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방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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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개관'''==
윤설아, "[오래된 것들의 귀환(1) 옛 공장들의 화려한 변신] 카페로 부활한 조양방직 '강화읍에 숨을 불어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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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1933년도 강화 지주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직물공장이었으나 폐업된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2018년 보수공사 끝에 카페,전시실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공장 건물의 골조를 그대로 살리고 기계들을 비롯한 1970년대 일상 소품부터 수입 장식품들을 곳곳에 배치해서 거대한 설치 미술품처럼 만들어 운영되고 있다. 여러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점차 입소문을 타고 현재는 강화도 최고의 관광명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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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외관은 1958년 폐업된 당시의 원형 그대로를 두고 내부를 카페, 전시실, 작업공간으로 리모델링하였다. 보일러실은 주문을 하고 음료를 제조하는 공간으로, 가장 큰 건물인 공장 내부는 양측 대칭을 이룬 콘크리트 구조물이 그대로 놓여있다. 이곳에는 기계를 들어낸 곳에 길을 만들고 양쪽으로 의자를 배치해 카페를 찾는 손님들을 위한 테이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조 직물을 생산하던 방직기계 지지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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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90214010004008 윤설아, "[오래된 것들의 귀환(1) 옛 공장들의 화려한 변신] 카페로 부활한 조양방직 '강화읍에 </ref>
  
조양방직 카페 건물 외관은 1958년 폐업된 당시의 원형 그대로를 두고, 일부 내부는 카페, 전시실, 작업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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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직물산업'''==
카페로 들어가기전 보이는 . 창고는 직물들과 각종 집기들을 보관했던 곳으로 녹슨 철제 별틀과 합판이 벗겨진 시멘트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보일러실은 주문을 하고 음료를 제조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했으며, 가장 큰 건물인 공장 내부에는 양측 대칭을 이룬 콘크리트 구조물이 그대로 놓여있으며 카페를 찾는 손님들을 위한 테이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조 직물을 생산하던 방직기계 지지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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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는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생산지였다. 당시 섬유산업의 메카였던 대구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한때 30여 개의 직물공장이 몰려있었고, 이들 수천 명의 공장 노동자가 거주하여 강화 지역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 직물 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는 소창 공장 10여 곳만이 대부분 가내 수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모형을 통해서는 군산의 근대건축물을, 다양한 시청각자료를 통해서는 일제 강점기 군산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점장실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인 경술국치를 기억하기 위한 전시공간이며, 금고실은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화폐 등 유물을 통해 당시 조선은행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응접실에서는 군산 근대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야외전시장에서는 일제강점기 방공호와의 주인공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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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건물: "심도직물 굴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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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직물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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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생산지였다. 당시 섬유산업의 메카였던 대구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한때 30여 개의 직물공장이 몰려있었고, 이들 수천 명의 공장 노동자가 거주하여 강화 지역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다.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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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 직물 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는 소창 공장 10여 곳만이 대부분 가내 수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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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건물: "심도직물 굴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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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도직물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운영됐던 국내 굴지의 섬유회사이다. 1960-1970년대에는 직원이 약 1천 200여 명 정도로 번성했으며 현재는 공장터에 굴뚝의 일부가 남아있다. 근처 철종의 고향인 용흥궁 공원이 조성되자 심도직물을 기억하는 강화읍 주민들이 이를 기념하는 표지서고가 함께 2008년에 기념해 세워둔 것이다.
 
   심도직물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운영됐던 국내 굴지의 섬유회사이다. 1960-1970년대에는 직원이 약 1천 200여 명 정도로 번성했으며 현재는 공장터에 굴뚝의 일부가 남아있다. 근처 철종의 고향인 용흥궁 공원이 조성되자 심도직물을 기억하는 강화읍 주민들이 이를 기념하는 표지서고가 함께 2008년에 기념해 세워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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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방직 카페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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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방직 카페의 창업 배경'''==  
대표 이용철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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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대표는 서울 '상신상회' 빈티지샵 운영하던 곳으로 지인의 소개로 폐공장을 방문하고 이후 개조하겠다고 결심한 뒤 1년여간 조양방직 폐공장 공간은 1년여간 임대하여 보수공간  2017년 7월 2일부터 공사를 시작되었다. 쓰레기 치우는 것만 몇 달 걸렸다고.(강화뉴스). 이용철 대표는 지나치게 상업적인 공간이 되지 않도록 " 세상에 쓸모없는 물건은 없다는 믿음"으로 지나치게 상업적인 공간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기 대문에 조양방직 공간은 거대한 설치 미술작품으로 때 현재 이곳을 '신문리 미술관'이라 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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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 대표 인터뷰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86291&cid=40942&categoryId=33083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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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박물관이 물건에 대한 시선을 달리해보는 체험학습장이 되면 좋겠어요. 트랙터나 경운기로 테이블을 만든 것도 그런 의도가 있거든요. [..] 하찮다고 낙인찍은 사물의 품격이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특히 어린이들이 느낄 수 있으면 해요." <ref> 김세라,"조양방직은 세월이 다듬은 최고의 예술작품입니다.", 『강화뉴스』, 2018년 7월 24일.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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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위치적으로 내항에 인접해 식민지 금융기구의 역할을 수행한 역사적 의미가 있을 뿐만아니라, 그 규모의 건축물의 건축사적 가치에 있어서도 군산을 대표할만한 중요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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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보수 · 복원을 거쳐 현재 군산 근대건축관으로 활용하고 있다.<ref>http://www.gunsan.go.kr/oldtour/board/view.gunsan?boardId=BBS_0000274&menuCd=DOM_000000702008004000&startPage=1&dataSid=254062&contentsSid=4194&cpath=%2Foldtour 군산시 문화관광</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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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연혁'''==
 
=='''주요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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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처'''==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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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references/>
  
 
=='''기여'''==
 
=='''기여'''==

2019년 4월 10일 (수) 01:1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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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본래 1933년도 강화 지주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직물공장이었으나 폐업된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2018년 보수공사 끝에 카페,전시실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공장 건물의 골조를 그대로 살리고 기계들을 비롯한 1970년대 일상 소품부터 수입 장식품들을 곳곳에 배치해서 거대한 설치 미술품처럼 만들어 운영되고 있다. 여러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점차 입소문을 타고 현재는 강화도 최고의 관광명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건물 외관은 1958년 폐업된 당시의 원형 그대로를 두고 내부를 카페, 전시실, 작업공간으로 리모델링하였다. 보일러실은 주문을 하고 음료를 제조하는 공간으로, 가장 큰 건물인 공장 내부는 양측 대칭을 이룬 콘크리트 구조물이 그대로 놓여있다. 이곳에는 기계를 들어낸 곳에 길을 만들고 양쪽으로 의자를 배치해 카페를 찾는 손님들을 위한 테이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조 직물을 생산하던 방직기계 지지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

강화의 직물산업

강화도는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생산지였다. 당시 섬유산업의 메카였던 대구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한때 30여 개의 직물공장이 몰려있었고, 이들 수천 명의 공장 노동자가 거주하여 강화 지역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 직물 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는 소창 공장 10여 곳만이 대부분 가내 수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관련 건물: "심도직물 굴뚝"

 심도직물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운영됐던 국내 굴지의 섬유회사이다. 1960-1970년대에는 직원이 약 1천 200여 명 정도로 번성했으며 현재는 공장터에 굴뚝의 일부가 남아있다. 근처 철종의 고향인 용흥궁 공원이 조성되자 심도직물을 기억하는 강화읍 주민들이 이를 기념하는 표지서고가 함께 2008년에 기념해 세워둔 것이다.

사진

조양방직 카페의 창업 배경

이용철대표는 서울 '상신상회' 빈티지샵 운영하던 곳으로 지인의 소개로 폐공장을 방문하고 이후 개조하겠다고 결심한 뒤 1년여간 조양방직 폐공장 공간은 1년여간 임대하여 보수공간  2017년 7월 2일부터 공사를 시작되었다. 쓰레기 치우는 것만 몇 달 걸렸다고.(강화뉴스). 이용철 대표는 지나치게 상업적인 공간이 되지 않도록 " 세상에 쓸모없는 물건은 없다는 믿음"으로 지나치게 상업적인 공간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기 대문에 조양방직 공간은 거대한 설치 미술작품으로 때 현재 이곳을 '신문리 미술관'이라 명명
  • 이용철 대표 인터뷰

"우리 박물관이 물건에 대한 시선을 달리해보는 체험학습장이 되면 좋겠어요. 트랙터나 경운기로 테이블을 만든 것도 그런 의도가 있거든요. [..] 하찮다고 낙인찍은 사물의 품격이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특히 어린이들이 느낄 수 있으면 해요." [4]

주요 연혁

   · 1933년 : 조양방직 주식회사 설립
      1934년 : 강화도에 첫 전기 개통
   · 1942년 : 일본기업 미쓰이(三井:삼정물산) 출신 이세현이 인수
   · 1958년 : 조양방직 폐업
   · 2017년 : 현 대표 이용철이 인수, 7월 2일 공사 시작
   · 2018년 :「신문리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7월 24일 개관 
   · [5]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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