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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감리교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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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개관==
강화 서도 중앙교회 건물은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지은 한옥 예배당이다. 1902년 감리교 전도사 윤정일이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이곳 주문도리에 들어왔고, 1905년에는 교회와 신도가 마음을 모아 영생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이 교회를 새로 지었다. 1978년 주문교회에서 서도 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붕은 옆에서 볼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홑처마집이다. 건물 안은 중세 전기의 서양교회 양식을 하고 있으나 매우 단순하여, 예배실로 쓰이는 좁은 신랑(身廊)과 측랑(側廊), 중앙의 강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전통 목조건물의 가구형식을 바탕으로 서양교회를 지었다는데 큰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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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서도 중앙교회 건물은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지은 한옥 예배당이다. 1902년 감리교 전도사 윤정일이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이곳 주문도리에 들어왔고, 1905년에는 교회와 신도가 마음을 모아 영생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이 교회를 새로 지었다. 강화도는 19세기 말 우리 나라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할 그 전진적 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고, 따라서 서양인들의 선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이들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거나 그들의 영향에 의해 당시에 세워진 교회 중 지금까지 강화도에 남아있는 것만 3곳에 이른다. 1900년에 세운 성공회 강화 성당, 1906년에 세워진 강화 온수리 성공회교회 그리고 서도 중앙 교회가 현존하고 있는 당시의 교회들이다. 그 중 서도 중앙 교회는 1923년 2월 교인들의 건축 헌금으로 지어지기 시작해 같은 해 7월에 한옥 예배당으로 완공되었으며, 1978년 주문 교회에서 서도 중앙 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재 대한 기독교 감리회 소속이다.
  
==영국 성공회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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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감리교 전래==
한국 땅에 성공회가 들어온 것은 천주교가 100년의 박해를 받은 후 개항과 함께 막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하던 때이다. 영국이 강화도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동기는 강화도가 영국 성공회의 뿌리가 되었던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아이오나(Iona)섬’과 유사한 입지인데다 병인·신미양요를 경험한 강화도민들이 프랑스나 미국에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군양성을 위해 강화도에 들어갔었던 영국인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화도는 유배지로 역사적으로 많은 소외와 압박을 받았고, 그전까지는 교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지역으로 파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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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는 1887년부터 인천에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선교사와 한국인 교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892년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가 인천에 정착하여 조력자들의 협조로 점차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고 인천은 감리교 서부선교기지로 자리 잡았다. 1893년 성공회와 마찬가지로 감리교의 강화 선교가 시작되었다. 인천 내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환이 존스 목사를 고향인 강화 서사면 시루미에 초빙하여 그 모친과 지역 양반 유지인 김상임(후에 [[김상임 전도사]]가 된다)에게 전도한 결과 [[교산교회]]가 태동활 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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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에는 각 면마다 교회가 설립되었고 전체 강화주민의 약 10%가 감리교 신자가 되는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더욱이 강화의 기독교인들은 선교 초기부터 신앙교육과 계몽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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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신편 강화사』, 강화군:강화군 편찬위원회, 2003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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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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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서도면 면소재지이며 주문도 외의 부속섬은 볼음도, 아차도, 말도 등이 있다. 주문도의 이름은 예사롭지 않다. 조선 후기에 임경업(林慶業) 장군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장군이 중국의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임금에게 하직하는 글을 이 섬에서 올렸다 하여 아뢸 주(奏), 글월 문(文)을 써서 주문도(奏文島)라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주문도(注文島)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임경업 장군과 관련하여 물가를 뜻하는 삼 변에 임금 주(主)자를 합한 주(注)자와 글월 문(文)자를 써서 주문도라 부른다고 전해져오고 있다. 이 외에도 옛날에 사신단이 중국을 왕래할 때 한양의 국왕에게 기나긴 여정을 보고하는 글을 올렸다는 유래를 갖고 있다.
  
 
==건축==
 
==건축==
본채인 예배당 건물과 2층 종탑 건물로 구성되어있다. 초기 서양 기독교 양식의 2고주(高柱) 5량가(梁架)의 합각지붕 건물로, 성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문루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으로 이루어져있다. 원래 본채 건물의 외벽은 목조기둥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조적조로 변형되어 있는데, 서도의 중앙교회 건물 구조 및 양식과 매우 흡사하다. 성당 정면은 건물의 서면으로 출입구이고, 중앙 칸에는 두 짝의 양식 판문(板門)의 문비(門扉)를 달았다. 양측 칸은 중앙에 유리창문을 설치했고 중방 밑은 벽돌을 쌓아 벽체로 하였다. 기둥 위 창방과 납도리 사이에는 접시받침을 배치하여 건물의 격을 높였다. 건물의 동면은 중앙 칸에 양식 판문 한 짝을 설치하여 본당 뒷문으로 삼았고, 양측 칸은 중방 위에 작은 유리창을 달았다. 건물의 남면은 양단 한 칸만 기둥위 창방과 납도리 사이에 접시받침을 설치하였다. 강화읍 성당과 유사하게 외삼문형식의 종루를 통해 진입하나 당시 무덤이 많았던 주변의 대지조건 때문에 종루와 성당, 그리고 사제관이 일직선 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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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형식은 2고주(高柱), 5량가(梁架)의 가구구조를 가졌다. 평면 구성은 중세 초기 서양교회 형식이나 매우 단순하며 예배실로 쓰이는 좁은 신랑(身廊:Nave)과 측랑(側廊:Aisle), 그리고 전면 중앙 강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단 뒤에는 사제석(司祭席)이 마련되어 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홑처마집이다. 건물 안은 중세 전기의 서양교회 양식을 하고 있으나 매우 단순하여, 예배실로 쓰이는 좁은 신랑(身廊)과 측랑(側廊), 중앙의 강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전통 목조건물의 가구형식을 바탕으로 서양교회를 지었다는데 큰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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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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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문루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본당 내부는 중앙에 두 줄의 고주(高柱)를 세우고 비교적 가는 부재(部材)로 된 보를 걸었으며, 고주 머리에서 보 밑을 초공으로 받쳤다. 보 위 중앙에는 판대공(板臺工)으로 마루도리를 받쳤으며, 마루도리 밑에는 직접 장혀[長舌]을 붙이지 않고 접시받침을 배치하고 접시받침 밑에 장혀형 장재(長材)를 걸었다. 본당의 중방 밑 벽돌벽은 20년 전에 기둥하부 부식이 심하여 절단하고 중방 밑 전체를 벽돌벽으로 보수한 것이다. 원래는 입방체 화강석 기초 위에 세워진 2조 호형(弧形)으로 귀깍음한 각주(角柱)의 벽체는 전통기법의 회벽처리로 마감하였다. 현재 화강암 초석은 부근에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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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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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루 건물은 원래 모두 전통 목재건축기법으로 축조한 것으로 현존 건물과 같은 모습의 건물이었으나, 본당 보수시 부식이 심했던 기둥과 벽체를 모두 해체하고 시멘트 블록으로 축조하고, 지붕만 목조건축으로 꾸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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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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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은 전통기와로 덮었으며, 처마는 홑처마로서 팔작지붕이다. 용마루 양끝에는 연꽃 모양으로 된 곡선미를 살린 돌십자가가 달려 있고, 합각 중앙에는 십자가 모양으로 붉은 벽돌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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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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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과 거의 돌아앉은 사제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은 트롤로프신부가 1896년 강화도에 부임하여 선교를 시작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후 사제관이 퇴락하자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제관은 영국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인 사제가 한국 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여 왔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다.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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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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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리성당 내부는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카' 양식으로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개 기둥으로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강화성당의 구조와 달리 회중석 가운데 복도가 남녀석을 구분하고, 후진이나 고창(Clear story) 같은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은 생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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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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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관련 사이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0140000,23&pageNo=5_2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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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지식백과 <대한민국구석구석> "강화서도중앙교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30787&cid=42856&categoryId=42856
*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2_1_0&ccbaCpno=21123005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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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0140000,23&pageNo=5_2_1_0
* 네이버지식백과 <문화유산 알아보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6458&cid=58838&categoryId=58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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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지식백과 <주문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4124812&cid=43737&categoryId=59567
* 네이버지식백과 <미술대사전> "바실리카"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0641&cid=42635&categoryId=4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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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지식백과 <인천 보물섬에 놀자> "주문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83657&cid=58712&categoryId=58712
*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46037&cid=40942&categoryId=33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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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92861&cid=40942&categoryId=33081
  
 
=='''출처'''==
 
=='''출처'''==

2019년 6월 20일 (목) 20:46 기준 최신판

강화서도중앙교회 [江華西島中央敎會]



개관

강화 서도 중앙교회 건물은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지은 한옥 예배당이다. 1902년 감리교 전도사 윤정일이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이곳 주문도리에 들어왔고, 1905년에는 교회와 신도가 마음을 모아 영생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이 교회를 새로 지었다. 강화도는 19세기 말 우리 나라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할 때 그 전진적 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고, 따라서 서양인들의 선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이들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거나 그들의 영향에 의해 당시에 세워진 교회 중 지금까지 강화도에 남아있는 것만 3곳에 이른다. 1900년에 세운 성공회 강화 성당, 1906년에 세워진 강화 온수리 성공회교회 그리고 서도 중앙 교회가 현존하고 있는 당시의 교회들이다. 그 중 서도 중앙 교회는 1923년 2월 교인들의 건축 헌금으로 지어지기 시작해 같은 해 7월에 한옥 예배당으로 완공되었으며, 1978년 주문 교회에서 서도 중앙 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재 대한 기독교 감리회 소속이다.

강화 감리교 전래

감리교는 1887년부터 인천에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선교사와 한국인 교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892년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가 인천에 정착하여 조력자들의 협조로 점차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고 인천은 감리교 서부선교기지로 자리 잡았다. 1893년 성공회와 마찬가지로 감리교의 강화 선교가 시작되었다. 인천 내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환이 존스 목사를 고향인 강화 서사면 시루미에 초빙하여 그 모친과 지역 양반 유지인 김상임(후에 김상임 전도사가 된다)에게 전도한 결과 교산교회가 태동활 수있었다. 1900년대에는 각 면마다 교회가 설립되었고 전체 강화주민의 약 10%가 감리교 신자가 되는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더욱이 강화의 기독교인들은 선교 초기부터 신앙교육과 계몽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

주문도

강화군 서도면 면소재지이며 주문도 외의 부속섬은 볼음도, 아차도, 말도 등이 있다. 주문도의 이름은 예사롭지 않다. 조선 후기에 임경업(林慶業) 장군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장군이 중국의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임금에게 하직하는 글을 이 섬에서 올렸다 하여 아뢸 주(奏), 글월 문(文)을 써서 주문도(奏文島)라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주문도(注文島)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임경업 장군과 관련하여 물가를 뜻하는 삼 수 변에 임금 주(主)자를 합한 주(注)자와 글월 문(文)자를 써서 주문도라 부른다고 전해져오고 있다. 이 외에도 옛날에 사신단이 중국을 왕래할 때 한양의 국왕에게 기나긴 여정을 보고하는 글을 올렸다는 유래를 갖고 있다.

건축

건축형식은 2고주(高柱), 5량가(梁架)의 가구구조를 가졌다. 평면 구성은 중세 초기 서양교회 형식이나 매우 단순하며 예배실로 쓰이는 좁은 신랑(身廊:Nave)과 측랑(側廊:Aisle), 그리고 전면 중앙 강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단 뒤에는 사제석(司祭席)이 마련되어 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홑처마집이다. 건물 안은 중세 전기의 서양교회 양식을 하고 있으나 매우 단순하여, 예배실로 쓰이는 좁은 신랑(身廊)과 측랑(側廊), 중앙의 강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전통 목조건물의 가구형식을 바탕으로 서양교회를 지었다는데 큰 의미를 지닌다.

사진

위치

관련 사이트

출처

  1. 『신편 강화사』, 강화군:강화군 편찬위원회, 2003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4. 편집 이수민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