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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현(金寶鉉,1917~2014)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나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와 메이지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조선대학교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화단에서 60여 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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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현(金寶鉉,1917~2014)의 본래 이름은 김창수이다. 그는 경상남도 창녕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37년 일본 동경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동 시기에 태평양미술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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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2년간 공부하였다. 1945년 귀국 후, 조선대학교 예술학과(현 미술학과) 첫 번째 임용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당시 출강을 나왔던 오지호와 천경자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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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410 여수순천사건]](1948)에서 좌익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였고, 1950년에는 학생들과 홍도로 스케치 여행을 갔다가 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광주 인민군 치하 당시에는 미군 브라운 대령의 딸에게 미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친미 반동으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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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사건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을 겪으며 좌우 모두로부터 수난을 당한 그는 1955년 미국 일리노이대학 펠로우 쉽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이후, 그는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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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체류자 신세로 뉴욕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최저임금으로 넥타이 공장에서 일하거나 백화점 디스플레이를 하면서도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김환기와 만나게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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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두 번째 부인인 실비아 올드와 결혼하게 되었다. 추상화에 집중하였던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는 구상작품 전환하였고, 과일과 야채를 소재로 사실주의 작업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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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실주의적 드로잉 회화는 1970년대 중반 뉴욕 화단에 주목을 받게 되면서, 1975년 뉴욕 엘래인 벤슨 갤러리와 1976년 뉴욕 해들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1991년 라파예트가 노점 책방에서 만난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출신 한국청년과의 인연으로 1992년, 37년만에 한국에서도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해당 개인전은 서울 헤나 켄트 화랑에서 열렸고, 이를 시작으로 1995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도 '재미 40년의 회고전'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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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2월 조선대학교에 작품 307점을 기증하였으며, 2002년 8월에는 부인 실비아 올드가 작품 78점을 기증하였다. 2005년 조선대학교미술관에서 개인전 ‘조선대학교 개교59주년 기념 특별기회: 낙원의 향수[Nostalgia in the Paradise]’를 개최하였고, 2007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회고전 ‘고통과 환희의 변주: 김보현의 화업 60년’이 열렸다. 2009년 4월 뉴욕 노호 작업실 건물에 실비아 올드 앤드 포 김 아트 갤러리를 개관하였으며, 2011년 9월에는 조선대학교미술관 안에 ‘김보현&실비아 올드 미술관[Po Kim and Sylvia Wald of Art]’이 문을 열었다. 2014년 2월 7일 97세의 나이로 뉴욕 맨해튼에서 사망하였다.          
  
  

2023년 5월 10일 (수) 13:22 판

기본 정보

  • 이름: 김보현
  • 영문: Po Kim
  • 출생: 1917년
  • 사망: 2014년 2월 7일
  • 성별: 남
  • 직업: 화가
  • 가족: 실비아 올드(Sylvia Wald)
  • 경력: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교수 및 초대 학과장/미국 현대미술 100대 작가 선정

정의

미국 뉴욕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재미 한인 1세대 화가.

내용

김보현(金寶鉉,1917~2014)의 본래 이름은 김창수이다. 그는 경상남도 창녕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37년 일본 동경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동 시기에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그림을 2년간 공부하였다. 1945년 귀국 후, 조선대학교 예술학과(현 미술학과) 첫 번째 임용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당시 출강을 나왔던 오지호와 천경자를 알게 되었다.

그는 [여수순천사건](1948)에서 좌익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였고, 1950년에는 학생들과 홍도로 스케치 여행을 갔다가 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광주 인민군 치하 당시에는 미군 브라운 대령의 딸에게 미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친미 반동으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여수순천사건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좌우 모두로부터 수난을 당한 그는 1955년 미국 일리노이대학 펠로우 쉽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이후, 그는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불법 체류자 신세로 뉴욕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최저임금으로 넥타이 공장에서 일하거나 백화점 디스플레이를 하면서도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김환기와 만나게 되었고,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실비아 올드와 결혼하게 되었다. 추상화에 집중하였던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는 구상작품 전환하였고, 과일과 야채를 소재로 사실주의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의 사실주의적 드로잉 회화는 1970년대 중반 뉴욕 화단에 주목을 받게 되면서, 1975년 뉴욕 엘래인 벤슨 갤러리와 1976년 뉴욕 해들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1991년 라파예트가 노점 책방에서 만난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출신 한국청년과의 인연으로 1992년, 37년만에 한국에서도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해당 개인전은 서울 헤나 켄트 화랑에서 열렸고, 이를 시작으로 1995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도 '재미 40년의 회고전'을 가지게 된다.

2000년 2월 조선대학교에 작품 307점을 기증하였으며, 2002년 8월에는 부인 실비아 올드가 작품 78점을 기증하였다. 2005년 조선대학교미술관에서 개인전 ‘조선대학교 개교59주년 기념 특별기회: 낙원의 향수[Nostalgia in the Paradise]’를 개최하였고, 2007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회고전 ‘고통과 환희의 변주: 김보현의 화업 60년’이 열렸다. 2009년 4월 뉴욕 노호 작업실 건물에 실비아 올드 앤드 포 김 아트 갤러리를 개관하였으며, 2011년 9월에는 조선대학교미술관 안에 ‘김보현&실비아 올드 미술관[Po Kim and Sylvia Wald of Art]’이 문을 열었다. 2014년 2월 7일 97세의 나이로 뉴욕 맨해튼에서 사망하였다.


주요 품

백자상감모란문발.jpg
백자상감모란문발
백자철화 매죽문 편병 PS0100332700700171300000 0.jpg
백자철화매죽문편병
백자 호(진단구).jpg
백자호

참고문헌 및 사이트

* 강대규 외1인,『도자공예』, 솔출판사, 2004.

* 강경숙,『한국 도자기 가마터 연구』, 시공사, 2005.

* 한국도자재단

* 경기도 박물관 미술관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