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harondesign (토론 | 기여) |
Sharondesign (토론 | 기여)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개요'''== | =='''개요'''== | ||
− | 바닥에 까는 자리는 참골, 왕골, 대, 볏짚, 갈대, 칡 따위를 재료로 하여 만드는데 그 가짓수가 아주 많다. 여러 가지 풀이나 볏짚 따위로 짜여진 자리 가운데서 가장 긴하게 쓰였고 많이 만들어진 것은 왕골로 짠 자리이며, 또 가장 귀하게 여겨졌던 것은 참골로 짠 등메이다. <ref> 예용해전집 | + | 바닥에 까는 자리는 참골, 왕골, 대, 볏짚, 갈대, 칡 따위를 재료로 하여 만드는데 그 가짓수가 아주 많다. 여러 가지 풀이나 볏짚 따위로 짜여진 자리 가운데서 가장 긴하게 쓰였고 많이 만들어진 것은 왕골로 짠 자리이며, 또 가장 귀하게 여겨졌던 것은 참골로 짠 등메이다. <ref> 예용해전집(돗자리) 대원사, 1997.06.07 https://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5018&nodeId=NODE04209758&medaId=MEDA04350392#none </ref> |
− | 등메는 헝겊으로 가장자리 선을 두르고 뒤에 부들자리를 대서 꾸민 돗자리, 즉 수를 놓은 자리와 초석(草席)을 합쳐 만든 겹자리로 ‘등메’의 의미로 ‘등매’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등메’만 표준어로 삼고 | + | 등메는 헝겊으로 가장자리 선을 두르고 뒤에 부들자리를 대서 꾸민 돗자리, 즉 수를 놓은 자리와 초석(草席)을 합쳐 만든 겹자리로 ‘등메’의 의미로 ‘등매’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등메’만 표준어로 삼고 ‘등매’는 버린다. <ref>국어사전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10952200</ref> <ref> 세종대왕기념사업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8993&cid=41826&categoryId=41826</ref> |
=='''해설'''== | =='''해설'''== | ||
7번째 줄: | 7번째 줄: | ||
==='''등메의 정의'''=== | ==='''등메의 정의'''=== | ||
− | 안타깝지만, 지금은 사라진 기술로 언론인이자 | + | 화문석(花紋席) 또는 꽃돗자리라고 하면 다들 강화도를 연상하리만큼 강화의 화문석은 이름이 났는데, 그러나 그 화문석에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강화군 하점면(河岾面) 양오리(陽五里)에서 나는 왕골〔莞草〕을 재료로 하는 꽃돗자리요, 다른 하나는 교동면 읍내에서 골을 재료로 하는 등메이다. |
− | 등메에 관한 여러 정보들을 보면, 결국 1961년 했던 1번의 인터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예용해 선생 또한 후에 이 기술을 복원하고자 여러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 + | 세상에서는 흔히들 화문석이라고 하여 꽃돗자리와 등메를 혼동하고 있는데, 이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것으로 공정에 있어서도 꽃돗자리는 왕골 껍질을 손으로 엮은 것이고, 등메는 골을 한 올씩 가마니 치듯 바디로 다져서 짜는 것이며, 화문을 놓는 것도 전자는 물을 들인 왕골을 덧겹쳐 엮어서 무늬에 따라 잘라낸 것이요, 후자는 물을 들인 골로 수놓듯 무늬를 놓은 것이다. 꽃돗자리는 지금도 흔하게들 생산되며 시중에서도 볼 수가 있으나, 등메는 이미 없어진 지가 오랬고 강화 본바닥에서도 보기 힘들게 되었다. 옛날에는 궁에 진상했다고 하여 진상석이라고도 부른다. <ref> 예용해전집1(인간문화재), 등메장, 대원사, 1997.06.07 http://www.krpia.co.kr/viewer?plctId=PLCT00005018&tabNodeId=NODE04209736&nodeId=NODE04210444</ref> |
+ | |||
+ | |||
+ | ==='''등메의 정의'''=== | ||
+ | 안타깝지만, 지금은 사라진 기술로 언론인이자 문화재위원인이었던 예용해(1995년 작고) 기자가 마지막 남은 등메 장인 3명 중 1명인 이산룡(李山龍, 58세)씨와 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내용 외에는 등메에 관련 자료를 찾기 어렵다. <br/> | ||
+ | 등메에 관한 여러 정보들을 보면, 결국 1961년 했던 이씨와 1번의 인터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예용해 선생 또한 후에 이 기술을 복원하고자 여러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 ||
+ | 현재 없어져가고 있는 교동도의 ‘등메’도 보성석의 솜씨를 빌리면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ref> 예용해전집(보성석寶城蓆) 대원사, 1997.06.07 https://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5018&nodeId=NODE04209758&medaId=MEDA04350392#none </ref> | ||
+ | 오랜 전통공예인 꽃자리가 여느 고장에서는 예나 다름없이 이어져 오고 있는 데에 반해서, 꽃자리 가운데서 가장 으뜸의 자리를 차지해왔던 등메만이 우리 대에 와서 끊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 고장의 뜻 있는 사람들이 행여나 이 글을 읽고 등메를 되살리는 일에 마음을 쓸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겠다. <ref> 예용해전집(돗자리) 대원사, 1997.06.07 https://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5018&nodeId=NODE04209758&medaId=MEDA04350392#none </ref> | ||
+ | |||
자리[席]의 하나. 등메라고도 함. 헝겊으로 가선을 두르고 뒤에 부들자리를 대어 꾸민 돗자리로 즉, 수를 놓은 자리와 초석(草席)을 합쳐 만든 겹자리임. [유사어] 겹석(袷席). | 자리[席]의 하나. 등메라고도 함. 헝겊으로 가선을 두르고 뒤에 부들자리를 대어 꾸민 돗자리로 즉, 수를 놓은 자리와 초석(草席)을 합쳐 만든 겹자리임. [유사어] 겹석(袷席). |
2019년 6월 26일 (수) 00:17 판
개요
바닥에 까는 자리는 참골, 왕골, 대, 볏짚, 갈대, 칡 따위를 재료로 하여 만드는데 그 가짓수가 아주 많다. 여러 가지 풀이나 볏짚 따위로 짜여진 자리 가운데서 가장 긴하게 쓰였고 많이 만들어진 것은 왕골로 짠 자리이며, 또 가장 귀하게 여겨졌던 것은 참골로 짠 등메이다. [1] 등메는 헝겊으로 가장자리 선을 두르고 뒤에 부들자리를 대서 꾸민 돗자리, 즉 수를 놓은 자리와 초석(草席)을 합쳐 만든 겹자리로 ‘등메’의 의미로 ‘등매’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등메’만 표준어로 삼고 ‘등매’는 버린다. [2] [3]
해설
등메는 용수초라는 가늘고 긴 초경식물로 한올씩 가마니를 만드는것처럼 바디로 다져서 짜며 무늬도 물들인 골로 수놓듯 짜는 것으로 유연하면서도 부러지지않아 여름철 요나 보료 위 또는 궁중과 사대부가의 깔자리와 방석으로 쓰였다.
등메의 정의
화문석(花紋席) 또는 꽃돗자리라고 하면 다들 강화도를 연상하리만큼 강화의 화문석은 이름이 났는데, 그러나 그 화문석에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강화군 하점면(河岾面) 양오리(陽五里)에서 나는 왕골〔莞草〕을 재료로 하는 꽃돗자리요, 다른 하나는 교동면 읍내에서 골을 재료로 하는 등메이다. 세상에서는 흔히들 화문석이라고 하여 꽃돗자리와 등메를 혼동하고 있는데, 이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것으로 공정에 있어서도 꽃돗자리는 왕골 껍질을 손으로 엮은 것이고, 등메는 골을 한 올씩 가마니 치듯 바디로 다져서 짜는 것이며, 화문을 놓는 것도 전자는 물을 들인 왕골을 덧겹쳐 엮어서 무늬에 따라 잘라낸 것이요, 후자는 물을 들인 골로 수놓듯 무늬를 놓은 것이다. 꽃돗자리는 지금도 흔하게들 생산되며 시중에서도 볼 수가 있으나, 등메는 이미 없어진 지가 오랬고 강화 본바닥에서도 보기 힘들게 되었다. 옛날에는 궁에 진상했다고 하여 진상석이라고도 부른다. [4]
등메의 정의
안타깝지만, 지금은 사라진 기술로 언론인이자 문화재위원인이었던 예용해(1995년 작고) 기자가 마지막 남은 등메 장인 3명 중 1명인 이산룡(李山龍, 58세)씨와 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내용 외에는 등메에 관련 자료를 찾기 어렵다.
등메에 관한 여러 정보들을 보면, 결국 1961년 했던 이씨와 1번의 인터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예용해 선생 또한 후에 이 기술을 복원하고자 여러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현재 없어져가고 있는 교동도의 ‘등메’도 보성석의 솜씨를 빌리면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5] 오랜 전통공예인 꽃자리가 여느 고장에서는 예나 다름없이 이어져 오고 있는 데에 반해서, 꽃자리 가운데서 가장 으뜸의 자리를 차지해왔던 등메만이 우리 대에 와서 끊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 고장의 뜻 있는 사람들이 행여나 이 글을 읽고 등메를 되살리는 일에 마음을 쓸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겠다. [6]
자리[席]의 하나. 등메라고도 함. 헝겊으로 가선을 두르고 뒤에 부들자리를 대어 꾸민 돗자리로 즉, 수를 놓은 자리와 초석(草席)을 합쳐 만든 겹자리임. [유사어] 겹석(袷席).
용례
무릇 일용의 물건에는 마땅히 식은 있으되 기는 없어야 할 것이다.<하기가 없다는 말이다.>. 시험삼아 포진<골자리 등속을 포진이라 한다.> 한가지로 말해보자. 기록하기를 전 3전 <엽전 30잎이 3전이다.>은 백석 1장 값, 1전은 용수초 염색값<청•적•황•흑색을 다 물들인다.>, 1전은 기화<5색초로 수놓는 것을 기화라 한다.> 때의 공가, 2전은 겹과 초석 값<수석과 초석을 합쳐서 겹자리를 만드는데 이름하여 등매라 한다.> ; 凡日用之物宜 有式而無記<無下記> 試論舖陳一事<莞席之屬 謂之舖陳> 記之曰錢三戔<三十曰三戔> 白席一張價 錢一戔 龍鬚草染色價<靑赤黃黑皆染之> 錢一戔起花時嵀¥價<繡之以五色草曰起花> 錢二戔袷裏草席價<繡席草席合之袷席 名曰登每> [목민심서 봉공육조 수법]
[네이버 지식백과] 등매 [登每]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8993&cid=41826&categoryId=41826
.[7]
시각자료
사진
박물관과 갑곶돈대 입구
박물관 건물
박물관 전경
영상
- 채널A 오늘의 영상_스마트리포터 동영상, 왕골 돗자리, 게시일: 2013년 3월 4일.
가상현실[8]
-추후 드론과 파노라마사진을 넣을 곳입니다.
출처
- ↑ 예용해전집(돗자리) 대원사, 1997.06.07 https://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5018&nodeId=NODE04209758&medaId=MEDA04350392#none
- ↑ 국어사전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10952200
-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8993&cid=41826&categoryId=41826
- ↑ 예용해전집1(인간문화재), 등메장, 대원사, 1997.06.07 http://www.krpia.co.kr/viewer?plctId=PLCT00005018&tabNodeId=NODE04209736&nodeId=NODE04210444
- ↑ 예용해전집(보성석寶城蓆) 대원사, 1997.06.07 https://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5018&nodeId=NODE04209758&medaId=MEDA04350392#none
- ↑ 예용해전집(돗자리) 대원사, 1997.06.07 https://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5018&nodeId=NODE04209758&medaId=MEDA04350392#none
- ↑ 예용해전집1(인간문화재), 등메장, 대원사, 1997.06.07 http://www.krpia.co.kr/viewer?plctId=PLCT00005018&tabNodeId=NODE04209736&nodeId=NODE04210444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 광성보' 사진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6월 정리 및 편집 손형남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