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돈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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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敦頤墓誌銘 - 宋 潘興嗣)
(/* 周敦頤墓碣銘 주자는 포종맹이 쓴 묘갈명의 내용 가운데 ‘주돈이답지 않은’ 구절들을 임의로 산삭하고 추가로 맥락에 따라 편집했다. 여기서는 주자가 산삭하거나 편집한 구절을 대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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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나에겐 여동생이 있었는데 명랑하고 단정해서 짝을 맺어주고 싶었지만 배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가우嘉祐 기해년 촉강蜀江을 유람할 때 합양合陽을 지나다 주돈이와 함께 [3일 밤낮으로] 말을 했었다. 물러나와 “세상에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다니! [진정 내 누이의 짝이구나.]”라고 탄복하였다. 그 다음해 나의 누이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처음 나에겐 여동생이 있었는데 명랑하고 단정해서 짝을 맺어주고 싶었지만 배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가우嘉祐 기해년 촉강蜀江을 유람할 때 합양合陽을 지나다 주돈이와 함께 [3일 밤낮으로] 말을 했었다. 물러나와 “세상에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다니! [진정 내 누이의 짝이구나.]”라고 탄복하였다. 그 다음해 나의 누이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周君世為營道人, 始名敦實, 避英宗藩邸名, 改敦頤. 曾祖從逺, 祖智強, 皆不仕. 父輔成, 賀州桂嶺縣令, 累贈諫議大夫. 母鄭氏, 仙居縣太君. 君少孤, 養於舅家. 鄭舅為龍圖閣學士, 以㤙補君試將作監主簿. [自其窮時, 慨然欲有所施, 以見於世. 故仕而必行其志, 為政必有能名.] 初從吏部調洪州分寧主簿. 未幾, 南安獄上屢覆. 轉運使薦君為南安軍司理叅軍. 移郴州郴縣令, 又為桂陽令. 分寧有獄不決, 君至一訊立辨. [邑人驚詫曰: “老吏不如也.”] 南安囚, 法不當死, 轉運使欲深治之. 君爭不勝, 投其司理叅軍告身以去. 曰: “如此尚可仕乎! 殺人以媚人, 吾不為也.” 轉運使感悟, 囚卒得不死. 自桂陽, 用薦者言, 改大理寺丞. 知洪之南昌. 南昌人見君來, 咸曰: “是能辨分寧獄者, 吾屬得所訴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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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君世為營道人, 始名敦實, 避英宗藩邸名, 改敦頤. 曾祖從逺, 祖智強, 皆不仕. 父輔成, 賀州桂嶺縣令, 累贈諫議大夫. 母鄭氏, 仙居縣太君. 君少孤, 養於舅家. 鄭舅為龍圖閣學士, 以㤙補君試將作監主簿. [自其窮時, 慨然欲有所施, 以見於世. 故仕而必行其志, 為政必有能名.] 初從吏部調洪州分寧主簿. 未幾, 南安獄上屢覆<ref>覆: 12.審理; 審問.</ref>. 轉運使薦君為南安軍司理叅軍. 移郴州郴縣令, 又為桂陽令. 分寧有獄不決, 君至一訊立辨. [邑人驚詫曰: “老吏不如也.”] 南安囚, 法不當死, 轉運使欲深治之. 君爭不勝, 投其司理叅軍告身<ref>告身: 古代授官的文憑.</ref>以去. 曰: “如此尚可仕乎! 殺人以媚人, 吾不為也.” 轉運使感悟, 囚卒得不死. 自桂陽, 用薦者言, 改大理寺丞. 知洪之南昌. 南昌人見君來, 咸曰: “是能辨分寧獄者, 吾屬得所訴矣.”  
 
:*주돈이는 세대에 걸쳐 영도營道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돈실敦實을 이름으로 삼았지만, 영종英宗의 어렸을 적 이름을 피휘하여 돈이敦頤로 개명했다. 증조부는 종원從遠이고 조부는 지강智強으로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부친 보성輔成은 하주賀州의 계령현桂嶺縣의 현령이었는데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추증되었다. 모친 정씨鄭氏는 선거현태군仙居縣太君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 부모님을 잃어 외삼촌의 집에서 길러졌다. 외삼촌 정향鄭向은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였는데 음보로 군은 시장작감주부試將作監主簿이 되었다. [궁벽하던 시절부터 개연히 도를 펼쳐서 세상에 드러나길 바라는 뜻이 있었따. 그래서 출사해선 꼭 그 뜻을 행하였고, 정치를 행할 땐 반드시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처음 이부吏部로부터 홍주洪州 분녕현分寧縣의 주부로 임명되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남안南安의 옥사에서 누차 심문하였다. 전운사轉運使는 그를 남안군의 사리참군司理參軍으로 추천하였다. 그리고 다시 침주郴州의 침현령郴縣令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계양령桂陽令이 되었다. 분녕에는 해결되지 못한 옥사가 있었는데 그가 이르자 단박에 판단을 내렸다. [읍의 사람들이 놀라면서 ‘노련한 관리도 [주돈이만] 못하구나.’고 말했다.] 남안의 한 죄인은 법에 따르면 사형에 해당되지 않았는데 전운사가 그를 심히 치죄하였다. 그는 쟁론을 벌였으나 결판이 나지 않자 사리참군의 임명장을 던지고서 떠나버리며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관직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죽여서 사람에게 아첨하는 짓 따위 나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전운사는 감동을 느껴 [잘못을] 깨달았고 죄인은 결국 죽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계양桂陽에서부터 천거를 받아 대리사승大理寺丞으로 관직이 바뀌었다. 그리고 홍주洪州 남창南昌의 지현이 되었다. 남창의 사람들이 그가 [부임해] 오는 것을 보고는 모두 “그는 분녕의 옥사를 능히 판결한 자이니 우리들이 호소할 곳을 얻었구나.”고 하였다.
 
:*주돈이는 세대에 걸쳐 영도營道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돈실敦實을 이름으로 삼았지만, 영종英宗의 어렸을 적 이름을 피휘하여 돈이敦頤로 개명했다. 증조부는 종원從遠이고 조부는 지강智強으로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부친 보성輔成은 하주賀州의 계령현桂嶺縣의 현령이었는데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추증되었다. 모친 정씨鄭氏는 선거현태군仙居縣太君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 부모님을 잃어 외삼촌의 집에서 길러졌다. 외삼촌 정향鄭向은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였는데 음보로 군은 시장작감주부試將作監主簿이 되었다. [궁벽하던 시절부터 개연히 도를 펼쳐서 세상에 드러나길 바라는 뜻이 있었따. 그래서 출사해선 꼭 그 뜻을 행하였고, 정치를 행할 땐 반드시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처음 이부吏部로부터 홍주洪州 분녕현分寧縣의 주부로 임명되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남안南安의 옥사에서 누차 심문하였다. 전운사轉運使는 그를 남안군의 사리참군司理參軍으로 추천하였다. 그리고 다시 침주郴州의 침현령郴縣令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계양령桂陽令이 되었다. 분녕에는 해결되지 못한 옥사가 있었는데 그가 이르자 단박에 판단을 내렸다. [읍의 사람들이 놀라면서 ‘노련한 관리도 [주돈이만] 못하구나.’고 말했다.] 남안의 한 죄인은 법에 따르면 사형에 해당되지 않았는데 전운사가 그를 심히 치죄하였다. 그는 쟁론을 벌였으나 결판이 나지 않자 사리참군의 임명장을 던지고서 떠나버리며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관직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죽여서 사람에게 아첨하는 짓 따위 나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전운사는 감동을 느껴 [잘못을] 깨달았고 죄인은 결국 죽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계양桂陽에서부터 천거를 받아 대리사승大理寺丞으로 관직이 바뀌었다. 그리고 홍주洪州 남창南昌의 지현이 되었다. 남창의 사람들이 그가 [부임해] 오는 것을 보고는 모두 “그는 분녕의 옥사를 능히 판결한 자이니 우리들이 호소할 곳을 얻었구나.”고 하였다.
  
:[君益思以竒自名, 屠姦剪弊, 如快刀健斧, 落手無畱.] 富家大姓, 黠胥惡少, 惴惴懷恐, 不獨以得罪於君為憂, 而又以汙善政為恥也. 江之南九十餘邑, 如君比者無一二. 改太子中舍, 簽書合州判官事, 轉殿中丞, 賜五品服. 一郡之事, 不經君手, 吏不敢決; 茍下之, 民不肯從. 蜀之賢人君子莫不喜稱之. 今資政殿學士趙公為使者, 小人隂中君. 趙公惑, 比去, 尚疑君有過. 嘉祐中, 轉國子博士, 通判䖍州. 趙公來守䖍, 熟視<ref> 교감기 視原誤試, 今改.</ref>君所為, 執君手曰: “幾失君矣! 今日迺知周茂叔也.” 英宗登極, 遷尚書虞部員外郎. 䖍大火, 焚其州, 改通判永州, 轉比部員外郎. 今上即位, 遷駕部員外郎. 熈寧元年, 擢授廣南東路轉運判官. 三年, 轉虞部郎中, 提㸃本路刑獄. 君[以朝廷躐等見用, 奮發感厲.] 不憚出入之勤, 瘴毒之侵, 雖荒崖絶島, 人跡所不至處, 皆緩視徐按, 務以洗寃澤物為己任. 施設置措, 未及盡其所為, 而君已病矣. [病且劇, 念其母未葬.] 求南康以歸. [葬已. 君曰: “強疾而來者為葬耳, 今猶欲以病汙麾紱耶!] 病且劇, [三字元在上, 晦菴移於此.] 上南康印. 分司南京. 趙公再尹成都, 聞君之去, 拜章乞起君. 朝命及門, 疾已革. 熈寧六年六月七日卒, 卒年五十七. 嗟乎茂叔, 命止斯乎! [先時以書抵宗孟曰: ”上方興起數百年, 無有難能之事, 將圖大平天下, 㣲才小智茍有所長者, 莫不皆獲自盡. 吾獨不能補助萬分一<ref> 교감기 編者按: 一字據周敦頤墓室記補.</ref>, 又不得竊須臾之生, 以見堯舜禮樂之盛, 今死矣, 命也!“ 其語如此.] 嗚呼! 可哀也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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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益思以竒自名, 屠姦剪弊, 如快刀健斧, 落手無畱.] 富家大姓, 黠胥惡少, 惴惴懷恐, 不獨以得罪於君為憂, 而又以汙善政為恥也. 江之南九十餘邑, 如君比者無一二. 改太子中舍, 簽書合州判官事, 轉殿中丞, 賜五品服. 一郡之事, 不經君手, 吏不敢決; 茍下之, 民不肯從. 蜀之賢人君子莫不喜稱之. 今資政殿學士趙公為使者, 小人隂中君. 趙公惑, 比去, 尚疑君有過. 嘉祐中, 轉國子博士, 通判䖍州. 趙公來守䖍, 熟視<ref> 교감기 視原誤試, 今改.</ref>君所為, 執君手曰: “幾失君矣! 今日迺知周茂叔也.” 英宗登極<ref>登極: 2. 帝王即位.</ref>, 遷尚書虞部員外郎. 䖍大火, 焚其州, 改通判永州, 轉比部員外郎. 今上即位, 遷駕部員外郎. 熈寧元年, 擢授<ref>擢授: 提升.</ref>廣南東路轉運判官. 三年, 轉虞部郎中, 提㸃本路刑獄. 君[以朝廷躐等見用, 奮發感厲.] 不憚出入之勤, 瘴毒之侵, 雖荒崖絶島, 人跡所不至處, 皆緩視徐按, 務以洗寃澤物為己任. 施設置措, 未及盡其所為, 而君已病矣. [病且劇, 念其母未葬.] 求南康以歸. [葬已. 君曰: “強疾而來者為葬耳, 今猶欲以病汙麾紱耶!] 病且劇, [三字元在上, 晦菴移於此.] 上南康印. 分司南京. 趙公再尹成都, 聞君之去, 拜章乞起君. 朝命及門, 疾已革. 熈寧六年六月七日卒, 卒年五十七. 嗟乎茂叔, 命止斯乎! [先時以書抵宗孟曰: ”上方興起數百年, 無有難能之事, 將圖大平天下, 㣲才小智茍有所長者, 莫不皆獲自盡. 吾獨不能補助萬分一<ref> 교감기 編者按: 一字據周敦頤墓室記補.</ref>, 又不得竊須臾之生, 以見堯舜禮樂之盛, 今死矣, 命也!“ 其語如此.] 嗚呼! 可哀也已!  
 
:*[그는 탁월함으로 스스로 이름이 나기를 더욱 바랐으니, 간악한 자들을 죽이고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마치 날랜 검과 굳센 도끼와 같아 손을 쓰면 지체함이 없었다.] 부가富家와 대성大姓, 교활한 서리와 간악한 젊은이들은 벌벌 떨며 두려운 마음을 품었으니 그에게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였을 뿐 아니라 선정善政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하였다. 강남의 90개가 넘는 읍에서 그와 비견될만한 자가 1~2명조차 없었다. [이후] 태자중사太子中舍·첨서합주판관사簽書合州判官事·전전중승轉殿中丞으로 승진해서 5품의 관복을 하사받았다. 한 군의 사무 중에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관리가 감히 처결하지 못하였고, 만약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집행되면 백성들은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서촉지역의 현인賢人과 군자君子들 중에 그를 기뻐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 조공趙公이 사자가 되었을 때 소인들이 그를 음해하였는데, 조공이 미혹되었다가 비교적 [의심이] 제거되었지만 여전히 그에게 과오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가우嘉祐 연간에 [주돈이는] 국자박사國子博士·건주통판䖍州通判으로 관직이 옮겨졌다. 조공이 건주에 와서 태수가 되자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그의 손을 잡고선 “그대를 잃을 뻔 했구나! 지금에서야 주무숙을 알게 되었구나.”고 말했다. 영종이 즉위하고서 상서우부원외랑尚書虞部員外郎으로 관직이 바뀌었다. 건주에 큰 불이 나서 주州를 불태우자 영주통판永州通判으로 옮겨져서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郎이 되었다. 금상께서 즉위하자 가부원외랑駕部員外郎이 되었다. 희령원년에 광남동로전운판관廣南東路轉運判官으로 승진하였다. 희령3년에 우부낭중虞部郎中·제점본로형옥提㸃本路刑獄으로 관직이 옮겨졌다. 그는 [조정에서 등급을 뛰어넘어 임용을 받자 감동을 받아 더욱 분발해] 출입의 수고로움과 장독瘴毒이 몸에 스며드는 것을 불사하고 설령 황무지나 외딴 섬, 사람의 인적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 할지라도 모두 살피며 안무하여 원통함을 씻어주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조치를 시행함에 아직 해야 할 것을 다 하지 못하였는데 그는 병이 들고 말았다. [병이 장차 극심해질 때에도 모친을 아직 장례지내지 못함을 염려하였다.] 남강으로 돌아가길 구하였다. [장례가 마치고 그는 “병을 이겨가며 돌아온 것은 장례를 위한 것일 뿐 지금은 병을 털어 내버리길 바라네.”라고 말했다] 병이 장차 심해지자 - 이 부분은 원래 위에 있었지만 회옹은 이를 여기로 옮겼다. - 남강군의 인수를 바치고, 분사남경分司南京이 되었다. 조공이 재차 성도成都를 다스릴 때 그가 떠난 소식을 듣자 상주를 올려 그를 등용하길 청하였다. 조정의 명이 도달하였을 때 병은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희령6년 6월 7일 졸하였다. 졸하였을 때 나이는 57세였다. 아아! 무숙이여. 목숨이 여기까지구나. [이전에 편지를 나에게 보내와서 “대국이 흥기한지 수 백년 이뤄내기 어려운 일이 없었으니 장차 태평천하를 도모하였으니 미약한 재주나 작은 지혜라 할지라도 진실로 장기가 있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길 바랐다. 나는 오직 여기에 만분의 일 만큼이라도 보탬이 되지 못하였고 게다가 잠깐의 생이라도 얻어서 요순의 예악이 성대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지금 죽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명(命)이구나!”라고 말했다] 오호라. 애석할 뿐이구나.  
 
:*[그는 탁월함으로 스스로 이름이 나기를 더욱 바랐으니, 간악한 자들을 죽이고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마치 날랜 검과 굳센 도끼와 같아 손을 쓰면 지체함이 없었다.] 부가富家와 대성大姓, 교활한 서리와 간악한 젊은이들은 벌벌 떨며 두려운 마음을 품었으니 그에게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였을 뿐 아니라 선정善政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하였다. 강남의 90개가 넘는 읍에서 그와 비견될만한 자가 1~2명조차 없었다. [이후] 태자중사太子中舍·첨서합주판관사簽書合州判官事·전전중승轉殿中丞으로 승진해서 5품의 관복을 하사받았다. 한 군의 사무 중에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관리가 감히 처결하지 못하였고, 만약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집행되면 백성들은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서촉지역의 현인賢人과 군자君子들 중에 그를 기뻐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 조공趙公이 사자가 되었을 때 소인들이 그를 음해하였는데, 조공이 미혹되었다가 비교적 [의심이] 제거되었지만 여전히 그에게 과오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가우嘉祐 연간에 [주돈이는] 국자박사國子博士·건주통판䖍州通判으로 관직이 옮겨졌다. 조공이 건주에 와서 태수가 되자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그의 손을 잡고선 “그대를 잃을 뻔 했구나! 지금에서야 주무숙을 알게 되었구나.”고 말했다. 영종이 즉위하고서 상서우부원외랑尚書虞部員外郎으로 관직이 바뀌었다. 건주에 큰 불이 나서 주州를 불태우자 영주통판永州通判으로 옮겨져서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郎이 되었다. 금상께서 즉위하자 가부원외랑駕部員外郎이 되었다. 희령원년에 광남동로전운판관廣南東路轉運判官으로 승진하였다. 희령3년에 우부낭중虞部郎中·제점본로형옥提㸃本路刑獄으로 관직이 옮겨졌다. 그는 [조정에서 등급을 뛰어넘어 임용을 받자 감동을 받아 더욱 분발해] 출입의 수고로움과 장독瘴毒이 몸에 스며드는 것을 불사하고 설령 황무지나 외딴 섬, 사람의 인적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 할지라도 모두 살피며 안무하여 원통함을 씻어주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조치를 시행함에 아직 해야 할 것을 다 하지 못하였는데 그는 병이 들고 말았다. [병이 장차 극심해질 때에도 모친을 아직 장례지내지 못함을 염려하였다.] 남강으로 돌아가길 구하였다. [장례가 마치고 그는 “병을 이겨가며 돌아온 것은 장례를 위한 것일 뿐 지금은 병을 털어 내버리길 바라네.”라고 말했다] 병이 장차 심해지자 - 이 부분은 원래 위에 있었지만 회옹은 이를 여기로 옮겼다. - 남강군의 인수를 바치고, 분사남경分司南京이 되었다. 조공이 재차 성도成都를 다스릴 때 그가 떠난 소식을 듣자 상주를 올려 그를 등용하길 청하였다. 조정의 명이 도달하였을 때 병은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희령6년 6월 7일 졸하였다. 졸하였을 때 나이는 57세였다. 아아! 무숙이여. 목숨이 여기까지구나. [이전에 편지를 나에게 보내와서 “대국이 흥기한지 수 백년 이뤄내기 어려운 일이 없었으니 장차 태평천하를 도모하였으니 미약한 재주나 작은 지혜라 할지라도 진실로 장기가 있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길 바랐다. 나는 오직 여기에 만분의 일 만큼이라도 보탬이 되지 못하였고 게다가 잠깐의 생이라도 얻어서 요순의 예악이 성대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지금 죽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명(命)이구나!”라고 말했다] 오호라. 애석할 뿐이구나.  
  

2019년 9월 1일 (일) 00:08 판

해제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字는 茂叔, 號는 濂溪이다. 원 이름은 敦實이었지만 송나라 英宗(재위 1063~1067)의 초명인 宗實을 피휘하여 敦頤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표 저작으로 태극도설통서가 있다. 기타 정보는 추가하거나 다음의 링크를 참고할 것. [1]

주돈이 관련 전거

이하의 내용은 『주돈이집』(중화서국, 1990) 권3과 「부록1」에 기재된 주돈이 관련 전거들을 이 책의 순서에 따라 번역한 것이다.

遺事(十六條)[1]

1. 伊川先生作其父《太中公家傳》曰: “公嘗假倅南安軍, 獄掾周惇實甚少, 不為守所知. 公視其氣貌非常人, 與語, 果為學知道者, 因與為友. 及為郎官, 故事, 當舉代. 每遷授, 輒一薦之.” (釋周專務内, 若孔子并務内忘矣)
2. 伊川先生作《明道先生行狀》曰: “先生自十五六時, 聞汝南周茂叔論道, 遂厭科舉之業, 慨然有求道之志.” (釋宋之道學, 自汝南周子始.)
3. 河間劉立之敘述明道先生事曰: “先生從汝南周惇頥問學, 窮性命之理, 率性㑹道, 體道成德, 出入孔孟, 從容不勉.” (釋周教人, 專在性命上理㑹.)
4. 程氏門人記二先生語曰: “昔受學於周茂叔, 令尋仲尼顔子樂處, 所樂何事.” (釋樂在尋時猛省.)
5. 又曰: “詩可以興. 自再見周茂叔後, 吟風弄月以歸, ‘有吾與㸃也’之意.” (釋可想見茂叔之為人, 更有甚存著也.)
6. 又曰: “李初平見周茂叔云: ‘某欲讀書, 如何?’ 茂叔云: ‘公老矣! 無及矣! 待某只説與公.’ 初平遂聽説話, 二年乃覺悟.” (釋説話處即是力行. 然亦有如此太守, 亦有如此縣令.)
7. 又曰: “王君貺嘗見茂叔, 為與茂叔世契, 便受拜. 及坐間大風起, 説大畜卦.[一本作風天, 小畜卦] 君貺乃起曰: ‘適來不知, 受却公拜, 今却當請納拜.’ 茂叔走避. 君貺此一事却過人, 謝用休問: ‘當受拜, 不當受拜.’ 曰: ‘分已定, 不受乃是.’” (釋前革還知謙讓一王君貺見善連尊卑都忘也.)
8. 又曰: “田獵, 自謂今無此好. 周茂叔曰: ‘何言之易也! 但此心潛隱未發, 一日萌動, 復如初矣.’ 後十二年, 因見果知未也.” [明道年十六時好田獵, 既而自謂已無此好. 聞周先生此語, 後十二年暮歸, 在田閒見獵者, 不覺有喜心.] (釋必力行過, 方知此心復如初.)
9. 又曰: “周茂叔窗前草不除去. 問之, 云: ‘與自家意思一般.’ 子厚觀驢鳴, 亦謂如此.” (釋自家意, 豈惟草與驢嗚乎?)
10. 又曰: “周茂叔謂荀子元不識誠. 伯淳曰: ‘既誠矣, 心焉用養邪? 荀子不知誠.” (釋貶茍子大過. 大學中庸亦言誠.)
11. 又曰: “周茂叔謂一部『法華經』, 只消一個艮字可了.”
12. 邵伯温作『易學辨惑』, 記康節先生事曰: “伊川同朱光庭公掞訪先君, 先君留之飲酒. 因以論道. 伊川指面前食卓曰: ‘此卓安在地上? 不知天地安在甚處?’ 先君為極論天地萬物之理, 以及六合之外. 伊川歎曰: ‘平生惟見周茂叔論至此.’” (釋伊川聞諸周子者亦深乎!)
13. 吕本中作『童蒙訓』曰: “正獻公在侍從, 聞茂叔名, 力薦之. 自常調除轉運判官. 茂叔以啓謝正獻公曰: ‘在薄宦有四方之遊, 於髙賢無一日之雅.’” (釋可謂直躬而行矣.)
14. 營道何弃仲農父自作《營道齋詩序》曰: “營道縣出郭三十里, 而近有村落曰濓溪, 周氏家焉. 族衆而業儒. 至先生逺宦, 弛肩廬阜. 力不能返故居, 乃結屋臨流, 寓濓溪之名, 志鄉關在目中也. 蘇、黄二公與之同時, 而所為賦詩, 皆失本意. 文字傳誤, 吁可歎已! 濓溪之周, 至今蕃衍云.” (釋久宦至力不能返, 可知其為政矣.)
15. 邢恕和叔敘述明道先生事云: “茂叔聞道甚早.” (釋雖邢亦推信云.)
16. 王荆公為江東提㸃刑獄時, 已號為通儒. 茂叔遇之, 與語連日夜. 荆公退而精思, 至忘寢食. (釋周子葢發荆公之初心也.)

宋史道學傅序

道學之名, 古無是也. 三代盛時, 天子以是道為政教, 大臣百官有司以是道為職業, 黨庠術序師弟子以是道為講習, 四方百姓日用是道而不知. 是故盈覆載之間, 無一民一物不被是道之澤, 以遂其性. 於斯時也, 道學之名, 何自而立哉?
  • ‘도학’이라는 명칭은 예전에는 없었다. 삼대의 성대한 시절에 천자는 이 도를 정교로 삼았고, 대신·백관·유사는 이 도를 직분으로 삼았으며, 黨·庠·術·序의 스승과 제자는 이 도를 가르침으로 삼았고, 사방의 백성들은 날마다 이 도를 쓰면서도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천지간을 가득 채운 것 중에 한 사람·한 사물도 이 도의 은택을 입어 그 본성을 이루지 못한 것이 없었다. 당시에 도학이라는 명칭이 굳이 무엇을 통해 세워졌겠는가?
文王、周公既沒, 孔子有徳無位, 既不能使是道之用漸被斯世. 退而與其徒定禮樂, 明憲章, 刪詩、修春秋, 讃易象, 討論墳、典, 期使三五聖人之道昭明於無窮. 故曰: “夫子賢於堯舜, 逺矣.” 孔子沒, 曽子獨得其傳, 傳之子思, 以及孟子, 孟子沒而無傳. 兩漢而下, 儒者之論大道, 察焉而弗精, 語焉而弗詳, 異端邪説起而乘之, 㡬至大壞.
  • 문왕과 주공이 돌아가시고서, 공자께서는 덕은 있으셨으나 지위가 없으셔서 이 도의 작용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점차 적시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물러나 제자들과 예악을 산정하고 법도를 밝히셨으며, 『시』를 산삭하고 『춘추』를 다듬으며 『역상』을 짓고 『삼분』과 『오전』을 토론하셔서 삼황오제 성인의 도가 끝없이 밝게 빛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맹자』에서는 “공자께서는 요순보다 훨씬 훌륭하시다”[2]고 하였다. 공자께서 돌아가신 뒤, 증자만이 그 전수를 얻어 자사와 맹자에게 전해주셨고, 맹자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전해 받은 자가 없었다. 양한 이후 유자들이 위대한 도를 논함에 살피기는 했으나 정밀하지 못했고, 말하기는 했으나 상세하지 못해, 이단사설이 일어나 도에 올라타 도가 거의 크게 무너지게 되었다.
千有餘載, 至宋中葉, 周敦頤出於舂陵, 乃得聖賢不傳之學. 作太極圖説、通書, 推明隂陽五行之理, 命於天而性於人者, 瞭若指掌. 張載作西銘, 又極言理一分殊之旨. 然後道之大原出於天者, 灼然而無疑焉. 仁宗明道初年, 程顥及弟頤實生, 及長, 受業周氏. 已乃擴大其所聞, 表章大學、中庸二篇, 與語、孟並行, 於是上自帝王傳心之奥, 下至初學入徳之門, 融㑹貫通, 無復餘蘊.
  • 천여 년 뒤 송나라 중엽에 이르러 주돈이가 용릉에서 나와 전해지지 않던 성현의 학문을 얻었다. 『태극도설』과 《통서》를 지어 음양오행의 이치를 미루어 밝히고, 하늘에서 명을 받아 사람에게 본성이 되는 것이 명료하기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장재는 《서명》을 지었고 또 리일분수의 뜻을 지극히 말하였다. 이런 연후에 도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온다는 것이 훤하여 의심할 것이 없어졌다. 인종 명도 초년에 정호와 그의 아우 정이가 실로 태어났고, 장성하자 주돈이에게 학업을 전수받았다. 이윽고 전해들은 것을 확충하여 『대학』과 『중용』 두 편을 표창하고 『논어』·『맹자』와 나란하게 하니, 이에 위로는 제왕이 전한 마음의 깊은 뜻과 아래로는 초학자들이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 합쳐지고 관통되어 더 이상 남은 뜻이 없게 되었다.
迄宋南渡, 新安朱熹得程氏正傳, 其學加親切焉. 大抵以格物、致知為先, 明善、誠身為要. 凡詩、書、六藝之文, 與夫孔、孟之遺言, 顚錯於秦火, 支離於漢儒, 幽沉於魏、晉、六朝者, 至是皆煥然而大明, 秩然而各得其所. 此宋儒之學, 所以度越諸子, 而上接孟氏者歟! 其於世代之汚隆, 氣化之榮悴, 有所闗係也甚大. 道學盛於宋, 宋弗究於用, 甚至有厲禁焉. 後之時君世主, 欲復天徳王道之治, 必來此取法矣.
  • 송나라가 南渡하고서, 신안 주희가 이정의 正傳을 얻어 그의 학문이 더욱 절근하였다. 대저 격물·치지를 우선으로 삼고, 明善·誠身을 핵심으로 삼았다. 시·서·육예의 문식과 공자·맹자가 남긴 말이 진나라의 焚書 때 엎어지고 漢儒에 의해 지리해졌으며 위진남북조 시대에 아득해졌으나, 이 때 모두 환하게 크게 밝혀져, 질서정연하게 각각 제자리를 얻었다. 이것이 宋儒의 학문이 여러 학자를 건너뛰고 위로 맹자에 닿는 까닭일 것이다! 宋儒의 학문이 시대의 부침과 기후의 榮悴에 관계된 것이 매우 크다. 도학은 송대에 성대했으나 송나라는 활용하는 데 미치지 못했고 심지어는 엄히 금하기도 하였다. 후대의 군주가 天徳·王道의 다스림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여기에 와서 본보기를 취해야 할 것이다.[3]
邵雍髙明英悟, 程氏實推重之, 舊史列之隱逸, 未當, 今置張載後. 張栻之學, 亦出程氏, 既見朱熹, 相與博約, 又大進焉. 其他程、朱門人, 考其源委[4], 各以類從, 作道學傳.
  • 소옹은 고명하고 영특해 이정이 실로 존중하였는데, 옛 사료에서는 《은일》에 배치하였으나 합당하지 않으니 여기서는 장재의 뒤에 두겠다. 장식의 학문 역시 이정에게서 나왔는데, 주희를 만나 서로 博文約禮한 데다가 또 크게 진전되었다. 그 외 이정과 주희의 문인들은 그들의 源委를 고찰하여 각각 부류에 따라 모아 《도학전》을 지었다.

宋史周敦頤傳

周敦頤,字茂叔,道州營道人。元名敦實,避英宗舊諱改焉。以舅龍圖閣學士鄭向任,為分寧主簿。有獄久不決,敦頤至,一訊立辨。邑人驚曰:「老吏不如也。」部使者薦之,調南安軍司理參軍。有囚法不當死,轉運使王逵欲深治之。逵,酷悍吏也,眾莫敢爭,敦頤獨與之辨,不聽,乃委手版歸,將棄官去,曰:「如此尚可仕乎!殺人以媚人,吾不為也。」逵悟,囚得免。
  • 주돈이(周敦頤)는 자가 무숙(茂叔)이고 도주(道州) 영도현(營道)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돈실(敦實)이었는데 송나라 영종의 옛 이름을 피휘하여 고쳤다. 외삼촌인 용도각학사 정향(鄭向)의 추천으로 분녕의 주부로 임용되었다.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송사가 있었는데 주돈이가 오자 단번에 조사하여 판결을 내렸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면서 “노련한 관리도 [주돈이만] 못하구나.”라고 말했다. 부사가 그를 천거하였고 남안군사리참군(南安軍司理參軍)으로 임명되었다. 죄수 중에서 법으로 볼 때 죽여선 안 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운사(轉運使) 왕규(王逵)는 그를 심하게 치죄하였다. 왕규는 독하고 사나운 관리인지라 무리 중에서 아무도 감히 다투려고 하지 않았는데 주돈이만이 홀로 그와 논변하였다. 그러나 왕규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곧 수판(手版)을 버리고 돌아가 관직을 버리고 떠나려고 하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관리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죽여서 남에게 아첨하는 짓을 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왕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고, 죄수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移郴之桂陽令,治績尤著。郡守李初平賢之,語之曰:「吾欲讀書,何如?」敦頤曰:「公老無及矣,請為公言之。」二年果有得。徙知南昌,南昌人皆曰:「是能辨分寧獄者,吾屬得所訴矣。」富家大姓、黠吏惡少,惴惴焉不獨以得罪於令為憂,而又以污穢善政為恥。曆合州判官,事不經手,吏不敢決。雖下之,民不肯從。部使者趙抃惑於譖口,臨之甚威,敦頤處之超然。通判虔州,抃守虔,熟視其所為,乃大悟,執其手曰:「吾幾失君矣,今而後乃知周茂叔也。」
  • 침군(郴郡) 계양(桂陽)의 현령으로 자리를 옮기자 치적이 더욱 현저해졌다. 침군의 군수 이초평(李初平)은 그가 현명하다고 생각해서 “나는 독서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며 물었다. 주돈이는 “공은 나이가 많아 시간이 급박하니 공을 위하여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이년 뒤에 과연 소득이 있었다. 자리를 옮겨서 남창의 지현이 되었는데, 남창의 사람들은 모두 “이는 분녕의 옥사를 능히 판결한 사람이니 우리들이 하소연할 곳을 얻었다.”고 말했다. 부자들과 지방의 유력자들과 교활한 관리들과 악행을 저지르는 젊은이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현령으로부터 죄를 얻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였을 뿐 아니라 선정을 더럽히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합주(合州)의 판관을 역임할 때, 일이 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관리들이 감히 처결하지 못하였고, 비록 명령을 내리더라도 백성들은 청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부사 조변(趙抃)이 참소하는 말에 현혹되어 [주돈이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위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돈이는 초연히 대처하였다. 건주(虔州) 통판을 맡았을 때에는 조변이 건주의 현령이 되어 면밀하게 그의 행실을 보고선 곧 크게 깨닫더니 그의 손을 잡으며 “나는 그대를 거의 잃어버렸지만. 지금 이후로 주무숙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熙寧初,知郴州。用抃及呂公著薦,為廣東轉運判官,提點刑獄,以洗冤澤物為己任。行部不憚勞苦,雖瘴癘險遠,亦緩視徐按。以疾求知南康軍,因家廬山蓮花峰下。前有溪,合于溢江,取營道所居濂溪以名之。抃再鎮蜀,將奏用之,未及而卒,年五十七。
  • 희령(熙寧, 1068년~1077) 초년에 침주(郴州)의 지주가 되었다. 조변과 여공저(呂公著)로부터 천거를 받아 광동(廣東)의 전운판관(東轉運判官)이 되자 죄를 지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억울하게 죄를 지은 사람들의 누명을 벗겨주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부(部)를 순행하였지만 노고(勞苦)를 꺼려하지 않아서 비록 풍토병과 창병이 일고 길이 험하고 멀더라도 시찰하고 위무하였다. 나중에 주돈이는 병으로 지남강군(知南康軍)으로 자리를 옮기길 구하였고, 이로 인해 여산의 연화봉(蓮花峯) 아래에 집을 지었다. 앞에 시내가 있었는데 분강(湓江)으로 합하였고, 영도(營道)에 머물렀던 염계(溓溪)를 취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조변이 재차 촉(蜀)에 진수하였을 때 장차 [주돈이를] 등용하라 상주하려고 하였지만 그 일이 이루기도 전에 주돈이는 죽고 말았으니 당시의 나이가 57세였다.
黃庭堅稱其「人品甚高,胸懷灑落,如光風霽月。廉于取名而銳於求志,薄於徼福而厚於得民,菲於奉身而燕及煢嫠,陋於希世而尚友千古。」
  • 황정견(黃庭堅)은 “인품이 매우 높고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은 시원하여 마치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명성을 취하는 것을 뒷전으로 하였으나 뜻을 구하는 것에는 왕성하였고, 복을 구함에는 박하였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두터웠으며, 몸을 받듦에는 둔하였지만 즐거워함이 과부와 홀아비를 보살피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고, 세상에 영합함을 누추하게 여겼지만 위로는 천고(千古)와 벗하였다.”고 그를 칭송하였다.
博學行力,著《太極圖》,明天理之根源,究萬物之終始。其說曰:
  • 널리 배우고 힘써 실천하였는데, 《태극도》를 지어 천리의 근원을 밝히고 만물의 시작과 끝을 궁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無極而太極。太極動而生陽,動極而靜,靜而生陰,靜極複動,一動一靜,互為其根,分陰分陽,兩儀立焉。陽變陰合,而生水、火、木、金、土,五氣順布,四時行焉。五行一陰陽也,陰陽一太極也。太極本無極也。五行之生也,各一其性。無極之真,二五之精,妙合而凝,乾道成男,坤道成女。二氣交感,化生萬物,萬物生生,而變化無窮焉。惟人也得其秀而最靈,形既生矣,神發知矣,五性感動而善惡分,萬事出矣。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立人極焉。故聖人與天地合其德,日月合其明,四時合其序,鬼神合其吉凶。君子修之吉,小人悖之凶。故曰:「立天之道,曰陰與陽。立地之道,曰柔與剛。立人之道,曰仁與義。」又曰:「原始反終,故知死生之說。」大哉《易》也,斯其至矣。
  •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서 양(陽)이 생기고 움직임이 극한에 달하여 고요해지는데 고요해지면 음(陰)이 생긴다. 그리고 고요함이 극한에 다다르면 다시 움직인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해져서 서로 각각의 근거가 되니,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가 세워진다. 음양이 변화하거나 결합해서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라는 오행이 생겨난다. 다섯 종류의 기(五氣)는 순서에 따라 펴져서 춘(春)·하(夏)·추(秋)·동(冬)이라는 사시(四時)가 운행된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의 생성에 각각 본성을 동일하게 갖고 있다. 무극의 신실함과 음양·오행의 순정함은 신묘하게 결합해서 응결된다. ‘건(乾)의 도리는 남자를 이루고, 곤(坤)의 도리는 여자를 이룬다.’고 하니 음양이라는 두 기가 교감하여 만물을 화생시킨다. 만물이 발생하는 과정을 반복하니 변화는 끝이 없다. 오직 사람만이 빼어난 것을 얻어서 가장 영명하다. 형체가 이미 생겨나면 정신이 지각을 발현시키니 [인(仁)·의(義)·예(禮)·지(知)·신(信)이라는] 다섯 가지 본성(五性)이 외물에 감응해 움직이다 선악(善惡)이 나뉘고 온갖 사태들이 출현한다. 성인은 중(中)·정(正)·인(仁)·의(義)로써 이를 안정시키되 정(靜)을 위주로 사람의 표준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이 합치되고, 일월과 그 밝음이 합치되고, 사시와 그 순서가 합치되며, 귀신과 그 길흉이 합치된다. 군자는 수양하니 길하며, 소인은 어긋나니 흉하다. 그러므로 ‘천도(天道)를 세우며 음(陰)과 양(陽)을 말하였고, 지도(地道)를 세우며 유(柔)와 강(剛)을 말하였고, 인도(人道)를 세우며 인(仁)과 의(義)를 말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시작을 궁구하고 끝으로 돌아가니 그러므로 죽음과 삶의 설을 알겠다.’고 한 것이다. 위대하다 역(易)이여! 이렇게도 지극하도다.”
又著《通書》四十篇,發明太極之蘊。序者謂「其言約而道大,文質而義精,得孔、孟之本源,大有功于學者也。」
  • 또한 《통서》 40편을 저술하여 태극의 품은 뜻을 드러내서 밝혔다.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은 간략하지만 [담고 있는] 도는 크고, 형식과 내용이 갖추어져있고(文質) 의미가 정밀하여 공자와 맹자의 본원(本源)을 얻었으니 배우는 자들에게 큰 공이 있다.”
掾南安時,程珦通判軍事,視其氣貌非常人,與語,知其為學知道,因與為友,使二子顥、頤往受業焉。敦頤每令尋孔、顏樂處,所樂何事,二程之學源流乎此矣。故顥之言曰:「自再見周茂叔後,吟風弄月以歸,有'吾與點也'之意。」侯師聖學于程頤,未悟,訪敦頤,敦頤曰:「吾老矣,說不可不詳。」留對榻夜談,越三日乃還。頤驚異之,曰:「非從周茂叔來耶?」其善開發人類此。
  • 안정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통판군사(通判軍事) 정향(程珦)이 풍모가 비상한 사람임을 보고는 그와 함께 이야기를 했더니 과연 그의 학문 됨됨이와 도(道)를 알고 있음을 알고는 그와 교유를 맺어 두 아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로 하여금 가서 수업하도록 하였다. 주돈이는 매번 공자와 안회가 즐거워하는 것, 즉 그들이 즐기던 바가 무슨 일이었는지를 살피도록 하였으니, 이정의 학문이 이로부터 연원하였다. 그래서 정호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주무숙을 본 후로부터 음풍농월(吟風弄月) 중에 ‘나는 증점과 함께하겠노라.’라고 말씀하신 공자의 뜻이 있게 되었다.” 후사성(侯師聖)이 정이로부터 학문을 하였지만 깨닫지 못하고 주돈이를 방문하였다. 주돈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늙어서 말을 상세하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그와 책상을 마주하며 밤새도록 머물며 담론하다 3일이 지나 되돌아갔더니 정이가 남달라진 것을 탄복하며 이렇게 말했다. “주무숙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그는 사람들을 이렇게 잘 개발시켜주었다.
嘉定十三年,賜諡曰元公,淳祐元年,封汝南伯,從祀孔子廟庭。 二子壽、燾,燾官至寶文閣待制。
  • 가정(嘉定) 13년(1220년)에 시호를 하사하여 ‘원공(元公)’이라 하였고, 순우(淳祐) 원년(1241년)에 여남백(汝南伯)에 봉하고 공자의 묘정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두 아들은 주수(周壽)와 주도(周燾)이다. 주도는 관직이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에 이르렀다.

記濂溪傅 - 宋 朱熹

戊申六月, 在玉山邂逅洪景盧内翰, 借得所脩國史, 中有濓溪、程、張等傳, 盡載太極圖説. 蓋濓溪於是始得立傳, 作史者於此為有功矣.
  • 무신년(1188) 6월, 옥산에서 洪景盧(洪邁)를 만나 그가 편수한 國史를 빌려보았는데, 안에 주렴계·장횡거·이정 선생의 傳이 있었고, 《태극도설》을 모두 기재했었다. 주렴계가 이에 비로소 傳이 쓰였으니, 國史를 편수한 자가 이에 공이 있다 하겠다.
然此説本語首句, 但云: “無極而太極.” 今傳所載, 乃云: “自無極而為太極.” 不知其何所据而増此自、為二字也. 夫以本文之意, 親切渾全明白如此, 而淺見之士猶或妄有譏議. 若増此字, 其為前賢之累, 啓後學之疑, 益以甚矣! 謂當請而改之, 而或者以為不可. 昔蘇子容特以為父辨謗之故, 請刪國史所記“草頭木脚”之語, 而神祖猶俯從之. 况此乃百世道術淵源之所繫耶! 正當援此為例, 則無不可改之理矣.
  • 그런데 이 《태극도설》은 첫 머리에 본래 그저 “無極而太極”이라고만 했는데, 지금 주렴계의 傳의 기록은 “自無極而為太極.”라고 되어있다. 무슨 근거로 이 “自”자와 “為”자를 추가했는지 모르겠다. 본래 문장의 뜻이 친절·온전·명백한 것이 이와 같은데도 식견 좁은 선비가 오히려 혹 주제넘게 제 생각을 담았다. 만약 이 두 글자를 더하면 이전 현인들에게 누가 되고 후학들의 의심을 사는 것이 더욱 심할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청하여 고치라’고 했는데 혹자가 안 된다고 하였다. 예전에 蘇頌이 그저 자기 아버지가 입은 비방 때문에 國史에 기록된 “草頭木脚”이라는 말을 산삭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신종 황제께서 오히려 따라주셨다. 하물며 이 일이 바로 백세 도술의 연원이 달린 것임에 있어서랴! 응당 이 일을 전례로 삼는다면, 國史를 고칠 수 없는 이치는 없을 것이다.

周敦頤墓誌銘 - 宋 潘興嗣

吾友周茂叔, 諱惇頥. 其先營道人. 曾祖諱從遠, 祖諱智强, 皆不仕. 考諱輔成, 任賀州桂嶺縣令, 贈諫議大夫. 君幼孤, 依舅氏龍圖閣學士鄭向. 以君有遠器, 愛之如子. 龍圖公名子皆用’惇’字, 因以’惇’名君.
  • 내 벗 周茂叔의 諱는 惇頥이다. 그의 선조는 營道 출신으로, 증조부의 諱는 從遠이고 조부의 諱는 智强인데,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 周輔成은 賀州 桂嶺縣의 현령을 역임했고, 諫議大夫에 추증되었다. 君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삼촌 龍圖閣學士 鄭向에 의지했다. 鄭向은 君에게 심원한 자질이 있다고 여겨 그를 자식처럼 아꼈다. 정향은 자식 이름에 모두 ‘惇’자를 썼는데, 이 때문에 ‘惇’으로 君의 이름을 지었다.
景祐中, 奏補[5][6]將作監主簿, 授洪州分寧縣簿. 君博學力行, 遇事剛果, 有古人風, 衆口交稱之. 部使者以君為有才幹[7], 奏舉南安軍司理參軍. 轉運使王逵以苛刻涖下, 吏無敢可否. 君與之辨事, 不為屈, 因置手板歸, 取誥勅納之, 投劾而去. 逵為之改容, 復薦之. 移郴令, 改桂陽令, 皆有治績. 用薦者, 遷大理寺丞, 知洪州南昌縣. 其為治精密嚴恕, 務盡道理, 民至今思之. 改太子中書簽判, 覃恩[8]改虞部員外郎, 通判永州. 今上即位, 恩改駕部. 趙公抃入參大政, 奏君為廣南東路轉運判官, 稱其職. 遷虞部郎中, 提點本路刑獄. 君盡心職事, 務在矜恕. 雖瘴癘僻遠, 無所憚勞, 竟以此得疾. 懇請郡符[9], 知南康軍. 未幾, 分司[10]南京. 趙公抃復奏起君, 而君疾已篤. 熙寧六年六月七日卒于九江郡之私第, 享年五十七.
  • 景祐(1034-1038) 중반에 정향이 [君을] 試將作監主簿에 음서로 추천하였고,[1036년] 洪州 分寧縣의 주부에 임명되었다.[1041년] 君은 널리 배우고 힘써 실천했으며, 맡은 일을 과감히 처리하여 古人의 풍모가 있었던지라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다. 部使가 君이 재주가 있다고 여겨 南安軍 司理參軍에 천거했다.[1044년] 轉運使 王逵는 가혹하게 아랫사람을 대해 관원들이 감히 그의 행사에 대해 따지지 못했다. 君은 왕규와 변론했으나 굴복시킬 수 없어서 手板을 두고 돌아와 임명장을 반납하고서 스스로 사직하고 떠났다. 왕규가 이 때문에 태도를 바꿔 다시 그를 추천하였다.[1046년] 郴令으로 옮겼다가[1048년] 桂陽令으로 [다시] 옮겼는데[1050년] [두 곳에서] 모두 치적이 있었다. 천거를 받아 大理寺丞 知洪州南昌縣로 옮겼다.[1054년] 君의 통치가 嚴恕에 [모두] 정밀하고 도리를 모두 실현하는 데 힘썼으므로 백성들이 오늘날까지 君을 그리워한다. 太子中書·簽判으로 옮겼다가[1056년] 覃恩으로 虞部員外郎·通判永州에 임명되었다.[1063년] 今上이 즉위하자 駕部로 옮겼다. 趙抃 공이 국정에 참여하게 되자 君을 廣南東路轉運判官에 천거하였는데,[1068년] 君은 그 직분을 잘 수행했다. 虞部郎中·提點本路刑獄으로 옮겼다.[1070년] 君은 온 마음으로 나랏일에 임해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너그럽게 대하는 데 힘썼다. 비록 풍토병이 설치는 벽지에서도 수고를 꺼리는 바가 없어서 결국 이 때문에 병을 얻었다. 郡의 태수에 간청하여 知南康軍이 되었다.[1071년] 얼마 지나지 않아 南京에 근무했다. 趙抃 공이 다시 君을 쓸 것을 주청하였으나 君의 병이 이미 심했다. 熙寧 6년(1073) 6월 7일에 君이 九江郡의 사저에서 졸하니, 향년 57세였다.
君篤氣義[11], 以名節自礪, 郴守李初平最知君, 既薦之, 又賙其所不給. 及初平卒, 子尚幼, 君䕶其喪以歸, 葬之. 士大夫聞君之風, 識與不識, 皆指君曰: “是能葬舉主者.” 君奉養至廉, 所得俸禄, 分給宗族, 其餘以待賓客. 不知者以為好名, 君處之裕如也. 在南昌時, 得疾暴卒, 更一日一夜始蘇. 視其家, 服御之物, 止一敝篋, 錢不滿百, 人莫不歎服. 此予之親見也.
  • 君은 기개가 독실하고 명예와 절조를 스스로 닦았는데, 郴縣 知事 이초평이 君을 가장 잘 이해하여 그를 추천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부족한 물품을 채워주기도 하였다. 이초평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렸는데, 君은 그의 초상을 주관하고서 돌아와 장사지냈다. [이전에] 君을 알았든 몰랐든 간에 사대부들은 君의 풍모를 듣고서 모두 君을 “이 사람이 舉主(추천자)의 장례를 잘 치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君은 먹고 사는 것이 지극히 청렴하여 받은 봉록을 친족들에게 나눠주고 그 나머지는 빈객을 대접했다. 君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명예를 좋아한다’고 여겼지만 君은 태연하게 대처했다. 남창에 있을 때 병을 얻어 갑자기 졸할 때에, 하루 밤낮을 지나서야 깨어나기도 했다. 그의 집안을 살펴보니, 입고 쓰는 물건은 겨우 헌 상자 하나에 불과했고, 돈은 백 냥을 채우지 못했으니,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는 내가 직접 본 것이다.
嘗過潯陽, 愛廬山, 因築室溪上, 名之曰: 濂溪書堂. 每從容為予言: “可仕則仕, 古人無所必. 束髮為學, 將有以設施, 可澤於斯民者, 必不得已, 止未晚也. 此濂溪者, 異時與子相從於其上, 歌咏先正之道, 足矣!” 此君之志也. 尤善談性理, 深於易學. 作《太極圖》、『易説』、『易通』數十篇, 詩十卷, 今藏于家. 母鄭氏, 封仙居縣太君[12]. 娶陸氏, 職方郎中參之女. 再娶蒲氏, 太常丞師道之女. 子二人: 曰壽, 曰燾, 皆補太廟齋郎. 以其年十一月二十一日窆於德化縣德化鄉清泉社母夫人墓左, 從遺命也. 壽等次列其狀來請銘, 乃泣而為之.
  • 君이 전에 潯陽에 갔을 때 廬山을 좋아하여 시냇가에 집을 짓고 ‘염계서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매번 조용히 내게 “[공자께서는]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셨으니, 古人은 기필하신 바가 없었네. 내가 어려서 배웠던 것은 장차 [배운 것을 실제 정치에서] 시행하여 이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 수 있게 하려는 것이지만, 필시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니 아직 늦기 전에 그만두려네. 나 주렴계는 훗날 그대와 함께 이 옆에서 先正의 도를 노래한다면 충분하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君의 뜻이었다. 君은 性理에 대해 더욱 잘 이야기하였고, 역학에 조예가 깊었다. 《태극도》·『역설』·『역통』 수십 편·시 열 권을 지었는데, 지금 집에 보관되어있다. 君의 모친 鄭氏는仙居縣太君에 봉해졌다. 君은 陸氏에게 장가갔는데, 職方郎中 陸參의 딸이고, 蒲氏에게 다시 장가갔는데, 太常丞 蒲師道의 딸이다. 周壽·周燾 두 아들은 모두 太廟齋郎에 보임되었다. 그 해 11월 21일에 德化縣 德化鄉 清泉社의 모친의 왼쪽에 하관했는데,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 周壽 등이 君의 행장을 정리하고 내게 와서 묘지명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기에, 내가 울면서 지었다.
銘曰: “人之不然, 我獨然之. 義貫於中, 貴於自期. 譾譾日甚, 風俗之偷. 乃如伊人, 吾復何求. 志固在我, 壽則有命. 道之不行, 斯謂之病.”
  • 묘지명은 다음과 같다:
남들이 옳게 여기지 않는 것을 홀로 옳게 여겨,
의리가 내면을 관통하는 것이 스스로 기약하는 것보다 귀한 법.
날로 천박해지는 것이 [요즘] 풍속이니, 
이 같은 사람을 내 다시 어디서 얻을까? 
뜻은 실로 나에게 달려있지만 목숨은 천명에 달린 것.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 이것을 병으로 여기네.

周敦頤墓碣銘[13] - 宋 蒲宗孟

始予有女弟, 明爽端淑, 欲求配而未之得. 嘉祐己亥, 泛蜀江, 道合陽, 與周君語, [三日三夜]. 退而歎曰: “世有斯人歟! [眞吾妹之敵也.]” 明年以吾妹歸之.
  • 처음 나에겐 여동생이 있었는데 명랑하고 단정해서 짝을 맺어주고 싶었지만 배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가우嘉祐 기해년 촉강蜀江을 유람할 때 합양合陽을 지나다 주돈이와 함께 [3일 밤낮으로] 말을 했었다. 물러나와 “세상에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다니! [진정 내 누이의 짝이구나.]”라고 탄복하였다. 그 다음해 나의 누이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周君世為營道人, 始名敦實, 避英宗藩邸名, 改敦頤. 曾祖從逺, 祖智強, 皆不仕. 父輔成, 賀州桂嶺縣令, 累贈諫議大夫. 母鄭氏, 仙居縣太君. 君少孤, 養於舅家. 鄭舅為龍圖閣學士, 以㤙補君試將作監主簿. [自其窮時, 慨然欲有所施, 以見於世. 故仕而必行其志, 為政必有能名.] 初從吏部調洪州分寧主簿. 未幾, 南安獄上屢覆[14]. 轉運使薦君為南安軍司理叅軍. 移郴州郴縣令, 又為桂陽令. 分寧有獄不決, 君至一訊立辨. [邑人驚詫曰: “老吏不如也.”] 南安囚, 法不當死, 轉運使欲深治之. 君爭不勝, 投其司理叅軍告身[15]以去. 曰: “如此尚可仕乎! 殺人以媚人, 吾不為也.” 轉運使感悟, 囚卒得不死. 自桂陽, 用薦者言, 改大理寺丞. 知洪之南昌. 南昌人見君來, 咸曰: “是能辨分寧獄者, 吾屬得所訴矣.”
  • 주돈이는 세대에 걸쳐 영도營道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돈실敦實을 이름으로 삼았지만, 영종英宗의 어렸을 적 이름을 피휘하여 돈이敦頤로 개명했다. 증조부는 종원從遠이고 조부는 지강智強으로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부친 보성輔成은 하주賀州의 계령현桂嶺縣의 현령이었는데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추증되었다. 모친 정씨鄭氏는 선거현태군仙居縣太君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 부모님을 잃어 외삼촌의 집에서 길러졌다. 외삼촌 정향鄭向은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였는데 음보로 군은 시장작감주부試將作監主簿이 되었다. [궁벽하던 시절부터 개연히 도를 펼쳐서 세상에 드러나길 바라는 뜻이 있었따. 그래서 출사해선 꼭 그 뜻을 행하였고, 정치를 행할 땐 반드시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처음 이부吏部로부터 홍주洪州 분녕현分寧縣의 주부로 임명되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남안南安의 옥사에서 누차 심문하였다. 전운사轉運使는 그를 남안군의 사리참군司理參軍으로 추천하였다. 그리고 다시 침주郴州의 침현령郴縣令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계양령桂陽令이 되었다. 분녕에는 해결되지 못한 옥사가 있었는데 그가 이르자 단박에 판단을 내렸다. [읍의 사람들이 놀라면서 ‘노련한 관리도 [주돈이만] 못하구나.’고 말했다.] 남안의 한 죄인은 법에 따르면 사형에 해당되지 않았는데 전운사가 그를 심히 치죄하였다. 그는 쟁론을 벌였으나 결판이 나지 않자 사리참군의 임명장을 던지고서 떠나버리며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관직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죽여서 사람에게 아첨하는 짓 따위 나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전운사는 감동을 느껴 [잘못을] 깨달았고 죄인은 결국 죽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계양桂陽에서부터 천거를 받아 대리사승大理寺丞으로 관직이 바뀌었다. 그리고 홍주洪州 남창南昌의 지현이 되었다. 남창의 사람들이 그가 [부임해] 오는 것을 보고는 모두 “그는 분녕의 옥사를 능히 판결한 자이니 우리들이 호소할 곳을 얻었구나.”고 하였다.
[君益思以竒自名, 屠姦剪弊, 如快刀健斧, 落手無畱.] 富家大姓, 黠胥惡少, 惴惴懷恐, 不獨以得罪於君為憂, 而又以汙善政為恥也. 江之南九十餘邑, 如君比者無一二. 改太子中舍, 簽書合州判官事, 轉殿中丞, 賜五品服. 一郡之事, 不經君手, 吏不敢決; 茍下之, 民不肯從. 蜀之賢人君子莫不喜稱之. 今資政殿學士趙公為使者, 小人隂中君. 趙公惑, 比去, 尚疑君有過. 嘉祐中, 轉國子博士, 通判䖍州. 趙公來守䖍, 熟視[16]君所為, 執君手曰: “幾失君矣! 今日迺知周茂叔也.” 英宗登極[17], 遷尚書虞部員外郎. 䖍大火, 焚其州, 改通判永州, 轉比部員外郎. 今上即位, 遷駕部員外郎. 熈寧元年, 擢授[18]廣南東路轉運判官. 三年, 轉虞部郎中, 提㸃本路刑獄. 君[以朝廷躐等見用, 奮發感厲.] 不憚出入之勤, 瘴毒之侵, 雖荒崖絶島, 人跡所不至處, 皆緩視徐按, 務以洗寃澤物為己任. 施設置措, 未及盡其所為, 而君已病矣. [病且劇, 念其母未葬.] 求南康以歸. [葬已. 君曰: “強疾而來者為葬耳, 今猶欲以病汙麾紱耶!] 病且劇, [三字元在上, 晦菴移於此.] 上南康印. 分司南京. 趙公再尹成都, 聞君之去, 拜章乞起君. 朝命及門, 疾已革. 熈寧六年六月七日卒, 卒年五十七. 嗟乎茂叔, 命止斯乎! [先時以書抵宗孟曰: ”上方興起數百年, 無有難能之事, 將圖大平天下, 㣲才小智茍有所長者, 莫不皆獲自盡. 吾獨不能補助萬分一[19], 又不得竊須臾之生, 以見堯舜禮樂之盛, 今死矣, 命也!“ 其語如此.] 嗚呼! 可哀也已!
  • [그는 탁월함으로 스스로 이름이 나기를 더욱 바랐으니, 간악한 자들을 죽이고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마치 날랜 검과 굳센 도끼와 같아 손을 쓰면 지체함이 없었다.] 부가富家와 대성大姓, 교활한 서리와 간악한 젊은이들은 벌벌 떨며 두려운 마음을 품었으니 그에게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였을 뿐 아니라 선정善政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하였다. 강남의 90개가 넘는 읍에서 그와 비견될만한 자가 1~2명조차 없었다. [이후] 태자중사太子中舍·첨서합주판관사簽書合州判官事·전전중승轉殿中丞으로 승진해서 5품의 관복을 하사받았다. 한 군의 사무 중에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관리가 감히 처결하지 못하였고, 만약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집행되면 백성들은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서촉지역의 현인賢人과 군자君子들 중에 그를 기뻐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 조공趙公이 사자가 되었을 때 소인들이 그를 음해하였는데, 조공이 미혹되었다가 비교적 [의심이] 제거되었지만 여전히 그에게 과오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가우嘉祐 연간에 [주돈이는] 국자박사國子博士·건주통판䖍州通判으로 관직이 옮겨졌다. 조공이 건주에 와서 태수가 되자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그의 손을 잡고선 “그대를 잃을 뻔 했구나! 지금에서야 주무숙을 알게 되었구나.”고 말했다. 영종이 즉위하고서 상서우부원외랑尚書虞部員外郎으로 관직이 바뀌었다. 건주에 큰 불이 나서 주州를 불태우자 영주통판永州通判으로 옮겨져서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郎이 되었다. 금상께서 즉위하자 가부원외랑駕部員外郎이 되었다. 희령원년에 광남동로전운판관廣南東路轉運判官으로 승진하였다. 희령3년에 우부낭중虞部郎中·제점본로형옥提㸃本路刑獄으로 관직이 옮겨졌다. 그는 [조정에서 등급을 뛰어넘어 임용을 받자 감동을 받아 더욱 분발해] 출입의 수고로움과 장독瘴毒이 몸에 스며드는 것을 불사하고 설령 황무지나 외딴 섬, 사람의 인적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 할지라도 모두 살피며 안무하여 원통함을 씻어주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조치를 시행함에 아직 해야 할 것을 다 하지 못하였는데 그는 병이 들고 말았다. [병이 장차 극심해질 때에도 모친을 아직 장례지내지 못함을 염려하였다.] 남강으로 돌아가길 구하였다. [장례가 마치고 그는 “병을 이겨가며 돌아온 것은 장례를 위한 것일 뿐 지금은 병을 털어 내버리길 바라네.”라고 말했다] 병이 장차 심해지자 - 이 부분은 원래 위에 있었지만 회옹은 이를 여기로 옮겼다. - 남강군의 인수를 바치고, 분사남경分司南京이 되었다. 조공이 재차 성도成都를 다스릴 때 그가 떠난 소식을 듣자 상주를 올려 그를 등용하길 청하였다. 조정의 명이 도달하였을 때 병은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희령6년 6월 7일 졸하였다. 졸하였을 때 나이는 57세였다. 아아! 무숙이여. 목숨이 여기까지구나. [이전에 편지를 나에게 보내와서 “대국이 흥기한지 수 백년 이뤄내기 어려운 일이 없었으니 장차 태평천하를 도모하였으니 미약한 재주나 작은 지혜라 할지라도 진실로 장기가 있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길 바랐다. 나는 오직 여기에 만분의 일 만큼이라도 보탬이 되지 못하였고 게다가 잠깐의 생이라도 얻어서 요순의 예악이 성대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지금 죽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명(命)이구나!”라고 말했다] 오호라. 애석할 뿐이구나.
初娶陸氏, 縉雲縣君; 再娶吾妹, 德清縣君. 二子夀、燾, 皆太廟齋郞. [君自少信古喜義, 以名節自高.] 李初平守郴, 與君相好, 不以部中吏待君. 初平卒, 子㓜, 不克葬. 君曰: “吾事也.” 往來其家, 終始經紀之. 雖至貧, 不計貲, 恤其宗族朋友. 分司而歸, 妻子饘粥不給, 君曠然不以為意也. [生平襟懷飄灑, 有高趣, 常以仙翁隐者自許. 尤樂佳山水, 遇適意處, 終日徜徉其間.] 酷愛廬阜, 買田其旁, 築室以居, 號曰濓溪書堂. [乘興結客, 與高僧道人, 跨松蘿, 躡雲嶺, 放肆於山巔水涯, 彈琴吟詩, 經月不返. 及其以病還家, 猶藍舉而往, 登覽忘倦. 語其友曰: “今日出處無累, 正可與公等為逍遥社, 但媿以病來耳.” 君之卒, 四月十六日.] 二甥[求吾銘], 將以其年十一月二十一日葬君於江州德化縣德化鄉清泉社. [吾嘗謂茂叔為貧而仕, 仕而有所為, 亦大概略見於人, 人亦頗知之. 然至其孤風逺操, 寓懷於塵埃之外, 常有高棲遐遁之意, 則世人未必盡知之也. 於其死, 吾深悲焉! 故想像君之平生, 而寫其所好, 以寄之銘云.] 來求銘. [三字續添]
  • 처음에는 육씨陸氏를 부인으로 맞았으니 진운현군縉雲縣君이고, 나의 누이과 재혼하였으니 덕청현군德清縣君이다. 두 명의 자식 주수周壽 주도周燾는 모두 태묘재랑太廟齋郞이 되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옛 것을 믿고 의로움을 즐겨 명성과 절개로 스스로를 높였다.] 이초평이 침주의 수守였을 때 그와 서로 교우관계가 좋아서 관부 안의 관리로 그를 대우하지 않았다. 이초평이 죽었을 때 자식은 나이가 어려서 능히 장례를 치룰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나서야 할 일이다.”라고 말하며 시종 이를 주관하였다. 비록 매우 빈곤하였지만 재물을 도모하지 않았으며 종족과 붕우를 구휼하였다. 분사남경을 역임하다 귀향하였을 때 처자식들이 음식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그는 통달한 듯 걱정하지 않았다. [평생토록 품은 뜻이 나부껴서 높은 뜻이 있었고, 항상 선사 은일자로 자처했다. 더욱 아름다운 산수를 즐겨서 마음 내키는 곳에 머무르며 종일토록 그 공간에서 노닐었다.] 여산廬山을 매우 좋아하여 그 근방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거처하였는데 이름을 ‘염계서당濓溪書堂’이라고 하였다. [빈객들과 교유하는 것에 흥취가 있어서 고승, 도인들과 함께 산림과 높은 봉우리를 다니며 산꼭대기나 물가에 노니며 현악기를 타며 시를 읊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돌아갈 줄 몰랐다. 병 때문에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수레를 타고 명승지를 올라 둘러보면서 피로를 잊었다. 친구에게 “오늘날 출처出處에 아무런 얽매임이 없이 정말로 공들과 함께 소요逍遙를 위하여 모였으나 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네.”라고 말했다. 그가 죽으니, 4월 16일이었다.] 두 명의 조카가 [나에게 명銘을 구하였다.] 그 해 11월 21일에 그를 강주江州 덕화현德化縣 덕화향德化鄉 청천사清泉社에 매장하고자 하였다. [내가 일찍이 일컫기를, 주무숙은 가난 때문에 출사하였지만 출사하고 나서는 업적이 있어서 또한 사람들에게 대개 알려졌고 사람들 역시 꽤나 알아주었다. 그러나 그는 고원한 풍격과 절조가 있어서 세속의 밖에 뜻을 두었고 항상 은거하며 멀리 떠나려는 뜻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필시 모두 이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죽게 되었을 때 나는 매우 비통하였다! 때문에 그의 평생을 추억하면서 그가 좋아하던 것을 그리며 이를 묘지명에 부치고자 한다.] 와서 묘지명을 구하였다. [3글자는 잇닿아 보태어졌다.]
銘曰: “廬山之月兮暮而明, 湓浦之風兮朝而清. 翁飄颻兮何所, 琴悄寂兮無聲! 杳乎欲訴而奚問, 浩乎欲忘而難平! 山巔水涯兮, 生既不得以自足, 死而葬乎其間兮, 又安知其不為清風白月, 往來於深林幽谷, 皎皎而泠泠也! 形骸兮歸此, 適所願兮, 攸安攸寧!”
  • 묘지명은 다음과 같다.
여산廬山의 달이여 해가 저무니 밝아지고, 분포湓浦의 바람이여 해가 뜨니 맑구나. 
옹은 훨훨 어디에 있는가, 거문고는 적막하여 아무 소리 없네.
적막하니 말하고 싶어도 어찌 묻겠으며, 광대하니 잊고 싶어도 평안키 어려워라. 
산봉우리와 물가는 살아생전 자족할 줄 모르더니 죽어서 그 사이에 묻혔네. 
또 어찌 알겠는가? 맑은 바람 밝은 달 되어 그윽한 산림과 계곡을 오가며 휘영청 밝게 비추고 졸졸 흐르고 있지 않을지. 
형해形骸는 돌아가 원하는 곳으로 가버렸구나. 평안한 곳으로.

周敦頤墓室記 - 宋 何子舉

先生世家舂陵之濂溪. 今以故里名行於湓, 蓋襲舂陵舊耳. 自先生講道此邦, 距今幾二百年. 流風所漸, 民醇俗魯, 其為士也愿而文, 過化之盛, 非止家藏書、人誦言而巳! 邦人瞻仰有祠, 學聚有堂, 墓道有表揭, 闕而未舉. 惟春秋之祭, 俎罍班榛荆, 衿佩濡露雨耳!
寶祐癸丑, 制帥陳公夢斗以南豫學子典郡事, 二年間恩浹和集, 以公於已者公於人, 克臻暇裕. 於縮迫中, 將以餘力起廢墜. 乃諏吉, 先命理椽鳩工, 築室墓右. 踰時告成, 萃賓僚相祀, 妥厥像于中, 冠屨肅穆, 光霽洋洋, 生如也. 竣事, 命某有以識.
夫圖書之妙, 中天日月, 天下見道, 即見先生. 室之築, 特以寄瓣香勺、齊之敬耳, 尚何言以藻繪斯道! 抑某反復左丞蒲公宗孟銘先生墓, 不能不扼腕於仲尼日月也. 其言曰: “先生疾革時, 致書某: ‘上方興起數千百年, 無有難能之事, 將圖太平天下, 材智皆圖自盡. 吾獨不能補助萬分一, 又不能竊湏臾之生, 以見堯舜禮樂之盛, 今死矣. 命也!’”
嗟乎! 有是言哉! 先生之學, 靜虚動直, 明通公溥, 以無欲為入聖之門者也. 窮達常變, 漠無繫累, 浮雲行藏, 晝夜生死. 其所造詣, 夫豈執世俗戀榮偷生之見者, 所可窺其藩! 言焉不得, 左丞尚得為知先生者! 然則先生之道, 豈固信於來世, 而獨不知於姻親者哉! 按左丞, 黨金陵者也, 方金陵倡新法, 毒天下, 熏心寵榮者, 無不皆和附其辭. 其所不然者, 惟特士醇儒未可以氣力奪. 左丞所云: “興起數千百年, 無有難能之事, 吾獨不能補助”者, 得無影響借重, 為新法厚自扳援者耶? 牟叔遐征里粟, 議者難之, 遂借其説於子產. 徐逢吉以河内冦為平民, 預引更生之對實其事. 自古貿亂是非, 往往一轍. 若左丞者, 設易簀之言, 堅金陵無復忌憚之心, 騰自欺之舌, 誣先生於無從究詰之地. 其為毁譽求合, 罔世塞道, 又罪浮於臧倉者也. 因辨識末, 以質於當世君子. 又一年, 五月既望, 後學金華何子舉撰并書. 建安翁甫題額.

周敦頤事狀 - 宋 朱熹

先生家世道州營道縣濓溪之上. 姓周氏, 名惇[20]實, 字茂叔. 後避英宗舊名, 改惇頥. 用舅氏龍圖閣學士鄭公珦奏, 授洪州分寧縣主簿. 縣有獄, 久不決, 先生至, 一訊立辨, 衆口交稱之. 部使者薦以為南安軍司理叅軍, 移郴及桂陽令. 用薦者, 改大理寺丞, 知洪州南昌縣事, 僉書合州判官㕔公事, 通判䖍州事, 改永州. 權發遣邵州事. 熈寧初, 用趙清獻公、吕正獻公薦, 為廣南東路轉運判官, 改提㸃刑獄公事, 未幾而病. 亦㑹水齧其先墓, 遂求南康軍以歸. 既葬, 上其印綬, 分司南京. 時趙公再尹成都府, 復奏起先生, 朝命及門, 而先生卒矣. 熈寧六年六月有七日也, 年五十有七. 葬江州德化縣德化鄉清泉社.
先生博學力行, 聞道甚早, 遇事剛果, 有古人風. 為政精密嚴恕, 務盡道理. 嘗作太極圖、易說、易通數十篇. 在南安時, 年少, 不為守所知. 洛人程公珦攝通守事, 視其氣貌非常人, 與語, 知其為學知道也. 因與為友, 且使其二子往受學焉. 及為郎, 故事, 當舉代. 每一遷授, 輒以先生名聞. 在郴時, 郡守李公初平知其賢, 與之語而歎曰: “吾欲讀書, 何如?” 先生曰: “公老, 無及矣. 某也請得為公言之.” 於是初平日聽先生語, 二年果有得. 而程公二子, 即所謂河南二先生者也. 南安獄有囚, 法不當死, 轉運使王逵欲深治之, 逵苛刻, 吏無敢與相可否. 先生獨力爭之, 不聽, 則置手板歸, 取告身, 委之而去. 曰: “如此尚可仕乎! 殺人以媚人, 吾不為也,” 逵亦感悟, 囚得不死. 在郴、桂皆有治績. 來南昌縣, 人迎喜曰: “是能辨分寧獄者, 吾屬得所訴矣.” 於是更相告語, 莫違教命. 葢不惟以抵罪為憂, 實以汙善政為恥也. 在合州, 事不經先生, 吏不敢決; 茍下之, 民不肯從. 蜀之賢人君子皆喜稱之. 趙公時為使者, 人或讒先生, 趙公臨之甚威, 而先生處之超然. 趙公疑終不釋. 及守䖍, 先生適佐州事, 趙公熟視其所為, 乃悟. 執其手曰: “幾失君矣! 今日乃知周茂叔也.” 於邵州, 新學校, 以教其人. 及使嶺表, 不憚出入之勤, 瘴癘之侵, 雖荒崖絶島, 人跡所不至, 亦必緩視徐按, 務以洗寃澤物為己任. 施設置措, 未及盡其所為, 而病以歸矣.
自少信古好義, 以名節自砥礪, 奉己甚約. 俸禄盡以周宗族, 奉賔友, 家或無百錢之儲. 李初平卒, 子幼, 䕶其喪歸葬之, 又往來經紀其家, 始終不懈. 及分司而歸, 妻子餰粥或不給, 而亦曠然, 不以為意也. 襟懷飄灑, 雅有高趣. 尤樂佳山水, 遇適意處, 或徜徉終日. 廬山之麓, 有溪焉, 發源於蓮花峯下, 潔清紺寒, 下合於湓江. 先生濯纓而樂之, 因寓以濓溪之號, 而築書堂於其上. 豫章黄太史庭堅詩而序之曰: “茂叔人品甚髙, 胸中灑落, 如光風霽月.” 知德者亦深有取於其言云.
(按: 呂柟編『周子抄釋』《事狀》後附注云: “晦菴即潘誌蒲碣及孔司封、黄太史所記先生行事之實, 刪去重複, 為此事狀.” 朱文載『朱子大全』卷九十八. 文末有“淳熙六年六月乙巳, 後學朱熹謹記”一句.)

周敦頤年譜 - 宋 度正

주정수수설(周程授受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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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明 呂柟, 『周子抄釋』 권2 「雜記第九」 ; 괄호 안의 설명은 여곤의 말이다.
  2. 맹자 공손추상 2. 宰我曰:『以予觀於夫子,賢於堯舜遠矣。』
  3. 맹자 등문공상 3. 人倫明於上,小民親於下。有王者起,必來取法,是為王者師也。
  4. 한어대사전 語本『禮記·學記』: “三王之祭川也, 皆先河而後海, 或源也, 或委也, 此之謂務本.” 鄭玄注: “源, 泉所出也; 委, 流所聚也.” 指水的發源和歸宿.
  5. 한어대사전 猶奏蔭.
  6. 한어대사전 13. 唐宋官制之一. 품계가 직임보다 1품 이상 높으면 行, 1품 낮으면 守, 2품보다 낮으면 試라고 함.
  7. 교감기 ‘幹’字, 據張、董、鄧三本補.
  8. 한어대사전 廣施恩澤. 舊時多用以稱帝王對臣民的封賞、赦免等.
  9. 한어대사전 郡太守的符璽. 亦借指郡太守.
  10. 한어대사전 2. 唐宋之制, 中央官員在陪都任職者, 稱為分司.
  11. 교감기 張本、鄧本義作誼.
  12. 한어대사전 太君: 封建時代官員母親的封號.
  13. 주자는 포종맹이 쓴 묘갈명의 내용 가운데 ‘주돈이답지 않은’ 구절들을 임의로 산삭하고 추가로 맥락에 따라 편집했다. 여기서는 주자가 산삭하거나 편집한 구절을 대괄호[]로 표시하겠다.
  14. 覆: 12.審理; 審問.
  15. 告身: 古代授官的文憑.
  16. 교감기 視原誤試, 今改.
  17. 登極: 2. 帝王即位.
  18. 擢授: 提升.
  19. 교감기 編者按: 一字據周敦頤墓室記補.
  20. 중화서국本 『주돈이집』에는 敦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