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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중앙에 위치한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을 중심으로 화약 제조과정이 그려져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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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중앙에 위치한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을 중심으로 화약 제조과정이 그려져 있다.<br/>
최무선은 당시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대응하기 위해서는 화약과 총포만한 것이 없다며 화약 제조에 관심을 가졌고, 왜구를 무찌르는 데는 화약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에 일찍부터 화약 제조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화약과 화포(火砲) 제조에서 유황, 숯과 함께 꼭 필요한 염초는 화약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수입해 와야 했는데, 당시 원, 명 왕조에서는 화약의 제조 방법(재료의 배합 비율 등)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이 기술을 아는 인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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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무선'''은 1325년(충숙왕 12)에 태어났다. 본관은 영주(永州)이며,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최무선 개인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관직에는 어떻게 진출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에는 그의 성품을 묘사하여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으며 병법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다른 기록에서는 “성품이 통달하고 민첩하여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상고하였고, 또 중국어를 잘 알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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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통도감'''(火筒都監)은 고려 말기에 설치된 화약 및 화기 제조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1377년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설립되었고, 1389년에 폐지되었다. 로켓형 무기인 주화(走火), 신호용 대포인 신포(信砲)를 비롯하여 18종의 화약 무기를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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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이 설치된 이후 화약은 급속도로 발달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그 이후 거의 20종의 화약무기가 생산되었다고 하는데, 이름으로 미루어 분류해보면 총포류로는 대장군포(大將軍砲), 장군포(二將軍砲), 삼장군포(三將軍砲), 육화석포(六花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㷁) 등이, 발사물로는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등이 있었고, 그밖에도 폭탄의 일종인 질려포(蒺藜砲), 로켓병기의 일종인 유화(流火), 주화(走火), 촉천화(觸天火) 등이 있었다. 그 위력은 보는 사람들이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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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 제조술의 보급''': 최무선의 공로는 염초를 확보하는 기술을 익혀서 보급했다는 데에 있다. 화통도감을 설치했음을 전하는 기록에는 이어서 “최무선이 원(元)의 염초장인 이원(李元)과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면서 잘 대우하고 가만히 그 비법을 물어서 가동(家僮) 몇 명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여 시험해보고, 드디어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게 하였다”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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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제10회 한국미술협회원 전국회의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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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  제7회 까뉴국제회화제 국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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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제7회 까뉴국제회화제 국가상
  
 
==관련 자료==
 
==관련 자료==

2023년 9월 20일 (수) 21:42 기준 최신판

최대섭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 1979


작품

작품 중앙에 위치한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을 중심으로 화약 제조과정이 그려져 있다.

  • 최무선은 1325년(충숙왕 12)에 태어났다. 본관은 영주(永州)이며,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최무선 개인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관직에는 어떻게 진출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에는 그의 성품을 묘사하여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으며 병법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다른 기록에서는 “성품이 통달하고 민첩하여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상고하였고, 또 중국어를 잘 알았다”고 하였다.
  • 화통도감(火筒都監)은 고려 말기에 설치된 화약 및 화기 제조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1377년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설립되었고, 1389년에 폐지되었다. 로켓형 무기인 주화(走火), 신호용 대포인 신포(信砲)를 비롯하여 18종의 화약 무기를 개발했다.
  • 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이 설치된 이후 화약은 급속도로 발달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그 이후 거의 20종의 화약무기가 생산되었다고 하는데, 이름으로 미루어 분류해보면 총포류로는 대장군포(大將軍砲), 장군포(二將軍砲), 삼장군포(三將軍砲), 육화석포(六花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㷁) 등이, 발사물로는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등이 있었고, 그밖에도 폭탄의 일종인 질려포(蒺藜砲), 로켓병기의 일종인 유화(流火), 주화(走火), 촉천화(觸天火) 등이 있었다. 그 위력은 보는 사람들이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 화약 제조술의 보급: 최무선의 공로는 염초를 확보하는 기술을 익혀서 보급했다는 데에 있다. 화통도감을 설치했음을 전하는 기록에는 이어서 “최무선이 원(元)의 염초장인 이원(李元)과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면서 잘 대우하고 가만히 그 비법을 물어서 가동(家僮) 몇 명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여 시험해보고, 드디어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게 하였다”라고 전한다.

작가

최대섭(崔大燮)은 1927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하여 1955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였다. 1950년 한국미술가협회 회원전 참여로 등단하여 다수의 국제전에 참여하였다. 1974년 한국미술협회원전 국회의장상, 75년 제7회 까뉴국제회화제 국가상을 수상하였다. 군산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경력

  • 군산대학교 미술과 교수
  •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감사

전시

  • 1963 현대미술동인전, 국립중앙공보관
  • 1964 현대작가연립전, 국립중앙공보관
  • 1968 현대작가초대전, 경복궁 미술관
  • 1974-78 앙데팡당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5 까뉴 국제회화제, 까뉴
  • 1975-80 에꼴드서울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6 제12회 아시아 현대미술전, 동경 동경도미술관
  • 1978 제4회 인도트리엔날레, 뉴델리
  • 1979 한국미술 오늘의 방법전, 미술회관
  • 1982 한국현대미술 위상전, 동경 교토 시립미술관
  • 1984 한국현대미술전, 대만 대북 시립미술관
  • 1987 한국현대미술에 있어서의 흑과 백전, 국립현대미술관
  • 1988 현대회화 `70년대의 흐름, 워커힐 미술관
  • 1990 한국미술-오늘의 상황전, 예술의전당

수상

  • 1974 제10회 한국미술협회원 전국회의장상
  • 1975 제7회 까뉴국제회화제 국가상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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