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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7일 (화) 11:36 기준 최신판
역사적 배경
B.C 1세기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한 백제의 역사는 한성시대 493년(B.C18-A.D 475) ,웅진 시대 63년 (475- 538), 사비시대122년 (538-660)으로 구분된다.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삼국을 이루며 고이왕(고이왕) 234- 286)집권 시기에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관제정비, 관복 제정 및 율령을 반포하여 고대 국가의 체제를 마련하였다.
- 한성시대 : B.C 18년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백제를 건국한 이후 A.D 475년(개로왕 21년)까지를 말한다.
- 웅진시대 :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개로왕이 전사한 475년부터 성왕이 백제 중흥을 표방하면서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긴 538년(성왕 16년)까지를 말한다.
- 사비시대 : 538년(성왕16년)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 백제가 망한 660년(의자왕 20년)까지를 말한다.
인종학적 구성
- 백제인의 얼굴을 복원한 결과 얼굴과 코가 길고 치아가 크며 눈 사이가 좁은 북방인의 얼굴을 갖고 있다.
- 『魏書』 卷100 列傳 第88 百濟國 百濟國 其先出自夫餘 백제가 부여국을 선조로 한다는 고서의 기록들과 연관 있다.
신분구조
<< 梁書>> 卷54 列傅48 其國有二十二簷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양서>>기록에 따르면 나라에 22담로를 두고 왕실의 자제들을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사비로 천도한 후 지방통치제는 5방제로 변경 되어 운영되었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
(1) 부여 고구려 신라와의 관계
- 문헌에 백제 의복에 대수자포大袖紫袍나, ‘부인의사포 婦人’등 특별히 ‘포를 지칭하여 표기함은 “백제의 선조가 부여로 부 터 내려왔다” 고 하는 고서 기록을 뒷 바침 하는 부분이 나타난다
(2) 중앙 아시와의 관계
- 고대 유목민 문화권의 국가들은 영토 개념의 국가가 아닌 거점 확보의 네트워크network 국가로서, 우리나라에서 초원길을 거쳐 그리스,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물적 교류가 이루어졌음 은 고고학 유물들이 입증한다.
- 신라의 혜초가 여행했던 카슈카르, 투르판, 타클라마칸 사막의 서역 북도와 호탄, 누란 등 서역 남도, 그리고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동 서 교류의 관문인 둔황서 서안에 이르는 실크로드까지 광범위한 문화적 소통이었음을 볼때 중아아시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3) 일본과의 관계
ㄴ. 천왕가계와의 관계
- 배경 : 백제계가 일본 왕실의 실력자로 들어서게 된 것은 3세기 후반 부터
4세기까지(고분시대) 약 120년 동안의 오오진왕(4세기 말)과 인덕왕 (313-399)때이다.
-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의 오오진왕에게 보냈다는 칠지도의 소장 명문.
- <<일본서기>>에 칠지도가 ‘서기 372년 백제가 오오진왕 어머니
신공황후에 내린 하사품’이라고 기록 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 <<남제서 南濟書>>백제국전百濟國傳 에도 역시 ‘당시 백제가 5개 속국의 후왕을 거느리고 있었고 일본이 그 중 하나이다’
-> 4세기 후반 백제계인 오오진이 왜국 왕실의 실력자(오오진왕)로 들어 왔다는 설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으며 이는 바로 왜국이 백제 22담로 중의 하나로서 백제의 속국이 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