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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3일 (월) 00:57 기준 최신판

2022 가을 답사

최수(崔洙)
대표명칭 최수
한자표기 崔洙
출생일 1443년
사망일 1472년
본관 강릉(江陵)
춘헌(春軒)
도원(道源)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직함 진잠현감(鎭岺縣監)
최여남(崔汝南)
정선전씨 생원 전무(全務)의 딸


최수(崔洙, 1443년 ~ 1472년)는 강릉 십이향현 중 일인인 조선의 문신이다.

생애

최수의 자는 도원(道源)이고, 호는 춘헌(春軒)이다. 고려조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입지(崔立之)의 후손으로 부친은 교수(敎授) 최여남(崔汝南)이고, 모친은 정선전씨 생원 전무(全務)의 딸이다. 1468년(세조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1472년(성종 3)에 진잠현감(鎭岺縣監)으로 나갔지만 3년 만에 병을 얻어 30세에 세상을 떠났다.

일화

1466년(세조 12)에 왕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동 일대를 순시하였는데, 이 때 특별히 오대산 어림대(御臨臺)에서 별시(別試)를 개최하였다. 이때, 숭불문(崇佛門)과 벽불문(闢佛門)을 설치하고 무사들로 하여금 벽불문을 지키게 하고 철추로 내리쳐 담력을 시험토록 하였다. 이에 모두 숭불문으로 통과하였는데, 최수는 끝까지 벽불문을 통과하려 하여 왕이 그 기개에 탄복하여 의사(義士)라고 칭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뿐만 아니라, 강릉 염양사(艶陽寺) 승려 학열(學悅)이 영남에서 면포를 사다가 비싼 값으로 백성에게 강매하였는데 최수가 백성들이 곤욕을 당하고 있으니 시정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예종실록(睿宗實錄)》 원년(元年:1469) 2월 30일(을묘) 기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중(僧) 학열(學悅)은 연화(緣化:불사(佛事))를 칭탁(稱托)하여 오로지 재화(財貨)를 늘리는 것만 일로 삼아, 민간(民間)에 폐단을 일으키니 백성들이 심히 고통스럽게 여깁니다.(僧學悅, 托爲緣化, 專事貨殖, 作弊民間, 民甚苦之.)” 1466년(세조 12)에는 강릉지역 유학자들과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라는 계회(契會)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맹약오장(盟約五章)’을 만드니 후인들이 이를 보배처럼 간직하였다.


첫째, 길한 일을 경축하고 흉한 일을 조문한다.(吉凶慶弔)


둘째, 좋은 날을 가려 경서를 강론하고 우의를 다진다.(良辰講好)


셋째, 허물이 있을 때는 면대하여 책망한다.(過惡面責)


넷째, 맹약을 어길 경우에는 벌금을 부과한다.(忤令贖金)


다섯째, 고의로 악행을 저지르면 제적한다.(故行削籍)

사후 추모사업

최수 관련 유적으로는 강릉시 장현동에 묘소와 송파정(松波亭), 재실인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최수의 비문(碑文)은 이삼현(李參鉉)이 지었다.

참고

도서

  • 박도식, 『강릉의 12향현 자료집』, 강릉문화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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