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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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페이지는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동양철학전공 원전 강독 세미나([[의적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br/> | + | 이 페이지는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동양철학전공 원전 강독 세미나([[의적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
− | 『통서(通書)』1권은 송대 신유학자인 [[주돈이]]의 저서이다. 글이 매우 짧고 단순하여 해석하기 어렵고 해석하더라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데, 주자마저도 주석을 단순하게 달아 후학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 | + | <br/> |
− | 이러한 해석의 모호함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견을 제기하였다.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하지만 종합해보면 결국 '『통서』와 『태극도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그리고 '정명도, 정이천과 주돈이의 관계는 어떠했는가?'로 집약시킬 수 있다. 후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주돈이]페이지의 주정수수설 파트를 참고할 것. <br/> <br/> | + | 『통서(通書)』1권은 송대 신유학자인 [[주돈이]]의 저서이다. 글이 매우 짧고 단순하여 해석하기 어렵고 해석하더라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데, 주자마저도 주석을 단순하게 달아 후학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이는 '''틀림없이 후학의 실력이 부족한 결과일 것이지 절대로 [[주돈이]]가 멍청하거나 학통이 불분명하거나 작문 실력이 없거나 해서는 아닐 것이다.'''<ref> 호굉 周子通書序 人見其書之約,而不知其道之大也;人見其文之質也,而不知其義之精也;人見其言之淡也,而不知其味之長也。</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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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해석의 모호함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견을 제기하였다.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하지만 종합해보면 결국 '『통서』와 『태극도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그리고 '정명도, 정이천과 주돈이의 관계는 어떠했는가?'로 집약시킬 수 있다. 후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주돈이]] 페이지의 [[주정수수설]] 파트를 참고할 것. <br/> <br/> | ||
『통서』는 주돈이가 직접 쓴 본문과 주희의 주해 사이에 몇몇 간극이 존재한다. 하지만 본문만 가지고는 주돈이의 사상을 재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희의 이해방식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주희의 이해방식에 근거하면 『통서』의 내용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통서』는 만물·운동·변화의 근거로서 ‘태극(太極)’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현상과 태극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誠上第一’, ‘誠下第二’, ‘動靜第十六’, ‘理性命第二十二’ 등에서 보인다. 둘째, 『통서』는 유학자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志學第十’, ‘顔子第二十三’ 등에서 보인다. 셋째, 『통서』는 세상을 경영하는 수단으로서의 ‘예(禮)’와 ‘악(樂)’의 활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樂上第十七’, ‘樂中第十八’, ‘樂下第十九’에서 보인다. | 『통서』는 주돈이가 직접 쓴 본문과 주희의 주해 사이에 몇몇 간극이 존재한다. 하지만 본문만 가지고는 주돈이의 사상을 재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희의 이해방식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주희의 이해방식에 근거하면 『통서』의 내용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통서』는 만물·운동·변화의 근거로서 ‘태극(太極)’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현상과 태극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誠上第一’, ‘誠下第二’, ‘動靜第十六’, ‘理性命第二十二’ 등에서 보인다. 둘째, 『통서』는 유학자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志學第十’, ‘顔子第二十三’ 등에서 보인다. 셋째, 『통서』는 세상을 경영하는 수단으로서의 ‘예(禮)’와 ‘악(樂)’의 활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樂上第十七’, ‘樂中第十八’, ‘樂下第十九’에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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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주돈이집』(중화서국, 1990)을 저본으로 하여, 권2와 「부록2」·「부록3」에 기재되어있는 통서 관련 글을 (될 수 있으면) 시간 순서대로 서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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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進周易表 - 宋 朱震<ref>1072~1138</ref>== |
− | :通書者, 濂溪夫子之所作也.(夫子性周氏, 名敦頤, 字茂叔). 夫子自少卽以學行有聞於世, 而莫或知其師傳之所自. 獨以河南兩程夫子嘗受學焉, 而得孔孟不傳之正統, 則其淵源因可槪見. 然所以指夫仲尼, 顔子之樂, 而發其吟風弄月之趣者, 亦不可得而悉聞矣. 所著之書, 又多放失. 獨此一篇, 本號易通, 與太極圖說並出, 程氏以傳於世, 而其爲說, 實相表裏. 大抵推一理、二氣、五行之分合, 以紀綱道體之精微; 決道義、文辭、祿利之取舍, 以振起俗學之卑陋. 至論所以入德之方、經世之具, 又皆親切簡要, 不爲空言. 顧其宏綱大用, 旣非秦漢以來諸儒所及; 而其條理之密、意味之深, 又非今世學者所能驟而窺也. 是以程氏旣沒, 而傳者鮮焉, 其知之者, 不過以爲用意高遠而已 | + | :臣伏奉四月二十九日聖㫖, 令臣進所撰『周易集傳』等書, 仍命尚方<ref>한어대사전 1. 古代製造帝王所用器物的官署. 3. 泛稱爲宮庭製辦和管掌飮食器物的官署、部門.</ref>給紙札書吏者. 臣聞商瞿學於夫子, 自丁寛而下, 其流為孟喜、京房. 喜書見於唐人者猶可考也, 一行所集房之易傳, 論卦氣、納甲、五行之類. 兩人之言, 同出於周易繫辭、說卦, 而費直亦以夫子「十翼」解説上、下經, 故前代號「繋辭」、「説卦」為「周易大傳」. 爾後馬、鄭、荀、虞各自名家, 說雖不同, 要之去象數之源猶未逺也. 獨魏王弼與鍾會同學, 盡去舊説, 雜之以莊、老之言. 於是儒者專尚文辭, 不復推原「大傳」天人之道, 自是分裂而不合者, 七百餘年矣. |
− | :『통서通書』는 염계 선생의 저작이다. (선생의 성은 周씨이고, 이름은 '돈이敦頤'이며, 자는 '무숙茂叔'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행실로 세상에 명성이 있었지만 그 사승관계의 연원은 아무도 모른다. 유독 하남의 정부자 <ref>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형제를 지칭한다. </ref> 께서 일찍이 수학해서 공자와 맹자이래로 전해지지 않던 정통을 얻었으니 이로써 그 연원을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자와 안자의 즐거움을 가리켜주고 <ref>『論語』「雍也」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飲,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ref> 음풍농월의 흥취를 일으키게 했던 것 <ref>『二程遺書』 卷三. “詩可以興. 某自再見茂叔後, 吟風弄月以歸, 有‘吾與點也’之意.”</ref> 을 또한 모두 들을 수 없는데다가 저술한 책도 흩어지고 잃어버린 것이 많다. 오직 이 한 편만은 본래 ‘역통易通’으로 불렸는데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함께 나와서 程氏가 이를 세상에 전하셨으니 그 학설은 실로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서로 표리를 이룬다. 대체로 [그 내용은] 一理와 二氣,五行의 나누어짐과 합해짐을 추론하여 道體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紀綱으로 삼았고, 道義와 文辭, 祿利 중에 취하고 버릴 것인지 결정해서 세속적 학문의 비루함을 떨치고 일어났으며, 덕德에 들어가는 방도와 세상을 경영하는 도구를 논하는 데 이르러서도 모두 친절하고 간단명료하니, 공허한 말이 아니다. 그 학설의 넓은 대강과 큰 쓰임을 돌아보니 이미 진나라와 한나라 이래 여러 유학자들이 미칠 바가 아니고, 그 조리의 엄밀함과 의미의 심오함 역시 오늘날의 학자들이 갑작스럽게 엿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 때문에 程氏가 세상을 떠나자 전한 사람이 드물었고, [이 책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 생각이 고원하다고 여길 뿐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미 다행히 그 남겨진 책을 얻어 읽었으나, 처음에는 아득하여 이것이 말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없었으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구두도 뗄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 연평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뒤에야 비로소 그 학설의 일부를 알 수 있었고, 근년 이래 오랫동안 깊이 완미해보고 나서야 조잡하게나마 뭔가 깨닫는 것이 있게 되었다. 비록 핵심적인 요지와 광대한 쓰임은 감히 알 순 없지만, 장구와 문자의 사이에 조리가 더욱 치밀하고 의미는 더욱 깊어서 진실로 나를 속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회고해 보건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 어느새 홀연히 36년이 되었다. 앞선 철인들이 점점 더 멀어짐을 개탄하고 미묘한 뜻이 멀어지고 있음을 두려워하여 삼가 나의 역량을 헤아리지도 않고 주해를 달았다. 비록 자질이 용렬하고 식견이 천박해서 선생님의 정밀한 뜻을 드러내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만, 처음 대강의 의미를 통하게 함으로써 훗날의 군자를 기다리니 만의 하나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순희 정미년(1187년) 9월 갑진일, 후학 주희朱熹는 삼가 서문을 쓰다 | + | :*지난 4월 29일 신은 엎드려 성지를 받았사온데, 신에게 신이 지은 『주역집전』 등의 책을 올리라고 하였고, 이어서 尚方에 명하여 종이를 제공하고 관원에게 공문을 보내게 하였습니다. 신이 들으니 商瞿는 공자께 배웠는데, 丁寛 이후로 그 흐름이 孟喜(?~?)와 京房(B.C.77~B.C.37) 로 이어졌습니다. 맹희의 글은 당나라 때 사람의 글에서 보이는 것으로 그래도 상고할 수 있고, 一行(683~727)이 모은 경방의 『역전』은 괘기설·납갑설·오행설 따위를 논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말이 똑같이 『주역』 「계사」·「설괘」에서 나왔고, 費直(?~?)은 또한 공자의 「십익」을 상·하경으로 해설했으므로, 이전 시대에는 「계사」·「설괘」를 「주역대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후 馬融(79~116)·鄭玄(127~200)·荀爽(128~190)·虞飜(164~223)이 각각 일가를 이루었는데, 설이 비록 다르지만 요약한다면 상수의 연원에서 여전히 멀지 않았습니다. 오직 위나라의 王弼(226~249)과 鍾會(225~264)가 함께 배워 옛 설을 모두 없애고 老莊의 말을 뒤섞었습니다. 이에 유자들이 오로지 그들의 글만 숭상하고 더 이상 「주역대전」의 하늘과 사람의 도에 대해 궁구하지 않았고, 이로부터 분열돼 합쳐지지 않은 것이 칠백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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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國家龍興, 異人閒出. 濮上陳摶以《先天圖》傳种放, 放傳穆修, 修傳李之才, 之才傳邵雍. 放以《河圖》、《洛書》傳李漑, 漑傳許堅, 堅傳范諤昌, 諤昌傳劉牧. 修以《太極圖》傳周敦頤, 敦頤傳程頤、程顥. 是時張載講學於二程、邵雍之閒. 故雍著『皇極經世』之書, 牧陳天地五十有五之數, 敦頤作『通書』, 程頤述『易傳』, 載造「太和」、「三兩」等篇. 或明其象, 或論其數, 或傳其辭, 或兼而明之. 更唱迭和, 相為表裏, 有所未盡, 以待後學. | ||
+ | :*우리나라가 우뚝 서는 가운데 뛰어난 인물들이 나왔습니다. 濮上의 陳摶(871~989)는 《선천도》를 种放(955~1016)에게 전했고, 충방은 穆修(979~1032)에게 전했으며, 목수는 李之才(?~1045)에게 전했고, 이지재는 邵雍(1011~1077)에게 전했습니다. 충방은 《하도》·《낙서》를 李漑에게 전했고, 이개는 許堅에게 전했으며, 허견은 范諤昌에게 전했고, 범악창은 劉牧(1011~1064)에게 전했습니다. 목수는 《태극도》를 周敦頤에게 전했고, 주돈이는 정이·정호에게 전했습니다. 당시 장재가 이정과 소옹 사이에서 강학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옹은 『황극경세서』를 지었고, 유목은 ‘天地之數五十五’를 주장했으며, 주돈이는 『통서』를 지었고, 정이는 『역전』을 지었으며, 장재는 「태화」·「삼량」 등의 편을 지었습니다. 혹자는 『주역』의 象을 밝혔고, 혹자는 『주역』의 數를 논했으며, 혹자는 『주역』의 辭를 전했고, 혹자는 이것들을 겸하여 밝혔습니다. 서로 선창하고 화답하며 표리를 이뤘는데, 미진한 점은 후학을 기다렸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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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臣頃者遊宦西洛, 獲觀遺書, 問疑請益, 徧訪師門, 而後粗窺一二. 造次不捨, 十有八年, 起政和丙申, 終紹興甲寅. 成『周易集傳』九卷, 『周易圖』三卷, 『周易叢説』一卷. 以『易傳』為宗, 和㑹雍、載之論, 上採漢、魏、吳、晉、元魏, 下逮有唐及今. 包括異同, 補苴罅漏, 庶㡬道離而復合. 不敢傳諸博雅, 姑以自備遺忘, 豈期清問<ref>한어대사전 淸審詳問. 『書』 「呂刑」 皇帝清問下民, 鰥寡有辭于苗.</ref>俯及<ref>한어대사전 下及.</ref>芻蕘? 昔虞翻講明秘說, 辨正流俗, 依經以立註, 嘗曰: “使天下一人知, 已足以不恨.” 而臣親逢陛下, 曲訪淺陋, 則臣之所遇, 過於昔人逺矣. 其書繕寫一十三冊, 謹隨狀上進, 以聞<ref>한어대사전 6. 指使君主聽見, 謂向君主報告.</ref>. 謹進. | ||
+ | :*신이 잠깐 西洛에 근무할 때 남아있는 전적들을 얻어 보고서, 의심나는 것을 묻고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 두루 선생들을 방문한 뒤에야 한두 가지를 조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기를 정화 6년(丙申, 1116년)부터 소흥 4년(甲寅, 1134년)까지 18년 동안 해서 『주역집전』 9권·『주역도』 3권·『주역총설』 1권을 완성하였는데, 『역전』을 종주로 삼고 소옹·장재의 주장을 모았으며, 위로는 한·위·오·진·원위(북위)의 설을 채록하고 아래로는 당에서 지금까지의 설을 두었습니다. 같고 다른 것을 포괄하여 빠진 틈을 메웠으니, 거의 도가 떨어졌으나 다시 합쳐졌습니다. 감히 아름다운 표현으로 전하진 못하고 우선 스스로 잊지 않도록 하는 것만 대비하였으니, 어찌 清問이 하찮은 제게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옛적에 우번이 秘說을 밝히고 세속을 변정할 때 경전에 의거해 주석을 달았는데, 일찍이 “천하 한 사람이라도 알아준다면 나는 여한이 없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직접 폐하를 뵙고 천박한 제 의견을 곡진히 아뢴다면 신이 만난 것은 옛사람(우번)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이 책을 열세 책에 옮겨쓰고 삼가 疏狀과 함께 올립니다. 삼가 올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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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通書後跋(1144) – 宋 祁寬== | ||
+ | :濂溪先生, 姓周, 名敦頤, 字茂叔, 世為營道人. 少孤, 養於舅家, 以恩補官. 試吏郡縣, 以至持節外臺, 為政力行其志, 所臨必有能聲. 卒官朝奉郎, 分司南京. 酷愛廬阜, 迺買田築室, 退樂濂溪之上. 人因以是稱之. 名賢賦詠, 及墓誌所載, 皆專美其清尚而已. | ||
+ | :*염계 선생의 성은 周, 이름은 敦頤이며 자는 茂叔이니, 대대로 營道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숙부의 집에서 길러졌는데, 음서로 관직에 올랐고, 벼슬이 試吏郡縣에서 持節外臺에 이르렀는데, 행정을 함에 그 뜻을 힘써 실천해 부임지마다 반드시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졸할 때의 관직은 朝奉郎 分司南京이었다. 여산을 매우 사랑하여 이에 밭을 사고 집을 지어 염계 가로 물러나 즐겼다. 사람들이 이것으로 선생을 칭한다. 유명한 현자들이 지은 시와 묘지명에 기재되어 있는 것들 모두 오직 선생의 고상한 절조를 찬미할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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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先生歿, 洛陽二程生生, 唱學於時. 辨異端, 闢邪說, 自孟子而下, 鮮不許可. 獨以先生為知道. 又云, 自聞道於先生, 而其學益明. 明道先生曰: “吾再見周茂叔, 吟風弄月以歸, 得‘吾與㸃也’之意.” 伊川先生狀明道之行曰: “幼聞汝南周茂叔論道, 遂厭科舉之業, 求諸六經而後得之.” 其推尊之如此. 於是, 世方以道學歸之. 其後東坡蘇公詩云: “先生本全德, 廉退乃一隅.” 葢謂此爾. | ||
+ | :*선생이 돌아가시자 낙양의 이정 선생이 그 때 학문을 창도하였다. 이단을 변별하고 사설을 물리쳐 맹자 이후로 거의 인정하지 않았는데, 유독 염계 선생만이 도를 알았다고 여겼다. 또 ‘염계 선생께 도를 들은 뒤로 자신의 학문이 더욱 밝아졌다’고 하였다. 명도 선생은 “내가 주무숙을 두 번 뵙고서 음풍농월하며 돌아와 ‘나는 증점을 허여한다’는 뜻을 얻게 되었다”고 하셨고, 이천 선생은 명도의 행장에서 “어려서 여남 주무숙이 도를 논함을 듣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싫증내고 육경에서 도를 구한 이후에 터득했다”고 말하였다. 이정 선생이 염계 선생을 추존한 것이 이와 같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비로소 도학을 의지하게 되었다. 그 뒤로 소동파가 시에서 “선생은 본래 덕을 온전히 갖추셨으면서도 한 쪽으로 겸양하며 물러나셨다”고 했으니 대개 이를 말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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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通書』即其所著也. 始出於程門侯師聖, 傳之荊門高元舉, 朱子發. 寬初得於高, 後得於朱. 又後得和靖先生所藏, 亦云得之程氏. 今之傳者是也. | ||
+ | :*『통서』는 곧 염계 선생의 저작이다. 처음 程門의 후중량(侯師聖)에서 나와 荊門의 高元舉·朱子發에게 전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高元舉에게 얻었고 나중에 朱子發에게 얻었다. 또 그 뒤에 윤돈(尹和靖)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얻었는데, 그 역시 ‘이천 선생에게 얻었다’고 하였다. 지금 전하는 것이 이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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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逮卜居九江, 得舊本於其家, 比前所見, 無《太極圖》. 或云: 圖乃手授二程, 故程本附之卷末也. 校正舛錯三十有六字, 疑則闕之. 夫老氏著『道德』五千言, 世稱微妙. 此書字不滿三千, 道德、性命、禮樂、刑政, 悉舉其要. 而又名之以通, 其示人至矣. 學者宜盡心焉. 紹興甲子春正月, 武當祁寬謹題. | ||
+ | :*구강에 살 집을 마련하고서, 염계 선생의 집에서 옛 판본을 얻어 전에 보았던 것과 비교해보니 《태극도》가 없었다. 혹자는 ‘《태극도》는 염계 선생이 손수 이정에게 주신 것이므로, 이정의 판본에서는 이를 권말에 붙였다’고 하였다. 잘못된 글자 36자를 교정했고, 의심스러운 것은 제거했다. 노자가 지은 『도덕경』 오천 자를 세상 사람들은 미묘하다고 일컫는데, 이 책은 삼천 자가 안 되지만 도덕·성명·예악·형정에 대해 모두 그 핵심을 거론하고 있고 또 “通”이라고 이름 붙였으니 사람들이게 보이는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이 책에 마음을 다 쏟아야 할 것이다. 소흥 14년(甲子, 1144년) 봄 정월에 武當 기관이 삼가 쓰노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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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通書序略 - 宋 胡宏<ref>1105~1161</ref>== | ||
+ | :『通書』四十章, 周子之所述也. 周子, 名敦頤, 字茂叔, 舂陵人. 推其道學所自, 或曰: 傳《太極圖》於穆修也, 修傳《先天圖》於种放, 放傳於陳摶, 此殆其學之一師歟, 非其至者也. 希夷先生有天下之願, 而卒與鳳歌、荷蓧長往不來者伍. 於聖人無可無不可之道, 亦似有未至者. | ||
+ | :*『통서』 40장은 周子의 저술이다. 周子의 이름은 敦頤, 자는 茂叔으로 舂陵 사람이다. 그 도학의 연원을 미뤄보면, 혹자는 ‘[周子가] 《太極圖》를 목수에게서 전해 받았고, 목수는 《先天圖》를 충방에게서 전해 받았으며, 충방은 진단에게서 전해 받았다’<ref> 朱震 《進周易表》</ref>고 하는데, 이들은 아마도 周子 학문에서의 한 스승일 뿐 결정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진단(希夷先生)은 천하를 구제하려는 소망이 있었으나 끝내 봉황 노래를 불렀던 자<ref> 논어 미자 5. 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鳳兮!鳳兮!何德之衰?往者不可諫,來者猶可追。已而,已而!今之從政者殆而!」孔子下,欲與之言。趨而辟之,不得與之言。</ref>와 삼태기를 메고 멀리 가버려 돌아오지 않았던 자<ref> 논어 미자 7. 子路從而後,遇丈人,以杖荷蓧。子路問曰:「子見夫子乎?」丈人曰:「四體不勤,五穀不分。孰為夫子?」植其杖而芸。子路拱而立。止子路宿,殺雞為黍而食之,見其二子焉。明日,子路行以告。子曰:「隱者也。」使子路反見之。至則行矣。子路曰:「不仕無義。長幼之節,不可廢也;君臣之義,如之何其廢之?欲潔其身,而亂大倫。君子之仕也,行其義也。道之不行,已知之矣。」</ref>의 부류가 되어, 성인(공자)의 “해야만 하는 것도 없고 하지 말아야할 것도 없는”<ref> 논어 미자 8. 逸民:伯夷、叔齊、虞仲、夷逸、朱張、柳下惠、少連。子曰:「不降其志,不辱其身,伯夷、叔齊與!」謂:「柳下惠、少連,降志辱身矣。言中倫,行中慮,其斯而已矣。」謂:「虞仲、夷逸,隱居放言。身中清,廢中權。」「我則異於是,無可無不可。」</ref> 도에 대해 이르지 못한 점이 있는 것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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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程明道先生嘗謂門弟子曰: “昔受學於周子, 令尋仲尼、顔子所樂者何事.” 而明道先生自再見周子, 吟風弄月以歸. 道學之士皆謂程顥氏續孟子不傳之學, 則周子豈特為种、穆之學而止者哉! | ||
+ | :*정명도 선생은 일찍이 문하의 제자들에게 “전에 周子께 수학할 때, [周子께서는] 중니와 안자가 즐겼던 것이 어떤 일인지 찾아보게 하셨다”고 말씀하셨고, 명도 선생은 周子를 두 번 만나고 나서 음풍농월하며 돌아오셨다. 도학의 선비들은 모두 명도 선생이 맹자 이후로 이어지지 않은 학문을 이었다고 하였으니, 周子가 어찌 충방·목수의 학문을 하고 그치신 분이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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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粤若稽古孔子, 述三五之道, 立百王經世之法. 孟軻氏闢楊、墨, 推明孔子之澤, 以為萬世不斬, 人謂孟氏功不在禹下. 今周子啓程氏兄弟以不傳之妙, 一回萬古之光明, 如日麗天, 將為百世之利澤, 如水行地. 其功蓋在孔、孟之間矣. | ||
+ | :*옛적 공자를 상고해보건대, 삼황오제의 도를 조술하시고 후대 백왕의 경세법을 확립하셨다. 맹자는 양주와 묵적을 배척하여 공자의 은택을 미루어 밝혀 만세토록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사람들은 맹자의 공이 우임금의 아래에 있지 않다고 여겼다. 지금 周子께서 전해지지 않던 신묘한 가르침으로 이정 형제를 계발하셔서 한 번 만고의 빛을 되돌아오게 하신 것은 마치 ‘해가 하늘에 붙어있는 것’<ref> 주역 리괘 단전 日月麗乎天.</ref> 같고, 장차 백세의 이익과 은택이 되는 것은 마치 물이 땅 위를 흐르는 것과 같으니, 그 공이 아마 공자와 맹자 사이일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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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人見其書之約也, 而不知其道之大也; 見其文之質也, 而不知其義之精也; 見其言之淡也, 而不知其味之長也. 顧愚何足以知之? 然服膺有年矣. 試舉一二語, 為同志者起予之益乎! 患人以發䇿決科、榮身肥家、希世取寵為事也, 則曰“志伊尹之所志.” 患人以知識聞見為得而自畫, 不待價而自沽也, 則曰“學顔子之所學.” 人有真能立伊尹之志、修顔子之學者, 然後知『通書』之言包括至大, 而聖門之事業無窮矣. 故此一卷書, 皆發端以示人者, 宜其度越諸子, 直以詩、書、易、春秋、語、孟同流行乎天下. 是以敘而藏之, 遇天下之善士, 又尚論前修<ref>한어대사전 【前脩】 猶前賢.</ref>而欲讀其書者, 則傳焉. 安定胡宏序. | ||
+ | :*사람들은 『통서』의 내용이 간략한 것만 보고 담겨있는 도가 큼을 알지 못하며, 그 표현이 질박한 것만 보고 그 뜻이 정밀함을 알지 못하며, 그 말이 담박한 것만 보고 그 여운이 긺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어리석은 내가 어찌 『통서』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수년 간 마음에 품어왔기에 시험 삼아 한두 마디를 하니, 뜻이 같은 자들이 더욱 나를 분발시켜주기를<ref> 논어 팔일 8. 子夏問曰:「『巧笑倩兮,美目盼兮,素以為絢兮。』何謂也?」子曰:「繪事後素。」曰:「禮後乎?」子曰:「起予者商也!始可與言詩已矣。」</ref> 위한 것이다. 사람들이 과거에 합격하는 것과 자신은 영달하고 집안은 살찌우며 세상에서 총애 얻기를 바라는 것을 일삼는 것을 걱정하셔서 “이윤이 뜻을 둔 바에 뜻을 두어라”<ref> 통서 志學第十</ref>라고 하셨고, 사람들이 지식·견문에 만족하고 스스로 한계 짓고 값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을 파는 것<ref> 논어 자한 13. 子貢曰:「有美玉於斯,韞匵而藏諸?求善賈而沽諸?」子曰:「沽之哉!沽之哉!我待賈者也。」</ref>을 걱정하셔서 “안자가 배웠던 바를 배우라”<ref> 통서 志學第十</ref>고 하셨다. 사람들 가운데 진정 이윤의 뜻을 세우고 안자의 학문을 닦을 수 있는 자가 있은 연후에 『통서』의 말이 포괄하는 것이 지극히 크고 聖門의 사업이 끝이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한 권의 책은 모두 단서를 계발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諸子의 수준을 뛰어넘고 곧장 『시』·『서』·『역』·『춘추』·『논어』·『맹자』와 함께 천하에 유통됨이 마땅하다. 이 때문에 서문을 쓰고 秘藏하니, 천하의 훌륭한 선비 중에 前賢을 尙論하여 그 책을 읽고자 하는 자를 만나면 전할 것이다. 안정 호굉이 서문을 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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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太極通書後序(建安本, 1169) - 宋 朱熹== | ||
+ | :右周子之書一篇, 今舂陵、零陵、九江皆有本, 而互有同異. 長沙本最後出, 乃熹所編定, 視他本最詳密矣, 然猶有所未盡也. | ||
+ | :*이상은 주돈이의 책 한 편으로, 지금 용릉·영릉·구강에 모두 판본이 있으나 서로 차이가 있다. 장사본이 가장 나중에 나왔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편정한 것으로, 다른 판본들과 견줘보니 [장사본이] 가장 상밀하긴 한데 여전히 미진한 바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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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盖先生之學, 其妙具於《太極》一圖. 『通書』之言, 皆發此《圖》之藴. 而程先生兄弟語及性命之際, 亦未嘗不因其說. 觀通書之誠、動静、理性命等章, 及程氏書之李仲通銘、程邵公誌、顔子好學論等篇, 則可見矣. 故潘清逸誌先生之墓, 敘所著書, 特以作太極圖為稱首. 然則此圖當為書首, 不疑也. 然先生既手以授二程本, 因附書後. (祁寛居之云) 傳者見其如此, 遂誤以圖為書之卒章, 不復釐正. 使先生立象盡意之㣲㫖, 暗而不眀. 而驟讀通書者, 亦復不知有所總攝. 此則諸本皆失之. 而長沙通書因胡氏所傳篇章, 非復本次, 又削去分章之目, 而别以‘周子曰’者加之, 於書之大義雖若無所害, 然要非先生之舊, 亦有去其目而遂不可曉者. (如理性命章之類.) 又諸本附載銘、碣、詩、文, 事多重複. 亦或不能有所發眀於先生之道, 以幸學者. | ||
+ | :*선생의 학문은 그 신묘한 것이 《태극도》 하나에 갖춰져 있다. 『통서』의 말은 모두 이 《태극도》에 담긴 뜻을 드러낸 것이다. 이정 형제께서 性命을 언급하실 때 역시 선생의 학설에 기인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 『통서』의 「誠」·「動静」·「理性命」 등의 장과 이정 선생이 쓰신 《李仲通銘》·《程邵公誌》·《顔子好學論》 등의 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潘清逸(반흥사)이 선생의 묘지명을 썼을 때 말한 선생의 저술 가운데 유독 《태극도》를 가장 먼저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 《태극도》가 응당 책의 첫머리가 되어야 함은 의심할 나위 없다. 그러나 선생이 손수 이정 선생에게 주신 판본은 책 마지막에 실려 있다. (祁寛[居之]의 말) 전하는 자가 이와 같음을 보고서 마침내 《태극도》를 책의 마지막 장이라고 잘못 여기고는 다시 수정하지 않았다. 만약 선생께서 도상을 세워 의미를 상세히 전달하고자 하는 깊은 뜻이 가려져 밝혀지지 않는다면, 급히 『통서』를 읽는 자 또한 다시는 總攝한 바가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는 여러 판본이 모두 틀렸다. 장사본 『통서』는 胡氏(호굉)가 전한 편장에 따라 본래의 편차를 회복하지 않았고, 또 分章의 절목을 산삭하고 따로 ‘周子曰’을 덧붙였는데, 『통서』의 대의에는 비록 문제될 것이 없으나, 요컨대 선생이 저술했을 때의 옛 모습이 아니고, 또 그 절목을 제거하여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리성명」 장 따위) 또 여러 판본이 명문(銘)·묘갈문(碣)·시·산문을 싣고 있는데, 일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또 간혹 선생의 도를 발명하여 배우는 자를 기쁘게 함이 있지 못하기도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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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今特據潘誌置圖篇端, 以為先生之精意, 則可以通乎書之說矣. 至於書之分章定次, 亦皆復其舊貫. 而取公及蒲左丞、孔司封、黄太史所記先生行事之實, 刪去重複, 合為一篇, 以便觀者. 盖世所傳先生之書、言行具此矣. | ||
+ | :*그러므로 이제 특별히 반흥사의 묘지명에 의거해 《태극도》를 책의 첫머리에 두니, 선생의 정미한 뜻이 『통서』의 설에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통서』에서 章을 나누고 차례를 정하는 것의 경우 또한 모두 그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공(반흥사)과 蒲左丞·孔司封·黄太史가 기록한 선생의 행적을 모아 중복된 것을 산삭하고 한 권으로 합쳐 독자를 편하게 하였으니, 세상에 전해오는 선생의 책과 언행이 이 책에 갖춰졌다고 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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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潘公所謂易通, 疑即通書. 而易說獨不可見, 向見友人多蓄異書, 自謂有傳本, 亟取而觀焉, 則淺陋可笑. 皆舍法時舉子葺緒餘, 與圖說、通書絶不相似, 不問可知其偽. 獨不知世復有能得其真者與否? 以圖、書推之, 知其所發當極精要, 㣲言湮沒, 甚可惜也! | ||
+ | :*반흥사가 말한 『역통』이라는 것이 아마도 『통서』인 듯한데, 『역설』이 유독 보이지 않는다. 전에 기이한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벗을 만났는데, 그가 스스로 전해지는 판본을 갖고 있다고 하기에 급히 가져다 읽어보니 천박하고 가소로웠다. 모두 舍人이 당시 과거 응시자들의 글 자투리를 본받은 것으로, 《태극도설》이나 『통서』와는 비슷하지도 않았으니, 그것이 가짜임은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세상에 얻을 수 있는 『역설』의 진본이 또 있을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태극도설》과 『통서』로 추측해보면, 『역설』이 발명한 것이 응당 精要를 다할 것임을 알 수 있지만, 선생의 정미한 뜻이 인멸되었으니 심히 애석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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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熹又嘗讀朱内翰震進易說表, 謂此圖之傳, 自陳摶、种放、穆脩而来. 而五峯胡公仁仲作通書序, 又謂先生非止為种、穆之學者, “此特其學之一師耳, 非其至者也.” 夫以先生之學之妙, 不出此圖, 以為得之於人, 則决非种、穆所及; 以為“非其至者”, 則先生之學, 又何以加於此圖哉? 是以嘗竊疑之. 及得誌文考之, 然後知其果先生之所自作, 而非有所受於人者. 公盖皆未見此誌而云云耳. 然胡公所論通書之指曰: “人見其書之約, 而不知其道之大也; 見其文之質, 而不知其義之精也; 見其言之淡, 而不知其味之長也. 人有真能立伊尹之志, 脩顔子之學, 則知此書之言包括至大, 而聖門之事業無窮矣.” 此則不可易之至論, 讀是書者所宜知也. 因復掇取以系於後云. | ||
+ | :*나는 또 일찍이 주진의 《進易說表》를 읽어보았는데, 이 《태극도》의 전수가 진단·충방·목수로부터 전래되었다고 하였고, 호오봉이 쓴 《통서서》에서는 또 선생이 충방·목수의 학문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들은 그저 선생이 배운 한 스승이었을 뿐이니 그 전부는 아니었다"고 하였다. 선생의 신묘한 학문이 이 《태극도》를 벗어나지 않으니, 남에게 얻었다고 하면 결코 충방이나 목수가 미칠 바가 아니고, “그 전부가 아니다”라고 하면 선생의 학문에서 이 《태극도》에 무엇을 더하겠는가? 이 때문에 일찍이 의심했었다. 반흥사의 묘지명을 얻어 고찰한 연후에야 《태극도설》이 과연 선생께서 스스로 지으신 것이지 남에게 전수받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호오봉은 아마 이 묘지명을 전혀 보지 못하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 뿐이다. 그러나 호오봉이 『통서』의 요지에 대해 “사람들은 그 책이 간략함만 보고 그 도가 원대함을 알지 못하고, 그 글이 질박함만 보고 뜻이 정밀함을 알지 못하며, 그 표현이 담박한 것만 보고 여운이 긺을 알지 못한다. 사람 가운데 진정 이윤의 뜻을 세우고 안자의 학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의 구절이 지극히 큰 것을 포괄하고 있으며 聖門의 사업이 무궁함을 알 것이다”라고 논한 것은 바꿀 수 없는 지론이니, 이 책을 읽는 자가 마땅히 알고 있어야할 바이다. 인하여 다시 모아 뒤에 달아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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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乾道己丑六月戊申, 新安朱熹謹書. | ||
+ | :*건도 기축년(1169) 6월 무신일, 신안 주희가 삼가 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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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通書後跋(1170) - 宋 張栻== | ||
+ | :友人朱熹元晦以《太極圖》列于篇首, 而題之曰太極通書. 栻刻于嚴陵學宮, 以示多士. | ||
+ | :*友人 주원회가 주렴계 선생의 『통서』에 《태극도》를 첫머리에 배열시키고 『태극통서』라고 제목을 붙였다. 내가 이를 嚴陵의 學宮에서 판각해서 여러 선비들에게 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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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嗟乎! 自聖學不明, 語道者不睹夫大全, 卑則割裂而無統, 髙則汗漫而不精. 是以性命之説, 不參乎事物之際; 而經世之務, 僅出於私意小智之為, 豈不可歎哉! 惟先生生乎千有餘載之後, 超然獨得夫『大易』之傳. 所謂太極圖乃其綱領也. 推明動靜之一源, 以見生化之不窮, 天命流行之體, 無乎不在. 文理密察, 本末該貫, 非闡微極幽, 莫能識其指歸也. | ||
+ | :*아! 성인의 학문이 밝혀지지 않은 뒤로 도를 말하는 자들은 그 크고 온전한 것을 보지 못하여, 낮게는 이리저리 찢어서 줄기가 없고, 높게는 산만하여 정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性命에 대한 설이 사물 사이에 참여하지 못했고, 經世의 일이 겨우 사적인 마음이나 쪼잔한 앎에서 겨우 나왔으니, 어찌 탄식할 만하지 않겠는가! 오직 주렴계 선생만이 천여 년 뒤에 태어나셔서 초연히 『주역』의 전수를 홀로 얻으셨다. 이른바 『태극도』라는 것이 바로 그 강령이다. 동정의 한 근원을 미루어 밝혀 [그것이] 끝없이 낳고 변화시킴을 보이시니, 천명유행의 본체가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글의 조리가 치밀·분명하고 본말을 모두 관통하니,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그윽한 것을 궁구한 자가 아니라면 그 뜻을 알 수 없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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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然而學者若之何而可以進於是哉? 亦曰敬而巳矣. 誠能起居食息, 主一而不舍, 則其德性之知, 必有卓然不可掩於體察之際者, 而後先生之蘊可得而窮, 太極可得而識矣. 乾道庚寅閏月謹題. | ||
+ | :*그러나 배우는 자들은 어떻게 여기에 나아갈 수 있는가? 역시 ‘敬’이라고 할 뿐이다. 진실로 기거하며 먹고 숨쉬는 때에 主一하여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 德性之知가 성찰할 때 반드시 탁연하여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니, 그런 이후에 선생의 깊은 뜻을 궁구할 수 있고, 태극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건도 건인년(1170년) 윤달에 삼가 쓰노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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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延平本, 1179)<ref>주자대전에는 "跋延平本太極通書(淳熙六年)"으로 쓰여있다. 혹 건안본을 연평본이라고 일컬은 것은 아닌지?</ref> - 宋 朱熹== | ||
+ | :臨汀楊方得九江故家傳本, 校此本, 不同者十有九處. 然亦互有得失. | ||
+ | :*임정 양방이 구강의 故家에서 전해오는 판본을 얻었는데, 이 판본(연평본)과 비교해보니 같지 않은 부분이 19곳이었다. 그러나 역시 서로 옳고 그른 것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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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其兩條, 此本之誤, 當從九江本: | ||
+ | :*두 조목은 이 판본(연평본)의 오류이니 마땅히 구강본을 따라야한다. | ||
+ | :: 如理性命章云: “柔如之”(當作“柔亦如之”) 師友章(當自“道義者”以下拆為下章) | ||
+ | ::*⓵ 「理性命」의 “柔如之”: 마땅히 “柔亦如之”로 써야한다. | ||
+ | ::*⓶ 「師友」: 마땅히 “道義者” 뒤에서 끊고 다음 장으로 삼아야 한다. | ||
+ | |||
+ | :其十四條, 義可兩通, 當並存之: | ||
+ | :*열네 조목은 의미가 둘 다 통하니, 마땅히 모두 기록해둔다. | ||
+ | ::如誠幾德章云: “理曰禮”(“理”一作“履”) 慎動章云: “邪動”(一作“動邪”) 化章(一作“順化”) 愛敬章云: “有善”(此下一有“是茍”字) “學焉”(此下一有“有”字) “曰有不善”(一無此四字) “曰不善”(此下一有“否”字) 樂章云: “優柔平中”(“平”一作“乎”) “輕生敗倫”(“倫”一作“常”) 聖學章云: “請聞焉”(“聞”一作“問”) 顔子章云: “獨何心哉”(“心”一作“以”) “能化而齊”(“齊”一作“濟”, 一作“消”) 過章(一作“仲由”) 刑章云: “不止即過焉”(“即”一作“則”) | ||
+ | ::*⓷ 「誠幾德」의 “理曰禮”: “理”를 어떤 판본은 “履”라고 하였다. | ||
+ | ::*⓸ 「慎動」의 “邪動”: 어떤 판본은 “動邪”라고 하였다. | ||
+ | ::*⓹ 「化」: 어떤 판본은 “順化”라고 하였다. | ||
+ | ::*⑥ 「愛敬」의 “有善”: 이 다음에 어떤 판본은 “是茍”자가 있다. | ||
+ | ::*⑦ 「愛敬」의 “學焉”: 이 다음에 어떤 판본은 “有”자가 있다. | ||
+ | ::*⑧ 「愛敬」의 “曰有不善”: 어떤 판본은 이 네 자가 없다. | ||
+ | ::*⑨ 「愛敬」의 “曰不善”: 이 다음에 어떤 판본은 “否”자가 있다. | ||
+ | ::*⑩ 「樂」의 “優柔平中”: “平”을 어떤 판본은 “乎”라고 하였다. | ||
+ | ::*⑪ 「樂」의 “輕生敗倫”: “倫”을 어떤 판본은 “常”이라고 하였다. | ||
+ | ::*⑫ 「聖學」의 “請聞焉”: “聞”을 어떤 판본은 “問”이라고 하였다. | ||
+ | ::*⑬ 「顔子」의 “獨何心哉”: “心”을 어떤 판본은 “以”라고 하였다. | ||
+ | ::*⑭ 「顔子」의 “能化而齊”: “齊”를 어떤 판본은 “濟”라고 하였고, 어떤 판본은 “消”라고 하였다. | ||
+ | ::*⑮ 「過」: 어떤 판본은 “仲由”라고 하였다. | ||
+ | ::*⑯ 「刑」의 “不止即過焉”: “即”을 어떤 판본은 “則”이라고 하였다. | ||
+ | |||
+ | :其三條, 九江本誤, 而當以此本為正: | ||
+ | :*세 조목은 구강본의 오류이니 마땅히 이 판본(연평본)을 정본으로 삼아야한다. | ||
+ | ::如太極説云: “無極而太極”(“而”下誤多一“生”字) 誠章云: “誠斯立焉”(“立”誤作“生”) 家人暌復无妄章云: “誠心復其不善之動而巳矣”(“心”誤作“以”) | ||
+ | ::*⑰ 《태극도설》의 “無極而太極”: “而” 다음에 “生”자가 잘못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 ||
+ | ::*⑱ 「誠」의 “誠斯立焉”: “立”을 “生”으로 잘못 썼다. | ||
+ | ::*⑲ 「家人暌復无妄」의 “誠心復其不善之動而巳矣”: “心”을 “以”로 잘못 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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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凡十九條. 今附見於此, 學者得以考焉. | ||
+ | :*총 19조목이다. 지금 여기에 기록하여 표시해서 배우는 자들이 참고할 수 있게 하노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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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再定太極通書後序(南江本, 1179) - 宋 朱熹== | ||
+ | :右周子太極圖並說一篇、通書四十章、世傳舊本遺文九篇、遺事十五條、事狀一篇,熹所集次,皆已校定,可繕寫。某按先生之書,近歲以來,其傳既益廣矣,然皆不能無謬誤 ; 惟長沙建安板本為庶幾焉,而猶頗有所未盡也。 | ||
+ | :*이상은 주돈이의 「태극도」와 『태극도설』 한 편과 『통서』 40장, 세상에 전해진 구본의 유고 아홉 편, 유사(遺事) 열 다섯 조목, 그리고 사장(事狀) 한 편이다. 내가 차례대로 모은 것은 모두 이미 교정한 것이므로 수록할 만하다. 내가 선생의 글을 살펴봄에 최근에 와서야 그 전해 받은 것이 또한 더욱 넓어졌긴 하지만, 각각의 오류가 없을 수 없었다. 오직 장사본과 건안본이 (본의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럼에도 오히려 자못 미진한 부분이 있다. | ||
+ | :蓋先生之學之奧,其可以象告者,莫備於太極之一圖。若通書之言,蓋皆所以發明其蘊,而誠、動靜、理性命等章為尤著。程氏之書,亦皆袓述其意,而李仲通銘、程邵公誌、顏子好學論等篇,乃或並其語而道之。故清逸潘公誌先生之墓,而敘其所著之書,特以作太極圖為首稱,而後乃以易說、易通繫之,其知此矣。 | ||
+ | :*대개 선생의 학문의 심오함에 있어서 상(象)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 중에 「태극도」 하나보다 완비된 것은 없다. 통서의 말과 같은 경우에는 대개 모두 그 정밀한 뜻을 드러내 밝힌 것이니, 「성」,「동정」,「리성명」 등의 장(章)이 더욱 뚜렷하다. 이정의 글은 또한 모두 (주돈이의) 뜻을 조술하였으니, 「이중통명(李仲通銘)」,「정소공지(程邵公誌)」, 「안자호학론(顏子好學論)」등의 편은 바로 혹 주돈이의 말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 따라서 반흥사가 선생의 묘에 묘지문을 써서 주돈이가 썼던 글을 나열하였는데, 특히 「태극도」를 만든 것을 맨 앞에 드러내었고 이후에 비로소 「역설」과 『역통』을 덧붙였으니, 이러한 점을 알았던 것이다. | ||
+ | ::按 : 漢上朱震子發,言陳摶以太極圚傳種放,放傳穆修,修傳先生。衡山胡宏仁仲則以為種、穆之傳,特先生「所學之一師,而非其至者」。武當祈寬居之又謂圖像乃先生指畫以語二程,而未嘗有所為書。此蓋皆未見潘誌而言。若胡氏之說,則又未考乎先生之學之奧,始卒不外乎此圖也。先生易說久已不傳於世,向見兩本,皆非是。其一卦說,乃陳忠肅公所著;其一繫辭說,又皆佛、老陳腐之談。其甚陋而可笑者,若曰「易之冒天下之道也,猶狙公之罔眾狙也。」觀此則其決非先生所為可知矣。易通疑即通書。蓋易說既依經以解義,此則通論其大旨、而不系於經者也。特不知其去易而為今名,始於何時爾。 | ||
+ | ::*살펴보건대, 한상 주진은 진단이 「태극도」를 충방에게 전하였고, 충방이 목수에게 전하였으며, 목수가 염계선생께 전했다고 말하였다. 형산 호굉의 경우에는 종방과 목수가 전수한 일에 대하여 다만 선생이 ‘배운 한 스승이었을 뿐이니 선생이 배웠던 지극한 핵심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무당 기관은 또한 도상이 바로 선생이 손수 그리셔 이정에게 말해주셨으니 일찍이 책을 지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모두 반흥사의 묘지문을 보지 못하고 말한 것이다. 호씨의 설과 같은 경우는 또한 선생의 학문의 심오한 의미가 시종일관 이 「태극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고찰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의 「역설」은 오랫동안 이미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으며, (내가) 이전에 두 판본을 보았는데 모두 맞는 것이 아니었다. 그 하나는 「괘설」이었는데, 바로 진충숙공이 저술한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계사설」이었는데, 또한 모두 불가와 노장의 진부한 말이었다. 그 가운데 매우 비루하여 비웃을 만한 것이 있었으니, 예를 들어, ‘역이 천하의 도를 포괄하는 것이 마치 저공(狙公)이 여러 원숭이들을 (조삼모사로) 속이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다. 이것을 보면 그것이 결코 선생이 지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역통』은 아마도 『통서』일 것이다. 대체로 「역설」은 이미 경전에 의거하여 의미를 해석하였으며, 이것(통서)은 그 큰 요지를 통론한 것으로 경전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것이 ‘역(易)’자를 없애고 지금의 이름이 된 것이 어느 때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 ||
+ | :然諸本皆附於通書之後,而讀者遂誤以為書之卒章,使先生立象之微旨暗而不明。驟而語夫通書者,亦不知其綱領之在是也。長沙本既未及有所是正,而通書乃因胡氏所定,章次先後輒頗有所移易,又刊去章目,而別以「周子曰」者加之,皆非先生之舊。若理性命章之類,則一去其目,而遂不可曉。其所附見銘、碣、詩、文,視他本則詳矣,然亦或不能有以發明於先生之道,而徒為重復。 | ||
+ | :*그러나 여러 판본은 모두 그것(「태극도」)을 통서의 뒤에 덧붙였기 때문에, 읽는 자가 마침내 그것을 책의 마지막 장이라고 오해하여 선생이 도상을 세운 깊은 뜻을 어둡게 하여 밝혀지지 않게 하였다. 생각없이 『통서』를 말하는 사람들도 또한 그 강령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장사본은 교정한 것을 이미 언급하지 않았고, 『통서』의 경우는 바로 호씨가 정한 것에 따르면 장의 차례가 선후가 번번이 옮겨지거나 바뀐 것이 있었으며, 또한 각 장의 제목을 없앴으며 별도로 ‘주자 왈(周子曰)’을 붙였으니, 모두 선생의 구본이 아니다. 「리성명」장의 부류들은 일제히 그 제목을 없애버려서 마침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첨부한 묘지명(銘)과 묘갈문(碣), 시, 문에 있어서 다른 판본을 보면 상세하긴 하지만 또한 간혹 선생의 도를 발명해 낼 수 없었고, 다만 중복한 것이 되었을 뿐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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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通書後記(1187) - 宋 朱熹== | ||
+ | :通書者, 濂溪夫子之所作也.(夫子性周氏, 名敦頤, 字茂叔). 夫子自少卽以學行有聞於世, 而莫或知其師傳之所自. 獨以河南兩程夫子嘗受學焉, 而得孔孟不傳之正統, 則其淵源因可槪見. 然所以指夫仲尼, 顔子之樂, 而發其吟風弄月之趣者, 亦不可得而悉聞矣. 所著之書, 又多放失. 獨此一篇, 本號易通, 與太極圖說並出, 程氏以傳於世, 而其爲說, 實相表裏. 大抵推一理、二氣、五行之分合, 以紀綱道體之精微; 決道義、文辭、祿利之取舍, 以振起俗學之卑陋. 至論所以入德之方、經世之具, 又皆親切簡要, 不爲空言. 顧其宏綱大用, 旣非秦漢以來諸儒所及; 而其條理之密、意味之深, 又非今世學者所能驟而窺也. 是以程氏旣沒, 而傳者鮮焉, 其知之者, 不過以爲用意高遠而已. | ||
+ | :*『통서通書』는 염계 선생의 저작이다. (선생의 성은 周씨이고, 이름은 '돈이敦頤'이며, 자는 '무숙茂叔'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행실로 세상에 명성이 있었지만 그 사승관계의 연원은 아무도 모른다. 유독 하남의 정부자 <ref>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형제를 지칭한다. </ref> 께서 일찍이 수학해서 공자와 맹자이래로 전해지지 않던 정통을 얻었으니 이로써 그 연원을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자와 안자의 즐거움을 가리켜주고 <ref>『論語』「雍也」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飲,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ref> 음풍농월의 흥취를 일으키게 했던 것 <ref>『二程遺書』 卷三. “詩可以興. 某自再見茂叔後, 吟風弄月以歸, 有‘吾與點也’之意.”</ref> 을 또한 모두 들을 수 없는데다가 저술한 책도 흩어지고 잃어버린 것이 많다. 오직 이 한 편만은 본래 ‘역통易通’으로 불렸는데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함께 나와서 程氏가 이를 세상에 전하셨으니 그 학설은 실로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서로 표리를 이룬다. 대체로 [그 내용은] 一理와 二氣,五行의 나누어짐과 합해짐을 추론하여 道體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紀綱으로 삼았고, 道義와 文辭, 祿利 중에 취하고 버릴 것인지 결정해서 세속적 학문의 비루함을 떨치고 일어났으며, 덕德에 들어가는 방도와 세상을 경영하는 도구를 논하는 데 이르러서도 모두 친절하고 간단명료하니, 공허한 말이 아니다. 그 학설의 넓은 대강과 큰 쓰임을 돌아보니 이미 진나라와 한나라 이래 여러 유학자들이 미칠 바가 아니고, 그 조리의 엄밀함과 의미의 심오함 역시 오늘날의 학자들이 갑작스럽게 엿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 때문에 程氏가 세상을 떠나자 전한 사람이 드물었고, [이 책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 생각이 고원하다고 여길 뿐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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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熹自蚤歲旣幸得其遺編而伏讀之, 初蓋茫然不知其所謂, 而甚或不能以句. 壯歲獲遊延平先生之門, 然後始得聞其說之一二, 比年以來, 潛玩旣久, 乃若粗有得焉. 雖其宏綱大用所不敢知, 然於其章句文字之間, 則有以實見其條理之愈密、意味之愈深, 而不我欺也. 顧自始讀以至於今, 歲月幾何! 倏焉三紀. 慨前哲之益遠, 懼妙旨之無傳, 竊不自量, 輒爲注釋. 雖知凡近不足以發夫子之精蘊, 然創通大義, 以俟後之君子, 則萬一其庶幾焉. | ||
+ | :*나는 어려서부터 이미 다행히 그 남겨진 책을 얻어 읽었으나, 처음에는 아득하여 이것이 말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없었으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구두도 뗄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 연평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뒤에야 비로소 그 학설의 일부를 알 수 있었고, 근년 이래 오랫동안 깊이 완미해보고 나서야 조잡하게나마 뭔가 깨닫는 것이 있게 되었다. 비록 핵심적인 요지와 광대한 쓰임은 감히 알 순 없지만, 장구와 문자의 사이에 조리가 더욱 치밀하고 의미는 더욱 깊어서 진실로 나를 속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회고해 보건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 어느새 홀연히 36년이 되었다. 앞선 철인들이 점점 더 멀어짐을 개탄하고 미묘한 뜻이 멀어지고 있음을 두려워하여 삼가 나의 역량을 헤아리지도 않고 주해를 달았다. 비록 자질이 용렬하고 식견이 천박해서 선생님의 정밀한 뜻을 드러내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만, 처음 대강의 의미를 통하게 함으로써 훗날의 군자를 기다리니 만의 하나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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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淳熙丁未九月甲辰, 後學朱熹謹記. | ||
+ | :*순희 정미년(1187년) 9월 갑진일, 후학 주희朱熹는 삼가 서문을 쓰다 | ||
==주석== | ==주석== | ||
<references/> | <references/> |
2024년 7월 18일 (목) 17:09 기준 최신판
목차
- 1 해제
- 2 원문 및 朱注
- 2.1 誠上第一
- 2.2 誠下第二
- 2.3 誠幾德第三
- 2.4 聖第四
- 2.5 愼動第五
- 2.6 道第六
- 2.7 師第七
- 2.8 幸第八
- 2.9 思第九
- 2.10 志學第十
- 2.11 順化第十一
- 2.12 治第十二
- 2.13 禮樂第十三
- 2.14 務實第十四
- 2.15 愛敬第十五
- 2.16 動靜第十六
- 2.17 樂上第十七
- 2.18 樂中第十八
- 2.19 樂下第十九
- 2.20 聖學第二十
- 2.21 公明第二十一
- 2.22 理性命第二十二
- 2.23 顔子第二十三
- 2.24 師友上第二十四
- 2.25 師友下第二十五
- 2.26 過第二十六
- 2.27 勢第二十七
- 2.28 文辭第二十八
- 2.29 聖蘊第二十九
- 2.30 精蘊第三十
- 2.31 乾損益動第三十一
- 2.32 家人睽無妄第三十二
- 2.33 富貴第三十三
- 2.34 陋第三十四
- 2.35 擬議第三十五
- 2.36 刑第三十六
- 2.37 公第三十七
- 2.38 孔子上第三十八
- 2.39 孔子下第三十九
- 2.40 蒙艮第四十
- 3 통서 관련 글
해제
이 페이지는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동양철학전공 원전 강독 세미나(의적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통서(通書)』1권은 송대 신유학자인 주돈이의 저서이다. 글이 매우 짧고 단순하여 해석하기 어렵고 해석하더라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데, 주자마저도 주석을 단순하게 달아 후학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이는 틀림없이 후학의 실력이 부족한 결과일 것이지 절대로 주돈이가 멍청하거나 학통이 불분명하거나 작문 실력이 없거나 해서는 아닐 것이다.[1]
이러한 해석의 모호함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견을 제기하였다.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하지만 종합해보면 결국 '『통서』와 『태극도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그리고 '정명도, 정이천과 주돈이의 관계는 어떠했는가?'로 집약시킬 수 있다. 후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주돈이 페이지의 주정수수설 파트를 참고할 것.
『통서』는 주돈이가 직접 쓴 본문과 주희의 주해 사이에 몇몇 간극이 존재한다. 하지만 본문만 가지고는 주돈이의 사상을 재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희의 이해방식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주희의 이해방식에 근거하면 『통서』의 내용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통서』는 만물·운동·변화의 근거로서 ‘태극(太極)’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현상과 태극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誠上第一’, ‘誠下第二’, ‘動靜第十六’, ‘理性命第二十二’ 등에서 보인다. 둘째, 『통서』는 유학자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志學第十’, ‘顔子第二十三’ 등에서 보인다. 셋째, 『통서』는 세상을 경영하는 수단으로서의 ‘예(禮)’와 ‘악(樂)’의 활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樂上第十七’, ‘樂中第十八’, ‘樂下第十九’에서 보인다.
원문 및 朱注
번역 없이 원문만 필요할 경우 다음의 링크를 활용하고,[1]
각 장의 번역이 필요한 경우에는 아래의 링크를 확인할 것. (발제자가 달라 형식/표점 등이 일정하지 않는데, 추후 교정 필요)
誠上第一
誠下第二
誠幾德第三
聖第四
愼動第五
道第六
師第七
幸第八
思第九
志學第十
順化第十一
治第十二
禮樂第十三
務實第十四
愛敬第十五
動靜第十六
樂上第十七
樂中第十八
樂下第十九
聖學第二十
公明第二十一
理性命第二十二
顔子第二十三
師友上第二十四
師友下第二十五
過第二十六
勢第二十七
文辭第二十八
聖蘊第二十九
精蘊第三十
乾損益動第三十一
家人睽無妄第三十二
富貴第三十三
陋第三十四
擬議第三十五
刑第三十六
公第三十七
孔子上第三十八
孔子下第三十九
蒙艮第四十
통서 관련 글
『주돈이집』(중화서국, 1990)을 저본으로 하여, 권2와 「부록2」·「부록3」에 기재되어있는 통서 관련 글을 (될 수 있으면) 시간 순서대로 서술한다.
進周易表 - 宋 朱震[2]
- 臣伏奉四月二十九日聖㫖, 令臣進所撰『周易集傳』等書, 仍命尚方[3]給紙札書吏者. 臣聞商瞿學於夫子, 自丁寛而下, 其流為孟喜、京房. 喜書見於唐人者猶可考也, 一行所集房之易傳, 論卦氣、納甲、五行之類. 兩人之言, 同出於周易繫辭、說卦, 而費直亦以夫子「十翼」解説上、下經, 故前代號「繋辭」、「説卦」為「周易大傳」. 爾後馬、鄭、荀、虞各自名家, 說雖不同, 要之去象數之源猶未逺也. 獨魏王弼與鍾會同學, 盡去舊説, 雜之以莊、老之言. 於是儒者專尚文辭, 不復推原「大傳」天人之道, 自是分裂而不合者, 七百餘年矣.
- 지난 4월 29일 신은 엎드려 성지를 받았사온데, 신에게 신이 지은 『주역집전』 등의 책을 올리라고 하였고, 이어서 尚方에 명하여 종이를 제공하고 관원에게 공문을 보내게 하였습니다. 신이 들으니 商瞿는 공자께 배웠는데, 丁寛 이후로 그 흐름이 孟喜(?~?)와 京房(B.C.77~B.C.37) 로 이어졌습니다. 맹희의 글은 당나라 때 사람의 글에서 보이는 것으로 그래도 상고할 수 있고, 一行(683~727)이 모은 경방의 『역전』은 괘기설·납갑설·오행설 따위를 논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말이 똑같이 『주역』 「계사」·「설괘」에서 나왔고, 費直(?~?)은 또한 공자의 「십익」을 상·하경으로 해설했으므로, 이전 시대에는 「계사」·「설괘」를 「주역대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후 馬融(79~116)·鄭玄(127~200)·荀爽(128~190)·虞飜(164~223)이 각각 일가를 이루었는데, 설이 비록 다르지만 요약한다면 상수의 연원에서 여전히 멀지 않았습니다. 오직 위나라의 王弼(226~249)과 鍾會(225~264)가 함께 배워 옛 설을 모두 없애고 老莊의 말을 뒤섞었습니다. 이에 유자들이 오로지 그들의 글만 숭상하고 더 이상 「주역대전」의 하늘과 사람의 도에 대해 궁구하지 않았고, 이로부터 분열돼 합쳐지지 않은 것이 칠백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 國家龍興, 異人閒出. 濮上陳摶以《先天圖》傳种放, 放傳穆修, 修傳李之才, 之才傳邵雍. 放以《河圖》、《洛書》傳李漑, 漑傳許堅, 堅傳范諤昌, 諤昌傳劉牧. 修以《太極圖》傳周敦頤, 敦頤傳程頤、程顥. 是時張載講學於二程、邵雍之閒. 故雍著『皇極經世』之書, 牧陳天地五十有五之數, 敦頤作『通書』, 程頤述『易傳』, 載造「太和」、「三兩」等篇. 或明其象, 或論其數, 或傳其辭, 或兼而明之. 更唱迭和, 相為表裏, 有所未盡, 以待後學.
- 우리나라가 우뚝 서는 가운데 뛰어난 인물들이 나왔습니다. 濮上의 陳摶(871~989)는 《선천도》를 种放(955~1016)에게 전했고, 충방은 穆修(979~1032)에게 전했으며, 목수는 李之才(?~1045)에게 전했고, 이지재는 邵雍(1011~1077)에게 전했습니다. 충방은 《하도》·《낙서》를 李漑에게 전했고, 이개는 許堅에게 전했으며, 허견은 范諤昌에게 전했고, 범악창은 劉牧(1011~1064)에게 전했습니다. 목수는 《태극도》를 周敦頤에게 전했고, 주돈이는 정이·정호에게 전했습니다. 당시 장재가 이정과 소옹 사이에서 강학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옹은 『황극경세서』를 지었고, 유목은 ‘天地之數五十五’를 주장했으며, 주돈이는 『통서』를 지었고, 정이는 『역전』을 지었으며, 장재는 「태화」·「삼량」 등의 편을 지었습니다. 혹자는 『주역』의 象을 밝혔고, 혹자는 『주역』의 數를 논했으며, 혹자는 『주역』의 辭를 전했고, 혹자는 이것들을 겸하여 밝혔습니다. 서로 선창하고 화답하며 표리를 이뤘는데, 미진한 점은 후학을 기다렸습니다.
- 臣頃者遊宦西洛, 獲觀遺書, 問疑請益, 徧訪師門, 而後粗窺一二. 造次不捨, 十有八年, 起政和丙申, 終紹興甲寅. 成『周易集傳』九卷, 『周易圖』三卷, 『周易叢説』一卷. 以『易傳』為宗, 和㑹雍、載之論, 上採漢、魏、吳、晉、元魏, 下逮有唐及今. 包括異同, 補苴罅漏, 庶㡬道離而復合. 不敢傳諸博雅, 姑以自備遺忘, 豈期清問[4]俯及[5]芻蕘? 昔虞翻講明秘說, 辨正流俗, 依經以立註, 嘗曰: “使天下一人知, 已足以不恨.” 而臣親逢陛下, 曲訪淺陋, 則臣之所遇, 過於昔人逺矣. 其書繕寫一十三冊, 謹隨狀上進, 以聞[6]. 謹進.
- 신이 잠깐 西洛에 근무할 때 남아있는 전적들을 얻어 보고서, 의심나는 것을 묻고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 두루 선생들을 방문한 뒤에야 한두 가지를 조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기를 정화 6년(丙申, 1116년)부터 소흥 4년(甲寅, 1134년)까지 18년 동안 해서 『주역집전』 9권·『주역도』 3권·『주역총설』 1권을 완성하였는데, 『역전』을 종주로 삼고 소옹·장재의 주장을 모았으며, 위로는 한·위·오·진·원위(북위)의 설을 채록하고 아래로는 당에서 지금까지의 설을 두었습니다. 같고 다른 것을 포괄하여 빠진 틈을 메웠으니, 거의 도가 떨어졌으나 다시 합쳐졌습니다. 감히 아름다운 표현으로 전하진 못하고 우선 스스로 잊지 않도록 하는 것만 대비하였으니, 어찌 清問이 하찮은 제게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옛적에 우번이 秘說을 밝히고 세속을 변정할 때 경전에 의거해 주석을 달았는데, 일찍이 “천하 한 사람이라도 알아준다면 나는 여한이 없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직접 폐하를 뵙고 천박한 제 의견을 곡진히 아뢴다면 신이 만난 것은 옛사람(우번)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이 책을 열세 책에 옮겨쓰고 삼가 疏狀과 함께 올립니다. 삼가 올립니다.
通書後跋(1144) – 宋 祁寬
- 濂溪先生, 姓周, 名敦頤, 字茂叔, 世為營道人. 少孤, 養於舅家, 以恩補官. 試吏郡縣, 以至持節外臺, 為政力行其志, 所臨必有能聲. 卒官朝奉郎, 分司南京. 酷愛廬阜, 迺買田築室, 退樂濂溪之上. 人因以是稱之. 名賢賦詠, 及墓誌所載, 皆專美其清尚而已.
- 염계 선생의 성은 周, 이름은 敦頤이며 자는 茂叔이니, 대대로 營道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숙부의 집에서 길러졌는데, 음서로 관직에 올랐고, 벼슬이 試吏郡縣에서 持節外臺에 이르렀는데, 행정을 함에 그 뜻을 힘써 실천해 부임지마다 반드시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졸할 때의 관직은 朝奉郎 分司南京이었다. 여산을 매우 사랑하여 이에 밭을 사고 집을 지어 염계 가로 물러나 즐겼다. 사람들이 이것으로 선생을 칭한다. 유명한 현자들이 지은 시와 묘지명에 기재되어 있는 것들 모두 오직 선생의 고상한 절조를 찬미할 뿐이다.
- 先生歿, 洛陽二程生生, 唱學於時. 辨異端, 闢邪說, 自孟子而下, 鮮不許可. 獨以先生為知道. 又云, 自聞道於先生, 而其學益明. 明道先生曰: “吾再見周茂叔, 吟風弄月以歸, 得‘吾與㸃也’之意.” 伊川先生狀明道之行曰: “幼聞汝南周茂叔論道, 遂厭科舉之業, 求諸六經而後得之.” 其推尊之如此. 於是, 世方以道學歸之. 其後東坡蘇公詩云: “先生本全德, 廉退乃一隅.” 葢謂此爾.
- 선생이 돌아가시자 낙양의 이정 선생이 그 때 학문을 창도하였다. 이단을 변별하고 사설을 물리쳐 맹자 이후로 거의 인정하지 않았는데, 유독 염계 선생만이 도를 알았다고 여겼다. 또 ‘염계 선생께 도를 들은 뒤로 자신의 학문이 더욱 밝아졌다’고 하였다. 명도 선생은 “내가 주무숙을 두 번 뵙고서 음풍농월하며 돌아와 ‘나는 증점을 허여한다’는 뜻을 얻게 되었다”고 하셨고, 이천 선생은 명도의 행장에서 “어려서 여남 주무숙이 도를 논함을 듣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싫증내고 육경에서 도를 구한 이후에 터득했다”고 말하였다. 이정 선생이 염계 선생을 추존한 것이 이와 같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비로소 도학을 의지하게 되었다. 그 뒤로 소동파가 시에서 “선생은 본래 덕을 온전히 갖추셨으면서도 한 쪽으로 겸양하며 물러나셨다”고 했으니 대개 이를 말한 것이다.
- 『通書』即其所著也. 始出於程門侯師聖, 傳之荊門高元舉, 朱子發. 寬初得於高, 後得於朱. 又後得和靖先生所藏, 亦云得之程氏. 今之傳者是也.
- 『통서』는 곧 염계 선생의 저작이다. 처음 程門의 후중량(侯師聖)에서 나와 荊門의 高元舉·朱子發에게 전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高元舉에게 얻었고 나중에 朱子發에게 얻었다. 또 그 뒤에 윤돈(尹和靖)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얻었는데, 그 역시 ‘이천 선생에게 얻었다’고 하였다. 지금 전하는 것이 이것이다.
- 逮卜居九江, 得舊本於其家, 比前所見, 無《太極圖》. 或云: 圖乃手授二程, 故程本附之卷末也. 校正舛錯三十有六字, 疑則闕之. 夫老氏著『道德』五千言, 世稱微妙. 此書字不滿三千, 道德、性命、禮樂、刑政, 悉舉其要. 而又名之以通, 其示人至矣. 學者宜盡心焉. 紹興甲子春正月, 武當祁寬謹題.
- 구강에 살 집을 마련하고서, 염계 선생의 집에서 옛 판본을 얻어 전에 보았던 것과 비교해보니 《태극도》가 없었다. 혹자는 ‘《태극도》는 염계 선생이 손수 이정에게 주신 것이므로, 이정의 판본에서는 이를 권말에 붙였다’고 하였다. 잘못된 글자 36자를 교정했고, 의심스러운 것은 제거했다. 노자가 지은 『도덕경』 오천 자를 세상 사람들은 미묘하다고 일컫는데, 이 책은 삼천 자가 안 되지만 도덕·성명·예악·형정에 대해 모두 그 핵심을 거론하고 있고 또 “通”이라고 이름 붙였으니 사람들이게 보이는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이 책에 마음을 다 쏟아야 할 것이다. 소흥 14년(甲子, 1144년) 봄 정월에 武當 기관이 삼가 쓰노라.
通書序略 - 宋 胡宏[7]
- 『通書』四十章, 周子之所述也. 周子, 名敦頤, 字茂叔, 舂陵人. 推其道學所自, 或曰: 傳《太極圖》於穆修也, 修傳《先天圖》於种放, 放傳於陳摶, 此殆其學之一師歟, 非其至者也. 希夷先生有天下之願, 而卒與鳳歌、荷蓧長往不來者伍. 於聖人無可無不可之道, 亦似有未至者.
- 『통서』 40장은 周子의 저술이다. 周子의 이름은 敦頤, 자는 茂叔으로 舂陵 사람이다. 그 도학의 연원을 미뤄보면, 혹자는 ‘[周子가] 《太極圖》를 목수에게서 전해 받았고, 목수는 《先天圖》를 충방에게서 전해 받았으며, 충방은 진단에게서 전해 받았다’[8]고 하는데, 이들은 아마도 周子 학문에서의 한 스승일 뿐 결정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진단(希夷先生)은 천하를 구제하려는 소망이 있었으나 끝내 봉황 노래를 불렀던 자[9]와 삼태기를 메고 멀리 가버려 돌아오지 않았던 자[10]의 부류가 되어, 성인(공자)의 “해야만 하는 것도 없고 하지 말아야할 것도 없는”[11] 도에 대해 이르지 못한 점이 있는 것 같다.
- 程明道先生嘗謂門弟子曰: “昔受學於周子, 令尋仲尼、顔子所樂者何事.” 而明道先生自再見周子, 吟風弄月以歸. 道學之士皆謂程顥氏續孟子不傳之學, 則周子豈特為种、穆之學而止者哉!
- 정명도 선생은 일찍이 문하의 제자들에게 “전에 周子께 수학할 때, [周子께서는] 중니와 안자가 즐겼던 것이 어떤 일인지 찾아보게 하셨다”고 말씀하셨고, 명도 선생은 周子를 두 번 만나고 나서 음풍농월하며 돌아오셨다. 도학의 선비들은 모두 명도 선생이 맹자 이후로 이어지지 않은 학문을 이었다고 하였으니, 周子가 어찌 충방·목수의 학문을 하고 그치신 분이겠는가!
- 粤若稽古孔子, 述三五之道, 立百王經世之法. 孟軻氏闢楊、墨, 推明孔子之澤, 以為萬世不斬, 人謂孟氏功不在禹下. 今周子啓程氏兄弟以不傳之妙, 一回萬古之光明, 如日麗天, 將為百世之利澤, 如水行地. 其功蓋在孔、孟之間矣.
- 옛적 공자를 상고해보건대, 삼황오제의 도를 조술하시고 후대 백왕의 경세법을 확립하셨다. 맹자는 양주와 묵적을 배척하여 공자의 은택을 미루어 밝혀 만세토록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사람들은 맹자의 공이 우임금의 아래에 있지 않다고 여겼다. 지금 周子께서 전해지지 않던 신묘한 가르침으로 이정 형제를 계발하셔서 한 번 만고의 빛을 되돌아오게 하신 것은 마치 ‘해가 하늘에 붙어있는 것’[12] 같고, 장차 백세의 이익과 은택이 되는 것은 마치 물이 땅 위를 흐르는 것과 같으니, 그 공이 아마 공자와 맹자 사이일 것이다.
- 人見其書之約也, 而不知其道之大也; 見其文之質也, 而不知其義之精也; 見其言之淡也, 而不知其味之長也. 顧愚何足以知之? 然服膺有年矣. 試舉一二語, 為同志者起予之益乎! 患人以發䇿決科、榮身肥家、希世取寵為事也, 則曰“志伊尹之所志.” 患人以知識聞見為得而自畫, 不待價而自沽也, 則曰“學顔子之所學.” 人有真能立伊尹之志、修顔子之學者, 然後知『通書』之言包括至大, 而聖門之事業無窮矣. 故此一卷書, 皆發端以示人者, 宜其度越諸子, 直以詩、書、易、春秋、語、孟同流行乎天下. 是以敘而藏之, 遇天下之善士, 又尚論前修[13]而欲讀其書者, 則傳焉. 安定胡宏序.
- 사람들은 『통서』의 내용이 간략한 것만 보고 담겨있는 도가 큼을 알지 못하며, 그 표현이 질박한 것만 보고 그 뜻이 정밀함을 알지 못하며, 그 말이 담박한 것만 보고 그 여운이 긺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어리석은 내가 어찌 『통서』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수년 간 마음에 품어왔기에 시험 삼아 한두 마디를 하니, 뜻이 같은 자들이 더욱 나를 분발시켜주기를[14] 위한 것이다. 사람들이 과거에 합격하는 것과 자신은 영달하고 집안은 살찌우며 세상에서 총애 얻기를 바라는 것을 일삼는 것을 걱정하셔서 “이윤이 뜻을 둔 바에 뜻을 두어라”[15]라고 하셨고, 사람들이 지식·견문에 만족하고 스스로 한계 짓고 값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을 파는 것[16]을 걱정하셔서 “안자가 배웠던 바를 배우라”[17]고 하셨다. 사람들 가운데 진정 이윤의 뜻을 세우고 안자의 학문을 닦을 수 있는 자가 있은 연후에 『통서』의 말이 포괄하는 것이 지극히 크고 聖門의 사업이 끝이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한 권의 책은 모두 단서를 계발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諸子의 수준을 뛰어넘고 곧장 『시』·『서』·『역』·『춘추』·『논어』·『맹자』와 함께 천하에 유통됨이 마땅하다. 이 때문에 서문을 쓰고 秘藏하니, 천하의 훌륭한 선비 중에 前賢을 尙論하여 그 책을 읽고자 하는 자를 만나면 전할 것이다. 안정 호굉이 서문을 쓴다.
太極通書後序(建安本, 1169) - 宋 朱熹
- 右周子之書一篇, 今舂陵、零陵、九江皆有本, 而互有同異. 長沙本最後出, 乃熹所編定, 視他本最詳密矣, 然猶有所未盡也.
- 이상은 주돈이의 책 한 편으로, 지금 용릉·영릉·구강에 모두 판본이 있으나 서로 차이가 있다. 장사본이 가장 나중에 나왔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편정한 것으로, 다른 판본들과 견줘보니 [장사본이] 가장 상밀하긴 한데 여전히 미진한 바가 있다.
- 盖先生之學, 其妙具於《太極》一圖. 『通書』之言, 皆發此《圖》之藴. 而程先生兄弟語及性命之際, 亦未嘗不因其說. 觀通書之誠、動静、理性命等章, 及程氏書之李仲通銘、程邵公誌、顔子好學論等篇, 則可見矣. 故潘清逸誌先生之墓, 敘所著書, 特以作太極圖為稱首. 然則此圖當為書首, 不疑也. 然先生既手以授二程本, 因附書後. (祁寛居之云) 傳者見其如此, 遂誤以圖為書之卒章, 不復釐正. 使先生立象盡意之㣲㫖, 暗而不眀. 而驟讀通書者, 亦復不知有所總攝. 此則諸本皆失之. 而長沙通書因胡氏所傳篇章, 非復本次, 又削去分章之目, 而别以‘周子曰’者加之, 於書之大義雖若無所害, 然要非先生之舊, 亦有去其目而遂不可曉者. (如理性命章之類.) 又諸本附載銘、碣、詩、文, 事多重複. 亦或不能有所發眀於先生之道, 以幸學者.
- 선생의 학문은 그 신묘한 것이 《태극도》 하나에 갖춰져 있다. 『통서』의 말은 모두 이 《태극도》에 담긴 뜻을 드러낸 것이다. 이정 형제께서 性命을 언급하실 때 역시 선생의 학설에 기인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 『통서』의 「誠」·「動静」·「理性命」 등의 장과 이정 선생이 쓰신 《李仲通銘》·《程邵公誌》·《顔子好學論》 등의 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潘清逸(반흥사)이 선생의 묘지명을 썼을 때 말한 선생의 저술 가운데 유독 《태극도》를 가장 먼저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 《태극도》가 응당 책의 첫머리가 되어야 함은 의심할 나위 없다. 그러나 선생이 손수 이정 선생에게 주신 판본은 책 마지막에 실려 있다. (祁寛[居之]의 말) 전하는 자가 이와 같음을 보고서 마침내 《태극도》를 책의 마지막 장이라고 잘못 여기고는 다시 수정하지 않았다. 만약 선생께서 도상을 세워 의미를 상세히 전달하고자 하는 깊은 뜻이 가려져 밝혀지지 않는다면, 급히 『통서』를 읽는 자 또한 다시는 總攝한 바가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는 여러 판본이 모두 틀렸다. 장사본 『통서』는 胡氏(호굉)가 전한 편장에 따라 본래의 편차를 회복하지 않았고, 또 分章의 절목을 산삭하고 따로 ‘周子曰’을 덧붙였는데, 『통서』의 대의에는 비록 문제될 것이 없으나, 요컨대 선생이 저술했을 때의 옛 모습이 아니고, 또 그 절목을 제거하여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리성명」 장 따위) 또 여러 판본이 명문(銘)·묘갈문(碣)·시·산문을 싣고 있는데, 일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또 간혹 선생의 도를 발명하여 배우는 자를 기쁘게 함이 있지 못하기도 하다.
- 故今特據潘誌置圖篇端, 以為先生之精意, 則可以通乎書之說矣. 至於書之分章定次, 亦皆復其舊貫. 而取公及蒲左丞、孔司封、黄太史所記先生行事之實, 刪去重複, 合為一篇, 以便觀者. 盖世所傳先生之書、言行具此矣.
- 그러므로 이제 특별히 반흥사의 묘지명에 의거해 《태극도》를 책의 첫머리에 두니, 선생의 정미한 뜻이 『통서』의 설에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통서』에서 章을 나누고 차례를 정하는 것의 경우 또한 모두 그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공(반흥사)과 蒲左丞·孔司封·黄太史가 기록한 선생의 행적을 모아 중복된 것을 산삭하고 한 권으로 합쳐 독자를 편하게 하였으니, 세상에 전해오는 선생의 책과 언행이 이 책에 갖춰졌다고 하겠다.
- 潘公所謂易通, 疑即通書. 而易說獨不可見, 向見友人多蓄異書, 自謂有傳本, 亟取而觀焉, 則淺陋可笑. 皆舍法時舉子葺緒餘, 與圖說、通書絶不相似, 不問可知其偽. 獨不知世復有能得其真者與否? 以圖、書推之, 知其所發當極精要, 㣲言湮沒, 甚可惜也!
- 반흥사가 말한 『역통』이라는 것이 아마도 『통서』인 듯한데, 『역설』이 유독 보이지 않는다. 전에 기이한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벗을 만났는데, 그가 스스로 전해지는 판본을 갖고 있다고 하기에 급히 가져다 읽어보니 천박하고 가소로웠다. 모두 舍人이 당시 과거 응시자들의 글 자투리를 본받은 것으로, 《태극도설》이나 『통서』와는 비슷하지도 않았으니, 그것이 가짜임은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세상에 얻을 수 있는 『역설』의 진본이 또 있을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태극도설》과 『통서』로 추측해보면, 『역설』이 발명한 것이 응당 精要를 다할 것임을 알 수 있지만, 선생의 정미한 뜻이 인멸되었으니 심히 애석하다!
- 熹又嘗讀朱内翰震進易說表, 謂此圖之傳, 自陳摶、种放、穆脩而来. 而五峯胡公仁仲作通書序, 又謂先生非止為种、穆之學者, “此特其學之一師耳, 非其至者也.” 夫以先生之學之妙, 不出此圖, 以為得之於人, 則决非种、穆所及; 以為“非其至者”, 則先生之學, 又何以加於此圖哉? 是以嘗竊疑之. 及得誌文考之, 然後知其果先生之所自作, 而非有所受於人者. 公盖皆未見此誌而云云耳. 然胡公所論通書之指曰: “人見其書之約, 而不知其道之大也; 見其文之質, 而不知其義之精也; 見其言之淡, 而不知其味之長也. 人有真能立伊尹之志, 脩顔子之學, 則知此書之言包括至大, 而聖門之事業無窮矣.” 此則不可易之至論, 讀是書者所宜知也. 因復掇取以系於後云.
- 나는 또 일찍이 주진의 《進易說表》를 읽어보았는데, 이 《태극도》의 전수가 진단·충방·목수로부터 전래되었다고 하였고, 호오봉이 쓴 《통서서》에서는 또 선생이 충방·목수의 학문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들은 그저 선생이 배운 한 스승이었을 뿐이니 그 전부는 아니었다"고 하였다. 선생의 신묘한 학문이 이 《태극도》를 벗어나지 않으니, 남에게 얻었다고 하면 결코 충방이나 목수가 미칠 바가 아니고, “그 전부가 아니다”라고 하면 선생의 학문에서 이 《태극도》에 무엇을 더하겠는가? 이 때문에 일찍이 의심했었다. 반흥사의 묘지명을 얻어 고찰한 연후에야 《태극도설》이 과연 선생께서 스스로 지으신 것이지 남에게 전수받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호오봉은 아마 이 묘지명을 전혀 보지 못하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 뿐이다. 그러나 호오봉이 『통서』의 요지에 대해 “사람들은 그 책이 간략함만 보고 그 도가 원대함을 알지 못하고, 그 글이 질박함만 보고 뜻이 정밀함을 알지 못하며, 그 표현이 담박한 것만 보고 여운이 긺을 알지 못한다. 사람 가운데 진정 이윤의 뜻을 세우고 안자의 학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의 구절이 지극히 큰 것을 포괄하고 있으며 聖門의 사업이 무궁함을 알 것이다”라고 논한 것은 바꿀 수 없는 지론이니, 이 책을 읽는 자가 마땅히 알고 있어야할 바이다. 인하여 다시 모아 뒤에 달아둔다.
- 乾道己丑六月戊申, 新安朱熹謹書.
- 건도 기축년(1169) 6월 무신일, 신안 주희가 삼가 쓴다.
通書後跋(1170) - 宋 張栻
- 友人朱熹元晦以《太極圖》列于篇首, 而題之曰太極通書. 栻刻于嚴陵學宮, 以示多士.
- 友人 주원회가 주렴계 선생의 『통서』에 《태극도》를 첫머리에 배열시키고 『태극통서』라고 제목을 붙였다. 내가 이를 嚴陵의 學宮에서 판각해서 여러 선비들에게 보였다.
- 嗟乎! 自聖學不明, 語道者不睹夫大全, 卑則割裂而無統, 髙則汗漫而不精. 是以性命之説, 不參乎事物之際; 而經世之務, 僅出於私意小智之為, 豈不可歎哉! 惟先生生乎千有餘載之後, 超然獨得夫『大易』之傳. 所謂太極圖乃其綱領也. 推明動靜之一源, 以見生化之不窮, 天命流行之體, 無乎不在. 文理密察, 本末該貫, 非闡微極幽, 莫能識其指歸也.
- 아! 성인의 학문이 밝혀지지 않은 뒤로 도를 말하는 자들은 그 크고 온전한 것을 보지 못하여, 낮게는 이리저리 찢어서 줄기가 없고, 높게는 산만하여 정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性命에 대한 설이 사물 사이에 참여하지 못했고, 經世의 일이 겨우 사적인 마음이나 쪼잔한 앎에서 겨우 나왔으니, 어찌 탄식할 만하지 않겠는가! 오직 주렴계 선생만이 천여 년 뒤에 태어나셔서 초연히 『주역』의 전수를 홀로 얻으셨다. 이른바 『태극도』라는 것이 바로 그 강령이다. 동정의 한 근원을 미루어 밝혀 [그것이] 끝없이 낳고 변화시킴을 보이시니, 천명유행의 본체가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글의 조리가 치밀·분명하고 본말을 모두 관통하니,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그윽한 것을 궁구한 자가 아니라면 그 뜻을 알 수 없을 것이다.
- 然而學者若之何而可以進於是哉? 亦曰敬而巳矣. 誠能起居食息, 主一而不舍, 則其德性之知, 必有卓然不可掩於體察之際者, 而後先生之蘊可得而窮, 太極可得而識矣. 乾道庚寅閏月謹題.
- 그러나 배우는 자들은 어떻게 여기에 나아갈 수 있는가? 역시 ‘敬’이라고 할 뿐이다. 진실로 기거하며 먹고 숨쉬는 때에 主一하여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 德性之知가 성찰할 때 반드시 탁연하여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니, 그런 이후에 선생의 깊은 뜻을 궁구할 수 있고, 태극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건도 건인년(1170년) 윤달에 삼가 쓰노라.
又(延平本, 1179)[18] - 宋 朱熹
- 臨汀楊方得九江故家傳本, 校此本, 不同者十有九處. 然亦互有得失.
- 임정 양방이 구강의 故家에서 전해오는 판본을 얻었는데, 이 판본(연평본)과 비교해보니 같지 않은 부분이 19곳이었다. 그러나 역시 서로 옳고 그른 것이 있었다.
- 其兩條, 此本之誤, 當從九江本:
- 두 조목은 이 판본(연평본)의 오류이니 마땅히 구강본을 따라야한다.
- 如理性命章云: “柔如之”(當作“柔亦如之”) 師友章(當自“道義者”以下拆為下章)
- ⓵ 「理性命」의 “柔如之”: 마땅히 “柔亦如之”로 써야한다.
- ⓶ 「師友」: 마땅히 “道義者” 뒤에서 끊고 다음 장으로 삼아야 한다.
- 其十四條, 義可兩通, 當並存之:
- 열네 조목은 의미가 둘 다 통하니, 마땅히 모두 기록해둔다.
- 如誠幾德章云: “理曰禮”(“理”一作“履”) 慎動章云: “邪動”(一作“動邪”) 化章(一作“順化”) 愛敬章云: “有善”(此下一有“是茍”字) “學焉”(此下一有“有”字) “曰有不善”(一無此四字) “曰不善”(此下一有“否”字) 樂章云: “優柔平中”(“平”一作“乎”) “輕生敗倫”(“倫”一作“常”) 聖學章云: “請聞焉”(“聞”一作“問”) 顔子章云: “獨何心哉”(“心”一作“以”) “能化而齊”(“齊”一作“濟”, 一作“消”) 過章(一作“仲由”) 刑章云: “不止即過焉”(“即”一作“則”)
- ⓷ 「誠幾德」의 “理曰禮”: “理”를 어떤 판본은 “履”라고 하였다.
- ⓸ 「慎動」의 “邪動”: 어떤 판본은 “動邪”라고 하였다.
- ⓹ 「化」: 어떤 판본은 “順化”라고 하였다.
- ⑥ 「愛敬」의 “有善”: 이 다음에 어떤 판본은 “是茍”자가 있다.
- ⑦ 「愛敬」의 “學焉”: 이 다음에 어떤 판본은 “有”자가 있다.
- ⑧ 「愛敬」의 “曰有不善”: 어떤 판본은 이 네 자가 없다.
- ⑨ 「愛敬」의 “曰不善”: 이 다음에 어떤 판본은 “否”자가 있다.
- ⑩ 「樂」의 “優柔平中”: “平”을 어떤 판본은 “乎”라고 하였다.
- ⑪ 「樂」의 “輕生敗倫”: “倫”을 어떤 판본은 “常”이라고 하였다.
- ⑫ 「聖學」의 “請聞焉”: “聞”을 어떤 판본은 “問”이라고 하였다.
- ⑬ 「顔子」의 “獨何心哉”: “心”을 어떤 판본은 “以”라고 하였다.
- ⑭ 「顔子」의 “能化而齊”: “齊”를 어떤 판본은 “濟”라고 하였고, 어떤 판본은 “消”라고 하였다.
- ⑮ 「過」: 어떤 판본은 “仲由”라고 하였다.
- ⑯ 「刑」의 “不止即過焉”: “即”을 어떤 판본은 “則”이라고 하였다.
- 其三條, 九江本誤, 而當以此本為正:
- 세 조목은 구강본의 오류이니 마땅히 이 판본(연평본)을 정본으로 삼아야한다.
- 如太極説云: “無極而太極”(“而”下誤多一“生”字) 誠章云: “誠斯立焉”(“立”誤作“生”) 家人暌復无妄章云: “誠心復其不善之動而巳矣”(“心”誤作“以”)
- ⑰ 《태극도설》의 “無極而太極”: “而” 다음에 “生”자가 잘못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 ⑱ 「誠」의 “誠斯立焉”: “立”을 “生”으로 잘못 썼다.
- ⑲ 「家人暌復无妄」의 “誠心復其不善之動而巳矣”: “心”을 “以”로 잘못 썼다.
- 凡十九條. 今附見於此, 學者得以考焉.
- 총 19조목이다. 지금 여기에 기록하여 표시해서 배우는 자들이 참고할 수 있게 하노라.
再定太極通書後序(南江本, 1179) - 宋 朱熹
- 右周子太極圖並說一篇、通書四十章、世傳舊本遺文九篇、遺事十五條、事狀一篇,熹所集次,皆已校定,可繕寫。某按先生之書,近歲以來,其傳既益廣矣,然皆不能無謬誤 ; 惟長沙建安板本為庶幾焉,而猶頗有所未盡也。
- 이상은 주돈이의 「태극도」와 『태극도설』 한 편과 『통서』 40장, 세상에 전해진 구본의 유고 아홉 편, 유사(遺事) 열 다섯 조목, 그리고 사장(事狀) 한 편이다. 내가 차례대로 모은 것은 모두 이미 교정한 것이므로 수록할 만하다. 내가 선생의 글을 살펴봄에 최근에 와서야 그 전해 받은 것이 또한 더욱 넓어졌긴 하지만, 각각의 오류가 없을 수 없었다. 오직 장사본과 건안본이 (본의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럼에도 오히려 자못 미진한 부분이 있다.
- 蓋先生之學之奧,其可以象告者,莫備於太極之一圖。若通書之言,蓋皆所以發明其蘊,而誠、動靜、理性命等章為尤著。程氏之書,亦皆袓述其意,而李仲通銘、程邵公誌、顏子好學論等篇,乃或並其語而道之。故清逸潘公誌先生之墓,而敘其所著之書,特以作太極圖為首稱,而後乃以易說、易通繫之,其知此矣。
- 대개 선생의 학문의 심오함에 있어서 상(象)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 중에 「태극도」 하나보다 완비된 것은 없다. 통서의 말과 같은 경우에는 대개 모두 그 정밀한 뜻을 드러내 밝힌 것이니, 「성」,「동정」,「리성명」 등의 장(章)이 더욱 뚜렷하다. 이정의 글은 또한 모두 (주돈이의) 뜻을 조술하였으니, 「이중통명(李仲通銘)」,「정소공지(程邵公誌)」, 「안자호학론(顏子好學論)」등의 편은 바로 혹 주돈이의 말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 따라서 반흥사가 선생의 묘에 묘지문을 써서 주돈이가 썼던 글을 나열하였는데, 특히 「태극도」를 만든 것을 맨 앞에 드러내었고 이후에 비로소 「역설」과 『역통』을 덧붙였으니, 이러한 점을 알았던 것이다.
- 按 : 漢上朱震子發,言陳摶以太極圚傳種放,放傳穆修,修傳先生。衡山胡宏仁仲則以為種、穆之傳,特先生「所學之一師,而非其至者」。武當祈寬居之又謂圖像乃先生指畫以語二程,而未嘗有所為書。此蓋皆未見潘誌而言。若胡氏之說,則又未考乎先生之學之奧,始卒不外乎此圖也。先生易說久已不傳於世,向見兩本,皆非是。其一卦說,乃陳忠肅公所著;其一繫辭說,又皆佛、老陳腐之談。其甚陋而可笑者,若曰「易之冒天下之道也,猶狙公之罔眾狙也。」觀此則其決非先生所為可知矣。易通疑即通書。蓋易說既依經以解義,此則通論其大旨、而不系於經者也。特不知其去易而為今名,始於何時爾。
- 살펴보건대, 한상 주진은 진단이 「태극도」를 충방에게 전하였고, 충방이 목수에게 전하였으며, 목수가 염계선생께 전했다고 말하였다. 형산 호굉의 경우에는 종방과 목수가 전수한 일에 대하여 다만 선생이 ‘배운 한 스승이었을 뿐이니 선생이 배웠던 지극한 핵심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무당 기관은 또한 도상이 바로 선생이 손수 그리셔 이정에게 말해주셨으니 일찍이 책을 지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모두 반흥사의 묘지문을 보지 못하고 말한 것이다. 호씨의 설과 같은 경우는 또한 선생의 학문의 심오한 의미가 시종일관 이 「태극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고찰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의 「역설」은 오랫동안 이미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으며, (내가) 이전에 두 판본을 보았는데 모두 맞는 것이 아니었다. 그 하나는 「괘설」이었는데, 바로 진충숙공이 저술한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계사설」이었는데, 또한 모두 불가와 노장의 진부한 말이었다. 그 가운데 매우 비루하여 비웃을 만한 것이 있었으니, 예를 들어, ‘역이 천하의 도를 포괄하는 것이 마치 저공(狙公)이 여러 원숭이들을 (조삼모사로) 속이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다. 이것을 보면 그것이 결코 선생이 지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역통』은 아마도 『통서』일 것이다. 대체로 「역설」은 이미 경전에 의거하여 의미를 해석하였으며, 이것(통서)은 그 큰 요지를 통론한 것으로 경전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것이 ‘역(易)’자를 없애고 지금의 이름이 된 것이 어느 때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 然諸本皆附於通書之後,而讀者遂誤以為書之卒章,使先生立象之微旨暗而不明。驟而語夫通書者,亦不知其綱領之在是也。長沙本既未及有所是正,而通書乃因胡氏所定,章次先後輒頗有所移易,又刊去章目,而別以「周子曰」者加之,皆非先生之舊。若理性命章之類,則一去其目,而遂不可曉。其所附見銘、碣、詩、文,視他本則詳矣,然亦或不能有以發明於先生之道,而徒為重復。
- 그러나 여러 판본은 모두 그것(「태극도」)을 통서의 뒤에 덧붙였기 때문에, 읽는 자가 마침내 그것을 책의 마지막 장이라고 오해하여 선생이 도상을 세운 깊은 뜻을 어둡게 하여 밝혀지지 않게 하였다. 생각없이 『통서』를 말하는 사람들도 또한 그 강령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장사본은 교정한 것을 이미 언급하지 않았고, 『통서』의 경우는 바로 호씨가 정한 것에 따르면 장의 차례가 선후가 번번이 옮겨지거나 바뀐 것이 있었으며, 또한 각 장의 제목을 없앴으며 별도로 ‘주자 왈(周子曰)’을 붙였으니, 모두 선생의 구본이 아니다. 「리성명」장의 부류들은 일제히 그 제목을 없애버려서 마침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첨부한 묘지명(銘)과 묘갈문(碣), 시, 문에 있어서 다른 판본을 보면 상세하긴 하지만 또한 간혹 선생의 도를 발명해 낼 수 없었고, 다만 중복한 것이 되었을 뿐이었다.
通書後記(1187) - 宋 朱熹
- 通書者, 濂溪夫子之所作也.(夫子性周氏, 名敦頤, 字茂叔). 夫子自少卽以學行有聞於世, 而莫或知其師傳之所自. 獨以河南兩程夫子嘗受學焉, 而得孔孟不傳之正統, 則其淵源因可槪見. 然所以指夫仲尼, 顔子之樂, 而發其吟風弄月之趣者, 亦不可得而悉聞矣. 所著之書, 又多放失. 獨此一篇, 本號易通, 與太極圖說並出, 程氏以傳於世, 而其爲說, 實相表裏. 大抵推一理、二氣、五行之分合, 以紀綱道體之精微; 決道義、文辭、祿利之取舍, 以振起俗學之卑陋. 至論所以入德之方、經世之具, 又皆親切簡要, 不爲空言. 顧其宏綱大用, 旣非秦漢以來諸儒所及; 而其條理之密、意味之深, 又非今世學者所能驟而窺也. 是以程氏旣沒, 而傳者鮮焉, 其知之者, 不過以爲用意高遠而已.
- 『통서通書』는 염계 선생의 저작이다. (선생의 성은 周씨이고, 이름은 '돈이敦頤'이며, 자는 '무숙茂叔'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행실로 세상에 명성이 있었지만 그 사승관계의 연원은 아무도 모른다. 유독 하남의 정부자 [19] 께서 일찍이 수학해서 공자와 맹자이래로 전해지지 않던 정통을 얻었으니 이로써 그 연원을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자와 안자의 즐거움을 가리켜주고 [20] 음풍농월의 흥취를 일으키게 했던 것 [21] 을 또한 모두 들을 수 없는데다가 저술한 책도 흩어지고 잃어버린 것이 많다. 오직 이 한 편만은 본래 ‘역통易通’으로 불렸는데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함께 나와서 程氏가 이를 세상에 전하셨으니 그 학설은 실로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서로 표리를 이룬다. 대체로 [그 내용은] 一理와 二氣,五行의 나누어짐과 합해짐을 추론하여 道體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紀綱으로 삼았고, 道義와 文辭, 祿利 중에 취하고 버릴 것인지 결정해서 세속적 학문의 비루함을 떨치고 일어났으며, 덕德에 들어가는 방도와 세상을 경영하는 도구를 논하는 데 이르러서도 모두 친절하고 간단명료하니, 공허한 말이 아니다. 그 학설의 넓은 대강과 큰 쓰임을 돌아보니 이미 진나라와 한나라 이래 여러 유학자들이 미칠 바가 아니고, 그 조리의 엄밀함과 의미의 심오함 역시 오늘날의 학자들이 갑작스럽게 엿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 때문에 程氏가 세상을 떠나자 전한 사람이 드물었고, [이 책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 생각이 고원하다고 여길 뿐이었다.
- 熹自蚤歲旣幸得其遺編而伏讀之, 初蓋茫然不知其所謂, 而甚或不能以句. 壯歲獲遊延平先生之門, 然後始得聞其說之一二, 比年以來, 潛玩旣久, 乃若粗有得焉. 雖其宏綱大用所不敢知, 然於其章句文字之間, 則有以實見其條理之愈密、意味之愈深, 而不我欺也. 顧自始讀以至於今, 歲月幾何! 倏焉三紀. 慨前哲之益遠, 懼妙旨之無傳, 竊不自量, 輒爲注釋. 雖知凡近不足以發夫子之精蘊, 然創通大義, 以俟後之君子, 則萬一其庶幾焉.
- 나는 어려서부터 이미 다행히 그 남겨진 책을 얻어 읽었으나, 처음에는 아득하여 이것이 말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없었으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구두도 뗄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 연평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뒤에야 비로소 그 학설의 일부를 알 수 있었고, 근년 이래 오랫동안 깊이 완미해보고 나서야 조잡하게나마 뭔가 깨닫는 것이 있게 되었다. 비록 핵심적인 요지와 광대한 쓰임은 감히 알 순 없지만, 장구와 문자의 사이에 조리가 더욱 치밀하고 의미는 더욱 깊어서 진실로 나를 속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회고해 보건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 어느새 홀연히 36년이 되었다. 앞선 철인들이 점점 더 멀어짐을 개탄하고 미묘한 뜻이 멀어지고 있음을 두려워하여 삼가 나의 역량을 헤아리지도 않고 주해를 달았다. 비록 자질이 용렬하고 식견이 천박해서 선생님의 정밀한 뜻을 드러내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만, 처음 대강의 의미를 통하게 함으로써 훗날의 군자를 기다리니 만의 하나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淳熙丁未九月甲辰, 後學朱熹謹記.
- 순희 정미년(1187년) 9월 갑진일, 후학 주희朱熹는 삼가 서문을 쓰다
주석
- ↑ 호굉 周子通書序 人見其書之約,而不知其道之大也;人見其文之質也,而不知其義之精也;人見其言之淡也,而不知其味之長也。
- ↑ 1072~1138
- ↑ 한어대사전 1. 古代製造帝王所用器物的官署. 3. 泛稱爲宮庭製辦和管掌飮食器物的官署、部門.
- ↑ 한어대사전 淸審詳問. 『書』 「呂刑」 皇帝清問下民, 鰥寡有辭于苗.
- ↑ 한어대사전 下及.
- ↑ 한어대사전 6. 指使君主聽見, 謂向君主報告.
- ↑ 1105~1161
- ↑ 朱震 《進周易表》
- ↑ 논어 미자 5. 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鳳兮!鳳兮!何德之衰?往者不可諫,來者猶可追。已而,已而!今之從政者殆而!」孔子下,欲與之言。趨而辟之,不得與之言。
- ↑ 논어 미자 7. 子路從而後,遇丈人,以杖荷蓧。子路問曰:「子見夫子乎?」丈人曰:「四體不勤,五穀不分。孰為夫子?」植其杖而芸。子路拱而立。止子路宿,殺雞為黍而食之,見其二子焉。明日,子路行以告。子曰:「隱者也。」使子路反見之。至則行矣。子路曰:「不仕無義。長幼之節,不可廢也;君臣之義,如之何其廢之?欲潔其身,而亂大倫。君子之仕也,行其義也。道之不行,已知之矣。」
- ↑ 논어 미자 8. 逸民:伯夷、叔齊、虞仲、夷逸、朱張、柳下惠、少連。子曰:「不降其志,不辱其身,伯夷、叔齊與!」謂:「柳下惠、少連,降志辱身矣。言中倫,行中慮,其斯而已矣。」謂:「虞仲、夷逸,隱居放言。身中清,廢中權。」「我則異於是,無可無不可。」
- ↑ 주역 리괘 단전 日月麗乎天.
- ↑ 한어대사전 【前脩】 猶前賢.
- ↑ 논어 팔일 8. 子夏問曰:「『巧笑倩兮,美目盼兮,素以為絢兮。』何謂也?」子曰:「繪事後素。」曰:「禮後乎?」子曰:「起予者商也!始可與言詩已矣。」
- ↑ 통서 志學第十
- ↑ 논어 자한 13. 子貢曰:「有美玉於斯,韞匵而藏諸?求善賈而沽諸?」子曰:「沽之哉!沽之哉!我待賈者也。」
- ↑ 통서 志學第十
- ↑ 주자대전에는 "跋延平本太極通書(淳熙六年)"으로 쓰여있다. 혹 건안본을 연평본이라고 일컬은 것은 아닌지?
- ↑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형제를 지칭한다.
- ↑ 『論語』「雍也」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飲,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 ↑ 『二程遺書』 卷三. “詩可以興. 某自再見茂叔後, 吟風弄月以歸, 有‘吾與點也’之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