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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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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강화도의 대형 방직공장인 심도직물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해 회사에 저항한 사건. 사측은 노조 결성에 주된 역할을 했던 사내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을 비롯해 노동자들을 해고하였으나 이 과정에 JOC 총재 주교였던 김수환(당시 마산교구장) 추기경이 노동자들을 방문하고, 한국 주교단은 성명서를 통해 노동자 권익을 대변하는 등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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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강화직물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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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는 강화도 직물업의 부흥기로, 강화에만 직물회사가 21곳이 있었다. 그중 심도직물은 종업원이 1200여명이나 되는 큰 규모의 공장으로. 당시 직물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공휴일 전날 야간조는 24시간) 노동에 열악한 환경에서 격무에 시달렸다. 5~6년차 숙련공이 5000~6000원밖에 월급을 받지 못하는 데다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해 노동자의 60%가 위장병을 앓고있었다. 하루 12시간 노동에도 불구,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아온 노동자들은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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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직물 노조결성과 한국기독교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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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강화도 직물회사의 하나인 심도직물에 노조가 결성됐다. 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강화 본당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심도직물노조 결성 후 사용자 쪽은 단체협약 체결을 거부하고 JOC 회원들을 불법적으로 해고했다. 다른 회사 사용자 쪽도 이 틈을 타 노조 활동에 가담한 노동자를 해고했다. 해고된 노동자 16명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또한, 직물회사 사장들은 향후 JOC 회원을 고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는 종업원 1200여 명 중 900여 명이 노조에 가입하자 온갖 방법을 동원해 노조를 와해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심지어 전 미카엘 강화 본당 주임신부를 찾아가 노조활동에 간섭한다고 항의하고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시키겠다고 위협한 후 공장을 폐쇄했다. 미카엘 신부는 노동자들의 회합 장소를 제공하는 등, 노조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사용자 쪽이 노동자와 천주교 신자를 탄압하자, 1967년 3월 2대 JOC 총재로 취임한, 당시 마산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강화도를 방문해 대책을 강구했다. 당시 김 추기경은 "억눌리고 고통 받는 노동자를 위해 그리스도 사랑을 실행하느라 스스로 십자가를 진 연약한 소녀들과 JOC 회원들에게 존경을 표할 뿐입니다. 여러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교회 역사가 증명합니다"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심도직물을 비롯한 직물회사들은 노조와 JOC 회원들을 계속 탄압했다. 결국 나 굴리엘모 인천교구장은 1968년 1월 18일 "모든 사람이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 임무를 이행할 때, 또 그들이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할 때, 하느님의 뜻대로 나라가 번영할 것"이라는 특별 메시지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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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발표와 해고자 복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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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 임시 주교회의를 통해 주교단은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고, 이후  그해 7월까지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됐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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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교단은 옳지 못한 일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킨다면 큰 잘못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대 교황께서 가르치신 원리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특히 노동자 권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목자로서 신부는 이러한 정의와 권리를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노동자의 기본적 존엄성과 권리를 존중하고 이 존엄성과 권리를 강화하는 데 능동적으로 관여할 때 비로소 하느님 뜻에 따라 국가가 발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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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오세택,"[격동의 현대사-교회와 세상]- 7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 가톨릭평화신문, 2008년 8월 17일,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261661&path=200808 가톨릭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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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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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한만송, "노동사목의 시작, 강화 심도직물 사건을 아시나요?", 오마이뉴스, 2015년 4월 21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01215 오마이뉴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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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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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youtube.com/watch?v=4adqx2F5VqU  cpbc 라디오 드라마 '바보 김수환' 47회 [심도 직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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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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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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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편집 || 이수민 || 인문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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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8일 (화) 18:34 기준 최신판


해설

요약

1967년 강화도의 대형 방직공장인 심도직물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해 회사에 저항한 사건. 사측은 노조 결성에 주된 역할을 했던 사내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을 비롯해 노동자들을 해고하였으나 이 과정에 JOC 총재 주교였던 김수환(당시 마산교구장) 추기경이 노동자들을 방문하고, 한국 주교단은 성명서를 통해 노동자 권익을 대변하는 등 큰 역할을 했다.

배경: 강화직물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1960년대는 강화도 직물업의 부흥기로, 강화에만 직물회사가 21곳이 있었다. 그중 심도직물은 종업원이 1200여명이나 되는 큰 규모의 공장으로. 당시 직물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공휴일 전날 야간조는 24시간) 노동에 열악한 환경에서 격무에 시달렸다. 5~6년차 숙련공이 5000~6000원밖에 월급을 받지 못하는 데다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해 노동자의 60%가 위장병을 앓고있었다. 하루 12시간 노동에도 불구,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아온 노동자들은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했다.

심도직물 노조결성과 한국기독교의 연대

1967년 5월, 강화도 직물회사의 하나인 심도직물에 노조가 결성됐다. 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강화 본당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심도직물노조 결성 후 사용자 쪽은 단체협약 체결을 거부하고 JOC 회원들을 불법적으로 해고했다. 다른 회사 사용자 쪽도 이 틈을 타 노조 활동에 가담한 노동자를 해고했다. 해고된 노동자 16명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또한, 직물회사 사장들은 향후 JOC 회원을 고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는 종업원 1200여 명 중 900여 명이 노조에 가입하자 온갖 방법을 동원해 노조를 와해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심지어 전 미카엘 강화 본당 주임신부를 찾아가 노조활동에 간섭한다고 항의하고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시키겠다고 위협한 후 공장을 폐쇄했다. 미카엘 신부는 노동자들의 회합 장소를 제공하는 등, 노조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사용자 쪽이 노동자와 천주교 신자를 탄압하자, 1967년 3월 2대 JOC 총재로 취임한, 당시 마산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강화도를 방문해 대책을 강구했다. 당시 김 추기경은 "억눌리고 고통 받는 노동자를 위해 그리스도 사랑을 실행하느라 스스로 십자가를 진 연약한 소녀들과 JOC 회원들에게 존경을 표할 뿐입니다. 여러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교회 역사가 증명합니다"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심도직물을 비롯한 직물회사들은 노조와 JOC 회원들을 계속 탄압했다. 결국 나 굴리엘모 인천교구장은 1968년 1월 18일 "모든 사람이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 임무를 이행할 때, 또 그들이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할 때, 하느님의 뜻대로 나라가 번영할 것"이라는 특별 메시지를 발표했다.

성명서 발표와 해고자 복직

2월 9일 임시 주교회의를 통해 주교단은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고, 이후 그해 7월까지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됐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

"한국 주교단은 옳지 못한 일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킨다면 큰 잘못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대 교황께서 가르치신 원리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특히 노동자 권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목자로서 신부는 이러한 정의와 권리를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노동자의 기본적 존엄성과 권리를 존중하고 이 존엄성과 권리를 강화하는 데 능동적으로 관여할 때 비로소 하느님 뜻에 따라 국가가 발전할 것입니다." [1] [2]

관련 영상

출처

  1. 오세택,"[격동의 현대사-교회와 세상]- 7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 가톨릭평화신문, 2008년 8월 17일, 가톨릭평화신문
  2. 한만송, "노동사목의 시작, 강화 심도직물 사건을 아시나요?", 오마이뉴스, 2015년 4월 21일,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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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4. 편집 이수민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