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왕골공예육성현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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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까지 왕실과 양반, 교역품으로서도 인기가 높고 으뜸으로 알려진 화문석이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재의 상황과 이를 육성하기 위한 강화도민들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 조선시대까지 왕실과 양반, 교역품으로서도 인기가 높고 으뜸으로 알려진 화문석이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재의 상황과 이를 육성하기 위한 강화도민들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
2019년 8월 19일 (월) 15:40 판
개요
조선시대까지 왕실과 양반, 교역품으로서도 인기가 높고 으뜸으로 알려진 화문석이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재의 상황과 이를 육성하기 위한 강화도민들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해설
일제강점기시대 화문석육성
일제강점기에는 민족말살 정책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가 탄압을 받았으나, 강화 화문석의 공예기술은 오히려 장려할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1919년에는 보통학교 어린이들에게 왕골을 짜는 기술을 가르키기 위하여 기술자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에게 염색하는 기술과 문양을 놓는 방법을 교육시켰다.[1] 또한 강화군청에서 재직했던 정혜채 선생은 <강화직물화연조합>을 만들어 [2] 강화 지역에서 생산되는 화문석의 품질 개선과 판로에 힘쓰며 화문석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후 <강화산업조합>에서 업무를 이어받아 화문석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한편 1937년에는 왕골, 슬리퍼, 핸드백, 바스켓, 화문석 등이 일본장을 발판으로 해외에 수출되기도 하였다.[3]
해방 후 현재까지의 화문석
8.15광복 이후 왕골 공예는 더욱 활발하여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수요의 급증되자, 생산자 및 정부의 노력으로 왕골공예품 장려정책을 펴 국내수요는 물론 수출산업에까지 확대 되었고[4] 강화에서 화문석의 주산지는 송해면 양오리와 당산리였고, 1960년대에 이르러 하점면과 양사면 등 강화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는데 그즈음 닷새마다 서는 강화장에서는 600여 매의 화문석이 매매되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1991년의 1년 통계에는 화문석 20456매, 화방석 20624매, 꽃삼합 30371첩이 거래된 것으로 집계됐다.[5] 강화 일대에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화문석 재료인 왕골을 재배하는 농가가 1000여가구에 달하였다. 생활이 좌식에서 입식으로 바뀌고 외국의 저가 상품과 화문석 외에 다양한 소재의 상품들이 쏟아지면서 2000년대 초반엔 120여가구(재배면적 12.4㏊)로 줄었으며, 가구당 평균 재배면적도 100∼200평에 불과하며, 전업농가는 별로 없고 대개 부업으로 한다. 그나마 화문석을 직접 짜는 곳은 송해·양사면의 80여가구에 불과한 상황이 되었다.[6]
또한 1990년대까지 강화읍 갑곶리에 자리잡고 있는 강화 풍물시장에는 화문석장이 열렸지만 사라지고 현재는 화문석을 판매하는 상점들만 몇 곳 모여있다. 화문석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생산량도 자연스럽게 감소했다. 한순자씨의 강화도 양오리 마을은 1970년대만 해도 50가구 대부분이 화문석을 짰지만 지금은 두 집 남았다고 한다. [7] [8]
어머니의 화문석 가게를 이어받아 10년째 강화 풍물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최승기씨(44세) 또한 강화 왕골로 짠 돗자리와 중국산 제품의 가격은 최소 2배에서 3배 가량 차이가 난다며 방문한 손님들도 강화 화문석이 좋다는 것을 알지만, 가격대를 듣고 저렴한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한해에 판매되는 화문석은 20여점에 불과하다. 기업에서 한꺼번에 구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드물다 강화 화문석을 찾는 손님 나이가 대부분 50대 이상인 부분도 우려된다. [9]
왕골공예육성현황
강화군 왕골 공예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
2019년부터 시행할 계획이며 왕골 재배농가 대부분이 고령화됨에 따라 그 수가 감소하고 있고, 재배 및 가공이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져 왕골 재배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에 공감해 조례안이 발표되었으며, 기존에 왕골공예품을 제작하는 공예인으로 한정해 지원했던 기존 정책과 다르게 왕골 재배 농가와 미래 왕골공예인이 될 군민까지 지원범위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0]
완초보존협회
강화 완초 공예인 모임은 10여년전부 완초보존협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현재 50여명의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올해 강화군의 15개 초등학교는 체험학습 프로그램으로 강화 완초 공예를 배우는데, 강의는 보존협회 회원들이 맡는다.
과거에는 화문석이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화문석 외에도 왕골을 이용해 열쇠고리와 휴대전화고리, 바구니 등 다양한 상품을 만든다. 강화군청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여러 방법을 통해 강화 화문석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1]
강화완초전통보존회
완초공예 전통 계승·발전과 군민 및 관광객을 대상으로 완초공예 홍보 및 후계자 양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2]
강화도령화문석
박물관에 전시된 전통문화가 아니라 현대인들에게도 유효한 화문석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는 강화의 젊은 기업가인 박윤환 대표는 2대째 화문석을 판매하고 있는 ‘강화도령 화문석’의 대표이다. 화문석 판매는 물론, 기술개발, 제작, 체험, 홍보 등 화문석 및 왕골제품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과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강화군 왕골공예품 경진대회
1989년부터 매년 완초공예품경진대회가 열리며, 벌써 30회를 맞이하였다. 공예품 개발을 육성하고, 군민의 우의를 돈독히 하며, 공예품 생산 농가와 장인의 감소를 억제하고 특산물의 맥을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13]
화문석 후진양성 프로그램
화문석문화관에서는 사라져가는 왕골공예인의 맥을 잇기 위해 후계자를 양성하는 '화문석 후진양성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으며, 강화군 왕골 공예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통한 지원으로 다양한 교육과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14]
시각자료
영상
- Hwamunseok, 강화도령화문석 제작 모습 2014년 , 게시일: 2017년 9월 25일.
출처
- ↑ 향토명인 : 음악/미술 : 초고장(草藁匠) 지역정보포털 http://www.oneclick.or.kr/bbs/boardView.do?id=83&bIdx=80937&page=1&menuId=151&bc=0
- ↑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
- ↑ 완초공예 서순임 - HIINOUT http://iyoc.kr/portal/interview.asp?idx=121
- ↑ 향토명인 : 음악/미술 : 초고장(草藁匠) 지역정보포털 http://www.oneclick.or.kr/bbs/boardView.do?id=83&bIdx=80937&page=1&menuId=151&bc=0
- ↑ 강화포커스 http://ganghwafocus.com/tour/bbs/board.php?bo_table=2009_news6_1&wr_id=12
- ↑ 서울신문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707211001#csidx641f39f96a57585bde93af267d203c9
- ↑ 서울신문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707211001#csidx641f39f96a57585bde93af267d203c9
- ↑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2/05/2014120500310.html
- ↑ 경인일보 http://m.kyeongin.com/view.php?key=970994#rs
- ↑ 강화군 왕골 공예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 http://www.elis.go.kr/newlaib/laibLaws/h1126/laws_list_new.jsp?lawsNum=28710110229025
- ↑ 경인일보 http://m.kyeongin.com/view.php?key=970994#rs
- ↑ 경기신문 http://www.kg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5356
- ↑ HIINOUT http://iyoc.kr/portal/interview.asp?idx=121
- ↑ 중앙일보 https://news.joins.com/article/23199406
기여
일자 | 역할 | 이름 | 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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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 정리 및 편집 | 손형남 | 인문정보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