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넙성동(芿城洞)"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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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구유관(具有寬)의 고손이다. 병자년 난리에 순절한 일은 충렬사주(註)에 보인다.<br /> | 낸 구유관(具有寬)의 고손이다. 병자년 난리에 순절한 일은 충렬사주(註)에 보인다.<br /> | ||
2019년 4월 24일 (수) 07:07 판
具門世築芿城中 (구문세축넙성중) 구씨 가문 넙성리에 대를 이어 사는데,
現使今人想古風 (현사금인상고풍) 오늘날 우리에게 옛 풍모를 생각게 하네.
楣上紅旌兵判字 (미상홍정병판자) 문 이마의 정려 글씨 병조판서 쓰였으니,
海天星日貫貞忠 (해천성일관정충) 바다 하늘 해와 별에 충정으로 통했네.
○ 능성 구씨인 구원일(具元一)은 강암공(江菴公)의 7대손이다. 병조참의를 지낸 구신충(具信忠)의 6세손이다. 호조의 낭관을 지
낸 구유관(具有寬)의 고손이다. 병자년 난리에 순절한 일은 충렬사주(註)에 보인다.
○ 그 자손들은 문학을 세습하여 이곳에 많이 살고 있다.
인물
- 구원일[1](1582∼1637)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여선(汝先). 병자호란 때 강화좌부천총(江華左部千摠)으로서 휘하 수십명을 거느리고 갑곶나루로 나아갔으나,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싸울 뜻이 없음을 보고 항의하다 바다에 빠져 자결하였다.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으며,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 구신충(생몰년 미상) 1444년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15위로 합격하였다.
- 구유관(具有寬)
- 강화유수 장신(張紳) [2][3]
참고
- 현 불은면 넙성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