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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周敦頤,字茂叔,道州營道人。元名敦實,避英宗舊諱改焉。以舅龍圖閣學士鄭向任,為分寧主簿。有獄久不決,敦頤至,一訊立辨。邑人驚曰:「老吏不如也。」部使者薦之,調南安軍司理參軍。有囚法不當死,轉運使王逵欲深治之。逵,酷悍吏也,眾莫敢爭,敦頤獨與之辨,不聽,乃委手版歸,將棄官去,曰:「如此尚可仕乎!殺人以媚人,吾不為也。」逵悟,囚得免。<br/> 주돈이(周敦頤)는 자가 무숙(茂叔)이고 도주(道州) 영도현(營道)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돈실(敦實)이었는데 송나라 영종의 옛 이름을 피휘하여 고쳤다. 외삼촌인 용도각학사 정향(鄭向)의 추천으로 분녕의 주부로 임용되었다.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송사가 있었는데 주돈이가 오자 단번에 조사하여 판결을 내렸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면서 “노련한 관리도 [주돈이만] 못하구나.”라고 말했다. 부사가 그를 천거하였고 남안군사리참군(南安軍司理參軍)으로 임명되었다. 죄수 중에서 법으로 볼 때 죽여선 안 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운사(轉運使) 왕규(王逵)는 그를 심하게 치죄하였다. 왕규는 독하고 사나운 관리인지라 무리 중에서 아무도 감히 다투려고 하지 않았는데 주돈이만이 홀로 그와 논변하였다. 그러나 왕규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곧 수판(手版)을 버리고 돌아가 관직을 버리고 떠나려고 하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관리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죽여서 남에게 아첨하는 짓을 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왕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고, 죄수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br/> 移郴之桂陽令,治績尤著。郡守李初平賢之,語之曰:「吾欲讀書,何如?」敦頤曰:「公老無及矣,請為公言之。」二年果有得。徙知南昌,南昌人皆曰:「是能辨分寧獄者,吾屬得所訴矣。」富家大姓、黠吏惡少,惴惴焉不獨以得罪於令為憂,而又以污穢善政為恥。曆合州判官,事不經手,吏不敢決。雖下之,民不肯從。部使者趙抃惑於譖口,臨之甚威,敦頤處之超然。通判虔州,抃守虔,熟視其所為,乃大悟,執其手曰:「吾幾失君矣,今而後乃知周茂叔也。」<br/> 침군(郴郡) 계양(桂陽)의 현령으로 자리를 옮기자 치적이 더욱 현저해졌다. 침군의 군수 이초평(李初平)은 그가 현명하다고 생각해서 “나는 독서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며 물었다. 주돈이는 “공은 나이가 많아 시간이 급박하니 공을 위하여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이년 뒤에 과연 소득이 있었다. 자리를 옮겨서 남창의 지현이 되었는데, 남창의 사람들은 모두 “이는 분녕의 옥사를 능히 판결한 사람이니 우리들이 하소연할 곳을 얻었다.”고 말했다. 부자들과 지방의 유력자들과 교활한 관리들과 악행을 저지르는 젊은이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현령으로부터 죄를 얻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였을 뿐 아니라 선정을 더럽히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합주(合州)의 판관을 역임할 때, 일이 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관리들이 감히 처결하지 못하였고, 비록 명령을 내리더라도 백성들은 청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부사 조변(趙抃)이 참소하는 말에 현혹되어 [주돈이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위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돈이는 초연히 대처하였다. 건주(虔州) 통판을 맡았을 때에는 조변이 건주의 현령이 되어 면밀하게 그의 행실을 보고선 곧 크게 깨닫더니 그의 손을 잡으며 “나는 그대를 거의 잃어버렸지만. 지금 이후로 주무숙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br/> 熙寧初,知郴州。用抃及呂公著薦,為廣東轉運判官,提點刑獄,以洗冤澤物為己任。行部不憚勞苦,雖瘴癘險遠,亦緩視徐按。以疾求知南康軍,因家廬山蓮花峰下。前有溪,合于溢江,取營道所居濂溪以名之。抃再鎮蜀,將奏用之,未及而卒,年五十七。 <br/> 희령(熙寧, 1068년~1077) 초년에 침주(郴州)의 지주가 되었다. 조변과 여공저(呂公著)로부터 천거를 받아 광동(廣東)의 전운판관(東轉運判官)이 되자 죄를 지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억울하게 죄를 지은 사람들의 누명을 벗겨주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부(部)를 순행하였지만 노고(勞苦)를 꺼려하지 않아서 비록 풍토병과 창병이 일고 길이 험하고 멀더라도 시찰하고 위무하였다. 나중에 주돈이는 병으로 지남강군(知南康軍)으로 자리를 옮기길 구하였고, 이로 인해 여산의 연화봉(蓮花峯) 아래에 집을 지었다. 앞에 시내가 있었는데 분강(湓江)으로 합하였고, 영도(營道)에 머물렀던 염계(溓溪)를 취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조변이 재차 촉(蜀)에 진수하였을 때 장차 [주돈이를] 등용하라 상주하려고 하였지만 그 일이 이루기도 전에 주돈이는 죽고 말았으니 당시의 나이가 57세였다. <br/> 黃庭堅稱其「人品甚高,胸懷灑落,如光風霽月。廉于取名而銳於求志,薄於徼福而厚於得民,菲於奉身而燕及煢嫠,陋於希世而尚友千古。」 <br/> 황정견(黃庭堅)은 “인품이 매우 높고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은 시원하여 마치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명성을 취하는 것을 뒷전으로 하였으나 뜻을 구하는 것에는 왕성하였고, 복을 구함에는 박하였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두터웠으며, 몸을 받듦에는 둔하였지만 즐거워함이 과부와 홀아비를 보살피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고, 세상에 영합함을 누추하게 여겼지만 위로는 천고(千古)와 벗하였다.”고 그를 칭송하였다. <br/> 博學行力,著《太極圖》,明天理之根源,究萬物之終始。其說曰: <br/> 널리 배우고 힘써 실천하였는데, 《태극도》를 지어 천리의 근원을 밝히고 만물의 시작과 끝을 궁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br/> 無極而太極。太極動而生陽,動極而靜,靜而生陰,靜極複動,一動一靜,互為其根,分陰分陽,兩儀立焉。陽變陰合,而生水、火、木、金、土,五氣順布,四時行焉。五行一陰陽也,陰陽一太極也。太極本無極也。五行之生也,各一其性。無極之真,二五之精,妙合而凝,乾道成男,坤道成女。二氣交感,化生萬物,萬物生生,而變化無窮焉。惟人也得其秀而最靈,形既生矣,神發知矣,五性感動而善惡分,萬事出矣。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立人極焉。故聖人與天地合其德,日月合其明,四時合其序,鬼神合其吉凶。君子修之吉,小人悖之凶。故曰:「立天之道,曰陰與陽。立地之道,曰柔與剛。立人之道,曰仁與義。」又曰:「原始反終,故知死生之說。」大哉《易》也,斯其至矣。 <br/>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서 양(陽)이 생기고 움직임이 극한에 달하여 고요해지는데 고요해지면 음(陰)이 생긴다. 그리고 고요함이 극한에 다다르면 다시 움직인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해져서 서로 각각의 근거가 되니,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가 세워진다. 음양이 변화하거나 결합해서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라는 오행이 생겨난다. 다섯 종류의 기(五氣)는 순서에 따라 펴져서 춘(春)·하(夏)·추(秋)·동(冬)이라는 사시(四時)가 운행된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의 생성에 각각 본성을 동일하게 갖고 있다. 무극의 신실함과 음양·오행의 순정함은 신묘하게 결합해서 응결된다. ‘건(乾)의 도리는 남자를 이루고, 곤(坤)의 도리는 여자를 이룬다.’고 하니 음양이라는 두 기가 교감하여 만물을 화생시킨다. 만물이 발생하는 과정을 반복하니 변화는 끝이 없다. 오직 사람만이 빼어난 것을 얻어서 가장 영명하다. 형체가 이미 생겨나면 정신이 지각을 발현시키니 [인(仁)·의(義)·예(禮)·지(知)·신(信)이라는] 다섯 가지 본성(五性)이 외물에 감응해 움직이다 선악(善惡)이 나뉘고 온갖 사태들이 출현한다. 성인은 중(中)·정(正)·인(仁)·의(義)로써 이를 안정시키되 정(靜)을 위주로 사람의 표준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이 합치되고, 일월과 그 밝음이 합치되고, 사시와 그 순서가 합치되며, 귀신과 그 길흉이 합치된다. 군자는 수양하니 길하며, 소인은 어긋나니 흉하다. 그러므로 ‘천도(天道)를 세우며 음(陰)과 양(陽)을 말하였고, 지도(地道)를 세우며 유(柔)와 강(剛)을 말하였고, 인도(人道)를 세우며 인(仁)과 의(義)를 말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시작을 궁구하고 끝으로 돌아가니 그러므로 죽음과 삶의 설을 알겠다.’고 한 것이다. 위대하다 역(易)이여! 이렇게도 지극하도다.”<br/> 又著《通書》四十篇,發明太極之蘊。序者謂「其言約而道大,文質而義精,得孔、孟之本源,大有功于學者也。」 <br/> 또한 《통서》 40편을 저술하여 태극의 품은 뜻을 드러내서 밝혔다.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은 간략하지만 [담고 있는] 도는 크고, 형식과 내용이 갖추어져있고(文質) 의미가 정밀하여 공자와 맹자의 본원(本源)을 얻었으니 배우는 자들에게 큰 공이 있다.” <br/> 掾南安時,程珦通判軍事,視其氣貌非常人,與語,知其為學知道,因與為友,使二子顥、頤往受業焉。敦頤每令尋孔、顏樂處,所樂何事,二程之學源流乎此矣。故顥之言曰:「自再見周茂叔後,吟風弄月以歸,有'吾與點也'之意。」侯師聖學于程頤,未悟,訪敦頤,敦頤曰:「吾老矣,說不可不詳。」留對榻夜談,越三日乃還。頤驚異之,曰:「非從周茂叔來耶?」其善開發人類此。 <br/> 안정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통판군사(通判軍事) 정향(程珦)이 풍모가 비상한 사람임을 보고는 그와 함께 이야기를 했더니 과연 그의 학문 됨됨이와 도(道)를 알고 있음을 알고는 그와 교유를 맺어 두 아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로 하여금 가서 수업하도록 하였다. 주돈이는 매번 공자와 안회가 즐거워하는 것, 즉 그들이 즐기던 바가 무슨 일이었는지를 살피도록 하였으니, 이정의 학문이 이로부터 연원하였다. 그래서 정호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주무숙을 본 후로부터 음풍농월(吟風弄月) 중에 ‘나는 증점과 함께하겠노라.’라고 말씀하신 공자의 뜻이 있게 되었다.” 후사성(侯師聖)이 정이로부터 학문을 하였지만 깨닫지 못하고 주돈이를 방문하였다. 주돈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늙어서 말을 상세하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그와 책상을 마주하며 밤새도록 머물며 담론하다 3일이 지나 되돌아갔더니 정이가 남달라진 것을 탄복하며 이렇게 말했다. “주무숙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그는 사람들을 이렇게 잘 개발시켜주었다. <br/> 嘉定十三年,賜諡曰元公,淳祐元年,封汝南伯,從祀孔子廟庭。 <br/> 가정(嘉定) 13년(1220년)에 시호를 하사하여 ‘원공(元公)’이라 하였고, 순우(淳祐) 원년(1241년)에 여남백(汝南伯)에 봉하고 공자의 묘정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br/> 二子壽、燾,燾官至寶文閣待制。 <br/> 두 아들은 주수(周壽)와 주도(周燾)이다. 주도는 관직이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에 이르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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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9일 (월) 01:19 판
목차
주돈이(周敦頤)
주돈이(1017~1073)의 字는 茂叔, 號는 濂溪이다. 원 이름은 敦實이었지만 송나라 英宗(재위 1063~1067)의 초명인 宗實을 피휘하여 敦頤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표 저작으로 태극도설과 통서가 있다. 기타 정보는 추가하거나 다음의 링크를 참고할 것. [1]
송사 주돈이전
周敦頤,字茂叔,道州營道人。元名敦實,避英宗舊諱改焉。以舅龍圖閣學士鄭向任,為分寧主簿。有獄久不決,敦頤至,一訊立辨。邑人驚曰:「老吏不如也。」部使者薦之,調南安軍司理參軍。有囚法不當死,轉運使王逵欲深治之。逵,酷悍吏也,眾莫敢爭,敦頤獨與之辨,不聽,乃委手版歸,將棄官去,曰:「如此尚可仕乎!殺人以媚人,吾不為也。」逵悟,囚得免。
주돈이(周敦頤)는 자가 무숙(茂叔)이고 도주(道州) 영도현(營道)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돈실(敦實)이었는데 송나라 영종의 옛 이름을 피휘하여 고쳤다. 외삼촌인 용도각학사 정향(鄭向)의 추천으로 분녕의 주부로 임용되었다.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송사가 있었는데 주돈이가 오자 단번에 조사하여 판결을 내렸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면서 “노련한 관리도 [주돈이만] 못하구나.”라고 말했다. 부사가 그를 천거하였고 남안군사리참군(南安軍司理參軍)으로 임명되었다. 죄수 중에서 법으로 볼 때 죽여선 안 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운사(轉運使) 왕규(王逵)는 그를 심하게 치죄하였다. 왕규는 독하고 사나운 관리인지라 무리 중에서 아무도 감히 다투려고 하지 않았는데 주돈이만이 홀로 그와 논변하였다. 그러나 왕규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곧 수판(手版)을 버리고 돌아가 관직을 버리고 떠나려고 하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관리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죽여서 남에게 아첨하는 짓을 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왕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고, 죄수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移郴之桂陽令,治績尤著。郡守李初平賢之,語之曰:「吾欲讀書,何如?」敦頤曰:「公老無及矣,請為公言之。」二年果有得。徙知南昌,南昌人皆曰:「是能辨分寧獄者,吾屬得所訴矣。」富家大姓、黠吏惡少,惴惴焉不獨以得罪於令為憂,而又以污穢善政為恥。曆合州判官,事不經手,吏不敢決。雖下之,民不肯從。部使者趙抃惑於譖口,臨之甚威,敦頤處之超然。通判虔州,抃守虔,熟視其所為,乃大悟,執其手曰:「吾幾失君矣,今而後乃知周茂叔也。」
침군(郴郡) 계양(桂陽)의 현령으로 자리를 옮기자 치적이 더욱 현저해졌다. 침군의 군수 이초평(李初平)은 그가 현명하다고 생각해서 “나는 독서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며 물었다. 주돈이는 “공은 나이가 많아 시간이 급박하니 공을 위하여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이년 뒤에 과연 소득이 있었다. 자리를 옮겨서 남창의 지현이 되었는데, 남창의 사람들은 모두 “이는 분녕의 옥사를 능히 판결한 사람이니 우리들이 하소연할 곳을 얻었다.”고 말했다. 부자들과 지방의 유력자들과 교활한 관리들과 악행을 저지르는 젊은이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현령으로부터 죄를 얻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였을 뿐 아니라 선정을 더럽히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합주(合州)의 판관을 역임할 때, 일이 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관리들이 감히 처결하지 못하였고, 비록 명령을 내리더라도 백성들은 청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부사 조변(趙抃)이 참소하는 말에 현혹되어 [주돈이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위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돈이는 초연히 대처하였다. 건주(虔州) 통판을 맡았을 때에는 조변이 건주의 현령이 되어 면밀하게 그의 행실을 보고선 곧 크게 깨닫더니 그의 손을 잡으며 “나는 그대를 거의 잃어버렸지만. 지금 이후로 주무숙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熙寧初,知郴州。用抃及呂公著薦,為廣東轉運判官,提點刑獄,以洗冤澤物為己任。行部不憚勞苦,雖瘴癘險遠,亦緩視徐按。以疾求知南康軍,因家廬山蓮花峰下。前有溪,合于溢江,取營道所居濂溪以名之。抃再鎮蜀,將奏用之,未及而卒,年五十七。
희령(熙寧, 1068년~1077) 초년에 침주(郴州)의 지주가 되었다. 조변과 여공저(呂公著)로부터 천거를 받아 광동(廣東)의 전운판관(東轉運判官)이 되자 죄를 지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억울하게 죄를 지은 사람들의 누명을 벗겨주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부(部)를 순행하였지만 노고(勞苦)를 꺼려하지 않아서 비록 풍토병과 창병이 일고 길이 험하고 멀더라도 시찰하고 위무하였다. 나중에 주돈이는 병으로 지남강군(知南康軍)으로 자리를 옮기길 구하였고, 이로 인해 여산의 연화봉(蓮花峯) 아래에 집을 지었다. 앞에 시내가 있었는데 분강(湓江)으로 합하였고, 영도(營道)에 머물렀던 염계(溓溪)를 취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조변이 재차 촉(蜀)에 진수하였을 때 장차 [주돈이를] 등용하라 상주하려고 하였지만 그 일이 이루기도 전에 주돈이는 죽고 말았으니 당시의 나이가 57세였다.
黃庭堅稱其「人品甚高,胸懷灑落,如光風霽月。廉于取名而銳於求志,薄於徼福而厚於得民,菲於奉身而燕及煢嫠,陋於希世而尚友千古。」
황정견(黃庭堅)은 “인품이 매우 높고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은 시원하여 마치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명성을 취하는 것을 뒷전으로 하였으나 뜻을 구하는 것에는 왕성하였고, 복을 구함에는 박하였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두터웠으며, 몸을 받듦에는 둔하였지만 즐거워함이 과부와 홀아비를 보살피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고, 세상에 영합함을 누추하게 여겼지만 위로는 천고(千古)와 벗하였다.”고 그를 칭송하였다.
博學行力,著《太極圖》,明天理之根源,究萬物之終始。其說曰:
널리 배우고 힘써 실천하였는데, 《태극도》를 지어 천리의 근원을 밝히고 만물의 시작과 끝을 궁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無極而太極。太極動而生陽,動極而靜,靜而生陰,靜極複動,一動一靜,互為其根,分陰分陽,兩儀立焉。陽變陰合,而生水、火、木、金、土,五氣順布,四時行焉。五行一陰陽也,陰陽一太極也。太極本無極也。五行之生也,各一其性。無極之真,二五之精,妙合而凝,乾道成男,坤道成女。二氣交感,化生萬物,萬物生生,而變化無窮焉。惟人也得其秀而最靈,形既生矣,神發知矣,五性感動而善惡分,萬事出矣。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立人極焉。故聖人與天地合其德,日月合其明,四時合其序,鬼神合其吉凶。君子修之吉,小人悖之凶。故曰:「立天之道,曰陰與陽。立地之道,曰柔與剛。立人之道,曰仁與義。」又曰:「原始反終,故知死生之說。」大哉《易》也,斯其至矣。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서 양(陽)이 생기고 움직임이 극한에 달하여 고요해지는데 고요해지면 음(陰)이 생긴다. 그리고 고요함이 극한에 다다르면 다시 움직인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해져서 서로 각각의 근거가 되니,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가 세워진다. 음양이 변화하거나 결합해서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라는 오행이 생겨난다. 다섯 종류의 기(五氣)는 순서에 따라 펴져서 춘(春)·하(夏)·추(秋)·동(冬)이라는 사시(四時)가 운행된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의 생성에 각각 본성을 동일하게 갖고 있다. 무극의 신실함과 음양·오행의 순정함은 신묘하게 결합해서 응결된다. ‘건(乾)의 도리는 남자를 이루고, 곤(坤)의 도리는 여자를 이룬다.’고 하니 음양이라는 두 기가 교감하여 만물을 화생시킨다. 만물이 발생하는 과정을 반복하니 변화는 끝이 없다. 오직 사람만이 빼어난 것을 얻어서 가장 영명하다. 형체가 이미 생겨나면 정신이 지각을 발현시키니 [인(仁)·의(義)·예(禮)·지(知)·신(信)이라는] 다섯 가지 본성(五性)이 외물에 감응해 움직이다 선악(善惡)이 나뉘고 온갖 사태들이 출현한다. 성인은 중(中)·정(正)·인(仁)·의(義)로써 이를 안정시키되 정(靜)을 위주로 사람의 표준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이 합치되고, 일월과 그 밝음이 합치되고, 사시와 그 순서가 합치되며, 귀신과 그 길흉이 합치된다. 군자는 수양하니 길하며, 소인은 어긋나니 흉하다. 그러므로 ‘천도(天道)를 세우며 음(陰)과 양(陽)을 말하였고, 지도(地道)를 세우며 유(柔)와 강(剛)을 말하였고, 인도(人道)를 세우며 인(仁)과 의(義)를 말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시작을 궁구하고 끝으로 돌아가니 그러므로 죽음과 삶의 설을 알겠다.’고 한 것이다. 위대하다 역(易)이여! 이렇게도 지극하도다.”
又著《通書》四十篇,發明太極之蘊。序者謂「其言約而道大,文質而義精,得孔、孟之本源,大有功于學者也。」
또한 《통서》 40편을 저술하여 태극의 품은 뜻을 드러내서 밝혔다.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은 간략하지만 [담고 있는] 도는 크고, 형식과 내용이 갖추어져있고(文質) 의미가 정밀하여 공자와 맹자의 본원(本源)을 얻었으니 배우는 자들에게 큰 공이 있다.”
掾南安時,程珦通判軍事,視其氣貌非常人,與語,知其為學知道,因與為友,使二子顥、頤往受業焉。敦頤每令尋孔、顏樂處,所樂何事,二程之學源流乎此矣。故顥之言曰:「自再見周茂叔後,吟風弄月以歸,有'吾與點也'之意。」侯師聖學于程頤,未悟,訪敦頤,敦頤曰:「吾老矣,說不可不詳。」留對榻夜談,越三日乃還。頤驚異之,曰:「非從周茂叔來耶?」其善開發人類此。
안정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통판군사(通判軍事) 정향(程珦)이 풍모가 비상한 사람임을 보고는 그와 함께 이야기를 했더니 과연 그의 학문 됨됨이와 도(道)를 알고 있음을 알고는 그와 교유를 맺어 두 아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로 하여금 가서 수업하도록 하였다. 주돈이는 매번 공자와 안회가 즐거워하는 것, 즉 그들이 즐기던 바가 무슨 일이었는지를 살피도록 하였으니, 이정의 학문이 이로부터 연원하였다. 그래서 정호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주무숙을 본 후로부터 음풍농월(吟風弄月) 중에 ‘나는 증점과 함께하겠노라.’라고 말씀하신 공자의 뜻이 있게 되었다.” 후사성(侯師聖)이 정이로부터 학문을 하였지만 깨닫지 못하고 주돈이를 방문하였다. 주돈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늙어서 말을 상세하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그와 책상을 마주하며 밤새도록 머물며 담론하다 3일이 지나 되돌아갔더니 정이가 남달라진 것을 탄복하며 이렇게 말했다. “주무숙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그는 사람들을 이렇게 잘 개발시켜주었다.
嘉定十三年,賜諡曰元公,淳祐元年,封汝南伯,從祀孔子廟庭。
가정(嘉定) 13년(1220년)에 시호를 하사하여 ‘원공(元公)’이라 하였고, 순우(淳祐) 원년(1241년)에 여남백(汝南伯)에 봉하고 공자의 묘정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二子壽、燾,燾官至寶文閣待制。
두 아들은 주수(周壽)와 주도(周燾)이다. 주도는 관직이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에 이르렀다.
주정수수설(周程授受說)
발단
주자의 북송오자 선양 및 이를 계승한 『송사』 「도학전」.
쓰치다 겐지로(土田健次郎)의 『북송도학사』(성현창 역, 예문서원, 2006) 제2장 제2절 "주정수수설 재고"(164~199쪽) 파트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정의 태도
이정이 어렸을 때 주돈이에게 배운 것은 분명하지만, 사제관계가 성립한다고 해서 이정보다 앞선 도학의 종주로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이정집』에서의 주돈이에 대한 평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昔受學於周茂叔, 每令尋顏子・仲尼樂處, 所樂何事. (전에 주무숙에게 배울 때, 주무숙은 매번 안자와 공자께서 즐기신 경지와 즐기신 바가 어떤 일인지 찾아보게 하였다.)
- 詩可以興. 某自再見茂叔後, 吟風弄月以歸, 有吾與點也之意. (시는 사람을 흥기시킬 수 있다. 내가 주무숙을 두 번 본 뒤에 음풍농월하며 돌아가면서 공자께서 '나는 증점을 허여하노라'라고 말씀하셨던 뜻을 갖게 되었다.)
- 周茂叔窗前草不除去. 問之, 云: "與自家意思一般." (주무숙은 창 앞의 풀을 뽑지 못하게 하였다.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내 마음과 똑같기 때문이네.")
- 周茂叔窮禪客. (주무숙은 허접한(?) 선객이었다.) [혹은 '주무숙은 선객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 獵, 自謂今無此好. 周茂叔曰: "何言之易也? 但此心潛隱未發. 一日萌動, 復如前矣." 後十二年, 因見, 果知未. (내가 전에 사냥에 대해서 '요즘엔 이런 취미가 없습니다.'하고 스스로 말했는데, 주무숙이 말하길: "어찌 말을 쉽게 하는가? 그저 이 마음이 가라앉아 숨어 드러나지 않을 뿐이네. 어느 날 이 마음이 싹터 움직이게 되면 다시 전과 같아질걸세."라고 하였다. 12년 뒤에 이 말에 입각해 살펴보니, 과연 내 말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 先生爲學, 自十五六時, 聞汝南周茂叔論道, 遂厭科舉之業, 慨然有求道之志. 未知其要, 泛濫於諸家, 出入於老釋者幾十年, 返求諸六經而後得之. (선생의 학문의 경우, 15-6세에 여남의 주무숙이 도를 논한다는 소문을 듣고 마침내 과거 공부에 염증내고 개연히 도를 추구하려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핵심을 알지 못해 제자백가를 떠돌고 도불에 출입하기를 십여 년간 하시고서, 돌아와 육경에서 도를 구한 이후에야 터득하셨다.)
- 異時, 伊川同朱公掞訪先君. 先君留之飮酒, 因以論道. 伊川指面前食卓曰: "此卓安在地上? 不知天地安在甚處?" 先君爲之極論天地萬物之理、以及六合之外. 伊川歎曰: "平生唯見周茂叔論至此. 然不及先生之有條理也." (어느날 이천 선생께서 주공섬과 함께 先君을 방문하셨다. 先君께서 함께 자리하시고 술을 드셨는데, 인하여 도에 대해 논하였다. 이천 선생께서 앞의 식탁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이 식탁은 어떻게 땅 위에 서있는 것인가? 잘 모르겠지만, 천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것인가?" 先君께서 답하기 위해 천지만물의 이치와 六合 바깥에 대해 지극히 논하셨다. 이천 선생께서 찬탄하시며 말씀하셨다: "평생 오직 주무숙의 논의만이 이정도의 수준에 이른 것을 보았네. 그러나 주무숙의 논의는 그대의 설에 조리가 있는 것만 못했네.")
제기된 의문
역사적으로 주정수수를 의심한 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1. 남송 왕응신(汪應辰) 『文定集』 권15 「與朱元晦」 9, 10.
- 伊川于濓溪, 若止云少年嘗從學, 則無害矣. (이천 선생이 염계 선생에 대해 그저 '소년기에 일찍이 따라 배웠다'고만 말했다면 문제는 없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 濓溪先生髙明純正. 然謂二程受學, 恐未能盡. 范文正公一見横渠竒之, 授以『中庸』, 謂横渠學文正, 則不可也. (염계 선생께서는 髙明하고 純正하셨지만, 만약 '이정이 염계 선생께 수학했다'고 한다면 아마 실정을 온전히 표현한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범문정공[범중엄]이 횡거 선생을 한 번 보고 기특하게 여겨 『중용』을 주긴 했지만, '횡거 선생이 범문정공에게 배웠다'고 하면 안 됩니다.)
- 2. 남송 육구연(陸九淵) 『象山集』 권12 「與朱元晦」 1.
- 梭山兄謂: "『太極圖説』與『通書』不類, 疑非周子所為. 不然則或是其學未成時所作; 不然則或傳他人之文, 後人不辨也. 葢『通書』「理性命」章言: "中焉止矣", "二氣五行, 化生萬物, 五殊二實, 二本則一." 曰一曰中, 即太極也, 未甞於其上加無極字; 「動静」章言: "五行隂陽, 隂陽太極", 亦無無極之文. 假令『太極圖説』是其所傳, 或其少時所作, 則作『通書』時不言無極, 葢已知其説之非矣." 此言殆未可忽也. (梭山형[육구소]이 말씀하시길: "『태극도설』 과 『통서』가 비슷하지 않으니, 아마 周子가 지은 게 아닌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혹 그의 학문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을 때 지은 것이거나, 아니면 혹 다른 사람의 글을 옮긴 건데 후인이 변별하지 못한 것일 것이다. 대개 『통서』의 「리성명」장에서 '中焉止矣', '二氣五行, 化生萬物, 五殊二實, 二本則一.'라고 하는데, 一·中이라고 한 것은 곧 태극이니 그 위에 '무극'을 덧붙인 적이 없고, 「動静」장에서는 '五行隂陽, 隂陽太極'이라고 하는데 역시 '무극'이라는 말이 없다. 가령 『태극도설』이 남의 말을 옮긴 것이거나 혹 그가 어렸을 때 지은 것이라면, 『通書』를 쓸 때 '무극'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태극도설』이 틀렸음을 이미 알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결코 소홀히해서는 안 됩니다.)
- 無極二字, 出於『老子』 「知此雄」章, 吾聖人之書所無有也. 『老子』首章言: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而卒同之, 此老氏之宗㫖也, "無極而太極"即是此㫖. 老氏學之不正, 見理不明, 所蔽在此. 兄於此學用力之深, 為日之乆, 曽此之不能辨, 何也? 『通書』"中焉止矣"之言, 與此之昭然不類, 而兄曾不之察, 何也? 『太極圖説』以無極二字冠首, 而『通書』終篇未甞一及無極字. 二程言論文字至多, 亦未甞一及無極字. 假令其初實有是圖, 觀其後來未甞一及無極字, 可見其道之進而不自以為是也. ('무극' 두 글자는 『노자』 「知其雄」 장에서 나오지 우리 유가 성인의 책에 있는 말이 아닙니다. 『노자』 수장에서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라 하고 끝내 같게 여기는데, 이것이 노자의 종지이고 "무극이태극"이 곧 이 뜻입니다. 노자는 배운 것이 바르지 않고 이치를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으니, 그의 병폐가 여기에 있는데, 존형께서는 이 학문에 대해 깊이 힘쓰시고 오래 시간을 보내셨으면서 일찍이 이를 변별해내지 못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통서』 「리성명」장의 "中焉止矣"라는 말은 이것이 분명한 것과 같지 않은데, 존형께서 일찍이 이를 살피지 못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태극도설』은 '무극' 두 글자를 첫머리에 두고 있지만 『통서』는 마지막 편까지 한 번도 '무극'을 언급하지 않고, 이정이 논의한 글이 지극히 많은데도 '무극'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주돈이가 처음에 실제로 『태극도설』을 썼다 하더라도, 그가 나중에 한 번도 '무극'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학문이 발전하여 스스로 이를 옳게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3. 남송 장식(張栻) 『朱子全書』 권13 「太極圖說解」 《後記》
- 某既爲此說, 嘗錄以寄廣漢張敬夫. 敬夫以書來曰: “二先生所與門人講論問答之言, 見於書者詳矣. 其於《西銘》, 蓋屢言之; 至此圖則未嘗一言及也. 謂其必有微意, 是則固然. 然所謂微意者, 果何謂耶?” (내[주희]가 이 해설을 쓰고서 일찍이 이를 적어 광한 장경부에게 보냈는데, 경부가 편지를 보내왔다: “[명도·이천] 두 선생께서 문인들과 강론하고 문답을 주고받으신 말씀들은 책에 보이는 것이 상세합니다. 두 선생께서 《서명》에 대해서는 누차 말씀하셨는데, 이 《태극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는] ‘거기에 필시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그렇겠지만, 이른바 ‘숨겨진 의도’라는 게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 4. 청 주이존(朱彝尊) 『曝書亭集』 권58 「太極圖授受考」
- 自漢以來, 諸儒言『易』, 莫有及《太極圖》者. 惟道家者流有上方大洞真元妙經, 著太極三五之說. (한나라 이후로 여러 유자가 『주역』에 대해 말했는데 《태극도》를 언급한 경우는 없다. 오직 도가에 『上方大洞真元妙經』이 太極·三五의 설을 말한 것이 전해 온다.)
- 山陽度正作元公年表, 書: “慶厯六年, 知䖍州興國縣程公珦假倅南安, 因與先生為友, 令二子師之. 時明道年十五, 伊川年十四爾. 其後先生作《太極圖》, 獨手授之, 他莫得而聞焉". 攷是年, 元公以轉運使王逵薦移知郴縣, 自是而後二程子未聞與元公覿面. 然則從何地手授乎? (산양 도정이 원공[주돈이]의 연표를 지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력6년 知䖍州興國縣 정향이 남안 부지사도 겸임하고 있었는데, 인하여 선생과 벗이 되어 두 아들로 하여금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당시 명도 선생은 15살이었고 이천 선생은 14살이었다. 그 후에 선생이 《太極圖》를 지어 유독 직접 전해주셨는데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해를 헤아려보면, 원공은 전운사 왕규의 추천으로 침현으로 이직하셨으니, 이 이후에는 이정 선생이 원공을 면대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직접 전수하했겠는가?)
- 伊川撰《明道行状》云: “先生為學自十五六時, 聞汝南周茂叔論道, 遂厭科舉之業, 慨然有求道之志. 未知其要, 泛濫于諸家, 出入于老釋者幾十年. 反求諸六經而後得之.” 繹其文, 若似乎未受業于元公者. 不然, 何以求道未知其要, 復出入于老釋也邪? (이천 선생이 《명도행장》을 지어 말씀하셨다: "선생의 학문의 경우, 15살 때 여남 주무숙이 도를 논함을 듣고 마침내 과거 공부에 염증내고 개연히 도를 추구할 뜻을 갖게 되셨다. 그러나 그 핵심을 알지 못하여 제자백가를 떠돌고 도불에 출입하기를 거의 십여 년 하시고서, 돌아와 육경에서 도를 찾은 이후에야 터득하셨다." 이 글을 풀어보면, 원공에게 학업을 전수받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도를 추구함에 그 핵심을 알지 못해 다시 도불에 출입하셨겠는가?)
- 潘興嗣志元公墓亦不及二程子從游事. (반흥사가 원공의 묘에 쓴 묘지명에도 이정 선생이 종유한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 明道之卒, 其弟子朋友, 若范淳夫、朱公掞、邢和叔、游定夫, 叙其行事, 皆不言其以元公為師. 惟劉斯立為: “從周茂叔問學, 斯猶孔子問禮于老子, 問樂于萇弘, 問官于郯子云然.” 盖與受業有間矣. (명도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그의 제자와 벗, 예를 들면 범순부·주공섬·형화숙·유정부가 명도 선생의 행적을 서술할 때 모두 원공이 스승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직 유사립만이 "명도 선생께서 주무숙을 종유하여 학문을 물으신 것은 공자께서 노자에게 예를 물으시고, 장홍에게 음악을 물으시며, 담자에게 관제를 물은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대개 학업을 전수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 呂與叔『東見錄』, 則有昔受學于周茂叔之語. 然弟子稱師, 無直呼其字者, 而『遺書』凡司馬君實、張子厚、邵堯夫, 皆目之曰先生, 惟元公直呼其字. 至以窮禪客目元公, 尤非弟子義所當出. (여여숙의 『동견록』에 '전에 주무숙에게 수학했다'라는 말이 있긴 하다. 그런데 제자가 스승을 일컬을 때 직접 그의 자를 부르지 않는데, 『유서』에서 사마광· 장재· 소옹에 대해서는 모두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오직 원공만은 그의 자를 직접 부른다. '허접한 선객'으로 원공을 지목한 것은 더욱 제자가 의리상 꺼낼 말이 아니다.)
- 且元公初名惇實, 後避英宗藩邸嫌名, 改惇頤. 夫既以學傳伊川矣, 不應下同其名, 而伊川亦不引避. 昔朱子表程正思墓稱: "其名下字同周程, 亟請其父而更焉." 孰謂二程子而智反出正思下哉? 此皆事之可疑者也. (또 원공의 첫 이름은 '돈실'이었는데 나중에 영종이 藩邸 생활할 때의 비슷한 이름[宗實]을 피휘하여 '돈이'로 고쳤다. 이미 이천 선생에게 학문을 전수했을 때에는 스승의 이름과 같게 하면 안 될 텐데, 이천은 그래도 피휘하지 않았다. 전에 주자가 정정사의 묘에 표창하며 "[정정사는] 그의 이름의 끝 글자가 周程과 같아 자주 부친에게 고쳐줄 것을 청하였다."고 하였다. 누가 '이정 선생의 앎이 정정사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 이것들이 모두 의심할 만한 일들이다.)
그 외 명나라의 풍방(豊坊)이나 청나라의 전조망(全祖望), 대진(戴震)은 역시 주정수수설을 부정하였다. 주정수수설을 부정하거나 『태극도설』과 『통서』을 별개의 텍스트로 간주하는 주장은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 왜냐하면 주정수수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대체로 『태극도설』과 『통서』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주희의 옹호
주희는 “선생의 학문은 그 오묘함이 『태극도설』 한 권에 구비되어 있으며, 통서는 모두 이 태극도설에 온축되어 있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통서』의 서문에서는 “유독 하남의 정부자(程夫子)께서 일찍이 수학해서 공자와 맹자이래로 전해지지 않던 정통을 얻었으니 이로써 그 연원을 대략 알 수 있다.”고 하여 태극도설과 통서가 모두 주돈이의 저작이라고 간주하였으며, 주돈이와 이정의 사승관계를 인정하였다.
현대 학자 견해
등광명(邓广铭)이 「關於周敦頤的師承和傳授」라는 논문에서 “이정은 결코 理學을 주돈이로부터 배우지 않았다. 특히 그의 『태극도설』과 『통서』를 이정은 모두 접촉한 적도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반하여 주정수수의 가능성을 다른 방식으로 찾아보려는 학자도 있다. 예를 들어 정종모는 「정명도의 주역해석과 그 경학사적 의의」에서 “그(정명도)의 경학의 출발점은 『통서』에 드러난 주렴계의 관점과 유사하며,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주정수수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