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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5일 (일) 08:19 기준 최신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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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중기의 학자 이이(李珥)가 왕도정치의 이상을 문답형식으로 서술하여 선조에게 올린 글.
내용
이이가 34세 되던 해 홍문관 교리로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면서 지은 글이다. 이 글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논군도(論君道)>, <논신도(論臣道)>, <논군신상득지난(論君臣相得之難)>, <논동방도학불행(論東方道學不行)>, <논아조고도불복(論我朝古道不復)>, <논당금지시세(論當今之時勢)>, <논무실위수기지요(論務實爲修己之要)>, <논변간위용현지요(論辨姦爲用賢之要)>, <논안민지술(論安民之術)>, <논교인지술(論敎人之術)>, <논정명위치도지본(論正名爲治道之本)> 등 11개 편으로 나누어 논하고, 마지막에 1575년 이이가 쓴 〈송조여식설(送趙汝式說)〉이 붙어 있다. 〈송조여식설〉은 조여식이 읍재(邑宰)가 되어 조언을 요청한 것에 대해 답한 것이다.
각 편의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제1 <논군도>편에서는 임금이 어떻게 통치하는 것이 바른 도리인가를 역사 속에서 사례를 들어가며 논하였다. 제2 <논신도>편에서는 신하로서 나아감과 물러남의 도를 설명했는데, 즉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나아가 겸선천하(兼善天下)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물러나 독선기신(獨善其身)하는 것이 도리임을 설명하였다.
제3 <논군신상득지난>편에서는 현군(賢君)이 현상(賢相)을 만나기가 어려웠던 역사적 사례를 열거하면서 도학을 존숭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4 〈논동방도학불행〉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도학이 행해지지 못했던 예를 서술하고‚ 제5 〈논아조고도불복〉편에서는 당시까지 우리나라에 고도(古道)가 행해지지 못했음을 논하였다. 제6 〈논당금지세〉편에서는 당시 우리나라의 형세에 대해 논하고 삼대(三代)의 지치(至治)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논술하였다. 제7 〈논무실위수기지요〉편에서는 무실(務實)하여 모든 폐해를 혁신할 것을 논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입지(立志)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제8 〈논변간위용현지요〉편에서는 간신과 충신을 가리어 간신을 멀리하고 현인들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9 〈논안민지술〉편에서는 당시 우리나라의 가장 큰 폐법(弊法) 다섯 가지를 지적하였는데 이족절린(一族切隣)‚ 진상번중(進上煩重)‚ 공물방납(貢物防納)‚ 역사불균(役事不均)‚ 이서주구(吏胥誅求) 등 모두 민생과 관계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신들을 등용하여 이러한 폐법을 혁신하고 백성들을 구제하며‚ 언로를 넓히어 누구의 말이든지 좋은 말은 항상 받아들여야 한다는 등의 부국과 안민의 방법을 역사적인 예를 들어가며 논하였다. 제10 〈논교인지술〉편에서는 이미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평화롭게 된 후에 윤리·도덕을 교육시킬 것을 강조하면서 그 방법을 논하였다. 제11 〈논정명위치도지본〉편에서는 당시의 급선무는 안민(安民)인데 안민은 정명(正名)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하여 역사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정명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됨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본서는 16세기 당시의 시대상과 노출된 문제점을 해결하고 왕도지치(王道之治)를 구현하기 위해 당대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이이(李珥)가 어떠한 방법을 제시하였는가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