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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부묘의, 친경의, 배릉례 등을 거행하고 궁궐로 돌아올 때에 여러 행사를 베풀었다. |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부묘의, 친경의, 배릉례 등을 거행하고 궁궐로 돌아올 때에 여러 행사를 베풀었다. | ||
− | + | 어가(御駕)가 움직이면 고취(鼓吹)가 진작(振作)하고 종친(宗親) 및 백관(百官)들이 몸을 굽힌[鞠躬]다. <br/>〈어가가〉 지나가면 몸을 바로 하[平身]여 차례로 시위(侍衛)하고 도종(導從)하기를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이 한다. <br/>의금부(義禁府)의 군기감(軍器監)이 종묘(宗廟)의 동구(洞口)에서 나례(儺禮)를 올리고, <br/>성균관(成均館)의 학생(學生)들이 종루(鍾樓)의 서가(西街)에서 가요(歌謠)를 올리고, <br/>교방(敎坊)에서 혜정교(惠政橋) 동쪽에서 가요(歌謠)를 올리고, 이어 정재(呈才)한다. <br/>그리고 또 광화문(光化門) 밖의 좌우(左右)에다 채붕(綵棚)을 맺는다. <br/>어가(御駕)가 광화문(光化門) 밖의 시신 하마소(侍臣下馬所)에 이르러 잠시 멈추면, <br/>시신(侍臣)이 모두 말에서 내려 나누어 서서 몸을 굽힌[鞠躬]다.<br/> 지나가면 몸을 바로 한[平身]다. 어가(御駕)가 근정문(勤政門)에 이르면, 악(樂)이 그친다.<br/> 판통례(判通禮)가 연(輦) 앞에 나아가서 부복하고 꿇어앉아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타라."고 계청하고, <br/>부복하였다 일어나서 돌아와 시립(侍立)한다. <br/>전하께서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타고 들어가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는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고, 시신(侍臣)이 뒤를 따라 전정(殿庭)에 이른다. <br/>액정서(掖庭署)에서 어좌(御座)를 설치하고, 전의(典儀)가 종친 및 백관들의 자리를 설치하고, <br/>병조(兵曹)에서 여러 위(衛)를 거느리고 대장(大仗)을 진열(陳列)하고 군사(軍士)들을 늘어 세운다.<br/> 판통례(判通禮)가 외판(外辦)을 아뢰면, 전하께서 여(輿)를 타고 나와 어좌(御座)에 올라가서 하례(賀禮)를 받고, 이내 유서(宥書)를 반포하기를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이 한다. <br/>【다만 여러 도(道)에서 하례(賀禮)하여 올리는 전(箋)을 받는 것이 다르다. 】 <br/>또 유사(攸司)에 명하여 향관(享官)과 여러 집사(執事)들에게 잔치를 내린다. <br/>[http://sillok.history.go.kr/id/kda_20011065 세종실록 권135 오례 흉례 의식 부묘의] | |
− | 어가(御駕)가 움직이면 고취(鼓吹)가 진작(振作)하고 종친(宗親) 및 백관(百官)들이 몸을 굽힌[鞠躬]다. <br/>〈어가가〉 지나가면 몸을 바로 하[平身]여 차례로 시위(侍衛)하고 도종(導從)하기를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이 한다. <br/>의금부(義禁府)의 군기감(軍器監)이 종묘(宗廟)의 동구(洞口)에서 나례(儺禮)를 올리고, <br/>성균관(成均館)의 학생(學生)들이 종루(鍾樓)의 서가(西街)에서 가요(歌謠)를 올리고, <br/>교방(敎坊)에서 혜정교(惠政橋) 동쪽에서 가요(歌謠)를 올리고, 이어 정재(呈才)한다. <br/>그리고 또 광화문(光化門) 밖의 좌우(左右)에다 채붕(綵棚)을 맺는다. <br/>어가(御駕)가 광화문(光化門) 밖의 시신 하마소(侍臣下馬所)에 이르러 잠시 멈추면, <br/>시신(侍臣)이 모두 말에서 내려 나누어 서서 몸을 굽힌[鞠躬]다.<br/> 지나가면 몸을 바로 한[平身]다. 어가(御駕)가 근정문(勤政門)에 이르면, 악(樂)이 그친다.<br/> 판통례(判通禮)가 연(輦) 앞에 나아가서 부복하고 꿇어앉아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타라."고 계청하고, 부복하였다 일어나서 돌아와 시립(侍立)한다. <br/>전하께서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타고 들어가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는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고, 시신(侍臣)이 뒤를 따라 전정(殿庭)에 이른다. <br/>액정서(掖庭署)에서 어좌(御座)를 설치하고, 전의(典儀)가 종친 및 백관들의 자리를 설치하고, 병조(兵曹)에서 여러 위(衛)를 거느리고 대장(大仗)을 진열(陳列)하고 군사(軍士)들을 늘어 세운다.<br/> 판통례(判通禮)가 외판(外辦)을 아뢰면, 전하께서 여(輿)를 타고 나와 어좌(御座)에 올라가서 하례(賀禮)를 받고, 이내 유서(宥書)를 반포하기를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이 한다. <br/>【다만 여러 도(道)에서 하례(賀禮)하여 올리는 전(箋)을 받는 것이 다르다. 】 <br/>또 유사(攸司)에 명하여 향관(享官)과 여러 집사(執事)들에게 잔치를 내린다. <br/>[http://sillok.history.go.kr/id/kda_20011065 세종실록 권135 오례 흉례 의식 부묘의] | + | |
2022년 6월 3일 (금) 10:49 판
목차
Theme
조선시대 행사에서의 연희
조선시대의 전통연희는 나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수륙재, 우란분재, 문희연, 관아 행사, 동제, 사대부가의 잔치 등에서 연행되었다. 이밖에도 임금이 선왕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를 마치고 궁중으로 돌아올 때, 공자를 비롯한 유학의 성인을 모신 문묘를 참배할 때, 왕의 각종 행사 시, 왕세자의 태를 태봉에 묻을 때, 정월 보름에 궁중에서 풍농을 기원하며 일종의 모의 농경의례인 내농작을 거행할 때, 지방관을 환영할 때 등에도 연희가 연행되었다.
연희는 왕조의 성립과 교체와 같은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장르였다. 조선 후기에는 국가 행사들이 크게 위축되거나 소멸되어 국가 행사와 궁정 행사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민간에 퍼져 공연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의 연희 문화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국가적인 행사로서의 나례는 축소, 폐지되었고, 연행하던 연희자들은 민간에서의 공연활동을 이어갔다.
Synopsis
전통연희가 행해졌던 행사 scene을 메타버스로 구현
각 행사와 관련된 역사문화 지식을 wiki를 통해 정리
Storyline
Episode 1: 중국 사신 영접행사에서의 전통연희-아극돈의 조선 방문
중국의 아극돈(阿克敦, 1685~1756)은 1717년에서 1725년 사이 네 차례나 조선에 왔던 청나라 사신이다.
1717년 조선에서 숙종임금의 안질 치료에 필요한 공청을 구하러 청나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강희제는 숙종의 치세를 높이 평가하며 특별히 공청을 보내도록 명했고, 그 해 9월 18일 아극돈을 정사, 장정매를 부사로 하는 사신단이 파견되어 조선을 방문했다. 이 때 아극돈은 수많은 즉흥시를 남겼고, <아극돈시>라는 시집으로 남아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아극돈이 두번째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조선에서 귀국한지 3일째 되는 날 황태후가 승하하자 이를 알리는 고부사(告訃使)로 임명되며 오게 되었다. 서 번째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1722년 4월로 경종임금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어 그 이복동생인 연잉군 이금 (영조)을 세제로 삼는 다는 조서를 전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수행인원이 75명이되는 대규모 사신단이었다. 이후 1724년 12월 19일 네번째로 조선을 받문하게 되는데, 이때는 각라서로와 아극돈이 경종에게 사제 및 세제 이금을 국왕으로 봉한다는 조서를 전하는 임무로 온 것으로, 조선에서 정사 각라서로가 병을 앓는 바람에 이듬해 3월에 귀국하게 된다.
아극돈은 1725년(영조1) 조선에 관한 풍물과 자신에 대한 영접 행사를 묘사한 스무폭짜리 화첩 <봉사도>를 만들었다. 이 중 제7폭에 그려진 모화관 마당 연희 공연에서는 대접돌리기, 땅재주(물구나무서기), 탈춤, 줄타기 등이 묘사되어 있고, 소규모 산대도 보인다. 11폭에는 솟대타기를 하는 연희자도 보인다. 이 7폭의 배경이 되는 모화관은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전 머물던 곳으로 지금의 독립문 근처이다. 중국 사신 영접을 위한 대산대를 만드는 데만 각각 수군 천사백명과 천삼백명이 동원될 정도였다고 한다. 행사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중국 사신 영접의 나례는 정조 8년 (1784)에 폐지되었다.[1]
Episode 2: 환궁행사에서의 전통연희
궁중 연향의 공연 공간은 무대를 중심으로 객석이 둘러싼 구조를 이루며 무대와 객석이 고정된 단일 공간의 성격인 반면, 행렬 의식에서의 공연공간은 무대가 고정되고 객석이 이동하거나, 객석이 고정되고 무대가 이동하는 복합공간의 성격을 가진다. 궁중 연향에서는 술과 음식을 올리는 의례 절차에 따라 7~9개의 정재가 공연된 반면, 행렬 의식에서는 복잡한 공간의 성격에 따라 정재의 공연 방식과 무대 장치에 변화를 주었다. 즉 공연 종목을 축소하되 출연자의 수를 늘리고 크고 화려한 무대장치를 사용해 거리 공연의 효과를 높인 것이다. 반주에 있어서도 연향에서는 등가악을 사용한 반면 행렬 의식에서는 고취악을 사용했다. 행렬 의식은 특별한 계기를 맞이해 궁궐 밖에서 거행하는 일련의 의전 행사를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부묘의, 친경의, 배릉례 등을 거행하고 궁궐로 돌아올 때에 여러 행사를 베풀었다.
어가(御駕)가 움직이면 고취(鼓吹)가 진작(振作)하고 종친(宗親) 및 백관(百官)들이 몸을 굽힌[鞠躬]다.
〈어가가〉 지나가면 몸을 바로 하[平身]여 차례로 시위(侍衛)하고 도종(導從)하기를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이 한다.
의금부(義禁府)의 군기감(軍器監)이 종묘(宗廟)의 동구(洞口)에서 나례(儺禮)를 올리고,
성균관(成均館)의 학생(學生)들이 종루(鍾樓)의 서가(西街)에서 가요(歌謠)를 올리고,
교방(敎坊)에서 혜정교(惠政橋) 동쪽에서 가요(歌謠)를 올리고, 이어 정재(呈才)한다.
그리고 또 광화문(光化門) 밖의 좌우(左右)에다 채붕(綵棚)을 맺는다.
어가(御駕)가 광화문(光化門) 밖의 시신 하마소(侍臣下馬所)에 이르러 잠시 멈추면,
시신(侍臣)이 모두 말에서 내려 나누어 서서 몸을 굽힌[鞠躬]다.
지나가면 몸을 바로 한[平身]다. 어가(御駕)가 근정문(勤政門)에 이르면, 악(樂)이 그친다.
판통례(判通禮)가 연(輦) 앞에 나아가서 부복하고 꿇어앉아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타라."고 계청하고,
부복하였다 일어나서 돌아와 시립(侍立)한다.
전하께서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타고 들어가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는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고, 시신(侍臣)이 뒤를 따라 전정(殿庭)에 이른다.
액정서(掖庭署)에서 어좌(御座)를 설치하고, 전의(典儀)가 종친 및 백관들의 자리를 설치하고,
병조(兵曹)에서 여러 위(衛)를 거느리고 대장(大仗)을 진열(陳列)하고 군사(軍士)들을 늘어 세운다.
판통례(判通禮)가 외판(外辦)을 아뢰면, 전하께서 여(輿)를 타고 나와 어좌(御座)에 올라가서 하례(賀禮)를 받고, 이내 유서(宥書)를 반포하기를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이 한다.
【다만 여러 도(道)에서 하례(賀禮)하여 올리는 전(箋)을 받는 것이 다르다. 】
또 유사(攸司)에 명하여 향관(享官)과 여러 집사(執事)들에게 잔치를 내린다.
세종실록 권135 오례 흉례 의식 부묘의
임금의 행차가 지나는 좌우 양쪽에 나례를 별였고, 광화문 밖에 산대나 채붕을 좌우에 하나씩 설치했다. 연(가마)이 광화문 밖에 이르고, 채붕에서 공연이 이어졌다고 한다. 인조는 반정 이후에 왕실의 유연(遊宴)에 관한 기물들을 대로에서 불태우는 상징적 행사를 단행하고, 왕실 의식과 행사를 간소화하며, 환궁 행사로서의 나례는 폐지했다.
Episode 3: 문희연에서의 전통연희
문희연(聞喜宴)은 사대부가의 과거 급제 축하 잔치이다. 문희연 외에 과거제도와 관련된 행사로는 아래의 행사들이 있다.
구성 | 장소 | 내용 |
---|---|---|
방방의(放榜儀) | 의정부 | 왕이 참석하여 합격증인 홍패, 백패, 모화, 개, 주과 등을 하사하는 의식 |
은영연 | 의정부 | 임금이 급제자에게 베푼 잔치 |
유가 | 한양 거리 | 한양에 거주하는 과거 급제자가 세악수(삼현육각), 광대, 재인을 대동하고 서울 시가를 사흘간 돌아다니며 하는 거리 행진 |
도문(到門) | 급제자 지역의 거리 | 60일간의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가 문묘에 절한 후 거리 행진 |
영친의 | 급제자의 지역 관아 | 지방 출신 급제자가 고향으로 왔을 때 그 지방 수령이 급제자와 부모를 관아에 초청해 베푸는 축하 잔치 |
홍패고사 | 급제자의 집 사당 | 삼일유가를 함께 한 광대들과 집에 도착해 광대가 마당에 소반을 놓고 그 위에 쌀, 그 위에 홍패를 올리고서 고사를 지냄. 고사 내용은 우주가 생긴 이래 삼한에서 조선에 이르는 역사를 약술, 그 집의 세간 등 묘사, 급제한 사실 고지, 앞으로 부귀를 누리라는 덕담으로 구성 |
소분 | 선산 | 도문 이후에 선산에 성묘 |
문희연 | 급제자의 집 | 사대부가의 과거 급제 축하 잔치로 전문 연희자들이 성대한 연희를 펼침 |
문희연을 치르기 위해 전문 연희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과거가 임방하면 지방 연희자들이 한양으로 몰렸다. 여러 놀이패가 상경해 문희연에 초청받기 위해 기량을 과시하는 모습을 <관우희> 44수와 45수에서 알 수 있다. 문희연의 연희자들은 주로 재인청에 소속된 재인이었다.
Episode 4: 전통연희의 무대
조선 전기 명나라 사신이 올 때는 광화문 밖 양쪽에 광화문처럼 높고 큰 산대를 하나씩, 모두 두 개를 만들었었다. 이후 임병 양란을 거치면서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졌고, 광화문 앞에 기존 대산대를 세우던 장소에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서 대산대를 세울 만한 공간도 부족했다. 또한 중국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며 중국 사신 영접의 열기가 시들해졌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소규모 산대를 사용했다. 아국돈의 <봉사도>에 그려진 산대는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니는 것으로 예산대, 산거, 산붕이라 불리던 것이다. 여기에는 맨 아래 낚시질하는 신선과 춤추는 선녀인형이 있고, 가운데 원숭이 인형, 맨 위에 붉은 옷을 입은 인형이 상반신만 보인다. 산모양 구조물에는 나무와 누대도 설치되어 있다. 이 인형 잡상들은 단순한 진열물이 아니라 기계장치로 움직이는 잡상놀이로 알려져있다. <기완별록>은 국가적인 산대 나례의 전통이 끊긴 정조 8년(1784년)에서 80여년이 지난 시점인 1865년 경복궁 중건 당시 축하 공연 모습을 묘사한 기록물이다. 이 때 거행된 대규모의 공연 행사는 부역을 고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지만 궁정 연극문화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산대놀이란 산대를 세우고 재인을 동원하여 거행한 국가적인
Episode 5: 죄가 된 풍자, 공길의 우희
우인 공길이 노유희(老儒戱)를 만들어 말하기를 '전하는 요순같은 임금이요, 저는 고요 같은 신하입니다.
요순 같은 임금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요 같은 신하는 언제나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또 <논어>를 외우며 말하길,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다워야합니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설사 쌀이 있은들 제가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임금은 그의 말이 공경스럽지 못하다고 해 형장을 치고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연산군일기> 11년 12월 29일조
이 우희가 연행된 날짜의 기록에서 연산군은 '나례는 배우의 장난으로, 볼 만한 것이 없다'고 이유를 들어 나례 중지를 명했다고 한다. 여기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로 <왕의 남자>가 있다.
Storytelling Network
Metaverse
메타버스의 구현 내용은 줄타기, 솟대타기, 땅재주 등 연희 종목들을 영상 갤러리로 구성하고, 해당 기량과 관계된 훈련/운동 영상을 함께 배치
전체 무드는 봉사도와 왕의 남자를 떠올렸을 때 가진 시각 자료들을 활용할 예정
references
- ↑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참고문헌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은영연도>, 1580, 요메이분코, 일본.
아극돈, <봉사도>, 1725.
<연산군일기>
<단종실록>
김홍도, <평안감사향연도>
김홍도, <8폭 평생도> 중 삼일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