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하도동(下道洞)"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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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ig>石洲卜宅五流'''川''' (<small>석주복택오류'''천'''</small>) 석주선생 오류천에 자리 잡고 살았는데, <br />陂上櫻桃幾百'''年''' (<small>피상앵도기백'''년'''</small>) 언덕 위의 앵두나무 몇 백 년이 되었는가.<br />讀罷碑文如復見 (<small>독파비문여복견</small>) 비문을 읽고 나니 다시 선생을 보는 듯,<br />羹牆遺意士皆'''然''' (<small>갱장유의사개'''연'''</small>) 우러러 사모하는 뜻 선비라면 모두 같네.<br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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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절개와 행실을 갈고 닦아서 벼슬길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 | ○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절개와 행실을 갈고 닦아서 벼슬길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 | ||
다. 광해군 때에 궁류시(宮柳詩)에 연좌되어 해를 당하고서 이곳 오류천(五流川) 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 소유동(小有洞) 앵도파 | 다. 광해군 때에 궁류시(宮柳詩)에 연좌되어 해를 당하고서 이곳 오류천(五流川) 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 소유동(小有洞) 앵도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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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워 기문을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 세워 기문을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 ||
− | + | “강화부 서쪽 오리천은 석주 선생의 유지이다. 선생의 휘는 필(韠)이요 자는 여장(汝章)으로 습재 선생 권벽(權擘)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고, 계부(季父)생원부군 휘 별(撇)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일찍이 과거에 뜻이 없어 포기하고 관직에 제수되어도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의 번거로움을 피해 이곳에 집을 짓고 거주하니 원근의 학자(學子)들이 선생의 명성을 듣고 다투어 몰려들어 구의(摳衣 ; 옷을 걷어 올려 존경을 표함)로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 선생은 나날이 가르쳐 성취시키는 것을 일로 삼았고, 때때로 시를 읊으며 스스로 소일하여 늙음에 이르는 것도 알지 못 하였다. 수년간 거하였는데 강화유수가 | |
재물에 빠져 아비를 시해한 옥사를 관대히 처결하자, 선생은 소를 올려 그 죄를 바로잡았고, 드디어는 이곳을 떠나 현석강으로 돌아가 살았는데 스스로 호하여 석주(石洲)라 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공이 일찍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문사를 엄선할 때 선생은 유생으로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 죽창 구용(具容)과 함께 화친을 주장하는 두 상신을 참수할 것을 청하는 글을 써 올렸다. 이이첨(李爾瞻)을 남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담을 넘어서 피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 4) 무옥(誣獄)에 궁류시(宮柳詩 ; 광해군 비 유씨의 아우 柳希奮 등 척족들의 방종을 비방한 시)로 연좌되어 화를 입었으니 간악한 무리들의 모해로 그렇게 된 것이다. 계해년(1623, 인조 즉위년) 인조의 개옥(改玉ㆍ왕은 佩玉으로 즉법을 고침, 인조반정을 이름)에 이르러 선생에게 지평을 추증하고 그 후사를 관직에 채용하니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이다. 선생은 자질이 매우 뛰어났고 안으로 행실이 심히 조신하셨으며 염락(濂洛)의 여러 책을 읽어 그 견해가 두루 통하여 밝았다. 또한 도학정맥(道學正脈) 한 편을 저술하였으니 그 초(抄)하고 평(評)함이 자세하고 적절하니, 문장을 짓는 일은 실로 여가의 일인데, 세상에서 선생을 아는 이들은 다만 시를 잘 한다고만 알고 깊이 쌓인 것을 다 살피지 못하니 역사 아는 것이 천박하다. 불초한 제가 무오년 1738, 영조 14) 가을, 강화부에 부임하여 선생의 유거(遺居)를 내방하니, 황폐한 집터며 부서진 섬돌들은 오히려 이곳이 유거임을 판별하게 한다. 반환정(盤桓亭), 앵도파(櫻桃坡), 소유동(小有洞) 등 여러 명승지는 선생의 시집 중에서 지칭한 곳이며, 또한 고로(古老)들도 가리켜 전해져 설명한 곳이기도 하다. | 재물에 빠져 아비를 시해한 옥사를 관대히 처결하자, 선생은 소를 올려 그 죄를 바로잡았고, 드디어는 이곳을 떠나 현석강으로 돌아가 살았는데 스스로 호하여 석주(石洲)라 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공이 일찍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문사를 엄선할 때 선생은 유생으로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 죽창 구용(具容)과 함께 화친을 주장하는 두 상신을 참수할 것을 청하는 글을 써 올렸다. 이이첨(李爾瞻)을 남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담을 넘어서 피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 4) 무옥(誣獄)에 궁류시(宮柳詩 ; 광해군 비 유씨의 아우 柳希奮 등 척족들의 방종을 비방한 시)로 연좌되어 화를 입었으니 간악한 무리들의 모해로 그렇게 된 것이다. 계해년(1623, 인조 즉위년) 인조의 개옥(改玉ㆍ왕은 佩玉으로 즉법을 고침, 인조반정을 이름)에 이르러 선생에게 지평을 추증하고 그 후사를 관직에 채용하니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이다. 선생은 자질이 매우 뛰어났고 안으로 행실이 심히 조신하셨으며 염락(濂洛)의 여러 책을 읽어 그 견해가 두루 통하여 밝았다. 또한 도학정맥(道學正脈) 한 편을 저술하였으니 그 초(抄)하고 평(評)함이 자세하고 적절하니, 문장을 짓는 일은 실로 여가의 일인데, 세상에서 선생을 아는 이들은 다만 시를 잘 한다고만 알고 깊이 쌓인 것을 다 살피지 못하니 역사 아는 것이 천박하다. 불초한 제가 무오년 1738, 영조 14) 가을, 강화부에 부임하여 선생의 유거(遺居)를 내방하니, 황폐한 집터며 부서진 섬돌들은 오히려 이곳이 유거임을 판별하게 한다. 반환정(盤桓亭), 앵도파(櫻桃坡), 소유동(小有洞) 등 여러 명승지는 선생의 시집 중에서 지칭한 곳이며, 또한 고로(古老)들도 가리켜 전해져 설명한 곳이기도 하다. | ||
상하의 두 연못에 이르러서는 지금은 벼논이 되어 옛날의 맑은 물결이 없어, 배회하며 쓸쓸한 감상을 억제할 수 없다. 드디어 초당 옛 터에 짧은 표(表)를 세워 사실을 간략히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알리노니 이 역시 선생을 경모하고 추념하는 뜻이 깃든 것이다. 나를 뒤이어 오는 사람이 만약 더욱 뜻이 있어 이를 보호하여 비문이 벗겨져 떨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지켜준다면 어찌 비단 자손들만의 사사로운 다행이겠는가.” | 상하의 두 연못에 이르러서는 지금은 벼논이 되어 옛날의 맑은 물결이 없어, 배회하며 쓸쓸한 감상을 억제할 수 없다. 드디어 초당 옛 터에 짧은 표(表)를 세워 사실을 간략히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알리노니 이 역시 선생을 경모하고 추념하는 뜻이 깃든 것이다. 나를 뒤이어 오는 사람이 만약 더욱 뜻이 있어 이를 보호하여 비문이 벗겨져 떨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지켜준다면 어찌 비단 자손들만의 사사로운 다행이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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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 ||
− | + | * 하도동(下道洞) : 송해면 하도리이다. | |
− | + | * 오류천 : 송해면 하도2리 오류내 마을에서 다섯 개울물이 합해져 바다로 흘러간다. 오리천(五里川)이라고도 한다. |
2019년 5월 25일 (토) 00:07 기준 최신판
石洲卜宅五流川 (석주복택오류천) 석주선생 오류천에 자리 잡고 살았는데,
陂上櫻桃幾百年 (피상앵도기백년) 언덕 위의 앵두나무 몇 백 년이 되었는가.
讀罷碑文如復見 (독파비문여복견) 비문을 읽고 나니 다시 선생을 보는 듯,
羹牆遺意士皆然 (갱장유의사개연) 우러러 사모하는 뜻 선비라면 모두 같네.
○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절개와 행실을 갈고 닦아서 벼슬길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
다. 광해군 때에 궁류시(宮柳詩)에 연좌되어 해를 당하고서 이곳 오류천(五流川) 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 소유동(小有洞) 앵도파
(櫻桃坡)와 반환정(盤桓亭)이 있었는데 지금도 명칭이 전해진다. 사손(嗣孫) 권적(權樀)이 강화부의 유수가 되었을 때에 그 유허에 비를
세워 기문을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강화부 서쪽 오리천은 석주 선생의 유지이다. 선생의 휘는 필(韠)이요 자는 여장(汝章)으로 습재 선생 권벽(權擘)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고, 계부(季父)생원부군 휘 별(撇)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일찍이 과거에 뜻이 없어 포기하고 관직에 제수되어도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의 번거로움을 피해 이곳에 집을 짓고 거주하니 원근의 학자(學子)들이 선생의 명성을 듣고 다투어 몰려들어 구의(摳衣 ; 옷을 걷어 올려 존경을 표함)로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 선생은 나날이 가르쳐 성취시키는 것을 일로 삼았고, 때때로 시를 읊으며 스스로 소일하여 늙음에 이르는 것도 알지 못 하였다. 수년간 거하였는데 강화유수가 재물에 빠져 아비를 시해한 옥사를 관대히 처결하자, 선생은 소를 올려 그 죄를 바로잡았고, 드디어는 이곳을 떠나 현석강으로 돌아가 살았는데 스스로 호하여 석주(石洲)라 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공이 일찍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문사를 엄선할 때 선생은 유생으로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 죽창 구용(具容)과 함께 화친을 주장하는 두 상신을 참수할 것을 청하는 글을 써 올렸다. 이이첨(李爾瞻)을 남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담을 넘어서 피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 4) 무옥(誣獄)에 궁류시(宮柳詩 ; 광해군 비 유씨의 아우 柳希奮 등 척족들의 방종을 비방한 시)로 연좌되어 화를 입었으니 간악한 무리들의 모해로 그렇게 된 것이다. 계해년(1623, 인조 즉위년) 인조의 개옥(改玉ㆍ왕은 佩玉으로 즉법을 고침, 인조반정을 이름)에 이르러 선생에게 지평을 추증하고 그 후사를 관직에 채용하니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이다. 선생은 자질이 매우 뛰어났고 안으로 행실이 심히 조신하셨으며 염락(濂洛)의 여러 책을 읽어 그 견해가 두루 통하여 밝았다. 또한 도학정맥(道學正脈) 한 편을 저술하였으니 그 초(抄)하고 평(評)함이 자세하고 적절하니, 문장을 짓는 일은 실로 여가의 일인데, 세상에서 선생을 아는 이들은 다만 시를 잘 한다고만 알고 깊이 쌓인 것을 다 살피지 못하니 역사 아는 것이 천박하다. 불초한 제가 무오년 1738, 영조 14) 가을, 강화부에 부임하여 선생의 유거(遺居)를 내방하니, 황폐한 집터며 부서진 섬돌들은 오히려 이곳이 유거임을 판별하게 한다. 반환정(盤桓亭), 앵도파(櫻桃坡), 소유동(小有洞) 등 여러 명승지는 선생의 시집 중에서 지칭한 곳이며, 또한 고로(古老)들도 가리켜 전해져 설명한 곳이기도 하다. 상하의 두 연못에 이르러서는 지금은 벼논이 되어 옛날의 맑은 물결이 없어, 배회하며 쓸쓸한 감상을 억제할 수 없다. 드디어 초당 옛 터에 짧은 표(表)를 세워 사실을 간략히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알리노니 이 역시 선생을 경모하고 추념하는 뜻이 깃든 것이다. 나를 뒤이어 오는 사람이 만약 더욱 뜻이 있어 이를 보호하여 비문이 벗겨져 떨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지켜준다면 어찌 비단 자손들만의 사사로운 다행이겠는가.”
인물
- 권필(1569∼1612)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 염락(濂洛) : 중국 송대 성리학의 두 계파로, 염은 염계의 주돈이, 낙은 낙양의 정호·정이를 이른다.
참고
- 하도동(下道洞) : 송해면 하도리이다.
- 오류천 : 송해면 하도2리 오류내 마을에서 다섯 개울물이 합해져 바다로 흘러간다. 오리천(五里川)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