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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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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중앙교회는 주선일, 박성일 등이 강화읍 천교하의 여섯 칸 반짜리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존스 선교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현 위치로 옮겨 강화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됐다. 누에머리를 닮은 잠두 언덕배기에 위치해 설립 초기에는 잠두교회라고도 불렀다. <ref>출처: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FjFX&articleno=6823318&categoryId=251091&regdt=20090308181333 강화도 감리교]</ref><br/>
 
강화중앙교회는 주선일, 박성일 등이 강화읍 천교하의 여섯 칸 반짜리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존스 선교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현 위치로 옮겨 강화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됐다. 누에머리를 닮은 잠두 언덕배기에 위치해 설립 초기에는 잠두교회라고도 불렀다. <ref>출처: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FjFX&articleno=6823318&categoryId=251091&regdt=20090308181333 강화도 감리교]</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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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완공한 현대식 성전이 하늘 높이 솟아 위용을 뽐낸다. 교회 본당 입구에 위치한 교회 역사관에서 초가로 지은 초기 예배당의 모습과 100년 이상을 지내온 교회의 역사 유산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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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중앙교회는 1세기동안 강화지역 복음화의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의 교회를 개척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줬다. 더불어 강화중앙교회는 민족과 어우러지며 발전한 지역의 구심점 역할마저 해냈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민족주의자 이동휘가 권사로 헌신했고 일제에 대항하여 신앙을 지키다 더리미해안에서 순국한 김동수 권사와 형제들이 이 교회 출신들이다. <ref>출처: [http://www.kidok.com 기독신문]<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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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9일 (화) 21:4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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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와 종교

강화도는 예로부터 유난히 종교의식이 강한 곳이다. 단군신앙부터 불교, 유교,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까지 수많은 종교들의 뿌리가 깊다. 현존하는 고인돌, 천 년된 정수사, 천주교 순교지 갑곶순교성지, 백년 된 교산교회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주요이동수단이 배였던 시절 강화도를 통해 많은 문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던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가장 먼저 당한 아픔의 땅이기도 하다. 당시 강화도는 수도(한양)와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인천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선교사가 지정학적 특성을 살리기 위하여 강화지역 전도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강화지역에 전해진 복음이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신미박해, 신유박해, 병인박해 등 수많은 장애가 있었지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현재 강화도에는 교회가 179개나 있고, 인구의 25%이상이 기독교인이다.

강화중앙교회

강화중앙교회는 주선일, 박성일 등이 강화읍 천교하의 여섯 칸 반짜리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존스 선교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현 위치로 옮겨 강화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됐다. 누에머리를 닮은 잠두 언덕배기에 위치해 설립 초기에는 잠두교회라고도 불렀다. [1]

2000년에 완공한 현대식 성전이 하늘 높이 솟아 위용을 뽐낸다. 교회 본당 입구에 위치한 교회 역사관에서 초가로 지은 초기 예배당의 모습과 100년 이상을 지내온 교회의 역사 유산을 엿볼 수 있다.

강화중앙교회는 1세기동안 강화지역 복음화의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의 교회를 개척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줬다. 더불어 강화중앙교회는 민족과 어우러지며 발전한 지역의 구심점 역할마저 해냈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민족주의자 이동휘가 권사로 헌신했고 일제에 대항하여 신앙을 지키다 더리미해안에서 순국한 김동수 권사와 형제들이 이 교회 출신들이다. 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감리교

강화도 지역의 기독교는 감리교에 의해 시작되었다. 179개 교회 중에 120개가 감리교회다. 강화지역 기독교인 중에 감리교 소속이 77.6%나 된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회 선교를 개척한 미감리회 소속 선교사였다. 1893년 존스 선교사가 인천 책임자로 와서 독립계삭회가 구성되면서 선교확장의 열망이 강화지역으로 이어졌다. 당시 강화지역에 대한 감리교의 선교는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존스 목사와 인천의 노병일, 김기범, 이명숙, 백헬렌 등 한국인 전도자들이 강화선교에 열성을 쏟았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수도로 가는 관문이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해주 방면, 남으로는 덕적도를 경유해 충청도 당진까지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강화의 복음화는 황해도 전도를 위한 전진기지 확보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리하고 있던 스크랜턴은 1892년 12월 21일에 본국으로 보낸 편지에서 존스가 이미 1892년 말에 강화전도여행을 시도한 것과 더불어 강화지역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제물포와) 이웃해 있는 섬인 강화에는 7만 명 주민이 있는데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얻게만 된다면 우리에겐 값진 보화가 될 것입니다. 사실 발판은 이미 얻어 놓았습니다.”

강화의 최초의 교회는 1893년 세워진 교항교회(현 강화교산교회)다. 양사면 시루미 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이승환이 존스 목사를 만나면서 복음이 들어오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존스는 이승환의 모친에게 선상에서 세례를 주고 인천에서 활동하던 전도인 이명숙과 전도부인 백헬렌을 시루미로 파송해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화지역의 첫 신앙공동체가 탄생했다. 4~5명으로 시작한 예배는 불과 1년 만에 80명으로 부흥했다. 천민출신이 많은 시루미 마을에서 좀 떨어진 다리목에 살던 양반 김상임이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마을 전체가 개종했다. 김상임이 1894년 자기 집 앞마당에 예배당을 마련하자 시루미 마을교인들이 옮겨왔고 다리목(교항, 橋項)과 시루미(증산, 甑山)의 한자를 따서 교산교회라 이름 지었다.

홍의교회는 교산교회 설립 3년 후인 1896년에 설립되었다. 이 마을 서당훈장이던 박능일이 교산교회의 김상임을 만나고 돌아와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서당학생 20여 명,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자기 집에서 홍의교회를 설립했다. 강화의 두 번째 교회가 탄생했다. 1900년에는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 박성일, 허진일, 김봉일 등 몇몇 교인이 강화읍 천교하(현 강화읍 신문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오늘날 강화중앙교회의 모체(잠두교회)가 되었다. 강화지역 복음 전파 8년 만인 1900년에 수도 강화읍에 드디어 교회가 세워졌다. 1892년 존스 목사가 입성하려다 실패했던 강화읍에 토착교인에 의하여 십자가가 세워졌고, 강화도 전 지역 복음화의 터전을 굳건히 다졌다. 강화복음화의 중심역할을 했으며 한국교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사진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출처

  1. 출처: 강화도 감리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