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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church service among Korean immigrants held at Mokuleia on O'ahu with Kim E-je [[김우제(김이제) 목사]] leading. Between 1903 and 1905, 400 Christians arrive from Korea, as many as 30 having done evangelical work prior to their departure from Korea. <ref> 출처: Hawaiihistory [http://www.hawaiihistory.org/index.cfm?fuseaction=ig.page&year=1903]</ref> | First church service among Korean immigrants held at Mokuleia on O'ahu with Kim E-je [[김우제(김이제) 목사]] leading. Between 1903 and 1905, 400 Christians arrive from Korea, as many as 30 having done evangelical work prior to their departure from Korea. <ref> 출처: Hawaiihistory [http://www.hawaiihistory.org/index.cfm?fuseaction=ig.page&year=1903]</ref> |
2019년 6월 24일 (월) 23:24 판
목차
역사
강화도 지역의 기독교는 감리교에 의해 시작되었다. 179개 교회 중에 120개가 감리교회다. 강화지역 기독교인 중에 감리교 소속이 77.6%나 된다.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회 선교를 개척한 미감리회 소속 선교사였다. 1893년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가 인천 책임자로 와서 독립계삭회가 구성되면서 선교확장의 열망이 강화지역으로 이어졌다. 당시 강화지역에 대한 감리교의 선교는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존스 목사와 인천의 노병일, 김기범, 이명숙, 백헬렌 등 한국인 전도자들이 강화선교에 열성을 쏟았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수도로 가는 관문이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해주 방면, 남으로는 덕적도를 경유해 충청도 당진까지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강화의 복음화는 황해도 전도를 위한 전진기지 확보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리하고 있던 스크랜턴은 1892년 12월 21일에 본국으로 보낸 편지에서 존스가 이미 1892년 말에 강화전도여행을 시도한 것과 더불어 강화지역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제물포와) 이웃해 있는 섬인 강화에는 7만 명 주민이 있는데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얻게만 된다면 우리에겐 값진 보화가 될 것입니다. 사실 발판은 이미 얻어 놓았습니다.”
강화의 근대정신에 영향을 미친 것은 기독교의 수용이다. 1893년부터 본격적으로 성공회, 감리교 등 기독교의 선교가 이루어지는데, 이들이 설립한 교회와 학교는 근대문물을 익히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특히 성재 이동휘가 [1907년 조선군대해산 당시 대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후일 교육운동으로 돌아서면서 합일초등학교, 보창학교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육기관을 설립하게된다. 이때 이동휘 등이 설립한 학교와 교회는 1919년 강화군 3.1만세운동의 근거지가 된다. [1]
강화 감리교인들은 다섯 가지 신앙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복음적 신앙이다. 성경 말씀대로 빚 탕감과 노예 해방을 직접 실천함으로써 삶을 통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 강화 주민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둘째, 자립신앙이다. 선교사의 지원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예배처소 구입과 운영 및 선교에 앞장섰다. 셋째, 토착적 신앙이다. 장례식에서 곡을 하는 대신 찬송을 부르고, 십자건을 쓰고 비석 대신 십자패를 세우는 등 복음을 우리 문화에 맞게 적용하였다. 넷째, 일자 돌림 신앙이다. 이름에 한 일(一)자, 또는 믿을 신 (信)자를 넣어 이름을 개명한 후 의형제를 맺고 강화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다섯째, 민족적 신앙이다. 항일 운동 및 1동 1학교 세우기 운동을 비롯한 사회 계몽운동, 마리산 부흥운동을 통해 민족 자주와 독립을 위해 앞장섰다. [2]
이렇게 미국에서 들어와 조선의 강화지역에 교세를 확장한 감리교는 하와이 이민을 통해 다시 미주로 나가게 되고 하와이에 한인 교인들의 손에 의해 한인감리교회를 세우게 된다. 외세에 의해서 열린 종교가 아닌 자생적인 종교로서의 강화감리교는 1893년 미국에서 들어와 김상임 전도사에 의해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고 1903년 다시 하와이로 나아가 김상임 전도사의 차남인 김우제(김이제) 목사에 의해 미국에서 최초의 한인예배를 드리게 되는 역사를 갖게 되었다. 조선 강화지역의 근대화, 신식 교육을 이끌었던 감리교는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들의 구심점으로 그 역할을 했다.
한인들은 단체의 조직과 더불어 자신들의 신앙심 함양과 정신적 안정을 찾고자 종교 특히 교회를 설립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를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인들은 자신들과 자녀들을 교육시키고자 교회당에 학교를 세웠다. 농장주들의 부당한 대우 속에서 한인들은 좀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세 개의 축을 형성해 나갔다. 이들은 먼저 단체를 조직하여 한인사회의 단결을 도모하는 한편, 이를 통해 농장주들의 비합리적인 행포를 막고자 했다. 친목도모에 머물러 있던 초기 한인단체의 성격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 헤이그 밀사였던 이준(李儁)의 자결, 장인환(張仁煥)과 전명운(田明雲)의 스트븐스(D. W. Stevens) 저격사건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추구하는 단체로 변모해 갔다. [3]
한인의 이민으로 인해 조선독립운동이 해외에서 벌어질까 전전긍긍했던 일본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1893년 조선의 강화에 들어온 감리교는 조선인의 손에 의해서 강화 일대로 퍼졌고 이후 10년이 지나 하와이부터 미주 본토에 이르는 독립운동터전을 갖게 되었다. 이 터전을 발판으로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대고 별도의 무장세력을 길러나갔으니 미주와 상해(만주/간도)라는 쌍두마차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조직적, 외교적으로 이끌게 된다.
이와 같은 강화감리교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이야기가 김상임 전도사 가문이다. 김상임 전도사는 강화에 감리교를 불러들였고 그 차남 김우제(김이제) 목사는 이 강화감리교를 다시 하와이에서 최초의 한인예배로 연결시켜 동생과 함께 한인감리교회를 세웠으며 이후 하와이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일대기가 그의 외아들 독립운동가 김동수 선생에까지 이르게 된다.
교산교회
강화 최초의 개신교 교회. 1893년 세워진 교항교회(현 강화교산교회)다. 1892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이며 인천 내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는 몇 차례 강화도에 들어오려고 시도했으나 강화 유수의 거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강화읍 남문에서 발길을 돌렸다. 이 때 강화도 시루미(지금의 양사면) 출신으로서 인천에 있던 이승환(양사면 시루미 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이 예수를 영접하고 인천 내리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인천의 교회계(계) '계꾼 교인'의 한 명이었다. 한 명의 계꾼이 50명의 돈을 갖고 도망갔으나 이승훈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존스 목사는 세례를 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술파는 사람이라서. 그리고 천국같이 좋은 곳을 가는 일을 고향에 계신 어머니보다 먼저 할 수는 없다고 해서. 그리고 같은 해 여름, 존스 목사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이승환의 요청으로 강화도 북쪽 해안까지 왔다. 그러나 지역 유지인 유학자 김상임의 반대로 육지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자 이승환은 한 밤중에 어머니를 업고 해안 갯벌을 지나 존스 목사가 있는 배로 갔다. 그리하여 존스 목사는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선상에서 세례를 베풀 수 있었다. 인천에서 활동하던 전도인 이명숙과 전도부인 백헬렌가 시루미로 파송되어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4~5명으로 시작한 예배는 불과 1년 만에 80명으로 부흥했다. 천민출신이 많은 시루미 마을에서 좀 떨어진 다리목에 살던 양반 김상임이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마을 전체가 개종했다. 김상임 전도사가 1894년 자기 집 앞마당에 예배당을 마련하자 시루미 마을교인들이 옮겨왔고 다리목(교항, 橋項)과 시루미(증산, 甑山)의 한자를 따서 교산교회라 이름 지었다.
교산 교회는 강화의 다른 지역 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그 흐름은 크게 세 줄기로, 첫 줄기는 홍의(홍의교회)를 거쳐 강화읍으로 해서 남쪽으로, 둘째 줄기는 고부(고부교회)를 거쳐 중서부로, 셋째 줄기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섬인 교동으로 연결되어졌다. 이러한 복음 전파의 흐름을 통해 강화는 선교 개시 10년 안에 강화전역에 교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얻었으며 현재는 150 여개의 감리교회가 있는 섬이 되었다.
박기현 목사(교산교회)는 "강화도 기독교의 특징은 복음을 있는 그대로 삶속에서 실천을 한다는 것이다"며, "그것이 강화 주민들에게 퍼져나가면서 기독교는 자유와 해방을 주는 실천적인 종교라는 인식이 확대 됐고, 강화도가 복음화 되는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4]
인물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 이승훈, 김상임 전도사, 종순일
강화도의 양반 중 선상세례의 과정에 감명을 받은 이가 있었다. 경주 김씨 가문으로 벼슬을 하지 않고 초시 신분으로 교항(현 교산)에 서당을 차려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던 김상임이 바로 그다. 양반이자 유학자요, 마을의 스승이던 김상임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자 그 파급효과는 컸다. 김상임의 가족은 물론 제자와 다리목과 시루미 마을 주민들도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강화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1895년 4월에 그는 15칸 초가와 토지를 기증했다. 이로써 시루미의 이승환 집에 모이던 천민들과 다리목 양반들이 한 곳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됐다. 이후 김상임이 마을의 가신과 산당을 불사르고, 말씀 공부에 집중한 결과 교산교회 신앙공동체의 교인 수가 급증하게 된다. 서민층 일색이던 신앙공동체에 양반층이 합세하며 강화교산교회는 복음을 전 지역으로 확산시키게 된다. 김상임의 개종은 개신교를 부녀자와 천민들이나 믿는 종교로 여기고 천시하던 주민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교산교회는 기존 서민층과 가세한 양반층이 어우러진 균형적인 발전이 이루어졌고, 강화지역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개종해 강화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김상임 전도사는 교산 감리교회 2대 담임자로 사역을 하고, 그의 장남 김홍제 전도사는 4대 담임자로, 그의 차남 김우제(김이제) 목사는 강화 중앙감리교회 3대 담임자로 목회를 하였다.
홍의교회
강화 두번째 개신교 교회. 교산교회 설립 3년 후인 1896년에 설립되었다. 이 마을 서당훈장이던 박능일이 교산교회의 김상임을 만나고 돌아와 자기 집(상도리 958번지)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서당학생 20여 명,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자기 집에서 홍의교회를 설립했다. 홍우, 홍해, 삼해라고도 불렸다. 구한말 제물포에 남, 여 매일학교가 하나씩 밖에 없었는데 강화 홍의교회에도 하나가 있었다. 1898년 교회 출석인 고씨부인이 별세했을 때 곡하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며 비석대신 십자패를 세웠다. 선원, 길상, 석모도, 주문도, 성검도, 영정도, 인천 등지에 전도하던 교회다.
인물
김상임 전도사의 개종 소식을 듣고 따지러 갔다가 박능일도 개신교에 감화되어 개종하게 되었다. 그는 서당을 운영하던 훈장이었다. 개종 이후 그의 서당은 근대 학교로 변모하였고 토담집은 예배당으로 바뀌어 자립적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1년도 채 안 되어 예배 출석 인원이 80명에 육박했다. 일자 개명을 처음 한 인물로 인천 제물포 영화학당 교사이기도 했다. 1900년 12월 평양신학회에서 전도사 과정 이수후 잠두교회에서 1901년 4월 1903년 2월까지 담임으로 시무했다. 존스 목사와 함께 잠두의숙을 설립했다. 1903년 3월 1일 별세. 당시 <신학월보>는 '기둥같은 선생을 잃었다'고 논평하였다.
홍의교회 신자 중 종순일은 <마18:23-35>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읽고 나서 자신의 구원을 1만 달란트빚을 탕감받은 자로 여겼다. 그는 당시 마을에서 부자여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들을 한 마당에 모았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빚문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제 여러분들은 제게 빚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선포 했다. 그리고 가산을 다 팔아서 강화도 근처의 섬들을 돌며 전도활동을 했다. 그는 예수를 믿고 삶을 뒤집어 버렸다. 부자가 가난한 자가 되어 복음 하나만 들고 섬들을 찾은 것이다. 이는 대한그리스도인 회보. 1900년 6월 6일자에 소개되었다. [5]
일자돌림
'믿음 안에서 하나', '첫 믿음'이라는 의미로 일자가 들어가는 이름으로 개명을 한다. 주 안에서 '하나'라는 의식이 우리 민족의 색채에 맞게 변모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홍의교회에는 최초로 믿게 된 7명의 교인이 있었다. 이들은 중대한 결단을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니 한 형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돌림자를 같이 쓰기로 했다. 항렬을 맞추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이 한 일(一)자이다. 성은 바꿀 수가 없으니 그대로 두고 이름의 끝자를 한 일자로 맞추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서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한 7가지 글자를 선택했다. 그래서 나온 것인 능(能), 신(信), 경(敬), 봉(奉), 순(純), 천(天), 광(光) 등이다. 이 첫 교인 7명은 이 글자를 하나 씩 뽑았다. 그리고 자기 성을 유지하고 가운데 글자를 이것으로 하고 끝은 한 일자로 항렬을 맞춘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인 바로 박능일(朴能一)과 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말기, 유교가 사회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그 시기에 이 사람들은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특히 박능일은 그 마을에서 훈장으로 유교의 선생이며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유교의 근간인 사농공상의 반상을 없애고, 아저씨와 조카, 위아래의 서열을 파괴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 형제라고 했으니 이것은 보통의 충격이 아니다. 그 당시의 생각을 뒤집어 버리고, 구조를 뒤바꾸어 버리며,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온 것이다. [6]
검정 옷
당시 홍의교회 출석 교인들은 옷을 검정색으로 통일해서 입고 다녔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의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흰 옷이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이를 보고 '검정개'라고 놀렸다.
강화중앙교회
강화 세번째 개신교 교회.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 박성일, 허진일, 김봉일 등 몇몇 교인이 강화읍 천교하(현 강화읍 신문리. 신문리 144번지, 초가 6칸 반)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오늘날 강화중앙교회의 모체(잠두교회)가 되었다.1900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강화지역 복음 전파 8년 만인 1900년에 수도 강화읍에 드디어 교회가 세워졌다. 다음해 4월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교회를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소요된 상당한 금액은 존스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매리에타(Marietta)에 살고 있던 교인, 찰스 오토(Charless Otto)가 보내 준 기금으로 충당되었다. 이로써 8년 전 존스가 강화성에 입성하려던 꿈을 강화토착인들에 의해 이루게 되었다. 이 교회는 설립 8개월 만에 강화에서 가장 넓고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강화 선교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교회명은 1914년‘잠두교회’에서‘강화읍교회’로 변경. 1975년 11월 ‘강화읍교회’에서 ‘강화중앙교회’로 변경되었다.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 교회를 직접 개척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주었다.
인물
초기 개척인물로는 박능일을 비롯하여 김봉일과 권신일, 윤정일, 정천일 등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일자(一字)’ 돌림신앙의 장본인들이었다.[7] 김우제(김이제) 목사가 잠두교회 3대 목사로 헌신했다.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형제가 이동휘와 관련되어 순교하였다. 유경근도 이 교회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다. 4대 담임이었던 홍승하는 후에 신민회를 조직한다.
더리미 순국지
갑곶 순교지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위치한 더리미 순국지에서 4명의 기독교인이 학살을 당했다. 1907년 대한 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던 날 강화도의 군인들과 주민들은 의병이 되었다.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고 읍내까지 들어와 30여명의 주민을 무차별 학살했으며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다. 그중에 김동수 권사, 김영구, 김남수, 김근식은 강화 중앙 교회에 다니는 독실한 신자였고 강화지역 반일 사상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였다. 일본군은 이들을 칼로 머리를 쳐 죽였고 강화도 감리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이 되었다. 1년 후 데밍 선교사는“이곳(강화)은 피의 세례를 통과 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이들의 순교의 피는 강화도에 오늘의 감리교회를 이룬 큰 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8]
합일초등학교
강화중앙교회는 교육선교를 위해 1901년 4월 1일에 존스 목사와 박능일 전도사가 신교육 기관인 교회부설로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였으며, 1902년에 또 여학교인 “합일여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민중교육을 시작하였다. 이후 두 학교는 하나의 학교로 통합되었는데, 오늘의 합일초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이 학교는 일제치하에 저항하는 민족운동과 한국 개화의 산실이 되어 왔다. 이 학교의 이름은 강화양명학과 강화감리교를 동시에 떠오르게 한다. 양명학에서의 '지행합일'이 학교 이름으로 발전했다는 주장과 개신교의 '하나님'에서 합일이라는 이름이 기원한다는 주장이 모두 공존한다.
길직교회
1919년 3월 9일 오후 3시경 길직리 예수교회당에서 길직리의 조종환(趙鍾桓)·장명순(張明淳)·장동원(張東元)·장상용(張相用)·장삼수(張三壽)·장흥환(張興煥) 등과 선두리의 황유부(黃有富) 전도사·연희정문학교 황도문(黃道文)·염성오(廉成五)·유희철(劉熙哲), 온수리의 유봉진(劉鳳鎭) 권사, 상방리의 이진형(李鎭亨) 목사 등이 회합하였다. 이들은 주로 길직교회와 선두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온 황도문과 조종환은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에 관한 상황을 전하고 강화에서도 만세운동을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돌아오는 장날 중 여건이 좋은 날을 정해 이진형 목사가 부내면 신문리의 잠두교회(강화중앙교회)와 의논하여 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여러 번의 협의를 통해 18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9] 피뫼교회라고도 불렸고 지금의 강화초대교회다.
강화지역 만세운동은 3월 8일에 길직교회(피뫼교회) 이진형 목사 사택에서 첫 논의가 있었고 3월 11일에 확인하고 3월 18일에 강화읍 전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날은 강화읍 장날이어서 2만여 명이 모여서 대규모 만세 시위를 벌였다. 강화도 주변인 인천과 개성에서는 3월 3일과 9일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강화도 지역의 3.11만세운동은 길상지역에서 준비되었고 강화읍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고 강화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그 만세운동은 봉화불로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는 그런 열정적인 운동이었다.
탑골공원과 서울역 학생대연합 시위에 가담하였던 연희전문학교 학생 황도문이 독립선언서를 몸속에 품고 고향 강화로 돌아왔다. 강화 길상면 선두교회 출신 황도문은 그 길로 바로 길직교회 유봉진 권사를 찾아가 서울 상황을 전하고, 강화에서도 만세 운동을 건의한다. [10]
서울에서 벌어진 3.1운동에 대해서 보고하고 독립선언문을 보면서 사전준비를 했다. 9일 주일예배를 마친 후 길직교회에서 앞에서 말씀드린 네 사람과 뜻을 같이하는 장윤백, 조종환, 장명순, 장동원 등 10여명이 만세운동을 할 지도부를 구성하고 만세시위준비를 본격화했다. 이들은 길직교회(강화초대교회)를 비롯해서 직하교회(길촌교회), 다로지교회(선두교회) 산뒤교회(선두중앙교회) 소속 청년들이었다. 3월 18일을 만세운동 거사일로 잡고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기로 인쇄했다. '강화인민에게' 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만들어 비밀리에 각 교회에 보냈다. 잠두교회(강화중앙교회) 전도부인 김유의는 독립선언서를 17일에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만세운동을 알렸다. 유봉진 권사는 섬으로 다니면서 독려했고, 16일 주일에는 보름도에서 열변을 토하며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고 전한다. 거사 전날인 17일에는 장윤백 집에서 밤을 세우고 일찍 강화읍에 들어온 유희철, 황일남, 황윤실, 장동원, 장명순 등의 결사대원들이 장보기 위해서 들어오는 주민들이 가장 많은 오후 2시경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강화읍 관청리와 신문리 사이에 흐르는 시냇물 사이에 있는 돌다리 부근에 있는 사람들을 한 곳으로 불러모아 태극기를 어깨에 걸고 백마를 타고 달려나와서 시위를 이끈 결사대장 유봉진이 종각에 올라 종을 치며 군중들을 종각 앞으로 집결시키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자 일제경찰은 태극기를 나눠주고 있는 유희철, 장상용, 조사신 등을 현장에서 체포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2만명에 이르자 일제경찰이 당황하기에 이른다. 한국인 순사들에게 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 유봉진은 시위대를 이끌고 군청에 이르러 당시 군수인 이봉종에게 만세 부를 것을 요구하자 겁에 질린 군수도 만세를 불렀다고 전한다. 그리고 잡혀간 사람들을 석방하게 하고 일경은 함성의 물결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3월 18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21-24일까지 교동에서 계속되었고, 길상면 온수리, 송해면, 하점면, 양사면, 삼산면 석모리, 선원면 냉정리, 양도면 인산리와 길정리, 불은면 두운리 등 강화 전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가열 차게 전개되었다고 전한다. 육지로 쫒겨갔던 일본경찰이 다시 들어와서 과격한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자 야간을 이용해서 봉화불 시위로 그 방법을 바꿔 만세운동을 계속했다. 이런 만세운동의 불길은 강화지역의 교육과 독립운동, 흥천학교와 합일학교 등을 설립하는 교육운동, 대동단 활동, 맹인들을 위한 점자 창안 등으로 이어져서 지금까지 교회 중심의 3.1운동은 강화군민들과 강화사회의 정신적 유산과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다. [11]
하와이 이민
대한제국 국민이 집단으로 미국 영토 하와이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고종황제의 윤허로 대한제국 발행의 집조(執照=여권)를 지참하고 이민 오면서부터이다. 하와이에 한인들이 오게 된 것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협회, 주한 미국 공사 앨렌과 그리고 동서개발회사 사장 데슐러 등이 노력한 결과이다. 이민이 성사될 수 있었던 전제 조건은 1882년 5월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조선과 미국과의 교류가 시작될 수 있었으며 또한 한인들이 미국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민 첫 배인 갤릭호로 102명의 한인이 1903년 1월 13일에 호놀룰루 항에 내리게 되었다. 이 들 중에는 인천 내리교회 (용동교회 혹은 제물포 웨슬레안 교회로도 알려짐) 교인들을 위시하여 경기 서부지방의 교회 교인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데슐러 사장이 이민자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내리교회 목사이며 인천과 강화를 포함한 서부지방을 관할한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가 교인들에게 하와이 이민을 권장했기 때문이다. 존스는 하와이는 기후가 좋고, 자녀교육의 기회가 좋고, 급료가 높고, 집과 의료비를 준다면서 하와이 이민을 권장하였다. 존스의 설득으로 그가 맡은 서부지방의 여러 교회 교인 28 가족이 이민대열에 올랐다. 이들을 실은 일본선 겐카이마루(玄海丸)가 제물포항을 떠나는 1902년 12월 22일에 존스 목사는 항구에 차일을 치고 환송예배를 드렸다. 존스는 이들에게 책자도 주고 또 이민단 지도자에게는 하와이 감리사에게 쓴 소개장을 주었다. 목포와 부산을 거쳐 이틀 후 일본의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1월 2일 미국선 갤릭호를 타고 호놀룰루로 오는 10일 동안 내리교회 교인 안정수와 김우제(김이제) 목사가 매일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설교와 전도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호놀룰루에 내릴 때에는 8명의 새로운 신자가 생겼다. 호놀룰루 항에는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의 감리사 피어슨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아후 섬 북쪽에 있는 와이알루아 농장의 모쿨레이아 캠프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3월 3일에 도착한 두 번째 배에는 64명의 한인이 왔는데, 이 배에는 동서개발회사에 다니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한 현순이 통역관으로 왔다. 이 그룹은 오아후 북쪽에 있는 카후쿠농장으로 갔다. 한인들이 계속하여 도착하였고, 피어슨 감리사는 한인이 배치된 여러 농장을 방문하며 야간학교를 세워 일주일에 몇 번씩 영어 반을 열도록 도와주었다. 그 후 1905년 8월 8일까지 2년 반 동안 약 7,400명의 한인이 하와이에 도착하여 30여개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같은 민족 노동자들이 모여 살도록 숙소를 배정하였음으로, 각국의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마을, 즉 일본인 마을, 한인 마을, 폴투갈인 마을 등에 살았다. 그 후 5년 동안에 이 노동자들 중 약 2,000명은 미주 본토로 이사하였고, 약 1,000명은 귀국하였다. 그래서 1910년 미국의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을 때, 하와이에 4,533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던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이 중에는 하와이에서 출생한 미국 시민 어린 아이 36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12]
First church service among Korean immigrants held at Mokuleia on O'ahu with Kim E-je 김우제(김이제) 목사 leading. Between 1903 and 1905, 400 Christians arrive from Korea, as many as 30 having done evangelical work prior to their departure from Korea. [13]
하와이 한국 이민을 추진․성사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이는 주한 미국공사 알렌(H. N. Allen, 安連)이었다. 알렌이 하와이 한국 이민을 추진하게 된 동기와 목적은 무엇일까? 첫째, 한국 이민을 실현한다면 그만큼 한미 간에 경제적 유대 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이에 따라 미국의 한국 독립에 대한 관심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인 하와이 이민은 한국에게는 기근(饑饉) 극복책이 될 뿐만 아니라 외화 획득으로 당면한 경제난 타개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상 정치적․경제적으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알렌은‘이민이권’에 적극 개입한 것이다. 이리하여 1903년 1월부터 1905년 7월까지 65회 선편으로 총 7,226명의 한국 이민이 하와이로 떠났다. 신체검사 불합격자 및 질병으로 입국이 거부되어 본국으로 귀환한 479명을 제외하면 이민 실수는 6,747명이다. 이와 같이 한국인 하와이 이민이 급증하자 일본은 한국인 하와이 이민 제한치로‘해외 이민 금지령’(1905. 4. 3)을 발동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자기네가 한인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한국인의 미국이민을 중단시킨다 [14]- 한국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1905년 12월까지 한국 하와이 이민은 계속되어서 한국인 이민 총수는 7,394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7천여 명의 한국 이민이 오늘날 미주 한국 교민의 뿌리가 되었고, 나아가서는 일제강점기 미주에서의 한국 민족운동의‘기층 세력집단’으로 성장했다.
첫 이민자 중엔 기독교도가 많았다. 기독교인이 약 4백명, 전도사도 30명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민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했다.1903년 6월 14일 하와이 목쿨리어 농장에서 김우제(김이제) 목사의 주례로 첫 예배를 보았다. 이어 11월 10일 호놀루루에 사는 동포들이 안정수, 우병길을 대표로 정하고 감리교회 감리사 피어슨을 만나 홍승하 목사의 지도로 '한인전도회'를 발족하였다. 이것이 미국에서 한인감리교회의 출발이었다. 이민교회는 시작한지 10년만에 하와이 각 지방의 예배당수가 39개, 교인은 2,800명에 달했다. 또 본토에서도 한인예배당은 7개소에 교인은 452명이 된다. 이들 교회는 이민자들이 집단으로 일하고 있던 하와이의 오아후섬의 와이알루아와 가후쿠 농장에 처음 세워졌다. 1903년 11월 10일 하와이 오하우섬에서 미국 최초의 한인이민교회가 탄생했다. 현재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효시인 한인감리교선교회가 이날 첫 주일 예배를 드렸다. 교회 설립은 안정수, 윤병구씨 등 항일운동의 구심점인 신민회 설립자들이 주도했다. 하와이 감리교회 선교부 조지 피어슨 목사도 선교회 조직에 힘을 보탰다.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처음 미국령을 밟은 사탕수수 한인 이민자들이다.
1903년 1월12일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102명의 초기 사탕수수 이민자 중 절반 이상이 첫 예배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하와이에만 한인교회가 14개나 생겨났다. 당시 한인 교인 수는 402명. 그로부터 10년 후인 1914년에는 하와이 교회 수가 39개로 늘었고 교인 수는 2800명에 이르렀다. 하와이에서 첫 주일 예배가 열린 지 꼭 4개월만인 1904년 3월 11일 미국 본토에 최초의 한인교회가 세워진다. 그 다음 해인 1905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상항 한국인연합감리교회'가 설립됐고 1906년에는 제퍼슨장로교회로 불리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1914년에는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 1919년 시카고한인감리교회 1921년 뉴욕감리교회 순으로 세워졌다. [15]
이민자들은 자녀를 예배당에 보내어 종교적인 교육을 받게 했는데 이때가 한인교회의 전성기였다. 교회마다 한글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에 비중을 두었다. 이 때부터 이민교회는 신앙공동체뿐만아니라 민족공동체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다. 일본에게 조국을 빼앗긴 후 교회를 중심으로 미국으로 건너오는 독립운동자를 지원하고 모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 이민교회는 독립운동의‘요람’이 된다. 이들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름도, 빛도 없이 조국광복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렸다.[16]
관련 사이트
- 한국기독교회사 [9]
- 격월간문화비평지 플랫폼 [10]
- 국민일보 선정 아름다운 교회길 (5) 강화중앙교회 [11]
- 강화도에 들어온 복음이 조선 팔도로! 온누리신문 [12]
- 강화도 감리교회의 발자취 양진교회 담임목사 최훈철 [13]
- “강화 감리교 신앙운동에서 배운다”크리스천위클리.2017.12.06 [14]
- 강화디아스포라 [15]
- 강화내리감리교회100년사 [16]
- 하와이 이민 100년사 [17]
- 개인블로그 [18]
- 개인블로그 [19]
- 개인블로그 [20]
- 개인블로그 [21]
참고문헌
- 『강화중앙교회100년사』이은용
출처
- ↑ 출처: 강화군 지역정치의 어제와 오늘(1). 인터넷 강화뉴스. 2017.11.16 [1]
- ↑ 출처: “강화 감리교 신앙운동에서 배운다”크리스천위클리.2017.12.06 [2]
- ↑ 출처: 또 하나의 역사 퍼즐,『국민보(國民報)』[3]
- ↑ 출처: 강화도 선교 120년 역사를 한눈에. 노컷뉴스.2013.04.25 [4]
- ↑ 출처: 홍의교회 이야기. 아이굿뉴스_기독교연합신문.2012.11.29
- ↑ 출처: 홍의교회 이야기. 아이굿뉴스_기독교연합신문.2012.11.29
-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 ↑ 출처: 생명의 샘가. 2015.06.06 [6]
- ↑ 출처: 길직교회 3·1운동 만세시위 모의지. [7]
- ↑ 출처:“감리회, 그 날의 만세운동 재현한다”.기독교타임즈. 2019.02.13
- ↑ 출처: 군수와 서장까지 쫒아낸 강화지역 3.1운동. 연합기독뉴스. 2015.03. 12
- ↑ 출처: 이민 108주년 기념 특별연재. 하와이 한인이 애용한 조국 상징물. 한국일보. 코리아타임즈하와이. 2011.01.12
- ↑ 출처: Hawaiihistory [8]
- ↑ 출처: 이민 초기부터 시작된 교회생활. 한호일보.2012.12.13
- ↑ 출처:그때 그 사건 - 미국 최초 한인이민교회. 107년전 하와이서 첫 교회 설립, 미주 한인교계 태동의 불씨돼. LA중앙일보2010.11.10
- ↑ 출처: 이민 초기부터 시작된 교회생활. 한호일보.2012.12.13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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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 편집 및 정리 | 최원재 | 교육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