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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활동'''==
 
=='''음악활동'''==
그의 아들 김용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생각할 때, 늘 가장 먼저 떠로르는 것은 언제나 일에 열중히 계시던 모습이다'(이왕직, 79)라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먹고 잘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열중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에 기여하였다. 여러가지 업적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창작국악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은 국악창작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이능화의 한시에 김기수가 곡을 붙인 곡으로 1939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이왕직에서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1900년 행사에 사용할 창작곡을 공모(이수정, 236)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기수의 다른 작품인 <세우영> 혹은 <고향소>를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이수정, 235) 그리고 그가 작곡한 <정백혼>이라는 작품은 국악관현악곡으로 이 곡을 통해서 국악관현악에 지휘봉이 처음 도입되었고,(김우진, 62)현재까지도 국악관현악에 지휘를 한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한 곡수는 약 510곡(서한범, 69)정도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악보편찬이다. 당시 연주되던 정악, 민속악을 오선보 혹은 정간보로 채보하였다. 그가 편찬한 국악교재들은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으로 국악사양성소의 정규교재로 사용되었다.(김우진,56) 그가 작업한 악보에는 시김해 부호 통일 등 실제음악에 더 가까워졌는데, 이전에 구전심수로 배웠던 국악교육이 악보를 통한 국악교육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교육현장에서 단소연주가 필수로 음악교과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소가 교육현장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합성수지재를 이용한 교육용 단소 등을 제작하여 규격과 음악을 통일하였고, 저렴한 생산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립국악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친일파 동상 논란에 휩싸였다. 그가 미쓰야마 테쓰조(光山哲三)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일본 천황 탄신을 기념하는 곡인 <황화만년지곡>을 지었다는 이유때문인데, 결국 국립국악원에서는 김기수의 친일행적을 동상에 기록하는 것으로 논란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72958&section=sc2을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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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ref>[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ref>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ref>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50쪽</ref>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font color='green'><b>국악보급</b></fon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ref>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ref> [[이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ref>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ref>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ref>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ref>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ref>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 64쪽</ref>라는 말을 듣고, 항상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아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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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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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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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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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주요경력'''==

2017년 6월 26일 (월) 20:05 판

성경린

개요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

기본 정보

  • 이름 = 성경린(成慶麟)
  • 아호 = 관제
  • 전공 = 거문고
  • 출생지 = 서울시
  • 출생-사망 = 1911-2008

음악활동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1]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2]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악보급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3] 이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4]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5]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6]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아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는 것이다.

주요경력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

주요작품 및 저서

  • 저서 1947년 《조선의 아악》
  • 저서 1947년 《조선음악독본》
  • 저서 1949년 《수상집 雅樂》
  • 저서 1949년 《조선의 민요》
  • 저서 1952년 《국악개론》
  • 저서 1952년 《국악개설》
  • 저서 1976년 《한국의 무용》
  • 저서 1976년 《한국음악논고》
  • 저서 1976년 《국악감상》
  • 저서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
  • 저서 1979년 《韓國傳統舞踊》
  • 저서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
  • 저서 2000년 《국악학논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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