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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202 Story 백성을_생각한_개천,_청계천
 
S0-202 Story 백성을_생각한_개천,_청계천
E0-202A Episode Episode_1:_준천을_통해_백성을_생각하다 http://dh.aks.ac.kr/~hanyang2/cgi-bin/Story03.py?db=Class2022&project=study03&key=KSVC-220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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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0-202B Episode Episode_2:_백성들_덕분에_57일만에_준천을_끝나다 http://dh.aks.ac.kr/~hanyang2/cgi-bin/Story03.py?db=Class2022&project=study03&key=KSVC-220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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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0-202C Episode Episode_3:_준천_참여자의_마음을_헤아리다 http://dh.aks.ac.kr/~hanyang2/cgi-bin/Story03.py?db=Class2022&project=study03&key=KSVC-220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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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0-202D Episode Episode_4:_영조,_지속가능성을_고려하다 http://dh.aks.ac.kr/~hanyang2/cgi-bin/Story03.py?db=Class2022&project=study03&key=KSVC-220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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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6일 (일) 21:56 기준 최신판


Theme

백성을 생각한 개천, 청계천

Synopsis

  • 조선 후기, 한양이 상업도시로 변모하면서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무분별한 벌목 등으로 한양의 도성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하천인 개천(開川, 청계천)은 비가 오면 쉽게 범람하여 도선 안의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영조는 1752년 광통교에 행차하여 백성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고 신하들의 반대와 염려에도 불구하고 1760년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개천 준설, 즉 준천(개천의 바닥을 파내어 물길이 원활히 흐르게 하는 것)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 영조는 준천이 시작되자 개천에 나가 곡식과 무명을 나눠주는 등 백성을 위로하고 준천으로 거주지를 잃은 백성에게 도성의 빈집을 제공하는 등 민생을 돌보았다. 또한 백성을 강제로 부역시킨 이전까지의 국가적 토목공사와는 다르게 영조는 동원된 백성들에게 품삯을 지급했다. 이에 21만 5천 여명의 다양한 백성들이 동원되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결과, 57일만에 공사가 끝나게 된다.
  • 영조는 비바람이 몰아침에도 준천 현장에 방문하거나 공사가 끝난 뒤 준천에 참여한 참여자들에게 대대적인 포상과 잔치를 베풀어 참여자를 위로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버클리대학교가 소장한 『준천계첩』에 실린 4점의 그림을 통해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 영조는 준천의 효과를 지속하고자 1760년 경진준천 이후 1773년에도 준천(계사준천)을 진행하는데, 이는 이전의 준천에서 목책으로 임시 가설한 것을 보완한 것이다. 또한 준천의 전 과정을 준천당상 홍계희에게 기록하도록 하여 후대에 전범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경진지평’이라는 표석을 세워서 이를 기준점으로 삼아 토사를 관리하도록 하여 홍수를 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Storyline

에피소드1: 준천을 통해 백성을 생각하다

조선의 도읍인 한양은 한반도의 중심지에 자리를 잡았고, 조세의 운송에도 매우 유리했다. 여기에 동, 서, 남, 북 4대 산으로 둘러싸인 형국은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도 명당이었다. 그러나 한양은 홍수에 취약한 도시 구조였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남산 등지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모인 물들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을 통해 한강으로 나가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청계천이 넘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도성 안의 백성들은 홍수 피해로 몸살을 앓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한 태종은 1405년 한양의 도성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하천인 개천(開川)의 준설을 명했다. 이때 준설한 개천(開川)이 현재 청계천의 원형이다. (한양도 - 위백규(1727~1798)가 1770년 저술한 『환영지』에 수록)

15세기 세종 대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개천은 비가 오면 쉽게 범람하여 도선 안의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조선 후기, 한양은 상업도시로 변모하여 많은 상인과 평민이 생계를 목적으로 상경하였고, 이들은 주로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며 개천 주변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 증가(호구총수)과 개천 주변 거류민 증가, 하류지역 경각지 개간, 도성 사산에서의 벌목(지봉유설), 시체 유기(박지원, 『연암집』 「방경각외전」 광문자전, 1754년) 등으로 개천에 각종 퇴적물이 쌓여서 개천 주변은 불안정한 거주공간이 되었다. 숙종 36년(1710)에는 한성이 호된 물난리를 겪었는데, "무릇 네 산에 나무가 없어 민둥산이 된 뒤로 사석(沙石·모래와 돌)이 흘러내려 봇도랑이 메워지고 물길이 막힘으로써, 가뭄에는 물이 고여 흐르지 않아 악취가 진동하는가 하면, 큰비가 내리면 평지까지 물이 범람해 부근 인가가 피해를 보았다"며 가장 주된 원인으로 무차별한 산림 남벌을 다음과 같이 지목하고 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 1710년 09월 05일)

이에 영조는 1760년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개천 준설, 즉 준천(개천의 바닥을 파내어 물길이 원활히 흐르게 하는 것)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영조는 신하들의 반대와 염려에도 불구하고(『영조실록』 영조 36년 3월 16일, 영조 36년 04월 10일, 영조 36년 4월 17일, 영조 36년 04월 19일)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에 있다"(승정원일기 영조 36년 02월 23일), "도랑을 파내는 한 가지는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니..."라고 하였는데(『영조실록』 영조 35년 10월 15일)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준천을 단행하였다.


에피소드2: 백성들 덕분에 57일만에 준천을 끝나다

영조는 재임 기간 중 200여 차례의 순문을 진행했는데, 그 중 준천과 관련해서는 9차례를 진행하였다. 즉, 준천이 중요한 국책사업인 만큼 백성과 신하들과 소통하면서 준천에 대한 민심과 의견을 파악한 것이다.

영조는 1752년 광통교에 행차하여 백성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고(『영조실록』, 영조 28년 01월 27일), 1758년에는 숭문당에서 준천의 실시여부를 신하들과 토론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4년 05월 02일)

1759년 10월 준천을 담당할 임시 관청인 준천소(浚川所)를 설치하고, 홍봉한(洪鳳漢, 1713~1778), 홍계희(洪啓禧, 1703~1771), 이창의(李昌誼, 1704~1772)를 준천당상으로 임명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5년 10월 06일) 한달 후인 11월 20일 자원하여 성책(成冊)된 인원이 1만명을 넘자 명정전(明政殿) 월대에서 시민(市民)들을 직접 면대하여 위로하는 등 (『영조실록』, 영조 35년 11월 20일)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였다.

본격적인 준천사업은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되었다. 공사기간동안 21만 5천 여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는데, 도성의 방민(坊民)을 비롯하여 각 시전의 상인 등, 지방의 자원군(自願軍), 승군(僧軍), 모군(募軍)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참여하였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 3천 여 명은 품삯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략 공사 기간 동안 3만 5천 냥의 돈과 쌀 2천 3백여 석의 물자가 소요되었다.

조선전기에는 국가적 토목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는 경우 강제로 부역시켰지만, 영조는 지방의 백성에 대해서는 강제로 동원하지 않았고, 동원된 백성들에게는 품삯을 지급했다. 이것은 정조대에도 계승되어 정조는 화성 건축 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면서 품삯을 지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또한 영조는 준천이 시작되자 개천에 나가 곡식과 무명을 나눠주는 등 백성을 위로하였고, 백성에 대한 자신의 뜻을 표현한 『어제균역준천여사업』(1773,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을 지었다. 더불어 준천으로 백성들이 불편함이 있는 지를 살피었고(『영조실록』 영조 36년 3월 11일) 개천 주변의 일부 백성이 거주지를 잃게 되었는데, 영조는 도성의 빈집을 준천소에 소속시켜 이들에게 제공 (『영조실록』 영조 36년 4월 1일)하는 등 민생을 돌보았다.

이와 같은 영조의 노력 덕분일까, 백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준천사업은 57일만인 4월 15일에 종료되었다.


에피소드3: 준천 참여자의 마음을 헤아리다

영조는 준천을 자신의 대표 업적 중 하나로 꼽으며(영조실록 49년 12월 20일), 세손(정조)과 신하들에게 명심하라고 당부하였다. (어제준천명병소서, 1773) 실제로 영조는 비바람으로 신하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준천 현장에 방문하거나 공사가 끝난 뒤 준천에 참여한 참여자들에게 대대적인 포상과 잔치를 베풀어 참여자를 위로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버클리대학교가 소장한 『준천계첩』에 실린 4점의 그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준천계첩』은 영조가 시를 지어 준천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내린 「어제어필」와 「어제사언시」, 영조가 준천을 격려하는 내용을 그린 그림 4점, 준천소의 관원 명단과 동원된 연인원을 5장에 기록한 「준천소좌목」, 이 해 4월에 홍봉한(1713-1778)이 영조의 명을 받고서 지은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점의 그림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영조가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오간수문(五間水門)에 행차하여 준천의 현장을 관람한 것을 그린 것으로 준천 당시 오간수문의 모습과 공사 현장의 생생함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4월 09일)
  • 영화당친림사선도 (暎花堂親臨賜膳圖): 공식적으로 준천이 완료된 후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에서 준천소의 당상과 낭청에게 시사(試射, 무장들의 활쏘기 시합)를 행한 후 영화당(暎花堂)에서 사선(賜膳,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림)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4월 16일)
  • 모화관친림시재도 (慕華館親臨試才圖): 영조(英祖)가 모화관(慕華館)에서 각 군문(軍門)과 준천소 군병(軍兵)들의 훈련 모습을 시찰하고 준천(濬川) 사업에 참여한 군병을 격려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후 누락된 장교(將校)와 군졸(軍卒), 지원한 백성과 승려들까지 참여하여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4월 23일)
  • 연융대사연도(鍊戎臺賜宴圖): 영조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영조가 준천소 당상(堂上)부터 하급 예속(隸屬)에 이르기까지 준천의 참여자를 모두 연융대(鍊戎臺)에 모이게 한 후 잔치를 베푼 것을 그린 것이다. 이 날은 준천(濬川)에 관한 모든 일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음을 기념(記念)하여 세초연(洗草宴)을 하는 자리로 준천(濬川)에 참여한 군민(軍民)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없애 버렸다. (『영조실록』, 영조 36년 04월 16일 참고)

『준천계첩』과 같이 계첩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들은 임금에게 바쳐서 관청이나 궁중에서 보관하기 위한 책(유일본)과 참석한 고위관료들이 나누어 가지기 위한 여러 책(부본, 副本)을 함께 만들었다. 유일본은 당대 최고 수준의 화가가 아주 정교하고 채색한 것이고, 이에 비해 부본은 실무적으로 활용하도록 만든 작품이다. 『준천계첩』도 여러 본이 전해지는데,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 부산시립박물관에 《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가 소장되어 있다. 당시 몇 부가 완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유일본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준천계첩』이라 추정된다. 이 책에 수록된 그림은 여타의 전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채색성과 정교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수문상친임관역」에서 네 개의 오간수문 다리 기둥 중에서 첫째와 넷째 기둥에는 거북문양을 새겨 놓은 것이 보이며, 「연융대사연」에서 앉아있는 관료들을 위해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간 분주해 보이지 않는데 다른 전본은 이들을 생략해 버렸다. 또한 다른 전본에는 모든 그림이 실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림의 완성도, 호화 장정, 그림의 여부 등을 보아 버클리대학교에서 소장한 책이 영조에게 바친 유일본 『준천계첩』으로 추정된다.


에피소드4: 영조, 지속가능성을 고려하다

영조는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백년은 갈 것입니다’라고 대답 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6년 03월 16일)

이처럼 영조는 준천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였다. 영조대에 개천 준천은 경진준천(1760년), 계사준천(1773년) 두번 진행되었는데, 1773년 공사는 개천의 양쪽 기슭에 석축을 쌓는 것으로 경진준천에서 목책으로 임시 가설한 것을 보완한 것으로 이 역시 준천 효과를 지속하기 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조는 준천을 시작한 지 근 한 달이 되어가던 때에 “준천을 위한 대책은 역시 찾기 어렵다. 이제는 그 실마리를 알 수 있겠다.”라며 준천의 전 과정을 준천당상 홍계희에게 기록하도록 하여 후대에 계승시키고자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36년 03월 16일) 홍계희는 경진준천의 의미와 준천 배경 및 경과 등 제반 사항을 기록하여 1760년에 『준천사실』을 간행하였다. 영조는 서문에서 “수백 년이 지나도 지금의 일을 생각할 것이니 후일 누구라도 개천이 막히지 않고 물이 잘 흐르도록 해야 한다”며 준천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즉, 『준천계첩』이 군신간의 기념비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준천사실』 은 후대에 준천 시행에 대한 전범을 제공하고자 준천의 전 과정과 결과를 남긴 것이다.

번암 채제공(蔡濟恭)은 조선 개국부터 준천까지의 개천 역사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며 준천을 시행한 영조를 칭송하는 준천가(濬川歌)를 남겼다. (『번암집』 9권 - 詩, 1791)

또한 영조는 준천 사업을 기념하는 표석(標石)을 세워 기준점으로 삼도록 했다. 영조는 “표석(標石)은 경진년(1760년)을 지평(地平)으로 새기고 침수되지 않게 해야 유효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경진지평’ 네 글자를 새기고 이 글자들이 모두 보이도록 늘 토사 관리에 만전을 가할 것을 지시한 것이었다. (『승정원일기』 영조 36년 0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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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