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윤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잔글 (사용방법)
 
(같은 사용자에 의한 2개의 중간 편집이 숨겨짐)
1번째 줄: 1번째 줄:
<onlyinclude>
+
 
{|class="metadata" style="background:#f2f2f2; width:400px; margin: 3px 3px 3px 3px;" cellspacing="10" align="right"
+
 
|-
+
! colspan="2" style="background:#800000; color:#ffffff; font-size:150%; text-align:center;" | '''{{{대표명칭}}}'''
+
|-
+
| colspan="2" style="text-align:center;" | [[파일:{{{image|}}}|380px]]
+
|-
+
! colspan="2" style="background:#008080; color:#ffffff; font-size:100%; text-align:center;" | '''{{{DB유형}}}'''
+
|-
+
| style="width:100px; text-align:left;" |'''한글표기''' || {{{한글표기|}}}
+
|-
+
| style="width:100px; text-align:left;" |'''한자표기''' || {{{한자표기|}}}
+
|-
+
| style="width:100px; text-align:left;" |'''시대''' || {{{시대|}}}
+
|-
+
| style="width:100px; text-align:left;" |'''분야''' || {{{분야|}}}
+
|-
+
| style="width:100px; text-align:left;" |'''제작시기''' || {{{제작시기|}}}
+
|-
+
| style="width:100px; text-align:left;" |'''제작자''' || {{{편저자|}}}
+
|}
+
</onlyinclude>
+
 
<pre style="width:500px">
 
<pre style="width:500px">
 
{{기록물정보
 
{{기록물정보
34번째 줄: 14번째 줄:
 
}}
 
}}
 
</pre>
 
</pre>
 +
 +
[[분류:틀]]
  
  
 
고종이 대소 관료와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에게 내린 척사윤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이 실려 있다.
 
고종이 대소 관료와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에게 내린 척사윤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이 실려 있다.
 
천주교에 대한 척사로 발생한 사옥邪獄은 1801년 순조1 신유사옥을 기화로 헌종대 기해사옥, 병오사옥 그리고 고종 대 병인사옥이 대표적이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병인사옥이었다. 1866년 고종3 에 시작된 병인사옥은 다른 사옥과는 달리 6년 동안 지속되어 약 8,000명의 천주교인이 순교하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열강의 침입을 경험하면서, 흥선대원군은 서구 열강에 대한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를 지속하였다.1881년 고종이 내린 윤음은 사실상 마지막 척사윤음이었다. 이 윤음의 내용은 천주교 교리를 반박하고, 백성들에게 천주교에 현혹되지 말라는 취지의 다른 윤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고종은 정조 이후로 천주교인을 여러 번 징계했으나, 소멸되지 않았다고 전제하였다. 이어 천주교인이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설명하고, 유학 사상을 실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순박한 풍속을 회복하고 사당私黨인 천주교인들을 소멸시키자는 것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척사로 발생한 사옥邪獄은 1801년 순조1 신유사옥을 기화로 헌종대 기해사옥, 병오사옥 그리고 고종 대 병인사옥이 대표적이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병인사옥이었다. 1866년 고종3 에 시작된 병인사옥은 다른 사옥과는 달리 6년 동안 지속되어 약 8,000명의 천주교인이 순교하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열강의 침입을 경험하면서, 흥선대원군은 서구 열강에 대한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를 지속하였다.1881년 고종이 내린 윤음은 사실상 마지막 척사윤음이었다. 이 윤음의 내용은 천주교 교리를 반박하고, 백성들에게 천주교에 현혹되지 말라는 취지의 다른 윤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고종은 정조 이후로 천주교인을 여러 번 징계했으나, 소멸되지 않았다고 전제하였다. 이어 천주교인이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설명하고, 유학 사상을 실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순박한 풍속을 회복하고 사당私黨인 천주교인들을 소멸시키자는 것이었다.

2016년 12월 27일 (화) 07:30 기준 최신판


{{기록물정보
|대표명칭= 고종윤음
|DB유형 = 목판본
|한글표기 = 고종윤음
|한자표기 = 高宗綸音
|시대 = 고종 3년 (1881)
|분야 = 종교, 천주교
|제작시기 = 1881년
|제작자 = 고종
|image = 
}}


고종이 대소 관료와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에게 내린 척사윤음으로 한문본과 언해본이 실려 있다. 천주교에 대한 척사로 발생한 사옥邪獄은 1801년 순조1 신유사옥을 기화로 헌종대 기해사옥, 병오사옥 그리고 고종 대 병인사옥이 대표적이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병인사옥이었다. 1866년 고종3 에 시작된 병인사옥은 다른 사옥과는 달리 6년 동안 지속되어 약 8,000명의 천주교인이 순교하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열강의 침입을 경험하면서, 흥선대원군은 서구 열강에 대한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를 지속하였다.1881년 고종이 내린 윤음은 사실상 마지막 척사윤음이었다. 이 윤음의 내용은 천주교 교리를 반박하고, 백성들에게 천주교에 현혹되지 말라는 취지의 다른 윤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고종은 정조 이후로 천주교인을 여러 번 징계했으나, 소멸되지 않았다고 전제하였다. 이어 천주교인이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설명하고, 유학 사상을 실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순박한 풍속을 회복하고 사당私黨인 천주교인들을 소멸시키자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