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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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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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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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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초에 해동역사는 요사를 인용하여 ‘고려 목종 11년(1008)에 요나라에 용수초 31석을 보냈다’고 기록하였다. ‘요나라 통화 26년인 무신 5월에 사신을 보내어 문화무공 양 궁전에 용수초 31석을 전물하였다’라는 최초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이전으로 추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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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같은 책에 <원씨액정기>를 인용하여 ‘원나라 순제가 영영을 위하여 경화도에 채방관을 세우고 안에 당인 만화문석을 깔았다’고 하였다. 그것은 ‘성질이 부드러워 부러지지 않으며 광택이 있어 매우 좋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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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 권 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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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문종이 즉위하여 영을 내릴 인욕(茵褥 : 왕골로 짠 자리)는 금, 은선으로 짜서 계금을 사용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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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는 마땅히 동철(銅鐵)과 능견(綾絹)으로 바꾸어야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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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도경 제28권 공장(供張) 문석(文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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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송시대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인종 때 고려의 문물을 둘러보고 기록한 <고려도경>에도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정교한 것은 핌상과 평상에 깔고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며 부드러워접거나 굽혀도 구부러지지 않는다’라고 극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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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도경 中 화문석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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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석은 곱고 일정하지 않다.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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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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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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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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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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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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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llery mode=packed-hover heights=16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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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강화전쟁박물관외부1.jpg | 박물관과 갑곶돈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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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강화전쟁박물관외부2.jpg | 박물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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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갑곶돈대3.jpg | 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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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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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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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채널A 오늘의 영상_스마트리포터 동영상, 왕골 돗자리, 게시일: 2013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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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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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cIEMPX3WQCM"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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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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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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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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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ass="wiki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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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자 || 역할|| 이름 ||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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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9년 6월 || 정리 및 편집 || [[손형남]] || 인문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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