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왕골공예육성현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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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현재까지의 화문석'''===
 
==='''해방 후 현재까지의 화문석'''===
8.15광복 이후 왕골 공예는 더욱 활발하여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수요의 급증되자, 생산자 및 정부의 노력으로 왕골공예품 장려정책을 펴 국내수요는 물론 수출산업에까지 확대 되었다.<ref>향토명인 : 음악/미술 : 초고장(草藁匠) 지역정보포털http://www.oneclick.or.kr/bbs/boardView.do?id=83&bIdx=80937&page=1&menuId=151&bc=0</ref>  강화 일대에는 18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화문석 재료인 왕골을 재배하는 농가가 1000여가구에 달했지만, 2000년대 초반엔 120여가구(재배면적 12.4㏊)로 줄었으며, 가구당 평균 재배면적도 100∼200평에 불과하며, 전업농가는 별로 없고 대개 부업으로 한다. 그나마 화문석을 직접 짜는 곳은 송해·양사면의 80여가구에 불과하다.<ref>서울신문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707211001#csidx641f39f96a57585bde93af267d203c9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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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광복 이후 왕골 공예는 더욱 활발하여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수요의 급증되자, 생산자 및 정부의 노력으로 왕골공예품 장려정책을 펴 국내수요는 물론 수출산업에까지 확대 되었다.<ref>향토명인 : 음악/미술 : 초고장(草藁匠) 지역정보포털http://www.oneclick.or.kr/bbs/boardView.do?id=83&bIdx=80937&page=1&menuId=151&bc=0</ref>  강화 일대에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화문석 재료인 왕골을 재배하는 농가가 1000여가구에 달했지만, 2000년대 초반엔 120여가구(재배면적 12.4㏊)로 줄었으며, 가구당 평균 재배면적도 100∼200평에 불과하며, 전업농가는 별로 없고 대개 부업으로 한다. 그나마 화문석을 직접 짜는 곳은 송해·양사면의 80여가구에 불과하다.<ref>서울신문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707211001#csidx641f39f96a57585bde93af267d203c9 </ref>
 
1990년대까지 강화읍 갑곶리에 자리잡고 있는 강화 풍물시장에는 화문석장이 열렸지만 사라지고 현재는 화문석을 판매하는 상점들만 모여있다. 화문석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생산량도 자연스럽게 감소했다.
 
1990년대까지 강화읍 갑곶리에 자리잡고 있는 강화 풍물시장에는 화문석장이 열렸지만 사라지고 현재는 화문석을 판매하는 상점들만 모여있다. 화문석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생산량도 자연스럽게 감소했다.
 
어머니의 화문석 가게를 이어받아 10년째 운영하는 최승기씨(44세)는 지금은 화문석만 가지고는 상점을 운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강화 왕골로 짠 돗자리와 중국산 제품의 가격은 최소 2배에서 3배 가량 차이가 난다며 방문한 손님들도 강화 화문석이 좋다는 것을 알지만, 가격대를 듣고 저렴한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한해에 판매되는 화문석은 20여점에 불과하다. 기업에서 한꺼번에 구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드물다.<ref> 경인일보 http://m.kyeongin.com/view.php?key=970994#rs</ref>
 
어머니의 화문석 가게를 이어받아 10년째 운영하는 최승기씨(44세)는 지금은 화문석만 가지고는 상점을 운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강화 왕골로 짠 돗자리와 중국산 제품의 가격은 최소 2배에서 3배 가량 차이가 난다며 방문한 손님들도 강화 화문석이 좋다는 것을 알지만, 가격대를 듣고 저렴한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한해에 판매되는 화문석은 20여점에 불과하다. 기업에서 한꺼번에 구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드물다.<ref> 경인일보 http://m.kyeongin.com/view.php?key=970994#rs</ref>

2019년 6월 25일 (화) 20:26 판

개요

조선시대까지 왕실과 양반, 교역품으로서도 인기가 높고 으뜸으로 알려진 화문석이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재의 상황과 이를 육성하기 위한 현황을 파악하였다.

해설

돗틀은 골풀을 이용하여 경사가 드러나지 않게 은경밀직으로 짜는 돗자리용 직기이며, 자리틀은 왕골이나 짚을 노경소직으로 거칠게 짜는 서민적이거나 막 사용하는 자리용 직기이며, 가마니틀은 가마니를 짜기 위한 직기인데, 돗틀과 유사한 형태이지만 폭이 더 좁고 바디 모양이 다르다.

일제강점기시대 화문석육성

일제강점기에는 민족말살 정책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가 탄압을 받았으나, 강화 화문석의 공예기술은 오히려 장려할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1919년에는 보통학교 어린이들에게 왕골을 짜는 기술을 가르키기 위하여 기술자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에게 염색하는 기술과 문양을 놓는 방법을 교육시켰다.[1] 또한 강화군청에서 재직했던 정혜채 선생은 <강화직물화연조합>을 만들어 [2] 강화 지역에서 생산되는 화문석의 품질 개선과 판로에 힘쓰며 화문석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후 <강화산업조합>에서 업무를 이어받아 화문석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한편 1937년에는 왕골, 슬리퍼, 핸드백, 바스켓, 화문석 등이 일본장을 발판으로 해외에 수출되기도 하였다.[3]

해방 후 현재까지의 화문석

8.15광복 이후 왕골 공예는 더욱 활발하여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수요의 급증되자, 생산자 및 정부의 노력으로 왕골공예품 장려정책을 펴 국내수요는 물론 수출산업에까지 확대 되었다.[4] 강화 일대에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화문석 재료인 왕골을 재배하는 농가가 1000여가구에 달했지만, 2000년대 초반엔 120여가구(재배면적 12.4㏊)로 줄었으며, 가구당 평균 재배면적도 100∼200평에 불과하며, 전업농가는 별로 없고 대개 부업으로 한다. 그나마 화문석을 직접 짜는 곳은 송해·양사면의 80여가구에 불과하다.[5] 1990년대까지 강화읍 갑곶리에 자리잡고 있는 강화 풍물시장에는 화문석장이 열렸지만 사라지고 현재는 화문석을 판매하는 상점들만 모여있다. 화문석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생산량도 자연스럽게 감소했다. 어머니의 화문석 가게를 이어받아 10년째 운영하는 최승기씨(44세)는 지금은 화문석만 가지고는 상점을 운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강화 왕골로 짠 돗자리와 중국산 제품의 가격은 최소 2배에서 3배 가량 차이가 난다며 방문한 손님들도 강화 화문석이 좋다는 것을 알지만, 가격대를 듣고 저렴한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한해에 판매되는 화문석은 20여점에 불과하다. 기업에서 한꺼번에 구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드물다.[6]


강화 화문석을 찾는 손님은 대부분 50대 이상이다. 이들은 강화 화문석의 품질을 잘 알기에 찾아오지만 그렇지 않은 30-40대는 화문석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최씨의 설명이다.

강화 완초 공예인 모임은 10여년전부 완초보존협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현재 50여명의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올해 강화군의 15개 초등학교는 체험학습 프로그램으로 강화 완초 공예를 배운다. 보존협회 회원들이 강의를 맡는다. 과거에는 화문석이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화문석 외에도 왕골을 이용해 열쇠고리와 휴대전화고리, 바구니 등 다양한 상품을 만든다.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이 소요되어 배우기도 쉽고 판매 제품을 만들기도 수월하다. 상화군청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여러 방법을 통해 강화 화문석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왕골공예육성현황

주요부품

가마니틀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부품이 있다.

  • 바디:빠개지거나 터지지 않는 참죽나무로 만든다. 베틀의 바디와 잉아의 구실을 같이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통나무에 구멍을 뚫었으므로, 새끼줄을 하나하나 사람의 손으로 꿰었으나, 근래에는 바디를 두 쪽으로 만들어서 쓴다. 따라서, 한쪽 구멍에 줄을 꿰고 나머지 반쪽은 이에 맞춘 뒤 조여 붙일 수 있어서 매우 편리하다.
  • 달대:참죽나무로 만든다. 긴 작대기에 바디와 같은 수의 구멍을 뚫었으며, 날줄을 매는 곳이다.
  • 바늘: 대나무로 만든 길고 곧은 것으로 베틀의 북 구실을 하는 긴 작대기이다. 끝에 귀가 달려서 짚을 꿰어 밀어 넣고, 또 바디질하는 사람이 걸어 주는 것을 당겨 내는 기구이다.
  • 돗바늘:가마니감을 다 짠 뒤에 반으로 접고 양옆을 꿰매는 데 쓰는 쇠바늘이다.

[7]

돗틀과 가마니틀의 차이

돗틀과 가마니틀은 바디의 형태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각자료

영상

얼듯보면, 틀은 비슷해보이지만, 가마니 짜는 방법과 돗자리를 짜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 김제신문, 김제지평선축제2014가마니짜기체험, 게시일: 2014년 10월 3일.

  • IRISmovie, 돗자리 짜기 (Korean mat Dotjari making), 게시일:2013년 10월 31일.

출처

  1. 향토명인 : 음악/미술 : 초고장(草藁匠) 지역정보포털http://www.oneclick.or.kr/bbs/boardView.do?id=83&bIdx=80937&page=1&menuId=151&bc=0
  2.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
  3. 완초공예 서순임 - HIINOUT http://iyoc.kr/portal/interview.asp?idx=121
  4. 향토명인 : 음악/미술 : 초고장(草藁匠) 지역정보포털http://www.oneclick.or.kr/bbs/boardView.do?id=83&bIdx=80937&page=1&menuId=151&bc=0
  5. 서울신문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707211001#csidx641f39f96a57585bde93af267d203c9
  6. 경인일보 http://m.kyeongin.com/view.php?key=970994#rs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4540&cid=46631&categoryId=46631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6월 정리 및 편집 손형남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