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추암과 해암정"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해암정(海岩亭))
89번째 줄: 89번째 줄:
 
=='''참고문헌'''==
 
=='''참고문헌'''==
 
임봉훈, 「한시와 기행」, 한글한자문화 155권, 2012
 
임봉훈, 「한시와 기행」, 한글한자문화 155권, 2012
+
박종분, 『답사여행의 길잡이 3』, 돌베개, 2011
 +
 
 
=='''주석'''==
 
=='''주석'''==
 
<references/>
 
<references/>

2017년 4월 5일 (수) 23:20 판




개요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에 있는 누정.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3호. 1361년에 심동로가 처음 세웠으나 소실되고, 1530년에 중건하였다.

위치


역사

시초

고려 공민왕 10년(1361) 삼척심씨의 시조 심동로(沈東老)가 낙향하여 건립한 정자이다. 심동로의 자는 한(漢)이요, 호는 신제(信齊)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여 한림원사(翰林院使) 등을 역임하고 고려 말의 혼란한 국정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권세가의 비위를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때 왕이 이를 만류하다가 동로(東老: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낙향한 후에는 후학의 양성과 풍월로 세월을 보냈다. 왕은 다시 그를 진주군(眞珠君)으로 봉하고 삼척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1]


고려시대

심동로의 자는 한(漢)이요, 호는 신제(信齊)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여 한림원사(翰林院使) 등을 역임하고 고려 말의 혼란한 국정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권세가의 비위를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때 왕이 이를 만류하다가 동로(東老: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낙향한 후에는 후학의 양성과 풍월로 세월을 보냈다. 왕은 다시 그를 진주군(眞珠君)으로 봉하고 삼척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2]


조선시대

지금의 해암정(海岩亭)은 본래 건물이 소실된 후 조선 중종 25년(1530)에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이 중건하고, 정조 18년(1794) 다시 중수한 것이다.


해방이후

건물은 낮은 1단의 석축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 형식이다. 4면 모두 기둥만 있고 벽면은 없다. 뒤로 지붕보다 조금 높은 바위산이 있어 운치를 더해 주며, 이곳에서 보는 일출 광경은 장관이라 한다.


특징

추암(湫岩)

‘추암’은 파도와 비바람에 씻긴 기암괴석이 해안을 막아서듯 절벽을 이루고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백사장이 있는 한적한 해수욕장이다. 최근에는 이웃해 있는 망상해수욕장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그러나 해수욕장이기 이전에 ‘작은 어촌’이 추암의 본래 모습이다. 추암 전경뛰어난 경승으로 '해금강'이라 불리는 추암은 물이 맑고 깨끗해 한적한 해수욕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뛰어난 경승으로 ‘삼척 해금강’이라 불리었으나 지금은 동해시에 속해 있으니 ‘동해 해금강’이라 해야 마땅하다. 조선 세조 때 한명회가 강원도 체찰사(體察使)로 있으면서 추암에 와보고는 그 경승에 취해 ‘능파대’라 부르기도 했다.특히 바다에 일부러 꽂아놓은 듯 뾰족하게 솟아 있는 촛대바위를 제1의 경치로 친다. 수십 년 전 심한 폭풍우로 위쪽 일부가 부숴졌지만 고고한 모습은 여전하다. 흰 수건을 적시면 푸른색 물이 흠씬 배어들 듯 짙푸른 바다색도 인상적이다. 추암(湫岩)이라는 이름 그대로 촛대처럼 뾰족 솟은 모습도 기묘하지만 강원도 동해시와 삼척시 바닷가에 한 발씩 걸친 위치가 더 절묘하다. 바다를 향해 서면 왼쪽이 동해시, 오른쪽이 삼척시이다.

마을에서 해안 쪽을 바라보면 작은 동산 하나가 있는데, 촛대바위는 이 동산 너머 동쪽 바다에 솟아 있다. 동산에 올라 촛대바위를 직접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남쪽 백사장 끝에서 멀리 바라보는 풍광이 더 낫다.

동산 앞쪽에는 조그만 정자 하나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사방 문을 열어놓으면 바람이 술술 통하는 누마루 형식이다. 특히 뒤쪽 문을 열어 젖히면 갖가지 형상의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앞쪽으로는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데, 바다라는 자연 자체를 집 안으로 끌어들여 정원을 삼은 조경법이 단연 돋보인다.

[3]

해암정(海岩亭)

심동로는 삼척 심씨의 시조로 고려 충선왕 2년(1310)에 태어났으며, 자는 한(漢), 호는 신재(信齋)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였으며, 한림원사라는 높은 벼슬까지 지냈다. 바른 정치를 위해 힘쏟던 그는 간신배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부모 공양을 핑계로 통천 군수를 자청하여 낙향하였다. 공민왕이 몹시 아쉬워하며 만류하였으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동로’(東老, 동쪽으로 간 노인)라는 이름을 내리며 낙향을 허락하였다. 낙향 이후 심동로는 후학을 가르치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시문과 풍월로 여생을 보냈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심동로가 세운 해암정은 조선 중종 25년(1530) 예조판서를 지낸 심언광이 다시 지었고, 정조 18년(1794)에 한 차례 더 중수됐다.

정자 누마루의 안쪽 벽에 걸려 있는 여러 개의 판각은 이곳을 다녀갔다는 옛사람의 기록이거나 경치를 읊은 시구들이다. “초합운심경전사”(草合雲深逕轉斜)는 우암 송시열이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내다가 왕가의 장례 문제로 구설수에 올라 함경남도 덕원땅으로 귀양살이를 가던 도중 이곳에 들른 기념으로 남긴 글씨이다.

정자 앞마당은 햇살을 쨍쨍 받는 너른 터로 어촌 아낙들이 미역을 말리는 단골 장소이다. 작은 냇물이 정자 앞을 지나 바다와 합쳐지는데, 해안가와 해암정 사이에 민박집들이 너무 바투 있어 바다 쪽 시야를 방해하고 있다. 이 민박집들을 빼놓고, 또 언덕과 해암정 뒤쪽 기암절벽에 눈엣가시처럼 둘러쳐진 군대 철조망을 빼놓고 바닷가에 오롯이 해암정만 들어서 있는 한적한 풍경을 상상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듯하다. 한 가지 더 못내 아쉬운 것은 마을 초입의 굴다리 바로 뒤편에 대규모의 북평공단이 들어서게 된다는 점이다. 이 맑은 바닷물에 어떤 영향은 없을지 매우 걱정이다.

그나마 좁은 굴다리 안쪽에 요새처럼 자리 잡고 있기에 대형 관광지로 개발되는 신세를 면했지만, 그래도 추암의 풍광은 차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아직은 작은 어촌 냄새를 풍기고 있으나 이 풍경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촛대처럼 우뚝 서서 멀리 바다 저편에서부터 솟아오는 해를 맞이하는 촛대바위나 작고 아담한 해암정도 좋지만, 그것을 품고 있는 전체가 더 사랑스러운 곳이다.

관련 인물

경내 문화재


가상현실

참고문헌

임봉훈, 「한시와 기행」, 한글한자문화 155권, 2012 박종분, 『답사여행의 길잡이 3』, 돌베개, 2011

주석

  1. "해암정" 두산백과
  2. "해암정" 두산백과
  3. "길잡이-3" 동해 설악,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