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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사적 제1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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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  1965년 4월 1일
 
|지정일 =  1965년 4월 1일
|지정명칭 = 고창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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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명칭 = 고창읍성 (高敞邑城)
 
|한자명칭 = 高敞邑城
 
|한자명칭 = 高敞邑城
 
|영문명칭 =
 
|영문명칭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지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지
|건립·제작 = 불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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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제작 = 조선시대
 
|주소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126번지
 
|주소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12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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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개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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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창 고을의 읍성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단종 원년(1453)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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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복구하였다. 성 둘레는 1,684m이며, 동·서·북문과 옹성이 3개소, 장대지 6개소와 해자들로 된 전략적 요충시설이 갖춰져 있다. 성 안에는 동헌·객사를 비롯하여 22동의 관아건물들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손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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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파인 누문(樓門)을 가지고 있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어 성곽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여성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한 해의 재앙과 질병을 쫓고 복을 비는 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가 된다.<ref>출처 : 문화재청 '고창읍성'</ref>
 
=='''사진 및 도면'''==
 
=='''사진 및 도면'''==
  

2018년 3월 29일 (목) 23:39 판

개관

옛 고창 고을의 읍성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단종 원년(1453)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복구하였다. 성 둘레는 1,684m이며, 동·서·북문과 옹성이 3개소, 장대지 6개소와 해자들로 된 전략적 요충시설이 갖춰져 있다. 성 안에는 동헌·객사를 비롯하여 22동의 관아건물들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손실되었다.

이 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파인 누문(樓門)을 가지고 있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어 성곽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여성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한 해의 재앙과 질병을 쫓고 복을 비는 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가 된다.[1]

사진 및 도면

사진

도면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 안승수·이남석, 『공산성 백제추정왕궁지 발굴보고서』 (공주 : 공주대학교 박물관, 1987)

출처

  1. 출처 : 문화재청 '고창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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