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혹문』 경1장-7: 삼강령·팔조목) |
(→傳七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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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曰。語孟。隨事問答。難見要領。惟大學。是曾子述孔子說古人為學之大方。而門人又傳述<ref><한어대사전> 轉述; 傳授; 傳說.</ref>以明其旨。前後相因。體統都具。翫味此書。知得古人為學所向。却讀語孟。便易<sub>去聲</sub>入。後面工夫雖多。而大體已立矣。<br/> | 朱子曰。語孟。隨事問答。難見要領。惟大學。是曾子述孔子說古人為學之大方。而門人又傳述<ref><한어대사전> 轉述; 傳授; 傳說.</ref>以明其旨。前後相因。體統都具。翫味此書。知得古人為學所向。却讀語孟。便易<sub>去聲</sub>入。後面工夫雖多。而大體已立矣。<br/>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논어>와 <맹자>는 일에 따라 문답한 것이므로 핵심을 이해하기 어렵다. 오직 <대학>만은 증자가 공자께서 옛 분들이 학문한 큰 방법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조술하고 [증자의] 문인들이 다시 전술하여 그 뜻을 밝힌 것이어서, 앞뒤로 [맥락이] 서로 연결되고 체계가 모두 갖춰져 있으니, 이 책을 완미한다면 옛 분들의 학문적 지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논어>와 <맹자>를 읽는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뒤에 공부가 비록 많지만, 큰 얼개는 이미 세워진 것이다."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논어>와 <맹자>는 일에 따라 문답한 것이므로 핵심을 이해하기 어렵다. 오직 <대학>만은 증자가 공자께서 옛 분들이 학문한 큰 방법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조술하고 [증자의] 문인들이 다시 전술하여 그 뜻을 밝힌 것이어서, 앞뒤로 [맥락이] 서로 연결되고 체계가 모두 갖춰져 있으니, 이 책을 완미한다면 옛 분들의 학문적 지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논어>와 <맹자>를 읽는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뒤에 공부가 비록 많지만, 큰 얼개는 이미 세워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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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看這一書又自與看語孟不同。語孟中。只一項事。是一箇道理。如孟子說仁義處。只就仁義上說道理。孔子答顔淵以克己復禮。只就克己復禮上說道理。若大學。却只統說。論其功用之極。至於平天下。然天下所以平。却先須治國。國之所以治。却先須齊家。家之所以齊。却先須修身。身之所以修。却先須正心。心之所以正。却先須誠意。意之所以誠。却先須致知。知之所以至。却先須格物。<br/> | |
− | + | 이 책을 읽는 것은 <논어>나 <맹자>를 읽는 것과는 또 절로 다르다. <논어>와 <맹자>에서는 한 가지 사건이 하나의 도리일 뿐이다. 예를 들어 맹자께서 인의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은 그저 인의의 차원에서 도리를 말한 것이고, 공자께서 안연에게 '극기복례'라고 대답해주신 부분은 그저 '극기복례'의 차원에서 도리를 말씀하신 것일 뿐이다. [그러나] <대학>은 統說(한 텍스트가 하나의 체계를 설명)일 뿐이다. 최종적 공효를 말한다면 '평천하'에 이르지만, 천하가 평안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국'해야 하고, 나라가 다스려지기 위해서는 먼저 '제가'해야 하며, 집안이 가지런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수신'해야 하고, 자신이 수양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심'해야 하며, 마음을 바루기 위해서는 먼저 '성의'해야 하고, 뜻을 진실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지'해야 하며, 앎을 지극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격물'해야 한다. | |
− | + | ○大學。是為學綱目。先讀大學。立定綱領。他書皆雜說在裏許。通得大學了。去看他經。方見得此是格物致知事。此是誠意正心事。此是修身事。此是齊家治國平天下事。<br/> | |
− | + | <대학>은 학문의 綱目(큰 줄기와 세목)이다. 먼저 <대학>을 읽어 강령을 강령(큰 줄기)를 굳게 세우고 나면, 다른 책들은 모두 그 안의 여러 설일 뿐이다. <대학>에 통달하고 나서 다른 경전을 보아야 비로소 '이건 격물치지의 일이고, 이건 성의정심의 일이며, 이건 수신의 일이고, 이건 제가치국평천하의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
− | + | ○今且熟讀大學作間架。却以他書。塡補去。<br/> | |
− | + | 지금 우선 <대학>을 숙독하여 얼개를 세우고, 다른 책으로 [세목을] 채워나가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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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學。是通言學之初終。中庸是指本原極致處。<br/> | ||
+ | <대학>은 학문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전체적으로 말하고, <중용>은 궁극적인 본원을 가리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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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問欲專看一書。以何為先。曰先讀大學。可見古人為學首末次第。不比他書。他書非一時所言。非一人所記。<br/> | ||
+ | 물었다: "한 책만 집중해서 보고자 한다면, 무슨 책을 먼저 봐야합니까?" 말씀하셨다: "먼저 <대학>을 읽으면 옛 분들이 학문하신 단계를 알 수 있으니, 다른 책이 비길 바가 아니다. 다른 책은 어느 한 시점에 말한 것도 아니고, 한 사람의 기록도 아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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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r/> | 2.<br/> | ||
又曰。看大學。固是着逐句看去。也須先統讀傳文敎熟。方好<ref><한어대사전> 10. 可以; 便於.</ref>從頭仔細看。若專不識傳文大意。便看前頭亦難。<br/> | 又曰。看大學。固是着逐句看去。也須先統讀傳文敎熟。方好<ref><한어대사전> 10. 可以; 便於.</ref>從頭仔細看。若專不識傳文大意。便看前頭亦難。<br/> | ||
− | 또 말씀하셨다: "<대학>을 읽을 때에는 진실로 구절마다 읽어나가야 하지만, 그래도 먼저 傳文을 통독해 익숙하게 해야 | + | 또 말씀하셨다: "<대학>을 읽을 때에는 진실로 구절마다 읽어나가야 하지만, 그래도 먼저 傳文을 통독해 익숙하게 해야 비로소 처음부터 자세하게 읽을 수 있다. 만일 傳文의 대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앞부분 읽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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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r/> | 3.<br/> | ||
又曰。嘗欲作一說。敎人只將大學一日去讀一遍。看他如何是大人之學。如何是小學。如何是明明德。如何是新民。如何是止於至善。日日如是讀。月來日去。自見所謂溫故而知新。須是知新。日日看得新。方得。却不是道理解<ref><한어대사전> 28. 能够; 會.</ref>新。但自家這箇意思。長長地新。<br/> | 又曰。嘗欲作一說。敎人只將大學一日去讀一遍。看他如何是大人之學。如何是小學。如何是明明德。如何是新民。如何是止於至善。日日如是讀。月來日去。自見所謂溫故而知新。須是知新。日日看得新。方得。却不是道理解<ref><한어대사전> 28. 能够; 會.</ref>新。但自家這箇意思。長長地新。<br/> | ||
− | 또 말씀하셨다: "전에 한 마디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저 <대학>을 하루에 한 번 읽게 해, | + | 또 말씀하셨다: "전에 한 마디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저 <대학>을 하루에 한 번 읽게 해, 그들에게 무엇이 '大人의 학문'이며, 무엇이 '소학'이며, 무엇이 '명명덕'이며, 무엇이 '신민'이며, 무엇이 '지어지선'인지 살펴보게 하고자 하였다. 날마다 이처럼 읽어 시간이 흐르면, 절로 이른바 '온고이지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반드시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하니, 날마다 새로운 것을 읽어야 옳다. 도리가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이 생각이 길이길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
− | + | ○讀大學。初間也只如此讀。後來也只如此讀。只是初間讀得。似不與自家相關。後來看熟。見許多說話。須著如此做。不如此做自不得。<br/> | |
− | + | <대학>을 읽을 때 처음에도 이렇게 읽고 나중에도 이렇게 읽으라. 처음 읽었을 때에는 나와 상관이 없는 것 같겠지만, 나중에 읽는 것이 익숙해지고 나면 여러 말이 이렇게 해야 하거나 절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여러 말대로 해야 하거나 절로 여러 말대로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 |
− | + | ○讀書。不可貪多。當且以大學為先逐段熟讀精思。須令了了分明。方可改讀後段。看第二段。却思量前段。令文意連屬<sub>音燭。</sub>却不妨。<br/> | |
− | + | 책을 읽을 때 많이 읽기를 탐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우선 <대학>을 우선으로 해서 단락마다 자세히 읽으며 정밀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명명백백하게 이해하고서야 다음 단락을 읽어야 하고, 두 번째 단락을 읽을 때 앞 단락을 생각해 문의가 연결되게 해야 문제가 없을 것이다. | |
− | + | ○問大學稍通。方要讀論語。曰且未可。大學稍通。正好着<sub>陟略反。下同</sub>心精讀。前日讀時。見得前未見得後面。見得後未見得前面。今識得大綱體統。正好熟看。讀此書。功深則用博。昔尹和靖見伊川半年。方得大學西銘看。今人半年。要讀多少書。某且要人讀此是如何。緣此書却不多。而規模周備。凡讀書。初一項。須著十分工夫了。第二項。只費得八九分工夫。第三項。便只費得六七分工夫。少間<ref><한어대사전> 3. 一會兒; 不多久.(잠깐 사이에, 오래지 않아)</ref>讀漸多。自通貫。他書自著不得多工夫。<br/> | |
− | + | 물었다: "<대학>은 조금 알겠으니, 이제 <논어>를 읽으려고 합니다." 말씀하셨다: "아직 안 된다. <대학>을 조금 알게 되었다면, 이제는 집중해서 정독할 때다. 전에 읽었을 때에는 앞부분만 이해하고 뒷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뒷부분만 이해하고 앞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지금 [<대학>을 조금 알게 되어] 큰 얼개와 체계를 이해했다면, 이제는 숙독할 때다. 이 책을 읽는 공부가 깊어진다면 공효가 넓어질 것이다. 전에 윤화정은 이천 선생을 뵌 지 반 년이 돼서야 <대학>과 <서명>을 볼 수 있었는데, 요즘 사람들은 반 년만에 많은 책을 읽으려고 한다. 나는 우선 사람들로 하여금 이 책만 읽게 하는데, 어째서일까? 이 책이 분량은 많지 않지만 체계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100%로 노력해야 하지만, 두 번째에는 8-90% 노력만 필요로 하고, 세 번째에는 6-70%의 노력만 필요로 하니, [그렇게 되면] 오래지 않아 읽는 것이 점차 많게 되고 절로 이해하게 되어, 다른 책에 절로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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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看大學。俟見大指。乃及他書。但看時。須是更將大段分作小段。字字句句。不可容易放過。常時暗誦黙思反覆硏究。未上口時。須敎上口。未通透時。須敎通透。已通透後。便要純熟。直待<ref><한어대사전> 直要.</ref>不思索時。此意。常在心胸之間。驅遣不去<ref>1. 접미사. 동작의 결과가 화자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뜻을 나타냄.</ref>。方是。此一段了。又換一段看。令如此數段之後。心安理熟。覺工夫省力時。便漸得力也。<br/> | ||
+ | <대학>을 읽을 때 요지를 이해하고서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다만 [<대학>을] 읽을 때 큰 단락을 다시 작은 단락으로 나눠야 하고, 글자마다 구절마다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평소에 암송하기도 하고 묵묵히 생각하기도 하며 반복해서 탐구해, 입에 붙지 않았을 때에는 입에 붙게 해야 하고,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을 때에는 완전히 이해되기 해야 하며, 완전히 이해된 이후에는 숙달되게 해서, 사색하지 않을 때에도 이 뜻이 늘 마음에 있어 쫓아버릴 수 없어야 한다. 이 단락이 끝나고서 다음 단락을 읽어 이와 같이 여러 단락을 하고 나면 마음은 안정되고 이해가 무르익어, 공부에 힘이 덜 든다고 느낄 때 점차 힘을 얻게 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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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br/> | 4.<br/> | ||
又曰。大學是一箇腔子。而今却要塡敎<sub>平聲</sub>他實。如他說格物。自家須是去格物後塡敎他實著。誠意亦然。若只讀得空殼子。亦無益也。<br/> | 又曰。大學是一箇腔子。而今却要塡敎<sub>平聲</sub>他實。如他說格物。自家須是去格物後塡敎他實著。誠意亦然。若只讀得空殼子。亦無益也。<br/> | ||
− | 또 말씀하셨다: "<대학>은 腔子이니, 지금 | + | 또 말씀하셨다: "<대학>은 腔子이니, 지금 메워 그것을 채워야 한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격물'을 말하면, 스스로 '격물'한 뒤에 메워 그것을 채워야 한다. '성의'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그저 빈 껍데기만 읽는다면 무익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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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讀大學。豈在看他言語。正欲驗之於心如何。如好好色惡惡臭。試驗之吾心。果能好善惡惡如此乎。閒居為不善。是果有此乎。一有不至。則勇猛奮躍不已。必有長<sub>上聲</sub>進。今不知如此。則書自書我自我。何益之有。<br/> | ||
+ | <대학>을 읽는 [목적이] 어찌 그 문장을 읽는 데 달려있겠는가? 다만 내 마음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대학>에서]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 악취를 싫어하듯이 한다'<ref><대학장구> 傳6章. 所謂誠其意者:毋自欺也,如惡惡臭,如好好色,此之謂自謙,故君子必慎其獨也!</ref>고 하는데, [이것을] 한 번 자기 마음에 비춰보면, 과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기를' 이처럼 할 수 있는가? [<대학>에서 '소인은] 혼자 있을 때 불선한 짓을 한다'<ref><대학장구> 傳6章. 小人閒居為不善,無所不至。</ref>고 하는데, 과연 [나에게] 이런 점이 있는가? 하나라도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용맹하게 분발하기를 그치지 않아야 반드시 발전이 있을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한다면, 책은 책이고 나는 나일 것이니,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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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安陳氏曰: "凡讀書之法, 皆當如此, 非但<大學>也."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무릇 독서법은 모두 이와 같아야 하니, <대학>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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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曰。某一生。只看得這文字透。見得前賢所未到<ref><한어대사전> 8. 知; 覺.</ref>處。溫公作通鑑。言平生精力。盡在此書。某於大學亦然。先須通此。方可讀他書。<br/> | 又曰。某一生。只看得這文字透。見得前賢所未到<ref><한어대사전> 8. 知; 覺.</ref>處。溫公作通鑑。言平生精力。盡在此書。某於大學亦然。先須通此。方可讀他書。<br/> | ||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일생토록 이 글을 철저하게 읽어 이전 현인들이 알지 못했던 바를 알게 되었다. 사마온공은 <자치통감>을 짓고서 '평생의 정력이 모두 이 책에 있다'고 말했는데, 내가 <대학>에 있어서 역시 그러하다. 먼저 이 책에 통달하고서 다른 책을 봐야 한다." |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일생토록 이 글을 철저하게 읽어 이전 현인들이 알지 못했던 바를 알게 되었다. 사마온공은 <자치통감>을 짓고서 '평생의 정력이 모두 이 책에 있다'고 말했는데, 내가 <대학>에 있어서 역시 그러하다. 먼저 이 책에 통달하고서 다른 책을 봐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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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曰。伊川舊日。敎人先看大學。那時。未解說。而今有註解。覺大段分曉了。只在仔細看。<ref><주자어류> 권14 <대학1> | + | 又曰。伊川舊日。敎人先看大學。那時。未解說。而今有註解。覺大段分曉了。只在仔細看。<ref><주자어류> 권14 <대학1> 伊川舊日教人先看大學,那時未有解說,想也看得鶻突。而今看注解,覺大段分曉了,只在子細看。</ref><br/> |
− | 또 말씀하셨다: "이천 선생께서 전에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대학>을 읽게 하셨지만 그때에는 [<대학>을] 풀이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 + | 또 말씀하셨다: "이천 선생께서 전에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대학>을 읽게 하셨지만 그때에는 [<대학>을] 풀이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주해가 있어 [의미가] 대단히 분명하다고 생각하니, 그저 자세하게 읽는 데 달렸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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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陳氏曰: "<大學章句>巳示學者一定之凖, 只直按他見成底熟, 就裏面看意思滋味, 便見得無窮義理出焉." | ||
+ | :진씨가 말했다: "<대학장구>에서 이미 배우는 자들에게 일정한 기준을 보여주었으니, 그저 그 완성된 것을 익숙히 살펴 그 안의 의미나 맛을 보게 된다면, 무궁한 의리가 거기서 나옴을 알게 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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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br/> | 7.<br/> | ||
又曰。看大學。且逐章理會。先將本文念得。次將章句來解本文。又將或問來參章句。須逐一令<sub>平聲。下同</sub>記得。反覆尋究。待他浹洽。旣逐段曉得。却統看溫尋過。<br/> | 又曰。看大學。且逐章理會。先將本文念得。次將章句來解本文。又將或問來參章句。須逐一令<sub>平聲。下同</sub>記得。反覆尋究。待他浹洽。旣逐段曉得。却統看溫尋過。<br/> | ||
− | 또 말씀하셨다: "<대학>을 볼 때 우선 장마다 이해해야 한다. 먼저 본문을 생각해보고서 다음으로 | + | 또 말씀하셨다: "<대학>을 볼 때 우선 장마다 이해해야 한다. 먼저 본문을 생각해보고서 다음으로 <장구>로 본문을 해석해보고, 다시 <혹문>으로 <장구>에 참조해보라. [그리고 나서] 하나하나 기억나게 하고 반복 탐구해 그것이 [마음에] 젖어들게 하라. 단락마다 이해되고 나면, 전체적으로 읽으며 복습해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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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曰。大學一書有正經有章句有或問。看來看去。不用或問。只看章句便了。久之又只看正經便了。又久之自有一部大學在我胸中。而正經亦不用矣。然不用某許多工夫。亦看某底不出。不用聖賢許多工夫。亦看聖賢底不出。<br/> | 又曰。大學一書有正經有章句有或問。看來看去。不用或問。只看章句便了。久之又只看正經便了。又久之自有一部大學在我胸中。而正經亦不用矣。然不用某許多工夫。亦看某底不出。不用聖賢許多工夫。亦看聖賢底不出。<br/> | ||
− | 또 말씀하셨다: "<대학> 한 텍스트에는 正經(경전 원문), <章句>, <或問>이 있다. 여러 번 읽다보면 <혹문>은 필요하지 않고 <장구>만 읽어도 될 것이며, [읽기가] 오래되면 다시 경전 원문만 읽어도 될 것이다. [읽기가] 더 오래되어 저절로 <대학> 한 부가 마음속에 있게 되면, 경전 원문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 + | 또 말씀하셨다: "<대학> 한 텍스트에는 正經(경전 원문), <章句>, <或問>이 있다. 여러 번 읽다보면 <혹문>은 필요하지 않고 <장구>만 읽어도 될 것이며, [읽기가] 오래되면 다시 경전 원문만 읽어도 될 것이다. [읽기가] 더 오래되어 저절로 <대학> 한 부가 마음속에 있게 되면, 경전 원문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주자)의 많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 것을 알 수 없고, 성현의 많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성현의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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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曰。大學解本文未詳者。於或問中詳之。且從頭逐句理會。到不通處却看。或問乃註脚之註脚。<br/> | 又曰。大學解本文未詳者。於或問中詳之。且從頭逐句理會。到不通處却看。或問乃註脚之註脚。<br/> | ||
− | 또 말씀하셨다: "<대학>에서 본문을 해석하다가 자세하지 않은 것은 <혹문> 가운데 상세히 | + | 또 말씀하셨다: "<대학>에서 본문을 해석하다가 자세하지 않은 것은 <혹문> 가운데 상세히 설명하였으니, 처음부터 구절마다 이해하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면 읽어보라. <혹문>은 바로 '주석의 주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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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某解書不合太多。又先準備學者為<sub>去聲</sub>他設疑說了。所以致得學者看得容易<sub>去聲</sub>了。<br/> | ||
+ | 내가 책을 너무 상세하게 해설해서는 안 됐지만, 그래도 배우는 자들을 미리 대비해 그들을 위해 의문을 가설해 설명해서 배우는 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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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人只說某說大學等不略說使人自致思。此事大不然。人之為學。只爭箇肯與不肯耳。他若不肯向<ref><한어대사전> 19. 介詞. 對; 與. 表示動作的對象.</ref>這裏。略亦不解致思。他若肯向此一邊。自然有味。愈詳愈有味。<ref><주자어류> 권118 <주자13/훈문인4>又言:「大學等書,向來人只說某說得詳,如何不略說,使人自致思?此事大不然。人之為學,只是爭箇肯不肯耳。他若無得,不肯向這邊,略亦不解致思;他若肯向此一邊,自然有味,愈詳愈有意味。」</ref><br/> | ||
+ | 사람들은 그저 내가 '<대학> 등에 대해 설명할 때, 간략하게 설명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을 다하지 못하게 한다(상세하게 설명해 해석의 여지를 좁힌다)'고만 말하는데, 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학문함은 그저 긍정하냐 긍정하지 않냐를 따질 뿐이다. 그가 만약 이쪽에 대해 긍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간략하게 설명하더라도 생각을 다하지 못하겠지만, 그가 만일 이쪽에 대해 긍정한다면 절로 재미가 있어, 설명이 상세할수록 재미있을 것이다. | ||
− | : | + | :陳氏曰: "<大學>約其旨於<章句>, 已的確眞切; 而詳其義於<或問>, 又明實敷暢. <章句>中太簡而或未喻則易枯, 必於<或問>詳之; <或問>中太博而或未貫則易泛, 必於<章句>約之." |
− | : | + | :진씨가 말했다: "<대학>에서 그 뜻을 <장구>에 요약시켜 놓았으니 이미 적확하고 진실한 데다가, <대학>에서 그 뜻을 <혹문>에 상세히 설명하였으니 명확하고 막힘이 없기까지 하다. <장구>의 내용이 너무 간략해 혹 이해가 안 되면 지치기 쉬우니 반드시 <혹문>을 상세히 살펴보고, <혹문>의 내용이 너무 자세해서 혹 맥락이 잡히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쉬우니 반드시 <장구>로 핵심을 잡으라." |
− | : | + | :○新安陳氏曰: "右二條之説不同, 而可互相發明." |
− |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위의 두 조목(○某解書, ○人只說)의 말이 같지 않지만, 서로 밝혀줄 수 있다." |
==大學章句序== | ==大學章句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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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진씨가 말했다: "이 <대학장구서>는 여섯 단락으로 나눠지는데,<ref>신안 진씨는 "大學之書,古之大學所以教人之法也。"을 한 단락으로, 다음 "蓋自天降生民,則既莫不與之以仁義禮智之性矣。然其氣質之稟或不能齊,是以不能皆有以知其性之所有而全之也。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出於其閒,則天必命之以為億兆之君師,使之治而教之,以復其性。此伏羲、神農、黃帝、堯、舜,所以繼天立極,而司徒之職、典樂之官所由設也。"을 또 한 단락으로 본 듯 하다.</ref> 핵심적 의미(精義)는 두 번째 단락에 있으니, '모든 사람이 性에 있는 [인의예지를] 알고서 이를 온전히 한다', '가르쳐 자신의 처음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주자께서 학문을 말씀하실 때에는 반드시 '본성을 회복하는 것(復性)'을 강령·핵심으로 삼으셨다. <논어>에서 '學'자에 주석을 다시길: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하다', '선을 밝혀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ref><논어집주> <학이> 學之為言效也。人性皆善,而覺有先後,後覺者必效先覺之所為,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ref>고 하셨고, <소학제사>에서 말씀하시길: '인의예지는 사람 본성의 벼리이다', '덕이 높고 업이 넓어야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하셨으며, 이 책(<대학장구>)의 처음에 '명명덕'을 풀이하시며 또한 '마침내 밝혀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ref><대학장구> 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以復其初也。</ref>고 하셨으니, 이 <대학장구서>까지 총 네 곳에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셨다. '聖人盡性'은 본래 온전한 것을 지극히 하는 것이요, '學者復其性'은 돌아간 이후에야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에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은 格物·致知에 달렸고, 성에 있는 것을 다시 온전히 하고자 하는 것은 誠意·正心·脩身해 실천에 힘을 다하는 것에 달려있을 뿐이다. 이 <대학장구서>와 이 <대학>을 읽는 자는 '성에 있는 것을 아는 것'과 '본성(性初)으로 돌아가는 것'을 핵심으로 삼고 知行을 공부 방법으로 삼아서 그 종지를 완전히 깨달을 것이다."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이 <대학장구서>는 여섯 단락으로 나눠지는데,<ref>신안 진씨는 "大學之書,古之大學所以教人之法也。"을 한 단락으로, 다음 "蓋自天降生民,則既莫不與之以仁義禮智之性矣。然其氣質之稟或不能齊,是以不能皆有以知其性之所有而全之也。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出於其閒,則天必命之以為億兆之君師,使之治而教之,以復其性。此伏羲、神農、黃帝、堯、舜,所以繼天立極,而司徒之職、典樂之官所由設也。"을 또 한 단락으로 본 듯 하다.</ref> 핵심적 의미(精義)는 두 번째 단락에 있으니, '모든 사람이 性에 있는 [인의예지를] 알고서 이를 온전히 한다', '가르쳐 자신의 처음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주자께서 학문을 말씀하실 때에는 반드시 '본성을 회복하는 것(復性)'을 강령·핵심으로 삼으셨다. <논어>에서 '學'자에 주석을 다시길: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하다', '선을 밝혀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ref><논어집주> <학이> 學之為言效也。人性皆善,而覺有先後,後覺者必效先覺之所為,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ref>고 하셨고, <소학제사>에서 말씀하시길: '인의예지는 사람 본성의 벼리이다', '덕이 높고 업이 넓어야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하셨으며, 이 책(<대학장구>)의 처음에 '명명덕'을 풀이하시며 또한 '마침내 밝혀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ref><대학장구> 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以復其初也。</ref>고 하셨으니, 이 <대학장구서>까지 총 네 곳에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셨다. '聖人盡性'은 본래 온전한 것을 지극히 하는 것이요, '學者復其性'은 돌아간 이후에야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에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은 格物·致知에 달렸고, 성에 있는 것을 다시 온전히 하고자 하는 것은 誠意·正心·脩身해 실천에 힘을 다하는 것에 달려있을 뿐이다. 이 <대학장구서>와 이 <대학>을 읽는 자는 '성에 있는 것을 아는 것'과 '본성(性初)으로 돌아가는 것'을 핵심으로 삼고 知行을 공부 방법으로 삼아서 그 종지를 완전히 깨달을 것이다." | ||
− | == | + | ==대학 경문/전문/혹문== |
− | '''大學章句大全''' | + | |
− | :大,舊音泰,今讀如字。 | + | 원전 [https://www.kanripo.org/text/KR1h0043/000#15a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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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단 <대학장구대전>는 세주 가운데 주자와 주자 이전 학자의 것만 번역하고, <대학혹문>은 모든 세주를 번역하겠다.<br/> | ||
+ | 번역이 되지 않는 구절에는 '''물음표 두 개("??")'''를 달아놓아 추후에 Ctrl+F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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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ig>'''大學章句大全'''</big> | ||
+ | ::大,舊音泰,今讀如字。 | ||
:子程子曰:「大學,孔氏之遺書,而初學入德之門也。」於今可見古人為學次第者,獨賴此篇之存,而論、孟次之。學者必由是而學焉,則庶乎其不差矣。 | :子程子曰:「大學,孔氏之遺書,而初學入德之門也。」於今可見古人為學次第者,獨賴此篇之存,而論、孟次之。學者必由是而學焉,則庶乎其不差矣。 | ||
+ |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대학>은 공자께서 남기신 책으로 초학자들이 [성인의] 마음 공부로 들어가는 문이다."<ref>『수언』3-31 子曰: 大學孔子之遺言也. 學者由是而學則不迷於入德之門也.</ref> 옛 분들이 학문 체계 가운데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오직 남아있는 이 책에 기대고 있고, <논어>와 <맹자>는 [<대학>보다는] 부차적이다.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대학>을 통해 배워야 하니, 그렇게 한다면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 ||
+ | ::龜山楊氏曰: "大學一篇, 聖學之門戸, 其取道<ref><한어대사전> 2. 選取經由的道路。</ref>至徑. 故二程多命'初學者讀之'." | ||
+ | ::귀산 양씨가 말했다: "<대학> 한 편은 성학의 문이니, [성학으로의] 길을 보여줌이 매우 직접적이다. 그러므로 이정 선생께서 여러 번 '초학자는 <대학>을 읽으라'고 하셨다." | ||
+ | ::○朱子曰: "大學首尾貫通, 都無所疑, 然後可及語孟. 又無所疑然後可及中庸."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대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여 전혀 의심나는 바가 없게 된 연후에 <논어>와 <맹자>를 읽어야 하고, 또 <논어>와 <맹자>에 의심나는 바가 없게 된 연후에 <중용>을 읽어야 한다." | ||
+ | ::○某要人先讀大學以定其規模; 次讀論語以及其根本; 次讀孟子以觀其發越<ref><한어대사전> 7. 闡述;闡發。</ref>; 次讀中庸以求古人之微妙. | ||
+ |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대학>을 읽어 [성학의] 체계를 갖추도록 하고, 이어서 <논어>를 읽어 [성학의] 근본을 접하게 하며, 이어서 <맹자>를 읽어 맹자께서 천명하신 바를 살펴보게 하고, 이어서 <중용>을 읽어 옛 분들이 은미하고 영묘한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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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經一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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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物有本末,事有終始,知所先後,則近道矣。 | + | 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br/> |
+ |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데 달려있으며, 백성들을 새롭게 만드는 데 달려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데 달려있다. | ||
+ | :程子曰:「親,當作新。」大學者,大人之學也。明,明之也。明德者,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以具眾理而應萬事者也。 | ||
+ |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親'은 '新'으로 써야 한다."<ref><정씨경설> <伊川先生改正大學></ref> '대학'이라는 것은 대인(아이가 아니라 어른)의 학문이다. '명'은 밝힘이다. '명덕'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불매하면서 뭇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대응하는 것이다. | ||
+ | ::朱子曰: "天之賦於人物者謂之命; 人與物受之者謂之性; 主於一身者謂之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謂之明徳.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사람과 사물에 부여한 것을 '명'이라 하고, 사람과 사물이 받은 것을 '성'이라 하며, 일신을 주재하는 것을 '심'이라 하고, 하늘에서 얻어 빛나고 정대한 것을 '명덕'이라고 한다." | ||
+ | ::○問: "明徳是心是性?" 曰: "心與性自有分别. 靈底是心, 實底是性; 性便是那理, 心便是盛貯該載敷施發用底. 心屬火, 縁他是箇光明發動底物. 所以具得許多道理. 如向父母則有那孝出來, 向君則有那忠出來, 這便是性. 如知道事親要孝, 事君要忠, 這便是心. 張子曰: '心統性情', 此說最精密." | ||
+ | ::물었다: "'명덕'은 心입니까, 性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心과 性은 절로 구별된다. 영명한 것이 心이고, 실제적인 것이 性이며, 性은 저 理이고 心은 [理를] 싣고서 사용·발현시키는 것이다. 心은 [오행 가운데] 火에 속하니, 그것이 빛나고 발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도리를 갖추고 있을 수 있다. 가령 부모를 향해서는 효성스런 마음이 생기고, 임금을 향해서는 충성스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性이고, 부모를 섬길 때 효성스러워야 하고 임금을 섬길 때 충성스러워야 함을 아는 것은 心이다. 장자께서 '心統性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가장 정밀하다." | ||
+ | ::○虚靈不昧, 便是心; 此理具足於中, 無少欠闕, 便是性; 隨感而動, 便是情. | ||
+ | ::허령불매한 것이 心이고, 이 理가 내면에 온전히 갖춰져 어떠한 흠결도 없는 것이 性이며, 감각한 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情이다. | ||
+ | ::○虚靈自是心之本體, 非我所能虚靈. 耳目之視聽, 所以視聽者, 即其心也, 豈有形象? 然有耳目以視聽之, 則猶有形象也. 若心之虚靈, 何嘗有物? | ||
+ | ::'허령함'은 心의 본래적 특징이니 내가 허령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이 보고 귀가 들음에, 보고 듣는 근거는 바로 心이니, [心의 작용에] 어찌 감각할 수 있는 점(형상)이 있겠는가? 그러나 눈과 귀가 있어 보고 듣는다는 점에서 보면 그래도 감각할 수 있는 점(형상)이 있는 것이다. 心의 허령함에 언제 감각할 수 있는 점(형상)이 있었겠는가? | ||
+ | ::○只虚靈不昧四字, 説明徳意已足矣; 更說具衆理應萬事, 包體用在其中, 又却實而不為虚, 其言的確渾圎, 無可破綻<ref>2. 亦作“ 破賺 ”。 漏洞;毛病。</ref>處. | ||
+ | ::단지 '허령불매' 네 글자만으로도 '명덕'의 뜻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데, 다시 '뭇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한다'고 말해 그 안에 체용을 포괄해 다시 實하여 虚가 되지 않아, 말이 적확하고 온전해져 흠잡을 수 있는 곳이 없게 되었다. | ||
+ | :但為氣稟所拘,人欲所蔽,則有時而昏;然其本體之明,則有未嘗息者。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ref>21. 全部;完全;盡。</ref>明之,以復其初也。 | ||
+ | :다만 기품에 구속되고 인욕에 가려져 때에 따라 어두워진다. 그러나 명덕 본래 상태의 밝음은 그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명덕이 드러난 바에 따라 온전히 밝혀 그 처음 상태를 회복해야 한다. | ||
+ | ::朱子曰: "明徳未嘗息, 時時發見於日用之間. 如見孺子入井而怵惕, 見非義而羞惡, 見賢人而恭敬, 見善事而歎慕, 皆明徳之發見也. 雖至惡之人, 亦時有善念之發. 但當因其所發之端, 接續光明之.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명덕은 그친 적이 없으니, 때로 일상에서 발현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우물에 기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마음이 들거나,<ref><맹자> <공손추상> 6.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皆有怵惕惻隱之心。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非所以要譽於鄉黨朋友也,非惡其聲而然也。由是觀之,無惻隱之心,非人也;</ref> 불의를 보고 부끄럽고 미워하는 마음이 들거나, 현인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이 들거나, 선한 일을 보고 찬탄하는 마음이 드는 것 모두 명덕이 발현한 것이다. 비록 매우 악한 사람이라도 때로 선한 마음이 발현한다. 다만 명덕이 발현한 단서를 따라 계속 밝혀나가야 한다." | ||
+ | ::○明徳謂本有此明徳也. 孩提之童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其良知良能, 本自有之, 只為私欲所蔽, 故暗而不明. 所謂明明徳者, 求所以明之也. 譬如鏡焉: 本是箇明底物, 縁為塵昏, 故不能照. 須是磨去塵垢, 然後鏡復明也. | ||
+ | ::'명덕'은 본래 이러한 밝은 덕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도 제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없고, 그가 좀 자라서는 제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자가 없다. 그러한 양지·양능<ref><맹자> <진심상> 15. 孟子曰:「人之所不學而能者,其良能也;所不慮而知者,其良知也。孩提之童,無不知愛其親者;及其長也,無不知敬其兄也。</ref>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지만 사욕에 가려졌기 때문에 어두워 밝지 못한 것이다. 이른바 '명명덕'이라는 것은 명덕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거울에 비유해보자면, 거울은 본래 밝은 사물이지만 먼지에 의해 어두워지므로 비출 수 없게 된다. 반드시 먼지를 닦아없앤 연후에야 거울이 다시 밝아질 수 있다. | ||
+ | ::○明徳是一箇光明底物事. 如一把火將去照物, 則無不燭<ref><한어대사전> 4. 照亮;照見。(밝게 비추다); 5. 指顯露, 呈現。(드러나다)</ref>, 便是明徳. 若漸隠微便暗了, 吹得這火著, 便是明其明徳. | ||
+ | ::명덕은 빛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로 사물을 비추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명덕이다. 만일 점차 은미해다보면 어두워져버리지만, [꺼지지 않도록] 이 불에 공기를 불어넣는 것이 바로 명덕을 밝히는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4 <대학1> 蓋所謂明德者,只是一個光明底物事。如人與我一把火,將此火照物,則無不燭。自家若滅息著,便是暗了明德;能吹得著時,又是明其明德。</ref> | ||
+ | :新者,革其舊之謂也,言既自明其明德,又當推以及人,使之亦有以去<sub>上聲</sub>其舊染之污<sub>音烏又去聲</sub>也。 | ||
+ | :'신'이라는 것은 옛 것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명덕을 스스로 밝히고 나서 다시 그것을 남에게 미뤄 그들 역시 과거에 물든 오염을 없애도록 해야함을 말한다. | ||
+ | ::朱子曰: "此理人所均有, 非我所得私. 既自明其徳, 須當推以及人, 見人為氣與欲所昏, 豈不惻然欲有以新之?"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이 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내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덕을 스스로 밝혔다면 모름지기 이를 남에게 미루어야 하니, 남들이 氣와 사욕에 의해 어두워진 것을 봤다면 어찌 측은해서 그들을 새롭게 만들고자 하지 않겠는가?" | ||
+ | ::○問: "'明徳新民'在我, 有以新之; 至民之明其明徳, 却又在他." 曰: "雖說是明己徳新民徳, 然其意自可參見. '明明徳於天下', 自新以新其民可知." | ||
+ | ::물었다: "'명덕·신민'은 나에게 다려있으니 새롭게 할 수 있지만, '백성들이 자신의 덕을 밝히는 것'의 경우는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비록 '자신의 덕을 밝히고 백성의 덕을 새롭게 하라'고 [나눠] 말하지만, 그 의미는 절로 함께 이해(參見)할 수 있다. [뒤에서] '明明徳於天下'라고 말하는 것에서 자신을 새롭게 하고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
+ | :止者,必至於是而不遷之意。至善,則事理當然之極也。 | ||
+ | :'지'라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 옮겨가지 말하는 뜻이다. '지선'은 지극히 당연한 사리이다. | ||
+ | ::朱子曰: "說一箇止字,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也.'"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止'자를 써놓고 다시 '至'자를 쓴 것은 다만 저 지극한 곳(至)에 이른 뒤에 머물라는 것(止)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지극함을 쓰지 않는 바가 없다.'<ref><대학장구> 전2장.</ref>" | ||
+ | ::○未至其地, 則必求其至; 既至其地, 則不當遷動而之他也. 未至此便住不可謂止; 至此不能守亦不可謂止. | ||
+ |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반드시 거기에 이르도록 해댜 하고, 이미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 아직 이 경지에 이르지 못했는데 머무는 것도 '止'라고 불러선 안 되고, 이 경지에 이르렀는데 지키지 못하는 것도 '止'라고 불러선 안 된다. | ||
+ | ::○至善如言極好道理. 十分盡頭善在那裏, 自家須去止他. 止則善與我一; 未能止, 善自善, 我自我. | ||
+ | ::'지선'은 '매우 훌륭한 도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십분 완전한 선이 거기에 있으면, 스스로 가서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머무른다면 선와 내가 하나가 되겠지만, 머무르지 못한다면 '선은 선이고 나는 나'일 것이다. | ||
+ | :言明明德、新民,皆當至於至善之地而不遷。蓋必其有以盡夫<sub>音扶</sub>天理之極,而無一毫人欲之私也。此三者,大學之綱領也。 | ||
+ | :'명명덕'과 '신민' 모두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르러 옮겨가지 말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대개 반드시 지극한 천리를 온전히 밝혀 한 터럭의 자기중심적 사욕이 없게 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대학>의 강령이다. | ||
+ | ::朱子曰: "明徳新民, 非人力私意所為. 本有一箇當然之則, 過之不可, 不及亦不可. 如孝是明徳, 然自有當然之則, 不及固不是; 若過其則必有刲股之事. 須是到當然之則, 處而不遷, 方是止於至善. '止至善'包明徳新民, 己也要止於至善, 民也要止於至善. 在他雖未能, 在我所以望他則不可不如是也."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명덕·신민은 인력이나 혼자의 생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마땅히 그래야 하는 법칙(當然之則)이 있어, 지나쳐도 안 되고 미치지 못해도 안 된다. 예를 들어 효는 명덕이지만, 본래 當然之則이 있어 미치지 못해서는 진실로 안 되지만, 지나치면 필시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내는 일'<ref><한어대사전> 割大腿肉。 割股療親, 古以為孝行;割股祭祀, 則表示崇敬之至。 ▶ 《新唐書‧孝友傳序》: “ 唐 時 陳藏器 著《本草拾遺》, 謂人肉治羸疾, 自是民間以父母疾, 多刲股肉而進。” </ref>이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當然之則에 이르면 거기에 머물러 옮겨가지 않아야 비로소 '지어지선'이다. '지어지선'은 명덕·신민을 포함하니, 자신도 지선에 머물러야 하고, 백성도 지선에 머물러야 한다. 남에게 있는 것은 비록 어떻게 할 수 없더라도, 내가 남에 대해 바라는 것은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 ||
+ | ::○問: "明明徳是自己事, 可以做得到極好處; 若新民則在人, 如何得他到極好處?" 曰: "且教自家先明得盡, 然後漸民以仁, 摩民以義. 如孟子所謂: '勞之來之, 匡之直之, 輔之翼之, 又從而振徳之.' 如此變化, 他自解到極好處." | ||
+ | ::물었다: "'명명덕'은 자기 일이니 지극히 훌륭한 경지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다만, '신민'의 경우는 남에게 달려있는데 어떻게 지극히 훌륭한 경지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우선 스스로 다 밝힌 연후에 仁으로 백성들을 적시고 義로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것이니, 맹자께서 '위로해주고 오게 하며, 바로잡아주고 곧게 하며, 부축하고 도와주며, 또 따라 은덕을 베풀어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ref><맹자> <등문공상> 4. </ref> 이렇게 변화한다면, 저들이 스스로 지극히 훌륭한 경지를 깨우칠 것이다." | ||
+ | ::○問: "至善不是明徳外别有所謂善, 只就明徳中到極處便是否?" 曰: "是. 明徳中也有至善, 新民中也有至善, 皆要到那極處. 至善只是以其極言. 不特是理會到極處, 亦要做到極處. 如為人君止於仁, 固是一箇仁, 然亦多般須是隨處看如這一事合當如此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亦是仁. 若不理會, 只管執一, 便成一邉去. 安得謂之至善? 至善只是恰好處." | ||
+ | ::물었다: "'지선'은 명덕 밖에 따로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명덕 가운데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것이 이것 아닙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명덕 가운데에도 '지선'이 있고 신민 가운데에도 '지선'이 있으니, 모두 지극한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지선'은 단지 '정도의 지극함'을 말한 것이다. 지극한 것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지극한 것을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임금이 仁에 머무는 것은 진실로 仁이지만, 역시 다양하게 상황에 따라 '이 일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仁이고, 저 일은 저렇게 하는 것이 또한 仁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만 고집한다면 하나만 해낼 것이다. 어찌 '지선'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지선'이란 단지 적절한 것일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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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知止而后有定,定而后能靜,靜而后能安,安而后能慮,慮而后能得。<br/> | ||
+ | 머물 곳을 안 이후에 [뜻에] 일정한 [방향이] 있게 되고, [뜻에] 일정한 [방향이 있게 된] 연후에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으며, [마음이] 고요해진 이후에 [몸이] 편안해질 수 있고, [몸이] 편안해진 이후에 [정밀히] 사려할 수 있으며, [정밀히] 사려할 수 있은 이후에 [머물러야 할 곳을] 얻는다. | ||
+ | :后,與後同,後放此。止者,所當止之地,即至善之所在也。<sub>此止字即接上文在止於至善之止字說下來。</sub>知之,則志有定向。靜,謂心不妄動。安,謂所處<sub>上聲下同</sub>而安。慮,謂處事精詳。得,謂得其所止。 | ||
+ | :'止'라는 것은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이니, 바로 至善의 소재이다.<sub>이 '止'자는 바로 앞 글의 '在止於至善'의 '止'자를 이어 말한 것이다.</sub>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을] 안다면 뜻에 일정한('定') 방향이 있게 된다. '靜'은 마음이 망동하지 않음을 말한다. '安'은 처한 바에 따라 편안함을 말한다. '慮'는 정밀히 일에 대처함을 말한다. '得'은 머물러야 할 곳을 얻음을 말한다. | ||
+ | ::朱子曰: "'知止'是識得去處. 既識得, 心中便定, 更不他求. 如行路, 知得從這一路去, 心中自是定; 如求之此, 又求之彼, 即是未定. 定、静、安、慮、得五字是功效次第, 不是工夫節目. 纔知止, 自然相因而見."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知止'란 갈 곳을 아는 것이다. [갈 곳을] 알고 나면 마음이 정해져 다른 데서 찾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길을 갈 때 '이 길로 가면 된다'고 알면 마음이 절로 정해질 것이지만, 여기저기서 [길을] 찾는다면 [마음이] 아직 정해지지 못한 것이다. 定·静·安·慮·得 다섯 자는 공효의 단계이지 공부 절목이 아니다. '머물 곳을 알자마자'(知止) 저절로 [이러한 공효가] 잇달아 드러난다." | ||
+ | ::○定静安相去不逺, 但有淺深耳. 與<中庸>動變化相類, 皆不甚相逺. 定以理言, 故曰有; 静以心言, 故曰能. 静是就心上說, 安是就身上說. | ||
+ | ::定·静·安은 큰 차이가 없고 다만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중용>의 動·變·化<ref><중용장구> 23장. 其次致曲,曲能有誠,誠則形,形則著,著則明,明則動,動則變,變則化,唯天下至誠為能化。</ref>와 마찬가지로 모두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定'은 理로 말한 것이므로 '有'(有定)라고 했고, '静'은 마음(心)으로 말했으므로 '能'(能靜)이라고 했다. '静'은 마음(心)에 대해 말한 것이고, '安'은 몸(身)에 대해 말한 것이다. | ||
+ | ::○既見得事物有定理, 而此心恁地寧静了. 看處在那裏: 在這裏也安, 在那裏也安. '安而后能慮', 慮是思之精審. 今人心中摇漾不定疊<ref><한어대사전> 定當;安定。</ref>, 還能處得事否? 人處事於叢冗<ref>猶繁雜。</ref>急遽之際而不錯亂, 非安不能也. '知止'是知事物所當止之理. 到臨事, 又須研㡬審處, 方能得所止. | ||
+ | ::사물에 일정한 이치(定理)가 있음을 알면 이 마음은 이처럼 고요해진다. 어디에 처했는지 보면?? 여기에서도 편안하고, 저기에서도 편안하다. '安而后能慮'의 '慮'는 정밀히 사려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속이 요동쳐 안정되지 못하니, 그런데도 제대로 일에 대처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번잡하거나 급박한 상황에서 일에 대처할 때 잘못하지 않는 건, 편안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知止'는 사물이 마땅히 머물러야 할 이치를 아는 것이다. 일을 대했을 때 다시 정밀한 부분까지 연구해야 비로소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 | ||
+ | ::○'知止'只是知有這箇道理, 也須是得其所止, 方是. 若要得其所止, 直是'能慮', 方是. '能慮'却是要緊'知止', 如知為子而必孝, 知為臣而必忠. '能得'是身親為忠孝之事. 若徒知這箇道理, 至於事親之際, 為私欲所汨, 不能盡其孝; 事君之際, 為利祿所汨, 不能盡其忠, 這便不是'能得'矣. '能慮'是見得此事合當如此, 便如此做. | ||
+ | ::'知止'란 다만 이 도리가 있음을 아는 것이니, 머물 곳을 얻어야 옳다. 만일 머물 곳을 얻고자 한다면, 그저 '能慮'하기만 하면 된다. '能慮'는 도리어 긴밀히 '知止'하려고 해야 하니, 예를 들어 자식이 되어서는 반드시 효성스러워야 하고, 신하게 되어서는 반드시 충성스러워야 함을 아는 것과 같다. '能得'은 자신이 직접 忠孝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만약 단지 이 도리를 알기만 하고, 부모를 섬길 때 사욕에 빠져 효를 다하지 못하거나, 임금을 섬길 때 利祿에 빠져 충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는 '能得'이 아니다. '能慮'란 '이 일이 마땅히 이렇게 해야함'을 아는 것이니, [알면] 이렇게 행하게 된다. | ||
+ | ::○'知止', 如射者之於的; '得止'是已中其的. | ||
+ | ::'知止'는 활 쏘는 사람과 과녁 간의 관계와 같으니, '得止'는 이미 과녁을 맞춘 것이다. | ||
+ | ::○定、静、安三字雖分節次, 其實'知止'後皆容易進.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此最是難進處, 多是至安處住了. '安而后能慮', 非顔子不能之. 去'得'字地位雖甚近, 然只是難進. 挽弓到臨滿時, 分外難開.<ref><주자대전> 권32 <答張敬夫問目></ref> | ||
+ | ::定·静·安 세 글자는 비록 단계를 나눴지만, 사실 '知止' 이후에 모두 쉽게 나아갈 수 있는 것들이다.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이것이 가장 나아가기 어려운 부분이니, 대부분 '편안해진 경지(安)'에서 눌러앉아버린다. '安而后能慮'는 안자가 아니면 해낼 수 없다. ['能慮'의 지위가] '得'자 지위와 비록 매우 가깝지만, 나아가기 힘들 따름이다. 활을 최대한 당겼을 때, 분수 이상은 당기기 어려운 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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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物有本末,事有終始,知所先後,則近道矣。<br/> | ||
+ | 物에는 본말이 있고 事에는 시종이 있으니, 우선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을 안다면 도에 가까워질 것이다. | ||
:明德為本,新民為末。知止為始,能得為終。本始所先,末終所後。此結上文兩節之意。 | :明德為本,新民為末。知止為始,能得為終。本始所先,末終所後。此結上文兩節之意。 | ||
+ | :'명명덕'이 근본이고 '신민'이 말단이며, '知止'가 시작이고 '能得'이 끝이다. 근본·시작이 우선할 것이고, 말단·끝이 나중에 할 것이다. 이 구절은 앞의 두 절의 뜻을 마무리한 것이다. | ||
+ | ::問: "事、物何分別?" 朱子曰: "對言則事是事, 物是物; 獨言物, 則兼事在其中. 知止、能得如耕而種而耘而斂, 是事有箇首尾如此. 明徳是理㑹己之一物; 新民是理㑹天下之萬物. 以己之一物對天下之萬物, 便有箇内外本末. '知所先後, 自然近道', 不知先後, 便倒了, 如何能近道? | ||
+ | ::물었다: "事와 物은 어떻게 구별됩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대비해서 말하면 事는 事이고 物은 物이지만, 物만 말하면 그 안에 事를 겸하는 것이다. '知止'와 '能得'은 마치 밭 갈고 씨뿌리며 김매고 수확하는 것과 같으니, 일에 처음과 끝이 있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명덕'은 자기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고, '신민'은 천하의 만물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 하나로 천하 만물에 대비하면 내외·본말의 [구별이] 있게 된다. '知所先後, 自然近道'란, 선후를 알지 못하면 거꾸로 하게 되니, 어떻게 도에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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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欲治其國者,先齊其家;欲齊其家者,先脩其身;欲脩其身者,先正其心;欲正其心者,先誠其意;欲誠其意者,先致其知;致知在格物。 | + |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欲治其國者,先齊其家;欲齊其家者,先脩其身;欲脩其身者,先正其心;欲正其心者,先誠其意;欲誠其意者,先致其知;致知在格物。<sub>治平聲。後倣此</sub><br/> |
− | : | + | 옛적 천하에 명덕을 밝히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國을 다스렸고, 자신의 國을 다스리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家를 단속했으며, 자신의 家를 단속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했고,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
+ | 心을 바르게 했으며, 자신의 心을 바르게 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意를 진실하게 했고, 자신의 意를 진실하게 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知를 지극해 했으며, 知를 지극히 하는 것은 格物에 달려있다. | ||
+ | :明明德於天下者,使天下之人皆有以明其明德也。心者,身之所主也。誠,實也。意者,心之所發也。實其心之所發,欲其一於善而無自欺也。致,推極也。<sub>推之以至極處</sub>知,猶識也。推極吾之知識,欲其所知無不盡也。格,至也。物,猶事也。窮至事物之理,欲其極處無不到也。此八者,大學之條目也。 | ||
+ | :'明明德於天下'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자신의 명덕을 밝힐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心'이라는 것은 일신의 주재이다. '誠'은 진실함이다. '意'라는 것은 心이 발한 것이다. 心이 발한 것을 진실하게 함이란 心이 선에 전일하여 스스로를 속임이 없는 것이다. '致'란 지극한 데까지 미루어나가는 것이다. '知'는 '알다(識)'과 같다. 내 지식을 지극한 데까지 미루어 나감이란 아는 바가 지극하지 않음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 ||
+ | ::朱子曰: "六箇欲與先字, 謂欲如此必先如此, 是言工夫節次. 若致知則便在格物上. 欲與先字差慢, 在字又緊得些子."<ref><주자어류> 권15. 「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至致知在格物。」「欲」與「先」字,謂如欲如此,必先如此,是言工夫節次。若「致知在格物」,則致知便在格物上。看來「欲」與「先」字,差慢得些子,「在」字又緊得些子。</ref>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여섯 번의 '欲'과 '先'자는 '이렇게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함'을 말하니, 공부의 절차를 말한 것이다. '치지'의 경우는 '격물'에 달려있다. '欲'과 '先'자는 조금 느슨하고, '在'자가 더욱 긴밀하다." | ||
+ | ::○致知、誠意是學者兩箇關. 致知乃夢與覺之關; 誠意乃善與惡之關. 透得致知之關則覺; 不然則夢. 透得誠意之關則善; 不然則惡. | ||
+ | ::'致知'·'誠意'는 배우는 자의 두 가지 관문이다. '致知'는 바로 꿈과 깸을 [가르는] 관문이고, '誠意'는 선과 악을 [가르는] 관문이다. '致知'의 관문을 뚫으면 깸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꿈이고, '誠意'의 관문을 뚫으면 선이지만 아니면 악이다. | ||
+ | ::○格物是夢覺關; 誠意是人鬼關. 過得此二關, 上面工夫一節易如一節了. 至治國平天下, 地步愈濶, 但須照顧得到. | ||
+ | :: '격물'은 꿈과 깸을 [가르는] 관문이고, '성의'는 사람과 귀신을 [가르는] 관문이다. 이 두 관문을 지날 수 있으면, 윗 단계의 공부는 일절이 일절보다 쉬워진다?? '치국'·'평천하'에 이르면 경지가 더욱 크지만, 반드시 제대로 살펴야 한다. | ||
+ | ::○格物是零細說; 致知是全體說. | ||
+ | ::'격물'은 세세하게 말한 것이고, '치지'는 전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 ||
+ | ::○格物致知, 於物上窮得一分之理, 則我之知亦知得一分; 物理窮得愈多, 則我之知愈廣. 其實只是一理, 纔明彼, 即曉此. | ||
+ | ::'격물'·'치지'란 사물에서 한 푼의 理를 궁구하면 내 知 또한 한 푼만큼 알게 되고, 사물의 理를 더욱 많이 궁구하면 내 知도 더욱 넓어진다. 사실 하나의 理일 뿐이니, 저것을 밝히면 이것을 알게 된다. | ||
+ | ::○格物, 十事格得九事通透, 一事未通透, 不妨; 一事只格得九分, 一分不通透, 最不可. 須窮盡到十分處. | ||
+ | ::'격물'에 있어서, 열 가지 일 가운데 아홉 가지 일에 통달하고 한 가지 일에 통달하지 못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한 가지 일 가운데 9할 정도만 궁구하고 1할만큼 통달하지 못한 것은 가장 안 될 짓이다. 반드시 십분 궁구해야 한다. | ||
+ | ::○因其所已知, 推之至於無所不知. | ||
+ |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통해 모르는 것이 없는 데까지 미루어 나간다. | ||
+ | ::○人多把這道理作一箇懸空底物. <大學>不説窮理, 只說格物, 便是要人就事物上理㑹. 如此, 方見得實體. 如作舟行水, 作車行陸, 今試以衆力共推一舟於陸, 必不能行, 方見得舟不可以行陸也. 此之謂實體. | ||
+ |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도리를 허공에 매달린 무언가로 간주한다. <대학>에서 '이치를 궁구한다(窮理)'고 말하지 않고 단지 '격물'을 말한 것은, 사람들이 [구체적] 사물에서 이해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실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배를 만들어 물 위에 띄우고 수레를 만들어 육지 위를 가는데, 시험삼아 인력으로 함께 배를 육지에서 밀어보면 분명 갈 수 없을 것이니, 비로소 '배는 육지 위를 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을 '실체'라고 한다. | ||
+ | ::○格物窮理, 有一物便有一理, 窮得到後遇事觸物, 皆撞着這道理: 事君便遇忠, 事親便遇孝, 居處便恭, 執事便敬, 與人便忠. 以致參前倚衡, 無往而不見這箇道理. 若窮不至, 則所見不真, 外面雖為善而内實為惡. | ||
+ | ::'격물'·'궁리'란 한 사물이 있으면 한 이치가 있어서, 모두 궁구한 뒤에는 마주치는 사물이 모두 이 도리를 만나는 것이다. 임금을 섬기면 忠을 만나고, 부모를 섬기면 孝를 만나며, 거처할 때에는 恭을, 일을 처리할 때는 敬을, 다른 사람과 함께일 때는 忠을 [만난다.] 이로부터 '[忠信篤敬이] 눈앞에 참여해있고 멍에에 기대어있음을 [보는]'<ref><논어> <위령공> 5. 立,則見其參於前也;在輿,則見其倚於衡也。</ref> 데까지 이르면, 어디를 가더라도 이 도리를 보지 않음이 없게 된다. 궁구함이 지극하지 않으면, 소견이 진실하지 못해 겉으로 선을 행하더라도 내면은 실로 악할 것이다. | ||
+ | ::○問: "物者, 理之所在, 人所必有而不能無者, 何者為切?" 曰: "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 皆人所不能無者, 但學者須要窮格得盡. 事父母, 則當盡其孝; 處兄弟, 則當盡其友. 如此之類, 須是要見得盡. 若有一毫不盡, 便是窮格不至也." | ||
+ | ::물었다: "物이라는 것은 理가 있는 곳이니, 사람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서 없을 수 없는 것 가운데 무엇이 가장 절실합니까?" 대답하셨다: "군신관계·부자관계·형제관계·부부관계·붕우관계 모두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배우는 자는 완전히 궁구(窮格)해야 한다. 부모를 섬길 때에는 孝를 다해야 하고, 兄弟와 있을 때에는 우애를 다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 반드시 완전히 알아야 한다.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바로 궁구함(窮格)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다." | ||
+ | ::○物謂事物也. 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 便有一箇是、一箇非. 凡自家身心上皆須體驗得一箇是非. 若講論文字, 應接事物, 各各體驗, 漸漸推廣, 地步自然寬闊. 如曾子三省, 只管如此體驗去.<ref><주자어류> 권15. 「格物」二字最好。物,謂事物也。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便有一箇是,一箇非,是底便行,非底便不行。凡自家身心上,皆須體驗得一箇是非。若講論文字,應接事物,各各體驗,漸漸推廣,地步自然寬闊。如曾子三省,只管如此體驗去。</ref> | ||
+ | ::'物'이란 사물을 말한다. 모름지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해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거든 [옳은 것은 실천하고 그른 것은 실천하지] 말아야 한다. 글을 강론하고 일에 대처하는 경우, 각각 체험하여 점진적으로 넓혀나가면, 수준이 저절로 광대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증자의 '三省'<ref><논어> <학이> 4. 曾子曰:「吾日三省吾身:為人謀而不忠乎?與朋友交而不信乎?傳不習乎?」</ref>은 그저 이렇게 체험하신 것이다. | ||
+ | ::○致知格物只是一事, 非是今日格物, 明日又致知. 格物以理言也; 致知以心言也. | ||
+ | ::'치지'·'격물'은 하나의 일일 뿐이니, 오늘 '격물'하고 내일 다시 '치지'하는 것이 아니다. '격물'은 理로 말한 것이고, '치지'는 心으로 말한 것이다. | ||
+ | ::○致知格物是窮此理; 誠意正心脩身是體此理; 齊家治國平天下是推此理. 要做三節看. | ||
+ | ::'치지'·'격물'은 이 理를 궁구하는 것이고, '성의'·'정심'·'수신'은 이 理를 체득하는 것이며, '제가'·'치국'·'평천하'는 이 理를 [현실에] 미루어나가는 것이다. 세 절목으로 봐야 한다. | ||
+ | ::○於格物致知誠意正心脩身之際, 要常見一箇明徳隠然流行於五者之間, 方分明. | ||
+ |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할 때에 명덕이 은연중에 다섯 단계에 유행하는 것을 늘 봐야 분명할 것이다. | ||
+ | ::○自格物至平天下, 聖人亦是略分箇先後與人看, 不成做一件浄盡無餘, 方做一件. 如此, 何時做得成!<ref><주자어류> 권15. 聖人亦是略分箇先後與人知,不是做一件淨盡無餘,方做一件。若如此做,何時得成!</ref> | ||
+ | ::'격물'에서 '평천하'까지는 성인께서 다만 대략적으로 선후를 나눠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지, 하나를 깨끗하게 남김없이 처리하고나서 [다른] 하나를 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한다면 언제 해낼 수 있겠는가! | ||
+ | ::○'明明徳於天下'以上, 皆有等級. 到致知格物處, 便親切. 故不曰: '致知者先格其物', 只曰: '致知在格物'也. | ||
+ | ::'明明徳於天下' 이상에는 모두 등급이 있다. '치지'·'격물'은 비근하므로 [<대학> 경문에서] '致知者先格其物'이라고 하지 않고 '致知在格物'이라고만 말했다. | ||
− | 物格而后知至,知至而后意誠,意誠而后心正,心正而后身脩,身脩而后家齊,家齊而后國治,國治而后天下平。 | + | 物格而后知至,知至而后意誠,意誠而后心正,心正而后身脩,身脩而后家齊,家齊而后國治,國治而后天下平。<sub>治去聲。後倣此</sub><br/> |
− | : | + | 物의 [이치에] 이른 이후에 知가 지극해지고, 知가 지극해진 이후에 意가 진실해지며, 意가 진실해진 이후에 心이 바르게 되고, 心이 바르게 된 이후에 身이 수양되며, 身이 수양된 이후에 家가 단속되고, 家가 단속된 이후에 國이 다스려지며, 國이 다스려진 이후에 천하가 평안해진다. |
+ | :物格者,物理之極處無不到也。知至者,吾心之所知無不盡也。知既盡,則意可得而實矣,意既實,則心可得而正矣。脩身以上,明明德之事也。齊家以下,新民之事也。<sub>此四句包括上一節</sub>物格知至,則知所止矣。意誠以下,則皆得所止之序也。 | ||
+ | :'物格'이라는 것은 物理의 지극한 곳에 周到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知至'라는 것은 내 心의 앎(所知)이 다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知가 지극한 이상 意는 진실할 수 있고, 意가 진실한 이상 心은 바르게 될 수 있다. '수신' 이상(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은 '명명덕'의 일이고, '제가' 이하(제가·치국·평천하)는 '신민'의 일이다.<sub>이 네 구절이 앞의 한 구절을 포괄한다</sub> '物格'·'知至'하면 머물 곳을 알게 된다. '意誠' 이하(의성·심정·신수·가제·국치·천하평)는 모두 머물 곳의 차례를 얻은 것이다. | ||
+ | ::新安陳氏曰: "意誠、心正、身脩, 明明徳所以得止至善之次序; 家齊、國治、天下平, 新民所以得止至善之次序也. '皆'之一字包明明徳新民而言. 此四句包括此一節也. 是二節可見三綱之統八目, 而八目之𨽻三綱矣."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意誠'·'心正'·'身脩'은 '명명덕'이 '止至善'의 차례를 얻은 것이고, '家齊'·'國治'·'天下平'은 '신민'이 '止至善'의 차례를 얻은 것이다. ['皆得所止之序也'의] ]'皆'자는 '명명덕'과 '신민'을 포괄하여 말한 것이다. 이 네 구절은 이 한 절목을 포괄한 것이다. 이 두 절목에서 삼강령이 팔조목을 거느리고, 팔조목이 삼강령에 종속됨을 알 수 있다." | ||
+ | ::○朱子曰: "致知者, 理在物而推吾之知以知之也; 知至者, 理雖在物而吾心之知已得其極也."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치지'라는 것은 理가 외물에 있어서 내 知를 미루어 아는 것이고, '知至'라는 것은 理가 비록 외물에 있지만 내 마음의 知가 이미 그 지극한 것까지 아는 것이다." | ||
+ | ::○問: "物未格時, 意亦當誠?" 曰: "固然. 豈可說'物未格, 意便不用誠?' 但知未至時, 雖欲誠意, 其道無由. 如人夜行, 雖知路從此去, 但黒暗行不得. 所以要致知. 知至則道理明白, 坦然行之. 今人知未至者也. 知道善當好, 惡當惡, 然臨事不能如此者, 只是實未曾見得. 若實見得則行處無差." | ||
+ | ::물었다: "物[의 이치에]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에도 意는 진실해야 하겠지요?" 대답하셨다: "진실로 그렇다. 어찌 '物[의 이치에]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 意는 진실하지 않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다만 知가 지극하지 않을 때에는 비록 意를 진실하게 하고자 하더라도 말미암을 방도가 없으니, 마치 사람이 밤에 길을 갈 때 비록 길을 이쪽으로 가면 된다고 알더라도 어두워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치지'해야 한다. ['치지'의 결과로] '知至'하게 되면 도리가 분명해져 평탄하게 행하게 된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해야 함을 알지만, 일을 접하면 이렇게 못하는 것은 다만 제대로 안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제대로 알았다면 실천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 ||
+ | ::○問物格、知至. 曰: "格物時, 方是區處<ref><한어대사전> 處理;籌劃安排。 </ref>理會; 到得知至時, 却已自有箇主宰, 會去分別取舍. 初間或只見得表, 不見得裏, 只見得粗, 不見得精. 到知至時, 方知得到; 能知得到, 方㑹意誠, 可者必為, 不可者決不肯為. 到心正, 則胸中無些子私蔽, 洞然光明正大, 截然有主而不亂, 此身便脩, 家便齊, 國便治, 而天下可平."<ref><주자어류> 권15. 或問:「格物、致知,到貫通處,方能分別取舍。初間亦未嘗不如此,但較生澀勉強否?」曰:「格物時是窮盡事物之理,這方是區處理會。到得知至時,卻已自有箇主宰,會去分別取舍。初間或只見得表,不見得裏;只見得粗,不見得精。到知至時,方知得到;能知得到,方會意誠,可者必為,不可者決不肯為。到心正,則胸中無些子私蔽。洞然光明正大,截然有主而不亂,此身便修,家便齊,國便治,而天下可平。」</ref> | ||
+ | ::'物格'·'知至'에 대해 물었다. 대답하셨다: "'격물'하는 때에는 한창 일을 처리하고 이해하지만, '知至'에 도달한 때에는 이미 자신에게 주재가 있어 분별해 취사선택할 수 있다. 처음에는 혹 겉만 알고 속은 모르며, 거친 것만 알고 정밀한 것은 모르겠지만, '知至'에 도달한 때에는 비로소 완전히 알고, 완전히 알 수 있으면 비로소 意가 진실해질 수 있어서, 옳은 것은 반드시 실천하고 옳지 않은 것은 결코 하려고 하지 않는다. 心이 바르게 되면 가슴속에 조금의 이기적인 가림이 없어 훤하게 빛나고 정대하며 분명하게 주재가 있어 어지럽지 않으니, 이 身은 곧 수양되고 家는 단속되며 國은 다스려지고 天下는 평안해질 수 있다." | ||
+ | ::○知至謂天下事物之理知無不到之謂. 若知一而不知二, 知大而不知細, 知髙逺而不知幽深, 皆非知之至也. 須要無所不知, 乃為至耳. | ||
+ | ::'知至'란 천하 사물의 이치에 周到하지 않음을 말한다. 만약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거나, 큰 것만 알고 세세한 것을 모르거나, 고원한 것만 알고 심오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知가 지극'(知至)한 것이 아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야 '지극'(知至)한 것이다. | ||
+ | ::○物格、知至是一截事; 意誠、心正、身脩是一截事; 家齊、國治、天下平又是一截事. 自知至交誠意又是一箇過接<ref><한어대사전> 過渡連接。 </ref>關子; 自脩身交齊家又是一箇過接關子. | ||
+ | ::'物格'·'知至'가 하나의 일이고, '意誠'·'心正'·'身脩'가 하나의 일이며, '家齊'·'國治'·'天下平'이 또 하나의 일이다. '知至'가 '意誠'과 만나는 곳이 분기점이고, '身脩'가 '家齊'와 만나는 곳도 분기점이다. | ||
+ | ::○知至、意誠是凡聖界分, 未過此關, 雖有小善, 猶是黑中之白; 已過此關, 雖有小過, 亦是白中之黑. | ||
+ | ::'知至'와 '意誠'은 범부와 성인의 경계이니, 이 관문을 넘지 못한다면 비록 작은 선이 있더라도 검은 색 가운데의 흰색과 같고, 이미 이 관문을 통과했다면 비록 작은 허물이 있더라도 흰색 가운데의 검은 색이다. | ||
+ | ::○意誠後, 推盪<ref><한어대사전> 2. 推動搖蕩;振蕩。</ref>得查滓伶俐, 心盡是義理.<ref><주자어류> 권15. 意誠後,推盪得渣滓靈利,心盡是義理。</ref> 意是指發處; 心是指體言. 意是動, 心該動静. 身對心言, 則心正是内能如此; 身脩是外若不各自做一節工夫, 不成說我意已誠矣; 心將自正, 恐懼哀樂引將去, 又却邪了, 不成說心正矣. 身不用管外面更不顧而心與迹有異矣. 須是無所不用其功. | ||
+ | ::'意誠' 이후에는 찌꺼끼·약삭빠름 같은 것으로 어지럽히더라도 心은 완전히 의리이다. 意란 [心이] 발한 것을 가리키고, 心은 [意의] 體를 말한다. 意는 動이고, 心은 動静을 갖추고 있다. 身을 心에 대비해 말하면, '心正'은 내면으로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고, '身脩'는 외면이 ?? 반드시 공부를 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 ||
+ | ::○到正心時節已好了, 只是就好裏面又有許多偏, 如水已淘去濁十分清了, 又怕於清裏面有波浪動盪處. | ||
+ | ::'正心'에 이르렀을 때 이미 좋지만, 좋은 것 이면에는 또 수많은 치우침이 있으니, 마치 물에서 이미 탁한 것을 걸러내 십분 맑더라도, 맑은 것 이면에 파랑·물결이 있는지 걱정해야 한다. | ||
+ | ::○意未誠時, 如人犯私罪; 意既誠而心猶動, 如人犯公罪, 亦有間矣. | ||
+ | ::意가 아직 진실하지 않은 때는 마치 사람이 개인적인 죄를 지은 것 같고, 意가 이미 진실한데 心이 여전히 동요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공적인 죄를 지은 것 같으니, 역시 차이가 있다. | ||
+ | ::○'物格而後知至', 至'心正而後身脩', 著'而'字則是先為此而後能為彼也. 盖即物而極致其理矣, 而後吾之所知無不至; 吾知無不至矣而後見善明, 察惡盡, 不容有所自欺而意誠; 意無不誠矣而後念慮隠微, 慊快充足<ref><대학장구> 전6장. 所謂誠其意者:毋自欺也,如惡惡臭,如好好色,此之謂自謙,故君子必慎其獨也!【朱注】謙,快也,足也。</ref>而心正; 心得其本然之正矣而後身有所主而可得而脩. | ||
+ | ::'物格而後知至'에서 '心正而後身脩'까지 '而'자를 쓴 것은 '먼저 이것을 한 이후에 저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개 物에 나아가 그 이치에 이른 이후에 내 앎(所知)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내 知가 지극하지 않음이 없게 된 이후에 선을 분명히 보고 악을 온전히 살펴 스스로 속이는 바가 있을 수 없으므로 意가 진실해진다. 意가 진실하지 않음이 없게 된 이후에 은미한 것을 헤아리고 만족스러워져 心이 바르게 된다. 心이 본래의 바름을 얻은 이후에 身에 주재가 있어 수양될 수 있게 된다. | ||
− | 自天子以至於庶人,壹是皆以脩身為本。 | + | 自天子以至於庶人,壹是皆以脩身為本。<br/> |
− | : | + | 천자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脩身을 근본으로 삼는다. |
+ | :壹是,一切也。<sub><漢書> <平帝紀> '一切', 顔師古註云: "猶以刀切物, 取其齊整."</sub>正心以上,皆所以脩身也。齊家以下,則舉此而措之耳。 | ||
+ | :'壹是'는 '일체'이다.<sub><한서> <평제기>의 '一切'를 안사고의 주석에 "칼로 사물을 잘라 깨끗하게 [잘린] 것을 취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sub> '正心' 이상은 모두 '脩身'하는 방법이다. '齊家' 이하는 이것을 들어 놓는 것일 뿐이다. | ||
− | 其本亂而末治者否矣,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未之有也! | + | 其本亂而末治者否矣,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未之有也!<br/> |
− | : | + | 근본이 어지러운데 말단이 다스려진 경우는 없고, 두텁게 할 것을 박하게 하면서 박하게 할 것을 두텁게 하는 경우는 있지 않았다. |
+ | :本,謂身也。<sub>接上文本字. 末謂天下國家</sub>所厚,謂家也。此兩節結上文兩節之意。 | ||
+ | :'本'은 ['脩身'의] '身'이다.<sub>앞 글의 '本'자에 이어지는 것이다. '末'은 '天下'·'國'·'家'이다.</sub> '두텁게 할 것'(所厚)은 '家'이다. 이 두 구절은 앞 글의 두 구절의 뜻을 마무리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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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右經一章,蓋孔子之言,而曾子述之。<sub>凡二百五字。</sub>其傳<sub>去聲</sub>十章,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sub>蓋字疑辭, 則字決辭</sub>舊本頗有錯簡,今因程子所定,而更考經文,別<sub>必列反</sub>為序次如左。<sub>凡千五百四十六字。</sub> | ||
+ | ::이상은 경1장이니, 아마 공자의 말씀을 증자께서 조술하신 것이다.<sub>모두 205자이다.</sub> 전10장은 증자의 뜻을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다.<sub>'蓋'자는 불확실하다는 말이고, '則'자는 확실하다는 말이다.</sub> 옛 판본에 착간이 꽤 있기 때문에, 이제 정자께서 산정하신 것에 기인해 경문을 다시 고찰해 따로 다음과 같이 차례짓는다. | ||
+ | :::凡傳文,雜引經傳,若無統紀,然文理接續,血脈貫通,深淺始終,至為精密。熟讀詳味,久當見之,今不盡釋也。 | ||
+ | :::무릇 傳文은 경전을 잡다하게 인용해 맥락이 없는 것 같지만, 글의 조리가 이어지고 혈맥이 일관되니, 깊이와 논리가 지극히 정밀하다. 자세히 읽고 음미하여 오래되면 응당 알 것이므로, 지금은 다 해설하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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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문』 경1장 | + | ====『혹문』 경1장==== |
+ | 1. <대학>과 <소학>의 구분 | ||
或問: “大學之道, 吾子以爲大人之學, 何也?”<br/> | 或問: “大學之道, 吾子以爲大人之學, 何也?”<br/> | ||
299번째 줄: | 458번째 줄: | ||
− | + | 2. <소학>이란? | |
曰: “敢問其爲小子之學, 何也?”<br/> | 曰: “敢問其爲小子之學, 何也?”<br/> | ||
308번째 줄: | 467번째 줄: | ||
− | + | 3. <대학>과 <소학> 간의 관계 | |
曰: “吾聞君子務其遠者大者, 小人務其近者小者. 今子方將語<sub>音御</sub>人以大學之道, 而又欲其考乎『小學』之書, 何也?” <br/> | 曰: “吾聞君子務其遠者大者, 小人務其近者小者. 今子方將語<sub>音御</sub>人以大學之道, 而又欲其考乎『小學』之書, 何也?” <br/> | ||
336번째 줄: | 495번째 줄: | ||
− | + | 4. <소학>을 배우지 않고 장성한 사람의 학문 순서 문제(경공부) | |
曰: “幼學之士, 以子之言而得循序漸進, 以免於躐等陵節之病, 則誠幸矣. 若其年之旣長, 而不及乎此者, 欲反從事於小學, 則恐其不免於扞格不勝、勤苦難成之患; <br/> | 曰: “幼學之士, 以子之言而得循序漸進, 以免於躐等陵節之病, 則誠幸矣. 若其年之旣長, 而不及乎此者, 欲反從事於小學, 則恐其不免於扞格不勝、勤苦難成之患; <br/> | ||
356번째 줄: | 515번째 줄: | ||
:물었다: "'敬'이라는 글자는 소학에 대적할 수 없습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내 생각에는 소학이 도리어 '敬'에 대적할 수 없으니, 敬은 이미 그 자체로 소학을 포함한다. 敬은 위 아래를 관통하는 공부이니, 비록 성인의 경지에 이르더라도 이 敬을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 :물었다: "'敬'이라는 글자는 소학에 대적할 수 없습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내 생각에는 소학이 도리어 '敬'에 대적할 수 없으니, 敬은 이미 그 자체로 소학을 포함한다. 敬은 위 아래를 관통하는 공부이니, 비록 성인의 경지에 이르더라도 이 敬을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 ||
:○問: "大學首云明徳, 却不曾說主敬, 莫是已見於小學否?" 曰: "然. 自小學不傳, 伊川却是帶補一敬字." | :○問: "大學首云明徳, 却不曾說主敬, 莫是已見於小學否?" 曰: "然. 自小學不傳, 伊川却是帶補一敬字." | ||
− | :물었다: "『대학』 첫 머리에서는 '명덕'만 말하고 도리어 '主敬'을 말한 적이 없으니, [경이] 이미 | + | :물었다: "『대학』 첫 머리에서는 '명덕'만 말하고 도리어 '主敬'을 말한 적이 없으니, [경이] 이미 『소학』에 드러나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소학』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천선생께서 오히려 '敬'자를 보완하신 것이다. |
:○北溪陳氏曰: "程子只說一箇主敬工夫, 可以補小學之缺. 盖主敬工夫可以收放心而立大本; 大本既立, 然後工夫循序而進, 無往不通. 大抵主敬之功, 貫始終, 一動靜, 合内外, 小學大學皆不可無也." | :○北溪陳氏曰: "程子只說一箇主敬工夫, 可以補小學之缺. 盖主敬工夫可以收放心而立大本; 大本既立, 然後工夫循序而進, 無往不通. 大抵主敬之功, 貫始終, 一動靜, 合内外, 小學大學皆不可無也." | ||
:북계 진씨가 말했다: "정자께서는 오직 주경공부를 말씀하셨으니, 소학의 흠결을 보완할 수 있다. 대개 주경공부를 [통해]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큰 근본을 세울 수 있으니, 큰 근본이 세워지고 난 연후에야 공부가 순서대로 나아가 가는 곳마다 통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대저 주경공부라고 하는 것은 시작과 끝을 관통하고 動과 靜에 동일하며 内와 外에 일치하니, 소학과 대학에 모두 없어선 안 된다." | :북계 진씨가 말했다: "정자께서는 오직 주경공부를 말씀하셨으니, 소학의 흠결을 보완할 수 있다. 대개 주경공부를 [통해]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큰 근본을 세울 수 있으니, 큰 근본이 세워지고 난 연후에야 공부가 순서대로 나아가 가는 곳마다 통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대저 주경공부라고 하는 것은 시작과 끝을 관통하고 動과 靜에 동일하며 内와 外에 일치하니, 소학과 대학에 모두 없어선 안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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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일찍이 소학공부를 하지 않고 단지 대학만 배웠기 때문에 실천할 길이 없다. 지금은 우선 마땅히 持敬부터 시작해서 확실하게 순일하고 오롯하게 해야 하니, 그런 연후에야 격물치지할 수 있을 것이다. '敬'이라는 글자는 철두철미한 공부이니, 격물에서부터 평천하까지 모두 이것(경)을 벗어나지 않는다." | :요즘 사람들은 일찍이 소학공부를 하지 않고 단지 대학만 배웠기 때문에 실천할 길이 없다. 지금은 우선 마땅히 持敬부터 시작해서 확실하게 순일하고 오롯하게 해야 하니, 그런 연후에야 격물치지할 수 있을 것이다. '敬'이라는 글자는 철두철미한 공부이니, 격물에서부터 평천하까지 모두 이것(경)을 벗어나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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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경공부의 방법 | ||
曰: “然則所謂敬者, 又若何而用力耶?” <br/> | 曰: “然則所謂敬者, 又若何而用力耶?”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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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와 사량좌와 윤돈이 敬을 설명한 것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비유하자면, 이 방은 사방으로 모두 들어올 수 있는데, 만일 한 쪽으로 들어온다면 나머지 세 쪽도 모두 여기에 있는 것과 같다." | :정자와 사량좌와 윤돈이 敬을 설명한 것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비유하자면, 이 방은 사방으로 모두 들어올 수 있는데, 만일 한 쪽으로 들어온다면 나머지 세 쪽도 모두 여기에 있는 것과 같다." | ||
:○問: "敬, 諸先生之說, 各不同. 然總而言之, 常令此心常存, 是否?" 曰: "其實只一般. 若是敬時, 自然主一無適, 自然整齊嚴肅, 自然常惺惺, 其心收歛不容一物. 但程子'整齊嚴肅', 與謝氏、尹氏之說又更分曉." | :○問: "敬, 諸先生之說, 各不同. 然總而言之, 常令此心常存, 是否?" 曰: "其實只一般. 若是敬時, 自然主一無適, 自然整齊嚴肅, 自然常惺惺, 其心收歛不容一物. 但程子'整齊嚴肅', 與謝氏、尹氏之說又更分曉." | ||
− | :물었다: "敬에 대한 여러 선생들의 설명이 각각 같지 않는데, | + | :물었다: "敬에 대한 여러 선생들의 설명이 각각 같지 않는데, 총괄해 말한다면 항상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지요?" 말했다. "사실 한 가지일 뿐이다. 만약 敬하는 때라면 자연히 主一無適하고 자연히 整齊嚴肅하며 자연히 常惺惺하고 그 마음이 수렴되어 어떤 외물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정자께서 말씀하신 '整齊嚴肅'이 사량좌나 윤돈의 설명과 비교했을 때 [의미가] 더욱 분명하다." |
:○問: "程子、謝氏之説, 謝氏尤切當<ref><한어대사전> 貼切恰當。 </ref>." 曰: "如某所見, 程子說得切當. 整齊嚴肅, 此心便存, 便能惺惺, 未有外面整齊嚴肅而内不惺惺者. 人一時間外面整肅, 便一時惺惺; 一時放寛了, 便昏怠也." 新安陳氏曰: "朱子深取整齊嚴肅之説者, 盖以有著實下手處耳." | :○問: "程子、謝氏之説, 謝氏尤切當<ref><한어대사전> 貼切恰當。 </ref>." 曰: "如某所見, 程子說得切當. 整齊嚴肅, 此心便存, 便能惺惺, 未有外面整齊嚴肅而内不惺惺者. 人一時間外面整肅, 便一時惺惺; 一時放寛了, 便昏怠也." 新安陳氏曰: "朱子深取整齊嚴肅之説者, 盖以有著實下手處耳." | ||
− | :물었다: "정자와 사량좌의 설명 가운데 사량좌이 설명이 더욱 적절한 것 같습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보건대, | + | :물었다: "정자와 사량좌의 설명 가운데 사량좌이 설명이 더욱 적절한 것 같습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보건대, 정자께서 적절하게 말씀하셨다. 整齊嚴肅하면 마음이 보존되고 惺惺해질 수 있으니 외면을 整齊嚴肅하는데 내면이 惺惺하지 않은 자는 있지 않았다. 사람이 한 번 외면을 바르게 하면 일시에 惺惺해지며, 한 번 방관하게 되면 곧바로 혼매하고 나태해진다." 신안 진씨가 말했다: "주자께서 整齊嚴肅의 설명을 깊히 취하신 것은 아마도 착실히 실천하는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勿齋程氏曰: "整齊嚴肅、及收歛不容一物, 皆敬之始也; 主一無適、及常惺惺者, 皆敬之成也. 主一無適者, 敬之純; 常惺惺者, 敬而明也. 然主一亦有淺深, 以初學言之, 則欲主乎一; 以成徳言之, 則所主者一." | :○勿齋程氏曰: "整齊嚴肅、及收歛不容一物, 皆敬之始也; 主一無適、及常惺惺者, 皆敬之成也. 主一無適者, 敬之純; 常惺惺者, 敬而明也. 然主一亦有淺深, 以初學言之, 則欲主乎一; 以成徳言之, 則所主者一." | ||
:물재 정씨가 말했다. "'整齊嚴肅'과 '收歛不容一物'은 모두 敬의 시작이고, '主一無適'과 '常惺惺'은 모두 경의 완성이다. '主一無適'은 敬 중에 순수한 것이고 '常惺惺'은 敬 중에 밝은 것이다. 그러나 '主一'함에는 깊이가 있으니, 초학자로 말한다면 한 가지를 주로 하고자 해야하고, 덕을 이룬 사람으로 말한다면 주로하는 한 가지일 것이다." | :물재 정씨가 말했다. "'整齊嚴肅'과 '收歛不容一物'은 모두 敬의 시작이고, '主一無適'과 '常惺惺'은 모두 경의 완성이다. '主一無適'은 敬 중에 순수한 것이고 '常惺惺'은 敬 중에 밝은 것이다. 그러나 '主一'함에는 깊이가 있으니, 초학자로 말한다면 한 가지를 주로 하고자 해야하고, 덕을 이룬 사람으로 말한다면 주로하는 한 가지일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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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씨가 말했다: "우선 나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무엇이 主一無適이고 무엇이 整齊嚴肅이며 무엇이 常惺惺이고 무엇이 心收歛不容一物인지 살펴보라(體察見得). 이 네 가지는 모두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주자께서 만년에 말씀하신 敬자의 의미는 오직 畏자에 가까우니, 그 의미가 정밀하다. " | :황씨가 말했다: "우선 나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무엇이 主一無適이고 무엇이 整齊嚴肅이며 무엇이 常惺惺이고 무엇이 心收歛不容一物인지 살펴보라(體察見得). 이 네 가지는 모두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주자께서 만년에 말씀하신 敬자의 의미는 오직 畏자에 가까우니, 그 의미가 정밀하다. " | ||
:○西山眞氏曰: "持敬之道, 合三先生之言而用力焉, 然後内外交相養之功始備." | :○西山眞氏曰: "持敬之道, 合三先生之言而用力焉, 然後内外交相養之功始備." | ||
− | :서산 진씨가 말했다: "敬을 유지하는 방법은, 세 선생의 말을 합쳐서 그것에 힘쓰는 것이니, 그런 연후에야 내외를 서로 길러주는 | + | :서산 진씨가 말했다: "敬을 유지하는 방법은, 세 선생의 말을 합쳐서 그것에 힘쓰는 것이니, 그런 연후에야 내외를 서로 길러주는 공효가 비로소 갖추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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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경공부가 학문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되는 이유 | ||
曰: “敬之所以爲學之始者然矣, 其所以爲學之終也, 奈何?” <br/> | 曰: “敬之所以爲學之始者然矣, 其所以爲學之終也, 奈何?” <br/> | ||
물었다: "敬이 학문의 시작이 되는 것은 맞지만, 학문의 끝이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br/> | 물었다: "敬이 학문의 시작이 되는 것은 맞지만, 학문의 끝이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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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敬者, 一心之主宰, 而萬事之本根也. 知其所以用力之方, 則知小學之不能無賴於此以爲始; 知小學之賴此以始, 則夫<sub>音扶</sub>大學之不能無賴乎此以爲終者, 可以一以貫之而無疑矣. 蓋此心旣立, 由是格物致知以盡事物之理, 則所謂尊德性而道問學; <br/> | 曰: “敬者, 一心之主宰, 而萬事之本根也. 知其所以用力之方, 則知小學之不能無賴於此以爲始; 知小學之賴此以始, 則夫<sub>音扶</sub>大學之不能無賴乎此以爲終者, 可以一以貫之而無疑矣. 蓋此心旣立, 由是格物致知以盡事物之理, 則所謂尊德性而道問學; <br/> | ||
− | 대답했다: "敬이라는 것은 一心의 주재이자 모든 일의 근본이니, 이에 힘쓸 방법을 안다면 소학은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시작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고, 소학이 이를 의지해 시작이 됨을 안다면, 저 대학이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끝이 될 수 없다는 것도 '一以貫之'<ref><논어> <리인> 15. 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ref>해 의심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 마음이 확립되고서 이것(敬)을 통해 格物致知해 사물의 이치를 다하는 것이 이른바 '尊德性而道問學'<ref><중용장구> 27장. 故君子尊德性而道問學,致廣大而盡精微,極高明而道中庸。溫故而知新,敦厚以崇禮。</ref>이요, | + | 대답했다: "敬이라는 것은 一心의 주재이자 모든 일의 근본이니, [이에] 힘쓸 방법을 안다면 소학은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시작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고, 소학이 이를 의지해 시작이 됨을 안다면, 저 대학이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끝이 될 수 없다는 것도 '一以貫之'<ref><논어> <리인> 15. 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ref>해 의심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 마음이 확립되고서 이것(敬)을 통해 格物致知해 사물의 이치를 다하는 것이 이른바 '尊德性而道問學'<ref><중용장구> 27장. 故君子尊德性而道問學,致廣大而盡精微,極高明而道中庸。溫故而知新,敦厚以崇禮。</ref>이요, |
:新安陳氏曰: "尊徳性, 持敬以涵養本原也; 道問學, 窮格以開發聰明也." | :新安陳氏曰: "尊徳性, 持敬以涵養本原也; 道問學, 窮格以開發聰明也." | ||
− |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尊徳性은 敬의 상태를 유지해서 본원을 함양하는 것이고 道問學은 궁리·격물해서 총명함을 개발하는 것이다." |
由是誠意正心以修其身, 則所謂先立其大者而小者不能奪; <br/> | 由是誠意正心以修其身, 則所謂先立其大者而小者不能奪; <br/> | ||
이것(敬)을 통해 誠意正心해 자신을 닦는 것이 이른바 '先立其大者而小者不能奪'<ref><맹자> <고자상> 15. 先立乎其大者,則其小者弗能奪也。</ref>이요, | 이것(敬)을 통해 誠意正心해 자신을 닦는 것이 이른바 '先立其大者而小者不能奪'<ref><맹자> <고자상> 15. 先立乎其大者,則其小者弗能奪也。</ref>이요, | ||
:新安陳氏曰: "先立其大者, 持敬以誠其意、正其心也; 小者不能奪, 百體從心君所令而身脩也." | :新安陳氏曰: "先立其大者, 持敬以誠其意、正其心也; 小者不能奪, 百體從心君所令而身脩也." | ||
− |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先立其大'라는 것은 경의 상태를 유지하여 그 뜻을 진실하게 하고 그 마음을 바로하는 것이며, '小者不能奪'이라는 것은 온 몸이 心이라는 군주가 명령한 바를 따라서 몸이 닦이는 것이다." |
由是齊家治國以及乎天下, 則所謂修已以安百姓, 篤恭而天下平. 是皆未始一日而離<sub>去聲</sub>乎敬也. 然則敬之一字, 豈非聖學始終之要也哉!” <br/> | 由是齊家治國以及乎天下, 則所謂修已以安百姓, 篤恭而天下平. 是皆未始一日而離<sub>去聲</sub>乎敬也. 然則敬之一字, 豈非聖學始終之要也哉!” <br/> | ||
이것(敬)을 통해 齊家治國해 천하에 이르는 것이 이른바 '修已以安百姓'<ref><논어> <헌문> 45. 脩己以安百姓,堯舜其猶病諸!</ref>, '篤恭而天下平'<ref><중용장구> 33장. 是故君子篤恭而天下平。</ref>이니, 이 모두는 하루도 敬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그렇다면 敬 한 자가 어찌 성인되는 학문(聖學)의 처음부터 끝까지 [적용되는] 키워드가 아니겠는가!"<br/> | 이것(敬)을 통해 齊家治國해 천하에 이르는 것이 이른바 '修已以安百姓'<ref><논어> <헌문> 45. 脩己以安百姓,堯舜其猶病諸!</ref>, '篤恭而天下平'<ref><중용장구> 33장. 是故君子篤恭而天下平。</ref>이니, 이 모두는 하루도 敬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그렇다면 敬 한 자가 어찌 성인되는 학문(聖學)의 처음부터 끝까지 [적용되는] 키워드가 아니겠는가!"<br/> | ||
:朱子曰: "敬者, 始終之要, 未知則敬以知之; 巳知則敬以守之. 若不敬則其心顛倒昏昧, 而不自知, 未知者, 非敬無以知; 巳知者, 非敬無所守." | :朱子曰: "敬者, 始終之要, 未知則敬以知之; 巳知則敬以守之. 若不敬則其心顛倒昏昧, 而不自知, 未知者, 非敬無以知; 巳知者, 非敬無所守." | ||
− |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敬이라는 것은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핵심이니, 아직 알지 못한 것이 있다면 敬해서 그것을 알아가고, 이미 알았다면 敬해서 그것을 지켜야 한다. 만약 敬하지 않은다면 마음이 전도되고 어두워져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게 되니,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은 敬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이미 안 것은 敬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 |
:○陳氏曰: "心之為物, 虚靈知覺, 所以為一身之主宰也. 身無此以為之主宰, 則四肢百體皆無所管攝矣. 然所以為心者, 又當由我有以主宰之, 我若何而主宰之乎? 所謂敬者, 是又一心之主宰也." | :○陳氏曰: "心之為物, 虚靈知覺, 所以為一身之主宰也. 身無此以為之主宰, 則四肢百體皆無所管攝矣. 然所以為心者, 又當由我有以主宰之, 我若何而主宰之乎? 所謂敬者, 是又一心之主宰也." | ||
− | :진씨가 말했다 | + | :진씨가 말했다: "마음이라는 것은 허령한 지각이라서 한 몸의 주재가 된다. 몸이 이것을 주재로 삼지 않으면 온몸의 기관 모두를 관장하는 것이 없게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마땅히 나를 통해 주재돼야 하니, 나는 어떻게 그것을 주재하나? 이른바 敬이라는 것이 다시 마음의 주재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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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삼강령·팔조목 | ||
曰: “然則此篇所謂‘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者, 亦可得而聞其說之詳乎?” <br/> | 曰: “然則此篇所謂‘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者, 亦可得而聞其說之詳乎?”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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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씨가 말했다: "'천도'는 理이고 '음양오행'은 氣이다. 합해서 말하면 氣는 곧 理이니 '一隂一陽之謂道'<ref><주역> <계사상> 5. 一陰一陽之謂道,繼之者善也,成之者性也。</ref>가 이것이다. 나눠 말하면 理는 그 자체로 理이고, 氣는 그 자체로 氣이니 '形而上下'<ref><주역> <계사상> 12. 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ref>가 이것이다." | :황씨가 말했다: "'천도'는 理이고 '음양오행'은 氣이다. 합해서 말하면 氣는 곧 理이니 '一隂一陽之謂道'<ref><주역> <계사상> 5. 一陰一陽之謂道,繼之者善也,成之者性也。</ref>가 이것이다. 나눠 말하면 理는 그 자체로 理이고, 氣는 그 자체로 氣이니 '形而上下'<ref><주역> <계사상> 12. 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ref>가 이것이다." | ||
:○未有五行, 只得喚做隂陽; 既有五行, 則隂陽在五行之中矣.<br/> | :○未有五行, 只得喚做隂陽; 既有五行, 則隂陽在五行之中矣.<br/> | ||
− | :아직 오행이 있지 않을 때에는 음양이라고 부를 수 있을 | + | :아직 오행이 있지 않을 때에는 단지 음양이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다. 오행이 있고 나면 음양은 오행 가운데 있다. |
而所謂陰陽五行者, 又必有是理而後有是氣; 及其生物, 則又必因是氣之聚而後有是形. 故人物之生必得是理, 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 然後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周子所謂‘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者, 正謂是也.<br/> | 而所謂陰陽五行者, 又必有是理而後有是氣; 及其生物, 則又必因是氣之聚而後有是形. 故人物之生必得是理, 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 然後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周子所謂‘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者, 正謂是也.<br/> | ||
− | 이른바 '음양오행'이라는 것은 다시 반드시 理가 있은 뒤에 氣가 | + | 이른바 '음양오행'이라는 것은 다시 반드시 理가 있은 뒤에 氣가 있고, 만물을 낳음에 이르러서는 다시 반드시 氣의 응취에 기인해 形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이 태어남에 반드시 理를 얻은 연후에 健順·仁義禮智와 같은 性이 될 수 있고, 반드시 氣를 얻은 연후에 魂魄·五臟·百骸와 같은 身이 될 수 있다. 周子께서 ‘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ref><[[태극도설]]></ref>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
− | :問: "必有是理然後有是氣, 是如何?" 朱子曰: "此本無先後之可言. 然必欲推其氣之所從來, 則須說先有是理. 然理又非别為一物, 即存乎是氣之中. 無是氣, | + | :問: "必有是理然後有是氣, 是如何?" 朱子曰: "此本無先後之可言. 然必欲推其氣之所從來, 則須說先有是理. 然理又非别為一物, 即存乎是氣之中. 無是氣, 則是理亦無掛搭<ref><한어대사전> 2. 比喻着落、依據。</ref>處. 氣則為金木水火, 理則為仁義禮智. |
− | :물었다. "반드시 이 理가 있은 이후에 氣가 | + | :물었다. "'반드시 이 理가 있은 이후에 氣가 있다'고 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본래 말할 만한 선후가 없다. 그러나 굳이 氣의 유래를 추론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理가 먼저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理가 다시 별도로 하나의 사물인 것이 아니니, 氣 가운데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氣가 없다면 理 또한 안착할 곳이 없다. 氣는 金·木·水·火가 되고 理는 인·의·예·지가 된다." |
:○理未嘗離乎氣, 然豈無先後? 理無形, 氣便粗有查滓. | :○理未嘗離乎氣, 然豈無先後? 理無形, 氣便粗有查滓. | ||
− | : | + | :理는 일찍이 氣와 떨어진 적이 없지만, 어찌 선후가 없겠는가? 理에는 형체가 없지만 氣는 거칠게 찌꺼기 [같은 것이] 있다. |
:○就原頭定體上說, 則未分五行時, 只謂之隂陽; 未分五性時, 只謂之健順. 及分而言之, 則陽為木火, 隂為金水, 健為仁禮, 順為智義. | :○就原頭定體上說, 則未分五行時, 只謂之隂陽; 未分五性時, 只謂之健順. 及分而言之, 則陽為木火, 隂為金水, 健為仁禮, 順為智義. | ||
− | : | + | :근원적 상태(原頭定體)에 대해 말한다면, 아직 오행으로 나눠지지 않은 때에는 다만 隂·陽이라 말하고, 아직 오성으로 나눠지지 않은 때에는 다만 健·順이라고 말한다. [오행과 오성으로] 나눠지는 경우에 대해 말하면, 陽은 木·火가 되고 隂은 金·水가 되며, 健은 仁·禮가 되고 順은 智·義가 된다. |
:○問隂陽五行健順五常之性. 曰: "健是稟得那陽之氣; 順是稟得那隂之氣; 五常是稟得五行之理. 人物皆稟得健順五常之性. | :○問隂陽五行健順五常之性. 曰: "健是稟得那陽之氣; 順是稟得那隂之氣; 五常是稟得五行之理. 人物皆稟得健順五常之性. | ||
− | :隂陽·五行·健順·五常의 性에 대해 | + | :隂陽·五行·健順·五常의 性에 대해 물었다. 말씀하셨다: "健은 저 陽의 氣를 품수받은 것이고, 順은 저 隂의 氣를 품수받은 것이며, 五常은 五行의 理를 품수받은 것이다. 사람과 만물은 모두 健順·五常의 性을 품수받는다." |
:○天地之間有理有氣. 理也者, 形而上之道也, 生物之本也; 氣也者, 形而下之器也, 生物之具也. 故人物之生, 必稟此理, 然後有性; 必稟此氣, 然後有形. 其性其形, 雖不外乎一身, 然道器之間, 分際甚明, 不可亂也. | :○天地之間有理有氣. 理也者, 形而上之道也, 生物之本也; 氣也者, 形而下之器也, 生物之具也. 故人物之生, 必稟此理, 然後有性; 必稟此氣, 然後有形. 其性其形, 雖不外乎一身, 然道器之間, 分際甚明, 不可亂也. | ||
− | : | + | :천지 사이에 理와 氣가 있으니, 理라는 것은 형이상의 도이니 만물을 낳는 근본이고, 氣라는 것은 형이하의 기물(器)이니 만물을 낳는 도구(具)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이 생겨남에 반드시 理를 품수받은 이후에 性이 있게 되고, 반드시 이 氣를 품수받은 이후에 형체가 있게 된다. 이 性과 형체는 비록 한 몸을 벗어나지 않지만, 道와 器 사이에는 구분이 매우 명확하여 [서로] 어지럽힐 수 없다. |
− | :○北溪陳氏曰: " | + | :○北溪陳氏曰: "人始於氣感則得魂為先, 既而體凝焉則魄次之. 魂主乎動, 所以行乎此身之中, 隨所貫而無不生者也; 魄主乎静, 所以實乎此身之中, 隨所注<ref><한어대사전> 【貫注】 1. 貫穿;貫通。▶ 《參同契》卷上“須以造化, 精氣乃舒” 宋 朱熹 考异: “此時陰陽對待, 分為二物, 莫不含情互結, 兩相貪戀, 交通貫注, 而後化生萬物, 以舒展向來自具之精氣。” </ref>而無不定者也. |
− | : | + | :북계 진씨가 말했다: "사람이 처음 기를 感하면 魂을 먼저 얻고, 이어서 육체가 응결되면 魄을 그 다음으로 [얻는다]. 魂은 動을 주로하기 때문에 몸 안에서 행함에 관통함(貫)에 따라 낳지 않는 것이 없고, 魄은 静을 주로하기 때문에 몸 안을 채움에 관통함(注)에 따라 안정시키기 않음이 없다." |
− | :○節齋蔡氏曰: "先有理後有氣者, 形而上為道, 形而下為器之謂也; 有則俱有者, 道即器之謂也. 盖不分先後, 則理氣不明; 不合理氣, 則判為二物, | + | :○節齋蔡氏曰: "先有理後有氣者, 形而上為道, 形而下為器之謂也; 有則俱有者, 道即器之謂也. 盖不分先後, 則理氣不明; 不合理氣, 則判為二物, 如性之與情未發已發, 自有先後, 固不可道性情同時也. 然情之本實具於性, 非先有此性而後别生一情, 是有此性即有此情也. |
− | : | + | :절제 채씨가 말했다: "'먼저 理가 있은 후에 氣가 있다'는 것은 형이상자가 道가 되고 형이하자가 器가 된다는 말이고, '[理가] 있으면 [氣를] 갖춘다'는 것은 '道가 器에 즉한다'는 말이다. 대개 선후를 나누지 않으면 理와 氣[의 차이가] 밝혀지지 않고, 理와 氣를 합하지 않으면 [理와 氣가] 별개의 것이 되니, 마치 性과 情은 未發과 已發의 상태로 자연히 선후가 있어서 진실로 性과 情이 동시에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情은 본래 性에 실로 갖추어져 있어서 性이 먼저 존재한 연후에 따로 情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性이 있으면 곧 이 情이 있게 되는 것과 같다." |
− | :○東窻李氏曰: "天之運五行, 其實隂陽而已; 人之性五常, | + | :○東窻李氏曰: "天之運五行, 其實隂陽而已; 人之性五常, 其實健順而已. 仁之油然生意不可遏, 禮之粲然明盛不可亂, 健之為也; 義不拂乎可否之宜, 智不外乎是非之别, 順之為也. 若夫信, 則體是理而不易者, 健也; 循是理而不違者, 順也. |
− | : | + | :동창 이씨가 말했다: "하늘이 五行을 운행함에 그 실질은 隂·陽일 뿐이고, 사람이 五常을 性으로 함에 그 실질은 健·順일 뿐이다. 仁의 유연한 生意를 막을 수 없고 禮의 찬연하고 성대함을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은 健이 행한 것이고, 義가 可·否의 마땅함에서 벗어나지 않음과 智가 是·非의 구별에서 벗어나지 않음은 順이 행한 것이다. 信의 경우는, 理를 체득하여 바뀌지 않는 것이 健이고 理를 따라서 거스르지 않는 것이 順이다." |
− | :○玉溪盧氏曰: " | + | :○玉溪盧氏曰: "魂, 陽之靈; 魄, 隂之靈; 五臟, 五行之質<ref><한어대사전>4. 形體;外貌。 </ref>; 百骸, 萬物之象也; 眞, 以理言而理不雜氣; 精, 以氣言而氣不離理. 妙者, 理氣之莫測; 合者, 理氣之無間; 凝則有是形而各一其性矣. |
− |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魂은 陽의 영이고 魄은 隂의 영이며, 오장은 오행의 형체이고 百骸은 만물의 형체이다. 眞은 理로 말하여 理가 氣와 섞이지 않는 것이고 精은 氣로 말하여 氣가 理와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妙라는 것은 理와 氣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合이라는 것은 理·氣에 간극이 없어서, 응결되면 형체가 있고 각각 하나의 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周子之言見<太極圖說> | :○周子之言見<太極圖說> | ||
:주돈이의 말은 <[[태극도설]]>에 보인다. | :주돈이의 말은 <[[태극도설]]>에 보인다. | ||
然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sub>先則反</sub>者爲物, 是以或貴或賤而不能齊也.<br/> | 然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sub>先則反</sub>者爲物, 是以或貴或賤而不能齊也.<br/> | ||
− | 그러나 理로 말한다면 만물은 같은 근원이니 진실로 사람과 | + | 그러나 理로 말한다면 만물은 같은 근원이니 진실로 사람과 사물·귀함과 천함의 다름이 없고, 氣로 말한다면 그 바르고 통한 것을 얻은 것이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은 것은 사물이 되기 때문에 어떤 것은 귀하고 어떤 것은 천하여 같을 수가 없다. |
:朱子曰: "以理言之, 則無不全; 以氣言之, 則不能無偏." | :朱子曰: "以理言之, 則無不全; 以氣言之, 則不能無偏." | ||
:주자가 말했다. "理로 말한다면 온전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氣로 말한다면 치우침이 없을 수 없다." | :주자가 말했다. "理로 말한다면 온전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氣로 말한다면 치우침이 없을 수 없다." | ||
:○人得其氣之正, 故是理通而無所塞; 物得其氣之偏, 故是理塞而無所通. 且如人頭圓象天, 足方象地, 平正端直, 以其受天地之正氣, 所以識道理有知識; 物受天地之偏氣, 所以禽獸横生, 草木頭生向下, 尾反向上, 物之間有知者, 不過只通得一路, 如烏之知孝, 獺之知祭, 犬但能守禦, 牛但能耕而已. 人則無不知、無不能, 人所以與物異, 所争者此耳. | :○人得其氣之正, 故是理通而無所塞; 物得其氣之偏, 故是理塞而無所通. 且如人頭圓象天, 足方象地, 平正端直, 以其受天地之正氣, 所以識道理有知識; 物受天地之偏氣, 所以禽獸横生, 草木頭生向下, 尾反向上, 物之間有知者, 不過只通得一路, 如烏之知孝, 獺之知祭, 犬但能守禦, 牛但能耕而已. 人則無不知、無不能, 人所以與物異, 所争者此耳. | ||
− | :사람은 그 氣 중에 | + | :사람은 그 氣 중에 바른 것을 얻었기 때문에 理가 통해 막힘이 없지만, 사물은 氣 중에 치우친 것을 얻었기 때문에 理가 막혀 통하는 바가 없다. 예를 들어 사람의 머리 모양이 둥근 것은 하늘은 본뜬 것이고, 발이 네모난 것은 땅을 본 뜬 것이며, 평평하고 바르고 단정하고 곧으며, 천지의 바른 기를 얻었기 때문에 도리를 인식하고 지식이 있는 것이다. 사물은 천지의 치우친 기를 받았기 때문에 금수는 横生하고, 초목은 머리가 날 때 아래를 향하고 꼬리는 도리어 위를 향한다. [또] 사물들 중에 지각이 있는 것은 다만 한 갈래만 통하는 데 불과하니, 예를 들어 까마귀는 孝를 알고 수달이 제사 지낼 줄 알며, 개는 지킬 수만 있고 소는 밭갈 수만 있을 뿐이다. 사람이라면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할 수 없는 것이 없으니, 사람이 사물과 다른 점은 그 차이가 이것일 뿐이다. |
− | :○論萬物之一原, 則理同而氣異; 觀萬物之異體, 則氣猶相近而理絶不同. 方賦與萬物之初, 天命流行只是一般, 故理同; 二五之氣有清濁純駁, 故氣異. | + | :○論萬物之一原, 則理同而氣異; 觀萬物之異體, 則氣猶相近而理絶不同. 方賦與萬物之初, 天命流行只是一般, 故理同; 二五之氣有清濁純駁, 故氣異. 萬物已得之後, 雖有清濁純駁之不同, 而同此二五之氣, 故氣相近; 以其昏明開塞之甚逺, 故理絶不同. 氣相近, 如知寒暖、識飢飽、好生惡死、趨利避害, 人與物都一般; 理不同, 如蜂蟻之君臣, 只是他義上有一㸃子明; 虎狼之父子, 只是他仁上有一㸃子明, 其他更推不去. |
− | :만물의 근원이 같음을 논한다면 理는 같고 氣는 다르며, | + | :만물의 근원이 같음을 논한다면 理는 같고 氣는 다르며, 만물의 형체가 다름을 본다면 氣는 오히려 서로 가깝지만 理는 절대로 같지 않다. 만물에게 부여한 처음에는 천명의 유행은 단지 똑같기 때문에 理는 같지만, 음양오행의 氣에는 清濁純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氣는 다르다. 만물이 이미 얻고 난 후에는 비록 清濁純駁의 차이가 있지만 이 음양오행의 기는 같기 때문에 氣는 서로 가깝고, 그 어둡거나 밝고 열리거나 막힘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理는 전혀 다른 것이다. '氣가 서로 가까운 것'은 마치 춥고 따뜻함을 알고 배고프고 배부름을 인지하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며 이익을 쫓고 해악을 피하는 것과 같으니 사람과 만물이 모두 같은 것이고, '理가 같지 않은 것'은 마치 벌과 개미의 군신관계가 다만 '義'에 대해서 약간 밝은 부분이 있고, 호랑이와 이리의 부자관계가 다만 '仁'에 대해서 약간 밝은 것과 같은 것이니, 이밖으로는 더 미룰 수 없다.(벌과 개미는 義에만 밝고, 호랑이와 이리는 仁에만 밝다.) |
:○新安倪氏曰: "理雖不雜乎氣, 而亦不離乎氣. 以不雜者言之, 則理同而氣異; 以不離者言之, 則得氣之正者理亦全, 得氣之偏者理亦不全矣. 朱子後一條, 與或問之說略有不同者, 而亦未嘗不互相發也. | :○新安倪氏曰: "理雖不雜乎氣, 而亦不離乎氣. 以不雜者言之, 則理同而氣異; 以不離者言之, 則得氣之正者理亦全, 得氣之偏者理亦不全矣. 朱子後一條, 與或問之說略有不同者, 而亦未嘗不互相發也. | ||
− | : | + | :신안 예씨가 말했다: "理는 비록 氣와 섞이지 못하지만 氣와 떨어지지도 못한다. 섞이지 못하는 점으로 말하면 理는 동일하고 氣는 다르며,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점으로 말하면 氣 중에 치우친 것을 얻으면 리 또한 온전하지 못하다. 주자의 이후 한 조목이 [여기] <혹문>의 설명과 약간 같지 않은 것이 있지만, 그래도 서로 발명하지 않은 적이 없다." |
彼賤而爲物者, 旣梏於形氣之偏塞, 而無以充其本體之全矣. 唯人之生乃得其氣之正且通者, 而其性爲最貴, 故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br/> | 彼賤而爲物者, 旣梏於形氣之偏塞, 而無以充其本體之全矣. 唯人之生乃得其氣之正且通者, 而其性爲最貴, 故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br/> | ||
− | + | 저 천하여 사물이 된 것은 이미 치우치고 막힌 형기에 구속되어 그 본체의 온전함을 확충할 수 없다. 오직 사람만이 태어남에 곧 바르고 통한 기를 얻어 性이 가장 귀중하게 되었으므로 마음이 허령하고 막힘없이 훤해 만리를 모두 갖추고 있다. | |
− | :北溪陳氏曰: "此八字, 只是再詳'虛靈不昧, 以具衆理' | + | :北溪陳氏曰: "此八字, 只是再詳'虛靈不昧, 以具衆理'之意. 虛靈洞徹, 盖理與氣合而有此妙用耳, 非可專指氣. 如心恙底人亦有氣存, 何故昏迷顛錯, 無此虚靈洞徹耶?" |
− | : | + | :북계 진씨가 말했다: "이 여덟 자(虛靈洞徹, 萬理咸備)는 다만 '虛靈不昧, 以具衆理'<ref><대학장구> 경1장 주석. 明德者,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以具眾理而應萬事者也。</ref>의 의미를 다시 상세히 밝힌 것이다. '虛靈洞徹'은 대개 理와 氣를 합해 이러한 묘용이 있는 것이지 오직 氣만 가리킬 수는 없다. 만약 마음이 병든 사람에게도 [좋은] 氣가 보존되어 있다면, 무엇 때문에 혼미하고 전도되어 이러한 虚靈洞徹이 없겠는가?" |
蓋其所以異於禽獸者正在於此, 而其所以可爲堯舜而能參天地以贊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 然其通也或不能無淸濁之異, 其正也或不能無美惡之殊, 故其所賦之質, 淸者智而濁者愚, 美者賢而惡者不肖, 又有不能同者. <br/> | 蓋其所以異於禽獸者正在於此, 而其所以可爲堯舜而能參天地以贊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 然其通也或不能無淸濁之異, 其正也或不能無美惡之殊, 故其所賦之質, 淸者智而濁者愚, 美者賢而惡者不肖, 又有不能同者. <br/> | ||
− | 대개 | + | 대개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고, 사람이 요순이 될 수 있고 천지에 참여하여 화육함을 도울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明德이다. 그러나 사람의 통한 [기]에도 간혹 맑고 탁한 차이가 없을 수 없고, 바른 [기에도] 간혹 아름답거나 추악한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부여받은 기질이 맑은 사람은 지혜롭고 탁한 사람은 어리석으며 아름다운 사람은 어질고 나쁜사람은 불초하니, [사람과 사물 사이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도] 다시 같을 수 없는 점이 있다. |
:朱子曰: "人雖皆是天地之正氣, 但衮來衮去, 便有昏明厚薄之異. 盖氣是有形之物, 纔是有形之物, 便自有美惡也." | :朱子曰: "人雖皆是天地之正氣, 但衮來衮去, 便有昏明厚薄之異. 盖氣是有形之物, 纔是有形之物, 便自有美惡也." | ||
− |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록 천지의 바른 기를 가지고 있지만, 다만 이리저리 뒤섞여 昏明厚薄의 차이가 있다. 대개 氣는 형체가 있는 것이니, 형체가 있는 것인 이상 절로 아름답거나 추악한 [차이가] 있다." |
:○問: "智愚賢不肖是所稟之氣有清濁美惡之不同, 不歸於所稟, 而歸於所賦, 何邪?" 曰: "賦如俗語云分俵均敷之意." | :○問: "智愚賢不肖是所稟之氣有清濁美惡之不同, 不歸於所稟, 而歸於所賦, 何邪?" 曰: "賦如俗語云分俵均敷之意." | ||
− | :물었다 | + | :물었다: "智·愚·賢·不肖함은 품부받은 氣에 清濁美惡의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그 원인을] '품수받은 것(所稟)'으로 환원하지 않고 '부여받은 것(所賦)'으로 환원하신 것은 어째서 입니까?" 말씀하셨다: "'賦'는 세간에서 ''''고르게''' 나눠준다(分俵均敷)'고 말하는 뜻과 같다." |
:○問: "有人聰明通曉, 是稟氣之清矣. 然却所為過差, 或流於小人之歸; 又有為人賢而不甚聰明通曉, 何也?" 曰: "<或問>中所謂知愚賢不肖之殊, 是也. 盖其所賦之質, 便有此四樣, 聰明曉了者, 智也; 而或不賢, 便是稟賦中欠了清和温恭之徳; 又有人極温和, 而不甚曉事, 便是賢而不智. 為學, 便是要克化教此等氣質, 令恰好耳." | :○問: "有人聰明通曉, 是稟氣之清矣. 然却所為過差, 或流於小人之歸; 又有為人賢而不甚聰明通曉, 何也?" 曰: "<或問>中所謂知愚賢不肖之殊, 是也. 盖其所賦之質, 便有此四樣, 聰明曉了者, 智也; 而或不賢, 便是稟賦中欠了清和温恭之徳; 又有人極温和, 而不甚曉事, 便是賢而不智. 為學, 便是要克化教此等氣質, 令恰好耳." | ||
− | :물었다 | + | :물었다: "어떤 사람이 총명하고 훤히 다 아는 것은 품부받은 氣가 맑기 때문인데, 도리어 잘못을 저질러 혹 소인이라는 귀결지로 흘러가 버리기도 하고, 또 사람됨이 어진데 썩 총명하거나 훤히 알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말씀하셨다: "<或問>에서 知·愚·賢·不肖의 차이를 말한 것이 이것이다. 대개 부여받은 자질에는 이 네 가지 양상이 있는데, 총명하고 훤히 아는 사람은 지혜롭지만(智) 간혹 어질지 못한 것(不賢)은 품부받은 것 중에 온화(清和·温恭)한 덕에 흠결이 있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매우 온화한데 썩 총명하지 못한 것은 어질면서도 지혜롭지 못한 것(賢而不智)이다. 학문함이란 바로 이러한 기질을 교화시켜서 적절하게 만드려고 하는 것이다." |
:○有是理, 而後有是氣; 有是氣, 必有是理. 但稟氣之清者為聖為賢, 此如寶珠在清冷水中; 稟氣之濁者為愚不肖, 此如寶珠在濁水中. 所謂明明徳者, 是就濁水中揩拭此珠也. 物亦有是理, 又如寶珠在至汚處. 然其所稟有些明處, 就上面便自不昩, 如虎狼之父子, 蜂蟻之君臣, 是也." | :○有是理, 而後有是氣; 有是氣, 必有是理. 但稟氣之清者為聖為賢, 此如寶珠在清冷水中; 稟氣之濁者為愚不肖, 此如寶珠在濁水中. 所謂明明徳者, 是就濁水中揩拭此珠也. 物亦有是理, 又如寶珠在至汚處. 然其所稟有些明處, 就上面便自不昩, 如虎狼之父子, 蜂蟻之君臣, 是也." | ||
− | : | + | :理가 있은 이후에 氣가 있으니, 氣가 있으면 반드시 理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품부받은 기질이 맑은 사람이 성현이 되는 것은 마치 보주가 맑은 물 안에 있는 것과 같고, 품부받은 기질이 탁한 사람이 어리석고 불초하게 되는 것은 마치 보주가 탁한 물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이른바 '明明徳'이라는 것은 바로 탁한 물에서 이 보주를 씻는 것이다. 사물에도 理가 있지만, 또 마치 보주가 매우 더러운 곳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품부받은 바에 조금이나마 밝은 부분이 있어서 그 위는 어둡지 없으니, 마치 호랑이나 이리의 부자관계나 벌과 개미의 군신관계 같은 것이 이것이다. |
:○黄氏曰: "美惡是有生之初便分了, 非以性言, 是以氣言. 譬如玉之與石, 則美惡固分; 而玉之中, 又有美惡分焉." | :○黄氏曰: "美惡是有生之初便分了, 非以性言, 是以氣言. 譬如玉之與石, 則美惡固分; 而玉之中, 又有美惡分焉." | ||
− | :황씨가 말했다 | + | :황씨가 말했다: "아름답거나 추악한 차이(美惡)는 생겨난 처음에 나눠지는데, 性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氣로 말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옥과 돌은 美惡이 진실로 구분되지만, 옥 가운데에서도 美惡이 나눠지는 경우와 같다." |
:○格庵趙氏曰: "通塞偏正, 判人物之大分而言; 其清濁美惡, 又就人中分别." | :○格庵趙氏曰: "通塞偏正, 判人物之大分而言; 其清濁美惡, 又就人中分别." | ||
− | : | + | :격암 조씨가 말했다: "'通塞偏正'은 사람과 사물을 나누는 큰 분류(大分)를 말한 것이고, '清濁美惡은' 사람 내에서 분별한 것이다." |
必其上智大賢之資乃能全其本體, 而無少不明, 其有不及乎此, 則其所謂明德者已不能無蔽而失其全矣. 况乎又以氣質有蔽之心, 接乎事物無窮之變, 則其目之欲色, 耳. 之欲聲, 口之欲味, 鼻之欲臭, 四肢之欲安佚, 所以害乎其德者, 又豈可勝<sub>平聲</sub>言也哉! 二者相因, 反覆深固, 是以此德之明, 日益昏昧, 而此心之靈, 其所知者不過情欲利害之私而已. 是則雖曰: 有人之形, 而實何以遠於禽獸, 雖曰: 可以爲堯舜而參天地, 而亦不能有以自充矣. 然而本明之體, 得之於天, 終有不可得而昧者, 是以雖其昏蔽之極, 而介然之頃<sub>介音甲倐然之頃也</sub>一有覺焉, 則卽此空隙之中, 而其本體已洞然矣.<br/> | 必其上智大賢之資乃能全其本體, 而無少不明, 其有不及乎此, 則其所謂明德者已不能無蔽而失其全矣. 况乎又以氣質有蔽之心, 接乎事物無窮之變, 則其目之欲色, 耳. 之欲聲, 口之欲味, 鼻之欲臭, 四肢之欲安佚, 所以害乎其德者, 又豈可勝<sub>平聲</sub>言也哉! 二者相因, 反覆深固, 是以此德之明, 日益昏昧, 而此心之靈, 其所知者不過情欲利害之私而已. 是則雖曰: 有人之形, 而實何以遠於禽獸, 雖曰: 可以爲堯舜而參天地, 而亦不能有以自充矣. 然而本明之體, 得之於天, 終有不可得而昧者, 是以雖其昏蔽之極, 而介然之頃<sub>介音甲倐然之頃也</sub>一有覺焉, 則卽此空隙之中, 而其本體已洞然矣.<br/> | ||
− | 반드시 | + | 반드시 上智·大賢의 자질이라야 그 본체를 온전히 할 수 있고 조금의 밝지 못함도 없을 수 있으니,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면 이른바 明德이라는 것이 이미 가려지지 않을 수 없어서 그 온전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게다가 더욱이 기질이 가린 마음으로 사물의 무궁한 변화를 만난다면, 여색을 바라는 눈과 아름다운 소리를 바라는 귀와 맛있는 것을 바라는 입과 향기를 바라는 코와 편안함을 바라는 몸이 그 덕(明德)을 해침을 또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가 서로 말미암아서 반복되어 더욱 견고해지니, 이 때문에 밝은 덕은 날마다 더욱 어두워지고 신령한 마음은 정욕·이해와 같은 사욕만 알 것이다. 이렇다면 비록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금수와 무엇이 다르겠으며, 비록' 요순이 될 수 있고 천지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 스스로 확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 밝은 것(明德)은 하늘로부터 얻은 것이라서 끝내 어두워질 수 없으니, 이 때문에 비록 지극히 가려지더라도 잠깐 사이에 하나라도 깨우친다면, 그 틈 사이로 본체가 이미 훤히 드러나 있을 것이다. |
− | :問: "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其本體已洞然矣, 須是就這些覺處, 便致知充廣將去." 朱子曰: "然. 如擊石之火只是些子, 纔引著, 便可以燎原. 若必欲等大覺了, | + | :問: "'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其本體已洞然矣', 須是就這些覺處, 便致知充廣將去." 朱子曰: "然. 如擊石之火只是些子, 纔引著, 便可以燎原. 若必欲等大覺了, 方去格物致知, 如何等得這般時節? 那箇覺是物格知至了, 大徹悟, 到恁地時, 事都了. 若是介然之覺, 一日之間, 其發也無時無數, 只要人識認得操持充養將去." |
− | :물었다 | + | :물었다: "'잠깐 사이에 하나라도 깨우침이 있다면, 그 틈 사이로 본체가 이미 훤히 드러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반드시 조금 깨우친 곳에서 앎을 지극히 하고 확충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부싯돌로 낸 불은 미미할 뿐이지만, 끌어다 붙이자마자 들판을 태워버릴 수도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반드시 크게 깨우치고 나서(大覺) 격물치지 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러한(大覺) 때를 기다리겠는가? 저 깨우침(大覺)은 [격물치지의 결과로] 物格知至해서 크게 깨우친 것이니, 이런 때에 이르면 일은 [이미] 다 이뤄진 것이다. 잠깐 사이의 깨우침이 드러나는 건 하루[같이 짧은 기간]에도 정해진 때나 횟수가 없으니, 다만 사람이 [이를] 인식하고 지켜서 확충해 나가야 할 뿐이다." |
− | 是以聖人施敎, 旣已養之於小學之中, 而復<sub>扶又反</sub>開之以大學之道. 其必先之以格物致知之說者, 所以使之卽其所養之中, 而因其所發, 以啓其明之之端也; 繼之以誠意·正心·修身之目者, 則又所以使之因其已明之端, 而反之於身, 以致其明之之實也. 夫<sub>音扶</sub>旣有以啓其明之之端, 而又有以致其明之之實, 則吾之所得於天而未嘗不明者, 豈不超然無有氣質物欲之累, 而復得其本體之全哉! 是則所謂明明德者, 而非有所作爲於性分<sub>去聲</sub>之外也. 然其所謂明德者, 又人人之所同得, 而非有我之得私也. 向也俱爲物欲之所蔽, 則其賢愚之分, 固無以大相遠者. 今吾旣幸有以自明矣,則視彼衆人之同得乎此而不能自明者, 方且甘心迷惑沒溺於卑汚<sub>音烏</sub>苟賤之中而不自知也, 豈不爲<sub>去聲</sub>之惻然而思有以救之哉! 故必推吾之所自明者以及之, 始於齊家, 中於治國, 而終及於平天下, 使彼有是明德而不能自明者, 亦皆有以自明, 而去<sub>上聲</sub>其舊染之汚焉, 是則所謂新民者, 而亦非有所付畀<sub>必至反</sub>增益之也. | + | 是以聖人施敎, 旣已養之於小學之中, 而復<sub>扶又反</sub>開之以大學之道. 其必先之以格物致知之說者, 所以使之卽其所養之中, 而因其所發, 以啓其明之之端也; 繼之以誠意·正心·修身之目者, 則又所以使之因其已明之端, 而反之於身, 以致其明之之實也. 夫<sub>音扶</sub>旣有以啓其明之之端, 而又有以致其明之之實, 則吾之所得於天而未嘗不明者, 豈不超然無有氣質物欲之累, 而復得其本體之全哉! 是則所謂明明德者, 而非有所作爲於性分<sub>去聲</sub>之外也. 然其所謂明德者, 又人人之所同得, 而非有我之得私也. 向也俱爲物欲之所蔽, 則其賢愚之分, 固無以大相遠者. 今吾旣幸有以自明矣, 則視彼衆人之同得乎此而不能自明者, 方且甘心迷惑沒溺於卑汚<sub>音烏</sub>苟賤之中而不自知也, 豈不爲<sub>去聲</sub>之惻然而思有以救之哉! 故必推吾之所自明者以及之, 始於齊家, 中於治國, 而終及於平天下, 使彼有是明德而不能自明者, 亦皆有以自明, 而去<sub>上聲</sub>其舊染之汚焉, 是則所謂新民者, 而亦非有所付畀<sub>必至反</sub>增益之也. |
− | 이 때문에 성인께서 | + | 이 때문에 성인께서 베푸신 가르침이란 소학에서 그들을 기르고 다시 대학의 道로 그들을 열어주는 것이다. 성인께서 반드시 격물치지의 설명을 우선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소학에서] 기르는 것에 나아가 [거기에서] 드러난 것을 통해 [명덕을] 밝히는 단서를 열게 하신 것이고, 誠意·正心·修身의 조목으로 격물치지를 이으신 것은 또한 그들로 하여금 이미 밝혀진 단서를 통해 자신에게 돌이켜 [명덕을] 밝히는 실질에 이루게 하신 것이다. 대저 이미 [명덕]을 밝히는 단서를 연 데다가 [명덕을] 밝히는 실질도 이뤘다면, 내가 하늘로부터 얻어 밝지 않은 적이 없던 것(명덕)이 어찌 초연히 기질과 물욕의 얽매임이 없이 다시 그 본체의 온전함을 회복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明明德'이라는 것이니, [명명덕은] 이렇다면 이른바 명명덕이라는 것은 성분 밖에서 작위하는 것이 아니다.<ref>혹은 '이것이 바로 이른바 명명덕이라는 것이니, 性分 밖에서 작위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다'</ref> 그러나 이른바 '명덕'이라는 것은 또한 사람마다 동일하게 얻은 것이지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모두 물욕에 의해 가려졌다면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賢愚)의 차이가 진실로 클 수 없을 것이지만, 지금 내가 다행히 스스로 [명덕을] 밝힌 이상, 이것(명덕)을 똑같이 얻고도 스스로 밝히지 못하는 저 사람들이 막 기꺼이 미혹되어 더럽고 구차한 곳에 빠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함을 본다면, 어찌 그들을 측은해 하며 그들을 구제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내가 스스로 밝힌 바를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쳐, 齊家에서 시작해서 治國을 거쳐 마침내 平天下에 이르러, 이 명덕을 가지고도 스스로 밝힐 수 없는 저 사람들로 하여금 역시 모두 스스로 밝혀서 구습의 오염된 더러움을 제거하게 해야 하니, 이렇다면 이른바 '新民'이라는 것 역시 주거나 더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
:玉溪盧氏曰: "非彼本無而我付畀之, 非彼本少而我増益之, 以其本體之明無不全也." | :玉溪盧氏曰: "非彼本無而我付畀之, 非彼本少而我増益之, 以其本體之明無不全也." | ||
− |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저들에게 본래부터 없기 때문에 내가 준 것도 아니고, 저들이 본래 조금만 가지고 있어서 내가 더해준 것이 아니니, 그 밝은 본체는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
− | 然德之在己而當明, 與其在民而當新者, 則又皆非人力之所爲 | + | 然德之在己而當明, 與其在民而當新者, 則又皆非人力之所爲; 而吾之所以明而新之者, 又非可以私意苟且而爲也. 是其所以得之於天而見<sub>形甸反</sub>於日用之間者, 固已莫不各有本然一定之則, <br/> |
− | 그러나 | + | 그러나 자신에게 있어서 마땅히 밝혀야 하는 德과 백성들에게 있어 마땅히 새롭게 해야할 것은 또한 모두 사람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밝히고 새롭게 하는 까닭 또한 사의로 구차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하늘로부터 얻어 일상생활에 드러나는 것에는 진실로 이미 각각 본연의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 없다. |
:西山眞氏曰: "則者, 法也. 天下之理, 皆天實為之, 莫不有一定之法, 非人力所可増損, 故曰則." | :西山眞氏曰: "則者, 法也. 天下之理, 皆天實為之, 莫不有一定之法, 非人力所可増損, 故曰則." | ||
− | : | + | :서산 진씨가 말했다: "'則'이라는 것은 법칙이다. 천하의 이치는 모두 하늘이 실로 행하는 것이니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 없고, 사람의 힘으로 더하고 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則'이라고 말한 것이다." |
:○玉溪盧氏曰: "至善, 乃太極之異名而明徳之本體. 得之於天而有本然一定之則者, 至善之體, 乃吾心體統之太極; 見於日用之間而各有本然一定之則者, 至善之用, 乃事事物物各具之太極也." | :○玉溪盧氏曰: "至善, 乃太極之異名而明徳之本體. 得之於天而有本然一定之則者, 至善之體, 乃吾心體統之太極; 見於日用之間而各有本然一定之則者, 至善之用, 乃事事物物各具之太極也." | ||
− |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至善'이란 바로 태극의 다른 이름이며 명덕이라는 본체이다.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연의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은 至善의 體이니 바로 내 마음의 體統이 되는 태극이요, '일상생활에 드러나는 것에는 각각 본연의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은 至善의 用이니, 이것이 바로 '사물마다 각각 갖추고 있는 태극'<ref> 『太極圖說』 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 “乾道成男, 坤道成女”, 二氣交感, 化生萬物. 萬物生生, 而變化無窮焉. <注> 蓋合而言之, 萬物統體一太極也; 分而言之, 一物各具一太極也.</ref>이다." |
− | 程子所謂‘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 + | 程子所謂‘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而『傳』<sub>去聲</sub>所謂君之仁·臣之敬·子之孝·父之慈·與人交之信, 乃其目之大者也. 衆人之心, 固莫不有是, 而或不能知, 學者雖或知之, 而亦鮮<sub>上聲</sub>能必至於是而不去, 此爲大學之敎者, 所以慮其理雖粗<sub>上聲略也</sub>復而有不純, 已雖粗克而有不盡, 且將無以盡夫<sub>音扶</sub>修己治人之道, 故必指是而言, 以爲明德·新民之標的也. 欲明德而新民者, 誠能求必至是而不容其少有過不及之差焉, 則其所以去<sub>上聲</sub>人欲而復天理者, 無毫髮之遺恨矣. |
+ | 정자께서 '지극히 정미한 의리에는 이름할 수 없는 점이 있기 때문에 우선 至善으로 지목한다'<ref><이정수언> 3-67. 子曰: "理義精微, 不可得而名言也, 姑以至善目之, 黙識, 可也."</ref> 고 하셨는데, <전>의 이른바 '君之仁·臣之敬·子之孝·父之慈·與人交之信'<ref><대학장구> 전3장. 為人君,止於仁;為人臣,止於敬;為人子,止於孝;為人父,止於慈;與國人交,止於信。</ref>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지선의) 조목 가운데 큰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진실로 이렇지 않음이 없으나 간혹 알지 못하기도 하고, 배우는 자가 비록 혹 이를 알더라도 [그 가운데] 반드시 이에 이르러 떠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무니, 이것이 <대학>의 가르침을 세운 자가 그 理가 비록 약간 회복되더라도 순수하지 않음이 있고 이미 비록 약간 극복했다하더라도 다하지 않음이 있어 장차 修己治人의 도를 다할 수 없음을 염려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것(至善)을 가리켜서 말해 至善을 明德·新民의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明德·新民하고 싶은 사람이 진실로 반드시 여기(至善)에 이르기를 바라 약간의 과불급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인욕을 없애고 천리를 회복하는 것에 조금의 여한도 없을 것이다. | ||
:朱子曰: "至善只是極好處, 十分端正恰好, 無一毫不是處, 無一毫不到處. 且如事君, 必當如舜之所以事堯, 而後喚做敬; 治民, 必當如堯之所以治民, 而後喚做仁. 不獨如此, 凡理皆有箇極好處." | :朱子曰: "至善只是極好處, 十分端正恰好, 無一毫不是處, 無一毫不到處. 且如事君, 必當如舜之所以事堯, 而後喚做敬; 治民, 必當如堯之所以治民, 而後喚做仁. 不獨如此, 凡理皆有箇極好處."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至善'은 그저 아주 좋은 것이니, 십분 단정하고 적절해 조금의 옳지 않음도 없고 조금의 주도하지 않음도 없는 것이다. 예를들어 군주를 섬기는 경우 반드시 舜이 군주를 섬겼던 것과 같이 한 이후에야 敬이라고 불러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경우 반드시 堯가 백성을 다스린 것과 같이 한 이후에야 仁이라고 불러야 한다. [지선은] 이와 같은 경우 뿐만 아니라 모든 이치에 모두 각각 지극히 좋은 것이 있는 것이다. | ||
:○陳氏曰: "所謂'姑以至善目之'者, 所以極形容其精微爾, 非謂精微之不為善而借此以形容之也." | :○陳氏曰: "所謂'姑以至善目之'者, 所以極形容其精微爾, 非謂精微之不為善而借此以形容之也." | ||
− | :○又曰: "自其大者言之, 如仁敬慈孝即君臣父子所當止之處; 自其小者言之, 如足容重, 手容恭,<ref><예기> <옥조> 足容重,手容恭,目容端,口容止,聲容靜,頭容直,氣容肅,立容德,色容莊,坐如尸,燕居告溫溫。</ref> | + | :진씨가 말했다: "이른바 '姑以至善目之'라는 것은 그 정미함을 지극히 형용한 것일 뿐이지, 정미함이 선하지 못해 이 말(지선)을 빌려 형용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 | :○又曰: "自其大者言之, 如仁敬慈孝即君臣父子所當止之處; 自其小者言之, 如足容重, 手容恭, 重與恭, 即手足所當止之處; 視思明, 聽思聰, 聰與明, 亦視聽所當止之處." | ||
+ | :또 말했다: "큰 것으로부터 말하면 仁·敬·慈·孝가 곧 군신·부자관계에서 마땅히 멈춰야 할 곳임과 같고, 작은 것으로부터 말하면 마치 '발 모양은 무겁게 하고 손 모양은 공손하게 한다'<ref><예기> <옥조> 足容重,手容恭,目容端,口容止,聲容靜,頭容直,氣容肅,立容德,色容莊,坐如尸,燕居告溫溫。</ref>에서 무겁게 하고 공경하게 함이 곧 손과 발이 마땅히 그쳐야하는 곳이며, '볼 때는 밝음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귀밝기를 생각한다'<ref><논어> <계씨> 10. 孔子曰:「君子有九思:視思明,聽思聰,色思溫,貌思恭,言思忠,事思敬,疑思問,忿思難,見得思義。」</ref>에서 귀밝음과 밝음은 또한 보고 들음이 마땅히 그쳐야 하는 곳인 것과 같다." | ||
− | 大抵『大學』一篇之指, 總而言之, 不出乎八事, 而八事之要, 總而言之, 又不出乎此三者, 此愚所以斷<sub>都玩反</sub>然以爲『大學』之綱領而無疑也. 然自孟子沒而道學不得其傳, | + | 大抵『大學』一篇之指, 總而言之, 不出乎八事, 而八事之要, 總而言之, 又不出乎此三者, 此愚所以斷<sub>都玩反</sub>然以爲『大學』之綱領而無疑也. 然自孟子沒而道學不得其傳, 世之君子各以其意之所便者爲學. 於是乃有不務明其明德, 而徒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者; 又有愛身獨善, 自謂足以明其明德, 而不屑乎新民者; 又有畧知二者之當務, 顧乃安於小成, 狃<sub>女九反</sub>於近利,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是皆不考乎此篇之過, 其能成己成物而不謬者鮮<sub>上聲</sub>矣.<br/> |
− | :朱子曰: "不務明其明徳而以政教法度為足以新民, 如管仲之徒便是; 自謂能明其明徳而不屑於新民, 如佛老便是; 略知明徳新民而不求止於至善, 如王通便是. | + | 대저 『대학』 한 편의 요지를 통틀어 말한다면 이 팔조목을 벗어나지 않으며, 이 팔조목의 요체를 통틀어 말한다면 또한 이 삼강령을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단호하게 [삼강령과 팔조목을] 『대학』의 강령이라고 여기고 의심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맹자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도학이 전해지지 못해 세상의 군자들이 각각 자기 뜻이 편한 바를 학문으로 삼았다. 이에 곧 자신의 明德을 밝히는 데 힘쓰지 않고 그저 정교와 법도가 新民하기 충분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었고, 또 자신을 아끼고 홀로 선하게 해서 스스로 '내 明德을 밝힐 수 있다'고 여기면서 '新民'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으며, 또 대략 이 두 가지(明德·新民)에 마땅히 힘써야 함을 알지만 도리어 이내 작은 성공에 안주하고 가까운 이익만 탐내서 '止於至善'의 소재를 구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이 모두는 이 편(<대학>)을 상고하지 않은 잘못이니, 자신을 이루고 사물을 이루며 잘못하지 않을 수 있는 자가 드물다. |
+ | :朱子曰: "不務明其明徳而以政教法度為足以新民, 如管仲之徒便是; 自謂能明其明徳而不屑於新民, 如佛老便是; 略知明徳新民而不求止於至善, 如王通便是. 看他於己分上亦甚脩飾, 其論為治, 本末亦有條理, 甚有志於斯世, 只是規模淺窄, 不曽就本原上着工, 便做不徹. 須是無所不用其極, 方是. 古之聖賢明明徳, 便欲無一毫私欲; 新民, 便欲人於事事物物上皆是當也."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의 明徳을 밝히는데 힘쓰지 않고 정교와 법도가 新民하기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은 관중과 같은 무리가 이에 해당하고, '스스로 明徳을 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新民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불교·도가와 같은 자들이 이에 해당하며, '대략 明徳·新民해야 함을 알지만 止於至善을 구하지 않는 것'은 왕통과 같은 자가 이에 해당한다. 그(왕통)를 보면, 자기 본분상에서 매우 잘 닦았고, 그가 다스림에 대해서 논한 것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시 조리가 있었으며, 이 세상에 심히 뜻을 두긴 했지만, 다만 규모가 너무 작아 일찍이 본원상에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저하지 못하였다. 모름지기 그 지극함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 비로소 옳다. 옛날의 성현들의 明明徳은 터럭만큼의 작은 사욕도 없고자 하셨고, 新民은 사람들이 사사물물마다 모두 옳게 하고자 하셨다." | ||
:○玉溪盧氏曰: "成己謂明徳; 成物謂新民; 不止至善, 故'不謬者鮮.'" | :○玉溪盧氏曰: "成己謂明徳; 成物謂新民; 不止至善, 故'不謬者鮮.'"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자신을 이루는 것을 明徳이라하고, 사물을 이뤄주는 것을 新民이라 한다. 至善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잘못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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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親民'을 '新民'으로 고친 이유 | ||
− | + | 曰: “程子之改親爲新也, 何所據? 子之從之, 又何所考而必其然耶? 且以已意輕改經文, 恐非傳疑之義<ref> 義 : 4.理應。</ref>, 奈何?” <br/> | |
− | 曰: | + | 물었다: "정자께서 '親'을 '新'으로 고치셨는데, 어디에 근거하신 것인가? 그대가 이를 따랐는데, 또 무엇을 살피고서 그렇다고 확신했는가? 또 자기 생각으로 함부로 경문을 고치는 것은 傳疑<ref><한어대사전> 謂將自己認為有疑義的問題如實告人。 亦謂傳授有疑義的問題。 ▶ 《穀梁傳‧莊公七年》: “《春秋》著以傳著, 疑以傳疑。” </ref>의 원칙(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는 원칙) 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떤가?"<br/> |
− | + | :新安倪氏曰: "<春秋穀梁傳>云: '信以傳信, 疑以傳疑.' 此傳疑二字所本也." | |
+ | :신안예씨가 말했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서 '미더운 것은 미더운 대로 전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한다'<ref><춘추곡량전> 환공5년. 五年春,正月甲戌、己丑,陳侯鮑卒。鮑卒,何為以二日卒之?《春秋》之義,信以傳信,疑以傳疑。陳侯以甲戌之日出,己丑之日得。不知死之日,故舉二日以包也。</ref>고 하니, 이것이 '傳疑' 두 글자의 유래이다." | ||
+ | 曰: “若無所考而輒改之, 則誠若吾子之譏矣. 今親民云者, 以文義推之則無理, 新民云者以傳<sub>去聲</sub>文考之則有據. 程子於此, 其所以處<sub>上聲</sub>之者亦已審矣. 矧未嘗去<sub>上聲</sub>其本文, 而但曰: '某當作某', 是乃漢儒釋經不得已之變例, 而亦何害於傳疑耶? 若必以不改爲是, 則世蓋有承誤踵<sub>之隴反</sub>訛<sub>吾禾反</sub>, 心知非是, 而故爲穿鑿附會, 以求其說之必通者矣. 其侮聖言而誤後學也益甚, 亦何足取以爲法耶?”<br/> | ||
+ | 대답했다: "만약 살핀 바가 없이 바로 그것을 고쳤다면, 진실로 그대의 비판과 같을 것이다. 지금 '親民'이라고 말한 것은 글의 뜻으로 미루어보면 근거가 없고, '新民'이라고 말한 것은 (<대학>의) 傳文을 가지고 살펴보면 근거가 있다. 정자께서 이를 처리하신 것은 또한 매우 분명하다. 하물며 [정자께서] 일찍이 그 본문을 제거하지 않고 단지 '무엇은 마땅히 무엇으로 써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한나라 유자들이 경전을 해석하며 부득이했던 變例니, 또한 어찌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는 원칙'(傳疑)에 해가 되겠는가? 만약 애써 고치지 않는 것을 옳다고 여긴다면, 세상은 아마도 잘못된 것을 답습해서, 마음으로는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천착하고 억지로 가져다 붙이면서 그 설명이 반드시 통하게 하고자 할 것이다. 이러한 짓이 성현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후학들을 그르침이 매우 심한데, 또 어떻게 본보기로 삼을 만 하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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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9.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에 대한 설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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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曰: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何也?”<br/> | |
− | 曰: | + | 물었다: "[<대학>에서] '머무를 곳을 안 이후에 일정함이 있고 일정한 이후에 고요해질 수 있고 고요해진 이후에 안정될 수 있고 안정된 이후에 사려할 수 있고 사려한 이후에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br/> |
− | 曰: | + | 曰: “此推本<ref><한어대사전> 探究</ref>上文之意, 言明德新民所以止於至善之由也. 蓋明德新民, 固皆欲其止於至善, 然非先有以知夫<sub>音扶下同</sub>至善之所在, 則不能有以得其所當止者而止之. 如射者固欲其中<sub>去聲下同</sub>夫正鵠<sub>正音征鵠音谷</sub>, 然不先有以知其正鵠之所在, 則不能有以得其所當中者而中之也. 知止云者, 物格知至而於天下之事皆有以知其至善之所在, 是則吾所當止之地也. 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 皆有定理矣;<br/> |
+ | 대답했다: "이것은 앞 글의 의미를 탐구한 것이니, '明德'과 '新民'이 '止於至善'하는 방법임을 말한 것이다. 대개 明德과 新民은 진실로 모두 止於至善하고자 하지만, 먼저 至善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면 마땅히 머물러야할 곳을 얻어서 머무를 수 없다. 이는 마치 사수가 진실로 정곡을 맞추고자 하는데, 먼저 정곡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다면 마땅히 맞춰야 할 바를 얻어서 맞출 수 없는 경우와 같다. '知止'라고 말한 것은 物格知至해서 천하의 일에 대해 모두 至善이 있는 곳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곳이 바로 내가 마땅히 멈춰야 할 곳이다. 머무를 곳을 알 수 있다면 마음속과 모든 일에 모두 일정한 이치가 있게 될 것이다."<br/> | ||
+ | :新安陳氏曰: "<章句>云: '知之則志有定向', 此云: '事物皆有定理', 合二說, 其義方備. 能知所止, 則此心光明, 見得事物皆有定理, 而志方有定向." | ||
+ | :신안진씨가 말했다: "<대학장구>에서 '알고 나면 뜻에 일정한 방향이 있게 된다'고 하고, 여기에서는 '만물에 모두 일정한 이치가 있게 된다'고 하니, 이 두 설명을 합쳐야 그 의미가 비로소 완전히 갖추어진다. 머무를 곳을 알 수 있다면 이 마음이 훤히 밝아져서 모든 일에 일정한 이치가 있음을 알게 되어, 뜻에 비로소 일정한 방향이 있게 될 것이다." | ||
− | + | 理既有定, 則無以動其心而能靜矣; 心既能靜, 則無所擇於地而能安矣; 能安, 則日用之間, 從<sub>七恭反</sub>容閒<sub>音閑</sub>暇, 事至物來, 有以揆之而能慮矣; 能慮, 則隨事觀理, 極深研幾<sub>平聲</sub>,<ref><주역> <계사상> 夫易,聖人之所以極深而研幾也。</ref>無不各得其所止之地而止之矣.<br/> | |
− | + | 이치가 정해지고 나면 그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어서 [마음이] 고요할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나면 어느 곳에서든 안정될 수 있으며, 안정될 수 있으면 평소에 느긋하고 한가해서 외물이 다가올 때 그것을 헤아려 사려할 수 있고, 사려할 수 있으면 일에 따라 이치를 관찰함에 매우 깊이 그 기미를 연구해서 각각 그 머물러야 할 곳을 얻어 머무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 |
+ | :問: "'知止'與'能慮', 先生昨以比<易>中'深'與'幾', <或問>中却兼下'極深研幾'字, 覺未穩." 朱子曰: "極深研幾, 是更審一審. 當時下得未仔細. 要之只著得研幾字." | ||
+ | :물었다: "'知止'와 '能慮'를 선생님께서 이전에 <주역>의 '深'과 '幾'에 비교하셨는데, <대학혹문>에서 도리어 '極深研幾'를 ['能慮'에] 함께 쓰셨으니, 온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極深研幾'는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당시에는 엄밀하게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이전처럼 '能慮'에는] '研幾'를 써야 한다." | ||
+ | :○陳氏曰: "物果格而無一理之不窮, 無一見之不盡, 則於天下之事, 所謂至善所當止者, 皆灼然有以知之矣." | ||
+ | :진씨가 말했다: "사물에게 과연 格했을 때 하나의 이치라도 궁구하지 않음이 없고 하나를 보더라도 다하지 않음이 없다면, 이른바 '至善'과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所當止)'을 모두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 ||
+ | :○'理既有定', 則心之所主, 更無外慕, 凡外物皆無以動之, 而能静矣. 身既能安, 則向者知所當止之事物, 或接乎吾前, 而吾從容以應之, 自能精於慮, 而不錯亂矣. | ||
+ | :'이치가 정해지고 나면' 마음이 주로하는 바에 달리 밖으로 사모하는 것이 없어, 모든 외물이 [내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으므로 고요할 수 있다. '몸이 편안할 수 있고 나면' 앞서 마땅히 머물러야 할 사물을 알기 때문에?? [그것이] 혹 내 눈앞에 다가오더라도 내가 순조롭게 그것에 응하여 절로 사려를 정밀하게 하고 착란하지 않을 수 있다. | ||
− | + | 然旣眞知所止, 則其必得所止, 固已不甚相遠. 其間四節, 蓋亦推言其所以然之故, 有此四者, 非如孔子之志學以至從心, 孟子之善信以至聖神, 實有等級之相懸, 爲終身經歷之次序也.”<br/> | |
− | + | 그러나 진실로 머물 곳을 안 이상, 반드시 그 머물 곳을 얻는 것은 진실로 멀지 않다. 그 사이에 네 단계는 아마도 다만 그 소이연의 까닭에 이 네 단계가 있음을 미루어 말한 것이니, 공자의 '志于學'부터 '從心所欲不踰矩'까지와<ref><논어> <위정> 4. 子曰:「吾十有五而志于學,三十而立,四十而不惑,五十而知天命,六十而耳順,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ref>과 맹자의 '善人'·'信人'으로부터 '聖人'·'神人'까지가<ref><맹자> <진심하> 25. 浩生不害問曰:「樂正子,何人也?」孟子曰:「善人也,信人也。」 「何謂善?何謂信?」 曰:「可欲之謂善,有諸己之謂信。充實之謂美,充實而有光輝之謂大,大而化之之謂聖,聖而不可知之之謂神。樂正子,二之中,四之下也。」</ref> 진실로 단계 사이에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어서 종신토록 거쳐야할 순서가 되는 것과는 같지 않다. | |
− | + | :朱子曰: "如'志學'至'從心', 中間許多, 便是大階級, 歩却闊. '知止'至'能得'只如'志學'至'立'、'立'至'不惑'相似, '定静安'大抵皆相類, 只是就一級中間細分耳."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志學'부터 '從心'까지 그 중간의 많은 단계들은 큰 단계이니 보폭이 넓다. '知止'부터 '能得'까지는 다만 '志學'부터 '立'까지, '立'부터 '不惑'까지와 서로 비슷하고, '定静安'도 대체로 이러한 부류인데 다만 한 단계 내에서 세분화한 것일 뿐이다." | ||
+ | :○某事當如此, 某事當如彼, 如'君當仁', 此是知止; 事至物來, 對著胷中恰好底道理, 將這箇去應他, 此是得其所止. | ||
+ | :어떤 일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고, 어떤 일은 마땅히 저와 같아야 하니, 예를 들어 '군주는 마땅히 仁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知止'이다.(앎의 문제) 사물이 다가옴에 마음속의 적절한 도리를 비춰 이것으로 [다가온] 사물에 응하는 것이 바로 '得其所止'이다.(실천의 문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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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0.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에 대한 설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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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曰: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何也?”<br/> | |
− | 曰: | + | 물었다: "'사물에는 本末이 있고 사건에는 終始가 있으니 선후를 알면 바로 도에 가까울 것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br/> |
− | 曰: | + | 曰: “此結上文兩節之意也. 明德·新民, 兩物而內外相對, 故曰本末; 知止、能得, 一事而首尾相因, 故曰終始. 誠知先其本而後其末, 先其始而後其終也, 則其進爲有序而至於道也不遠矣.”<br/> |
+ | 대답했다: "이는 윗 글의 두 구절의 의미를 마무리한 것이다. 明德과 新民은 두 가지지만 안팎으로 서로 짝이 되므로 '本末'이라고 말한 것이고, 知止와 能得은 한 가지 일인데 머리와 꼬리로 서로를 말미암기 때문에 '終始'이라고 말한 것이다. 진실로 그 근본을 먼저하고 그 말단을 나중에 하며, 그 처음을 먼저하고 그 마지막을 나중에 할 줄 안다면, 그 나아감에 순서가 있게 되어 도에 이르는 것이 멀지 않을 것이다." | ||
+ | :朱子曰: "知工夫先後、次第, 則進為有序, 不忽近務逺, 處下窺髙, 而其入道為不逺矣, 謂至道之近也."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공부의 선후와 순서를 안다면, 나아감에 순서가 있게 되어, 가까운 것을 소홀히하고 고원한 것에 힘쓰거나 낮은 곳에 있으면서 높은 것을 헤아리는 짓을 하지 않아, 도에 들어감이 멀지 않게 되니, '도의 이름이 가까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 ||
+ | :○黄氏曰: "知所先後, 方是曉得為學之道, 未能遂得夫道也. 然既知其進為之序, 則有至之階矣, 故云去道不遠." | ||
+ | :황씨가 말했다: "선후를 알아야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지만, 그 도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아가는 순서를 안 이상, [도에] 이르는 단계가 있기 때문에 '도까지 멀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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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 致知在格物’에 대한 설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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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何也?”<br/> | ||
+ | 물었다: "'옛적 천하에 명덕을 밝히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國을 다스렸고, 자신의 國을 다스리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家를 단속했으며, 자신의 家를 단속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했고,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心을 바르게 했으며, 자신의 心을 바르게 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意를 진실하게 했고, 자신의 意를 진실하게 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知를 지극해 했으며, 知를 지극히 하는 것은 格物에 달려있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br/> | ||
+ | 曰: “此言大學之序, 其詳如此, 蓋綱領之條目也.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者, 明明德之事也; 齊家·治國·平天下者, 新民之事也. 格物致知, 所以求知至善之所在; 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也. <br/> | ||
+ | 대답했다: "이는 <대학>의 순서가 이와 같이 상세함을 말한 것이니, 대개 삼강령의 조목이다.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이라는 것은 明明德의 일이고, 齊家·治國·平天下는 新民의 일이다. 格物致知는 至善이 있는 곳을 알고자 하는 것이고, 誠意부터 平天下에 이르기까지는 저 至善을 얻어서 그곳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이다." | ||
+ | :朱子曰: "格物、致知, 是求知其所止; 誠意、正心、脩身、至平天下, 是求得其所止. 物格、知至, 是知所止; 意誠、心正、身脩、家齊、國治、天下平, 是得其所止."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格物과 致知는 그 머무를 곳을 알고자 하는 것이고, 誠意·正心·脩身부터 平天下까지는 그 머무를 곳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物格·知至는 그 머무를 곳을 안 것이고, 意誠·心正·身脩·家齊·國治·天下平는 그 머무를 곳을 얻은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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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所謂明明德於天下者, 自明其明德而推以新民, 使天下之人皆有以明其明德也. 人皆有以明其明德, 則各誠其意, 各正其心, 各修其身, 各親其親, 各長<sub>上聲下同</sub>其長, 而天下無不平矣. <br/> | ||
+ | 이른바 '明明德於天下'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明德을 밝혀서 이를 新民으로 미루어나가, 천하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明德을 밝힐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의 명덕을 밝힐 수 있다면 각자 자신의 뜻을 진실하게 할 수 있고, 각자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며, 각자 자신을 닦아서, 각자 자신의 부모를 친히하고 각자 자신의 어른을 어른대접할 것이니,<ref><맹자> <이루상> 11. 孟子曰:「道在爾而求諸遠,事在易而求之難。人人親其親、長其長而天下平。」</ref> 천하가 평안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 ||
+ | :問: "明徳之功, 果能若是, 不亦善乎? 然以堯舜之聖, 閨門之内, 或未盡化, 况謂天下之大, 能服堯舜之化而各明其徳乎?" 朱子曰: "<大學>'明明徳於天下', 只是且說箇規模如此. 學者須有如此規模, 不如此, 便是欠了. 且如伊尹'思匹夫不被其澤, 如已推而納之溝中', 伊尹也只大槩要恁地, 又如何使得無一人不被其澤! 又如説'比屋可封',也須有一家半家不恁地者, 只是見得自家規模自當如此, 到做不去處, 却無可奈何. 規模自是著恁地, 工夫便却用寸寸進. 若無規模次第, 只管去細碎處走, 便入世之計功謀利處去; 若有規模而又無細密工夫, 又只是一箇空規模. 外極規模之大, 内推至於事事物物處, 莫不盡其工夫, 此所以為聖賢之學." | ||
+ | :물었다: "명덕의 공효가 과연 이와 같다면 물론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순과 같은 성인도 규문 안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간혹 다 교화시키지 못하셨으니, 하물며 거대한 천하의 사람들이 능히 요순의 교화에 복종해 각자 자신의 덕을 밝힐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대학>의 '明明徳於天下'라는 것은 다만 그 규모가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학자는 모름지기 이와 같은 규모를 가져야 하니, 이와 같지 않으면 부족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윤은 '필부라도 요순의 은택을 입지 못하는 것을 마치 자신이 그들을 밀어 구덩이에 넣는 것처럼 여겼'는데,<ref><맹자> <만장상> 7. 萬章問曰:「人有言『伊尹以割烹要湯』有諸?」 孟子曰:「否,不然。伊尹耕於有莘之野,而樂堯舜之道焉。…… 思天下之民匹夫匹婦有不被堯舜之澤者,若己推而內之溝中。」</ref> 이윤도 다만 대체적으로 이처럼 하고자 한 것이니, 또 어떻게 한 사람이라도 그 은택을 입지 못함이 없게끔 할 수 있겠는가? 또 예를 들어 '주나라 사람들은 집집마다 봉할 만 했다(比屋可封)'<ref><상서대전> <略說> 周人可比屋而封。; <한어대사전> 【比屋可封】 1. 謂上古之世教化遍及四海, 家家都有德行, 堪受旌表。</ref> 로 말하더라도 틀림이나 이와 같지 않은 한 집이나 반 집은 있었을 것이니, 다만 자신의 규모가 응당 이와 같아야 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규모는 본래 이와 같이 두고 공부는 하나하나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 규모나 순서가 없고 그저 세세한 것에만 집착한다면 세간 사람들이 공리나 꾀하는 수준에 들어가버리게 되고, 만약 규모는 있는데 세밀한 공부가 없다면 이는 또 그저 헛된 규모일 뿐이다. 밖으로는 거대한 규모를 다하고 안으로는 모든 일에 미루어나가 그 공부를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 이것이 성현의 학문이 되는 것이다." | ||
+ | :○新安陳氏曰: "不言各格物致知者, '民可使由, 不可使知'之意也. 親親、長長, 即齊家之大者."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각각 성의·정심한다'고만 하고] '각각 격물치지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백성들은 말미암게 할 수 있지만 알게 할 수 없다'<ref><논어> <태백> 9. 子曰:「民可使由之,不可使知之。」</ref>는 뜻이다. '親親', '長長'은 齊家 가운데 중요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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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然天下之本在國, 故欲平天下者, 必先有以治其國. 國之本在家, 故欲治國者, 必先有以齊其家. 家之本在身, 故欲齊家者, 必先有以修其身. 至於身之主則心也. 一有不得其本然之正, 則身無所主, 雖欲勉强<sub>上聲下同</sub>以修之, 亦不可得而修矣, 故欲修身者, 必先有以正其心. 而心之發則意也, 一有私欲雜乎其中, 而爲善去<sub>上聲</sub>惡或有未實, 則心爲所累, 雖欲勉强以正之, 亦不可得而正矣. 故欲正心者, 必先有以誠其意, 若夫<sub>音扶</sub>知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 人莫不有, 而或不能使其表裏洞然, 無所不盡, 則隱微之間, 眞妄錯雜, 雖欲勉强以誠之, 亦不可得而誠矣. 故欲誠意者, 必先有以致其知. 致者, 推致之謂, 如‘喪致乎哀’之致, 言推之而至於盡也. <br/> | ||
+ | 그러나 천하는 본래 나라에 달려있으니 平天下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려야하고, 나라는 본래 집안에 달려있으니 治國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지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해야 하며, 집안은 본래 자신에게 달려있으니 齊家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몸을 닦아야 한다. 몸의 주인은 마음이니, [마음에] 하나라도 본래의 바름을 얻을 수 없다면 몸에 주재하는 것이 없어, 비록 억지로 힘써 몸을 닦고자 하더라도 닦을 수 없다. 그러므로 修身하고하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로해야 한다. 마음이 발현된 것이 意이니, 하나라도 사욕이 그 속에 뒤섞여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함에 혹시라도 충실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마음이 [사욕에] 얽매여 비록 억지로 힘써 바로 잡고자 하더라도 바로 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正心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뜻을 진실되게 해야 한다. 대저 知(지각)는 마음의 신명이니 뭇 이치를 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이 知가] 없는 자가 없지만 혹 [마음의] 표리가 훤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할 수 없다면, 은미한 가운데 眞妄이 뒤섞여 비록 억지로 힘써 뜻을 진실되게 하고자 하더라도 또한 진실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誠意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앎을 지극히 해야한다. 致라는 것은 '推致(推求極致)'를 말하니 '상을 당하면 슬픔을 지극하게 한다(喪致乎哀)'<ref> 『논어』 <자장> 14. 子游曰:「喪致乎哀而止。</ref> 의 致와 같으니, 미루어서 지극한 데 이름을 말한다. | ||
+ | :朱子曰: "神是恁地精彩; 明是恁地光明."' | ||
+ | :주자가 말했다. "['神明'의] 神은 이러한 빛깔이고 明은 이러한 밝음이다." | ||
+ | :○道理固本有, 用知方發得出來. 所以謂之妙衆理. 妙猶言能運用衆理也. '運用'字有病, 故只下得'妙'字." | ||
+ | :道理는 진실로 본래 가지고 있지만 知를 써야 비로소 드러낼 수 있으므로 '妙衆理'라고 하였다. '妙'는 뭇 이치를 운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運用'에는 병통이 있기 때문에 다만 '妙'만 썼다. | ||
+ | :○問: "宰是主宰之宰, 宰制之宰?" 曰: "主便是宰, 宰便是制." | ||
+ | :물었다: "['宰萬物'의] 宰는 '主宰'의 宰입니까, '宰制'의 宰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主(주인노릇)는 宰(주관함)이고, 宰(관리함)는 制(통제함)이다." | ||
+ | :○問: "知如何宰物?" 曰: "無所知覺, 則不足以宰制萬物. 要宰制他, 也須要知覺." | ||
+ | :물었다: "知(지각)가 어떻게 사물을 제재합니까?" 말했다: "지각하는 바가 없으면 만물을 제재할 수 없다. 만물을 제재하려면 역시 지각해야한다." | ||
+ | :○心之為物, 至虛至靈, 神妙不測, 常為一身之主, 以提萬事之綱, 而不可有頃刻之不存者也. 一不自覺而馳騖飛揚, 以徇物欲於軀殻之外, 則一身無主, 萬事無綱, 雖其俯仰<ref> 俯仰 : 7.比喻時間短暫。</ref>顧盻之間, 盖巳不自覺其身之所在." | ||
+ | :'心'이라는 것은 매우 虛靈하고 신묘해 예측할 수 없고, 항상 일신의 주재가 되어 만사의 기강을 잡으니,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心'이] 한 번이라도 자각하지 못하고서 치달려 몸뚱이 밖으로 물욕을 좇는다면, 일신에 주재가 없고 만사에 기강이 없어 비록 잠깐 사이라도(짧은 시간만에) 대개 이미 몸이 있는 곳을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 ||
+ | :○黄氏曰: "理是不動底物, 不著妙字, 如何發得許多理出來?" | ||
+ | :황씨가 말했다: "理는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니, '妙'자를 쓰지 않으면 어떻게 허다한 理를 드러낼 수 있겠는가?" | ||
+ | :○陳氏曰: "致知言表裏洞然, 以心之内外而言. 知不致, 則無以識是非善惡之眞, 將從何而趨, 從何而捨? 必有錯認人欲作天理而不自覺者." | ||
+ | :진씨가 말했다: "'致知'를 '表裏洞然'이라고 말한 것은 마음의 안팎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知가 지극하지 않으면 참된 시비·선악을 알지 못하니, 장차 무엇을 통해 취하고 버릴 것인가? 필시 인욕을 천리라고 잘못 인식하고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 ||
+ | :○三山陳氏曰: "欲意之誠而不始於致知, 則有善否未明而誤於所向者, 多矣. '推之而至於盡', 有所用力之辭." | ||
+ | :삼산 진씨가 말했다. "뜻이 진실해지기를 바라면서 致知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선한지 아닌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점이 있게 되어 향할 바를 오인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推之而至於盡'라고 한 것은 힘쓸 바가 있다는 말이다." | ||
+ | :○玉溪盧氏曰: "心之神明, 即所得於天而虚靈不昩者也. 心固具衆理而應事物, 所以'妙衆理而宰事物'者, 非心之神明乎? 其'表與裏洞然無不盡', 則心之用與體無不明矣. 神明字與虚靈字, 相為表裏: 虚主理言, 靈兼氣言, 先言虚, 後言靈, 見心之體不離用; 神兼氣言, 明主理言, 先言神, 後言明, 見心之用不離體."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心의 신명은 바로 하늘에서 얻어서 허령불매한 것이다. 心은 진실로 뭇 이치를 갖추고서 외물에 응하니, '妙衆理하고 宰事物한다'는 것이 心의 신명 아니겠는가? '그 안과 밖이 훤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心의 용과 체가 밝혀지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신명'이라는 글자와 '허령'이라는 글자는 서로 표리가 되니, '허'는 리를 주로하여 말하였고 '령'은 기를 겸하여 말한 것인데, 먼저 '허'를 말하고 나중에 '령'이라고 말한 것은 心의 체가 용과 떨어지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고, '신'은 기를 겸하여 말한 것이고 '명'은 리를 주로 말한 것이니, 먼저 '신'을 말하고 나중에 '명'을 말한 것은 心의 용이 체와 떨어지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 ||
+ | :○新安陳氏曰: "心本神明之物; 知又心之所以神明者. 惟神明所以'妙'也."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心은 본래 신명한 것이고, 知는 또한 心이 신명한 까닭이다. 오직 신명하기 때문에 '묘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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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至於天下之物, 則必各有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 所謂理也. 人莫不知, 而或不能使其精粗、隱顯, 究極無餘, 則理所未窮, 知必有蔽, 雖欲勉强以致之, 亦不可得而致矣. <br/> | ||
+ | 천하 사물의 경우에는 반드시 각각 소이연의 까닭(所以然之故)이 있고 마땅히 그러한 법칙(所當然之則)이 있으니 이른바 理이다. 사람 중에 [理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자가 없지만, 혹 [천하 만물의] 精粗·隱顯을 궁구하여 남음이 없게 할 수 없으면, 理에는 미처 궁구되지 못한 부분이 있고 知에는 필시 가리워진 바가 있어, 비록 억지로 힘써 그것을 다하고자 해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 ||
+ | :朱子曰: "所當然之則, 如君之仁、臣之敬; 所以然之故, 如君何故用仁、臣何故用敬. 如君之所以仁, 盖君是箇主腦, 百姓人民皆屬他管, 他自是用仁愛, 非說是為君了, 不得巳以仁愛行之. 自是合如此, 若天使之然. 又如父之所以慈, 子之所以孝, 盖父子本同一氣, 只是一人之身分成兩箇, 其恩愛相屬, 自有不期然而然者. 其他大倫皆然, 皆天理使之如此, 豈容强為哉?"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所當然之則'이라는 것은 '군주는 인해야 하고 신하는 공경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所以然之故'라는 것은 '임금이 어째서 인해야 하고, 신하는 어째서 공경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임금이 인해야 하는 까닭은, 대개 임금은 우두머리이고 백성·인민은 모두 그의 관할에 속하기 때문에 그가 저절로 仁愛를 실천하는 것이지,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仁愛를 실천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절로 이처럼 하기 마련인 것은 마치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과 같다. 또 '아버지는 자애로워야 하고 자식은 효성스러워야 하는' 까닭은, 대개 부자는 본래 한 기를 공유해서 한 사람의 몸이 둘로 나뉜 것이니, 그 은혜와 사랑이 서로 이어져 절로 그렇게 하기를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다른 큰 인륜도 모두 이와 같이 모두 천리가 그와 같이 하게 한 것이니, 어찌 억지로 할 수 있겠는가?" | ||
+ | :○玉溪盧氏曰: "粗也顯也, 即事物當然之則也; 精也隱也, 即事物所以然之故也."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粗'와 '顯'은 바로 事物의 '當然之則'이고, '精'과 '隱'은 事物의 '所以然之故'이다." | ||
+ | :○新安陳氏曰: "所當然之則, 理之實處; 所以然之故, 乃其上一層理之源頭也."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所當然之則'는 理의 實處(실제적 측면)이고 '所以然之故' 바로 그 한 층 위의 근원으로서의 理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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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致知之道, 在乎卽事觀理, 以格夫物. 格者, 極至之謂, 如‘格於文祖’之格,<sub>見書舜典</sub> 言窮之而至其極也. <br/> | ||
+ | 그러므로 致知하는 방법은 일에 나아가 이치를 관찰하여 저 사물에 이르는 것에 달려 있다. 格이라는 것은 '이른다'는 것을 말하니, '문조에 이른다(格於文祖)'<sub><서경> <순전>에 보인다.</sub><ref><상서> <순전> 月正元日,舜格于文祖</ref>의 格과 같으니, 궁구하여 지극한 곳에 이른다는 말이다. | ||
+ | :括蒼葉氏曰: "但能隨事觀理, 盡與理㑹, 卒之天下事物之理, 不惟知得一件兩件, 若隱若顯, 盖將無所不知矣; 一事一物之間, 不唯知得一分兩分, 若精若粗, 盖將無所不知矣." | ||
+ | :괄창 엽씨(葉味道/賀孫)가 말했다: "그저 일을 따라서 理를 관찰하여 모두 이해할 수 있기만 한다면, 끝내 천하 사물의 이치에 대해 한두 가지만 알 수 있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은미한 것이든 드러난 것이든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한 사물간에 10% 20%만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밀한 것이든 거친 것이든 간에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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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此『大學』之條目, 聖賢相傳, 所以敎人爲學之次第, 至爲纖悉. 然漢、魏以來, 諸儒之論, 未聞有及之者. 至唐韓子<sub>名愈字退之</sub>, 乃能援<sub>音袁</sub>以爲說, 而見<sub>形甸反</sub>於「原道」之篇, 則庶幾其有聞矣. 然其言極於正心誠意, 而無曰致知格物云者, 則是不探<sub>音貪</sub>其端, 而驟語其次, 亦未免於'擇焉不精, 語焉不詳'之病矣. 何乃<ref><한어대사전> 1. 怎能; 何能.</ref>以是而議荀、揚哉?”<br/> | ||
+ | 이것이 『大學』의 조목이요, 성현께서 서로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학문하게 한 순서이니, 지극히 치밀하다. 그러나 漢·魏이래로 여러 유자들의 논의 가운에 이를 언급한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당나라 韓子<sub>이름은 愈이고, 자는 退之이다.</sub>에 이르러서야 이를 가져다가 설을 만들어 그것을 「原道」라는 글에서 보일 수 있었으니, 아마도 전해 들은 바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정심성의'까지에만 이르고 '치지격물'을 말한 적이 없었으니, 이는 그 시작점을 탐구하지 않고 곧장 그 다음부터 말한 것이니, 그 역시 '택함에 정미하지 못하고 말함이 상세하지 못한' 병폐를 면하지 못한 것 같다. 어찌 이 표현을 가지고 순자와 양웅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 ||
+ | :<韓文集>"荀與揚也, 擇焉而不精, 語焉而不詳." | ||
+ | :<韓文集>에서 "순자와 양웅은 택함이 정밀하지 못하고 말함이 상세하지 못하다"<ref>「原道」 曰:「斯道也,何道也?」曰:「斯吾所謂道也,非向所謂老與佛之道也。」堯以是傳之舜,舜以是傳之禹,禹以是傳之湯,湯以是傳之文武周公,文武周公傳之孔子,孔子傳之孟軻。軻之死,不得其傳焉。荀與揚也,擇焉而不精,語焉而不詳。</ref>고 하였다. | ||
+ | :○荀子, 名况, 字卿, 戰國時趙人也. 揚子, 名雄, 字子雲, 西漢成都人也. 各有所著之書, 今傳於世. | ||
+ | :순자는 이름이 황이고 자는 경이니 전국시대 조나라 사람이고, 양자는 이름이 웅이고 자가 자운이니 서한 성도 사람이다. 각자 저술한 책이 있어서 오늘날 세상에 전해진다. | ||
+ | :○朱子曰: "「原道」舉<大學>, 却不說'格物致知'; <蘇氏古史>舉<中庸>'不獲乎上', 却不說'明善誠身',這様都是無頭學問."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原道」에서 <大學>을 거론하지만 오히려 '格物致知'를 말하지 않았고, <蘇氏古史>에서는 <中庸>의 '不獲乎上'을 서론하지만 '明善誠身'<ref><중용장구> 20장. 在下位不獲乎上,民不可得而治矣;獲乎上有道:不信乎朋友,不獲乎上矣;信乎朋友有道:不順乎親,不信乎朋友矣;順乎親有道:反諸身不誠,不順乎親矣;誠身有道:不明乎善,不誠乎身矣。</ref>을 말하지 않았으니, 이런 것들은 모두 머리가 없는 학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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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 ‘物格而后知至, …… 國治而后天下平’에 대한 설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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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 意誠而后心正, 心正而后身修, 身修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 國治而后天下平’, 何也?”<br/> | ||
+ | 물었다: "'物格이후에 知至하고, 知至한 이후에 意誠하며, 意誠한 이후에 心正하고, 心正한 이후에 身修하며, 身修한 이후에 家齊하고, 家齊한 이후에 國治하며, 國治한 이후에 天下平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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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此覆<ref><한어대사전> 2. 翻倒;翻轉。; 15. 重複。</ref>說上文之意也. 物格者, 事物之理, 各有以詣其極<sub>上聲</sub>而無餘之謂也. 理之在物者, 旣詣其極而無餘, 則知之在我者, 亦隨所詣而無不盡矣. 知無不盡, 則心之所發能一於理而無自欺矣. 意不自欺, 則心之本體物不能動而無不正矣. 心得其正, 則身之所處不至陷於所偏而無不修矣. 身無不修, 則推之天下、國、家, 亦擧而措之耳, 豈外此而求之智謀、功利之末哉!”<br/> | ||
+ | 답했다: "이것은 윗 글의 뜻을 거꾸로 [올라가며](格物->物格) 설명한 것이다. 物格이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에 각각 그 지극한 곳에 이르러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사물에 있는 理가 이미 그 지극한 곳에 이르러 남은 것이 없다면, 나에게 있는 知 또한 이른 바에 따라 다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知에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면, 心이 발현된 것(즉 意)이 理에 전일하여 자신을 속이지 않을 수 있다. 意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心의 본체를 외물이 동요시킬 수 없어서 바르지 않음이 없게 된다. 心이 바르게 되었다면, 身이 편벽된 곳에 빠지지 않아 닦이지 않음이 없게 된다. 身이 닦여지지 않음이 없다면, 이를 천하·나라·집안에까지 미룸에 그저 들어서 두면 될 뿐이니, 어찌 이를 벗어나 말단적인 지모나 공리를 구하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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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篇首之言明明德, 以新民爲對, 則固專以自明爲言矣; 後段於平天下者, 復<sub>扶又反</sub>以明明德言之, 則似新民之事亦在其中, 何其言之不一, 而辨之不明耶?” <br/> | ||
+ | 물었다: "편 머리에서는 '명명덕'을 말함에 '신민'으로 대대했으니(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 ['명명덕'은] 진실로 오직 스스로 밝히는 것만 말한 것인데, 뒤의 '평천하'에 대해 다시 '명명덕'으로 말했으니(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신민'의 일이 또한 그('명명덕') 안에 있는 것 같다. 어째서 말이 한결같지 않고 분별이 명확하지 않은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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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篇首三言者, 『大學』之綱領也; 而以其賓主對待、先後次第言之, 則明明德者, 又三言之綱領也. 至此後段, 然後極其體用之全而一言以擧之, 以見<sub>形甸反</sub>夫<sub>音扶</sub>天下雖大, 而吾心之體無不該; 事物雖多, 而吾心之用無不貫. 蓋必析之有以極其精而不亂, 然後合之有以盡其大而無餘, 此又言之序也.”<br/> | ||
+ | 대답했다: "편 머리의 세마디 말은 『대학』의 강령이지만, 이것을 손님과 주인이 서로 대하는 관계로나 선후의 순서로 말한다면, '명명덕'이 다시 세 마디 말의 강령이 된다. 이 뒷 단락(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에 이르고 난 연후에야 온전한 體用을 완전히 드러내 한 마디로 제시한 것이니, 이것으로 '천하가 비록 크더라도 내 마음의 體가 갖추고있지 않은 것이 없고, 사물이 비록 많더라도 내 마음의 用이 관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보인 것이다. 대개 [<대학> 경문이 이렇게 구성된 것은] 반드시 정밀하게 분석해 혼란이 없게 된(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 연후에 [분석한 것을] 합쳐 [<대학>의] 큰 규모를 남김없이 드러낸 것이니(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이 또한 말하는 순서이다." | ||
+ | :○陳氏曰: "天下事物, 無一之不格; 幽明巨細, 有以洞灼其表裏, 其知之至也. 瑩萬理於胷中, 是極其所眞是而不可移; 非極其所眞非而不容易; 善極其本之所由來而無不徹; 惡極其幾之所從起而無少遁<ref><한어대사전> 8. 失。</ref>, 物果格, 知果至. 由是而往, 則意極其誠而無一念之或欺, 心極其正而無一息之不存, 身極其脩而無一動之或偏矣. 此書首三言固當無所不盡, 而所謂明明徳者, 又通為一篇之統體." 又曰: "體具於方寸之間, 萬理無所不備, 而無一物能出乎是理之外; 用發於方寸之間, 萬事無所不貫而無一理不行乎其事之中, 此心之所以為妙."<br/> | ||
+ | :진씨가 말했다: "천하의 사물에 하나라도 이르지 못함이 없고, 어둡고 밝은 것 크고 세세한 모든 것에 그 안과 밖을 훤히 밝힐 수 있는 것이 知의 지극함이다. 마음속으로 온갖 이치를 밝혀, 옳은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옳은 바를 지극히 하여 옮겨가지 못하고, 그른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그른 바를 지극히 하여 바꿀 수 없으며, 선한 것에 대해서는 그 말미암은 근본을 지극히 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고, 악한 것에 대해서는 말미암아서 일어난 기미를 지극히 하여 조금의 잘못도 없어, 사물의 [이치에] 과연 이르고 知가 과연 지극해질 것이다. 이것을 말미암아 나아간다면, 意는 誠을 다하여 하나의 생각이라도 혹 거짓됨이 없을 것이고, 心은 正을 지극히 하여 잠깐의 보존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며, 身은 그 脩을 지극히 하여 한 번 움직이더라도 혹 치우침이 없을 것이다. 이 책 서두의 세 마디는 진실로 다하지 못하는 바가 없고, 이른바 '명명덕'이라고 말한 것은 또한 <대학> 한 텍스트의 統體가 된다." 또 말했다: "體는 마음 안에 있으면서 온갖 이치를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없어서 어떤 사물도 이 이치를 벗어날 수 없고, 用은 마음 안에서부터 발현되어 모든 일을 관통되지 않음이 없어서 어떤 이치도 그 일에서 행해지지 못함이 없으니, 이것이 마음이 신묘하게 되는 까닭이다." | ||
+ | :○玉溪盧氏曰: "言明明徳與新民對, 則<大學>之體用猶二; 言明明徳於天下, 則<大學>之體用非二矣. 吾心之體, 即明徳之虚而具衆理者也; 吾心之用, 即明徳之靈而應萬事者也. 能析之極其精而不亂, 則知吾心之用無不貫矣; 能合之盡其大而無餘, 則知吾心之體無不該矣. 不析之而遽欲合之, 則有虚空恍惚之病; 徒析之而不能合之, 則有支離破碎之病. '必析之極其精, 然後合之盡其大', 此二句其義無窮. 眞西山嘗誦此而繼之曰: '小徳川流, 大徳敦化.' 又繼之曰: '吾道一以貫之.' 其旨深矣."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명명덕'과 '신민'을 대대하여 말한다면, <大學>의 體用이 구별되는 것 같고, '明明徳於天下'라고 말하면 <大學>의 體用이 구별되지 않는 것 같다. 내 마음의 體는 곧 '明徳의 虚'로 '뭇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具衆理)'고, 내 마음의 用은 곧 '明徳의 靈'으로 '온갖 일에 대응하는 것(應萬事)'이다. 지극히 정밀하게 분석해 어지럽지 않을 수 있다면, 내 마음의 用이 관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알 것이고, [분석한 것을] 합쳐 남김 없이 [<대학>의] 큰 규모를 드러낼 수 있다면, 내 마음의 體가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분석하지 않고서 갑자기 합치고자 한다면 허무맹랑해지는 병폐가 있을 것이고, 그저 분석하기만 하고 그것을 합칠 수 없다면 지리하고 자잘하게 되는 병폐가 있을 것이다. '必析之極其精, 然後合之盡其大' 이 두 구절의 의미가 무궁하다. 진서산이 일찍이 이것을 외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덧붙였다: '작은 덕은 냇물처럼 흐르고, 큰 덕은 두터이 변화시킨다.'<ref><중용장구> 30장. 萬物並育而不相害,道並行而不相悖,小德川流,大德敦化,此天地之所以為大也。</ref>(즉, 작은 덕과 큰 덕을 분석·구별) 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덧붙였다: '내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ref><논어> <리인> 15. 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曾子曰:「唯。」</ref>(즉, 분석·구별한 것을 종합) 그 뜻이 심오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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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自天子以至於庶人, …… , 未之有也’에 대한 설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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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何也?”<br/> | ||
+ | 물었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修身을 근본으로 삼으니, 그 근본이 어지러운데 말단이 다스려진 경우는 없었고, 그 후하게 해야할 것을 박하게 하면서 박하게 해야할 것을 후하게 하는 경우는 있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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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此結上文兩節之意也. 以身對天下國家而言, 則身爲本而天下國家爲末; 以家對國與天下而言, 則其理雖未嘗不一, 然其厚薄之分亦不容無等差<sub>楚宜反</sub>矣. 故不能格物致知, 以誠意正心而修其身, 則本必亂而末不可治. 不親其親, 不長<sub>上聲下同</sub>其長, 則所厚者薄而無以及人之親長, 此皆必然之理也. 孟子所謂‘於所厚者薄, 無所不薄’, 其言蓋亦本於此云.”<br/> | ||
+ | 대답했다: "이것은 윗 글의 두 구절의 의미를 끝맺은 것이다. 자신을 天下·國·家와 대대하여 말한다면 자신이 근본이 되고 天下·國·家는 말단이 되며, 家를 天下·國과 대대하여 말한다면 그 이치는 일찍이 같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후하게 하거나 박하게 하는 구분은 그래도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격물치지를 할 수 없으면서 성의정심해 그 몸을 닦는다면, 근본은 반드시 혼란해지고 말단도 다스려질 수 없다. 제 어버이를 친애하지 않고 제 어른을 어른대접하지 않는다면, 후하게 해야하는 것을 박하게 하는 것이라서 다른 사람의 부모나 어른에게까지 미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모두 필연적 이치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신 '마땅히 후하게 해야할 것을 박하게 하면 박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ref>『맹자』 「진심상」 45. "孟子曰:「於不可已而已者,無所不已;於所厚者薄,無所不薄也。"</ref> 는 말도 아마 여기에 근거한다." | ||
+ | :○三山陳氏曰: "脩身者, 自格物致知誠意正心而積也. 不如是, 則身不可脩; 身之不脩, 則其本亂矣; 本之既亂, 如國家何? 事父母而不能孝, 事兄長而不能弟, 則是'於其所厚者薄'矣. 所厚者猶薄, 奚望其親天下之親、長天下之長哉?" | ||
+ | :삼산 진씨가 말했다: "脩身이라는 것은 격물·치지·성의·정심을 통해 쌓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몸은 닦여질 수 없고, 몸이 닦여지지 않으면 그 근본이 혼란해지니, 근본이 혼란한 이상 국·가를 어떻게 하겠는가? 부모를 섬기면서 효도를 할 수 없고 형이나 어른을 섬기면서 공경할 수 없다면, 이것은 '그 후하게 해야할 것을 박하게 하는 것'이다. 후하게 해야할 것도 오히려 박하게 하고서 어떻게 그가 천하의 부모를 친히 여기고 천하 어른을 어른대접하기를 바라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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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대학>의 내용에 비춰봤을 때 상정된 독자가 적절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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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治國平天下者, 天子諸侯之事也. 卿大夫以下, 皆無與<sub>音預</sub>焉. 今大學之敎, 乃例以明明德於天下爲言, 豈不爲思出其位, 犯非其分<sub>去聲</sub>, 而何以得爲<sub>如字</sub>爲<sub>去聲</sub>己之學哉?”<br/> | ||
+ | 물었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은 천자와 제후의 일이니 경대부 이하는 모두 여기에 간여하지 않는다. 지금 <대학>의 가르침은 바로 '明明德於天下'를 예로 들어 말하니, 어찌 '자신의 지위를 벗어나서 생각함'<ref>『논어』, 「헌문」. 28장 "曾子曰:「君子思不出其位。」"</ref>이 아니겠는가? 제 직분이 아닌 것을 범하는데 어떻게 '자기를 위한 학문'<ref><논어> <헌문> 25. 子曰:「古之學者為己,今之學者為人。」</ref>이 될 수 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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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天之明命, 有生之所同得, 非有我之得私也. 是以君子之心, 豁<sub>呼括反</sub>然大公, 其視天下, 無一物而非吾心之所當愛, 無一事而非吾職之所當爲, 雖或勢在匹夫之賤, 而所以堯舜其君, 堯舜其民者, 亦未嘗不在其分<sub>去聲</sub>內也. 又况<大學>之敎, 乃爲<sub>去聲</sub>天子之元子·衆子, 公侯·卿大夫·士之適<sub>音的</sub>子, 與國之俊選<sub>去聲</sub><ref><한어대사전> 俊士和選士。 古代指可以教育深造的優秀人材。 </ref>而設, 是皆將有天下國家之責而不可辭者, 則其所以素敎而預養之者, 安得不以天下國家爲己事之當然, 而預求有以正其本、淸其源哉! 後世敎學不明, 爲人君父者, 慮不足以及此, 而苟徇於目前. 是以天下之治<sub>去聲</sub>日常少, 亂日常多, 而敗國之君, 亡家之主, 常接迹於當世, 亦可悲矣! 論者不此之監, 而反以聖法爲疑, 亦獨何哉? 大抵以學者而視天下之事, 以爲己事之所當然而爲之, 則雖甲兵·錢穀·籩豆·有司之事, 皆爲<sub>去聲</sub>己也; 以其可以求知於世而爲之, 則雖割股廬墓、敝車羸<sub>力為反</sub>馬, 亦爲<sub>去聲下同</sub>人耳. 善乎張子敬夫之言曰<sub>張子名栻, 字敬夫, 號南軒, 廣漢人. 乃朱子同志之友也.</sub>: ‘爲己者, 無所爲而然者也.’ 此其語意之深切, 蓋有前賢所未發者, 學者以是而日自省<sub>悉井反</sub>焉, 則有以察乎善利之間<ref><맹자> <진심상> 25. 欲知舜與蹠之分,無他,利與善之閒也。 </ref>而無毫釐之差矣.”<br/> | ||
+ | 대답했다: "하늘의 밝은 명령은 태어날 때 똑같이 받은 것이지 자신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豁然大公해서 천하의 어떤 사물도 자신의 마음이 마땅히 아껴할 바라고 여기지 않음이 없고, 어떤 일도 자신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할 바라고 여기지 않음이 없어서, 비록 혹 천한 필부의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자기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 또한 일찍이 그 직분 안에 있지 않음이 없다. 또한 하물며 <대학>의 가르침은 바로 천자의 적장자와 다른 적자들, 공·후·대부·사의 적장자와 나라의 뛰어난 인재들을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이들은 모두 장차 사양할 수 없는 천하와 국가의 책무를 지닌 자들이다. <대학>에서 이들을 평소부터 미리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 어찌 [그들로 하여금] 천하 국가의 일을 당연한 제 일로 여기게 해 미리 '뿌리를 바로잡고 그 근원을 맑게 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후세의 교육이 밝혀지지 못해 임금이나 부모된 자들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구차하게 눈앞의 것만 따랐다. 이 때문에 천하가 잘 다스려진 날은 늘 적고 어지러운 날은 늘 많았으며, 나라를 망치는 군주들과 집안을 망치는 주인들이 당시에 항상 연이어 나타났으니 역시 슬퍼할 만하다! 그대가 이러한 것을 살피지 않고 도리어 성인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은 유독 어째서 인가? 대개 학자의 신분으로 천하의 일을 볼 때, 자기가 마땅히 해야할 바로 여겨서 그것을 행한다면, 비록 군사일·창고일·제사일·유사의 일이라도 모두 자기를 위한 것(위기지학)이 되지만,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면 비록 허벅지 안쪽살을 베고<ref><한어대사전> 舊有自割股肉以供君親食用之說, 古人認為是大忠大孝的表現。 </ref> 무덤 옆에 여막을 지어 살아 [효를 다하고], 망가진 수레나 파리한 말을 타 [청렴함을 다하더라도]<ref><한어대사전> 破車瘦馬。▶ 《三國志‧吳志‧劉繇傳》“ 繇 伯父 寵 為 漢 太尉” 裴松之注引晉司馬彪 《續漢書》: “ 寵 前後歷二郡, 八居九列, 四登三事。 家不藏賄, 無重寶器, 恆菲飲食, 薄衣服, 弊車羸馬, 號為窶陋。”</ref> 다른 사람을 위한 것(위인지학)일 뿐이다. 훌륭하구나, 장경부의 말이여!<sub>張子의 이름은 식(栻)이고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남헌(南軒)이니 광한 사람이다. 주자와 뜻을 같이한 벗이다.</sub> '나를 위한 것은 위하는 바 없이(의도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ref><남헌집> 권14. <孟子講義序> 學者潜心孔孟, 必得其門而入, 愚以為莫先於義利之辯. 蓋聖學無所為而然也. 無所為而然者, 命之所以不已, 性之所以不偏, 而教之所以無窮也. 凡有所為而然者, 皆人欲之私而非天理之所存, 此義利之分也.</ref> 이 말의 의미가 심오하면서 절실하다. 아마도 [이 말에는] 이전 성현들께서 밝히지 않으셨던 점이 있으니, 배우는 자들이 이 말을 가지고 날마다 스스로 성찰한다면, '善'과 '利'의 차이를 알게 돼 털끝만큼의 착오도 없을 것이다." | ||
+ | :○問為己為人一條. 朱子曰: "這須要自看. 如一日之間, 小事大事, 只道'我合當做'便如此做, 這便是'無所為', 如讀書, 只道'自家合當如此讀', '合當如此理會身己'. 纔說要人知, 便是'有所為', 如世上人纔讀書, 便安排這箇好做時文. 此又為人之甚者." | ||
+ | :'나를 위한다'와 '남을 위한다'는 한 조목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이것은 모름지기 스스로 살펴보아야 한다. 평소 모든 일에 대해 '나는 이렇게 해야한다'고 말하고 곧 그렇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위하는 바가 없는 것(無所爲)'이이니, 마치 책을 읽는 경우 그저 '나는 이렇게 책을 읽어야 해', '이렇게 이해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말하자마자 곧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為)'이니, 세상 사람들이 책을 읽기만 하면 이 점을 감안해 과거 답안지(時文)<ref> <한어대사전> 3. 時下流行的文體。 舊時對科舉應試文體的通稱。</ref>나 잘 짓는 것과 같다. 이것 역시 남을 위하는 것이 심한 것이다." | ||
+ | :○如甲兵、錢榖、籩豆、有司, 到當自家理㑹便理㑹, 不是為别人了理㑹. 如割股、廬墓, 一是不忍其親之病, 一是不忍其親之死, 這都是為已者. 若因要人知了去恁地, 便是為人." | ||
+ | :"전쟁일, 창고일, 제사일, 유사의 일 같은 경우라도 마땅히 내가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割股나 廬墓의 경우, 하나는 그 부모의 지병을 차마 보아넘기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는 그 부모의 죽음을 차마 보아넘기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고서 이렇게 했다면, 이는 곧 남을 위한 것이 된다." | ||
+ | :○問: "割股事, 如何?" 曰: "割股固自不是. 若誠心為之, 不求人知, 亦庶幾; 今有以此要譽者." | ||
+ | :물었다. "割股의 일은 어떻습니까?" 말했다. "割股는 진실로 옳지 않다. 만약 마음을 진실하게 하여 그것을 행하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거의 [도에] 가깝겠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으로 명예를 구하려는 자들이 있다." | ||
+ | :○南軒此言, 擴前聖所未發, 而同於孟子性善、養氣之功者歟! | ||
+ | :장남헌의 이 말은 전 성현들이 아직 드러내지 못한 바를 넓힌 것이니 맹자의 性善、養氣의 공적<ref><이정문집> 9-20. <答楊時論西銘書> <西銘>之爲書, 推理以存義, 擴前聖所未發, 與孟子性善、養氣之論同功.(二者亦前聖所未發)</ref>과 동일하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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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 <대학>의 저자 문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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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子謂正經蓋夫子之言, 而曾子述之, 其傳<sub>去聲, 後凡言傳文經傳之類皆同.</sub>則曾子之意, 而門人記之. 何以知其然也.”<br/> | ||
+ | 물었다: "그대는 '正經은 아마 공자의 말씀을 증자가 조술한 것이고, 그 傳文은 증자의 뜻을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다'<ref><대학장구> 경1장 右經一章,蓋孔子之言,而曾子述之。其傳十章,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ref>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러하다는 것을 알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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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正經辭約而理備, 言近而指遠, 非聖人不能及也. 然以其無他左驗<ref><한어대사전> 證人;證據。 </ref>, 且意其或出於古昔先民之言也, 故疑之而不敢質<ref><한어대사전>【質】 15. 對質;驗證。</ref>. 至於傳文, 或引曾子之言, 而又多與『中庸』『孟子』者合, 則知其成於曾氏門人之手, 而子思以授孟子無疑也. 蓋『中庸』之所謂明善, 卽格物致知之功; 其曰誠身, 卽誠意·正心·修身之效也. 孟子之所謂知性者, 物格也; 盡心者, 知至也; 存心·養性·修身者, 誠意·正心·修身也. <br/> | ||
+ | 대답했다: "正經의 경우 말은 간략하지만 이치가 갖추어져 있고, 말은 비근하지만 뜻이 원대하니, 성인이 아니라면 해낼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증거가 없고, 또 아마 옛 先民의 말에서 나온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심만 하고 검증하지는 않았다. 傳文의 경우, 간혹 증자의 말씀을 인용하고 또 『中庸』과 『孟子』의 [내용에] 부합하는 것이 많으니, 증자 문하의 손에서 완성됐음을 알겠고, 자사가 이를 맹자에게 전수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대개 『中庸』에서 말한 '明善'은 곧 格物致知의 공부이고, '誠身'을 말한 것은 곧 誠意·正心·修身의 공부이며,<ref><중용장구> 20장. 在下位不獲乎上,民不可得而治矣;獲乎上有道:不信乎朋友,不獲乎上矣;信乎朋友有道:不順乎親,不信乎朋友矣;順乎親有道:反諸身不誠,不順乎親矣;誠身有道:不明乎善,不誠乎身矣。</ref> 맹자가 말한 '知性'은 物格이고, '盡心'은 知至며, '存心·養性·修身'은 誠意·正心·修身이다.<ref><맹자> <진심상> 1. 孟子曰:「盡其心者,知其性也。知其性,則知天矣。存其心,養其性,所以事天也。殀壽不貳,修身以俟之,所以立命也。」</ref>" | ||
+ | :○朱子曰: "知性者, 物格也, 物字對性字; 盡心者, 知至也, 知字對心字."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知性'이라는 것은 物格이니, 物자는 性자에 대응한다. '盡心'이라는 것은 知至니, 知자는 心자에 대응한다." | ||
+ | :○'物理之極處無不到', 知性也; '吾心之所知無不盡', 盡心也. | ||
+ | :'物理의 지극한 곳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ref><대학장구> 경1장. 【朱注】 物格者,物理之極處無不到也。</ref>는 것은 知性이고, '내 마음의 아는 바를 다하지 않음이 없다'<ref><대학장구> 경1장. 【朱注】 知至者,吾心之所知無不盡也。</ref>는 것은 盡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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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其他如謹獨之云, 不慊<sub>口簟口劫二反</sub>之說, 義利之分, 恒言之序,<br/> | ||
+ | 그밖에 [『中庸』에서] 말한 '謹獨'과<ref><중용장구> 1장. 見乎隱,莫顯乎微,故君子慎其獨也。</ref> [『孟子』에서] 말한 不慊<ref>『맹자』, 「공손추상」, 2장. "是集義所生者,非義襲而取之也。行有不慊於心,則餒矣。我故曰,告子未嘗知義,以其外之也。" 【朱注】 慊,快也,足也。言所行一有不合於義,而自反不直,則不足於心而其體有所不充矣</ref>·義利의 구분<ref><맹자> <양혜왕상> 孟子對曰:「王何必曰利?亦有仁義而已矣。」</ref>·늘 하는 말의 순서<ref><맹자> <이루상> 5. 孟子曰:「人有恆言,皆曰『天下國家』。天下之本在國,國之本在家,家之本在身。」</ref>가 | ||
+ | :○新安倪氏曰: "孟子云: '人有常言皆曰天下國家,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此'常言之序'也." | ||
+ | :신안 예씨가 말했다: "맹자께서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어 모두들 天下國家를 말하는데, 天下의 근본은 國에 있고, 國의 근본은 家에 있으며 家의 근본은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 이것이 '常言之序'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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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亦無不脗<sub>武粉反又音冺</sub>合焉者. 故程子以爲孔氏之遺書, 學者之先務, 而<論><孟>猶處<sub>上聲</sub>其次焉, 亦可見矣.”<br/> | ||
+ | 또한 [『대학』]에 들어맞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정자께서는 '[『대학』을] 공자께서 남기신 책이며 배우는 자들의 급선무'로 여기셨고,<ref><대학장구> 서론. 子程子曰:「大學,孔氏之遺書,而初學入德之門也。」於今可見古人為學次第者,獨賴此篇之存,而論、孟次之。學者必由是而學焉,則庶乎其不差矣。 ; <이정유서> 2上-36. 大學乃孔氏遺書, 須從此學則不差.</ref> '『논어』·『맹자』는 오히려 그 다음'<ref><이정유서> 22上-1. 棣初見先生, 問「初學如何?」 曰:「入德之門, 無如大學. 今之學者, 賴有此一篇書存, 其他莫如論·孟.」</ref>인 것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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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程子之先是書而後論、孟, 又且不及乎<中庸>, 何也?”<br/> | ||
+ | 물었다: "정자께서는 이 책(『대학』)을 우선하시고 『논어』·『맹자』를 뒤로 하셨는데, 그런데도 『중용』을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어째서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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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是書垂世立敎<ref><상서정의> <序> 討論墳典, 斷自唐虞以下 訖于周, 芟夷煩亂, 翦截浮辭, 擧其宏綱, 撮其機要, 足以垂世立敎.</ref>之大典, 通爲<sub>去聲</sub>天下後世而言者也. <論><孟>應機接物之微言, 或因一時一事而發者也. 是以是書之規模雖大, 然其首尾該備, 而綱領可尋, 節目分明, 而工夫有序, 無非切於學者之日用. <論><孟>之爲<sub>去聲</sub>人雖切, 然而問者非一人, 記者非一手, 或先後淺深之無序, 或抑揚進退之不齊, 其間蓋有非初學日用之所及者. 此程子所以先是書後<論><孟>, 蓋以其難易<sub>去聲下同</sub>緩急言之, 而非以聖人之言爲有優劣也. 至於<中庸>, 則又聖門傳授極致之言, 尤非後學之所易得而聞者, 故程子之敎未遽及之, 豈不又以爲<論><孟>旣通, 然後可以及此乎? 蓋不先乎<大學>, 無以提挈綱領而盡<論><孟>之精微; 不參之<論><孟>, 無以融貫會通而極<中庸>之歸趣; 然不會其極於<中庸>, 則又何以建立大本<sub>盡性也</sub>, 經綸大經<sub>立教也</sub>, 而讀天下之書, 論天下之事哉? 以是觀之, 則務講學者, 固不可不急於四書, 而讀四書者, 又不可不先於<大學>, 亦已明矣. 今之敎者, 乃或棄此不務, 而反以他說先焉, 其不溺於虛空, 流於功利, 而得罪於聖門者, 幾<sub>平聲</sub>希矣."<br/> | ||
+ | 대답했다: "이 책(『대학』)은 세상에 드리워져 가르침을 세우는 위대한 텍스트니, 모두 천하의 후세를 위하여 말해진 것이다. 『논어』·『맹자』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대응한 微言(별 거 아닌 듯 하지만 심오한 말)이라서, 간혹 한 때나 한 사건에 의해 언급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책(『대학』)의 규모는 비록 크지만 머리부터 꼬리까지 갖춰져 강령을 살필 수 있으며 절목이 분명하고 공부에 순서가 있어 배우는 자들의 일상 생활에 절근하지 않음이 없는 반면, 『논어』·『맹자』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비록 절실하지만 질문자도 한 명이 아니고 기록자도 한 명이 아니라서 간혹 先後·淺深의 순서가 없기도 하고 간혹 抑揚·進退가 일정하지 않기도 해서 이 사이에 대개 초학자의 일상 생활에 관련되지 않는 것이 있다. 이것이 정자께서 『대학』을 우선시하고 『논어』·『맹자』를 뒤로 하신 까닭이다. 이는 대개 난이도나 우선순위로 말씀하신 것이지, 성인의 말씀에 우열이 있다고 여기신 것은 아니다. 『중용』에 경우 성인 문하에서 전수해온 지극한 글이기 때문에, 더욱 후학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자의 훈계에서 성급하게 언급되지 않았으니, 어찌 『논어』·『맹자』를 통달한 연후에 여기(『중용』)에 미칠 수 있다고 여기신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대학』을 우선하지 않으면 [『대학』을 통해] 강령을 세워 『논어』·『맹자』의 정미한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논어』·『맹자』를 참고하지 않으면 [『논어』·『맹자』를] 온전히 통달하여 『중용』의 의미를 지극히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중용』에서 그 지극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달리 어떻게 큰 근본을 세우고(명명덕)<sub>盡性이다.</sub> 큰 법도를 운용하여(신민)<sub>立教이다.</sub> 천하의 책을 읽고 천하의 일을 논하겠는가? 이것으로 본다면, 강학에 힘쓰는 사람들은 진실로 이 네 가지 책(四書, 『대학』·『논어』·『맹자』·『중용』)즉 을 우선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이 네 가지 책을 읽는 사람은 또한 『대학』을 우선으로 하지 않아서는 안 됨 또한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자들은 도리어 이 네 가지 책을 버려두고 힘쓰지 않으면서 도리어 다른 학설을 우선하니, 虛(도교)·空(불교)에 빠지거나 功利에 흘러들어가 성인의 문하에 죄를 얻지 않는 자가 드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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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傳一章=== | ||
+ | 康誥曰:「克明德。」<br/> | ||
+ | <강고>에서는 "[문왕께서] 능히 [자신의] 명덕을 밝히셨다"고 하였고, | ||
+ | :康誥,周書。克,能也。 | ||
+ | :'강고'는 <서경> <주서> [편명이다.] '克'은 '能'이다. | ||
+ | ::朱子曰: "此克字, 雖訓能, 然比能字有力. 見人皆有是明徳而不能明, 惟文王能明之. 克只是真箇㑹底意."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이 '克'자는 '能'으로 풀지만, '能'자와 비교하면 [더욱] 힘이 있다. [이 구절은] 사람들이 모두 이 명덕을 가지고 있는데도 밝히지 못하는데, 오직 문왕만이 이를 밝히실 수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克'은 다만 진정으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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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甲曰:「顧諟天之明命。」<sub>大讀作泰. 諟古是字.</sub><br/> | ||
+ | <태갑>에서는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고 하였으며, | ||
+ | :大甲,商書。顧,謂常目在之也。 | ||
+ | :<태갑>은 <서경> <상서> [편명이다.] '顧'는 늘 이것에 눈을 둔다는 것이다. | ||
+ | ::朱子曰: "'常目在之', 古註語, 極好. 如一物在此, 惟恐人偷去, 兩眼常常覷在此相似."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常目在之'는 옛 주석의 표현이니, 매우 훌륭하다. 마치 여기 어떤 물건을 남이 훔쳐갈까 걱정해 두 눈으로 여기를 보는 것과 같다." | ||
+ | :諟,猶此也,<sub>從古是字之說</sub>或曰審也。<sub>廣韻註也. 今不必從.</sub>天之明命,即天之所以與我,而我之所以為德者也。常目在之,則無時不明矣。 | ||
+ | :'諟'는 '此'과 같으니,<sub>'是'자로 보는 옛 설을 따랐다.</sub> 혹자는 '審'이라고 한다.<sub><광운> 주석이다. 오늘날 굳이 따를 필요는 없다.</sub> '天之明命'이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고, 내가 덕으로 삼은 것이다. '常目在之'는 어느 때고 밝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 ||
+ | ::朱子曰: "上下文都說明徳, 這裏却說明命, 盖天之所以與我便是明命; 我所得以為性者便是明徳. 命與徳皆以明言, 是這箇物本自光明. 我自昏蔽了他."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앞뒤의 글에서 모두 '명덕'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明命'을 말한 것은, 대개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 '명명'이고, 내가 얻어 性으로 삼은 것이 '명덕'이다. '命'과 '徳'을 모두 '明'으로 말한 것은, 이것이 본래 빛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어둡게 하고 가린 것이다." | ||
+ | ::○顧諟者只是長存此心, 知得有這道理光明不昧. 方其未接物, 此理固湛然清明; 及其遇事應接, 此理亦隨處發見. 只要常提撕省察, 念念不忘. 存養久之, 則道理愈明, 雖欲忘之而不可得矣. | ||
+ | ::'顧諟'라는 것은 다만 이 마음을 오래 보존하여 이 도리가 빛나 어둡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아직 외물을 접하지 않았을 때 이 理는 진실로 고요히 청명하다가, 외물을 만나 대응할 때, 이 理 역시 상황에 따라 발현한다. 다만 늘 일깨우고 살피며 늘 생각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존양함이 오래되면 도리는 더욱 밝아져, 비록 잊고자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 ||
+ | ::○只是見得道理常在目前, 不被事物遮障了, 不成是有一物可見其形象. | ||
+ | ::다만 늘 눈앞에 있는 도리를 알고 외물에 의해 가려지지 않게 하는 것이니, 형상을 볼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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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帝典曰:「克明峻德。」<sub>峻書作俊</sub><br/> | ||
+ | <요전>에서는 "능히 큰 덕을 밝힌다"고 하였으니, | ||
+ | :帝典,堯典,虞書。峻,大也。 | ||
+ | :'帝典'은 <서경> <요전>이니 <우서>의 편명이다. '峻'은 '큼'이다. | ||
+ | |||
+ | 皆自明也。<br/> | ||
+ | 모두 스스로 밝힌 것이다. | ||
+ | :結所引書,皆言自明己德之意。 | ||
+ | :인용한 <서경>이 모두 스스로 자신의 덕을 밝혔다는 의미임을 말한 것이라고 마무리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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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r/> | ||
+ | ::右傳之首章。釋明明德。 | ||
+ | ::이상은 전1장이다. '명명덕'을 풀이한 것이다. | ||
+ | :::此通下三章至「止於信」,舊本誤在「沒世不忘」之下。 | ||
+ | :::이 장에서 다음 전3장의 '止於信'까지 옛 판본에서는 '沒世不忘' 다음에 잘못 배치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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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문』 전1장==== | ||
+ | 或問: "一章而下以至三章之半, 鄭本元在沒世不忘之下, 而程子乃以次於'此謂知之至也'之文, 子獨何以知其不然而遂以爲傳之首章也?"<br/> | ||
+ | 혹자가 물었다: "전1장부터 전3장의 반까지를 鄭本(정현본)에서는 원래 '沒世不忘' 다음에 두었고, 정자(이천)께서는 '此謂知之至也' 다음에 두셨는데, 그대는 유독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고서 마침내 전의 첫 장으로 삼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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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以經統傳, 以傳附經, 則其次第可知, 而二說之不然, 審矣."<br/> | ||
+ | 대답했다: "經으로 傳을 통괄하고, 傳으로 經을 부연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분석하면] 그 순서를 알 수 있으니, 두 설 모두 옳지 않음이 명백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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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然則其曰: '克明徳'者, 何也?"<br/> | ||
+ | 물었다: "그렇다면 전1장에서 '克明徳'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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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此言文王能明其徳也. 蓋人莫不知徳之當明而欲明之. 然氣稟拘之於前, 物欲蔽之於後. 是以雖欲明之而有不克也. 文王之心, 渾<sub>上聲</sub>然天理, 亦無待於克之而自明矣. 然猶云爾者, 亦見其獨能明之而他人不能. 又以見夫<sub>音扶</sub>未能明者之不可不致其克之之功也."<br/> | ||
+ | 대답했다: "이는 문왕께서 자신의 덕을 밝히실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대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덕을 마땅히 밝혀야 함을 알고 이를 밝히려고 한다. 그러나 氣稟이 선천적으로 구속하고, 물욕이 후천적으로 [덕을] 가린다. 그러므로 비록 덕을 밝히려고 하더라도 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문왕의 마음은 혼연한 천리이므로 역시 [기품이나 물욕을] 이겨낼 필요가 없이 본래 밝다. 그런데도 [전1장에서] 오히려 이렇게 말한 것은, 다만 문왕만이 덕을 밝힐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또 이를 통해 아직 밝히지 못한 사람들이 [기품이나 물욕을] 이겨내는 공부를 다하지 않아서는 안 됨을 드러낸 것이다." | ||
+ | :問: "'克明徳', 克, 能也. <或問>中却作'能致其克之之功', 又似克治之克, 如何?" 朱子曰: "此克字, 雖訓能字, 然克字重, 是他人不能而文王獨能之. 若只作'能明徳', 語意便都弱了. 凡字有文義一般而聲響頓異, 如云: '克宅心'、'克明徳'之類, 可見." | ||
+ | :물었다: "'克明徳'의 '克'은 '할 수 있다(能)'는 것입니다. <或問>중에 도리어 '[기품이나 물욕을] 이겨내는 공부를 다할 수 있다'라고 써서 또 '克治'<ref> 謂克製私欲邪念。</ref> 의 '克'과 같아보이는 데, 어떻습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여기 '克'자는 비록 '能'으로 풀지만 '克'이라는 글자가 더 [뉘앙스가] 강하니, 이는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고 문왕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다만 '덕을 밝힐 수 있다(能明徳)'고만 쓴다면, 의미가 매우 약해질 것이다. 모든 글자에는 그 뜻은 같지만 울림이 확연히 다른 경우가 있으니, '克宅心'<ref><상서> <입정> 文王惟克厥宅心,乃克立茲常事司牧人,以克俊有德。」</ref>이나 '克明徳'과 같은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 ||
+ | :○人所以不能明其徳者, 何哉? 盖氣偏而失之太剛, 則有所不克; 氣偏而失之太柔, 則有所不克; 聲色之欲蔽之, 則有所不克; 貨利之欲蔽之, 則有所不克. 不獨此耳, 凡有一毫之偏蔽得以害之, 則有所不克. 唯文王無氣稟物欲之偏蔽, 故能有以勝之而無疑. | ||
+ | :사람들이 자신의 덕을 밝힐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기질이 치우쳐 너무 강직한 데서 잘못한다면 이겨내지 못하는 바가 있고, 기질이 치우쳐 너무 유한 데서 잘못한다면 이겨내지 못하는 바가 있으며, 감각적 욕구가 명덕을 가리면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 있고, 물욕이 명덕을 가린다면 이겨내지 못하는 바가 있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라 무릇 [기질이] 조금이라도 치우쳐 명덕을 해칠 수 있다면 이겨내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오직 문왕만이 기품의 치우침과 물욕의 가림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이겨내고 의심이 없을 수 있었다. | ||
+ | :○西山眞氏曰: "明徳, 人所同有, 其所以為聖愚之分者, 但以克明與不能明之異爾. 常人所以不能明者, 一則以氣稟昏弱之故; 二則以物欲蔽塞之故. 雖是蔽塞之餘, 若一旦悔悟, 欲自明其徳, 亦無不可者. 患在自暴自棄而不肯為耳. | ||
+ | :서산 진씨가 말했다: "明徳은 사람이 똑같이 가진 것인데, 성인이나 어리석은 사람으로 구분되는 까닭은 다만 [명덕을] 밝힐 수 있는 것과 밝힐 수 없는 것의 차이일 뿐이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명덕을] 밝힐 수 없는 까닭은, 하나는 기품이 혼매하고 약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물욕이 가리고 막기 때문이다. 비록 [기품이] 가리고 [물욕이] 막음이 많더라도, 만약 일단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자신의 덕을 밝히려고 한다면, 또한 해내지 못할 리 없을 것이다. 문제는 자포자기<ref><맹자> <이루상> 10. 孟子曰:「自暴者,不可與有言也;自棄者,不可與有為也。言非禮義,謂之自暴也;吾身不能居仁由義,謂之自棄也。</ref>해서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데 있을 뿐이다." | ||
+ | :○格庵趙氏曰: "文王自誠而明者. 故其心渾然天理, 表裏澄瑩, 不待克之而自明. 若大賢而下, 未能如文王, 則不可無克之之功矣." | ||
+ | :격암 조씨가 말했다: "문왕은 '誠을 통해 밝아진' 분이다.<ref>『중용장구』 21장. 自誠明,謂之性;自明誠,謂之教。誠則明矣,明則誠矣。 【朱注】 自,由也。德無不實而明無不照者,聖人之德。</ref> 그러므로 그 마음은 혼연히 천리이고 안팎이 모두 맑아서 [기품이나 물욕을] 이겨낼 필요 없이 본래 밝으셨다. 大賢 이하는 문왕과 같을 수 없으니, [기품이나 물욕을] 이겨내는 공부가 없어서는 안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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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顧諟天之明命', 何也?" <br/> | ||
+ | 물었다: "'顧諟天之明命'는 무슨 의미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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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人受天地之中以生. 故人之明徳, 非他也, 即天之所以命我而至善之所存也. 是其全體大用, 蓋無時而不發見<sub>形甸反</sub>於日用之間.<br/> | ||
+ | 대답했다: "사람은 천지의 중정함을 얻어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사람의 明徳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이 나에게 명한 것이며 至善이 보존된 곳이다. 이것이 바로 全體이자 大用이니, 대개 어느 때고 일상생활에 드러나지 않음이 없다." | ||
+ | :陳氏曰: "於寂然不動之時, 則合萬殊為一本, 而渾然之全體常昭融於方寸之間; 及感而遂通之際, 則散一本為萬殊, 而縱横曲直莫非大用之所流行矣." 又曰: "天理本體, 常生生而無一息之已; 而其大用, 亦無一息不流行乎日用之間." | ||
+ | :진씨가 말했다: "'寂然不動'한 때에는 萬殊가 합해져 하나의 근본이 되어 혼연한 全體가 늘 마음 속에서 밝게 드러나 있고, '[외물을] 감하여 마침내 통한(感而遂通)' 때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근본이 나눠져 萬殊가 되어, 온갖 [차별적인] 것들이 大用의 유행 아닌 것이 없다." 또 말했다. "天理의 本體는 늘 [만물을] 낳고 낳아 한 순간의 그침도 없고, 天理의 大用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한 순간도 유행하지 않음이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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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人惟不察於此. 是以汨<sub>音骨</sub>於人欲而不知所以自明. 常目在之而眞若'見其參於前、倚於衡也', 則'成性存存而道義出'矣.<br/> | ||
+ | 사람이 오직 이 점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인욕에 빠지고도 스스로 밝힐 줄을 알지 못한다. 늘 눈을 여기(명덕)에 두고서 진실로 '그것이 앞에 참여하고 있고, 멍에에 기대고 있음을 보듯'<ref><논어> <위령공> 5. 立,則見其參於前也;在輿,則見其倚於衡也。夫然後行。</ref> 한다면, '본래 갖춰진 성이 보존되고 보존되어 道義가 [이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ref><주역> <계사상> 7. 成性存存,道義之門。</ref>" | ||
+ | :問: "如何是體, 如何是用?" 朱子曰: "體與用不相離, 且如身是體, 要起行去便是用. 赤子匍匐將入井, 皆有怵惕惻隱之心, 只此一端體用便可見. 如喜怒哀樂是用, 所以喜怒哀樂是體." | ||
+ | :물었다: "무엇이 體이고 무엇이 用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體와 用은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예를 들어 몸은 體이고 일어나서 가려는 것은 用이다. '어린 아이가 기어서 우물에 들어가려고 할 때 모두들 깜짝 놀라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단지 이 한 경우에서도 體用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喜怒哀樂[과 같은 감정]은 用이고, 喜怒哀樂[과 같은 감정이 생기는] 까닭이 體이다." | ||
+ | :○若'見其參前', '倚衡', 此豈有物可見? 但凡人不知省察, 常行日用毎與是徳相忘, 亦不自知其有是也. 今所謂'顧諟'者, 只是心裏常常存著此理. 一出言, 一行事, 皆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初豈實有一物之可見其形象耶? | ||
+ | :'見其參前'·'倚衡'의 경우, 이것이 어찌 [정말로] 볼 수 있는 것이겠는가? 다만 보통 사람들이 성찰할 줄 몰라, 일상 생활에서 매번 이 徳을 잊어버리고 그에게 이 徳이 있는 줄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지금 이른바 '顧諟'라는 것은 다만 마음속으로 이 理를 늘 보존하는 것이다. 한 마디 말할 때나 한 번 행동할 때 모두 반드시 마땅한 법칙이 있으니, 이를 어겨서는 안 된다. 애초에 어찌 실제로 그 형상을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겠는가? | ||
+ | :○問: "'成性存存, 道義出矣', 何如?" 曰: "天之所命, 我之所得於己, 只是一箇道理. 人只要存得這些在這裏. 才存得在這裏, 則事君必㑹忠, 事親必㑹孝, 見孺子入井, 則怵惕之心便發, 見穿窬之類, 則羞惡之心便發, 合恭敬處便自然㑹恭敬, 合辭遜處便自然㑹辭遜. 須要常存得此心, 則便見得此性發出底都是道理; 若不存得這些, 待做出, 那箇㑹合道理?" | ||
+ | :물었다: "'成性存存, 道義出矣'란 무슨 의미인가?" 대답했다: "하늘이 명령한 것과 내가 얻은 것은 같은 道理일 뿐이다. 사람이라면 단지 이와 같은 것을 내면에 보존해야 한다. 내면에 보존하기만 하면 군주를 섬김에 틀림없이 忠할 수 있고, 부모를 섬김에 틀림없이 孝할 수 있으며, 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는 마음이 일어나고, 도둑질하는 부류를 보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며, 공경해야 할 상황에서는 저절로 공경할 수 있고, 사양해야 할 상황에서는 저절로 사양할 수 있게 된다. 모름지기 이 마음을 항상 보존해야하니, 그렇게 한다면 이 性이 발한 것이 모두 道理임을 알겠지만, 만일 이것을 보존하지 않고 [저절로] 되기를 기다린다면, 무엇이 道理에 부합할 수 있겠는가?" | ||
+ | :○西山眞氏曰: "'成性'者, 言天之與我者, 自有渾成之性, 如俗言'見成渾淪之物', 是也. 我但當存之又存, 不令頃刻失之, 則天下之道義皆從此出. 道義, 如事君忠, 事親孝之類." | ||
+ | :서산 진씨가 말했다: "'成性'이라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해준 것에 본래 혼연히 완성된 性이 있음을 말하니, 세속에서 '見成渾淪之物'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내가 다만 마땅히 보존하고 또 보존해 잠시라고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면, 천하의 道義가 모두 이것을 따라 나올 것이다. '道義'란 군주를 섬김에 忠하고, 부모를 섬김에 孝하는 부류와 같은 것이다." | ||
+ | :○玉溪盧氏曰: "'天地之中', 太極是已, 天之命我, 此也; 我之明徳, 此也; 謂之至善, 亦此也. 道者, 體; 義者, 用. '成性存存而道義出', 則明徳之全體大用無不明矣."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天地之中'이란 태극이 이것이니, '하늘이 나에게 명한 것'이 이것이고, 나의 '明徳'이 이것이며, '至善'이라고 한 것 또한 이것이다. '道'라는 것은 體이고, '義'라는 것은 用이다. '成性存存而道義出'이란 明徳의 全體와 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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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克明峻徳', 何也?" <br/> | ||
+ | 물었다: "'克明峻徳'이란 무슨 의미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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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言堯能明其大徳也." <br/> | ||
+ | 대답했다: "요임금께서 자신의 大徳을 밝히실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 ||
+ | :朱子曰: "人之為徳未嘗不明, 而其明之為體亦未嘗不大. 但人自有以昏之, 是以既不能明, 而又自䧟於一物之小. 唯堯為能明其大徳而無昏暗狹小之累, 是則所謂止於至善."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徳은 일찍이 밝지 않음이 없고, 그 밝음의 정도 또한 일찍이 크지 않음이 없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어둡게 만들기 때문에 밝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소한 것에 빠진다. 오직 요임금만이 자신의 大徳을 밝히셔서 [그것을] 어둡게 하거나 좁게 하는 장애가 없으셨으니, 이것이 이른바 '止於至善'이다." | ||
+ | :○玉溪盧氏曰: "'能明其大徳', 只是明明徳到十分盡處, 非明徳之外有峻徳也."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能明其大徳'이란 다만 明徳을 밝히는 것을 100% 다하는 것이니, 明徳 밖에 따로 '峻徳'이 있는 게 아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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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是三者, 固皆自明之事也. 然其言之, 亦有序乎?" <br/> | ||
+ | 물었다: "이 세 가지는 진실로 모두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말한 것에도 순서가 있는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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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康誥>通言明徳而已; <太甲>則明天之未始不爲人而人之未始不爲天也; <帝典>則專言成徳之事, 而極其大焉. 其言之淺深, 亦略有序矣." | ||
+ | 대답했다: "<康誥>는 明徳을 전체적으로 말한 것일 뿐이고, <太甲>은 '하늘은 애초에 사람을 위하지 않음이 없고, 사람은 애초에 하늘을 위하지 않음이 없음'을 밝힌 것이며, <帝典>은 오로지 완벽한 덕을 지닌 자(成徳, 즉 堯)의 사례를 말하여 그 위대함을 지극히 표현한 것이다. 그 말의 깊이에도 대략 순서가 있다." | ||
+ | :問: "'天未始不為人而人未始不為天', 何也?" 朱子曰: "只是言人性本無不善, 而其日用之間莫不有當然之則, 所謂天理也. 人若毎事做得是, 則便合天理. 天人本一理, 若理㑹得此意, 則天何嘗大, 人何嘗小也?" | ||
+ | :물었다: "'하늘은 애초에 사람을 위하지 않음이 없고, 사람은 애초에 하늘을 위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다만 사람의 性은 본래 선하지 않음이 없고, 평소에 당연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이른바 天理이다. 사람이 만일 매사에 옳게 행한다면 천리에 부합하게 된다. 하늘과 사람은 본래 하나의 理이니, 만약 이 뜻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언제 하늘은 크고 사람은 작았겠는가?" | ||
+ | :○天即人, 人即天. 人之始生, 得於天也; 既生此人, 則天又在人矣. 凡語言動作視聽, 皆天也. '顧'是常要看得光明燦爛, 照在目前. | ||
+ | :하늘은 곧 사람이고 사람은 곧 하늘이니,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하늘을 얻고, [하늘이] 이 사람을 낳고 나면 하늘은 다시 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무릇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고 보고 듣는 것은 모두 하늘[이 하는 것]이다. '顧'란 항상 광명찬란한 것(즉 명덕)이 눈앞에서 빛나는 것을 보려는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4 <대학1> 「在明明德」,須是自家見得這物事光明燦爛,常在目前,始得。; 같은 책, 권 17 <대학혹문상> 顧諟,是常要看教光明燦爛,照在目前。</ref> | ||
+ | :○黄氏曰: "本文三引<書>, 乃斷章取義, 以明經文明明徳之意. 其言之序, 則自淺而深, 最爲有用. '克明徳'者, 泛言之; 曰'顧諟', 則言明之之功; 曰'明命', 則言明徳之故; 次之曰'峻徳', 加一峻字, 則又見明徳之極, 乃所謂'止於至善'者也." | ||
+ | :황씨가 말했다: "본문에서 세 번 <서경>을 인용한 것은 바로 斷章取義해서 경문의 '明明徳'의 의미를 밝힌 것이다. 언급 순서는 얕은 것에서부터 깊어지니, 매우 쓸모가 있다. '克明徳'이라는 것은 범범하게 말한 것이고, '顧諟'라고 말한 것은 명덕을 밝히는 공부를 말한 것이며, '明命'을 말한 것은 明徳의 원인을 말한 것이다. 다음에 말한 '峻徳'에서 '峻'자를 더한 것은 또한 明徳의 지극함을 드러낸 것이니, 바로 이른바 '止於至善'이라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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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傳二章=== | ||
+ | 湯之盤銘曰:「苟日新,日日新,又日新。」<br/> | ||
+ | 탕왕의 盤銘에서는 "진실로 어느 날에 새롭게 했거든, [이를 말미암아]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고 하였고, | ||
+ | :盤,沐浴之盤也。銘,名其器以自警之辭也。苟,誠也。<sub><論語>"苟至於仁", 苟亦訓誠.<ref><논어> <리인> 4. 子曰:「苟志於仁矣,無惡也。」 【朱注】 苟,誠也。</ref></sub>湯以人之洗濯其心以去<sub>上聲下同</sub>惡,如沐浴其身以去垢。故銘其盤,言誠能一日有以滌其舊染之汙而自新,則當因其已新者,而日日新之,又日新之,不可略有間<sub>去聲</sub>斷<sub>徒玩反</sub>也。 | ||
+ | :'盤'은 목욕하는 그릇이다. '銘'은 그 그릇에 스스로를 경계하는 말을 새긴 것이다. '苟'는 '진실로'(誠)이다.<sub><논어>의 "苟至於仁"의 '苟'도 '誠'으로 풀었다.</sub> 탕왕은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씻어 악을 제거하는 것을 마치 몸을 씻어 때를 제거하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므로 자신의 '盤'에 명문을 새겨 '진실로 어느 날 전에 물든 더러움을 씻어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있다면, 이미 새롭게 한 바에 말미암아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져 조금의 끊어짐도 있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 ||
+ | ::問: "盤銘見於何書?" 朱子曰: "只見於<大學>. 緊要在一'苟'字, 首句是為學入頭處. 誠能日新, 則下兩句工夫方能接續做去. 今學者却不去'苟'字上著工夫." | ||
+ | ::물었다: "盤銘은 어떤 책에서 나옵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대학>에만 보인다. 핵심은 '苟'자에 달려있으니, 첫 구('苟日新')가 학문의 시작점이다. 진실로 어느 날 새롭게 할 수 있었다면, 다음 두 구의 공부('日日新,又日新')가 비로소 연이어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배우는 자들은 '苟'자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 | ||
+ | ::○'苟日新', 新是對舊染之汙而言; '日日新, 又日新', 只是要常常如此無間斷也. | ||
+ | ::'苟日新'의 '新'은 '전에 물든 더러움'(舊染之汙)에 대해 말한 것이고, '日日新, 又日新'은 단지 늘 이렇게 끊어짐이 없게해야 한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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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康誥曰:「作新民。」<br/> | ||
+ | <강고>에서는 '[스스로] 새롭게 하는 백성을 진작시켜라'라고 하였으며, | ||
+ | :鼓之舞之之謂作,言振起其自新之民也。 | ||
+ | :고무하는 것을 '作'이라고 하니, 스스로 새롭게 하는 백성을 진작시킴을 말한다. | ||
+ | ::朱子曰: "'鼓之舞之', 如擊鼓然, 自然能使人跳舞踊躍. 上之人之於民, 時時提撕警發之, 則下之觀瞻感化, 各自有以興起同然之善心而不能自已耳."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鼓之舞之'는 마치 북을 치는 것처럼 저절로 사람들로 하여금 춤추고 뛰어오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정자가 백성에 대해 때때로 그들을 일깨운다면, 이를 보고 감화된 백성들은 각자 스스로 공통의 선한 마음을 흥기시켜 스스로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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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曰:「周雖舊邦,其命惟新。」<br/> | ||
+ | <시>에서는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지만, [문왕에 이르러] 천명이 새로워졌다"고 하였다. | ||
+ | :詩大雅文王之篇。言周國雖舊,至於文王,能新其德以及於民,<sub>此是推本說</sub>而始受天命也。<sub>始字貼新字</sub> | ||
+ | :<시> <대아> <문왕>편이다. 주나라가 비록 오래되었지만, 문왕에 이르러 자신의 덕을 새롭게 해 백성들에게 미쳐<sub>이것은 推本說이다??</sub> 비로소 천명을 받을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sub>'始'자가 '新'자에 해당한다.</sub> | ||
+ | ::朱子曰: "是新民之極, 和天命也新."<ref><주자어류> 권16. 「其命維新」,是新民之極,和天命也新。</ref>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其命維新'이란] '신민'을 지극히 하니 천명도 새로워졌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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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br/> | ||
+ | 이 때문에 군자는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다. | ||
+ | :自新新民,皆欲止於至善也。 | ||
+ |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至善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다. | ||
+ | ::朱子曰: "'明明徳', 便要如湯之日新; '新民', 便要如文王之'周雖舊邦, 其命維新'. 各求'止於至善'之地而後已也."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명명덕'은 탕왕이 날로 새롭게 한 것처럼 하려는 것이고, '신민'은 문왕의 '周雖舊邦, 其命維新'처럼 하려는 것이다. 각각 '지어지선'의 경지를 구한 이후에 그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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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右傳之二章。釋新民。 | ||
+ | ::이상은 전2장이다. '신민'을 풀이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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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문』 전2장==== | ||
+ | 或問: "盤之有銘, 何也?"<br/> | ||
+ | 혹자가 물었다: "盤에 銘을 새긴 것'은 어째서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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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盤者, 常用之器, 銘者, 自警之辭也. 古之聖賢, 兢兢業業<ref><한어대사전> 1. 謹慎戒懼貌。▶ 《書‧皋陶謨》: “兢兢業業, 一日二日萬幾。”▶ 孔 傳: “兢兢, 戒慎;業業, 危懼。” </ref>, 固無時而不戒謹恐懼. 然猶恐其有所怠忽而或忘之也. 是以於其常用之器, 各因其事而刻銘以致戒焉, 欲其常接乎目, 毎警乎心而不至於忽忘也." <br/> | ||
+ | 답했다. "'盤'이라는 것은 늘 사용하는 기물이고, '銘'이라는 것은 스스로 경계하는 말이다. 옛 성현들께서는 경계하고 경계하셔서, 진실로 어느 때나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으셨다. 그런데도 오히려 태만하고 소홀해서 혹 잊어버리는경우가 있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이 때문에 늘 사용하는 기물에 각각 그 기물에 따라 銘을 새겨 경계를 지극히 하셨으니, 늘 눈앞에 두어 매번 마음을 경계하고 소홀해 잊어버리는 데 이르지 않고자 하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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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然則沐浴之盤而其所刻之辭如此, 何也?"<br/> | ||
+ | 물었다: "그렇다면 목욕하는 盤에 새긴 글이 이러한 것은 어째서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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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人之有是徳, 猶其有是身也; 徳之本明, 猶其身之本㓗也; 徳之明而利欲昏之, 猶身之㓗而塵垢<sub>音苟</sub>汚<sub>音烏又去聲</sub>之也. 一旦存養省<sub>悉井反</sub>察之功, 眞有以去<sub>上聲下同</sub>其前日利欲之昏, 而日新焉, 則亦猶其䟽<sub>平聲</sub>瀹<sub>音藥</sub><ref><한어대사전> 1. 洗滌;沐浴。 </ref>澡<sub>音早</sub>雪<ref><한어대사전> 1. 洗滌使之清潔;洗滌。 </ref>, 而有以去其前日塵垢之汚也. 然既新矣, 而所以新之之功不繼, 則利欲之交將復<sub>扶又反下同</sub>有如前日之昏, 猶既㓗矣而所以㓗之之功不繼, 則塵垢之集將復有如前日之汚也. 故必因其巳新而日日新之, 又日新之, 使其存養省察之功無少間斷<sub>間去聲斷徒玩反後凡二字相連者並同</sub>, 則明徳常明而不復爲利欲之昏, 亦如人之一日沐浴而日日沐浴, 又無日而不沐浴, 使其䟽瀹澡雪之功無少間斷, 則身常㓗清而不復爲舊染之汚也. <br/> | ||
+ | 昔成湯所以反之而至於聖者, 正惟有得於此. 故稱其徳者有曰: '不邇聲色, 不殖<sub>承職反</sub>貨利.' 又曰: '以義制事, 以禮制心.' 有曰: '從諌弗咈<sub>音佛</sub>', '改過不吝.' 又曰: '與人不求備, 檢身若不及.' 此皆足以見其日新之實. 至於所謂聖敬日躋<sub>牋西反</sub>云者, 則其言愈約而意愈切矣<sub>躋, 升也. 聖人能敬其徳, 日愈升於髙明也.</sub>然本湯之所以得此, 又其學於伊尹而有發焉. 故伊尹自謂與湯咸有一徳, 而於復<sub>如字</sub>政太甲之初, 復<sub>扶又反下同</sub>以終始惟一, 時乃日新, 爲丁寧之戒, 蓋於是時, 太甲方且自怨自艾<sub>音乂</sub>, 於桐處<sub>上聲</sub>仁遷義而歸, 是亦所謂苟日新者. 故復推其嘗以告于湯者告之, 欲其日進乎此, 無所間斷, 而有以繼其烈祖之成徳也. 其意亦深切矣.<br/> | ||
+ | 대답했다: "사람에게 이 덕이 있는 것은 이 몸이 있는 것과 같고, 덕이 본래 밝은 것(즉 명덕)은 몸이 원래 깨끗한 것과 같으며, 밝은 덕을 利欲이 가리는 것은 깨끗한 몸을 먼지가 더럽히는 것과 같다. 한 번 존양성찰의 공부가 진실로 이전의 利欲의 가림을 제거하여 날로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은 또한 [몸을] 씻어 전날의 더러움을 제거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미 새로워졌더라도 새롭게 하는 공부를 계속하지 않으면 利欲이 엮여서 다시 이전의 가림과 같게 되는 것은, 이미 씻었더라도 깨끗하게 하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먼지가 모여서 다시 전날의 더러움과 같아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미 새롭게 한 것에 기인해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여 존양성찰의 공부가 조금의 끊어짐도 없게 하면, 명덕이 늘 밝아서 다시는 利欲의 가림이 없는 것이 또한 사람이 어느 날 씻고 또 날마다 씻어 하루라도 씻지 않음이 없어서, 씻는 노력이 조금의 끊어짐도 없게 하면, 몸이 늘 깨끗해 다시는 과거의 더러움이 없게 되는 것과 같다. <br/> | ||
+ | 옛날 탕왕께서 [본성을] 회복해<ref><맹자> <진심하> 33. 孟子曰:「堯舜,性者也;湯武,反之也。</ref> 성인이 되신 까닭은 바로 이점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경>에서] 탕왕의 덕을 칭송해 '노래와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재물을 늘리지 않는다'<ref><서경> <商書> <仲虺之誥> 惟王不邇聲色,不殖貨利。</ref>·'義로써 일을 제어하고, 禮로써 마음을 제어한다.'<ref><서경> <商書> <仲虺之誥> 王懋昭大德,建中于民,以義制事,以禮制心,垂裕後昆。</ref>·'간언을 따르고 거스르지 않는다'<ref><서경> <商書> <伊訓> 先王肇修人紀,從諫弗咈,先民時若。</ref>·'잘못을 고치는데 거리끼지 않는다'<ref><서경> <商書> <仲虺之誥> 用人惟己,改過不吝。</ref>고 하였고, 또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갖추기를 바라지 않았고, 자신을 단속하기를 마치 부족한 듯 한다"<ref><서경> <商書> <伊訓> 居上克明,為下克忠,與人不求備,檢身若不及,以至于有萬邦,茲惟艱哉!</ref>고 하였으니, 이 모두에서 탕왕께서 날마다 새로워지신 실질을 볼 수 있다. 이른바 "성인께서 공경하셔서 날로 발전하셨다"<ref><시경> <상송> <長發> 湯降不遲、聖敬日躋。</ref>의 경우, 말은 더욱 간략하지만 의미는 더욱 절실하다.<sub>'躋'는 '올라감'이다. 성인께서 능히 자신의 덕을 공경하셔서 날이 갈수록 더욱 고명한 경지에 오르셨다는 것이다.</sub> 그러나 본래 탕임금이 이점을 깨달으셨던 이유는 또 이윤에게 배워 감발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윤 스스로 '[탕왕과] 함께 공통적인 덕을 가지고 있다'<ref><서경> <商書> <咸有一德> 惟尹躬暨湯,咸有一德,克享天心,受天明命,以有九有之師,爰革夏正。</ref>고 말했고, 태갑을 정치에 복귀시킬 때 다시 '시종 한결같이 하는 것이 바로 날로 새롭게 하는 것'<ref><서경> <商書> <咸有一德> 終始惟一,時乃日新。</ref>이라는 말로 간곡한 경계를 삼았다. 아마 이때 태갑이 비로소 '스스로 원망하고 자신을 다스려 桐땅에서 인의를 실천하고 돌아왔으니'<ref><맹자> <만장상> 6. 太甲顛覆湯之典刑,伊尹放之於桐。三年,太甲悔過,自怨自艾,於桐處仁遷義;三年,以聽伊尹之訓己也,復歸于亳。</ref> 이 또한 이른바 '苟日新'이다. 그러므로 다시 전에 탕왕께 고했던 말을 미루어 태갑에게 고한 것은 태갑으로 하여금 날로 이에 나아감에 끊어짐 없게 해서<ref><서경> <商書> <伊訓> 伊尹乃明言烈祖之成德,以訓于王。</ref> 조상의 성대한 덕을 계승할 수 있게 한 것이니, 뜻이 매우 깊고 절실하다. | ||
+ | :朱子曰: "成湯工夫, 全在敬字上. 看來大叚是箇脩飭<ref><한어대사전> 1. 謹慎整飭, 不違禮義。</ref>底人. 故當時人說他做工夫處, 如云以義以禮, 不邇不殖等, 可見日新之功. 或問中所以詳載, 非說道人不知, 亦欲學者經心<ref><한어대사전> 2. 留心;着意。 </ref>耳."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成湯의 공부는 모두 '敬'이라는 글자에 달려 있다. 생각건대 [탕왕은] 대체로 [스스로를] 잘 단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가 공부하는 것에 대해 '義'나 '禮', '不邇'나 不殖' 등의 말로 표현했으니, (여기에서)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를 볼 수 있다. <或問> 안에 [탕왕을 칭송한 말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것은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여기에] 마음을 두게 하고자 한 것일 뿐이다." | ||
+ | :○格庵趙氏曰: "塵垢之汚, 其害淺; 利欲之昏, 其害深. 塵垢之汚, 人知求以去之; 而利欲之昏, 則不知所以去之. 唯聖人則以為徳之不可不新, 甚於身之不可不㓗也. 且人之㓗身也, 既知䟽瀹澡雪以去前日塵垢之汚矣. 然其㓗之之功不繼, 則塵垢復集, 將又如前日之汚. 故必日加䟽瀹澡雪之功, 無少間斷, 而後其身常㓗而不汚, 况欲去利欲之昏, 而復本然之明, 則存養省察之功, 其可一日而有間斷哉!" | ||
+ | :격암 조씨가 말했다: "먼지와 때가 [깨끗한 몸을] 더럽히는 것은 그 해악이 적지만, 이욕이 [명덕을] 가리는 것은 그 해악이 심하다. 먼지와 때가 [깨끗한 몸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들이 제거할 줄 알지만,이욕이 [명덕을] 가리는 것은 제거할 줄 모른다. 오직 성인만이 덕을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이 몸을 깨끗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보다 심하다고 여긴다. 또 사람들이 몸을 깨끗이 함에 있어서, [몸을] 씻어 전날의 먼지와 때의 더러움을 제거할 줄은 이미 알지만, 깨끗이 하는 노력을 잇지 않으면 먼지와 때가 다시 쌓여 다시 전날의 더러움과 같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날마다 깨끗이 하는 노력을 잠깐의 끊어짐도 없이 한 이후에야 그 몸이 항상 깨끗하여 더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욕의 가림을 없애 본연의 밝음을 회복하려고 한다면, 존양성찰의 공부를 어찌 하루라도 끊어지게 해서야 되겠는가?" | ||
+ | :○玉溪盧氏曰: "不邇聲色等八句, 是敬之目; 聖敬日躋一句, 是敬之綱. 合而言之, 即顧諟明命之事也."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不邇聲色'등의 여덟 구절은 敬의 조목이고, '聖敬日躋'의 한 조목 구절은 敬의 강령이다. 합하여 말한다면 '顧諟明命'의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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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其後周之武王, 踐阼<sub>存故反</sub>之初, 受師尚父<ref><한어대사전> 齊太公 呂望 的尊稱。 </ref>丹書之戒曰<sub>尚父太公望吕氏. 詳見孟子離婁上篇</sub>: '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br/> | ||
+ | 이후 주나라 무왕이 즉위하셨을 때, 사상보<sub>상보는 태공망 여씨이다. 자세한 것은 <맹자> <이루상>에 보인다.</sub>에게 丹書의 경계를 받으셨다: '공경함이 태만함을 이기는 자는 길하고, 태만함이 공경함을 이기는 자는 망한다. 의로움이 욕망을 이기는 자는 순조롭고, 욕구가 의로움을 이기는 자는 흉하다.'<ref><대대례기> <武王踐阼>王齊三日,端冕,師尚父亦端冕,奉書而入,負屏而立。王下堂,南面而立。師尚父曰:「先王之道不北面!」王行西,折而南,東面而立。師尚父西面道書之言曰:「敬勝怠者吉,怠勝敬者滅,義勝欲者從,欲勝義者凶,凡事,不強則枉,弗敬則不正,枉者滅廢,敬者萬世。藏之約、行之行、可以為子孫常者,此言之謂也!且臣聞之,以仁得之,以仁守之,其量百世;以不仁得之,以仁守之,其量十世;以不仁得之,以不仁守之,必及其世。」</ref> | ||
+ | :問從字意. 朱子曰: "從, 順也. 敬便立起, 怠便放倒. 以理從事是義, 不以理從事便是欲. 這處敬與義, 是箇體用." | ||
+ | :'從'의 뜻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從은 '순조롭다'는 것이다. 敬은 똑바로 서는 것이고, 怠는 엎어지는 것이다. 이치대로 하는 것이 義이며, 이치대로 하지 않는 것이 欲이다. 敬과 義는 體用관계이다." | ||
+ | :○須是將敬來做本領. 涵養得貫通時, 纔敬以直内, 便義以方外. 義便有敬, 敬便有義. 如居仁便由義, 由義便居仁. 敬者, 守於此而勿失之謂; 義者, 施於彼而合宜之謂. | ||
+ | :모름지기 敬을 본령으로 삼아야 한다. 함양공부가 철저해졌을 때, '敬以直内'하자마자 '義以方外'하게 된다. 義에 敬이 있고 敬에 義가 있으니, 마치 '仁에 머물면 곧 義를 말미암게 되고, 義를 말미암으면 곧 仁에 머물게 된다'는 것과 같다. 敬이라는 것은 여기서 지켜서 잃어버리지 않음을 말하고, 義라는 것은 저기에서 시행하여 합당한 것을 말한다. | ||
+ | :○西山眞氏曰: "武王之始踐阼也, 訪丹書於太公, 可謂急於聞道者矣. 而太公望所告, 不出敬與義之一言. 蓋敬則萬善俱立, 怠則萬善俱廢; 義則理為之主, 欲則物為之主. 上古聖人巳致謹於此矣. 武王聞之, 若湯之戒懼而銘之器物以自警焉. 蓋恐斯須不存, 而怠與欲得乘其隙也." | ||
+ | :서산 진씨가 말했다: "무왕께서 막 즉위하셨을 때 丹書를 태공에게 자문하셨으니, '道를 듣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고 말할 만하다. 태공망이 고한 것은 敬과 義 한 마디를 벗어나지 않았다. 대개 공경하면 뭇 善이 함께 확립되고, 태만하면 뭇 善이 함께 사라지며, 의로우면 이치가 주인이 되지만, 욕망을 추구하면 외물이 주인이 된다. 옛적 성인들께서는 이점에 대해 매우 지극히 조심하셨다. 무왕께서 이를 들으시고는, 마치 탕왕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기물에 銘을 새겨 스스로 경계한 것과 같이 하셨다. 아마도 잠시라도 [敬과 義를] 보존하지 않아 怠와 欲이 그 틈을 탈 것을 두려워 하셨던 것이다." | ||
+ | :○新安陳氏曰: "敬義對言, 其理甚精. 孔子於坤<文言>曰: '敬以直内, 義以方外.'<ref><주역> <문언> 「直」其正也,「方」其義也。君子敬以直內,義以方外,敬義立而德不孤。「直、方、大、不習无不利」,則不疑其所行也。</ref> 實自此發."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敬과 義를 대비해 말한 그 논리가 더욱 정밀하다. 공자께서 곤괘 <文言>에서 '敬以直内, 義以方外'라고 말씀하신 것은 실로 여기(무왕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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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退而於其几席、觴豆、刀劒、户牖, 莫不銘焉, 蓋聞湯之風而興起者. 今其遺語尚幸頗見<sub>形甸反</sub>於禮書, 願治<sub>去聲</sub>之君, 志學之士, 皆不可以莫之考也."<br/> | ||
+ | [무왕께서 이를 들으시고는] 물러나 궤석·식기·칼·창문에 이 경계를 새기지 않음이 없으셨으니, 아마도 탕왕의 풍모를 듣고 흥기하신 것이다. 오늘날 그 남겨진 말이 여전히 다행히도 예서에 상당히 드러나 있으니,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군주와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모두 [이 경계를] 상고하지 않아선 안 된다.<br/> | ||
+ | :張氏存中曰: "<大戴禮> <武王踐阼>篇, '武王踐阼三日, 召師尚父而問焉曰: 『黄帝顓帝之道, 可得而見與?』 曰: 『在丹書, 王欲聞之, 則齊矣.』 王齊三日, 師尚父奉書而入, 道書之言曰: 『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 凡事不强則枉, 弗敬則不正, 枉者滅廢, 敬者萬世.』 王聞書之言, 惕若恐懼, 而為戒書於席四端為銘焉. 銘曰: 『安樂必敬』 『無行可悔』 『一反一側, 亦不可不志<ref><대대례기> 원문에는 "不志"가 "以忘"으로 되어 있다.</ref> 『殷<ref><대대례기> 원문에는 '殷'자는 '所'자로 되어 있다.</ref>監不逺, 視爾<ref><대대례기> 원문에는 爾자가 邇자로 되어 있다.</ref>所代』, 鑑銘曰: 『見爾前, 慮爾後』, 盤銘曰: 『與其溺於人也, 寧溺於淵. 溺於淵, 猶可游也; 溺於人, 不可捄也.』, 楹銘曰: 『毋曰胡殘, 其禍將然; 毋曰胡害, 其禍將大; 毋曰胡傷, 其禍將長』, 牖銘曰: 『隨天之時, 以地之財, 敬祀皇天, 敬以先時』, 劒銘曰: 『帶之以為服, 動必行徳行. 德則興, 倍徳則崩』.'"<sub>倍與背同. 銘凡十有四, 今摘其辭義之易知者于此.</sub> | ||
+ | :장존중이 말했다: "<대대례기>의 <武王踐阼>에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무왕이 즉위한 지 3일 후에 사상보를 불러서 물었다: 「황제·전욱의 도를 볼 수 있겠는가?」 사상보가 대답했다: 「丹書에 있으니, 듣고자 하신다면 재계하십시오.」 왕이 3일간 재계하자, 사상보가 丹書를 들고 들어와 丹書의 내용을 낭송했다: 「공경함이 태만함을 이기는 사람은 길하고, 태만함이 공경함을 이기는 사람은 망한다. 의로움이 욕망을 이기는 사람은 순조롭고, 욕망이 의로움을 이기는 사람은 흉하다. 모든 일에 강하지 않으면 굽어지고 공경하지 않으면 바르지 않으니, 굽어진 것은 없어지고 공경한 것은 만세를 갈 것이다.」 왕이 丹書의 내용을 듣고 두려워하고 경계하여, 경계하는 글을 지어 자리 네 귀퉁이에 [다음과 같이] 새겼다: 「편안하고 즐거울 때 반드시 조심하라」·「후회할 만한 짓은 하지 마라」·「한 번 돌아누울 때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은나라라는 거울이 멀지 않으니, 저들이 [하나라를] 대신한 것을 보라.」 거울에는 [다음과 같이] 새겼다: 「네 앞을 보고 네 뒤를 생각해라.」 세숫대야에는 [다음과 같이] 새겼다: 「사람에게 빠질지언정 차라리 연못에 빠져라. 연못에 빠지면 그래도 헤엄칠 수 있지만, 사람에게 빠지면 구할 수 없다.」 기둥에는 [다음과 같이] 새겼다: 「무슨 해가 있겠냐고 말하지 말라. 그 화가 타오를 것이다. 뭐가 걱정스럽냐고 말하지 말라, 그 화가 클 것이다. 뭐가 문제냐고 말하지 말라, 그 화가 커질 것이다.」 창문에는 [다음과 같이] 새겼다: 「하늘의 때를 따르고 땅의 재화를 이용하라. 하늘을 공경히 모시고, 선대를 공경하라.」 검에는 [다음과 같이] 새겼다: 「칼을 차 복식을 갖추되, 움직일 때 반드시 덕을 행하라. 덕을 행하면 흥기하겠지만, 덕을 등지면 망할 것이다.」 "<sub>銘이 총 14수인데, 그 가운데 내용이 알기 쉬운 것만 여기에 뽑았다.</su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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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此言'新民', 其引此, 何也?" <br/> | ||
+ | 물었다: "여기(전2장)에서는 '新民'을 말하는데, 이것(탕왕의 자기 수양 내용)을 인용한 것은 어째서인가?" <br/> | ||
+ | 曰: "此自其本而言之, 蓋以是爲自新之至而新民之端也." <br/> | ||
+ | 대답했다: "이것은 근본으로부터 말한 것이다. 대개 이것을 自新의 완성이자 新民의 시작으로 삼은 것이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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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康誥>之言'作新民', 何也?" <br/> | ||
+ | 물었다: "<康誥>에 말에서 '作新民'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br/> | ||
+ | 曰: "武王之封康叔也, 以商之餘民, 染紂汚俗而失其本心也. 故作<康誥>之書而告之以此, 欲其有以鼓舞而作興之, 使之振奮踴躍, 以去<sub>上聲</sub>其惡而遷於善, 舍<sub>上聲</sub>其舊而進乎新也. 然此豈聲色<ref><한어대사전> 4. 《詩‧大雅‧皇矣》: “帝謂文王,予懷明德,不大聲以色,不長夏以革。” ▶ 孔穎達 疏: “不大其音聲以見於顏色而加人,不以年長大以有變革於幼時。” 後遂以“聲色”為疾言厲色之意。 ▶ 《禮記‧中庸》: “聲色之於以化民, 末也。”</ref>號令之所及哉? 亦自新而已矣. <br/> | ||
+ | 대답했다: "무왕께서 강숙을 봉하셨을 때, 상나라의 유민들이 紂의 오염된 습속에 물들어 그들의 본심을 잃었다. 그러므로 <강고>의 글을 지어 이를 강숙에게 말해줘, 강숙이 백성들을 고무시키고 흥기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떨쳐 일어나 악한 것을 제거하고 선한 것으로 옮겨가며,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큰 소리나 엄한 낯빛·호령이 미칠 바겠는가? 단지 자신을 새롭게 만들 뿐이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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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孔氏<小序>以<康誥>爲成王周公之書, 而子以武王言之, 何也?" <br/> | ||
+ | 물었다. "공안국의 <小序>는 <康誥>를 성왕과 주공의 책이라고 여겼는데,<ref><상서정의> <강고> <序> 成王旣伐管叔蔡叔.</ref> 그대가 '무왕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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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此五峯胡氏之說也.<sub>胡氏, 名宏, 字仁仲, 建安人, 文定公安國之子也. 其說見<皇王大紀></sub> 蓋嘗因而考之, 其曰朕弟寡兄云者, 皆爲武王之自言, 乃得事理之實; 而其他証亦多. <小序>之言不足深信, 於此可見. 然非此書大義所關, 故不暇於致詳. 當别爲<sub>去聲</sub>讀書者言之耳."<br/> | ||
+ | 대답했다: "이것은 호오봉의 설이다.<sub>호씨의 이름이 宏이고 字는 仁仲이며 건안 사람이니, 문정공 호안국의 아들이다. 그의 설은 <皇王大紀>에 보인다.<ref><호굉집>, 중화서국, 1987, 262쪽, <皇王大紀論> <載書之敍> <康誥>序曰: "成王既伐管叔、蔡叔, 以殷餘民封康叔." 謹按, 康叔者, 成王叔父也, 不應稱之曰: "朕其弟". 成王者, 康叔之猶子也, 不應自稱曰: "乃寡兄". 其曰兄曰弟者, 盖武王命康叔之辭也, 故<史記>武王封康叔於衛. 且康叔者, 文王之子, 叔虞, 成王之弟也. 周公東征叔虞, 已得封於唐, 王命歸周公於東, 豈有康叔得封反在唐叔之後乎? 故不得不捨<書>序而從經史也. </ref></sub> 대개 일찍이 호오봉의 설에 따라 상고해보니, [<康誥>에서] 朕·弟·寡兄라고 말하는 것을 모두 무왕이 스스로 일컬은 것으로 보아야 맥락에 맞고, 그 다른 증거 또한 많다. <小序>의 말을 깊이 신뢰하기 부족함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小序>의 신뢰성 여부는] 이 책의 대의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자세히 따질 겨를이 없다. 응당 추가적으로 <서경>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말했을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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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詩>之言'周雖舊邦, 其命維新', 何也?" <br/> | ||
+ | 물었다: "<詩>에서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지만, [문왕에 이르러] 천명이 새로워졌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br/> | ||
+ | 曰: "言周之有邦, 自后稷以來千有餘年, 至於文王, 聖徳日新而民亦丕變<ref><한어대사전> 大變。 ▶ 《書‧盤庚上》: “罔有逸言, 民用丕變。” ▶ 孔 傳: “民用大變從化。” </ref>.<br/> | ||
+ | 대답했다: "주나라가 생기고 후직으로부터 천여 년이 지나 문왕에 이르러, 성인의 덕이 날로 새로워지고 백성들 또한 크게 변했음을 말한 것이다." | ||
+ | :新安陳氏曰: "此乃推本言之, <詩>無日新、丕變意. 蓋承上文'日新', 作新說來."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이것은 바로 [주자께서] 근본을 미루어 말씀하신 것이니, <시>에는 '날로 새로워졌다'거나 '크게 변했다'는 의미는 없다. 아마도 앞 글의 '日新'을 이어 새로운 설명을 만드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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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天命之以有天下. 是其邦雖舊而命則新也. 蓋民之視效在君, 而天之視聽在民. 君徳既新, 則民徳必新; 民徳既新, 則天命之新, 亦不旋日<ref><한어대사전> 1. 一日之間。 </ref>矣."<br/> | ||
+ | 그러므로 하늘이 문왕께 명을 내려 천하를 소유하게 하였다. 이것이 '나라는 비록 오래되었지만 천명은 새롭다'는 것이다. 대개 백성들의 본보기는 군주에게 달려있고,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백성에게 달려있다. 군주의 덕이 새로워진 이상 백성의 덕은 반드시 새로울 것이고, 백성의 덕이 새로워진 이상 천명이 새로워짐 또한 하루가 걸리지 않을 것이다.<br/> | ||
+ | :問: "'天之視聽在民', 與'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ref><서경> <주서> <泰誓中> 天視自我民視,天聽自我民聽。</ref>, 若有不同, 如何?" 朱子曰: "天豈曾有耳目以視聽? 只是自民之視聽, 便是天之視聽. 如帝命文王, 豈天諄諄然命之? 只是文王要恁地, 便是理合恁地, 便是帝命之也." 又曰: "若一件事, 民人皆以為是, 便是天以為是; 若民人皆歸往之, 便是天命也." | ||
+ | :물었다: "'天之視聽在民'과 '하늘은 내 백성이 보는 것을 통해 보고, 하늘은 내 백성이 듣는 것을 통해 듣는다'는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에 언제 일찍이 귀와 눈이 있어서 보고 들었겠는가? 다만 백성들의 보고 들음을 통하는 것이 바로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이다. 상제께서 문왕에게 명한 것이 어찌 하늘이 꼬치꼬치 명령한 것이겠는가? 다만 문왕께서 이렇게 하려고 하신 것이 이치상 마땅히 이와 같아야 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상제가 명한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어떤 일을 백성이 모두 옳게 여기는 것은 곧 하늘도 옳게 여기는 것이고, 백성들이 모두 귀의해 오는 것은 하늘이 명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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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所謂'君子無所不用其極'者, 何也?"<br/> | ||
+ | 물었다. "이른바 '군자는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br/> | ||
+ | 曰: "此結上文<詩><書>之意也. 蓋盤銘言自新也, <康誥>言新民也, 文王之詩自新、新民之極也.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 極, 即至善之云也. 用其極者, 求其止於是而巳矣."<br/> | ||
+ | 대답했다: "이 말은 윗 글의 <詩>와 <書>의 뜻을 마무리한 것이다. 대개 盤銘은 '스스로를 새롭게 함'을 말한 것이고 <康誥>는 '백성을 새롭게 함'을 말한 것이며, 문왕의 시는 '스스로 새롭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함'의 지극함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 것이니, '極'이란 곧 至善을 말한다. '지극하게 한다'는 것은 여기(自新과 新民)에 머물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 ||
+ | :朱子曰: "觀上文三引<詩><書>而此以無所二字總而結之, 則於自新、新民皆欲用其極, 可知矣."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앞 글에서 <詩>와 <書>를 세 번 인용하고 '無所' 두 글자로 총결한 것을 보면, '스스로 새롭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함'을 모두 지극하게 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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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傳三章=== | ||
+ | 詩云:「邦畿千里,惟民所止。」<br/> | ||
+ | <시>에서는 "왕도 천 리, 백성들이 살 곳이로다"라고 하였다. | ||
+ | :詩商頌玄鳥之篇。邦畿,王者之都也。止,居也,言物各有所當止之處也。 | ||
+ | :<시> <상송> <현조>편이다. '邦畿'은 천자의 도읍이다. '止'는 '居'이니, 만물이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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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云:「緡蠻黃鳥,止于丘隅。」子曰:「於止,知其所止,可以人而不如鳥乎!」<sub>緡,詩作綿。</sub><br/> | ||
+ | [또] <시>에서는 "緡蠻히 우는 황조, 숲속에 머무네"라고 했는데, 공자께서는 "살 곳에 대해 [저 황조는] 살 곳을 [제대로] 아니, 사람이 새만 못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셨다.<sub>'緡'을 <시>에서는 '綿'이라고 썼다.</sub> | ||
+ | :詩小雅綿蠻之篇。緡蠻,鳥聲。丘隅,岑<sub>鋤林反</sub>蔚<sub>紆弗反</sub>之處。<sub>岑蔚二字本古註</sub>子曰以下,孔子說詩之辭。言人當知所當止之處也。 | ||
+ | :<시> <소아> <緡蠻>편이다. '緡蠻'은 새소리이다. '丘隅'는 깊고 울창한 숲이다.<sub>'岑蔚' 두 자는 옛 주석에 근거한 것이다.</sub> '子曰' 이하는 공자께서 시를 해설하신 말이니, 사람이라면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을 알아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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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云:「穆穆文王,於緝熙敬止!」為人君,止於仁;為人臣,止於敬;為人子,止於孝;為人父,止於慈;與國人交,止於信。<sub>於緝之於,音烏。</sub><br/> | ||
+ | <시>에서 "穆穆한 문왕이시여! 아! 끊임없이 밝히셔서 敬하며 [편히] 머무시는구나!"라고 하였으니, [문왕께서는] 임금이 되서는 '어짊'(仁)에 머무셨고, 신하가 되서는 '공경'(敬)에 머무셨으며, 자식이 되서는는 '효성스러움'(孝)에 머무셨고, 부모가 되서는 '자애로움'(慈)에 머무셨으며, 國人과 교제할 때는 '미더움'(信)에 머무셨다. | ||
+ | :詩文王之篇。穆穆,深遠之意。<sub>以徳容言</sub>於,歎美辭。緝,繼續也。熙,光明也。<sub>緝, 不容已之誠也; 熙, 不容掩之明也.</sub>敬止,言其無不敬而安所止也。 | ||
+ | :<시> <문왕>편이다. '穆穆'은 [문왕의 덕이] 심원하다는 뜻이다.<sub>덕에 대해 말한 것이다.</sub> '오'(於)는 탄미하는 말이다. '緝'은 계속함이다. '熙'는 빛남이다.<sub>'緝'은 멈출 수 없는 성실함을 [말하고], '熙'는 가릴 수 없는 밝음을 [말한다].</sub> '敬止'는 敬하지 않음이 없어서 머무는 곳을 편히 여긴다는 것이다. | ||
+ | ::朱子曰: "緝熙是工夫; 敬止是功效."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緝熙'는 공부이고, '敬止'는 공효이다." | ||
+ | :引此而言聖人之止,無非至善。五者乃其目之大者也。學者於此,究其精微之蘊<sub>委粉於問二反</sub>,而又推類以盡其餘,則於天下之事,皆有以知其所止而無疑矣。 | ||
+ | :이를 인용해 성인은 至善에 머물지 않음이 없음을 말하였다. 다섯 가지는 바로 그(至善에 머묾) 항목 가운데 큰 것이다. 배우는 자가 이에 대해 정미한 것을 궁구하고 또 유추해 나머지를 모두 아우른다면, 천하의 일에 대해 모두 그것이 머물 곳을 알아 의심함이 없을 것이다. | ||
+ | ::朱子曰: "'為人君止於仁', 仁亦有㡬多般, 須隨處看. 這一事合當如此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是仁. '為人臣止於敬', 敬亦有多少般, 不可止道擎跽曲拳<ref><장자> <인간세> 擎、跽、曲拳,人臣之禮也,人皆為之,吾敢不為邪!<한어대사전> 陳鼓應 今注: “‘擎’, 執笏;‘跽’, 跪拜。 ‘曲拳’, 鞠躬。”</ref>是敬. 如'陳善閉邪', 納君無過, 皆是敬. 若止執一, 便偏了, 安得謂之'至善'?"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為人君止於仁'의 '仁'에도 여러 [뜻이] 있으니, 상황에 따라 살펴야 한다. 이 일에서 마땅히 이렇게 해야하는 것도 仁이고, 저 일에서 마땅히 저렇게 해야하는 것도 仁이다. '為人臣止於敬'의 '敬'에도 여러 [뜻이] 있으니, '홀을 잡거나, 무릎 꿇고 절하거나, 몸을 굽히는 것'만이 敬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선한 것을 아뢰고 삿된 것을 막거나'<ref><맹자> <이루상> 1. 故曰:責難於君謂之恭,陳善閉邪謂之敬,吾君不能謂之賊。</ref> 임금을 허물 없는 경지에 들이는 것 모두 敬이다. 만일 그저 하나에만 집착하면 치우치게 되니, 어찌 '至善'이라 할 수 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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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云:「瞻彼淇澳,菉竹猗猗。有斐君子,如切如磋,如琢如磨。瑟兮僩兮,赫兮喧兮。有斐君子,終不可諠兮!」如切如磋者,道學也;如琢如磨者,自脩也;瑟兮僩兮者,恂慄也;赫兮喧兮者,威儀也;有斐君子,終不可諠兮者,道盛德至善,民之不能忘也。<sub>澳,於六反。菉,詩作綠。猗,協韻音阿。僩,下版反。喧,詩作咺,諠,詩作諼;並況晚反。恂,鄭氏讀作峻。</sub><br/> | ||
+ | <시>에서 "저 기수(淇水) 모퉁이를 보라, 푸른 대가 무성하구나. 문채나는 군자여, 자른 듯 간 듯 쪼은 듯 간 듯하구나. 엄밀하고 굳세며 빛나고 성대하니, 문채나는 군자여, 끝내 잊을 수 없도다!"라고 하니, '如切如磋'라는 것은 학문을 말하고, '如琢如磨'는 스스로 수양함이며, '瑟兮僩兮'는 두려워 하는 듯한 [모습]이고, '赫兮喧兮'는 [겉으로 드러난] 위의이다. '有斐君子,終不可諠兮'는 [그의] 盛德과 至善을 백성들이 잊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 ||
+ | :詩衛風淇澳之篇。淇,水名。澳,隈<sub>烏回反</sub>也。猗猗,美盛貌。興<sub>去聲</sub>也。斐,文貌。切以刀鋸<sub>居御反</sub>,琢以椎<sub>直追反</sub>鑿,皆裁物使成形質<ref><한어대사전> 2. 外形, 外表。</ref>也。磋以鑢<sub>音慮</sub>鐋<sub>他浪反</sub>,磨以沙石,皆治物使其滑澤也。治骨角者,既切而復<sub>扶又反下同</sub>磋之。治玉石者,既琢而復磨之。皆言其治之有緒,而益致其精也。<sub>切與琢是治之有端緒; 磋與磨是益致其精細.</sub>瑟,嚴密之貌。僩,武毅之貌。<sub>嚴密, 不麤疏也; 武毅, 不怠弛也.</sub>赫喧,宣著盛大之貌。諠,忘也。道,言也。學,謂講習討論之事,自脩者,省<sub>星上聲</sub>察克治之功。恂慄,戰懼也。<sub>戰懼之意, 嚴於中.</sub>威,可畏也。儀,可象也。引詩而釋之,以明<sub>此明字謂發明</sub>明明德者之止於至善。道學、自脩,言其所以得之之由。恂慄、威儀,言其德容表裏之盛。<sub>恂慄, 在裏徳也; 威儀, 見於表容也</sub>卒乃指其實<sub>謂盛徳至善</sub>而歎美之也。 | ||
+ | :<시> <위풍> <기욱> 편이다. '淇'는 강 이름이다. '澳'는 모퉁이이다. '猗猗'는 아름답고 성대한 모양이다. [이 시는] 興이다.<ref><한어대사전> 2. 《詩》六義之一。 乃先言他物以引起所詠之詞的一種寫作手法。</ref> '斐'는 문채나는 모습이다. '자르는 것'(切)은 칼·톱을 쓰고, '쪼는 것'(琢)은 망치·끌을 쓰니, 모두 사물을 잘라 모양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가는 것'(磋)은 줄·대패를 쓰고, '연마하는 것'(磨)은 모래·돌을 쓰니, 모두 사물을 다듬어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骨角을 다듬는 자는 자르고 나서(切)갈고(磋), 玉石을 다듬는 자는 쪼고 나서(琢) 연마하니(磨), 모두 '[사물을] 다듬을 때 시작점이 있고 [그러고나서] 그것의 정미함을 더욱 지극히 함'을 말한 것이다.<sub>'切'과'琢'은 '다듬을 때 시작점이 있는 것'이고, '磋'와 '磨'는 '그것의 정미함을 더욱 지극히 하는 것'이다.</sub> '瑟'은 엄밀한 모양이고, '僩'은 굳센 모양이다.<sub>'엄밀함'은 거칠지 읺다는 것이고, '굳셈'은 태만하지 않다는 것이다.</sub> '赫'·'喧'은 드러나고 성대한 모양이다. '諠'은 '잊는다'는 것이다. '道'는 '말하다'이고, '學'은 강습하고 토론하는 일을 말한다. '自脩'라는 것은 성찰하고 다스리는 공부이다. '恂慄'은 두려워 하는 것이다. <sub>'두려워한다'는 건 마음을 엄숙하게 한다는 것이다.</sub> '위엄'(威)은 두려워할 만한 것이고, '의장'(儀)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시>를 인용하고 이를 풀이해 '[자신의] 명덕을 밝힌 자가 至善에 머묾'을 밝힌 것이다. '道學'과 '自脩'는 至善을 얻게 된 이유를 말한 것이고, '恂慄'과 '威儀'는 그의 德과 容·안과 밖의 성대함을 말한 것이다.<sub>'恂慄'은 내면의 덕에 있고, '威儀'은 겉모습으로 드러난다.</sub> 마지막에 그의 실질<sub>'盛徳至善'을 말한다.</sub>을 가리키며 탄미하였다. | ||
+ | ::朱子曰: "切而不磋, 未到至善處; 琢而不磨, 亦未到至善處. '瑟兮僴兮', 則誠敬存於中矣. 未至於'赫兮喧兮', 威儀輝光著見於外, 亦未為至善. 至於'民之不能忘', 若非十分至善, 何以使民久而不能忘?"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르기만 하고 갈지 않으면 至善한 경지에 이를 수 없고, 쪼기만 하고 연마하지 않아도 至善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 '瑟兮僴兮'는 誠敬이 내면에 보존된 것이지만, '赫兮喧兮'에 도달하지 못하면 위의와 빛이 밖으로 드러나더라도 至善이 될 수 없다. '백성이 잊지 못했다'의 경우, 십분 至善하지 않으면, 어떻게 백성들로 하여금 오래토록 잊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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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云:「於戲前王不忘!」君子賢其賢而親其親,小人樂其樂而利其利,此以沒世不忘也。<sub>於戲,音嗚呼。樂,音洛。</sub><br/> | ||
+ | <시>에서 "아! 예전 임금을 잊을 수 없구나!"라고 하니, 군자는 예전 임금의 어진 점을 어질다고 [높게] 평가하고 예전 임금이 가까이 했던 것을 가까이 하며, 소인은 예전 임금이 즐겁게 해줬던 것을 즐겁게 여기고 예전 임금이 이롭게 해줬던 것을 이롭게 여긴다. 이 때문에 [예전 임금께서] 돌아가셨는데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 ||
+ | :詩周頌烈文之篇。於戲,歎辭。前王,謂文、武也。君子,謂其後賢後王。小人,謂後民也。此言前王所以新民者,止於至善,能使天下後世無一物不得其所,所以既沒世而人思慕之,愈久而不忘也。此兩節詠歎<ref><한어대사전> 2. 贊嘆歌頌</ref>淫泆<ref><한어대사전> 3. 謂聲音綿延不絕。</ref>,其味深長,當熟玩之。 | ||
+ | :<시> <주송> <열문>편이다. '於戲'는 찬탄하는 말이다. '前王'은 문왕·무왕이다. '君子'는 후대의 현인·임금을 말하고, '小人'은 후대의 백성이다. 이 구절은 '예전 임금이 백성을 새롭게 한 것이 至善에 머물러 천하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자도 제 자리를 얻지 못함이 없게 할 수 있었으므로, 이미 돌아가셨는데도 사람들이 사모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잊지 못했음'을 말한다. 이 두 구절은 찬탄의 [여운이] 넘쳐 의미가 깊고 오래가니, 충분히 완미해보아야 한다. | ||
+ | ::朱子曰: "沒世而人不能忘, 如堯舜文武之徳萬世尊仰之, 豈不是'賢其賢'? 如周后稷之徳, 子孫宗之, 以為先祖之所自出, 豈不是'親其親'?"<ref><주자어류> 권 16. 問「前王不忘」云云。曰:「前王遠矣,盛德至善,後人不能忘之。『君子賢其賢』,如堯舜文武之德,後世尊仰之,豈非賢其所賢乎!『親其親』,如周后稷之德,子孫宗之,以為先祖先父之所自出,豈非親其所親乎!</ref>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돌아가셨는데도 사람들이 잊지 못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요·순·문·무의 덕을 만세토록 추앙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그의 어짊을 어질게 여기는 것'(賢其賢)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주나라 [시조인] 후직의 덕을 자손들이 종지로 삼아 '선조가 말미암아 나온 바'로 여기니, 어찌 '그가 가까이 했던 것을 가까이 함'이 아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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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r/> | ||
+ | ::右傳之三章。釋止於至善。 | ||
+ | ::이상은 전3장이다. '止於至善'을 해석했다. | ||
+ | :::此章內自引淇澳詩以下,舊本誤在誠意章下。 | ||
+ | :::이 장 안에서 <淇澳> 시를 인용한 것 아래로, 옛 판본에서는 성의장 아래에 잘못 위치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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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문』 전3장==== | ||
+ | 或問: "此引<玄鳥>之詩, 何也?"<br/> | ||
+ | 혹자가 물었다: "여기에서 <현조> 시를 인용한 것은 어째서인가?" <br/> | ||
+ | 曰: "此以民之止於邦畿而明物之各有所止也." <br/> | ||
+ | 답했다: "이는 백성들이 수도(邦畿)에 머물렀음을 통해 사물에는 각각 머물 곳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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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引<緜蠻>之詩而系以孔子之言, 孔子何以有是言也?"<br/> | ||
+ | 물었다: "<緜蠻> 시를 인용하고 공자의 말을 덧붙였는데, 공자께서는 어째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인가?"<br/> | ||
+ | 曰: "此夫子說詩之辭也. 蓋曰: '鳥於其欲止之時, 猶知其當止之處, 豈可人爲萬物之靈, 而反不如鳥之能知所止而止之乎?' 其所以發明人當知止之義, 亦深切矣." <br/> | ||
+ | 대답했다: "이는 공자께서 시를 해설하신 말이다. 아마도 ‘새조차 머무르고자 할 때에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을 아는데, 어찌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되어서 도리어 새가 머물러야 할 곳을 알아 머무르는 것만 못해서야 되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머물 곳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밝히신 것이 또한 매우 간절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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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引<文王>之詩而繼以君臣父子與國人交之所止, 何也?"<br/> | ||
+ | 물었다: "<문왕> 시를 인용하고 군신·부자·백성들과의 교제에서 머물러야 할 곳을 덧붙인 것은 어째서인가?"<br/> | ||
+ | 曰: "此因聖人之止, 以明至善之所在也. 蓋天生烝民, 有物有則. 是以萬物庶事莫不各有當止之所. 但所居之位不同, 則所止之善不一. 故爲人君, 則其所當止者在於仁; 爲人臣, 則其所當止者在於敬; 爲人子, 則其所當止者在於孝; 爲人父, 則其所當止者在於慈; 與國人交, 則其所當止者在於信, 是皆天理人倫之極致, 發於人心之不容巳者. 而文王之所以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者, 亦不能加毫末於是焉. 但衆人類<ref><한어대사전> 11. 眾多。; 12. 率,皆;大抵。</ref>爲氣稟物欲之所昏. 故不能常敬而失其所止. 唯聖人之心表裏洞然, 無有一毫之蔽. 故連續光明, 自無不敬, 而所止者莫非至善, 不待知所止而後得所止也. <br/> | ||
+ | 대답했다: "이는 성인이 머문 것에 기인해 지극한 선(至善)이 있는 곳을 밝힌 것이다. 대개 하늘이 백성들을 내림에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ref><시경> <대아> <증민> 天生烝民、有物有則。</ref> 그러므로 모든 사물에 각각 머물러야 할 곳이 없는 경우는 없다. 다만 머무는 지위가 같지 않기 때문에, 머무는 선이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군주가 되면 그가 머물러야 하는 바는 仁에 있고, 신하가 되면 그가 머물러야 하는 바가 敬에 있으며, 자식이 되면 그가 머물러야 하는 바가 孝에 있고, 부모가 되면 그가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바가 자애(慈)에 있으며, 나라의 백성들과 교제하게 되면 그가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바가 신뢰(信)에 있다. 이는 모두 천리·인륜의 극치이고 인간의 마음 상 차마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문왕께서 천하의 본보기가 되셔서 후세에 전해질 만했던 점 역시 여기에 터럭만한 것도 더할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은 대체로 기품과 물욕에 의해서 어두워졌기 때문에, 항상 敬할 수 없고 머물 곳을 잃어버렸다. 오직 성인의 마음만 안팎이 훤히 비쳐 한 터럭의 가림도 없기 때문에, [명덕의] 빛을 계속 이어서 스스로 敬하지 않음이 없고, 머무는 바 가운데 지극한 선이 아님이 없어서, 머물 곳을 안 이후에 머물 곳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 | ||
+ | :新安陳氏曰: "學者必先知所止, 而後方得所止; 聖人安於所止, 則不待先知而後得也."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배우는 자는 반드시 먼저 머물 곳을 안 이후에야 비로소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 성인은 머무는 곳을 편히 여기니, 먼저 안 이후에 얻을 필요가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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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傳>引此詩而歷陳所止之實, 使天下後世得以取法焉. 學者於此誠有以見其發於本心之不容已者而緝熈之, 使其連續光明, 無少間斷, 則其敬止之功, 是亦文王而已矣. <詩>所謂'上天之載, 無聲無臭, 儀刑文王, 萬邦作孚', 正此意也."<br/> | ||
+ | 그러므로 傳에서 이 시를 인용하여 머물 곳에 대한 내용을 하나하나 드러내, 천하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본보기로 삼을 수 있게 하였다. 배우는 자들이 여기에서 진실로 그칠 수 없는 본심에서 드러난 것을 보고 계속 밝히고, 그 끊임없이 계속 빛나는 것으로 하여금 잠시라도 끊어짐이 없게 할 수 있다면, 그 敬止의 공효가 또한 문왕과 [다름 없을 것이다]. <시>의 이른바 ‘하늘의 일에는 소리도 냄새도 없지만, 문왕을 본받으면 온 나라 사람들이 진작해 믿을 것이다’<ref><시경> <대아> <문왕> 上天之載、無聲無臭。儀刑文王、萬邦作孚。</ref>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뜻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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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子之說<詩>, 既以敬止之止爲語助之辭, 而於此書又以爲所止之義, 何也?" <br/> | ||
+ | 물었다: "그대가 <詩>를 설명하면서 ‘敬止’의 ‘止’를 어조사로 여겼는데,<ref><시집전> <대아> <문왕> 止, 語辭.</ref> 이 글에서 도리어 '所止'라는 뜻으로 새긴 것은 어째서인가?"<br/> | ||
+ | 曰: "古人引<詩>斷<sub>音短</sub>章, 或姑借其辭以明已意, 未必皆取本文之義也. <br/> | ||
+ | 대답했다: "옛 사람들은 <시>를 인용하면서 [일부] 장을 잘랐는데, 간혹 잠시 이 부분의 글을 빌려서 자신의 뜻을 밝혔으므로, 반드시 모두 본문의 뜻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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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五者之目, 詞約而義該矣. 子之說乃復<sub>扶又反</sub>有所謂'究其精微之藴而推類以通之'者, 何其言之衍而不切耶?" <br/> | ||
+ | 물었다: "다섯 가지 항목은 말은 간략한데 의미는 충분하다. 그대의 설에 도리어 다시 이른바 ‘정미한 것을 궁구하고 유추해 통하게 한다’<ref><대학장구> 學者於此,究其精微之蘊,而又推類以盡其餘,則於天下之事,皆有以知其所止而無疑矣。</ref>고 말한 것은, 어째서 그 말이 장황하고 절실하지 않은가?" <br/> | ||
+ | 曰: "舉其徳之要而總名之, 則一言足矣<sub>一言謂一字, 如仁字、敬字之類.</sub>; 論其所以爲是一言者, 則其始終本末, 豈一言之所能盡哉? 得其名而不得其所以名, 則仁或流於姑息<ref><한어대사전> 2. 無原則的寬容。</ref>, 敬或墮於阿諛, 孝或陷父, 而慈或敗子, 且其爲信亦未必不爲尾生、白公之爲也." <br/> | ||
+ | 대답했다: "덕의 요체를 들어서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한 글자로 충분하겠지만, 이 한 글자가 되는 까닭을 논한다면 그 과정(始終本末)을 어찌 한 글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름만 얻고 이름이 되는 까닭을 얻지 못한다면, 仁은 혹 '원칙 없는 관용'이 될 것이고, 敬은 혹 아첨에 떨어질 것이며, 孝는 혹 부모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고, 자애로움은 혹 자식을 망칠 것이며, 또 미더움 역시 반드시 尾生이나 白公이 행한 것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 ||
+ | :<莊子>尾生與女子期於梁下, 女子不來, 水至不去, 抱梁柱而死. 梁, 橋也. | ||
+ | :<장자>에 따르면, 미생이 여인과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여인이 오지 않았다. 미생은 물이 차올라도 떠나지 않고 다리 기둥을 껴안고 있다가 죽었다.<ref><장자> 잡편 <도척> 尾生與女子期於梁下,女子不來,水至不去,抱梁柱而死。</ref> '梁'은 다리이다. | ||
+ | :○<左傳>哀公十六年, 鄭人殺子木<sub>楚平王太子建也, 因遇讒出奔而至鄭.</sub>, 其子曰勝在吳. 子西欲召之<sub>楚令尹子西</sub>, 曰: "吾聞勝也, 信而勇, 不爲不利." 葉公曰:<sub>葉音攝</sub> :"周仁之謂信, 率義之謂勇. 吾聞勝也好復言<sub>言之所許, 必欲復行, 不顧道理.</sub>而求死士, 殆有私乎! 復言, 非信也; 期死, 非勇也, 子必悔之." 弗從, 使處吳竟<sub>音境</sub>爲白公<sub>白, 楚邑也. 邑宰僣稱公</sub>. 請伐鄭, 子西許之. 未起師, 晉人伐鄭, 楚救之, 勝怒曰: "鄭人在此, 讎不逺矣!" 勝自厲劒, 子期之子平見之曰: "王孫何自厲也?" 曰: "勝以直聞, 不告女<sub>音汝</sub>, 庸為直乎? 將以殺爾父." 平以告子西, 子西不悛. 吳人伐愼, 白公敗之. 請以戰備獻, 許之, 遂作亂, 殺子西子期于朝. | ||
+ | :<좌전> 애공 16년에, 정나라 사람이 子木<sub>초 평왕의 태자 建이니, 참소를 당해 달아났다가 정나라에 왔다.</sub>을 죽였는데, 그의 아들 勝이 오나라에 있었다. 子西<sub>초나라 영윤 자서이다.</sub>가 그를 부르고자 했다: "내가 듣기에 승은 신의와 용기가 있다고 하니, 불리한 일은 되지 않을 것이다." 섭공이 말했다: "인에 부합하는 것을 신의라 하고, 의로운 행동을 실천하는 것을 용기라고 합니다. 제가 듣기에, 승은 뱉은 말을 애써 이행하려 하고<sub>말로 허락한 것을 반드시 이행하고자 하여 도리를 살피지 않는다.</sub> 죽음을 무릅쓰는 용사가 되고자 하니, 아마도 개인적인 원한 때문일 것입니다! 뱉은 말을 애써 이행하려고 하는 것은 신의가 아니며, 죽기를 바라는 것은 용기가 아니니, 그대는 필시 후회할 것입니다." 자서는 이를 따르지 않고 승으로 하여금 오나라와의 국경에 있게 하고 白公으로 삼았다.<sub>白은 초나라 고을이다. 읍재를 公으로 참칭했다.</sub> 승이 정나라를 치자고 자서에게 청했는데, 자서가 허락했다. 아직 군대를 일으키기도 전에 진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했는데, 초나라가 정나라를 구원하니 승이 분노했다: "정나라 놈이 여기에 있었구나! 원수가 멀리 있지 않았구나!" 승이 스스로 칼을 갈고 있는데, 子期의 아들 平이 이를 보고 물었다: "왕손께서는 어째서 직접 칼을 갈고 계십니까?" 승이 대답했다: "나는 대쪽같기로 유명하니, 너에게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어찌 대쪽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장자 이 칼로 네 아비(자서와 자기는 친형제이므로 함께 죽이려고 한 것이다.)를 죽이려고 한다." 평이 이를 자서에게 고했는데, 자서는 깨닫지 못했다. 오나라가 초나라의 愼 땅을 공격했는데, 백공이 패퇴시켰다. 이에 백공이 전리품을 바치기를 청하니, 자서가 허락했는데, 백공이 마침내 난을 일으켜 조정에서 자서와 자기를 살해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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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况<傳>之所陳, 姑以見<sub>形甸反</sub>物各有止之凡例, 其於大倫之目, 猶且闕其二焉. 苟不推類以通之, 則亦何以盡天下之理哉?"<br/> | ||
+ | 또 하물며 傳에서 말한 것은 다만 사물이 각각 그쳐야 할 일반적 예시를 보여주고 있고, 인륜의 항목에 대해서는 오히려 두 가지(부부와 장유)를 빠뜨렸다. 만약 '유추하여 통하게 하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천하의 이치를 다할 수 있겠는가?" | ||
+ | :節齊蔡氏曰: "所謂'得其名而不得其所以名', 若細推之, 如為人君止於仁, 固同一仁也, 然仁亦何止一端? 生之育之, 固仁也; 刑之威之, 亦仁也. 若執著其仁之一端, 不能隨處止其仁之所止, 安得謂止於仁之至善? 為人臣止於敬, 固同一敬也, 然敬亦何止一端? 鞠躬盡瘁, 固敬也; 陳善閉邪, 亦敬也. 若執著其敬之一端, 不能隨處止其敬之所止, 安得謂止於敬之至善? 為人子止於孝, 固同一孝也, 然孝亦何止一端? 先意承志, 固孝也; 幾諫不違亦孝也. 若執著其孝之一端, 不能隨處止其孝之所止, 安得謂止於孝之至善? 以至為人父止於慈, 與國人交止於信, 皆當如此. 而又推類以及其餘, 則凡天下之事, 無大無小, 雖千條萬緒, 皆有以知其所當止, 而無不止於至善矣." | ||
+ | :절재 채씨가 말했다: "이른바 '이름만 얻고 이름이 되는 까닭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자세히 생각해보자면, 예를 들어 임금된 자가 仁에 머무는 것은 진실로 동일한 仁이지만, 仁이 또 어찌 한 경우에 그치겠는가? 낳아주고 길러주는 것도 진실로 仁이고, 형벌을 내리고 두렵게 하는 것도 仁이다. 만일 仁의 한 경우에 집착해 상황에 따라 仁의 자리에 머물지 못한다면, 어찌 '仁의 지극히 선함'에 머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신하된 자가 敬에 머무는 것은 진실로 동일한 敬이지만, 敬이 또 어찌 한 경우에 그치겠는가? '공경해 마음을 다하는 것'(鞠躬盡瘁)도 진실로 敬이고 '선을 아뢰고 삿됨을 막는 것'(陳善閉邪)도 敬이다. 만일 敬의 한 경우에 집착해 상황에 따라 敬의 자리에 머물지 못한다면, 어찌 '敬의 지극히 선함'에 머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자식된 자가 孝에 머무는 것은 진실로 동일한 孝지만, 孝가 또 어찌 한 경우에 그치겠는가? '먼저 뜻을 받드는 것'(先意承志)<ref><한어대사전> 本謂孝子先父母之意而承順其志, 後泛指揣摩人意, 諂媚逢迎。 ▶ 《禮記‧祭義》: “君子之所為孝者, 先意承志, 諭父母於道。” </ref>도 孝이고 '은미하게 간언하고 어기지 않는 것'(幾諫不違)<ref><논어> <리인> 18. 子曰:「事父母幾諫。見志不從,又敬不違,勞而不怨。」</ref>도 孝이다. 만일 孝의 한 경우에 집착해 상황해 따라 孝의 자리에 머물지 못한다면, 어찌 '孝의 지극히 선함'에 머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부모가 되어 慈에 머물고, 國人과 교제함에 信에 머무는 경우도 모두 이와 같아야 한다. 다시 유추하여 나머지에 미친다면, 모든 천하의 일이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비록 다양하더라도 모두 머물러야 할 바를 알 수 있으니, '지어지선'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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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復<sub>扶又反</sub>引<淇澳>之詩, 何也?"<br/> | ||
+ | 물었다: "다시 <淇奧> 시를 인용한 것은 어째서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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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上言止於至善之理, 備矣. 然其所以求之之方, 與其得之之驗, 則未之及. 故又引此詩以發明之也. 夫<sub>音扶</sub>'如切如磋', 言其所以講於學者已精而益求其精也; '如琢如磨', 言其所以脩於身者已宻而益求其宻也. 此其所以擇善固執<sub>擇善即講學之事; 固執即脩身之事.</sub>, 日就月將, 而得止於至善之由也.<br/> | ||
+ | 대답했다: "앞서 '지어지선'의 이치를 말한 것이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지어지선')을 구하는 방도와 이것을 얻은 효험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시 이 시를 인용하여 밝히셨다. ‘如切如磋’는 그가 학문을 강구한 것이 이미 정밀하더라도 그 정밀함을 더욱 구해야 함을 말한 것이고, ‘如琢如磨’는 그가 몸을 수양한 것이 이미 엄밀하더라도 그 엄밀함을 더욱 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을 택해 굳게 붙잡아'<ref><중용장구> 20장. 誠者,天之道也;誠之者,人之道也。誠者不勉而中,不思而得,從容中道,聖人也。誠之者,擇善而固執之者也。</ref><sub>'擇善'은 강학의 일이고, ' 固執'은 수신의 일이다.</sub> 일취월장해서 '지극한 선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이다. | ||
+ | :朱子曰: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脩也', 既學而猶慮其未至, 則復講習討論以求之, 猶治骨角者既切而復磋之. 切是切得一箇璞在這裏, 似亦可矣. 又磋之使至於滑澤, 這是治骨角者之至善也. 既脩而又慮其未至, 則又省察克治以終之, 猶治玉石者既琢而復磨之. 琢是琢得一箇璞在這裏, 似亦得矣. 又磨之使至於精細, 這是治玉石者之至善也. 取此以喻君子之止於至善. 既格物以求知所止矣, 又日用力以求得其所止焉." <br/>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如切如磋라는 것은 학문을 말하고, 如琢如磨라는 것은 스스로 수양함이다.' 학문하고도 오히려 학문이 지극하지 못함을 걱정해, 다시 강습·토론해 지극함을 구하는 것은 뼈·뿔을 다듬는 자가 자르고도 다시 가는 것과 같다. '자르는 것'(切)은 여기의 옥돌을 자르는 것이니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지만, 다시 갈아서 윤택이 나게 하는 것, 이것이 뼈·뿔을 다듬는 자의 지극히 선함이다. 수양하고도 다시 수양이 지극하지 못함을 염려해, 다시 성찰하고 [자신을] 다스려 [수양을] 끝마치는 것은 옥석을 다듬는 자가 쪼고 나서 다시 가는 것과 같다. '쪼는 것'(琢)은 여기의 옥돌을 쪼는 것이니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지만, 다시 갈아서 정밀하게 하는 것, 이것이 옥석을 다듬는 자의 지극히 선함이다. 이를 가지고 군자의 '지어지선'에 비유하였다. 격물해서 머물 곳을 알고자 하고서, 다시 날마다 힘써 그 머물 곳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 ||
+ | :○陳氏曰: "切是窮究事物之理, 逐件分析, 有倫有序; 磋是講究到純熟處, 道理瑩徹, 所以如切而又磋. 琢是克去物欲之私, 使無瑕纇. 磨是磨礲至那十分純粹處, 所以如琢而又磨." | ||
+ | :진씨가 말했다: "'切'은 사물의 理를 궁구하는 것이니, 대상 마다 분석해 조리가 있게 된다. '磋'는 강구함이 무르익는 것이니, 도리에 훤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르고도 다시 가는 듯'하는 것이다. '琢'은 이기적인 물욕을 제거해 옥의 티를 없게 하는 것이고, '磨'는 갈아서 십분 정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쪼고도 다시 가는 듯'이 하는 것이다." | ||
+ | :○學是知止於至善所在; 自脩是止於至善所在. | ||
+ | :'배움'(學)이란 至善의 소재에 머무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고, '수양'(自脩)이란 至善의 소재에 머무는 것이다. | ||
+ | :○西山眞氏曰: "'如切如磋, 道學也', 主知而言; '如琢如磨, 自脩也', 主行而言, 言致知力行當並進也. 知到十分精處, 而行處有一分未宻, 亦未得為至善. 須是知極其至, 行亦極其至, 方謂之至善." | ||
+ | :서산 진씨가 말했다: "'如切如蹉라는 것은 학문을 말한다'는 것은 앎(知)에 대해 말한 것이고, '如琢如磨라는 것은 스스로 수양함이다'는 실천(行)에 대해 말한 것이니, 致知와 力行을 병행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앎(知)이 100% 정밀한 경지에 도달했더라도 실천(行)에 10% 엄밀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至善이라고 할 수 없다. 모름지기 앎(知)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고 실천(行)도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것을 至善이라고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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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恂慄者, 嚴敬之存乎中也; 威儀者, 輝光之著乎外也. 此其所以睟<sub>雖萃反</sub>面盎背, 施於四體而爲止於至善之驗也. '盛徳至善, 民不能忘', 蓋人心之所同然, 聖人既先得之而其充盛宣著又如此. 是以民皆仰之而不能忘也. '盛徳', 以身之所得而言也; '至善', 以理之所極而言也. '切磋琢磨', 求其止於是而已矣."<br/> | ||
+ | 준율(恂慄)이란 마음 안에 보존되어 있는 엄경함(嚴敬)이고, 위의(威儀)란 밖으로 드러나는 광채(輝光)이니, 이것이 바로 '얼굴에 윤택이 나고 몸에 넘쳐나 사체(四體)에 드러나는 것'<ref><맹자> <진심상> 21. 君子所性,仁義禮智根於心。其生色也,睟然見於面,盎於背,施於四體,四體不言而喻。</ref>을 가지고 '지극한 선에 머무른다'는 증거로 삼은 것이다. '덕을 성대하게 하고 선을 지극하게 하여 백성들이 잊을 수 없는 것'은, 대개 [명덕은] 사람들의 동일한 마음이나, 성인은 이것(徳·善)을 먼저 얻은 데다가 충만하게 해 밝게 드러나게 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이를 우러러 잊지 못했던 것이다. '盛德'은 자신이 얻은 바를 가지고 말한 것이고, '至善'은 이치에 이른 정도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切磋琢磨'는 이러한 경지(盛徳至善)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br/> | ||
+ | :問: "'切磋琢磨'是學者事, 而'盛徳至善'乃指聖人言之, 何也?" 朱子曰: "後面說得來大, 非聖人不能. 此是連上文'文王於緝熈敬止'說. 然聖人也不是挿手<ref><한어대사전> 2. 叉手。 表示無所事事。 </ref>掉臂<ref><한어대사전> 2. 自在行游貌。 </ref>, 做到那處, 也須學始得. 如孔子所謂'徳之不脩,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此有甚緊要? 聖人却憂者, 何故? 惟其憂之, 所以為聖人. 所謂生而知之者, 便只是知得此而已. 故曰: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 ||
+ | :물었다: "'切磋琢磨'는 배우는 자들의 일인데, '盛徳至善'은 도리어 성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어째서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뒤에서 말한 것이 성대하니, 성인이 아니면 해낼 수 없다. 이것은 앞의 '아! 끊임없이 밝히셔서 敬하며 [편히] 머무시는구나!'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라고 해도 팔짱 끼고 유유자적 하며 저 경지를 이루신 것이 아니니, 성인도 배워야 [저 경지를] 이룰 수 있다. 공자께서 '덕을 닦지 않고, 학문을 강습하지 않으며, 옳은 것을 듣고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불선한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내 걱정이다'<ref><논어> <술이> 3. 子曰:「德之不脩,學之不講,聞義不能徙,不善不能改,是吾憂也。」</ref>라고 말씀하신 것의 경우, 여기에 어떤 핵심이 있는가? 성인인데도 걱정한 것은 어째서인가? 걱정하기 때문에 성인이 되는 것이다! 이른바 '나면서부터 안다'(生而知之)는 건 단지 이것을 알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이 되고, 광인도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된다'<ref><상서> <주서> <다방> 惟聖罔念作狂,惟狂克念作聖。</ref>고 하는 것이다." | ||
+ | :○'盛徳至善', 言聖人事蓋渾然一理, 不可得而分者. 但以人言則曰徳; 以理言則曰善, 又不爲無辨矣. | ||
+ | :'盛徳至善'은 성인의 일이 대개 혼연히 一理여서 분별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다만 사람을 가지고 말하면 '徳'이라 하고, 理를 가지고 말하면 '善'이라 하니, 다시 구분이 없을 수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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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切磋琢磨', 何以爲學問、自脩之别<sub>後列反</sub>也?"<br/> | ||
+ | 물었다: "'切磋琢磨'가 어떻게 학문과 수양(自脩)으로 구별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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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骨角脉理可尋, 而切磋之功易<sub>去聲</sub>, 所謂'始條理'之事也; 玉石渾<sub>上聲</sub>全堅確<sub>克角反</sub>, 而琢磨之功難, 所謂'終條理'之事也."<br/> | ||
+ | 대답했다: "뼈나 뿔은 결을 찾기 쉬우므로 자르고 가는 작업이 쉬우니, 이른바 '始條理'<ref><맹자> <만장하> 1. 孔子之謂集大成。集大成也者,金聲而玉振之也。金聲也者,始條理也;玉振之也者,終條理也。始條理者,智之事也;終條理者,聖之事也。</ref>의 일이다. 옥이나 돌은 결이 없고(渾全) 단단해 쪼고 다듬는 작업이 어려우니, 이른바 '終條理'의 일이다." | ||
+ | :問: "'切磋是始條理, 琢磨是終條理', '終條理'較宻否?" 朱子曰: "始終條理都要宻. 講貫<ref>猶講習。 ▶ 《國語‧魯語下》: “晝而講貫, 夕而習復。” ▶ 韋昭 注: “貫, 習也。” </ref>而益講貫, 脩飭而益脩飭." | ||
+ | :물었다: "'切磋는 始條理이고, 琢磨는 終條理이다'에서 '終條理'가 ['始條理'보다] 상대적으로 엄밀하겠죠?"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始條理와 終條理 모두 엄밀해야 한다. 강습하고 더욱 강습하고, 다듬고 더욱 다듬는 것이다." | ||
+ | :○問: "琢磨後更有'瑟僴赫喧', 何故為'終條理'之事?" 曰: "那不是做工夫處, 是成就後氣象自如此." | ||
+ | :물었다: "'琢磨' 뒤에 '瑟僴赫喧'가 더 있는데, 어째서 ['琢磨'가] '終條理'의 일이라고 하신 겁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그건('瑟僴赫喧')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성취된 이후의 기상이 절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 ||
+ | :○新安陳氏曰: "此與<論語>引<詩>之意異. 此以比講學之先後難易, 又證之以<孟子>之始終條理, 以見二者之當兼盡而不可偏廢也."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이것(『대학』에서 <기욱>을 인용한 것)은 <논어>에서 <시>를 인용한 뜻과 다르다.<ref><논어> <학이> 15. 子貢曰:「貧而無諂,富而無驕,何如?」子曰:「可也。未若貧而樂,富而好禮者也。」 子貢曰:「詩云:『如切如磋,如琢如磨。』其斯之謂與?」 子曰:「賜也,始可與言詩已矣!告諸往而知來者。」 【朱注】 子貢自以無諂無驕為至矣,聞夫子之言,又知義理之無窮,雖有得焉,而未可遽自足也,故引是詩以明之。</ref> 여기서는 [<기욱>을] 강학의 순서·난이도에 견주고 또 이를 <맹자>의 '始條理·終條理'를 가지고 증명하여, 두 가지('切磋'와 '琢磨' 즉 '學問'과 '自脩')를 함께 다해야지 하나를 폐해서는 안 됨을 드러내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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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引<烈文>之詩而言'前王之沒世不忘', 何也?"<br/> | ||
+ | 물었다: "<열문> 시를 인용해 '예전 임금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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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賢其賢'者, '聞而知之', 仰其徳業之盛也; '親其親'者, '子孫保之', 思其覆<sub>敷救反</sub>育之恩也.<br/> | ||
+ | 대답했다: "'賢其賢'이라는 것은 '전해들어서 알게 되었다'(聞而知之)<ref><맹자> <진심하> 38. 孟子曰:「由堯舜至於湯,五百有餘歲,若禹、皋陶,則見而知之;若湯,則聞而知之。由湯至於文王,五百有餘歲,若伊尹、萊朱則見而知之;若文王,則聞而知之。由文王至於孔子,五百有餘歲,若太公望、散宜生,則見而知之;若孔子,則聞而知之。</ref>는 것이니, 예전 임금의 성대한 덕업을 추앙하는 것이다. '親其親'이라는 것은 '자손이 지켜나갔다'(子孫保之)<ref><중용장구> 17장. 子曰:「舜其大孝也與!德為聖人,尊為天子,富有四海之內。宗廟饗之,子孫保之。</ref>는 것이니, 예전 임금이 덮어주고 길러주던 은혜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 ||
+ | :朱子曰: "如孔子仰文武之徳, 是'賢其賢'; 成康以後, 思其恩而保其基緒<ref><한어대사전> 猶基業。</ref>, 便是'親其親'."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공자께서 문왕·무왕의 덕을 흠앙하신 것이 '賢其賢'이고, 성왕·강왕 이후 문왕·무왕의 은혜를 그리워하며 그들의 기업을 지켜나간 것이 '親其親'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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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樂其樂'者, 舍哺<sub>蒲故反</sub>鼓腹而安其樂也; '利其利'者, 耕田鑿井而享其利也, 此皆先王盛徳至善之餘澤<ref><한어대사전> 2. 指遺留給後人的德澤。 </ref>. 故雖已沒世而人猶思之, 愈久而不能忘也. 上文之引<淇澳>, 以明明徳之得所止言之, 而發新民之端也; 此引<烈文>, 以新民之得所止言之, 而著明明徳之效也."<br/> | ||
+ | '樂其樂'이라는 것은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들기며'<ref><한어대사전> 口含食物, 飽食挺腹。語出《莊子‧馬蹄》: “夫 赫胥氏 之時, 民居不知所為, 行不知所之, 含哺而熙, 鼓腹而遊, 民能以此矣。”後因以“含哺鼓腹”形容人過着安樂的生活。 </ref> 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고, '利其利'라는 것은 '밭 갈아 [먹고] 우물 파 [마시며]'<ref><논형> <감허> 堯時,五十之民,擊壤於塗。觀者曰:「大哉,堯之德也!」擊壤者曰:「吾日出而作,日入而息,鑿井而飲,耕田而食,堯何等力?」</ref> 그 이익을 누리는 것이니, 이것들은 모두 선왕의 성덕·至善 덕택이다. 그러므로 비록 [선왕이] 이미 세상을 떠났더라도 사람들이 오히려 그리워하고, 오래될수록 잊지 못하는 것이다. 앞에서 <기욱>을 인용한 것은 '明明徳'이 머물 바를 얻었음을 말하여 '新民'의 단서를 연 것이고, 여기서 <열조>를 인용한 것은 '新民'이 머물 바를 얻었음을 말하여 '明明徳'의 공효를 드러낸 것이다." | ||
+ | :朱子曰: "<淇澳>言明明徳而可以新民, 以見明明徳之極功; <烈文>因言非獨一時民不能忘, 而後世之民亦不能忘, 以見新民之極功."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기욱>은 '明明徳하면 新民할 수 있음'을 말하여 '明明徳'의 지극한 공효를 드러내고, <열문>은 이에 근거하여 '한 때의 백성만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의 백성 또한 잊을 수 없음'을 말하여 '新民'의 지극한 공효를 드러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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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淇澳><烈文>二節, 鄭本元在誠意章後, 而程子置之卒章之中, 子獨何以知其不然而屬<sub>音蜀下同</sub><ref><한어대사전> zhŭ 〔《廣韻》之欲切, 入燭, 章。 〕 1. 繼續;聯接。 </ref>之此也?"<br/> | ||
+ | 물었다: "<기욱>·<열문> 두 구절의 경우, 鄭本에서는 원래 성의장 뒤에 있었고, 정자께서는 마지막 장 가운데 두셨는데, 그대만 어떻게 그것들이 옳지 않음을 알고서 여기에 귀속시켰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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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二家所繫, 文意不屬<sub>音燭</sub><ref><한어대사전> shŭ 〔《廣韻》市玉切, 入燭, 禪。 〕 6. 歸屬;隸屬。 </ref>, 故有不得而從者. 且以所謂'道盛徳至善, 沒世不忘'者推之, 則知其當屬乎此也."<br/> | ||
+ | 대답했다: "두 사람이 이은 것은 의미상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따를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또 이른바 '道盛徳至善, 沒世不忘'을 가지고 추론해보면, <기욱>·<열문>이 마땅히 여기에 속함을 알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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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傳四章=== | ||
+ | 子曰:「聽訟,吾猶人也,必也使無訟乎!」無情者不得盡其辭。大畏民志,此謂知本。<br/> | ||
+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송사를 처리하는 건 나도 남들처럼 하겠지만, 반드시 송사가 없게 할 것이다!"<ref><논어> <안연> 13. 子曰:「聽訟,吾猶人也,必也使無訟乎!」</ref> 진실하지 못한 자가 거짓말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두렵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근본을 안다'고 말한다. | ||
+ | :猶人,不異於人也。情,實也。引夫子之言,而言聖人能使無實之人不敢盡其虛誕之辭。蓋我之明德既明,自然有以畏服民之心志,故訟不待聽而自無也。觀於此言,可以知本末之先後矣。 | ||
+ | :"猶人"은 남과 다르지 않음이다. 情은 實이다. 공자의 말씀을 인용해 성인이 진실하지 못한 자로 하여금 감히 거짓말을 다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음을 말한다. 대개 내 明德이 밝혀진 이상, 저절로 백성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복종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송사를 다스릴 필요도 없이 저절로 없어진다. 이 말을 살펴보면 근본적인 것과 말단적인 것의 선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
+ | ::朱子曰: "聖人說: '聽訟, 我也無異於人, 當使其無訟之可聽, 方得.' 聖人固不㑹錯斷了事. 只是他所以無訟者, 却不在於善聽訟, 在於意誠心正, 自然有以薰炙漸染, 大服民志. 故自無訟之可聽耳."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성인께서 '송사를 처리하는 건 나라도 남과 다를 것이 없지만, 처리할 만한 송사가 없게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인은 진실로 일을 잘못 처리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 송사가 없는 까닭은 송사를 잘 처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뜻이 진실하고 마음이 발라 자연히 물들여 크게 백성의 뜻을 복종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절로 다스릴 만한 송사가 없는 것이다." | ||
+ | ::○使民無訟, 在我之事, 本也. 此所以聽訟為末. | ||
+ | ::백성들로 하여금 송사가 없게 하는 건 내게 달린 일이니, 근본이다. 이것이 '송사를 다스리는 것이' 말단인 까닭이다. | ||
+ | ::○'無情者不得盡其辭', 便是說那無訟之由. 然惟先有以服其心志, 所以能使之不得盡其虚誕之辭. | ||
+ | ::'진실하지 못한 자가 거짓말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은 저 송사가 없는 이유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먼저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다할 수 없게 할 수 있는 것이다. | ||
+ | ::○如成人有其兄死而不為衰者, 聞子臯將為成宰, 遂為衰. 子臯又何曾聽訟了致然? 只是自然感動人處耳. | ||
+ | ::예컨대, 成땅 사람 가운데 제 형이 죽었는데도 상복을 입지 않는 자가 있었는데, 자고가 장차 成의 읍재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상복을 입었다.<ref><예기> <단궁하> 成人有其兄死而不為衰者,聞子皋將為成宰,遂為衰。成人曰:「蠶則績而蟹有匡,范則冠而蟬有緌,兄則死而子皋為之衰。」</ref> 자고가 또 언제 송사를 다스려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저 자연히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일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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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右傳之四章。釋本末。 | ||
+ | ::이상은 전4장이다. '本末'을 해석했다. | ||
+ | :::此章舊本誤在「止於信」下。 | ||
+ | :::이 장은 옛 판본에 "止於信" 다음에 잘못 위치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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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문』 전4장==== | ||
+ | 或問: "聽訟一章, 鄭本元在'止於信'之後, '正心脩身'之前; 程子又進而寘之經文之下、'此謂知之至也'之上, 子不之從而寘之於此, 何也?"<br/> | ||
+ | 혹자가 물었다: "<聽訟>장(전4장)의 경우, 鄭本에서는 원래 '止於信' 뒤, '正心脩身' 이전에 있었고, 程子(이천)께서는 더 앞당겨 경문 다음, '此謂知之至也'의 앞에 두셨다. 그대가 [선유의 설을] 따르지 않고 여기에 둔 것은 어째서인가?" | ||
+ | |||
+ | 曰: "以傳之結語考之, 則其爲釋本末之義可知矣; 以經之本文乘<ref><한어대사전> 16. 計算;籌劃。</ref>之, 則其當屬<sub>音蜀</sub>於此可見矣. 二家之說有未安者, 故不得而從也."<br/> | ||
+ | 답했다: "傳(전4장)의 마지막 말("此謂知本")로 상고하면 그것이 '本末'의 뜻을 해석한 것임을 알 수 있고, 經의 본문("物有本末")에 적용하면 그것이 여기에 속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두 학자의 설에 적절치 못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따를 수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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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然則聽訟、無訟, 於明徳新民之義, 何所當也?" <br/> | ||
+ | 물었다: "그렇다면 '聽訟·無訟'은 '明徳·新民'의 뜻 가운데 무엇에 해당하는가?" | ||
+ | |||
+ | 曰: "聖人徳盛仁熟, 所以自明者皆極天下之至善. 故能大有以畏服其民之心志而使之不敢盡其無實之辭. 是以雖其聽訟無以異於衆人而自無訟之可聽. 蓋己徳既明而民徳自新, 則得其本之明效也. 或不能然而欲區區於分爭辯訟之間以求新民之效, 其亦末矣. 此傳者釋經之意也."<br/> | ||
+ | 대답했다: "성인께서는 덕이 성대하고 仁이 순숙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밝히신 것이 모두 천하의 至善에 이르셨다. 그러므로 크게 백성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복종시켜 그들로 하여금 진실하지 못한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므로 비록 성인께서 송사를 다스리시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다스릴 만한 송사가 없게 되었다. 대개 자신의 덕이 이미 밝혀져 백성들의 덕이 저절로 새로워지는 것은 근본을 얻었다는 명백한 공효이다. 혹 그렇게 하지 못하고 爭訟의 [시비를] 가리는 데 얽매이면서 新民의 공효를 얻고자 한다면, 이 또한 말단이다. 이것은 傳을 쓴 자가 經을 해석한 뜻이다." | ||
+ | :陳氏曰: "聽訟, 末也; 明徳, 本也. 不能明己之徳而專以智能决訟者, 抑<ref><한어대사전> 10. 似;如。 ▶ 《國語‧魯語下》: “ 楚公子 甚美, 不大夫矣, 抑君也。” ▶ 韋昭 注: “似君也。” -이렇게 번역할 경우, '말단과 같다.' </ref>末矣." | ||
+ | :진씨가 말했다: "'聽訟'은 말단이고 '明徳'은 근본이다. 자신의 덕을 밝히지 못하고 오로지 지혜로 송사를 잘 판결하는 것은 도리어 말단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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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然則其不論夫終始者, 何也?"<br/> | ||
+ | 물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終始'를 논하지 않은 것("事有終始")은 어째서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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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古人釋經, 取其大略, 未必如是之屑屑也. 且此章之下有闕文焉, 又安知其非本有而并失之也邪?"<br/> | ||
+ | 대답했다: "옛 분들이 경전을 해석할 때, 대략만 취할 뿐 반드시 이처럼 하나하나 하신 것은 아니었다. 또 이 장 아래에 빠진 글이 있으니, ['終始'를 논한 것이] 본래는 있었으나 [다음 글과] 함께 망실된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 ||
+ | |||
+ | ===傳五章=== | ||
+ | (此謂知本,) | ||
+ | :程子曰:「衍文也。」 | ||
+ |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군더더기 글이다."<ref><정씨경설> 5-10 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四字衍> 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ref> | ||
+ | |||
+ | 此謂知之至也。<br/> | ||
+ | 이것을 '앎의 지극함'이라고 한다. | ||
+ | :此句之上別有闕文,此特其結語耳。 | ||
+ | :이 구절 앞에 따로 궐문이 있었으니, 이 말은 다만 맺음말일 뿐이다. | ||
+ | |||
+ | |||
+ | ::右傳之五章,蓋釋格物、致知之義,而今亡矣。 | ||
+ | ::이상은 전5장이니 格物·致知의 뜻을 해석했는데, 지금은 망실되었다. | ||
+ | :::此章舊本通下章,誤在經文之下。 | ||
+ | :::이 장은 구본(鄭本)에 다음 장과 마찬가지로 경문 다음에 잘못 위치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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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閒嘗竊取程子之意以補之曰:「所謂致知在格物者,言欲致吾之知,在即物而窮其理也。蓋人心之靈莫不有知,而天下之物莫不有理,惟於理有未窮,故其知有不盡也。是以大學始教,必使學者即凡天下之物,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以求至乎其極。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則眾物之表裏精粗無不到,而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矣。此謂物格,此謂知之至也。」 | ||
+ | :근자에 삼가 정자의 뜻을 취해 다음과 같이 보충하였다: "이른바 '致知在格物'이라는 것은, '내 앎을 지극히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사물에 나아가 그 理를 궁구함에 달려있음을 말한 것이다. 대개 영험한 사람의 마음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 만물에는 理가 없는 경우는 없다. 오직 理를 아직 [전부] 궁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앎에 다하지 못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첫 가르침이 반드시 배우는 자로 하여금 뭇 천하 사물에 나아가 이미 알고 있는 理를 근거로 더욱 궁구하여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길 구하지 않게 함이 없는 것이다. [格物·致知에] 오래 힘써 하루 아침에 막힘 없이 꿰뚫게 되면, 만물의 表裏·精粗에 주도하지 않음이 없게 되고, 내 마음의 全體大用이 밝혀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 이것을 '物格'이라 하고, 이것을 '앎의 지극함'(知之至)이라고 한다." | ||
+ | ::問: "所補第五章, 何不效其文體?" 朱子曰: "亦嘗效而為之, 竟不能成." | ||
+ | ::물었다: "[선생님께서] 보충하진 전5장의 경우, 어째서 [<대학>의] 문체를 모방하지 않으신 겁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나 역시 전에 모방해 지어보았지만, 끝내 완성할 수 없었다." | ||
+ | ::○<大學>不說窮理而謂之格物, 只是使人就實處窮究. | ||
+ | ::<대학>에서 '窮理'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格物'이라고 한 것은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것을 궁구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 ||
+ | ::○格物只是就一物上窮盡一物之理; 致知便只是窮得物理盡, 後我之知識亦無不盡處. | ||
+ | ::'格物'은 다만 한 사물에서 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고, '致知'는 다만 사물의 이치를 모두 궁구한 뒤에 내 지식도 다하지 않음이 없게 되는 것이다. | ||
+ | ::○<大學>是聖門最初用功處; 格物又是<大學>最初用功處. 試考其說, 就日用間如此作工夫, 久之意思自别. | ||
+ | ::<대학>은 성인의 문하에서 가장 먼저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格物'은 다시 <대학>에서 가장 먼저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설명을 한 번 살펴보건대, 일상 생활에서 이처럼 공부를 해서, 오래되면 생각이 절로 달라질 것이다. | ||
+ | ::○問: "經文'物格而後知至', 却是知至在後; 今乃云'因其巳知而益窮之', 則又在格物前." 曰: "知元自有. 纔要去理㑹, 便是這些知萌露. 若懵然全不向着, 便是知之端未曾通. 纔思量著, 便這箇骨子透出來. 且如做些事錯, 纔知道錯, 便是向好門路, 却不是方始去理㑹箇知. 只是如今須著因其端而推致之, 使四方八面千頭萬緒, 無有些不知, 無有毫髪窒礙. <孟子>所謂: '知皆擴而充之,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擴而充之, 便是致字意思." | ||
+ | ::물었다: "경문의 '物格而後知至'에서 '知至'가 뒤에 있는데, 지금 도리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 더욱 궁구한다'고 말하니, 도리어 ['知至'가] '格物' 앞에 있습니다." 대답하셨다: "앎은 본래 있다. 이해하려고 하자마자 이 약간의 앎이 싹튼다. 멍하니 전혀 향하지 않는 경우는 앎의 단서에 아직 통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하자마자 이 骨子(앎)가 새어나온다. 일을 잘못한 경우, 잘못을 알자마자 좋은 길을 향하는 것이니, 처음 앎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금은 그 단서를 바탕으로 미루어나가 사방팔면, 천 가지 만 가지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 것이 없고 털끝 만큼도 막히는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맹자>에서 '[사단을] 모두 확충할 줄 알면, 불이 처음 타오르거나 샘이 처음 솟는 것과 같을 것이다'<ref><맹자> <공손추상> 6. 凡有四端於我者,知皆擴而充之矣,若火之始然,泉之始達。苟能充之,足以保四海;苟不充之,不足以事父母。</ref>고 할 때의 '확충'이 바로 '致'자의 뜻이다."<ref><주자어류> 권16 任道弟問:「『致知』章,前說窮理處云:『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且經文『物格,而后知至』,卻是知至在後。今乃云『因其已知而益窮之』,則又在格物前。」曰:「知先自有。才要去理會,便是這些知萌露。若懵然全不向著,便是知之端未曾通。才思量著,便這箇骨子透出來。且如做些事錯,才知道錯,便是向好門路,卻不是方始去理會箇知。只是如今須著因其端而推致之,使四方八面,千頭萬緒,無有些不知,無有毫髮窒礙。孟子所謂:『知皆擴而充之,若火之始然,泉之始達。』『擴而充之』,便是『致』字意思。」</ref> | ||
+ | ::○表者人物所共由; 裏者吾心所獨得. 有人只就皮殻上用工, 於理之所以然者全無見處; 有人思慮向裏去多, 於事物上都不理㑹, 此乃說玄說妙之病. 二者都是偏. 若到物格知至, 則表裏精粗無不盡." | ||
+ | ::'겉'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물이 똑같이 말미암는 것이고, '속'이라는 것은 내 마음이 홀로 얻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저 껍데기에서만 노력할 뿐 理라는 所以然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고, 어떤 사람은 내면으로의 생각이 많을 뿐 사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니, 이는 현묘한 것을 말하는 병이다. 두 경우는 모두 치우친 것이다. 만약 '物格知至'에 이른다면, 겉과 속·정밀한 것과 거친 것을 다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 ||
+ | |||
+ | |||
+ | ====『혹문』 전5장==== | ||
+ | 1.<br/> | ||
+ | 或問: "'此謂知本', 其一爲聽訟章之結語則聞命<ref>接受命令或教導。</ref>矣. 其一, 鄭本元在經文之後, '此謂知之至也'之前; 而程子以爲衍文, 何也?"<br/> | ||
+ | 혹자가 물었다: "[두 번 나오는] '此謂知本' [가운데] 하나가 聽訟章(전4장)의 마지막 문장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을 들었다. 다른 하나의 경우, 鄭本에서는 원래 경문의 뒤, '此謂知之至也' 앞에 있었는데, 정자께서 [이를] '군더더기 글'이라고 여기신 것은 어째서인가?" | ||
+ | |||
+ | 曰: "以其複<sub>音福</sub>出而他無所繫也."<br/> | ||
+ | 대답했다: "그것('此謂知本')이 중복해서 나왔는데 다른 데 연결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 ||
+ | |||
+ | |||
+ | 2.<br/> | ||
+ | 曰: "'此謂知之至也', 鄭本元隨'此謂知本'繫於經文之後而下屬<sub>音蜀下同</sub>誠意之前; 程子則去<sub>上聲</sub>其上句之複而附此句於聽訟知本之章以屬明徳之上, 是必皆有說矣. 子獨何據以知其皆不盡然而有所取舍<sub>上聲</sub>於其間邪?"<br/> | ||
+ | 물었다: "'此謂知之至也'의 경우, 鄭本에서는 원래 '此謂知本'을 따라 경문 뒤에 연결되어 다음으로 誠意장 앞에 이어져있고, 정자께서는 윗 구절의 중복된 것을 제거하고 이 구절을 聽訟知本장(전4장)에 붙이시고는 명덕장 앞에 이으셨으니, 이들에는 필시 모두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대는 유독 무엇에 의거해 그것들이 모두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님을 알고서 그 가운데서 취사선택 했는가?" | ||
+ | |||
+ | 曰: "此無以他求爲也. 考之經文, 初無再論知本、知至之云者, 則知屬之經後者之不然矣; 觀於聽訟之章, 既以知本結之而其中間又無知至之說, 則知再結聽訟者之不然矣. 且其下文所屬明徳之章, 自當爲傳文之首, 又安得以此而先之乎? 故愚於此皆有所不能無疑者. 獨程子上句之所刪、鄭氏下文之所屬, 則以經傳之次求之而有合焉. 是以不得而異也."<br/> | ||
+ | 대답했다: "이것은 달리 찾을 것도 없다. 경문을 상고해보면 애당초 '知本'·'知至'라는 것을 재론할 것도 없으니, ['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를] 경문 뒤에 잇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겠다.('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이 경문 뒤에 위치할 수 없다.) 聽訟장(전4장)을 보면 '知本'으로 마무리하는 데다가 그 중간에 또 '知至'를 말하는 부분이 없으니, '聽訟'을 ['此謂知本'로] 거듭 마무리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겠다.(중복된 '此謂知本' 가운데 하나는 산삭해야 한다) 또 그 아래 이어진 명덕장은 응당 傳文의 첫머리가 되어야 하니, 또 어찌 이것('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을 명덕장의 앞에 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이것들에 대해 모두 의심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정자께서 윗 구절(중복된 '此謂知本' 가운데 앞의 것)을 산삭하신 것과 정현이 다음 글로 이은 것(전6장)은 경문-전문의 순서로 헤아려보면 부합하는 점이 있다. 그러므로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 ||
+ | |||
+ | |||
+ | 3.<br/> | ||
+ | 曰: "然則子何以知其爲釋知至之結語, 而又知其上之當有闕文也?"<br/> | ||
+ |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그것('此謂知之至也')이 '知至'에 대한 해석을 마무리하는 문장임을 알았고,<ref><대학장구> 此句之上別有闕文,此特其結語耳。</ref> 또 어떻게 그 앞에 응당 빠진 글이 있는 줄 알았는가?"<br/> | ||
+ | |||
+ | 曰: "以文義與下文推之而知其釋知至也; 以句法<ref><한어대사전> 1. 句子的結構方式。 </ref>推之而知其爲結語也; 以傳之例推之而知其有闕文也."<br/> | ||
+ | 대답했다: "글의 뜻('知之至'='知至')과 다음의 글(전6장)로 추론해보고서 그것이 '知至'를 해석한 것임을 알았고, 문장 구조('此謂')로 추론해보고서 그것이 마무리하는 문장임을 알았으며, 전문의 [다른] 예시로 추론해보고서 거기에 빠진 글이 있음을 알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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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br/> | ||
+ | ○曰: "此經之序, 自誠意以下, 其義明而傳悉矣; 獨其所謂格物致知者, 字義不明而傳復<sub>扶又反下同</sub>闕焉. 且爲最初用力之地而無復上文語緒之可尋也. 子乃自謂'取程子之意以補之', 則程子之言何以見其必合於經意? 而子之言又似不盡出於程子, 何邪?"<br/> | ||
+ | 물었다: "이 경(<대학>)의 차례에서 '誠意'부터는 뜻이 분명하고 전문이 상세하다. 오직 이른바 '格物致知'라는 것만 글자의 뜻이 불분명하고 전문이 다시 빠져있다. 또 [格物致知'는] 처음 힘쓰는 단계인데도(즉,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도) 앞 글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달리 없다. [그런데] 그대는 도리어 스스로 '정자의 뜻을 가져다 보충한다'고 말했으니,<ref><대학장구> 閒嘗竊取程子之意以補之.</ref> 정자의 말씀이 어떻게 틀림없이 경(<대학>)의 뜻에 부합함을 알았는가? 그대의 말은 또 정자에게서 모두 나온 것은 아닌 듯 하니, 어째서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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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br/> | ||
+ | 曰: "或問於程子曰: '學何爲而可以有覺也?' 程子曰: '學莫先於致知. 能致其知, 則思日益明, 至於久而後有覺爾. <書>所謂「思曰睿, 睿作聖」<sub>見周書洪範篇</sub>、董子所謂「勉强<sub>上聲下同</sub>學問則聞見博而智益明」, 正謂此也.'"<br/> | ||
+ | 대답했다: "혹자가 정자께 물었다: '배움은 어떻게 해야 깨우칠 수 있습니까?' 정자께서 대답하셨다: '배움에서 致知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앎을 지극히 할 수 있다면, 생각은 날로 더욱 밝아질 것이고, [그것이] 오래된 이후에 깨우치게 된다. <서경>에서 말한 「생각은 슬기롭게 해야 하니,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는 것과,<sub><주서> <홍범>에 보인다</sub> 동중서가 말한 「학문에 힘쓰면 견문은 넓어지고 앎은 더욱 밝아진다」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 ||
+ | :<西漢書>董仲舒<sub>廣川人</sub>以賢良對䇿曰: "勉强學問, 則聞見博而智益明; 勉强行道, 則徳日起而大有功: 此皆可使還<ref><한서> 師古曰: "還讀曰旋, 旋, 速也."</ref>至而立<ref><한어대사전> 19. 立刻(즉시) ▶ 《史記‧留侯世家》: “於是 呂澤 立夜見 呂后 , 呂后 承間為上泣涕而言, 如四人意。” ; <한서> 宋祁曰: "越本無立字."</ref>有效者也." | ||
+ | :<한서>에 동중서<sub>광천 사람이다.</sub>가 <현량대책>으로 말했다: "학문에 힘쓰면 견문은 넓어지고 앎은 더욱 밝아지고. 道를 행하는 데 힘쓰면, 덕은 날로 진작하고 크게 공효가 있을 것이니, 이 모두는 속히 [목표에] 이르고 바로 공효를 이루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ref><한서> <동중서전> 彊勉學問,則聞見博而知益明;彊勉行道,則德日起而大有功:此皆可使還至而立有效者也。《詩》曰「夙夜匪解」,《書》云「茂哉茂哉!」皆彊勉之謂也。</ref> | ||
+ | |||
+ | "'學而無覺, 則亦何以學爲<ref><한어대사전> 42. 助詞。 用在句末, 常與“何”、“奚”等相配合, 表疑問或反詰。 ▶ 《左傳‧襄公十七年》: “親逐而君, 爾父為厲。 是之不憂, 而何以田為?” </ref>也哉?'"<br/> | ||
+ | "'배우고도 깨우침이 없다면, 또 어째서 배우겠는가?'<ref><이정유서> 18-18 問:「學何以有至覺悟處?」 曰:「莫先致知. 能致知, 則思一日愈明一日, 久而後有覺也. 學而無覺, 則何益矣? 又奚學爲? 『思曰睿, 睿作聖.』纔思便睿, 以至作聖, 亦是一箇思. 故曰:『勉强學問, 則聞見博而智益明.』」 又問:「莫致知與力行兼否. 曰:「爲常人言纔知得非禮不可爲, 須用勉强, 至於知穿窬不可爲, 則不待勉强, 是知亦有深淺也. 古人言樂循理之謂君子. 若勉强, 只是知循理, 非是樂也. 纔到樂時, 便是循理爲樂, 不循理爲不樂, 何苦而不循理. 自不須勉强也. 若夫聖人不勉而中, 不思而得. 此又上一等事.」</ref>" | ||
+ | :朱子曰: "能致知, 則思自然明. '至於久而後有覺', 是積累之多自有箇覺悟時節."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致知할 수 있다면 생각이 저절로 밝아진다. '오래된 이후에 깨우침이 있게 된다'는 것은 많이 쌓여 절로 깨우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 ||
+ | :○格菴趙氏曰: "知是識其所當然; 覺是悟其所以然." | ||
+ | :격암 조씨가 말했다: "'知'는 所當然을 아는 것이고, '覺'는 所以然을 깨우치는 것이다." | ||
+ | :○玉溪盧氏曰: "覺者, 知至之事. '思曰睿', 所以致知; '睿作聖', 則知至矣. '勉强學問', 所以致知; '聞見博, 智益明', 則知至矣."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覺'이라는 것은 '知至'의 일이다. '생각은 슬기롭게 해야 한다'는 것은 '致知'하는 방법이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는 것은 '知至'이다. '학문에 힘쓴다'는 것은 '致知'하는 방법이고, '견문은 넓어지고 앎은 더욱 밝아진다'는 것은 '知至'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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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br/> | ||
+ | "或問: '忠信則可勉矣. 而致知爲難, 柰何?' 程子曰: '誠敬固不可以不勉. 然天下之理不先知之, 亦未有能勉以行之者也. 故<大學>之序, 先致知而後誠意, 其等有不可躐者. 苟無聖人之聰明睿知而徒欲勉焉以踐其行事之迹, 則亦安能如彼之動容周旋無不中<sub>去聲</sub>禮也哉? 惟其燭理之明, 乃能不待勉彊而自樂<sub>音洛下同</sub>循理爾. 夫<sub>音扶下同</sub>人之性本無不善, 循理而行, 宜無難者. 惟其知之不至而但欲以力爲之, 是以苦其難而不知其樂耳. 知之而至, 則循理爲樂, 不循理爲不樂, 何苦而不循理以害吾樂耶? 昔嘗見有談虎傷人者. 衆莫不聞, 而其間一人神色<ref>神情面色。 </ref>獨變. 問其所以, 乃嘗傷於虎者也. 夫虎能傷人, 人孰不知? 然聞之有懼有不懼者, 知之有眞有不眞也. 學者之知道, 必如此人之知虎然後爲至耳. 若曰: 知不善之不可爲而猶或爲之, 則亦未嘗眞知而巳矣.'"<br/> | ||
+ | "혹자가 물었다: '忠信은 힘쓸 수 있지만, 致知는 어려우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자께서 대답하셨다: '誠敬은 진실로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천하의 理를 먼저 알지 않으면 힘써 행할 수 있는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차례가 致知를 우선하고 誠意를 나중에 하는 것이니, 그 단계에 엽등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는 것이다. 만약 성인과 [같은] 지혜(聰明睿知)도 없으면서 그저 힘써 성인이 행한 일의 자취를 좇고자 한다면, 또 어찌 저 행동거지가 예에 맞지 않음이 없는 성인과 같을 수 있겠는가? 오직 理를 분명히 알아야 힘쓰지 않고도 절로 즐거이 理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사람의 性은 본래 선하지 않음이 없어서, 理를 따라 행함에 의당 어려운 점이 없을 것이다. 오직 앎이 지극하지 못하면서 그저 애써 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괴롭게 여기고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는 것이 지극해지면 理를 따르는 것을 즐기고 理를 따르지 않는 것을 즐기지 않을 것이니, 무엇이 괴롭길래 理를 따르지 않아 자신의 즐거움을 해치겠는가? 전에 범이 사람을 해친 이야기를 하는 자를 보았다. [그것을] 듣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그 중 한 사람만 정신과 안색이 변했다. 그 까닭을 물어보니, 바로 전에 범에게 물렸기 때문이었다. 범이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사람 가운데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듣고 두려워하는 자가 있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있는 것은, 그것을 진정으로 아는 경우가 있고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가 道를 앎은 반드시 이 사람이 범을 아는 것과 같은 후에야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만약 불선을 행해선 안 됨을 안다면서 오히려 혹 불선을 행한다면, 그 또한 진정으로 안 적이 없었던 것이다.'<ref><이정유서> 18-25 問: 「忠信進德之事固可勉强, 然致知甚難.」 曰:「子以誠敬爲可勉强, 且恁地說. 到底, 須是知了方行得. 若不知, 只是覰却堯學他行事. 無堯許多聰明叡智, 怎生得如他動容周旋中禮? 有諸中, 必形諸外. 德容安可妄學? 如子所言, 是篤信而固守之, 非固有之也. 且如中庸九經, 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堯典『克明峻德, 以親九族』. 親親本合在尊賢上, 何故却在下? 須是知所以親親之道方得. 未致知, 便欲誠意, 是躐等也. 學者固當勉强, 然不致知, 怎生行得? 勉强行者, 安能持久. 除非燭理明, 自然樂循理. 性本善, 循理而行是順理事, 本亦不難. 但爲人不知, 旋安排著, 便道難也. 知有多少般數, 煞有深淺. 向親見一人, 曾爲虎所傷, 因言及虎, 神色便變. 傍有數人, 見佗說虎, 非不知虎之猛可畏, 然不如佗說了有畏懼之色, 蓋眞知虎者也. 學者深知亦如此. 且如膾炙, 貴公子與野人莫不皆知其美, 然貴人聞著便有欲嗜膾炙之色, 野人則不然. 學者須是眞知, 纔知得是, 便泰然行將去也. 某年二十時, 解釋經義, 與今無異. 然思今日, 覺得意味與少時自別.」</ref>" | ||
+ | :朱子曰: "今人有知不善之不當為, 及臨事又為之, 只是知之未至. 人知烏喙<ref><한어대사전> 3. 中藥附子的別稱。 以其塊莖形似得名。 </ref>之殺人不可食, 斷然終於不食, 是眞知之也. '知不善不可為而猶或為之', 是特未能眞知也. 所以未能眞知者, 縁於道理上只就外面理㑹, 裏面却未理㑹得十分瑩浄."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요즘 사람들이 불선을 행해선 안 됨을 알면서도 일에 닥쳐서는 다시 불선을 행하는 것은 다만 앎이 지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부자(附子)가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먹어선 안 됨을 알아서, 결단코 끝내 먹지 않으니, 이는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불선을 행해선 안 됨을 안다면서 오히려 혹 불선을 행하는 것'은 다만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까닭은 도리에 대해 그저 겉만 이해하고 속은 십분 명쾌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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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此兩條者, 皆言格物致知所以當先而不可後之意也."<br/> | ||
+ | "이 두 조목은 모두 格物致知를 우선해야지 뒤로 미뤄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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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br/> | ||
+ | "又有問進脩之術何先者. 程子曰: '莫先於正心誠意. 然「欲誠意, 必先致知; 而欲致知, 又在格物」. 致, 盡也; 格, 至也. 凡有一物, 必有一理, 窮而至之, 所謂格物者也. 然而格物亦非一端. 如或讀書講明道義, 或論古今人物而别<sub>彼列反</sub>其是非, 或應接事物而處<sub>上聲</sub>其當<sub>去聲</sub>否, 皆窮理也.'"<br/> | ||
+ | "또 '덕을 진작하고 공업을 닦는'(進德脩業)<ref><주역> <문언·건> 九三曰:「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无咎」。何謂也?子曰:「君子進德脩業,忠信,所以進德也,脩辭立其誠,所以居業也。</ref> 방법으로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묻는 자가 있었다. 정자께서 대답하셨다: '正心誠意보다 우선할 것은 없다. 그러나 誠意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致知를 우선해야 하고, 致知하고자 한다면 다시 格物에 달려있다. 致란 다함이고, 格이란 이름이다. 무릇 사물이 하나 있으면 틀림없이 하나의 이치가 있으니, 그 이치를 궁구해 이르는 것이 이른바 格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格物 역시 한 가지가 아니다. 예를 들어 혹 책을 읽고 도리를 강론하거나, 고금의 인물을 논해 그들의 시비를 분별하거나, 혹 사물에 응해 그 옳고 그름에 대처하는 것, 모두 窮理이다.'<ref><이정유서> 18-27 或問:「進修之術何先?」 曰:「莫先於正心誠意. 誠意在致知, 『致知在格物』. 格, 至也. 如『祖考來格』之格. 凡一物上有一理, 須是窮致其理. 窮理亦多端: 或讀書, 講明義理; 或論古今人物, 別其是非. 或應接事物而處其當. 皆窮理也.」 或問:「格物須物物格之, 還只格一物而萬理皆知?」 曰:「怎生便會該通? 若只格一物便通衆理. 雖顔子亦不敢如此道. 須是今日格一件, 明日又格一件, 積習旣多, 然後脫然自有貫通處.」</ref> | ||
+ | :朱子曰: "格物之理, 所以致我之知."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물의 이치를 궁구(格)하는 것이 내 앎을 지극히 하는 방법이다."<ref><주자어류> 권18 格物、致知,彼我相對而言耳。格物所以致知。於這一物上窮得一分之理,即我之知亦知得一分;於物之理窮二分,即我之知亦知得二分;於物之理窮得愈多,則我之知愈廣。其實只是一理,「才明彼,即曉此」。所以大學說「致知在格物」,又不說「欲致其知者在格其物」。蓋致知便在格物中,非格之外別有致處也。又曰:「格物之理,所以致我之知。」</ref> | ||
+ | :○而今且只就事物上格去. 如讀書便就文字上格, 聽人說話便就說話上格, 接物便就接物上格, 精粗大小都要格. 久後貫通, 粗底便是精, 小底便是大, 這便是理之一本處. | ||
+ | :지금 우선 그저 사물에 대해 궁구(格)하라. 예를 들어, 책을 읽을 땐 문자를 궁구(格)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이야기를 궁구(格)하며, 사물을 대할 때는 사물을 대하는 것을 궁구(格)해서 정밀하고 거친 것, 크고 작은 것에 모두 궁구(格)해야 한다. [이것이] 오래된 이후에 통달해 거친 것이 정밀해지고 작은 것이 커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의 근본으로서의 理이다. | ||
+ | :○陳氏曰: "事事物物固皆有理, 而聖賢書中又見成理義所萃, 而皆事物之則也. 在初學者窮理工夫, 先且就聖賢言語實處為凖則, 於幽間静一之中, 虛心而詳玩, 隨章逐句, 一一實下講明工夫, 果實有得, 則是非邪正大分已明, 而胷中權度稍定; 然後次而及於論古今人物以相參質<ref><한어대사전> 參考質正。 </ref>, 則其褒貶去取方可有定論; 最其後也, 乃及於應接事物, 更相<ref>相繼;相互。 </ref>證訂, 則其裁處剖决方中節而不至於差謬. 故以我之見有以照彼之情, 而歴練感觸處有以長吾之見, 内外交相發, 將何所往而非吾窮格之益也? 程子之言, 其有序矣." | ||
+ | :진씨가 말했다: "모든 사물에는 본래 理가 있지만, 성현의 책 안에도 이미 완성된 理義의 모음이 있으니, [이 두 가지] 모두 사물의 법칙이다. 초학자의 궁리 공부에 있어, 먼저 일단 성현 말씀 가운데 핵심적인 것을 준칙으로 삼고서, 한가한 때에 마음을 비우고 완미하여 장과 구절마다 하나하나 착실하게 강명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이런 공부를 통해] 과연 실로 얻은 바가 있다면, 옳고 그름과 삿되고 바름의 큰 경계(大分)가 매우 분명해져 가슴속의 기준(權度)이 조금 확정될 것이다.(기준 확립) 그런 연후에 다음으로 고금 인물에 대해 논해 서로 비교하고 질정하게 되면, 포폄과 취사에 비로소 정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기준을 역사적 사례에 적용) 가장 마지막에는 마침내 사물을 대해 연이어 평정(評定)하게 되면, 결재하고 판결함이 비로소 절도에 맞아 잘못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기준을 현실에 적용) 그러므로 내 앎을 가지고 저것의 실정을 비출 수 있고, 겪은 것을 가지고 내 앎을 기를 수 있어서, 안팎으로 서로 계발한다면 장차 어디를 간들 내가 궁리·격물했던 덕(窮格之益)이 아니겠는가? 정자의 말씀에 진실로 차례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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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格物者, 必物物而格之耶? 將<ref><한어대사전> 40. 介詞。 或;抑。 </ref>止格一物而萬理皆通邪?' 曰: '一物格而萬理通, 雖顏子亦未至此. 惟今日而格一物焉, 明日又格一物焉, 積習既多, 然後脫然有貫通處耳.'"<br/> | ||
+ | "물었다: '格物이라는 것은 반드시 物마다 궁구(格)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단지 하나의 物만 궁구하면 온갖 이치에 모두 통달하는 겁니까?' 대답하셨다: '하나의 物만 궁구하고서 온갖 이치에 통달하는 건, 비록 안자라도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셨다. 오늘 하나의 物을 궁구하고, 내일 또 하나의 物을 궁구해, 점진적으로 익힌 것이 많아진 연후에야 脫然<ref><한어대사전> 2. 超越尋常貌。</ref>하게 통달하게 될 뿐이다.'<ref><이정유서> 18-27 或問:「進修之術何先?」 曰:「莫先於正心誠意. 誠意在致知, 『致知在格物』. 格, 至也. 如『祖考來格』之格. 凡一物上有一理, 須是窮致其理. 窮理亦多端: 或讀書, 講明義理; 或論古今人物, 別其是非. 或應接事物而處其當. 皆窮理也.」 或問:「格物須物物格之, 還只格一物而萬理皆知?」 曰:「怎生便會該通? 若只格一物便通衆理. 雖顔子亦不敢如此道. 須是今日格一件, 明日又格一件, 積習旣多, 然後脫然自有貫通處.」</ref>" | ||
+ | :朱子曰: "'一日一件'者, 格物工夫次第也; '脱然貫通'者, 知至效驗極致也. 不循其序而遽責其全, 則為自罔; 但求粗曉而不期貫通, 則為自畫."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루에 한 건'(一日一件)이라는 것은 격물 공부의 단계이고, '脫然하게 통달한다'는 것은 '知至'라는 결과의 극치이다. 차례를 따르지 않고 바로 온전하기를 구한다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 되고, 조금만 알려고 하고 통달하려고 하지 않으면 '스스로 한계짓는 것'이 된다." | ||
+ | :○程子此語, 便是眞實做工夫來, 不說格一件後便貫通, 也不說盡格得天下物理後方始通. 只云積習既多, 然後脱然有箇貫通處. | ||
+ | :정자의 이 말씀은 진정으로 공부해보신 것이니, '하나만 궁구(格)하면 통달하게 된다'고 말씀하시지도 않고, '천하 사물의 이치를 모두 궁구(格)한 뒤에야 통달할 수 있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단지 '점진적으로 익힌 것이 많아진 연후에야 脫然하게 통달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 ||
+ | :○問: "'一理通則萬理通', 其說如何?" 曰: "伊川嘗云: '雖顔子亦未到此', 天下豈有一理通便解萬理皆通? 也須積累將去. 如顔子髙明, 不過聞一知十, 亦是大叚聰明了. 學問却有漸, 無急迫之理." | ||
+ | :물었다: "'하나의 이치에 통달하면 모든 이치에 통달하게 된다'는 설은 어떻습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이천 선생께서는 '비록 안자라도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셨다'고 말씀하셨으니, 천하에 어찌 하나의 이치에 통달하면 모든 이치에 통달할 수 있는 경우가 있겠는가? 역시 점진적으로 쌓아나가야 한다. 안자와 같은 고명하신 분도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ref><논어> <공야장> 9. 子謂子貢曰:「女與回也孰愈?」 對曰:「賜也何敢望回。回也聞一以知十,賜也聞一以知二。」</ref> 정도에 지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대단히 총명하신 것이었다. 학문은 점진적인 것이지 급박할 리가 없다." | ||
+ | :○窮理者, 因其所已知而及其所未知; 因其所已逹而及其所未逹. 人之良知, 本所固有, 然不能窮理者, 只是足於已知已逹, 而不能窮其未知未逹. 故見得一截, 不曾又見得一截, 此其所以於理未精也. 然仍須工夫日日增加, 今日既格得一物, 明日又格得一物, 工夫更不住地做. 如左脚進得一歩, 右脚又進一歩; 右脚進得一歩, 左脚又進, 接續不已, 自然貫通. | ||
+ | :'窮理'라는 것은 이미 아는 것에 기인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이르고, 이미 통달한 것에 기인데 아직 통달하지 못한 것에 이르는 것이다. 사람의 양지는 본래 가지고 있는 것에 근거하지만, 窮理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해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궁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만 알고 나머지 반을 더이상 알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이치에 대해 정통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것에] 기인해 공부해서 날마다 [앎을] 증진시켜야 한다. 오늘 하나를 궁구(格)하고 내일 또 하나를 궁구(格)해 공부를 더이상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마치 왼발을 한 걸음 내딛으면 오른발을 또 한 걸음 내딛고, 오른발을 한 걸음 내딛으면 왼발을 또 내딛듯이 끊임없이 이어간다면 저절로 통달하게 될 것이다. | ||
+ | :○問: "無事時, 見得是如此; 臨事又做錯了, 如何?" 曰: "只是斷置不分明, 所以格物便要閒時理㑹, 不是要臨時理㑹. 閒時看得道理分曉, 則事來時, 斷置自易. 格物只是理㑹未理㑹得底; 不是從頭都要理㑹. 如水火人自是知其不可蹈, 何曾有錯去蹈水火? 格物只是理㑹當蹈水火與不當蹈水火, 臨事時斷置教分曉. 程子所謂: '今日格一件, 明日格一件', 亦是如此." | ||
+ | :물었다: "별 일이 없을 때에는 이러한 줄 알다가, 일을 마주하면 또 잘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대답하셨다: "단지 대처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格物하는 방법은 한가할 때 이해하려는 것이지, 일이 닥쳤을 때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가할 때 도리를 분명히 알면, 일이 닥쳤을 때 대처하기 절로 쉬워진다. 격물은 다만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물이나 불에 대해 사람들은 본래부터 거기에 들어가서는 안 됨을 아는데, 언제 물이나 불에 잘못 들어가봤던가? 격물은 단지 물이나 불에 들어가야 하는지 들어가면 안 되는 지 이해해, 일을 마주했을 때 대처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정자께서 말씀하신 '오늘 하나를 궁구(格)하고 내일 하나를 궁구(格)하라'는 것 역시 이와 같다." | ||
+ | :○'積習既多, 自當脫然有貫通處', 乃是零零碎碎湊合將來, 不知不覺, 自然醒悟. 其始固須用力; 及其得之也, 又却不假用力. 此箇事不可欲速, 欲速則不逹. 須是慢慢做去. | ||
+ | :'점진적으로 익힌 것이 많아지고 나면 절로 응당 脫然하게 통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바로 자질구레하게 모으면 부지불식간에 저절로 깨우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힘을 써야겠지만, 터득하고 나면 더이상 힘을 쓸 필요가 없다. 이 일은 서둘러서는 안 되니, 서두르면 이루지 못한다.<ref><논어> <자로> 17. 子夏為莒父宰,問政。子曰:「無欲速,無見小利。欲速,則不達;見小利,則大事不成。」</ref> 반드시 천천히 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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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4.<br/> | ||
+ | "又曰: '自一身之中, 以至萬物之理, 理㑹得多, 自當豁然有箇覺處.'"<br/> | ||
+ | "또 말씀하셨다: '일신의 마음(中)으로부터 만물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많이 이해하면 저절로 응당 豁然하게 깨우치는 바가 있게 된다.'<ref><이정유서> 17-64 今人欲致知, 須要格物. 物不必謂事物然後謂之物也, 自一身之中, 至萬物之理, 但理會得多, 相[幾]次自然豁然有覺處.</ref>" | ||
+ | :朱子曰: "'一身之中', 是仁義禮智、惻隱羞惡辭遜是非, 與視聽言動, 皆所當理㑹. 至夫萬物之榮悴, 與夫動植小大, 這底是如何使, 那底是如何用; 車之可以行陸, 舟可以行水, 皆當理㑹."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一身之中'은 인의예지와 측은·수오·사양(辭遜)·시비지심 그리고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니, 모두 이해해야 할 것들이다. 만물의 성쇠와 동식물의 크고 작음, 이것은 어떻게 사용하고 저것은 어떻게 사용하는지, 수리는 육지를 다닐 수 잇고 배는 물 위를 다닐 수 있는 것 모두 이해해야 한다." | ||
+ | :○玉溪盧氏曰: "至'豁然覺處', 則一身之理與夫萬物之理通貫而為一矣."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豁然하게 깨우치게 되면' 일신의 이치와 저 만물의 이치가 꿰어져 하나가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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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5.<br/> | ||
+ | "又曰: '窮理者, 非謂必盡窮天下之理; 又非謂止窮得一理便到. 但積累<sub>魯水反. 後凡言積累者音同.</sub>多後, 自當脫然有悟處.'"<br/> | ||
+ | "또 말씀하셨다: '窮理라는 것은 반드시 천하의 이치를 모두 궁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나의 이치만 궁구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안다. 단지 점진적으로 누적한 것이 많아진 뒤에 저절로 응당 脫然하게 깨우치는 바가 있게 되는 것이다.'<ref><이정유서> 02上-192 所務於窮理者, 非道須盡窮了天下萬物之理, 又不道是窮得一理便到, 只是要積累多後, 自然見去.</ref>" | ||
+ | :問: "'知至'若論極盡處, 聖賢亦難言. 如孟子未學諸侯䘮禮,<ref><맹자> <등문공상> 2. 諸侯之禮,吾未之學也;</ref> 與未詳班爵之制.<ref><맹자> <만장하> 2. 北宮錡問曰:「周室班爵祿也,如之何?」 孟子曰:「其詳不可得聞也。</ref>" 朱子曰: "如何要一切知得? 然理㑹得已多, 萬一有揷一件差異底事來, 也識得他破<ref><한어대사전> 32. 用在動詞後, 表示極度。 相當於“煞”。 </ref>. 只是貫通, 便不通底亦通將去. 某舊亦有此疑, 後看程子說'格物, 非欲窮盡天下之理, 積累多, 後自當脫然有悟處', 方理㑹得. 如十事, 巳窮得八九, 其一二雖未窮, 將來凑合, 都自見得."<ref><주자어류> 권18 問:「知至若論極盡處,則聖賢亦未可謂之知至。如孔子不能證夏商之禮,孟子未學諸侯喪禮,與未詳周室班爵之制之類否?」曰:「然。如何要一切知得!然知至只是到脫然貫通處,雖未能事事知得,然理會得已極多。萬一有插生一件差異底事來,也都識得他破。只是貫通,便不知底亦通將去。某舊來亦如此疑,後來看程子說:『格物非謂欲盡窮天下之物,又非謂只窮得一理便到,但積累多後自脫然有悟處。』方理會得。」; 같은 책, 같은 곳. 問程子格物之說。曰:「須合而觀之,所謂『不必盡窮天下之物』者,如十事已窮得八九,則其一二雖未窮得,將來湊會,都自見得。</ref> | ||
+ | :물었다: "'知至'를 '지극한 것'으로 논한다면, 성현이라도 ['知至'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니, 맹자께서 제후의 상례를 배우지 못하신 것과 班爵의 제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신 것과 같습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모두 알려고 하는가? 그러나 이해한 것이 이미 많다면, 만에 하나라도 다른 일이 끼어들더라도 그것을 잘 알아챌 것이다. 단지 통달하기만 하면 알지 못했던 것도 알게 된다. 나도 예전에 이런 의문이 있었는데, 나중에 정자께서 '격물은 천하의 모든 이치를 모두 궁구하려는 것이 아니니, 점진적으로 누적한 것이 많게 된 뒤에 절로 응당 脫然하게 깨우치는 바가 있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열 가지 일 가운데 이미 8-9개를 궁구했다면, 나머지 1-2개를 비록 아직 궁구하지 못했더라도 나중에 모으면 모두 절로 알 수 있다." | ||
+ | :○王氏曰: "右三條皆要工夫多積, 自能貫通覺悟. 却自是三樣: 第一是漸漸格; 第二是合内外格; 第三是不泛不漏格." | ||
+ | :왕씨가 말했다: "이상 세 조목(4-3·4·5)은 모두 '공부는 많이 쌓아야 한다'는 것이니, [그러면] 절로 통달하고 깨우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4-3)는 점진적인 궁구(格)이고, 두 번째(4-4)는 안팎을 합하는 궁구(格)이며, 세 번째(4-5)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궁구(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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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6.<br/> | ||
+ | "又曰: '格物, 非欲盡窮天下之物, 但於一事上窮盡, 其他可以類推. 至於言孝, 則當求其所以爲孝者如何. 若一事上窮不得, 且别窮一事, 或先其易<sub>去聲</sub>者, 或先其難者, 各隨人淺深. 譬如千蹊萬徑, 皆可以適國, 但得一道而入, 則可以推類而通其餘矣. 蓋萬物各具一理, 而萬理同出一原, 此所以可推而無不通也.'"<br/> | ||
+ | "또 말씀하셨다: '格物은 천하의 사물을 모두 궁구하려는 것이 아니니, 단지 한 사물을 모두 궁구하면 나머지는 유추할 수 있다. 효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이 효 되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구해야 한다. 한 사물을 궁구하지 못하면, 우선 달리 한 사물을 궁구하되, 어떤 경우에는 쉬운 것을 우선하고, 어떤 경우에는 어려운 것을 우선해 각각 사람의 수준에 따른다. 비유하자면, 온갖 길로도 모두 도성에 다다를 수 있지만, 하나의 길을 택해 들어가면 유추하여 나머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대개 만물은 각각 하나의 이치를 갖추고 있고, 모든 이치는 하나의 근원에서 동일하게 나오니, 이것이 유추해서 통달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이다.'<ref><이정유서> 15-104 格物窮理, 非是要盡窮天下之物. 但於一事上窮盡, 其他可以類推. 至如言孝, 其所以爲孝者如何, 窮理(一無此二字). 如一事上窮不得, 且別窮一事, 或先其易者, 或先其難者, 各隨人深淺. 如千蹊萬徑, 皆可適國, 但得一道入得便可. 所以能窮者, 只爲萬物皆是一理, 至如一物一事, 雖小, 皆有是理.</ref>" | ||
+ | :朱子曰: "既是教人類推, 不是窮盡一事便了. 且如盡得箇孝底道理, 故忠可移於君, 又須盡得忠. 以至兄弟、夫婦、朋友, 從此推之無不盡窮, 始得."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에게 유추하게 한 이상, 하나의 사물만 모두 궁구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孝라는 도리를 모두 터득했다면, 忠을 임금에게 적용할 수 있지만,<ref><효경> <廣揚名> 子曰:「君子之事親孝,故忠可移於君。事兄悌,故順可移於長。居家理,故治可移於官。是以行成於內,而名立於後世矣。」</ref> 다시 忠을 다해야 한다. 형제·부부·친구에 이르기까지 이것으로부터 유추해 모두 궁구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ref><주자어류> 권18 問:「程子言:『今日格一件,明日格一件,積習既久,自當脫然有貫通處。』又言:『格物非謂盡窮天下之理,但於一事上窮盡,其他可以類推。』二說如何?」曰:「既是教類推,不是窮盡一事便了。且如孝,盡得箇孝底道理,故忠可移於君,又須去盡得忠。以至於兄弟、夫婦、朋友,從此推之無不盡窮,始得。且如炭,又有白底,又有黑底。只窮得黑,不窮得白,亦不得。且如水雖是冷而濕者,然亦有許多樣,只認冷濕一件也不是格。但如今下手,且須從近處做去。若幽奧紛拏,卻留向後面做。所以先要讀書,理會道理。蓋先學得在這裏,到臨時應事接物,撞著便有用處。且如火爐,理會得一角了,又須都理會得三角,又須都理會得上下四邊,方是物格。若一處不通,便非物格也。」又曰:「格物不可只理會文義,須實下工夫格將去,始得。」</ref> | ||
+ | :○問: "程子 '若一事上窮不得, 且别窮一事'之說, 與<中庸>'弗得弗措'相發明否?" 曰: "看來有一様底, 若'弗得弗措', 一向思量這箇, 少間便㑹擔閣<ref><한어대사전> 【擔擱】 2. 耽誤.</ref>了. 若謂窮一事不得, 便掉了别窮一事, 又輕忽了, 也不得. 程子為見學者有恁地底, 不得已說此話."::물었다: "정자의 '한 사물을 궁구하지 못하면, 우선 달리 한 사물을 궁구하라'는 설과 <중용>의 '터득하지 못했거든 놔두지 말라'는 것은 서로 밝혀주는 것(상호보완적)입니까?" 대답하셨다: "보아하니 [정자의 설과 <중용>의 설에] 공통점이 있다. '터득하지 못해 놔두지 않는다면' 오로지 이것만 생각해 잠깐 사이에 시간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한 일을 궁구하지 못하면 달리 일을 궁구하지도 않고 또 소홀히 여겨버려라'라고 여겨도 안 된다?? 정자께서는 배우는 자들에게 이러한 점이 있음을 보셨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8 問:「程子『若一事上窮不得,且別窮一事』之說,與中庸『弗得弗措』相發明否?」曰:「看來有一樣底,若『弗得弗措』,一向思量這箇,少間便會擔閣了。若謂窮一事不得,便掉了別窮一事,又輕忽了,也不得。程子為見學者有恁地底,不得已說此話。」</ref> | ||
+ | :○問: "致之為言, 推而致之以至於盡也. 於窮不得處正當努力, 豈可遷延<ref><한어대사전> 1. 退卻, 後退。 </ref>逃避, 别求一事邪?" 曰: "這是隨人之量, 非曰遷延逃避也. 蓋於此處既理㑹不得, 若專一守在這裏, 却轉昏了. 須著别窮一事, 又或可以因此而明彼也."<ref><주자어류> 권18 問:「伊川論致知處云:『若一事上窮不得,且別窮一事。』竊謂致之為言,推而致之以至於盡也。於窮不得處正當努力,豈可遷延逃避,別窮一事邪?至於所謂『但得一道而入,則可以類推而通其餘矣』。夫專心致志,猶慮其未能盡知,況敢望以其易而通其難者乎?」曰:「這是言隨人之量,非曰遷延逃避也。蓋於此處既理會不得,若專一守在這裏,卻轉昏了。須著別窮一事,又或可以因此而明彼也。」</ref> | ||
+ | :물었다: "'致'라는 말은 미루어 나가 지극한 데 이른다는 것입니다. 궁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노력해야지, 어찌 물러나고 회피해 달리 일을 구해서야 되겠습니까?" 대답하셨다: "이 말은 사람의 역량에 따르라는 것이지, '물러나고 회피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대개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여기서 전일하게 지키기만 한다면 도리어 혼매하게 된다. 모름지기 달리 일을 궁구해야 하고, 또 간혹 이것(달리 궁구한 일)에 기인해 저것(원래 궁구하지 못했던 일)을 알게 될 수도 있다." | ||
+ | :○問: "伊川說, 與延平李先生說, 如何?" 曰: "這說自有一項難窮底事, 如造化、禮樂、度數等, 卒急難曉, 只得且放住. 李先生說是窮理之要. 若平常遇事, 這一件理㑹未透, 又理㑹第二件; 第二件理㑹未得, 又理㑹第三件, 恁地終身不長進." | ||
+ | :물었다: "이천 선생의 설은 연평 선생의 설<ref><주자어류> 권18 問:「延平謂:『為學之初,且當常存此心,勿為他事所勝。凡遇一事,即當且就此事反復推尋以究其極。待此一事融釋脫落,然後別窮一事,久之自當有洒然處。』與伊川『今日格一件,明日格一件』之語不同,如何?」曰:「這話不如伊川說『今日明日』恁地急。卓錄但云:「伊川說得較快。」這說是教人若遇一事,即且就上理會教爛熟離析,不待擘開,自然分解。久之自當有洒然處,自是見得快活。某常說道,天下事無他,只是箇熟與不熟。若只一時恁地約摸得,都不與自家相干,久後皆忘卻。只如借得人家事一般,少間被人取將去,又濟自家甚事!」</ref>과 비교했을 때 어떻습니까?" 대답하셨다: "이 설(이천의 설)에는 궁구하기 어려운 일이 전제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만물의] 조화·예악·도수 등은 갑자기 이해하기는 어려우니, 우선 그대로 놔둬야 한다. 연평 선생의 설은 窮理공부의 핵심이다. 평소 일을 마주했을 때 이것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다시 두 번째 것을 이해하고, 두 번째 것을 이해하지 이해하지 못해 다시 세 번째 것을 이해하려 한다면, 이렇게 해서는 죽을 때까지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8 仁甫問:「伊川說『若一事窮不得,須別窮一事』,與延平之說如何?」曰:「這說自有一項難窮底事,如造化、禮樂、度數等事,是卒急難曉,只得且放住。且如所說春秋書『元年春王正月』,這如何要窮曉得?若使孔子復生,也便未易理會在。須是且就合理會底所在理會。延平說,是窮理之要。若平常遇事,這一件理會未透,又理會第二件;第二件理會未得,又理會第三件,恁地終身不長進。」</ref> | ||
+ | :○問: "'千蹊萬徑, 皆可以適國.' 國是譬理之一原處. 不知從一事上便窮到一原處否?" 曰: "也未解便至如此, 只要以類而推. 理固是一理, 然其間曲折甚多, 須是把這箇做樣子<ref><한어대사전> 1. 供人效法、模仿的榜樣和式樣。 </ref>, 却從這裏推去, 始得. 且如事親, 固當盡其事之之道, 若得於親是如何, 不得於親又當如何. 以此而推之於事君, 則知得於君是如何, 不得於君又當如何. 推以事長, 亦是如此. 推去, 莫不皆然." | ||
+ | :물었다: "'온갖 길로도 모두 도성에 다다를 수 있다'에서, '도성'(國)은 하나의 근원으로서의 理를 비유할 것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나의 일에서 하나의 근원을 궁구할 수 있습니까?" 대답하셨다: "물론 바로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부류에 따라 추론해야 한다. 理는 진실로 하나의 理이지만, 그 안에 디테일이 매우 많으니, 모름지기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여기서 추론해야 한다. 가령 부모를 섬길 때에는, 예를 들어 부모의 마음에 들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고, 부모의 마음에 들지 못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진실로 마땅히 부모 섬기는 도리를 다해야 한다. 이것을 가지고 임금 섬기는 경우에 미루어 적용한다면, 임금의 마음에 들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고, 임금의 마음에 들지 못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어른을 섬기는 경우에 미루어 적용하는 것도 이와 같다. 미루어 적용한다면 모두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을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8 陶安國問:「『千蹊萬徑,皆可適國。』國,恐是譬理之一源處。不知從一事上便可窮得到一源處否?」曰:「也未解便如此,只要以類而推。理固是一理,然其間曲折甚多,須是把這箇做樣子,卻從這裏推去,始得。且如事親,固當盡其事之之道,若得於親時是如何,不得於親時又當如何。以此而推之於事君,則知得於君時是如何,不得於君時又當如何。推以事長,亦是如此。自此推去,莫不皆然。」</ref> | ||
+ | :○"萬物皆有此理, 理皆同出一原. 但所居之位不同, 則其理之用不一. 如為君須仁, 為臣須敬, 為子須孝, 為父須慈. 物物各具此理, 而物物各具其用, 然莫非一理之流行者也." 又曰: "近而一身之中, 逺而八荒<ref><한어대사전> 八方荒遠的地方。</ref>之外, 微而一草一木之衆, 莫不各具此理. 如此四人在坐, 各有這箇道理, 某不用假借於公, 公不用求於某. 然雖各有這一道理, 又却同出於一箇理耳. 如排數器水相似: 這盂也是這樣水, 那盂也是這樣水, 各各滿足, 不待求假於外. 然打破放裏, 也只是這箇水. 此所以可推而無不通也. 所以謂格得多後自能貫通, 只為是一理." | ||
+ | :"만물은 모두 이 理를 가지고 있고, 理는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동일하게 나온다. 다만 처한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理의 用이 같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된 자는 仁해야 하고 신하된 자는 공경해야 하며 부모된 자는 자애로워야 한다.<ref><대학장구> 전3장 為人君,止於仁;為人臣,止於敬;為人子,止於孝;為人父,止於慈;與國人交,止於信。</ref> 모든 사물은 각각 이 理를 갖추고 있고, 모든 사물은 각각 이 理의 用을 갖추고 있지만, 하나의 用가 유행한 것이 아님이 없다."<ref><주자어류> 권18 德元問:「萬物各具一理,而萬理同出一原。」曰:「萬物皆有此理,理皆同出一原。但所居之位不同,則其理之用不一。如為君須仁,為臣須敬,為子須孝,為父須慈。物物各具此理,而物物各異其用,然莫非一理之流行也。</ref> 또 말씀하셨다: "가까이로는 일신의 마음으로부터 멀게는 八荒의 바깥, 작게는 한 초목에 이르기까지 각각 이 理를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예를 들어, 여기 자리에 있는 네 사람 각각 이 도리를 가지고 있으니, 나는 그대에게 빌릴 필요가 없고, 그대는 나에게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비록 각각 이 도리를 가지고 있지만, 동일하게 하나의 理에서 나왔을 뿐이다. 마치 여러 그릇에 물을 담는 것과 같아, 이 사발도 이런 물이고 저 사발도 저런 물이니, 각각 가득 차서 밖에서 빌려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발을] 깨뜨리면 이 물일 뿐이다. 이것이 '유추해서 통달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궁구(格)한 것이 많아진 뒤에 절로 통달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理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8 行夫問:「萬物各具一理,而萬理同出一源,此所以可推而無不通也。」曰:「近而一身之中,遠而八荒之外,微而一草一木之眾,莫不各具此理。如此四人在坐,各有這箇道理,某不用假借於公,公不用求於某,仲思與廷秀亦不用自相假借。然雖各自有一箇理,又卻同出於一箇理爾。如排數器水相似;這盂也是這樣水,那盂也是這樣水,各各滿足,不待求假於外。然打破放裏,卻也只是箇水。此所以可推而無不通也。所以謂格得多後自能貫通者,只為是一理。釋氏云:『一月普現一切水,一切水月一月攝。』這是那釋氏也窺見得這些道理。濂溪通書只是說這一事。」</ref> | ||
+ | :○玉溪盧氏曰: "'一事上窮盡, 他可類推', 此貫通覺悟之機也. '如言孝則求其所以為孝者如何', 此格物致知要法; '一事上窮不得, 且别窮一事', 此格物致知活法<ref><한어대사전> 1. 宋 人詩論中提出的學詩所必須掌握的能靈活變通的法則。 </ref>. '萬物各具一理', 萬物各具之太極也; '萬理同出一原', 萬物統體之太極也. '推而無不通', 則有脫然豁然處矣."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한 사물을 궁구하면 나머지는 유추할 수 있다' 이것은 통달하고 깨우치게 되는 계기(機)이다. '효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이 효 되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구해야 한다'는 것은 격물치지의 핵심적 방법이다. 하나의 일에서 궁구하지 못하면 우선 달리 일을 궁구하라' 이것은 격물치지의 변통적 방법이다. '만물이 각각 하나의 理를 갖추고 있다'는 것은 '만물이 각각 갖추고 있는 태극'이고, '모든 理가 동일하게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다'는 것은 '만물 통체로서의 태극'이다.<ref><태극해의> 蓋合而言之, 萬物統體一太極也; 分而言之, 一物各具一太極也.</ref> '유추해서 통달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脫然·豁然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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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7.<br/> | ||
+ | "又曰: '物必有理, 皆所當窮. 若天地之所以髙深, 鬼神之所以幽顯, 是也. 若曰: 天吾知其髙而已矣; 地吾知其深而已矣; 鬼神吾知其幽且顯而已矣, 則是已然之詞, 又何理之可窮哉?'"<br/> | ||
+ | "또 말씀하셨다: '사물에는 반드시 이치가 있으니, 모두 궁구해야 할 것들이다. 예를 들어, 하늘은 높고 땅은 깊은 까닭이나, 鬼는 숨겨져 있고 神은 드러나는 까닭이 이것이다. 만약 「하늘이 높은 건 알고 있다」, 「땅히 깊다는 건 알고 있다」던가 「鬼가 숨겨져 있고 神은 드러나 있다는 건 알고 있다」고 할 뿐이라면, 이는 기정사실화하는 말이니, 어떤 이치가 궁구할 만한 하겠는가?'<ref><이정유서> 15-108 物理須是要窮. 若言天地之所以高深, 鬼神之所以幽顯. 若只言天只是高, 地只是深, 只是已辭, 更有甚?</ref><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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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8.<br/> | ||
+ | "又曰: '如欲爲孝, 則當知所以爲孝之道, 如何而爲奉養<sub>去聲</sub>之宜, 如何而爲温凊<sub>七性反</sub>之節,<sub><禮記>凡為人子者, 冬温而夏凊.<ref><예기> <곡례상> 凡為人子之禮:冬溫而夏凊,昏定而晨省,在醜夷不爭。</ref></sub>莫不窮究, 然後能之, 非獨守夫<sub>音扶</sub>孝之一字而可得也.'"<br/> | ||
+ | "또 말씀하셨다: '효를 행하고자 한다면, 효라는 도를 행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니, 어떻게 해야 적절한 봉양이 되며, 어떻게 해야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는」 예절이 되는 지를 궁구하지 않음이 없은 뒤에야 [효를 행할 수] 있으니, 저 「효」(孝) 한 글자만 지켜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ref><이정유서> 18-101 問:「必有事焉, 當用敬否?」 曰:「敬只是涵養一事. 必有事焉, 須當集義. 只知用敬, 不知集義, 却是都無事也.」 又問:「義莫是中理否?」 曰:「中理在事, 義在心內. 苟不主義, 浩然之氣從何而生? 理只是發而見於外者. 且如恭敬, 幣之未將也恭敬, 雖因幣帛威儀而後發見於外, 然須心有此恭敬, 然後著見. 若心無恭敬, 何以能爾? 所謂德者得也, 須是得於己, 然後謂之德也.」 幣之未將之時, 已有恭敬, 非因幣帛而後有恭敬也. 問:「敬義何別?」 曰:「敬只是持己之道, 義便知有是有非. 順理而行, 是無義也. 若只守一箇敬, 不知集義, 却是都無事也. 且如欲爲孝, 不成只守著一箇孝字? 須是知所以爲孝之道, 所以侍奉當如何, 溫凊當如何, 然後能盡孝道也.」 又問:「義只在事上, 如何?」 曰:「內外一理, 豈特事上求合義也?」</ref>" | ||
+ | :朱子曰: “聖人言孝, 其實精粗本末只是一理. 人皆有良知, 而前此未嘗知者, 只為不曽推去耳. 愛親從兄, 誰無是心? 於此推去, 則温凊定省之事, 亦不過是. 自其所知, 推而至於無所不知, 皆由人推耳.”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성인께서 말씀하신 孝는 사실 정미한 것이든 거친 것이든, 근본적인 것이든 지엽적인 것이든 단지 하나의 이치일 뿐이다. 사람들은 모두 양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은 단지 추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를 사랑하고 형에게 순종하는 것,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겠는가? 이것으로부터 추론한다면,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밤에는] 이부자리를 정돈해드리고, [아침에는] 안부를 여쭙는 일 역시 이(양지)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아는 것으로부터 추론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은 모두 사람이 추론하는 데 말미암는다." | ||
+ | :○陳氏曰: “如事親當孝, 非是空守一箇孝字, 必須窮格所以為孝之理當如何. 凡古人事親條目, 皆無一不講, 然後可以實能盡孝.” | ||
+ | :진씨가 말했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길 때 효성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헛되이, 효 한 글자만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효라는 이치를 행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궁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 옛 분들께서 [말씀하신] 부모 섬기는 것에 대한 조목들을 하나도 강론하지 않음이 없은 뒤라야 실제로 효를 다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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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9.<br/> | ||
+ | "或問: '觀物察己者, 豈因見物而反求諸己乎?' 曰: '不必然也. 物我一理, 纔明彼即曉此, 此合<ref>5. 同, 相同;一致。▶ 《易‧乾》: “夫大人者, 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 </ref>内外之道也. 語其大, 天地之所以髙厚; 語其小, 至一物之所以然, 皆學者所宜致思也.' 曰: '然則先求之四端, 可乎?' 曰: '求之情性, 固切於身. 然一草一木, 亦皆有理, 不可不察.'"<br/> | ||
+ | "혹자가 물었다: '「사물을 살피고 나를 살펴라」라는 것이 어찌 사물을 보고 나서 돌이켜 자신을 탐구하라는 것이겠습니까?'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사물과 나는 하나의 이치[를 갖추고 있으니], 저것(사물)을 알자마자 이것(나)을 알게 되니, 이것이 「안팎으로 일치된 도」이다. 큰 것을 말하자면 「하늘은 높고 땅은 두터운 까닭」과, 작은 것을 말하자면 「한 사물의 소이연」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우는 자들이 지극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물었다: '그렇다면 먼저 四端을 궁구해도 괜찮습니까?'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감정이나 본성(情性)을 탐구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에게 절실한 것이지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이치가 있으니 살피지 않아선 안 된다.'<ref><이정유서> 18-48 問:「觀物察己, 還因見物, 反求諸身否?」 曰:「不必如此說. 物我一理, 纔明彼卽曉此, 合內外之道也. 語其大, 至天地之高厚; 語其小, 至一物之所以然. 學者皆當理會.」 又問:「致知, 先求之四端, 如何.」 曰:「求之性情, 固是切於身. 然一草一木皆有理, 須是察.」 </ref>" | ||
+ | :朱子曰: “‘天地之所以髙厚’, ‘一物之所以然’, 只是舉至大與至細者言之. 學者之窮理, 無一物而在所遺也.”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은 높고 땅은 두터운 까닭'과 '한 사물의 소이연'은 다만 지극히 큰 것과 지극히 작은 것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다. 배우는 자의 궁리는 한 사물도 빠뜨리지 않는다." | ||
+ | :○問: “格物須合内外始得.” 曰: “未嘗不合. 自家知得物之理如此, 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 便是合内外之理. 目前事事物物, 皆有至理, 如一草一木、一禽一獸皆有理. 草木春生秋殺, 好生惡死, 仲夏斬陽木, 仲冬斬隂木, 皆是順隂陽道理. 自家知得萬物均氣同體, 見生不忍見死, 聞聲不忍食肉; 非其時不伐一木, 不殺一獸; 胎不殀, 不覆巢, 此便是合内外之道.” | ||
+ | :물었다: "격물 공부는 '안팎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일치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사물의 이치가 이러함을 스스로 알았다면, 본래의 이치에 따라 응하는 것이 '안팎의 이치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눈앞의 사물마다 모두 지극한 이치를 가지고 있으니, 예를 들어 한 포기 풀과 한 그루 나무, 한 마리의 금수 모두 이치를 가지고 있다. '초목이 봄에 나서 가을에 시들고',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며', '仲夏에는 陽木을 베고 仲冬에는 隂木을 베는 것'<ref><주례> <지관사도> 仲冬斬陽木,仲夏斬陰木。</ref> 모두 음양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다. 만물이 氣를 공유하는 한 몸임을 스스로 안다면, '살아있는 것을 보고는 차마 죽는 걸 보지 못하고, [살아있는 금수의] 울음 소리를 듣고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며',<ref><맹자> <양혜왕상> 7. 君子之於禽獸也,見其生,不忍見其死;聞其聲,不忍食其肉。是以君子遠庖廚也。</ref> '제때가 아니라면 나무 한 그루도 베지 않고 짐승 한 마리고 죽이지 않고',<ref><맹자> <양혜왕상> 3. 不違農時,穀不可勝食也;數罟不入洿池,魚鼈不可勝食也;斧斤以時入山林,材木不可勝用也。</ref> '새끼를 죽이지 않고 둥지를 엎지 않으니',<ref><예기> <왕제> 昆蟲未蟄,不以火田,不麑,不卵,不殺胎,不殀夭,不覆巢。</ref> 이것이 '안팎을 일치시키는 도'이다."<ref><주자어류> 권15 問:「格物須合內外始得?」曰:「他內外未嘗不合。自家知得物之理如此,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便見合內外之理。目前事事物物,皆有至理。如一草一木,一禽一獸,皆有理。草木春生秋殺,好生惡死。『仲夏斬陽木,仲冬斬陰木』,皆是順陰陽道理。砥錄作「皆是自然底道理」。自家知得萬物均氣同體,『見生不忍見死,聞聲不忍食肉』,非其時不伐一木,不殺一獸,『不殺胎,不殀夭,不覆巢』,此便是合內外之理。」</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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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0.<br/> | ||
+ | “又曰: ‘致知之要, 當知至善之所在, 如父止於慈, 子止於孝之類. 若不務此而徒欲汎然<ref>【泛然】 5. 空泛;浮淺, 不深入。 </ref>以觀萬物之理, 則吾恐其如大軍之遊騎<sub>去聲</sub>出太逺而無所歸也<br/> | ||
+ |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致知의 핵심은 至善의 소재를 아는 것이니, 예를 들면 '부모는 자애로움(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성스러움(孝)에 머무는 것'<ref><대학장구> 전3장 為人子,止於孝;為人父,止於慈;</ref> 따위와 같다. 만약 이런 것에 힘쓰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만물의 이치만 관찰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러한 것이 대군의 遊騎가 너무 멀리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을까 염려스럽다.'<ref><이정유서> 07-60 致知, 但知止於至善·爲人子止於孝·爲人父止於慈之類, 不須外面, 只務觀物理, 汎然正如遊騎無所歸也.</ref>" | ||
+ | :朱子曰: “格物之論, 伊川意雖謂眼前無非是物, 然其格之也, 亦須有緩急先後之序. 如今為學而不窮天理、明人倫、論聖言、通世故, 乃兀然存心於一草木、器用之間, 此是何學問?”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格物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천 선생의 뜻은 '비록 눈앞에 사물이 아닌 것이 없지만, 그것을 궁구(格)하는 경우에 역시 선후의 차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금 학문을 한다면서 천리를 궁구하지도, 인륜을 밝히지도, 성인의 말씀을 논하지도, 세상 일을 이해하지도 않고 그저 우두커니 초목이나 기물에 마음을 쏟는다면, 이것이 무슨 학문이겠는가?"<ref><주자대전> 권39 <答陳齊仲> 格物之論, 伊川意雖謂眼前無非是物, 然其格之也, 亦須有緩急先後之序, 豈遽以爲存心於一草木器用之間而忽然懸悟也哉? 且如今爲此學而不窮天理、明人倫、講聖言、通世故, 乃兀然存心於一草木․一器用之間, 此是何學問?</ref> | ||
+ | :○天下之理, 偪塞滿前, 耳之所聞、目之所見, 無非物也. 若之何而窮之哉? 須當察之於心, 使此心之理既明, 然後於物之所在, 從而察之, 則不至於汎濫矣. | ||
+ | :천하의 이치는 눈앞에 가득차 있어서, 귀에 들리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사물 아닌 것이 없다.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궁구할까? 마음을 살펴 이 마음의 이치가 밝아진 연후에 사물의 소재를 이어 살펴야 하니, 그렇게 한다면 압도당하지 않을 것이다." | ||
+ | :○致知一章, 是<大學>最初下手處. 若理㑹透徹, 後面便容易. 故程子此處說得節目甚多, 皆是因人之資質了說, 雖若不同, 其實一也. 見敏者太去理㑹外事, 則教之去父慈子孝上理㑹, 曰: ‘若不務此而徒泛觀萬物之理, 恐如遊騎出太逺而無所歸’; 見人專去裏面理㑹, 則教之以 ‘求之性情, 固切於身, 然一草木亦皆有理.’ 要之, 内事外事皆是自已合當理㑹底. 但須是六七分去裏面理㑹, 三四分去外面理㑹, 方可. 若是工夫中半時, 亦自不可, 况在外面工夫多, 在内工夫少邪? 此尤不可也.” | ||
+ | :致知장은 <대학>에서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곳이다. 만약 투철하게 이해했다면, 그 뒤에는 쉬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께서 이것에 대해 말씀하신 조목이 매우 많으니, 이 모두는 사람의 자질에 따라 말씀하신 것으로 비록 다른 것 같지만 사실 한 가지이다. 명민한 자가 바깥 일을 지나치게 이해한 것을 보시고는 '부모는 자애로움(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성스러움(孝)에 머무는 것'을 이해하게 하시고는, '만약 이런 것에 힘쓰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만물의 이치만 관찰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러한 것이 대군의 遊騎가 너무 멀리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을까 염려스럽다'고 말씀하셨고, 어떤 사람이 오로지 내면을 이해하려는 것을 보시고는 '감정이나 본성(情性)을 탐구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에게 절실한 것이지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이치가 있다'고 가르치셨다. 요컨대, 안팎의 일 모두 스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6-70% 정도는 내면을 이해하고, 3-40% 정도는 외면을 이해해야 괜찮을 것이다. [안팎의] 공부가 반반일 때에도 안 되는데, 하물며 외면 공부는 많고 내면 공부는 적을 때는 어떻겠는가? 이는 더욱 안 된다."<ref><주자어류> 권18 「致知」一章,此是大學最初下手處。若理會得透徹,後面便容易。故程子此處說得節目最多,皆是因人之資質耳。雖若不同,其實一也。見人之敏者,太去理會外事,則教之使去父慈、子孝處理會,曰:「若不務此,而徒欲汎然以觀萬物之理,則吾恐其如大軍之遊騎,出太遠而無所歸。」若是人專只去裏面理會,則教之以「求之情性,固切於身,然一草一木,亦皆有理」。要之,內事外事,皆是自己合當理會底,但須是六七分去裏面理會,三四分去外面理會方可。若是工夫中半時,已自不可。況在外工夫多,在內工夫少耶!此尤不可也。」</ref> | ||
+ | |||
+ | 4-11.<br/> | ||
+ | “又曰: ‘格物莫若察之於身, 其得之尤切.’”<br/> | ||
+ |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格物 [공부로는] 자신을 살펴 터득한 것이 더욱 절실한 것 만한 것이 없다.'<ref><이정유서> 17-07 「致知在格物」, 格物之理, 不若察之於身, 其得尤切.</ref>" | ||
+ | :朱子曰: “前既說 ‘當察物理, 不可專在性情’; 至此又言 ‘莫若察之於身為尤切’, 皆是互相發處.”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앞에서는 사물의 이치를 살펴야지 性情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여기서는 다시 '자신을 살피는 것이 더욱 절실함 만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두 가지는 상호보완적이다." | ||
+ | :○王氏曰: “前數條是推開去<ref><한어대사전> 2. 用在動詞後。 表示擴大或擴展。; 3. 用在動詞後。 表示開始並繼續下去。 ; 4. 用在動詞後。 表示分開或離開。 </ref>用工; 此兩條是収歸來用工, 皆隨人偏處教他.” | ||
+ | :왕씨가 말했다: "앞의 여러 조목(4-3~9)은 확장해나가는 공부이고, 이 두 조목(4-10, 11)은 수렴하는 공부이니, 모두 사람의 치우친 점에 따라 그를 가르치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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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此九條者, 皆言格物致知所當用力之地、與其次第工程也.”<br/> | ||
+ | "이 아홉 조목(4-3~11)은 모두 '格物致知에서 힘써야 할 것과 그 순서·과정을 말한 것이다." | ||
+ | :玉溪盧氏曰: “‘用力之地’者, ‘讀書’、‘應接事物’之類, 是也; ‘次第工程’者, ‘今日格一物, 明日又格一物’之類, 是也.”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힘써야 할 것'이라는 것은 '독서'(4-3)나 '사물에 응대하는 것'(4-3) 따위가 이것이고, '순서·과정'이라는 것은 '오늘 한 사물을 궁구(格)하고 내일 또 한 사물을 궁구한다'(4-3)는 것이 이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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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2.<br/> | ||
+ | “又曰: ‘格物窮理, 但立誠意以格之. 其遲速, 則在乎人之明暗耳.’”<br/> | ||
+ |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格物窮理는 다만 誠意를 확립하고서 궁구(格)하는 것이다. 格物窮理의 속도는 사람의 현명함에 달려있을 뿐이다.'<ref><이정유서> 22上-03 又問:「如何是格物?」先生曰:「格, 至也, 言窮至物理也.」又問:「如何可以格物?」曰:「但立誠意去格物, 其遲速卻在人明暗也. 明者格物速, 暗者格物遲.」</ref>" | ||
+ | :問: “‘知至而後意誠’, 而程子又云: ‘格物窮理, 但立誠意以格之’, 何也?” 朱子曰: “此誠字說較淺, 未說得深處. 只是確定其志, 朴實去做工夫, 如胡氏 ‘立志以定其本’便是. 這意此與經文誠意之說不同也.” 又曰: “誠意不立, 如何能格物? 所謂 ‘立誠意’者, 只是要著實下工夫, 不要若存若亡. 遇一物, 須是眞箇即此一物, 究極得箇道理了, 方可言格. 若 ‘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 <大學>蓋言其所止之序. 其始則必在於立誠.” | ||
+ | :물었다: "[<대학>의 가르침에 따르면] ‘앎이 지극해진 이후에 뜻이 진실해지는데'(知至而後意誠), 정자께서는 도리어 '格物窮理는 다만 誠意하고서 궁구(格)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자께서 말씀하신] '誠'자의 [의미는 <대학>의 '誠意'에 비해] 비교적 가벼우니(淺) 무겁게(深) 말해서는 안 된다. [정자의 말씀은] 다만 자신의 뜻을 확정하고 착실하게 공부하라는 것이니, 호오봉이 말한 '뜻을 세우고서 근본을 정초한다'<ref><예기집설> 五峯胡氏曰: "人非生而知之, 則其所知皆縁事物而知. 故迷於事物, 流蕩失中, 無所攸止. 然所謂事物者, 乃人生所不可無而亦不能掃滅使之無者也. 故儒之道, 即事即物, 不厭不棄, 必身親格之以精其知焉. 格之之道, 立志以定其本, 而居敬以持其志. 志立乎事物之表而敬行乎事物之内, 則物可格而知可精矣."</ref>는 것이 이것이다. 이 뜻은 [<대학>] 경문의 '誠意'설과 다르다." 또 말씀하셨다: "誠意가 확립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格物하겠는가? [정자께서] 말씀하신 ‘立誠意’라는 것은 다만 착실히 공부하라는 것이요, [뜻이] 있는 듯 없는 듯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물을 마주했을 때 이 사물에 진정으로 다가가 도리를 모두 궁구해야 '格'이라고 할 수 있다. ‘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은 <대학>에서 머무를 바의 차례를 말한 것이니, 그 시작은 반드시 '立誠'에 달려있다." | ||
+ | :○玉溪盧氏曰: “立誠意, 即主敬之謂.”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정자의] '誠意를 확립한다'는 것은 바로 '主敬'을 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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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3.<br/> | ||
+ | “又曰: ‘入道莫如敬. 未有能致知而不在敬者.’”<br/> | ||
+ |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道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敬만한 것이 없다. 능히 致知하면서 敬에 있지 않은 경우는 없다.'<ref><이정유서> 03-98 入道莫如敬, 未有能致知而不在敬者. 今人主心不定, 視心如寇賊而不可制, 不是事累心, 乃是心累事. 當知天下無一物是合少得者, 不可惡也.</ref>" | ||
+ | :朱子曰: “今人將持敬致知來做兩事, 持敬時只塊然獨坐, 更不去思量; 却是今日持敬, 明日去思量道理也, 豈可如此? 但一面自持敬, 一面自思量道理, 二者本不相妨.”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持敬'과 '致知'를 두 가지로 여겨, '持敬'할 때에는 그저 우두커니 홀로 앉아 전혀 사유하지 않거나, 아니면 오늘은 '持敬'하고 내일은 도리를 생각하니,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다만 한편으로는 '持敬'하고, 한편으로는 도리를 생각해야하니, 두 가지는 본래부터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ref><주자어류> 권117. 又曰:「今人將敬、致知來做兩事。特敬時只塊然獨坐,更不去思量;卻是今日持敬,明日去思量道理也!豈可如此?但一面自持敬,一面去思慮道理,二者本不相妨。」</ref> | ||
+ | :○莫若且收歛身心, 盡掃雜慮, 令其光明洞逹, 方能作得主宰, 方能見理. | ||
+ | :우선 몸과 마음을 수렴해 잡생각을 모두 없애 빛나는 것이 훤히 비치게 하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그렇게 하면] 비로소 주재를 세울 수 있고, 비로소 이치를 깨우칠 수 있다."<ref><주자어류> 권128. 某以為諸公莫若且收斂身心,盡掃雜慮,令其光明洞達,方能作得主宰,方能見理。不然,亦終歲而無成耳。</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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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4.<br/> | ||
+ | “又曰: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br/> | ||
+ |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함양할 때는 敬해야 하고, 학문을 진전시키는 것은 致知에 달려있다.'<ref><이정유서> 8-28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ref>" | ||
+ | :朱子曰: “學者工夫, 惟在居敬窮理二事. 此二事互相發. 能窮理, 則居敬工夫日益進; 能居敬, 則窮理工夫日益密.”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는 자의 공부는 오직 '居敬'과 '窮理' 두 가지에 달려있을 뿐이다. 이 두 가지는 상호보완적이다. 능히 窮理한다면 居敬 공부가 날로 발전될 것이고, 능히 居敬한다면 窮理공부가 날로 치밀해질 것이다." | ||
+ | :○問涵養在致知之先. 曰: “涵養合下在先. 古人從少以敬涵養, 父兄漸教之讀書、識義理. 今若說 ‘待涵養了, 方去致知’, 也無限期. 須兩下用工.” | ||
+ | :'함양이 致知보다 우선한다'는 것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함양이 원래 우선한다. 옛 분들은 어려서부터 敬으로 함양하시고, 부형이 점진적으로 책을 읽게 해 의리를 알게 하셨다. 만약 '함양하고나서야 致知한다'고 말한다면 기약이 없을 것이니, 둘 다 공부해야 한다."<ref><주자어류> 권18. 任道弟問:「或問,涵養又在致知之先?」曰:「涵養是合下在先。古人從小以敬涵養,父兄漸漸教之讀書,識義理。今若說待涵養了方去理會致知,也無期限。須是兩下用工,也著涵養,也著致知。伊川多說敬,敬則此心不放,事事皆從此做去。」</ref> | ||
+ | :○涵養本原、思索義理, 須用齊頭<ref><한어대사전> [tou] 3. 名詞後綴。 接於形容詞詞根之後。 ▶ 《朱子語類》卷二一: “眾人只是樸實頭不欺瞞人, 亦謂之忠。” </ref>做, 方能互相發. 程子下須字、在字便是要齊頭著力. | ||
+ | :본원을 함양하고 의리를 사색하는 것은 병행해야 서로 보완할 수 있다. 정자께서 '須'자와 '在'자를 쓰신 것이 바로 둘다 똑같이 힘쓰라는 것이다." | ||
+ | :○問: “涵養、體認、致知、力行, 雖云互相發明, 然畢竟當於甚處著力?” 曰: “四者不可先後, 又不可無先後. 須當以涵養為先. 若不涵養而專於致知, 則是徒然思索; 若專於涵養而不致知, 則却鶻突去了. 以某觀之, 四事只是三事, 盖體認便是致知也.” | ||
+ | :물었다: "'涵養'·'體認'·'致知'·'力行'에 대해 비록 '상호보완적'이라고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디에 힘써야 합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네 가지는 차례지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차례가 없을 수도 없다. 모름지기 함양을 우선해야 한다. 만약 함양하지 않고 致知에 전념한다면 이는 헛된 사색일 뿐이고, 함양만 하고 致知하지 않으면 도리어 멍청해진다. 내가 보기에, 네 가지는 세 가지일 뿐이니, '體認'은 곧 '致知'이다." | ||
+ | :○無事時, 且存養在這裏, 提撕警覺, 不要放肆. 到那講習應接, 便當思量義理, 用義理做將去. 無事便著存養收拾此心. | ||
+ |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일단 내면을 존양해야 하니, 가볍게 일깨워 나태하지 않게 해야 한다. 강습하고 [외물에] 대응하게 되면, 마땅히 의리를 생각해 의리대로 행해야 한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이 마음을 존양·수습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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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5.<br/> | ||
+ | “又曰: ‘致知在乎所養, 養知<ref><莊子> <繕性> 古之治道者,以恬養知; </ref>莫過於寡欲.’”<br/> | ||
+ |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 致知는 함양하는 바에 달려있으니, 知를 함양하는 [방법으론] 욕심을 줄이는 것만한 것이 없다.'"<ref><이정외서> 2-66 "致知在格物", 格, 至也; 物, 事也. 事皆有理, 至其理, 乃格物也. 然致知在所養, 養知莫過於寡欲二字. <正叔> </ref> | ||
+ | :問: “養知是既知後如此養否?” 朱子曰: “此不分先後. 未知之前, 若不養之, 此知如何養得? 既知之後, 若不養, 又差了. 不可道未知之前便不必如此.” | ||
+ | :물었다: "'養知'는 '안 뒤에 이렇게 함양한다'는 겁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養知'는 선후를 나누지 않는다. 아직 모를 때 知를 함양하지 않는다면 이 知를 어떻게 함양할 수 있겠는가? 알고 나서 함양하지 않는다면 또 잘못된다. '아직 모를 때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선 안 된다." | ||
+ | :○致知者, 推致其知識而至於盡也. 將致知者, 必先有以養其知; 有以養之, 則所見益明, 所得益固. 欲養其知者, 惟寡欲而已矣. 欲寡則無紛櫌之雜而知益明矣; 無變遷之患而得益固者矣.” 又曰: “二者自是箇兩頭說話, 本若無相干. 但得其道, 則交相為養; 失其道, 則交相為害.” | ||
+ | :致知라는 것은 자신의 지식을 확충해 지극한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致知하려는 자는 먼저 자신의 知를 함양해야 한다. 知를 함양할 수 있다면, 알게 되는 것이 더욱 분명해지고, 터득한 것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자신의 知를 함양하고자 하는 자는 다만 욕심을 줄일 뿐이다. 욕심을 줄이면 어지러운 잡생각이 없어져 知가 더욱 밝아지고, 오락가락한 근심이 없어져 터득한 것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두 가지(致知와 養知)는 별개의 이야기로 본래부터 상관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제대로 하면 서로 길러주겠지만,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서로 방해가 될 것이다." | ||
+ | :○玉溪盧氏曰: “欲致知, 固在有所養. 知既至, 又不可無所養. 欲多, 則心無所養而知昏; 欲寡, 則心有所養而知明.”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致知하고자 한다면, [致知의 성패는] 진실로 함양하는 바에 달려있다. 知가 이미 지극하더라도 함양하는 바가 없어선 안 된다. 욕심이 많으면 마음에 함양한 것이 없어 知가 어두워지고, 욕심이 적으면 마음에 함양한 것이 있어 知가 밝아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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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6.<br/> | ||
+ | “又曰: ‘格物者, 適道之始. 思欲格物, 則固已近道矣. 是何也? 以收其心而不放也.’”<br/> | ||
+ |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格物이라는 것은 道로 나아가는 시작이다. 格物하려고 생각하면 진실로 이미 道에 가까운 것이다. 이는 어째서인가? 자신의 마음을 수렴해 놓아버리지 않기 때문이다."<ref><이정유서> 25-01 大學曰:「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人之學莫大於知本末終始. 致知在格物, 則所謂本也, 始也; 治天下國家, 則所謂末也, 終也. 治天下國家, 必本諸身, 其身不正而能治天下國家者無之. 格猶窮也, 物猶理也, 猶曰窮其理而已也. 窮其理, 然後足以致之, 不窮則不能致也. 格物者適道之始, 欲思格物, 則固已近道矣. 是何也? 以收其心而不放也.</ref> | ||
+ | :新安陳氏曰: “纔思量要格物, 便已近道, 只就格物上便可收其放心. 此條與上四條微不同.”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格物하려고 생각하자마자 이미 道에 가까워지니, 格物에 자신의 놓아버린 마음을 수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목(4-16)은 이전의 네 조목(4-12~15)과 조금 다르다."<ref>4-12~15조목은 경공부와 격물치지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말하고 있다면, 4-16조목은 격물 공부 자체가 일종의 경공부라고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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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此五條者, 又言涵養本原之功, 所以爲格物致知之本者也. 凡程子之爲說者不過如此, 其於格物致知之傳詳矣.”<br/> | ||
+ | "이 다섯 조목(4-12~16)은 또 본원을 함양하는 공부가 격물치지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무릇 정자께서 [格物致知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格物致知의 전문(전5장)에 대해 상세하다." | ||
+ | :問程子致知格物之說不同. 曰: “當時答問, 各就其人而言之. 今須是合就許多不同處來看作一意為佳. 且如既言 ‘不必盡窮天下之物’, 又云: ‘一草一木亦皆有理.’ 今若以一草一木上理㑹, 有甚了期<ref><한어대사전> 1. 盡頭。 ▶ 宋 晏幾道 《長相思》詞: “若問相思甚了期, 除非相見時。”</ref>? 但其間有 ‘積習多後, 自當脫然有貫通處’者, 為切當耳. 今以十事言之, 若理㑹得七八件, 則那兩三件觸類可通; 若四旁都理㑹得, 則中間所未通者, 其道理亦是如此. 蓋長短小大, 自有凖則. 如忽然遇一件事來時, 必知某事合如此, 某事合如彼, 則此方來之事亦有可見者矣. 聖賢於難處之事, 只以數語盡其曲折, 後人皆不能易者, 以其於此理素明故也.” 又曰: “所謂格物者, 常人於此理或能知一二分, 即其一二分之所知者推之, 直要推到十分, 窮得來無去處, 方是格物.” | ||
+ | :정자의 格物致知에 대한 설이 같지 않은 것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당시의 문답은 각각 질문자에 다라 대답하신 것이다. 지금은 다양하게 다른 것들을 모아 하나의 의미로 만들어야 좋을 것이다. 가령 [정자께서] '천하 사물을 모두 궁구할 필요는 없다'(4-5)고 말씀하셔놓고 다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이치가 있다'(4-9)고 말씀하셨다. 만약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 이해'한다면, 언제 끝나겠는가? 다만 그 사이에 '점진적으로 익힌 것이 많아지고 나면 절로 응당 脫然하게 통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4-5)라는 말이 있어 적당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열 가지 일로 말하자면, 만약 7~8개를 이해했다면, 나머지 2-3개는 '부류에 따라 이해할 수 있고',<ref><주역> <계사상> 八卦而小成,引而伸之,觸類而長之,天下之能事畢矣。; <한어대사전> 【觸類旁通】 《易‧繫辭上》: “引而伸之, 觸類而長之。”又《乾》: “六爻發揮, 旁通情也。”後以“觸類旁通”謂掌握了某一事物規律, 就能推知同類事物。 </ref> 사방을 모두 이해했다면 아직 이해하지 못한 중간도 그 도리는 역시 이것(상방)과 같을 뿐이다. 대개 긴 것이든 짧은 것이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모두 [일정한] 준칙이 있다. 우연히 어떤 일을 만났을 때, 반드시 '어떤 일은 이렇게 해야 하고, 어떤 일은 저렇게 해야 함'을 알고 있다면, 방금 다가온 이 일에도 알 수 있는 점이 있을 것이다. 성현께서는 대처하기 어려운 일에 대해 단지 몇 마디로 그 디테일을 모두 표현하시고 후인들이 누구도 그것을 바꾸지 못하는 것은, 성현께서 이 이치에 대해 밝으셨기 때문이다." 또 말씀하셨다: "이른바 格物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이 이치에 대해 혹 10~20% 정도 알 수 있다면, 이 10~20% 아는 것에서 확충해 바로 100%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니, 궁구해 더이상 갈 곳이 없어야 格物이다."<ref><주자어류> 권18. 或問程子致知、格物之說不同。曰:「當時答問,各就其人而言之。今須是合就許多不同處,來看作一意為佳。且如既言『不必盡窮天下之物』,又云『一草一木亦皆有理』。今若於一草一木上理會,有甚了期。但其間有『積習多後自當脫然有貫通處』者為切當耳。今以十事言之,若理會得七八件,則那兩三件觸類可通。若四旁都理會得,則中間所未通者,其道理亦是如此。蓋長短大小,自有準則。如忽然遇一件事來時,必知某事合如此,某事合如彼,則此方來之事亦有可見者矣。聖賢於難處之事,只以數語盡其曲折,後人皆不能易者,以其於此理素明故也。」又云:「所謂格物者,常人於此理,或能知一二分,即其一二分之所知者推之,直要推到十分,窮得來無去處,方是格物。」</ref> | ||
+ | :○問: “伊川說格物致知許多項, 當如何看?” 曰: “說得已自分曉. 如初間說知覺及誠敬, 固不可不勉; '然天下之理必先知之而後有以行之', 這許多說不可不格物致知; 中間說 '物物當格'、及'反之吾身'之說, 却是指出格物箇<ref><한어대사전> 9. 助詞。 相當於“的”用在定語後面。 表示領屬。 </ref>地頭<ref><한어대사전> 3. 處所;地方。</ref>如此.” 又曰: “此項兼兩意, 又見節次<ref><한어대사전> 1. 逐次;逐一。▶ 宋 朱熹 《勸農文》之一: “其塍畔斜生茅草之屬, 亦須節次芟削, 取令凈盡, 免得分耗土力。” </ref>格處. 自 ‘立誠意以格之’以下, 却是做工夫合如此.” 又曰: “用誠敬涵養為格物致知之本.” | ||
+ | :물었다: "이천 선생께서 格物致知에 대해 말씀하신 많은 조목들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대답하셨다: "[정자께서] 말씀하신 것이 매우 분명하다. 처음에 致知와 깨우침(4-1) 그리고 誠敬에 대해 말씀하신 것(4-2)은 '진실로 힘쓰지 않아선 안 된다'는 것이고, '그러나 천하의 이치는 필시 먼저 안 뒤에 행할 수 있다'(4-2) 이 여러 말은 '格物致知하지 않아선 안 된다'는 것이며, 중간에 '사물마다 궁구(格)해야 한다'(4-3)와 '내 자신을 반성한다'(4-11)고 말씀하신 것은 '격물하는 대상이 이와 같음'을 가리킨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이 항목(??)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하나 궁구(格)함을 알 수 있다?? ‘立誠意以格之’ 이하(4-11)는 '공부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誠敬으로 함양하는 것을 格物致知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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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今也尋其義理, 既無可疑; 考其字義, 亦皆有據. 至以他書論之, 則<文言>所謂學聚問辨<sub><易> <文言> "學以聚之, 問以辨之, 寛以居之, 仁以行之."</sub> 、 <中庸>所謂明善擇善、<孟子>所謂知性知天, 又皆在乎固守力行之先, 而可以驗夫<sub>音扶</sub><大學>始教之功爲有在乎此也. 愚嘗反覆考之而有以信其必然. 是以竊取其意以補傳文之缺. 不然則又安敢犯不韙之罪, 爲無證之言, 以自託於聖經賢傳之間乎?<sub>韙, 音偉, 是也. ‘犯不韙’之說, 出<春秋左氏傳>.</sub><br/> | ||
+ | "[내가 위와 같이 정자의 설을 빌려 '格物致知'를 설명했는데], 이제 [정자 설의] 의미를 살펴보건대 의심할 것이 없고, [정자가 규정한 '格物致知'의] 문자적 뜻을 살펴봐도 모두 근거가 있다. 다른 책으로 논해본다면, <문언>에서 말한 '學聚問辨', <중용>에서 말한 '明善擇善',<ref><중용장구> 20장. 誠身有道:不明乎善,不誠乎身矣。…… 誠之者,擇善而固執之者也。</ref> <맹자>에서 말한 '知性知天'<ref><맹자> <진심상> 1. 孟子曰:「盡其心者,知其性也。知其性,則知天矣。</ref>도 모두 '굳게 지키고 힘써 실천하는 것'의 앞에 있으니, <대학>의 첫 가르침에 해당하는 공부가 여기(格物致知)에 달려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나는 일찍이 이를 반복해 살펴보고 그것(格物致知의 뜻이)이 반드시 그러함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삼가 정자의 뜻을 취해 傳文의 빠진 부분을 보충하였다. 그렇지 않다면(확신이 없었다면) 또 어찌 감히 '옳지 않은 죄'를 범하고 '증거 없는 말'을 해서 스스로 '성현의 경전' 사이에 넣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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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br/> | ||
+ | 曰: "然則吾子之意, 亦可得而悉聞之乎?" 曰: "吾聞之也: 天道流行<sub>此以理言</sub>, 造化發育<sub>此以氣言</sub>, 凡有聲色貌象而盈於天地之間者, 皆物也; 既有是物, 則其所以爲是物者莫不各有當然之則而自不容已, 是皆得於天之所賦而非人之所能爲也."<br/> | ||
+ | 혹자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도 모두 들어볼 수 있겠는가?" 대답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천도가 유행해 [만물을] 만들고 발육함에, 소리·색·모양을 가지면서 천지 사이를 채운 것은 모두 物이다. 이러한 物이 있는 이상, 이 物이 된 것에는 각각 마땅히 그러해야 할 법칙이 있지 않음이 없어 스스로 그칠 수 없으니, 이 모두는 하늘이 부여한 것에서 얻은 것이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
+ | :朱子曰: "物, 乃形氣; 則, 乃理也. 物之理方為則."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物'은 바로 형기이고, '則'은 바로 理이다. 物의 理라야 '則'이 된다." | ||
+ | :○理之所當為者, 自不容巳, 如孩提之愛、及長知敬, 自有住不得處. | ||
+ | :마땅히 행해야 할 理는 스스로 그칠 수 없으니, 예를 들면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고, 자라서는 [형을] 공경함에<ref><맹자> <진심상> 15. 孩提之童,無不知愛其親者;及其長也,無不知敬其兄也。</ref>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는 것과 같다. | ||
+ | :○問: "人物之生, 莫不得其所以生者以為一身之主, 是此性隨所生處便在否?" 曰: "一物各具一太極. '天生烝民, 有物有則', 盖視有當視之則, 聽有當聽之則, 如是而視, 如是而聽, 便是; 不如是而視, 不如是而聽, 便不是. 謂如'視逺惟明, 聽徳惟聰', 能視逺謂之明, 所視不逺不謂之明; 能聽徳謂之聰, 所聽非徳不謂之聰. 視聽是物, 聰明是則. 推之至於口之於味、鼻之於臭, 莫不各有當然之則. 所謂窮理者, 窮此而巳." | ||
+ | :물었다: "사람·만물이 태어날 때, 태어난 까닭을 얻어 일신의 주인으로 삼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이 性은 태어난 바에 따라 존재하게 되는 겁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한 物마다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음에, 物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고 하니, 봄에 마땅히 봐야하는 법칙이 있고, 들음에 마땅히 들어야하는 법칙이 있어서, 이렇게 보고 이렇게 듣으면 옳고, 이와 같지 않게 보고 이와 같지 않게 들으면 옳지 않다. 예를 들어 '멀리 보되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 덕스러운 것을 듣되 귀밝게 들을 것을 생각한다'<ref><서경> <태갑중> 視遠惟明;聽德惟聰。</ref>고 하니, 능히 멀리 보는 것을 '밝음'(明)이라고 하지 보는 것이 멀지 않은 것을 '밝음'(明)이라 하지 않고, 능히 덕스러운 것을 듣는 것을 '귀밝음'(聰)이라고 하지 듣는 것이 덕스럽지 않은 것을 '귀밝음'(聰)이라 하지 않는다. 보고 듣는 것은 이 物이고, 귀밝고 눈밝은 것은 이 則이다. 이러한 관계를 입과 맛, 코와 냄새 간으로 유추해보면, 각각 마땅히 그러한 원칙이 없는 경우는 없다. 이른바 '窮理'라는 것은 이것을 궁구하는 것일 뿐이다." | ||
+ | :○玉溪盧氏曰: "物者, 形而下之器; 則者, 形而上之道. 形而上者, 不出於形而下者之外, 所謂有物必有則也."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物'이라는 것은 형이하의 器이고, 則이라는 것은 형이상의 道이다.<ref><주역> <계사상> 12. 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ref> 형이상자는 형이하자의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니, 이른바 '物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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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今且以其至切而近者言之, 則心之爲物, 實主於身, 其體則有仁義禮智之性; 其用則有惻隱、羞惡、恭敬、是非之情, 渾<sub>上聲</sub>然在中, 隨感而應, 各有攸主而不可亂也."<br/> | ||
+ | "우선 매우 비근한 것으로 말하자면, 마음(心)이라는 것은 실로 몸(身)을 주재하니, 그 體에는 仁義禮智의 性이 있고 그 用에는 측은·수오·공경·시비의 情이 있어서, [性은] 혼연히 마음속에 있다가 감각하는 바에 따라 응함에<ref><주역> <계사상> 10장. 易无思也,无為也,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ref> 각각 주로 하는 바가 있어 어지럽힐 수 없다." | ||
+ | :西山眞氏曰: "圓外竅中者, 心之形體, 可以物言, 備具衆理. 神明不測者, 此心之理, 不可以物言. 然有此形體, 方包得此理." | ||
+ | :서산 진씨가 말했다: "외부는 둥글고 속에 구멍이 있는 것이 心의 형체이니, 物로 말할 수 있고, 뭇 이치를 갖추고 있다. 神明해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이 心의 理이니, 物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형체가 있어야 비로소 이 理를 품을 수 있다." | ||
+ | :○玉溪盧氏曰: "'心之為物, 主於身', 形而下者也; 其體用性情, 形而上者也. '渾然在中', 其體初無仁義禮智之分; '隨感而應', 其用始有惻隱等四者之别. 仁為惻隱之主, 義為羞惡之主, 禮智為恭敬、是非之主, 而皆不可亂, 所謂則也."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心之為物, 主於身'은 형이하자이고, 心의 體用·性情은 형이상자이다. '渾然在中'에서는 心의 體에 처음에는 仁義禮智의 구분이 없다가, '隨感而應'하면 心의 用에 비로소 측은지심 등의 네 가지 구별이 생긴다. 仁은 측은지심의 주인이고, 義는 수오지심의 주인이며, 禮와 智는 공경지심과 시비지심의 주인이니, [이러한 性情간의 관계를] 모두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 이른바 '則'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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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次而及於身之所具, 則有口鼻耳目四肢之用; 又次而及於身之所接, 則有君臣、父子、夫婦、長㓜、朋友之常, 是皆必有當然之則而自不容已, 所謂理也."<br/> | ||
+ | "다음으로 몸이 갖추고 있는 [부위의] 경우 입·코·귀·눈·사지의 쓰임이 있고, 또 다음으로 몸이 마주치는 [사회적 관계의] 경우 군신·부자·부부·장유·붕우의 일상이 있으니, 이 모두에는 반드시 마땅히 그래야 하는 법칙이 있어서 스스로 그만둘 수 없으니, 이른바 理이다." | ||
+ | :玉溪盧氏曰: "耳目等乃吾身所具之物; 君臣等乃吾身所接之物. 口容止, 口之則也; 氣容肅, 鼻之則也; 聽思聰, 視思明, 耳目之則也; 非禮勿動, 四肢之則也; 君臣有義, 是君臣之則; 父子有親, 是父子之則; 有别有序有信是夫婦長㓜朋友之則, 皆所謂有物必有則也. 吾心之則乃此身統體一太極; 吾身所具所接者之則乃物物各具一太極也. 其統體者乃各具者之所自出, 其各具者初未嘗在統體者之外也."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귀·눈 등의 [부위는] 바로 내 몸이 갖추고 있는 物이고, 군신 등의 [사회적 관계는] 바로 내 몸이 마주치는 物이다. '입 모양은 그친다'는 것은 입에 대한 준칙이고, '숨쉬는 모양은 엄숙하게 한다'는 것은 코에 대한 준칙이며,<ref><예기> <옥조> 足容重,手容恭,目容端,口容止,聲容靜,頭容直,氣容肅,立容德,色容莊,坐如尸,燕居告溫溫。</ref> '들을 때 귀밝기를 생각하고, 볼 때 눈밝기를 생각한다'는 것은 귀·눈에 대한 준칙이고,<ref><논어> <계씨> 10. 孔子曰:「君子有九思:視思明,聽思聰,色思溫,貌思恭,言思忠,事思敬,疑思問,忿思難,見得思義。」</ref>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것은 사지에 대한 준칙이며,<ref><논어> <안연> 1. 顏淵問仁。子曰:「克己復禮為仁。一日克己復禮,天下歸仁焉。為仁由己,而由人乎哉?」顏淵曰:「請問其目。」子曰:「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ref> '군신 간에 의리가 있다'는 것은 군신 관계에 대한 준칙이고, '부자 간에 친애함이 있다'는 것은 부자 관계에 대한 준칙이며, 구별·차례·신의는 부부·장유·붕우에 대한 준칙이니,<ref><맹자> <등문공상> 4. 聖人有憂之,使契為司徒,教以人倫:父子有親,君臣有義,夫婦有別,長幼有序,朋友有信。</ref> 모두 이른바 '物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내 마음의 법칙은 바로 내 몸 統體의 하나의 태극이고, 내 몸이 갖추고 있거나 마주치는 것의 법칙은 바로 物마다 각각 지니고 있는 하나의 태극이다.<ref><태극해의> 蓋合而言之, 萬物統體一太極也; 分而言之, 一物各具一太極也.</ref> 그 統體라는 것은 바로 각각 지니고 있는 것의 출처이고, 그 각각 지니고 있는 것은 애당초 統體라는 것 밖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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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外而至於人, 則人之理不異於己也; 遠而至於物, 則物之理不異於人也. 極其大, 則天地之運、古今之變, 不能外也; 盡於小, 則一塵之微、一息之頃, 不能遺也."<br/> | ||
+ | "그 외에 다른 사람의 경우 다른 사람의 理는 내 것과 다르지 않고, 멀리 사물의 경우 사물의 理는 사람의 것과 다르지 않다. 지극히 크게 봤을 때 천지의 운행이나 고금의 변화도 [理를] 벗어날 수 없고, 지극히 작게 봤을 때 미세한 먼지나 숨쉬는 짧은 틈도 [理를] 빠뜨릴 수 없다." | ||
+ | :格菴趙氏曰: "'一塵之微、一息之頃, 不能遺'者, 理無物不在, 無時不然. 大而天地之一開一闔、古今之一否一㤗, 小而一塵之或飛或伏、一息之或呼或吸, 皆此理之所寓也." | ||
+ | :격암 조씨가 말했다: "미세한 먼지나 숨쉬는 짧은 틈도 [理를] 빠뜨릴 수 없다'는 것은 理가 어느 사물에도 어느 때에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크게는 천지가 열리고 닫히거나 고금이 막히거나 트이는 것으로부터, 작게는 먼지 하나가 날리거나 숨어있고 숨을 내쉬거나 들이쉬기는 데까지 모두 이 理가 깃들어있는 바이다." | ||
+ | :○新安陳氏曰: "'天地'及'一塵'是横說; '古今'及'一息'是直說."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天地'와 '一塵'은 横說(공간적으로 말한 것)이고, '古今'과 '一息'은 直說(시간적으로 말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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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是乃上帝所降之衷<sub><書> <湯誥> "惟皇上帝, 降衷于下民."</sub>, 烝民所秉之彛<sub><詩> <烝民> "民之秉彛."</sub>, 劉子所謂天地之中<sub><左傳·成公十三年> "劉康公、成肅公㑹晉侯伐秦. <劉、成, 食采之邑名; 康、肅, 皆其諡也.> 成子受脤于社, 不敬.<脤, 市軫反, 宜社之肉也.> 劉子曰: '吾聞之: 民受天地之中以生, 所謂命也. 是以有動作、禮義、威儀之則以定命也. 能者養之以福, 不能者敗以取禍."</sub> 夫子所謂性與天道, 子思所謂天命之性, 孟子所謂仁義之心, 程子所謂天然自有之中,"<br/> | ||
+ | "이것이 바로 '상제께서 내려주신 마음'<sub><서경> <탕고> "위대한 상제께서 백성에게 마음을 내려주셨다."</sub>이고, '뭇 백성이 지니고 있는 불변의 도리'<sub><시경> <증민> "백성이 지니고 있는 불변의 도리."</sub>이며, 유강공이 말한 '天地之中'이고,<sub><춘추좌전·성공13년> "劉康公·成肅公이 晉侯를 회맹하고 秦을 정벌했다.<劉·成은 채지로 받은 고을의 이름이고,康·肅은 모두 그들의 시호이다.> 成肅公이 제사에서 제사고기를 받았는데, 공경스럽지 못했다. 劉康公이 말했다: '내가 들으니, 백성은 천지의 中을 받아 태어나니, 이른바 命이다. 그러므로 동작·예의·위의에 대한 준칙을 두어 命을 구현하는 것이다. 뛰어난 자는 천지의 中을 잘 길러 복을 받고, 못난 자는 천지의 中을 해쳐 화를 입는다.'"</sub> 공자께서 말씀하신 '性과 天道'이며,<ref><논어> <공야장> 12. 子貢曰:「夫子之文章,可得而聞也;夫子之言性與天道,不可得而聞也。」</ref> 자사께서 말씀하신 '天命之性'이고, 맹자께서 말씀하신 '仁義之心'이며, 정자께서 말씀하신 '天然自有之中'이고," | ||
+ | :程子曰: "楊子拔一毛不為, 墨子又摩頂放踵為之, 此皆是不得中. 至如子莫執中, 欲執此二者之中, 不知怎麽執得? 識得則事事物物上皆天然有箇中在那上, 不待人安排也. 安排著, 則不中矣." | ||
+ |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양주는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터럭 하나만 뽑으라고 해도 하지 않았는데, 묵적은 또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정수리에서부터 발꿈치까지 갈아넣어야 한다고 해도 했으니, 이 두 가지 모두 中을 얻은 것이 아니다. 子莫이 잡은 中의 경우, 이 두 가지의 가운데(中)를 잡으려고 했다.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알았다면?? 사물마다 모두 선천적으로 中이 그 위에 있으니 사람이 손쓸 필요가 없다. 손쓰면 中이 아니다.<ref><이정유서> 17-65 楊子拔一毛不爲, 墨子又摩頂放踵爲之, 此皆是不得中. 至如子莫執中, 欲執此二者之中, 不知怎麽執得? 識得則事事物物上皆天然有箇中在那上, 不待人安排也. 安排著, 則不中矣.</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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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張子所謂萬物之一原,"<br/> | ||
+ | "장자께서 말씀하신 '만물의 동일한 근원'이며," | ||
+ | :張子名載, 字子厚, 家于鳳翔府郿縣横渠鎭, 世號横渠先生. | ||
+ | :張子의 이름은 載이고 자는 子厚이니, 봉상부 미현 횡거진에 사셨으므로 대대로 횡거선생이라고 불렀다. | ||
+ | :○<正蒙> <誠明篇> "性者, 萬物之一原, 非有我之得私也." | ||
+ | :<정몽> <성명편> "性이라는 것은 만물의 동일한 근원이니,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ref><정몽> <성명편> 性者萬物之一源,非有我之得私也。惟大人僞能盡其道,是故立必俱立,知必周知,愛必兼愛,成不獨成。披自蔽塞而不知順吾理者,則亦末如之何矣。</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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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邵子所謂道之形體者."<br/> | ||
+ | "소자께서 말씀하신 '道의 形體'이다." | ||
+ | :邵子名雍, 字堯夫, 諡康節, 河南人. | ||
+ | :邵子의 이름은 雍이고 자는 堯夫이며 시호는 康節이니, 하남 사람이다. | ||
+ | :○"性者, 道之形體", 見<擊壤集序>. | ||
+ | :"性이라는 것은 道의 形體이다"라는 말은 <격양집서>에 보인다.<ref>[https://zh.wikisource.org/wiki/伊川擊壤集 <격양집>] 性者,道之形體也。性傷,則道亦從之矣。心者,性之邪郭也。心傷,則性亦從之矣。身者,心之區宇也。身傷,則心亦從之矣。物者,身之舟車也。物傷,則亦從之矣。是知以道觀性,以性觀心,以心觀身,以身觀物,治則治矣,然猶未離乎害者也。不若以道觀道,以性觀性,以心觀心,以身觀身,以物觀物,則雖欲相傷其可得乎。</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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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但其氣質有清濁偏正之殊, 物欲有淺深厚薄之異. 是以人之與物, 賢之與愚, 相與懸絶而不能同耳."<br/> | ||
+ | "그러나 기질에 清濁·偏正의 차이가 있고, 물욕에 淺深·厚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사물과, 현명한 자는 어리석은 자와 현격히 달라 같을 수 없을 뿐이다." | ||
+ | :問: "降衷秉彛一段, 其名雖異, 要之皆是一理." 朱子曰: "誠是一理, 豈可無分别? 須各曉其名字訓義之所以異, 方見其所謂同." | ||
+ | :물었다: "'降衷'·'秉彛' 부분에서 그러한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요컨대 모두 하나의 理입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하나의 理지만, 차이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 명칭과 의미의 차이점을 각각 알아야 하니, 그래야 이른바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
+ | :○衷字只是箇無過不及之中, 是箇恰好底道理. 天生人物, 箇箇有一副當恰好無過不及道理降與你. 今人言折衷, 折衷者以中為則而取其正也. '天生烝民, 有物有則', 則字却似中字. 天之生此物, 必有箇當然之則, 故民執之以為常道. 所以無不好此懿徳. '降衷于下民', 緊要在降字上. 故自天而言謂之降衷; 自人受此衷而言則謂之性, 縁各據來處與受處而言也. | ||
+ | :'衷'자는 '過不及이 없다'는 의미의 中이니, 적절한 도리이다. 하늘이 인간과 사물을 낳을 때, 각각 적절하고 過不及이 없는 도리를 두어 너에게 내려주었다. 요즘 사람들이 '절충'(折衷)을 말할 때, '折衷'이란 中을 기준으로 삼아 바름을 취한다는 것이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매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의 '則'자는 '中'자와 같다. 하늘이 이 사물을 낳을 때 반드시 규범적 준칙(當然之則)을 둔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이를 가지고 불변의 도리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땅한 덕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이다. '백성에게 衷을 내렸다'(降衷于下民)에서 핵심은 '降'자에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관점에서 말하면 '降衷'이라 하고, 사람이 이 '衷'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말하면 '性'이라 하니, 각각 온 곳과 받은 곳에 의거해 말한 것이다. | ||
+ | :○問: "彛而言秉, 何也?" 曰: "渾然一理, 只于吾心不可移奪<ref><한어대사전> 强行改變.</ref>, 若秉執然." | ||
+ | :물었다: "'불변의 도리'(彛)인데 '잡는다'(秉)고 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대답하셨다: "渾然한 理가 그저 내 마음에 있어 바꿀 수 없는 것이 마치 잡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 ||
+ | :○問: "劉子云天地之中, 程子云天然自有之中, 此中字同否?" 曰: "天地之中是未發之中; 天然自有之中是時中; 天地之中是指道體; 天然自有之中是指事物之理." | ||
+ | :물었다: "劉子가 말한 '天地之中'과 程子가 말한 '天然自有之中'의 이 中자는 같습니까?" 대답하셨다: "'天地之中'은 '未發之中'이고, '天然自有之中'은 '時中'이다. '天地之中'은 '道體'를 가리키고, '天然自有之中'은 사물의 이치를 가리킨다." | ||
+ | :○"性與天道", 性便是自家底; 天道便是上面腦子. 其流行者是天道; 人得之為性. | ||
+ | :"性與天道"에서 '性'은 자신의 것이고 '天道'는 그 위의 근원이다. 유행하는 것이 天道이고, 인간이 이를 얻어 性으로 삼는다. | ||
+ | :○諸先生說這道理, 邵子說得最著實. 這道理空虚無形影, 惟是說 '性者, 道之形體', 却見得實[有]<ref><주자어류>에 의거해 수정한다. <주자어류> 권100 正卿問:「邵子所謂『道之形體』如何?」曰:「諸先生說這道理,卻不似邵子說得最著實。這箇道理,纔說出,只是虛空,更無形影。惟是說『性者道之形體』,卻見得實有。不須談空說遠,只反諸吾身求之,是實有這箇道理?還是無這箇道理?故嘗為之說曰:『欲知此道之實有者,當求之吾性分之內。』邵子忽地於擊壤集序自說出幾句,最說得好!」</ref>. 只反諸吾身求之: 是實有這道理? 還是無這道理? 故嘗為之說曰: '欲知此道之實有者, 當求之吾性分之内.' 邵子忽自於<擊壤集序>内說出幾句云: "性者, 道之形體也; 心者, 性之郛郭也; 身者, 心之區宇也; 物者, 身之舟車也." 此說極好. | ||
+ | :여러 선생이 이 도리를 말씀하셨는데, 소자께서 말씀하신 것이 가장 착실하다. 이 도리는 텅 비어 어떠한 형체·그림자도 없지만, 오직 '性이라는 것은 道의 形體이다'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도리가] 실제로 존재함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자기 자신을 반성해 찾아보라: 이 도리가 실제로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그러므로 전에 이에 대해 '이 道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고 싶은 자는 자기 性分 안에서 찾아봐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소자께서 문득 스스로 <격양집서>에서 몇 구절 말씀하셨다: "性이라는 것은 道의 형체이고, 心이라는 것은 性의 성곽이며, 身이라는 것은 心의 집이고, 物이라는 것은 身의 배나 수레이다." 이 설이 매우 좋다. | ||
+ | :○'氣質清濁偏正', 本<正蒙>中語, 亦是將人物賢不肖、智愚相對而分言之如此. 若大槩而論, 則人清而物濁, 人正而物偏; 又細論之, 則智乃清之清, 賢乃正之正, 愚乃清之濁, 不肖乃正之偏. 而張子所謂 "物有近人之性"者, 又濁之清, 偏之正者也. "物欲淺深厚薄", 乃通為衆人而言. | ||
+ | :'氣質에 清濁·偏正의 [차이가 있다]'<ref><正蒙> <誠明篇第六> 人之剛柔、緩急、有才與不才,氣之偏也。天本參和不偏,養其氣,反之本而不偏,則盡性而天矣。; 莫非天也,陽明勝則德性用,陰濁勝則物欲行。領惡而全好者,其必由學乎!- '氣質清濁偏正'을 직접 언급한 구절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ref>는 것은 본래 <정몽>의 말이니, 사람·사물의 賢·不肖나 智·愚를 대비해 이렇게 나눠 말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氣質은] 맑고 사물[의 氣質은] 탁하며, 사람[의 氣質은] 바르고 사물[의 氣質은] 치우쳐져 있다. [그러나] 다시 자세하게 말하자면, 지혜로운 건(智) 맑은 것 가운데 [더욱] 맑은 것이고, 어진 건(賢) 바른 것 가운데 [더욱] 바른 것이며, 어리석은 것(愚)은 맑은 것 가운데 탁한 것이고, 못난 것(不肖)은 바른 것 가운데 치우친 것이다. 장자께서 "사물 가운데 사람의 性에 가까운 것이 있다"<ref><예기집설> 권133 藍田吕氏曰: " …… 然人有近物之性者, 物有近人之性者, 亦係乎此. 於人之性開塞偏正無所不盡, 則物之性未有不能盡也. 人也物也莫不盡其性, 則天地之化幾矣." - 주자는 장재 말로 알았던 것 같은데, 衛湜은 여대림의 말로 본다.</ref>고 말씀하신 것은 또 탁한 것 가운데 [그나마] 맑은 것, 치우친 것 가운데 [그나마] 바른 것이다. "物欲淺深厚薄"은 뭇 사람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 ||
+ | :○陳氏曰: "天命即天道之流行而賦予於物者, 受於天而為我所有, 故謂之性." 又曰: "道者, 事物中所當然之理, 人之所共由者也. 性即在我之理, 具於吾心而道之所總㑹也. 所謂 '形體'正如此." | ||
+ | :진씨가 말했다: "'天命'은 바로 天道가 유행하다가 사물에 부여된 것이고, 하늘로부터 받아서 내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性'이라고 한다." 또 말했다: "'道'라는 것은 사물의 당위적 원리(所當然之理)이니, 사람이 공통적으로 따르는 바이다. '性'은 내게 있는 理이니 내 마음에 갖춰져 있고, '道'가 모여있는 곳이다. 이른바 [소옹이 말한 '道'의] 形體'가 바로 이와 같다." | ||
+ | :○西山眞氏曰: "<詩>謂 '秉彛', 言衆民所秉執此常理. <孟子>謂 '仁義之心', 言人既得隂陽之理以為性, 則自然有仁義之心. 只舉仁義二字者, 仁包禮, 義包智故也. 禮是仁之著; 智是義之藏. 程子所謂 '天然之中', 言凡百事物皆有箇恰好底道理, 不可過, 不可不及也. 張子所謂 '萬物之一原', 凡人物之性皆自此流出, 如百川之同一原也." | ||
+ | :서산 진씨가 말했다: "<시경>에서 말한 '秉彛'는 뭇 백성이 이 불변의 理를 지니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맹자>에서 말한 '仁義之心'은 사람이 음양의 理를 얻어 性으로 삼은 이상, 저절로 仁義로운 마음(仁義之心)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仁義' 두 글자만 거론한 것은, 仁이 禮를 포괄하고 義가 智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禮는 仁이 드러난 것이고, 智는 義가 감춰져 있는 것이다. 정자께서 말씀하신 '天然之中'은 온갖 사물에 모두 적합한 도리가 있어서 지나쳐서도 미치지 못해서도 안 됨을 말한 것이다. 장자께서 말씀하신 '萬物之一原'은 사람과 사물의 性이 여기서부터 흘러나왔다는 것이니, 뭇 시내의 동일한 수원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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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以其理之同, 故以一人之心而於天下萬物之理無不能知; 以其稟之異, 故於其理或有所不能窮也. 理有未窮, 故其知有不盡; 知有不盡, 則其心之所發, 必不能純於義理而無雜乎物欲之私. 此其所以意有不誠, 心有不正, 身有不脩, 而天下國家不可得而治也. 昔者聖人蓋有憂之, 是以於其始教, 爲之小學而使之習於誠敬, 則所以收其放心, 養其徳性者, 已無所不用其至矣."<br/> | ||
+ | "理가 동일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마음으로 천하 만물의 理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품부받은 것(氣質)이 다르기 때문에 理에 혹 궁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理를 궁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앎이 온전하지 못하고, 앎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발현될 때 틀림없이 義理에 순수해 자기중심적 物欲에 뒤섞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意에 진실하지 못한 점이 있고, 心에 바르지 않은 점이 있으며, 身에 닦이지 않은 부분이 있고, 天下國家가 잘 다스려질 수 없는 까닭이다. 과거 성인께서도 이를 염려하셨기 때문에, 처음 가르치실 때는 소학을 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誠敬을 익히게 하셨으니,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고'<ref><맹자> <고자상> 11. 學問之道無他,求其放心而已矣。</ref> '덕성을 함양한다'<ref><맹자> <진심상> 1. 存其心,養其性,所以事天也。</ref>는 것에 대해 이미 지극하게 하지 않으신 점이 없었다." | ||
+ | :玉溪盧氏曰: "此格物致知之本原."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이것은 격물치지 [공부의] 근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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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及其進乎大學, 則又使之即夫<sub>音扶</sub>事物之中, 因其所知之理, 推而究之, 以各到乎其極, 則吾之知識, 亦得以周遍精切, 而無不盡也. 若其用力之方, 則或考之事爲之著, 或察之念慮之微,"<br/> | ||
+ | "사람들이 태학에 진학하게 되자, [성인께서] 다시 그들로 하여금 사물에 나아가 알고있는 理를 근거로 추론·궁구해 각각 [궁구하는 대상의] 극치(즉 事物之理)에 이르게 하셨으니, 내 지식 역시 [성인처럼] 周遍하고 精切해 완전하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공부 방법에 대해서는, 어떤 분은 드러난 행적에서 [理를] 분석하셨고, 어떤 분은 은미한 사려에서 [理를] 살피셨으며," | ||
+ | :問: "關於事為者不外乎念慮, 而入於念慮者往往皆是事為, 此分為二項, 意如何?" 朱子曰: "固是都相關. 然也有做在外底, 也有念慮方動底. 念慮方動, 便須辨别那箇是正, 那箇是不正. 這只就始末上大約如此說." 問: "只就著與微上看?" 曰: "有箇顯有箇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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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或求之文字之中, 或索<sub>山客反</sub>之講論之際,"<br/> | ||
+ | "어떤 분은 글에서 [理를] 탐구하셨고, 어떤 분은 강론하면서 [理를] 찾으셔서," | ||
+ | :玉溪盧氏曰: "此四句, 格物致知之條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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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使於身心性情之徳、人倫日用之常, 以至天地鬼神之變、鳥獸草木之宜, 自其一物之中, 莫不有以見其所當然而不容巳、與其所以然而不可易者."<br/> | ||
+ | "?? 身心과 性情의 덕, 일상에서 지키는 인륜으로부터 천지와 귀신의 변화, 들짐승·날짐승과 초목의 적절함까지 한 사물에서 '마땅히 그러해야 해서 그만둘 수 없는 점'과 '그러해서 바꿀 수 없는 점'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없으셨다." | ||
+ | :朱子曰: "今人未嘗看見當然而不容已者, 只是就上較量一箇好惡耳. 如眞見得這底是我合當為, 則自有所不可已者矣. 如為臣而必忠, 非是謾說如此, 蓋為臣不可以不忠; 為子而必孝, 亦非是謾說如此, 蓋為子不可以不孝也."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마땅히 그러해야 해서 그만둘 수 없는 점'을 본 적이 없어서 그저 일에 대해 호오를 따질 뿐이다. 만약 이것이 내가 마땅히 해야할 것임을 진정으로 안다면, 그만두지 못하는 점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 '신하가 되면 반드시 충성한다'는 게, 대충 이와 같다고 말한 게 아니라, 신하가 되면 충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식이 되면 반드시 효도한다'는 것 역시 대충 이와 같다고 말한 게 아니라, 자식이 되면 효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
+ | :○問: "'所以然而不可易'者, 是指理而言; '所當然而不容已'者, 是指人心而言否?" 曰: "下句只是指事而言. 凡事固有所當然而不容已者, 然又當求其所以然者何故. 其所以然者, 理也; 理如此, 故不可易. 又如人見赤子入井, 皆有怵惕惻隱之心, 此其事所當然而不容已者也. 然其所以如此者何故? 必有箇道理之不可易者." | ||
+ | :물었다: "'그러해서 바꿀 수 없는 것'은 理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마땅히 그러해야 해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은 人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대답하셨다: "아랫 구절은 단지 일(事)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일(事)에는 본래 '마땅히 그러해야 해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지만, '그러한 까닭'이 어째서인지에 대해서도 마땅히 탐구해야 한다. '그러한 까닭'이 理이고, 理가 이와 같기 떄문에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또 예를 들어, 사람이 어린 아기가 우물로 기어가는 것을 보면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해 하는 마음이 드니, 이것이 일(事)의 '마땅히 그러해야 해서 그만둘 수 없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까닭은 어째서인가? 필시 바꿀 수 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 ||
+ | :○陳氏曰: "在身, 謂手容合當恭, 足容合當重之類; 在心, 如體合當寂, 用合當感之類; 性, 如仁合當愛, 義合當斷之類; 情, 如見赤子入井合當惻隱, 見大賔客合當恭敬之類; 人倫, 如君合當止仁, 臣合當止敬之類; 日用, 如居處合當恭, 執事合當敬之類; 天地, 如天合當髙, 地合當厚; 鬼神二氣, 如陽合當伸, 隂合當屈; 鳥獸, 如牛合當耕, 馬合當乘; 草木, 如春合當生, 秋合當殺等類, 皆有理存乎其間也." | ||
+ | :진씨가 말했다: "'몸(身)'은 '손 모양은 조심스러워야 하고, 발 모양은 무거워야 한다'<ref><예기> <옥조> 足容重,手容恭,目容端,口容止,聲容靜,頭容直,氣容肅,立容德,色容莊</ref> 따위를 말하고, '마음(心)'은 '體의 국면에서는 고요해야 하고, 用의 국면에서는 [적절히] 감응해야 한다'<ref><주역> <계사상> 10. 易无思也,无為也,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ref> 따위이며, '性'은 '仁은 마땅히 아껴야 하고, 義는 마땅히 결단해야 한다' 따위이고, '情'은 '어린 아기가 우물로 기어가는 것을 보면 측은한 감정을 느껴야 하고, 중요한 손님을 보면 공경해야 한다' 따위이며, '人倫'은 '임금은 仁에 머물러야 하고, 신하는 敬에 머물러야 한다'<ref><대학장구> 전3장 為人君,止於仁;為人臣,止於敬;為人子,止於孝;為人父,止於慈;與國人交,止於信。</ref> 따위이고, '日用'은 '거처할 때는 공손해야 하고, 일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ref><논어> <자로> 19. 樊遲問仁。子曰:「居處恭,執事敬,與人忠。雖之夷狄,不可棄也。」</ref> 따위이며, '天地'는 '하늘은 높아야 하고 땅은 두터워야 한다'는 것이고, '鬼神' 두 기는 '陽은 펴져야 하고(伸), 隂은 움츠려야 한다(屈)'는 것이며, '鳥獸'는 '소는 밭을 갈아야 하고, 말은 [사람을] 태워야 한다'는 것이고, '草木'은 '봄에는 싹터야 하고 가을에는 죽여야 한다'는 등의 부류이니, 모두 그 사이에 理가 있는 것이다." | ||
+ | :○西山眞氏曰: "如為君當仁, 臣當敬之類, 乃道理合當如此. 不如此, 則不可, 故曰所當然. 然仁敬等, 非是人力强為. 有生之初, 即稟此理, 是乃天之所與也. 故曰所以然. 知所當然是知性; 知所以然是知天, 謂知其理所自來也." | ||
+ | :서산 진씨가 말했다: "예를 들어 '임금은 仁해야 하고 신하는 敬해야 한다' 따위는 도리상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니, 이와 같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바'(所當然)라고 한다. 그러나 仁·敬 등은 사람의 힘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갓 태어날 때 이 理를 품부받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까닭'(所以然)이라고 한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바'를 아는 것이 '知性'이고, '그러한 까닭'을 아는 것이 '知天'이니<ref><맹자> <진심상> 1. 孟子曰:「盡其心者,知其性也。知其性,則知天矣。</ref> 理의 유래를 안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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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必其表裏精粗無所不盡, 而又益推其類以通之, 至於一日脫然而貫通焉, 則於天下之物皆有以究其義理精微之所極,"<br/> | ||
+ | "반드시 表裏·精粗에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 또 더욱 그 부류를 미루어나가 이해해, 어느날 脫然하게 통달하게 되면, 천하 사물에 대해 모두 그것의 精微한 義理의 지극한 바를 궁구할 수 있게 되어," | ||
+ | :玉溪盧氏曰: "極即至善之謂."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極'은 '至善'을 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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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而吾之聰明睿智, 亦皆有以極其心之本體而無不盡矣."<br/> | ||
+ | "내 聰明睿智 역시 마음의 본모습을 다해 빠뜨리는 바가 없을 것이다." | ||
+ | :朱子曰: "不可盡者, 心之事; 可盡者, 心之理. 理既盡後, 謂如<ref><한어대사전> 猶如; 例如.</ref>一物初不曾識, 來到面前, 便識得此物, 盡吾心之理."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다할 수 없는 것'은 마음의 事이고, '다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理이다. 理를 다한 뒤에는 마치 하나도 안 적이 없는 것 같지만, 눈앞에 닥치면 이것을 알고서 내 마음의 理를 다하게 된다."<ref><주자어류> 권60 盡心,如何盡得?不可盡者心之事,可盡者心之理。理既盡之後,謂如一物初不曾識,來到面前,便識得此物,盡吾心之理。盡心之理,便是「知性,知天」。</ref> | ||
+ | :○新安陳氏曰: "此格物致知之效騐."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이것은 격물치지의 공효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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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此愚之所以補乎本傳闕文之意. 雖不能盡用程子之言, 然其指趣要歸, 則不合者鮮<sub>上聲</sub>矣. 讀者其亦深考而實識之哉!"<br/> | ||
+ | "이것이 내가 本傳의 빠진 글을 보충한 까닭이다. 비록 정자의 말씀을 다 인용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보충한 글의] 취지나 요점 가운데 [정자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드물 것이다. 독자 역시 [나처럼] 깊게 살피고 실제적으로 이해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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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br/> | ||
+ | 曰: "然則子之爲學, 不求諸心而求諸迹; 不求之内而求之外. 吾恐聖賢之學不如是之淺近而支離也."<br/> | ||
+ | 혹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학문은 마음에서 구하지 않고 자취에서 구하며, 내면에서 구하지 않고 외면에서 구하는 것이다. 나는 성현의 학문이 이처럼 淺近하며 지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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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人之所以爲學, 心與理而已矣. 心雖主乎一身, 而其體之虛靈足以管乎天下之理; 理雖散在萬物, 而其用之微妙實不外一人之心, 初不可以内外精粗而論也."<br/> | ||
+ | 대답했다: "사람이 학문하는 대상은 心과 理일 뿐이다. 心은 비록 일신을 주재하지만, 그 體의 허령함은 천하의 理를 주관하기에 충분하고, 理는 비록 만물에 흩어져있지만, 그 用의 미묘함은 실로 개인의 心을 벗어나지 않으니, 애당초 内外·精粗로 [구분해] 논할 수 없다." | ||
+ | :問: "'用之微妙', 是心之用否?" 朱子曰: "理必有用, 何必又說是心之用乎? 心之體具乎是理, 理則無所不該而無一物之不在. 然其用實不外乎人心, 蓋理雖在物而用實在心也." | ||
+ | :물었다: "'用之微妙'은 心의 用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理에도 분명 用이 있으니, 굳이 또 心의 用을 말해야 겠는가? 心의 體는 理를 갖추고 있고, 理는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 없다. 그러나 理의 用은 실로 사람의 心을 벗어나지 않으니, 대개 理가 비록 사물에 있더라도 [그] 用은 실로 心에 달린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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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然或不知此心之靈而無以存之, 則昏昩雜擾而無以窮衆理之妙; 不知衆理之妙而無以窮之, 則偏狹固滯<sub>偏一作褊</sub>而無以盡此心之全. 此其理勢之相須, 蓋亦有必然者. 是以聖人設教, | ||
+ | 使人黙識此心之靈而存之於端莊靜一之中, 以爲窮理之本; | ||
+ | 使人知有衆理之妙而窮之於學問思辨之際, 以致盡心之功. | ||
+ | 巨細相涵, 動靜交養, 初未嘗有内外精粗之擇; | ||
+ | 及其眞積力乆而豁然貫通焉, 則亦有以知其渾然一致而果無内外精粗之可言矣. | ||
+ | 今必以是爲淺近支離, 而欲藏形匿影, 别爲一種<sub>上聲</sub>幽深恍惚艱難阻絶之論, 務使學者莽<sub>模黨反</sub>措其心於文字言語之外, 而曰: '道必如此然後可以得之', 則是近世佛學詖淫邪遁之尤者, 而欲移之以亂古人明徳新民之實學, 其亦誤矣."<br/> | ||
+ | "그러나 이 心의 허령함을 알지 못해 보존하지 못하면 혼매하고 어지러워져 뭇 理의 신묘함을 궁구하지 못할 것이고, 뭇 理의 신묘함을 알지 못해 궁구하지 못한다면 편협하고 꽉 막혀 이 心의 온전함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형세상의 상호 의존 관계이니, 역시 반드시 그러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가르침을 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묵묵히 이 心의 허령함을 알아 端莊·靜一한 가운데 보존하여 궁리의 근본으로 삼게 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뭇 理의 신묘함을 알아 學問·思辨할 때 궁구하게 해 盡心의 공부를 다하게 하셨다. [성인의 가르침은] 巨細가 서로 기르고 動靜이 서로 배양해 애당초 内外·精粗를 가린 적이 없고, 진실로 오래 노력을 모아 豁然하게 통달하면 또한 渾然히 일치되어 진실로 말할 만한 内外·精粗의 [구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것을 '淺近하고 지루하다'고 여기고서, 형체와 그림자를 숨기고 따로 일종의 幽深·恍惚·艱難·阻絶한 주장을 만들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문자·언어 밖에서 막연하게 자기 心을 잡게 하는데 힘쓰며, '道는 분명 이렇게 한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이는 근래 불학의 詖淫邪遁<ref><맹자> <공손추상> 2. 「何謂知言?」曰:「詖辭知其所蔽,淫辭知其所陷,邪辭知其所離,遁辭知其所窮。</ref> 중에서도 심한 것인데, 이것을 옮겨 옛 분의 明徳·新民의 實學을 변화시키려 하니, 그 역시 잘못이다." | ||
+ | :問: "陸象山不取伊川格物之說, 以為'若隨事討論, 則精神易弊, 不若但求之心. 心明則無不照.' 其說亦似省力." 朱子曰: "不去隨事討論, 便聽他胡做, 話便信口說, 脚便信歩行, 冥冥地去, 都不管他." | ||
+ | :물었다: "육상산은 이천의 格物설을 취하지 않고서 '만약 일마다 따진다면 정신이 쉽게 지칠 것이니, 그저 마음에서 구하는 것만 못하다. 마음이 밝아지면 비추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의 설 역시 공력을 적게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일마다 따지지 않는다면, 그가 멋대로 하는 짓을 받아들여 [그가] 말하면 [그] 말을 믿어버리고 [그가] 걸으면 [그] 걸음을 믿어버려 흐리멍덩하게 그를 전혀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8. 問:「陸先生不取伊川格物之說。若以為隨事討論,則精神易弊,不若但求之心,心明則無所不照,其說亦似省力。」曰:「不去隨事討論後,聽他胡做,話便信口說,腳便信步行,冥冥地去,都不管他。」</ref> | ||
+ | :○節齋蔡氏曰: "盡心者, 言其心之所存, 更無一毫之不盡也. 然若要盡得, 須先知得. 所以學者要先窮理也." 又曰: "存此心於端莊靜一之中以立其本; 窮此理於學問思辨之際以逹其用; 反之於身以踐其實, 則巨細相涵, 動靜交養, 及其眞積力乆而豁然融㑹, 然後可以造乎一之妙." | ||
+ | :절재 채씨가 말했다: "'盡心'이라는 것은 心이 보존함에 털끝만큼의 다하지 않음도 없는 것을 말한다. 만약 盡心하고자 한다면,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우선 窮理해야 한다." 또 말했다: "이 心을 端莊靜一한 가운데서 보존하여 心의 근본을 세우고 이 理를 學問思辨할 때 궁구하여 理의 用에 통달하고서 자신에게 돌이켜 그 실제 내용을 실천한다면, 巨細가 서로 길러주고 動靜이 서로 배양할 것이며, 진정으로 오래 노력을 모아 豁然하게 통달한 연후에 一(渾然一致)의 신묘함에 도달할 수 있다." | ||
+ | :○陳氏曰: "古人毎言學, 必欲其博, 所以極盡乎此心無窮之量也. 所謂盡心者, 須是盡得箇極大無窮之量, 無一理之或遺, 方是實能盡得心." | ||
+ | :진씨가 말했다: "옛 분들은 학문을 논하실 때마다 반드시 넓게 하기를 바라신 것은 그것으로써 이 心의 무궁한 역량을 다하려는 것이었다. 이른바 '盡心'이라는 것은 지극히 크고 무궁한 역량을 다하여 하나의 이치도 혹 빠뜨림이 없어야 하니, [그래야] 비로소 진실로 心을 다할 수 있다." | ||
+ | :○西山眞氏曰: "存心窮理二者, 當表裏用工. 蓋知窮理而不知存心, 則思慮紛擾, 物欲交攻, 此心昏亂, 如何窮理? 但知存心而不務窮理, 雖能執持静定, 亦不過如禪家之空寂而已. 故必二者交進, 則心無不正, 理無不通. 學之大端, 惟此而已." | ||
+ | :서산 진씨가 말했다: "存心·窮理 두 가지는 안팎의 공부에 해당한다. 窮理할 줄만 알고 存心할 줄 모르면, 사려가 어지러워지고 물욕이 서로 치받아 이 心이 혼매하고 어지러워지니, 어떻게 窮理하겠는가? 存心할 줄만 알고 窮理에 힘쓰지 않으면, 비록 [내면을] 단속해 고요하게 만들 수 있더라도 선가의 空寂과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두 가지를 병진해야 하니, 그렇게 한다면 心은 바르지 않음이 없고 理에는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학문의 큰 줄기는 이것일 뿐이다." | ||
+ | :○端莊主容貌言; 静一主心言; 表裏交正之義. 合而言之, 則敬而已. | ||
+ | :'端莊'은 용모를 위주로 말한 것이고, '静一'은 心을 위주로 말한 것이니, 안팎을 모두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합해서 말하면 敬일 뿐이다. | ||
+ | :○玉溪盧氏曰: "'存心於端莊静一', 主敬之工夫也; '窮理於學問思辨', 格致之工夫也. '巨'以此心言; '細'以衆理言; '動'以格物工夫言; '静'以主敬工夫言; '豁然貫通而果無内外精粗之可言', 則明徳明矣."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存心於端莊静一'은 主敬공부이고, '窮理於學問思辨'는 격물치지 공부이다. '巨'는 이 心을 말한 것이고, '細'는 뭇 理를 말한 것이며, '動'은 격물공부를 말한 것이고, '静'은 主敬공부를 말한 것이다. '豁然貫通而果無内外精粗之可言'은 明徳이 밝혀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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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格物'을 '外物을 막다'로 해설하는 것에 대한 평가<br/> | ||
+ | ○曰: "近世大儒有爲格物致知之說者, 曰: '格猶扞<sub>音汗</sub>也, 禦也. 能扞禦外物而後能知至道也.'"<br/> | ||
+ | 물었다: "근세 大儒 가운데 格物致知에 대해 설명한 자가 있다. [그는] '格은 扞·禦(막다)와 같다. 외물을 막은 이후에야 至道를 알 수 있다'<ref><傳家集> <致知在格物論> 太學曰: "致知在格物." 格猶扞也, 禦也. 能扞禦外物, 然後能知至道矣.</ref>고 하였다. | ||
+ | :問: "温公以格物為扞格之格, 不知格字有訓扞義否?" 朱子曰: "亦有之, 如格闘之格, 是也." | ||
+ | :물었다: "온공(사마광)은 格物을 '막다'(扞格)의 格이라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格자에 '막다'(扞)라는 뜻이 있습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그런 뜻도 있으니, 예를 들어 '격투'(格闘)의 格이 이에 해당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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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有推其說者, 曰: '人生而靜, 其性本無不善. 而有爲不善者, 外物誘<sub>音酉</sub>之也. 所謂格物以致其知者, 亦曰扞去<sub>上聲</sub>外物之誘而本然之善自明耳.'<sub>孔周翰說</sub> 是其爲說, 不亦善乎?" 曰: "'天生烝民, 有物有則', 則物之與道, 固未始相離<sub>去聲</sub>也."<br/> | ||
+ | "또 이 설을 발전시킨 자도 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났을 때에는 고요하니,<ref><예기> <악기> 人生而靜,天之性也;感於物而動,性之欲也。物至知知,然後好惡形焉。好惡無節於內,知誘於外,不能反躬,天理滅矣。</ref> 그 본성은 본래 선하지 않음이 없다. 불선한 점이 있는 것은 외물이 꾄 것이다. 이른바 格物致知라는 것 역시 외물의 꾐을 막고 제거해 본래 그러한 선함이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것일 뿐이다.'<sub>孔周翰<ref>[https://baike.baidu.com/item/孔宗翰 孔宗翰(1029-1088)]</ref>의 설이다</sub>라고 하였는데, 그의 설이 괜찮지 않은가?" 대답했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음에, 物이 있으면 법칙이 있으니', 物과 道는 본래 애당초 서로 떨어진 적이 없다." | ||
+ | :格菴趙氏曰: "物與理未嘗相離. 若離物以求理, 則空虚而無據, 豈得一切扞而去之?" | ||
+ | :격암 조씨가 말했다: "物과 理는 본래 애당초 서로 떨어진 적이 없다. 만약 物을 떠나 理를 찾는다면 텅 비어 근거할 것이 없을 것이니, 어찌 모두 막고 제거할 수 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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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今曰: '禦外物而後可以知至道', 則是絶父子而後可以知孝慈; 離<sub>如字</sub>君臣而後可以知仁敬也, 是安有此理哉? 若曰: '所謂外物者, 不善之誘耳, 非指君臣父子而言也', 則夫<sub>音扶</sub>外物之誘, 人莫甚於飲食男女之欲. 然推其本, 則固亦莫非人之所當有而不能無者也. 但於其間自有天理人欲之辨, 而不可以毫釐<sub>力之反正作氂</sub>差耳."<br/> | ||
+ | "만일 '외물을 막은 이후에야 至道를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부자관계를 끊은 이후에야 孝慈를 알 수 있다는 것이며, 군신관계를 떠난 이후에야 仁敬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니,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만약 '이른바 外物이란 불선의 꾐일 뿐이니, 군신·부자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저 '外物의 꾐'으론 식욕·색욕<ref><예기> <예운> 飲食男女,人之大欲存焉;死亡貧苦,人之大惡存焉。故欲惡者,心之大端也。人藏其心,不可測度也;美惡皆在其心,不見其色也,欲一以窮之,舍禮何以哉?</ref>보다 심한 것이 없을 것이지만, 그 근본을 헤아려 본다면 진실로 [이러한 욕구] 역시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것으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그 가운데 본래 천리와 인욕의 구별이 있어 털끝만큼도 어긋나서는 안 될 뿐이다." | ||
+ | :問: "飲食之間, 孰為天理, 孰為人欲?" 朱子曰: "飲食者, 天理也; 要求美味, 人欲也." | ||
+ | :물었다: "'먹고 마시는 것'(飲食)에서 무엇이 천리이고 무엇이 인욕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먹고 마시는 것은 천리이고, 맛있는 것을 찾는 것은 인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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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惟其徒有是物而不能察於吾之所以行乎其間者, 孰爲天理, 孰爲人欲. 是以無以致其克復之功, 而物之誘於外者得以奪乎天理之本然也. 一<ref><한어대사전> 26. 連詞. 與'便'或'就'連用, 表示兩種動作時間上的前後緊接.</ref>不即物以窮其原, 而徒惡<sub>去聲</sub>物之誘乎己, 乃欲一切扞而去<sub>上聲</sub>之, 則是必閉口枵<sub>虚驕反</sub>腹然後可以得飲食之正; 絶滅種<sub>上聲</sub>類然後可以全夫婦之别<sub>筆列反</sub>也. 是雖裔<sub>以制反</sub>戎無君無父之教有不能充其說者, 况乎聖人大中至正之道而得以此亂之哉!"<br/> | ||
+ | :이러한 物이 있음만 생각하고 그 사이에서 내가 행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천리이며 어떤 것이 인욕인지 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극기복례의 공부를 다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의 物의 꾐이 본래 그러한 천리를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物에 나아가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그저 物이 자신을 꾐만 미워해 모두 막고 제거하려 한다면, 이러한 [목표는] 입을 막고 배를 비운 뒤에야 먹고 마심의 정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종족을 끊어버린 뒤에야 부부의 구별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오랑캐의 '임금도 없고 부모도 없는' 가르침도 이러한 설을 충족시킬 수가 없는데, 하물며 성인의 지극히 중정한 도리를 이러한 것으로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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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程門 제자의 格物致知설에 대한 평가<br/> | ||
+ | ○曰: "自程子以格物爲窮理, 而其學者傳之見<sub>形甸反</sub>於文字多矣. 是亦有以發其師說而有助於後學者耶?" 曰: "程子之說, 切於己而不遺於物; 本於行事之實而不廢文字之功; 極其大而不略其小; 究其精而不忽其粗. 學者循是而用力焉, 則既不務博而陷於支離, 亦不徑約而流於狂妄. 既不舍<sub>上聲</sub>其積累之漸, 而其所謂豁然貫通者, 又非見聞思慮之可及也."<br/> | ||
+ | 물었다: "정자께서 格物을 '窮理'로 여기신 뒤로 정자께 배운 자들이 그 설을 글로 표현해 전한 경우가 많다. 이 역시 자기 스승의 설을 밝혀 후학에게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대답했다: "정자의 설은 자신에게 절실하면서도 남을 빠뜨리지 않고, 실제적인 실천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글공부를 폐하지 않으며, 큰 것을 지극히 하면서도 작은 것을 생략하지 않고, 정밀한 것을 궁구하면서도 거친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배우는 자가 이를 따라 힘쓴다면, 넓게 하는데 힘쓰더라도 지리한 데 빠지지 않으며, 간략함을 말미암더라도 허무맹랑한 데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정자의 설은] 점진적인 공부를 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자 설에서] 이른바 '豁然貫通'이라는 것 역시 [일반적인] 생각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
+ | :新安陳氏曰: "'務博陷於支離', 博物洽聞<ref><한어대사전> 多聞博識.</ref>之徒; '徑約流於狂妄', 禪學頓悟之徒. 一句說盡世人爲學之弊." | ||
+ | :신안 진씨가 말했다: "'務博陷於支離'는 박식을 [추구하는] 무리이고, '徑約流於狂妄'은 선학의 돈오를 [주장하는] 무리이다.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이 학문하면서 [저지르는] 폐단을 모두 표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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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是於說經之意、入徳之方, 其亦可謂反復<sub>芳服反, 亦作覆. 後凡言反復音同.</sub>詳備而無俟於發明<ref><한어대사전> 2. 說明; 證明; 表明.</ref>矣."<br/> | ||
+ | "이는(정자가 格物을 '窮理'로 풀이한 설) 경전을 해설한 뜻으로나 덕을 갖추는 방법으로나 ?? '반복하고 상세히 [설명해서 더 이상] 밝힐 것이 없다'고 말할 만하다." | ||
+ | :朱子曰: "博學, 亦非欲求異聞雜學方謂之博. 博之與約, 初學且須作兩途理㑹. 一面博學, 又自一面持敬守約, 莫令兩下<ref><한어대사전> 1. 雙方; 兩方面.</ref>相靠<ref><한어대사전> 1. 相違; 背向. 3. 依賴; 憑藉. 5. 指在時間或空間上接近.</ref>; 須兩路進前用工, 塞斷中間, 莫令相通. 將來成時, 便自有㑹通處. 若不如此兩下用工, 成甚次第<ref><한어대사전> 6. 規模.</ref>?"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博學' 역시 색다르거나 뒤섞은 배움을 찾으려고 하고 나서야 '博'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博'과 '約'은 초학자라면 우선 별개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博學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持敬·守約해서 양자가 서로 닿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두 길로 나아가며 공부해, 중간을 막고 끊어 서로 통하지 않게 해야 한다. [공부가] 완성될 때 저절로 통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 두 가지로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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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若其門人雖曰: '祖<ref><한어대사전> 9. 效法; 承襲.</ref>其師說', 然以愚考之, 則恐其皆未足以及此也. 蓋有以必窮萬物之理同出於一爲格物; 知萬物同出乎一理爲知至. 如合内外之道則天人物我爲一; 通晝夜之道則死生幽明爲一; 逹哀樂<sub>音洛</sub>好惡<sub>並去聲</sub>之情則人與鳥獸魚鼈爲一; 求屈伸消長<sub>上聲</sub>之變則天地山川爲一者, 似矣.<sub>吕與叔說</sub> 然其欲必窮萬物之理而專指外物, 則於理之在己者有不明矣; 但求衆物比類之同而不究一物性情之異, 則於理之精微者有不察矣; 不欲其異而不免乎四說之異; 必欲其同而未極乎一原之同, 則徒有牽合之勞而不睹貫通之妙矣. 其於程子之說, 何如哉?"<br/> | ||
+ | "예를 들어, 정자의 문인이 '자기 스승의 설을 본받았다'고 말했더라도, 내가 살펴보니 정자 문인 모두가 이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만물의 理가 똑같이 하나(一)에서 나옴을 반드시 궁구하는 것을 格物로 여기고, 만물이 똑같이 하나(一)에서 나옴을 아는 것을 知至로 여기며, [정자가 말한] 「合内外之道」<ref><이정유서> 03-08 須是合內外之道, 一天人, 齊上下, 下學而上達, 極高明而道中庸.</ref>는 하늘과 인간·사물과 내가 하나되는 것이라고 [여기고], [정자가 말한]「通晝夜之道」<ref><이정유서> 25-40 通乎晝夜之道, 而知晝夜, 死生之道也.</ref>는 죽음과 삶·저승과 이승이 하나되는 것이라고 [여기며], 哀樂·好惡의 감정에 통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간과 鳥獸魚鼈이 하나되는 것으로 [여기고], 屈伸消長의 변화를 탐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天地山川이 하나되는 것으로 [여기는] 자가 있는데, 그럴 듯하다.<sub>吕與叔의 설이다</sub> 그러나 그가 만물의 理를 반드시 궁구하려고 하면서 오직 外物만 가리킨 것은 내게 있는 理에 대해 밝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고, 뭇 사물 부류의 공통점만 탐구하고 개별 사물의 性情 차이는 탐구하지 않은 것은 理의 자세한 부분에 살피지 않은 점이 있는 것이며, [정자의 설과] 다르고자 하지 않으면서 [정자의] 네 가지 설에 대해서는 다름을 면하지 못했고, [정자의 설과] 같고자 하면서 하나의 동일한 근원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억지로 갖다 붙이는 수고만 있었을 뿐 관통하는 신묘함을 보지 못했다. 그가 정자의 설에 대해 어떠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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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有以爲窮理只是尋箇是處, 然必以恕爲本而又先其大者, 則一處理通而觸<sub>樞玉反</sub>處皆通者.<sub>謝顯道說</sub> 其曰: '尋箇是處'者則得矣, 而曰: '以恕爲本', 則是求仁之方而非窮理之務也. 又曰: '先其大者', 則不若先其近者之切也. 又曰: '一處通而一切通', 則又顔子之所不能及、程子之所不敢言, 非若類推積累之可以循序而必至也."<br/> | ||
+ | "또 '窮理는 다만 옳은 것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恕를 근본으로 여겨야 하고, 또 큰 것을 우선해야 하니, 한 곳의 理에 통달하면 닿는 곳마다 모두 통달할 것이다'라고 여긴 자가 있었다.<sub>謝顯道의 설이다.</sub> 그가 '옳은 것을 찾는다'고 말한 것은 맞지만, '恕를 근본으로 한다'고 말한 것의 경우, [恕는] 仁하기 위한 방법이지<ref><논어> <위령공> 23. 子貢問曰:「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子曰:「其恕乎!己所不欲,勿施於人。」- 尹氏曰:「學貴於知要。子貢之問,可謂知要矣。孔子告以求仁之方也。」</ref> 窮理에 힘쓰는 것이 아니다. 또 '큰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비근한 것을 우선하는 것이 절실함만 못하다. 또 '한 곳의 [理에] 통달하면 [닿는 곳마다] 모두 통달한다'는 것은 또 안자께서도 미치지 못했던 바이며, 정자께서도 감히 말씀하시지 못하셨던 것이니,<ref><주자어류> 권18 問:「『一理通則萬理通』,其說如何?」曰:「伊川嘗云:『雖顏子亦未到此。』天下豈有一理通便解萬理皆通!也須積累將去。如顏子高明,不過聞一知十,亦是大段聰明了。學問卻有漸,無急迫之理。」</ref> [아는 것에서부터] 유추하고 쌓아나는 [식으로 일정한] 단계를 거쳐 [목표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는 것만 못하다." | ||
+ | :朱子曰: "謝氏'尋箇是處'之說甚好, 與吕與叔'必窮萬物之理同出於一為格物, 知萬物同出乎一理為知至', 其所見大叚不同. 但'尋箇是處'者, 須是於其一二分是處直窮到十分是處, 方可."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량좌의 '옳은 것을 찾는다'는 말은 매우 좋으니, 여여숙의 '만물의 理가 똑같이 하나(一)에서 나옴을 반드시 궁구하는 것을 格物로 여기고, 만물이 똑같이 하나(一)에서 나옴을 아는 것을 知至로 여기는 것'과는 견식이 매우 다르다. 그러나 '옳은 것을 찾는다'는 것은 10~20% 옳은 것에서 단지 100% 옳은 것을 궁구해야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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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有以爲天下之物不可勝<sub>平聲</sub>窮, 然'皆備於我'而非從外得也. 所謂格物, 亦曰'反身而誠', 則天下之物無不在我者, 是亦似矣.<sub>楊中立說</sub> 然'反身而誠'乃爲物格知至以後之事, 言其窮理之至無所不盡. 故凡天下之理反求諸身, 皆有以見其如目視、耳聽、手持、足行之畢具於此而無毫髮之不實耳, 固非以是方爲格物之事, 亦不謂但務反求諸身而天下之理自然無不誠也. <中庸>之言'明善'即物格知至之事; 其言'誠身'即意誠心正之功. 故不明乎善, 則有反諸身而不誠者. 其功夫地位固有序而不可誣矣. 今爲格物之說, 又安得遽以是而爲言哉?"<br/> | ||
+ | "또 '천하의 사물[의 理를] 이루 다 궁구할 수 없다. 그러나 [理는]「모두 내게 갖춰져 있지」<ref><맹자> <진심상> 4. 孟子曰:「萬物皆備於我矣。反身而誠,樂莫大焉。</ref> 외부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格物이라는 것 역시「자신을 반성해 진실하면」 천하 사물[의 理 가운데] 내게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여긴 자가 있었다.<sub>楊中立의 설이다.</sub> 그러나 '자신을 반성해 진실하다'는 것은 바로 '物格知至' 이후의 일이니, 窮理가 완성되어 빠뜨린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천하의 理를 돌이켜 자신에게 구하면, 누구나 천하의 理가 '눈의 봄·귀의 들음·손의 쥠·발의 걸음이 이 몸에 모두 갖춰져 털끝만큼도 실제적이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진실로 이러한 것을 바로 格物의 일로 여긴 것도 아니고, 또 '그저 돌이켜 자신에게 찾는데 힘쓰면 천하의 理가 저절로 진실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중용>에서 말한 '明善'은 物格知至의 일이고, <중용>에서 말한 '誠身'은 意誠心正의 공효이다. 그러므로 '선에 밝지 않으면 자신에게 돌이켜보았을 때 진실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다.'<ref><중용장구> 20장. 反諸身不誠,不順乎親矣;誠身有道:不明乎善,不誠乎身矣。</ref> 공부의 단계에 진실로 차례가 있으니 속일 수 없다. 지금 格物에 대한 해설을 하면서, 또 어찌 바로 이것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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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有以'今日格一物, 明日格一物'爲非程子之言者,<sub>尹彦明說</sub> 則諸家所記程子之言, 此類非一, 不容皆誤. 且其爲說正<中庸>學問思辨、弗得弗措之事, 無所咈<sub>音佛</sub>於理者. 不知何所病而疑之也? 豈其習於持敬之約而厭夫<sub>音扶下同</sub>觀理之煩耶? 抑直以己所未聞而不信他人之所聞也? 夫持敬觀理不可偏廢, 程子固已言之. 若以己偶未聞而遂不之信, 則以有子之似聖人, 而速貧速朽之論猶不能無待於子游而後定. 今又安得遽以一人之所未聞而盡廢衆人之所共聞者哉?"<br/> | ||
+ | "또 '「오늘 하나를 궁구(格)하고 내일 하나를 궁구(格)하라」는 것은 정자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여긴 자가 있었다.<sub>尹彦明의 설이다.</sub> 여러 학자가 기록한 정자의 말씀 가운데 이러한 것이 하나는 아니고, 모두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우선 정자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중용>의 '學問思辨'과 '弗得弗措'의 일이니,<ref><중용장구> 20장. 博學之,審問之,慎思之,明辨之,篤行之。有弗學,學之弗能弗措也;有弗問,問之弗知弗措也;有弗思,思之弗得弗措也;有弗辨,辨之弗明弗措也;有弗行,行之弗篤弗措也;</ref> 理에 어긋난 것이 없다. 잘 모르겠지만, [윤돈은] 무엇을 문제로 여겨 의심한 것인가? 어찌 그가 持敬의 간략함에 익숙하고 觀理의 번거로움에 염증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단지 자신이 듣지 못했다고 해서 남이 들은 것을 불신한 것인가? 持敬과 觀理는 한쪽을 폐해서는 안 되니, 정자께서 진실로 이미 말씀하셨다. 만일 자신이 우연히 듣지 못했다고 해서 마침내 신뢰하지 않는 것은, 유자의 [생각이] 성인과 같은데도 '速貧速朽'에 대한 설명을 자유에게 기대지 않고서는 확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 또 어찌 급히 한 사람이 듣지 못했다 해서 여러 사람이 함께 들은 것을 모두 폐할 수 있겠는가?" | ||
+ | :<禮記> <檀弓> 有子問於曽子曰: "問<sub>當作聞</sub>喪<sub>去聲</sub>於夫子乎?<sub>喪, 謂失位去國.</sub> 曰: "聞之矣. 喪欲速貧, 死欲速朽." 有子曰: "是非君子之言也." 曽子曰: "參也與子游聞之." 有子曰: "然, 然則夫子有爲<sub>去聲</sub>言之也." 曽子以斯言告於子游, 子游曰: "甚哉! 有子之言似夫子也. 昔者夫子居於宋, 見桓司馬<sub>宋向戌之孫, 名魋.</sub>自為石槨, 三年而不成. 夫子曰: '若是其靡也, 死不如速朽之愈也.' 死之欲速朽, 為桓司馬言之也. 南宫敬叔反,<sub>魯仲孫閲嘗失位去國而得反.</sub> 必載寳而朝. 夫子曰: '若是其貨也, 喪不如速貧之愈也.' 喪之欲速貧, 為敬叔言之也." 曽子以子游之言告於有子, 有子曰: "然. 吾固曰非夫子之言也." | ||
+ | :<예기> <단궁상> 유자가 증자에게 물었다: "선생님께 벼슬에서 물러났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들은 게 있는가?" 증자가 대답했다: "그에 대해 들었다. '벼슬에서 물러났으면 빨리 가난해지려고 하고, 죽었으면 빨리 썩으려고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유자가 말했다: "이는 군자의 말이 아니다." 증자가 대답했다: "나는 자유와 함께 이를 들었다." 유자가 말했다: "그렇가?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까닭이 있어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증자가 이 말을 자유에게 하니, 자유가 말했다: "훌륭하구나! 유자의 말이 선생님과 같다. 전에 선생님께서 송나라에 머무실 때, 환퇴가 스스로 석곽을 만드는데 3년이 되도록 완성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는, '이렇게 화려하다니! 차라리 죽어서 빨리 썩는 것만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즉] '죽어서 빨리 썩는다'는 것은 환퇴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남궁경숙이 돌아오고나서 반드시 보물을 싣고 임금을 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뇌물을 쓰다니! 차라리 벼슬에서 물러나 빨리 가난해지는 것만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즉] '벼슬에서 물러나 빨리 가난해진다'는 것은 남궁경숙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증자가 자유의 말을 유자에게 하니, 유자가 말했다: "그렇다! 내가 진실로 '선생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말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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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有以爲物物致察而宛轉歸己, 如察天行以自强, 察地勢以厚徳者, 亦似矣.<sub>胡安國說</sub> 然其曰: '物物致察', 則是不察程子所謂'不必盡窮天下之物'也; 又曰: '宛轉歸己', 則是不察程子所謂'物我一理, 纔明彼即曉此'之意也; 又曰: '察天行以自强, 察地勢以厚徳', 則是但欲因其已定之名, 擬其已著之迹, 而未嘗如程子所謂'求其所以然與其所以爲'者之妙也. 獨有所謂'即事即物, 不厭不棄而身親格之以精其知'者, 爲得致字向裏之意. 而其曰: '格之之道, 必立志以定其本, 居敬以持其志. 志立乎事物之表, 敬行乎事物之内, 而後知乃可精'者,<sub>胡仁仲說</sub> 又有以合乎所謂'未有致知而不在敬者'之指. 但其語意頗傷急迫, 既不能盡其全體規模之大, 又無以見其從<sub>七恭反</sub>容潛玩、積乆貫通之功耳."<br/> | ||
+ | "또 '[격물이란] 사물마다 자세히 살펴서 宛轉하게?? 자신에게 귀결시키는 것이니, 하늘의 운행을 관찰하여 자신을 강하게 하고,<ref><주역> 건괘 상전 天行健,君子以自強不息。</ref> 땅의 형세를 관찰하여 덕을 두텁게 하는 것<ref><주역> 곤괘 상전 地勢坤,君子以厚德載物。</ref>과 같다'고 여기는 자가 있었으니, 그럴 듯하다.<sub>胡安國의 설이다.</sub><ref><예기집설> 권 149. 武夷胡氏曰: "格, 度也, 猶曰品式也, 所謂物之則也." 又曰: "夫窮理盡性乃聖門事業, 物物而察知之始也, 中人所可能者; 一以貫之, 知之至也, 非上知不與焉. 是故以子貢之明達, 猶疑於其師以為多學而識之也. 且置是事而以致知格物為先, 物物而察則知益明, 心益廣, 道可近矣. 然物物而察者, 又豈逐物而不知反哉? 又豈以己與物為二哉? 察於天行, 以自强也; 察於地勢, 以厚德也; 察於雲雷, 以經綸也; 察於山泉, 以果行也; 察於日月, 通晝夜也; 察於尺蠖, 明屈伸也; 逺察諸物, 其畧如此. 察於耳目身舌, 克私心也; 察於辭貌顔色, 尊德性也; 察於灑掃應對, 兼本末也; 察於心性四體, 養浩然之氣也; 近察諸身, 其要如此. 無所不在者, 理也; 無所不有者, 心也. 物物致察, 宛轉歸己, 則心與理不昧. 故知循理者, 士也; 物物皆備, 反身而誠, 則心與理不違. 故樂循理者, 君子也; 天地合德, 四時合序, 則心與理為一無事乎循矣. 故一以貫之, 聖人也, 豈易言哉?</ref> 그러나 그가 '사물마다 자세히 살핀다'고 한 것은 정자의 '천하의 사물을 모두 궁구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살피지 않은 것이고, 또 '宛轉하게?? 자신에게 귀결시킨다'고 한 것은 정자의 '사물과 나는 동일한 理를 [갖고 있으니], 저것을 밝히자마자 이것을 알게 된다'는 뜻을 살피지 않은 것이며, 또 '하늘의 운행을 관찰하여 자신을 강하게 하고, 땅의 형세를 관찰하여 덕을 두텁게 한다'고 한 것은 단지 이미 정해진 이름을 따르고 이미 드러난 자취에 의거하는 것이니, 정자의 이른바 '그 所以然과 그 所以爲를 찾는 묘함'과 같았던 적이 없는 것이다. 오직 이른바 '사물에 나아가 싫증내지도 버리지도 않고 몸소 직접 궁구해 앎을 정밀하게 한다'는 것이 있으니, '致'자의 향내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다 하겠다. 그가 '궁구하는 방법은 반드시 뜻을 세워 근본을 확정하고, 居敬해 그 뜻을 유지하는 것이다. 뜻이 사물 밖에서 확립되고 敬이 사물 안에서 행해진 뒤에야 앎이 정밀해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또 [정자의] '致知하면서 敬에 있지 않은 경우는 없다'는 뜻에 부합한다. 다만 그의 표현이 급박하다는 작지 않은 문제가 있어 정자의 큰 전체 규모를 포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자의 느긋하게 익히고 누적이 오래되어 통달하게 되는 공부를 보지 못한다." | ||
+ | :朱子曰: "'身親格之', 說得親字急迫, 不成是倩人格?"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身親格之'에서 '親'자를 말한 것이 급박하니, 남한테 부탁해서 궁구(格)하겠는가!"<ref><주자어류> 권18 上蔡說:「窮理只尋箇是處,以恕為本。」窮理自是我不曉這道理,所以要窮,如何說得「恕」字?他當初說「恕」字,大概只是說要推我之心以窮理,便礙理了。龜山說「反身而誠」,卻大段好。須是反身,乃見得道理分明。如孝如弟,須見得孝弟,我元有在這裏。若能反身,爭多少事。他又卻說:「萬物皆備於我,不須外面求。」此卻錯了。「身親格之」,說得「親」字急迫。自是自家格,不成倩人格!</ref> | ||
+ | :○此叚本說得精, 然却有病者, 只說得向裏來, 不曾説得外面, 所以語意頗傷急迫. 蓋致知本廣大, 須說得表裏内外、周遍兼該, 方得. 其曰: "志立乎事物之表, 敬行乎事物之内", 此語極好. 而曰: "知乃可精", 便有局促氣象. 他須要就這裏便精其知, 殊不知致知之道不如此急迫. 須是寛其程限<ref><한어대사전> 2. 期限; 3. 路程.</ref>, 大其度量, 久久自然通貫. 他只說得裏面一邊極精, 遺了外面一邊, 所以其規模之大不如程子. 且看程子所說: "今日格一物, 明日格一物, 積久自貫通", 此言該内外, 寛緩不迫, 有涵泳從容之意. 所謂"語小天下莫能破, 語大天下莫能載"也. | ||
+ | :이 단락은 본래 정밀하게 말했지만 병폐가 있다. 내면에 대해서만 말하고 외면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표현이 급박하다는 상당한 단점이 있다. 대개 致知는 본래 광대해서 안팎을 두루 빠짐 없이 말해야 한다. 그가 '뜻은 사물 밖에서 세워지고, 敬은 사물 안에서 행해진다'고 한 이 말은 매우 좋다. 그러나 '앎이 그제서야 정밀해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급박한 느낌이 있다. 그는 여기에서 앎을 정밀하게 하려고 했으니, 致知하는 방법이 이렇게 급박하지 않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반드시 기한을 여유롭게 두고 도량을 크게 해 오래 되면 저절로 통달하게 된다. 그는 그저 내면 하나에 대해서만 매우 지극하게 말하고 외면은 빠뜨렸기 때문에, 규모가 정자만 못한 것이다. 또 정자께서 '오늘 하나를 궁구하고 내일 하나를 궁구해, 누적이 오래되면 저절로 통달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말은 안팎을 겸하면서도 여유 있고 급박하지 않아 천천히 젖어드는 뜻이 있다. 이른바 '작은 것을 말하면 누구도 쪼갤 수 없고, 큰 것을 말하면 천하도 실을 수 없다'<ref><중용장구> 12장. 故君子語大,天下莫能載焉;語小,天下莫能破焉。</ref>는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8 五峰說「立志以定其本,居敬以持其志。志立乎事物之表,敬行乎事物之內,而知乃可精」者,這段語本說得極精。然卻有病者,只說得向裏來,不曾說得外面,所以語意頗傷急迫。蓋致知本是廣大,須用說得表裏內外周遍兼該方得。其曰「志立乎事物之表,敬行乎事物之內」,此語極好。而曰「而知乃可精」,便有局促氣象。他便要就這裏便精其知。殊不知致知之道不如此急迫,須是寬其程限,大其度量,久久自然通貫。他言語只說得裏面一邊極精,遺了外面一邊,所以其規模之大不如程子。且看程子所說:「今日格一件,明日格一件,積久自然貫通。」此言該內外,寬緩不迫,有涵泳從容之意,所謂「語小天下莫能破,語大天下莫能載」也。</ref> | ||
+ | :○問'立志以定其本, 居敬以持其志.' 曰: "人之爲事, 必先立志以為本. 志不立, 則不能爲得事. 雖能立志, 苟不能居敬以持之, 此心亦泛然而無主, 悠悠終日, 亦只是虛言. 立志必須髙出事物之表, 而居敬則常存於事物之中, 令此敬與事物皆不相違. 言也須敬, 動也須敬, 坐也須敬, 頃刻去他不得." | ||
+ | :'뜻을 세워 근본을 확정하고, 居敬해 뜻을 유지한다'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이 뭔가를 할 때 반드시 먼저 뜻을 세워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뜻이 확정되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비록 뜻을 세울 수 있더라도 居敬해 유지하지 못한다면, 이 마음은 역시 泛然히 주재가 없어 아득한 채로 하루를 보낼 것이니, ['立志'라는 말] 역시 허언이 되버린다. '뜻을 세우는 것'은 반드시 사물 밖에 높이 드러나야 하고, '居敬'은 늘 사물 안에 보존되어 이 敬과 사물 모두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말할 때에도 敬하고, 움직일 때에도 敬하며, 앉아있을 때에도 敬해서 잠시라도 敬에서 떨어져서는 안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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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嗚呼! 程子之言, 其答問反復之詳且明也如彼, 而其門人之所以爲說者乃如此. 雖或僅有一二之合焉, 而不免於猶有所未盡也. 是亦不待七十子喪<sub>去聲</sub>而大義已乖矣.<sub>出<家語>後序</sub> 尚何望其能有所發而有助於後學哉?<br/> | ||
+ | "아! 정자의 말씀하신 문답이 반복되어 상세하고도 명백한 것이 저와 같은데, 그의 문인들이 말한 것은 도리어 이와 같다. 비록 혹시 겨우 10~20%라도 부합하는 점이 있더라도, 여전히 포괄하지 못하는 점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니, [공자의] 칠십 제자가 죽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대의가 이미 어그러졌다.<sub><공자가어> 후서에 나온다.<ref><공자가어> <후서> 孔子旣没而微言絶, 七十二弟子終而大義乖.</ref></sub> 그런데도 어찌 그들이 계발한 바가 있어 후학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겠는가?" | ||
+ | :朱子曰: "程子說更不可易. 某當初於呂、謝、楊、尹說, 叚叚録出, 句句比對, 逐字秤停<ref><한어대사전> 衡量斟酌.</ref>過, 方見程子說攧撲不破, 諸說挨著便成粉碎, 諸說皆失了程子意. 此正是入門欵, 於此既差, 他可知矣."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정자의 설은 더이상 바꿀 수 없다. 나는 원래 여여숙·사상채·양귀산·윤화정의 설을 단락마다 기록해두고 구절마다 비교하며 글자마다 헤아려보았고, 그제서야 정자의 설을 어떻게 해도 깨뜨릴 수 없고, 정자 제자들의 설은 줄줄이 분쇄되어 그들의 설 모두 정자의 뜻을 놓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격물치지)은 바로 입문에 [해당하는] 조목이니, 여기서 어긋나면 다른 것도 알 수 있다."<ref><주자어류> 권18. 先生問:「大學看得如何?」曰:「大綱只是明明德,而著力在格物上。」曰:「著力處大段在這裏,更熟看,要見血脈相貫穿。程子格物幾處,更子細玩味,說更不可易。某當初亦未曉得。如呂,如謝,如尹楊諸公說,都見好。後來都段段錄出,排在那裏,句句將來比對,逐字稱停過,方見得程子說鶏撲不破。諸公說,挨著便成粉碎了!」; 같은 책, 같은 곳. 諸公致知、格物之說,皆失了伊川意,此正是入門款。於此既差,則他可知矣。</ref> | ||
+ | :○程子諸門人說得都差, 不曽精曉程子之說. 亦縁當時諸公所聞於程子者語意不全, 所以多差, 後來集註家語録凑起衆說, 此叚工夫方是渾全. 然則當時親炙, 未為全幸; 生先生之後者, 未為不幸也. | ||
+ | :정자의 여러 문인들이 말한 것은 모두 어긋나 정자의 설을 제대로 이해한 경우가 없었다. 또 당시 여러 선생이 정자께 들은 내용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많이 차이를 보여, 나중에 주석가의 어록이나 여러 설을 모으고 나서야 이 공부(격물치지)가 비로소 온전해졌다. 그렇다면 당시에 [정자께] 직접 수업을 들었다고 해서 십분 다행인 것도 아니고, 선생 뒤에 태어난 것도 불행이 아니다.<ref><주자어류> 권18. 這箇道理,自孔孟既沒,便無人理會得。只有韓文公曾說來,又只說到正心、誠意,而遺了格物、致知。及至程子,始推廣其說,工夫精密,無復遺憾。然程子既沒,諸門人說得便差,都說從別處去,與致知、格物都不相干,只不曾精曉得程子之說耳。只有五峰說得精,其病猶如此。亦緣當時諸公所聞於程子者語意不全,或只聞一時之語,或只聞得一邊,所以其說多差。後來卻是集諸家語錄,湊起眾說,此段工夫方始渾全。則當時門人親炙者未為全幸,生於先生之後者未為不幸。</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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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間獨惟念昔聞延平先生之教,<sub>李先生名侗, 字愿中, 延平人, 朱子之師也.</sub> 以爲'爲學之初, 且當常存此心, 勿爲他事所勝. 凡遇一事, 即當且就此事反復推尋以究其理, 待此一事融釋脫落, 然後循序少進, 而别窮一事. 如此既久, 積累之多, 胷中自當有洒然處, 非文字言語之所及也.' 詳味此言, 雖其規模之大、條理之宻, 若不逮於程子. 然其功夫之漸次、意味之深切, 則有非他說所能及者. 惟嘗實用力於此者, 爲能有以識之, 未易<sub>去聲</sub>以口舌爭也."<br/> | ||
+ | "근래에 유독 전에 들었던 연평 선생의 가르침이 떠올랐다.<sub>이선생의 이름은 侗이고 자는 愿中이니 延平 사람으로, 주자의 스승이다.</sub> [연평 선생께서는] '학문하는 첫 단계에는 우선 이 마음을 늘 보존하여 다른 일에 압도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무릇 어떤 일을 마주쳤을 때에는 우선 이 일을 반복해 탐구해 그 안의 理를 찾아야 하고, 한 가지 일이 눈 녹듯 해결된 연후에 차례대로 조금씩 나아가 다른 일을 궁구해야 한다. 이런 식이 오래 되고 누적한 것이 많게 되면, 가슴 속에 저절로 응당 시원한 부분이 있을 것이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잘 살펴보니, 비록 규모의 크기나 조리의 엄밀성이 정자의 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공부의 단계나 의미의 깊이는 다른 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오직 이에 실제로 힘쓴 자만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요, 쉽게 말로 다툴 문제가 아니다." | ||
+ | :格菴趙氏曰: "程子言: '若一事窮未得, 且别窮一事'; 延平則言: '且就一事推尋, 待其融釋脫落, 然後别窮一事', 其言不同. 盖程子以人心各有明處有暗處, 若就明處推去, 則易為力, 非謂一事未窮得而可貳以二、參以三也. 若延平則專爲不能主一者之戒. 讀者不可以辭害意." | ||
+ | :격암 조씨가 말했다: "정자께서는 '만약 한 가지 일을 아직 다 궁구하지 못했다면 우선 다른 일을 궁구하라'고 말씀하셨고, 연평 선생께서는 '우선 한 가지 일을 탐구해 눈 녹듯 해결된 연후에 다른 일을 궁구하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이 같지 않다. 대개 정자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각각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있으니, 밝은 부분에서 탐구한다면 쉽게 힘을 낼 수 있다'고 여기신 것이지, '한 가지 일을 아직 궁구하지 못했더라도 두 번째·세 번째로 옮겨가도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연평 선생의 경우는 오직 主一하지 못하는 자에 대해 경계하신 것이다. 독자는 표현을 가지고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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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br/> | ||
+ | 曰: "然則所謂'格物致知之學', 與世之所謂'博物洽聞'者, 奚以異?" 曰: "此以反身窮理爲主, 而必究其本末是非之極摯<sub>與至同</sub>; 彼以徇外誇多爲務, 而不覈<sub>下革反</sub>其表裏眞妄之實. 然必究其極, 是以知愈博而心愈明; 不覈其實, 是以識愈多而心愈窒<sub>陟力反</sub>. 此正爲<sub>去聲下同</sub>己爲人之所以分, 不可不察也."<br/> | ||
+ | 물었다: "그렇다면 이른바 '격물치지의 학문'은 세간의 이른바 '博物洽聞'이라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대답했다: "이것(격물치지)은 자신을 반성하고 理를 궁구하는 것을 위주로 하니, 반드시 본말·시비의 극치를 궁구한다. 저것(博物洽聞)은 외물을 좇아 박식을 과장하는 데 힘쓸 뿐 표리·眞妄의 실질은 탐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격물치지는] 반드시 극치를 궁구하기 때문에 앎이 넓어질수록 마음이 더욱 밝혀지는 반면, [博物洽聞은] 실질을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지식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막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이 나뉘는 지점이니,<ref><논어> <헌문> 25. 子曰:「古之學者為己,今之學者為人。」</ref> 살피지 않아선 안 된다." | ||
+ | :濳室陳氏曰: "格物致知, 研窮義理, 心學也; 記誦博識, 口耳外馳, 喪志之學也. 二者正相反." | ||
+ | :잠실 진씨가 말했다: "격물치지는 의리를 연구하니 마음의 학문이고, 記誦博識은 입과 귀가 밖으로 내달리니, 뜻을 해치는 학문이다.<ref><이정유서> 03-17 以記誦博識爲玩物喪志.</ref> 두 가지는 정반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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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傳六章=== | ||
+ | 所謂誠其意者:毋自欺也,如惡惡臭,如好好色,此之謂自謙,故君子必慎其獨也!<sub>惡、好上字,皆去聲。謙讀為慊,苦劫反。</sub><br/> | ||
+ | 이른바 '誠其意'라는 것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듯이 하고 [선을 좋아하기를] 미모를 좋아하듯이 하는 것, 이것을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혼자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 | ||
+ | :誠其意者,自脩之首也。毋者,禁止之辭。自欺云者,知為善以去<sub>上聲下同</sub>惡<sub>此知字帶從上章致知之知字來</sub>,而心之所發有未實也。謙,快也,足也。<sub>朱子曰: "誠意章在兩箇自字上用功."</sub>獨者,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言欲自脩者知為善以去其惡,則當實用其力,而禁止其自欺。使其惡惡則如惡惡臭,好善則如好好色,皆務決去,而求必得之,以自快足於己,不可徒苟且以殉外而為<sub>去聲</sub>人也。<sub>不求自惬便是為人</sub> 然其實與不實,蓋有他人所不及知而己獨知之者,故必謹之於此<sub>此指獨字</sub>以審其幾焉。 | ||
+ | :'誠其意'라는 것은 '自脩'<ref><대학장구> 전3장. 如切如磋者,道學也;如琢如磨者,自脩也;</ref>의 시작이다. '毋'는 금지사이다. '自欺'라는 것은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해야 함을 알면서도<sub>여기 '知'자는 앞 장의 '致知'의 知자에서 가져온 것이다.</sub> 마음에서 발현되는 것에 진실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다. '謙'은 만족스러움이다.<sub>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성의장은 두 自자(毋自欺, 自謙)에서 공부해야 한다."</sub> '獨'은 남은 모르고 자기만 아는 곳이다. 자신을 수양하고자 하는 자가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해야 함을 안다면, 마땅히 자신의 힘을 실제로 써서 스스로를 속이는 일을 금해, 악을 미워하기를 마치 악취를 싫어하듯이 하고 선을 좋아하기를 미모를 좋아하듯이 해서, [악은] 모두 없애는 데 힘쓰고 [선은] 구하면 반드시 얻어 자신에게 만족스럽게 해야지, 그저 구차하게 외물을 좇고 남을 위해서는 안 된다.<sub>스스로 만족스럽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다.</sub> 그러나 그 진실함과 진실하지 못함은 대개 타인은 알 수 없고 자기만 알 수 있는 것이므로, 반드시 여기서(혼자만 아는 곳) 조심하며 기미를 살펴야 한다. | ||
+ | ::○朱子曰: "'㡬者, 動之微', 是欲動未動之間, 便有善惡, 便須就這處理㑹. 若到發出處, 更怎生奈何得?"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기미(㡬)라는 것은 움직임의 싹이다'<ref><주역> <계사하> 5. 子曰:「知幾其神乎?君子上交不諂,下交不瀆,其知幾乎,幾者動之微,吉之先見者也,君子見幾而作,不俟終日。易曰:『介于石,不終日,貞吉。』介如石焉,寧用終日,斷可識矣,君子知微知彰,知柔知剛,萬夫之望。」</ref>란 동하려고 하거나 동하지 않은 사이이니, [이때] 선악이 있으니<ref><통서> <誠幾德> 幾,善惡.</ref>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발현되고 나면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 ||
+ | ::○問: "知至了, 如何到誠意? 又說'毋自欺'?" 曰: "到這裏, 方可著手下工夫, 不是知至了下面許多一齊掃去. 下面節節有工夫在." | ||
+ | ::물었다: "知至하고 나서 어떻게 誠意합니까? 또 어째서 '毋自欺'라고 말한 것입니까?" 대답하셨다: "知至하고 나서야 비로소 공부에 착수할 수 있지, 知至하고 나면 다음의 많은 공부를 일절 제치는 것이 아니다. 知至 다음에 단계별로 공부가 있다." | ||
+ | ::○譬如一塊物, 外面是銀, 裏面是鐵, 便是自欺. 須表裏如一, 方是不自欺. 須是見得分曉, 如知烏喙不可食, 水火不可蹈, 則自不食不蹈. 如寒欲衣, 饑欲食, 則自是不能已. 人果見善如饑欲食寒欲衣, 見惡如烏喙不可食, 水火不可蹈, 則此意自是實矣.<sub>烏喙藥石, 食之, 能殺人.</sub> | ||
+ | ::어떤 덩어리에 비유하자면, 외면은 은인데 내면은 철이라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반드시 안팎이 한결같아야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이다. 마치 오훼는 먹어선 안 되고 물·불에 뛰어들어서는 안 됨을 아는 것처럼 분명히 안다면 스스로 오훼를 먹지도 물·불에 뛰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추우면 옷을 입으려 하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으려 하는 것은 본래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선천적으로 아는 것이다) 사람이 만약 마치 배고플 때 먹으려 하고 추울 때 옷을 입으려 하는 것처럼 선을 보고, 마치 오훼를 먹어선 안 되고 물·불에 뛰어들어선 안 되는 것처럼 악을 본다면, 이 뜻이 저절로 진실해질 것이다.<sub>오훼는 약석이니 먹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sub> | ||
+ | ::○自欺是半知半不知底人. 知道善我所當為, 却又不十分去為善; 知道惡不可為, 却又自家舎他不得, 這便是自欺. 不知不識只喚欺; 不知不識不喚做自欺.<sub>新安陳氏曰: "以上語, 以知為重. 見得物格知至為意誠之根基也."</sub> | ||
+ | ::'自欺'는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사람이다. 선을 내가 실천해야 함을 알면서도 십분 선을 실천하지 못하고, 악을 내가 행해선 안 됨을 알면서도 스스로 악을 버리지 못하는 것, 이것이 '自欺'이다. 모르는 것은 '欺'라고만 부르지, 모르는 것을 '自欺'라고 부르지는 않는다.<ref><주자어류> 권16. 問劉棟:「看大學自欺之說如何?」曰:「不知義理,卻道我知義理,是自欺。」先生曰:「自欺是箇半知半不知底人。知道善我所當為,卻又不十分去為善;知道惡不可作,卻又是自家所愛,舍他不得,這便是自欺。不知不識,只喚欺,不知不識卻不喚做『自欺』。」</ref><sub>신안 진씨가 말했다: "이상의 말은 앎(知)을 중시한 것이다. 物格知至가 意誠의 근거가 됨을 알겠다."</sub> | ||
+ | ::○纔說不自欺, 則其好善惡惡, 只要求以自快自足. 如寒而思衣以自溫, 饑而思食以自飽, 非有牽強苟且姑以為人之意也. | ||
+ | ::'不自欺'를 말하는 순간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단지 스스로 만족스러움을 구하는 것이니 되니, 마치 추울 때 옷을 입어 스스로 따뜻하게 하고자 하고 배고플 때 음식을 먹어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억지로 구차하게 남을 위하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ref><주자대전> 권64 <答孫敬甫> 蓋自欺自慊兩事正相抵背, 纔不自欺, 卽其好惡眞如好好色惡惡臭, 只爲求以自快自足, 如寒而思衣以自溫, 饑而思食以自飽, 非有牽强苟且, 姑以爲人之意.</ref> | ||
+ | ::○如鑄私錢, 做官㑹<ref><한어대사전> 宋代發行的一種紙幣.</ref>, 此是大故<ref><한어대사전> 5. 猶言特別.</ref>無狀<ref><한어대사전> 4. 謂所行醜惡無善狀.</ref>小人, 豈自欺之謂耶? 此處工夫極細, 未便說到粗處. 前後學者說差了. 縁賺<ref><한어대사전> 4.誤, 貽誤.</ref>連下文'小人閒居'一節看了, 所以差也. | ||
+ | ::私錢을 주조하고 지폐를 위조하는 것은 매우 볼썽사나운 소인이니, 어찌 '自欺'를 말하는 것이겠는가? 이 공부(성의)는 지극히 세밀하니, 거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앞뒤 학자들이 잘못 설명했다. 다음의 '小人閒居'와 잘못 이어 봤기 때문에 틀린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6. 如公之言,須是鑄私錢,假官會,方為自欺,大故是無狀小人,此豈自欺之謂邪!…… 此處工夫極細,未便說到那粗處。所以前後學者多說差了,蓋為牽連下文『小人閒居為不善』一段看了,所以差也。</ref> | ||
+ | ::○如有九分義理, 雜了一分私意, 便是自欺. 到得厭然揜著之時, 又其甚者. | ||
+ | ::의리가 90%이고 사의가 10% 뒤섞였다면 '自欺'이다. '슬쩍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는 때가 되면 ['自欺'가] 더욱 심한 경우이다.<ref><주자어류> 권16. 如有得九分義理,雜了一分私意,九分好善、惡惡,一分不好、不惡,便是自欺。到得厭然揜著之時,又其甚者。</ref> | ||
+ | ::○十分為善, 有一分不好底意潜發於其間, 便由邪徑以長, 這箇却是實, 前面善意却是虚矣. | ||
+ | ::100% 선을 행하더라도 10% 좋지 못한 뜻이 그때 슬그머니 발한다면 삿된 길을 통해 [좋지 못한 뜻이] 자라니, 이것(선을 행한 것)은 진실하지만, 앞의 선의는 허위이다.<ref><주자어류> 권16. 今能致知,知至而意誠矣。驗以日用間誠意,十分為善矣。有一分不好底意思潛發以間於其間,此意一發,便由斜徑以長,這箇卻是實,前面善意卻是虛矣。</ref> | ||
+ | ::○凡惡惡之不真, 為善之不勇, 外然而中實不然, 或有為而為之, 或始勤而終怠, 皆不實而自欺之患也. | ||
+ | ::악을 미워함에 진실하지 않고, 선을 행함에 용감하지 않으며, 겉으로는 옳게 여기면서 속으로는 사실 옳게 여기지 않고, 어떨 때는 까닭이 있어 하고, 어떨 때는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 끝에 가서는 해이해지니, 이 도무는 진실하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는 근심거리이다.<ref><주자어류> 권16. 凡惡惡之不實,為善之不勇,外然而中實不然,或有所為而為之,或始勤而終怠,或九分為善,尚有一分苟且之心,皆不實而自欺之患也。</ref> | ||
+ | ::○論自欺細處: 且如為善, 自家也知得是當為, 也勉強去做, 只是心裏又有些便不消如此做也不妨底意思; 如為不善, 也知得不當為而不為, 心中也又有些便為也不妨底意思, 便是自欺, 便是虚偽不實矣. | ||
+ | ::'스스로를 속이는(自欺)' 디테일한 상황을 따져보자: 선을 행하는 경우, 스스로도 이것을 마땅히 행해야 하고 힘써야 함을 알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하지 않다고 괜찮다'는 생각이 있고, 불선을 행하는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됨을 알아서 하지 않지만,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있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거짓되어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8. 若論自欺細處:且如為善,自家也知得是合當為,也勉強去做,只是心裏又有些便不消如此做也不妨底意思;如不為不善,心裏也知得不當為而不為,雖是不為,然心中也又有些便為也不妨底意思。此便是自欺,便是好善不『如好好色』,惡惡不『如惡惡臭』。便做九分九釐九毫要為善,只那一毫不要為底,便是自欺,便是意不實矣。</ref> | ||
+ | ::○"'自謙', 與<孟子>'行有不慊於心'相類, 亦微不同. <孟子>訓滿足意多, <大學>訓快意多." 問: "'自謙'只是真實為善去惡, 無牽滯於己私, 只是快底意, 方是心下滿足?" 曰: "是." | ||
+ | ::"'自謙'은 <맹자>의 '행실이 마음에 만족스럽지 않다(行有不慊於心)'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맹자>의 의미는 '만족스럽다'는 뜻이 많고, <대학>의 의미는 '시원하다'는 뜻이 많다." 물었다: "'自謙'은 진실하게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함에 사욕에 얽매이지 않는 것일 뿐이요, '시원하다'는 뜻이며, 그러고나서야 만족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까?" 대답하셨다: "그렇다."<ref><주자어류> 권16.「『自慊』之『慊』,大意與孟子『行有不慊』相類。子細思之,亦微有不同:孟子慊訓滿足意多,大學訓快意多。橫渠云:『有外之心,蜀錄作「自慊」。不足以合天心。』初看亦只一般。然橫渠亦是訓足底意思多,大學訓快意多。」問:「大學說『自慊』,且說合做處便做,無牽滯於己私,且只是快底意,少間方始心下充滿。孟子謂『行有不慊』,只說行有不滿足,則便餒耳。」曰:「固是。 </ref> | ||
+ | ::○自謙是合下好惡時便是要自謙了, 非謂做得善了方能自謙. 自謙正與自欺相對. 所謂誠其意, 便是要毋自欺, 非是誠其意了, 方能不自欺也. 自謙者, 外面如此, 中心也是如此, 表裏一般; 自欺者, 外面如此, 中心其實有些子不願. 只此便是二心, 誠偽之所由分也. | ||
+ | ::'自謙'은 좋아하거나 싫어할 때 당장 스스로 만족스러워야 한다는 것이지, 선을 행하고 나서 비로소 스스로 만족스러워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自謙'은 '自欺'와 정반대이다. '자기 뜻을 진실하게 한다(誠其意)'라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 자신의 뜻을 진실하게 하고 나서 비로소 스스로를 속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自謙'이라는 것은 밖으로 이러하다면 마음속도 이와 같아 겉과 속이 똑같은 것이고, '自欺'라는 것은 밖으로는 이러한데 마음속으로는 조금 내키지 않는 점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둘로 만드는 것이니, 진실과 거짓이 나뉘는 지점이다. | ||
+ | ::○謹獨, 則於善惡之㡬察之愈精愈密. | ||
+ | ::혼자 있을 때 삼간다면, 선악이 나뉘는 기미를 살피는 것이 더욱 정밀해질 것이다. | ||
+ | ::○如與衆人對坐, 自心中發一念, 或正或不正, 此亦是獨處. | ||
+ | ::여러 사람들과 마주앉아있을 때 마음속에서 한 생각이 싹트면 바르기도 하고 바르지 않기도 하는데, 이 역시 '혼자 있는 경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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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小人閒居為不善,無所不至,見君子而后厭然,揜其不善,而著其善。人之視己,如見其肺肝然,則何益矣。此謂誠於中,形於外,故君子必慎其獨也。<sub>閒,音閑。厭,鄭氏讀為黶。</sub><br/> | ||
+ | 소인은 혼자 있을 때 불선한 짓을 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가, 군자를 본 이후에 厭然히 자신의 불선을 가리고 선을 드러낸다. 남들이 자신을 봄이 마치 폐나 간을 보는 것과 같으니, [감춘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이를 '내면으로 진실하면 겉으로 드러난다'고 말하니,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가 혼자 있을 때 삼간다. | ||
+ | :閒居,獨處也。厭然,消沮閉藏之貌。此言小人陰為不善,而陽欲揜之<sub>閒居為隂, 見君子為陽.</sub>,則是非不知善之當為與惡之當去<sub>上聲</sub>也<sub>非不知乃其秉彝之天不可泯沒者</sub>;但不能實用其力以至此耳。然欲揜其惡而卒不可揜,欲詐為善而卒不可詐,則亦何益之有哉!此君子所以重<sub>去聲</sub>以為戒,而必謹其獨也。 | ||
+ | :'閒居'는 혼자 있는 경우이다. '厭然'은 막고 가리는 모습이다. 이 구절은 [다음을] 말한 것이다: 몰래 불선한 짓을 하면서 겉으로 그것을 숨기려 한다면, 이는 선은 행하고 악은 제거해야 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단지 실제로 힘을 써 이에 이르지 못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악을 가리려 하더라고 끝내 가릴 수 없고, 선을 거짓으로 행하려 하더라도 끝내 속일 수 없으니,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이것이 군자가 거듭 이를 경계하고 반드시 혼자 있을 때 삼가는 이유이다. | ||
+ | ::朱子曰: "'小人閒居為不善', 是誠心為不善也; '揜其不善而著其善', 是為善不誠也. 為惡於隠微之中而詐善於顯明之地, 將虚假之善來盖真實之惡, 自欺以欺人也. 然人豈可欺哉?"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小人閒居為不善'은 진심으로 불선을 행하는 것이고, '揜其不善而著其善'은 선을 행함에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몰래 악을 행하면서 겉으로 선을 꾸미는 것은 거짓된 설으로 진실한 악을 가리는 것이니, 자실을 속여 남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남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ref><주자어류> 권64. 曰:「『小人閒居為不善』,是誠心為不善也。『掩其不善,而著其善』,是為善不誠。」; 같은 책, 권16. 所謂為惡於隱微之中,而詐善於顯明之地,是所謂自欺以欺人也。然人豈可欺哉!</ref> | ||
+ | ::○'閒居為不善', 便是'惡惡不如惡惡臭'; '揜不善, 著其善', 便是'好善不如好好色'. | ||
+ | ::'閒居為不善'은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듯 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揜不善, 著其善'은 '선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
+ | ::○君子小人之分, 却在誠其意處. 誠於為善, 便是君子; 不誠底便是小人. | ||
+ |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誠其意'에 달려있다. 선을 행함에 진실하면 군자이니, 진실하지 않은 자는 소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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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曾子曰:「十目所視,十手所指,其嚴乎!」<br/> | ||
+ | 증자께서 말씀하셨다: "열 눈이 보는 대상이며, 열 손이 가리키는 대상이니, 엄중하도다!" | ||
+ | :引此以明上文之意。言雖幽獨之中,而其善惡之不可揜如此。可畏之甚也。 | ||
+ | :이것(증자의 말)을 인용해 앞 글의 의미를 밝혔다. 비록 혼자 있을 때라도 선악을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매우 두려워할 만함을 말한 것이다. | ||
+ | ::朱子曰: "此是承上文'人之視己, 如見其肺肝'之意. 不可說人不知, 人曉然共知如此. 人雖不知, 我已自知, 自是甚可皇恐了, 其與十目十手所視所指, 何異哉?"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앞 글의 '人之視己, 如見其肺肝'의 의미를 이은 것이다. 남들이 모른다고 말해선 안 되니, 남들은 이처럼 훤히 모두 알고 있다. 남이 비록 모르더라도 나는 이미 스스로 알고 있어서 스스로 매우 두려워할 만하니, 이것이 '열 눈이 보는 대상이며, 열 손이 가리는 바'와 무엇이 다르겠는가?"<ref><주자어류> 권16. 蓋人雖不知,而我已自知,自是甚可皇恐了,其與十目十手所視所指,何以異哉?</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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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富潤屋,德潤身,心廣體胖,故君子必誠其意。<sub>胖,步丹反。</sub><br/> | ||
+ |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해주고 덕은 자신을 윤택하게 해주기에,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편안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자신의 뜻을 진실하게 한다. | ||
+ | :胖,安舒也。言富則能潤屋矣,德則能潤身矣,故心無愧怍,則廣大寬平,而體常舒泰,德之潤身者然也。蓋善之實於中而形於外者如此,故又言此以結之。 | ||
+ | :'胖'은 편안함이다. [이 구절은 다음을] 말한 것이다: 부는 집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고, 덕은 자신을 윤택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마음에 부끄러운 바가 없다면, [마음은] 넓고 안정되고 몸은 늘 편안해지니, '덕이 자신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대개 선이 '내면으로 진실하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와 같으므로, 다시 이를 말하여 마무리한 것이다. | ||
+ | ::朱子曰: "'富潤屋'以下, 是說意誠之驗如此. 心本是濶大底物事, 只因愧怍便卑狹. 被他隔礙了, 所以體不能得安舒."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富潤屋' 이하는 意誠의 결과가 이와 같음을 말한다. 마음은 본래 광대한 것인데, 부끄러움에 의해 협소해진다. 부끄러움에 의해 막혔기 때문에 몸이 편안할 수 없는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6.『富潤屋』以下,卻是說意誠之驗如此。</ref> | ||
+ | ::○毋自欺是誠意; 自慊是意誠 | ||
+ | ::'毋自欺'는 '誠意'이고, '自慊'은 '意誠'이다. | ||
+ | ::○小人閒居以下是形容自欺之情狀; 心廣體胖是形容自慊之意. | ||
+ | ::'小人閒居' 이하는 '自欺'의 정황을 형용한 것이고, '心廣體胖'은 '自慊'의 의미를 형용한 것이다. | ||
+ | ::○無愧怍是無物欲之蔽, 所以能廣大. | ||
+ | ::[마음에] 부끄러워하는 바가 없는 것이 [마음에] 물욕에 의한 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광대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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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右傳之六章。釋誠意。<sub>朱子曰: "許多病痛都在誠意章, 一齊說了. 下面有些小病痛, 亦輕可. 此章最緊切. 若透過此一關此去做工夫便易了. 由是而之, 便駸駸<ref><한어대사전> 2. 疾速.</ref>進於善, 而決不至下陷於惡矣."</sub> | ||
+ | ::이상은 전6장이니, '誠意'를 풀이하였다. <sub>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수많은 병통이 모두 성의장에 달려있으니, 모두 말했다. 이후의 여러 작은 병통들은 가벼이 여겨도 괜찮다. 이 장이 가장 핵심적이다. 만약 이 관문을 통과하고서 공부한다면 쉬울 것이다. 이로부터 나아간다면 빠르게 선을 진전시켜 결코 악에 빠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6. 說許多病痛,都在「誠意」章,一齊要除了。下面有些小為病痛,亦輕可。若不除去,恐因此滋蔓,則病痛自若。</ref></sub> | ||
+ | :::經曰:「欲誠其意,先致其知。」又曰:「知至而后意誠。」蓋心體之明有所未盡,則其所發必有不能實用其力,而苟焉以自欺者。<sub>朱子曰: "<大學>雖使人戒夫自欺, 而推其本, 則必其有以用力於格物致知之地, 然後理明心一, 而所發自然莫非真實. 不然則正念方萌, 而私意隨起, 亦非力之所能制矣." ○若知有不至, 則其不至之處, 惡必蔵焉以為自欺之主, 雖欲致其謹獨之功, 亦且無主之能為而無地之可據矣. 此又傳文之所未發, 而其理已具於經者, 皆不可以不察也.</sub> 然或己明而不謹乎此,則其所明又非己有,而無以為進德之基。故此章之指,必承上章而通考之,然後有以見其用力之始終,其序不可亂而功不可闕如此云。 | ||
+ | :::<대학> 경문에서 "欲誠其意,先致其知"라고 했고, 또 "知至而后意誠"이라고 했다. 대개 心體의 밝음을 다 드러내지 못하면, 마음에서 발한 것 가운데 필시 자기 힘을 실제로 쓰지 못하는 것이 있어 구차하게 그 때문에 자신을 속일 것이다. <sub>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대학>이 비록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속이는 것을 경계하게 하지만, 그 근본을 추론해보면 반드시 격물치지 단계에 힘을쏟을 수 있은 연후에야 理가 밝혀지고 마음이 전일해져 [마음에서] 발한 것이 저절로 진실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격물치지하지 않는다면) 바른 생각이 막 싹텄을 때 이기적인 생각이 따라 일어나 힘으로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다."<ref><주자대전> 권60 <答彭子壽> 然竊聞之: <大學>於此雖若使人戒夫自欺, 而推其本則必其有以用力於格物致之地, 然後理明心一, 而所發自然莫非眞實. 如其不然, 則雖欲防微謹獨, 無敢自欺, 而正念方萌, 私欲隨起, 亦非力之所能制矣. </ref> ; 만약 앎에 지극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지극하지 않은 곳에서 악이 반드시 숨어서 스스로를 속이는 주체가 될 것이니, 비록 '謹獨'의 공부를 다하려 하더라도 해낼 수 있는 주체가 없고 근거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또 전문에서 말하지 않았지만 그 이치는 이미 경문에 갖춰져 있는 것이니, 모두 살피지 않아선 안 된다.</sub> 그러나 혹시라도 [心體가] 이미 밝은데 여기서 삼가지 않는다면, 밝은 것이 다시 제 소유가 아니게 되어 덕을 진전시키는 기초로 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의미는 반드시 앞 장을 이어 전체적으로 살펴본 연후에야 실천의 순서와 그 순서를 어지럽혀선 안 되며 공부는 빠드려서는 안 됨이 이와 같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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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문』 전6장==== | ||
+ | 或問: "六章之㫖, 其詳猶有可得而言者邪?" 曰: "天下之道二, 善與惡而已矣. 然揆厥所元而循其次第, 則善者天命所賦之本然; 惡者物欲所生之邪穢也. 是以人之常性莫不有善而無惡, 其本心莫不好<sub>去聲下並同</sub>善而惡惡<sub>上去聲下如字. 此後可惡其惡惡之不惡而惡好惡並去聲</sub>. 然既有是形體之累而又爲氣稟之拘. 是以物欲之私得以蔽之, 而天命之本然者不得而著. 其於事物之理, 固有瞢<sub>莫中反</sub>然不知其善惡之所在者, 亦有僅識其粗而不能眞知其可好可惡之極者. 夫<sub>音扶下同</sub>不知善之眞可好, 則其好善也雖曰好之, 而未能無不好者以拒之於内; 不知惡之眞可惡, 則其惡惡也雖曰惡之, 而未能無不惡者以挽<sub>音晚</sub>之於中. 是以不免於苟焉以自欺, 而意之所發有不誠者."<br/> | ||
+ | 혹자가 물었다: "6장 뜻의 상세한 부분에 대해 더 말해줄 수 있는가?" 대답했다: "세상의 길은 善과 惡 두 가지일 뿐이다. 그러나 선악의 근원을 헤아려 그 순서를 따라가 보면, 선이라는 것은 天命이 부여한 본래적인 것이고, 악이라는 것은 물욕이 낳은 삿되고 더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항상된 性은 선만 있고 악은 없으며, 사람의 本心은 선을 좋아하고 惡을 싫어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그러나 형체가 얽매고 또 기품에 의해 구속되기 때문에, 이기적인 물욕이 그 본심을 가리고 天命이 부여한 본래적인 것이 드러나지 못한다. 그러한 사람은 사물의 이치에 대해서 진실로 멍청하게 그 善惡의 소재을 알지 못하기도 하고, 또 겨우 사물의 이치를 거칠게나마 알았더라도 좋아해야 할 것과 싫어해야 할 것의 극치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무릇 선을 진실로 좋아해야 함을 알지 못한다면, 그가 선을 좋아하는 것을 비록 '좋아한다'고 말하더라도 좋아하지 않음이 없을 수 없어서 마음에서 그것(선)을 막게되고, 악을 진실로 싫어해야 함을 알지 못한다면, 그가 惡을 싫어하는 것을 비록 '싫어한다'고 말하더라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 없을 수 없어서 마음으로 그것(악)을 끌어온다. 그러므로 결국 구차하게 이런 식으로 자신을 속이고, 意가 발현됨에 진실하지 않은 점이 있게 되는 것이다." | ||
+ | :北溪陳氏曰: "造化流行, 生育賦與, 更無别物, 只是箇善而已. 所謂善者, 以實理言. 人受得此理以為善<ref>'善'이 '性'의 오자인 듯하다. <북계자의> 天所命於人以是理, 本只善而無惡. 故人所受以為性, 亦本善而無惡. …… 造化流行, 生育賦予, 更無别物, 只是箇善而已. 此是太極之動而陽時. 所謂善者, 以實理言.</ref>, 亦本善而無惡. 如外好善而内不好善, 外惡惡而内不惡惡, 便是不眞實. 一等未實見道理人, 雖分明有好善之心, 終是不能徹表裏. 須是眞知善惡分明, 然後有眞好眞惡之切<ref>'切'이 '功'의 오자인 듯하다. 趙順孫(격암 조씨), <四書纂疏> 陳氏曰: "造化流行, 生育賦予, 更無别物, 只是箇善而已. 所謂善者, 以實理言. 人受得此理以為善, 亦本善而無惡." …… 陳氏曰: "一等未實見道理人, 雖分明有好善之心, 終是不能徹表裏. 須是真知善惡分明, 然後有真好真惡之功." …… 陳氏曰: "如外好善而内不好善, 外惡惡而内不惡惡, 便是不真實."</ref>." | ||
+ | :북계 진씨가 말했다: "[天理가] 조화·유행해서 [만물을] 생육시키고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은, 달리 특별한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善일 뿐이다. 이른바 선이라는 것은 '實理'로 말한 것이다. 사람은 이 理를 얻어서 性으로 삼았으므로 性 또한 본래 선할 뿐 惡함이 없다. 만일 겉으로만 선을 좋아하고 안으로는 선을 좋아하지 않으며, 겉으로는 악을 싫어하는데 안으로는 악을 싫어하지 않는다면, 이는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道理를 진실하게 보지 못한 사람은 비록 선을 좋아하는 마음을 분명히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 겉과 속을 다 꿰뚫을 수 없다. 모름지기 선악을 분명하게 안 연후에야 진실하게 좋아하고 진실하게 싫어하는 공효가 있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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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夫好善而不誠, 則非唯不足以爲善, 而反有以賊乎其善; 惡惡而不誠, 則非唯不足以去<sub>上聲</sub>惡, 而適所以長<sub>上聲</sub>乎其惡. 是則其爲害也徒有甚焉, 而何益之有哉? 聖人於此蓋有憂之. 故爲<大學>之教而必首之以格物致知之目, 以開明其心術, 使既有以識夫善惡之所在、與其可好可惡之必然矣. 至此而復<sub>扶又反</sub>進之以必誠其意之說焉, 則又欲其謹之於幽獨隱微之奥, 以禁止其苟且自欺之萌. 而凡其心之所發, 如曰好善則必由中及外無一毫之不好也; 如曰惡惡則必由中及外無一毫之不惡也. 夫好善而中無不好, 則是其好之也, 如好好色之眞, 欲以快乎己之目, 初非爲<sub>去聲</sub>人而好之也; 惡惡而中無不惡, 則是其惡之也, 如惡惡臭之眞, 欲以足乎已之鼻, 初非爲人而惡之也.<sub>新安陳氏曰: "慊字, 兼快、足之義. 此以快與足分屬好惡言之, 蓋對舉而互相備也."</sub> 所發之實既如此矣, 而須臾之頃、纎芥之微, 念念相承, 又無敢有少間斷焉, 則庶乎内外昭融, 表裏澄徹, 而心無不正, 身無不脩矣.<sub>意誠則心正, 身脩之本, 皆已在此. 故於此便究言之.</sub>"<br/> | ||
+ | "무릇 善을 좋아하는데 진실하지 않다면, 선을 실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선을 해치게 되고, 惡을 싫어하는데 진실하지 않다면, 악을 제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악을 기르는 데 알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폐해가 심하기만 할 뿐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성인께서 아마도 이를 우려하셨기 때문에, <大學>의 가르침을 펴실 때 반드시 格物致知 조목을 첫 머리에 두어 사람들의 마음(心術)을 열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저 선악의 소재와 필연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해야 하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다시 '반드시 그 意을 진실하게 해야한다'는 설을 내세우셨으니, 또한 그들이 은미하고 혼자인 곳에서부터 삼가서 구차하게 자신을 속이는 싹을 막고자 하신 것이다. 무릇 心이 발현한 바를 만약 '善을 좋아한다'고 한다면, 반드시 마음속에서부터 밖으로 나옴에 한 터럭만큼의 좋아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고, 만약 '惡을 싫어한다'고 한다면 반드시 마음속에서부터 밖으로 나옴에 한 터럭만큼의 싫어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선을 좋아하는데 마음속에 선을 좋아하지 않음이 없다면, 이는 그가 선을 좋아하는 것이 마치 '미모를 좋아하는 진실함이 자기 눈에 만족스럽고자 하는 것이지 애당초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님'과 같을 것이고, 惡을 싫어하는데 마음속으로 악을 싫어하지 않음이 없다면, 이는 그가 악을 싫어하는 것이 마치 '악취를 싫어하는 진실함이 자기 코에 만족스럽고자 하는 것이지 애당초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님'과 같을 것이다.<sub>신안진씨가 말했다: "'慊'이라는 글자는 '快'와 '足'의 뜻을 겸한다. 여기서 '快'자와 '足'자를 好와 惡에 분속하여 말한 것은 대개 상대해서 들어서 서로 갖추려는 것이다."</sub> 발현한 바의 실질이 이미 이와 같은 데다가, 아주 잠깐 사이나 아주 실같이 작은 것이라도 생각마다 이어지고 또 감히 잠시라도 끊어짐이 없다면, 거의 안과 밖·겉과 속이 다 훤히 밝혀져 心이 바르지 않음이 없고 자신도 수양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sub>意誠은 心正과 身脩의 근본으로, 이 두 가지 모두는 이미 이것(意誠)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모두 말했다.</su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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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若彼小人, 幽隱之間實爲不善, 而猶欲外託於善以自蓋, 則亦不可謂其全然不知善惡之所在. 但以不知其眞可好惡, 而又不能謹之於獨以禁止其苟且自欺之萌. 是以淪䧟至於如此, 而不自知耳. 此章之說其詳如此, 是固宜爲自脩之先務矣. 然非有以開其知識之眞, 則不能有以致其好惡之實. 故必曰: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又曰: '知至而后意誠'. 然猶不敢恃其知之已至而聽其所自爲也. 故又曰: '必誠其意, 必謹其獨而毋自欺焉', 則<大學>工夫次第相承首尾爲一, 而不假他術以雜乎其間, 亦可見矣. 後此皆然. 今不復<sub>扶又反</sub>重<sub>平聲</sub>出也.<sub>"後此皆然", 如'意誠而後心正'. 意既誠, 又不可不正其心. 心正而后身修倣此.</sub>"<br/> | ||
+ | "저 소인은 으슥한 곳에서 진실로 不善을 행하고도 오히려 겉으로는 善에 가탁하여 스스로를 가리려고 하니, 그가 전혀 그 善惡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실로 좋아하거나 싫어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또 혼자 있을 때 삼가서 구차하게 자기를 속이려는 싹을 막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에 빠져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이 장 설명이 이처럼 상세하니, 진실로 마땅히 자신을 수양하기 위한 첫 단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지식에 개명하지 못하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실질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意을 진실하게 하고자 하는 자는 그 知를 먼저 지극히 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 '知가 지극해진 이후에 意가 진실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감히 자신의 知가 이미 지극해졌다고 자부하고서 스스로 하는 바를 따를 순 없다. 그러므로 또 '반드시 그 意을 진실하게 하고 반드시 그 혼자 있을 때 삼가서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말한 것이니, <大學> 공부의 순서가 서로 이어지고 수미일관해서 감히 다른 학설을 그 사이에 뒤섞을 필요가 없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이후의 것들이 모두 그러하니, 이제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sub>"後此皆然"은 '意이 진실해진 이후에 心이 바르게 된다'와 같다. 意가 진실해지면 그 心도 바르지 않을 수 없다. 心이 바르게 된 이후에 자신이 수양되는 것도 이와 같다.</su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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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然則慊之爲義, 或以爲少, 又以爲恨, 與此不同, 何也?" 曰: "慊之爲字, 有作嗛<sub>口簟反</sub>者, 而<字書>以爲口銜物也. 然則慊亦但爲心有所銜之義, 而其爲快爲足、爲恨爲少, 則以所銜之異而别<sub>筆列反下同</sub>之耳. <孟子>所爲'慊於心', <樂毅>所謂'慊於志', 則以銜其快與足之意而言者也<sub><史記> <列傳> 樂毅遺燕惠王書曰: '自五伯<sub>音霸</sub>以來, 功未有及於先王者也. 先王以爲慊於志.'<sub>先王, 燕昭王也.</sub></sub> <孟子>所謂'吾何慊'、<漢書>所謂'嗛栗姬'<sub><史記> <西漢外戚傳> 景帝立齊栗姬男爲太子, 王夫人男爲膠東王. 長公主嫖有女, 欲與太子為妃, 栗姬謝不許. 長公主欲與王夫人, 夫人許之. 㑹薄皇后廢, 長公主日譛栗姬短景帝. 甞屬諸姬曰: '吾百嵗<ref><한어대사전> 3. 死的諱稱.</ref>後, 善視之.' 栗姬怒, 不肯應, 言不遜. 景帝心銜之而未發也. 長公主日譽王夫人男之美, 帝亦自賢之. 王夫人知嗛栗姬, 又隂使人趣大臣立栗姬為皇后. 大臣奏事文曰: '子以母貴, 母以子貴. 今太子母宜號為皇后.' 帝怒曰: '是乃所當言耶?' 遂案誅<ref><한어대사전> 査明罪行而處以死刑.</ref>大臣而廢太子為臨江王, 栗姬以憂死. 卒立王夫人為皇后, 男為太子.</sub>, 則以銜其恨與少之意而言者也.<sub>朱子曰: "字有同一義而二用者. 如銜字, 或為銜恨, 或為銜思, 亦同此義.</sub> 讀者各隨所指而觀之, 則既並行而不悖矣. 字書又以其訓快與足者. 讀與惬同, 則義愈明而音又異, 尤不患於無别也."<br/> | ||
+ | ○물었다: "그렇다면 '慊'의 뜻을 어떨 때는 '少'라고 하고 또 어떨 때는 '恨'이라고 하는데, 이것과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답했다: "慊이라는 글자는 '嗛'이라고 쓴 경우가 있는데, <字書>에서는 '입이 물건을 머금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慊 또한 단지 마음이 머금고 있는 것이 있다는 뜻이니, 慊이 '快'·'足'이나 '恨'·'少'의 뜻이 되는 것은 머금고 있는 것의 차이 때문에 구별한 것일 뿐이다. <맹자>에서 '마음에 흡족하다'<ref><맹자> <공손추상> 2. 「敢問何謂浩然之氣?」曰:「難言也。其為氣也,至大至剛,以直養而無害,則塞于天地之閒。其為氣也,配義與道;無是,餒也。是集義所生者,非義襲而取之也。行有不慊於心,則餒矣。</ref>고 말한 것과 <사기> <악의열전>에서 말한 '뜻을 이룬 것에 만족함'이란 것이 '快'와 '足'의 뜻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고,<sub><史記> <列傳> 악의가 연나라 혜왕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오패 이후로 선왕만큼 공업을 이룬 분은 있지 않았습니다. 선왕께서는 뜻을 이룬 것에 만족하셨습니다.'<sub>선왕은 연나라 소왕이다.</sub></sub> <맹자>에서 '내 어찌 부족할 것이 있겠는가?'<ref><맹자> <공손추하> 2. 曰:「豈謂是與?曾子曰:『晉楚之富,不可及也。彼以其富,我以吾仁;彼以其爵,我以吾義,吾何慊乎哉?』</ref>라고 한 것과 <한서>에서 '율희를 원망한다'<sub><사기> <외척세가> 경제는 제나라 출신 율희의 아들을 태자로, 왕부인의 아들을 교동왕으로 세웠다. 장공주 표에게 딸이 있었는데, 그를 태자에게 주어 태자비로 삼게 하고자 했는데, 율희가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장공주는 왕부인의 [아들(교동왕)에게 자신의 딸을] 주려고 했는데, 왕부인은 허락했다. 마침 박황후가 폐해지자, 장공주는 날마다 율희의 단점을 경제에게 참소하였다. [경제는] 일찍이 여러 처첩들을 [율희에게] 부탁했다: '내가 죽은 뒤에 잘 돌봐주시오.' 율희가 노하여 응낙하려 하지 않아 말이 불손했다. 경제는 마음속으로 [화를] 품었을 뿐 드러내지는 않았다. 장공주가 날마다 왕부인 아들(교동왕)의 훌륭함을 칭찬하니, 경제 역시 절로 그를 대견하게 생각했다. 왕부인은 [경제가 여전히] 율희를 원망함을 알고, 다시 사람을 대신에게 보내 율희를 황후로 세우도록 은밀히 사주했다. 대신이 상주문에서 아뢰었다: '자식은 어머니를 때문에 귀해지고, 어머니는 자식 때문에 귀해진다고 합니다. 지금 태자의 어머니를 마땅히 황후로 불러야 합니다.' 경제가 노하여 말했다: '이게 마땅히 해야 할 말인가?' 마침내 대신의 죄를 따져 주살하고 태자를 폐해 임강왕으로 삼으니, 율희는 근심하다가 죽었다. 마침내 왕부인을 황후로, 그 아들(교동왕)을 태자로 삼았다.<ref> <사기> <외척세가> 景帝長男榮,其母栗姬。栗姬,齊人也。立榮為太子。長公主嫖有女,欲予為妃。栗姬妒,而景帝諸美人皆因長公主見景帝,得貴幸,皆過栗姬,栗姬日怨怒,謝長公主,不許。長公主欲予王夫人,王夫人許之。長公主怒,而日讒栗姬短於景帝曰:「栗姬與諸貴夫人幸姬會,常使侍者祝唾其背,挾邪媚道。」景帝以故望之。景帝嘗體不安,心不樂,屬諸子為王者於栗姬,曰:「百歲後,善視之。」栗姬怒,不肯應,言不遜。景帝恚,心嗛之而未發也。長公主日譽王夫人男之美,景帝亦賢之,又有曩者所夢日符,計未有所定。王夫人知帝望栗姬,因怒未解,陰使人趣大臣立栗姬為皇后。大行奏事畢,曰:「『子以母貴,母以子貴』,今太子母無號,宜立為皇后。」景帝怒曰:「是而所宜言邪!」遂案誅大行,而廢太子為臨江王。栗姬愈恚恨,不得見,以憂死。卒立王夫人為皇后,其男為太子,封皇后兄信為蓋侯。</ref></sub>라고 말한 것은 '恨'과 '少'의 뜻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sub>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글자 중에 뜻은 하나인데 두 가지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銜'자의 경우, 어떨 때는 '원한을 품다(銜恨)'로 쓰이고 어떨 때는 '그리움을 품다(銜思)'로 쓰이지만 역시 똑같이 '품다'라는 뜻이다. </sub> 글을 읽는 사람이 각각 가리키는 바에 따라 살핀다면, 두 가지 뜻이 함께 쓰이더라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字書에서는 또 '慊 가운데 快와 足의 뜻을 지닌 것은 협(惬)과 같이 읽는다'고 하니, 뜻은 더욱 분명하고 음 또한 달라 구분되지 않는 것을 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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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傳七章=== | ||
+ | 所謂脩身在正其心者,身有所忿懥,則不得其正;有所恐懼,則不得其正;有所好樂,則不得其正;有所憂患,則不得其正。<sub>忿, 弗粉反; 懥, 勑值反. 好樂, 並去聲.</sub><br/> | ||
+ | 이른바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그 心을 바르게 하는 데 달려있다'는 것은, 心에 분노가 있으면 心이 바르게 되지 못하고, 두려움이 있으면 心이 바르게 되지 못하며,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心이 바르게 되지 못하고,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心이 바르게 되지 못한다. | ||
+ | :程子曰:「身有之身當作心。」○ 忿懥,怒也。蓋是四者,皆心之用,而人所不能無者。然一有之而不能察,則欲動情勝,而其用之所行,或不能不失其正矣。 | ||
+ |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身有'의 '身'은 마땅히 '心'이 되어야 한다." ○ 忿懥는 분노이다. 이 네 가지 감정은 모두 心의 用으로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감정이 생겼는데 살피지 못한다면, 욕망이 끓고 감정이 압도해 감정이 발현됨에 혹 올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
+ | ::問: "'有所忿懥、恐懼、好樂、憂患, 心不得其正', 是要無此數者, 心乃正乎?" 程子曰: "非是謂無, 只是不以此動其心. 學者未到不動處, 須是執持其志." | ||
+ | ::물었다: "'분노·두려움·좋아함·근심이 있으면 心이 바르게 될 수 없다'는 것은 이 여러 가지가 없어야 心이 바르게 된다는 겁니까?" 정자께서 대답하셨다: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것들로 자기 心을 동요시켜선 안 된다는 것이다. 배우는 자가 아직 不動<ref><맹자> <공손추상> 2. 公孫丑問曰:「夫子加齊之卿相,得行道焉,雖由此霸王不異矣。如此,則動心否乎?」孟子曰:「否。我四十不動心。」</ref>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자신의 志를 잡아 지켜야 한다.<ref><맹자> <공손추상> 2. 夫志,氣之帥也;氣,體之充也。夫志至焉,氣次焉。故曰:『持其志,無暴其氣。』</ref>"<ref><이정유서> 19-05 問:「『有所忿懥·恐懼·憂患, 心不得其正.』是要無此數者, 心乃正乎?」 曰:「非是謂無, 只是不以此動一本作累.其心. 學者未到不動處, 須是執持其志.」 </ref> | ||
+ | ::○朱子曰: "<大學>格物誠意, 都已鍊成; 到得正心脩身章, 都易了. 意有善惡之殊, 意或不誠, 則易於為惡; 心有偏正之異, 心有不正, 則為物欲所動, 未免有偏處, 却未必為惡."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대학>의 格物·誠意를 모두 단련하고 나서 正心·脩身에 이르면 모두 쉬워진다. 意에는 善惡의 구분이 있어서, 意가 혹 진실하지 않으면 惡하게 되기 쉽다. 心에는 偏正의 차이가 있어서, 心에 바르지 않은 것이 있으면 물욕에 동요되어 치우침을 면할 수 없지만 반드시 악하게 되는 건 아니다."<ref><주자어류> 권16. 大學於「格物」、「誠意」章,都是鍊成了,到得正心、修身處,都易了。</ref> | ||
+ | ::○四者只要從無處發出, 不可先有在心下. 須看'有所'二字. 如有所忿怒, 因人有罪而撻之, 纔了, 其心便平, 是不有; 若此心常常不平, 便是有. | ||
+ | ::[분노·두려움·좋아함·근심] 네 가지 감정은 빈 상태에서 나와야지 미리 마음에 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有所' 두 글자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분노하는 바가 있는 경우, 어떤 사람에게 죄가 있어 매를 칠 때 다 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 '미리 마음에 두지 않은 것'이다. 만약 이 마음이 늘 평안하지 않다면, 이는 '미리 마음에 둔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6. 敬之問:「『正心』章云:『人之心要當不容一物。』」曰:「這說便是難。才說不容一物,卻又似一向全無相似。只是這許多好樂、恐懼、忿懥、憂患,只要從無處發出,不可先有在心下。; 같은 책, 같은 곳. 大學七章,看「有所」二字。「有所憂患」,憂患是合當有,若因此一事而常留在胸中,便是有。「有所忿懥」,因人之有罪而撻之,才撻了,其心便平,是不有;若此心常常不平,便是有。恐懼、好樂亦然。</ref> | ||
+ | ::○所謂'有所', 是被他為主於内, 心反為他動也. | ||
+ | ::이른바 '有所'란 어떤 것이 마음속에서 위주가 되어 心이 거꾸로 그것에 의해 동요하는 것이다. | ||
+ | ::○心纔繫於物, 便為所動. 所以繫於物者有三事: 未來先有箇期待之心; 或事已應過, 又留在心下, 不能忘; 或正應事時, 意有偏重, 都是為物所繫縳. 便是有這箇物事, 到别事來到面前, 應之便差了, 如何心得其正? 聖人之心, 瑩然虚眀, 看事物來, 若大若小, 四方八面, 莫不隨物隨應, 此心元不曾有這物事. | ||
+ | ::心이 외물에 얽매이자마자 동요하게 된다. 외물에 얽매이는 경우가 세 가지 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해 미리 기대하는 마음이 있는 경우, 혹 일이 이미 지나갔는데도 미련을 갖고 잊지 못하는 경우, 혹 일에 대응할 때 意가 치우치는 경우, 모두 외물에 얽매이는 것이다. 이 일이 있는데 다른 일이 눈앞에 닥치면 대응이 잘못될 것이니, 어떻게 心이 바르게 될 수 있겠는가? 성인의 心은 瑩然하게 虚眀해서, 일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 그 일이 크든 작든 사방팔면 어디서 오든 간에 일에 따라 제대로 대응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心에는 원래 이러한 일들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ref><주자어류> 권16. 才係於物,心便為其所動。其所以係於物者有三:或是事未來,而自家先有這箇期待底心;或事已應去了,又卻長留在胸中不能忘;或正應事之時,意有偏重,便只見那邊重,這都是為物所係縛。既為物所係縛,便是有這箇物事,到別事來到面前,應之便差了,這如何會得其正!聖人之心,瑩然虛明,無纖毫形跡。一看事物之來,若小若大,四方八面,莫不隨物隨應,此心元不曾有這箇物事。</ref> | ||
+ | ::○如顔子'不遷怒', 可怒在物, 顔子未嘗為血氣所動而移於人也, 則豈怒而心有不正哉? | ||
+ | ::안자의 '분노를 옮기지 않음'(不遷怒)<ref><논어> <옹야> 2. 哀公問:「弟子孰為好學?」孔子對曰:「有顏回者好學,不遷怒,不貳過。不幸短命死矣!今也則亡,未聞好學者也。」</ref>이란, 노여워할 만한 것이 외물에 있어서 안자께서는 혈기에 동요돼 남에게 전가하지 않으셨던 것이니, 어찌 분노했다고 해서 心에 바르지 않은 것이 있으셨겠는가? | ||
+ | ::○今人多是才怒, 雖有可喜事, 亦所不喜; 才喜, 雖有當怒之事來, 亦不復怒, 便是蹉過事理了. 盖這物事纔私, 便不去, 只管在胷中推盪, 終不消釋. 使此心如太虚, 則應接萬務, 各止其所, 而我無所與, 可也. 看此一章, 只是要人不可先有此心耳. | ||
+ |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분노하기만 하면 기뻐할 만한 일이 있더라도 기뻐하지 않고, 기뻐하기만 하면 분노할 만한 일이 닥치더라도 더이상 분노하지 않으니, 이는 사리에 어긋난 것이다. ?? 이 心이 태허 같다면, 온갖 일에 대응할 때 각각 제자리에 있게 되어 내가 간여하는 바가 없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이 장을 보니 단지 사람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미리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6. 今人多是才忿懥,雖有可喜之事亦所不喜;才喜,雖有當怒之事亦不復怒,便是蹉過事理了,便『視而不見,聽而不聞,食而不知其味』了。蓋這物事才私,便不去,只管在胸中推盪,終不消釋。設使此心如太虛然,則應接萬務,各止其所,而我無所與,則便視而見,聽而聞,食而真知其味矣。看此一段,只是要人不可先有此心耳。</ref> | ||
+ | ::○問: "忿、好自己事, 可勉強不為; 憂患恐懼自外來, 不由自家." 曰: "便是自外來, 須要我有道理處之. 事來亦合當憂懼. 但只管累其本心, 亦濟甚事? 孔子畏於匡, 文王囚羑里, 死生在前, 聖人元不動心, 處之恬然." | ||
+ | ::물었다: "분노·좋아함은 자신의 감정이니 노력하면 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근심·두려움은 외부에서 오지 자기에게서 말미암지 않습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분노·두려움·좋아함·근심은 외부에서 오니, 반드시 자신이 도리대로 대처해야 한다. ?? 공자께서는 匡에서 경계하시고, 문왕께서는 羑里에 갇혀계셔서 생사가 목전에 있었는데, 성인은 원래 不動心하기 때문에 편안하게 대처하셨다."<ref><주자어류> 권120. 又問:「忿懥好樂,乃在我之事,可以勉強不做。如憂患恐懼,乃是外面來底,不由自家。」曰:「都不得。便是外面來底,須是自家有箇道理措置得下。恐懼憂患,只是徒然。事來亦合當思慮不妨,但只管累其本心,也不濟得事。孔子畏匡人,文王囚羑里,死生在前了,聖人元不動心,處之恬然。</ref> | ||
+ | |||
+ | 心不在焉,視而不見,聽而不聞,食而不知其味。<br/> | ||
+ | 心이 보존되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 ||
+ | :心有不存,則無以檢其身. 是以君子必察乎此而敬以直之,然後此心常存而身無不脩也。 | ||
+ | :心이 보존되지 못하면 자신의 몸을 검속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心을 살펴 敬하여 곧게 하니, 그러한 뒤에야 이 心이 항상 보존되어 자신이 수양되지 않음이 없다. | ||
+ | ::朱子曰: "心若不存, 一身便無主宰."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心이 보존되지 못하면 일신에 주재가 없게 된다." | ||
+ | ::○敬是常要此心在這裏, 直是直上直下<ref><한어대사전> 1. 上下一貫; 2. 從上到下, 從頭到脚.</ref>無纎毫委曲. | ||
+ | ::敬은 이 心을 이 안에 늘 보존하려는 것이니, 단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털끝만큼의 구부러짐도 없는 것이다. | ||
+ | ::○問: "'視而不見, 聽而不聞', 只是說知覺之心, 却不及義理之心." 曰: "才知覺, 義理便在此; 才昏, 便不見了." | ||
+ | ::물었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지각하는 心을 말할 뿐 義理의 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지각하기만 하면 義理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心이 어두워지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다."<ref><주자어류> 권16. 黃丈云:「舊嘗問:『「視而不見,聽而不聞」,只是說知覺之心,卻不及義理之心。』先生曰:『才知覺,義理便在此;才昏,便不見了。』」</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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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此謂脩身在正其心。<br/> | ||
+ | 이것을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그 心을 바르게 하는 데 달려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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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右傳之七章。釋正心脩身。 | ||
+ | ::이상은 전 7장이니, 正心·修身을 풀이했다. | ||
+ | :::此亦承上章以起下章。蓋意誠則真無惡而實有善矣,所以能存是心以檢其身。<sub>朱子曰: "意誠然後心得其正, 自有先後." ○新安陳氏曰: "此言'意誠而後心可得而正', 盖其序之不可亂者."</sub>然或但知誠意,而不能密察此心之存否,則又無以直內而脩身也。<sub>○或謂: "意誠則心正." 朱子曰: "不然. 這㡬句連了又斷, 斷了又連. 雖若不相連綴, 中間又自相貫. 譬如一竿<ref><한어대사전> 6. 量詞. 猶棵、株. 用於竹的計量.</ref>竹, 雖只是一竿, 然其間又有許多節. 意未誠, 則全體是私意, 更理㑹甚正心? 然意雖誠了, 又不可不正其心."<ref><주자어류> 권16. 或問「正心」、「誠意」章。先生令他說。曰:「意誠則心正。」曰:「不然。這幾句連了又斷,斷了又連,雖若不相粘綴,中間又自相貫。譬如一竿竹,雖只是一竿,然其間又自有許多節。意未誠,則全體是私意,更理會甚正心!然意雖誠了,又不可不正其心。」</ref></sub>自此以下,並以舊文為正。 | ||
+ | :::이 장 역시 앞 장을 이어서 뒷 장을 일으킨 것이다. 대개 意가 진실하면 진실로 악은 없고 선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心을 보존하여 그 몸을 검속할 수 있는 것이다.<sub>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意가 진실해진 연후에 心이 바르게 될 수 있으니, 본래 선후의 차례가 있다." ○신안 진씨가 말했다: "여기서 '意가 진실해진 연후에 心이 바르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차례를 어지럽힐 수 없다는 것이다."</sub> 그러나 혹 단지 誠意만 알고 이 心이 보존되는지 아닌지를 정밀하게 살피지 못한다면, 또한 내면을 곧게 하여 자신을 수양할 수 없다.<sub>혹자가 意가 진실해지면 心이 바르게 된다'고 말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이 여러 구절은 이어지지만 또 끊어지고, 끊어졌지만 또 다시 이어진다. 비록 서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중간에 또 서로 연관된다. 대나무에 비유하자면, 비록 대나무 한 그루지만 그 안에 또 수많은 마디가 있다. 意가 진실하지 못하면 전체가 사사로운 생각일 것이니, 달리 무슨 正心을 이해하겠는가? 그러나 意가 진실하더라도 心을 바르게 하지 않아선 안 된다."</sub> 이 이하는 모두 옛 판본의 글을 바르다고 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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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문』 전7장==== | ||
+ | 或問: "人之有心, 本以應物. 而此章之傳, 以爲有所喜怒、憂懼, 便爲不得其正. 然則其爲心也, 必如槁木之不復<sub>扶又反下同</sub>生, 死灰之不復然, 乃爲得其正邪?"<br/> | ||
+ | 曰: "人之一心, 湛<sub>丈減反</sub>然虛明, 如鑑之空, 如衡之平, 以爲一身之主者, 固其眞體之本然.<sub>眞體乃其本體之不雜於人偽者也</sub> 而喜怒、憂懼, 隨感而應, 妍蚩<sub>充之反</sub>俯仰因物賦形者, 亦其用之所不能無者也. 故其未感之時, 至虛至静, 所謂鑑空衡平之體, 雖鬼神有不得窺其際者, 固無得失之可議. 及其感物之際, 而所應者又皆中<sub>去聲</sub>節, 則其鑑空衡平之用, 流行不滯, 正大光明, 是乃所以爲天下之逹道, 亦何不得其正之有哉? 唯其事物之來, 有所不察, 應之既或不能無失, 且又不能不與俱往, 則其喜怒憂懼必有動乎中者, 而此心之用始有不得其正者耳."<br/> | ||
+ | 혹자가 물었다. "사람에게 있는 마음은 본래 이것으로 외물에게 응하는 것인데, 이 장의 설명에서는 喜怒憂懼한 것이 있으면 곧 바르지 않음이 있기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마음 됨이라는 것은 반드시 죽어버린 나무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꺼져버린 잿더미가 다시 불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되고 나서야 그 바름을 얻게 되는 것입니까?"<br/> | ||
+ | 답했다. "사람의 한 마음은 맑고 허령불매함이 마치 거울의 텅빔과 저울의 평평함 같아서 한 몸의 주재자가 되는 것이니 진실로 眞體의 본래 그러함이다.<sub>眞體란 바로 그 본체가 인위적인 것에 섞이지 않는 것이다.</sub> 喜怒憂懼는 (외물에게) 감한 것을 따라서 응한 것이고, 아름다움과 추함, (저울의) 오르내림은 외물에 따라서 형체가 부여된 것이니 또한 마음의 用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직 감하기 전에는 매우 허명하고 고요하니 이른바 거울의 텅빔, 저울의 평평함 이라는 體다. 비록 귀신이라고 그 때(미발)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어서 진실로 의논할 만한 잘못을 얻지 않는 것이고, 외물에 감할 때에 미쳐서 그 응한 것이 또한 모두 절도에 맞으면 그 鑑空衡平이라는 用이 흘러다님에 막힘이 없고 바르고 크며 빛나니 이것이 바로 천하의 공통된 도가 되는 이유이다. 또 어찌 그 바름을 얻지 못함이 있겠는가! 오직 그 사물이 올 때에 살피지 못하 바가 있어서 응하는 것에 잘못이 없을 수 없고, 또 (외물에) 휩쓸려가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그 喜怒憂懼가 반드시 미발 상태에서 동요된 바가 있어서 이 마음의 用이 비로소 그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 ||
+ | :朱子曰: "人心如一箇鏡. 先未有一箇影象, 有物事來, 方始照見妍醜. 若先有箇影象在裏面, 如何照得人心本是湛然虚明? 事物之來, 隨感而應, 自然照得髙下輕重. 事過便當依前恁地虚方得. 若事未來, 先有一箇忿懥、好樂、恐懼、憂患之心在這裏; 及忿懥、好樂、恐懼、憂患之事到來, 又以這心相與滚合, 便失其正. 事了又只若留在這裏, 如何得正?" | ||
+ | :주자가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어떤 거울 같아서 먼저 어떤 형상이 있지 않다가 외물이 오는 경우에야 비로소 (외물의) 아름답고 추함을 비추게 된다. 만약 먼저 어떤 형상이 그 안에 있다면 어떻게 (외물을) 비출 수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본래 맑고 허명해서 사물이 올 때에 감한 것을 따라 응해서 자연스럽게 높이와 무게를 비출 수 있는 것이다. 외물이 지나가면 이전의 이와같은 허명함을 따라야 비로소 옳다. 만약 외물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먼저 어떤 忿懥、好樂、恐懼、憂患의 마음이 그 안에 있다가 忿懥、好樂、恐懼、憂患한 일이 오는 경우에 미쳐서 이 마음으로 서로 합하는 경우에는 그 바름을 잃어버리고 일이 끝나고도 그 안에 머무르는 바가 있게 되면 어떻게 바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 | ||
+ | :○北溪陳氏曰: "感自外入, 以彼物之至吾前而言. 應由中出, 以此心之接彼物而言." | ||
+ | :북계진씨가 말했다. "感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니 저 외물이 와서 내 앞에 있는 것으로 말한 것이고, 應은 마음으로 부터 나온 것이니 이 마음이 외물에 접한 것으로 말한 것이다." | ||
+ | :○節齋蔡氏曰: "鑑之空, 方能照人. 若先有人形滯其中, 則人之繼至者不復可得而照矣. 衡之平, 方能稱物. 若先有物重滯於上, 則物之繼至者不復可得而稱矣. 以鑑空衡平喻心體之虚明, 最為精切." | ||
+ | :절제채씨가 말했다. "거울의 텅빔이어야 다른 사람을 비출 수 있다. 만약 먼저 그 마음에 모습이 있다면 다른 모습이 이어지는 경우에 다시 비출 수 없게 된다. 저울의 평평함 이라야 외물을 잴 수 있다. 만약 먼저 그 위에 무게가 달려있으면 다른 외물이 이어지는 경우에 다시 잴 수 없다. 鑑空衡平으로 心體의 허명함을 비유한 것은 가장 정밀하고 적절하다." | ||
+ | :○陳氏曰: "此章只是四者感物而應不中其節, 則此心便爲四者所動而不得其正矣. 若世俗心盧昏昏, 莫克主宰, 體用動静無復凖則, 目隨物視, 耳隨物聽, 行信足歩, 言信口說矣." | ||
+ | :진씨가 말했다. "이 장에서 다만 (忿懥、好樂、恐懼、憂患의) 네 가지가 외물에 감하여 응한 것이 그 절도에 맞지 못하면 이 마음은 곧 이 네 가지에 의해 동요되어서 그 바름을 얻지 못하게 된다. 마치 세상 사람들의 걱정이 혼란스러워서 (그들을) 주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마음의) 體用과 動静이 기준을 회복하지 못하면 눈은 외물을 따라 보고, 귀는 외물을 따라 듣고, 걷는 것은 발 가는대로 가고, 말은 말하는 대로 말한다." | ||
+ | :○西山眞氏曰: "鑑空衡平之體用, 切須玩味. 蓋未應物時, 此心只要清明虛静, 不可先有一物, 如鑑未照物, 只是一箇空; 如衡未稱物, 只是一箇平. 此乃心之本體; 即喜怒哀樂未發之中; 所謂鑑空衡平之體也. 及事物之來, 隨感而應, 因其可喜而喜, 可怒而怒, 在我本未甞先有此心, 但隨物所感而應之耳, 故其發無不中節, 此所謂鑑空衡平之用也." | ||
+ | :서산진씨가 말했다. "鑑空衡平의 體用은 절실히 완미해야한다. 대개 외물에 아직 응하지 않았을 때에 이 마음은 清明虛静하기 마련이니 어떤 외물이 먼저 있을 수 없다. 마치 거울이 아직 외물을 비추지 않으면 다만 텅 비어있고, 저울이 아직 외물을 재지 않았으면 다만 평평한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본체이니 '喜怒哀樂未發之中'의 경우가 이른바 鑑空衡平의 體라는 것이요, 사물이 올 때에 감응한 것을 따라 응하는 것은 기뻐할 만한 것을 따라 기뻐하고, 화낼 만한 것에 화내니, 나에게 있는 것은 본래 먼저 이러한 마음이 아닌 적이 없고 다만 외물에 감응한 바를 따라서 응할 뿐이다. 그러므로 '其發無不中節'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鑑空衡平의 用이라는 것이다." | ||
+ | :○徽菴程氏曰: "未發之前, 氣未用事, 心之本體, 不待正而後正; 發而中節, 則心之用無不正, 亦不待正之而後正. 夫有不正而後正, 心體静而未發, 何待於正乎? 惟此心之用, 發不中節, 始有不正, 而待於正耳. <章句>曰: '用之所行, 或失其正'; <或問>曰: '此心之用, 不得其正', 未甞言體之不正也. 惟經之<或問>有曰: '不得其本然之正', 曰: '心之本體, 物不能動而無不正', 或者遂執之以為正心乃静時工夫, 如<中庸>未發之中, <太極圖>之主静, 而經之所謂定静安也. 傳之心不在焉, 乃心不在腔子裏時也, 殊不知聖人教人多於動處用功. 格至誠正脩皆教人用功於動者, 定静安, 亦非但言心之静也. 若静時工夫, 則戒謹恐懼而已, 存之養之守之而已, 不待乎正其所不正也. 聖賢之動固主乎静. 元亨誠之通, 固主乎利貞誠之復. 而誠正脩云者, 正誠通之事. 既誠正而脩矣, 始有誠復之明. 若當誠意之後, 厭動而求静, 棄事而㝠心, 收視反聽, 而曰: '吾將以正心焉', 此乃異端之事, 非吾儒事也. 况'心不在焉'亦曰: 心不在視, 則視而不見; 不在聽, 則聽而不聞, 豈静在腔中之謂哉? <或問>所謂本然、本體, 亦指此心之義理而言; 孟子言本心亦指仁義之心而言, 豈一於静之謂乎?" | ||
+ | :휘암정씨가 말했다. "아직 발하기 전에 기가 용사하지 않았으면 마음의 본체는 바르기를 기다린 이후에 바르게 되는 것이 아니며; 발하여 절도에 맞게 되었다면 마음의 용은 바르지 않음이 없어서 또한 마음을 바르게 하기를 기다린 이후에 바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무릇 바르지 않은 것이 있은 이후에 바르게 하는 것이니 心體가 고요하고 아직 말하지 않았다면 무슨 바르게 하기를 기다리겠는가? 오직 이 마음의 用이 발하여 중절하지 않아야 비로소 바르지 않음이 있어서 바르게 하기를 기라릴 뿐이다. <대학장구>에서 (주자의 주석에서) 말한 '마음이 행하는 바가 혹 그 바름을 잃는다'<ref> <대학장구> 8장. 所謂脩身在正其心者,身有所忿懥,則不得其正;有所恐懼,則不得其正;有所好樂,則不得其正;有所憂患,則不得其正。<주> 程子曰:「身有之身當作心。」忿,弗粉反。懥,敕值反。好、樂,並去聲。忿懥,怒也。蓋是四者,皆心之用,而人所不能無者。然一有之而不能察,則欲動情勝,而其用之所行,或不能不失其正矣。</ref> 고 말한 것과 <혹문>에서 '이 마음의 용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일찍이 그 마음의 體의 바르지 않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오직 경1장에 관한 <혹문>에서 '그 본연의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과 '마음의 본체는 외물이 동요시킬 수 없으니 바르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 것을 혹자가 끝내 그것을 가져가다 正心은 바로 고요한때의 공부이니, <중용>의 '未發之中'과 <태극도>의 主静공부와 경전에서 말한 '定静安'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대학>의) 傳의 '心不在焉'는 바로 마음이 텅 비어있는 때에 있다는 것이 아니니 성인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움직이는 곳에서 힘쓰게 하신 바가 많게 했음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격물, 치지, 성의, 정신, 수신은 모두 사람들도 하여금 움직이는 곳에서 힘쓰게 한 것들이니, '定静安'또한 다만 마음의 고요한 때만 말한 것이 아니다. 고요한 때의 공부는 계신공구일 뿐이요 '存之', '養之', '守之'일 뿐이니, 그 바르지 않은 바를 바르게 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현의 動은 진실로 靜을 주로하니, 元亨의 誠의 통함이 진실로 利貞의 誠의 돌아옴(復)을 주로하는 것이다. <ref> <통서해>, 誠上第一. 元、亨,誠之通;利、貞,誠之復。</ref> 성의, 정심, 수신을 말한 것은 바로 (앞 구절의) '誠'과 '通'의 일이요, 성의 정심하고 나서 수신하여야 비로소 '誠'과 '復'의 밝음이 있게 된다. 만약 성의한 이후에 움직이기를 싫어하면서 精을 구하고, 일을 버리고 마음을 밝히려 하여 보는 것을 거두고 듣는 것을 돌이켜 말하기를 '나는 장차 이러한 행동들로 마음을 바르게 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이단의 일이요 우리 유가의 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心不在焉'은 또한 마음이 보는 것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마음이 듣는 것에 있지 않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 다는 말이니, 어찌 텅 빈 곳 속에 고요하게 있음을 말한 것이겠는가! <혹문>에서 말한 (경1장의) '本然'과 '本體' 또한 이 마음의 의리를 가리켜 말한 것이요, 맹자가 말한 '本心' 또한 인의의 마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어찌 静에 한결같음을 말한 것이겠는가?" | ||
+ | :○玉溪盧氏曰: "湛然虚明者, 心之體; 隨感而應者, 心之用. 如鑑之空, 則妍蚩因物, 而空者自如; 如衡之平, 則俯仰因物, 而平者自若. 眞體之本然, 吾心之太極也. 隨感而應, 則本體之眞, 在在呈露, 而太極亦無不在矣. 未感之時, 鬼神不得窺其際, 乃天下之大本, 是明徳之體、寂然不動者也. 寂之中有能感者存, 感物之際, 流行不滯, 正大光明, 乃天下之逹道, 是明徳之用、感而遂通者也. 感之中未甞無寂者存." | ||
+ | :옥계노씨가 말했다. "맑고 허명하다는 것은 마음의 體요, 감한 것을 따라 응한다는 것은 마음의 用이니, 마치 거울의 텅빔은 그 아름답고 추함이 외물을 따르지만 텅빔은 본래 그러함과 같고, 저울의 평평함은 그 오르내림이 외물을 따르지만 평평함은 본래 그러함과 같다. 眞體之本然은 내 마음의 태극이다. 감하는 바에 따라 응하면 본체의 眞이 곳곳마다 드러나니 태극 또한 없는 곳이 없다. (마음이) 아직 발하기 이전에 귀신이 그 (미발의) 때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바로 '天下之大本'이니 明徳의 體이고 寂然不動하다는 것이다. 적연한 가운데에 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외물에 감할 때에 그 흘러감이 막힘이 없고 正大光明한 것이 바로 '天下之逹道'이니, 이것이 明徳의 用이요, 感而遂通한다는 것이다. 감하는 중에도 일찍이 고요함이 보존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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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傳者之意, 固非以心之應物便爲不得其正, 而必如枯木死灰然後乃爲得其正也. 惟是此心之靈, 既曰一身之主, 苟得其正而無不在是, 則耳目鼻口四肢百骸, 莫不有所聽命以供其事, 而其動靜語黙出入起居, 唯吾所使而無不合於理. 如其不然, 則身在於此而心馳於彼, 血肉之軀無所管攝, 其不爲仰面貪看鳥. 囘頭錯應人者幾<sub>平聲</sub>希矣.<sub>所引二句乃杜子美詩</sub> 孔子所謂: '操則存, 舍則亡', 孟子所謂: '求其放心'、'從其大體'者, 蓋皆謂此. 學者可不深念而屢省<sub>悉井反</sub>之哉!"<br/> | ||
+ | "傳의 뜻은 진실로 마음이 외물에 응하면 곧 바름을 얻지 못하게 되어 반드시 죽은 나무와 꺼진 재와 같이 된 이후에야 그 바름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한 것이 아니다. 오직 이 마음의 허령임을 이미 '一身之主'라고 말했으니 만약 그 바름을 얻고 옳은 곳에 있지 않음이 없다면 귀, 눈, 코, 입, 사지 온 몸의 뼈가 그 (마음이) 명령한 바를 들어서 각자의 일에 이바지 하지 않음이 없고 그 움직임과 말함과 출입함과 행동함이 오직 내가 시키는 바 대로 하여도 이치에 부합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몸이 여기에 있더라도 마음이 저쪽을 내달리고 , 육신이 다스려지는 바가 없게되니, 얼굴 들어 새보기를 탐하다가 고개 돌려 사람에게 응답하지 못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sub>인용한 두 구절은 모두 두보의 아름다운 시이다.</sub> 공자가 말한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없어진다' <ref> <맹자>, <고자상> 8장 </ref>는 것과 맹자가 말한 '그 놓아버린 마음을 구한다' <ref> <맹자>, <고자상>, 11장. </ref>, '그 큰 것을 따른다' <ref> <맹자>, <고자상>, 15장 </ref>는 것이 모두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학자가 깊히 생각하고 자주 이것을 성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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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傳八章=== | ||
+ | 所謂齊其家在脩其身者:人之其所親愛而辟焉,之其所賤惡而辟焉,之其所畏敬而辟焉,之其所哀矜而辟焉,之其所敖惰而辟焉。故好而知其惡,惡而知其美者,天下鮮矣!<sub>辟,讀為僻。惡而之惡、敖、好,並去聲。鮮,上聲</sub><br/> | ||
+ | 이른바 '자기 집안을 단속하는 것은 제 자신을 수양하는 데 달려있다'는 것은 [다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아끼는 것에 치우치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치우치며, 경외하는 것에 치우치고, 안타까워하는 것에 치우치며, 게으른 바에 치우치므로, 좋게 여기면서 그것의 단점을 알거나 싫어하면서 그것의 장점을 아는 경우는 천하에 드물다. | ||
+ | :人,謂眾人。之,猶於也。辟,猶偏也。<sub>朱子曰: "古註辟音譬, 窒礙不通. 只是辟字便通. 况此篇自有僻字, '辟則為天下僇', 是矣"</sub>五者,在人本有當然之則;然常人之情惟其所向而不加審焉,則必陷於一偏而身不脩矣。 | ||
+ | :'人'은 뭇 사람들을 말한다. '之'는 '於'와 같다. '辟'은 치우침(偏)과 같다.<sub>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옛 주석에 '辟'의 음이 '비(譬)'라고 했는데, [의미가] 막혀서 통하지 않는다. '벽(辟)'자라면 [의미가] 통한다. 게다가 이 책에 본래 '벽(僻)'자가 있으니, '편벽되면 천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ref><대학장구> 전10장. 詩云:「節彼南山,維石巖巖,赫赫師尹,民具爾瞻。」有國者不可以不慎,辟則為天下僇矣。</ref>는 것이 이것이다."</sub> 이 다섯 가지의 경우 사람에게 마땅히 따라야 할 준칙이 본래부터 있지만, 일반 사람들의 마음은 오직 이를 좇을 뿐 더 이상 살피지 않으니, 틀림없이 한 쪽에 빠져 자신이 수양되지 못한다. | ||
+ | ::○朱子曰: "正心、脩身兩段, 大㮣差錯處, 皆非在人欲上, 皆是人合有底事, 如在官街<ref><한어대사전> 都市中的大街.</ref>上差了路."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정심과 수신 두 단락에서 일반적으로 잘못하는 지점은 모두 인욕에 있지 않고, 모두 사람이 해야 할 일에 있으니, 마치 대로에서 길을 잃는 것과 같다."<ref><주자어류> 권16. 正心、修身,今看此段大概差錯處,皆未在人欲上。這箇皆是人合有底事,皆恁地差錯了。況加之以放辟邪侈,分明是官街上錯了路!</ref> | ||
+ | ::○忿懥等是心與物接時事; 親愛等是身與物接時事. | ||
+ | ::'忿懥' 등은 마음이 외물과 접했을 경우이고, '親愛' 등은 몸이 외물과 접했을 경우이다. | ||
+ | ::○'之所親愛', 如父子當主於愛. 然父有不義, 不可以不争; 子有不肖, 亦不可不知教之. '之所敬畏', 如君固當敬畏. 然若當正救責難, 也只管敬畏不得. '賤惡'固可惡, 或尚可教, 或有長處, 亦當知之. | ||
+ | ::'之所親愛'는 예를 들어 마땅히 사랑(愛)을 위주로 해야 하는 부자 관계와 같다. 그러나 부모에게 불의한 점이 있으면 [자식이] 다투지 않아선 안 되고, 자식에게 불초한 점이 있으면 [부모] 또한 그를 가르칠 줄 몰라서는 안 된다. '之所敬畏'는 예를 들어 마땅히 경외해야 하는 군주와 같다. 그러나 마땅히 바로잡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경우 그저 경외만 해서는 안 된다. '賤惡'은 진실로 미워할 만하지만, 혹 여전히 가르칠 만하거나 혹 뛰어난 점이 있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ref><주자어류> 권16. 「人之其所親愛而僻焉」,如父子是當主於愛,然父有不義,子不可以不爭;如為人父雖是止於慈,若一向僻將去,則子有不肖,亦不知責而教焉,不可。「人之其所賤惡而僻焉」,人固自有一種可厭者,然猶未至於可賤惡處,或尚可教,若一向僻將去,便賤惡他,也不得。「人之其所畏敬而僻焉」,如事君固是畏敬,然「說大人則藐之」,又不甚畏敬。孟子此語雖稍粗,然古人正救其惡,與「陳善閉邪」,「責難於君」,也只管畏敬不得。</ref> | ||
+ | ::○問: "'敖惰', 恐非好事." 曰: "此如眀鏡之懸, 妍醜隨其來而應之. 不成醜者至前, 亦喚做妍者? 又'敖惰'是輕, '賤惡'是重. 既賤惡得, 如何却不得敖惰? 然傳者猶戒其辟, 則須檢㸃, 不可有過當處." | ||
+ | ::물었다: "'敖惰'는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답하셨다: "이는 밝은 거울이 매달려있는 것과 같으니, 예쁘고 못난 것은 오는 바에 따라 드러나는 것이다. 못난 것이 앞에 왔는데 예쁘다고 하지는 않겠지? 또 '게으름(敖惰)'는 가볍고 '싫어함(賤惡)'는 무겁다. 싫어한 이상 어찌 게으르지 않겠는가? 그러나 전을 쓴 자가 오히려 그 치우침을 경계했으니, 반드시 점검해 정도를 넘어서는 점이 있어선 안 된다."<ref><주자어류> 권16. 又問:「『敖惰』二字,恐非好事。」曰:「此如明鑑之懸,妍者自妍,醜者自醜,隨所來而應之。不成醜者至前,須要換作妍者!又敖惰是輕,賤惡是重。既得賤惡,如何卻不得敖惰?然聖人猶戒其僻,則又須點檢,不可有過當處。」</ref> | ||
+ | ::○'哀矜', 如有大姦, 方欲懲之, 被他哀鳴懇吿, 又却寬之, 這便是哀矜之偏處. | ||
+ | ::'哀矜'은 마치 매우 간사한 자를 징계하려고 할 때, 그의 슬프고 간곡한 하소연을 듣고 용서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안타까움(哀矜)'에 의해 치우친 것이다. | ||
+ | ::○五者各自有當然之則, 只不可偏. 如人饑而食, 只合當食, 食纔過些子便是偏; 渴而飲, 飲纔過些子便是偏. 如愛其人之善, 若愛之過則不知其惡, 便是因其所重而陷於所偏; 惡惡亦然. 下面說'人莫知其子之惡, 莫知其苗之碩', 上面許多偏病不除, 必至於此. | ||
+ | ::다섯 가지 각각에는 마땅히 따라야 할 준칙이 있으니, 치우쳐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이 굶주렸다가 먹을 때에는 마땅히 먹어야겠지만, 먹는 것이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치우친 것이다. 목이 말라서 마실 때 마시는 것이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치우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선을 아끼는 경우, 아낌이 지나치면 그의 단점을 알아채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중하게 여기는 바 때문에 치우침에 빠지는 것이다. 악을 미워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아래에 '사람 중에 제 자식의 단점을 아는 자가 없고, 제 싹이 큼을 아는 자가 없다'고 말한 것은, 위의 수많은 치우침의 병폐가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런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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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諺有之曰:「人莫知其子之惡,莫知其苗之碩。」<sub>諺,音彥。碩,協韻,時若反。</sub><br/> | ||
+ |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 "사람 중에 제 자식의 단점을 아는 자가 없고, 제 싹이 큼을 아는 자가 없다." | ||
+ | :諺,俗語也。溺愛者不明,貪得者無厭,是則偏之為害,而家之所以不齊也。 | ||
+ | :'諺'은 속담이다. 자식 사랑에 빠진 자는 사리에 어둡고, 이득을 탐하는 자는 만족을 모르니, 이것이 치우침의 해이며 집안이 단속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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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此謂身不脩不可以齊其家。<br/> | ||
+ | 이를 "자신이 수양되지 않으면 제 집안을 단속할 수 없다"고 말한다. | ||
+ | ::問: "如何脩身專指待人而言?" 朱子曰: "脩身以後, 大㮣說向接物待人去, 又與只說心處不同. 要之, 根本之理則一, 但一節說濶, 一節去." | ||
+ | ::물었다: "어째서 '脩身'인데 오로지 다른 사람(人)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脩身' 이후에는 대체로 외물이나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경우를 말하니, 단지 마음에 대해 말하는 부분과는 다르다. 요컨대 근본 이치는 똑같지만, 한 절은 넓게 말했고, 한 절은 없애버렸다."??<ref><주자어류> 권16. 問:「如何修身卻專指待人而言?」曰:「修身以後,大概說向接物待人去,又與只說心處不同。要之,根本之理則一,但一節說闊,一節去。」</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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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右傳之八章。釋脩身、齊家。 | ||
+ | ::이상은 전8장이니, 脩身·齊家를 풀이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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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문』 전8장==== | ||
+ | 或問: "八章之辟, 舊讀爲譬, 而今讀爲僻, 何也?" 曰: "舊音舊說, 以上章例之而不合也; 以下文逆之而不通也. 是以間者竊以類例文意求之而得其說如此, 蓋曰人之常情. 於此五者一有所向, 則失其好<sub>去聲下同</sub>惡<sub>去聲下於惡好惡同</sub>之平, 而陷於一偏. 是以身有不脩, 不能齊其家耳. 蓋偏於愛, 則溺焉而不知其惡矣; 偏於惡, 則阻焉而不知其善矣. 是其身之所接好惡取舍<sub>上聲</sub>之間, 將無一當<sub>去聲</sub>於理者. 而况於閨門之内恩常掩義, 亦何以勝其情愛暱<sub>尼質反</sub>比<sub>音鼻</sub>之私, 而能有以齊之哉?"<br/> | ||
+ | 혹자가 물었다. "8장의 '辟'을 옛날에는 '譬'으로 읽었고, 지금은 '僻'이라고 읽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답했다. "옛날 음과 옛 설명은 위의 장을 참조해 보아도 맞지 않고, 아래의 글로 역추해봐도 통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최근에 삼가 부류들과 글의 뜻으로 구해서 이와 같은 설명을 얻은 것이다. 대게 '사람들의 항상된 감정은 이 다섯가지에 대해 하나라도 지향하는 바가 있으면 그 좋아하고 싫어함의 평정심을 잃고 한 쪽 편에 빠져버리니, 이 때문에 몸은 닦여지지 않는 것이 있고, 그 집안은 다스려질 수 없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대개 愛에 치우치면 愛에 빠져서 그의 악함을 알지 못하게 되고, 싫어함(惡)에 빠지면 惡에 가로막혀서 그의 선함을 알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ref> 是 15. 則</ref> 이 몸이 (외물을) 접하는 것과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때에 장차 하나도 이치에 합당한 것이 없을텐데 하물며 집안에서는 '은혜가 항상 義를 가리니'<ref> 예기, <喪服四制>, '門內之治,恩掩義;門外之治,義斷恩。資於事父以事君,而敬同,貴貴尊尊,義之大者也。故為君亦斬衰三年,以義制者也。'</ref> , 또 어찌 이 情,愛,暱,比의 사사로움을 이겨서 집안을 가지런히 할 수 있겠는가!" | ||
+ | :北溪陳氏曰: "治家非如治國. 治國可用刑威, 治家則刑威不可得而施, 只是公其心而已." | ||
+ | :북계진씨가 말했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는 형벌을 쓸 수 있지만, 집안을 다스릴 적에는 형벌을 시행할 수 없으니 다만 이 마음을 공정하게 할 뿐이다." | ||
+ | :○格菴趙氏曰: "'閨門之内, 義常不勝乎恩; 情愛暱比之私, 尤所難克. 使一有偏焉, 則長幼親疏, 欲其心之齊一不可得矣. 盖至近至宻之地, 一毫之偽無所容欺. 此常情之所易忽而君子之所甚謹也." | ||
+ | :○격암조씨가 말했다. "집 안에서 義는 항상 은혜를 이기지 못하니 情,愛,暱,比의 사사로움은 더욱 이기기 어려운 것이다. 만일 그 중에 하나라도 치우친 것이 있다면 長幼, 親疏에 그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싶어도 할 수 없다. 대개 가장 가깝고 가장 친밀한 경우에 약간의 거짓됨이라도 속임을 용납하는 바가 없이 해야하니 이것이 (일반사람들의) 항상된 감정이 쉽게 소홀히하는 바이며 군주는 매우 삼가는 바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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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凡是五者, 皆身與物接所不能無, 而亦既有當然之則矣. 今曰一有所向便爲偏倚而身不脩, 則是必其接物之際, 此心漠然都無親疎之等、貴賤之别<sub>筆列反</sub>, 然後得免於偏也. 且心既正矣, 則宜其身之無不脩, 今乃猶有若是之偏, 何哉?" 曰: "不然也. 此章之義, 實承上章. 其立文命意, 大抵相似. 蓋以爲身與事接而後或有所偏, 非以爲一與事接而必有所偏. 所謂'心正而后身脩', 亦曰: '心得其正, 乃能脩身',非謂: '此心一正, 則身不待檢而自脩'也."<br/> | ||
+ | 물었다. "무릇 이 다섯가지는 모두 자신이 외물과 접하는 경우에 없을 수 없는 것이며 또 이미 당연한 이치가 있습니다. 지금 '하나라도 지향하는 바가 있으면 곧 치우치게 되어서 몸이 닦여지지 않는다'고 말하니 이것은 필시 그 외물을 접할 때에 이 마음이 막연하게 親疎의 차이와 貴賤의 구별을 없앤 다음에야 이 치우침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마음이 이미 바르다면 마땅히 그 몸이 닦여지지 않음이 없을 것인데 지금 이내 이와 같은 치우침이 있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답했다. "그렇지 않다. 이 장의 뜻은 진실로 윗 장을 이은 것이니, 그 의도가 대체로 서로 비슷하다. 대개 몸이 외물과 접한 이후에 간혹 치우친 바가 있게 된다고 여긴 것이지, 한 번이라도 외물과 접하면 반드시 치우치는 바가 있다고 여긴것이 아니다. 이른바 '마음이 바르게 된 이후에 몸이 닦여진다'고 한 것은 '마음이 그 바름을 얻어야 몸을 닦을 수 있다고'고 하 것이지 이 마음이 한 번 바르게 되면 몸은 검속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닦여진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 ||
+ | :朱子曰: "<大學>所以有許多節次, 正欲教人逐節用功, 非如一無節之竹, 使人才能格物, 便知平天下也. 人蓋有意誠而心未正者, 故於忿懥等, 誠不可不隨事而排遣; 有心正而身未脩者, 故於好惡間, 誠不可不隨人而節制. 齊家以下, 皆是教人省察用功. 故經之序, 但言心正者必自誠意而來; 修身者必自正心而來, 非謂意既誠, 則心無事乎正; 心既正, 則身無事乎脩也."<ref><주자어류> 권16. 大學所以有許多節次,正欲學者逐節用工。非如一無節之竹,使人才能格物,則便到平天下也。夫人蓋有意誠而心未正者,蓋於忿懥、恐懼等事,誠不可不隨事而排遣也。蓋有心正而身未修者,故於好惡之間,誠不可不隨人而節制也。至於齊家以下,皆是教人節節省察用功。故經序但言心正者必自誠意而來,修身者必自正心而來。非謂意既誠而心無事乎正,心既正而身無事乎修也。</ref> | ||
+ | :주자가 말했다. "<대학>에 많은 절목들이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절목을 따라 힘쓰게 하기 위함이지, 하나의 마디도 없는 나무와 같이 사람들로 하여금 격물하자마자 곧바로 평천하를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대개 뜻이 진실되더라도 마음이 아직 바르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忿,懥등에 있어서 진실로 일에 따라서 배제하지 않을 수 없고, 마음이 바르게 되더라도 몸은 아직 닦여지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好,惡사이에 진실로 사람에 따라서 절제하지 않을 수 없다. 齊家이하는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성찰하고 힘쓰게 한 것이기 때문에 경전의 순서에서 다만 마음이 바르게 되는 것은 반드시 뜻을 진실하게 하는 것으로 부터 오고, 몸을 닦는 것은 반드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부터 온다고 말한 것이지 뜻이 이미 진실해 졌다면 마음은 바름에 종사하지 않음이 없고, 마음이 이미 바르게 되었다면 몸은 닦음에 종사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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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親愛、賤惡、畏敬、哀矜, 固人心之所宜有. 若夫<sub>音扶</sub>敖惰, 則凶徳也. 曾謂本心而有如是之則哉?" 曰: "敖之爲凶徳也, 正以其先有是心, 不度<sub>待洛反</sub>所施而無所不敖爾. 若因人之可敖而敖之, 則是常情所宜有而事理之當然也. 今有人焉, 其親且舊未至於可親而愛也; 其位與徳未至於可畏而敬也; 其窮未至於可哀而其惡未至於可賤也, 其言無足去<sub>去聲</sub>取而其行<sub>去聲</sub>無足是非也, 則視之泛然如塗之人而已爾. 又其下者, 則夫子之取瑟而歌,<ref><논어> <양화> 21. 孺悲欲見孔子,孔子辭以疾。將命者出戶,取瑟而歌。使之聞之。</ref> 孟子之隱<sub>去聲</sub>几而臥,<ref><맹자> <공손추하> 11. 孟子去齊,宿於晝。有欲為王留行者,坐而言。不應,隱几而臥。客不悅曰:「弟子齊宿而後敢言,夫子臥而不聽,請勿復敢見矣。」曰:「坐!我明語子。昔者魯繆公無人乎子思之側,則不能安子思;泄柳、申詳,無人乎繆公之側,則不能安其身。子為長者慮,而不及子思,子絕長者乎?長者絕子乎?」</ref> 蓋亦因其有以自取而非吾故有敖之之意, 亦安得而遽謂之凶徳哉? 又况此章之㫖, 乃爲<sub>去聲</sub>慮其因有所重而陷於一偏者發. 其言雖曰有所敖惰, 而其意則正欲人之於此更加詳審; 雖曰所當敖惰, 而猶不敢肆其敖惰之心也. 亦何病哉?"<br/> | ||
+ | ○물었다, "親愛、賤惡、畏敬、哀矜은 진실로 人心이 마땅히 가지고 있는 것인데, 저 업신여김(敖惰)의 경우는 흉한 덕인데 일찍이 본심에 이와같은 법칙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했다. "敖이 흉덕이 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이 마음에 먼저 있는데 시행하는 바를 헤아리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는 바가 없을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사람의 업신여길말한 것에 인하여 그를 업신여긴다면 이것은 항상된 감정이 마땅히 가지고 있는 바이고 이치의 당연한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있어서 그의 親과 舊가 친애할 수 있음에 미치지 못하고, 그의 지위와 덕망이 경외할 수 있음에 미치지 못하고, 그의 곤궁함이 슬퍼할만함에 미치지 않고, 그의 악함이 천하게 여길만함에 미치지 못하고, 그의 말이 버리고 취하기에 부족하고, 그의 행실도 시비를 논하기 부족하니, 평범하게 그를 보기를 마치 길가의 일반 사람들 같이할 뿐이다. 또 그보다 못한 사람의 경우 공자는 비파를 가져다 노래하였고, 맹자는 궤에 기대어 누워있었다. (이는) 대개 그가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에 따른 것이지, 내가 고의로 그를 업신여기는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니 또 어찌 갑자기 흉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장의 뜻은 바로 그가 중요하게 가진 것에 인하여 한 쪽으로 빠져버릴까 염려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그 말이 비록 '업신여기는 바가 있다'고 했지만 그 뜻은 바로 사람들이 '敖惰'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를 바란 것이다. 비록 '마땅히 업신여기는 바'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감히 그 업신여기는 마음을 멋대로 하지 않는 것이니 또 뭐가 병폐이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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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傳九章=== | ||
+ | 所謂治國必先齊其家者,其家不可教而能教人者,無之。故君子不出家而成教於國:孝者,所以事君也;弟者,所以事長也;慈者,所以使眾也。<sub>弟,去聲。長,上聲。</sub><br/> | ||
+ | 이른바 '治國은 반드시 齊家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집안을 가르치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군자는 집안을 벗어나지 않고 나라에 대한 교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孝라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방법이고, 弟(悌)라는 것은 어른을 섬기는 방법이며, 慈라는 것은 백성을 부리는 방법이다. | ||
+ | :身脩,則家可教矣<sub>因家不可教而推家所以可教之由, 實自脩身始.</sub>;孝、弟、慈,所以脩身而教於家者也;然而國之所以事君、事長、使眾之道不外乎此<sub>此字指孝弟慈而言</sub>。此所以家齊於上,而教成於下也。 | ||
+ | :자신이 수양된다면 집안을 가르칠 수 있다.<sub>집안을 가르칠 수 없음으로부터 집안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미뤄보면, [齊家는] 실로 脩身에서 비롯된다.</sub> 孝·弟·慈는 脩身하고서 집안을 가르치는 방법이다. 그러나 나라에서 임금을 섬기고 어른을 섬기며 백성을 부리는 방법이 이것<sub>'이것'은 孝·弟·慈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sub>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지배층에서는 집안이 단속되고, 피지배층에서는 교화가 완성된 방법이다. | ||
+ | ::朱子曰: "上面說不出家而成教於國, 下面便說所以教者如此, 此三者便是教之目."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앞부분에서 '집안을 벗어나지 않고도 나라에 대한 교화를 이룬다'고 말하고, 뒷부분에서 '가르치는 방법이 이와 같다'고 말하였으니, 이 세 가지(孝·弟·慈)가 바로 교화의 조목이다." | ||
+ | ::○'孝者, 所以事君; 弟者, 所以事長; 慈者, 所以使衆', 此道理皆是我家裏做成了, 天下人看着, 自能如此; 不是我推之於國. | ||
+ | ::'孝라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방법이고, 弟(悌)라는 것은 어른을 섬기는 방법이며, 慈라는 것은 백성을 부리는 방법이다.' 이 도리는 모두 자기 집안에서 이뤄진 것을 천하 사람들이 보고 스스로 이처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내가 이를 나라에 적용하는 게 아니다. | ||
+ | ::○孝以事親, 而使一家之人皆孝; 弟以事長, 而使一家之人皆弟; 慈以使衆, 而使一家之人皆慈, 是乃成教於國者也. | ||
+ | ::孝로 부모를 섬겨 집안 사람들이 모두 효도하게 만들고, 弟(悌)로 어른을 섬겨 집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게 만들며, 慈로 백성을 부려 집안 사람들이 모두 자애롭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나라에 대한 교화를 이루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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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康誥曰「如保赤子」,心誠求之,雖不中不遠矣。未有學養子而后嫁者也!<sub>中,去聲。</sub><br/> | ||
+ | <康誥>에서 '핏덩이를 보호하듯 한다'고 말하니, 마음으로 진실하게 [핏덩이가/백성이 원하는 바를] 추구한다면 비록 [목표에] 들어맞지는 않더라도 [목표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자식 기르는 법을 배운 뒤에 장가가는 경우는 없다! | ||
+ | :此引書而釋之,又明立教之本不假強<sub>上聲</sub>為,在識其端而推廣之耳。 | ||
+ | :이는 <서경>을 인용하여 해석한 것이니, '교화를 세우는 근본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화의 실마리를 알아 이를 확충하는 데 달려있을 뿐'임을 거듭 밝힌 것이다. | ||
+ | ::朱子曰: "孝弟雖人所同有, 能守而不失者鮮; 惟保赤子罕有失者. 故特即人所易曉者以示訓, 亦與<孟子>言'見孺子入井'之意同."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孝·弟가 비록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덕목이지만, 지켜서 잃지 않을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오직 핏덩이를 보호하려는 마음만큼은 잃는 자가 드물다. 그러므로 특별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가르치신 것이니, 이 역시 <맹자>의 '어린 아이가 우물로 기어가는 것을 본 사례'의 의미과 같다. | ||
+ | ::○'保赤子', 慈於家也; '如保赤子', 慈於國也. '保赤子', 是慈; '如保赤子', 是使衆. 心誠求赤子所欲, 於民亦當求其不能自達者. 此是推慈幼之心以使衆也. | ||
+ | ::'핏덩이를 보호하는 것'은 집안 사람들에게 자애롭게 대하는 것이고, '핏덩이를 보호하듯 하는 것'은 나라에 자애롭게 대하는 것이다. '핏덩이를 보호하는 것'은 慈이고, '핏덩이를 보호하듯 하는 것은' 백성을 부리는 것(使衆)이다. 마음으로 진실로 핏덩이가 원하는 바를 추구한다면, 백성에 대해서도 응당 그들이 스스로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린 아이에 대한 자애로운 마음을 미루어 백성을 부리는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6. 「心誠求之」者,求赤子之所欲也。於民,亦當求其有不能自達。此是推其慈幼之心以使眾也。</ref> | ||
+ | ::○此且只說動化<ref><한어대사전> 感化.</ref>為本; 未說到推上. 後方全是說推. | ||
+ | ::이 구절은 우선 감화가 근본임을 말하고 있을 뿐, 그 이상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뒷장에서 비로소 그 이상을 말한다.<ref><주자어류> 권16. 問「治國在齊其家」。曰:「且只說動化為功,未說到推上。後章方全是說推。</ref> | ||
+ | |||
+ | 一家仁,一國興仁;一家讓,一國興讓;一人貪戾<ref><예기정의> 정현 注: 戾之言利也。</ref>,一國作亂;其機如此。此謂一言僨事,一人定國。<sub>僨,音奮。</sub><br/> | ||
+ | 한 집안이 仁해야 한 나라가 그 仁에 감동해 일어나고, 한 집안이 겸양해야 한 나라가 그 겸양에 감동해 일어나며, [군주] 한 사람만이라도 이익을 탐내면 한 나라가 난을 일으키니, 그 기미가 이와 같다. 이를 '말 한 마디가 일을 망치기도 하고,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키기도 한다'고 한다. | ||
+ | :一人,謂君也。機,發動所由也。僨,覆敗也。此言教成於國之效。 | ||
+ | :'한 사람'은 군주이다. '機'는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된 시원이다. '僨'은 엎어지는 것이다. 이 구절은 '나라에 대한 교화가 이뤄진' 결과를 말한 것이다. | ||
+ | ::朱子曰: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自家禮讓, 有以感之. 故民亦如此興起. 自家好争利, 却責民間禮讓, 如何得他應?"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주] 한 집안이 仁하면 한 나라가 그 仁에 감동해 일어나고, 한 집안이 겸양하면 한 나라가 그 겸양에 감동해 일어난다'는 것은, [군주] 자신이 예양하면 [백성을] 감동시킬 수 있으므로, 백성도 이렇게(겸양) 흥기한다는 것이다. [군주] 자신이 이익 다투길 좋아하면서 도리어 백성들에게는 예양을 요구한다면, 백성의 호응을 어떻게 얻겠는가?"<ref><주자어류> 권16. 因講「禮讓為國」,曰:「『一家仁,一國興仁;一家讓,一國興讓。』自家禮讓有以感之,故民亦如此興起。自家好爭利,卻責民間禮讓,如何得他應!</ref> | ||
+ | ::○'一家仁'以上, 是推其家以治國; '一家仁'以下, 是人自化之也. | ||
+ | ::'一家仁' 이전은 [논의의 대상을] '집안'에서부터 '국가 통치'로 확장한 것이고, '一家仁' 이후는 백성들이 스스로 교화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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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堯舜帥天下以仁,而民從之;桀紂帥天下以暴,而民從之;其所令反其所好,而民不從。是故君子有諸己而后求諸人,無諸己而后非諸人。所藏乎身不恕,而能喻諸人者,未之有也。<sub>好,去聲。</sub><br/> | ||
+ | 요순은 천하 사람들을 [자신의] 仁한 덕으로 이끌었는데 백성들이 따랐고, 걸주는 천하 사람들을 [자신의] 포악한 덕으로 이끌었는데 백성들이 따랐으니, 군주가 명령한 것이 군주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배치되면 백성들은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신에게 [선함이] 있은 뒤에야 남에게 [선함을] 요구하고, 자기에게 [악함이] 없은 뒤에야 남에게 [악함이 있음을] 비판한다. 자기 몸에 간직하고 있는 것을 恕하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 ||
+ | :此又承上文一人定國而言。有善於己,然後可以責人之善;無惡於己,然後可以正人之惡。皆推己以及人,所謂恕也,不如是,則所令反其所好,而民不從矣。喻,曉也。 | ||
+ | :이는 다시 앞 글의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키기도 한다'에 이어 말한 것이다. 자신에게 선함이 있고 나서 남에게 선을 요구할 수 있고, 자신에게 악함이 없고 나서 남의 악을 바로잡을 수 있다. 모두 자기로부터 남에게 확장하는 것(推己以及人)이니, 이른바 '恕'이다. 이와 같지 않다면, 명령하는 바가 자신이 좋아하는 바에 배치되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喻'는 가르침이다. | ||
+ | ::問: "此章言治國, 乃言'帥天下以仁', 又似說平天下; 言'有諸己', 又似說脩身, 何也?" 朱子曰: "聖賢之文簡暢. 身是齊治平之本; 治國、平天下自是相關, 豈可截然不相入?" | ||
+ | ::물었다: "이 장은 治國을 말하는데, 천하 사람들을 [자신의] 仁한 덕으로 이끌었다'고 말하니 또 흡사 '平天下'를 말하는 것 같고, '자신에게 [선함이] 있다'고 말하니 또 흡사 脩身을 말하는 것 같은데, 어째서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성현의 글은 간단하면서도 막힘이 없다. 자기 자신(身)은 治國·平天下의 근본이고, 治國·平天下는 본래 연관되어 있으니, 어찌 자른 듯이 서로 관련이 없을 수 있겠는가?"<ref><주자어류> 권16. 問:「九章本言治國,何以曰『堯舜率天下以仁而民從之』,都是說治天下之事也?至言『君子有諸己而後求諸人,無諸己而後非諸人』,又似說修身,如何?」曰:「聖人之言,簡暢周盡。修身是齊家之本,齊家是治國之本。如言『一家仁,一國興仁;一家讓,一國興讓』之類,自是相關,豈可截然不相入也!」</ref> | ||
+ | ::○尋常人若有諸己, 又何必求諸人? 無諸己, 又何必非諸人? 如孔子說'躬自厚而薄責於人', '攻其惡, 無攻人之惡'. 至於<大學>之說, 是有天下國家者, 勢不可以不責他. 大抵治國者禁人惡、勸人善, 便是求諸人、非諸人. | ||
+ | ::보통 사람은 만약 [선함이] 자신에게 있다면 또 어찌 남에게 [선함을] 반드시 요구하겠는가? [악함이] 자신에게 없다면, 또 어찌 남에게 [악함이 있음을] 비판하겠는가? 공자께서 '몸소 후하게 자책하고 남에게는 박하게 책망하라'<ref><논어> <위령공> 14. 子曰:「躬自厚而薄責於人,則遠怨矣。」</ref>, '자신의 악함을 공격하고 남의 악은 공격하지 말아라'<ref><논어> <안연> 21. 樊遲從遊於舞雩之下,曰:「敢問崇德、脩慝、辨惑。」子曰:「善哉問!先事後得,非崇德與?攻其惡,無攻人之惡,非脩慝與?一朝之忿,忘其身,以及其親,非惑與?」</ref>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대학>의 말의 경우는, 천하국가를 소유한 자는 형세상 다른 사람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사람들의 악함을 금하고 선함을 권하니, 이것이 바로 '남에게 요구하고 남을 비판하는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8. 或問:「先吏部說:『有諸己而後求諸人,無諸己而後非諸人。』」曰:「這是說尋常人,若自家有諸己,又何必求諸人;無諸己,又何必非諸人。如孔子說『躬自厚而薄責於人』,『攻其惡,毋攻人之惡』。至於大學之說,是有天下國家者,勢不可以不責他。然又須自家有諸己,然後可以求人之善;無諸己,然後可以非人之惡。」</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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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治國在齊其家。<br/> | ||
+ | 그러므로 治國은 齊家에 달려있는 것이다. | ||
+ | :通結上文。 | ||
+ | :이상의 글을 총괄해 마무리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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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云:「桃之夭夭,其葉蓁蓁;之子于歸,宜其家人。」宜其家人,而后可以教國人。<sub>夭,平聲。蓁,音臻。</sub><br/> | ||
+ | <시>에서 "어리고 예쁜 복사꽃, 그 잎이 무성하네. 시집 가는 이 처자, 집안 사람들에게 잘하라"고 하니, 집안 사람에게 잘한 이후에야 나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다. | ||
+ | :詩周南桃夭之篇。夭夭,少<sub>去聲</sub>好貌<sub>少嫩也</sub>。蓁蓁,美盛貌。興<sub>去聲</sub>也。<sub>於六義屬興</sub>之子,猶言是子,此指女子之嫁者而言也。婦人謂嫁曰歸。宜,猶善也。 | ||
+ | :<시> <주남> <도요>편이다. '夭夭'는 어리고 예쁜 모습이다. '蓁蓁'은 아름다고 성대한 모습이다. 興이다.<sub>六義 가운데 興에 속한다.</sub> '之子'는 '是子'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시집가는 여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부인이 시집가는 것을 '歸'라고 한다. '宜'는 '善'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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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云:「宜兄宜弟。」宜兄宜弟,而后可以教國人。<br/> | ||
+ | <시>에서 "형과 동생에게 잘하라"라고 하니, 형과 동생에게 잘한 뒤에야 나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다. | ||
+ | :詩小雅蓼<sub>音六</sub>蕭篇。 | ||
+ | :<시> <소아> <육소>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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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云:「其儀不忒,正是四國。」其為父子兄弟足法,而后民法之也。<br/> | ||
+ | <시>에서 "그 위의가 어긋나지 않으니, 이 사방 나라를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하니, 父子·兄弟가 [그를] 본받을 만한 이후에야 백성들이 그를 본받을 것이다. | ||
+ | :詩曹風鳲<sub>音尸</sub>鳩篇。忒,差也。 | ||
+ | :<시> <조풍> <시구>편이다. '忒'은 어긋남이다. | ||
+ | ::問: "'父子兄弟足法而後民法之', 然堯舜不能化其子, 周公不能和兄弟, 是如何?" 朱子曰: "聖賢是論其常; 堯、舜、周公是處其變. 如不將天下與其子而傳賢, 便是能處變得好. 若周公不辟管叔, 周如何不亂? 是不得已著恁地. 而今且理㑹常底. 今未解有父如瞽瞍、兄弟如管蔡, 未論到變處." | ||
+ | ::물었다: "'부자·형제가 본받을 만한 이후에야 백성들이 그를 본받을 것'이지만, 요순은 제 자식을 교과하지 못했고, 주공은 자기 형제를 화합하지 못했으니, 이는 어째서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성현(<대학>)은 일반적(常)인 경우를 논한 것이고, 요·순·주공은 예외적(變)인 경우에 대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천하를 자기 아들에게 주지 않고 현자에게 전한 것은 예외적인 경우에 잘 대처한 것이다. 만약 주공이 관숙을 물리치지 않았다면, 주나라가 어떻게 어지럽지 않았겠는가? 이는 부득이하게 이렇게 한 것이다. 지금 우선 일반적인 경우를 이해해야 한다. 지금은 고수같은 아버지나 관숙·채숙같은 형제가 있을 수 없으므로, 예외적인 경우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ref><주자어류> 권16. 問:「齊家、治國之道,斷然『是父子兄弟足法,而後人法之』。然堯舜不能化其子,而周公則上見疑於君,下不能和其兄弟,是如何?」曰:「聖人是論其常,堯舜是處其變。看他『烝烝乂,不格姦』,至於『瞽瞍底豫』,便是他有以處那變處。且如他當時被那兒子恁地,他處得好,不將天下與兒子,卻傳與賢,便是他處得那兒子好。若堯當時把天下與丹朱,舜把天下與商均,則天下如何解安!他那兒子如何解寧貼!如周公被管蔡恁地,他若不去致辟于商,則周如何不擾亂!他後來盡死做這一著時,也是不得已著恁地。但是而今且去理會常倫。而今如何便解有箇父如瞽瞍,有箇兄弟如管蔡。未論到那變處。」</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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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此謂治國在齊其家。<br/> | ||
+ | 이것을 '治國은 齊家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 ||
+ | :此三引詩,皆以詠歎上文之事,而又結之如此。其味深長,最宜潛玩。 | ||
+ | :여기서 <시>를 세 편 인용한 것은 모두 앞 글의 일을 읊은 것이고, 또 이렇게 마무리한 것이다. 그 맛이 깊고 기니, 가장 마땅히 음미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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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右傳之九章。釋齊家治國。 | ||
+ | ::이상은 전9장이다. 齊家·治國을 풀이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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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문』 전9장==== | ||
+ | 或問: "'如保赤子', 何也?" 曰: "程子有言: '赤子未能自言其意, 而爲之母者慈愛之心出於至誠, 則凡所以求其意者雖或不中<sub>去聲</sub>, 而不至於大相逺矣.' 豈待學而後能哉? 若民則非如赤子之不能自言矣. 而使之者反不能無失於其心, 則以本無慈愛之實而於此有不察耳. 傳之言此, 蓋以明夫<sub>音扶</sub>使衆之道不過自其慈幼者而推之, 而慈幼之心又非外鑠<ref><맹자> <고자상> 6. 仁義禮智,非由外鑠我也,我固有之也,弗思耳矣。【朱注】鑠,以火銷金之名,自外以至內也。</ref><sub>式約反</sub>而有待於强<sub>上聲</sub>爲也. 事君之孝、事長之弟, 亦何以異於此哉? 既舉其細, 則大者可知矣.<sub>細謂慈; 大謂孝弟.</sub>"<br/> | ||
+ | 혹자가 물었다: "'핏덩이를 보호하듯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대답했다: "정자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핏덩이는 아직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지만, 그 어미의 자애로운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니, 무릇 [어미가] 핏덩이의 생각을 추리하는 것이 비록 딱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ref><이정유서> 02上-26 今夫赤子未能言, 其志意嗜欲人所未知, 其母必不能知之, 然不至誤認其意者, 何也? 誠心愛敬而已. 若使愛敬其民如其赤子, 何錯繆之有? 故心誠求之, 雖不中, 不遠矣. </ref> [이것이] 어찌 배운 뒤에야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백성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핏덩이와 같지 않은데도 백성을 부리는 자가 도리어 그들의 마음을 놓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본래 [어미와 같은] 자애로움의 실질이 없어 그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일 뿐이다. 전9장에서 이를(如保赤子) 말한 것은, '백성을 부리는 방법은 아이에게 자애롭게 대하는 것으로부터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아이에게 자애롭게 대하는 마음은 또 밖으로부터 들어와 강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군주를 섬기는 것과 孝와의 관계, 어른을 섬기는 것과 弟(悌)와의 관계 역시 이(慈)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상세한 것(慈)을 거론한 이상, 큰 것(孝弟)은 알 수 있다.<sub>'상세한 것'은 '慈'이고, 큰 것은 '孝弟'이다.</sub>" | ||
+ | :○三山陳氏曰: "長民者往往不得下之情, 蓋亦視之不切於己, 不若慈母之心耳. 孝弟與慈初無二心. 苟自切己推之, 則舉慈可以見孝矣." | ||
+ | :삼산 진씨가 말했다: "백성의 우두머리가 된 자가 종종 백성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역시 백성을 보는 것이 자신에게 절실하지 않아 자애로운 어미의 마음과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孝弟'와 '慈'는 애당초 두 가지 마음이 아니다. 만약 자신에게 절실한 것으로부터 추론한다면, '慈'만 거론해도 '孝'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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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仁讓言家, 貪戾言人, 何也?" 曰: "善必積而後成, 惡雖小而可懼, 古人之深戒也. <書>所謂'爾惟徳罔小, 萬邦惟慶; 爾惟不徳罔大, 墜厥宗', 亦是意爾."<br/> | ||
+ | 물었다: "'仁讓'에 대해서는 집안(家)을 말하고, '貪戾'에 대해서는 개인(人)을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대답했다: "선(仁讓)은 반드시 누적된 이후에야 완성되므로 [家로 말하고], 악(貪戾)은 비록 적더라도 두려워할 만하므로 [人으로 말하였으니], 옛 분들의 심오한 경계이다. <서경>에서 '너는 덕을 작게 여기지 말라, 만방이 경하할 것이다. 너는 부덕을 크게 여기지 않으면 종묘사직를 무너뜨릴 것이다'<ref><서경> <이훈> 爾惟德罔小,萬邦惟慶;爾惟不德罔大,墜厥宗。</ref>라고 말한 것 역시 이런 의미이다." | ||
+ | :朱子曰: "'惟徳罔小', 言其不可小也."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惟徳罔小'는 것은 작게 여겨선 안 됨을 말한 것이다." | ||
+ | :○三山陳氏曰: "為惡之効, 捷於為善. 仁讓必積而刑<ref><한어대사전> 12. 通"形".</ref>於一家, 而後可以化一國; 貪戾則纔出於一人之身, 而一國已作亂矣. 見為善者不可無悠久之積; 為惡者不可有斯須之暫也." | ||
+ | :삼산 진씨가 말했다: "악을 행한 결과는 선을 행한 것보다 빠르게 [나타난다.] '仁讓'이 반드시 누적되고서야 한 집안에 드러나고, 그런 이후에야 한 나라를 교화할 수 있다. [군주가] 이익을 탐내면, 개인의 몸을 벗어나자마자 한 나라가 이미 난을 일으킨다. 선을 행하는 것은 오래 누적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는 것은 잠시라도 있어선 안 됨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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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此章本言上行下效有不期然而然者, 今曰: '有諸己而后求諸人, 無諸己而後非諸人', 則是猶有待於勸勉程督<sub>督音篤, 察也勸也.</sub>而后化. 且内適自脩, 而遽欲望人之皆有; 己方僅免, 而遂欲責人以必無也." 曰: "此爲<sub>去聲</sub>治其國者言之, 則推吾所有與民共由. 其條教法令之施、賞善罰惡之政, 固有理所當然而不可已者. 但以所令反其所好, 則民不從. 故又推本言之, 欲其先成於己而有以責人, 固非謂其專務修己, 都不治人, 而拱手以俟其自化; 亦非謂其矜己之長, 愧人之短, 而脅之以必從也. 故先君子之言曰<sub>文公父名松, 字喬年, 號韋齊先生.</sub>: "有諸己, 不必求諸人, 以爲求諸人而無諸己, 則不可也; 無諸己, 不必求諸人, 以爲非諸人而有諸己, 則不可也", 正此意也."<br/> | ||
+ | 물었다: "이 장에서는 본래 '윗사람이 행하면 그렇게 하라고 약속하지 않아도 아랫사람이 본받음'을 말하는데, 지금 '자신에게 [선함이] 있은 이후에 남에게 [선함을] 요구하고, 자신에게 [악함이] 없은 이후에 남에게 [악함이 있음을] 비판한다'고 말하니, 이는 오히려 [인위적으로] 권면하고 감독하고서야 교화되는 것이다. 또 내면으로 이제 막 자신을 수양해놓고 급히 백성 모두 [선함을] 가지고 있기를 바라고, 자신은 이제야 겨우 [악함을] 면해놓고 마침내 남에게 [악함이] 반드시 없기를 요구한다." 대답했다: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에 대해 말한 것이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미루어 백성들과 함께 말미암는 것이다. 법령의 시행과 선을 포상하고 악을 벌주는 정치는 진실로 이치상 당연해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다.(정치에서 인위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군주가] 명령한 것이 그가 좋아하는 바에 배치되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기 때문에 다시 근본을 미루어 말한 것이다. 먼저 자신을 완성하고 백성을 책망하고자 하는 것이지, 진실로 오로지 자기 수양에만 힘쓰고 백성을 전혀 다스리지 않아서 팔짱 끼고 백성 스스로 교화되기를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 자신의 뛰어남을 뽐내고 백성의 못남을 부끄러워해 백성을 을러 반드시 따르게끔 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선군자께서<sub>주자 부친의 이름은 송(松)이고 자는 교년(喬年)이며 호는 위재선생(韋齊先生)이다.</sub> ‘자신에게 [선함이] 있으면 되지 반드시 남에게 [선함을]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에게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악함이] 없으면 되지 반드시 남에게 [악함이 없기를]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을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 ||
+ | :玉溪盧氏曰: "有諸己而求諸人, 無諸己而非諸人者, 恕也. 求諸人而無諸己, 則不可. 非諸人而有諸己則不可者, 必先有忠而後有恕也." | ||
+ | :옥계 노씨가 말했다: "[<대학>의] ‘자신에게 [선함을] 있어서 [선함을] 남에게 요구하거나, 자신에게 [악함을] 없어서 남에게 있는 [악함을] 비판한다’는 것은 恕이다. [주송의] ‘남에게 [선함을] 요구하면서 자신에게 [선함이] 없어서는 안 된다. 남에게 있는 [악함을] 비판하면서 자신에게 [악함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은, 반드시 忠을 우선하고 恕를 나중에 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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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然則未能有善而遂不求人之善; 未能去<sub>上聲</sub>惡而遂不非人之惡, 斯不亦恕而終身可行乎哉?" 曰: "恕字之旨, 以如心爲義, 蓋曰如治己之心以治人, 如愛己之心以愛人, 而非苟然<ref><한어대사전> 隨隨便便.(아무 생각 없이, 멋대로, 좋을대로)</ref>姑息<ref><한어대사전> 1. 苟安.(안일하다)</ref>之謂也. 然人之爲心, 必甞窮理以正之, 使其所以治己愛己者, 皆出於正, 然後可以即是推之以及於人, 而恕之爲道有可言者. 故<大學>之傳最後兩章, 始及於此, 則其用力之序, 亦可見矣. 至即此章而論之, 則欲如治己之心以治人者, 又不過以强<sub>上聲下同</sub>於自治爲本. 蓋能强於自治, 至於有善而可以求人之善, 無惡而可以非人之惡, 然後推己及人, 使之亦如我之所以自治而自治焉, 則表端景正<sub>景即影字, 古只作景. 至晉葛洪始加彡.</sub>, 源潔流清, 而治己治人, 無不盡其道矣. 所以終身力此而無不可行之時也. 今乃不然, 而直欲以其不肖之身爲標凖, 視吾治教所當及者, 一以姑息待之, 不相訓誥, 不相禁戒, 將使天下之人, 皆如已之不肖, 而淪胥以䧟焉, 是乃大亂之道, 而豈所謂終身可行之恕哉? 近世名卿之言有曰<sub>范純仁, 字堯夫, 諡忠宣公.</sub>: '人雖至愚, 責人則明; 雖有聰明, 恕己則昏. 苟能以責人之心責己, 恕己之心恕人, 則不患不至於聖賢矣.' 此言近厚, 世亦多稱之者. 但恕字之義, 本以如心而得. 故可以施之於人, 而不可以施之於己. 今曰: '恕己則昏', 則是己知其如此矣; 而又曰: '以恕己之心恕人', 則是既不知自治其昏, 而遂推以及人, 使其亦將如我之昏而後已也. 乃欲由此以入聖賢之域, 豈不誤哉? 藉令<sub>平聲</sub>其意但爲欲反此心以施於人, 則亦止可以言下章愛人之事, 而於此章治人之意, 與夫<sub>音扶</sub><中庸>以人治人之說, 則皆有未合者. 蓋其爲恕雖同, 而一以及人爲主; 一以自治爲主, 則二者之間, 毫釐之異, 正學者所當深察而明辨也. 若漢之光武亦賢君也. 一旦以無罪黜其妻, 其臣郅<sub>音質</sub>惲<sub>委粉反</sub>不能力陳大義以救其失, 而姑爲緩辭以慰解之. 是乃所謂'不能三年而緦功之察, 放飯流歠而齒决是憚者. 光武乃謂惲爲善恕己量主, 則其失又甚逺, 而大啓爲人臣者不肯責難陳善以賊其君之罪. 一字之義, 有所不明, 而其禍乃至於此, 可不謹哉?"<br/> | ||
+ | 물었다: "그렇다면 선함을 가지지 못했다면 마침내 남에게 선을 요구하지 않거나, 악함을 아직 제거하지 못했다면 끝내 남의 악함을 비판하지 않는 것, 이것도 '恕해서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대답했다: "'恕'자의 뜻은 '如心'으로 의미를 삼으니, '자신을 다스리는 마음처럼 남을 다스리고, 자신을 아끼는 마음처럼 남을 아낌'을 말하는 것이지, ['마음대로(如心)'라는 말처럼] 아무 생각 없이 마음대로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됨은 반드시 궁리(격물)하고 바로잡아(정심) 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을 아끼는 것(수신)이 모두 바름에서 나오게 한 연후에야 곧 이를 미루어 남에게 미칠 수 있고, 恕의 도리에 말할 만한 것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대학>의 마지막 두 장(전9장<제가치국>, 전10장<치국평천하>)에서 처음 이것(恕)을 언급하였으니, <대학>의 공부 순서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이 장에 대해 논한다면, 자신을 다스리는 마음처럼 남을 다스리려는 것은 또 자신을 다스리는 것(自治)에 힘쓰는 것을 근본으로 함에 지나지 않는다. 대개 자신을 다스리는 데 능히 힘써, '선하게 되어 남에게 선을 요구할 수 있고, 악함이 없게 되어 남의 악을 비판할 수 있게 된' 연후에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쳐 남들도 내가 자신을 다스린 방법처럼 자신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겉모습이 단정해 그림자가 바르고, 근원이 정결해 물줄기가 맑듯 자신을 다스리고 남을 다스림에 도리를 다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이에 힘써도 행하지 못하는 때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아서, 단지 못난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이것을] 내 治教가 마땅히 미쳐야 할 바로 여기고는, 한결같이 제멋대로 남을 대해 훈계하지도 금지하지도 않아 장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못난 자신과 같이 되어 함께 [수렁에] 빠지고자 하니, 이것이 바로 크게 어지러운 도이니, [이것이] 어찌 이른바 '종신토록 행할 만한 恕'이겠는가? 근래 유명한 공경<sub>범순인의 자는 요부(堯夫)이고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sub>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사람이 비록 매우 어리석더라도 남을 비판할 때만큼은 현명하다. 사람이 비록 총명하더라도 자신을 용서(恕)할 때만큼은 어리석다. 만약 남을 비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비판하고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면, 성현이 되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비근하면서도 울림이 있어 세상 사람들도 자주 이를 일컫는다. 다만 '恕'자의 뜻은 본래 '如心'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恕'자는] 남에게 쓸 수 있지 자신에게는 쓸 수 없다. 지금 [범순인이] '자신을 용서(恕)할 때는 어리석다'고 말한 것은 자신이 이처럼 [어리석음을] 아는 것이지만, 또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고 말한다면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다스릴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마침내 이를 미루어 남에게 미쳐 남도 장차 어리석은 나같이 만든 뒤에야 그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통해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고자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설령 범순인의 뜻이 단지 '이 마음을 뒤집어 남에게 베풀고자 한다'는 것이었더라도, 다음 장의 '愛人'의 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 이 장의 '治人'의 일과 <중용>의 '以人治人'<ref><중용장구> 13장. 故君子以人治人,改而止。</ref> 설에 대해서는 모두 부합하지 않는다. 대개 '恕'라고 말한 것은 똑같지만, 하나는 남에게 미치는 것(及人)을 위주로 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다스리는 것(自治)을 위주로 하니, 양자의 미세한 차이가 바로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면밀하게 살펴 분명하게 변별해야 할 바이다. 예를 들어, 후한 광무제 역시 현군이었지만 하루 아침에 죄없이 자기 아내를 쫓아냈는데, 신하였던 질운은 대의를 힘써 말해 군주의 잘못을 구제하지 못하고 그저 완곡한 말로 위로하며 타일렀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삼년상은 잘 치르지 못하면서 시마복이나 소공복만 자세히 살피며, 밥숟가락은 크게 뜨고 국은 흘리면서 마른고기를 이로 끊어 먹는 걸 꺼리는 격'<ref><맹자> <진심상> 47. 不能三年之喪,而緦小功之察;放飯流歠,而問無齒決,是之謂不知務。」</ref>이다. 광무제는 도리어 '질운이 잘 자신을 恕하여 군주를 헤아렸다'고 말했으니 그 잘못이 매우 심할 뿐더러, 신하된 자가 군주를 책망하고 선을 말하려 하지 않아 제 군주를 망치는 죄를 크게 열었다. 한 글자의 뜻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 화가 도리어 이 지경에 이르니,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
+ | :<後漢書> <郅惲傳> 郭皇后廢,<sub>光武之后. 以寵衰數懐懟而廢.</sub> 惲乃言於帝曰: "臣聞夫婦之好, 父不能得之於子, 况臣能得之於君乎? 是臣所不敢言. 雖然, 願陛下念其可否之計, 無令天下有議社稷而巳." 帝曰: "惲善恕己量主, 知我必不有所左右而輕天下也." | ||
+ | :<후한서> <질운전> 곽황후가 폐위되자,<sub>[곽황후는] 광무제의 황후이다. 총애가 식자 자주 원망을 품었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sub> 질운이 이에 광무제에게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부부 간의 애정은 아버지도 자식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신이 폐하께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신이 감히 말할 수 없는 바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폐하께서 황후를 폐하신 일이 괜찮은지 아닌지 유념하셔서, 천하 사람들이 종묘사직 운운하지 않게 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광무제가 말했다: "질운이 자신을 恕하여 군주를 헤아리길 잘하니, 내가 필시 左右??하는 바가 있는데도 천하를 가볍게 여기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 것이다."<ref><후한서> <申屠剛鮑永郅惲列傳> 及郭皇后廢,惲乃言於帝曰:「臣聞夫婦之好,父不能得之於子,況臣能得之於君乎?是臣所不敢言。雖然,願陛下念其可否之計,無令天下有議社稷而已。」帝曰:「惲善恕己量主,知我必不有所左右而輕天下也。」; <자치통감> 권43. 郭后寵衰,數懷怨懟,上怒之。冬,十月,辛巳,廢皇后郭氏,立貴人陰氏為皇后。詔曰:「異常之事,非國休福,不得上壽稱慶。」郅惲言於帝曰:「臣聞夫婦之好,父不能得之於子,況臣能得之於君乎!<sub>賢曰: "得猶制御也. 司馬遷曰: '妃匹之愛, 君不能得之臣, 父不能得之子, 况卑下乎?'"</sub>是臣所不敢言。雖然,願陛下念其可否之計,無令天下有議社稷而已。」帝曰:「惲善恕己量主,知我必不有所左右而輕天下也!」<sub>賢曰: "左右, 猶向背也, 言其齊等."</sub> 帝進郭后子右翊公輔為中山王,以常山郡益中山國,郭后為中山太后,其餘九國公皆為王。 </ref> | ||
+ | :○問如心爲恕. 朱子曰: "如, 比也, 比自家心上推去. 仁之與恕, 只争些子. 自然底是仁; 比而推之, 便是恕." | ||
+ | :○'如心'이 '恕'가 되는 것에 대해 물었다. 주자가 답했다. "如는 비교한다는 것이니, 나의 마음에서 비교해서 (이를) 미루어나가는 것이다. 仁은 恕와 약간의 차이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仁이고, 비교하여 이를 미루어서 나가는 것이 恕다." | ||
+ | :○問: "范忠宣以恕己恕人此語固有病. 但上文先言以責人之心責己, 則連下句亦未害." 曰: "上句自好, 下句自不好. 蓋才恕己便已不是. 若横渠云: '以愛己之心愛人, 則盡仁; 以責人之心責己, 則盡道'<ref><정몽> <中正篇第八> 以責人之心責己則盡道,所謂「君子之道四,丘未能一焉」者也;以愛己之心愛人則盡仁,所謂「施諸己而不願,亦勿施於人」者也;以衆人望人則易從,所謂「以人治人改而止」者也;此君子所以責己責人愛人之三術也。 </ref>, 語便不同. 蓋恕是推去底, 我有是善, 亦要他人有是善. 推此計度之心, 此乃恕也. 於己不當下恕字." | ||
+ | :○물었다. "범충선이 '나를 용서하는 것을 가지고 남을 용서한다'고 한 이 말은 진실로 병폐가 있습니다. 다만 윗글에서 먼서 '남을 책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를 책한다'고 말하였으니 아랫 문장을 이어도 해가 아닌 것입니다." 답했다, "윗 구절은 그 자체로 좋고, 아랫구절은 그 자체로 좋지 않다. 대개 나를 용서하자마자라고 한다면 이미 옳지 않다. 만약 횡거가 말한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남을 아낀다면 仁을 다한 것이고, 남을 책하는 마음으로 나를 책한다면 道를 다한 것이다.'라는 것과는 말이 같지 않다. 대개 恕는 미루어 나가는 것으로 내가 선함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선함을 요구할 수 있어서 이 헤아리는 마음을 미루니 이것이 바로 恕다. 본인(己)에 대해서 아래 恕자가 붙는 것은 옳지 못하다." | ||
+ | :○玉溪盧氏曰: "心必窮理以正之者, 格物致知之事. 治己愛己, 皆出於正者, 誠意正心脩身之事. 即是推之以及人者, 齊家治國平天下之事也. 治己愛己, 皆出於正, 是盡己之忠, 即是推之以及於人, 是推己之恕. 忠者體, 恕者用. 表端源潔, 忠也; 景正流清, 恕也. 忠者, 明徳之事; 恕者, 新民之事. <大學>之道, 一忠恕而已. 此章言治國, 下章言治國平天下, 皆明明徳之推而恕之事也. 此章之義, 則欲如治己之心以治人; 下章絜矩之義, 則欲如愛己之心以愛人. 蓋治國乃平天下之本, 故此章以治人言; 下章以愛人言. 義各有攸當也." | ||
+ | :○옥계노씨가 말했다. "'마음은 반드시 궁리해서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다'라는 것은, 격물치지의 일이요, '나를 다스리고 나를 아끼는 것은 모두 바름에서 나온다'는 것은 성의, 정심, 수신의 일이요 '이것을 미루어서 남에게 미친다'는 것은 제가, 치국, 평천하의 일이다. '治己愛己, 皆出於正'은 '盡己之忠'이요, '即是推之以及於人'은 '推己之恕'이다. 忠은 體이고 恕는 用이다. (위에서) '表端', '源潔'이라고 한 것은 忠이고, '景正', '流清'이라고 한 것은 恕이다. 忠이라는 것은 '明徳'의 일이요, 恕라는 것은 '新民'의 일이다. <대학>의 도는 '忠恕'로 관통될 뿐이다. 이 장에서 치국을 말하고, 아래장에서는 치국, 평천하를 말한 것은 모두 명명덕을 미루어서 恕하는 일이다. 이 장의 뜻은 나를 다스리는 마음과 같이 남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요, 아래장 '絜矩'의 뜻은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나를 아끼고자 하는 것이다. 대개 치국은 평천하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 장에서는 治人으로 말한 것이고, 아래 장에서는 愛人으로 말한 것이니 뜻은 각각 마땅한 바가 있다." | ||
+ | :○新安陳氏曰: "<大學>傳至治國平天下章方言恕. 觀此言恕, 則隱然見脩身以前之當言忠矣. 盧氏之說, 正是即後之言以發明前之所未言者也." | ||
+ | :○신안진씨가 말했다. "<대학>의 傳은 치국, 평천하장에 이르러서 비로소 恕를 말하였다. 이 恕를 말한 것을 보면 은연중에 수신 이전의 일은 忠을 말한 것임을 알겠다. 노씨의 설은 바로 이후의 것을 말하여서 이전에 말하지 않은 것을 드러낸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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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既結上文而復<sub>扶又反</sub>引詩者三, 何也?" 曰: "古人言必引詩, 蓋取其嗟嘆咏歌, 優游厭飫<sub>依據反</sub>, 有以感發人之善心, 非徒取彼之文, 證此之義而已也. 夫<sub>音扶</sub>以此章所論齊家治國之事, 文具而意足矣. 復三引詩, 非能於其所論之外, 别有所發明也. 然甞試讀之, 則反覆吟咏之間, 意味深長, 義理通暢, 使人心融神㑹, 有不知手舞而足蹈者, 是則引詩之助與<sub>音預</sub>爲多焉. 蓋不獨此, 他凡引詩云者, 皆以是求之, 則引者之意可見, 而詩之爲用亦得矣." 曰: "三詩亦有序乎?" 曰: "首言家人, 次言兄弟, 終言四國, 亦'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ref><시경> <대아> <思齊> 刑于寡妻、至于兄弟、以御于家邦。</ref>之意也."<br/> | ||
+ | ○물었다. "이미 윗 글을 결론지었는데 다시 시 세 가지를 인용한 것은 어째서 입니까?" 답했다. "옛 사람들은 말할 적에 반드시 시를 인용했으니 대개 시의 특성들을 취해서 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감발시킬 수 있었으니 다만 저 글자만을 취하여 여기의 뜻을 알린 것이 아니었다. 무읏 이 장에서 논한 제가, 치국의 일은 글이 갖춰져있고 의미가 충분하다. 다시 시 세가지를 인용한 것은 논한 것 이외에 별도로 감발하려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찍이 시험삼아 읽어보니, 반복해서 읊어보는 사이에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고, 뜻이 통하게 되어 사람들도 하여금 마음으로 이해하게 하여서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足之蹈之、手之舞之'<ref> <맹자장구>, 이루상 27. "孟子曰:「仁之實,事親是也;義之實,從兄是也。智之實,知斯二者弗去是也;禮之實,節文斯二者是也;樂之實,樂斯二者,樂則生矣;生則惡可已也,惡可已,則不知足之蹈之、手之舞之。」"</ref> 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시를 인용하는 도움이 많은 것이다. 대개 이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시를 인용해 말한 것은 모두 이러한 이유로 헤아린 것이니, 인용한 사람의 뜻을 알수 있고 시의 쓰임도 얻은 것이다." 물었다. "세 시는 또한 순서가 있습니까?" 답했다. "처음에 家人을 말하였고 다음에 兄弟를 말하였고 마지막에 四國을 말하였으니, 또한 '덕이 적은 부인에게 모범이 되고, 형제들에까지 미쳐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 ||
+ | :新安陳氏曰: "所引詩, 見<大雅><思齊>篇. 孟子甞引之, <集註>云: '御, 治也', 於御字無音; <詩傳>云: '御, 迎也', 於御字音牙嫁反. 當依<集註>如字讀." | ||
+ | :신안진씨가 말했다. "인용한 시는 <大雅>, <思齊>편에 보인다. 맹자가 일찍이 이를 인용하여 <집주>에서 '御는 다스린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御'자가 성조가 없고, <시집전>에서 '御'는 맞이하는 것이다' 라고 한 것은 御의 음이 牙嫁反이니, 마땅히 <집주>가 如字로 읽은 것에 의거해야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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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傳十章=== | ||
+ | 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上老老而民興孝,上長長而民興弟,上恤孤而民不倍,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sub>長,上聲。弟,去聲。倍,與背同。絜,胡結反。</sub><br/> | ||
+ | 이른바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달려있다'는 것은, 위정자가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면 백성들이 효(孝)를 일으키고, 위정자가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면 백성들이 공경(弟)을 일으키며, 위정자가 고아를 긍휼히 대우하면 백성들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혈구지도(絜矩之道)가 있다. | ||
+ | :老老,所謂老吾老也。興,謂有所感發而興起也。孤者,幼而無父之稱。絜,度<sub>待洛反下同</sub>也。矩,所以為方也。<sub>矩者, 制方之器, 俗呼曲尺. 此借以為喻.</sub>言此三者,上行下效,捷<sub>疾業反</sub>於影響,所謂家齊而國治也。亦可以見人心之所同,而不可使有一夫之不獲矣。是以君子必當因其所同,推以度物<sub>物即人也</sub>,使彼我之間各得分<sub>去聲</sub>願,則上下四旁均齊方正,而天下平矣。 | ||
+ | :'老老'는 [<맹자>의 이른바] '내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한다'<ref><맹자> <양혜왕상> 7. 老吾老,以及人之老;幼吾幼,以及人之幼。天下可運於掌。</ref>는 것이다. '興'은 감발하는 점이 있어 흥기함을 말한다. '孤'라는 것은 어린데 부모가 없는 사람을 말한다. '혈(絜)'은 헤아림이고, '구(矩)'는 직각(方)을 만드는 도구이다.<sub>'矩'라는 것은 직각을 만드는 도구이니, 세속에서는 곡척(曲尺)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가지고 비유한 것이다.</sub> [이 구절은 다음을] 말한다: 이 세 가지는 위정자가 실천하면 피치자가 본받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르니, 이른바 '집안이 단속되어 나라가 다스려진다'는 것이고, 또한 [이 세 가지에서] 사람 마음이 매한가지니 한 사람이라도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동일한 마음에 기인해 이를 미루어 남을 헤아려 피아가 각각 원하는 바를 얻게 해야 하니, 이렇게 한다면 상하사방이 고르고 바르게 되어 천하가 평안해질 것이다. | ||
+ | ::朱子曰: "'老老、長長、恤孤', 方是就自家切近處說, 所謂家齊也; '民興孝、興弟、不倍'是就民之感發興起處說, 治國而國治之事也. 上行下效, 感應甚速, 可見人心所同者如此. '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此句方是引起絜矩事; 下面方說絜矩, 而結之云此之謂絜矩之道."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며, 고아를 긍휼히 대우하는 것'은 한창 자기에게 가까운 곳에서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집안이 단속된다'는 것이고, '백성들이 효를 일으키고 공경을 일으키며 배신하지 않는 것'은 백성들이 [위정자의 실천에] 감발해 흥기한 상황에서 말하는 것이니, '나라를 다스려 나라가 다스려진' 일이다. 위정자가 실천함에 피치자가 본받는 감응의 과정이 매우 빠르니, 사람 마음이 이렇게 동일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혈구지도(絜矩之道)가 있다' 이 구절은 한창 혈구(絜矩)의 일을 제기하고 있고, 뒤에서야 혈구(絜矩)를 말하고, '이것을 혈구지도라고 한다'고 마무리한다."<ref><주자어류> 권16. 才卿問:「『上老老而民興孝』,恐便是連那老眾人之老說?」曰:「不然。此老老、長長、恤孤方是就自家身上切近處說,所謂家齊也。民興孝、興弟、不倍此方是就民之感發興起處,說治國而國治之事也。緣為上行下效,捷於影響,可以見人心之所同者如此。『是以君子必有絜矩之道也』,此一句方是引起絜矩事。下面方解說絜矩,而結之云:『此之謂絜矩之道。』</ref> | ||
+ | ::○絜矩之說, 不在前數章, 却在治國平天下章. 到此是節次成了, 方用得. | ||
+ | ::혈구(絜矩)에 대한 설은 이전의 여러 장에 있지 않고 전10장(치국평천하장)에 있다. 전10장에 이르면 절차가 완성되므로 비로소 이를 실천할 수 있다.<ref><주자어류> 권16. 絜矩之說,不在前數章,卻在治國、平天下之後。到這裏,也是節次成了,方用得。</ref> | ||
+ | ::○先說上行下效, 到絜矩處是就政事上說. 若但興起其善心, 不使得遂其心, 雖能興起, 亦徒然耳. 如政煩賦重, 不得養其父母, 畜其妻子, 又安得遂其善心? 須是推己之心, 以及於彼, 使彼仰足以事, 俯足以育, 方得. | ||
+ | ::먼저 위정자가 실천하면 피치자가 본받음을 말하고, 혈구(絜矩) 부분에서는 정사에 대해 말한다. 만일 단지 피치자의 선한 마음만 일으키고 그 마음을 이룰 수 있도록 하지 못한다면, 비록 그들이 선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허사일 뿐이다. 만약 정치가 번잡하고 세금은 무거워 피치자가 자신의 부모를 봉양하거나 자신의 처자식을 기르지 못한다면, 또 어디서 선한 마음을 이룰 수 있겠는가? 반드시 [위정자는]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쳐, 피치자로 하여금 위로는 [위정자를] 섬길 수 있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기를 수 있어야 한다. | ||
+ | ::○能使人興起者, 聖人之教化也; 能遂其興起之心者, 聖人之政事也. | ||
+ | ::사람들이 흥기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성인의 교화이고, 그들이 일으킨 마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성인의 정사이다. | ||
+ | ::○矩者, 心也. 我心所欲, 即他人所欲. 我欲孝弟慈, 必使他人皆如我之孝弟慈, 不使一夫之不獲, 方可. 只我能如此, 他人不能如此, 即是不平矣. | ||
+ | ::구(矩)라는 것은 마음이다. 내 마음이 원하는 바가 바로 남이 원하는 바이다. 내가 효도·공경·자애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남들도 모두 내가 효도·공경·자애하는 것처럼 만들어 한 사람이라도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나만 이렇게 할 수 있고 남은 이렇게 못하는 것은 평안하지 못한 것이다. | ||
+ | ::○絜矩不是外面别有箇道理, 只便是前面正心脩身底推而措之. | ||
+ | ::혈구(絜矩)란 외부에 따로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正心·脩身한 것을 미루어 행하는 것이다. | ||
+ | ::○問: "絜矩之道是廣仁之用否?" 曰: "此乃求仁工夫, 正要著力. 若仁者, 只是舉而措之耳, 不待絜矩而自無不平矣. 絜矩正是恕者之事." | ||
+ | ::물었다: "혈구지도는 仁의 用을 넓히는 것입니까?" 대답하셨다: "혈구지도는 仁을 구하는 공부이니 힘을 쏟아야 한다. 仁이라는 [경지는] 단지 들어다 놓기만 하면 될 뿐 혈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평안하지 않음이 없다. 혈구는 바로 恕의 일이다."<ref><주자어류> 권16. 陶安國問:「絜矩之道,是廣其仁之用否?」曰:「此乃求仁工夫,此處正要著力。若仁者,則是舉而措之,不待絜矩,而自無不平者矣。」銖曰:「仁者,則『己欲立而立人,己欲達而達人』,不待推矣。若絜矩,正恕者之事也。」先生頷之。</ref> | ||
+ | ::○興孝、興弟、不倍, 上行下效之意, 上章已言之矣, 此章再舉之者, 乃欲引起下文'君子必須絜矩然後可以平天下'之意. 不然則雖民化其上以興於善, 而天下終不免於不平也. 故此一章首尾皆以絜矩之意推之, 而未嘗復言躬行化下之說. | ||
+ | ::'興孝·興弟·不倍'는 '위정자가 실천하면 피치자가 본받는다'는 뜻으로 앞장에서 이미 언급했는데 이 장에서 다시 거론한 것은, 다음의 '군자는 반드시 혈구한 연후에 천하를 평안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비록 백성들이 위정자에 감화되어 선한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천하는 끝내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혈구의 뜻에서 미룬 것이고, 더 이상 '위정자가 몸소 실천해 피치자를 감화시킨다'는 설을 말한 적이 없다. | ||
+ | ::○問: "'上老老而民興孝', 下面接'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似不相續, 如何?" 曰: "這箇便是相續. 絜矩是四面均平底道理, 教他各得老其老, 各得長其長, 各得幼其幼. 不成自家老其老, 教他不得老其老; 長其長, 教他不得長其長; 幼其幼, 教他不得幼其幼, 便不得. '是以'二字是結上文, 猶言君子為是之故所以有絜矩之道." | ||
+ | ::물었다: "'위정자가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면 백성들이 효(孝)를 일으킨다' 뒤에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혈구지도(絜矩之道)가 있다'를 이었는데,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대답하셨다: "이 부분은 서로 연결된다. 혈구란 사방으로 균등한 도리이니, 그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고, 자신의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며, 자신의 아이를 아이로 대우하는 것이지, 자기는 자기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면서 남은 자기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지 못하게 하거나, 자기는 자기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면서 남은 자기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지 못하게 하거나, 자기는 자기 아이를 아이로 대우하면서 남은 자기 아이를 아이로 대우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是以' 두 자가 앞 문장을 마무리하니, '군자는 이 때문에 혈구지도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 ||
+ | ::○絜矩如自家好安樂, 便思他人亦欲安樂, 當使無'老稚轉乎溝壑, 壯者散而之四方'之患. 制其田里, 教之樹畜, 皆比以推之. | ||
+ | ::혈구는 마치 자신이 안락함을 좋아하면 남도 안락하고자 함을 생각하고서 그들로 하여금 '노인과 어린이의 시체가 골짜기에 뒹굴고, 청년이 흩어저 사방으로 가는'<ref><맹자> <등문공상> 3. 使老稚轉乎溝壑,惡在其為民父母也?; <양혜왕하> 12. 孟子對曰:「凶年饑歲,君之民老弱轉乎溝壑,壯者散而之四方者,幾千人矣;而君之倉廩實,府庫充,有司莫以告,是上慢而殘下也。</ref> 근심이 없게 해야 하는 것과 같다. 백성들의 농지를 구획하고 나무 심고 가축을 기르게 하는 등의 정치 행위 모두 자신의 마음에 견줘 미루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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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所惡於上,毋以使下;所惡於下,毋以事上;所惡於前,毋以先後;所惡於後,毋以從前;所惡於右,毋以交於左;所惡於左,毋以交於右:此之謂絜矩之道。<sub>惡、先,並去聲。</sub><br/> | ||
+ | 윗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고, 아랫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뒷사람의 앞에 서지 말고, 뒷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앞사람의 뒤에 서지 말며, 오른쪽 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왼쪽 사람과 사귀지 말고, 왼쪽 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오른쪽 사람과 사귀지 않는 것, 이것을 혈구지도(絜矩之道)라고 한다. | ||
+ | :此覆解上文絜矩二字之義。如不欲上之無禮於我,則必以此度下之心,而亦不敢以此無禮使之。不欲下之不忠於我,則必以此度上之心,而亦不敢以此不忠事之。至於前後左右,無不皆然,則身之所處<sub>上聲</sub>,上下、四旁<sub>上下己見上文. 前後左右為四旁, 四旁即四方也.</sub>、長短、廣狹,彼此如一,而無不方矣。彼同有是心而興起焉者,又豈有一夫之不獲哉。所操<sub>平聲</sub>者約,而所及者廣,此平天下之要道也。故章內之意,皆自此而推之。 | ||
+ | :여기서는 앞의 '혈구' 두 자의 뜻을 다시 풀고 있다. 만약 윗사람이 내게 무례했던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로써 아랫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나라도 이렇게 무례하게 아랫사람을 감히 부려서는 안 되고, 아랫사람이 내게 불충했던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로써 윗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나라도 이렇게 불충하게 윗사람을 감히 섬겨서는 안 된다. 전후·좌우의 경우도 모두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다면, 내 자신이 놓여있는 상하·사방·장단·광협의 관계가 피차가 모두 한결같아 바르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니, 나와 똑같은 이 마음을 지녀 흥기한 자들 가운데 또 어찌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는가? 단속하는 바는 간략한데 미치는 효과는 광대하니, 이것이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핵심적 방법이다. 그러므로 전10장의 의미는 모두 이것(혈구)에서 미룬 것이다. | ||
+ | ::朱子曰: "上下、前後、左右都只一様. 心只是將那頭折轉來比這頭. 在我上者使我如此而我惡之, 更不將來待在下之人. 如此則自家在中央, 上面也占許多地步, 下面也占許多地步, 便均平方正. 若下之事我如此而我惡之, 我若將去事上, 便下面長, 上面短, 不方了. 左右前後皆然."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상하·전후·좌우 모두 똑같을 뿐이다. 마음에는 [피차의 구분이 없고] 그저 저것을 돌려 이것에 견주는 것일 뿐이다. 내 위에 있는 자가 나를 이렇게 부려서 내가 싫다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아랫사람을 대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한다면, 내가 가운데에 있으면서 위로도 ?? 아래로도 ?? 똑같이 방정해질 것이다. 만약 아랫사람이 나를 이렇게 섬겨서 내가 싫은데 내가 만약 이렇게 윗사람을 섬긴다면, 아래는 길고 위는 짧아 방정하지 못하게 된다. 좌우·전후 모두 그러하다."<ref><주자어류> 권16. 問絜矩。曰:「只把『上下』、『前後』、『左右』等句看,便見。絜,度也。不是真把那矩去量度,只是自家心裏暗度那箇長那箇短。所謂度長絜大,上下前後左右,都只一樣。心無彼己之異,只是將那頭折轉來比這頭。在我之上者使我如此,而我惡之,則知在我下者心亦似我如此,故更不將所責上底人之心來待下人。如此,則自家在中央,上面也占許多地步,下面也占許多地步,便均平正方。若將所責上底人之心來待下,便上面長,下面短,不方了。下之事我如此,而我惡之,則知在我之上者心亦似我如此。若將所責下底人之心更去事上,便又下面長,上面短了。左右前後皆然。待前底心,便折轉來待後;待左底心,便折轉來待右,如此便方。每事皆如此,則無所不平矣。」</ref> | ||
+ | ::○譬如交代官, 前官之待我既不善, 吾毋以前官所以待我者待後官也. 左右, 如東西鄰. 以鄰國為壑, 是所惡於左, 毋以交於右, 可也. 上下、前後、左右做九箇人來看便見<ref>사고전서본 <사서대전>에는 '便是'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출처로 추정되는 <주자어류> 원문이나 학민본에는 '便見'으로 되어있다.</ref>. | ||
+ | ::관직 교대에 비유하자면, 전임자가 나를 잘 대우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전임자가 나를 대우한 식으로 후임자를 대해서는 안 된다. '좌우'는 동서의 이웃과 같다. '이웃 나라를 구렁으로 여기는 것'<ref><맹자> <고자하> 11. 白圭曰:「丹之治水也愈於禹。」孟子曰:「子過矣。禹之治水,水之道也。是故禹以四海為壑,今吾子以鄰國為壑。</ref>이 '왼쪽 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오른쪽 사람과 사귀는 것'이니,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ref><주자어류> 원문에 의거해 번역했다. <주자어류> 권16 「平天下,謂均平也。『所惡於上,毋以使下;所惡於下,毋以事上。』此與中庸所謂『所求乎臣,以事君未能』者同意。但中庸是言其所好者,此言其所惡者也。」問:「前後左右何指?」曰:「譬如交代官相似。前官之待我者既不善,吾毋以前官所以待我者待後官也。左右,如東鄰西鄰。以鄰國為壑,是所惡於左而以交於右也。俗語所謂『將心比心』,如此,則各得其平矣。」</ref> 상하·전후·좌우 등 [중앙과 팔방] 아홉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알 수 있다??<ref><주자어류> 권16 問絜矩。曰:「只把『上下』、『前後』、『左右』等句看,便見。</ref> | ||
+ |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是兩摺說, 只以己對人言. 若絜矩, 則上之人所以待我, 我又思以待下之人, 是三摺說, 如<中庸>'所求乎子以事父未能'亦是此意. 但<中庸>是言其所好; 此言其所惡也. 人莫不有在我之上者, 莫不有在我之下者, 如親在我之上、子孫在我之下, 我欲子孫孝於我而我却不能孝於親; 我欲親慈於我而我却不能慈於子孫, 便是一畔長一畔短, 不是絜矩. | ||
+ | ::'내가 서고자 하면 남부터 세워주고, 내가 현달하고자 하면 남부터 현달시킨다'<ref><논어> <옹야> 28. 夫仁者,己欲立而立人,己欲達而達人。</ref>는 말은 둘로 접은 설(己·人)이니, 단지 자신을 남에게 대비해 말한 것이다. '혈구'는 윗사람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내가 다시 생각하고서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이니, 셋으로 접은 설(上之人·我·下之人)로 <중용>의 '자식에게 원하는 바로 부모 섬기기를 잘 하지 못한다'<ref><중용장구> 13장. 君子之道四,丘未能一焉:所求乎子,以事父未能也;</ref> 역시 이런 의미이다. 다만 <중용>은 좋아하는 바를 말하는 말하고, 여기는 싫어하는 바를 말하고 있다. 마치 내 위의 부모나 내 아래의 자손처럼 누구나에게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있는데, 자신은 자손이 내게 효도하기를 바라면서 정작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고, 자신은 부모가 내게 자애롭기를 바라면서 정작 자손에게 자애롭지 못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길고 한편으로는 짧은 것이니 '혈구'가 아니다."<ref><주자어류> 권16. 又曰:「『己欲立而立人,己欲達而達人』,是兩摺說,只以己對人而言。若絜矩,上之人所以待己,己又所以待人,是三摺說,如中庸『所求乎子以事父未能也,所求乎臣以事君未能也』,一類意。」; 같은 책, 같은 곳. 李丈問:「盡得絜矩,是仁之道,恕之道?」曰:「未可說到那裏。且理會絜矩是如何。」問:「此是『我不欲人之加諸我,吾亦欲無加諸人』意否?」曰:「此是兩人,須把三人看,便見。人莫不有在我之上者,莫不有在我之下者。如親在我之上,子孫在我之下。我欲子孫孝於我,而我卻不能孝於親;我欲親慈於我,而我卻不能慈於子孫,便是一畔長,一畔短,不是絜矩。」</ref> | ||
+ | ::○問: "長短、廣狭如一而無不方. 在人有天子、諸侯、大夫、士、庶人之分, 何以使之均平?" 曰: "非言上下之分欲使之均平. 盖事親事長, 當使之均平, 上下皆得行之. 上之人得事其親, 下之人也得事其親. 但各隨其分, 得盡其事親事長之意耳." | ||
+ | ::물었다: "'장단·광협의 관계가 피차가 모두 한결같아 바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셨는데, 사람에게는 천자·제후·대부·사·서인의 신분이 있는데, 어떻게 균등하게 합니까?" 대답하셨다: "상하 신분을 균등하게 하려고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나 어른을 섬길 때 똑같이 해야 상하가 모두 순조로워진다. 윗사람이 자신의 부모를 잘 섬겨야 아랫사람도 자신의 부모를 잘 섬길 수 있다. 다만 각각 자신의 분수에 따라 부모나 어른을 섬기는 뜻을 다할 수 있을 뿐이다."<ref><주자어류> 권16. 問:「論上下四旁,長短廣狹,彼此如一,而無不方。在矩,則可以如此。在人則有天子諸侯大夫士庶人之分,何以使之均平?」曰:「非是言上下之分欲使之均平。蓋事親事長,當使之均平,上下皆得行。上之人得事其親,下之人也得以事其親;上之人得長其長,下之人也得以事其長。」</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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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혈구<br/> | ||
+ | 詩云:「樂只君子,民之父母。」民之所好好之,民之所惡惡之,此之謂民之父母。<sub>樂,音洛。只,音紙。好、惡,並去聲,下並同。</sub><br/> | ||
+ | <시>에서 "즐거운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고 하니, 백성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를 싫어하는 자, 이 자를 '백성의 부모'라고 한다. | ||
+ | :詩小雅南山有臺之篇。只,語助辭。言能絜矩而以民心為己心,則是愛民如子,而民愛之如父母矣。 | ||
+ | :<시> <소아> <남산유대>편이다. '只'는 어조사이다. [이 구절은 다음을] 말한 것이다: 혈구해 백성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을 수 있다면, 이는 백성을 자식처럼 아낀 것이니, 백성은 부모처럼 아낄 것이다. | ||
+ | ::此言能絜矩之效. | ||
+ | ::이 구절은 잘 혈구했을 때의 효과를 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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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云:「節彼南山,維石巖巖,赫赫師尹,民具爾瞻。」有國者不可以不慎,辟則為天下僇矣。<sub>節,讀為截。辟,讀為僻。僇,與戮同。</sub><br/> | ||
+ | <시>에서 "깎아지르는 듯한 저 남산, 바위가 겹겹이 쌓였구나. 위대한 태사 윤씨여, 백성들이 모두 그대를 바라보노라"라고 하니, 나라를 소유한 자는 삼가지 않아선 안 되니, 편벽되면 천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 ||
+ | :詩小雅節南山之篇。節,截然高大貌。師尹,周太師尹氏也。具,俱也。辟,偏也。言在上者人所瞻仰,不可不謹。若不能絜矩而好惡殉於一己之偏,則身弒國亡,為天下之大戮矣。 | ||
+ | :<시> <소아> <절남산> 편이다. '節'은 깎아지른 듯 높고 큰 모양이다. '師尹'은 주나라 태사 윤씨이다. '具'은 '모두'이다. '辟'은 '치우침'이다. [이 구절은 다음을] 말한 것이다: 윗자리에 있는 자는 백성들이 우러르는 대상이니, 삼가지 않아선 안 된다. 만약 그가 혈구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기호만 좇아 좋아하고 싫어한다면, 자신은 시해당하고 나라는 망해 천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 ||
+ | ::此言不能絜矩之禍, 與上一節正相反者也. | ||
+ | ::여 구절에서는 혈구하지 못했을 때의 화에 대해 말했으니, 앞 구절과 정반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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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云:「殷之未喪師,克配上帝;儀監于殷,峻命不易。」道得眾則得國,失眾則失國。<sub>喪,去聲。儀,詩作宜。峻,詩作駿。易,去聲。</sub><br/> | ||
+ | <시>에서 "은나라가 아직 대중을 잃지 않았을 때는 능히 [그 덕이]<ref><시경집전> 又言殷未失天下之時,其德足以配乎上帝矣。</ref> 상제에 짝했었다. 마땅히 은나라를 볼 지어다. 큰 명은 [지키기] 쉽지 않도다"라고 하니, 대중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대중을 잃으면 나라를 잃음을 말한다. | ||
+ | :詩文王篇。師,眾也。配,對也。配上帝,言其為天下君,而對乎上帝也。監,視也。峻,大也。不易,言難保也。道,言也。引詩而言此,以結上文兩節之意。有天下者,能存此心而不失,則所以絜矩而與民同欲者,自不能已矣。 | ||
+ | :<시> <문왕>편이다. '師'는 대중이다. '配'는 '짝함'이다. '配上帝'는 그가 천하의 임금이 되어 상제와 짝함을 말한다. '監'은 '봄'이다. '峻'은 '큼'이다. '不易'는 보존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道'는 '말함'이다. 시를 인용해 이를 말함으로써 앞의 두 구절의 의미를 마무리하였다. 천하를 소유한 자가 이 마음을 보존해 잃지 않을 수 있다면, 혈구해 백성들과 똑같이 바라는 것을 저절로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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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財貨를 가지고 혈구를 말함<br/> | ||
+ | 是故君子先慎乎德。有德此有人,有人此有土,有土此有財,有財此有用。<br/> | ||
+ | 그러므로 군자는 먼저 자신의 덕을 삼간다. 덕이 있으면 이에 사람을 얻고, 사람을 얻으면 땅을 얻으며, 땅을 얻으면 재물을 얻고, 재물을 얻으면 그것을 쓰게 된다. | ||
+ | :先慎乎德,承上文不可不慎而言。德,即所謂明德。有人,謂得眾。有土,謂得國<sub>應上文得衆則得國</sub>。有國則不患無財用矣。 | ||
+ | :'먼저 자신의 덕을 삼간다'는 것은 앞 글의 '삼가지 않아선 안 된다'<ref><대학장구> 전10장. 有國者不可以不慎,辟則為天下僇矣。</ref>를 이어 말한 것이다. '德'은 바로 이른바 '명덕'이다. '有人'은 대중을 얻음을 말하고, '有土'는 '나라를 얻음'을 말한다.<sub>앞 글의 "得衆則得國"에 호응한다.</sub> 나라를 얻으면 재용이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 ||
+ | ::朱子曰: "為國, 絜矩之大者又在於財用. 所以後面只管說財."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를 다스릴 때, 혈구하는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또한 재용에 달려있다. 그래서 뒤에서는 그저 재용(財)에 대해 말한다." | ||
+ | ::○自家若意誠、心正、身脩、家齊了, 則天下之人, 安得不歸於我? 如湯、武之東征西怨, 則自然有人有土." | ||
+ | ::자신이 만일 뜻이 진실하고 마음이 바르며 자기 자신이 수양되고 집안이 단속되었다면, 천하 사람들이 어찌 나에게 귀의하지 않겠는가? 탕왕·무왕이 동쪽을 정벌하면 서쪽 사람들이 원망한 것처럼<ref><서경> <상서> <중외지고> 初征自葛,東征,西夷怨;南征,北狄怨,曰:『奚獨後予?』</ref> 저절로 사람과 땅을 얻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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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德者本也,財者末也,<br/> | ||
+ | 덕이라는 것은 근본이고, 재물이라는 것은 말단이니, | ||
+ | :本上文而言。 | ||
+ | :앞 글에 근거해 말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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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外本內末,爭民施奪。<br/> | ||
+ | 근본을 제쳐두고 말단만 중시하면, [이는] 백성들을 다투게 하고 빼앗으라고 가르치는 격이다. | ||
+ | :人君以德為外,以財為內,則是爭鬥其民,而施之以劫奪之教也。蓋財者人之所同欲,不能絜矩而欲專之,則民亦起而爭奪矣。 | ||
+ | :임금이 덕을 제쳐두고 재물만 중시하면, 이는 자기 백성들을 다투게 하고 빼앗으라는 가르침을 펴는 것이다. 재물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똑같이 원하는 바이지만, 혈구하지 못하고 독차지하려고 한다면, 백성들 역시 일어나 다투고 빼앗을 것이다. | ||
+ | ::朱子曰: "民本不是要争奪. 惟上之人以徳為外而暴征横斂, 民便效, 尤相攘相奪. 是上教得他如此." | ||
+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은 본래부터 다투고 빼앗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윗사람이 덕을 제쳐두고 멋대로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기 때문에, 백성이 이를 본받아 더욱 서로 빼앗는 것이니, 이는 위정자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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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是故財聚則民散,財散則民聚。<br/> | ||
+ | 그러므로 재물이 모이면 백성은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백성이 모인다. | ||
+ | :外本內末故財聚,爭民施奪故民散.反是則有德而有人矣。 | ||
+ | :'근본을 제쳐두고 말단을 중시했기' 때문에 '재물이 모이고', '백성을 다투게 하고 빼앗으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백성이 흩어진다. 이와 반대로 하면 '덕이 생기고 사람을 얻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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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是故言悖而出者,亦悖而入;貨悖而入者,亦悖而出。<sub>悖,布內反。悖,逆也。</sub><br/> | ||
+ | 그러므로 어그러져 나간 말은 다시 어그러져 들어오고, 어그러져 들어온 재화는 다시 어그러져 나간다. | ||
+ | :此以言之出入,明貨之出入也。自先慎乎德以下至此,又因財貨以明能絜矩與不能者之得失也。 | ||
+ | :이 구절은 말의 출입으로 재화의 출입을 밝혔다. "先慎乎德"부터 여기까지는 또 재화를 통해 혈구할 수 있는지 못하는지에 따른 득실을 밝혔다. | ||
+ | ::問: "絜矩如何只管說財利?" 朱子曰: "畢竟人為這箇較多. 所以生養人, 只是這箇; 所以殘害人, 亦只是這箇." | ||
+ | ::물었다: "혈구에 대해 [논하는데] 어째서 줄곧 재화만 말하는 것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결국 사람들이 재화를 추구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기 때문이다. 사람을 낳고 기르는 것도 이것 뿐이고, 사람을 해치는 것도 이것 뿐이다."<ref><주자어류> 권16. 或問:「絜矩之義,如何只說財利?」曰:「必竟人為這箇較多。所以生養人者,所以殘害人者,亦只是這箇。且如今官司皆不是絜矩。自家要賣酒,便教人不得賣酒;自家要榷鹽,便教人不得賣鹽。但事勢相迫,行之已久,人不為怪,其實理不如此。」</ref> | ||
+ | ::○此章大㮣是専從絜矩上來. 盖財者, 人之所同好也. 而我欲専其利, 則民有不得其所好者矣. 大抵有國有家所以生起禍亂, 皆是從這裏來. | ||
+ | ::이 장은 대체로 오로지 '혈구'만 다루고 있다. 재물이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그 이익을 독차지하고자 한다면, 백성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자가 생길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라나 집안에 화란이 생기는 이유는 모두 이로부터 말미암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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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br/> | ||
+ | 康誥曰:「惟命不于常!」道善則得之,不善則失之矣。<br/> | ||
+ | :道,言也。因上文引文王詩之意而申言之,其丁寧反覆之意益深切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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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楚書曰:「楚國無以為寶,惟善以為寶。」<br/> | ||
+ | :楚書,楚語。言不寶金玉而寶善人也。 | ||
+ | ::<國語><楚語>王孫圉聘扵晉, 定公饗之, 趙簡子鳴玉以相, 問曰: "楚之白珩, 猶在乎? 其為寳也, 㡬何矣?" 曰: "楚之所寳者, 曰觀射父, 能作訓辭以行事於諸侯, 使無以寡君為口實. 又有左史倚相, 能通訓典, 以敘百物, 以朝夕獻善敗于寡君, 使無忘先王之業. 若諸侯之好幣具, 而導之以訓辭, 寡君其可以免罪於諸侯, 而國民保焉. 此楚國之寳也. 若夫白珩, 先王之玩也, 何寳之焉?"<sub>王孫圉, 楚大夫; 趙簡子, 名鞅. '鳴玉以相', 鳴佩玉以相禮也. 珩, 佩玉之横者.</su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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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舅犯曰:「亡人無以為寶,仁親以為寶。」<br/> | ||
+ | :舅犯,晉文公舅狐偃,字子犯。亡人,文公時為公子<sub>名重耳</sub>,出亡在外也。仁,愛也。事見<sub>形甸反</sub>檀弓。<sub><禮記><檀弓篇>晉獻公之喪, 秦穆公使人弔公子重耳, 且曰: "寡人閒之: 亡國恒於斯, 得國恒於斯. 雖吾子儼然在憂服之中, 喪亦不可久也. 時亦不可失也. 孺子其圖之." 以吿舅犯, 舅犯曰: "孺子其辭焉. 喪人無寳, 仁親以為寳. 父死之謂何? 又因以為利而天下其孰能說之? 孺子其辭焉."<sub>重, 平聲. 喪亦、喪人之喪並去聲. 喪即出亡也. 父死而欲反國求為後, 是因以為利也. 說如字, 猶解也.</sub></sub>此兩節又明不外本而內末之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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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秦誓曰:「若有一个臣,斷斷兮無他技,其心休休焉,其如有容焉。人之有技,若己有之,人之彥聖,其心好之,不啻若自其口出,寔能容之,以能保我子孫黎民,尚亦有利哉。人之有技,媢疾以惡之,人之彥聖,而違之俾不通,寔不能容,以不能保我子孫黎民,亦曰殆哉。」<sub>个,古賀反,書作介。斷,丁亂反。媢,音冒。</sub><br/> | ||
+ | :秦誓,周書。斷斷,誠一之貌。彥,美士也。聖,通明也。尚,庶幾也。媢,忌也。違,拂戾也。殆,危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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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唯仁人放流之,迸諸四夷,不與同中國。此謂唯仁人為能愛人,能惡人。<sub>迸,讀為屏,古字通用。</sub><br/> | ||
+ | :迸,猶逐也。言有此媢疾之人,妨賢而病國,則仁人必深惡而痛絕之。以其至公無私,故能得好惡之正如此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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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見賢而不能舉,舉而不能先,命也;見不善而不能退,退而不能遠,過也。<br/> | ||
+ | :命,鄭氏云「當作慢。」程子云:「當作怠。」未詳孰是。遠,去聲。若此者,知所愛惡矣,而未能盡愛惡之道,蓋君子而未仁者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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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好人之所惡,惡人之所好,是謂拂人之性,菑必逮夫身。<sub>菑,古災字。夫,音扶。</sub><br/> | ||
+ | :拂,逆也。好善而惡惡,人之性也;至於拂人之性,則不仁之甚者也。自秦誓至此,又皆以申言好惡公私之極,以明上文所引南山有臺、節南山之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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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是故君子有大道,必忠信以得之,驕泰以失之。<br/> | ||
+ | :君子,以位言之。道,謂居其位而修己治人之術。發己自盡為忠,循物無違謂信。驕者矜高,泰者侈肆。此因上所引文王、康誥之意而言。章內三言得失,而語益加切,蓋至此而天理存亡之幾決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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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生財有大道,生之者眾,食之者寡,為之者疾,用之者舒,則財恒足矣。<sub>恒,胡登反。</sub><br/> | ||
+ | :呂氏曰:「國無遊民,則生者眾矣;朝無幸位,則食者寡矣;不奪農時,則為之疾矣;量入為出,則用之舒矣。愚按:此因有土有財而言,以明足國之道在乎務本而節用,非必外本內末而後財可聚也。自此以至終篇,皆一意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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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仁者以財發身,不仁者以身發財。<br/> | ||
+ | :發,猶起也。仁者散財以得民,不仁者亡身以殖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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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未有上好仁而下不好義者也,未有好義其事不終者也,未有府庫財非其財者也。<br/> | ||
+ | :上好仁以愛其下,則下好義以忠其上;所以事必有終,而府庫之財無悖出之患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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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孟獻子曰:「畜馬乘不察於雞豚,伐冰之家不畜牛羊,百乘之家不畜聚斂之臣,與其有聚斂之臣,寧有盜臣。」此謂國不以利為利,以義為利也。<sub>畜,許六反。乘、斂,並去聲。</sub><br/> | ||
+ | :孟獻子,魯之賢大夫仲孫蔑也。畜馬乘,士初試為大夫者也。伐冰之家,卿大夫以上,喪祭用冰者也。百乘之家,有采地者也。君子寧亡己之財,而不忍傷民之力;故寧有盜臣,而不畜聚斂之臣。此謂以下,釋獻子之言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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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長國家而務財用者,必自小人矣。彼為善之,小人之使為國家,菑害並至。雖有善者,亦無如之何矣!此謂國不以利為利,以義為利也。<sub>長,上聲。</sub><br/> | ||
+ | :「彼為善之」,此句上下,疑有闕文誤字。自,由也,言由小人導之也。此一節,深明以利為利之害,而重言以結之,其丁寧之意切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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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右傳之十章。釋治國平天下。 | ||
+ | :::此章之義,務在與民同好惡而不專其利,皆推廣絜矩之意也。能如是,則親賢樂利各得其所,而天下平矣。 | ||
+ | :::凡傳十章:前四章統論綱領指趣,後六章細論條目功夫。其第五章乃明善之要,第六章乃誠身之本,在初學尤為當務之急,讀者不可以其近而忽之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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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문』 전10장==== | ||
+ | 或問: "上章論齊家治國之道, 既以孝弟慈爲言矣. 此論治國平天下之道, 而復<sub>扶又反</sub>以是爲言, 何也?" 曰: "三者, 人道之大端、衆心之所同得者也. 自家以及國, 自國以及天下, 雖有大小之殊, 然其道不過如此而已. 但前章專以己推而人化爲言; 此章又申言之以見<sub>形甸反</sub>人心之所同而不能已者如此. 是以君子不唯有以化之, 而又有以處<sub>上聲下同</sub>之也.<sub>新安陳氏曰: "'老老長長恤孤, 躬行於上而民興孝弟不倍於下', 是'有以化之'. '絜矩'是乃'處之'之道也."</sub> 蓋人之所以爲心者, 雖曰未甞不同, 然貴賤殊勢, 賢愚異稟. 苟非在上之君子眞知實蹈有以倡<sub>尺亮反</sub>之, 則下之有是心者, 亦無所感而興起矣.<sub>以上詳說'有以化之'.</sub> 幸其有以倡焉而興起矣, 然上之人乃或不能察彼之心而失其所以處之之道, 則彼其所興起者或不得遂而反有不均之歎. 是以君子察其心之所同而得夫<sub>音扶</sub>絜矩之道, 然後有以處此而遂其興起之善端也.<sub>以上詳説'有以處之'.</sub>" <br/> | ||
+ | 혹자가 물었다. "윗 장에서 齊家, 治國의 도를 논할 적에 이미 孝弟慈를 말했는데, 여기에서 治國, 平天下의 도를 논할 적에 다시 孝弟慈를 말하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답했다. "세 가지는 人道의 핵심이요, 뭇 사람들의 마음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집안에서부터 나라까지, 나라에서부터 천하까지 비록 그 크기는 다르지만, 그 道는 여기(孝弟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다만 이전 장에서는 오직 나를 미루어서 남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또 (효제자를) 거듭 말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똑같이 가진 것이라서 그칠 수 없음이 이와 같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sub>신안진씨가 말했다. "'노인을 노인대접하고 어른을 어른대접하며 고아를 긍휼히 여기는 것을 위에서 부터 몸소 실천하면 백성들이 아래에서 부터 孝, 弟, 不倍를 일으킨다'는 것이 '有以化之'요, '絜矩'가 바로 '그들을 대처'하는 방법이다."</sub> 대개 사람들의 마음은 비록 똑같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지만 귀천이 형세를 달리하고, 어질고 우매함이 기품을 달리하여 만일 위에 있는 군자가 진실로 알고 몸소 실천해서 그들을 선도할 수 있지 않다면 아래사람들 중에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또한 감발하여 흥기함이 없을 것이다. <sub>여기까지가 '有以化之'를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sub> 요행히 그들을 선도하여 흥기시킬 수 있겠지만, 윗 사람들이 이에 간혹 그들의 마음을 살필 수 없고, 그들을 대처하는 방법을 잃어버린다면 그들이 흥기하는 바가 간혹 이루어질 수 없고 도리어 균등하지 못하다는 탄식이 있을 것이니, 이 때문에 군자가 그 마음이 동일한 바를 살피고 絜矩의 방법을 얻은 이후에야 그들에게 대처하고 그 흥기하는 선한 단서를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sub>여기까지가 '有以處之'를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su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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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何以言'絜之爲度'<sub>待洛反下同</sub>也?" 曰: "此<莊子>所謂'挈之百圍'; 賈子所謂'度長絜大'者也.<sub>莊子<sub>名周</sub>人間世篇匠石之齊, 至于曲轅, 見社櫟樹, 其大蔽牛, 絜之百圍.<sub><註> 絜, 圍束也. 是将一物圍束以為之則也.<ref><주자어류> 권16. 道夫云:「古注,絜音戶結反。云結也。」曰:「作『結』字解,亦自得。蓋荀子莊子注云:『絜,圍束也。』是將一物圍束以為之則也。」又曰:「某十二三歲時,見范丈所言如此。他甚自喜,以為先儒所未嘗到也。」</ref></sub>賈子<sub>名誼, 西漢洛陽人.</sub><過秦論>試使山東之國, 與陳渉度長絜大, 比權量力, 則不可同年而語矣.</sub> 前此諸儒, 蓋莫之省<sub>悉井反</sub>而强<sub>上聲</sub>訓以挈<sub>口結反</sub>,<ref><예기정의> 絜,猶結也,挈也。矩,法也。君子有挈法之道,謂當執而行之,動作不失之。</ref> 殊無意謂<ref><한어대사전> 3. 猶意義.</ref>. 先友太史范公<sub>名如圭, 文公父韋齋之友.</sub>乃獨推此以言之, 而後其理可得而通也. 蓋挈, 度也; 矩, 所以爲方也. 以己之心, 度人之心, 知人之所惡<sub>去聲下同</sub>者不異乎己, 則不敢以己之所惡者施之於人, 使吾之身一處乎此, 則上下四方物我之際, 各得其分<sub>去聲</sub>, 不相侵越, 而各就其中. 校<sub>音教</sub>其所占之地, 則其廣狹、長短又皆平均如一, 截然方正, 而無有餘不足之處<sub>去聲</sub>. 是則所謂絜矩者也. 夫<sub>音扶</sub>爲天下國家, 而所以處心制事者一出於此, 則天地之間, 將無一物不得其所, 而凡天下之欲爲孝弟不倍者, 皆得以自盡其心而無不均之歎矣. 天下其有不平者乎? 然君子之所以有此, 亦豈自外至而强<sub>上聲</sub>爲之哉? 亦曰物格知至, 故有以通天下之志, 而知千萬人之心即一人之心; 意誠心正, 故有以勝一己之私而能以一人之心爲千萬人之心. 其如此而已矣."<br/> | ||
+ | 물었다. "어째서 '絜'는 탁(度)이 된다고 말한 것입니까?" 답했다. "이것은 <장자>에서 '둘레가 백아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가의가 '길이를 헤아리고 크기를 재다'라고 말한 것이다." <sub><장자><sub>이름은 周다.</sub><人間世>편에, '장인 石이 齊나라에 가다가, 曲轅에 이르러 社櫟樹를 보았는데 그 크기가 소를 가릴만했고, 둘레가 백 아름이었다'라고 하였다.<sub><註>에 絜, 는 두른다는 것이니 장차 하나의 물건으로 두른 것을 규격으로 삼는다는 것이다.</sub>賈子<sub>이름은 의(誼)요, 서한 낙양사람이다.</sub><過秦論>에 '시험삼아 산동국으로 하여금 진섭과 (서로) 길이와 크기를 재보고 그 힘을 비교해보니, 동등하게 말할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sub> 이 전의 여러 유자들은 대개 아무도 이것을 성찰하지 않고 억지로 '挈'을 뜻으로 하였으니, 매우 말이 안 된다. 아버지의 친우이신 태사범공이<sub>이름은 如圭이고, 문공부 위재의 친구이다.</sub> 이에 홀로 '度'을 미루어서 말씀하신 이후에 그 문맥이 통할 수 있었다. 대개 '絜'는 헤아린다는 것이고 '矩'는 직각을 만드는 것이니,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면 감히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을 것이다. 내 몸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여기에 거처하게 한다면 세상 안의 나와 외물 사이에 각각 그 몫을 얻어서 서로 침범하지 않고 각각 그 中을 얻을 수 있으니, 점유한 곳을 비교해봐도 그 넓이와 길이가 또한 한결같이 일정할 것이고 완전히 딱 정확해서 남거나 부족한 곳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絜矩'라는 것이다. 무릇 나라와 집안을 다스리면서 대처하고 일을 제재하는 방법이 모두 絜矩에서 똑같이 나온다면 천지간에 장차 한 가지라도 그 바른 곳을 얻지 못함이 없을 것이고 무릇 천하에 효, 제, 不倍하고자 아는 사람들이 모두 그 마음을 스스로 다해서 균등하지 않다는 탄식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천하에 어찌 평화롭지 않음이 있겠는가! 그러나 군자가 絜矩를 소유한 것이 또한 어찌 외부에서부터 와서 억지로 하는 것이겠는가. 또한 '物格知至'라고 말하였으니 그러므로 천하의 志를 통달할 수 있고 천만가지 마음은 곧 한 사람의 마음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意誠心正'이라고 말하였으니 그러므로 한 가지의 사사로움을 이겨서 한 사람의 마음을 천만가지 사람의 마음으로 여길 수 있으니 絜矩는 이와같을 뿐이다. | ||
+ | :格庵趙氏曰: "天下之志萬殊, 理則一也. 物格知至者, 能燭理, 則視衆人之心猶一心而明絜矩之義, 公則一致, 私則萬殊; 意誠心正者, 能克己則以一心為衆人之心而盡絜矩之道." | ||
+ | :격암조씨가 말했다. "천하의 뜻은 만가지로 다르지만 理는 하나이다. 물격지지한 사람은 이치를 밝힐 수 있으니 뭇사람들의 마음이 한 마음과 같음을 볼 것이요 혈구의 의미를 밝힐 것이다. 公은 일치하지만 사사로움(私)은 만 가지로 다르니, 자기를 극복할 수 있다면 한 마음을 뭇 사람들의 마음으로 삼아서 혈구의 도를 다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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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一有私意存乎其間, 則一膜<sub>音莫</sub>之外, 便爲胡越<ref><한어대사전> 2. 胡地在北, 越在南, 比喩疎遠隔絶.</ref>, 雖欲絜矩, 亦將有所隔礙<sub>牛代反</sub>而不能通矣. 若趙由之爲守, 則易<sub>去聲</sub>尉; 而爲尉則陵守. 王肅之方於事上而好<sub>去聲</sub>人佞己. 推其所由, 蓋出於此. 而充其類, 則雖桀、紂、盗跖<sub>音隻</sub>之所爲, 亦將何所不至哉?" <br/> | ||
+ | 하나의 사사로운 의도라도 그 사이에 있으면 한 장막의 밖일 뿐이었는데 아주 멀어지게 될 것이니, 비록 絜矩하고자 하더라도 장차 떨어지는 바가 있어서 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마치 조유가 태수가 되면 도위를 업신여기고, 도위가 되면 태수를 능멸하는 것과 왕숙이 윗사람 섬기기에는 맞게하고, 사람이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 그 말미암은 바를 추론해보면 대개 사의에서 나온 것이니 그 사의를 충족한다면 비록 걸주와 도척이 한 짓이라도 장차 무슨 미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 ||
+ | :<史記> <酷吏傳> 周陽由者, 其父趙兼, 以淮南王舅父, 侯周陽. 故因姓周陽氏. 由為郎事孝文及景帝, 景帝時為郡守. 武帝即位, 吏治尚循謹甚. 然由居二千石中, 最為酷暴驕恣, 所居郡, 必夷其豪, 為守視都尉如令; 為令必陵太守, 奪之治. 由後為河東都尉時, 與其守勝屠公<sub>勝屠, 即申屠也.</sub>, 相告言罪. 勝屠公當抵罪, 義不受刑, 自殺而由棄市.<ref><사기> <혹리열전> 周陽由者,其父趙兼以淮南王舅父侯周陽,故因姓周陽氏。由以宗家任為郎,事孝文及景帝。景帝時,由為郡守。武帝即位,吏治尚循謹甚,然由居二千石中,最為暴酷驕恣。所愛者,撓法活之;所憎者,曲法誅滅之。所居郡,必夷其豪。為守,視都尉如令。為都尉,必陵太守,奪之治。與汲黯俱為忮,司馬安之文惡,俱在二千石列,同車未嘗敢均茵伏。由后為河東都尉,時與其守勝屠公爭權,相告言罪。勝屠公當抵罪,義不受刑,自殺,而由棄市。</ref> | ||
+ | :<사기>, <혹리전>에 주양유라는 사람은 그 아버지 조겸이 회남왕의 외삼촌으로 주양의 제후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말미람아 주양씨를 성으로 삼은 것이다. 유가 랑이 되어 효문과 경제를 모셨다. 경제때에 군수가 되었다. 무제가 즉위할 적에 관리들의 풍속이 여전히 법을 지키는 풍속이 심하였다. 그러나 유가 이천 석에 있을 적에 가장 혹독하고 교만하였다. 거처하는 도위는 그의 호족을 배척하였고, 도위를 대할적에 현령과 같이 하였다. 현령이 되어서는 꼭 태수를 능멸했고, 그의 권력을 빼앗았다. 유가 후에 하동군위가 되었을 적에 거기 태수인 승도공과 권세를 다퉜다. <sub>승도는 바로 申屠이다.</sub> 서로 죄를 고하였는데, 승도공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았으나 의리상 형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자살하였고, 유는 기시형을 받아서 죽었다. | ||
+ | :○<魏志> <王肅傳> 肅太和中拜散騎常侍,<sub>肅字子雍, 東海郡人.</sub> 史評曰: "劉寔以為肅方於事上而好下佞己, 此一反也."<ref><삼국지> <王朗傳子名肅> 王肅亮直多聞,能析薪哉!<sub>劉寔以為肅方於事上而好下佞己,此一反也。性嗜榮貴而不求苟合,此二反也。吝惜財物而治身不穢,此三反也。</sub></ref> | ||
+ | :<위지>, <왕숙전>에 왕숙이 태화 때 산기상시에 제수되었다. <sub>숙은 字가 子雍이고, 동해군 사람이다.</sub> 사평에 이르길 '유식은 숙이 윗 사람에게는 맞게 하였지만 아랫사람이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했으니 이것이 하나의 반례이다라고 생각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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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然則絜矩之云, 是則所謂恕者己乎?" 曰: "此固前章所謂'如愛己之心以愛人'者也. 夫子所謂終身可行,<ref><논어> <위령공> 23. 子貢問曰:「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子曰:「其恕乎!己所不欲,勿施於人。」</ref> 程子所謂'充拓<sub>音托</sub>得去, 則天地變化而草木蕃<sub>音煩</sub>; 充拓不去, 則天地閉而賢人隱',<ref><이정외서> 12-22 或問: "明道先生如何斯可謂之恕?" 先生曰: "充擴得去則爲恕." "心如何是充擴得去底氣象?" 曰: "天地變化, 草木蕃." "充擴不去時, 如何?" 曰: "天地閉, 賢人隱."</ref> 皆以其可以推之而無不通耳." | ||
+ | :朱子曰: "推得去, 則物我貫通, 自有箇生生無窮底意思, 便有'天地變化, 草木蕃'氣象. 天地只是這様道理. 若推不去, 物我隔絶, 欲利於己, 不利於人; 欲己之富, 欲人之貧; 欲己之壽, 欲人之夭, 似這氣象, 全然閉塞隔絶了, 便似'天地閉, 賢人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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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然必自其窮理正心者而推之, 則吾之愛惡、取舍<sub>上聲</sub>, 皆得其正; 而其所推以及人者, 亦無不得其正. 是以上下四方, 以此度<sub>音鐸</sub>之, 而莫不截然各得其分<sub>去聲</sub>. 若於理有未明而心有未正, 則吾之所欲者, 未必其所當欲; 吾之所惡者, 未必其所當惡. 乃不察此而遽欲以是爲施於人之凖則, 則其意雖公而事則私. 是將見其物我相侵, 彼此交病, 而雖庭除<ref><한어대사전> 2. 庭院.</ref>之内、跬<sub>丘弭反</sub>歩<ref><한어대사전> 1. 半步, 跨一脚. ; 3. 指極近的距離.</ref>之間, 亦且參商<sub>參音森參商二星名<ref><한어대사전> 1. 參星和商星. 參星在西, 商星在東, 此出彼沒, 永不上見. ; 2. 喩彼此對立, 不和睦.</ref></sub>矛盾<sub>盾食允反二者皆兵器名</sub>而不可行矣. 尚何終身之望哉? 是以聖賢凡言恕者, 又必以忠爲本; 而程子亦言'忠恕兩言, 如形與影',<ref><이정외서> 11-6 或問忠恕之別, 曰: "猶形影也. 無忠則不能爲恕矣."</ref> 欲去<sub>上聲</sub>其一而不可得. 蓋唯忠而後所如之心始得其正, 是亦此篇先後本末之意也.<sub>所當先而為本者, 忠也; 所當後而為末者, 恕也.</sub> 然則君子之學, 可不謹其序哉!" | ||
+ | :朱子曰: "忠是本體, 恕是枝葉, 非是别有枝葉, 乃是本根中發出枝葉." | ||
+ | :○陳氏曰: "大槩忠恕只是一物; 就中截作兩片, 則為二物. 蓋存諸中者既忠, 則發出外來便是恕; 應事接物處不恕, 則是在我者必不十分眞實. 故發出忠底心, 便是恕底事; 做成恕底事, 便見忠底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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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自身而家, 自家而國, 自國而天下, 均爲推己及人之事, 而傳之所以釋之者, 一事自爲一說, 若有不能相通焉者, 何也?" 曰: "此以勢之遠邇、事之先後而所施有不同耳, 實非有異事也. 蓋必審於接物、好惡<sub>二字並去聲下同</sub>不偏, 然後有以正倫理、篤思義而齊其家; 其家已齊, 事皆可法, 然後有以立標凖、胥教誨而治其國; 其國已治<sub>去聲</sub>, 民知興起, 然後可以推已度<sub>待洛反</sub>物、舉此加彼而平天下. 此以其遠近、先後而施有不同者也. 然自國以上<sub>上聲</sub>, 則治於内者嚴宻而精詳; 自國以下, 則治於外者廣愽而周遍, 亦可見其本末實一物, 首尾實一身矣. 何名爲異說哉?" | ||
+ | :格庵趙氏曰: "嚴宻精詳, 所以為廣博周遍之地. 治内者疎略苟簡, 則治外者雖欲廣博周遍, 得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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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所謂'民之父母'者, 何也?" 曰: "君子有絜矩之道, 故能以己之好惡知民之好惡; 又能以民之好惡爲己之好惡也. 夫<sub>音扶</sub>好其所好而與之聚之; 惡其所惡而不以施焉, 則上之愛下, 眞猶父母之愛其子矣. 彼民之親其上, 豈不亦猶子之愛其父母哉?" | ||
+ | :三山陳氏曰: "父母之於子, 其所好惡無有不知者, 體氣同也. 至於民之好惡, 其君常有所不知, 無他, 制於形體之異耳. 能絜矩, 則能以民之心為心, 而可以父母斯民, 民亦父母之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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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此所引節南山之詩, 何也?" 曰: "言在尊位者, 人所觀仰, 不可不謹. 若人君恣己徇私, 不與天下同其好惡, 則爲天下僇如桀、紂、幽、厲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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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得衆得國, 失衆失國, 何也?" 曰: "言能絜矩, 則民父母之而得衆得國矣; 不能絜矩, 則爲天下僇而失衆失國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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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所謂先慎乎徳, 何也?" 曰: "上言有國者不可不謹; 此言其所謹而當先者尤在於徳也. 徳即所謂明徳; 所以謹之, 亦曰格物、致知、誠意、正心以脩其身而已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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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此其深言務財用而失民, 何也?" 曰: "有徳而有人有土, 則因天分地, 不患乎無財用矣. 然不知本末而無絜矩之心, 則未有不爭鬭其民而施之以劫奪之教者也. <易>大傳曰: '何以聚人? 曰財'<ref><주역> <계사하> 1. 天地之大德曰生,聖人之大寶曰位。何以守位曰仁,何以聚人曰財。理財正辭,禁民為非曰義。</ref>; <春秋外傳>曰:<sub>即<國語></sub> '王人者, 將以導利而布之上下者也'<ref><국어> <周語上> 夫王人者,將導利而布之上下者也,使神人百物無不得其極,猶曰怵惕,懼怨之來也。</ref>. 故財聚於上, 則民散於下矣; 財散於下, 則民歸於上矣. 言悖而出者亦悖而入; 貨悖而入者亦悖而出. 鄭氏以爲君有逆命, 則民有逆辭; 上貪於利, 則下人侵畔, 得其㫖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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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前既言命之不易矣,<ref><대학장구> 전10장. 詩云:「殷之未喪師,克配上帝;儀監于殷,峻命不易。」道得眾則得國,失眾則失國。</ref> 此又言命之不常, 何也?" 曰: "以天命之重而致其丁寜之意, 亦承上文而言之也. 蓋'善則得之'者, 有徳而有人之謂也; '不善則失之'者, 悖入而悖出之謂也. 然則命之不常, 乃人之所自爲耳, 可不謹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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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其引<秦誓>, 何也?" 曰: "言好<sub>去聲下同</sub>善之利及其子孫; 不好善之害流於後世, 亦由絜矩與否之異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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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媢疾之人, 誠可惡<sub>去聲下並同</sub>矣. 然仁人惡之之深, 至於如此, 得無疾之已甚之亂邪?" <br/> | ||
+ |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진실로 미워할만 하지만 인한 사람이 그를 미워함이 심한 것이 이와 같은 수준에 이르렀다면 그를 지나치게 미워하여 (생긴) 난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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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小人爲惡<sub>如字. 下惡人、其惡、善惡並同</sub>, 千條萬端, 其可惡者, 不但媢疾一事而已. 仁人不深惡乎彼而獨深惡乎此者, 以其有害於善人, 使民不得被其澤; 而其流禍之長, 及於後世而未已也. 然非殺人于貨之盗, 則罪不至死. 故亦放流之而已. 然又念夫<sub>音扶</sub>彼此之勢雖殊, 而苦樂<sub>音洛</sub>之情則一. 今此惡人放而不遠, 則其爲害雖得不施於此, 而彼所放之地其民復<sub>扶又反</sub>何罪焉? 故不敢以己之所惡施之於人, 而必遠而置之無人之境, 以禦魑<sub>抽知反</sub>魅<sub>音媚</sub>而後已<ref>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18년 조에 “순 임금이 요 임금의 신하가 되어서는 사문을 활짝 열어 손님을 맞아들이고, 사흉의 무리인 혼돈, 궁기, 도올, 도철을 유배하여 사방 변두리로 내쳐서 도깨비들의 재해를 막게 하였다.〔舜臣堯, 賓于四門, 流四凶族渾敦、窮奇、檮杌、饕餮, 投諸四裔, 以禦魑魅.〕”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ref>. 蓋不惟保安善人, 使不蒙其害; 亦所以禁伏凶人, 使不得稔其惡. 雖因彼之善惡而有好惡之殊, 然所以仁之之意, 亦未甞不行乎其間也. 此其爲禦亂之術至矣, 而何致亂之有?" <br/> | ||
+ | 소인이 악을 행함은 다양하니, 그를 미워할 만한 점은 시기하는 일 하나에 그치지지 않는다. 인한 사람이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인 도둑이 아니라면 죄가 사형에 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를 추방할 뿐이다. 그러나 또 생각건데 저 피차의 (지역의) 형세가 비록 다르지만 고락의 감정은 똑같다. 지금 이 악인을 추방하되 멀지 않게 한다면 그 해됨이 비록 여기에는 시행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저 추방된 곳의 백성은 또 무슨 죄겠는가? 그러므로 감히 자신이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시행하지 않으니 반드시 멀리하여 사람이 없는 곳에 두어서 나쁜기운(魑魅)을 막게한 이후에 그친다. 대개 선한 사람을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여 (악한 사람의) 해를 입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흉인을 막고 복종시켜서 그의 악함을 쌓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비록 그의 선악에 따라서 좋고 나쁨의 다름이 있지만 그를 인하게 여기는 뜻이 또한 일찍이 그 사이에 행해지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그가 난리를 막는 기술을 행함이 지극한 것이니 무슨 난리를 부름이 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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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迸之爲屏<sub>必正反下同</sub>, 何也?" 曰: "古字之通用者, 多矣. 漢石刻詞有引'尊五美, 屏四惡'<ref><논어> <요왈> 2. 子張問於孔子曰:「何如斯可以從政矣?」子曰:「尊五美,屏四惡,斯可以從政矣。」</ref>者, 而以尊爲遵, 以屏爲迸, 則其證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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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仁人之能愛人、能惡人, 何也?" 曰: "仁人者, 私欲不萌而天下之公在我. 是以是非不謬<sub>靡又反</sub>而舉措得宜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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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命之爲慢, 與其爲怠也, 孰得?" 曰: "大凡疑義所以决之, 不過乎義理、文勢、事證三者而已. 今此二字欲以義理、文勢决之, 則皆通; 欲以事證决之, 則無考, 蓋不可以深求矣. 若使其於義理、事實之大者有所鄉<sub>許亮反</sub>背<sub>音佩</sub>而不可以不究, 猶當視其緩急以爲先後, 况於此等字既兩通, 而於事義無大得失, 則亦何必苦心極力以求之, 徒費日而無所益乎? 以是而推, 他亦皆可見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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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好善惡<sub>好惡並去聲下同</sub>惡<sub>如字</sub>, 人之性, 然也. 有'拂人之性'者, 何哉?" 曰: "不仁之人, 阿黨媢疾, 有以陷溺其心. 是以其所好惡戾於常性如此, 與民之父母能好惡人者<ref><대학장구> 전10장. 詩云:「樂只君子,民之父母。」民之所好好之,民之所惡惡之,此之謂民之父母。</ref>正相反. 使其能勝私而絜矩, 則不至於是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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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忠信、驕泰之所以爲得失者, 何也?" 曰: "忠信者, 盡己之心而不違於物, 絜矩之本也; 驕泰, 則恣己徇私, 以人從欲, 不得與人同好惡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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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上文深陳財用之失民矣, 此復<sub>扶又反</sub>言生財之道, 何也?" 曰: "此所謂'有土而有財'<ref><대학장구> 전10장. 有德此有人,有人此有土,有土此有財,有財此有用。</ref>者也. 夫<sub>音扶</sub><洪範>八政, 食、貨爲先<sub>見<尚書> <洪範>篇'三八政'疇</sub>;<ref><서경> <주서> <홍범> 三、八政:一曰食,二曰貨,三曰祀,四曰司空,五曰司徒,六曰司寇,七曰賓,八曰師。</ref> 子貢問政, 而夫子告之亦以'足食'爲首;<ref><논어> <안연> 7. 子貢問政。子曰:「足食。足兵。民信之矣。」</ref> 蓋生民之道不可一日而無者, 聖人豈輕之哉? 特以爲國者以利爲利, 則必至於剥民以自奉, 而有悖出之禍. 故深言其害以爲戒耳. 至於崇本節用<sub>'崇本', '生之衆'、'為之疾'也; '節用', '食之寡'、'用之舒'也.</sub>, 有國之常政, 所以厚下而足民者, 則固未甞廢也. 吕氏之說得其㫖矣.<sub>吕說已見章句中<ref><대학장구> 전10장. 呂氏曰:「國無遊民,則生者眾矣;朝無幸位,則食者寡矣;不奪農時,則為之疾矣;量入為出,則用之舒矣。</ref></sub> 有子曰: '百姓足, 君孰 | ||
+ | 與不足?';<ref><논어> <안연> 9. 哀公問於有若曰:「年饑,用不足,如之何?」有若對曰:「盍徹乎?」曰:「二,吾猶不足,如之何其徹也?」對曰:「百姓足,君孰與不足?百姓不足,君孰與足?」</ref>孟子曰: "無政事, 則財用不足",<ref><맹자> <진심하> 12. 孟子曰:「不信仁賢,則國空虛。無禮義,則上下亂。無政事,則財用不足。」</ref> 正此意也. 然孟子所謂政事, 則所以告齊、梁之君, 使之制民之産者是己, 豈若後世頭㑹<sub>古外反</sub>箕歛<sub>力驗反</sub>, 厲民自養之云哉?" | ||
+ | :<前漢書> <陳餘傳> 秦為亂政, 外内騷動, 百姓罷敝<sub>罷音疲</sub>; 頭㑹箕歛, 以供軍費<sub>秦吏到民家, 計人頭數以箕歛之, 而供軍需.</sub>財匱力盡. | ||
+ | :<전한서> <진여전> 진나라가 어지러운 정치를 행해, 나라 안팎으로 동요가 일어나고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진나라 관리들이] 사람 머릿수대로 키질하듯 세금을 거둬 군비에 충당하니, 재정은 바닥나고 민력은 다하였다.<ref><한서> <장이진여전> 至諸縣,說其豪桀曰:「秦為亂政虐刑,殘滅天下,北為長城之役,南有五領之戍,外內騷動,百姓罷敝,頭會箕斂以供軍費,財匱力盡,重以苛法,使天下父子不相聊。</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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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仁者以財發身; 不仁者以身發財', 何也?" 曰: "仁者不私其有, 故財散民聚而身尊; 不仁者惟利是圖, 故捐身賈<sub>音古</sub>禍以崇貨也. 然亦即財貨而以其效言之爾, 非謂仁者眞有以財發身之意也." | ||
+ | 曰: "'未有府庫財非其財'者, 何也?" 曰: "上好<sub>去聲下同</sub>仁, 則下好義矣; 下好義, 則事有終矣; 事有終, 則爲君者安富尊榮, 而府庫之財可長保矣. 此'以財發身'之效也. 上不好仁, 則下不好義; 下不好義, 則其事不終. 是將爲天下僇之不暇, 而况府庫之財又豈得爲吾之財乎? 若商紂以自焚而起鉅橋、鹿臺之財; 徳宗以出走而豐瓊林、大盈之積, 皆'以身發財'之效也." | ||
+ | :<史記> 紂使師㳙作新淫聲, 北里之舞、靡靡之樂. 厚賦税以實鹿臺之財, 而盈鉅橋之粟, 以酒為池, 縣肉為林, 爲長夜之飲, 百姓怨望, 而諸侯有畔者. 周武王於是遂率諸侯伐紂. 紂亦發兵距之牧野. 甲子日, 紂兵敗, 紂走登鹿臺, 衣其寳玉, 乃自焚而死. 武王遂斬紂頭, 懸之白旗. 又<書> <武成>篇<sub>此篇記武王功成之事</sub> "乃反商政, 政由舊. 散鹿臺之財, 發鉅橋之栗, 大賚于四海, 而萬姓悦服." | ||
+ | :<사기> 주왕(紂)이 사연(師㳙)으로 하여금 새로운 음란한 노래, 즉 <북리>라는 춤과 <미미>라는 음악을 짓게 했다. 세금을 심하게 걷어 녹대(鹿臺)에는 재물을 채우고 거교(鉅橋)에는 곡식을 채웠으며,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매달아 숲을 만들어 밤새도록 마시니, 백성들은 원망하고 제후 가운데에는 배신하는 자가 있었다. 주 무왕이 이에 마침내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왕을 정벌했다. 주왕 역시 군대를 일으켜 목야(牧野)에서 항거했다. 갑자일에 주왕의 군대가 패퇴하자, 주왕은 달아나 녹대에 올라 보옥을 둘러입고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다. 무왕이 마침내 주왕의 머리를 베어 백기에 매달았다.<ref><사기> <은본기> 愛妲己,妲己之言是從。於是使師涓作新淫聲,北里之舞,靡靡之樂。厚賦稅以實鹿臺之錢,而盈鉅橋之粟。益收狗馬奇物,充仞宮室。益廣沙丘苑臺,多取野獸蜚鳥置其中。慢於鬼神。大聚樂戲於沙丘,以酒為池,縣肉為林,使男女裸相逐其閒,為長夜之飲。百姓怨望而諸侯有畔者,…… 周武王於是遂率諸侯伐紂。紂亦發兵距之牧野。甲子日,紂兵敗。紂走入,登鹿臺,衣其寶玉衣,赴火而死。周武王遂斬紂頭,縣之白旗。</ref> 또 <서경> <무성편> "상나라 정사를 되돌렸는데, 정사는 옛 것을 따랐다. 녹대의 재물을 나눠주고 거교의 곡식을 베풀어 사해의 백성을 크게 위로하니, 온 백성이 기뻐하며 복종했다."<ref><상서> <주서> <무성> 乃反商政,政由舊。釋箕子囚,封比干墓,式商容閭。散鹿臺之財,發鉅橋之粟,大賚于四海,而萬姓悅服。</ref> | ||
+ | :○<唐書> <陸贄𫝊> "始, 帝播遷<sub>帝, 徳宗也. 朱泚反, 帝出走在外.</sub>, 府蔵委棄, 至是天下貢奉稍至, 乃於行在夾廡署<ref><한어대사전> 3. 布置, 安排.</ref>瓊林、大盈二庫, 别藏貢物. 贄諌以為: '今師旅方殷, 瘡痛呻吟之聲未息, 遽以珍貢私别庫, 恐羣下有所觖望<sub>不滿所望</sub>. 請悉出以賜有功, 給軍賞.' 帝悟, 即撤其署." | ||
+ | :<당서> <육지전> "예전에 황제가 파천했을 때<sub>'황제'는 덕종이다. 주차(朱泚)가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도성 밖으로 달아났다.</sub> 창고를 버려두었는데, 이때 천하 각지의 공물이 조금씩 올라오자 행재소의 협무(夾廡)에 경림(瓊林)·대영(大盈) 두 창고를 설치하고 따로 공물을 보관하였다. 육지가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지금 전쟁이 한창 성하고 부상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급히 공물을 별도의 창고에 개인적으로 보관하신다면 아랫사람들이 불만을 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청컨대 이를 모두 내어 유공자에게 내리시거나 군대의 포상에 사용하십시오.' 황제가 깨달아 바로 설치했던 것을 철거했다."<ref><신당서> 권157 <열전제82 陸贄> 始,帝播遷,府藏委棄,衛兵無褚衣。至是,天下貢奉稍至,乃於行在夾廡署瓊林、大盈二庫,別藏貢物。贄諫,以為:「瓊林、大盈於古無傳。舊老皆言:開元時貴臣飾巧以求媚,建言郡邑賦稅,當委有司以制經用,其貢獻悉歸天子私有之。蕩心侈欲,亦終以餌寇。今師旅方殷,瘡痛呻吟之聲未息,遽以珍貢私別庫,恐群下有所觖望,請悉出以賜有功。令後納貢必歸之有司,先給軍賞,瑰怪纖麗無得以供。是乃散小儲成大儲,捐小寶固大寶也。」帝悟,即撤其署。</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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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其引孟獻子之言, 何也?" 曰: "鷄、豚、牛、羊, 民之所畜<sub>許六反</sub>養以爲利者也. 既已食君之禄而享民之奉矣, 則不當復<sub>扶又反</sub>與之爭. 此公儀子所以㧞園葵去<sub>上聲下同</sub>織婦; 而董子因有與之齒者去其角. 傅之翼者兩其足之喻, 皆絜矩之義也." | ||
+ | :<史記> 公儀休爲魯相, 食茹而美,<sub>食其菜曰茹</sub> 㧞其園葵而棄之; 見其家織布好而疾, 出其家婦, 燔其機, 云: '欲令農夫工女, 安所讎其貨乎?'<sub>讎, 售也. 謂食禄者不得與下民爭利.</sub> | ||
+ | :<사기> 공의휴가 노나라 재상일 때, 자기 채소밭의 채소를 먹었는데 맛이 좋자 자기 채소밭의 채소를 뽑아 갖다버렸고, 자기 집에서 베를 빨리 잘 짜는 것을 보고는 베 짜는 여인을 내쫓고 베틀을 태워버리고는 말했다: "농부와 베 짜는 여인들이 어디서 이 재화를 팔라는 것이냐?"<sub>녹을 받는 자는 백성들과 이익을 다퉈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sub><ref><사기> <순리열전> 公儀休者,魯博士也。以高弟為魯相。奉法循理,無所變更,百官自正。使食祿者不得與下民爭利,受大者不得取小。客有遺相魚者,相不受。客曰:「聞君嗜魚,遺君魚,何故不受也?」相曰:「以嗜魚,故不受也。今為相,能自給魚;今受魚而免,誰復給我魚者?吾故不受也。」食茹而美,拔其園葵而棄之。見其家織布好,而疾出其家婦,燔其機,云「欲令農士工女安所讎其貨乎」?</ref> | ||
+ | :○<西漢書> 董仲舒以賢良對䇿曰: "夫天亦有所分<sub>去聲</sub>, 予<sub>上聲</sub>之齒者去其角,<sub>言天生物賦予有分定. 牛無上齒者, 則有角; 其餘無角則有上齒.</sub> 傅之翼者两其足,<sub>傅, 讀曰附, 附著也. 言鳥不四足</sub> 是所受大者不得取小也. 古之所予禄者, 不食於力, 不勤於末,<sub>末謂工商之業.</sub> 是亦受大者不得取小, 與天同意者也." | ||
+ | :<서한서> 동중서가 현량대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에도 정해진 몫이 있으니, 윗니를 준 소에게는 뿔을 없애고,<sub>하늘이 만물을 낳고 부여함에 일정한 몫이 있음을 말한다. 소 중에 윗니가 없는 것은 뿔이 있고, 나머지 뿔이 없는 소는 윗니가 있다.</sub> 날개를 붙여준 것에는 다리가 두 개 뿐이니,<sub>'傅'는 '附'로 읽으니 붙인다는 것이다. 새는 다리가 넷이 아님을 말한다.</sub> 이는 '큰 것을 받은 자는 작은 것을 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적 봉록을 주는 자가 자기 힘으로 농사지어 먹지 않고 말업에 힘쓰지 않은 것 역시 '큰 것을 받은 자는 작은 것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니, 하늘과 같은 뜻입니다."<ref><한서> <동중서전> 夫天亦有所分予,予之齒者去其角,傅其翼者兩其足,是所受大者不得取小也。古之所予祿者,不食於力,不動於末,是亦受大者不得取小,與天同意者也。夫已受大,又取小,天不能足,而況人乎!此民之所以囂囂苦不足也。</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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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聚歛之臣, 剥民之膏血以奉上, 而民被其殃; 盗臣, 竊君之府庫以自私, 而禍不及下. 仁者之心, 至誠惻怛,<sub>當葛反</sub> 寧亡己之財, 而不忍傷民之力. 所以'與其有聚歛之臣, 寧有盗臣'亦絜矩之義也. 昔孔子以臧文仲之妾織蒲, 而直斥其不仁;<sub>事詳見<論語><公冶長>篇<ref><공자가어> <안회> 顏回問於孔子曰:「臧文仲、武仲孰賢?」孔子曰:「武仲賢哉!」顏回曰:「武仲世稱聖人,而身不免於罪,是智不足稱也;好言兵討,而挫銳於邾,是智不足名也。夫文仲、其身雖歿,而言不朽,惡有未賢?」孔子曰:「身歿言立,所以為文仲也。然猶有不仁者三,不智者三,是則不及武仲也。」回曰:「可得聞乎?」孔子曰:「下展禽,置六關,妾織蒲,三不仁。設虛器,縱逆祀,祠海鳥,三不智。</ref></sub> 以冉求聚歛於季氏, 而欲鳴鼓以聲其罪.<ref><논어> <선진> 16. 季氏富於周公,而求也為之聚斂而附益之。子曰:「非吾徒也。小子鳴鼓而攻之,可也。」</ref> 以聖人之宏大兼容、温良博愛, 而所以責二子者, 疾痛深切, 不少假借如此, 其意亦可見矣." | ||
+ | :三山陳氏曰: "織紝亦儉矣, 而君子疾之, 以其主於利也. 冉求之聚歛, 未必有後世掊克<ref><한어대사전> 聚斂; 搜括. 亦指搜括民財之人. <詩·大雅·蕩>曾是彊禦、曾是掊克。</ref>之事, 但聚歛藏於季氏之家, 而不能布之於下, 則聖人疾而欲攻之, 况剥民力以自富乎?" | ||
+ | :○西山眞氏曰: "近世所謂善理財者, 何其僭<ref><서산문집>에는 '懵'으로 되어있다.</ref>乎此也! 元元<ref><한어대사전> 1. 百姓; 庶民.</ref>已病, 而科歛日興, 不知皮將盡而毛無所附也. 出新巧以籠愚民, 苟邀倍稱<ref><한어대사전> 加倍償還, 借一還二.</ref>之入, 不知朝四暮三之無益也. 孟子曰: '「我能為君充府庫.」今之所謂良臣, 古之所謂民賊也.'" | ||
+ | :서산 진씨가 말했다: "오늘날 '잘 재화를 다룬다'고 하는 자들은 어째서 이리도 이것에 대해 몽매한지요! [그들은] 백성들은 이미 병들었는데 세금을 날로 일으켜, 백성들의 살갗이 닳아 털이 붙어있을 곳이 없는 지경임을 알지 못하고 있고, 새로운 기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구차하게 2배의 세입을 걷지만, 조삼모사의 꼴이라 전혀 이득이 없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날 임금을 섬기는 자는]「나는 임금을 위해 부고를 채워줄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이른바 훌륭한 신하(良臣)는 옛날의 이른바 백성의 도적(民賊)이다.'<ref><맹자> <고자하> 9. 孟子曰:「今之事君者曰:『我能為君辟土地,充府庫。』今之所謂良臣,古之所謂民賊也。</ref>"<ref><서산문집> 권5. 夫晏以一有司粗知財用之本末, 猶能致利若此, 况爲天下者誠能究<大學>生財之義, 一意務徳以養民, 其效可勝計㢤? 臣觀近世所謂善理財者. 何其懵乎此也? 元元已病而科歛日興, 不知皮將盡而毛亡所傳也. 出新巧以籠愚民. 苟邀倍稱之入, 不知朝四莫三之亡益也. 孟子曰: "'我能爲君實倉廩充府庫.' 今之所謂良臣, 古之所謂民賊也."(劉晏은 일개 유사로써 재용의 본말을 거칠게 알았는데도 능히 이익을 이룬 것이 이와 같았으니, 하물며 천하를 다스리는 자가 진실로 <대학> '生財'의 뜻을 궁구하여 한뜻으로 덕에 힘써 백성을 기를 수 있다면, 그 공효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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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國不以利爲利, 以義爲利', 何也?" 曰: "'以利爲利', 則上下交征, 不奪不饜;<ref><맹자> <양혜왕상> 1. 孟子對曰:「王何必曰利?亦有仁義而已矣。王曰『何以利吾國』?大夫曰『何以利吾家』?士庶人曰『何以利吾身』?上下交征利而國危矣。萬乘之國弒其君者,必千乘之家;千乘之國弒其君者,必百乘之家。萬取千焉,千取百焉,不為不多矣。苟為後義而先利,不奪不饜。</ref> '以義爲利', 則不遺其 | ||
+ | 親, 不後其君, 蓋惟義之安而自無所不利矣. 程子曰: '聖人以義爲利. 義之所安, 即利之所生'<ref><이정유서> 16-03 趙景平問:「『子罕言利與命與仁』, 所謂利者, 何利?」 曰:「不獨財利之利, 凡有利心, 便不可. 如作一事, 須尋自家穩便處, 皆利心也. 聖人以義爲利, 義安處便爲利. 如釋氏之學, 皆本於利, 故便不是.」 </ref>, 正謂此也. 孟子分别<sub>筆列反</sub>義利、㧞本塞源之意, 其傳蓋亦出於此云." | ||
+ | :朱子曰: "只萬物皆得其分便是利. 君得其為君, 臣得其為臣, 父得其為父, 子得其為子, 何利如之? 這利字即<易>所謂'利者, 義之和'<ref><주역> 건괘 <문언> 「元」者,善之長也;「亨」者,嘉之會也;「利」者,義之和也;「貞」者,事之幹也。</ref>, 利便是義之和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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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此其言'菑害並至, 無如之何', 何也?" 曰: "怨己結於民心, 則非一朝一夕之可解矣. 聖賢深探其實而極言之, 欲人有以審於未然而不爲無及於事之悔也. 以此爲防, 人猶有用桑羊、孔僅、宇文融、楊矜、陳京、裴延齡之徒, 以敗其國者." | ||
+ | :桑弘羊、楊愼矜, 朱子以在宋避諱, 故各去一字. | ||
+ | :○張氏存中曰: "桑弘羊, 洛陽賈人之子. 漢武帝朝, 為治栗都尉, 領大司農, 盡管天下監鐵, 後為御史大夫. 昭帝朝, 與燕王旦謀反坐誅." | ||
+ | :○孔僅, 漢武帝朝為大農丞, 領鹽鐵事, 後為大農令. | ||
+ | :○宇文融, 辨給多詐. 唐玄宗朝為覆田勸農使, 擢兵部員外郎兼侍御史; 又兼稅地安輯戸口使, 拜御史中丞. 有司劾融交不逞, 作威福, 貶平樂尉. 司農發融在汴州紿隱官息錢巨萬, 給事中馮紹烈深文推證. 詔流嵓州道廣州, 惶恐而卒. | ||
+ | :○楊愼矜, 唐玄宗朝為御史知雜事, 後授御史中丞. 以蓄讖緯妖言賜死. | ||
+ | :○陳京事唐徳宗. 帝討李希烈, 財用屈, 京為給事中與戸部侍郎趙賛請稅民屋間架, 籍賈人資力, 以率貸之. 後以事罷, 為秘書少監卒. | ||
+ | :○裴延齡, 唐徳宗朝為司農少卿, 領度支. 取宿姦老吏與謀, 以固帝幸. 延齡資苛刻, 專剥下附上. 肆騁譎怪, 時人側目. 及死, 人語以相安. 惟帝悼不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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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陸宣公之言曰:<sub>陸公名䞇, 字敬輿, 蘇州嘉興人. 事唐徳宗, 諡曰宣. 其言見奏議.</sub> "民者, 邦之本; 財者, 民之心. 其心傷, 則其本傷; 其本傷, 則枝幹凋瘁<sub>秦醉反</sub>而根柢蹷<sub>居月反</sub>㧞矣." 吕正獻公之言曰:<sub>吕公名公著, 字晦叔, 諡正獻, 河南人. 其言見奏劄.</sub> "小人聚歛以佐人主之欲, 人主不悟以爲有利於國, 而不知其終爲害也. 賞其納忠而不知其大不忠也; 嘉其任怨而不知其怨歸於上也." 嗚呼! 若二公之言, 則可謂深得此章之指者矣. 有國家者可不監哉?" | ||
+ | :格庵趙氏曰: "興利之臣, 不過以聚歛為長䇿; 以掊克為善謀/ 唯求取媚於上而不顧結怨於下, 人主以其奉己之欲悅而寵之, 不知其失民心而蠧國脉. '菑害並至', 匪一朝一夕之可解, 有必然之理者. 此桑羊之徒, 所以誤人之天下國家至於極也. 陸、吕二公之言, 可謂當矣. 如司馬公闢善理財者, 不加賦之說, 則亦所當知. 其言曰: '天地所生財貨百物, 止有此數, 不在民, 則在官. 譬如雨澤, 夏澇則秋旱',<ref><송명신언행록> 후집권7 公曰: "衮辭禄猶賢於持禄固位者. 國用不足真急務. 安石言非是." 安石曰: "不足者, 以未得善理財者也." 公曰: "善理財者, 不過頭㑹箕歛以盡民財, 民窮為盗, 非國之福." 安石曰: "不然. 善理財者, 不加賦而上用足." 公曰: "天下安有此理? 天地所生財貨百物, 止有此數, 不在民則在官. 譬如雨澤, 夏澇則秋旱. '不加賦而上用足', 不過設法隂奪民利, 其害甚於加賦." ; <송사> 권336 <열전제95 사마광> 執政以河朔旱傷,國用不足,乞南郊勿賜金帛。詔學士議,光與王珪、王安石同見,光曰:「救災節用,宜自貴近始,可聽也。」安石曰:「常袞辭堂饌,時以爲袞自知不能,當辭位不當辭祿。且國用不足,非當世急務,所以不足者,以未得善理財者故也。」光曰:「善理財者,不過頭會箕斂爾。」安石曰:「不然,善理財者,不加賦而國用足。」光曰:「天下安有此理?天地所生財貨百物,不在民,則在官,彼設法奪民,其害乃甚於加賦。此蓋桑羊欺武帝之言,太史公書之以見其不明耳。」爭議不已。</ref> 此古今之至言也. 後世之臣, 有以言利媒人主者, 其尚以<大學>此章之㫖. 與三君子之言察之." | ||
+ | :○玉溪盧氏曰: "聖賢千言萬語, 其論道, 只在遏人欲以存天理; 其論治, 只在進君子而退小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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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曰: "此章之文, 程子多所更<sub>平聲下同</sub>定, 而子獨以舊文爲正者, 何也?" 曰: "此章之義博, 故傳言之詳. 然其實, 則不過好惡<sub>並去聲</sub>義利之兩端而已. 但以欲致其詳, 故所言已足, 而復<sub>扶又反</sub>更端以廣其意. 是以二義相循, 間<sub>去聲</sub>見<sub>形甸反下同</sub>層出, 有似於易置而錯陳耳. 然徐而考之, 則其端緒接續, 脉絡貫通, 而丁寧反復爲<sub>去聲</sub>人深切之意, 又自别見於言外, 不可易也. 必欲二說中判, 以類相從, 自始至終, 畫爲兩節, 則其界辨雖若有餘, 而意味或反不足. 此不可不察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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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 |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 ||
|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 |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 ||
− | |①大學之道, 在明明德, | + | |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當作新>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
|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 |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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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 | |③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 | ||
|⑦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康誥》曰: 「作新民.」 《詩》曰: 「周雖舊邦, 其命維新.」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 |⑦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康誥》曰: 「作新民.」 《詩》曰: 「周雖舊邦, 其命維新.」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 ||
− | |⑨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 | + | |⑨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四字衍> |
|⑥《康誥》曰: 「克明德.」 《大甲》曰: 「顧諟天之明命.」 《帝典》曰: 「克明峻德.」 皆自明也. | |⑥《康誥》曰: 「克明德.」 《大甲》曰: 「顧諟天之明命.」 《帝典》曰: 「克明峻德.」 皆自明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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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慎其獨也! 小人閑居為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後厭然, 掩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然, 則何益矣! 此謂誠於中, 形於外, 故君子必慎其獨也.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 |④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慎其獨也! 小人閑居為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後厭然, 掩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然, 則何益矣! 此謂誠於中, 形於外, 故君子必慎其獨也.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 ||
|⑧《詩》云: 「邦畿千里, 惟民所止.」 《詩》云: 「緡蠻黃鳥, 止于丘隅.」 子曰: 「於止, 知其所止, 可以人而不如鳥乎?」 《詩》云: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為人君, 止於仁; 為人臣, 止於敬; 為人子, 止於孝; 為人父, 止於慈; 與國人交, 止於信. | |⑧《詩》云: 「邦畿千里, 惟民所止.」 《詩》云: 「緡蠻黃鳥, 止于丘隅.」 子曰: 「於止, 知其所止, 可以人而不如鳥乎?」 《詩》云: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為人君, 止於仁; 為人臣, 止於敬; 為人子, 止於孝; 為人父, 止於慈; 與國人交, 止於信. | ||
− | |③此謂知本 | + | |③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 |
|⑦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康誥》曰: 「作新民.」 《詩》曰: 「周雖舊邦, 其命維新.」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 |⑦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康誥》曰: 「作新民.」 《詩》曰: 「周雖舊邦, 其命維新.」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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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0일 (금) 11:35 기준 최신판
목차
해제
의적단의 강독 작업 일환으로 개설한 페이지이다.
저본은 <사서장구집주대전>, <대학혹문>이다.
원문
讀大學法
1.
朱子曰。語孟。隨事問答。難見要領。惟大學。是曾子述孔子說古人為學之大方。而門人又傳述[1]以明其旨。前後相因。體統都具。翫味此書。知得古人為學所向。却讀語孟。便易去聲入。後面工夫雖多。而大體已立矣。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논어>와 <맹자>는 일에 따라 문답한 것이므로 핵심을 이해하기 어렵다. 오직 <대학>만은 증자가 공자께서 옛 분들이 학문한 큰 방법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조술하고 [증자의] 문인들이 다시 전술하여 그 뜻을 밝힌 것이어서, 앞뒤로 [맥락이] 서로 연결되고 체계가 모두 갖춰져 있으니, 이 책을 완미한다면 옛 분들의 학문적 지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논어>와 <맹자>를 읽는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뒤에 공부가 비록 많지만, 큰 얼개는 이미 세워진 것이다."
○看這一書又自與看語孟不同。語孟中。只一項事。是一箇道理。如孟子說仁義處。只就仁義上說道理。孔子答顔淵以克己復禮。只就克己復禮上說道理。若大學。却只統說。論其功用之極。至於平天下。然天下所以平。却先須治國。國之所以治。却先須齊家。家之所以齊。却先須修身。身之所以修。却先須正心。心之所以正。却先須誠意。意之所以誠。却先須致知。知之所以至。却先須格物。
이 책을 읽는 것은 <논어>나 <맹자>를 읽는 것과는 또 절로 다르다. <논어>와 <맹자>에서는 한 가지 사건이 하나의 도리일 뿐이다. 예를 들어 맹자께서 인의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은 그저 인의의 차원에서 도리를 말한 것이고, 공자께서 안연에게 '극기복례'라고 대답해주신 부분은 그저 '극기복례'의 차원에서 도리를 말씀하신 것일 뿐이다. [그러나] <대학>은 統說(한 텍스트가 하나의 체계를 설명)일 뿐이다. 최종적 공효를 말한다면 '평천하'에 이르지만, 천하가 평안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국'해야 하고, 나라가 다스려지기 위해서는 먼저 '제가'해야 하며, 집안이 가지런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수신'해야 하고, 자신이 수양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심'해야 하며, 마음을 바루기 위해서는 먼저 '성의'해야 하고, 뜻을 진실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지'해야 하며, 앎을 지극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격물'해야 한다.
○大學。是為學綱目。先讀大學。立定綱領。他書皆雜說在裏許。通得大學了。去看他經。方見得此是格物致知事。此是誠意正心事。此是修身事。此是齊家治國平天下事。
<대학>은 학문의 綱目(큰 줄기와 세목)이다. 먼저 <대학>을 읽어 강령을 강령(큰 줄기)를 굳게 세우고 나면, 다른 책들은 모두 그 안의 여러 설일 뿐이다. <대학>에 통달하고 나서 다른 경전을 보아야 비로소 '이건 격물치지의 일이고, 이건 성의정심의 일이며, 이건 수신의 일이고, 이건 제가치국평천하의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今且熟讀大學作間架。却以他書。塡補去。
지금 우선 <대학>을 숙독하여 얼개를 세우고, 다른 책으로 [세목을] 채워나가라.
○大學。是通言學之初終。中庸是指本原極致處。
<대학>은 학문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전체적으로 말하고, <중용>은 궁극적인 본원을 가리킨다.
○問欲專看一書。以何為先。曰先讀大學。可見古人為學首末次第。不比他書。他書非一時所言。非一人所記。
물었다: "한 책만 집중해서 보고자 한다면, 무슨 책을 먼저 봐야합니까?" 말씀하셨다: "먼저 <대학>을 읽으면 옛 분들이 학문하신 단계를 알 수 있으니, 다른 책이 비길 바가 아니다. 다른 책은 어느 한 시점에 말한 것도 아니고, 한 사람의 기록도 아니다."
2.
又曰。看大學。固是着逐句看去。也須先統讀傳文敎熟。方好[2]從頭仔細看。若專不識傳文大意。便看前頭亦難。
또 말씀하셨다: "<대학>을 읽을 때에는 진실로 구절마다 읽어나가야 하지만, 그래도 먼저 傳文을 통독해 익숙하게 해야 비로소 처음부터 자세하게 읽을 수 있다. 만일 傳文의 대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앞부분 읽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3.
又曰。嘗欲作一說。敎人只將大學一日去讀一遍。看他如何是大人之學。如何是小學。如何是明明德。如何是新民。如何是止於至善。日日如是讀。月來日去。自見所謂溫故而知新。須是知新。日日看得新。方得。却不是道理解[3]新。但自家這箇意思。長長地新。
또 말씀하셨다: "전에 한 마디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저 <대학>을 하루에 한 번 읽게 해, 그들에게 무엇이 '大人의 학문'이며, 무엇이 '소학'이며, 무엇이 '명명덕'이며, 무엇이 '신민'이며, 무엇이 '지어지선'인지 살펴보게 하고자 하였다. 날마다 이처럼 읽어 시간이 흐르면, 절로 이른바 '온고이지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반드시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하니, 날마다 새로운 것을 읽어야 옳다. 도리가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이 생각이 길이길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讀大學。初間也只如此讀。後來也只如此讀。只是初間讀得。似不與自家相關。後來看熟。見許多說話。須著如此做。不如此做自不得。
<대학>을 읽을 때 처음에도 이렇게 읽고 나중에도 이렇게 읽으라. 처음 읽었을 때에는 나와 상관이 없는 것 같겠지만, 나중에 읽는 것이 익숙해지고 나면 여러 말이 이렇게 해야 하거나 절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여러 말대로 해야 하거나 절로 여러 말대로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讀書。不可貪多。當且以大學為先逐段熟讀精思。須令了了分明。方可改讀後段。看第二段。却思量前段。令文意連屬音燭。却不妨。
책을 읽을 때 많이 읽기를 탐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우선 <대학>을 우선으로 해서 단락마다 자세히 읽으며 정밀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명명백백하게 이해하고서야 다음 단락을 읽어야 하고, 두 번째 단락을 읽을 때 앞 단락을 생각해 문의가 연결되게 해야 문제가 없을 것이다.
○問大學稍通。方要讀論語。曰且未可。大學稍通。正好着陟略反。下同心精讀。前日讀時。見得前未見得後面。見得後未見得前面。今識得大綱體統。正好熟看。讀此書。功深則用博。昔尹和靖見伊川半年。方得大學西銘看。今人半年。要讀多少書。某且要人讀此是如何。緣此書却不多。而規模周備。凡讀書。初一項。須著十分工夫了。第二項。只費得八九分工夫。第三項。便只費得六七分工夫。少間[4]讀漸多。自通貫。他書自著不得多工夫。
물었다: "<대학>은 조금 알겠으니, 이제 <논어>를 읽으려고 합니다." 말씀하셨다: "아직 안 된다. <대학>을 조금 알게 되었다면, 이제는 집중해서 정독할 때다. 전에 읽었을 때에는 앞부분만 이해하고 뒷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뒷부분만 이해하고 앞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지금 [<대학>을 조금 알게 되어] 큰 얼개와 체계를 이해했다면, 이제는 숙독할 때다. 이 책을 읽는 공부가 깊어진다면 공효가 넓어질 것이다. 전에 윤화정은 이천 선생을 뵌 지 반 년이 돼서야 <대학>과 <서명>을 볼 수 있었는데, 요즘 사람들은 반 년만에 많은 책을 읽으려고 한다. 나는 우선 사람들로 하여금 이 책만 읽게 하는데, 어째서일까? 이 책이 분량은 많지 않지만 체계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100%로 노력해야 하지만, 두 번째에는 8-90% 노력만 필요로 하고, 세 번째에는 6-70%의 노력만 필요로 하니, [그렇게 되면] 오래지 않아 읽는 것이 점차 많게 되고 절로 이해하게 되어, 다른 책에 절로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看大學。俟見大指。乃及他書。但看時。須是更將大段分作小段。字字句句。不可容易放過。常時暗誦黙思反覆硏究。未上口時。須敎上口。未通透時。須敎通透。已通透後。便要純熟。直待[5]不思索時。此意。常在心胸之間。驅遣不去[6]。方是。此一段了。又換一段看。令如此數段之後。心安理熟。覺工夫省力時。便漸得力也。
<대학>을 읽을 때 요지를 이해하고서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다만 [<대학>을] 읽을 때 큰 단락을 다시 작은 단락으로 나눠야 하고, 글자마다 구절마다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평소에 암송하기도 하고 묵묵히 생각하기도 하며 반복해서 탐구해, 입에 붙지 않았을 때에는 입에 붙게 해야 하고,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을 때에는 완전히 이해되기 해야 하며, 완전히 이해된 이후에는 숙달되게 해서, 사색하지 않을 때에도 이 뜻이 늘 마음에 있어 쫓아버릴 수 없어야 한다. 이 단락이 끝나고서 다음 단락을 읽어 이와 같이 여러 단락을 하고 나면 마음은 안정되고 이해가 무르익어, 공부에 힘이 덜 든다고 느낄 때 점차 힘을 얻게 될 것이다.
4.
又曰。大學是一箇腔子。而今却要塡敎平聲他實。如他說格物。自家須是去格物後塡敎他實著。誠意亦然。若只讀得空殼子。亦無益也。
또 말씀하셨다: "<대학>은 腔子이니, 지금 메워 그것을 채워야 한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격물'을 말하면, 스스로 '격물'한 뒤에 메워 그것을 채워야 한다. '성의'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그저 빈 껍데기만 읽는다면 무익할 것이다."
○讀大學。豈在看他言語。正欲驗之於心如何。如好好色惡惡臭。試驗之吾心。果能好善惡惡如此乎。閒居為不善。是果有此乎。一有不至。則勇猛奮躍不已。必有長上聲進。今不知如此。則書自書我自我。何益之有。
<대학>을 읽는 [목적이] 어찌 그 문장을 읽는 데 달려있겠는가? 다만 내 마음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대학>에서]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 악취를 싫어하듯이 한다'[7]고 하는데, [이것을] 한 번 자기 마음에 비춰보면, 과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기를' 이처럼 할 수 있는가? [<대학>에서 '소인은] 혼자 있을 때 불선한 짓을 한다'[8]고 하는데, 과연 [나에게] 이런 점이 있는가? 하나라도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용맹하게 분발하기를 그치지 않아야 반드시 발전이 있을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한다면, 책은 책이고 나는 나일 것이니,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 新安陳氏曰: "凡讀書之法, 皆當如此, 非但<大學>也."
- 신안 진씨가 말했다: "무릇 독서법은 모두 이와 같아야 하니, <대학>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5.
又曰。某一生。只看得這文字透。見得前賢所未到[9]處。溫公作通鑑。言平生精力。盡在此書。某於大學亦然。先須通此。方可讀他書。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일생토록 이 글을 철저하게 읽어 이전 현인들이 알지 못했던 바를 알게 되었다. 사마온공은 <자치통감>을 짓고서 '평생의 정력이 모두 이 책에 있다'고 말했는데, 내가 <대학>에 있어서 역시 그러하다. 먼저 이 책에 통달하고서 다른 책을 봐야 한다."
6.
又曰。伊川舊日。敎人先看大學。那時。未解說。而今有註解。覺大段分曉了。只在仔細看。[10]
또 말씀하셨다: "이천 선생께서 전에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대학>을 읽게 하셨지만 그때에는 [<대학>을] 풀이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주해가 있어 [의미가] 대단히 분명하다고 생각하니, 그저 자세하게 읽는 데 달렸을 뿐이다."
- 陳氏曰: "<大學章句>巳示學者一定之凖, 只直按他見成底熟, 就裏面看意思滋味, 便見得無窮義理出焉."
- 진씨가 말했다: "<대학장구>에서 이미 배우는 자들에게 일정한 기준을 보여주었으니, 그저 그 완성된 것을 익숙히 살펴 그 안의 의미나 맛을 보게 된다면, 무궁한 의리가 거기서 나옴을 알게 될 것이다."
7.
又曰。看大學。且逐章理會。先將本文念得。次將章句來解本文。又將或問來參章句。須逐一令平聲。下同記得。反覆尋究。待他浹洽。旣逐段曉得。却統看溫尋過。
또 말씀하셨다: "<대학>을 볼 때 우선 장마다 이해해야 한다. 먼저 본문을 생각해보고서 다음으로 <장구>로 본문을 해석해보고, 다시 <혹문>으로 <장구>에 참조해보라. [그리고 나서] 하나하나 기억나게 하고 반복 탐구해 그것이 [마음에] 젖어들게 하라. 단락마다 이해되고 나면, 전체적으로 읽으며 복습해보라."
8.
又曰。大學一書有正經有章句有或問。看來看去。不用或問。只看章句便了。久之又只看正經便了。又久之自有一部大學在我胸中。而正經亦不用矣。然不用某許多工夫。亦看某底不出。不用聖賢許多工夫。亦看聖賢底不出。
또 말씀하셨다: "<대학> 한 텍스트에는 正經(경전 원문), <章句>, <或問>이 있다. 여러 번 읽다보면 <혹문>은 필요하지 않고 <장구>만 읽어도 될 것이며, [읽기가] 오래되면 다시 경전 원문만 읽어도 될 것이다. [읽기가] 더 오래되어 저절로 <대학> 한 부가 마음속에 있게 되면, 경전 원문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주자)의 많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 것을 알 수 없고, 성현의 많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성현의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9.
又曰。大學解本文未詳者。於或問中詳之。且從頭逐句理會。到不通處却看。或問乃註脚之註脚。
또 말씀하셨다: "<대학>에서 본문을 해석하다가 자세하지 않은 것은 <혹문> 가운데 상세히 설명하였으니, 처음부터 구절마다 이해하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면 읽어보라. <혹문>은 바로 '주석의 주석'이다."
○某解書不合太多。又先準備學者為去聲他設疑說了。所以致得學者看得容易去聲了。
내가 책을 너무 상세하게 해설해서는 안 됐지만, 그래도 배우는 자들을 미리 대비해 그들을 위해 의문을 가설해 설명해서 배우는 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했다.
○人只說某說大學等不略說使人自致思。此事大不然。人之為學。只爭箇肯與不肯耳。他若不肯向[11]這裏。略亦不解致思。他若肯向此一邊。自然有味。愈詳愈有味。[12]
사람들은 그저 내가 '<대학> 등에 대해 설명할 때, 간략하게 설명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을 다하지 못하게 한다(상세하게 설명해 해석의 여지를 좁힌다)'고만 말하는데, 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학문함은 그저 긍정하냐 긍정하지 않냐를 따질 뿐이다. 그가 만약 이쪽에 대해 긍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간략하게 설명하더라도 생각을 다하지 못하겠지만, 그가 만일 이쪽에 대해 긍정한다면 절로 재미가 있어, 설명이 상세할수록 재미있을 것이다.
- 陳氏曰: "<大學>約其旨於<章句>, 已的確眞切; 而詳其義於<或問>, 又明實敷暢. <章句>中太簡而或未喻則易枯, 必於<或問>詳之; <或問>中太博而或未貫則易泛, 必於<章句>約之."
- 진씨가 말했다: "<대학>에서 그 뜻을 <장구>에 요약시켜 놓았으니 이미 적확하고 진실한 데다가, <대학>에서 그 뜻을 <혹문>에 상세히 설명하였으니 명확하고 막힘이 없기까지 하다. <장구>의 내용이 너무 간략해 혹 이해가 안 되면 지치기 쉬우니 반드시 <혹문>을 상세히 살펴보고, <혹문>의 내용이 너무 자세해서 혹 맥락이 잡히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쉬우니 반드시 <장구>로 핵심을 잡으라."
- ○新安陳氏曰: "右二條之説不同, 而可互相發明."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위의 두 조목(○某解書, ○人只說)의 말이 같지 않지만, 서로 밝혀줄 수 있다."
大學章句序
1.
大學之書。古之大學所以敎人之法[13]也。蓋自天降生民。則旣莫不與之以仁義禮智之性矣。
<대학>은 옛적 태학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던 교법(표준 텍스트)이다. 대개 하늘이 백성을 내리고 나서 이미 인의예지의 성을 주지 않은 경우는 없다.
- 朱子曰。天之生民。各與以性。性非有物。只是一箇道理之在我者耳。仁則是箇溫和慈愛底道理。義則是箇斷制裁割底道理。禮則是箇恭敬撙節底道理。智則是箇分別是非底道理。凡此四者。具於人心。乃是性之本體。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백성을 낳을 때 각각 性을 부여했다. 性은 물건이 아니라 그저 나에게 있는 도리일 뿐이다. 인은 온화하고 자애로운 도리이고, 의는 판단하고 제재하는 도리이며, 예는 공경하고 절약하는 도리이고, 지는 시비를 분별하는 도리이다. 무릇 이 네 가지는 사람의 마음에 갖춰져 있으니, 바로 성의 본모습(本體)이다."
- ○雲峯胡氏曰。朱子四書。釋仁曰心之德。愛之理。義曰心之制。事之宜。禮曰天理之節文。人事之儀則。皆兼體用。獨智字未有明釋。嘗欲竊取朱子之意以補之。曰智則心之神明。所以妙衆理而宰萬物者也。番易沈氏云。智者。涵天理動靜之機。具人事是非之鑑。
- 운봉 호씨가 말했다: "주자의 <사서>에서 인은 '마음의 덕이자 사랑의 이치'라고 하고, 의는 '마음의 제재이자 일의 마땅함'이라 하며, 예는 '천리의 절문이며 인사의 의칙'이라고 하니, 모두 體用을 겸한다. [그런데] 유독 智자에만 분명한 해석이 없다. 전에 주자의 생각을 삼가 취해 보충하려고 했다: '智는 마음의 신명이니, 뭇 이치를 신묘하게 [갖추고서]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 파양 심씨가 말하길: '智라는 것은 天理動靜의 기틀을 포함하고, 인사의 시비를 [비추는] 거울을 갖추고 있다.'라고 하였다."
- ○新安陳氏曰。書云。惟皇上帝。降衷于下民。若有恒性。六經言性自此始。謂天降生民而與之以性。亦本書之意而言。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서경>에서 말하길: '위대한 상제께서 백성들에게 속마음(衷)을 내려주셔서 순히 변치 않는 性을 두셨다'[14]고 하니, 육경에서 性을 말하는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대학장구서>에서] '하늘이 백성을 내리고 나서 性을 주었다'고 말한 것 역시 <서경>의 뜻에 근거해 말한 것이다."
然其氣質之稟。或不能齊。是以不能皆有以知其性之所有而全之也。
그러나 품수받은 기질이 혹 일정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性에 있는 [인의예지를] 알고서 이를 온전히 할 수는 없다.
- 新安陳氏曰。性之所有。卽仁義禮智是也。性無智愚賢不肖之殊。惟氣有淸濁。淸者能知。而濁者不能知。故不能皆知。質有粹駁。粹者能全。而駁者不能全。故不能皆全。知性之所有屬知。全性之所有屬行。知行二者。該盡一部大學。意已寓於此矣。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지닌 性'은 곧 인의예지가 이것이다. 性에는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현명한 자와 못난 자의 차이가 없고, 오직 氣에 맑고 탁함의 차이가 있어서, 기가 맑은 자는 지닌 성을 알 수 있지만, 기가 탁한 자는 알 수 없다. 質에는 순수하고 잡박함의 차이가 있어, 質이 순수한 자는 [자신의 성을] 온전히 할 수 있지만, 잡박한 자는 온전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온전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닌 성을 아는 것은 앎(知)에 속하고, 지닌 성을 온전히 하는 것은 실천(行)에 속한다. 앎과 실천(知行) 두 가지는 <대학> 한 부에 완비되어 있으니, 그 의미가 이미 여기에 깃들여져 있다."
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出於其間。則天必命之。以為億兆之君師。使之治平聲下治人同而敎之。以復其性。
총명예지를 갖추고서 자신의 성을 다할 수 있는 자가 혹 한 명이라도 그 사이에서 나오면, 하늘은 반드시 그에게 명하여 뭇 백성의 임금이자 스승(君師)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백성들을 다스리고 가르쳐 자신의 성을 회복하게(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 問何處見得天命處。朱子曰。此也如何知得。只是才生得一箇恁地底人。定是為億兆之君師。便是天命之也。他旣有許多氣魄才德。決不但已[15]。必統御億兆之衆。人亦自是歸他。如三代已前。聖人都是如此。至孔子方不然。雖不為帝王。然也閑他不得。也做出許多事來。以敎天下後世。是亦天命也。
- 물었다: "어디에서 천명을 볼 수 있습니까?"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또 어찌 알겠느냐? 그저 이런 사람을 낳자마자 반드시 뭇 백성의 임금이자 스승으로 삼는 것, 이것이 '하늘이 명한 것'이다. 그는 많은 기백과 재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뭇 백성을 통솔할 것이요, 사람들 또한 스스로 그에게 귀의할 것이니, 삼대 이전의 성인들은 모두 이와 같았다. 공자에 이르러 비로소 그러하지 못했다. 공자의 경우 비록 제왕으로 삼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를 내버려 둘 수 없었고, 그래도 수많은 일을 해내 천하 후세를 가르치게 하셨으니, 이 또한 천명이다."
- ○新安陳氏曰。聰明睿智。能盡其性者。是就淸濁粹駁不齊中。指出極淸極粹者言之。聰明睿智。生知之聖也。與知其性相應。能盡其性。安行之聖也。與全之相應。常人必先知其性。方可望以全其性。故於中下一而字。聖人合下生知安行。不待知而方全。故只平說。天必命之以為億兆君師。君以治之。師以敎之。變化其氣質。而復還其本性。以上四箇性字。須融貫看透。三代以前。聖賢之君。君師之責兼盡。三代以後。君道有略得之者。而師道則絶無矣。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총명예지를 갖추고서 자신의 성을 다할 수 있는 자'는 기질의 청탁/수박이 고르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지극히 맑고 지극히 순수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총명예지를 갖춘 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生知) 성인이니, '자신의 성을 안다'와 호응한다. '자신의 성을 다할 수 있는 자'는 편안히 여겨 행하는(安行) 성인이니, '온전히 한다'와 상응한다. 보통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의 성을 알아야 비로소 자신의 성을 온전히 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운데에 '而'자를 두었다. 성인은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편안히 여겨 행하니, 보통 사람들처럼 자신의 성을 알고서 비로소 온전히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다만 평이하게 말했다. 하늘은 반드시 그에게 명하여 뭇 백성의 임금이자 스승이 되게 하여, 임금의 자격으로 그들을 다스리고, 스승의 자격으로 그들을 가르쳐 기질을 변화시켜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상 네 번의 性자(仁義禮智之性, 知其性之所有, 能盡其性, 復其性)를 반드시 일관하여 철저히 읽어야 한다. 삼대 이전의 성현이었던 임금들은 임금과 스승의 책임을 모두 지극히 하셨지만, 삼대 이후에는 임금의 도(君道)의 경우에는 이를 대략 얻은 자는 있었지만 스승의 도(師道)의 경우에는 [이를 대략이라도 얻은 자가] 전혀 없었다."
此伏羲神農黃帝堯舜。所以繼天立極。而司徒之職。典樂之官。所由設也。
이것이 복희·신농·황제·요·순이 하늘의 뜻을 잇고 법도를 세운 까닭이며, 사도의 직책과 전악의 관직이 설치된 이유이다.
- 書舜典。帝曰。契。汝作司徒。敬敷五敎在寬。又曰。夔。命汝典樂。敎冑子。
- <서경> <순전>에 "요임금께서 말씀하셨다: '설아! 너는 사도가 되어 공경히 五敎를 펴되, 너그럽게 하라."고 하였고, 또 "기야! 너를 전악으로 임명하니, 冑子[16]를 가르쳐라."라고도 하였다.
- ○朱子曰。天只生得許多人物。與你[17]許多道理。然天却自做不得。所以必得聖人為之脩道立敎。以敎化百姓。所謂裁成天地之道。輔相天地之宜是也。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은 그저 수많은 인물을 낳고 모든 사람에게 많은 도리를 부여한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작용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성인을 얻어 그로 하여금 도를 닦고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교화하게 했으니, 이른바 '천지의 도를 재단하고 이루며, 천지의 마땅함을 돕는다'[18]는 것이 이것이다."
- ○古者敎法。禮樂射御書數。不可闕一。就中樂之敎尤親切。夔敎冑子。只用樂。大司徒之職。也是用樂。蓋是敎人朝夕從事於此物。束得心長在這上面。蓋為樂有節奏。學他底。急也不得。慢也不得。久之都換了他情性。
- 과거의 교법(교과 과정)인 육예(禮樂射御書數)는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안 되는데, 그 가운데 음악의 가르침은 더욱 친절하다. 夔가 冑子를 가르칠 때 단지 음악을 사용했고, 대사도의 직임도 음악을 사용했으니, 대개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 종일 이것에 종사하게 해서 마음을 단속해 오래토록 여기에 있게 한 것이다. 대개 음악을 연주하는 데에는 리듬(節奏)이 있으니, 그것을 배울 때에는 급해도 안 되고 느슨해서도 안 된다. [음악을 배우는 것이] 오래되면 그들의 情性을 모두 바꿀 것이다.
- ○雲峯胡氏曰。司徒之職。統敎百姓。典樂之官。專敎冑子。
- 운봉 호씨가 말했다: "사도의 직책은 백성을 통솔하고 가르치는 것이며, 전악의 관리는 오로지 冑子만 가르친다."
- ○新安陳氏曰。上文說其理。此實之以其事。天生民而賦與之。不能敎之。聖君代天立標準。以主敎於上。而設司徒及典樂之官。以掌敎於下。此時敎已立。而敎之法未備。學之名未聞也。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앞의 글에서 이치를 말했다면, 여기서는 일로 실증한다. 하늘은 백성을 낳고 [성을] 부여하지만, [직접] 가르치지는 못한다. 성군이 하늘을 대신해 표준을 세워 위에서 가르침을 주관하고, 사도와 전악의 관직을 설치해 아래에서 가르침을 관장하게 했다. 이때에는 가르침이 이미 세워졌지만 교법(교육 제도)가 미비했고, '학교'라는 명칭이 아직 들리지 않았다."
2.
三代之隆。其法寖備。然後王宮國都。以及閭巷。莫不有學。人生八歲。則自王公以下。至於庶人之子弟。皆入小學。而敎之以灑上聲又去聲掃去聲應對進退之節。禮樂射御書數之文。
융성한 삼대에 그 법도가 차츰 갖춰진 연후에, 왕궁(천자의 도성)·국도(제후의 도성)에서 여항(그 외 지방)에 이르기까지 학교가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람이 태어나 8세가 되면 왕·공 이하로 서인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에 들어가게 해서 쇄소·응대·진퇴의 예절과 육예의 이름을 가르쳤다.
- 朱子曰。古者小學。已自是聖賢坯樸[19]了。但未有聖賢許多知見。及其長也。令入大學。使之格物致知。長許多知見。[20]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소학을 [다니면] 이미 성현의 그릇(坯璞)이지만, 성현의 많은 지식(내용물)은 없다. 자라서 태학에 들어가게 해 격물치지하게 해 많은 지식을 기르는 것이다."
- ○番易齊氏曰。灑掃。內則所謂雞初鳴。灑掃室堂及庭。曲禮所謂。為長者糞。加帚箕上以袂拘而退。以箕自向而扱之之類是也。應對。內則所謂。在父母之所。有命之。應唯敬對。曲禮所謂。長者負劍辟咡詔之。負。置之於背。劍。挾之於旁。口耳之間曰咡。辟咡詔之。傾頭與語。則揜口而對之類是也。進退。內則所謂。在父母之所。進退周旋愼齊。曲禮所謂。凡與客入者。每門讓於客之類是也。禮。習於度數之節文。所以敎之中也。樂。明於聲音之高下。所以敎之和也。射法。一弓挾四矢。驗其中否。以觀德行。御法。一車乘四馬。御者執轡。立於車上。欲調習不失驅馳之正也。書。書字之體。可以見心畫。數。算數之法。可以盡物變。周禮大司徒。所以敎萬民而賓興之者。始以六德。繼以六行。後及於六藝。非八歲以上者。所能盡究其事。不過使曉其名物而已。故上三者言節。有品節存焉。下六者言文。文者。名物之謂也。非其事也。
- 파양 제씨가 말했다: "'쇄소'는 <내칙>의 이른바 '닭이 막 울거든 집과 뜰에 물을 뿌리고 쓴다'[21], <곡례>의 이른바 '어른을 위해 청소하는 [예절은 반드시] 빗자루를 쓰레받기 위에 두고서 소매로 빗자루 앞을 막고 [쓸면서] 물러나 [먼지가 어른에게 이르지 않게 하며] 쓰레받기를 자신을 향하게 하여 쓸어담든다'[22]는 것 따위가 이것이다. '응대'는 <내칙>의 이른바 '부모·[시부모가 계신] 곳에서 명하시거든 길고 짧게(應·唯) 공경스럽게 대답한다'[23], <곡례>의 이른바 '장자가 칼은 등에 진 듯, 칼을 찬 듯 입가에 대고 말씀하시거든, 입을 가리고 대답한다'[24]'負'는 등에 지는 것이고, '劍'은 옆에 차는 것이다. 입과 귀 사이를 '咡'라고 하니, '辟咡詔之'는 머리를 숙여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따위가 이것이다. '진퇴'는 <내칙>의 이른바 '부모·[시부모가 계신] 곳에서는 진퇴와 행동을 삼간다'[25], <곡례>의 이른바 '무릇 손님과 들어갈 때에는 문마다 손님에게 양보한다'[26]는 것 따위가 이것이다. '예'는 도수의 절차를 익히는 것이니, '中'을 가르치는 과정이고, '악'은 음악의 고하를 밝히는 것이니, '和'를 가르치는 과정이다. 활쏘는 법은 활 하나에 화살 네 개를 가지고서 적중 여부를 시험해 그의 덕행을 살피는 것이다. 수레 모는 법은 한 수레에 말 네 마리를 매고, 모는 사람이 고삐를 쥐고 수레 위에 서서 바른 운전법을 잃지 않기를 연습하려는 것이다. '서'는 글자 쓰는 체계이니, '心畫'[27]를 볼 수 있고, '수'는 계산법이니, 사물의 변화를 다할 수 있다. <주례> <대사도>에 따르면, 만민을 가르치고 우대하는 것 방법은 육덕으로 시작하고 육행으로 이으며 육예에 미치는데,[28] [육예는] 8세 이상인 [아이가] 능히 그(육예) 구체적 일을 모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로 하여금 그저 사물의 이름을 알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앞의 세 가지(쇄소·응대·진퇴)에서는 '예절(灑掃應對進退之節)'이라고 말했으니 구체적 절차(品節)가 있는 것이요, 뒤의 여섯 가지에서는 '이름(禮樂射御書數之文)'이라고 말했으니, 文이라는 것은 사물의 이름을 말하니, 그 일이 아니다."
- ○勿軒熊氏曰。按大戴記保傅篇。古者年八歲。出就外舍。學小藝焉。履小節焉。束髮就大學。學大藝焉。履大節焉。註曰小學為庠門。一作虎闈。大學在王宮之東。束髮謂成童。尙書大傳曰。公卿之太子。元士之嫡子。年十三入小學。二十入大學。白虎通曰。八歲入小學。十五入大學。此太子之禮也。按年數互有不同。而朱子獨以白虎通為斷。
- 물헌 웅씨가 말했다: "<대대례기> <보부>편에 '옛적에 8세가 되면 소학(外舍)에 가서 小藝를 배우고 小節을 실천한다. [成童이 되어] 상투를 묶으면(束髮) 태학에 가서 大藝를 배우고 大節을 실천한다'[29]고 하고, 그 주석에 '소학은 庠門[30]이니, 虎闈[31]라고도 한다. 태학은 왕궁의 동쪽에 있었다. 송발은 성동이다.'라고 하였으며, <상서> 대전에 이르길: '公卿의 태자와 元士의 적자가 13세가 되면 소학에 들어가고, 20세가 되면 태학에 들어간다'고 하고, <백호통>에 이르길: '8세에 소학에 들어가고, 15세에 태학에 들어가니, 이는 태자의 예이다'라고 했다. 살펴보건대, 입학연령이 서로 같지 않은데, 주자께서는 유독 <백호통>을 기준으로 판단하셨다."
及其十有五年。則自天子之元子衆子。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音的子。與凡民之俊秀。皆入大學。
15세가 되면 천자의 元子와 衆子로부터 공·경·대부·원사의 적자 및 뭇 백성 가운데 준수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학에 들어가게 해서,
- 新安陳氏曰。凡民惟賢者得入大學。不比[32]小學。則無貴賤賢愚皆得入也。
- 신안 진씨가 말했다: "뭇 백성의 경우 오직 현명한 자만 태학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소학은 貴賤·賢愚와 관계없이 모두 들어갈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르다."
而敎之以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此又學校之敎。大小之節。所以分也。
窮理·正心·修己·治人의 도를 가르쳤다. 이것은 또한 학교의 가르침과 대학·소학의 제도가 구분되는 방식이다.
- 新安陳氏曰。三代有小學大學之敎法。未有書也。天子元子。繼世有天下。衆子建為諸侯。公卿大夫元士適子。將有國家之責。皆在所敎。民之俊秀。他日亦將用之。以佐理天下國家者也。窮理。知之事。正心以下。行之事。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삼대에는 소학·태학의 교법이 있었지만 이 텍스트는 없었다. 천자의 원자는 대를 이어 천하를 소유하고, 중자는 제후로 세워진다. 공·경·대부·원사의 적자는 장자 국가를 다스릴 책무를 갖게 되니, 모두 가르침을 받아야 할 대상에 속한다. 준수한 백성 역시 훗날 등용되어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데 보좌하는 자이다. 궁리는 앎의 일이고, 정심 이하는 실천의 일이다."
3.
夫音扶以學校之設。其廣如此。敎之之術。術卽法也。其次第節目之詳又如此。而其所以為敎。則又皆本之人君躬行心得之餘。不待求之民生日用彝倫之外。
저 학교를 설치함에 그 범위가 넓음이 이와 같고, 가르치는 법제의 순서나 절목이 상세함이 또 이와 같았는데, 가르침으로 삼았던 것은 또한 모두 임금이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깨닫는 것들에 근본하고, 백성들이 날마다 쓰는 도리 밖에 것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 新安陳氏曰。上言學校施敎之法。此言君身為立敎之本。卽所謂為億兆君師繼天立極者也。躬行心得。謂躬行仁義禮智之道。心得仁義禮智之德。卽行道而有得於心也。彛倫。常理也。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앞에서는 학교에서 교육하는 방식에 대해 말했고, 여기서는 임금 자신이 가르침을 세우는(즉 교육제도를 만듦과 동시에 교육의 본보기가 되는) 근본이 됨을 말했으니, 곧 이른바 '뭇 백성의 임금이자 스승이 되어 하늘을 잇고 법도를 세운다'는 것이다. '躬行心得'은 몸소 인의예지의 도리를 실천하고, 인의예지라는 덕을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이니, 즉 도를 실천해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이다. '彛倫'은 일상적인 도리이다."
是以當世之人無不學。其學焉者。無不有以知其性分去聲下同之所固有。職分之所當為。而各俛音免焉以盡其力。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 가운데 배우지 않았던 자가 없었고, [태학에서] 배웠던 자들 가운데 자신의 성에 본래부터 있었던 것과 직분상 마땅히 해야할 것을 알아서 각자 노력해 자신의 힘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雲峯胡氏曰。前說上之所以為敎。此說下之所以為學。
- 운봉 호씨가 말했다: "앞에서는 윗사람이 가르치는 방식을 말했고, 여기서는 아랫사람이 배우는 방식을 말한다."
- ○新安陳氏曰。性分固有。卽仁義禮智。是理是體。職分當為。如子職分當孝。臣職分當忠之類。是事是用。知性分職分。是知之事。俛焉盡力。是行之事。與前知性之所有而全之相照應。
- 신안 진씨가 말했다: "'性分固有'는 곧 인의예지이니, 理이자 體이다. '職分當為'는 자식의 직분은 마땅히 효도해야 하고, 신하의 직분은 마땅히 충성해야 하는 것 등이니, 事이자 用이다. '知性分職分'은 앎의 일이고, '俛焉盡力'은 실천의 일이니, 앞의 '知性之所有而全之'와 호응된다."
此古昔盛時所以治去聲下同隆於上。俗美於下。而非後世之所能及也。
이것이 과거 성대했던 때에 위에서는 통치가 훌륭하고 아래에서는 풍속이 아름다웠던 까닭이니, 후세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4.
及周之衰。賢聖之君不作。學校之政不修。敎化陵夷。風俗頹徒回反敗。時則有若孔子之聖。而不得君師之位以行其政敎。於是獨取先王之法。誦而傳之。以詔後世。
주 왕조가 쇠퇴하자 성현다운 임금이 흥기하지 않고 교육 정책이 닦이지 않아, 교화는 쇠퇴했고 풍속은 타락했다. 이 때 공자 같은 성인이 계셨지만 임금이자 스승으로서의 지위를 얻어 정치와 가르침을 행할 수 없으셨다. 이에 공자께서는 오직 선왕의 법도를 취해 이를 외고 전달해 후세에게 알려주셨다.
- 新安陳氏曰。皇帝生當天地氣運盛時。所以達而在上。以身為敎。而道行於當世。孔子當天地氣運衰時。不免窮而在下。以言為敎。傳諸其徒。而道明於後世而已。
- 신안 진씨가 말했다: "황제가 살아있을 때에는 천지의 기운이 성대한 때를 만나 현달하여 임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으므로, 몸소 가르침을 행해 도가 당시에 행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천지의 기운이 쇠한 때를 만나 곤궁하여 아랫자리에 있음을 면하지 못했으므로, 말로 가르침을 행해 제자들에게 전했고 도가 후세에나 밝혀질 수 있었을 뿐이다."
若曲禮少去聲儀內則弟子職諸篇。固小學之支流餘裔餘制反。
<곡례>·<소의>·<내칙>·<제자직> 등의 여러 편은 본래 소학의 지류이자 말단이지만,
- ○番易齊氏曰。曲禮少儀內則。見禮記。弟子職。見管子。此四篇作於春秋時。三代小學之全法。僅存其一二。故曰支流餘裔。支流。水之旁出而非正流者。餘裔。衣裾之末也。
- 파양 제씨가 말했다: "<곡례>·<소의>·<내칙>은 <예기>에 보이고, <제자직>은 <관자>에 보인다. 이 네 편은 춘추 시대에 지어졌다. 삼대 소학의 전체 교법 가운데 겨우 한두 가지만 보존되었으므로 '支流·餘裔'라고 한 것이다. '지류'는 물이 옆으로 흘러나와 바른 줄기가 아닌 것이고, '餘裔'는 옷자락 끝이다."
而此篇者。則因小學之成功。以著大學之明法。外有以極其規模之大。而內有以盡其節目之詳者也。
이 편(<대학>)은 소학에서 이룬 공부를 기반으로 태학의 밝은 교법을 드러내는 것이니, 밖으로는 規模의 큼을 지극히 하고, 안으로는 節目의 상세함을 다한다."
- 問外有以極其規模之大。內有以盡其節目之詳。朱子曰。這箇須先識得外面一箇規模如此大了。而內做工夫以實之。凡人為學。便當以[明][33]明德新民止於至善。及明明德於天下為事。不成只要獨善其身便了。須是志於天下。所謂志伊尹之所志。學顔子之所學也。所以大學第二句。便說在新民。
- "外有以極其規模之大。內有以盡其節目之詳。"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반드시 밖의 규모가 이처럼 큼을 먼저 알고서 안으로 공부를 해 채워야 한다. 무릇 사람이 학문한다면 마땅히 '明明德'·'新民'·'止於至善'해서 '明明德於天下'함을 일삼아야지, 그저 자신만 선하게 해서는 안 된다.[34] 반드시 천하에 뜻을 두어야 하니, 이른바 '이윤이 지향한 것을 지향하고, 안연이 배운 것을 배우라'[35]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두 번째 구절에서 '新民'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1. 공부 과정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공부의 공효는 사회/국가/천하에 미친다. 즉 전자가 節目之詳이고 후자가 規模之大이다.)
- ○新安陳氏曰。規模之大。指三綱領。節目之詳。指八條目。孔子時。方有大學一章之經。
- 신안 진씨가 말했다: "'規模之大'는 삼강령을 가리키고, '節目之詳'은 팔조목을 가리킨다. 공자 때가 돼서야 비로소 <대학> 1장의 경문이 있게 되었다." (2. 삼강령이 대원칙이고, 팔조목이 그에 대한 구체적 실천 방법이다. 즉 전자가 規模之大이고 후자가 節目之詳이다.)
- ○東陽許氏曰。規模節目。以三綱八條對言。則三綱為規模。八條為節目。謂八條卽三綱中事也。獨以八條言之。則平天下為規模。上七條為節目。平天下是大學之極功。然須是有上七條。節節做工夫。行至于極。然後可以天下平。
- 동양 허씨가 말했다: "'規模'와 '節目'을 삼강령과 팔조목으로 대대해서 말하면, 삼강령이 '規模'이고 팔조목이 '節目'이니, 팔조목은 곧 삼강령 안의 일이다. 오직 팔조목만 말한다면 '平天下'가 '規模'가 되고, 앞의 일곱 조목은 '節目'이 된다. '平天下'는 <대학>의 궁극적 공효지만, 앞의 일곱 조목마다 공부해서 그 실천이 지극한 경지에 이른 연후에야 천하가 평안해질 수 있다."[36]
三千之徒。蓋莫不聞其說。而曾氏之傳獨得其宗。於是作為傳去聲義。以發其意。
[공자의] 삼천 제자 가운에 이러한 설을 듣지 못한 자가 없었지만, 증자가 전수받은 것만이 그 종지를 얻었다. 이에 [<대학>의] 傳義(文義에 대한 해설)를 지어 공자의 뜻을 드러냈다.[37]
- 曾子方有今大學之傳。以發明孔子之意。
- 증자가 비로소 오늘날의 <대학>의 傳을 두어 공자의 뜻을 발명했다.
及孟子沒而其傳泯音閔焉。則其書雖存。而知者鮮上聲矣。
맹자가 돌아가시고 나서 전수가 민멸되어, <대학> 텍스트는 비록 남아있었지만 [그 의미를] 아는 자는 드물었다.
5.
自是以來。俗儒記誦詞章之習。其功倍於小學而無用。
이때부터 속유들이 記誦·詞章을 익히는 공력이 소학에 배가 되었으나 쓸모가 없었다.
- 朱子曰。自聖學不傳。為士者不知學之有本。而所以求於書。不越乎記誦訓詁文詞之間。是以天下之書愈多而理愈昧。學者之事愈勤而心愈放。詞章愈麗。議論愈高。而其德業事功之實。愈無以逮乎古人。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聖學이 전해지지 않은 뒤로 선비들이 학문에 근본이 있음을 알지 못해, 책에서 찾는 것이라곤 記誦·訓詁·文詞 사이를 넘지 못했다. 그러므로 천하에 책이 더 많아질수록 이치는 더욱 어두워졌고, 배우는 자들이 더 열심히 노력할수록 그들의 마음은 더욱 방탕해졌으며, 詞章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議論은 더욱 고원해졌지만 德業·事功의 성과는 더욱 고인에 미치지 못했다."
- ○新安陳氏曰。記誦。口耳之學。詞章。枝葉之文。
- 신안 진씨가 말했다: "'記誦'은 단순 암기의 학문(口耳之學)이요, '詞章'은 지엽적인(하찮은) 글쓰기(枝葉之文)이다."
異端虛無寂滅之敎。其高過於大學而無實。
이단의 虛無(도가)·寂滅(불교)한 가르침은 고원하기가 <대학>을 넘어섰으나 실질이 없었고,
- 問異端何以高而無實。朱子曰。吾儒便著讀書。逐一就事物上理會道理。異端便都掃了。只恁地空空寂寂。便道事都了。若將些子事付之。便都沒奈何。
- 물었다: "이단은 어째서 고원하지만 실질이 없습니까?"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유가는 책을 읽어 하나하나 사물에서 도리를 이해하지만, 이단은 [그런 것들을] 모두 쓸어버리고는 그저 이처럼 거듭 비우고 거듭 고요하게만 하고서 '일이 모두 끝났다'고 말하는데, 만약 약간의 일이라도 맡기면 전혀 어찌하지 못한다."
- ○雲峯胡氏曰。此之虛。虛而有。彼之虛。虛而無。此之寂。寂而感。彼之寂。寂而滅。所以高而無實。
- 운봉 호씨가 말했다: "여기(유가)의 '虛'는 虛하면서도 有하지만, 저기(도가)의 '虛'는 虛하면서 無이다. 여기(유가)의 '寂'는 寂하면서도 感하지만,[38] 저기(도가)의 '寂'는 寂하면서 滅이다. 그래서 [저들은] 고원하면서도 실질이 없는 것이다."
- ○新安陳氏曰。老氏虛無。佛氏寂滅。
- 신안 진씨가 말했다: "老氏(도가)가 '虛無'이고, 佛氏(불교)가' 寂滅'이다."
其他權謀術數。一切以就功名之說。與夫音扶百家衆技之流。所以惑世誣民。充塞先則反下同仁義者[39]。又紛然雜出乎其間。
나머지 권모술수를 [부려] 공명을 추구하는 일체의 설과 저 각종 재주를 [부리는] 제자백가 부류들이 혹세무민하여 인의(유가)를 막는 경우가 또 어지럽게 그 사이에서 뒤섞여 나와,
- 朱子曰。秦漢以來。隨世以就功名者。未必自其本而推之。是以天理不明而人欲熾。道學不傳而異端起。人挾其私智。以馳騖於一世。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秦漢이래로 시대에 따라 功名을 좇는 자들이 반드시 근본으로부터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천리는 밝혀지지 않고 인욕은 타올랐으며, 도학은 전해지지 않고 이단은 흥기해, 사람들은 자신의 꾀(私智)에 의지해 한 시대를 풍미했다."
- ○新安陳氏曰。權謀術數。謂管仲商鞅等。百家衆技。如九流等是也。
- 신안 진씨가 말했다: "權謀術數'는 관중·상앙 등을 말하고, '百家衆技'는 예를 들면 '九流'[40] 등이 이것이다."
使其君子。不幸而不得聞大道之要。其小人。不幸而不得蒙至治之澤。晦盲眉庚反否塞。
군자(치자)들로 하여금 불행히 위대한 도의 핵심을 듣지 못하게 하였고, 소인(피치자)들로 하여금 불행히 이상적 통치의 은택을 입지 못하게 해, [그들로 하여금] 어둡고 막히며,
- 東陽許氏曰。如月之晦。如目之盲。如氣之否。如川之塞。晦盲。言不明。否塞。言不行。
- 동양 허씨가 말했다: "달이 그믐인 것 같고, 눈이 먼 것 같으며, 기가 막힌 것 같고, 개울이 막힌 것 같은 것이다. '晦盲'은 밝지 않은 것(不明, 밝혀지지 않은 것)이고, '否塞'은 흐르지 않는 것(不行, 실천되지 않는 것)이다."
反覆沈俗作沉非痼音固。
엎어지고(反覆) 잠기고(沈) 병들게 되었는데(痼),
- ○東陽許氏曰。反覆。是展轉愈深而不可去底意。沈。如物沒於水而不可浮。痼。如病著於身而不可愈。
- 동양 허씨가 말했다: "'反覆'은 더욱 깊은 곳으로 굴러 떨어져 떠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沈'은 사물이 물에 잠겨 떠오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痼'는 몸에 병이 나 나을 수 없는 것과 같다."
以及五季謂梁唐晉漢周。五代季世。之衰。而壞亂極矣。
[당나라 이후] 五季의 쇠퇴한 시절에 이르러 혼란이 극에 달했다.
- 雲峯胡氏曰。惑世誣民。使斯民昏而不能知。充塞仁義。使斯道壅而不能行。晦盲。全無能知者。否塞。全無能行者。所以為壞亂之極也。大道之要。是大學書中所載者。至治之澤。是自大學中流出者。上之人無能知此大學。故君子不得聞大道之要。上之人無能行此大學。故小人不得蒙至治之澤。
- 운봉 호씨가 말했다: "'혹세무민'해서 이 백성들로 하여금 어리석어 알지 못하게 하고, '인의를 막아(充塞仁義)' 이 도로 하여금 막혀 행해지지 못하게 했다. '晦盲'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고, '否塞'은 전혀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란의 극이 된 것이다. '大道之要'는 <대학>에 기록된 것이고, '至治之澤'은 <대학>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윗사람이 이 <대학>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군자가 위대한 도의 핵심을 듣지 못했고', 윗사람이 이 <대학>을 실천하지 못했으므로 '소인이 완벽한 통치의 은택을 입지 못했다'."
6.
天運循環。無往不復。宋德隆盛。治敎休明。於是河南程氏兩夫子出。
하늘의 운수는 순환하기 때문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으니, 송나라의 덕이 융성하여 통치와 교화가 아름답게 빛났다. 이때 하남 정씨 두 부자께서 나오셔서,
- 伯子諱顥。字伯淳。號明道先生。叔子諱頤。字正叔。號伊川先生。
- 첫째의 성함은 '호(顥)'이고 字는 '백순(伯淳)'이며, 號는 '명도선생(明道先生)'이다. 셋째의 성함은 '이(頤)'이고 字는 '정숙(正叔)'이며 號는 '이천선생(伊川先生)'이다.
而有以接乎孟氏之傳。實始尊信此篇而表章之。旣又為去聲之次其簡編。發其歸趣音娶。
맹자의 전수를 이으셨으니, 실질적으로 처음 이 편(<대학>)을 존신하시고 표창하신 것이다. 이어서 또 <대학>에 대해서 텍스트의 차례를 손보고 그 의미를 드러내셨는데,
- ○新安陳氏曰。孟子沒而其傳泯焉。至二程夫子出。而絶學復傳。於是始拔大學篇於戴記之中而尊信之。又整頓其錯亂之簡而發揮之。但未成書耳。
- 신안 진씨가 말했다: "맹자께서 돌아가시자 전수되던 것이 민멸됐었는데, 이정 선생이 나오시고 나서 끊어졌던 학문이 다시 전해졌다. 이때 [이정 선생께서] 처음 <소대례기> 안에서 <대학>편을 독립시켜 존신하셨고, 또 뒤섞인 죽간을 정돈해 [그 의미를] 드러내셨다. 그러나 책을 완성하시지는 않았다."
然後古者大學敎人之法。
그런 연후에야 옛 태학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던 교법과
- 此八字收拾序文起句。
- 이 여덟 글자(古者大學敎人之法)는 <대학장구서> 앞쪽 구절을 모은 것이다.
聖經賢傳去聲之指。粲然復扶又反明於世。雖以熹之不敏。亦幸私淑而與去聲有聞焉。
聖經賢傳(성인이 지은 經에 현인이 傳을 달아 해석함)의 뜻이 찬연하게 다시 세상에 밝혀졌으니, 비록 불민한 나도 다행히 사숙해서[41]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42].
- 新安陳氏曰。孟子云。予未得為孔子徒也。予私淑諸人也。此用其語。謂聞程子之敎於延平李先生諸公。
- 신안 진씨가 말했다: "맹자께서 '나는 공자의 제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자사의 제자에게][43] 사숙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을 인용한 것이다. 정자의 가르침을 연평 선생 등 여러 공께 들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 ○東陽許氏曰。私淑者。私善於人。孟子不得為孔子之徒。而私善於再傳之子思。朱子不得為程子之徒。而私善於三傳之李氏。此私淑字最切。
- 동양 허씨가 말했다: "'私淑'이라는 것은 남을 통해 스스로를 선하게 하는 것이다. 맹자께서는 공자의 제자가 될 수 없어서 [공자의] 재전제자인 자사를 통해 스스로를 선하게 하셨고, 주자께서는 정자의 제자가 될 수 없어서 [정자의] 삼전제자인 연평 선생(李氏)을 통해 스스로를 선하게 하셨다. 여기의 '私淑'이라는 단어가 가장 절실하다."
顧其為書猶頗放失。是以忘其固陋。采而輯音集之。間亦竊附己意。補其闕略。
그런데 <대학> 텍스트가 여전히 상당히 방실되었기 때문에, 내 고루함을 [잠시] 잊고서 [주제넘게 방실된 부분을 다른 곳에서] 찾아 모으고 그 사이에 다시 삼가 내 생각을 덧붙여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서,
- 謂補傳之第五章。
- 傳의 제5장을 보충한 것을 말한다.
以俟後之君子。極知僭踰。無所逃罪。然於國家化民成俗之意。學者修己治人之方。則未必無小補云。
훗날의 군자를 기다린다. 주제 넘는 짓이라 죄를 피할 길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지만, 국가가 백성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이루는 뜻과 배우는 자가 수기치인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조그만 보탬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 脩己治人四字。包盡大學體用綱目。
- '脩己治人' 네 자는 <대학>의 體用·綱目을 모두 포괄한다.
7.
淳熙己酉二月甲子新安朱熹序。
순희 기유년(1189) 2월 갑자일에 신안 주희가 서문을 쓴다.
- 新安陳氏曰。此序分六節。精義尤在第二節。曰知其性之所有而全之。曰敎之以復其初是也。朱子論學。必以復性初為綱領要歸。論語首註學字。曰人性皆善。曰明善而復其初。小學題辭曰。仁義禮智。人性之綱。曰德崇業廣。乃復其初。此書首釋明明德。亦曰遂明之以復其初。與此序凡四致意焉。聖人盡性。盡其本全者也。學者復其性。復而後能全也。欲知性之所有。在格物致知。欲復全其性之所有。在誠意正心脩身。以力於行而已。讀此序此書者。其以知性之所有。與復其性初為要領。以知行為工夫而融貫其旨云。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이 <대학장구서>는 여섯 단락으로 나눠지는데,[44] 핵심적 의미(精義)는 두 번째 단락에 있으니, '모든 사람이 性에 있는 [인의예지를] 알고서 이를 온전히 한다', '가르쳐 자신의 처음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주자께서 학문을 말씀하실 때에는 반드시 '본성을 회복하는 것(復性)'을 강령·핵심으로 삼으셨다. <논어>에서 '學'자에 주석을 다시길: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하다', '선을 밝혀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45]고 하셨고, <소학제사>에서 말씀하시길: '인의예지는 사람 본성의 벼리이다', '덕이 높고 업이 넓어야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하셨으며, 이 책(<대학장구>)의 처음에 '명명덕'을 풀이하시며 또한 '마침내 밝혀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46]고 하셨으니, 이 <대학장구서>까지 총 네 곳에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셨다. '聖人盡性'은 본래 온전한 것을 지극히 하는 것이요, '學者復其性'은 돌아간 이후에야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에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은 格物·致知에 달렸고, 성에 있는 것을 다시 온전히 하고자 하는 것은 誠意·正心·脩身해 실천에 힘을 다하는 것에 달려있을 뿐이다. 이 <대학장구서>와 이 <대학>을 읽는 자는 '성에 있는 것을 아는 것'과 '본성(性初)으로 돌아가는 것'을 핵심으로 삼고 知行을 공부 방법으로 삼아서 그 종지를 완전히 깨달을 것이다."
대학 경문/전문/혹문
원전 링크
일단 <대학장구대전>는 세주 가운데 주자와 주자 이전 학자의 것만 번역하고, <대학혹문>은 모든 세주를 번역하겠다.
번역이 되지 않는 구절에는 물음표 두 개("??")를 달아놓아 추후에 Ctrl+F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한다.
大學章句大全
- 大,舊音泰,今讀如字。
- 子程子曰:「大學,孔氏之遺書,而初學入德之門也。」於今可見古人為學次第者,獨賴此篇之存,而論、孟次之。學者必由是而學焉,則庶乎其不差矣。
-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대학>은 공자께서 남기신 책으로 초학자들이 [성인의] 마음 공부로 들어가는 문이다."[47] 옛 분들이 학문 체계 가운데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오직 남아있는 이 책에 기대고 있고, <논어>와 <맹자>는 [<대학>보다는] 부차적이다.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대학>을 통해 배워야 하니, 그렇게 한다면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 龜山楊氏曰: "大學一篇, 聖學之門戸, 其取道[48]至徑. 故二程多命'初學者讀之'."
- 귀산 양씨가 말했다: "<대학> 한 편은 성학의 문이니, [성학으로의] 길을 보여줌이 매우 직접적이다. 그러므로 이정 선생께서 여러 번 '초학자는 <대학>을 읽으라'고 하셨다."
- ○朱子曰: "大學首尾貫通, 都無所疑, 然後可及語孟. 又無所疑然後可及中庸."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대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여 전혀 의심나는 바가 없게 된 연후에 <논어>와 <맹자>를 읽어야 하고, 또 <논어>와 <맹자>에 의심나는 바가 없게 된 연후에 <중용>을 읽어야 한다."
- ○某要人先讀大學以定其規模; 次讀論語以及其根本; 次讀孟子以觀其發越[49]; 次讀中庸以求古人之微妙.
-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대학>을 읽어 [성학의] 체계를 갖추도록 하고, 이어서 <논어>를 읽어 [성학의] 근본을 접하게 하며, 이어서 <맹자>를 읽어 맹자께서 천명하신 바를 살펴보게 하고, 이어서 <중용>을 읽어 옛 분들이 은미하고 영묘한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經一章
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데 달려있으며, 백성들을 새롭게 만드는 데 달려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데 달려있다.
- 程子曰:「親,當作新。」大學者,大人之學也。明,明之也。明德者,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以具眾理而應萬事者也。
-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親'은 '新'으로 써야 한다."[50] '대학'이라는 것은 대인(아이가 아니라 어른)의 학문이다. '명'은 밝힘이다. '명덕'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불매하면서 뭇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대응하는 것이다.
- 朱子曰: "天之賦於人物者謂之命; 人與物受之者謂之性; 主於一身者謂之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謂之明徳.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사람과 사물에 부여한 것을 '명'이라 하고, 사람과 사물이 받은 것을 '성'이라 하며, 일신을 주재하는 것을 '심'이라 하고, 하늘에서 얻어 빛나고 정대한 것을 '명덕'이라고 한다."
- ○問: "明徳是心是性?" 曰: "心與性自有分别. 靈底是心, 實底是性; 性便是那理, 心便是盛貯該載敷施發用底. 心屬火, 縁他是箇光明發動底物. 所以具得許多道理. 如向父母則有那孝出來, 向君則有那忠出來, 這便是性. 如知道事親要孝, 事君要忠, 這便是心. 張子曰: '心統性情', 此說最精密."
- 물었다: "'명덕'은 心입니까, 性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心과 性은 절로 구별된다. 영명한 것이 心이고, 실제적인 것이 性이며, 性은 저 理이고 心은 [理를] 싣고서 사용·발현시키는 것이다. 心은 [오행 가운데] 火에 속하니, 그것이 빛나고 발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도리를 갖추고 있을 수 있다. 가령 부모를 향해서는 효성스런 마음이 생기고, 임금을 향해서는 충성스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性이고, 부모를 섬길 때 효성스러워야 하고 임금을 섬길 때 충성스러워야 함을 아는 것은 心이다. 장자께서 '心統性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가장 정밀하다."
- ○虚靈不昧, 便是心; 此理具足於中, 無少欠闕, 便是性; 隨感而動, 便是情.
- 허령불매한 것이 心이고, 이 理가 내면에 온전히 갖춰져 어떠한 흠결도 없는 것이 性이며, 감각한 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情이다.
- ○虚靈自是心之本體, 非我所能虚靈. 耳目之視聽, 所以視聽者, 即其心也, 豈有形象? 然有耳目以視聽之, 則猶有形象也. 若心之虚靈, 何嘗有物?
- '허령함'은 心의 본래적 특징이니 내가 허령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이 보고 귀가 들음에, 보고 듣는 근거는 바로 心이니, [心의 작용에] 어찌 감각할 수 있는 점(형상)이 있겠는가? 그러나 눈과 귀가 있어 보고 듣는다는 점에서 보면 그래도 감각할 수 있는 점(형상)이 있는 것이다. 心의 허령함에 언제 감각할 수 있는 점(형상)이 있었겠는가?
- ○只虚靈不昧四字, 説明徳意已足矣; 更說具衆理應萬事, 包體用在其中, 又却實而不為虚, 其言的確渾圎, 無可破綻[51]處.
- 단지 '허령불매' 네 글자만으로도 '명덕'의 뜻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데, 다시 '뭇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한다'고 말해 그 안에 체용을 포괄해 다시 實하여 虚가 되지 않아, 말이 적확하고 온전해져 흠잡을 수 있는 곳이 없게 되었다.
- 但為氣稟所拘,人欲所蔽,則有時而昏;然其本體之明,則有未嘗息者。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52]明之,以復其初也。
- 다만 기품에 구속되고 인욕에 가려져 때에 따라 어두워진다. 그러나 명덕 본래 상태의 밝음은 그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명덕이 드러난 바에 따라 온전히 밝혀 그 처음 상태를 회복해야 한다.
- 朱子曰: "明徳未嘗息, 時時發見於日用之間. 如見孺子入井而怵惕, 見非義而羞惡, 見賢人而恭敬, 見善事而歎慕, 皆明徳之發見也. 雖至惡之人, 亦時有善念之發. 但當因其所發之端, 接續光明之.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명덕은 그친 적이 없으니, 때로 일상에서 발현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우물에 기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마음이 들거나,[53] 불의를 보고 부끄럽고 미워하는 마음이 들거나, 현인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이 들거나, 선한 일을 보고 찬탄하는 마음이 드는 것 모두 명덕이 발현한 것이다. 비록 매우 악한 사람이라도 때로 선한 마음이 발현한다. 다만 명덕이 발현한 단서를 따라 계속 밝혀나가야 한다."
- ○明徳謂本有此明徳也. 孩提之童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其良知良能, 本自有之, 只為私欲所蔽, 故暗而不明. 所謂明明徳者, 求所以明之也. 譬如鏡焉: 本是箇明底物, 縁為塵昏, 故不能照. 須是磨去塵垢, 然後鏡復明也.
- '명덕'은 본래 이러한 밝은 덕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도 제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없고, 그가 좀 자라서는 제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자가 없다. 그러한 양지·양능[54]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지만 사욕에 가려졌기 때문에 어두워 밝지 못한 것이다. 이른바 '명명덕'이라는 것은 명덕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거울에 비유해보자면, 거울은 본래 밝은 사물이지만 먼지에 의해 어두워지므로 비출 수 없게 된다. 반드시 먼지를 닦아없앤 연후에야 거울이 다시 밝아질 수 있다.
- ○明徳是一箇光明底物事. 如一把火將去照物, 則無不燭[55], 便是明徳. 若漸隠微便暗了, 吹得這火著, 便是明其明徳.
- 명덕은 빛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로 사물을 비추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명덕이다. 만일 점차 은미해다보면 어두워져버리지만, [꺼지지 않도록] 이 불에 공기를 불어넣는 것이 바로 명덕을 밝히는 것이다.[56]
- 新者,革其舊之謂也,言既自明其明德,又當推以及人,使之亦有以去上聲其舊染之污音烏又去聲也。
- '신'이라는 것은 옛 것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명덕을 스스로 밝히고 나서 다시 그것을 남에게 미뤄 그들 역시 과거에 물든 오염을 없애도록 해야함을 말한다.
- 朱子曰: "此理人所均有, 非我所得私. 既自明其徳, 須當推以及人, 見人為氣與欲所昏, 豈不惻然欲有以新之?"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이 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내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덕을 스스로 밝혔다면 모름지기 이를 남에게 미루어야 하니, 남들이 氣와 사욕에 의해 어두워진 것을 봤다면 어찌 측은해서 그들을 새롭게 만들고자 하지 않겠는가?"
- ○問: "'明徳新民'在我, 有以新之; 至民之明其明徳, 却又在他." 曰: "雖說是明己徳新民徳, 然其意自可參見. '明明徳於天下', 自新以新其民可知."
- 물었다: "'명덕·신민'은 나에게 다려있으니 새롭게 할 수 있지만, '백성들이 자신의 덕을 밝히는 것'의 경우는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비록 '자신의 덕을 밝히고 백성의 덕을 새롭게 하라'고 [나눠] 말하지만, 그 의미는 절로 함께 이해(參見)할 수 있다. [뒤에서] '明明徳於天下'라고 말하는 것에서 자신을 새롭게 하고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止者,必至於是而不遷之意。至善,則事理當然之極也。
- '지'라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 옮겨가지 말하는 뜻이다. '지선'은 지극히 당연한 사리이다.
- 朱子曰: "說一箇止字,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也.'"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止'자를 써놓고 다시 '至'자를 쓴 것은 다만 저 지극한 곳(至)에 이른 뒤에 머물라는 것(止)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지극함을 쓰지 않는 바가 없다.'[57]"
- ○未至其地, 則必求其至; 既至其地, 則不當遷動而之他也. 未至此便住不可謂止; 至此不能守亦不可謂止.
-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반드시 거기에 이르도록 해댜 하고, 이미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 아직 이 경지에 이르지 못했는데 머무는 것도 '止'라고 불러선 안 되고, 이 경지에 이르렀는데 지키지 못하는 것도 '止'라고 불러선 안 된다.
- ○至善如言極好道理. 十分盡頭善在那裏, 自家須去止他. 止則善與我一; 未能止, 善自善, 我自我.
- '지선'은 '매우 훌륭한 도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십분 완전한 선이 거기에 있으면, 스스로 가서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머무른다면 선와 내가 하나가 되겠지만, 머무르지 못한다면 '선은 선이고 나는 나'일 것이다.
- 言明明德、新民,皆當至於至善之地而不遷。蓋必其有以盡夫音扶天理之極,而無一毫人欲之私也。此三者,大學之綱領也。
- '명명덕'과 '신민' 모두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르러 옮겨가지 말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대개 반드시 지극한 천리를 온전히 밝혀 한 터럭의 자기중심적 사욕이 없게 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대학>의 강령이다.
- 朱子曰: "明徳新民, 非人力私意所為. 本有一箇當然之則, 過之不可, 不及亦不可. 如孝是明徳, 然自有當然之則, 不及固不是; 若過其則必有刲股之事. 須是到當然之則, 處而不遷, 方是止於至善. '止至善'包明徳新民, 己也要止於至善, 民也要止於至善. 在他雖未能, 在我所以望他則不可不如是也."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명덕·신민은 인력이나 혼자의 생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마땅히 그래야 하는 법칙(當然之則)이 있어, 지나쳐도 안 되고 미치지 못해도 안 된다. 예를 들어 효는 명덕이지만, 본래 當然之則이 있어 미치지 못해서는 진실로 안 되지만, 지나치면 필시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내는 일'[58]이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當然之則에 이르면 거기에 머물러 옮겨가지 않아야 비로소 '지어지선'이다. '지어지선'은 명덕·신민을 포함하니, 자신도 지선에 머물러야 하고, 백성도 지선에 머물러야 한다. 남에게 있는 것은 비록 어떻게 할 수 없더라도, 내가 남에 대해 바라는 것은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 ○問: "明明徳是自己事, 可以做得到極好處; 若新民則在人, 如何得他到極好處?" 曰: "且教自家先明得盡, 然後漸民以仁, 摩民以義. 如孟子所謂: '勞之來之, 匡之直之, 輔之翼之, 又從而振徳之.' 如此變化, 他自解到極好處."
- 물었다: "'명명덕'은 자기 일이니 지극히 훌륭한 경지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다만, '신민'의 경우는 남에게 달려있는데 어떻게 지극히 훌륭한 경지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우선 스스로 다 밝힌 연후에 仁으로 백성들을 적시고 義로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것이니, 맹자께서 '위로해주고 오게 하며, 바로잡아주고 곧게 하며, 부축하고 도와주며, 또 따라 은덕을 베풀어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59] 이렇게 변화한다면, 저들이 스스로 지극히 훌륭한 경지를 깨우칠 것이다."
- ○問: "至善不是明徳外别有所謂善, 只就明徳中到極處便是否?" 曰: "是. 明徳中也有至善, 新民中也有至善, 皆要到那極處. 至善只是以其極言. 不特是理會到極處, 亦要做到極處. 如為人君止於仁, 固是一箇仁, 然亦多般須是隨處看如這一事合當如此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亦是仁. 若不理會, 只管執一, 便成一邉去. 安得謂之至善? 至善只是恰好處."
- 물었다: "'지선'은 명덕 밖에 따로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명덕 가운데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것이 이것 아닙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명덕 가운데에도 '지선'이 있고 신민 가운데에도 '지선'이 있으니, 모두 지극한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지선'은 단지 '정도의 지극함'을 말한 것이다. 지극한 것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지극한 것을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임금이 仁에 머무는 것은 진실로 仁이지만, 역시 다양하게 상황에 따라 '이 일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仁이고, 저 일은 저렇게 하는 것이 또한 仁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만 고집한다면 하나만 해낼 것이다. 어찌 '지선'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지선'이란 단지 적절한 것일 뿐이다."
知止而后有定,定而后能靜,靜而后能安,安而后能慮,慮而后能得。
머물 곳을 안 이후에 [뜻에] 일정한 [방향이] 있게 되고, [뜻에] 일정한 [방향이 있게 된] 연후에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으며, [마음이] 고요해진 이후에 [몸이] 편안해질 수 있고, [몸이] 편안해진 이후에 [정밀히] 사려할 수 있으며, [정밀히] 사려할 수 있은 이후에 [머물러야 할 곳을] 얻는다.
- 后,與後同,後放此。止者,所當止之地,即至善之所在也。此止字即接上文在止於至善之止字說下來。知之,則志有定向。靜,謂心不妄動。安,謂所處上聲下同而安。慮,謂處事精詳。得,謂得其所止。
- '止'라는 것은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이니, 바로 至善의 소재이다.이 '止'자는 바로 앞 글의 '在止於至善'의 '止'자를 이어 말한 것이다.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을] 안다면 뜻에 일정한('定') 방향이 있게 된다. '靜'은 마음이 망동하지 않음을 말한다. '安'은 처한 바에 따라 편안함을 말한다. '慮'는 정밀히 일에 대처함을 말한다. '得'은 머물러야 할 곳을 얻음을 말한다.
- 朱子曰: "'知止'是識得去處. 既識得, 心中便定, 更不他求. 如行路, 知得從這一路去, 心中自是定; 如求之此, 又求之彼, 即是未定. 定、静、安、慮、得五字是功效次第, 不是工夫節目. 纔知止, 自然相因而見."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知止'란 갈 곳을 아는 것이다. [갈 곳을] 알고 나면 마음이 정해져 다른 데서 찾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길을 갈 때 '이 길로 가면 된다'고 알면 마음이 절로 정해질 것이지만, 여기저기서 [길을] 찾는다면 [마음이] 아직 정해지지 못한 것이다. 定·静·安·慮·得 다섯 자는 공효의 단계이지 공부 절목이 아니다. '머물 곳을 알자마자'(知止) 저절로 [이러한 공효가] 잇달아 드러난다."
- ○定静安相去不逺, 但有淺深耳. 與<中庸>動變化相類, 皆不甚相逺. 定以理言, 故曰有; 静以心言, 故曰能. 静是就心上說, 安是就身上說.
- 定·静·安은 큰 차이가 없고 다만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중용>의 動·變·化[60]와 마찬가지로 모두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定'은 理로 말한 것이므로 '有'(有定)라고 했고, '静'은 마음(心)으로 말했으므로 '能'(能靜)이라고 했다. '静'은 마음(心)에 대해 말한 것이고, '安'은 몸(身)에 대해 말한 것이다.
- ○既見得事物有定理, 而此心恁地寧静了. 看處在那裏: 在這裏也安, 在那裏也安. '安而后能慮', 慮是思之精審. 今人心中摇漾不定疊[61], 還能處得事否? 人處事於叢冗[62]急遽之際而不錯亂, 非安不能也. '知止'是知事物所當止之理. 到臨事, 又須研㡬審處, 方能得所止.
- 사물에 일정한 이치(定理)가 있음을 알면 이 마음은 이처럼 고요해진다. 어디에 처했는지 보면?? 여기에서도 편안하고, 저기에서도 편안하다. '安而后能慮'의 '慮'는 정밀히 사려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속이 요동쳐 안정되지 못하니, 그런데도 제대로 일에 대처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번잡하거나 급박한 상황에서 일에 대처할 때 잘못하지 않는 건, 편안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知止'는 사물이 마땅히 머물러야 할 이치를 아는 것이다. 일을 대했을 때 다시 정밀한 부분까지 연구해야 비로소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
- ○'知止'只是知有這箇道理, 也須是得其所止, 方是. 若要得其所止, 直是'能慮', 方是. '能慮'却是要緊'知止', 如知為子而必孝, 知為臣而必忠. '能得'是身親為忠孝之事. 若徒知這箇道理, 至於事親之際, 為私欲所汨, 不能盡其孝; 事君之際, 為利祿所汨, 不能盡其忠, 這便不是'能得'矣. '能慮'是見得此事合當如此, 便如此做.
- '知止'란 다만 이 도리가 있음을 아는 것이니, 머물 곳을 얻어야 옳다. 만일 머물 곳을 얻고자 한다면, 그저 '能慮'하기만 하면 된다. '能慮'는 도리어 긴밀히 '知止'하려고 해야 하니, 예를 들어 자식이 되어서는 반드시 효성스러워야 하고, 신하게 되어서는 반드시 충성스러워야 함을 아는 것과 같다. '能得'은 자신이 직접 忠孝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만약 단지 이 도리를 알기만 하고, 부모를 섬길 때 사욕에 빠져 효를 다하지 못하거나, 임금을 섬길 때 利祿에 빠져 충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는 '能得'이 아니다. '能慮'란 '이 일이 마땅히 이렇게 해야함'을 아는 것이니, [알면] 이렇게 행하게 된다.
- ○'知止', 如射者之於的; '得止'是已中其的.
- '知止'는 활 쏘는 사람과 과녁 간의 관계와 같으니, '得止'는 이미 과녁을 맞춘 것이다.
- ○定、静、安三字雖分節次, 其實'知止'後皆容易進.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此最是難進處, 多是至安處住了. '安而后能慮', 非顔子不能之. 去'得'字地位雖甚近, 然只是難進. 挽弓到臨滿時, 分外難開.[63]
- 定·静·安 세 글자는 비록 단계를 나눴지만, 사실 '知止' 이후에 모두 쉽게 나아갈 수 있는 것들이다.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이것이 가장 나아가기 어려운 부분이니, 대부분 '편안해진 경지(安)'에서 눌러앉아버린다. '安而后能慮'는 안자가 아니면 해낼 수 없다. ['能慮'의 지위가] '得'자 지위와 비록 매우 가깝지만, 나아가기 힘들 따름이다. 활을 최대한 당겼을 때, 분수 이상은 당기기 어려운 법이다.
物有本末,事有終始,知所先後,則近道矣。
物에는 본말이 있고 事에는 시종이 있으니, 우선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을 안다면 도에 가까워질 것이다.
- 明德為本,新民為末。知止為始,能得為終。本始所先,末終所後。此結上文兩節之意。
- '명명덕'이 근본이고 '신민'이 말단이며, '知止'가 시작이고 '能得'이 끝이다. 근본·시작이 우선할 것이고, 말단·끝이 나중에 할 것이다. 이 구절은 앞의 두 절의 뜻을 마무리한 것이다.
- 問: "事、物何分別?" 朱子曰: "對言則事是事, 物是物; 獨言物, 則兼事在其中. 知止、能得如耕而種而耘而斂, 是事有箇首尾如此. 明徳是理㑹己之一物; 新民是理㑹天下之萬物. 以己之一物對天下之萬物, 便有箇内外本末. '知所先後, 自然近道', 不知先後, 便倒了, 如何能近道?
- 물었다: "事와 物은 어떻게 구별됩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대비해서 말하면 事는 事이고 物은 物이지만, 物만 말하면 그 안에 事를 겸하는 것이다. '知止'와 '能得'은 마치 밭 갈고 씨뿌리며 김매고 수확하는 것과 같으니, 일에 처음과 끝이 있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명덕'은 자기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고, '신민'은 천하의 만물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 하나로 천하 만물에 대비하면 내외·본말의 [구별이] 있게 된다. '知所先後, 自然近道'란, 선후를 알지 못하면 거꾸로 하게 되니, 어떻게 도에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欲治其國者,先齊其家;欲齊其家者,先脩其身;欲脩其身者,先正其心;欲正其心者,先誠其意;欲誠其意者,先致其知;致知在格物。治平聲。後倣此
옛적 천하에 명덕을 밝히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國을 다스렸고, 자신의 國을 다스리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家를 단속했으며, 자신의 家를 단속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했고,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心을 바르게 했으며, 자신의 心을 바르게 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意를 진실하게 했고, 자신의 意를 진실하게 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知를 지극해 했으며, 知를 지극히 하는 것은 格物에 달려있다.
- 明明德於天下者,使天下之人皆有以明其明德也。心者,身之所主也。誠,實也。意者,心之所發也。實其心之所發,欲其一於善而無自欺也。致,推極也。推之以至極處知,猶識也。推極吾之知識,欲其所知無不盡也。格,至也。物,猶事也。窮至事物之理,欲其極處無不到也。此八者,大學之條目也。
- '明明德於天下'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자신의 명덕을 밝힐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心'이라는 것은 일신의 주재이다. '誠'은 진실함이다. '意'라는 것은 心이 발한 것이다. 心이 발한 것을 진실하게 함이란 心이 선에 전일하여 스스로를 속임이 없는 것이다. '致'란 지극한 데까지 미루어나가는 것이다. '知'는 '알다(識)'과 같다. 내 지식을 지극한 데까지 미루어 나감이란 아는 바가 지극하지 않음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 朱子曰: "六箇欲與先字, 謂欲如此必先如此, 是言工夫節次. 若致知則便在格物上. 欲與先字差慢, 在字又緊得些子."[64]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여섯 번의 '欲'과 '先'자는 '이렇게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함'을 말하니, 공부의 절차를 말한 것이다. '치지'의 경우는 '격물'에 달려있다. '欲'과 '先'자는 조금 느슨하고, '在'자가 더욱 긴밀하다."
- ○致知、誠意是學者兩箇關. 致知乃夢與覺之關; 誠意乃善與惡之關. 透得致知之關則覺; 不然則夢. 透得誠意之關則善; 不然則惡.
- '致知'·'誠意'는 배우는 자의 두 가지 관문이다. '致知'는 바로 꿈과 깸을 [가르는] 관문이고, '誠意'는 선과 악을 [가르는] 관문이다. '致知'의 관문을 뚫으면 깸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꿈이고, '誠意'의 관문을 뚫으면 선이지만 아니면 악이다.
- ○格物是夢覺關; 誠意是人鬼關. 過得此二關, 上面工夫一節易如一節了. 至治國平天下, 地步愈濶, 但須照顧得到.
- '격물'은 꿈과 깸을 [가르는] 관문이고, '성의'는 사람과 귀신을 [가르는] 관문이다. 이 두 관문을 지날 수 있으면, 윗 단계의 공부는 일절이 일절보다 쉬워진다?? '치국'·'평천하'에 이르면 경지가 더욱 크지만, 반드시 제대로 살펴야 한다.
- ○格物是零細說; 致知是全體說.
- '격물'은 세세하게 말한 것이고, '치지'는 전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 ○格物致知, 於物上窮得一分之理, 則我之知亦知得一分; 物理窮得愈多, 則我之知愈廣. 其實只是一理, 纔明彼, 即曉此.
- '격물'·'치지'란 사물에서 한 푼의 理를 궁구하면 내 知 또한 한 푼만큼 알게 되고, 사물의 理를 더욱 많이 궁구하면 내 知도 더욱 넓어진다. 사실 하나의 理일 뿐이니, 저것을 밝히면 이것을 알게 된다.
- ○格物, 十事格得九事通透, 一事未通透, 不妨; 一事只格得九分, 一分不通透, 最不可. 須窮盡到十分處.
- '격물'에 있어서, 열 가지 일 가운데 아홉 가지 일에 통달하고 한 가지 일에 통달하지 못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한 가지 일 가운데 9할 정도만 궁구하고 1할만큼 통달하지 못한 것은 가장 안 될 짓이다. 반드시 십분 궁구해야 한다.
- ○因其所已知, 推之至於無所不知.
-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통해 모르는 것이 없는 데까지 미루어 나간다.
- ○人多把這道理作一箇懸空底物. <大學>不説窮理, 只說格物, 便是要人就事物上理㑹. 如此, 方見得實體. 如作舟行水, 作車行陸, 今試以衆力共推一舟於陸, 必不能行, 方見得舟不可以行陸也. 此之謂實體.
-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도리를 허공에 매달린 무언가로 간주한다. <대학>에서 '이치를 궁구한다(窮理)'고 말하지 않고 단지 '격물'을 말한 것은, 사람들이 [구체적] 사물에서 이해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실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배를 만들어 물 위에 띄우고 수레를 만들어 육지 위를 가는데, 시험삼아 인력으로 함께 배를 육지에서 밀어보면 분명 갈 수 없을 것이니, 비로소 '배는 육지 위를 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을 '실체'라고 한다.
- ○格物窮理, 有一物便有一理, 窮得到後遇事觸物, 皆撞着這道理: 事君便遇忠, 事親便遇孝, 居處便恭, 執事便敬, 與人便忠. 以致參前倚衡, 無往而不見這箇道理. 若窮不至, 則所見不真, 外面雖為善而内實為惡.
- '격물'·'궁리'란 한 사물이 있으면 한 이치가 있어서, 모두 궁구한 뒤에는 마주치는 사물이 모두 이 도리를 만나는 것이다. 임금을 섬기면 忠을 만나고, 부모를 섬기면 孝를 만나며, 거처할 때에는 恭을, 일을 처리할 때는 敬을, 다른 사람과 함께일 때는 忠을 [만난다.] 이로부터 '[忠信篤敬이] 눈앞에 참여해있고 멍에에 기대어있음을 [보는]'[65] 데까지 이르면, 어디를 가더라도 이 도리를 보지 않음이 없게 된다. 궁구함이 지극하지 않으면, 소견이 진실하지 못해 겉으로 선을 행하더라도 내면은 실로 악할 것이다.
- ○問: "物者, 理之所在, 人所必有而不能無者, 何者為切?" 曰: "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 皆人所不能無者, 但學者須要窮格得盡. 事父母, 則當盡其孝; 處兄弟, 則當盡其友. 如此之類, 須是要見得盡. 若有一毫不盡, 便是窮格不至也."
- 물었다: "物이라는 것은 理가 있는 곳이니, 사람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서 없을 수 없는 것 가운데 무엇이 가장 절실합니까?" 대답하셨다: "군신관계·부자관계·형제관계·부부관계·붕우관계 모두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배우는 자는 완전히 궁구(窮格)해야 한다. 부모를 섬길 때에는 孝를 다해야 하고, 兄弟와 있을 때에는 우애를 다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 반드시 완전히 알아야 한다.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바로 궁구함(窮格)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다."
- ○物謂事物也. 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 便有一箇是、一箇非. 凡自家身心上皆須體驗得一箇是非. 若講論文字, 應接事物, 各各體驗, 漸漸推廣, 地步自然寬闊. 如曾子三省, 只管如此體驗去.[66]
- '物'이란 사물을 말한다. 모름지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해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거든 [옳은 것은 실천하고 그른 것은 실천하지] 말아야 한다. 글을 강론하고 일에 대처하는 경우, 각각 체험하여 점진적으로 넓혀나가면, 수준이 저절로 광대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증자의 '三省'[67]은 그저 이렇게 체험하신 것이다.
- ○致知格物只是一事, 非是今日格物, 明日又致知. 格物以理言也; 致知以心言也.
- '치지'·'격물'은 하나의 일일 뿐이니, 오늘 '격물'하고 내일 다시 '치지'하는 것이 아니다. '격물'은 理로 말한 것이고, '치지'는 心으로 말한 것이다.
- ○致知格物是窮此理; 誠意正心脩身是體此理; 齊家治國平天下是推此理. 要做三節看.
- '치지'·'격물'은 이 理를 궁구하는 것이고, '성의'·'정심'·'수신'은 이 理를 체득하는 것이며, '제가'·'치국'·'평천하'는 이 理를 [현실에] 미루어나가는 것이다. 세 절목으로 봐야 한다.
- ○於格物致知誠意正心脩身之際, 要常見一箇明徳隠然流行於五者之間, 方分明.
-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할 때에 명덕이 은연중에 다섯 단계에 유행하는 것을 늘 봐야 분명할 것이다.
- ○自格物至平天下, 聖人亦是略分箇先後與人看, 不成做一件浄盡無餘, 方做一件. 如此, 何時做得成![68]
- '격물'에서 '평천하'까지는 성인께서 다만 대략적으로 선후를 나눠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지, 하나를 깨끗하게 남김없이 처리하고나서 [다른] 하나를 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한다면 언제 해낼 수 있겠는가!
- ○'明明徳於天下'以上, 皆有等級. 到致知格物處, 便親切. 故不曰: '致知者先格其物', 只曰: '致知在格物'也.
- '明明徳於天下' 이상에는 모두 등급이 있다. '치지'·'격물'은 비근하므로 [<대학> 경문에서] '致知者先格其物'이라고 하지 않고 '致知在格物'이라고만 말했다.
物格而后知至,知至而后意誠,意誠而后心正,心正而后身脩,身脩而后家齊,家齊而后國治,國治而后天下平。治去聲。後倣此
物의 [이치에] 이른 이후에 知가 지극해지고, 知가 지극해진 이후에 意가 진실해지며, 意가 진실해진 이후에 心이 바르게 되고, 心이 바르게 된 이후에 身이 수양되며, 身이 수양된 이후에 家가 단속되고, 家가 단속된 이후에 國이 다스려지며, 國이 다스려진 이후에 천하가 평안해진다.
- 物格者,物理之極處無不到也。知至者,吾心之所知無不盡也。知既盡,則意可得而實矣,意既實,則心可得而正矣。脩身以上,明明德之事也。齊家以下,新民之事也。此四句包括上一節物格知至,則知所止矣。意誠以下,則皆得所止之序也。
- '物格'이라는 것은 物理의 지극한 곳에 周到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知至'라는 것은 내 心의 앎(所知)이 다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知가 지극한 이상 意는 진실할 수 있고, 意가 진실한 이상 心은 바르게 될 수 있다. '수신' 이상(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은 '명명덕'의 일이고, '제가' 이하(제가·치국·평천하)는 '신민'의 일이다.이 네 구절이 앞의 한 구절을 포괄한다 '物格'·'知至'하면 머물 곳을 알게 된다. '意誠' 이하(의성·심정·신수·가제·국치·천하평)는 모두 머물 곳의 차례를 얻은 것이다.
- 新安陳氏曰: "意誠、心正、身脩, 明明徳所以得止至善之次序; 家齊、國治、天下平, 新民所以得止至善之次序也. '皆'之一字包明明徳新民而言. 此四句包括此一節也. 是二節可見三綱之統八目, 而八目之𨽻三綱矣."
- 신안 진씨가 말했다: "'意誠'·'心正'·'身脩'은 '명명덕'이 '止至善'의 차례를 얻은 것이고, '家齊'·'國治'·'天下平'은 '신민'이 '止至善'의 차례를 얻은 것이다. ['皆得所止之序也'의] ]'皆'자는 '명명덕'과 '신민'을 포괄하여 말한 것이다. 이 네 구절은 이 한 절목을 포괄한 것이다. 이 두 절목에서 삼강령이 팔조목을 거느리고, 팔조목이 삼강령에 종속됨을 알 수 있다."
- ○朱子曰: "致知者, 理在物而推吾之知以知之也; 知至者, 理雖在物而吾心之知已得其極也."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치지'라는 것은 理가 외물에 있어서 내 知를 미루어 아는 것이고, '知至'라는 것은 理가 비록 외물에 있지만 내 마음의 知가 이미 그 지극한 것까지 아는 것이다."
- ○問: "物未格時, 意亦當誠?" 曰: "固然. 豈可說'物未格, 意便不用誠?' 但知未至時, 雖欲誠意, 其道無由. 如人夜行, 雖知路從此去, 但黒暗行不得. 所以要致知. 知至則道理明白, 坦然行之. 今人知未至者也. 知道善當好, 惡當惡, 然臨事不能如此者, 只是實未曾見得. 若實見得則行處無差."
- 물었다: "物[의 이치에]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에도 意는 진실해야 하겠지요?" 대답하셨다: "진실로 그렇다. 어찌 '物[의 이치에]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 意는 진실하지 않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다만 知가 지극하지 않을 때에는 비록 意를 진실하게 하고자 하더라도 말미암을 방도가 없으니, 마치 사람이 밤에 길을 갈 때 비록 길을 이쪽으로 가면 된다고 알더라도 어두워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치지'해야 한다. ['치지'의 결과로] '知至'하게 되면 도리가 분명해져 평탄하게 행하게 된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해야 함을 알지만, 일을 접하면 이렇게 못하는 것은 다만 제대로 안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제대로 알았다면 실천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 ○問物格、知至. 曰: "格物時, 方是區處[69]理會; 到得知至時, 却已自有箇主宰, 會去分別取舍. 初間或只見得表, 不見得裏, 只見得粗, 不見得精. 到知至時, 方知得到; 能知得到, 方㑹意誠, 可者必為, 不可者決不肯為. 到心正, 則胸中無些子私蔽, 洞然光明正大, 截然有主而不亂, 此身便脩, 家便齊, 國便治, 而天下可平."[70]
- '物格'·'知至'에 대해 물었다. 대답하셨다: "'격물'하는 때에는 한창 일을 처리하고 이해하지만, '知至'에 도달한 때에는 이미 자신에게 주재가 있어 분별해 취사선택할 수 있다. 처음에는 혹 겉만 알고 속은 모르며, 거친 것만 알고 정밀한 것은 모르겠지만, '知至'에 도달한 때에는 비로소 완전히 알고, 완전히 알 수 있으면 비로소 意가 진실해질 수 있어서, 옳은 것은 반드시 실천하고 옳지 않은 것은 결코 하려고 하지 않는다. 心이 바르게 되면 가슴속에 조금의 이기적인 가림이 없어 훤하게 빛나고 정대하며 분명하게 주재가 있어 어지럽지 않으니, 이 身은 곧 수양되고 家는 단속되며 國은 다스려지고 天下는 평안해질 수 있다."
- ○知至謂天下事物之理知無不到之謂. 若知一而不知二, 知大而不知細, 知髙逺而不知幽深, 皆非知之至也. 須要無所不知, 乃為至耳.
- '知至'란 천하 사물의 이치에 周到하지 않음을 말한다. 만약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거나, 큰 것만 알고 세세한 것을 모르거나, 고원한 것만 알고 심오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知가 지극'(知至)한 것이 아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야 '지극'(知至)한 것이다.
- ○物格、知至是一截事; 意誠、心正、身脩是一截事; 家齊、國治、天下平又是一截事. 自知至交誠意又是一箇過接[71]關子; 自脩身交齊家又是一箇過接關子.
- '物格'·'知至'가 하나의 일이고, '意誠'·'心正'·'身脩'가 하나의 일이며, '家齊'·'國治'·'天下平'이 또 하나의 일이다. '知至'가 '意誠'과 만나는 곳이 분기점이고, '身脩'가 '家齊'와 만나는 곳도 분기점이다.
- ○知至、意誠是凡聖界分, 未過此關, 雖有小善, 猶是黑中之白; 已過此關, 雖有小過, 亦是白中之黑.
- '知至'와 '意誠'은 범부와 성인의 경계이니, 이 관문을 넘지 못한다면 비록 작은 선이 있더라도 검은 색 가운데의 흰색과 같고, 이미 이 관문을 통과했다면 비록 작은 허물이 있더라도 흰색 가운데의 검은 색이다.
- ○意誠後, 推盪[72]得查滓伶俐, 心盡是義理.[73] 意是指發處; 心是指體言. 意是動, 心該動静. 身對心言, 則心正是内能如此; 身脩是外若不各自做一節工夫, 不成說我意已誠矣; 心將自正, 恐懼哀樂引將去, 又却邪了, 不成說心正矣. 身不用管外面更不顧而心與迹有異矣. 須是無所不用其功.
- '意誠' 이후에는 찌꺼끼·약삭빠름 같은 것으로 어지럽히더라도 心은 완전히 의리이다. 意란 [心이] 발한 것을 가리키고, 心은 [意의] 體를 말한다. 意는 動이고, 心은 動静을 갖추고 있다. 身을 心에 대비해 말하면, '心正'은 내면으로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고, '身脩'는 외면이 ?? 반드시 공부를 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 ○到正心時節已好了, 只是就好裏面又有許多偏, 如水已淘去濁十分清了, 又怕於清裏面有波浪動盪處.
- '正心'에 이르렀을 때 이미 좋지만, 좋은 것 이면에는 또 수많은 치우침이 있으니, 마치 물에서 이미 탁한 것을 걸러내 십분 맑더라도, 맑은 것 이면에 파랑·물결이 있는지 걱정해야 한다.
- ○意未誠時, 如人犯私罪; 意既誠而心猶動, 如人犯公罪, 亦有間矣.
- 意가 아직 진실하지 않은 때는 마치 사람이 개인적인 죄를 지은 것 같고, 意가 이미 진실한데 心이 여전히 동요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공적인 죄를 지은 것 같으니, 역시 차이가 있다.
- ○'物格而後知至', 至'心正而後身脩', 著'而'字則是先為此而後能為彼也. 盖即物而極致其理矣, 而後吾之所知無不至; 吾知無不至矣而後見善明, 察惡盡, 不容有所自欺而意誠; 意無不誠矣而後念慮隠微, 慊快充足[74]而心正; 心得其本然之正矣而後身有所主而可得而脩.
- '物格而後知至'에서 '心正而後身脩'까지 '而'자를 쓴 것은 '먼저 이것을 한 이후에 저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개 物에 나아가 그 이치에 이른 이후에 내 앎(所知)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내 知가 지극하지 않음이 없게 된 이후에 선을 분명히 보고 악을 온전히 살펴 스스로 속이는 바가 있을 수 없으므로 意가 진실해진다. 意가 진실하지 않음이 없게 된 이후에 은미한 것을 헤아리고 만족스러워져 心이 바르게 된다. 心이 본래의 바름을 얻은 이후에 身에 주재가 있어 수양될 수 있게 된다.
自天子以至於庶人,壹是皆以脩身為本。
천자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脩身을 근본으로 삼는다.
- 壹是,一切也。<漢書> <平帝紀> '一切', 顔師古註云: "猶以刀切物, 取其齊整."正心以上,皆所以脩身也。齊家以下,則舉此而措之耳。
- '壹是'는 '일체'이다.<한서> <평제기>의 '一切'를 안사고의 주석에 "칼로 사물을 잘라 깨끗하게 [잘린] 것을 취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正心' 이상은 모두 '脩身'하는 방법이다. '齊家' 이하는 이것을 들어 놓는 것일 뿐이다.
其本亂而末治者否矣,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未之有也!
근본이 어지러운데 말단이 다스려진 경우는 없고, 두텁게 할 것을 박하게 하면서 박하게 할 것을 두텁게 하는 경우는 있지 않았다.
- 本,謂身也。接上文本字. 末謂天下國家所厚,謂家也。此兩節結上文兩節之意。
- '本'은 ['脩身'의] '身'이다.앞 글의 '本'자에 이어지는 것이다. '末'은 '天下'·'國'·'家'이다. '두텁게 할 것'(所厚)은 '家'이다. 이 두 구절은 앞 글의 두 구절의 뜻을 마무리한 것이다.
- 右經一章,蓋孔子之言,而曾子述之。凡二百五字。其傳去聲十章,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蓋字疑辭, 則字決辭舊本頗有錯簡,今因程子所定,而更考經文,別必列反為序次如左。凡千五百四十六字。
- 이상은 경1장이니, 아마 공자의 말씀을 증자께서 조술하신 것이다.모두 205자이다. 전10장은 증자의 뜻을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다.'蓋'자는 불확실하다는 말이고, '則'자는 확실하다는 말이다. 옛 판본에 착간이 꽤 있기 때문에, 이제 정자께서 산정하신 것에 기인해 경문을 다시 고찰해 따로 다음과 같이 차례짓는다.
- 凡傳文,雜引經傳,若無統紀,然文理接續,血脈貫通,深淺始終,至為精密。熟讀詳味,久當見之,今不盡釋也。
- 무릇 傳文은 경전을 잡다하게 인용해 맥락이 없는 것 같지만, 글의 조리가 이어지고 혈맥이 일관되니, 깊이와 논리가 지극히 정밀하다. 자세히 읽고 음미하여 오래되면 응당 알 것이므로, 지금은 다 해설하지 않는다.
『혹문』 경1장
1. <대학>과 <소학>의 구분
或問: “大學之道, 吾子以爲大人之學, 何也?”
혹자가 물었다: "'大學之道'를 그대가 '대인의 학문(大人之學)'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曰: “此對小子之學言之也.”
대답했다: "이는 '아이의 학문(小子之學)'에 대비해 말한 것이다."
2. <소학>이란?
曰: “敢問其爲小子之學, 何也?”
물었다: "감히 묻건대, '아이의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曰: “愚於序文已畧陳之. 而古法之宜於今者, 亦旣輯而爲書矣,即今之小學書 學者不可以不之考也.”
대답했다: "내가 서문(<대학장구서>)에서 이미 간략하게 말했고, 옛 법도 가운데 오늘날에 적합한 것을 역시 이미 모아 책을 만들었으니,즉 오늘날의 <소학>이다. 배우는 자들이 이를 고찰하지 않아선 안 될 것이다."
3. <대학>과 <소학> 간의 관계
曰: “吾聞君子務其遠者大者, 小人務其近者小者. 今子方將語音御人以大學之道, 而又欲其考乎『小學』之書, 何也?”
물었다: "내가 듣기에 군자는 고원한 것·거대한 것에 힘쓰고, 소인은 비근한 것·사소한 것에 힘쓴다고 하는데, 지금 그대는 사람들에게 '大學之道'를 말하면서 다시 그들로 하여금 <소학>을 고찰하게 하려는 것은 어째서인가?"
- 朱子曰: "<小學>書是做人底樣子."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소학>은 사람을 만드는 틀이다."
- ○問小學大學之别. 曰: "小學大學只是一箇事. 小學是學事親事長; 大學便就上面講究委曲其所以事親事長是如何."
- 小學과 大學의 차이에 대해 물었다. 대답하셨다: "小學과 大學은 하나의 일일 뿐이다. 소학은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대학은 그 위에서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섬기는 까닭이 무엇인지 강구하고 상세히 살피는 것이다."
- ○古人由小學而進於大學, 其於洒掃應對進退之間, 持守堅定, 涵養純熟, 固已久矣. 大學之序, 特因小學已成之功.
- 옛 분들은 소학을 거쳐 대학으로 나아가셨기 때문에, 쇄소응대·진퇴하는 때에 단속이 堅定하고 함양이 純熟했던 것이 진실로 매우 오래됐었다. [그러므로 삼강령·팔조목 같은] <대학>의 순서는 그저 소학에서 이미 이룬 결과에 기인할 뿐이다.
- ○陳氏曰: "小學書綱領甚好, 最切於日用. 雖至大學之成, 亦不外是."
- 진씨가 말했다: "<소학>의 강령이 매우 좋으니, 일상 생활에 매우 비근하다. 비록 대학 [공부가 완성되더라도]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曰: “學之大小, 固有不同, 然其爲道則一而已. 是以方其幼也, 不習之於小學, 則無以收其放心, 養其德性, 而爲大學之基本.
대답했다: "학문의 큰 것(대학)과 작은 것(소학)에는 진실로 차이가 있지만, 도를 추구한다는 점은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 소학에서 익히지 않는다면 놓아버린 마음을 수습하고 덕성을 길러 대학의 기반으로 삼을 수 없고,
- 或曰: "放心者, 或心起邪思妄念, 耳聽邪言, 目觀亂色, 口談不道之言, 以至手足動之不以禮, 皆是放也; 收者, 便於邪思妄念處, 截斷不續, 耳目言動皆然, 此謂之收. 既能收其放心, 徳性自然養得, 不是收放心外, 又養箇徳性也." 朱子曰: "然."
- 혹자가 말했다. "방심이라는 것은 간혹 마음에 삿된 생각이나 망념이 일어나서 귀로는 거짓된 말을 듣고, 눈으로는 난색을 보며, 입으로는 도가 아닌 말을 하여 손과 발이 움직임에 예로 하지 않는데 이르게 되니, 모두 '放'인 것입니다. 거둔다는 것은 바로 삿된 생각이나 망념이 일어난 곳을 절단해서 이어지지 않게하는 것이니 귀, 눈, 말과 행동이 모두 그렇게 (잘못하지 않게) 되니 이것이 '收'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 놓아버린 마음을 거둘 수 있다면 덕성은 자연히 길러질 수 있으니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는 것 이외에 또 덕성을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자가 말했다. "그렇다."
- ○西山真氏曰: "徳性謂得之於天者, 仁義禮智信, 是也; 徳性在心, 本皆全備, 縁放縱其心, 不知操存, 是致賊害其性. 若能收其放心, 即是養其徳性, 非二事也."
- 진덕수가 말하였다. "덕성이란 하늘에서 얻어진 것이니 인의예지신이 이것이요, 덕성은 마음 안에 있으니 본애 완전히 갖춰진 것이지만 그 마음을 방종하게 하면서도 잡아서 지킬 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성을 해치는데 이른 것이다. 만약 그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어 들일 수 있다면 곧바로 덕성을 기르게 되는 것이지, 두 가지 일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及其長上聲下同也, 不進之於大學, 則無以察夫音扶義理, 措諸事業, 而收小學之成功.
장성해서 태학에 진학하지 않으면 의리를 살피고 여러 사업을 주관해 소학에서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
- 玉溪盧氏曰: "察夫義理, 大學始事, 格致是也; 措諸事業, 大學終事, 齊治平是也."
- 옥계노씨가 말했다. "'察夫義理'란 대학의 시작이 되는 일이니 격물치지가 이것이고, '措諸事業'은 대학의 마지막이 되는 일이니, 제가·치국·평천하가 이것이다."
是則學之大小所以不同, 特以少去聲長所習之異宜, 而有高下淺深先後緩急之殊, 非若古今之辨, 義利之分, 判然如薰蕕音猶冰炭之相反而不可以相入也.薰香草蕕臭草 今使幼學之士, 必先有以自盡乎洒上去二聲掃去聲應對進退之間, 禮樂射御書數之習, 俟其旣長, 而後進乎明德·新民, 以止於至善, 是乃次第之當然, 又何爲而不可哉?”
이렇다면 학문의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는 그저 나이에 따라 익혀야 하는 것의 차이에 따라 高下·淺深·先後·緩急의 차이가 있는 것일 뿐이니, 고금의 차이·義利의 차이가 마치 薰蕕·冰炭이 상반되어 판연히 서로 섞일 수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제 어린 선비로 하여금 반드시 우선 洒掃應對進退之間과 禮樂射御書數之習에 스스로 다하도록 하고, 그가 장성하기를 기다린 이후에 明德·新民·止於至善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순서이니, 또 무엇 때문에 불가하겠는가?"
4. <소학>을 배우지 않고 장성한 사람의 학문 순서 문제(경공부)
曰: “幼學之士, 以子之言而得循序漸進, 以免於躐等陵節之病, 則誠幸矣. 若其年之旣長, 而不及乎此者, 欲反從事於小學, 則恐其不免於扞格不勝、勤苦難成之患;
물었다: "어린 선비가 그대의 말에 따라 순서를 얻어 점차 나아가 躐等·陵節[75]의 병폐를 면한다면 진실로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장성했는대도 이에 미치지 못한 자가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 소학에 종사하고자 한다면 '[인욕에] 부딪혀 이기지 못하고 고생하더라도 이루기 힘든' 근심을 면하지 못할까 걱정스러우며,
- <記><學記>"發然後禁, 則扞格而不勝; 時過然後學, 則勤苦而難成."扞, 胡半反; 格, 胡客反. 勝, 平聲. 人欲既發而後禁之, 則扞拒堅强而不勝也.
- 『예기』, 「학기」편에서 "일어난 다음에 금지한다면 인욕에 부딪혀 이겨내지 못할 것이고, 때가 지난 다음에 배운다면 노력하고 고생하면서도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인욕이 이미 일어난 후에 금지하면 [인욕의] 저항이 견고하고 강해 이길 수 없다.
欲直從事於大學, 則又恐其失序無本, 而不能以自達也, 則如之何?”
[그렇다고] 바로 대학에 종사하고자 한다면 또한 순서를 어겨 근본이 없기에 스스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까 걱정스러우니, 어떻게 해야 하나?"
曰: “是其歲月之已逝者, 則固不可得而復扶又反下同追矣. 若其工夫之次第條目, 則豈遂不可得而復補耶?
대답했다: "이미 지나가버린 세월은 진실로 다시 나아갈 순 없지만, 공부의 순서나 조목은 어찌 끝내 다시 보완할 수 없겠는가?
- 朱子曰: "古人於小學, 自能言便有教, 一嵗有一嵗工夫, 到二十來嵗, 聖賢資質已自有二三分, 大學只出治光采. 而今都蹉過了, 不能更轉去做得, 只據而今地頭, 便劄住立定脚跟[76]做去, 栽種後來根株, 塡補前日欠缺. 如二十嵗覺悟, 便從二十嵗立定脚跟做去; 如三十嵗覺悟, 亦然; 便年八九十嵗覺悟, 亦只據現定劄住硬寨[77]做去."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소학에서는 말할 수 있을 때부터 교육을 두었고, 1년에 (그에 해당하는) 1년 과정의 공부를 두었으니, 20세가 되면 성현의 자질이 이미 2-30%정도 있게 된다. <대학>은 다만 [거기에] 광채를 내는 것이다. 지금 [이미] 다 지나가버려서 다시 뒤돌아 갈 수 없다면, 다만 현위치에 의거하여 입장을 확고히 해, 훗날의 기반을 북돋고 과거의 흠결을 보완하여야 한다. 만약 스무살에 깨우쳤다면 스무살 때 부터 그 입장을 확고히 하고, 서른에 깨우쳤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8-90세에 깨우쳤더라도 역시 그저 현재에 의거해서 견고한 입장을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
蓋吾聞之, 敬之一字, 聖學之所以成始而成終者也. 爲小學者, 不由乎此, 固無以涵養本原,即前所謂收放心養徳性而謹夫音扶下同洒掃應對進退之節, 與夫六藝之敎. 爲大學者, 不由乎此, 亦無以開發聰明,格致之事 進德誠正修修業,齊治平 而致夫明德新民之功也. 是以程子發明格物之道, 而必以是爲說焉.
내가 들으니, '敬' 한 자는 성인되는 학문(聖學)의 처음과 끝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소학이라는 것도 이를 말미암지 않으면 진실로 본원을 함양해 저 洒掃應對進退之節과 저 六藝之敎를 삼가 실천할 수 없고, 대학이라는 것도 이를 말미암지 않으면 또한 開發聰明하고 進德修業[78]해 저 明德·新民의 공효를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정자께서 격물의 도를 발명하실 때 반드시 이것(敬)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 問: "敬字當不得小學." 朱子曰: "看來小學却未當得敬, 敬巳自包得小學. 敬是徹上徹下工夫, 雖做到聖人田地, 也只放下這敬不得."
- 물었다: "'敬'이라는 글자는 소학에 대적할 수 없습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내 생각에는 소학이 도리어 '敬'에 대적할 수 없으니, 敬은 이미 그 자체로 소학을 포함한다. 敬은 위 아래를 관통하는 공부이니, 비록 성인의 경지에 이르더라도 이 敬을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 ○問: "大學首云明徳, 却不曾說主敬, 莫是已見於小學否?" 曰: "然. 自小學不傳, 伊川却是帶補一敬字."
- 물었다: "『대학』 첫 머리에서는 '명덕'만 말하고 도리어 '主敬'을 말한 적이 없으니, [경이] 이미 『소학』에 드러나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소학』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천선생께서 오히려 '敬'자를 보완하신 것이다.
- ○北溪陳氏曰: "程子只說一箇主敬工夫, 可以補小學之缺. 盖主敬工夫可以收放心而立大本; 大本既立, 然後工夫循序而進, 無往不通. 大抵主敬之功, 貫始終, 一動靜, 合内外, 小學大學皆不可無也."
- 북계 진씨가 말했다: "정자께서는 오직 주경공부를 말씀하셨으니, 소학의 흠결을 보완할 수 있다. 대개 주경공부를 [통해]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큰 근본을 세울 수 있으니, 큰 근본이 세워지고 난 연후에야 공부가 순서대로 나아가 가는 곳마다 통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대저 주경공부라고 하는 것은 시작과 끝을 관통하고 動과 靜에 동일하며 内와 外에 일치하니, 소학과 대학에 모두 없어선 안 된다."
- ○玉溪盧氏曰: "敬者, 定志慮, 攝精神, 而存養本心之道, 故為聖學之始終. 百倍其功, 只在主敬. 篇首三言為大學一書之綱領; 明明徳一句為篇首三言之綱領; 朱子敬之一字, 則又明明徳之綱領也."
- 옥계 노씨가 말했다: "경이라는 것은 사려를 안정시키고 정신을 거두어들여 본심을 존양하는 방법이므로 성인의 학문의 시작과 끝이 된다. [남들보다] 백 배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79] 다만 주경공부에 달려있을 뿐이다. [『대학』] 첫머리의 세 마디(명명덕, 신민, 지어지선)는 『대학』의 강령이 되며, '명명덕' 한 구절은 첫머리 세 마디의 강령이 되며, 주자의 '敬' 한 글자는 다시 '명명덕'의 강령이 된다."
不幸過時而後學者, 誠能用力於此, 以進乎大, 而不害兼補乎其小, 則其所以進者, 將不患於無本而不能以自達矣. 其或摧頹已甚, 而不足以有所兼, 則其所以固其肌膚之會·筋骸之束, 而養其良知良能之本者, 亦可以得之於此, 而不患其失之於前也.
불행이 때를 놓쳐 뒤늦게 배우는 자가 진실로 이에 힘쓸 수 있다면, 큰 것(대학)에 나아가면서도 작은 것(소학)을 아울러 보완하는 데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니, 그렇다면 그가 진전된 바가 장차 근본이 없어 스스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혹 摧頹함이 너무 심해 [소학까지] 아우를 수 없다면, 肌膚와 筋骸의 결속을 굳게 해[80]良知·良能의 근본을 기르는 것 또한 이것(경)에서 얻을 수 있으니 과거에 잘못했던 것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 <記><禮運>"故禮義也者, 人之大端也, 所以講信脩睦, 而固人之肌膚之㑹、筋骸之束也." 㑹, 合也, 物合其則也, 如頭容宜合於直之類; 束, 收歛也, 如手容宜恭之類.
- 『예기』, 「예운」편에서 "그러므로 예의라는 것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大端)이니, 신의를 익히고 화목함을 닦아 肌膚와 筋骸의 결속을 굳게 하는 것이다."[81]라고 하였는데, '㑹'는 '맞다'로 사물이 그 법도에 맞는 것이니, 마치 머리모양이 마땅히 '直'에 맞아야 하는 부류와 같다. '束'은 '거두어들인다'로 손모양이 마땅히 공손해야 하는 부류와 같다.[82]
顧以七年之病, 而求三年之艾, 非百倍其功, 不足以致之. 若徒歸咎於旣往, 而所以補之於後者, 又不能以自力, 則吾見其扞格勤苦日有甚焉, 而身心顚倒, 眩瞀務茂二音迷惑, 終無以爲致知力行之地矣. 况欲有以及乎天下國家也哉!”
생각건대 7년의 병치레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경우,[83] 백 배로 노력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으니, 만일 그저 과거에 허물을 돌리고 나중에 보완하려는 자도 스스로 힘쓰지 않는다면, 그가 [인욕에] 부딪히고 고생하는 것이 날로 심해져 몸과 마음이 엎어지고 어지럽고 미혹돼 끝내 致知力行의 경지가 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천하·국가에 미칠 수 있기를 바라는 자에 있어서랴!"
- 問: "人於已失學後, 須如此勉强奮勵, 方得." 朱子曰: "失時而後學, 必著如此䟎補得前許多欠缺處.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若不如是, 悠悠度日, 一日不做得一日工夫, 只見没長進, 如何要補前面?"
- 물었다: "사람이라면 배움을 놓치고 나서는 모름지기 이처럼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때를 놓친 이후에 배우게 됐다면 반드시 많은 흠결을 서둘러 이처럼 보완해야 하니, '다른 사람이 한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백 번하고, 다른 사람이 열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천 번한다.'고 하였다. 만약 이와같이 하지 않고 덧없이 시간만 보내고 하루에 하루치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발전이 없을 것이니, 어찌 과거를 보완하려고 하겠는가?"
- ○今人不曽做得小學工夫, 一旦學大學, 是以無下手處. 今且當自持敬始, 使端的純一静専, 然後能致知格物. 敬字是徹頭徹尾工夫, 自格物以至平天下, 皆不外此.
- 요즘 사람들은 일찍이 소학공부를 하지 않고 단지 대학만 배웠기 때문에 실천할 길이 없다. 지금은 우선 마땅히 持敬부터 시작해서 확실하게 순일하고 오롯하게 해야 하니, 그런 연후에야 격물치지할 수 있을 것이다. '敬'이라는 글자는 철두철미한 공부이니, 격물에서부터 평천하까지 모두 이것(경)을 벗어나지 않는다."
5. 경공부의 방법
曰: “然則所謂敬者, 又若何而用力耶?”
물었다: "그렇다면 이른바 '敬'이라는 것에 또 어떻게 힘쓰는가?"
曰: “程子於此, 嘗以主一無適言之矣,
대답했다: "정자께서는 이에 대해 '主一無適'으로 설명하시기도 했고,
- 程子曰: "主一之謂敬, 無適之謂一."
-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主一'은 '敬'을 말하고 '無適'은 '一'을 말한다."
- ○朱子曰: "主一只是心專一, 不以他念雜之; 無適只是不走作[84], 如讀書時只讀書; 著衣時只著衣. 了此一件, 又做一件, 身在這裏, 心亦在這裏."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主一'은 다만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다른 생각이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고, '無適'은 다만 [마음이] 방일하지 않게 하는 것이니, 독서할 때는 단지 독서만하고 옷 입을 때에는 단지 옷만 입는 것처럼 한 가지 일을 끝내고 나서 또 한 가지 일을 하고, 몸이 여기에 있으면 마음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今講學, 更須於主一上做工夫. 若無主一工夫, 則講底義理無安著處, 都不是自家物事. 若有主一底工夫, 則外面許多義理, 方始為我有, 都是自家物事. 工夫到時, 纔主一, 便覺意思好, 卓然精明.
- 지금 강학함에 더욱 '主一'에 대해 공부(노력)해야 한다. 만약 '主一'공부가 없다면 강학한 의리가 안착할 곳이 없어서 모두 나의 일이 아니게 된다. 만약 '主一'공부가 있다면 외면의 많은 의리가 비로소 나에게 있게 되어 모두 나의 일이 된다. 공부가 완성된 때에는 '主一'하자마자 바로 생각이 좋고 매우 정밀하고 밝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 ○北溪陳氏曰: "主一, 是心只在此, 不二不三; 無適, 是心只在此, 不東不西. 主一無適, 只展轉相解, 釋要分明, 非主一外, 又别有無適之功也."
- 북계 진씨가 말했다: "'主一'이라는 것은 마음이 단지 여기에 있어서 두 갈래 세 갈래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無適'은 마음이 다만 여기에 있어서 동쪽으로 가거나 서쪽으로 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주일'과 '무적'은 상보적으로 풀어야 해석이 분명하게 되니, '主一' 이외에 또 따로 '無適'공부가 있는 것이 아니다."
嘗以整齊嚴肅言之矣.
'整齊嚴肅'으로 설명하시기도 했다.
- 程子曰: "只整齊嚴肅, 則心便一; 一則無非僻之干矣."
-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다만 整齊嚴肅 한다면 마음이 전일해지고, [마음이] 전일해지면 사악함[85]의 간섭이 없을 것이다."
- ○玉溪盧氏曰: "主一無適, 未易曉. 故又就事實上教人, 使只就眼前做工夫, 如正衣冠, 尊瞻視, 足容重, 手容恭之類, 皆是内外一致. 外面整齊嚴肅, 則内面便一; 内面便一, 則外面便無非僻之干."
- 옥계 노씨가 말했다: "'主一無適'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구체적인 일로 사람들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단지 눈앞에서 공부하게 하셨으니, 예를 들어 '의관을 바르게 하고 보기를 높게 하며'[86] '발모양은 무겁게 하고 손모양은 공경스럽게 하는'[87] 것들은 모두 내외가 일치되는 것이다. 외면을 整齊嚴肅하면 내면이 전일해지고, 내면이 전일하다면 외에 사악함의 간섭이 없을 것이다."
至其門人謝氏之說, 則又有所謂常惺惺法者焉.
정자의 문인 사량좌의 설의 경우에는 이른바 '常惺惺法'이라는 것이 있기도 하고,
- 上蔡謝氏曰: "敬是常惺惺法."
- 상채 사씨가 말했다: "敬은 늘 깨어있는 수양법(常惺惺法)이다."
- ○朱子曰: "惺惺乃心不昏昧之謂, 只此便是敬. 整齊嚴肅固是敬, 然心若昏昧, 燭理不明, 雖强把捉, 豈得為敬?"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惺惺은 바로 마음이 혼매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렇게만 해도 敬이다. 整齊嚴肅은 진실로 경공부지만, 마음이 만약 혼매해서 이치를 밝게 밝히지 못한다면, 비록 [정제엄숙에 집착해 마음을] 애써 붙들더라도 어찌 敬이라 할 수 있겠는가?"
- ○學問須是警省, 且如瑞巖和尚每日常自問: "主人翁惺惺否?" 又自答曰: "惺惺." 今時學者却不能如此.
- 학문할 때는 모름지기 경계하고 성찰해야하니, 예를 들어 서암화상이 매일 항상 스스로 '주인장은 깨어있는가?'하고 묻고는 다시 스스로 '깨어있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렇게도 하지 못한다.
- ○或問: "佛氏亦有此語." 曰: "其喚醒此心則同; 其為道則異. 吾儒喚醒此心, 欲他照管許多道理; 佛氏則空喚醒此心, 無所作為, 異處在此."
- 혹자가 물었다: "불교에도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이 마음을 일깨우는 것[88]은 동일하지만 도를 행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 유가는 이 마음을 일깨워 그것으로 하여금 수많은 도리를 비추고자 하지만, 불교는 헛되이 마음을 일깨우기만 하고 하는 바가 없으니,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 ○心既常惺惺, 又以規矩䋲檢之, 此内外交相養之道也.
- 마음이 이미 항상 깨어있는 상태에서 다시 規矩로 마음을 검속하는 것, 이것이 안과 밖을 같이 기르는 방법이다.
- ○今人心聳然在此, 尚無惰慢之氣, 况曰心常能惺惺者乎! 故心常惺惺, 自無客慮.
- 요즘 사람들의 마음도 조심히 여기에 있으면 오히려 태만한 기운이 없는데, 하물며 '마음이 늘 깨어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경우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마음이 늘 깨어있으면 저절로 사념이 없게 된다.
- ○陳氏曰: "是就心地上做工夫處. 盖心常惺惺在這裏, 便常惺惺恁地活; 若不在, 便死了. 心纔在這裏, 則萬理便森然於其中矣."
- 진씨가 말했다: "이것(경)은 마음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대개 마음이 늘 깨어있어서 여기에 있으면 늘 깨어있는 것이 이처럼 활발하지만, 만약 여기에 있지 않으면 곧 바로 죽어버린다. 마음은 여기에 있자마자 만리가 마음속에 가득하다."
尹氏之說, 則又有所謂其心收斂不容一物者焉.
윤돈의 설의 경우에는 또 이른바 '其心收斂, 不容一物'이라는 것이 있기도 하다.
- 祈寛問: "如何是主一?" 和靖尹氏曰: "只收歛身心, 便是主一. 且如人到神祠致敬時, 其心收歛, 便著不得毫髮事, 非主一而何?"
- 기관이 물었다: "무엇이 '主一'입니까?" 화정 윤씨가 말했다: "다만 몸과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바로 '主一'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신사에 이르러 공경을 다할 때 그 마음을 거둬들여 털끝 만큼의 일도 [마음속에] 두지 못하는 것, 이것이 '主一'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朱子曰: "心主這一事, 不為他事攙亂, 便是不容一物."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이 이 한 가지 일을 주로하고 다른 일로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이 '不容一物'이다."
- ○問'心收歛, 不容一物.' 曰: "這心都不著一物, 便收歛. 他上文云: '今人入神祠, 當那時, 直是更著不得些子事, 只有箇恭敬.' 此最親切. 今人若能專一此心, 便收歛緊宻, 都無些子空罅; 若這事思量未了, 又走做那邊去, 心便成兩路."
- '心收歛, 不容一物.'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이 마음이 어떤 일에도 마음두지 않는 것이 곧 '收歛'이다. 윤돈의 윗 글에서 '사람이 신사에 들어가면 그때에는 단지 어떤 일에도 마음두지 않고 다만 공경함만 지니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비근하다. 사람들이 만약 이 마음을 전일하게 할 수 있다면, [마음이] 수렴되고 긴밀해져 약간의 틈도 없겠지만, 만약 이 일에 대한 생각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것으로 가버린다면 마음이 두 갈래가 되는 것이다."
觀是數說, 足以見其用力之方矣.”
이 여러 설을 보면 힘쓸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問程子、謝氏、尹氏所說敬處. 朱子曰: "譬如此屋四方皆入得, 若從一方入到這裏, 則那三方入處都在這裏了."
- 정자와 사량좌와 윤돈이 敬을 설명한 것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비유하자면, 이 방은 사방으로 모두 들어올 수 있는데, 만일 한 쪽으로 들어온다면 나머지 세 쪽도 모두 여기에 있는 것과 같다."
- ○問: "敬, 諸先生之說, 各不同. 然總而言之, 常令此心常存, 是否?" 曰: "其實只一般. 若是敬時, 自然主一無適, 自然整齊嚴肅, 自然常惺惺, 其心收歛不容一物. 但程子'整齊嚴肅', 與謝氏、尹氏之說又更分曉."
- 물었다: "敬에 대한 여러 선생들의 설명이 각각 같지 않는데, 총괄해 말한다면 항상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지요?" 말했다. "사실 한 가지일 뿐이다. 만약 敬하는 때라면 자연히 主一無適하고 자연히 整齊嚴肅하며 자연히 常惺惺하고 그 마음이 수렴되어 어떤 외물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정자께서 말씀하신 '整齊嚴肅'이 사량좌나 윤돈의 설명과 비교했을 때 [의미가] 더욱 분명하다."
- ○問: "程子、謝氏之説, 謝氏尤切當[89]." 曰: "如某所見, 程子說得切當. 整齊嚴肅, 此心便存, 便能惺惺, 未有外面整齊嚴肅而内不惺惺者. 人一時間外面整肅, 便一時惺惺; 一時放寛了, 便昏怠也." 新安陳氏曰: "朱子深取整齊嚴肅之説者, 盖以有著實下手處耳."
- 물었다: "정자와 사량좌의 설명 가운데 사량좌이 설명이 더욱 적절한 것 같습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보건대, 정자께서 적절하게 말씀하셨다. 整齊嚴肅하면 마음이 보존되고 惺惺해질 수 있으니 외면을 整齊嚴肅하는데 내면이 惺惺하지 않은 자는 있지 않았다. 사람이 한 번 외면을 바르게 하면 일시에 惺惺해지며, 한 번 방관하게 되면 곧바로 혼매하고 나태해진다." 신안 진씨가 말했다: "주자께서 整齊嚴肅의 설명을 깊히 취하신 것은 아마도 착실히 실천하는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勿齋程氏曰: "整齊嚴肅、及收歛不容一物, 皆敬之始也; 主一無適、及常惺惺者, 皆敬之成也. 主一無適者, 敬之純; 常惺惺者, 敬而明也. 然主一亦有淺深, 以初學言之, 則欲主乎一; 以成徳言之, 則所主者一."
- 물재 정씨가 말했다. "'整齊嚴肅'과 '收歛不容一物'은 모두 敬의 시작이고, '主一無適'과 '常惺惺'은 모두 경의 완성이다. '主一無適'은 敬 중에 순수한 것이고 '常惺惺'은 敬 중에 밝은 것이다. 그러나 '主一'함에는 깊이가 있으니, 초학자로 말한다면 한 가지를 주로 하고자 해야하고, 덕을 이룬 사람으로 말한다면 주로하는 한 가지일 것이다."
- ○黄氏曰: "且將自家身心去體察見得如何是主一無適, 如何是整齊嚴肅, 如何是常惺惺, 如何是其心收歛不容一物. 是四者皆以有所畏而然. 朱子晚年言敬字之義, 惟畏字近之, 其意精矣."
- 황씨가 말했다: "우선 나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무엇이 主一無適이고 무엇이 整齊嚴肅이며 무엇이 常惺惺이고 무엇이 心收歛不容一物인지 살펴보라(體察見得). 이 네 가지는 모두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주자께서 만년에 말씀하신 敬자의 의미는 오직 畏자에 가까우니, 그 의미가 정밀하다. "
- ○西山眞氏曰: "持敬之道, 合三先生之言而用力焉, 然後内外交相養之功始備."
- 서산 진씨가 말했다: "敬을 유지하는 방법은, 세 선생의 말을 합쳐서 그것에 힘쓰는 것이니, 그런 연후에야 내외를 서로 길러주는 공효가 비로소 갖추어질 것이다."
6. 경공부가 학문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되는 이유
曰: “敬之所以爲學之始者然矣, 其所以爲學之終也, 奈何?”
물었다: "敬이 학문의 시작이 되는 것은 맞지만, 학문의 끝이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曰: “敬者, 一心之主宰, 而萬事之本根也. 知其所以用力之方, 則知小學之不能無賴於此以爲始; 知小學之賴此以始, 則夫音扶大學之不能無賴乎此以爲終者, 可以一以貫之而無疑矣. 蓋此心旣立, 由是格物致知以盡事物之理, 則所謂尊德性而道問學;
대답했다: "敬이라는 것은 一心의 주재이자 모든 일의 근본이니, [이에] 힘쓸 방법을 안다면 소학은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시작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고, 소학이 이를 의지해 시작이 됨을 안다면, 저 대학이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끝이 될 수 없다는 것도 '一以貫之'[90]해 의심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 마음이 확립되고서 이것(敬)을 통해 格物致知해 사물의 이치를 다하는 것이 이른바 '尊德性而道問學'[91]이요,
- 新安陳氏曰: "尊徳性, 持敬以涵養本原也; 道問學, 窮格以開發聰明也."
- 신안 진씨가 말했다: "尊徳性은 敬의 상태를 유지해서 본원을 함양하는 것이고 道問學은 궁리·격물해서 총명함을 개발하는 것이다."
由是誠意正心以修其身, 則所謂先立其大者而小者不能奪;
이것(敬)을 통해 誠意正心해 자신을 닦는 것이 이른바 '先立其大者而小者不能奪'[92]이요,
- 新安陳氏曰: "先立其大者, 持敬以誠其意、正其心也; 小者不能奪, 百體從心君所令而身脩也."
- 신안 진씨가 말했다: "'先立其大'라는 것은 경의 상태를 유지하여 그 뜻을 진실하게 하고 그 마음을 바로하는 것이며, '小者不能奪'이라는 것은 온 몸이 心이라는 군주가 명령한 바를 따라서 몸이 닦이는 것이다."
由是齊家治國以及乎天下, 則所謂修已以安百姓, 篤恭而天下平. 是皆未始一日而離去聲乎敬也. 然則敬之一字, 豈非聖學始終之要也哉!”
이것(敬)을 통해 齊家治國해 천하에 이르는 것이 이른바 '修已以安百姓'[93], '篤恭而天下平'[94]이니, 이 모두는 하루도 敬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그렇다면 敬 한 자가 어찌 성인되는 학문(聖學)의 처음부터 끝까지 [적용되는] 키워드가 아니겠는가!"
- 朱子曰: "敬者, 始終之要, 未知則敬以知之; 巳知則敬以守之. 若不敬則其心顛倒昏昧, 而不自知, 未知者, 非敬無以知; 巳知者, 非敬無所守."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敬이라는 것은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핵심이니, 아직 알지 못한 것이 있다면 敬해서 그것을 알아가고, 이미 알았다면 敬해서 그것을 지켜야 한다. 만약 敬하지 않은다면 마음이 전도되고 어두워져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게 되니,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은 敬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이미 안 것은 敬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
- ○陳氏曰: "心之為物, 虚靈知覺, 所以為一身之主宰也. 身無此以為之主宰, 則四肢百體皆無所管攝矣. 然所以為心者, 又當由我有以主宰之, 我若何而主宰之乎? 所謂敬者, 是又一心之主宰也."
- 진씨가 말했다: "마음이라는 것은 허령한 지각이라서 한 몸의 주재가 된다. 몸이 이것을 주재로 삼지 않으면 온몸의 기관 모두를 관장하는 것이 없게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마땅히 나를 통해 주재돼야 하니, 나는 어떻게 그것을 주재하나? 이른바 敬이라는 것이 다시 마음의 주재가 된다."
7. 삼강령·팔조목
曰: “然則此篇所謂‘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者, 亦可得而聞其說之詳乎?”
물었다: "그렇다면 이 편에서 말한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는가?"
曰: “天道流行, 發育萬物, 其所以爲造化者, 陰陽五行而已.
대답했다: "천도가 유행해 만물을 발육함에 조화를 이루는 것은 음양오행일 뿐인데,
- 黄氏曰:"天道是理; 隂陽五行是氣. 合而言之, 氣即是理, 一隂一陽之謂道, 是也; 分而言之, 理自為理, 氣自為氣, 形而上下, 是也.
- 황씨가 말했다: "'천도'는 理이고 '음양오행'은 氣이다. 합해서 말하면 氣는 곧 理이니 '一隂一陽之謂道'[95]가 이것이다. 나눠 말하면 理는 그 자체로 理이고, 氣는 그 자체로 氣이니 '形而上下'[96]가 이것이다."
- ○未有五行, 只得喚做隂陽; 既有五行, 則隂陽在五行之中矣.
- 아직 오행이 있지 않을 때에는 단지 음양이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다. 오행이 있고 나면 음양은 오행 가운데 있다.
而所謂陰陽五行者, 又必有是理而後有是氣; 及其生物, 則又必因是氣之聚而後有是形. 故人物之生必得是理, 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 然後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周子所謂‘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者, 正謂是也.
이른바 '음양오행'이라는 것은 다시 반드시 理가 있은 뒤에 氣가 있고, 만물을 낳음에 이르러서는 다시 반드시 氣의 응취에 기인해 形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이 태어남에 반드시 理를 얻은 연후에 健順·仁義禮智와 같은 性이 될 수 있고, 반드시 氣를 얻은 연후에 魂魄·五臟·百骸와 같은 身이 될 수 있다. 周子께서 ‘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97]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 問: "必有是理然後有是氣, 是如何?" 朱子曰: "此本無先後之可言. 然必欲推其氣之所從來, 則須說先有是理. 然理又非别為一物, 即存乎是氣之中. 無是氣, 則是理亦無掛搭[98]處. 氣則為金木水火, 理則為仁義禮智.
- 물었다. "'반드시 이 理가 있은 이후에 氣가 있다'고 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본래 말할 만한 선후가 없다. 그러나 굳이 氣의 유래를 추론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理가 먼저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理가 다시 별도로 하나의 사물인 것이 아니니, 氣 가운데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氣가 없다면 理 또한 안착할 곳이 없다. 氣는 金·木·水·火가 되고 理는 인·의·예·지가 된다."
- ○理未嘗離乎氣, 然豈無先後? 理無形, 氣便粗有查滓.
- 理는 일찍이 氣와 떨어진 적이 없지만, 어찌 선후가 없겠는가? 理에는 형체가 없지만 氣는 거칠게 찌꺼기 [같은 것이] 있다.
- ○就原頭定體上說, 則未分五行時, 只謂之隂陽; 未分五性時, 只謂之健順. 及分而言之, 則陽為木火, 隂為金水, 健為仁禮, 順為智義.
- 근원적 상태(原頭定體)에 대해 말한다면, 아직 오행으로 나눠지지 않은 때에는 다만 隂·陽이라 말하고, 아직 오성으로 나눠지지 않은 때에는 다만 健·順이라고 말한다. [오행과 오성으로] 나눠지는 경우에 대해 말하면, 陽은 木·火가 되고 隂은 金·水가 되며, 健은 仁·禮가 되고 順은 智·義가 된다.
- ○問隂陽五行健順五常之性. 曰: "健是稟得那陽之氣; 順是稟得那隂之氣; 五常是稟得五行之理. 人物皆稟得健順五常之性.
- 隂陽·五行·健順·五常의 性에 대해 물었다. 말씀하셨다: "健은 저 陽의 氣를 품수받은 것이고, 順은 저 隂의 氣를 품수받은 것이며, 五常은 五行의 理를 품수받은 것이다. 사람과 만물은 모두 健順·五常의 性을 품수받는다."
- ○天地之間有理有氣. 理也者, 形而上之道也, 生物之本也; 氣也者, 形而下之器也, 生物之具也. 故人物之生, 必稟此理, 然後有性; 必稟此氣, 然後有形. 其性其形, 雖不外乎一身, 然道器之間, 分際甚明, 不可亂也.
- 천지 사이에 理와 氣가 있으니, 理라는 것은 형이상의 도이니 만물을 낳는 근본이고, 氣라는 것은 형이하의 기물(器)이니 만물을 낳는 도구(具)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이 생겨남에 반드시 理를 품수받은 이후에 性이 있게 되고, 반드시 이 氣를 품수받은 이후에 형체가 있게 된다. 이 性과 형체는 비록 한 몸을 벗어나지 않지만, 道와 器 사이에는 구분이 매우 명확하여 [서로] 어지럽힐 수 없다.
- ○北溪陳氏曰: "人始於氣感則得魂為先, 既而體凝焉則魄次之. 魂主乎動, 所以行乎此身之中, 隨所貫而無不生者也; 魄主乎静, 所以實乎此身之中, 隨所注[99]而無不定者也.
- 북계 진씨가 말했다: "사람이 처음 기를 感하면 魂을 먼저 얻고, 이어서 육체가 응결되면 魄을 그 다음으로 [얻는다]. 魂은 動을 주로하기 때문에 몸 안에서 행함에 관통함(貫)에 따라 낳지 않는 것이 없고, 魄은 静을 주로하기 때문에 몸 안을 채움에 관통함(注)에 따라 안정시키기 않음이 없다."
- ○節齋蔡氏曰: "先有理後有氣者, 形而上為道, 形而下為器之謂也; 有則俱有者, 道即器之謂也. 盖不分先後, 則理氣不明; 不合理氣, 則判為二物, 如性之與情未發已發, 自有先後, 固不可道性情同時也. 然情之本實具於性, 非先有此性而後别生一情, 是有此性即有此情也.
- 절제 채씨가 말했다: "'먼저 理가 있은 후에 氣가 있다'는 것은 형이상자가 道가 되고 형이하자가 器가 된다는 말이고, '[理가] 있으면 [氣를] 갖춘다'는 것은 '道가 器에 즉한다'는 말이다. 대개 선후를 나누지 않으면 理와 氣[의 차이가] 밝혀지지 않고, 理와 氣를 합하지 않으면 [理와 氣가] 별개의 것이 되니, 마치 性과 情은 未發과 已發의 상태로 자연히 선후가 있어서 진실로 性과 情이 동시에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情은 본래 性에 실로 갖추어져 있어서 性이 먼저 존재한 연후에 따로 情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性이 있으면 곧 이 情이 있게 되는 것과 같다."
- ○東窻李氏曰: "天之運五行, 其實隂陽而已; 人之性五常, 其實健順而已. 仁之油然生意不可遏, 禮之粲然明盛不可亂, 健之為也; 義不拂乎可否之宜, 智不外乎是非之别, 順之為也. 若夫信, 則體是理而不易者, 健也; 循是理而不違者, 順也.
- 동창 이씨가 말했다: "하늘이 五行을 운행함에 그 실질은 隂·陽일 뿐이고, 사람이 五常을 性으로 함에 그 실질은 健·順일 뿐이다. 仁의 유연한 生意를 막을 수 없고 禮의 찬연하고 성대함을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은 健이 행한 것이고, 義가 可·否의 마땅함에서 벗어나지 않음과 智가 是·非의 구별에서 벗어나지 않음은 順이 행한 것이다. 信의 경우는, 理를 체득하여 바뀌지 않는 것이 健이고 理를 따라서 거스르지 않는 것이 順이다."
- ○玉溪盧氏曰: "魂, 陽之靈; 魄, 隂之靈; 五臟, 五行之質[100]; 百骸, 萬物之象也; 眞, 以理言而理不雜氣; 精, 以氣言而氣不離理. 妙者, 理氣之莫測; 合者, 理氣之無間; 凝則有是形而各一其性矣.
- 옥계 노씨가 말했다: "魂은 陽의 영이고 魄은 隂의 영이며, 오장은 오행의 형체이고 百骸은 만물의 형체이다. 眞은 理로 말하여 理가 氣와 섞이지 않는 것이고 精은 氣로 말하여 氣가 理와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妙라는 것은 理와 氣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合이라는 것은 理·氣에 간극이 없어서, 응결되면 형체가 있고 각각 하나의 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周子之言見<太極圖說>
- 주돈이의 말은 <태극도설>에 보인다.
然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先則反者爲物, 是以或貴或賤而不能齊也.
그러나 理로 말한다면 만물은 같은 근원이니 진실로 사람과 사물·귀함과 천함의 다름이 없고, 氣로 말한다면 그 바르고 통한 것을 얻은 것이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은 것은 사물이 되기 때문에 어떤 것은 귀하고 어떤 것은 천하여 같을 수가 없다.
- 朱子曰: "以理言之, 則無不全; 以氣言之, 則不能無偏."
- 주자가 말했다. "理로 말한다면 온전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氣로 말한다면 치우침이 없을 수 없다."
- ○人得其氣之正, 故是理通而無所塞; 物得其氣之偏, 故是理塞而無所通. 且如人頭圓象天, 足方象地, 平正端直, 以其受天地之正氣, 所以識道理有知識; 物受天地之偏氣, 所以禽獸横生, 草木頭生向下, 尾反向上, 物之間有知者, 不過只通得一路, 如烏之知孝, 獺之知祭, 犬但能守禦, 牛但能耕而已. 人則無不知、無不能, 人所以與物異, 所争者此耳.
- 사람은 그 氣 중에 바른 것을 얻었기 때문에 理가 통해 막힘이 없지만, 사물은 氣 중에 치우친 것을 얻었기 때문에 理가 막혀 통하는 바가 없다. 예를 들어 사람의 머리 모양이 둥근 것은 하늘은 본뜬 것이고, 발이 네모난 것은 땅을 본 뜬 것이며, 평평하고 바르고 단정하고 곧으며, 천지의 바른 기를 얻었기 때문에 도리를 인식하고 지식이 있는 것이다. 사물은 천지의 치우친 기를 받았기 때문에 금수는 横生하고, 초목은 머리가 날 때 아래를 향하고 꼬리는 도리어 위를 향한다. [또] 사물들 중에 지각이 있는 것은 다만 한 갈래만 통하는 데 불과하니, 예를 들어 까마귀는 孝를 알고 수달이 제사 지낼 줄 알며, 개는 지킬 수만 있고 소는 밭갈 수만 있을 뿐이다. 사람이라면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할 수 없는 것이 없으니, 사람이 사물과 다른 점은 그 차이가 이것일 뿐이다.
- ○論萬物之一原, 則理同而氣異; 觀萬物之異體, 則氣猶相近而理絶不同. 方賦與萬物之初, 天命流行只是一般, 故理同; 二五之氣有清濁純駁, 故氣異. 萬物已得之後, 雖有清濁純駁之不同, 而同此二五之氣, 故氣相近; 以其昏明開塞之甚逺, 故理絶不同. 氣相近, 如知寒暖、識飢飽、好生惡死、趨利避害, 人與物都一般; 理不同, 如蜂蟻之君臣, 只是他義上有一㸃子明; 虎狼之父子, 只是他仁上有一㸃子明, 其他更推不去.
- 만물의 근원이 같음을 논한다면 理는 같고 氣는 다르며, 만물의 형체가 다름을 본다면 氣는 오히려 서로 가깝지만 理는 절대로 같지 않다. 만물에게 부여한 처음에는 천명의 유행은 단지 똑같기 때문에 理는 같지만, 음양오행의 氣에는 清濁純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氣는 다르다. 만물이 이미 얻고 난 후에는 비록 清濁純駁의 차이가 있지만 이 음양오행의 기는 같기 때문에 氣는 서로 가깝고, 그 어둡거나 밝고 열리거나 막힘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理는 전혀 다른 것이다. '氣가 서로 가까운 것'은 마치 춥고 따뜻함을 알고 배고프고 배부름을 인지하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며 이익을 쫓고 해악을 피하는 것과 같으니 사람과 만물이 모두 같은 것이고, '理가 같지 않은 것'은 마치 벌과 개미의 군신관계가 다만 '義'에 대해서 약간 밝은 부분이 있고, 호랑이와 이리의 부자관계가 다만 '仁'에 대해서 약간 밝은 것과 같은 것이니, 이밖으로는 더 미룰 수 없다.(벌과 개미는 義에만 밝고, 호랑이와 이리는 仁에만 밝다.)
- ○新安倪氏曰: "理雖不雜乎氣, 而亦不離乎氣. 以不雜者言之, 則理同而氣異; 以不離者言之, 則得氣之正者理亦全, 得氣之偏者理亦不全矣. 朱子後一條, 與或問之說略有不同者, 而亦未嘗不互相發也.
- 신안 예씨가 말했다: "理는 비록 氣와 섞이지 못하지만 氣와 떨어지지도 못한다. 섞이지 못하는 점으로 말하면 理는 동일하고 氣는 다르며,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점으로 말하면 氣 중에 치우친 것을 얻으면 리 또한 온전하지 못하다. 주자의 이후 한 조목이 [여기] <혹문>의 설명과 약간 같지 않은 것이 있지만, 그래도 서로 발명하지 않은 적이 없다."
彼賤而爲物者, 旣梏於形氣之偏塞, 而無以充其本體之全矣. 唯人之生乃得其氣之正且通者, 而其性爲最貴, 故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
저 천하여 사물이 된 것은 이미 치우치고 막힌 형기에 구속되어 그 본체의 온전함을 확충할 수 없다. 오직 사람만이 태어남에 곧 바르고 통한 기를 얻어 性이 가장 귀중하게 되었으므로 마음이 허령하고 막힘없이 훤해 만리를 모두 갖추고 있다.
- 北溪陳氏曰: "此八字, 只是再詳'虛靈不昧, 以具衆理'之意. 虛靈洞徹, 盖理與氣合而有此妙用耳, 非可專指氣. 如心恙底人亦有氣存, 何故昏迷顛錯, 無此虚靈洞徹耶?"
- 북계 진씨가 말했다: "이 여덟 자(虛靈洞徹, 萬理咸備)는 다만 '虛靈不昧, 以具衆理'[101]의 의미를 다시 상세히 밝힌 것이다. '虛靈洞徹'은 대개 理와 氣를 합해 이러한 묘용이 있는 것이지 오직 氣만 가리킬 수는 없다. 만약 마음이 병든 사람에게도 [좋은] 氣가 보존되어 있다면, 무엇 때문에 혼미하고 전도되어 이러한 虚靈洞徹이 없겠는가?"
蓋其所以異於禽獸者正在於此, 而其所以可爲堯舜而能參天地以贊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 然其通也或不能無淸濁之異, 其正也或不能無美惡之殊, 故其所賦之質, 淸者智而濁者愚, 美者賢而惡者不肖, 又有不能同者.
대개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고, 사람이 요순이 될 수 있고 천지에 참여하여 화육함을 도울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明德이다. 그러나 사람의 통한 [기]에도 간혹 맑고 탁한 차이가 없을 수 없고, 바른 [기에도] 간혹 아름답거나 추악한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부여받은 기질이 맑은 사람은 지혜롭고 탁한 사람은 어리석으며 아름다운 사람은 어질고 나쁜사람은 불초하니, [사람과 사물 사이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도] 다시 같을 수 없는 점이 있다.
- 朱子曰: "人雖皆是天地之正氣, 但衮來衮去, 便有昏明厚薄之異. 盖氣是有形之物, 纔是有形之物, 便自有美惡也."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록 천지의 바른 기를 가지고 있지만, 다만 이리저리 뒤섞여 昏明厚薄의 차이가 있다. 대개 氣는 형체가 있는 것이니, 형체가 있는 것인 이상 절로 아름답거나 추악한 [차이가] 있다."
- ○問: "智愚賢不肖是所稟之氣有清濁美惡之不同, 不歸於所稟, 而歸於所賦, 何邪?" 曰: "賦如俗語云分俵均敷之意."
- 물었다: "智·愚·賢·不肖함은 품부받은 氣에 清濁美惡의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그 원인을] '품수받은 것(所稟)'으로 환원하지 않고 '부여받은 것(所賦)'으로 환원하신 것은 어째서 입니까?" 말씀하셨다: "'賦'는 세간에서 '고르게 나눠준다(分俵均敷)'고 말하는 뜻과 같다."
- ○問: "有人聰明通曉, 是稟氣之清矣. 然却所為過差, 或流於小人之歸; 又有為人賢而不甚聰明通曉, 何也?" 曰: "<或問>中所謂知愚賢不肖之殊, 是也. 盖其所賦之質, 便有此四樣, 聰明曉了者, 智也; 而或不賢, 便是稟賦中欠了清和温恭之徳; 又有人極温和, 而不甚曉事, 便是賢而不智. 為學, 便是要克化教此等氣質, 令恰好耳."
- 물었다: "어떤 사람이 총명하고 훤히 다 아는 것은 품부받은 氣가 맑기 때문인데, 도리어 잘못을 저질러 혹 소인이라는 귀결지로 흘러가 버리기도 하고, 또 사람됨이 어진데 썩 총명하거나 훤히 알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말씀하셨다: "<或問>에서 知·愚·賢·不肖의 차이를 말한 것이 이것이다. 대개 부여받은 자질에는 이 네 가지 양상이 있는데, 총명하고 훤히 아는 사람은 지혜롭지만(智) 간혹 어질지 못한 것(不賢)은 품부받은 것 중에 온화(清和·温恭)한 덕에 흠결이 있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매우 온화한데 썩 총명하지 못한 것은 어질면서도 지혜롭지 못한 것(賢而不智)이다. 학문함이란 바로 이러한 기질을 교화시켜서 적절하게 만드려고 하는 것이다."
- ○有是理, 而後有是氣; 有是氣, 必有是理. 但稟氣之清者為聖為賢, 此如寶珠在清冷水中; 稟氣之濁者為愚不肖, 此如寶珠在濁水中. 所謂明明徳者, 是就濁水中揩拭此珠也. 物亦有是理, 又如寶珠在至汚處. 然其所稟有些明處, 就上面便自不昩, 如虎狼之父子, 蜂蟻之君臣, 是也."
- 理가 있은 이후에 氣가 있으니, 氣가 있으면 반드시 理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품부받은 기질이 맑은 사람이 성현이 되는 것은 마치 보주가 맑은 물 안에 있는 것과 같고, 품부받은 기질이 탁한 사람이 어리석고 불초하게 되는 것은 마치 보주가 탁한 물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이른바 '明明徳'이라는 것은 바로 탁한 물에서 이 보주를 씻는 것이다. 사물에도 理가 있지만, 또 마치 보주가 매우 더러운 곳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품부받은 바에 조금이나마 밝은 부분이 있어서 그 위는 어둡지 없으니, 마치 호랑이나 이리의 부자관계나 벌과 개미의 군신관계 같은 것이 이것이다.
- ○黄氏曰: "美惡是有生之初便分了, 非以性言, 是以氣言. 譬如玉之與石, 則美惡固分; 而玉之中, 又有美惡分焉."
- 황씨가 말했다: "아름답거나 추악한 차이(美惡)는 생겨난 처음에 나눠지는데, 性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氣로 말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옥과 돌은 美惡이 진실로 구분되지만, 옥 가운데에서도 美惡이 나눠지는 경우와 같다."
- ○格庵趙氏曰: "通塞偏正, 判人物之大分而言; 其清濁美惡, 又就人中分别."
- 격암 조씨가 말했다: "'通塞偏正'은 사람과 사물을 나누는 큰 분류(大分)를 말한 것이고, '清濁美惡은' 사람 내에서 분별한 것이다."
必其上智大賢之資乃能全其本體, 而無少不明, 其有不及乎此, 則其所謂明德者已不能無蔽而失其全矣. 况乎又以氣質有蔽之心, 接乎事物無窮之變, 則其目之欲色, 耳. 之欲聲, 口之欲味, 鼻之欲臭, 四肢之欲安佚, 所以害乎其德者, 又豈可勝平聲言也哉! 二者相因, 反覆深固, 是以此德之明, 日益昏昧, 而此心之靈, 其所知者不過情欲利害之私而已. 是則雖曰: 有人之形, 而實何以遠於禽獸, 雖曰: 可以爲堯舜而參天地, 而亦不能有以自充矣. 然而本明之體, 得之於天, 終有不可得而昧者, 是以雖其昏蔽之極, 而介然之頃介音甲倐然之頃也一有覺焉, 則卽此空隙之中, 而其本體已洞然矣.
반드시 上智·大賢의 자질이라야 그 본체를 온전히 할 수 있고 조금의 밝지 못함도 없을 수 있으니,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면 이른바 明德이라는 것이 이미 가려지지 않을 수 없어서 그 온전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게다가 더욱이 기질이 가린 마음으로 사물의 무궁한 변화를 만난다면, 여색을 바라는 눈과 아름다운 소리를 바라는 귀와 맛있는 것을 바라는 입과 향기를 바라는 코와 편안함을 바라는 몸이 그 덕(明德)을 해침을 또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가 서로 말미암아서 반복되어 더욱 견고해지니, 이 때문에 밝은 덕은 날마다 더욱 어두워지고 신령한 마음은 정욕·이해와 같은 사욕만 알 것이다. 이렇다면 비록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금수와 무엇이 다르겠으며, 비록' 요순이 될 수 있고 천지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 스스로 확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 밝은 것(明德)은 하늘로부터 얻은 것이라서 끝내 어두워질 수 없으니, 이 때문에 비록 지극히 가려지더라도 잠깐 사이에 하나라도 깨우친다면, 그 틈 사이로 본체가 이미 훤히 드러나 있을 것이다.
- 問: "'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其本體已洞然矣', 須是就這些覺處, 便致知充廣將去." 朱子曰: "然. 如擊石之火只是些子, 纔引著, 便可以燎原. 若必欲等大覺了, 方去格物致知, 如何等得這般時節? 那箇覺是物格知至了, 大徹悟, 到恁地時, 事都了. 若是介然之覺, 一日之間, 其發也無時無數, 只要人識認得操持充養將去."
- 물었다: "'잠깐 사이에 하나라도 깨우침이 있다면, 그 틈 사이로 본체가 이미 훤히 드러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반드시 조금 깨우친 곳에서 앎을 지극히 하고 확충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부싯돌로 낸 불은 미미할 뿐이지만, 끌어다 붙이자마자 들판을 태워버릴 수도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반드시 크게 깨우치고 나서(大覺) 격물치지 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러한(大覺) 때를 기다리겠는가? 저 깨우침(大覺)은 [격물치지의 결과로] 物格知至해서 크게 깨우친 것이니, 이런 때에 이르면 일은 [이미] 다 이뤄진 것이다. 잠깐 사이의 깨우침이 드러나는 건 하루[같이 짧은 기간]에도 정해진 때나 횟수가 없으니, 다만 사람이 [이를] 인식하고 지켜서 확충해 나가야 할 뿐이다."
是以聖人施敎, 旣已養之於小學之中, 而復扶又反開之以大學之道. 其必先之以格物致知之說者, 所以使之卽其所養之中, 而因其所發, 以啓其明之之端也; 繼之以誠意·正心·修身之目者, 則又所以使之因其已明之端, 而反之於身, 以致其明之之實也. 夫音扶旣有以啓其明之之端, 而又有以致其明之之實, 則吾之所得於天而未嘗不明者, 豈不超然無有氣質物欲之累, 而復得其本體之全哉! 是則所謂明明德者, 而非有所作爲於性分去聲之外也. 然其所謂明德者, 又人人之所同得, 而非有我之得私也. 向也俱爲物欲之所蔽, 則其賢愚之分, 固無以大相遠者. 今吾旣幸有以自明矣, 則視彼衆人之同得乎此而不能自明者, 方且甘心迷惑沒溺於卑汚音烏苟賤之中而不自知也, 豈不爲去聲之惻然而思有以救之哉! 故必推吾之所自明者以及之, 始於齊家, 中於治國, 而終及於平天下, 使彼有是明德而不能自明者, 亦皆有以自明, 而去上聲其舊染之汚焉, 是則所謂新民者, 而亦非有所付畀必至反增益之也. 이 때문에 성인께서 베푸신 가르침이란 소학에서 그들을 기르고 다시 대학의 道로 그들을 열어주는 것이다. 성인께서 반드시 격물치지의 설명을 우선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소학에서] 기르는 것에 나아가 [거기에서] 드러난 것을 통해 [명덕을] 밝히는 단서를 열게 하신 것이고, 誠意·正心·修身의 조목으로 격물치지를 이으신 것은 또한 그들로 하여금 이미 밝혀진 단서를 통해 자신에게 돌이켜 [명덕을] 밝히는 실질에 이루게 하신 것이다. 대저 이미 [명덕]을 밝히는 단서를 연 데다가 [명덕을] 밝히는 실질도 이뤘다면, 내가 하늘로부터 얻어 밝지 않은 적이 없던 것(명덕)이 어찌 초연히 기질과 물욕의 얽매임이 없이 다시 그 본체의 온전함을 회복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明明德'이라는 것이니, [명명덕은] 이렇다면 이른바 명명덕이라는 것은 성분 밖에서 작위하는 것이 아니다.[102] 그러나 이른바 '명덕'이라는 것은 또한 사람마다 동일하게 얻은 것이지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모두 물욕에 의해 가려졌다면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賢愚)의 차이가 진실로 클 수 없을 것이지만, 지금 내가 다행히 스스로 [명덕을] 밝힌 이상, 이것(명덕)을 똑같이 얻고도 스스로 밝히지 못하는 저 사람들이 막 기꺼이 미혹되어 더럽고 구차한 곳에 빠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함을 본다면, 어찌 그들을 측은해 하며 그들을 구제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내가 스스로 밝힌 바를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쳐, 齊家에서 시작해서 治國을 거쳐 마침내 平天下에 이르러, 이 명덕을 가지고도 스스로 밝힐 수 없는 저 사람들로 하여금 역시 모두 스스로 밝혀서 구습의 오염된 더러움을 제거하게 해야 하니, 이렇다면 이른바 '新民'이라는 것 역시 주거나 더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 玉溪盧氏曰: "非彼本無而我付畀之, 非彼本少而我増益之, 以其本體之明無不全也."
- 옥계 노씨가 말했다: "저들에게 본래부터 없기 때문에 내가 준 것도 아니고, 저들이 본래 조금만 가지고 있어서 내가 더해준 것이 아니니, 그 밝은 본체는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然德之在己而當明, 與其在民而當新者, 則又皆非人力之所爲; 而吾之所以明而新之者, 又非可以私意苟且而爲也. 是其所以得之於天而見形甸反於日用之間者, 固已莫不各有本然一定之則,
그러나 자신에게 있어서 마땅히 밝혀야 하는 德과 백성들에게 있어 마땅히 새롭게 해야할 것은 또한 모두 사람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밝히고 새롭게 하는 까닭 또한 사의로 구차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하늘로부터 얻어 일상생활에 드러나는 것에는 진실로 이미 각각 본연의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 없다.
- 西山眞氏曰: "則者, 法也. 天下之理, 皆天實為之, 莫不有一定之法, 非人力所可増損, 故曰則."
- 서산 진씨가 말했다: "'則'이라는 것은 법칙이다. 천하의 이치는 모두 하늘이 실로 행하는 것이니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 없고, 사람의 힘으로 더하고 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則'이라고 말한 것이다."
- ○玉溪盧氏曰: "至善, 乃太極之異名而明徳之本體. 得之於天而有本然一定之則者, 至善之體, 乃吾心體統之太極; 見於日用之間而各有本然一定之則者, 至善之用, 乃事事物物各具之太極也."
- 옥계 노씨가 말했다: "'至善'이란 바로 태극의 다른 이름이며 명덕이라는 본체이다.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연의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은 至善의 體이니 바로 내 마음의 體統이 되는 태극이요, '일상생활에 드러나는 것에는 각각 본연의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은 至善의 用이니, 이것이 바로 '사물마다 각각 갖추고 있는 태극'[103]이다."
程子所謂‘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而『傳』去聲所謂君之仁·臣之敬·子之孝·父之慈·與人交之信, 乃其目之大者也. 衆人之心, 固莫不有是, 而或不能知, 學者雖或知之, 而亦鮮上聲能必至於是而不去, 此爲大學之敎者, 所以慮其理雖粗上聲略也復而有不純, 已雖粗克而有不盡, 且將無以盡夫音扶修己治人之道, 故必指是而言, 以爲明德·新民之標的也. 欲明德而新民者, 誠能求必至是而不容其少有過不及之差焉, 則其所以去上聲人欲而復天理者, 無毫髮之遺恨矣. 정자께서 '지극히 정미한 의리에는 이름할 수 없는 점이 있기 때문에 우선 至善으로 지목한다'[104] 고 하셨는데, <전>의 이른바 '君之仁·臣之敬·子之孝·父之慈·與人交之信'[105]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지선의) 조목 가운데 큰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진실로 이렇지 않음이 없으나 간혹 알지 못하기도 하고, 배우는 자가 비록 혹 이를 알더라도 [그 가운데] 반드시 이에 이르러 떠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무니, 이것이 <대학>의 가르침을 세운 자가 그 理가 비록 약간 회복되더라도 순수하지 않음이 있고 이미 비록 약간 극복했다하더라도 다하지 않음이 있어 장차 修己治人의 도를 다할 수 없음을 염려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것(至善)을 가리켜서 말해 至善을 明德·新民의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明德·新民하고 싶은 사람이 진실로 반드시 여기(至善)에 이르기를 바라 약간의 과불급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인욕을 없애고 천리를 회복하는 것에 조금의 여한도 없을 것이다.
- 朱子曰: "至善只是極好處, 十分端正恰好, 無一毫不是處, 無一毫不到處. 且如事君, 必當如舜之所以事堯, 而後喚做敬; 治民, 必當如堯之所以治民, 而後喚做仁. 不獨如此, 凡理皆有箇極好處."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至善'은 그저 아주 좋은 것이니, 십분 단정하고 적절해 조금의 옳지 않음도 없고 조금의 주도하지 않음도 없는 것이다. 예를들어 군주를 섬기는 경우 반드시 舜이 군주를 섬겼던 것과 같이 한 이후에야 敬이라고 불러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경우 반드시 堯가 백성을 다스린 것과 같이 한 이후에야 仁이라고 불러야 한다. [지선은] 이와 같은 경우 뿐만 아니라 모든 이치에 모두 각각 지극히 좋은 것이 있는 것이다.
- ○陳氏曰: "所謂'姑以至善目之'者, 所以極形容其精微爾, 非謂精微之不為善而借此以形容之也."
- 진씨가 말했다: "이른바 '姑以至善目之'라는 것은 그 정미함을 지극히 형용한 것일 뿐이지, 정미함이 선하지 못해 이 말(지선)을 빌려 형용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又曰: "自其大者言之, 如仁敬慈孝即君臣父子所當止之處; 自其小者言之, 如足容重, 手容恭, 重與恭, 即手足所當止之處; 視思明, 聽思聰, 聰與明, 亦視聽所當止之處."
- 또 말했다: "큰 것으로부터 말하면 仁·敬·慈·孝가 곧 군신·부자관계에서 마땅히 멈춰야 할 곳임과 같고, 작은 것으로부터 말하면 마치 '발 모양은 무겁게 하고 손 모양은 공손하게 한다'[106]에서 무겁게 하고 공경하게 함이 곧 손과 발이 마땅히 그쳐야하는 곳이며, '볼 때는 밝음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귀밝기를 생각한다'[107]에서 귀밝음과 밝음은 또한 보고 들음이 마땅히 그쳐야 하는 곳인 것과 같다."
大抵『大學』一篇之指, 總而言之, 不出乎八事, 而八事之要, 總而言之, 又不出乎此三者, 此愚所以斷都玩反然以爲『大學』之綱領而無疑也. 然自孟子沒而道學不得其傳, 世之君子各以其意之所便者爲學. 於是乃有不務明其明德, 而徒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者; 又有愛身獨善, 自謂足以明其明德, 而不屑乎新民者; 又有畧知二者之當務, 顧乃安於小成, 狃女九反於近利,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是皆不考乎此篇之過, 其能成己成物而不謬者鮮上聲矣.
대저 『대학』 한 편의 요지를 통틀어 말한다면 이 팔조목을 벗어나지 않으며, 이 팔조목의 요체를 통틀어 말한다면 또한 이 삼강령을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단호하게 [삼강령과 팔조목을] 『대학』의 강령이라고 여기고 의심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맹자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도학이 전해지지 못해 세상의 군자들이 각각 자기 뜻이 편한 바를 학문으로 삼았다. 이에 곧 자신의 明德을 밝히는 데 힘쓰지 않고 그저 정교와 법도가 新民하기 충분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었고, 또 자신을 아끼고 홀로 선하게 해서 스스로 '내 明德을 밝힐 수 있다'고 여기면서 '新民'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으며, 또 대략 이 두 가지(明德·新民)에 마땅히 힘써야 함을 알지만 도리어 이내 작은 성공에 안주하고 가까운 이익만 탐내서 '止於至善'의 소재를 구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이 모두는 이 편(<대학>)을 상고하지 않은 잘못이니, 자신을 이루고 사물을 이루며 잘못하지 않을 수 있는 자가 드물다.
- 朱子曰: "不務明其明徳而以政教法度為足以新民, 如管仲之徒便是; 自謂能明其明徳而不屑於新民, 如佛老便是; 略知明徳新民而不求止於至善, 如王通便是. 看他於己分上亦甚脩飾, 其論為治, 本末亦有條理, 甚有志於斯世, 只是規模淺窄, 不曽就本原上着工, 便做不徹. 須是無所不用其極, 方是. 古之聖賢明明徳, 便欲無一毫私欲; 新民, 便欲人於事事物物上皆是當也."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의 明徳을 밝히는데 힘쓰지 않고 정교와 법도가 新民하기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은 관중과 같은 무리가 이에 해당하고, '스스로 明徳을 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新民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불교·도가와 같은 자들이 이에 해당하며, '대략 明徳·新民해야 함을 알지만 止於至善을 구하지 않는 것'은 왕통과 같은 자가 이에 해당한다. 그(왕통)를 보면, 자기 본분상에서 매우 잘 닦았고, 그가 다스림에 대해서 논한 것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시 조리가 있었으며, 이 세상에 심히 뜻을 두긴 했지만, 다만 규모가 너무 작아 일찍이 본원상에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저하지 못하였다. 모름지기 그 지극함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 비로소 옳다. 옛날의 성현들의 明明徳은 터럭만큼의 작은 사욕도 없고자 하셨고, 新民은 사람들이 사사물물마다 모두 옳게 하고자 하셨다."
- ○玉溪盧氏曰: "成己謂明徳; 成物謂新民; 不止至善, 故'不謬者鮮.'"
- 옥계 노씨가 말했다: "자신을 이루는 것을 明徳이라하고, 사물을 이뤄주는 것을 新民이라 한다. 至善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잘못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
8. '親民'을 '新民'으로 고친 이유
曰: “程子之改親爲新也, 何所據? 子之從之, 又何所考而必其然耶? 且以已意輕改經文, 恐非傳疑之義[108], 奈何?”
물었다: "정자께서 '親'을 '新'으로 고치셨는데, 어디에 근거하신 것인가? 그대가 이를 따랐는데, 또 무엇을 살피고서 그렇다고 확신했는가? 또 자기 생각으로 함부로 경문을 고치는 것은 傳疑[109]의 원칙(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는 원칙) 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떤가?"
- 新安倪氏曰: "<春秋穀梁傳>云: '信以傳信, 疑以傳疑.' 此傳疑二字所本也."
- 신안예씨가 말했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서 '미더운 것은 미더운 대로 전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한다'[110]고 하니, 이것이 '傳疑' 두 글자의 유래이다."
曰: “若無所考而輒改之, 則誠若吾子之譏矣. 今親民云者, 以文義推之則無理, 新民云者以傳去聲文考之則有據. 程子於此, 其所以處上聲之者亦已審矣. 矧未嘗去上聲其本文, 而但曰: '某當作某', 是乃漢儒釋經不得已之變例, 而亦何害於傳疑耶? 若必以不改爲是, 則世蓋有承誤踵之隴反訛吾禾反, 心知非是, 而故爲穿鑿附會, 以求其說之必通者矣. 其侮聖言而誤後學也益甚, 亦何足取以爲法耶?”
대답했다: "만약 살핀 바가 없이 바로 그것을 고쳤다면, 진실로 그대의 비판과 같을 것이다. 지금 '親民'이라고 말한 것은 글의 뜻으로 미루어보면 근거가 없고, '新民'이라고 말한 것은 (<대학>의) 傳文을 가지고 살펴보면 근거가 있다. 정자께서 이를 처리하신 것은 또한 매우 분명하다. 하물며 [정자께서] 일찍이 그 본문을 제거하지 않고 단지 '무엇은 마땅히 무엇으로 써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한나라 유자들이 경전을 해석하며 부득이했던 變例니, 또한 어찌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는 원칙'(傳疑)에 해가 되겠는가? 만약 애써 고치지 않는 것을 옳다고 여긴다면, 세상은 아마도 잘못된 것을 답습해서, 마음으로는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천착하고 억지로 가져다 붙이면서 그 설명이 반드시 통하게 하고자 할 것이다. 이러한 짓이 성현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후학들을 그르침이 매우 심한데, 또 어떻게 본보기로 삼을 만 하겠는가?"
9.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에 대한 설명
曰: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何也?”
물었다: "[<대학>에서] '머무를 곳을 안 이후에 일정함이 있고 일정한 이후에 고요해질 수 있고 고요해진 이후에 안정될 수 있고 안정된 이후에 사려할 수 있고 사려한 이후에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曰: “此推本[111]上文之意, 言明德新民所以止於至善之由也. 蓋明德新民, 固皆欲其止於至善, 然非先有以知夫音扶下同至善之所在, 則不能有以得其所當止者而止之. 如射者固欲其中去聲下同夫正鵠正音征鵠音谷, 然不先有以知其正鵠之所在, 則不能有以得其所當中者而中之也. 知止云者, 物格知至而於天下之事皆有以知其至善之所在, 是則吾所當止之地也. 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 皆有定理矣;
대답했다: "이것은 앞 글의 의미를 탐구한 것이니, '明德'과 '新民'이 '止於至善'하는 방법임을 말한 것이다. 대개 明德과 新民은 진실로 모두 止於至善하고자 하지만, 먼저 至善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면 마땅히 머물러야할 곳을 얻어서 머무를 수 없다. 이는 마치 사수가 진실로 정곡을 맞추고자 하는데, 먼저 정곡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다면 마땅히 맞춰야 할 바를 얻어서 맞출 수 없는 경우와 같다. '知止'라고 말한 것은 物格知至해서 천하의 일에 대해 모두 至善이 있는 곳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곳이 바로 내가 마땅히 멈춰야 할 곳이다. 머무를 곳을 알 수 있다면 마음속과 모든 일에 모두 일정한 이치가 있게 될 것이다."
- 新安陳氏曰: "<章句>云: '知之則志有定向', 此云: '事物皆有定理', 合二說, 其義方備. 能知所止, 則此心光明, 見得事物皆有定理, 而志方有定向."
- 신안진씨가 말했다: "<대학장구>에서 '알고 나면 뜻에 일정한 방향이 있게 된다'고 하고, 여기에서는 '만물에 모두 일정한 이치가 있게 된다'고 하니, 이 두 설명을 합쳐야 그 의미가 비로소 완전히 갖추어진다. 머무를 곳을 알 수 있다면 이 마음이 훤히 밝아져서 모든 일에 일정한 이치가 있음을 알게 되어, 뜻에 비로소 일정한 방향이 있게 될 것이다."
理既有定, 則無以動其心而能靜矣; 心既能靜, 則無所擇於地而能安矣; 能安, 則日用之間, 從七恭反容閒音閑暇, 事至物來, 有以揆之而能慮矣; 能慮, 則隨事觀理, 極深研幾平聲,[112]無不各得其所止之地而止之矣.
이치가 정해지고 나면 그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어서 [마음이] 고요할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나면 어느 곳에서든 안정될 수 있으며, 안정될 수 있으면 평소에 느긋하고 한가해서 외물이 다가올 때 그것을 헤아려 사려할 수 있고, 사려할 수 있으면 일에 따라 이치를 관찰함에 매우 깊이 그 기미를 연구해서 각각 그 머물러야 할 곳을 얻어 머무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 問: "'知止'與'能慮', 先生昨以比<易>中'深'與'幾', <或問>中却兼下'極深研幾'字, 覺未穩." 朱子曰: "極深研幾, 是更審一審. 當時下得未仔細. 要之只著得研幾字."
- 물었다: "'知止'와 '能慮'를 선생님께서 이전에 <주역>의 '深'과 '幾'에 비교하셨는데, <대학혹문>에서 도리어 '極深研幾'를 ['能慮'에] 함께 쓰셨으니, 온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極深研幾'는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당시에는 엄밀하게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이전처럼 '能慮'에는] '研幾'를 써야 한다."
- ○陳氏曰: "物果格而無一理之不窮, 無一見之不盡, 則於天下之事, 所謂至善所當止者, 皆灼然有以知之矣."
- 진씨가 말했다: "사물에게 과연 格했을 때 하나의 이치라도 궁구하지 않음이 없고 하나를 보더라도 다하지 않음이 없다면, 이른바 '至善'과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所當止)'을 모두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 ○'理既有定', 則心之所主, 更無外慕, 凡外物皆無以動之, 而能静矣. 身既能安, 則向者知所當止之事物, 或接乎吾前, 而吾從容以應之, 自能精於慮, 而不錯亂矣.
- '이치가 정해지고 나면' 마음이 주로하는 바에 달리 밖으로 사모하는 것이 없어, 모든 외물이 [내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으므로 고요할 수 있다. '몸이 편안할 수 있고 나면' 앞서 마땅히 머물러야 할 사물을 알기 때문에?? [그것이] 혹 내 눈앞에 다가오더라도 내가 순조롭게 그것에 응하여 절로 사려를 정밀하게 하고 착란하지 않을 수 있다.
然旣眞知所止, 則其必得所止, 固已不甚相遠. 其間四節, 蓋亦推言其所以然之故, 有此四者, 非如孔子之志學以至從心, 孟子之善信以至聖神, 實有等級之相懸, 爲終身經歷之次序也.”
그러나 진실로 머물 곳을 안 이상, 반드시 그 머물 곳을 얻는 것은 진실로 멀지 않다. 그 사이에 네 단계는 아마도 다만 그 소이연의 까닭에 이 네 단계가 있음을 미루어 말한 것이니, 공자의 '志于學'부터 '從心所欲不踰矩'까지와[113]과 맹자의 '善人'·'信人'으로부터 '聖人'·'神人'까지가[114] 진실로 단계 사이에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어서 종신토록 거쳐야할 순서가 되는 것과는 같지 않다.
- 朱子曰: "如'志學'至'從心', 中間許多, 便是大階級, 歩却闊. '知止'至'能得'只如'志學'至'立'、'立'至'不惑'相似, '定静安'大抵皆相類, 只是就一級中間細分耳."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志學'부터 '從心'까지 그 중간의 많은 단계들은 큰 단계이니 보폭이 넓다. '知止'부터 '能得'까지는 다만 '志學'부터 '立'까지, '立'부터 '不惑'까지와 서로 비슷하고, '定静安'도 대체로 이러한 부류인데 다만 한 단계 내에서 세분화한 것일 뿐이다."
- ○某事當如此, 某事當如彼, 如'君當仁', 此是知止; 事至物來, 對著胷中恰好底道理, 將這箇去應他, 此是得其所止.
- 어떤 일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고, 어떤 일은 마땅히 저와 같아야 하니, 예를 들어 '군주는 마땅히 仁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知止'이다.(앎의 문제) 사물이 다가옴에 마음속의 적절한 도리를 비춰 이것으로 [다가온] 사물에 응하는 것이 바로 '得其所止'이다.(실천의 문제)
10.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에 대한 설명
曰: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何也?”
물었다: "'사물에는 本末이 있고 사건에는 終始가 있으니 선후를 알면 바로 도에 가까울 것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曰: “此結上文兩節之意也. 明德·新民, 兩物而內外相對, 故曰本末; 知止、能得, 一事而首尾相因, 故曰終始. 誠知先其本而後其末, 先其始而後其終也, 則其進爲有序而至於道也不遠矣.”
대답했다: "이는 윗 글의 두 구절의 의미를 마무리한 것이다. 明德과 新民은 두 가지지만 안팎으로 서로 짝이 되므로 '本末'이라고 말한 것이고, 知止와 能得은 한 가지 일인데 머리와 꼬리로 서로를 말미암기 때문에 '終始'이라고 말한 것이다. 진실로 그 근본을 먼저하고 그 말단을 나중에 하며, 그 처음을 먼저하고 그 마지막을 나중에 할 줄 안다면, 그 나아감에 순서가 있게 되어 도에 이르는 것이 멀지 않을 것이다."
- 朱子曰: "知工夫先後、次第, 則進為有序, 不忽近務逺, 處下窺髙, 而其入道為不逺矣, 謂至道之近也."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공부의 선후와 순서를 안다면, 나아감에 순서가 있게 되어, 가까운 것을 소홀히하고 고원한 것에 힘쓰거나 낮은 곳에 있으면서 높은 것을 헤아리는 짓을 하지 않아, 도에 들어감이 멀지 않게 되니, '도의 이름이 가까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 ○黄氏曰: "知所先後, 方是曉得為學之道, 未能遂得夫道也. 然既知其進為之序, 則有至之階矣, 故云去道不遠."
- 황씨가 말했다: "선후를 알아야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지만, 그 도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아가는 순서를 안 이상, [도에] 이르는 단계가 있기 때문에 '도까지 멀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11.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 致知在格物’에 대한 설명
曰: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何也?”
물었다: "'옛적 천하에 명덕을 밝히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國을 다스렸고, 자신의 國을 다스리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家를 단속했으며, 자신의 家를 단속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했고,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心을 바르게 했으며, 자신의 心을 바르게 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意를 진실하게 했고, 자신의 意를 진실하게 하고자 한 자는 먼저 자신의 知를 지극해 했으며, 知를 지극히 하는 것은 格物에 달려있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曰: “此言大學之序, 其詳如此, 蓋綱領之條目也.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者, 明明德之事也; 齊家·治國·平天下者, 新民之事也. 格物致知, 所以求知至善之所在; 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也.
대답했다: "이는 <대학>의 순서가 이와 같이 상세함을 말한 것이니, 대개 삼강령의 조목이다.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이라는 것은 明明德의 일이고, 齊家·治國·平天下는 新民의 일이다. 格物致知는 至善이 있는 곳을 알고자 하는 것이고, 誠意부터 平天下에 이르기까지는 저 至善을 얻어서 그곳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이다."
- 朱子曰: "格物、致知, 是求知其所止; 誠意、正心、脩身、至平天下, 是求得其所止. 物格、知至, 是知所止; 意誠、心正、身脩、家齊、國治、天下平, 是得其所止."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格物과 致知는 그 머무를 곳을 알고자 하는 것이고, 誠意·正心·脩身부터 平天下까지는 그 머무를 곳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物格·知至는 그 머무를 곳을 안 것이고, 意誠·心正·身脩·家齊·國治·天下平는 그 머무를 곳을 얻은 것이다."
所謂明明德於天下者, 自明其明德而推以新民, 使天下之人皆有以明其明德也. 人皆有以明其明德, 則各誠其意, 各正其心, 各修其身, 各親其親, 各長上聲下同其長, 而天下無不平矣.
이른바 '明明德於天下'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明德을 밝혀서 이를 新民으로 미루어나가, 천하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明德을 밝힐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의 명덕을 밝힐 수 있다면 각자 자신의 뜻을 진실하게 할 수 있고, 각자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며, 각자 자신을 닦아서, 각자 자신의 부모를 친히하고 각자 자신의 어른을 어른대접할 것이니,[115] 천하가 평안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 問: "明徳之功, 果能若是, 不亦善乎? 然以堯舜之聖, 閨門之内, 或未盡化, 况謂天下之大, 能服堯舜之化而各明其徳乎?" 朱子曰: "<大學>'明明徳於天下', 只是且說箇規模如此. 學者須有如此規模, 不如此, 便是欠了. 且如伊尹'思匹夫不被其澤, 如已推而納之溝中', 伊尹也只大槩要恁地, 又如何使得無一人不被其澤! 又如説'比屋可封',也須有一家半家不恁地者, 只是見得自家規模自當如此, 到做不去處, 却無可奈何. 規模自是著恁地, 工夫便却用寸寸進. 若無規模次第, 只管去細碎處走, 便入世之計功謀利處去; 若有規模而又無細密工夫, 又只是一箇空規模. 外極規模之大, 内推至於事事物物處, 莫不盡其工夫, 此所以為聖賢之學."
- 물었다: "명덕의 공효가 과연 이와 같다면 물론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순과 같은 성인도 규문 안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간혹 다 교화시키지 못하셨으니, 하물며 거대한 천하의 사람들이 능히 요순의 교화에 복종해 각자 자신의 덕을 밝힐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대학>의 '明明徳於天下'라는 것은 다만 그 규모가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학자는 모름지기 이와 같은 규모를 가져야 하니, 이와 같지 않으면 부족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윤은 '필부라도 요순의 은택을 입지 못하는 것을 마치 자신이 그들을 밀어 구덩이에 넣는 것처럼 여겼'는데,[116] 이윤도 다만 대체적으로 이처럼 하고자 한 것이니, 또 어떻게 한 사람이라도 그 은택을 입지 못함이 없게끔 할 수 있겠는가? 또 예를 들어 '주나라 사람들은 집집마다 봉할 만 했다(比屋可封)'[117] 로 말하더라도 틀림이나 이와 같지 않은 한 집이나 반 집은 있었을 것이니, 다만 자신의 규모가 응당 이와 같아야 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규모는 본래 이와 같이 두고 공부는 하나하나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 규모나 순서가 없고 그저 세세한 것에만 집착한다면 세간 사람들이 공리나 꾀하는 수준에 들어가버리게 되고, 만약 규모는 있는데 세밀한 공부가 없다면 이는 또 그저 헛된 규모일 뿐이다. 밖으로는 거대한 규모를 다하고 안으로는 모든 일에 미루어나가 그 공부를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 이것이 성현의 학문이 되는 것이다."
- ○新安陳氏曰: "不言各格物致知者, '民可使由, 不可使知'之意也. 親親、長長, 即齊家之大者."
- 신안 진씨가 말했다: "['각각 성의·정심한다'고만 하고] '각각 격물치지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백성들은 말미암게 할 수 있지만 알게 할 수 없다'[118]는 뜻이다. '親親', '長長'은 齊家 가운데 중요한 것이다."
然天下之本在國, 故欲平天下者, 必先有以治其國. 國之本在家, 故欲治國者, 必先有以齊其家. 家之本在身, 故欲齊家者, 必先有以修其身. 至於身之主則心也. 一有不得其本然之正, 則身無所主, 雖欲勉强上聲下同以修之, 亦不可得而修矣, 故欲修身者, 必先有以正其心. 而心之發則意也, 一有私欲雜乎其中, 而爲善去上聲惡或有未實, 則心爲所累, 雖欲勉强以正之, 亦不可得而正矣. 故欲正心者, 必先有以誠其意, 若夫音扶知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 人莫不有, 而或不能使其表裏洞然, 無所不盡, 則隱微之間, 眞妄錯雜, 雖欲勉强以誠之, 亦不可得而誠矣. 故欲誠意者, 必先有以致其知. 致者, 推致之謂, 如‘喪致乎哀’之致, 言推之而至於盡也.
그러나 천하는 본래 나라에 달려있으니 平天下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려야하고, 나라는 본래 집안에 달려있으니 治國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지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해야 하며, 집안은 본래 자신에게 달려있으니 齊家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몸을 닦아야 한다. 몸의 주인은 마음이니, [마음에] 하나라도 본래의 바름을 얻을 수 없다면 몸에 주재하는 것이 없어, 비록 억지로 힘써 몸을 닦고자 하더라도 닦을 수 없다. 그러므로 修身하고하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로해야 한다. 마음이 발현된 것이 意이니, 하나라도 사욕이 그 속에 뒤섞여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함에 혹시라도 충실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마음이 [사욕에] 얽매여 비록 억지로 힘써 바로 잡고자 하더라도 바로 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正心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뜻을 진실되게 해야 한다. 대저 知(지각)는 마음의 신명이니 뭇 이치를 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이 知가] 없는 자가 없지만 혹 [마음의] 표리가 훤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할 수 없다면, 은미한 가운데 眞妄이 뒤섞여 비록 억지로 힘써 뜻을 진실되게 하고자 하더라도 또한 진실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誠意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앎을 지극히 해야한다. 致라는 것은 '推致(推求極致)'를 말하니 '상을 당하면 슬픔을 지극하게 한다(喪致乎哀)'[119] 의 致와 같으니, 미루어서 지극한 데 이름을 말한다.
- 朱子曰: "神是恁地精彩; 明是恁地光明."'
- 주자가 말했다. "['神明'의] 神은 이러한 빛깔이고 明은 이러한 밝음이다."
- ○道理固本有, 用知方發得出來. 所以謂之妙衆理. 妙猶言能運用衆理也. '運用'字有病, 故只下得'妙'字."
- 道理는 진실로 본래 가지고 있지만 知를 써야 비로소 드러낼 수 있으므로 '妙衆理'라고 하였다. '妙'는 뭇 이치를 운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運用'에는 병통이 있기 때문에 다만 '妙'만 썼다.
- ○問: "宰是主宰之宰, 宰制之宰?" 曰: "主便是宰, 宰便是制."
- 물었다: "['宰萬物'의] 宰는 '主宰'의 宰입니까, '宰制'의 宰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主(주인노릇)는 宰(주관함)이고, 宰(관리함)는 制(통제함)이다."
- ○問: "知如何宰物?" 曰: "無所知覺, 則不足以宰制萬物. 要宰制他, 也須要知覺."
- 물었다: "知(지각)가 어떻게 사물을 제재합니까?" 말했다: "지각하는 바가 없으면 만물을 제재할 수 없다. 만물을 제재하려면 역시 지각해야한다."
- ○心之為物, 至虛至靈, 神妙不測, 常為一身之主, 以提萬事之綱, 而不可有頃刻之不存者也. 一不自覺而馳騖飛揚, 以徇物欲於軀殻之外, 則一身無主, 萬事無綱, 雖其俯仰[120]顧盻之間, 盖巳不自覺其身之所在."
- '心'이라는 것은 매우 虛靈하고 신묘해 예측할 수 없고, 항상 일신의 주재가 되어 만사의 기강을 잡으니,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心'이] 한 번이라도 자각하지 못하고서 치달려 몸뚱이 밖으로 물욕을 좇는다면, 일신에 주재가 없고 만사에 기강이 없어 비록 잠깐 사이라도(짧은 시간만에) 대개 이미 몸이 있는 곳을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 ○黄氏曰: "理是不動底物, 不著妙字, 如何發得許多理出來?"
- 황씨가 말했다: "理는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니, '妙'자를 쓰지 않으면 어떻게 허다한 理를 드러낼 수 있겠는가?"
- ○陳氏曰: "致知言表裏洞然, 以心之内外而言. 知不致, 則無以識是非善惡之眞, 將從何而趨, 從何而捨? 必有錯認人欲作天理而不自覺者."
- 진씨가 말했다: "'致知'를 '表裏洞然'이라고 말한 것은 마음의 안팎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知가 지극하지 않으면 참된 시비·선악을 알지 못하니, 장차 무엇을 통해 취하고 버릴 것인가? 필시 인욕을 천리라고 잘못 인식하고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 ○三山陳氏曰: "欲意之誠而不始於致知, 則有善否未明而誤於所向者, 多矣. '推之而至於盡', 有所用力之辭."
- 삼산 진씨가 말했다. "뜻이 진실해지기를 바라면서 致知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선한지 아닌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점이 있게 되어 향할 바를 오인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推之而至於盡'라고 한 것은 힘쓸 바가 있다는 말이다."
- ○玉溪盧氏曰: "心之神明, 即所得於天而虚靈不昩者也. 心固具衆理而應事物, 所以'妙衆理而宰事物'者, 非心之神明乎? 其'表與裏洞然無不盡', 則心之用與體無不明矣. 神明字與虚靈字, 相為表裏: 虚主理言, 靈兼氣言, 先言虚, 後言靈, 見心之體不離用; 神兼氣言, 明主理言, 先言神, 後言明, 見心之用不離體."
- 옥계 노씨가 말했다: "心의 신명은 바로 하늘에서 얻어서 허령불매한 것이다. 心은 진실로 뭇 이치를 갖추고서 외물에 응하니, '妙衆理하고 宰事物한다'는 것이 心의 신명 아니겠는가? '그 안과 밖이 훤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心의 용과 체가 밝혀지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신명'이라는 글자와 '허령'이라는 글자는 서로 표리가 되니, '허'는 리를 주로하여 말하였고 '령'은 기를 겸하여 말한 것인데, 먼저 '허'를 말하고 나중에 '령'이라고 말한 것은 心의 체가 용과 떨어지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고, '신'은 기를 겸하여 말한 것이고 '명'은 리를 주로 말한 것이니, 먼저 '신'을 말하고 나중에 '명'을 말한 것은 心의 용이 체와 떨어지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 ○新安陳氏曰: "心本神明之物; 知又心之所以神明者. 惟神明所以'妙'也."
- 신안 진씨가 말했다: "心은 본래 신명한 것이고, 知는 또한 心이 신명한 까닭이다. 오직 신명하기 때문에 '묘한' 것이다."
至於天下之物, 則必各有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 所謂理也. 人莫不知, 而或不能使其精粗、隱顯, 究極無餘, 則理所未窮, 知必有蔽, 雖欲勉强以致之, 亦不可得而致矣.
천하 사물의 경우에는 반드시 각각 소이연의 까닭(所以然之故)이 있고 마땅히 그러한 법칙(所當然之則)이 있으니 이른바 理이다. 사람 중에 [理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자가 없지만, 혹 [천하 만물의] 精粗·隱顯을 궁구하여 남음이 없게 할 수 없으면, 理에는 미처 궁구되지 못한 부분이 있고 知에는 필시 가리워진 바가 있어, 비록 억지로 힘써 그것을 다하고자 해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 朱子曰: "所當然之則, 如君之仁、臣之敬; 所以然之故, 如君何故用仁、臣何故用敬. 如君之所以仁, 盖君是箇主腦, 百姓人民皆屬他管, 他自是用仁愛, 非說是為君了, 不得巳以仁愛行之. 自是合如此, 若天使之然. 又如父之所以慈, 子之所以孝, 盖父子本同一氣, 只是一人之身分成兩箇, 其恩愛相屬, 自有不期然而然者. 其他大倫皆然, 皆天理使之如此, 豈容强為哉?"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所當然之則'이라는 것은 '군주는 인해야 하고 신하는 공경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所以然之故'라는 것은 '임금이 어째서 인해야 하고, 신하는 어째서 공경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임금이 인해야 하는 까닭은, 대개 임금은 우두머리이고 백성·인민은 모두 그의 관할에 속하기 때문에 그가 저절로 仁愛를 실천하는 것이지,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仁愛를 실천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절로 이처럼 하기 마련인 것은 마치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과 같다. 또 '아버지는 자애로워야 하고 자식은 효성스러워야 하는' 까닭은, 대개 부자는 본래 한 기를 공유해서 한 사람의 몸이 둘로 나뉜 것이니, 그 은혜와 사랑이 서로 이어져 절로 그렇게 하기를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다른 큰 인륜도 모두 이와 같이 모두 천리가 그와 같이 하게 한 것이니, 어찌 억지로 할 수 있겠는가?"
- ○玉溪盧氏曰: "粗也顯也, 即事物當然之則也; 精也隱也, 即事物所以然之故也."
- 옥계 노씨가 말했다: "'粗'와 '顯'은 바로 事物의 '當然之則'이고, '精'과 '隱'은 事物의 '所以然之故'이다."
- ○新安陳氏曰: "所當然之則, 理之實處; 所以然之故, 乃其上一層理之源頭也."
- 신안 진씨가 말했다: "'所當然之則'는 理의 實處(실제적 측면)이고 '所以然之故' 바로 그 한 층 위의 근원으로서의 理이다."
故致知之道, 在乎卽事觀理, 以格夫物. 格者, 極至之謂, 如‘格於文祖’之格,見書舜典 言窮之而至其極也.
그러므로 致知하는 방법은 일에 나아가 이치를 관찰하여 저 사물에 이르는 것에 달려 있다. 格이라는 것은 '이른다'는 것을 말하니, '문조에 이른다(格於文祖)'<서경> <순전>에 보인다.[121]의 格과 같으니, 궁구하여 지극한 곳에 이른다는 말이다.
- 括蒼葉氏曰: "但能隨事觀理, 盡與理㑹, 卒之天下事物之理, 不惟知得一件兩件, 若隱若顯, 盖將無所不知矣; 一事一物之間, 不唯知得一分兩分, 若精若粗, 盖將無所不知矣."
- 괄창 엽씨(葉味道/賀孫)가 말했다: "그저 일을 따라서 理를 관찰하여 모두 이해할 수 있기만 한다면, 끝내 천하 사물의 이치에 대해 한두 가지만 알 수 있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은미한 것이든 드러난 것이든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한 사물간에 10% 20%만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밀한 것이든 거친 것이든 간에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此『大學』之條目, 聖賢相傳, 所以敎人爲學之次第, 至爲纖悉. 然漢、魏以來, 諸儒之論, 未聞有及之者. 至唐韓子名愈字退之, 乃能援音袁以爲說, 而見形甸反於「原道」之篇, 則庶幾其有聞矣. 然其言極於正心誠意, 而無曰致知格物云者, 則是不探音貪其端, 而驟語其次, 亦未免於'擇焉不精, 語焉不詳'之病矣. 何乃[122]以是而議荀、揚哉?”
이것이 『大學』의 조목이요, 성현께서 서로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학문하게 한 순서이니, 지극히 치밀하다. 그러나 漢·魏이래로 여러 유자들의 논의 가운에 이를 언급한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당나라 韓子이름은 愈이고, 자는 退之이다.에 이르러서야 이를 가져다가 설을 만들어 그것을 「原道」라는 글에서 보일 수 있었으니, 아마도 전해 들은 바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정심성의'까지에만 이르고 '치지격물'을 말한 적이 없었으니, 이는 그 시작점을 탐구하지 않고 곧장 그 다음부터 말한 것이니, 그 역시 '택함에 정미하지 못하고 말함이 상세하지 못한' 병폐를 면하지 못한 것 같다. 어찌 이 표현을 가지고 순자와 양웅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 <韓文集>"荀與揚也, 擇焉而不精, 語焉而不詳."
- <韓文集>에서 "순자와 양웅은 택함이 정밀하지 못하고 말함이 상세하지 못하다"[123]고 하였다.
- ○荀子, 名况, 字卿, 戰國時趙人也. 揚子, 名雄, 字子雲, 西漢成都人也. 各有所著之書, 今傳於世.
- 순자는 이름이 황이고 자는 경이니 전국시대 조나라 사람이고, 양자는 이름이 웅이고 자가 자운이니 서한 성도 사람이다. 각자 저술한 책이 있어서 오늘날 세상에 전해진다.
- ○朱子曰: "「原道」舉<大學>, 却不說'格物致知'; <蘇氏古史>舉<中庸>'不獲乎上', 却不說'明善誠身',這様都是無頭學問."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原道」에서 <大學>을 거론하지만 오히려 '格物致知'를 말하지 않았고, <蘇氏古史>에서는 <中庸>의 '不獲乎上'을 서론하지만 '明善誠身'[124]을 말하지 않았으니, 이런 것들은 모두 머리가 없는 학문이다."
12. ‘物格而后知至, …… 國治而后天下平’에 대한 설명
曰: “‘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 意誠而后心正, 心正而后身修, 身修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 國治而后天下平’, 何也?”
물었다: "'物格이후에 知至하고, 知至한 이후에 意誠하며, 意誠한 이후에 心正하고, 心正한 이후에 身修하며, 身修한 이후에 家齊하고, 家齊한 이후에 國治하며, 國治한 이후에 天下平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曰: “此覆[125]說上文之意也. 物格者, 事物之理, 各有以詣其極上聲而無餘之謂也. 理之在物者, 旣詣其極而無餘, 則知之在我者, 亦隨所詣而無不盡矣. 知無不盡, 則心之所發能一於理而無自欺矣. 意不自欺, 則心之本體物不能動而無不正矣. 心得其正, 則身之所處不至陷於所偏而無不修矣. 身無不修, 則推之天下、國、家, 亦擧而措之耳, 豈外此而求之智謀、功利之末哉!”
답했다: "이것은 윗 글의 뜻을 거꾸로 [올라가며](格物->物格) 설명한 것이다. 物格이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에 각각 그 지극한 곳에 이르러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사물에 있는 理가 이미 그 지극한 곳에 이르러 남은 것이 없다면, 나에게 있는 知 또한 이른 바에 따라 다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知에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면, 心이 발현된 것(즉 意)이 理에 전일하여 자신을 속이지 않을 수 있다. 意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心의 본체를 외물이 동요시킬 수 없어서 바르지 않음이 없게 된다. 心이 바르게 되었다면, 身이 편벽된 곳에 빠지지 않아 닦이지 않음이 없게 된다. 身이 닦여지지 않음이 없다면, 이를 천하·나라·집안에까지 미룸에 그저 들어서 두면 될 뿐이니, 어찌 이를 벗어나 말단적인 지모나 공리를 구하겠는가!"
曰: “篇首之言明明德, 以新民爲對, 則固專以自明爲言矣; 後段於平天下者, 復扶又反以明明德言之, 則似新民之事亦在其中, 何其言之不一, 而辨之不明耶?”
물었다: "편 머리에서는 '명명덕'을 말함에 '신민'으로 대대했으니(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 ['명명덕'은] 진실로 오직 스스로 밝히는 것만 말한 것인데, 뒤의 '평천하'에 대해 다시 '명명덕'으로 말했으니(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신민'의 일이 또한 그('명명덕') 안에 있는 것 같다. 어째서 말이 한결같지 않고 분별이 명확하지 않은가?"
曰: “篇首三言者, 『大學』之綱領也; 而以其賓主對待、先後次第言之, 則明明德者, 又三言之綱領也. 至此後段, 然後極其體用之全而一言以擧之, 以見形甸反夫音扶天下雖大, 而吾心之體無不該; 事物雖多, 而吾心之用無不貫. 蓋必析之有以極其精而不亂, 然後合之有以盡其大而無餘, 此又言之序也.”
대답했다: "편 머리의 세마디 말은 『대학』의 강령이지만, 이것을 손님과 주인이 서로 대하는 관계로나 선후의 순서로 말한다면, '명명덕'이 다시 세 마디 말의 강령이 된다. 이 뒷 단락(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에 이르고 난 연후에야 온전한 體用을 완전히 드러내 한 마디로 제시한 것이니, 이것으로 '천하가 비록 크더라도 내 마음의 體가 갖추고있지 않은 것이 없고, 사물이 비록 많더라도 내 마음의 用이 관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보인 것이다. 대개 [<대학> 경문이 이렇게 구성된 것은] 반드시 정밀하게 분석해 혼란이 없게 된(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 연후에 [분석한 것을] 합쳐 [<대학>의] 큰 규모를 남김없이 드러낸 것이니(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이 또한 말하는 순서이다."
- ○陳氏曰: "天下事物, 無一之不格; 幽明巨細, 有以洞灼其表裏, 其知之至也. 瑩萬理於胷中, 是極其所眞是而不可移; 非極其所眞非而不容易; 善極其本之所由來而無不徹; 惡極其幾之所從起而無少遁[126], 物果格, 知果至. 由是而往, 則意極其誠而無一念之或欺, 心極其正而無一息之不存, 身極其脩而無一動之或偏矣. 此書首三言固當無所不盡, 而所謂明明徳者, 又通為一篇之統體." 又曰: "體具於方寸之間, 萬理無所不備, 而無一物能出乎是理之外; 用發於方寸之間, 萬事無所不貫而無一理不行乎其事之中, 此心之所以為妙."
- 진씨가 말했다: "천하의 사물에 하나라도 이르지 못함이 없고, 어둡고 밝은 것 크고 세세한 모든 것에 그 안과 밖을 훤히 밝힐 수 있는 것이 知의 지극함이다. 마음속으로 온갖 이치를 밝혀, 옳은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옳은 바를 지극히 하여 옮겨가지 못하고, 그른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그른 바를 지극히 하여 바꿀 수 없으며, 선한 것에 대해서는 그 말미암은 근본을 지극히 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고, 악한 것에 대해서는 말미암아서 일어난 기미를 지극히 하여 조금의 잘못도 없어, 사물의 [이치에] 과연 이르고 知가 과연 지극해질 것이다. 이것을 말미암아 나아간다면, 意는 誠을 다하여 하나의 생각이라도 혹 거짓됨이 없을 것이고, 心은 正을 지극히 하여 잠깐의 보존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며, 身은 그 脩을 지극히 하여 한 번 움직이더라도 혹 치우침이 없을 것이다. 이 책 서두의 세 마디는 진실로 다하지 못하는 바가 없고, 이른바 '명명덕'이라고 말한 것은 또한 <대학> 한 텍스트의 統體가 된다." 또 말했다: "體는 마음 안에 있으면서 온갖 이치를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없어서 어떤 사물도 이 이치를 벗어날 수 없고, 用은 마음 안에서부터 발현되어 모든 일을 관통되지 않음이 없어서 어떤 이치도 그 일에서 행해지지 못함이 없으니, 이것이 마음이 신묘하게 되는 까닭이다."
- ○玉溪盧氏曰: "言明明徳與新民對, 則<大學>之體用猶二; 言明明徳於天下, 則<大學>之體用非二矣. 吾心之體, 即明徳之虚而具衆理者也; 吾心之用, 即明徳之靈而應萬事者也. 能析之極其精而不亂, 則知吾心之用無不貫矣; 能合之盡其大而無餘, 則知吾心之體無不該矣. 不析之而遽欲合之, 則有虚空恍惚之病; 徒析之而不能合之, 則有支離破碎之病. '必析之極其精, 然後合之盡其大', 此二句其義無窮. 眞西山嘗誦此而繼之曰: '小徳川流, 大徳敦化.' 又繼之曰: '吾道一以貫之.' 其旨深矣."
- 옥계 노씨가 말했다: "'명명덕'과 '신민'을 대대하여 말한다면, <大學>의 體用이 구별되는 것 같고, '明明徳於天下'라고 말하면 <大學>의 體用이 구별되지 않는 것 같다. 내 마음의 體는 곧 '明徳의 虚'로 '뭇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具衆理)'고, 내 마음의 用은 곧 '明徳의 靈'으로 '온갖 일에 대응하는 것(應萬事)'이다. 지극히 정밀하게 분석해 어지럽지 않을 수 있다면, 내 마음의 用이 관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알 것이고, [분석한 것을] 합쳐 남김 없이 [<대학>의] 큰 규모를 드러낼 수 있다면, 내 마음의 體가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분석하지 않고서 갑자기 합치고자 한다면 허무맹랑해지는 병폐가 있을 것이고, 그저 분석하기만 하고 그것을 합칠 수 없다면 지리하고 자잘하게 되는 병폐가 있을 것이다. '必析之極其精, 然後合之盡其大' 이 두 구절의 의미가 무궁하다. 진서산이 일찍이 이것을 외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덧붙였다: '작은 덕은 냇물처럼 흐르고, 큰 덕은 두터이 변화시킨다.'[127](즉, 작은 덕과 큰 덕을 분석·구별) 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덧붙였다: '내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128](즉, 분석·구별한 것을 종합) 그 뜻이 심오하다."
13. ‘自天子以至於庶人, …… , 未之有也’에 대한 설명
曰: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何也?”
물었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修身을 근본으로 삼으니, 그 근본이 어지러운데 말단이 다스려진 경우는 없었고, 그 후하게 해야할 것을 박하게 하면서 박하게 해야할 것을 후하게 하는 경우는 있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曰: “此結上文兩節之意也. 以身對天下國家而言, 則身爲本而天下國家爲末; 以家對國與天下而言, 則其理雖未嘗不一, 然其厚薄之分亦不容無等差楚宜反矣. 故不能格物致知, 以誠意正心而修其身, 則本必亂而末不可治. 不親其親, 不長上聲下同其長, 則所厚者薄而無以及人之親長, 此皆必然之理也. 孟子所謂‘於所厚者薄, 無所不薄’, 其言蓋亦本於此云.”
대답했다: "이것은 윗 글의 두 구절의 의미를 끝맺은 것이다. 자신을 天下·國·家와 대대하여 말한다면 자신이 근본이 되고 天下·國·家는 말단이 되며, 家를 天下·國과 대대하여 말한다면 그 이치는 일찍이 같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후하게 하거나 박하게 하는 구분은 그래도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격물치지를 할 수 없으면서 성의정심해 그 몸을 닦는다면, 근본은 반드시 혼란해지고 말단도 다스려질 수 없다. 제 어버이를 친애하지 않고 제 어른을 어른대접하지 않는다면, 후하게 해야하는 것을 박하게 하는 것이라서 다른 사람의 부모나 어른에게까지 미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모두 필연적 이치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신 '마땅히 후하게 해야할 것을 박하게 하면 박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129] 는 말도 아마 여기에 근거한다."
- ○三山陳氏曰: "脩身者, 自格物致知誠意正心而積也. 不如是, 則身不可脩; 身之不脩, 則其本亂矣; 本之既亂, 如國家何? 事父母而不能孝, 事兄長而不能弟, 則是'於其所厚者薄'矣. 所厚者猶薄, 奚望其親天下之親、長天下之長哉?"
- 삼산 진씨가 말했다: "脩身이라는 것은 격물·치지·성의·정심을 통해 쌓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몸은 닦여질 수 없고, 몸이 닦여지지 않으면 그 근본이 혼란해지니, 근본이 혼란한 이상 국·가를 어떻게 하겠는가? 부모를 섬기면서 효도를 할 수 없고 형이나 어른을 섬기면서 공경할 수 없다면, 이것은 '그 후하게 해야할 것을 박하게 하는 것'이다. 후하게 해야할 것도 오히려 박하게 하고서 어떻게 그가 천하의 부모를 친히 여기고 천하 어른을 어른대접하기를 바라겠는가?"
14. <대학>의 내용에 비춰봤을 때 상정된 독자가 적절한가?
曰: “治國平天下者, 天子諸侯之事也. 卿大夫以下, 皆無與音預焉. 今大學之敎, 乃例以明明德於天下爲言, 豈不爲思出其位, 犯非其分去聲, 而何以得爲如字爲去聲己之學哉?”
물었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은 천자와 제후의 일이니 경대부 이하는 모두 여기에 간여하지 않는다. 지금 <대학>의 가르침은 바로 '明明德於天下'를 예로 들어 말하니, 어찌 '자신의 지위를 벗어나서 생각함'[130]이 아니겠는가? 제 직분이 아닌 것을 범하는데 어떻게 '자기를 위한 학문'[131]이 될 수 있겠는가?"
曰: “天之明命, 有生之所同得, 非有我之得私也. 是以君子之心, 豁呼括反然大公, 其視天下, 無一物而非吾心之所當愛, 無一事而非吾職之所當爲, 雖或勢在匹夫之賤, 而所以堯舜其君, 堯舜其民者, 亦未嘗不在其分去聲內也. 又况<大學>之敎, 乃爲去聲天子之元子·衆子, 公侯·卿大夫·士之適音的子, 與國之俊選去聲[132]而設, 是皆將有天下國家之責而不可辭者, 則其所以素敎而預養之者, 安得不以天下國家爲己事之當然, 而預求有以正其本、淸其源哉! 後世敎學不明, 爲人君父者, 慮不足以及此, 而苟徇於目前. 是以天下之治去聲日常少, 亂日常多, 而敗國之君, 亡家之主, 常接迹於當世, 亦可悲矣! 論者不此之監, 而反以聖法爲疑, 亦獨何哉? 大抵以學者而視天下之事, 以爲己事之所當然而爲之, 則雖甲兵·錢穀·籩豆·有司之事, 皆爲去聲己也; 以其可以求知於世而爲之, 則雖割股廬墓、敝車羸力為反馬, 亦爲去聲下同人耳. 善乎張子敬夫之言曰張子名栻, 字敬夫, 號南軒, 廣漢人. 乃朱子同志之友也.: ‘爲己者, 無所爲而然者也.’ 此其語意之深切, 蓋有前賢所未發者, 學者以是而日自省悉井反焉, 則有以察乎善利之間[133]而無毫釐之差矣.”
대답했다: "하늘의 밝은 명령은 태어날 때 똑같이 받은 것이지 자신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豁然大公해서 천하의 어떤 사물도 자신의 마음이 마땅히 아껴할 바라고 여기지 않음이 없고, 어떤 일도 자신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할 바라고 여기지 않음이 없어서, 비록 혹 천한 필부의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자기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 또한 일찍이 그 직분 안에 있지 않음이 없다. 또한 하물며 <대학>의 가르침은 바로 천자의 적장자와 다른 적자들, 공·후·대부·사의 적장자와 나라의 뛰어난 인재들을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이들은 모두 장차 사양할 수 없는 천하와 국가의 책무를 지닌 자들이다. <대학>에서 이들을 평소부터 미리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 어찌 [그들로 하여금] 천하 국가의 일을 당연한 제 일로 여기게 해 미리 '뿌리를 바로잡고 그 근원을 맑게 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후세의 교육이 밝혀지지 못해 임금이나 부모된 자들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구차하게 눈앞의 것만 따랐다. 이 때문에 천하가 잘 다스려진 날은 늘 적고 어지러운 날은 늘 많았으며, 나라를 망치는 군주들과 집안을 망치는 주인들이 당시에 항상 연이어 나타났으니 역시 슬퍼할 만하다! 그대가 이러한 것을 살피지 않고 도리어 성인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은 유독 어째서 인가? 대개 학자의 신분으로 천하의 일을 볼 때, 자기가 마땅히 해야할 바로 여겨서 그것을 행한다면, 비록 군사일·창고일·제사일·유사의 일이라도 모두 자기를 위한 것(위기지학)이 되지만,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면 비록 허벅지 안쪽살을 베고[134] 무덤 옆에 여막을 지어 살아 [효를 다하고], 망가진 수레나 파리한 말을 타 [청렴함을 다하더라도][135] 다른 사람을 위한 것(위인지학)일 뿐이다. 훌륭하구나, 장경부의 말이여!張子의 이름은 식(栻)이고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남헌(南軒)이니 광한 사람이다. 주자와 뜻을 같이한 벗이다. '나를 위한 것은 위하는 바 없이(의도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136] 이 말의 의미가 심오하면서 절실하다. 아마도 [이 말에는] 이전 성현들께서 밝히지 않으셨던 점이 있으니, 배우는 자들이 이 말을 가지고 날마다 스스로 성찰한다면, '善'과 '利'의 차이를 알게 돼 털끝만큼의 착오도 없을 것이다."
- ○問為己為人一條. 朱子曰: "這須要自看. 如一日之間, 小事大事, 只道'我合當做'便如此做, 這便是'無所為', 如讀書, 只道'自家合當如此讀', '合當如此理會身己'. 纔說要人知, 便是'有所為', 如世上人纔讀書, 便安排這箇好做時文. 此又為人之甚者."
- '나를 위한다'와 '남을 위한다'는 한 조목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이것은 모름지기 스스로 살펴보아야 한다. 평소 모든 일에 대해 '나는 이렇게 해야한다'고 말하고 곧 그렇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위하는 바가 없는 것(無所爲)'이이니, 마치 책을 읽는 경우 그저 '나는 이렇게 책을 읽어야 해', '이렇게 이해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말하자마자 곧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為)'이니, 세상 사람들이 책을 읽기만 하면 이 점을 감안해 과거 답안지(時文)[137]나 잘 짓는 것과 같다. 이것 역시 남을 위하는 것이 심한 것이다."
- ○如甲兵、錢榖、籩豆、有司, 到當自家理㑹便理㑹, 不是為别人了理㑹. 如割股、廬墓, 一是不忍其親之病, 一是不忍其親之死, 這都是為已者. 若因要人知了去恁地, 便是為人."
- "전쟁일, 창고일, 제사일, 유사의 일 같은 경우라도 마땅히 내가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割股나 廬墓의 경우, 하나는 그 부모의 지병을 차마 보아넘기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는 그 부모의 죽음을 차마 보아넘기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고서 이렇게 했다면, 이는 곧 남을 위한 것이 된다."
- ○問: "割股事, 如何?" 曰: "割股固自不是. 若誠心為之, 不求人知, 亦庶幾; 今有以此要譽者."
- 물었다. "割股의 일은 어떻습니까?" 말했다. "割股는 진실로 옳지 않다. 만약 마음을 진실하게 하여 그것을 행하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거의 [도에] 가깝겠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으로 명예를 구하려는 자들이 있다."
- ○南軒此言, 擴前聖所未發, 而同於孟子性善、養氣之功者歟!
- 장남헌의 이 말은 전 성현들이 아직 드러내지 못한 바를 넓힌 것이니 맹자의 性善、養氣의 공적[138]과 동일하구나!
15. <대학>의 저자 문제
曰: “子謂正經蓋夫子之言, 而曾子述之, 其傳去聲, 後凡言傳文經傳之類皆同.則曾子之意, 而門人記之. 何以知其然也.”
물었다: "그대는 '正經은 아마 공자의 말씀을 증자가 조술한 것이고, 그 傳文은 증자의 뜻을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다'[139]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러하다는 것을 알았는가?"
曰: “正經辭約而理備, 言近而指遠, 非聖人不能及也. 然以其無他左驗[140], 且意其或出於古昔先民之言也, 故疑之而不敢質[141]. 至於傳文, 或引曾子之言, 而又多與『中庸』『孟子』者合, 則知其成於曾氏門人之手, 而子思以授孟子無疑也. 蓋『中庸』之所謂明善, 卽格物致知之功; 其曰誠身, 卽誠意·正心·修身之效也. 孟子之所謂知性者, 物格也; 盡心者, 知至也; 存心·養性·修身者, 誠意·正心·修身也.
대답했다: "正經의 경우 말은 간략하지만 이치가 갖추어져 있고, 말은 비근하지만 뜻이 원대하니, 성인이 아니라면 해낼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증거가 없고, 또 아마 옛 先民의 말에서 나온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심만 하고 검증하지는 않았다. 傳文의 경우, 간혹 증자의 말씀을 인용하고 또 『中庸』과 『孟子』의 [내용에] 부합하는 것이 많으니, 증자 문하의 손에서 완성됐음을 알겠고, 자사가 이를 맹자에게 전수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대개 『中庸』에서 말한 '明善'은 곧 格物致知의 공부이고, '誠身'을 말한 것은 곧 誠意·正心·修身의 공부이며,[142] 맹자가 말한 '知性'은 物格이고, '盡心'은 知至며, '存心·養性·修身'은 誠意·正心·修身이다.[143]"
- ○朱子曰: "知性者, 物格也, 物字對性字; 盡心者, 知至也, 知字對心字."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知性'이라는 것은 物格이니, 物자는 性자에 대응한다. '盡心'이라는 것은 知至니, 知자는 心자에 대응한다."
- ○'物理之極處無不到', 知性也; '吾心之所知無不盡', 盡心也.
- '物理의 지극한 곳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144]는 것은 知性이고, '내 마음의 아는 바를 다하지 않음이 없다'[145]는 것은 盡心이다.
其他如謹獨之云, 不慊口簟口劫二反之說, 義利之分, 恒言之序,
그밖에 [『中庸』에서] 말한 '謹獨'과[146] [『孟子』에서] 말한 不慊[147]·義利의 구분[148]·늘 하는 말의 순서[149]가
- ○新安倪氏曰: "孟子云: '人有常言皆曰天下國家,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此'常言之序'也."
- 신안 예씨가 말했다: "맹자께서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어 모두들 天下國家를 말하는데, 天下의 근본은 國에 있고, 國의 근본은 家에 있으며 家의 근본은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 이것이 '常言之序'이다."
亦無不脗武粉反又音冺合焉者. 故程子以爲孔氏之遺書, 學者之先務, 而<論><孟>猶處上聲其次焉, 亦可見矣.”
또한 [『대학』]에 들어맞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정자께서는 '[『대학』을] 공자께서 남기신 책이며 배우는 자들의 급선무'로 여기셨고,[150] '『논어』·『맹자』는 오히려 그 다음'[151]인 것도 알 수 있다."
曰: “程子之先是書而後論、孟, 又且不及乎<中庸>, 何也?”
물었다: "정자께서는 이 책(『대학』)을 우선하시고 『논어』·『맹자』를 뒤로 하셨는데, 그런데도 『중용』을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어째서인가?"
曰: “是書垂世立敎[152]之大典, 通爲去聲天下後世而言者也. <論><孟>應機接物之微言, 或因一時一事而發者也. 是以是書之規模雖大, 然其首尾該備, 而綱領可尋, 節目分明, 而工夫有序, 無非切於學者之日用. <論><孟>之爲去聲人雖切, 然而問者非一人, 記者非一手, 或先後淺深之無序, 或抑揚進退之不齊, 其間蓋有非初學日用之所及者. 此程子所以先是書後<論><孟>, 蓋以其難易去聲下同緩急言之, 而非以聖人之言爲有優劣也. 至於<中庸>, 則又聖門傳授極致之言, 尤非後學之所易得而聞者, 故程子之敎未遽及之, 豈不又以爲<論><孟>旣通, 然後可以及此乎? 蓋不先乎<大學>, 無以提挈綱領而盡<論><孟>之精微; 不參之<論><孟>, 無以融貫會通而極<中庸>之歸趣; 然不會其極於<中庸>, 則又何以建立大本盡性也, 經綸大經立教也, 而讀天下之書, 論天下之事哉? 以是觀之, 則務講學者, 固不可不急於四書, 而讀四書者, 又不可不先於<大學>, 亦已明矣. 今之敎者, 乃或棄此不務, 而反以他說先焉, 其不溺於虛空, 流於功利, 而得罪於聖門者, 幾平聲希矣."
대답했다: "이 책(『대학』)은 세상에 드리워져 가르침을 세우는 위대한 텍스트니, 모두 천하의 후세를 위하여 말해진 것이다. 『논어』·『맹자』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대응한 微言(별 거 아닌 듯 하지만 심오한 말)이라서, 간혹 한 때나 한 사건에 의해 언급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책(『대학』)의 규모는 비록 크지만 머리부터 꼬리까지 갖춰져 강령을 살필 수 있으며 절목이 분명하고 공부에 순서가 있어 배우는 자들의 일상 생활에 절근하지 않음이 없는 반면, 『논어』·『맹자』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비록 절실하지만 질문자도 한 명이 아니고 기록자도 한 명이 아니라서 간혹 先後·淺深의 순서가 없기도 하고 간혹 抑揚·進退가 일정하지 않기도 해서 이 사이에 대개 초학자의 일상 생활에 관련되지 않는 것이 있다. 이것이 정자께서 『대학』을 우선시하고 『논어』·『맹자』를 뒤로 하신 까닭이다. 이는 대개 난이도나 우선순위로 말씀하신 것이지, 성인의 말씀에 우열이 있다고 여기신 것은 아니다. 『중용』에 경우 성인 문하에서 전수해온 지극한 글이기 때문에, 더욱 후학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자의 훈계에서 성급하게 언급되지 않았으니, 어찌 『논어』·『맹자』를 통달한 연후에 여기(『중용』)에 미칠 수 있다고 여기신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대학』을 우선하지 않으면 [『대학』을 통해] 강령을 세워 『논어』·『맹자』의 정미한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논어』·『맹자』를 참고하지 않으면 [『논어』·『맹자』를] 온전히 통달하여 『중용』의 의미를 지극히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중용』에서 그 지극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달리 어떻게 큰 근본을 세우고(명명덕)盡性이다. 큰 법도를 운용하여(신민)立教이다. 천하의 책을 읽고 천하의 일을 논하겠는가? 이것으로 본다면, 강학에 힘쓰는 사람들은 진실로 이 네 가지 책(四書, 『대학』·『논어』·『맹자』·『중용』)즉 을 우선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이 네 가지 책을 읽는 사람은 또한 『대학』을 우선으로 하지 않아서는 안 됨 또한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자들은 도리어 이 네 가지 책을 버려두고 힘쓰지 않으면서 도리어 다른 학설을 우선하니, 虛(도교)·空(불교)에 빠지거나 功利에 흘러들어가 성인의 문하에 죄를 얻지 않는 자가 드물다."
傳一章
康誥曰:「克明德。」
<강고>에서는 "[문왕께서] 능히 [자신의] 명덕을 밝히셨다"고 하였고,
- 康誥,周書。克,能也。
- '강고'는 <서경> <주서> [편명이다.] '克'은 '能'이다.
- 朱子曰: "此克字, 雖訓能, 然比能字有力. 見人皆有是明徳而不能明, 惟文王能明之. 克只是真箇㑹底意."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이 '克'자는 '能'으로 풀지만, '能'자와 비교하면 [더욱] 힘이 있다. [이 구절은] 사람들이 모두 이 명덕을 가지고 있는데도 밝히지 못하는데, 오직 문왕만이 이를 밝히실 수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克'은 다만 진정으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大甲曰:「顧諟天之明命。」大讀作泰. 諟古是字.
<태갑>에서는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고 하였으며,
- 大甲,商書。顧,謂常目在之也。
- <태갑>은 <서경> <상서> [편명이다.] '顧'는 늘 이것에 눈을 둔다는 것이다.
- 朱子曰: "'常目在之', 古註語, 極好. 如一物在此, 惟恐人偷去, 兩眼常常覷在此相似."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常目在之'는 옛 주석의 표현이니, 매우 훌륭하다. 마치 여기 어떤 물건을 남이 훔쳐갈까 걱정해 두 눈으로 여기를 보는 것과 같다."
- 諟,猶此也,從古是字之說或曰審也。廣韻註也. 今不必從.天之明命,即天之所以與我,而我之所以為德者也。常目在之,則無時不明矣。
- '諟'는 '此'과 같으니,'是'자로 보는 옛 설을 따랐다. 혹자는 '審'이라고 한다.<광운> 주석이다. 오늘날 굳이 따를 필요는 없다. '天之明命'이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고, 내가 덕으로 삼은 것이다. '常目在之'는 어느 때고 밝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 朱子曰: "上下文都說明徳, 這裏却說明命, 盖天之所以與我便是明命; 我所得以為性者便是明徳. 命與徳皆以明言, 是這箇物本自光明. 我自昏蔽了他."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앞뒤의 글에서 모두 '명덕'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明命'을 말한 것은, 대개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 '명명'이고, 내가 얻어 性으로 삼은 것이 '명덕'이다. '命'과 '徳'을 모두 '明'으로 말한 것은, 이것이 본래 빛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어둡게 하고 가린 것이다."
- ○顧諟者只是長存此心, 知得有這道理光明不昧. 方其未接物, 此理固湛然清明; 及其遇事應接, 此理亦隨處發見. 只要常提撕省察, 念念不忘. 存養久之, 則道理愈明, 雖欲忘之而不可得矣.
- '顧諟'라는 것은 다만 이 마음을 오래 보존하여 이 도리가 빛나 어둡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아직 외물을 접하지 않았을 때 이 理는 진실로 고요히 청명하다가, 외물을 만나 대응할 때, 이 理 역시 상황에 따라 발현한다. 다만 늘 일깨우고 살피며 늘 생각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존양함이 오래되면 도리는 더욱 밝아져, 비록 잊고자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 ○只是見得道理常在目前, 不被事物遮障了, 不成是有一物可見其形象.
- 다만 늘 눈앞에 있는 도리를 알고 외물에 의해 가려지지 않게 하는 것이니, 형상을 볼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니다.
帝典曰:「克明峻德。」峻書作俊
<요전>에서는 "능히 큰 덕을 밝힌다"고 하였으니,
- 帝典,堯典,虞書。峻,大也。
- '帝典'은 <서경> <요전>이니 <우서>의 편명이다. '峻'은 '큼'이다.
皆自明也。
모두 스스로 밝힌 것이다.
- 結所引書,皆言自明己德之意。
- 인용한 <서경>이 모두 스스로 자신의 덕을 밝혔다는 의미임을 말한 것이라고 마무리한 것이다.
- 右傳之首章。釋明明德。
- 이상은 전1장이다. '명명덕'을 풀이한 것이다.
- 此通下三章至「止於信」,舊本誤在「沒世不忘」之下。
- 이 장에서 다음 전3장의 '止於信'까지 옛 판본에서는 '沒世不忘' 다음에 잘못 배치했다.
『혹문』 전1장
或問: "一章而下以至三章之半, 鄭本元在沒世不忘之下, 而程子乃以次於'此謂知之至也'之文, 子獨何以知其不然而遂以爲傳之首章也?"
혹자가 물었다: "전1장부터 전3장의 반까지를 鄭本(정현본)에서는 원래 '沒世不忘' 다음에 두었고, 정자(이천)께서는 '此謂知之至也' 다음에 두셨는데, 그대는 유독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고서 마침내 전의 첫 장으로 삼았는가?"
曰: "以經統傳, 以傳附經, 則其次第可知, 而二說之不然, 審矣."
대답했다: "經으로 傳을 통괄하고, 傳으로 經을 부연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분석하면] 그 순서를 알 수 있으니, 두 설 모두 옳지 않음이 명백하다."
○曰: "然則其曰: '克明徳'者, 何也?"
물었다: "그렇다면 전1장에서 '克明徳'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曰: "此言文王能明其徳也. 蓋人莫不知徳之當明而欲明之. 然氣稟拘之於前, 物欲蔽之於後. 是以雖欲明之而有不克也. 文王之心, 渾上聲然天理, 亦無待於克之而自明矣. 然猶云爾者, 亦見其獨能明之而他人不能. 又以見夫音扶未能明者之不可不致其克之之功也."
대답했다: "이는 문왕께서 자신의 덕을 밝히실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대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덕을 마땅히 밝혀야 함을 알고 이를 밝히려고 한다. 그러나 氣稟이 선천적으로 구속하고, 물욕이 후천적으로 [덕을] 가린다. 그러므로 비록 덕을 밝히려고 하더라도 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문왕의 마음은 혼연한 천리이므로 역시 [기품이나 물욕을] 이겨낼 필요가 없이 본래 밝다. 그런데도 [전1장에서] 오히려 이렇게 말한 것은, 다만 문왕만이 덕을 밝힐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또 이를 통해 아직 밝히지 못한 사람들이 [기품이나 물욕을] 이겨내는 공부를 다하지 않아서는 안 됨을 드러낸 것이다."
- 問: "'克明徳', 克, 能也. <或問>中却作'能致其克之之功', 又似克治之克, 如何?" 朱子曰: "此克字, 雖訓能字, 然克字重, 是他人不能而文王獨能之. 若只作'能明徳', 語意便都弱了. 凡字有文義一般而聲響頓異, 如云: '克宅心'、'克明徳'之類, 可見."
- 물었다: "'克明徳'의 '克'은 '할 수 있다(能)'는 것입니다. <或問>중에 도리어 '[기품이나 물욕을] 이겨내는 공부를 다할 수 있다'라고 써서 또 '克治'[153] 의 '克'과 같아보이는 데, 어떻습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여기 '克'자는 비록 '能'으로 풀지만 '克'이라는 글자가 더 [뉘앙스가] 강하니, 이는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고 문왕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다만 '덕을 밝힐 수 있다(能明徳)'고만 쓴다면, 의미가 매우 약해질 것이다. 모든 글자에는 그 뜻은 같지만 울림이 확연히 다른 경우가 있으니, '克宅心'[154]이나 '克明徳'과 같은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 ○人所以不能明其徳者, 何哉? 盖氣偏而失之太剛, 則有所不克; 氣偏而失之太柔, 則有所不克; 聲色之欲蔽之, 則有所不克; 貨利之欲蔽之, 則有所不克. 不獨此耳, 凡有一毫之偏蔽得以害之, 則有所不克. 唯文王無氣稟物欲之偏蔽, 故能有以勝之而無疑.
- 사람들이 자신의 덕을 밝힐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기질이 치우쳐 너무 강직한 데서 잘못한다면 이겨내지 못하는 바가 있고, 기질이 치우쳐 너무 유한 데서 잘못한다면 이겨내지 못하는 바가 있으며, 감각적 욕구가 명덕을 가리면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 있고, 물욕이 명덕을 가린다면 이겨내지 못하는 바가 있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라 무릇 [기질이] 조금이라도 치우쳐 명덕을 해칠 수 있다면 이겨내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오직 문왕만이 기품의 치우침과 물욕의 가림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이겨내고 의심이 없을 수 있었다.
- ○西山眞氏曰: "明徳, 人所同有, 其所以為聖愚之分者, 但以克明與不能明之異爾. 常人所以不能明者, 一則以氣稟昏弱之故; 二則以物欲蔽塞之故. 雖是蔽塞之餘, 若一旦悔悟, 欲自明其徳, 亦無不可者. 患在自暴自棄而不肯為耳.
- 서산 진씨가 말했다: "明徳은 사람이 똑같이 가진 것인데, 성인이나 어리석은 사람으로 구분되는 까닭은 다만 [명덕을] 밝힐 수 있는 것과 밝힐 수 없는 것의 차이일 뿐이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명덕을] 밝힐 수 없는 까닭은, 하나는 기품이 혼매하고 약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물욕이 가리고 막기 때문이다. 비록 [기품이] 가리고 [물욕이] 막음이 많더라도, 만약 일단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자신의 덕을 밝히려고 한다면, 또한 해내지 못할 리 없을 것이다. 문제는 자포자기[155]해서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데 있을 뿐이다."
- ○格庵趙氏曰: "文王自誠而明者. 故其心渾然天理, 表裏澄瑩, 不待克之而自明. 若大賢而下, 未能如文王, 則不可無克之之功矣."
- 격암 조씨가 말했다: "문왕은 '誠을 통해 밝아진' 분이다.[156] 그러므로 그 마음은 혼연히 천리이고 안팎이 모두 맑아서 [기품이나 물욕을] 이겨낼 필요 없이 본래 밝으셨다. 大賢 이하는 문왕과 같을 수 없으니, [기품이나 물욕을] 이겨내는 공부가 없어서는 안 된다."
○曰: "'顧諟天之明命', 何也?"
물었다: "'顧諟天之明命'는 무슨 의미인가?"
曰: "人受天地之中以生. 故人之明徳, 非他也, 即天之所以命我而至善之所存也. 是其全體大用, 蓋無時而不發見形甸反於日用之間.
대답했다: "사람은 천지의 중정함을 얻어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사람의 明徳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이 나에게 명한 것이며 至善이 보존된 곳이다. 이것이 바로 全體이자 大用이니, 대개 어느 때고 일상생활에 드러나지 않음이 없다."
- 陳氏曰: "於寂然不動之時, 則合萬殊為一本, 而渾然之全體常昭融於方寸之間; 及感而遂通之際, 則散一本為萬殊, 而縱横曲直莫非大用之所流行矣." 又曰: "天理本體, 常生生而無一息之已; 而其大用, 亦無一息不流行乎日用之間."
- 진씨가 말했다: "'寂然不動'한 때에는 萬殊가 합해져 하나의 근본이 되어 혼연한 全體가 늘 마음 속에서 밝게 드러나 있고, '[외물을] 감하여 마침내 통한(感而遂通)' 때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근본이 나눠져 萬殊가 되어, 온갖 [차별적인] 것들이 大用의 유행 아닌 것이 없다." 또 말했다. "天理의 本體는 늘 [만물을] 낳고 낳아 한 순간의 그침도 없고, 天理의 大用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한 순간도 유행하지 않음이 없다."
人惟不察於此. 是以汨音骨於人欲而不知所以自明. 常目在之而眞若'見其參於前、倚於衡也', 則'成性存存而道義出'矣.
사람이 오직 이 점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인욕에 빠지고도 스스로 밝힐 줄을 알지 못한다. 늘 눈을 여기(명덕)에 두고서 진실로 '그것이 앞에 참여하고 있고, 멍에에 기대고 있음을 보듯'[157] 한다면, '본래 갖춰진 성이 보존되고 보존되어 道義가 [이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158]"
- 問: "如何是體, 如何是用?" 朱子曰: "體與用不相離, 且如身是體, 要起行去便是用. 赤子匍匐將入井, 皆有怵惕惻隱之心, 只此一端體用便可見. 如喜怒哀樂是用, 所以喜怒哀樂是體."
- 물었다: "무엇이 體이고 무엇이 用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體와 用은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예를 들어 몸은 體이고 일어나서 가려는 것은 用이다. '어린 아이가 기어서 우물에 들어가려고 할 때 모두들 깜짝 놀라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단지 이 한 경우에서도 體用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喜怒哀樂[과 같은 감정]은 用이고, 喜怒哀樂[과 같은 감정이 생기는] 까닭이 體이다."
- ○若'見其參前', '倚衡', 此豈有物可見? 但凡人不知省察, 常行日用毎與是徳相忘, 亦不自知其有是也. 今所謂'顧諟'者, 只是心裏常常存著此理. 一出言, 一行事, 皆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初豈實有一物之可見其形象耶?
- '見其參前'·'倚衡'의 경우, 이것이 어찌 [정말로] 볼 수 있는 것이겠는가? 다만 보통 사람들이 성찰할 줄 몰라, 일상 생활에서 매번 이 徳을 잊어버리고 그에게 이 徳이 있는 줄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지금 이른바 '顧諟'라는 것은 다만 마음속으로 이 理를 늘 보존하는 것이다. 한 마디 말할 때나 한 번 행동할 때 모두 반드시 마땅한 법칙이 있으니, 이를 어겨서는 안 된다. 애초에 어찌 실제로 그 형상을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겠는가?
- ○問: "'成性存存, 道義出矣', 何如?" 曰: "天之所命, 我之所得於己, 只是一箇道理. 人只要存得這些在這裏. 才存得在這裏, 則事君必㑹忠, 事親必㑹孝, 見孺子入井, 則怵惕之心便發, 見穿窬之類, 則羞惡之心便發, 合恭敬處便自然㑹恭敬, 合辭遜處便自然㑹辭遜. 須要常存得此心, 則便見得此性發出底都是道理; 若不存得這些, 待做出, 那箇㑹合道理?"
- 물었다: "'成性存存, 道義出矣'란 무슨 의미인가?" 대답했다: "하늘이 명령한 것과 내가 얻은 것은 같은 道理일 뿐이다. 사람이라면 단지 이와 같은 것을 내면에 보존해야 한다. 내면에 보존하기만 하면 군주를 섬김에 틀림없이 忠할 수 있고, 부모를 섬김에 틀림없이 孝할 수 있으며, 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는 마음이 일어나고, 도둑질하는 부류를 보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며, 공경해야 할 상황에서는 저절로 공경할 수 있고, 사양해야 할 상황에서는 저절로 사양할 수 있게 된다. 모름지기 이 마음을 항상 보존해야하니, 그렇게 한다면 이 性이 발한 것이 모두 道理임을 알겠지만, 만일 이것을 보존하지 않고 [저절로] 되기를 기다린다면, 무엇이 道理에 부합할 수 있겠는가?"
- ○西山眞氏曰: "'成性'者, 言天之與我者, 自有渾成之性, 如俗言'見成渾淪之物', 是也. 我但當存之又存, 不令頃刻失之, 則天下之道義皆從此出. 道義, 如事君忠, 事親孝之類."
- 서산 진씨가 말했다: "'成性'이라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해준 것에 본래 혼연히 완성된 性이 있음을 말하니, 세속에서 '見成渾淪之物'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내가 다만 마땅히 보존하고 또 보존해 잠시라고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면, 천하의 道義가 모두 이것을 따라 나올 것이다. '道義'란 군주를 섬김에 忠하고, 부모를 섬김에 孝하는 부류와 같은 것이다."
- ○玉溪盧氏曰: "'天地之中', 太極是已, 天之命我, 此也; 我之明徳, 此也; 謂之至善, 亦此也. 道者, 體; 義者, 用. '成性存存而道義出', 則明徳之全體大用無不明矣."
- 옥계 노씨가 말했다" "'天地之中'이란 태극이 이것이니, '하늘이 나에게 명한 것'이 이것이고, 나의 '明徳'이 이것이며, '至善'이라고 한 것 또한 이것이다. '道'라는 것은 體이고, '義'라는 것은 用이다. '成性存存而道義出'이란 明徳의 全體와 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曰: "'克明峻徳', 何也?"
물었다: "'克明峻徳'이란 무슨 의미인가?"
曰: "言堯能明其大徳也."
대답했다: "요임금께서 자신의 大徳을 밝히실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 朱子曰: "人之為徳未嘗不明, 而其明之為體亦未嘗不大. 但人自有以昏之, 是以既不能明, 而又自䧟於一物之小. 唯堯為能明其大徳而無昏暗狹小之累, 是則所謂止於至善."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徳은 일찍이 밝지 않음이 없고, 그 밝음의 정도 또한 일찍이 크지 않음이 없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어둡게 만들기 때문에 밝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소한 것에 빠진다. 오직 요임금만이 자신의 大徳을 밝히셔서 [그것을] 어둡게 하거나 좁게 하는 장애가 없으셨으니, 이것이 이른바 '止於至善'이다."
- ○玉溪盧氏曰: "'能明其大徳', 只是明明徳到十分盡處, 非明徳之外有峻徳也."
- 옥계 노씨가 말했다: "'能明其大徳'이란 다만 明徳을 밝히는 것을 100% 다하는 것이니, 明徳 밖에 따로 '峻徳'이 있는 게 아니다."
○曰: "是三者, 固皆自明之事也. 然其言之, 亦有序乎?"
물었다: "이 세 가지는 진실로 모두 스스로 밝히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말한 것에도 순서가 있는 것인가?"
曰: "<康誥>通言明徳而已; <太甲>則明天之未始不爲人而人之未始不爲天也; <帝典>則專言成徳之事, 而極其大焉. 其言之淺深, 亦略有序矣." 대답했다: "<康誥>는 明徳을 전체적으로 말한 것일 뿐이고, <太甲>은 '하늘은 애초에 사람을 위하지 않음이 없고, 사람은 애초에 하늘을 위하지 않음이 없음'을 밝힌 것이며, <帝典>은 오로지 완벽한 덕을 지닌 자(成徳, 즉 堯)의 사례를 말하여 그 위대함을 지극히 표현한 것이다. 그 말의 깊이에도 대략 순서가 있다."
- 問: "'天未始不為人而人未始不為天', 何也?" 朱子曰: "只是言人性本無不善, 而其日用之間莫不有當然之則, 所謂天理也. 人若毎事做得是, 則便合天理. 天人本一理, 若理㑹得此意, 則天何嘗大, 人何嘗小也?"
- 물었다: "'하늘은 애초에 사람을 위하지 않음이 없고, 사람은 애초에 하늘을 위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다만 사람의 性은 본래 선하지 않음이 없고, 평소에 당연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이른바 天理이다. 사람이 만일 매사에 옳게 행한다면 천리에 부합하게 된다. 하늘과 사람은 본래 하나의 理이니, 만약 이 뜻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언제 하늘은 크고 사람은 작았겠는가?"
- ○天即人, 人即天. 人之始生, 得於天也; 既生此人, 則天又在人矣. 凡語言動作視聽, 皆天也. '顧'是常要看得光明燦爛, 照在目前.
- 하늘은 곧 사람이고 사람은 곧 하늘이니,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하늘을 얻고, [하늘이] 이 사람을 낳고 나면 하늘은 다시 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무릇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고 보고 듣는 것은 모두 하늘[이 하는 것]이다. '顧'란 항상 광명찬란한 것(즉 명덕)이 눈앞에서 빛나는 것을 보려는 것이다.[159]
- ○黄氏曰: "本文三引<書>, 乃斷章取義, 以明經文明明徳之意. 其言之序, 則自淺而深, 最爲有用. '克明徳'者, 泛言之; 曰'顧諟', 則言明之之功; 曰'明命', 則言明徳之故; 次之曰'峻徳', 加一峻字, 則又見明徳之極, 乃所謂'止於至善'者也."
- 황씨가 말했다: "본문에서 세 번 <서경>을 인용한 것은 바로 斷章取義해서 경문의 '明明徳'의 의미를 밝힌 것이다. 언급 순서는 얕은 것에서부터 깊어지니, 매우 쓸모가 있다. '克明徳'이라는 것은 범범하게 말한 것이고, '顧諟'라고 말한 것은 명덕을 밝히는 공부를 말한 것이며, '明命'을 말한 것은 明徳의 원인을 말한 것이다. 다음에 말한 '峻徳'에서 '峻'자를 더한 것은 또한 明徳의 지극함을 드러낸 것이니, 바로 이른바 '止於至善'이라는 것이다."
傳二章
湯之盤銘曰:「苟日新,日日新,又日新。」
탕왕의 盤銘에서는 "진실로 어느 날에 새롭게 했거든, [이를 말미암아]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고 하였고,
- 盤,沐浴之盤也。銘,名其器以自警之辭也。苟,誠也。<論語>"苟至於仁", 苟亦訓誠.[160]湯以人之洗濯其心以去上聲下同惡,如沐浴其身以去垢。故銘其盤,言誠能一日有以滌其舊染之汙而自新,則當因其已新者,而日日新之,又日新之,不可略有間去聲斷徒玩反也。
- '盤'은 목욕하는 그릇이다. '銘'은 그 그릇에 스스로를 경계하는 말을 새긴 것이다. '苟'는 '진실로'(誠)이다.<논어>의 "苟至於仁"의 '苟'도 '誠'으로 풀었다. 탕왕은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씻어 악을 제거하는 것을 마치 몸을 씻어 때를 제거하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므로 자신의 '盤'에 명문을 새겨 '진실로 어느 날 전에 물든 더러움을 씻어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있다면, 이미 새롭게 한 바에 말미암아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져 조금의 끊어짐도 있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 問: "盤銘見於何書?" 朱子曰: "只見於<大學>. 緊要在一'苟'字, 首句是為學入頭處. 誠能日新, 則下兩句工夫方能接續做去. 今學者却不去'苟'字上著工夫."
- 물었다: "盤銘은 어떤 책에서 나옵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대학>에만 보인다. 핵심은 '苟'자에 달려있으니, 첫 구('苟日新')가 학문의 시작점이다. 진실로 어느 날 새롭게 할 수 있었다면, 다음 두 구의 공부('日日新,又日新')가 비로소 연이어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배우는 자들은 '苟'자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
- ○'苟日新', 新是對舊染之汙而言; '日日新, 又日新', 只是要常常如此無間斷也.
- '苟日新'의 '新'은 '전에 물든 더러움'(舊染之汙)에 대해 말한 것이고, '日日新, 又日新'은 단지 늘 이렇게 끊어짐이 없게해야 한다는 것이다.
康誥曰:「作新民。」
<강고>에서는 '[스스로] 새롭게 하는 백성을 진작시켜라'라고 하였으며,
- 鼓之舞之之謂作,言振起其自新之民也。
- 고무하는 것을 '作'이라고 하니, 스스로 새롭게 하는 백성을 진작시킴을 말한다.
- 朱子曰: "'鼓之舞之', 如擊鼓然, 自然能使人跳舞踊躍. 上之人之於民, 時時提撕警發之, 則下之觀瞻感化, 各自有以興起同然之善心而不能自已耳."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鼓之舞之'는 마치 북을 치는 것처럼 저절로 사람들로 하여금 춤추고 뛰어오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정자가 백성에 대해 때때로 그들을 일깨운다면, 이를 보고 감화된 백성들은 각자 스스로 공통의 선한 마음을 흥기시켜 스스로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詩曰:「周雖舊邦,其命惟新。」
<시>에서는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지만, [문왕에 이르러] 천명이 새로워졌다"고 하였다.
- 詩大雅文王之篇。言周國雖舊,至於文王,能新其德以及於民,此是推本說而始受天命也。始字貼新字
- <시> <대아> <문왕>편이다. 주나라가 비록 오래되었지만, 문왕에 이르러 자신의 덕을 새롭게 해 백성들에게 미쳐이것은 推本說이다?? 비로소 천명을 받을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始'자가 '新'자에 해당한다.
- 朱子曰: "是新民之極, 和天命也新."[161]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其命維新'이란] '신민'을 지극히 하니 천명도 새로워졌다는 것이다."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이 때문에 군자는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다.
- 自新新民,皆欲止於至善也。
-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至善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다.
- 朱子曰: "'明明徳', 便要如湯之日新; '新民', 便要如文王之'周雖舊邦, 其命維新'. 各求'止於至善'之地而後已也."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명명덕'은 탕왕이 날로 새롭게 한 것처럼 하려는 것이고, '신민'은 문왕의 '周雖舊邦, 其命維新'처럼 하려는 것이다. 각각 '지어지선'의 경지를 구한 이후에 그치는 것이다."
- 右傳之二章。釋新民。
- 이상은 전2장이다. '신민'을 풀이한 것이다.
『혹문』 전2장
或問: "盤之有銘, 何也?"
혹자가 물었다: "盤에 銘을 새긴 것'은 어째서인가?'"
曰: "盤者, 常用之器, 銘者, 自警之辭也. 古之聖賢, 兢兢業業[162], 固無時而不戒謹恐懼. 然猶恐其有所怠忽而或忘之也. 是以於其常用之器, 各因其事而刻銘以致戒焉, 欲其常接乎目, 毎警乎心而不至於忽忘也."
답했다. "'盤'이라는 것은 늘 사용하는 기물이고, '銘'이라는 것은 스스로 경계하는 말이다. 옛 성현들께서는 경계하고 경계하셔서, 진실로 어느 때나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으셨다. 그런데도 오히려 태만하고 소홀해서 혹 잊어버리는경우가 있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이 때문에 늘 사용하는 기물에 각각 그 기물에 따라 銘을 새겨 경계를 지극히 하셨으니, 늘 눈앞에 두어 매번 마음을 경계하고 소홀해 잊어버리는 데 이르지 않고자 하신 것이다."
曰: "然則沐浴之盤而其所刻之辭如此, 何也?"
물었다: "그렇다면 목욕하는 盤에 새긴 글이 이러한 것은 어째서인가?"
曰: "人之有是徳, 猶其有是身也; 徳之本明, 猶其身之本㓗也; 徳之明而利欲昏之, 猶身之㓗而塵垢音苟汚音烏又去聲之也. 一旦存養省悉井反察之功, 眞有以去上聲下同其前日利欲之昏, 而日新焉, 則亦猶其䟽平聲瀹音藥[163]澡音早雪[164], 而有以去其前日塵垢之汚也. 然既新矣, 而所以新之之功不繼, 則利欲之交將復扶又反下同有如前日之昏, 猶既㓗矣而所以㓗之之功不繼, 則塵垢之集將復有如前日之汚也. 故必因其巳新而日日新之, 又日新之, 使其存養省察之功無少間斷間去聲斷徒玩反後凡二字相連者並同, 則明徳常明而不復爲利欲之昏, 亦如人之一日沐浴而日日沐浴, 又無日而不沐浴, 使其䟽瀹澡雪之功無少間斷, 則身常㓗清而不復爲舊染之汚也.
昔成湯所以反之而至於聖者, 正惟有得於此. 故稱其徳者有曰: '不邇聲色, 不殖承職反貨利.' 又曰: '以義制事, 以禮制心.' 有曰: '從諌弗咈音佛', '改過不吝.' 又曰: '與人不求備, 檢身若不及.' 此皆足以見其日新之實. 至於所謂聖敬日躋牋西反云者, 則其言愈約而意愈切矣躋, 升也. 聖人能敬其徳, 日愈升於髙明也.然本湯之所以得此, 又其學於伊尹而有發焉. 故伊尹自謂與湯咸有一徳, 而於復如字政太甲之初, 復扶又反下同以終始惟一, 時乃日新, 爲丁寧之戒, 蓋於是時, 太甲方且自怨自艾音乂, 於桐處上聲仁遷義而歸, 是亦所謂苟日新者. 故復推其嘗以告于湯者告之, 欲其日進乎此, 無所間斷, 而有以繼其烈祖之成徳也. 其意亦深切矣.
대답했다: "사람에게 이 덕이 있는 것은 이 몸이 있는 것과 같고, 덕이 본래 밝은 것(즉 명덕)은 몸이 원래 깨끗한 것과 같으며, 밝은 덕을 利欲이 가리는 것은 깨끗한 몸을 먼지가 더럽히는 것과 같다. 한 번 존양성찰의 공부가 진실로 이전의 利欲의 가림을 제거하여 날로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은 또한 [몸을] 씻어 전날의 더러움을 제거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미 새로워졌더라도 새롭게 하는 공부를 계속하지 않으면 利欲이 엮여서 다시 이전의 가림과 같게 되는 것은, 이미 씻었더라도 깨끗하게 하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먼지가 모여서 다시 전날의 더러움과 같아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미 새롭게 한 것에 기인해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여 존양성찰의 공부가 조금의 끊어짐도 없게 하면, 명덕이 늘 밝아서 다시는 利欲의 가림이 없는 것이 또한 사람이 어느 날 씻고 또 날마다 씻어 하루라도 씻지 않음이 없어서, 씻는 노력이 조금의 끊어짐도 없게 하면, 몸이 늘 깨끗해 다시는 과거의 더러움이 없게 되는 것과 같다.
옛날 탕왕께서 [본성을] 회복해[165] 성인이 되신 까닭은 바로 이점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경>에서] 탕왕의 덕을 칭송해 '노래와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재물을 늘리지 않는다'[166]·'義로써 일을 제어하고, 禮로써 마음을 제어한다.'[167]·'간언을 따르고 거스르지 않는다'[168]·'잘못을 고치는데 거리끼지 않는다'[169]고 하였고, 또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갖추기를 바라지 않았고, 자신을 단속하기를 마치 부족한 듯 한다"[170]고 하였으니, 이 모두에서 탕왕께서 날마다 새로워지신 실질을 볼 수 있다. 이른바 "성인께서 공경하셔서 날로 발전하셨다"[171]의 경우, 말은 더욱 간략하지만 의미는 더욱 절실하다.'躋'는 '올라감'이다. 성인께서 능히 자신의 덕을 공경하셔서 날이 갈수록 더욱 고명한 경지에 오르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탕임금이 이점을 깨달으셨던 이유는 또 이윤에게 배워 감발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윤 스스로 '[탕왕과] 함께 공통적인 덕을 가지고 있다'[172]고 말했고, 태갑을 정치에 복귀시킬 때 다시 '시종 한결같이 하는 것이 바로 날로 새롭게 하는 것'[173]이라는 말로 간곡한 경계를 삼았다. 아마 이때 태갑이 비로소 '스스로 원망하고 자신을 다스려 桐땅에서 인의를 실천하고 돌아왔으니'[174] 이 또한 이른바 '苟日新'이다. 그러므로 다시 전에 탕왕께 고했던 말을 미루어 태갑에게 고한 것은 태갑으로 하여금 날로 이에 나아감에 끊어짐 없게 해서[175] 조상의 성대한 덕을 계승할 수 있게 한 것이니, 뜻이 매우 깊고 절실하다.
- 朱子曰: "成湯工夫, 全在敬字上. 看來大叚是箇脩飭[176]底人. 故當時人說他做工夫處, 如云以義以禮, 不邇不殖等, 可見日新之功. 或問中所以詳載, 非說道人不知, 亦欲學者經心[177]耳."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成湯의 공부는 모두 '敬'이라는 글자에 달려 있다. 생각건대 [탕왕은] 대체로 [스스로를] 잘 단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가 공부하는 것에 대해 '義'나 '禮', '不邇'나 不殖' 등의 말로 표현했으니, (여기에서)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를 볼 수 있다. <或問> 안에 [탕왕을 칭송한 말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것은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여기에] 마음을 두게 하고자 한 것일 뿐이다."
- ○格庵趙氏曰: "塵垢之汚, 其害淺; 利欲之昏, 其害深. 塵垢之汚, 人知求以去之; 而利欲之昏, 則不知所以去之. 唯聖人則以為徳之不可不新, 甚於身之不可不㓗也. 且人之㓗身也, 既知䟽瀹澡雪以去前日塵垢之汚矣. 然其㓗之之功不繼, 則塵垢復集, 將又如前日之汚. 故必日加䟽瀹澡雪之功, 無少間斷, 而後其身常㓗而不汚, 况欲去利欲之昏, 而復本然之明, 則存養省察之功, 其可一日而有間斷哉!"
- 격암 조씨가 말했다: "먼지와 때가 [깨끗한 몸을] 더럽히는 것은 그 해악이 적지만, 이욕이 [명덕을] 가리는 것은 그 해악이 심하다. 먼지와 때가 [깨끗한 몸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들이 제거할 줄 알지만,이욕이 [명덕을] 가리는 것은 제거할 줄 모른다. 오직 성인만이 덕을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이 몸을 깨끗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보다 심하다고 여긴다. 또 사람들이 몸을 깨끗이 함에 있어서, [몸을] 씻어 전날의 먼지와 때의 더러움을 제거할 줄은 이미 알지만, 깨끗이 하는 노력을 잇지 않으면 먼지와 때가 다시 쌓여 다시 전날의 더러움과 같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날마다 깨끗이 하는 노력을 잠깐의 끊어짐도 없이 한 이후에야 그 몸이 항상 깨끗하여 더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욕의 가림을 없애 본연의 밝음을 회복하려고 한다면, 존양성찰의 공부를 어찌 하루라도 끊어지게 해서야 되겠는가?"
- ○玉溪盧氏曰: "不邇聲色等八句, 是敬之目; 聖敬日躋一句, 是敬之綱. 合而言之, 即顧諟明命之事也."
- 옥계 노씨가 말했다: "'不邇聲色'등의 여덟 구절은 敬의 조목이고, '聖敬日躋'의 한 조목 구절은 敬의 강령이다. 합하여 말한다면 '顧諟明命'의 일이다."
其後周之武王, 踐阼存故反之初, 受師尚父[178]丹書之戒曰尚父太公望吕氏. 詳見孟子離婁上篇: '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
이후 주나라 무왕이 즉위하셨을 때, 사상보상보는 태공망 여씨이다. 자세한 것은 <맹자> <이루상>에 보인다.에게 丹書의 경계를 받으셨다: '공경함이 태만함을 이기는 자는 길하고, 태만함이 공경함을 이기는 자는 망한다. 의로움이 욕망을 이기는 자는 순조롭고, 욕구가 의로움을 이기는 자는 흉하다.'[179]
- 問從字意. 朱子曰: "從, 順也. 敬便立起, 怠便放倒. 以理從事是義, 不以理從事便是欲. 這處敬與義, 是箇體用."
- '從'의 뜻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從은 '순조롭다'는 것이다. 敬은 똑바로 서는 것이고, 怠는 엎어지는 것이다. 이치대로 하는 것이 義이며, 이치대로 하지 않는 것이 欲이다. 敬과 義는 體用관계이다."
- ○須是將敬來做本領. 涵養得貫通時, 纔敬以直内, 便義以方外. 義便有敬, 敬便有義. 如居仁便由義, 由義便居仁. 敬者, 守於此而勿失之謂; 義者, 施於彼而合宜之謂.
- 모름지기 敬을 본령으로 삼아야 한다. 함양공부가 철저해졌을 때, '敬以直内'하자마자 '義以方外'하게 된다. 義에 敬이 있고 敬에 義가 있으니, 마치 '仁에 머물면 곧 義를 말미암게 되고, 義를 말미암으면 곧 仁에 머물게 된다'는 것과 같다. 敬이라는 것은 여기서 지켜서 잃어버리지 않음을 말하고, 義라는 것은 저기에서 시행하여 합당한 것을 말한다.
- ○西山眞氏曰: "武王之始踐阼也, 訪丹書於太公, 可謂急於聞道者矣. 而太公望所告, 不出敬與義之一言. 蓋敬則萬善俱立, 怠則萬善俱廢; 義則理為之主, 欲則物為之主. 上古聖人巳致謹於此矣. 武王聞之, 若湯之戒懼而銘之器物以自警焉. 蓋恐斯須不存, 而怠與欲得乘其隙也."
- 서산 진씨가 말했다: "무왕께서 막 즉위하셨을 때 丹書를 태공에게 자문하셨으니, '道를 듣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고 말할 만하다. 태공망이 고한 것은 敬과 義 한 마디를 벗어나지 않았다. 대개 공경하면 뭇 善이 함께 확립되고, 태만하면 뭇 善이 함께 사라지며, 의로우면 이치가 주인이 되지만, 욕망을 추구하면 외물이 주인이 된다. 옛적 성인들께서는 이점에 대해 매우 지극히 조심하셨다. 무왕께서 이를 들으시고는, 마치 탕왕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기물에 銘을 새겨 스스로 경계한 것과 같이 하셨다. 아마도 잠시라도 [敬과 義를] 보존하지 않아 怠와 欲이 그 틈을 탈 것을 두려워 하셨던 것이다."
- ○新安陳氏曰: "敬義對言, 其理甚精. 孔子於坤<文言>曰: '敬以直内, 義以方外.'[180] 實自此發."
- 신안 진씨가 말했다: "敬과 義를 대비해 말한 그 논리가 더욱 정밀하다. 공자께서 곤괘 <文言>에서 '敬以直内, 義以方外'라고 말씀하신 것은 실로 여기(무왕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退而於其几席、觴豆、刀劒、户牖, 莫不銘焉, 蓋聞湯之風而興起者. 今其遺語尚幸頗見形甸反於禮書, 願治去聲之君, 志學之士, 皆不可以莫之考也."
[무왕께서 이를 들으시고는] 물러나 궤석·식기·칼·창문에 이 경계를 새기지 않음이 없으셨으니, 아마도 탕왕의 풍모를 듣고 흥기하신 것이다. 오늘날 그 남겨진 말이 여전히 다행히도 예서에 상당히 드러나 있으니,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군주와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모두 [이 경계를] 상고하지 않아선 안 된다.
- 張氏存中曰: "<大戴禮> <武王踐阼>篇, '武王踐阼三日, 召師尚父而問焉曰: 『黄帝顓帝之道, 可得而見與?』 曰: 『在丹書, 王欲聞之, 則齊矣.』 王齊三日, 師尚父奉書而入, 道書之言曰: 『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 凡事不强則枉, 弗敬則不正, 枉者滅廢, 敬者萬世.』 王聞書之言, 惕若恐懼, 而為戒書於席四端為銘焉. 銘曰: 『安樂必敬』 『無行可悔』 『一反一側, 亦不可不志[181] 『殷[182]監不逺, 視爾[183]所代』, 鑑銘曰: 『見爾前, 慮爾後』, 盤銘曰: 『與其溺於人也, 寧溺於淵. 溺於淵, 猶可游也; 溺於人, 不可捄也.』, 楹銘曰: 『毋曰胡殘, 其禍將然; 毋曰胡害, 其禍將大; 毋曰胡傷, 其禍將長』, 牖銘曰: 『隨天之時, 以地之財, 敬祀皇天, 敬以先時』, 劒銘曰: 『帶之以為服, 動必行徳行. 德則興, 倍徳則崩』.'"倍與背同. 銘凡十有四, 今摘其辭義之易知者于此.
- 장존중이 말했다: "<대대례기>의 <武王踐阼>에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무왕이 즉위한 지 3일 후에 사상보를 불러서 물었다: 「황제·전욱의 도를 볼 수 있겠는가?」 사상보가 대답했다: 「丹書에 있으니, 듣고자 하신다면 재계하십시오.」 왕이 3일간 재계하자, 사상보가 丹書를 들고 들어와 丹書의 내용을 낭송했다: 「공경함이 태만함을 이기는 사람은 길하고, 태만함이 공경함을 이기는 사람은 망한다. 의로움이 욕망을 이기는 사람은 순조롭고, 욕망이 의로움을 이기는 사람은 흉하다. 모든 일에 강하지 않으면 굽어지고 공경하지 않으면 바르지 않으니, 굽어진 것은 없어지고 공경한 것은 만세를 갈 것이다.」 왕이 丹書의 내용을 듣고 두려워하고 경계하여, 경계하는 글을 지어 자리 네 귀퉁이에 [다음과 같이] 새겼다: 「편안하고 즐거울 때 반드시 조심하라」·「후회할 만한 짓은 하지 마라」·「한 번 돌아누울 때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은나라라는 거울이 멀지 않으니, 저들이 [하나라를] 대신한 것을 보라.」 거울에는 [다음과 같이] 새겼다: 「네 앞을 보고 네 뒤를 생각해라.」 세숫대야에는 [다음과 같이] 새겼다: 「사람에게 빠질지언정 차라리 연못에 빠져라. 연못에 빠지면 그래도 헤엄칠 수 있지만, 사람에게 빠지면 구할 수 없다.」 기둥에는 [다음과 같이] 새겼다: 「무슨 해가 있겠냐고 말하지 말라. 그 화가 타오를 것이다. 뭐가 걱정스럽냐고 말하지 말라, 그 화가 클 것이다. 뭐가 문제냐고 말하지 말라, 그 화가 커질 것이다.」 창문에는 [다음과 같이] 새겼다: 「하늘의 때를 따르고 땅의 재화를 이용하라. 하늘을 공경히 모시고, 선대를 공경하라.」 검에는 [다음과 같이] 새겼다: 「칼을 차 복식을 갖추되, 움직일 때 반드시 덕을 행하라. 덕을 행하면 흥기하겠지만, 덕을 등지면 망할 것이다.」 "銘이 총 14수인데, 그 가운데 내용이 알기 쉬운 것만 여기에 뽑았다.
曰: "此言'新民', 其引此, 何也?"
물었다: "여기(전2장)에서는 '新民'을 말하는데, 이것(탕왕의 자기 수양 내용)을 인용한 것은 어째서인가?"
曰: "此自其本而言之, 蓋以是爲自新之至而新民之端也."
대답했다: "이것은 근본으로부터 말한 것이다. 대개 이것을 自新의 완성이자 新民의 시작으로 삼은 것이다."
○曰: "<康誥>之言'作新民', 何也?"
물었다: "<康誥>에 말에서 '作新民'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曰: "武王之封康叔也, 以商之餘民, 染紂汚俗而失其本心也. 故作<康誥>之書而告之以此, 欲其有以鼓舞而作興之, 使之振奮踴躍, 以去上聲其惡而遷於善, 舍上聲其舊而進乎新也. 然此豈聲色[184]號令之所及哉? 亦自新而已矣.
대답했다: "무왕께서 강숙을 봉하셨을 때, 상나라의 유민들이 紂의 오염된 습속에 물들어 그들의 본심을 잃었다. 그러므로 <강고>의 글을 지어 이를 강숙에게 말해줘, 강숙이 백성들을 고무시키고 흥기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떨쳐 일어나 악한 것을 제거하고 선한 것으로 옮겨가며,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큰 소리나 엄한 낯빛·호령이 미칠 바겠는가? 단지 자신을 새롭게 만들 뿐이다."
曰: "孔氏<小序>以<康誥>爲成王周公之書, 而子以武王言之, 何也?"
물었다. "공안국의 <小序>는 <康誥>를 성왕과 주공의 책이라고 여겼는데,[185] 그대가 '무왕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曰: "此五峯胡氏之說也.胡氏, 名宏, 字仁仲, 建安人, 文定公安國之子也. 其說見<皇王大紀> 蓋嘗因而考之, 其曰朕弟寡兄云者, 皆爲武王之自言, 乃得事理之實; 而其他証亦多. <小序>之言不足深信, 於此可見. 然非此書大義所關, 故不暇於致詳. 當别爲去聲讀書者言之耳."
대답했다: "이것은 호오봉의 설이다.호씨의 이름이 宏이고 字는 仁仲이며 건안 사람이니, 문정공 호안국의 아들이다. 그의 설은 <皇王大紀>에 보인다.[186] 대개 일찍이 호오봉의 설에 따라 상고해보니, [<康誥>에서] 朕·弟·寡兄라고 말하는 것을 모두 무왕이 스스로 일컬은 것으로 보아야 맥락에 맞고, 그 다른 증거 또한 많다. <小序>의 말을 깊이 신뢰하기 부족함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小序>의 신뢰성 여부는] 이 책의 대의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자세히 따질 겨를이 없다. 응당 추가적으로 <서경>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말했을 뿐이다."
○曰: "<詩>之言'周雖舊邦, 其命維新', 何也?"
물었다: "<詩>에서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지만, [문왕에 이르러] 천명이 새로워졌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曰: "言周之有邦, 自后稷以來千有餘年, 至於文王, 聖徳日新而民亦丕變[187].
대답했다: "주나라가 생기고 후직으로부터 천여 년이 지나 문왕에 이르러, 성인의 덕이 날로 새로워지고 백성들 또한 크게 변했음을 말한 것이다."
- 新安陳氏曰: "此乃推本言之, <詩>無日新、丕變意. 蓋承上文'日新', 作新說來."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이것은 바로 [주자께서] 근본을 미루어 말씀하신 것이니, <시>에는 '날로 새로워졌다'거나 '크게 변했다'는 의미는 없다. 아마도 앞 글의 '日新'을 이어 새로운 설명을 만드신 것이다."
故天命之以有天下. 是其邦雖舊而命則新也. 蓋民之視效在君, 而天之視聽在民. 君徳既新, 則民徳必新; 民徳既新, 則天命之新, 亦不旋日[188]矣."
그러므로 하늘이 문왕께 명을 내려 천하를 소유하게 하였다. 이것이 '나라는 비록 오래되었지만 천명은 새롭다'는 것이다. 대개 백성들의 본보기는 군주에게 달려있고,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백성에게 달려있다. 군주의 덕이 새로워진 이상 백성의 덕은 반드시 새로울 것이고, 백성의 덕이 새로워진 이상 천명이 새로워짐 또한 하루가 걸리지 않을 것이다.
- 問: "'天之視聽在民', 與'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189], 若有不同, 如何?" 朱子曰: "天豈曾有耳目以視聽? 只是自民之視聽, 便是天之視聽. 如帝命文王, 豈天諄諄然命之? 只是文王要恁地, 便是理合恁地, 便是帝命之也." 又曰: "若一件事, 民人皆以為是, 便是天以為是; 若民人皆歸往之, 便是天命也."
- 물었다: "'天之視聽在民'과 '하늘은 내 백성이 보는 것을 통해 보고, 하늘은 내 백성이 듣는 것을 통해 듣는다'는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에 언제 일찍이 귀와 눈이 있어서 보고 들었겠는가? 다만 백성들의 보고 들음을 통하는 것이 바로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이다. 상제께서 문왕에게 명한 것이 어찌 하늘이 꼬치꼬치 명령한 것이겠는가? 다만 문왕께서 이렇게 하려고 하신 것이 이치상 마땅히 이와 같아야 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상제가 명한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어떤 일을 백성이 모두 옳게 여기는 것은 곧 하늘도 옳게 여기는 것이고, 백성들이 모두 귀의해 오는 것은 하늘이 명한 것이다."
○曰: "所謂'君子無所不用其極'者, 何也?"
물었다. "이른바 '군자는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曰: "此結上文<詩><書>之意也. 蓋盤銘言自新也, <康誥>言新民也, 文王之詩自新、新民之極也.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 極, 即至善之云也. 用其極者, 求其止於是而巳矣."
대답했다: "이 말은 윗 글의 <詩>와 <書>의 뜻을 마무리한 것이다. 대개 盤銘은 '스스로를 새롭게 함'을 말한 것이고 <康誥>는 '백성을 새롭게 함'을 말한 것이며, 문왕의 시는 '스스로 새롭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함'의 지극함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 것이니, '極'이란 곧 至善을 말한다. '지극하게 한다'는 것은 여기(自新과 新民)에 머물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 朱子曰: "觀上文三引<詩><書>而此以無所二字總而結之, 則於自新、新民皆欲用其極, 可知矣."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앞 글에서 <詩>와 <書>를 세 번 인용하고 '無所' 두 글자로 총결한 것을 보면, '스스로 새롭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함'을 모두 지극하게 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傳三章
詩云:「邦畿千里,惟民所止。」
<시>에서는 "왕도 천 리, 백성들이 살 곳이로다"라고 하였다.
- 詩商頌玄鳥之篇。邦畿,王者之都也。止,居也,言物各有所當止之處也。
- <시> <상송> <현조>편이다. '邦畿'은 천자의 도읍이다. '止'는 '居'이니, 만물이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詩云:「緡蠻黃鳥,止于丘隅。」子曰:「於止,知其所止,可以人而不如鳥乎!」緡,詩作綿。
[또] <시>에서는 "緡蠻히 우는 황조, 숲속에 머무네"라고 했는데, 공자께서는 "살 곳에 대해 [저 황조는] 살 곳을 [제대로] 아니, 사람이 새만 못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셨다.'緡'을 <시>에서는 '綿'이라고 썼다.
- 詩小雅綿蠻之篇。緡蠻,鳥聲。丘隅,岑鋤林反蔚紆弗反之處。岑蔚二字本古註子曰以下,孔子說詩之辭。言人當知所當止之處也。
- <시> <소아> <緡蠻>편이다. '緡蠻'은 새소리이다. '丘隅'는 깊고 울창한 숲이다.'岑蔚' 두 자는 옛 주석에 근거한 것이다. '子曰' 이하는 공자께서 시를 해설하신 말이니, 사람이라면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을 알아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詩云:「穆穆文王,於緝熙敬止!」為人君,止於仁;為人臣,止於敬;為人子,止於孝;為人父,止於慈;與國人交,止於信。於緝之於,音烏。
<시>에서 "穆穆한 문왕이시여! 아! 끊임없이 밝히셔서 敬하며 [편히] 머무시는구나!"라고 하였으니, [문왕께서는] 임금이 되서는 '어짊'(仁)에 머무셨고, 신하가 되서는 '공경'(敬)에 머무셨으며, 자식이 되서는는 '효성스러움'(孝)에 머무셨고, 부모가 되서는 '자애로움'(慈)에 머무셨으며, 國人과 교제할 때는 '미더움'(信)에 머무셨다.
- 詩文王之篇。穆穆,深遠之意。以徳容言於,歎美辭。緝,繼續也。熙,光明也。緝, 不容已之誠也; 熙, 不容掩之明也.敬止,言其無不敬而安所止也。
- <시> <문왕>편이다. '穆穆'은 [문왕의 덕이] 심원하다는 뜻이다.덕에 대해 말한 것이다. '오'(於)는 탄미하는 말이다. '緝'은 계속함이다. '熙'는 빛남이다.'緝'은 멈출 수 없는 성실함을 [말하고], '熙'는 가릴 수 없는 밝음을 [말한다]. '敬止'는 敬하지 않음이 없어서 머무는 곳을 편히 여긴다는 것이다.
- 朱子曰: "緝熙是工夫; 敬止是功效."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緝熙'는 공부이고, '敬止'는 공효이다."
- 引此而言聖人之止,無非至善。五者乃其目之大者也。學者於此,究其精微之蘊委粉於問二反,而又推類以盡其餘,則於天下之事,皆有以知其所止而無疑矣。
- 이를 인용해 성인은 至善에 머물지 않음이 없음을 말하였다. 다섯 가지는 바로 그(至善에 머묾) 항목 가운데 큰 것이다. 배우는 자가 이에 대해 정미한 것을 궁구하고 또 유추해 나머지를 모두 아우른다면, 천하의 일에 대해 모두 그것이 머물 곳을 알아 의심함이 없을 것이다.
- 朱子曰: "'為人君止於仁', 仁亦有㡬多般, 須隨處看. 這一事合當如此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是仁. '為人臣止於敬', 敬亦有多少般, 不可止道擎跽曲拳[190]是敬. 如'陳善閉邪', 納君無過, 皆是敬. 若止執一, 便偏了, 安得謂之'至善'?"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為人君止於仁'의 '仁'에도 여러 [뜻이] 있으니, 상황에 따라 살펴야 한다. 이 일에서 마땅히 이렇게 해야하는 것도 仁이고, 저 일에서 마땅히 저렇게 해야하는 것도 仁이다. '為人臣止於敬'의 '敬'에도 여러 [뜻이] 있으니, '홀을 잡거나, 무릎 꿇고 절하거나, 몸을 굽히는 것'만이 敬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선한 것을 아뢰고 삿된 것을 막거나'[191] 임금을 허물 없는 경지에 들이는 것 모두 敬이다. 만일 그저 하나에만 집착하면 치우치게 되니, 어찌 '至善'이라 할 수 있겠는가?"
詩云:「瞻彼淇澳,菉竹猗猗。有斐君子,如切如磋,如琢如磨。瑟兮僩兮,赫兮喧兮。有斐君子,終不可諠兮!」如切如磋者,道學也;如琢如磨者,自脩也;瑟兮僩兮者,恂慄也;赫兮喧兮者,威儀也;有斐君子,終不可諠兮者,道盛德至善,民之不能忘也。澳,於六反。菉,詩作綠。猗,協韻音阿。僩,下版反。喧,詩作咺,諠,詩作諼;並況晚反。恂,鄭氏讀作峻。
<시>에서 "저 기수(淇水) 모퉁이를 보라, 푸른 대가 무성하구나. 문채나는 군자여, 자른 듯 간 듯 쪼은 듯 간 듯하구나. 엄밀하고 굳세며 빛나고 성대하니, 문채나는 군자여, 끝내 잊을 수 없도다!"라고 하니, '如切如磋'라는 것은 학문을 말하고, '如琢如磨'는 스스로 수양함이며, '瑟兮僩兮'는 두려워 하는 듯한 [모습]이고, '赫兮喧兮'는 [겉으로 드러난] 위의이다. '有斐君子,終不可諠兮'는 [그의] 盛德과 至善을 백성들이 잊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 詩衛風淇澳之篇。淇,水名。澳,隈烏回反也。猗猗,美盛貌。興去聲也。斐,文貌。切以刀鋸居御反,琢以椎直追反鑿,皆裁物使成形質[192]也。磋以鑢音慮鐋他浪反,磨以沙石,皆治物使其滑澤也。治骨角者,既切而復扶又反下同磋之。治玉石者,既琢而復磨之。皆言其治之有緒,而益致其精也。切與琢是治之有端緒; 磋與磨是益致其精細.瑟,嚴密之貌。僩,武毅之貌。嚴密, 不麤疏也; 武毅, 不怠弛也.赫喧,宣著盛大之貌。諠,忘也。道,言也。學,謂講習討論之事,自脩者,省星上聲察克治之功。恂慄,戰懼也。戰懼之意, 嚴於中.威,可畏也。儀,可象也。引詩而釋之,以明此明字謂發明明明德者之止於至善。道學、自脩,言其所以得之之由。恂慄、威儀,言其德容表裏之盛。恂慄, 在裏徳也; 威儀, 見於表容也卒乃指其實謂盛徳至善而歎美之也。
- <시> <위풍> <기욱> 편이다. '淇'는 강 이름이다. '澳'는 모퉁이이다. '猗猗'는 아름답고 성대한 모양이다. [이 시는] 興이다.[193] '斐'는 문채나는 모습이다. '자르는 것'(切)은 칼·톱을 쓰고, '쪼는 것'(琢)은 망치·끌을 쓰니, 모두 사물을 잘라 모양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가는 것'(磋)은 줄·대패를 쓰고, '연마하는 것'(磨)은 모래·돌을 쓰니, 모두 사물을 다듬어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骨角을 다듬는 자는 자르고 나서(切)갈고(磋), 玉石을 다듬는 자는 쪼고 나서(琢) 연마하니(磨), 모두 '[사물을] 다듬을 때 시작점이 있고 [그러고나서] 그것의 정미함을 더욱 지극히 함'을 말한 것이다.'切'과'琢'은 '다듬을 때 시작점이 있는 것'이고, '磋'와 '磨'는 '그것의 정미함을 더욱 지극히 하는 것'이다. '瑟'은 엄밀한 모양이고, '僩'은 굳센 모양이다.'엄밀함'은 거칠지 읺다는 것이고, '굳셈'은 태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赫'·'喧'은 드러나고 성대한 모양이다. '諠'은 '잊는다'는 것이다. '道'는 '말하다'이고, '學'은 강습하고 토론하는 일을 말한다. '自脩'라는 것은 성찰하고 다스리는 공부이다. '恂慄'은 두려워 하는 것이다. '두려워한다'는 건 마음을 엄숙하게 한다는 것이다. '위엄'(威)은 두려워할 만한 것이고, '의장'(儀)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시>를 인용하고 이를 풀이해 '[자신의] 명덕을 밝힌 자가 至善에 머묾'을 밝힌 것이다. '道學'과 '自脩'는 至善을 얻게 된 이유를 말한 것이고, '恂慄'과 '威儀'는 그의 德과 容·안과 밖의 성대함을 말한 것이다.'恂慄'은 내면의 덕에 있고, '威儀'은 겉모습으로 드러난다. 마지막에 그의 실질'盛徳至善'을 말한다.을 가리키며 탄미하였다.
- 朱子曰: "切而不磋, 未到至善處; 琢而不磨, 亦未到至善處. '瑟兮僴兮', 則誠敬存於中矣. 未至於'赫兮喧兮', 威儀輝光著見於外, 亦未為至善. 至於'民之不能忘', 若非十分至善, 何以使民久而不能忘?"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르기만 하고 갈지 않으면 至善한 경지에 이를 수 없고, 쪼기만 하고 연마하지 않아도 至善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 '瑟兮僴兮'는 誠敬이 내면에 보존된 것이지만, '赫兮喧兮'에 도달하지 못하면 위의와 빛이 밖으로 드러나더라도 至善이 될 수 없다. '백성이 잊지 못했다'의 경우, 십분 至善하지 않으면, 어떻게 백성들로 하여금 오래토록 잊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詩云:「於戲前王不忘!」君子賢其賢而親其親,小人樂其樂而利其利,此以沒世不忘也。於戲,音嗚呼。樂,音洛。
<시>에서 "아! 예전 임금을 잊을 수 없구나!"라고 하니, 군자는 예전 임금의 어진 점을 어질다고 [높게] 평가하고 예전 임금이 가까이 했던 것을 가까이 하며, 소인은 예전 임금이 즐겁게 해줬던 것을 즐겁게 여기고 예전 임금이 이롭게 해줬던 것을 이롭게 여긴다. 이 때문에 [예전 임금께서] 돌아가셨는데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 詩周頌烈文之篇。於戲,歎辭。前王,謂文、武也。君子,謂其後賢後王。小人,謂後民也。此言前王所以新民者,止於至善,能使天下後世無一物不得其所,所以既沒世而人思慕之,愈久而不忘也。此兩節詠歎[194]淫泆[195],其味深長,當熟玩之。
- <시> <주송> <열문>편이다. '於戲'는 찬탄하는 말이다. '前王'은 문왕·무왕이다. '君子'는 후대의 현인·임금을 말하고, '小人'은 후대의 백성이다. 이 구절은 '예전 임금이 백성을 새롭게 한 것이 至善에 머물러 천하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자도 제 자리를 얻지 못함이 없게 할 수 있었으므로, 이미 돌아가셨는데도 사람들이 사모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잊지 못했음'을 말한다. 이 두 구절은 찬탄의 [여운이] 넘쳐 의미가 깊고 오래가니, 충분히 완미해보아야 한다.
- 朱子曰: "沒世而人不能忘, 如堯舜文武之徳萬世尊仰之, 豈不是'賢其賢'? 如周后稷之徳, 子孫宗之, 以為先祖之所自出, 豈不是'親其親'?"[196]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돌아가셨는데도 사람들이 잊지 못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요·순·문·무의 덕을 만세토록 추앙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그의 어짊을 어질게 여기는 것'(賢其賢)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주나라 [시조인] 후직의 덕을 자손들이 종지로 삼아 '선조가 말미암아 나온 바'로 여기니, 어찌 '그가 가까이 했던 것을 가까이 함'이 아니겠는가?"
- 右傳之三章。釋止於至善。
- 이상은 전3장이다. '止於至善'을 해석했다.
- 此章內自引淇澳詩以下,舊本誤在誠意章下。
- 이 장 안에서 <淇澳> 시를 인용한 것 아래로, 옛 판본에서는 성의장 아래에 잘못 위치해 있다.
『혹문』 전3장
或問: "此引<玄鳥>之詩, 何也?"
혹자가 물었다: "여기에서 <현조> 시를 인용한 것은 어째서인가?"
曰: "此以民之止於邦畿而明物之各有所止也."
답했다: "이는 백성들이 수도(邦畿)에 머물렀음을 통해 사물에는 각각 머물 곳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曰: "引<緜蠻>之詩而系以孔子之言, 孔子何以有是言也?"
물었다: "<緜蠻> 시를 인용하고 공자의 말을 덧붙였는데, 공자께서는 어째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인가?"
曰: "此夫子說詩之辭也. 蓋曰: '鳥於其欲止之時, 猶知其當止之處, 豈可人爲萬物之靈, 而反不如鳥之能知所止而止之乎?' 其所以發明人當知止之義, 亦深切矣."
대답했다: "이는 공자께서 시를 해설하신 말이다. 아마도 ‘새조차 머무르고자 할 때에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을 아는데, 어찌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되어서 도리어 새가 머물러야 할 곳을 알아 머무르는 것만 못해서야 되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머물 곳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밝히신 것이 또한 매우 간절하다."
○曰: "引<文王>之詩而繼以君臣父子與國人交之所止, 何也?"
물었다: "<문왕> 시를 인용하고 군신·부자·백성들과의 교제에서 머물러야 할 곳을 덧붙인 것은 어째서인가?"
曰: "此因聖人之止, 以明至善之所在也. 蓋天生烝民, 有物有則. 是以萬物庶事莫不各有當止之所. 但所居之位不同, 則所止之善不一. 故爲人君, 則其所當止者在於仁; 爲人臣, 則其所當止者在於敬; 爲人子, 則其所當止者在於孝; 爲人父, 則其所當止者在於慈; 與國人交, 則其所當止者在於信, 是皆天理人倫之極致, 發於人心之不容巳者. 而文王之所以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者, 亦不能加毫末於是焉. 但衆人類[197]爲氣稟物欲之所昏. 故不能常敬而失其所止. 唯聖人之心表裏洞然, 無有一毫之蔽. 故連續光明, 自無不敬, 而所止者莫非至善, 不待知所止而後得所止也.
대답했다: "이는 성인이 머문 것에 기인해 지극한 선(至善)이 있는 곳을 밝힌 것이다. 대개 하늘이 백성들을 내림에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198] 그러므로 모든 사물에 각각 머물러야 할 곳이 없는 경우는 없다. 다만 머무는 지위가 같지 않기 때문에, 머무는 선이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군주가 되면 그가 머물러야 하는 바는 仁에 있고, 신하가 되면 그가 머물러야 하는 바가 敬에 있으며, 자식이 되면 그가 머물러야 하는 바가 孝에 있고, 부모가 되면 그가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바가 자애(慈)에 있으며, 나라의 백성들과 교제하게 되면 그가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바가 신뢰(信)에 있다. 이는 모두 천리·인륜의 극치이고 인간의 마음 상 차마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문왕께서 천하의 본보기가 되셔서 후세에 전해질 만했던 점 역시 여기에 터럭만한 것도 더할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은 대체로 기품과 물욕에 의해서 어두워졌기 때문에, 항상 敬할 수 없고 머물 곳을 잃어버렸다. 오직 성인의 마음만 안팎이 훤히 비쳐 한 터럭의 가림도 없기 때문에, [명덕의] 빛을 계속 이어서 스스로 敬하지 않음이 없고, 머무는 바 가운데 지극한 선이 아님이 없어서, 머물 곳을 안 이후에 머물 곳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
- 新安陳氏曰: "學者必先知所止, 而後方得所止; 聖人安於所止, 則不待先知而後得也."
- 신안 진씨가 말했다: "배우는 자는 반드시 먼저 머물 곳을 안 이후에야 비로소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 성인은 머무는 곳을 편히 여기니, 먼저 안 이후에 얻을 필요가 없다."
故<傳>引此詩而歷陳所止之實, 使天下後世得以取法焉. 學者於此誠有以見其發於本心之不容已者而緝熈之, 使其連續光明, 無少間斷, 則其敬止之功, 是亦文王而已矣. <詩>所謂'上天之載, 無聲無臭, 儀刑文王, 萬邦作孚', 正此意也."
그러므로 傳에서 이 시를 인용하여 머물 곳에 대한 내용을 하나하나 드러내, 천하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본보기로 삼을 수 있게 하였다. 배우는 자들이 여기에서 진실로 그칠 수 없는 본심에서 드러난 것을 보고 계속 밝히고, 그 끊임없이 계속 빛나는 것으로 하여금 잠시라도 끊어짐이 없게 할 수 있다면, 그 敬止의 공효가 또한 문왕과 [다름 없을 것이다]. <시>의 이른바 ‘하늘의 일에는 소리도 냄새도 없지만, 문왕을 본받으면 온 나라 사람들이 진작해 믿을 것이다’[199]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뜻이다."
曰: "子之說<詩>, 既以敬止之止爲語助之辭, 而於此書又以爲所止之義, 何也?"
물었다: "그대가 <詩>를 설명하면서 ‘敬止’의 ‘止’를 어조사로 여겼는데,[200] 이 글에서 도리어 '所止'라는 뜻으로 새긴 것은 어째서인가?"
曰: "古人引<詩>斷音短章, 或姑借其辭以明已意, 未必皆取本文之義也.
대답했다: "옛 사람들은 <시>를 인용하면서 [일부] 장을 잘랐는데, 간혹 잠시 이 부분의 글을 빌려서 자신의 뜻을 밝혔으므로, 반드시 모두 본문의 뜻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曰: "五者之目, 詞約而義該矣. 子之說乃復扶又反有所謂'究其精微之藴而推類以通之'者, 何其言之衍而不切耶?"
물었다: "다섯 가지 항목은 말은 간략한데 의미는 충분하다. 그대의 설에 도리어 다시 이른바 ‘정미한 것을 궁구하고 유추해 통하게 한다’[201]고 말한 것은, 어째서 그 말이 장황하고 절실하지 않은가?"
曰: "舉其徳之要而總名之, 則一言足矣一言謂一字, 如仁字、敬字之類.; 論其所以爲是一言者, 則其始終本末, 豈一言之所能盡哉? 得其名而不得其所以名, 則仁或流於姑息[202], 敬或墮於阿諛, 孝或陷父, 而慈或敗子, 且其爲信亦未必不爲尾生、白公之爲也."
대답했다: "덕의 요체를 들어서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한 글자로 충분하겠지만, 이 한 글자가 되는 까닭을 논한다면 그 과정(始終本末)을 어찌 한 글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름만 얻고 이름이 되는 까닭을 얻지 못한다면, 仁은 혹 '원칙 없는 관용'이 될 것이고, 敬은 혹 아첨에 떨어질 것이며, 孝는 혹 부모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고, 자애로움은 혹 자식을 망칠 것이며, 또 미더움 역시 반드시 尾生이나 白公이 행한 것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 <莊子>尾生與女子期於梁下, 女子不來, 水至不去, 抱梁柱而死. 梁, 橋也.
- <장자>에 따르면, 미생이 여인과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여인이 오지 않았다. 미생은 물이 차올라도 떠나지 않고 다리 기둥을 껴안고 있다가 죽었다.[203] '梁'은 다리이다.
- ○<左傳>哀公十六年, 鄭人殺子木楚平王太子建也, 因遇讒出奔而至鄭., 其子曰勝在吳. 子西欲召之楚令尹子西, 曰: "吾聞勝也, 信而勇, 不爲不利." 葉公曰:葉音攝 :"周仁之謂信, 率義之謂勇. 吾聞勝也好復言言之所許, 必欲復行, 不顧道理.而求死士, 殆有私乎! 復言, 非信也; 期死, 非勇也, 子必悔之." 弗從, 使處吳竟音境爲白公白, 楚邑也. 邑宰僣稱公. 請伐鄭, 子西許之. 未起師, 晉人伐鄭, 楚救之, 勝怒曰: "鄭人在此, 讎不逺矣!" 勝自厲劒, 子期之子平見之曰: "王孫何自厲也?" 曰: "勝以直聞, 不告女音汝, 庸為直乎? 將以殺爾父." 平以告子西, 子西不悛. 吳人伐愼, 白公敗之. 請以戰備獻, 許之, 遂作亂, 殺子西子期于朝.
- <좌전> 애공 16년에, 정나라 사람이 子木초 평왕의 태자 建이니, 참소를 당해 달아났다가 정나라에 왔다.을 죽였는데, 그의 아들 勝이 오나라에 있었다. 子西초나라 영윤 자서이다.가 그를 부르고자 했다: "내가 듣기에 승은 신의와 용기가 있다고 하니, 불리한 일은 되지 않을 것이다." 섭공이 말했다: "인에 부합하는 것을 신의라 하고, 의로운 행동을 실천하는 것을 용기라고 합니다. 제가 듣기에, 승은 뱉은 말을 애써 이행하려 하고말로 허락한 것을 반드시 이행하고자 하여 도리를 살피지 않는다. 죽음을 무릅쓰는 용사가 되고자 하니, 아마도 개인적인 원한 때문일 것입니다! 뱉은 말을 애써 이행하려고 하는 것은 신의가 아니며, 죽기를 바라는 것은 용기가 아니니, 그대는 필시 후회할 것입니다." 자서는 이를 따르지 않고 승으로 하여금 오나라와의 국경에 있게 하고 白公으로 삼았다.白은 초나라 고을이다. 읍재를 公으로 참칭했다. 승이 정나라를 치자고 자서에게 청했는데, 자서가 허락했다. 아직 군대를 일으키기도 전에 진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했는데, 초나라가 정나라를 구원하니 승이 분노했다: "정나라 놈이 여기에 있었구나! 원수가 멀리 있지 않았구나!" 승이 스스로 칼을 갈고 있는데, 子期의 아들 平이 이를 보고 물었다: "왕손께서는 어째서 직접 칼을 갈고 계십니까?" 승이 대답했다: "나는 대쪽같기로 유명하니, 너에게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어찌 대쪽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장자 이 칼로 네 아비(자서와 자기는 친형제이므로 함께 죽이려고 한 것이다.)를 죽이려고 한다." 평이 이를 자서에게 고했는데, 자서는 깨닫지 못했다. 오나라가 초나라의 愼 땅을 공격했는데, 백공이 패퇴시켰다. 이에 백공이 전리품을 바치기를 청하니, 자서가 허락했는데, 백공이 마침내 난을 일으켜 조정에서 자서와 자기를 살해했다.
又况<傳>之所陳, 姑以見形甸反物各有止之凡例, 其於大倫之目, 猶且闕其二焉. 苟不推類以通之, 則亦何以盡天下之理哉?"
또 하물며 傳에서 말한 것은 다만 사물이 각각 그쳐야 할 일반적 예시를 보여주고 있고, 인륜의 항목에 대해서는 오히려 두 가지(부부와 장유)를 빠뜨렸다. 만약 '유추하여 통하게 하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천하의 이치를 다할 수 있겠는가?"
- 節齊蔡氏曰: "所謂'得其名而不得其所以名', 若細推之, 如為人君止於仁, 固同一仁也, 然仁亦何止一端? 生之育之, 固仁也; 刑之威之, 亦仁也. 若執著其仁之一端, 不能隨處止其仁之所止, 安得謂止於仁之至善? 為人臣止於敬, 固同一敬也, 然敬亦何止一端? 鞠躬盡瘁, 固敬也; 陳善閉邪, 亦敬也. 若執著其敬之一端, 不能隨處止其敬之所止, 安得謂止於敬之至善? 為人子止於孝, 固同一孝也, 然孝亦何止一端? 先意承志, 固孝也; 幾諫不違亦孝也. 若執著其孝之一端, 不能隨處止其孝之所止, 安得謂止於孝之至善? 以至為人父止於慈, 與國人交止於信, 皆當如此. 而又推類以及其餘, 則凡天下之事, 無大無小, 雖千條萬緒, 皆有以知其所當止, 而無不止於至善矣."
- 절재 채씨가 말했다: "이른바 '이름만 얻고 이름이 되는 까닭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자세히 생각해보자면, 예를 들어 임금된 자가 仁에 머무는 것은 진실로 동일한 仁이지만, 仁이 또 어찌 한 경우에 그치겠는가? 낳아주고 길러주는 것도 진실로 仁이고, 형벌을 내리고 두렵게 하는 것도 仁이다. 만일 仁의 한 경우에 집착해 상황에 따라 仁의 자리에 머물지 못한다면, 어찌 '仁의 지극히 선함'에 머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신하된 자가 敬에 머무는 것은 진실로 동일한 敬이지만, 敬이 또 어찌 한 경우에 그치겠는가? '공경해 마음을 다하는 것'(鞠躬盡瘁)도 진실로 敬이고 '선을 아뢰고 삿됨을 막는 것'(陳善閉邪)도 敬이다. 만일 敬의 한 경우에 집착해 상황에 따라 敬의 자리에 머물지 못한다면, 어찌 '敬의 지극히 선함'에 머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자식된 자가 孝에 머무는 것은 진실로 동일한 孝지만, 孝가 또 어찌 한 경우에 그치겠는가? '먼저 뜻을 받드는 것'(先意承志)[204]도 孝이고 '은미하게 간언하고 어기지 않는 것'(幾諫不違)[205]도 孝이다. 만일 孝의 한 경우에 집착해 상황해 따라 孝의 자리에 머물지 못한다면, 어찌 '孝의 지극히 선함'에 머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부모가 되어 慈에 머물고, 國人과 교제함에 信에 머무는 경우도 모두 이와 같아야 한다. 다시 유추하여 나머지에 미친다면, 모든 천하의 일이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비록 다양하더라도 모두 머물러야 할 바를 알 수 있으니, '지어지선'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曰: "復扶又反引<淇澳>之詩, 何也?"
물었다: "다시 <淇奧> 시를 인용한 것은 어째서인가?"
曰: "上言止於至善之理, 備矣. 然其所以求之之方, 與其得之之驗, 則未之及. 故又引此詩以發明之也. 夫音扶'如切如磋', 言其所以講於學者已精而益求其精也; '如琢如磨', 言其所以脩於身者已宻而益求其宻也. 此其所以擇善固執擇善即講學之事; 固執即脩身之事., 日就月將, 而得止於至善之由也.
대답했다: "앞서 '지어지선'의 이치를 말한 것이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지어지선')을 구하는 방도와 이것을 얻은 효험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시 이 시를 인용하여 밝히셨다. ‘如切如磋’는 그가 학문을 강구한 것이 이미 정밀하더라도 그 정밀함을 더욱 구해야 함을 말한 것이고, ‘如琢如磨’는 그가 몸을 수양한 것이 이미 엄밀하더라도 그 엄밀함을 더욱 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을 택해 굳게 붙잡아'[206]'擇善'은 강학의 일이고, ' 固執'은 수신의 일이다. 일취월장해서 '지극한 선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이다.
- 朱子曰: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脩也', 既學而猶慮其未至, 則復講習討論以求之, 猶治骨角者既切而復磋之. 切是切得一箇璞在這裏, 似亦可矣. 又磋之使至於滑澤, 這是治骨角者之至善也. 既脩而又慮其未至, 則又省察克治以終之, 猶治玉石者既琢而復磨之. 琢是琢得一箇璞在這裏, 似亦得矣. 又磨之使至於精細, 這是治玉石者之至善也. 取此以喻君子之止於至善. 既格物以求知所止矣, 又日用力以求得其所止焉."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如切如磋라는 것은 학문을 말하고, 如琢如磨라는 것은 스스로 수양함이다.' 학문하고도 오히려 학문이 지극하지 못함을 걱정해, 다시 강습·토론해 지극함을 구하는 것은 뼈·뿔을 다듬는 자가 자르고도 다시 가는 것과 같다. '자르는 것'(切)은 여기의 옥돌을 자르는 것이니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지만, 다시 갈아서 윤택이 나게 하는 것, 이것이 뼈·뿔을 다듬는 자의 지극히 선함이다. 수양하고도 다시 수양이 지극하지 못함을 염려해, 다시 성찰하고 [자신을] 다스려 [수양을] 끝마치는 것은 옥석을 다듬는 자가 쪼고 나서 다시 가는 것과 같다. '쪼는 것'(琢)은 여기의 옥돌을 쪼는 것이니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지만, 다시 갈아서 정밀하게 하는 것, 이것이 옥석을 다듬는 자의 지극히 선함이다. 이를 가지고 군자의 '지어지선'에 비유하였다. 격물해서 머물 곳을 알고자 하고서, 다시 날마다 힘써 그 머물 곳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 ○陳氏曰: "切是窮究事物之理, 逐件分析, 有倫有序; 磋是講究到純熟處, 道理瑩徹, 所以如切而又磋. 琢是克去物欲之私, 使無瑕纇. 磨是磨礲至那十分純粹處, 所以如琢而又磨."
- 진씨가 말했다: "'切'은 사물의 理를 궁구하는 것이니, 대상 마다 분석해 조리가 있게 된다. '磋'는 강구함이 무르익는 것이니, 도리에 훤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르고도 다시 가는 듯'하는 것이다. '琢'은 이기적인 물욕을 제거해 옥의 티를 없게 하는 것이고, '磨'는 갈아서 십분 정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쪼고도 다시 가는 듯'이 하는 것이다."
- ○學是知止於至善所在; 自脩是止於至善所在.
- '배움'(學)이란 至善의 소재에 머무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고, '수양'(自脩)이란 至善의 소재에 머무는 것이다.
- ○西山眞氏曰: "'如切如磋, 道學也', 主知而言; '如琢如磨, 自脩也', 主行而言, 言致知力行當並進也. 知到十分精處, 而行處有一分未宻, 亦未得為至善. 須是知極其至, 行亦極其至, 方謂之至善."
- 서산 진씨가 말했다: "'如切如蹉라는 것은 학문을 말한다'는 것은 앎(知)에 대해 말한 것이고, '如琢如磨라는 것은 스스로 수양함이다'는 실천(行)에 대해 말한 것이니, 致知와 力行을 병행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앎(知)이 100% 정밀한 경지에 도달했더라도 실천(行)에 10% 엄밀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至善이라고 할 수 없다. 모름지기 앎(知)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고 실천(行)도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것을 至善이라고 할 수 있다."
恂慄者, 嚴敬之存乎中也; 威儀者, 輝光之著乎外也. 此其所以睟雖萃反面盎背, 施於四體而爲止於至善之驗也. '盛徳至善, 民不能忘', 蓋人心之所同然, 聖人既先得之而其充盛宣著又如此. 是以民皆仰之而不能忘也. '盛徳', 以身之所得而言也; '至善', 以理之所極而言也. '切磋琢磨', 求其止於是而已矣."
준율(恂慄)이란 마음 안에 보존되어 있는 엄경함(嚴敬)이고, 위의(威儀)란 밖으로 드러나는 광채(輝光)이니, 이것이 바로 '얼굴에 윤택이 나고 몸에 넘쳐나 사체(四體)에 드러나는 것'[207]을 가지고 '지극한 선에 머무른다'는 증거로 삼은 것이다. '덕을 성대하게 하고 선을 지극하게 하여 백성들이 잊을 수 없는 것'은, 대개 [명덕은] 사람들의 동일한 마음이나, 성인은 이것(徳·善)을 먼저 얻은 데다가 충만하게 해 밝게 드러나게 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이를 우러러 잊지 못했던 것이다. '盛德'은 자신이 얻은 바를 가지고 말한 것이고, '至善'은 이치에 이른 정도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切磋琢磨'는 이러한 경지(盛徳至善)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 問: "'切磋琢磨'是學者事, 而'盛徳至善'乃指聖人言之, 何也?" 朱子曰: "後面說得來大, 非聖人不能. 此是連上文'文王於緝熈敬止'說. 然聖人也不是挿手[208]掉臂[209], 做到那處, 也須學始得. 如孔子所謂'徳之不脩,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此有甚緊要? 聖人却憂者, 何故? 惟其憂之, 所以為聖人. 所謂生而知之者, 便只是知得此而已. 故曰: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 물었다: "'切磋琢磨'는 배우는 자들의 일인데, '盛徳至善'은 도리어 성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어째서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뒤에서 말한 것이 성대하니, 성인이 아니면 해낼 수 없다. 이것은 앞의 '아! 끊임없이 밝히셔서 敬하며 [편히] 머무시는구나!'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라고 해도 팔짱 끼고 유유자적 하며 저 경지를 이루신 것이 아니니, 성인도 배워야 [저 경지를] 이룰 수 있다. 공자께서 '덕을 닦지 않고, 학문을 강습하지 않으며, 옳은 것을 듣고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불선한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내 걱정이다'[210]라고 말씀하신 것의 경우, 여기에 어떤 핵심이 있는가? 성인인데도 걱정한 것은 어째서인가? 걱정하기 때문에 성인이 되는 것이다! 이른바 '나면서부터 안다'(生而知之)는 건 단지 이것을 알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이 되고, 광인도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된다'[211]고 하는 것이다."
- ○'盛徳至善', 言聖人事蓋渾然一理, 不可得而分者. 但以人言則曰徳; 以理言則曰善, 又不爲無辨矣.
- '盛徳至善'은 성인의 일이 대개 혼연히 一理여서 분별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다만 사람을 가지고 말하면 '徳'이라 하고, 理를 가지고 말하면 '善'이라 하니, 다시 구분이 없을 수 없다.
曰: "'切磋琢磨', 何以爲學問、自脩之别後列反也?"
물었다: "'切磋琢磨'가 어떻게 학문과 수양(自脩)으로 구별되는가?"
曰: "骨角脉理可尋, 而切磋之功易去聲, 所謂'始條理'之事也; 玉石渾上聲全堅確克角反, 而琢磨之功難, 所謂'終條理'之事也."
대답했다: "뼈나 뿔은 결을 찾기 쉬우므로 자르고 가는 작업이 쉬우니, 이른바 '始條理'[212]의 일이다. 옥이나 돌은 결이 없고(渾全) 단단해 쪼고 다듬는 작업이 어려우니, 이른바 '終條理'의 일이다."
- 問: "'切磋是始條理, 琢磨是終條理', '終條理'較宻否?" 朱子曰: "始終條理都要宻. 講貫[213]而益講貫, 脩飭而益脩飭."
- 물었다: "'切磋는 始條理이고, 琢磨는 終條理이다'에서 '終條理'가 ['始條理'보다] 상대적으로 엄밀하겠죠?"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始條理와 終條理 모두 엄밀해야 한다. 강습하고 더욱 강습하고, 다듬고 더욱 다듬는 것이다."
- ○問: "琢磨後更有'瑟僴赫喧', 何故為'終條理'之事?" 曰: "那不是做工夫處, 是成就後氣象自如此."
- 물었다: "'琢磨' 뒤에 '瑟僴赫喧'가 더 있는데, 어째서 ['琢磨'가] '終條理'의 일이라고 하신 겁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그건('瑟僴赫喧')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성취된 이후의 기상이 절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 ○新安陳氏曰: "此與<論語>引<詩>之意異. 此以比講學之先後難易, 又證之以<孟子>之始終條理, 以見二者之當兼盡而不可偏廢也."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이것(『대학』에서 <기욱>을 인용한 것)은 <논어>에서 <시>를 인용한 뜻과 다르다.[214] 여기서는 [<기욱>을] 강학의 순서·난이도에 견주고 또 이를 <맹자>의 '始條理·終條理'를 가지고 증명하여, 두 가지('切磋'와 '琢磨' 즉 '學問'과 '自脩')를 함께 다해야지 하나를 폐해서는 안 됨을 드러내신 것이다.
○曰: "引<烈文>之詩而言'前王之沒世不忘', 何也?"
물었다: "<열문> 시를 인용해 '예전 임금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曰: "'賢其賢'者, '聞而知之', 仰其徳業之盛也; '親其親'者, '子孫保之', 思其覆敷救反育之恩也.
대답했다: "'賢其賢'이라는 것은 '전해들어서 알게 되었다'(聞而知之)[215]는 것이니, 예전 임금의 성대한 덕업을 추앙하는 것이다. '親其親'이라는 것은 '자손이 지켜나갔다'(子孫保之)[216]는 것이니, 예전 임금이 덮어주고 길러주던 은혜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 朱子曰: "如孔子仰文武之徳, 是'賢其賢'; 成康以後, 思其恩而保其基緒[217], 便是'親其親'."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공자께서 문왕·무왕의 덕을 흠앙하신 것이 '賢其賢'이고, 성왕·강왕 이후 문왕·무왕의 은혜를 그리워하며 그들의 기업을 지켜나간 것이 '親其親'이다."
'樂其樂'者, 舍哺蒲故反鼓腹而安其樂也; '利其利'者, 耕田鑿井而享其利也, 此皆先王盛徳至善之餘澤[218]. 故雖已沒世而人猶思之, 愈久而不能忘也. 上文之引<淇澳>, 以明明徳之得所止言之, 而發新民之端也; 此引<烈文>, 以新民之得所止言之, 而著明明徳之效也."
'樂其樂'이라는 것은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들기며'[219] 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고, '利其利'라는 것은 '밭 갈아 [먹고] 우물 파 [마시며]'[220] 그 이익을 누리는 것이니, 이것들은 모두 선왕의 성덕·至善 덕택이다. 그러므로 비록 [선왕이] 이미 세상을 떠났더라도 사람들이 오히려 그리워하고, 오래될수록 잊지 못하는 것이다. 앞에서 <기욱>을 인용한 것은 '明明徳'이 머물 바를 얻었음을 말하여 '新民'의 단서를 연 것이고, 여기서 <열조>를 인용한 것은 '新民'이 머물 바를 얻었음을 말하여 '明明徳'의 공효를 드러낸 것이다."
- 朱子曰: "<淇澳>言明明徳而可以新民, 以見明明徳之極功; <烈文>因言非獨一時民不能忘, 而後世之民亦不能忘, 以見新民之極功."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기욱>은 '明明徳하면 新民할 수 있음'을 말하여 '明明徳'의 지극한 공효를 드러내고, <열문>은 이에 근거하여 '한 때의 백성만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의 백성 또한 잊을 수 없음'을 말하여 '新民'의 지극한 공효를 드러낸다."
○曰: "<淇澳><烈文>二節, 鄭本元在誠意章後, 而程子置之卒章之中, 子獨何以知其不然而屬音蜀下同[221]之此也?"
물었다: "<기욱>·<열문> 두 구절의 경우, 鄭本에서는 원래 성의장 뒤에 있었고, 정자께서는 마지막 장 가운데 두셨는데, 그대만 어떻게 그것들이 옳지 않음을 알고서 여기에 귀속시켰는가?"
曰: "二家所繫, 文意不屬音燭[222], 故有不得而從者. 且以所謂'道盛徳至善, 沒世不忘'者推之, 則知其當屬乎此也."
대답했다: "두 사람이 이은 것은 의미상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따를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또 이른바 '道盛徳至善, 沒世不忘'을 가지고 추론해보면, <기욱>·<열문>이 마땅히 여기에 속함을 알 것이다."
傳四章
子曰:「聽訟,吾猶人也,必也使無訟乎!」無情者不得盡其辭。大畏民志,此謂知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송사를 처리하는 건 나도 남들처럼 하겠지만, 반드시 송사가 없게 할 것이다!"[223] 진실하지 못한 자가 거짓말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두렵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근본을 안다'고 말한다.
- 猶人,不異於人也。情,實也。引夫子之言,而言聖人能使無實之人不敢盡其虛誕之辭。蓋我之明德既明,自然有以畏服民之心志,故訟不待聽而自無也。觀於此言,可以知本末之先後矣。
- "猶人"은 남과 다르지 않음이다. 情은 實이다. 공자의 말씀을 인용해 성인이 진실하지 못한 자로 하여금 감히 거짓말을 다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음을 말한다. 대개 내 明德이 밝혀진 이상, 저절로 백성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복종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송사를 다스릴 필요도 없이 저절로 없어진다. 이 말을 살펴보면 근본적인 것과 말단적인 것의 선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朱子曰: "聖人說: '聽訟, 我也無異於人, 當使其無訟之可聽, 方得.' 聖人固不㑹錯斷了事. 只是他所以無訟者, 却不在於善聽訟, 在於意誠心正, 自然有以薰炙漸染, 大服民志. 故自無訟之可聽耳."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성인께서 '송사를 처리하는 건 나라도 남과 다를 것이 없지만, 처리할 만한 송사가 없게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인은 진실로 일을 잘못 처리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 송사가 없는 까닭은 송사를 잘 처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뜻이 진실하고 마음이 발라 자연히 물들여 크게 백성의 뜻을 복종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절로 다스릴 만한 송사가 없는 것이다."
- ○使民無訟, 在我之事, 本也. 此所以聽訟為末.
- 백성들로 하여금 송사가 없게 하는 건 내게 달린 일이니, 근본이다. 이것이 '송사를 다스리는 것이' 말단인 까닭이다.
- ○'無情者不得盡其辭', 便是說那無訟之由. 然惟先有以服其心志, 所以能使之不得盡其虚誕之辭.
- '진실하지 못한 자가 거짓말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은 저 송사가 없는 이유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먼저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다할 수 없게 할 수 있는 것이다.
- ○如成人有其兄死而不為衰者, 聞子臯將為成宰, 遂為衰. 子臯又何曾聽訟了致然? 只是自然感動人處耳.
- 예컨대, 成땅 사람 가운데 제 형이 죽었는데도 상복을 입지 않는 자가 있었는데, 자고가 장차 成의 읍재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상복을 입었다.[224] 자고가 또 언제 송사를 다스려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저 자연히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일 뿐이다.
- 右傳之四章。釋本末。
- 이상은 전4장이다. '本末'을 해석했다.
- 此章舊本誤在「止於信」下。
- 이 장은 옛 판본에 "止於信" 다음에 잘못 위치해 있다.
『혹문』 전4장
或問: "聽訟一章, 鄭本元在'止於信'之後, '正心脩身'之前; 程子又進而寘之經文之下、'此謂知之至也'之上, 子不之從而寘之於此, 何也?"
혹자가 물었다: "<聽訟>장(전4장)의 경우, 鄭本에서는 원래 '止於信' 뒤, '正心脩身' 이전에 있었고, 程子(이천)께서는 더 앞당겨 경문 다음, '此謂知之至也'의 앞에 두셨다. 그대가 [선유의 설을] 따르지 않고 여기에 둔 것은 어째서인가?"
曰: "以傳之結語考之, 則其爲釋本末之義可知矣; 以經之本文乘[225]之, 則其當屬音蜀於此可見矣. 二家之說有未安者, 故不得而從也."
답했다: "傳(전4장)의 마지막 말("此謂知本")로 상고하면 그것이 '本末'의 뜻을 해석한 것임을 알 수 있고, 經의 본문("物有本末")에 적용하면 그것이 여기에 속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두 학자의 설에 적절치 못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따를 수 없었다."
曰: "然則聽訟、無訟, 於明徳新民之義, 何所當也?"
물었다: "그렇다면 '聽訟·無訟'은 '明徳·新民'의 뜻 가운데 무엇에 해당하는가?"
曰: "聖人徳盛仁熟, 所以自明者皆極天下之至善. 故能大有以畏服其民之心志而使之不敢盡其無實之辭. 是以雖其聽訟無以異於衆人而自無訟之可聽. 蓋己徳既明而民徳自新, 則得其本之明效也. 或不能然而欲區區於分爭辯訟之間以求新民之效, 其亦末矣. 此傳者釋經之意也."
대답했다: "성인께서는 덕이 성대하고 仁이 순숙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밝히신 것이 모두 천하의 至善에 이르셨다. 그러므로 크게 백성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복종시켜 그들로 하여금 진실하지 못한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므로 비록 성인께서 송사를 다스리시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다스릴 만한 송사가 없게 되었다. 대개 자신의 덕이 이미 밝혀져 백성들의 덕이 저절로 새로워지는 것은 근본을 얻었다는 명백한 공효이다. 혹 그렇게 하지 못하고 爭訟의 [시비를] 가리는 데 얽매이면서 新民의 공효를 얻고자 한다면, 이 또한 말단이다. 이것은 傳을 쓴 자가 經을 해석한 뜻이다."
- 陳氏曰: "聽訟, 末也; 明徳, 本也. 不能明己之徳而專以智能决訟者, 抑[226]末矣."
- 진씨가 말했다: "'聽訟'은 말단이고 '明徳'은 근본이다. 자신의 덕을 밝히지 못하고 오로지 지혜로 송사를 잘 판결하는 것은 도리어 말단이다."
曰: "然則其不論夫終始者, 何也?"
물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終始'를 논하지 않은 것("事有終始")은 어째서인가?"
曰: "古人釋經, 取其大略, 未必如是之屑屑也. 且此章之下有闕文焉, 又安知其非本有而并失之也邪?"
대답했다: "옛 분들이 경전을 해석할 때, 대략만 취할 뿐 반드시 이처럼 하나하나 하신 것은 아니었다. 또 이 장 아래에 빠진 글이 있으니, ['終始'를 논한 것이] 본래는 있었으나 [다음 글과] 함께 망실된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傳五章
(此謂知本,)
- 程子曰:「衍文也。」
-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군더더기 글이다."[227]
此謂知之至也。
이것을 '앎의 지극함'이라고 한다.
- 此句之上別有闕文,此特其結語耳。
- 이 구절 앞에 따로 궐문이 있었으니, 이 말은 다만 맺음말일 뿐이다.
- 右傳之五章,蓋釋格物、致知之義,而今亡矣。
- 이상은 전5장이니 格物·致知의 뜻을 해석했는데, 지금은 망실되었다.
- 此章舊本通下章,誤在經文之下。
- 이 장은 구본(鄭本)에 다음 장과 마찬가지로 경문 다음에 잘못 위치해 있다.
- 閒嘗竊取程子之意以補之曰:「所謂致知在格物者,言欲致吾之知,在即物而窮其理也。蓋人心之靈莫不有知,而天下之物莫不有理,惟於理有未窮,故其知有不盡也。是以大學始教,必使學者即凡天下之物,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以求至乎其極。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則眾物之表裏精粗無不到,而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矣。此謂物格,此謂知之至也。」
- 근자에 삼가 정자의 뜻을 취해 다음과 같이 보충하였다: "이른바 '致知在格物'이라는 것은, '내 앎을 지극히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사물에 나아가 그 理를 궁구함에 달려있음을 말한 것이다. 대개 영험한 사람의 마음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 만물에는 理가 없는 경우는 없다. 오직 理를 아직 [전부] 궁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앎에 다하지 못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첫 가르침이 반드시 배우는 자로 하여금 뭇 천하 사물에 나아가 이미 알고 있는 理를 근거로 더욱 궁구하여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길 구하지 않게 함이 없는 것이다. [格物·致知에] 오래 힘써 하루 아침에 막힘 없이 꿰뚫게 되면, 만물의 表裏·精粗에 주도하지 않음이 없게 되고, 내 마음의 全體大用이 밝혀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 이것을 '物格'이라 하고, 이것을 '앎의 지극함'(知之至)이라고 한다."
- 問: "所補第五章, 何不效其文體?" 朱子曰: "亦嘗效而為之, 竟不能成."
- 물었다: "[선생님께서] 보충하진 전5장의 경우, 어째서 [<대학>의] 문체를 모방하지 않으신 겁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나 역시 전에 모방해 지어보았지만, 끝내 완성할 수 없었다."
- ○<大學>不說窮理而謂之格物, 只是使人就實處窮究.
- <대학>에서 '窮理'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格物'이라고 한 것은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것을 궁구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 ○格物只是就一物上窮盡一物之理; 致知便只是窮得物理盡, 後我之知識亦無不盡處.
- '格物'은 다만 한 사물에서 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고, '致知'는 다만 사물의 이치를 모두 궁구한 뒤에 내 지식도 다하지 않음이 없게 되는 것이다.
- ○<大學>是聖門最初用功處; 格物又是<大學>最初用功處. 試考其說, 就日用間如此作工夫, 久之意思自别.
- <대학>은 성인의 문하에서 가장 먼저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格物'은 다시 <대학>에서 가장 먼저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설명을 한 번 살펴보건대, 일상 생활에서 이처럼 공부를 해서, 오래되면 생각이 절로 달라질 것이다.
- ○問: "經文'物格而後知至', 却是知至在後; 今乃云'因其巳知而益窮之', 則又在格物前." 曰: "知元自有. 纔要去理㑹, 便是這些知萌露. 若懵然全不向着, 便是知之端未曾通. 纔思量著, 便這箇骨子透出來. 且如做些事錯, 纔知道錯, 便是向好門路, 却不是方始去理㑹箇知. 只是如今須著因其端而推致之, 使四方八面千頭萬緒, 無有些不知, 無有毫髪窒礙. <孟子>所謂: '知皆擴而充之,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擴而充之, 便是致字意思."
- 물었다: "경문의 '物格而後知至'에서 '知至'가 뒤에 있는데, 지금 도리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 더욱 궁구한다'고 말하니, 도리어 ['知至'가] '格物' 앞에 있습니다." 대답하셨다: "앎은 본래 있다. 이해하려고 하자마자 이 약간의 앎이 싹튼다. 멍하니 전혀 향하지 않는 경우는 앎의 단서에 아직 통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하자마자 이 骨子(앎)가 새어나온다. 일을 잘못한 경우, 잘못을 알자마자 좋은 길을 향하는 것이니, 처음 앎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금은 그 단서를 바탕으로 미루어나가 사방팔면, 천 가지 만 가지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 것이 없고 털끝 만큼도 막히는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맹자>에서 '[사단을] 모두 확충할 줄 알면, 불이 처음 타오르거나 샘이 처음 솟는 것과 같을 것이다'[228]고 할 때의 '확충'이 바로 '致'자의 뜻이다."[229]
- ○表者人物所共由; 裏者吾心所獨得. 有人只就皮殻上用工, 於理之所以然者全無見處; 有人思慮向裏去多, 於事物上都不理㑹, 此乃說玄說妙之病. 二者都是偏. 若到物格知至, 則表裏精粗無不盡."
- '겉'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물이 똑같이 말미암는 것이고, '속'이라는 것은 내 마음이 홀로 얻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저 껍데기에서만 노력할 뿐 理라는 所以然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고, 어떤 사람은 내면으로의 생각이 많을 뿐 사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니, 이는 현묘한 것을 말하는 병이다. 두 경우는 모두 치우친 것이다. 만약 '物格知至'에 이른다면, 겉과 속·정밀한 것과 거친 것을 다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혹문』 전5장
1.
或問: "'此謂知本', 其一爲聽訟章之結語則聞命[230]矣. 其一, 鄭本元在經文之後, '此謂知之至也'之前; 而程子以爲衍文, 何也?"
혹자가 물었다: "[두 번 나오는] '此謂知本' [가운데] 하나가 聽訟章(전4장)의 마지막 문장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을 들었다. 다른 하나의 경우, 鄭本에서는 원래 경문의 뒤, '此謂知之至也' 앞에 있었는데, 정자께서 [이를] '군더더기 글'이라고 여기신 것은 어째서인가?"
曰: "以其複音福出而他無所繫也."
대답했다: "그것('此謂知本')이 중복해서 나왔는데 다른 데 연결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2.
曰: "'此謂知之至也', 鄭本元隨'此謂知本'繫於經文之後而下屬音蜀下同誠意之前; 程子則去上聲其上句之複而附此句於聽訟知本之章以屬明徳之上, 是必皆有說矣. 子獨何據以知其皆不盡然而有所取舍上聲於其間邪?"
물었다: "'此謂知之至也'의 경우, 鄭本에서는 원래 '此謂知本'을 따라 경문 뒤에 연결되어 다음으로 誠意장 앞에 이어져있고, 정자께서는 윗 구절의 중복된 것을 제거하고 이 구절을 聽訟知本장(전4장)에 붙이시고는 명덕장 앞에 이으셨으니, 이들에는 필시 모두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대는 유독 무엇에 의거해 그것들이 모두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님을 알고서 그 가운데서 취사선택 했는가?"
曰: "此無以他求爲也. 考之經文, 初無再論知本、知至之云者, 則知屬之經後者之不然矣; 觀於聽訟之章, 既以知本結之而其中間又無知至之說, 則知再結聽訟者之不然矣. 且其下文所屬明徳之章, 自當爲傳文之首, 又安得以此而先之乎? 故愚於此皆有所不能無疑者. 獨程子上句之所刪、鄭氏下文之所屬, 則以經傳之次求之而有合焉. 是以不得而異也."
대답했다: "이것은 달리 찾을 것도 없다. 경문을 상고해보면 애당초 '知本'·'知至'라는 것을 재론할 것도 없으니, ['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를] 경문 뒤에 잇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겠다.('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이 경문 뒤에 위치할 수 없다.) 聽訟장(전4장)을 보면 '知本'으로 마무리하는 데다가 그 중간에 또 '知至'를 말하는 부분이 없으니, '聽訟'을 ['此謂知本'로] 거듭 마무리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겠다.(중복된 '此謂知本' 가운데 하나는 산삭해야 한다) 또 그 아래 이어진 명덕장은 응당 傳文의 첫머리가 되어야 하니, 또 어찌 이것('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을 명덕장의 앞에 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이것들에 대해 모두 의심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정자께서 윗 구절(중복된 '此謂知本' 가운데 앞의 것)을 산삭하신 것과 정현이 다음 글로 이은 것(전6장)은 경문-전문의 순서로 헤아려보면 부합하는 점이 있다. 그러므로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3.
曰: "然則子何以知其爲釋知至之結語, 而又知其上之當有闕文也?"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그것('此謂知之至也')이 '知至'에 대한 해석을 마무리하는 문장임을 알았고,[231] 또 어떻게 그 앞에 응당 빠진 글이 있는 줄 알았는가?"
曰: "以文義與下文推之而知其釋知至也; 以句法[232]推之而知其爲結語也; 以傳之例推之而知其有闕文也."
대답했다: "글의 뜻('知之至'='知至')과 다음의 글(전6장)로 추론해보고서 그것이 '知至'를 해석한 것임을 알았고, 문장 구조('此謂')로 추론해보고서 그것이 마무리하는 문장임을 알았으며, 전문의 [다른] 예시로 추론해보고서 거기에 빠진 글이 있음을 알았다."
4.
○曰: "此經之序, 自誠意以下, 其義明而傳悉矣; 獨其所謂格物致知者, 字義不明而傳復扶又反下同闕焉. 且爲最初用力之地而無復上文語緒之可尋也. 子乃自謂'取程子之意以補之', 則程子之言何以見其必合於經意? 而子之言又似不盡出於程子, 何邪?"
물었다: "이 경(<대학>)의 차례에서 '誠意'부터는 뜻이 분명하고 전문이 상세하다. 오직 이른바 '格物致知'라는 것만 글자의 뜻이 불분명하고 전문이 다시 빠져있다. 또 [格物致知'는] 처음 힘쓰는 단계인데도(즉,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도) 앞 글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달리 없다. [그런데] 그대는 도리어 스스로 '정자의 뜻을 가져다 보충한다'고 말했으니,[233] 정자의 말씀이 어떻게 틀림없이 경(<대학>)의 뜻에 부합함을 알았는가? 그대의 말은 또 정자에게서 모두 나온 것은 아닌 듯 하니, 어째서인가?"
4-1.
曰: "或問於程子曰: '學何爲而可以有覺也?' 程子曰: '學莫先於致知. 能致其知, 則思日益明, 至於久而後有覺爾. <書>所謂「思曰睿, 睿作聖」見周書洪範篇、董子所謂「勉强上聲下同學問則聞見博而智益明」, 正謂此也.'"
대답했다: "혹자가 정자께 물었다: '배움은 어떻게 해야 깨우칠 수 있습니까?' 정자께서 대답하셨다: '배움에서 致知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앎을 지극히 할 수 있다면, 생각은 날로 더욱 밝아질 것이고, [그것이] 오래된 이후에 깨우치게 된다. <서경>에서 말한 「생각은 슬기롭게 해야 하니,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는 것과,<주서> <홍범>에 보인다 동중서가 말한 「학문에 힘쓰면 견문은 넓어지고 앎은 더욱 밝아진다」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 <西漢書>董仲舒廣川人以賢良對䇿曰: "勉强學問, 則聞見博而智益明; 勉强行道, 則徳日起而大有功: 此皆可使還[234]至而立[235]有效者也."
- <한서>에 동중서광천 사람이다.가 <현량대책>으로 말했다: "학문에 힘쓰면 견문은 넓어지고 앎은 더욱 밝아지고. 道를 행하는 데 힘쓰면, 덕은 날로 진작하고 크게 공효가 있을 것이니, 이 모두는 속히 [목표에] 이르고 바로 공효를 이루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236]
"'學而無覺, 則亦何以學爲[237]也哉?'"
"'배우고도 깨우침이 없다면, 또 어째서 배우겠는가?'[238]"
- 朱子曰: "能致知, 則思自然明. '至於久而後有覺', 是積累之多自有箇覺悟時節."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致知할 수 있다면 생각이 저절로 밝아진다. '오래된 이후에 깨우침이 있게 된다'는 것은 많이 쌓여 절로 깨우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 ○格菴趙氏曰: "知是識其所當然; 覺是悟其所以然."
- 격암 조씨가 말했다: "'知'는 所當然을 아는 것이고, '覺'는 所以然을 깨우치는 것이다."
- ○玉溪盧氏曰: "覺者, 知至之事. '思曰睿', 所以致知; '睿作聖', 則知至矣. '勉强學問', 所以致知; '聞見博, 智益明', 則知至矣."
- 옥계 노씨가 말했다: "'覺'이라는 것은 '知至'의 일이다. '생각은 슬기롭게 해야 한다'는 것은 '致知'하는 방법이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는 것은 '知至'이다. '학문에 힘쓴다'는 것은 '致知'하는 방법이고, '견문은 넓어지고 앎은 더욱 밝아진다'는 것은 '知至'이다."
4-2.
"或問: '忠信則可勉矣. 而致知爲難, 柰何?' 程子曰: '誠敬固不可以不勉. 然天下之理不先知之, 亦未有能勉以行之者也. 故<大學>之序, 先致知而後誠意, 其等有不可躐者. 苟無聖人之聰明睿知而徒欲勉焉以踐其行事之迹, 則亦安能如彼之動容周旋無不中去聲禮也哉? 惟其燭理之明, 乃能不待勉彊而自樂音洛下同循理爾. 夫音扶下同人之性本無不善, 循理而行, 宜無難者. 惟其知之不至而但欲以力爲之, 是以苦其難而不知其樂耳. 知之而至, 則循理爲樂, 不循理爲不樂, 何苦而不循理以害吾樂耶? 昔嘗見有談虎傷人者. 衆莫不聞, 而其間一人神色[239]獨變. 問其所以, 乃嘗傷於虎者也. 夫虎能傷人, 人孰不知? 然聞之有懼有不懼者, 知之有眞有不眞也. 學者之知道, 必如此人之知虎然後爲至耳. 若曰: 知不善之不可爲而猶或爲之, 則亦未嘗眞知而巳矣.'"
"혹자가 물었다: '忠信은 힘쓸 수 있지만, 致知는 어려우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자께서 대답하셨다: '誠敬은 진실로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천하의 理를 먼저 알지 않으면 힘써 행할 수 있는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차례가 致知를 우선하고 誠意를 나중에 하는 것이니, 그 단계에 엽등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는 것이다. 만약 성인과 [같은] 지혜(聰明睿知)도 없으면서 그저 힘써 성인이 행한 일의 자취를 좇고자 한다면, 또 어찌 저 행동거지가 예에 맞지 않음이 없는 성인과 같을 수 있겠는가? 오직 理를 분명히 알아야 힘쓰지 않고도 절로 즐거이 理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사람의 性은 본래 선하지 않음이 없어서, 理를 따라 행함에 의당 어려운 점이 없을 것이다. 오직 앎이 지극하지 못하면서 그저 애써 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괴롭게 여기고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는 것이 지극해지면 理를 따르는 것을 즐기고 理를 따르지 않는 것을 즐기지 않을 것이니, 무엇이 괴롭길래 理를 따르지 않아 자신의 즐거움을 해치겠는가? 전에 범이 사람을 해친 이야기를 하는 자를 보았다. [그것을] 듣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그 중 한 사람만 정신과 안색이 변했다. 그 까닭을 물어보니, 바로 전에 범에게 물렸기 때문이었다. 범이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사람 가운데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듣고 두려워하는 자가 있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있는 것은, 그것을 진정으로 아는 경우가 있고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가 道를 앎은 반드시 이 사람이 범을 아는 것과 같은 후에야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만약 불선을 행해선 안 됨을 안다면서 오히려 혹 불선을 행한다면, 그 또한 진정으로 안 적이 없었던 것이다.'[240]"
- 朱子曰: "今人有知不善之不當為, 及臨事又為之, 只是知之未至. 人知烏喙[241]之殺人不可食, 斷然終於不食, 是眞知之也. '知不善不可為而猶或為之', 是特未能眞知也. 所以未能眞知者, 縁於道理上只就外面理㑹, 裏面却未理㑹得十分瑩浄."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요즘 사람들이 불선을 행해선 안 됨을 알면서도 일에 닥쳐서는 다시 불선을 행하는 것은 다만 앎이 지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부자(附子)가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먹어선 안 됨을 알아서, 결단코 끝내 먹지 않으니, 이는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불선을 행해선 안 됨을 안다면서 오히려 혹 불선을 행하는 것'은 다만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까닭은 도리에 대해 그저 겉만 이해하고 속은 십분 명쾌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此兩條者, 皆言格物致知所以當先而不可後之意也."
"이 두 조목은 모두 格物致知를 우선해야지 뒤로 미뤄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4-3.
"又有問進脩之術何先者. 程子曰: '莫先於正心誠意. 然「欲誠意, 必先致知; 而欲致知, 又在格物」. 致, 盡也; 格, 至也. 凡有一物, 必有一理, 窮而至之, 所謂格物者也. 然而格物亦非一端. 如或讀書講明道義, 或論古今人物而别彼列反其是非, 或應接事物而處上聲其當去聲否, 皆窮理也.'"
"또 '덕을 진작하고 공업을 닦는'(進德脩業)[242] 방법으로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묻는 자가 있었다. 정자께서 대답하셨다: '正心誠意보다 우선할 것은 없다. 그러나 誠意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致知를 우선해야 하고, 致知하고자 한다면 다시 格物에 달려있다. 致란 다함이고, 格이란 이름이다. 무릇 사물이 하나 있으면 틀림없이 하나의 이치가 있으니, 그 이치를 궁구해 이르는 것이 이른바 格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格物 역시 한 가지가 아니다. 예를 들어 혹 책을 읽고 도리를 강론하거나, 고금의 인물을 논해 그들의 시비를 분별하거나, 혹 사물에 응해 그 옳고 그름에 대처하는 것, 모두 窮理이다.'[243]
- 朱子曰: "格物之理, 所以致我之知."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물의 이치를 궁구(格)하는 것이 내 앎을 지극히 하는 방법이다."[244]
- ○而今且只就事物上格去. 如讀書便就文字上格, 聽人說話便就說話上格, 接物便就接物上格, 精粗大小都要格. 久後貫通, 粗底便是精, 小底便是大, 這便是理之一本處.
- 지금 우선 그저 사물에 대해 궁구(格)하라. 예를 들어, 책을 읽을 땐 문자를 궁구(格)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이야기를 궁구(格)하며, 사물을 대할 때는 사물을 대하는 것을 궁구(格)해서 정밀하고 거친 것, 크고 작은 것에 모두 궁구(格)해야 한다. [이것이] 오래된 이후에 통달해 거친 것이 정밀해지고 작은 것이 커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의 근본으로서의 理이다.
- ○陳氏曰: "事事物物固皆有理, 而聖賢書中又見成理義所萃, 而皆事物之則也. 在初學者窮理工夫, 先且就聖賢言語實處為凖則, 於幽間静一之中, 虛心而詳玩, 隨章逐句, 一一實下講明工夫, 果實有得, 則是非邪正大分已明, 而胷中權度稍定; 然後次而及於論古今人物以相參質[245], 則其褒貶去取方可有定論; 最其後也, 乃及於應接事物, 更相[246]證訂, 則其裁處剖决方中節而不至於差謬. 故以我之見有以照彼之情, 而歴練感觸處有以長吾之見, 内外交相發, 將何所往而非吾窮格之益也? 程子之言, 其有序矣."
- 진씨가 말했다: "모든 사물에는 본래 理가 있지만, 성현의 책 안에도 이미 완성된 理義의 모음이 있으니, [이 두 가지] 모두 사물의 법칙이다. 초학자의 궁리 공부에 있어, 먼저 일단 성현 말씀 가운데 핵심적인 것을 준칙으로 삼고서, 한가한 때에 마음을 비우고 완미하여 장과 구절마다 하나하나 착실하게 강명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이런 공부를 통해] 과연 실로 얻은 바가 있다면, 옳고 그름과 삿되고 바름의 큰 경계(大分)가 매우 분명해져 가슴속의 기준(權度)이 조금 확정될 것이다.(기준 확립) 그런 연후에 다음으로 고금 인물에 대해 논해 서로 비교하고 질정하게 되면, 포폄과 취사에 비로소 정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기준을 역사적 사례에 적용) 가장 마지막에는 마침내 사물을 대해 연이어 평정(評定)하게 되면, 결재하고 판결함이 비로소 절도에 맞아 잘못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기준을 현실에 적용) 그러므로 내 앎을 가지고 저것의 실정을 비출 수 있고, 겪은 것을 가지고 내 앎을 기를 수 있어서, 안팎으로 서로 계발한다면 장차 어디를 간들 내가 궁리·격물했던 덕(窮格之益)이 아니겠는가? 정자의 말씀에 진실로 차례가 있다."
"曰: '格物者, 必物物而格之耶? 將[247]止格一物而萬理皆通邪?' 曰: '一物格而萬理通, 雖顏子亦未至此. 惟今日而格一物焉, 明日又格一物焉, 積習既多, 然後脫然有貫通處耳.'"
"물었다: '格物이라는 것은 반드시 物마다 궁구(格)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단지 하나의 物만 궁구하면 온갖 이치에 모두 통달하는 겁니까?' 대답하셨다: '하나의 物만 궁구하고서 온갖 이치에 통달하는 건, 비록 안자라도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셨다. 오늘 하나의 物을 궁구하고, 내일 또 하나의 物을 궁구해, 점진적으로 익힌 것이 많아진 연후에야 脫然[248]하게 통달하게 될 뿐이다.'[249]"
- 朱子曰: "'一日一件'者, 格物工夫次第也; '脱然貫通'者, 知至效驗極致也. 不循其序而遽責其全, 則為自罔; 但求粗曉而不期貫通, 則為自畫."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루에 한 건'(一日一件)이라는 것은 격물 공부의 단계이고, '脫然하게 통달한다'는 것은 '知至'라는 결과의 극치이다. 차례를 따르지 않고 바로 온전하기를 구한다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 되고, 조금만 알려고 하고 통달하려고 하지 않으면 '스스로 한계짓는 것'이 된다."
- ○程子此語, 便是眞實做工夫來, 不說格一件後便貫通, 也不說盡格得天下物理後方始通. 只云積習既多, 然後脱然有箇貫通處.
- 정자의 이 말씀은 진정으로 공부해보신 것이니, '하나만 궁구(格)하면 통달하게 된다'고 말씀하시지도 않고, '천하 사물의 이치를 모두 궁구(格)한 뒤에야 통달할 수 있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단지 '점진적으로 익힌 것이 많아진 연후에야 脫然하게 통달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 ○問: "'一理通則萬理通', 其說如何?" 曰: "伊川嘗云: '雖顔子亦未到此', 天下豈有一理通便解萬理皆通? 也須積累將去. 如顔子髙明, 不過聞一知十, 亦是大叚聰明了. 學問却有漸, 無急迫之理."
- 물었다: "'하나의 이치에 통달하면 모든 이치에 통달하게 된다'는 설은 어떻습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이천 선생께서는 '비록 안자라도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셨다'고 말씀하셨으니, 천하에 어찌 하나의 이치에 통달하면 모든 이치에 통달할 수 있는 경우가 있겠는가? 역시 점진적으로 쌓아나가야 한다. 안자와 같은 고명하신 분도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250] 정도에 지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대단히 총명하신 것이었다. 학문은 점진적인 것이지 급박할 리가 없다."
- ○窮理者, 因其所已知而及其所未知; 因其所已逹而及其所未逹. 人之良知, 本所固有, 然不能窮理者, 只是足於已知已逹, 而不能窮其未知未逹. 故見得一截, 不曾又見得一截, 此其所以於理未精也. 然仍須工夫日日增加, 今日既格得一物, 明日又格得一物, 工夫更不住地做. 如左脚進得一歩, 右脚又進一歩; 右脚進得一歩, 左脚又進, 接續不已, 自然貫通.
- '窮理'라는 것은 이미 아는 것에 기인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이르고, 이미 통달한 것에 기인데 아직 통달하지 못한 것에 이르는 것이다. 사람의 양지는 본래 가지고 있는 것에 근거하지만, 窮理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해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궁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만 알고 나머지 반을 더이상 알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이치에 대해 정통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것에] 기인해 공부해서 날마다 [앎을] 증진시켜야 한다. 오늘 하나를 궁구(格)하고 내일 또 하나를 궁구(格)해 공부를 더이상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마치 왼발을 한 걸음 내딛으면 오른발을 또 한 걸음 내딛고, 오른발을 한 걸음 내딛으면 왼발을 또 내딛듯이 끊임없이 이어간다면 저절로 통달하게 될 것이다.
- ○問: "無事時, 見得是如此; 臨事又做錯了, 如何?" 曰: "只是斷置不分明, 所以格物便要閒時理㑹, 不是要臨時理㑹. 閒時看得道理分曉, 則事來時, 斷置自易. 格物只是理㑹未理㑹得底; 不是從頭都要理㑹. 如水火人自是知其不可蹈, 何曾有錯去蹈水火? 格物只是理㑹當蹈水火與不當蹈水火, 臨事時斷置教分曉. 程子所謂: '今日格一件, 明日格一件', 亦是如此."
- 물었다: "별 일이 없을 때에는 이러한 줄 알다가, 일을 마주하면 또 잘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대답하셨다: "단지 대처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格物하는 방법은 한가할 때 이해하려는 것이지, 일이 닥쳤을 때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가할 때 도리를 분명히 알면, 일이 닥쳤을 때 대처하기 절로 쉬워진다. 격물은 다만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물이나 불에 대해 사람들은 본래부터 거기에 들어가서는 안 됨을 아는데, 언제 물이나 불에 잘못 들어가봤던가? 격물은 단지 물이나 불에 들어가야 하는지 들어가면 안 되는 지 이해해, 일을 마주했을 때 대처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정자께서 말씀하신 '오늘 하나를 궁구(格)하고 내일 하나를 궁구(格)하라'는 것 역시 이와 같다."
- ○'積習既多, 自當脫然有貫通處', 乃是零零碎碎湊合將來, 不知不覺, 自然醒悟. 其始固須用力; 及其得之也, 又却不假用力. 此箇事不可欲速, 欲速則不逹. 須是慢慢做去.
- '점진적으로 익힌 것이 많아지고 나면 절로 응당 脫然하게 통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바로 자질구레하게 모으면 부지불식간에 저절로 깨우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힘을 써야겠지만, 터득하고 나면 더이상 힘을 쓸 필요가 없다. 이 일은 서둘러서는 안 되니, 서두르면 이루지 못한다.[251] 반드시 천천히 해야 한다.
4-4.
"又曰: '自一身之中, 以至萬物之理, 理㑹得多, 自當豁然有箇覺處.'"
"또 말씀하셨다: '일신의 마음(中)으로부터 만물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많이 이해하면 저절로 응당 豁然하게 깨우치는 바가 있게 된다.'[252]"
- 朱子曰: "'一身之中', 是仁義禮智、惻隱羞惡辭遜是非, 與視聽言動, 皆所當理㑹. 至夫萬物之榮悴, 與夫動植小大, 這底是如何使, 那底是如何用; 車之可以行陸, 舟可以行水, 皆當理㑹."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一身之中'은 인의예지와 측은·수오·사양(辭遜)·시비지심 그리고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니, 모두 이해해야 할 것들이다. 만물의 성쇠와 동식물의 크고 작음, 이것은 어떻게 사용하고 저것은 어떻게 사용하는지, 수리는 육지를 다닐 수 잇고 배는 물 위를 다닐 수 있는 것 모두 이해해야 한다."
- ○玉溪盧氏曰: "至'豁然覺處', 則一身之理與夫萬物之理通貫而為一矣."
- 옥계 노씨가 말했다: "'豁然하게 깨우치게 되면' 일신의 이치와 저 만물의 이치가 꿰어져 하나가 된다."
4-5.
"又曰: '窮理者, 非謂必盡窮天下之理; 又非謂止窮得一理便到. 但積累魯水反. 後凡言積累者音同.多後, 自當脫然有悟處.'"
"또 말씀하셨다: '窮理라는 것은 반드시 천하의 이치를 모두 궁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나의 이치만 궁구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안다. 단지 점진적으로 누적한 것이 많아진 뒤에 저절로 응당 脫然하게 깨우치는 바가 있게 되는 것이다.'[253]"
- 問: "'知至'若論極盡處, 聖賢亦難言. 如孟子未學諸侯䘮禮,[254] 與未詳班爵之制.[255]" 朱子曰: "如何要一切知得? 然理㑹得已多, 萬一有揷一件差異底事來, 也識得他破[256]. 只是貫通, 便不通底亦通將去. 某舊亦有此疑, 後看程子說'格物, 非欲窮盡天下之理, 積累多, 後自當脫然有悟處', 方理㑹得. 如十事, 巳窮得八九, 其一二雖未窮, 將來凑合, 都自見得."[257]
- 물었다: "'知至'를 '지극한 것'으로 논한다면, 성현이라도 ['知至'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니, 맹자께서 제후의 상례를 배우지 못하신 것과 班爵의 제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신 것과 같습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모두 알려고 하는가? 그러나 이해한 것이 이미 많다면, 만에 하나라도 다른 일이 끼어들더라도 그것을 잘 알아챌 것이다. 단지 통달하기만 하면 알지 못했던 것도 알게 된다. 나도 예전에 이런 의문이 있었는데, 나중에 정자께서 '격물은 천하의 모든 이치를 모두 궁구하려는 것이 아니니, 점진적으로 누적한 것이 많게 된 뒤에 절로 응당 脫然하게 깨우치는 바가 있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열 가지 일 가운데 이미 8-9개를 궁구했다면, 나머지 1-2개를 비록 아직 궁구하지 못했더라도 나중에 모으면 모두 절로 알 수 있다."
- ○王氏曰: "右三條皆要工夫多積, 自能貫通覺悟. 却自是三樣: 第一是漸漸格; 第二是合内外格; 第三是不泛不漏格."
- 왕씨가 말했다: "이상 세 조목(4-3·4·5)은 모두 '공부는 많이 쌓아야 한다'는 것이니, [그러면] 절로 통달하고 깨우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4-3)는 점진적인 궁구(格)이고, 두 번째(4-4)는 안팎을 합하는 궁구(格)이며, 세 번째(4-5)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궁구(格)이다."
4-6.
"又曰: '格物, 非欲盡窮天下之物, 但於一事上窮盡, 其他可以類推. 至於言孝, 則當求其所以爲孝者如何. 若一事上窮不得, 且别窮一事, 或先其易去聲者, 或先其難者, 各隨人淺深. 譬如千蹊萬徑, 皆可以適國, 但得一道而入, 則可以推類而通其餘矣. 蓋萬物各具一理, 而萬理同出一原, 此所以可推而無不通也.'"
"또 말씀하셨다: '格物은 천하의 사물을 모두 궁구하려는 것이 아니니, 단지 한 사물을 모두 궁구하면 나머지는 유추할 수 있다. 효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이 효 되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구해야 한다. 한 사물을 궁구하지 못하면, 우선 달리 한 사물을 궁구하되, 어떤 경우에는 쉬운 것을 우선하고, 어떤 경우에는 어려운 것을 우선해 각각 사람의 수준에 따른다. 비유하자면, 온갖 길로도 모두 도성에 다다를 수 있지만, 하나의 길을 택해 들어가면 유추하여 나머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대개 만물은 각각 하나의 이치를 갖추고 있고, 모든 이치는 하나의 근원에서 동일하게 나오니, 이것이 유추해서 통달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이다.'[258]"
- 朱子曰: "既是教人類推, 不是窮盡一事便了. 且如盡得箇孝底道理, 故忠可移於君, 又須盡得忠. 以至兄弟、夫婦、朋友, 從此推之無不盡窮, 始得."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에게 유추하게 한 이상, 하나의 사물만 모두 궁구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孝라는 도리를 모두 터득했다면, 忠을 임금에게 적용할 수 있지만,[259] 다시 忠을 다해야 한다. 형제·부부·친구에 이르기까지 이것으로부터 유추해 모두 궁구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260]
- ○問: "程子 '若一事上窮不得, 且别窮一事'之說, 與<中庸>'弗得弗措'相發明否?" 曰: "看來有一様底, 若'弗得弗措', 一向思量這箇, 少間便㑹擔閣[261]了. 若謂窮一事不得, 便掉了别窮一事, 又輕忽了, 也不得. 程子為見學者有恁地底, 不得已說此話."::물었다: "정자의 '한 사물을 궁구하지 못하면, 우선 달리 한 사물을 궁구하라'는 설과 <중용>의 '터득하지 못했거든 놔두지 말라'는 것은 서로 밝혀주는 것(상호보완적)입니까?" 대답하셨다: "보아하니 [정자의 설과 <중용>의 설에] 공통점이 있다. '터득하지 못해 놔두지 않는다면' 오로지 이것만 생각해 잠깐 사이에 시간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한 일을 궁구하지 못하면 달리 일을 궁구하지도 않고 또 소홀히 여겨버려라'라고 여겨도 안 된다?? 정자께서는 배우는 자들에게 이러한 점이 있음을 보셨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262]
- ○問: "致之為言, 推而致之以至於盡也. 於窮不得處正當努力, 豈可遷延[263]逃避, 别求一事邪?" 曰: "這是隨人之量, 非曰遷延逃避也. 蓋於此處既理㑹不得, 若專一守在這裏, 却轉昏了. 須著别窮一事, 又或可以因此而明彼也."[264]
- 물었다: "'致'라는 말은 미루어 나가 지극한 데 이른다는 것입니다. 궁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노력해야지, 어찌 물러나고 회피해 달리 일을 구해서야 되겠습니까?" 대답하셨다: "이 말은 사람의 역량에 따르라는 것이지, '물러나고 회피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대개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여기서 전일하게 지키기만 한다면 도리어 혼매하게 된다. 모름지기 달리 일을 궁구해야 하고, 또 간혹 이것(달리 궁구한 일)에 기인해 저것(원래 궁구하지 못했던 일)을 알게 될 수도 있다."
- ○問: "伊川說, 與延平李先生說, 如何?" 曰: "這說自有一項難窮底事, 如造化、禮樂、度數等, 卒急難曉, 只得且放住. 李先生說是窮理之要. 若平常遇事, 這一件理㑹未透, 又理㑹第二件; 第二件理㑹未得, 又理㑹第三件, 恁地終身不長進."
- 물었다: "이천 선생의 설은 연평 선생의 설[265]과 비교했을 때 어떻습니까?" 대답하셨다: "이 설(이천의 설)에는 궁구하기 어려운 일이 전제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만물의] 조화·예악·도수 등은 갑자기 이해하기는 어려우니, 우선 그대로 놔둬야 한다. 연평 선생의 설은 窮理공부의 핵심이다. 평소 일을 마주했을 때 이것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다시 두 번째 것을 이해하고, 두 번째 것을 이해하지 이해하지 못해 다시 세 번째 것을 이해하려 한다면, 이렇게 해서는 죽을 때까지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266]
- ○問: "'千蹊萬徑, 皆可以適國.' 國是譬理之一原處. 不知從一事上便窮到一原處否?" 曰: "也未解便至如此, 只要以類而推. 理固是一理, 然其間曲折甚多, 須是把這箇做樣子[267], 却從這裏推去, 始得. 且如事親, 固當盡其事之之道, 若得於親是如何, 不得於親又當如何. 以此而推之於事君, 則知得於君是如何, 不得於君又當如何. 推以事長, 亦是如此. 推去, 莫不皆然."
- 물었다: "'온갖 길로도 모두 도성에 다다를 수 있다'에서, '도성'(國)은 하나의 근원으로서의 理를 비유할 것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나의 일에서 하나의 근원을 궁구할 수 있습니까?" 대답하셨다: "물론 바로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부류에 따라 추론해야 한다. 理는 진실로 하나의 理이지만, 그 안에 디테일이 매우 많으니, 모름지기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여기서 추론해야 한다. 가령 부모를 섬길 때에는, 예를 들어 부모의 마음에 들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고, 부모의 마음에 들지 못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진실로 마땅히 부모 섬기는 도리를 다해야 한다. 이것을 가지고 임금 섬기는 경우에 미루어 적용한다면, 임금의 마음에 들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고, 임금의 마음에 들지 못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어른을 섬기는 경우에 미루어 적용하는 것도 이와 같다. 미루어 적용한다면 모두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을 것이다."[268]
- ○"萬物皆有此理, 理皆同出一原. 但所居之位不同, 則其理之用不一. 如為君須仁, 為臣須敬, 為子須孝, 為父須慈. 物物各具此理, 而物物各具其用, 然莫非一理之流行者也." 又曰: "近而一身之中, 逺而八荒[269]之外, 微而一草一木之衆, 莫不各具此理. 如此四人在坐, 各有這箇道理, 某不用假借於公, 公不用求於某. 然雖各有這一道理, 又却同出於一箇理耳. 如排數器水相似: 這盂也是這樣水, 那盂也是這樣水, 各各滿足, 不待求假於外. 然打破放裏, 也只是這箇水. 此所以可推而無不通也. 所以謂格得多後自能貫通, 只為是一理."
- "만물은 모두 이 理를 가지고 있고, 理는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동일하게 나온다. 다만 처한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理의 用이 같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된 자는 仁해야 하고 신하된 자는 공경해야 하며 부모된 자는 자애로워야 한다.[270] 모든 사물은 각각 이 理를 갖추고 있고, 모든 사물은 각각 이 理의 用을 갖추고 있지만, 하나의 用가 유행한 것이 아님이 없다."[271] 또 말씀하셨다: "가까이로는 일신의 마음으로부터 멀게는 八荒의 바깥, 작게는 한 초목에 이르기까지 각각 이 理를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예를 들어, 여기 자리에 있는 네 사람 각각 이 도리를 가지고 있으니, 나는 그대에게 빌릴 필요가 없고, 그대는 나에게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비록 각각 이 도리를 가지고 있지만, 동일하게 하나의 理에서 나왔을 뿐이다. 마치 여러 그릇에 물을 담는 것과 같아, 이 사발도 이런 물이고 저 사발도 저런 물이니, 각각 가득 차서 밖에서 빌려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발을] 깨뜨리면 이 물일 뿐이다. 이것이 '유추해서 통달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궁구(格)한 것이 많아진 뒤에 절로 통달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理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272]
- ○玉溪盧氏曰: "'一事上窮盡, 他可類推', 此貫通覺悟之機也. '如言孝則求其所以為孝者如何', 此格物致知要法; '一事上窮不得, 且别窮一事', 此格物致知活法[273]. '萬物各具一理', 萬物各具之太極也; '萬理同出一原', 萬物統體之太極也. '推而無不通', 則有脫然豁然處矣."
- 옥계 노씨가 말했다: "'한 사물을 궁구하면 나머지는 유추할 수 있다' 이것은 통달하고 깨우치게 되는 계기(機)이다. '효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이 효 되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구해야 한다'는 것은 격물치지의 핵심적 방법이다. 하나의 일에서 궁구하지 못하면 우선 달리 일을 궁구하라' 이것은 격물치지의 변통적 방법이다. '만물이 각각 하나의 理를 갖추고 있다'는 것은 '만물이 각각 갖추고 있는 태극'이고, '모든 理가 동일하게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다'는 것은 '만물 통체로서의 태극'이다.[274] '유추해서 통달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脫然·豁然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4-7.
"又曰: '物必有理, 皆所當窮. 若天地之所以髙深, 鬼神之所以幽顯, 是也. 若曰: 天吾知其髙而已矣; 地吾知其深而已矣; 鬼神吾知其幽且顯而已矣, 則是已然之詞, 又何理之可窮哉?'"
"또 말씀하셨다: '사물에는 반드시 이치가 있으니, 모두 궁구해야 할 것들이다. 예를 들어, 하늘은 높고 땅은 깊은 까닭이나, 鬼는 숨겨져 있고 神은 드러나는 까닭이 이것이다. 만약 「하늘이 높은 건 알고 있다」, 「땅히 깊다는 건 알고 있다」던가 「鬼가 숨겨져 있고 神은 드러나 있다는 건 알고 있다」고 할 뿐이라면, 이는 기정사실화하는 말이니, 어떤 이치가 궁구할 만한 하겠는가?'[275]
"
4-8.
"又曰: '如欲爲孝, 則當知所以爲孝之道, 如何而爲奉養去聲之宜, 如何而爲温凊七性反之節,<禮記>凡為人子者, 冬温而夏凊.[276]莫不窮究, 然後能之, 非獨守夫音扶孝之一字而可得也.'"
"또 말씀하셨다: '효를 행하고자 한다면, 효라는 도를 행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니, 어떻게 해야 적절한 봉양이 되며, 어떻게 해야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는」 예절이 되는 지를 궁구하지 않음이 없은 뒤에야 [효를 행할 수] 있으니, 저 「효」(孝) 한 글자만 지켜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277]"
- 朱子曰: “聖人言孝, 其實精粗本末只是一理. 人皆有良知, 而前此未嘗知者, 只為不曽推去耳. 愛親從兄, 誰無是心? 於此推去, 則温凊定省之事, 亦不過是. 自其所知, 推而至於無所不知, 皆由人推耳.”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성인께서 말씀하신 孝는 사실 정미한 것이든 거친 것이든, 근본적인 것이든 지엽적인 것이든 단지 하나의 이치일 뿐이다. 사람들은 모두 양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은 단지 추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를 사랑하고 형에게 순종하는 것,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겠는가? 이것으로부터 추론한다면,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밤에는] 이부자리를 정돈해드리고, [아침에는] 안부를 여쭙는 일 역시 이(양지)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아는 것으로부터 추론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은 모두 사람이 추론하는 데 말미암는다."
- ○陳氏曰: “如事親當孝, 非是空守一箇孝字, 必須窮格所以為孝之理當如何. 凡古人事親條目, 皆無一不講, 然後可以實能盡孝.”
- 진씨가 말했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길 때 효성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헛되이, 효 한 글자만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효라는 이치를 행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궁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 옛 분들께서 [말씀하신] 부모 섬기는 것에 대한 조목들을 하나도 강론하지 않음이 없은 뒤라야 실제로 효를 다할 수 있다."
4-9.
"或問: '觀物察己者, 豈因見物而反求諸己乎?' 曰: '不必然也. 物我一理, 纔明彼即曉此, 此合[278]内外之道也. 語其大, 天地之所以髙厚; 語其小, 至一物之所以然, 皆學者所宜致思也.' 曰: '然則先求之四端, 可乎?' 曰: '求之情性, 固切於身. 然一草一木, 亦皆有理, 不可不察.'"
"혹자가 물었다: '「사물을 살피고 나를 살펴라」라는 것이 어찌 사물을 보고 나서 돌이켜 자신을 탐구하라는 것이겠습니까?'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사물과 나는 하나의 이치[를 갖추고 있으니], 저것(사물)을 알자마자 이것(나)을 알게 되니, 이것이 「안팎으로 일치된 도」이다. 큰 것을 말하자면 「하늘은 높고 땅은 두터운 까닭」과, 작은 것을 말하자면 「한 사물의 소이연」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우는 자들이 지극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물었다: '그렇다면 먼저 四端을 궁구해도 괜찮습니까?'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감정이나 본성(情性)을 탐구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에게 절실한 것이지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이치가 있으니 살피지 않아선 안 된다.'[279]"
- 朱子曰: “‘天地之所以髙厚’, ‘一物之所以然’, 只是舉至大與至細者言之. 學者之窮理, 無一物而在所遺也.”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은 높고 땅은 두터운 까닭'과 '한 사물의 소이연'은 다만 지극히 큰 것과 지극히 작은 것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다. 배우는 자의 궁리는 한 사물도 빠뜨리지 않는다."
- ○問: “格物須合内外始得.” 曰: “未嘗不合. 自家知得物之理如此, 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 便是合内外之理. 目前事事物物, 皆有至理, 如一草一木、一禽一獸皆有理. 草木春生秋殺, 好生惡死, 仲夏斬陽木, 仲冬斬隂木, 皆是順隂陽道理. 自家知得萬物均氣同體, 見生不忍見死, 聞聲不忍食肉; 非其時不伐一木, 不殺一獸; 胎不殀, 不覆巢, 此便是合内外之道.”
- 물었다: "격물 공부는 '안팎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일치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사물의 이치가 이러함을 스스로 알았다면, 본래의 이치에 따라 응하는 것이 '안팎의 이치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눈앞의 사물마다 모두 지극한 이치를 가지고 있으니, 예를 들어 한 포기 풀과 한 그루 나무, 한 마리의 금수 모두 이치를 가지고 있다. '초목이 봄에 나서 가을에 시들고',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며', '仲夏에는 陽木을 베고 仲冬에는 隂木을 베는 것'[280] 모두 음양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다. 만물이 氣를 공유하는 한 몸임을 스스로 안다면, '살아있는 것을 보고는 차마 죽는 걸 보지 못하고, [살아있는 금수의] 울음 소리를 듣고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며',[281] '제때가 아니라면 나무 한 그루도 베지 않고 짐승 한 마리고 죽이지 않고',[282] '새끼를 죽이지 않고 둥지를 엎지 않으니',[283] 이것이 '안팎을 일치시키는 도'이다."[284]
4-10.
“又曰: ‘致知之要, 當知至善之所在, 如父止於慈, 子止於孝之類. 若不務此而徒欲汎然[285]以觀萬物之理, 則吾恐其如大軍之遊騎去聲出太逺而無所歸也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致知의 핵심은 至善의 소재를 아는 것이니, 예를 들면 '부모는 자애로움(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성스러움(孝)에 머무는 것'[286] 따위와 같다. 만약 이런 것에 힘쓰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만물의 이치만 관찰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러한 것이 대군의 遊騎가 너무 멀리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을까 염려스럽다.'[287]"
- 朱子曰: “格物之論, 伊川意雖謂眼前無非是物, 然其格之也, 亦須有緩急先後之序. 如今為學而不窮天理、明人倫、論聖言、通世故, 乃兀然存心於一草木、器用之間, 此是何學問?”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格物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천 선생의 뜻은 '비록 눈앞에 사물이 아닌 것이 없지만, 그것을 궁구(格)하는 경우에 역시 선후의 차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금 학문을 한다면서 천리를 궁구하지도, 인륜을 밝히지도, 성인의 말씀을 논하지도, 세상 일을 이해하지도 않고 그저 우두커니 초목이나 기물에 마음을 쏟는다면, 이것이 무슨 학문이겠는가?"[288]
- ○天下之理, 偪塞滿前, 耳之所聞、目之所見, 無非物也. 若之何而窮之哉? 須當察之於心, 使此心之理既明, 然後於物之所在, 從而察之, 則不至於汎濫矣.
- 천하의 이치는 눈앞에 가득차 있어서, 귀에 들리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사물 아닌 것이 없다.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궁구할까? 마음을 살펴 이 마음의 이치가 밝아진 연후에 사물의 소재를 이어 살펴야 하니, 그렇게 한다면 압도당하지 않을 것이다."
- ○致知一章, 是<大學>最初下手處. 若理㑹透徹, 後面便容易. 故程子此處說得節目甚多, 皆是因人之資質了說, 雖若不同, 其實一也. 見敏者太去理㑹外事, 則教之去父慈子孝上理㑹, 曰: ‘若不務此而徒泛觀萬物之理, 恐如遊騎出太逺而無所歸’; 見人專去裏面理㑹, 則教之以 ‘求之性情, 固切於身, 然一草木亦皆有理.’ 要之, 内事外事皆是自已合當理㑹底. 但須是六七分去裏面理㑹, 三四分去外面理㑹, 方可. 若是工夫中半時, 亦自不可, 况在外面工夫多, 在内工夫少邪? 此尤不可也.”
- 致知장은 <대학>에서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곳이다. 만약 투철하게 이해했다면, 그 뒤에는 쉬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께서 이것에 대해 말씀하신 조목이 매우 많으니, 이 모두는 사람의 자질에 따라 말씀하신 것으로 비록 다른 것 같지만 사실 한 가지이다. 명민한 자가 바깥 일을 지나치게 이해한 것을 보시고는 '부모는 자애로움(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성스러움(孝)에 머무는 것'을 이해하게 하시고는, '만약 이런 것에 힘쓰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만물의 이치만 관찰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러한 것이 대군의 遊騎가 너무 멀리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을까 염려스럽다'고 말씀하셨고, 어떤 사람이 오로지 내면을 이해하려는 것을 보시고는 '감정이나 본성(情性)을 탐구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에게 절실한 것이지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이치가 있다'고 가르치셨다. 요컨대, 안팎의 일 모두 스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6-70% 정도는 내면을 이해하고, 3-40% 정도는 외면을 이해해야 괜찮을 것이다. [안팎의] 공부가 반반일 때에도 안 되는데, 하물며 외면 공부는 많고 내면 공부는 적을 때는 어떻겠는가? 이는 더욱 안 된다."[289]
4-11.
“又曰: ‘格物莫若察之於身, 其得之尤切.’”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格物 [공부로는] 자신을 살펴 터득한 것이 더욱 절실한 것 만한 것이 없다.'[290]"
- 朱子曰: “前既說 ‘當察物理, 不可專在性情’; 至此又言 ‘莫若察之於身為尤切’, 皆是互相發處.”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앞에서는 사물의 이치를 살펴야지 性情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여기서는 다시 '자신을 살피는 것이 더욱 절실함 만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두 가지는 상호보완적이다."
- ○王氏曰: “前數條是推開去[291]用工; 此兩條是収歸來用工, 皆隨人偏處教他.”
- 왕씨가 말했다: "앞의 여러 조목(4-3~9)은 확장해나가는 공부이고, 이 두 조목(4-10, 11)은 수렴하는 공부이니, 모두 사람의 치우친 점에 따라 그를 가르치신 것이다."
“此九條者, 皆言格物致知所當用力之地、與其次第工程也.”
"이 아홉 조목(4-3~11)은 모두 '格物致知에서 힘써야 할 것과 그 순서·과정을 말한 것이다."
- 玉溪盧氏曰: “‘用力之地’者, ‘讀書’、‘應接事物’之類, 是也; ‘次第工程’者, ‘今日格一物, 明日又格一物’之類, 是也.”
- 옥계 노씨가 말했다: "'힘써야 할 것'이라는 것은 '독서'(4-3)나 '사물에 응대하는 것'(4-3) 따위가 이것이고, '순서·과정'이라는 것은 '오늘 한 사물을 궁구(格)하고 내일 또 한 사물을 궁구한다'(4-3)는 것이 이것이다."
4-12.
“又曰: ‘格物窮理, 但立誠意以格之. 其遲速, 則在乎人之明暗耳.’”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格物窮理는 다만 誠意를 확립하고서 궁구(格)하는 것이다. 格物窮理의 속도는 사람의 현명함에 달려있을 뿐이다.'[292]"
- 問: “‘知至而後意誠’, 而程子又云: ‘格物窮理, 但立誠意以格之’, 何也?” 朱子曰: “此誠字說較淺, 未說得深處. 只是確定其志, 朴實去做工夫, 如胡氏 ‘立志以定其本’便是. 這意此與經文誠意之說不同也.” 又曰: “誠意不立, 如何能格物? 所謂 ‘立誠意’者, 只是要著實下工夫, 不要若存若亡. 遇一物, 須是眞箇即此一物, 究極得箇道理了, 方可言格. 若 ‘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 <大學>蓋言其所止之序. 其始則必在於立誠.”
- 물었다: "[<대학>의 가르침에 따르면] ‘앎이 지극해진 이후에 뜻이 진실해지는데'(知至而後意誠), 정자께서는 도리어 '格物窮理는 다만 誠意하고서 궁구(格)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자께서 말씀하신] '誠'자의 [의미는 <대학>의 '誠意'에 비해] 비교적 가벼우니(淺) 무겁게(深) 말해서는 안 된다. [정자의 말씀은] 다만 자신의 뜻을 확정하고 착실하게 공부하라는 것이니, 호오봉이 말한 '뜻을 세우고서 근본을 정초한다'[293]는 것이 이것이다. 이 뜻은 [<대학>] 경문의 '誠意'설과 다르다." 또 말씀하셨다: "誠意가 확립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格物하겠는가? [정자께서] 말씀하신 ‘立誠意’라는 것은 다만 착실히 공부하라는 것이요, [뜻이] 있는 듯 없는 듯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물을 마주했을 때 이 사물에 진정으로 다가가 도리를 모두 궁구해야 '格'이라고 할 수 있다. ‘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은 <대학>에서 머무를 바의 차례를 말한 것이니, 그 시작은 반드시 '立誠'에 달려있다."
- ○玉溪盧氏曰: “立誠意, 即主敬之謂.”
- 옥계 노씨가 말했다: "[정자의] '誠意를 확립한다'는 것은 바로 '主敬'을 말한다."
4-13.
“又曰: ‘入道莫如敬. 未有能致知而不在敬者.’”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道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敬만한 것이 없다. 능히 致知하면서 敬에 있지 않은 경우는 없다.'[294]"
- 朱子曰: “今人將持敬致知來做兩事, 持敬時只塊然獨坐, 更不去思量; 却是今日持敬, 明日去思量道理也, 豈可如此? 但一面自持敬, 一面自思量道理, 二者本不相妨.”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持敬'과 '致知'를 두 가지로 여겨, '持敬'할 때에는 그저 우두커니 홀로 앉아 전혀 사유하지 않거나, 아니면 오늘은 '持敬'하고 내일은 도리를 생각하니,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다만 한편으로는 '持敬'하고, 한편으로는 도리를 생각해야하니, 두 가지는 본래부터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295]
- ○莫若且收歛身心, 盡掃雜慮, 令其光明洞逹, 方能作得主宰, 方能見理.
- 우선 몸과 마음을 수렴해 잡생각을 모두 없애 빛나는 것이 훤히 비치게 하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그렇게 하면] 비로소 주재를 세울 수 있고, 비로소 이치를 깨우칠 수 있다."[296]
4-14.
“又曰: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함양할 때는 敬해야 하고, 학문을 진전시키는 것은 致知에 달려있다.'[297]"
- 朱子曰: “學者工夫, 惟在居敬窮理二事. 此二事互相發. 能窮理, 則居敬工夫日益進; 能居敬, 則窮理工夫日益密.”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는 자의 공부는 오직 '居敬'과 '窮理' 두 가지에 달려있을 뿐이다. 이 두 가지는 상호보완적이다. 능히 窮理한다면 居敬 공부가 날로 발전될 것이고, 능히 居敬한다면 窮理공부가 날로 치밀해질 것이다."
- ○問涵養在致知之先. 曰: “涵養合下在先. 古人從少以敬涵養, 父兄漸教之讀書、識義理. 今若說 ‘待涵養了, 方去致知’, 也無限期. 須兩下用工.”
- '함양이 致知보다 우선한다'는 것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함양이 원래 우선한다. 옛 분들은 어려서부터 敬으로 함양하시고, 부형이 점진적으로 책을 읽게 해 의리를 알게 하셨다. 만약 '함양하고나서야 致知한다'고 말한다면 기약이 없을 것이니, 둘 다 공부해야 한다."[298]
- ○涵養本原、思索義理, 須用齊頭[299]做, 方能互相發. 程子下須字、在字便是要齊頭著力.
- 본원을 함양하고 의리를 사색하는 것은 병행해야 서로 보완할 수 있다. 정자께서 '須'자와 '在'자를 쓰신 것이 바로 둘다 똑같이 힘쓰라는 것이다."
- ○問: “涵養、體認、致知、力行, 雖云互相發明, 然畢竟當於甚處著力?” 曰: “四者不可先後, 又不可無先後. 須當以涵養為先. 若不涵養而專於致知, 則是徒然思索; 若專於涵養而不致知, 則却鶻突去了. 以某觀之, 四事只是三事, 盖體認便是致知也.”
- 물었다: "'涵養'·'體認'·'致知'·'力行'에 대해 비록 '상호보완적'이라고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디에 힘써야 합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네 가지는 차례지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차례가 없을 수도 없다. 모름지기 함양을 우선해야 한다. 만약 함양하지 않고 致知에 전념한다면 이는 헛된 사색일 뿐이고, 함양만 하고 致知하지 않으면 도리어 멍청해진다. 내가 보기에, 네 가지는 세 가지일 뿐이니, '體認'은 곧 '致知'이다."
- ○無事時, 且存養在這裏, 提撕警覺, 不要放肆. 到那講習應接, 便當思量義理, 用義理做將去. 無事便著存養收拾此心.
-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일단 내면을 존양해야 하니, 가볍게 일깨워 나태하지 않게 해야 한다. 강습하고 [외물에] 대응하게 되면, 마땅히 의리를 생각해 의리대로 행해야 한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이 마음을 존양·수습하라.
4-15.
“又曰: ‘致知在乎所養, 養知[300]莫過於寡欲.’”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 致知는 함양하는 바에 달려있으니, 知를 함양하는 [방법으론] 욕심을 줄이는 것만한 것이 없다.'"[301]
- 問: “養知是既知後如此養否?” 朱子曰: “此不分先後. 未知之前, 若不養之, 此知如何養得? 既知之後, 若不養, 又差了. 不可道未知之前便不必如此.”
- 물었다: "'養知'는 '안 뒤에 이렇게 함양한다'는 겁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養知'는 선후를 나누지 않는다. 아직 모를 때 知를 함양하지 않는다면 이 知를 어떻게 함양할 수 있겠는가? 알고 나서 함양하지 않는다면 또 잘못된다. '아직 모를 때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선 안 된다."
- ○致知者, 推致其知識而至於盡也. 將致知者, 必先有以養其知; 有以養之, 則所見益明, 所得益固. 欲養其知者, 惟寡欲而已矣. 欲寡則無紛櫌之雜而知益明矣; 無變遷之患而得益固者矣.” 又曰: “二者自是箇兩頭說話, 本若無相干. 但得其道, 則交相為養; 失其道, 則交相為害.”
- 致知라는 것은 자신의 지식을 확충해 지극한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致知하려는 자는 먼저 자신의 知를 함양해야 한다. 知를 함양할 수 있다면, 알게 되는 것이 더욱 분명해지고, 터득한 것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자신의 知를 함양하고자 하는 자는 다만 욕심을 줄일 뿐이다. 욕심을 줄이면 어지러운 잡생각이 없어져 知가 더욱 밝아지고, 오락가락한 근심이 없어져 터득한 것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두 가지(致知와 養知)는 별개의 이야기로 본래부터 상관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제대로 하면 서로 길러주겠지만,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서로 방해가 될 것이다."
- ○玉溪盧氏曰: “欲致知, 固在有所養. 知既至, 又不可無所養. 欲多, 則心無所養而知昏; 欲寡, 則心有所養而知明.”
- 옥계 노씨가 말했다: "致知하고자 한다면, [致知의 성패는] 진실로 함양하는 바에 달려있다. 知가 이미 지극하더라도 함양하는 바가 없어선 안 된다. 욕심이 많으면 마음에 함양한 것이 없어 知가 어두워지고, 욕심이 적으면 마음에 함양한 것이 있어 知가 밝아진다."
4-16.
“又曰: ‘格物者, 適道之始. 思欲格物, 則固已近道矣. 是何也? 以收其心而不放也.’”
"[정자께서] 또 말씀하셨다: '格物이라는 것은 道로 나아가는 시작이다. 格物하려고 생각하면 진실로 이미 道에 가까운 것이다. 이는 어째서인가? 자신의 마음을 수렴해 놓아버리지 않기 때문이다."[302]
- 新安陳氏曰: “纔思量要格物, 便已近道, 只就格物上便可收其放心. 此條與上四條微不同.”
- 신안 진씨가 말했다: "格物하려고 생각하자마자 이미 道에 가까워지니, 格物에 자신의 놓아버린 마음을 수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목(4-16)은 이전의 네 조목(4-12~15)과 조금 다르다."[303]
“此五條者, 又言涵養本原之功, 所以爲格物致知之本者也. 凡程子之爲說者不過如此, 其於格物致知之傳詳矣.”
"이 다섯 조목(4-12~16)은 또 본원을 함양하는 공부가 격물치지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무릇 정자께서 [格物致知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格物致知의 전문(전5장)에 대해 상세하다."
- 問程子致知格物之說不同. 曰: “當時答問, 各就其人而言之. 今須是合就許多不同處來看作一意為佳. 且如既言 ‘不必盡窮天下之物’, 又云: ‘一草一木亦皆有理.’ 今若以一草一木上理㑹, 有甚了期[304]? 但其間有 ‘積習多後, 自當脫然有貫通處’者, 為切當耳. 今以十事言之, 若理㑹得七八件, 則那兩三件觸類可通; 若四旁都理㑹得, 則中間所未通者, 其道理亦是如此. 蓋長短小大, 自有凖則. 如忽然遇一件事來時, 必知某事合如此, 某事合如彼, 則此方來之事亦有可見者矣. 聖賢於難處之事, 只以數語盡其曲折, 後人皆不能易者, 以其於此理素明故也.” 又曰: “所謂格物者, 常人於此理或能知一二分, 即其一二分之所知者推之, 直要推到十分, 窮得來無去處, 方是格物.”
- 정자의 格物致知에 대한 설이 같지 않은 것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당시의 문답은 각각 질문자에 다라 대답하신 것이다. 지금은 다양하게 다른 것들을 모아 하나의 의미로 만들어야 좋을 것이다. 가령 [정자께서] '천하 사물을 모두 궁구할 필요는 없다'(4-5)고 말씀하셔놓고 다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이치가 있다'(4-9)고 말씀하셨다. 만약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 이해'한다면, 언제 끝나겠는가? 다만 그 사이에 '점진적으로 익힌 것이 많아지고 나면 절로 응당 脫然하게 통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4-5)라는 말이 있어 적당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열 가지 일로 말하자면, 만약 7~8개를 이해했다면, 나머지 2-3개는 '부류에 따라 이해할 수 있고',[305] 사방을 모두 이해했다면 아직 이해하지 못한 중간도 그 도리는 역시 이것(상방)과 같을 뿐이다. 대개 긴 것이든 짧은 것이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모두 [일정한] 준칙이 있다. 우연히 어떤 일을 만났을 때, 반드시 '어떤 일은 이렇게 해야 하고, 어떤 일은 저렇게 해야 함'을 알고 있다면, 방금 다가온 이 일에도 알 수 있는 점이 있을 것이다. 성현께서는 대처하기 어려운 일에 대해 단지 몇 마디로 그 디테일을 모두 표현하시고 후인들이 누구도 그것을 바꾸지 못하는 것은, 성현께서 이 이치에 대해 밝으셨기 때문이다." 또 말씀하셨다: "이른바 格物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이 이치에 대해 혹 10~20% 정도 알 수 있다면, 이 10~20% 아는 것에서 확충해 바로 100%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니, 궁구해 더이상 갈 곳이 없어야 格物이다."[306]
- ○問: “伊川說格物致知許多項, 當如何看?” 曰: “說得已自分曉. 如初間說知覺及誠敬, 固不可不勉; '然天下之理必先知之而後有以行之', 這許多說不可不格物致知; 中間說 '物物當格'、及'反之吾身'之說, 却是指出格物箇[307]地頭[308]如此.” 又曰: “此項兼兩意, 又見節次[309]格處. 自 ‘立誠意以格之’以下, 却是做工夫合如此.” 又曰: “用誠敬涵養為格物致知之本.”
- 물었다: "이천 선생께서 格物致知에 대해 말씀하신 많은 조목들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대답하셨다: "[정자께서] 말씀하신 것이 매우 분명하다. 처음에 致知와 깨우침(4-1) 그리고 誠敬에 대해 말씀하신 것(4-2)은 '진실로 힘쓰지 않아선 안 된다'는 것이고, '그러나 천하의 이치는 필시 먼저 안 뒤에 행할 수 있다'(4-2) 이 여러 말은 '格物致知하지 않아선 안 된다'는 것이며, 중간에 '사물마다 궁구(格)해야 한다'(4-3)와 '내 자신을 반성한다'(4-11)고 말씀하신 것은 '격물하는 대상이 이와 같음'을 가리킨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이 항목(??)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하나 궁구(格)함을 알 수 있다?? ‘立誠意以格之’ 이하(4-11)는 '공부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誠敬으로 함양하는 것을 格物致知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今也尋其義理, 既無可疑; 考其字義, 亦皆有據. 至以他書論之, 則<文言>所謂學聚問辨<易> <文言> "學以聚之, 問以辨之, 寛以居之, 仁以行之." 、 <中庸>所謂明善擇善、<孟子>所謂知性知天, 又皆在乎固守力行之先, 而可以驗夫音扶<大學>始教之功爲有在乎此也. 愚嘗反覆考之而有以信其必然. 是以竊取其意以補傳文之缺. 不然則又安敢犯不韙之罪, 爲無證之言, 以自託於聖經賢傳之間乎?韙, 音偉, 是也. ‘犯不韙’之說, 出<春秋左氏傳>.
"[내가 위와 같이 정자의 설을 빌려 '格物致知'를 설명했는데], 이제 [정자 설의] 의미를 살펴보건대 의심할 것이 없고, [정자가 규정한 '格物致知'의] 문자적 뜻을 살펴봐도 모두 근거가 있다. 다른 책으로 논해본다면, <문언>에서 말한 '學聚問辨', <중용>에서 말한 '明善擇善',[310] <맹자>에서 말한 '知性知天'[311]도 모두 '굳게 지키고 힘써 실천하는 것'의 앞에 있으니, <대학>의 첫 가르침에 해당하는 공부가 여기(格物致知)에 달려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나는 일찍이 이를 반복해 살펴보고 그것(格物致知의 뜻이)이 반드시 그러함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삼가 정자의 뜻을 취해 傳文의 빠진 부분을 보충하였다. 그렇지 않다면(확신이 없었다면) 또 어찌 감히 '옳지 않은 죄'를 범하고 '증거 없는 말'을 해서 스스로 '성현의 경전' 사이에 넣겠는가?"
5.
曰: "然則吾子之意, 亦可得而悉聞之乎?" 曰: "吾聞之也: 天道流行此以理言, 造化發育此以氣言, 凡有聲色貌象而盈於天地之間者, 皆物也; 既有是物, 則其所以爲是物者莫不各有當然之則而自不容已, 是皆得於天之所賦而非人之所能爲也."
혹자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도 모두 들어볼 수 있겠는가?" 대답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천도가 유행해 [만물을] 만들고 발육함에, 소리·색·모양을 가지면서 천지 사이를 채운 것은 모두 物이다. 이러한 物이 있는 이상, 이 物이 된 것에는 각각 마땅히 그러해야 할 법칙이 있지 않음이 없어 스스로 그칠 수 없으니, 이 모두는 하늘이 부여한 것에서 얻은 것이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朱子曰: "物, 乃形氣; 則, 乃理也. 物之理方為則."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物'은 바로 형기이고, '則'은 바로 理이다. 物의 理라야 '則'이 된다."
- ○理之所當為者, 自不容巳, 如孩提之愛、及長知敬, 自有住不得處.
- 마땅히 행해야 할 理는 스스로 그칠 수 없으니, 예를 들면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고, 자라서는 [형을] 공경함에[312]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는 것과 같다.
- ○問: "人物之生, 莫不得其所以生者以為一身之主, 是此性隨所生處便在否?" 曰: "一物各具一太極. '天生烝民, 有物有則', 盖視有當視之則, 聽有當聽之則, 如是而視, 如是而聽, 便是; 不如是而視, 不如是而聽, 便不是. 謂如'視逺惟明, 聽徳惟聰', 能視逺謂之明, 所視不逺不謂之明; 能聽徳謂之聰, 所聽非徳不謂之聰. 視聽是物, 聰明是則. 推之至於口之於味、鼻之於臭, 莫不各有當然之則. 所謂窮理者, 窮此而巳."
- 물었다: "사람·만물이 태어날 때, 태어난 까닭을 얻어 일신의 주인으로 삼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이 性은 태어난 바에 따라 존재하게 되는 겁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한 物마다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음에, 物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고 하니, 봄에 마땅히 봐야하는 법칙이 있고, 들음에 마땅히 들어야하는 법칙이 있어서, 이렇게 보고 이렇게 듣으면 옳고, 이와 같지 않게 보고 이와 같지 않게 들으면 옳지 않다. 예를 들어 '멀리 보되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 덕스러운 것을 듣되 귀밝게 들을 것을 생각한다'[313]고 하니, 능히 멀리 보는 것을 '밝음'(明)이라고 하지 보는 것이 멀지 않은 것을 '밝음'(明)이라 하지 않고, 능히 덕스러운 것을 듣는 것을 '귀밝음'(聰)이라고 하지 듣는 것이 덕스럽지 않은 것을 '귀밝음'(聰)이라 하지 않는다. 보고 듣는 것은 이 物이고, 귀밝고 눈밝은 것은 이 則이다. 이러한 관계를 입과 맛, 코와 냄새 간으로 유추해보면, 각각 마땅히 그러한 원칙이 없는 경우는 없다. 이른바 '窮理'라는 것은 이것을 궁구하는 것일 뿐이다."
- ○玉溪盧氏曰: "物者, 形而下之器; 則者, 形而上之道. 形而上者, 不出於形而下者之外, 所謂有物必有則也."
- 옥계 노씨가 말했다: "'物'이라는 것은 형이하의 器이고, 則이라는 것은 형이상의 道이다.[314] 형이상자는 형이하자의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니, 이른바 '物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今且以其至切而近者言之, 則心之爲物, 實主於身, 其體則有仁義禮智之性; 其用則有惻隱、羞惡、恭敬、是非之情, 渾上聲然在中, 隨感而應, 各有攸主而不可亂也."
"우선 매우 비근한 것으로 말하자면, 마음(心)이라는 것은 실로 몸(身)을 주재하니, 그 體에는 仁義禮智의 性이 있고 그 用에는 측은·수오·공경·시비의 情이 있어서, [性은] 혼연히 마음속에 있다가 감각하는 바에 따라 응함에[315] 각각 주로 하는 바가 있어 어지럽힐 수 없다."
- 西山眞氏曰: "圓外竅中者, 心之形體, 可以物言, 備具衆理. 神明不測者, 此心之理, 不可以物言. 然有此形體, 方包得此理."
- 서산 진씨가 말했다: "외부는 둥글고 속에 구멍이 있는 것이 心의 형체이니, 物로 말할 수 있고, 뭇 이치를 갖추고 있다. 神明해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이 心의 理이니, 物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형체가 있어야 비로소 이 理를 품을 수 있다."
- ○玉溪盧氏曰: "'心之為物, 主於身', 形而下者也; 其體用性情, 形而上者也. '渾然在中', 其體初無仁義禮智之分; '隨感而應', 其用始有惻隱等四者之别. 仁為惻隱之主, 義為羞惡之主, 禮智為恭敬、是非之主, 而皆不可亂, 所謂則也."
- 옥계 노씨가 말했다: "'心之為物, 主於身'은 형이하자이고, 心의 體用·性情은 형이상자이다. '渾然在中'에서는 心의 體에 처음에는 仁義禮智의 구분이 없다가, '隨感而應'하면 心의 用에 비로소 측은지심 등의 네 가지 구별이 생긴다. 仁은 측은지심의 주인이고, 義는 수오지심의 주인이며, 禮와 智는 공경지심과 시비지심의 주인이니, [이러한 性情간의 관계를] 모두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 이른바 '則'이다."
"次而及於身之所具, 則有口鼻耳目四肢之用; 又次而及於身之所接, 則有君臣、父子、夫婦、長㓜、朋友之常, 是皆必有當然之則而自不容已, 所謂理也."
"다음으로 몸이 갖추고 있는 [부위의] 경우 입·코·귀·눈·사지의 쓰임이 있고, 또 다음으로 몸이 마주치는 [사회적 관계의] 경우 군신·부자·부부·장유·붕우의 일상이 있으니, 이 모두에는 반드시 마땅히 그래야 하는 법칙이 있어서 스스로 그만둘 수 없으니, 이른바 理이다."
- 玉溪盧氏曰: "耳目等乃吾身所具之物; 君臣等乃吾身所接之物. 口容止, 口之則也; 氣容肅, 鼻之則也; 聽思聰, 視思明, 耳目之則也; 非禮勿動, 四肢之則也; 君臣有義, 是君臣之則; 父子有親, 是父子之則; 有别有序有信是夫婦長㓜朋友之則, 皆所謂有物必有則也. 吾心之則乃此身統體一太極; 吾身所具所接者之則乃物物各具一太極也. 其統體者乃各具者之所自出, 其各具者初未嘗在統體者之外也."
- 옥계 노씨가 말했다: "귀·눈 등의 [부위는] 바로 내 몸이 갖추고 있는 物이고, 군신 등의 [사회적 관계는] 바로 내 몸이 마주치는 物이다. '입 모양은 그친다'는 것은 입에 대한 준칙이고, '숨쉬는 모양은 엄숙하게 한다'는 것은 코에 대한 준칙이며,[316] '들을 때 귀밝기를 생각하고, 볼 때 눈밝기를 생각한다'는 것은 귀·눈에 대한 준칙이고,[317]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것은 사지에 대한 준칙이며,[318] '군신 간에 의리가 있다'는 것은 군신 관계에 대한 준칙이고, '부자 간에 친애함이 있다'는 것은 부자 관계에 대한 준칙이며, 구별·차례·신의는 부부·장유·붕우에 대한 준칙이니,[319] 모두 이른바 '物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내 마음의 법칙은 바로 내 몸 統體의 하나의 태극이고, 내 몸이 갖추고 있거나 마주치는 것의 법칙은 바로 物마다 각각 지니고 있는 하나의 태극이다.[320] 그 統體라는 것은 바로 각각 지니고 있는 것의 출처이고, 그 각각 지니고 있는 것은 애당초 統體라는 것 밖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
"外而至於人, 則人之理不異於己也; 遠而至於物, 則物之理不異於人也. 極其大, 則天地之運、古今之變, 不能外也; 盡於小, 則一塵之微、一息之頃, 不能遺也."
"그 외에 다른 사람의 경우 다른 사람의 理는 내 것과 다르지 않고, 멀리 사물의 경우 사물의 理는 사람의 것과 다르지 않다. 지극히 크게 봤을 때 천지의 운행이나 고금의 변화도 [理를] 벗어날 수 없고, 지극히 작게 봤을 때 미세한 먼지나 숨쉬는 짧은 틈도 [理를] 빠뜨릴 수 없다."
- 格菴趙氏曰: "'一塵之微、一息之頃, 不能遺'者, 理無物不在, 無時不然. 大而天地之一開一闔、古今之一否一㤗, 小而一塵之或飛或伏、一息之或呼或吸, 皆此理之所寓也."
- 격암 조씨가 말했다: "미세한 먼지나 숨쉬는 짧은 틈도 [理를] 빠뜨릴 수 없다'는 것은 理가 어느 사물에도 어느 때에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크게는 천지가 열리고 닫히거나 고금이 막히거나 트이는 것으로부터, 작게는 먼지 하나가 날리거나 숨어있고 숨을 내쉬거나 들이쉬기는 데까지 모두 이 理가 깃들어있는 바이다."
- ○新安陳氏曰: "'天地'及'一塵'是横說; '古今'及'一息'是直說."
- 신안 진씨가 말했다: "'天地'와 '一塵'은 横說(공간적으로 말한 것)이고, '古今'과 '一息'은 直說(시간적으로 말한 것)이다."
"是乃上帝所降之衷<書> <湯誥> "惟皇上帝, 降衷于下民.", 烝民所秉之彛<詩> <烝民> "民之秉彛.", 劉子所謂天地之中<左傳·成公十三年> "劉康公、成肅公㑹晉侯伐秦. <劉、成, 食采之邑名; 康、肅, 皆其諡也.> 成子受脤于社, 不敬.<脤, 市軫反, 宜社之肉也.> 劉子曰: '吾聞之: 民受天地之中以生, 所謂命也. 是以有動作、禮義、威儀之則以定命也. 能者養之以福, 不能者敗以取禍." 夫子所謂性與天道, 子思所謂天命之性, 孟子所謂仁義之心, 程子所謂天然自有之中,"
"이것이 바로 '상제께서 내려주신 마음'<서경> <탕고> "위대한 상제께서 백성에게 마음을 내려주셨다."이고, '뭇 백성이 지니고 있는 불변의 도리'<시경> <증민> "백성이 지니고 있는 불변의 도리."이며, 유강공이 말한 '天地之中'이고,<춘추좌전·성공13년> "劉康公·成肅公이 晉侯를 회맹하고 秦을 정벌했다.<劉·成은 채지로 받은 고을의 이름이고,康·肅은 모두 그들의 시호이다.> 成肅公이 제사에서 제사고기를 받았는데, 공경스럽지 못했다. 劉康公이 말했다: '내가 들으니, 백성은 천지의 中을 받아 태어나니, 이른바 命이다. 그러므로 동작·예의·위의에 대한 준칙을 두어 命을 구현하는 것이다. 뛰어난 자는 천지의 中을 잘 길러 복을 받고, 못난 자는 천지의 中을 해쳐 화를 입는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性과 天道'이며,[321] 자사께서 말씀하신 '天命之性'이고, 맹자께서 말씀하신 '仁義之心'이며, 정자께서 말씀하신 '天然自有之中'이고,"
- 程子曰: "楊子拔一毛不為, 墨子又摩頂放踵為之, 此皆是不得中. 至如子莫執中, 欲執此二者之中, 不知怎麽執得? 識得則事事物物上皆天然有箇中在那上, 不待人安排也. 安排著, 則不中矣."
-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양주는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터럭 하나만 뽑으라고 해도 하지 않았는데, 묵적은 또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정수리에서부터 발꿈치까지 갈아넣어야 한다고 해도 했으니, 이 두 가지 모두 中을 얻은 것이 아니다. 子莫이 잡은 中의 경우, 이 두 가지의 가운데(中)를 잡으려고 했다.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알았다면?? 사물마다 모두 선천적으로 中이 그 위에 있으니 사람이 손쓸 필요가 없다. 손쓰면 中이 아니다.[322]
"張子所謂萬物之一原,"
"장자께서 말씀하신 '만물의 동일한 근원'이며,"
- 張子名載, 字子厚, 家于鳳翔府郿縣横渠鎭, 世號横渠先生.
- 張子의 이름은 載이고 자는 子厚이니, 봉상부 미현 횡거진에 사셨으므로 대대로 횡거선생이라고 불렀다.
- ○<正蒙> <誠明篇> "性者, 萬物之一原, 非有我之得私也."
- <정몽> <성명편> "性이라는 것은 만물의 동일한 근원이니,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323]
"邵子所謂道之形體者."
"소자께서 말씀하신 '道의 形體'이다."
- 邵子名雍, 字堯夫, 諡康節, 河南人.
- 邵子의 이름은 雍이고 자는 堯夫이며 시호는 康節이니, 하남 사람이다.
- ○"性者, 道之形體", 見<擊壤集序>.
- "性이라는 것은 道의 形體이다"라는 말은 <격양집서>에 보인다.[324]
"但其氣質有清濁偏正之殊, 物欲有淺深厚薄之異. 是以人之與物, 賢之與愚, 相與懸絶而不能同耳."
"그러나 기질에 清濁·偏正의 차이가 있고, 물욕에 淺深·厚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사물과, 현명한 자는 어리석은 자와 현격히 달라 같을 수 없을 뿐이다."
- 問: "降衷秉彛一段, 其名雖異, 要之皆是一理." 朱子曰: "誠是一理, 豈可無分别? 須各曉其名字訓義之所以異, 方見其所謂同."
- 물었다: "'降衷'·'秉彛' 부분에서 그러한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요컨대 모두 하나의 理입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하나의 理지만, 차이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 명칭과 의미의 차이점을 각각 알아야 하니, 그래야 이른바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衷字只是箇無過不及之中, 是箇恰好底道理. 天生人物, 箇箇有一副當恰好無過不及道理降與你. 今人言折衷, 折衷者以中為則而取其正也. '天生烝民, 有物有則', 則字却似中字. 天之生此物, 必有箇當然之則, 故民執之以為常道. 所以無不好此懿徳. '降衷于下民', 緊要在降字上. 故自天而言謂之降衷; 自人受此衷而言則謂之性, 縁各據來處與受處而言也.
- '衷'자는 '過不及이 없다'는 의미의 中이니, 적절한 도리이다. 하늘이 인간과 사물을 낳을 때, 각각 적절하고 過不及이 없는 도리를 두어 너에게 내려주었다. 요즘 사람들이 '절충'(折衷)을 말할 때, '折衷'이란 中을 기준으로 삼아 바름을 취한다는 것이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매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의 '則'자는 '中'자와 같다. 하늘이 이 사물을 낳을 때 반드시 규범적 준칙(當然之則)을 둔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이를 가지고 불변의 도리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땅한 덕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이다. '백성에게 衷을 내렸다'(降衷于下民)에서 핵심은 '降'자에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관점에서 말하면 '降衷'이라 하고, 사람이 이 '衷'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말하면 '性'이라 하니, 각각 온 곳과 받은 곳에 의거해 말한 것이다.
- ○問: "彛而言秉, 何也?" 曰: "渾然一理, 只于吾心不可移奪[325], 若秉執然."
- 물었다: "'불변의 도리'(彛)인데 '잡는다'(秉)고 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대답하셨다: "渾然한 理가 그저 내 마음에 있어 바꿀 수 없는 것이 마치 잡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 ○問: "劉子云天地之中, 程子云天然自有之中, 此中字同否?" 曰: "天地之中是未發之中; 天然自有之中是時中; 天地之中是指道體; 天然自有之中是指事物之理."
- 물었다: "劉子가 말한 '天地之中'과 程子가 말한 '天然自有之中'의 이 中자는 같습니까?" 대답하셨다: "'天地之中'은 '未發之中'이고, '天然自有之中'은 '時中'이다. '天地之中'은 '道體'를 가리키고, '天然自有之中'은 사물의 이치를 가리킨다."
- ○"性與天道", 性便是自家底; 天道便是上面腦子. 其流行者是天道; 人得之為性.
- "性與天道"에서 '性'은 자신의 것이고 '天道'는 그 위의 근원이다. 유행하는 것이 天道이고, 인간이 이를 얻어 性으로 삼는다.
- ○諸先生說這道理, 邵子說得最著實. 這道理空虚無形影, 惟是說 '性者, 道之形體', 却見得實[有][326]. 只反諸吾身求之: 是實有這道理? 還是無這道理? 故嘗為之說曰: '欲知此道之實有者, 當求之吾性分之内.' 邵子忽自於<擊壤集序>内說出幾句云: "性者, 道之形體也; 心者, 性之郛郭也; 身者, 心之區宇也; 物者, 身之舟車也." 此說極好.
- 여러 선생이 이 도리를 말씀하셨는데, 소자께서 말씀하신 것이 가장 착실하다. 이 도리는 텅 비어 어떠한 형체·그림자도 없지만, 오직 '性이라는 것은 道의 形體이다'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도리가] 실제로 존재함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자기 자신을 반성해 찾아보라: 이 도리가 실제로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그러므로 전에 이에 대해 '이 道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고 싶은 자는 자기 性分 안에서 찾아봐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소자께서 문득 스스로 <격양집서>에서 몇 구절 말씀하셨다: "性이라는 것은 道의 형체이고, 心이라는 것은 性의 성곽이며, 身이라는 것은 心의 집이고, 物이라는 것은 身의 배나 수레이다." 이 설이 매우 좋다.
- ○'氣質清濁偏正', 本<正蒙>中語, 亦是將人物賢不肖、智愚相對而分言之如此. 若大槩而論, 則人清而物濁, 人正而物偏; 又細論之, 則智乃清之清, 賢乃正之正, 愚乃清之濁, 不肖乃正之偏. 而張子所謂 "物有近人之性"者, 又濁之清, 偏之正者也. "物欲淺深厚薄", 乃通為衆人而言.
- '氣質에 清濁·偏正의 [차이가 있다]'[327]는 것은 본래 <정몽>의 말이니, 사람·사물의 賢·不肖나 智·愚를 대비해 이렇게 나눠 말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氣質은] 맑고 사물[의 氣質은] 탁하며, 사람[의 氣質은] 바르고 사물[의 氣質은] 치우쳐져 있다. [그러나] 다시 자세하게 말하자면, 지혜로운 건(智) 맑은 것 가운데 [더욱] 맑은 것이고, 어진 건(賢) 바른 것 가운데 [더욱] 바른 것이며, 어리석은 것(愚)은 맑은 것 가운데 탁한 것이고, 못난 것(不肖)은 바른 것 가운데 치우친 것이다. 장자께서 "사물 가운데 사람의 性에 가까운 것이 있다"[328]고 말씀하신 것은 또 탁한 것 가운데 [그나마] 맑은 것, 치우친 것 가운데 [그나마] 바른 것이다. "物欲淺深厚薄"은 뭇 사람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 ○陳氏曰: "天命即天道之流行而賦予於物者, 受於天而為我所有, 故謂之性." 又曰: "道者, 事物中所當然之理, 人之所共由者也. 性即在我之理, 具於吾心而道之所總㑹也. 所謂 '形體'正如此."
- 진씨가 말했다: "'天命'은 바로 天道가 유행하다가 사물에 부여된 것이고, 하늘로부터 받아서 내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性'이라고 한다." 또 말했다: "'道'라는 것은 사물의 당위적 원리(所當然之理)이니, 사람이 공통적으로 따르는 바이다. '性'은 내게 있는 理이니 내 마음에 갖춰져 있고, '道'가 모여있는 곳이다. 이른바 [소옹이 말한 '道'의] 形體'가 바로 이와 같다."
- ○西山眞氏曰: "<詩>謂 '秉彛', 言衆民所秉執此常理. <孟子>謂 '仁義之心', 言人既得隂陽之理以為性, 則自然有仁義之心. 只舉仁義二字者, 仁包禮, 義包智故也. 禮是仁之著; 智是義之藏. 程子所謂 '天然之中', 言凡百事物皆有箇恰好底道理, 不可過, 不可不及也. 張子所謂 '萬物之一原', 凡人物之性皆自此流出, 如百川之同一原也."
- 서산 진씨가 말했다: "<시경>에서 말한 '秉彛'는 뭇 백성이 이 불변의 理를 지니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맹자>에서 말한 '仁義之心'은 사람이 음양의 理를 얻어 性으로 삼은 이상, 저절로 仁義로운 마음(仁義之心)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仁義' 두 글자만 거론한 것은, 仁이 禮를 포괄하고 義가 智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禮는 仁이 드러난 것이고, 智는 義가 감춰져 있는 것이다. 정자께서 말씀하신 '天然之中'은 온갖 사물에 모두 적합한 도리가 있어서 지나쳐서도 미치지 못해서도 안 됨을 말한 것이다. 장자께서 말씀하신 '萬物之一原'은 사람과 사물의 性이 여기서부터 흘러나왔다는 것이니, 뭇 시내의 동일한 수원과 같다."
"以其理之同, 故以一人之心而於天下萬物之理無不能知; 以其稟之異, 故於其理或有所不能窮也. 理有未窮, 故其知有不盡; 知有不盡, 則其心之所發, 必不能純於義理而無雜乎物欲之私. 此其所以意有不誠, 心有不正, 身有不脩, 而天下國家不可得而治也. 昔者聖人蓋有憂之, 是以於其始教, 爲之小學而使之習於誠敬, 則所以收其放心, 養其徳性者, 已無所不用其至矣."
"理가 동일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마음으로 천하 만물의 理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품부받은 것(氣質)이 다르기 때문에 理에 혹 궁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理를 궁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앎이 온전하지 못하고, 앎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발현될 때 틀림없이 義理에 순수해 자기중심적 物欲에 뒤섞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意에 진실하지 못한 점이 있고, 心에 바르지 않은 점이 있으며, 身에 닦이지 않은 부분이 있고, 天下國家가 잘 다스려질 수 없는 까닭이다. 과거 성인께서도 이를 염려하셨기 때문에, 처음 가르치실 때는 소학을 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誠敬을 익히게 하셨으니,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고'[329] '덕성을 함양한다'[330]는 것에 대해 이미 지극하게 하지 않으신 점이 없었다."
- 玉溪盧氏曰: "此格物致知之本原."
- 옥계 노씨가 말했다: "이것은 격물치지 [공부의] 근원이다."
"及其進乎大學, 則又使之即夫音扶事物之中, 因其所知之理, 推而究之, 以各到乎其極, 則吾之知識, 亦得以周遍精切, 而無不盡也. 若其用力之方, 則或考之事爲之著, 或察之念慮之微,"
"사람들이 태학에 진학하게 되자, [성인께서] 다시 그들로 하여금 사물에 나아가 알고있는 理를 근거로 추론·궁구해 각각 [궁구하는 대상의] 극치(즉 事物之理)에 이르게 하셨으니, 내 지식 역시 [성인처럼] 周遍하고 精切해 완전하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공부 방법에 대해서는, 어떤 분은 드러난 행적에서 [理를] 분석하셨고, 어떤 분은 은미한 사려에서 [理를] 살피셨으며,"
- 問: "關於事為者不外乎念慮, 而入於念慮者往往皆是事為, 此分為二項, 意如何?" 朱子曰: "固是都相關. 然也有做在外底, 也有念慮方動底. 念慮方動, 便須辨别那箇是正, 那箇是不正. 這只就始末上大約如此說." 問: "只就著與微上看?" 曰: "有箇顯有箇微."
"或求之文字之中, 或索山客反之講論之際,"
"어떤 분은 글에서 [理를] 탐구하셨고, 어떤 분은 강론하면서 [理를] 찾으셔서,"
- 玉溪盧氏曰: "此四句, 格物致知之條目."
"使於身心性情之徳、人倫日用之常, 以至天地鬼神之變、鳥獸草木之宜, 自其一物之中, 莫不有以見其所當然而不容巳、與其所以然而不可易者."
"?? 身心과 性情의 덕, 일상에서 지키는 인륜으로부터 천지와 귀신의 변화, 들짐승·날짐승과 초목의 적절함까지 한 사물에서 '마땅히 그러해야 해서 그만둘 수 없는 점'과 '그러해서 바꿀 수 없는 점'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없으셨다."
- 朱子曰: "今人未嘗看見當然而不容已者, 只是就上較量一箇好惡耳. 如眞見得這底是我合當為, 則自有所不可已者矣. 如為臣而必忠, 非是謾說如此, 蓋為臣不可以不忠; 為子而必孝, 亦非是謾說如此, 蓋為子不可以不孝也."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마땅히 그러해야 해서 그만둘 수 없는 점'을 본 적이 없어서 그저 일에 대해 호오를 따질 뿐이다. 만약 이것이 내가 마땅히 해야할 것임을 진정으로 안다면, 그만두지 못하는 점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 '신하가 되면 반드시 충성한다'는 게, 대충 이와 같다고 말한 게 아니라, 신하가 되면 충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식이 되면 반드시 효도한다'는 것 역시 대충 이와 같다고 말한 게 아니라, 자식이 되면 효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問: "'所以然而不可易'者, 是指理而言; '所當然而不容已'者, 是指人心而言否?" 曰: "下句只是指事而言. 凡事固有所當然而不容已者, 然又當求其所以然者何故. 其所以然者, 理也; 理如此, 故不可易. 又如人見赤子入井, 皆有怵惕惻隱之心, 此其事所當然而不容已者也. 然其所以如此者何故? 必有箇道理之不可易者."
- 물었다: "'그러해서 바꿀 수 없는 것'은 理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마땅히 그러해야 해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은 人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대답하셨다: "아랫 구절은 단지 일(事)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일(事)에는 본래 '마땅히 그러해야 해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지만, '그러한 까닭'이 어째서인지에 대해서도 마땅히 탐구해야 한다. '그러한 까닭'이 理이고, 理가 이와 같기 떄문에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또 예를 들어, 사람이 어린 아기가 우물로 기어가는 것을 보면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해 하는 마음이 드니, 이것이 일(事)의 '마땅히 그러해야 해서 그만둘 수 없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까닭은 어째서인가? 필시 바꿀 수 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 ○陳氏曰: "在身, 謂手容合當恭, 足容合當重之類; 在心, 如體合當寂, 用合當感之類; 性, 如仁合當愛, 義合當斷之類; 情, 如見赤子入井合當惻隱, 見大賔客合當恭敬之類; 人倫, 如君合當止仁, 臣合當止敬之類; 日用, 如居處合當恭, 執事合當敬之類; 天地, 如天合當髙, 地合當厚; 鬼神二氣, 如陽合當伸, 隂合當屈; 鳥獸, 如牛合當耕, 馬合當乘; 草木, 如春合當生, 秋合當殺等類, 皆有理存乎其間也."
- 진씨가 말했다: "'몸(身)'은 '손 모양은 조심스러워야 하고, 발 모양은 무거워야 한다'[331] 따위를 말하고, '마음(心)'은 '體의 국면에서는 고요해야 하고, 用의 국면에서는 [적절히] 감응해야 한다'[332] 따위이며, '性'은 '仁은 마땅히 아껴야 하고, 義는 마땅히 결단해야 한다' 따위이고, '情'은 '어린 아기가 우물로 기어가는 것을 보면 측은한 감정을 느껴야 하고, 중요한 손님을 보면 공경해야 한다' 따위이며, '人倫'은 '임금은 仁에 머물러야 하고, 신하는 敬에 머물러야 한다'[333] 따위이고, '日用'은 '거처할 때는 공손해야 하고, 일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334] 따위이며, '天地'는 '하늘은 높아야 하고 땅은 두터워야 한다'는 것이고, '鬼神' 두 기는 '陽은 펴져야 하고(伸), 隂은 움츠려야 한다(屈)'는 것이며, '鳥獸'는 '소는 밭을 갈아야 하고, 말은 [사람을] 태워야 한다'는 것이고, '草木'은 '봄에는 싹터야 하고 가을에는 죽여야 한다'는 등의 부류이니, 모두 그 사이에 理가 있는 것이다."
- ○西山眞氏曰: "如為君當仁, 臣當敬之類, 乃道理合當如此. 不如此, 則不可, 故曰所當然. 然仁敬等, 非是人力强為. 有生之初, 即稟此理, 是乃天之所與也. 故曰所以然. 知所當然是知性; 知所以然是知天, 謂知其理所自來也."
- 서산 진씨가 말했다: "예를 들어 '임금은 仁해야 하고 신하는 敬해야 한다' 따위는 도리상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니, 이와 같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바'(所當然)라고 한다. 그러나 仁·敬 등은 사람의 힘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갓 태어날 때 이 理를 품부받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까닭'(所以然)이라고 한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바'를 아는 것이 '知性'이고, '그러한 까닭'을 아는 것이 '知天'이니[335] 理의 유래를 안다는 것이다."
"必其表裏精粗無所不盡, 而又益推其類以通之, 至於一日脫然而貫通焉, 則於天下之物皆有以究其義理精微之所極,"
"반드시 表裏·精粗에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 또 더욱 그 부류를 미루어나가 이해해, 어느날 脫然하게 통달하게 되면, 천하 사물에 대해 모두 그것의 精微한 義理의 지극한 바를 궁구할 수 있게 되어,"
- 玉溪盧氏曰: "極即至善之謂."
- 옥계 노씨가 말했다: "'極'은 '至善'을 말한다."
"而吾之聰明睿智, 亦皆有以極其心之本體而無不盡矣."
"내 聰明睿智 역시 마음의 본모습을 다해 빠뜨리는 바가 없을 것이다."
- 朱子曰: "不可盡者, 心之事; 可盡者, 心之理. 理既盡後, 謂如[336]一物初不曾識, 來到面前, 便識得此物, 盡吾心之理."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다할 수 없는 것'은 마음의 事이고, '다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理이다. 理를 다한 뒤에는 마치 하나도 안 적이 없는 것 같지만, 눈앞에 닥치면 이것을 알고서 내 마음의 理를 다하게 된다."[337]
- ○新安陳氏曰: "此格物致知之效騐."
- 신안 진씨가 말했다: "이것은 격물치지의 공효이다."
"此愚之所以補乎本傳闕文之意. 雖不能盡用程子之言, 然其指趣要歸, 則不合者鮮上聲矣. 讀者其亦深考而實識之哉!"
"이것이 내가 本傳의 빠진 글을 보충한 까닭이다. 비록 정자의 말씀을 다 인용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보충한 글의] 취지나 요점 가운데 [정자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드물 것이다. 독자 역시 [나처럼] 깊게 살피고 실제적으로 이해하라!"
6.
曰: "然則子之爲學, 不求諸心而求諸迹; 不求之内而求之外. 吾恐聖賢之學不如是之淺近而支離也."
혹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학문은 마음에서 구하지 않고 자취에서 구하며, 내면에서 구하지 않고 외면에서 구하는 것이다. 나는 성현의 학문이 이처럼 淺近하며 지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曰: "人之所以爲學, 心與理而已矣. 心雖主乎一身, 而其體之虛靈足以管乎天下之理; 理雖散在萬物, 而其用之微妙實不外一人之心, 初不可以内外精粗而論也."
대답했다: "사람이 학문하는 대상은 心과 理일 뿐이다. 心은 비록 일신을 주재하지만, 그 體의 허령함은 천하의 理를 주관하기에 충분하고, 理는 비록 만물에 흩어져있지만, 그 用의 미묘함은 실로 개인의 心을 벗어나지 않으니, 애당초 内外·精粗로 [구분해] 논할 수 없다."
- 問: "'用之微妙', 是心之用否?" 朱子曰: "理必有用, 何必又說是心之用乎? 心之體具乎是理, 理則無所不該而無一物之不在. 然其用實不外乎人心, 蓋理雖在物而用實在心也."
- 물었다: "'用之微妙'은 心의 用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理에도 분명 用이 있으니, 굳이 또 心의 用을 말해야 겠는가? 心의 體는 理를 갖추고 있고, 理는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 없다. 그러나 理의 用은 실로 사람의 心을 벗어나지 않으니, 대개 理가 비록 사물에 있더라도 [그] 用은 실로 心에 달린 것이다."
"然或不知此心之靈而無以存之, 則昏昩雜擾而無以窮衆理之妙; 不知衆理之妙而無以窮之, 則偏狹固滯偏一作褊而無以盡此心之全. 此其理勢之相須, 蓋亦有必然者. 是以聖人設教,
使人黙識此心之靈而存之於端莊靜一之中, 以爲窮理之本;
使人知有衆理之妙而窮之於學問思辨之際, 以致盡心之功.
巨細相涵, 動靜交養, 初未嘗有内外精粗之擇;
及其眞積力乆而豁然貫通焉, 則亦有以知其渾然一致而果無内外精粗之可言矣.
今必以是爲淺近支離, 而欲藏形匿影, 别爲一種上聲幽深恍惚艱難阻絶之論, 務使學者莽模黨反措其心於文字言語之外, 而曰: '道必如此然後可以得之', 則是近世佛學詖淫邪遁之尤者, 而欲移之以亂古人明徳新民之實學, 其亦誤矣."
"그러나 이 心의 허령함을 알지 못해 보존하지 못하면 혼매하고 어지러워져 뭇 理의 신묘함을 궁구하지 못할 것이고, 뭇 理의 신묘함을 알지 못해 궁구하지 못한다면 편협하고 꽉 막혀 이 心의 온전함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형세상의 상호 의존 관계이니, 역시 반드시 그러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가르침을 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묵묵히 이 心의 허령함을 알아 端莊·靜一한 가운데 보존하여 궁리의 근본으로 삼게 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뭇 理의 신묘함을 알아 學問·思辨할 때 궁구하게 해 盡心의 공부를 다하게 하셨다. [성인의 가르침은] 巨細가 서로 기르고 動靜이 서로 배양해 애당초 内外·精粗를 가린 적이 없고, 진실로 오래 노력을 모아 豁然하게 통달하면 또한 渾然히 일치되어 진실로 말할 만한 内外·精粗의 [구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것을 '淺近하고 지루하다'고 여기고서, 형체와 그림자를 숨기고 따로 일종의 幽深·恍惚·艱難·阻絶한 주장을 만들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문자·언어 밖에서 막연하게 자기 心을 잡게 하는데 힘쓰며, '道는 분명 이렇게 한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이는 근래 불학의 詖淫邪遁[338] 중에서도 심한 것인데, 이것을 옮겨 옛 분의 明徳·新民의 實學을 변화시키려 하니, 그 역시 잘못이다."
- 問: "陸象山不取伊川格物之說, 以為'若隨事討論, 則精神易弊, 不若但求之心. 心明則無不照.' 其說亦似省力." 朱子曰: "不去隨事討論, 便聽他胡做, 話便信口說, 脚便信歩行, 冥冥地去, 都不管他."
- 물었다: "육상산은 이천의 格物설을 취하지 않고서 '만약 일마다 따진다면 정신이 쉽게 지칠 것이니, 그저 마음에서 구하는 것만 못하다. 마음이 밝아지면 비추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의 설 역시 공력을 적게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일마다 따지지 않는다면, 그가 멋대로 하는 짓을 받아들여 [그가] 말하면 [그] 말을 믿어버리고 [그가] 걸으면 [그] 걸음을 믿어버려 흐리멍덩하게 그를 전혀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339]
- ○節齋蔡氏曰: "盡心者, 言其心之所存, 更無一毫之不盡也. 然若要盡得, 須先知得. 所以學者要先窮理也." 又曰: "存此心於端莊靜一之中以立其本; 窮此理於學問思辨之際以逹其用; 反之於身以踐其實, 則巨細相涵, 動靜交養, 及其眞積力乆而豁然融㑹, 然後可以造乎一之妙."
- 절재 채씨가 말했다: "'盡心'이라는 것은 心이 보존함에 털끝만큼의 다하지 않음도 없는 것을 말한다. 만약 盡心하고자 한다면,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우선 窮理해야 한다." 또 말했다: "이 心을 端莊靜一한 가운데서 보존하여 心의 근본을 세우고 이 理를 學問思辨할 때 궁구하여 理의 用에 통달하고서 자신에게 돌이켜 그 실제 내용을 실천한다면, 巨細가 서로 길러주고 動靜이 서로 배양할 것이며, 진정으로 오래 노력을 모아 豁然하게 통달한 연후에 一(渾然一致)의 신묘함에 도달할 수 있다."
- ○陳氏曰: "古人毎言學, 必欲其博, 所以極盡乎此心無窮之量也. 所謂盡心者, 須是盡得箇極大無窮之量, 無一理之或遺, 方是實能盡得心."
- 진씨가 말했다: "옛 분들은 학문을 논하실 때마다 반드시 넓게 하기를 바라신 것은 그것으로써 이 心의 무궁한 역량을 다하려는 것이었다. 이른바 '盡心'이라는 것은 지극히 크고 무궁한 역량을 다하여 하나의 이치도 혹 빠뜨림이 없어야 하니, [그래야] 비로소 진실로 心을 다할 수 있다."
- ○西山眞氏曰: "存心窮理二者, 當表裏用工. 蓋知窮理而不知存心, 則思慮紛擾, 物欲交攻, 此心昏亂, 如何窮理? 但知存心而不務窮理, 雖能執持静定, 亦不過如禪家之空寂而已. 故必二者交進, 則心無不正, 理無不通. 學之大端, 惟此而已."
- 서산 진씨가 말했다: "存心·窮理 두 가지는 안팎의 공부에 해당한다. 窮理할 줄만 알고 存心할 줄 모르면, 사려가 어지러워지고 물욕이 서로 치받아 이 心이 혼매하고 어지러워지니, 어떻게 窮理하겠는가? 存心할 줄만 알고 窮理에 힘쓰지 않으면, 비록 [내면을] 단속해 고요하게 만들 수 있더라도 선가의 空寂과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두 가지를 병진해야 하니, 그렇게 한다면 心은 바르지 않음이 없고 理에는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학문의 큰 줄기는 이것일 뿐이다."
- ○端莊主容貌言; 静一主心言; 表裏交正之義. 合而言之, 則敬而已.
- '端莊'은 용모를 위주로 말한 것이고, '静一'은 心을 위주로 말한 것이니, 안팎을 모두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합해서 말하면 敬일 뿐이다.
- ○玉溪盧氏曰: "'存心於端莊静一', 主敬之工夫也; '窮理於學問思辨', 格致之工夫也. '巨'以此心言; '細'以衆理言; '動'以格物工夫言; '静'以主敬工夫言; '豁然貫通而果無内外精粗之可言', 則明徳明矣."
- 옥계 노씨가 말했다: "'存心於端莊静一'은 主敬공부이고, '窮理於學問思辨'는 격물치지 공부이다. '巨'는 이 心을 말한 것이고, '細'는 뭇 理를 말한 것이며, '動'은 격물공부를 말한 것이고, '静'은 主敬공부를 말한 것이다. '豁然貫通而果無内外精粗之可言'은 明徳이 밝혀진 것이다."
7. '格物'을 '外物을 막다'로 해설하는 것에 대한 평가
○曰: "近世大儒有爲格物致知之說者, 曰: '格猶扞音汗也, 禦也. 能扞禦外物而後能知至道也.'"
물었다: "근세 大儒 가운데 格物致知에 대해 설명한 자가 있다. [그는] '格은 扞·禦(막다)와 같다. 외물을 막은 이후에야 至道를 알 수 있다'[340]고 하였다.
- 問: "温公以格物為扞格之格, 不知格字有訓扞義否?" 朱子曰: "亦有之, 如格闘之格, 是也."
- 물었다: "온공(사마광)은 格物을 '막다'(扞格)의 格이라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格자에 '막다'(扞)라는 뜻이 있습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그런 뜻도 있으니, 예를 들어 '격투'(格闘)의 格이 이에 해당한다."
"又有推其說者, 曰: '人生而靜, 其性本無不善. 而有爲不善者, 外物誘音酉之也. 所謂格物以致其知者, 亦曰扞去上聲外物之誘而本然之善自明耳.'孔周翰說 是其爲說, 不亦善乎?" 曰: "'天生烝民, 有物有則', 則物之與道, 固未始相離去聲也."
"또 이 설을 발전시킨 자도 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났을 때에는 고요하니,[341] 그 본성은 본래 선하지 않음이 없다. 불선한 점이 있는 것은 외물이 꾄 것이다. 이른바 格物致知라는 것 역시 외물의 꾐을 막고 제거해 본래 그러한 선함이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것일 뿐이다.'孔周翰[342]의 설이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설이 괜찮지 않은가?" 대답했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음에, 物이 있으면 법칙이 있으니', 物과 道는 본래 애당초 서로 떨어진 적이 없다."
- 格菴趙氏曰: "物與理未嘗相離. 若離物以求理, 則空虚而無據, 豈得一切扞而去之?"
- 격암 조씨가 말했다: "物과 理는 본래 애당초 서로 떨어진 적이 없다. 만약 物을 떠나 理를 찾는다면 텅 비어 근거할 것이 없을 것이니, 어찌 모두 막고 제거할 수 있겠는가?"
"今曰: '禦外物而後可以知至道', 則是絶父子而後可以知孝慈; 離如字君臣而後可以知仁敬也, 是安有此理哉? 若曰: '所謂外物者, 不善之誘耳, 非指君臣父子而言也', 則夫音扶外物之誘, 人莫甚於飲食男女之欲. 然推其本, 則固亦莫非人之所當有而不能無者也. 但於其間自有天理人欲之辨, 而不可以毫釐力之反正作氂差耳."
"만일 '외물을 막은 이후에야 至道를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부자관계를 끊은 이후에야 孝慈를 알 수 있다는 것이며, 군신관계를 떠난 이후에야 仁敬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니,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만약 '이른바 外物이란 불선의 꾐일 뿐이니, 군신·부자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저 '外物의 꾐'으론 식욕·색욕[343]보다 심한 것이 없을 것이지만, 그 근본을 헤아려 본다면 진실로 [이러한 욕구] 역시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것으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그 가운데 본래 천리와 인욕의 구별이 있어 털끝만큼도 어긋나서는 안 될 뿐이다."
- 問: "飲食之間, 孰為天理, 孰為人欲?" 朱子曰: "飲食者, 天理也; 要求美味, 人欲也."
- 물었다: "'먹고 마시는 것'(飲食)에서 무엇이 천리이고 무엇이 인욕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먹고 마시는 것은 천리이고, 맛있는 것을 찾는 것은 인욕이다."
"惟其徒有是物而不能察於吾之所以行乎其間者, 孰爲天理, 孰爲人欲. 是以無以致其克復之功, 而物之誘於外者得以奪乎天理之本然也. 一[344]不即物以窮其原, 而徒惡去聲物之誘乎己, 乃欲一切扞而去上聲之, 則是必閉口枵虚驕反腹然後可以得飲食之正; 絶滅種上聲類然後可以全夫婦之别筆列反也. 是雖裔以制反戎無君無父之教有不能充其說者, 况乎聖人大中至正之道而得以此亂之哉!"
- 이러한 物이 있음만 생각하고 그 사이에서 내가 행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천리이며 어떤 것이 인욕인지 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극기복례의 공부를 다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의 物의 꾐이 본래 그러한 천리를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物에 나아가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그저 物이 자신을 꾐만 미워해 모두 막고 제거하려 한다면, 이러한 [목표는] 입을 막고 배를 비운 뒤에야 먹고 마심의 정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종족을 끊어버린 뒤에야 부부의 구별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오랑캐의 '임금도 없고 부모도 없는' 가르침도 이러한 설을 충족시킬 수가 없는데, 하물며 성인의 지극히 중정한 도리를 이러한 것으로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8. 程門 제자의 格物致知설에 대한 평가
○曰: "自程子以格物爲窮理, 而其學者傳之見形甸反於文字多矣. 是亦有以發其師說而有助於後學者耶?" 曰: "程子之說, 切於己而不遺於物; 本於行事之實而不廢文字之功; 極其大而不略其小; 究其精而不忽其粗. 學者循是而用力焉, 則既不務博而陷於支離, 亦不徑約而流於狂妄. 既不舍上聲其積累之漸, 而其所謂豁然貫通者, 又非見聞思慮之可及也."
물었다: "정자께서 格物을 '窮理'로 여기신 뒤로 정자께 배운 자들이 그 설을 글로 표현해 전한 경우가 많다. 이 역시 자기 스승의 설을 밝혀 후학에게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대답했다: "정자의 설은 자신에게 절실하면서도 남을 빠뜨리지 않고, 실제적인 실천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글공부를 폐하지 않으며, 큰 것을 지극히 하면서도 작은 것을 생략하지 않고, 정밀한 것을 궁구하면서도 거친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배우는 자가 이를 따라 힘쓴다면, 넓게 하는데 힘쓰더라도 지리한 데 빠지지 않으며, 간략함을 말미암더라도 허무맹랑한 데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정자의 설은] 점진적인 공부를 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자 설에서] 이른바 '豁然貫通'이라는 것 역시 [일반적인] 생각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新安陳氏曰: "'務博陷於支離', 博物洽聞[345]之徒; '徑約流於狂妄', 禪學頓悟之徒. 一句說盡世人爲學之弊."
- 신안 진씨가 말했다: "'務博陷於支離'는 박식을 [추구하는] 무리이고, '徑約流於狂妄'은 선학의 돈오를 [주장하는] 무리이다.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이 학문하면서 [저지르는] 폐단을 모두 표현했다."
"是於說經之意、入徳之方, 其亦可謂反復芳服反, 亦作覆. 後凡言反復音同.詳備而無俟於發明[346]矣."
"이는(정자가 格物을 '窮理'로 풀이한 설) 경전을 해설한 뜻으로나 덕을 갖추는 방법으로나 ?? '반복하고 상세히 [설명해서 더 이상] 밝힐 것이 없다'고 말할 만하다."
- 朱子曰: "博學, 亦非欲求異聞雜學方謂之博. 博之與約, 初學且須作兩途理㑹. 一面博學, 又自一面持敬守約, 莫令兩下[347]相靠[348]; 須兩路進前用工, 塞斷中間, 莫令相通. 將來成時, 便自有㑹通處. 若不如此兩下用工, 成甚次第[349]?"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博學' 역시 색다르거나 뒤섞은 배움을 찾으려고 하고 나서야 '博'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博'과 '約'은 초학자라면 우선 별개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博學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持敬·守約해서 양자가 서로 닿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두 길로 나아가며 공부해, 중간을 막고 끊어 서로 통하지 않게 해야 한다. [공부가] 완성될 때 저절로 통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 두 가지로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
"若其門人雖曰: '祖[350]其師說', 然以愚考之, 則恐其皆未足以及此也. 蓋有以必窮萬物之理同出於一爲格物; 知萬物同出乎一理爲知至. 如合内外之道則天人物我爲一; 通晝夜之道則死生幽明爲一; 逹哀樂音洛好惡並去聲之情則人與鳥獸魚鼈爲一; 求屈伸消長上聲之變則天地山川爲一者, 似矣.吕與叔說 然其欲必窮萬物之理而專指外物, 則於理之在己者有不明矣; 但求衆物比類之同而不究一物性情之異, 則於理之精微者有不察矣; 不欲其異而不免乎四說之異; 必欲其同而未極乎一原之同, 則徒有牽合之勞而不睹貫通之妙矣. 其於程子之說, 何如哉?"
"예를 들어, 정자의 문인이 '자기 스승의 설을 본받았다'고 말했더라도, 내가 살펴보니 정자 문인 모두가 이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만물의 理가 똑같이 하나(一)에서 나옴을 반드시 궁구하는 것을 格物로 여기고, 만물이 똑같이 하나(一)에서 나옴을 아는 것을 知至로 여기며, [정자가 말한] 「合内外之道」[351]는 하늘과 인간·사물과 내가 하나되는 것이라고 [여기고], [정자가 말한]「通晝夜之道」[352]는 죽음과 삶·저승과 이승이 하나되는 것이라고 [여기며], 哀樂·好惡의 감정에 통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간과 鳥獸魚鼈이 하나되는 것으로 [여기고], 屈伸消長의 변화를 탐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天地山川이 하나되는 것으로 [여기는] 자가 있는데, 그럴 듯하다.吕與叔의 설이다 그러나 그가 만물의 理를 반드시 궁구하려고 하면서 오직 外物만 가리킨 것은 내게 있는 理에 대해 밝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고, 뭇 사물 부류의 공통점만 탐구하고 개별 사물의 性情 차이는 탐구하지 않은 것은 理의 자세한 부분에 살피지 않은 점이 있는 것이며, [정자의 설과] 다르고자 하지 않으면서 [정자의] 네 가지 설에 대해서는 다름을 면하지 못했고, [정자의 설과] 같고자 하면서 하나의 동일한 근원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억지로 갖다 붙이는 수고만 있었을 뿐 관통하는 신묘함을 보지 못했다. 그가 정자의 설에 대해 어떠한가?"
"又有以爲窮理只是尋箇是處, 然必以恕爲本而又先其大者, 則一處理通而觸樞玉反處皆通者.謝顯道說 其曰: '尋箇是處'者則得矣, 而曰: '以恕爲本', 則是求仁之方而非窮理之務也. 又曰: '先其大者', 則不若先其近者之切也. 又曰: '一處通而一切通', 則又顔子之所不能及、程子之所不敢言, 非若類推積累之可以循序而必至也."
"또 '窮理는 다만 옳은 것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恕를 근본으로 여겨야 하고, 또 큰 것을 우선해야 하니, 한 곳의 理에 통달하면 닿는 곳마다 모두 통달할 것이다'라고 여긴 자가 있었다.謝顯道의 설이다. 그가 '옳은 것을 찾는다'고 말한 것은 맞지만, '恕를 근본으로 한다'고 말한 것의 경우, [恕는] 仁하기 위한 방법이지[353] 窮理에 힘쓰는 것이 아니다. 또 '큰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비근한 것을 우선하는 것이 절실함만 못하다. 또 '한 곳의 [理에] 통달하면 [닿는 곳마다] 모두 통달한다'는 것은 또 안자께서도 미치지 못했던 바이며, 정자께서도 감히 말씀하시지 못하셨던 것이니,[354] [아는 것에서부터] 유추하고 쌓아나는 [식으로 일정한] 단계를 거쳐 [목표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는 것만 못하다."
- 朱子曰: "謝氏'尋箇是處'之說甚好, 與吕與叔'必窮萬物之理同出於一為格物, 知萬物同出乎一理為知至', 其所見大叚不同. 但'尋箇是處'者, 須是於其一二分是處直窮到十分是處, 方可."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량좌의 '옳은 것을 찾는다'는 말은 매우 좋으니, 여여숙의 '만물의 理가 똑같이 하나(一)에서 나옴을 반드시 궁구하는 것을 格物로 여기고, 만물이 똑같이 하나(一)에서 나옴을 아는 것을 知至로 여기는 것'과는 견식이 매우 다르다. 그러나 '옳은 것을 찾는다'는 것은 10~20% 옳은 것에서 단지 100% 옳은 것을 궁구해야 한다. ??"
"又有以爲天下之物不可勝平聲窮, 然'皆備於我'而非從外得也. 所謂格物, 亦曰'反身而誠', 則天下之物無不在我者, 是亦似矣.楊中立說 然'反身而誠'乃爲物格知至以後之事, 言其窮理之至無所不盡. 故凡天下之理反求諸身, 皆有以見其如目視、耳聽、手持、足行之畢具於此而無毫髮之不實耳, 固非以是方爲格物之事, 亦不謂但務反求諸身而天下之理自然無不誠也. <中庸>之言'明善'即物格知至之事; 其言'誠身'即意誠心正之功. 故不明乎善, 則有反諸身而不誠者. 其功夫地位固有序而不可誣矣. 今爲格物之說, 又安得遽以是而爲言哉?"
"또 '천하의 사물[의 理를] 이루 다 궁구할 수 없다. 그러나 [理는]「모두 내게 갖춰져 있지」[355] 외부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格物이라는 것 역시「자신을 반성해 진실하면」 천하 사물[의 理 가운데] 내게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여긴 자가 있었다.楊中立의 설이다. 그러나 '자신을 반성해 진실하다'는 것은 바로 '物格知至' 이후의 일이니, 窮理가 완성되어 빠뜨린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천하의 理를 돌이켜 자신에게 구하면, 누구나 천하의 理가 '눈의 봄·귀의 들음·손의 쥠·발의 걸음이 이 몸에 모두 갖춰져 털끝만큼도 실제적이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진실로 이러한 것을 바로 格物의 일로 여긴 것도 아니고, 또 '그저 돌이켜 자신에게 찾는데 힘쓰면 천하의 理가 저절로 진실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중용>에서 말한 '明善'은 物格知至의 일이고, <중용>에서 말한 '誠身'은 意誠心正의 공효이다. 그러므로 '선에 밝지 않으면 자신에게 돌이켜보았을 때 진실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다.'[356] 공부의 단계에 진실로 차례가 있으니 속일 수 없다. 지금 格物에 대한 해설을 하면서, 또 어찌 바로 이것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는가?"
"又有以'今日格一物, 明日格一物'爲非程子之言者,尹彦明說 則諸家所記程子之言, 此類非一, 不容皆誤. 且其爲說正<中庸>學問思辨、弗得弗措之事, 無所咈音佛於理者. 不知何所病而疑之也? 豈其習於持敬之約而厭夫音扶下同觀理之煩耶? 抑直以己所未聞而不信他人之所聞也? 夫持敬觀理不可偏廢, 程子固已言之. 若以己偶未聞而遂不之信, 則以有子之似聖人, 而速貧速朽之論猶不能無待於子游而後定. 今又安得遽以一人之所未聞而盡廢衆人之所共聞者哉?"
"또 '「오늘 하나를 궁구(格)하고 내일 하나를 궁구(格)하라」는 것은 정자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여긴 자가 있었다.尹彦明의 설이다. 여러 학자가 기록한 정자의 말씀 가운데 이러한 것이 하나는 아니고, 모두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우선 정자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중용>의 '學問思辨'과 '弗得弗措'의 일이니,[357] 理에 어긋난 것이 없다. 잘 모르겠지만, [윤돈은] 무엇을 문제로 여겨 의심한 것인가? 어찌 그가 持敬의 간략함에 익숙하고 觀理의 번거로움에 염증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단지 자신이 듣지 못했다고 해서 남이 들은 것을 불신한 것인가? 持敬과 觀理는 한쪽을 폐해서는 안 되니, 정자께서 진실로 이미 말씀하셨다. 만일 자신이 우연히 듣지 못했다고 해서 마침내 신뢰하지 않는 것은, 유자의 [생각이] 성인과 같은데도 '速貧速朽'에 대한 설명을 자유에게 기대지 않고서는 확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 또 어찌 급히 한 사람이 듣지 못했다 해서 여러 사람이 함께 들은 것을 모두 폐할 수 있겠는가?"
- <禮記> <檀弓> 有子問於曽子曰: "問當作聞喪去聲於夫子乎?喪, 謂失位去國. 曰: "聞之矣. 喪欲速貧, 死欲速朽." 有子曰: "是非君子之言也." 曽子曰: "參也與子游聞之." 有子曰: "然, 然則夫子有爲去聲言之也." 曽子以斯言告於子游, 子游曰: "甚哉! 有子之言似夫子也. 昔者夫子居於宋, 見桓司馬宋向戌之孫, 名魋.自為石槨, 三年而不成. 夫子曰: '若是其靡也, 死不如速朽之愈也.' 死之欲速朽, 為桓司馬言之也. 南宫敬叔反,魯仲孫閲嘗失位去國而得反. 必載寳而朝. 夫子曰: '若是其貨也, 喪不如速貧之愈也.' 喪之欲速貧, 為敬叔言之也." 曽子以子游之言告於有子, 有子曰: "然. 吾固曰非夫子之言也."
- <예기> <단궁상> 유자가 증자에게 물었다: "선생님께 벼슬에서 물러났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들은 게 있는가?" 증자가 대답했다: "그에 대해 들었다. '벼슬에서 물러났으면 빨리 가난해지려고 하고, 죽었으면 빨리 썩으려고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유자가 말했다: "이는 군자의 말이 아니다." 증자가 대답했다: "나는 자유와 함께 이를 들었다." 유자가 말했다: "그렇가?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까닭이 있어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증자가 이 말을 자유에게 하니, 자유가 말했다: "훌륭하구나! 유자의 말이 선생님과 같다. 전에 선생님께서 송나라에 머무실 때, 환퇴가 스스로 석곽을 만드는데 3년이 되도록 완성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는, '이렇게 화려하다니! 차라리 죽어서 빨리 썩는 것만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즉] '죽어서 빨리 썩는다'는 것은 환퇴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남궁경숙이 돌아오고나서 반드시 보물을 싣고 임금을 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뇌물을 쓰다니! 차라리 벼슬에서 물러나 빨리 가난해지는 것만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즉] '벼슬에서 물러나 빨리 가난해진다'는 것은 남궁경숙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증자가 자유의 말을 유자에게 하니, 유자가 말했다: "그렇다! 내가 진실로 '선생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말했었다."
"又有以爲物物致察而宛轉歸己, 如察天行以自强, 察地勢以厚徳者, 亦似矣.胡安國說 然其曰: '物物致察', 則是不察程子所謂'不必盡窮天下之物'也; 又曰: '宛轉歸己', 則是不察程子所謂'物我一理, 纔明彼即曉此'之意也; 又曰: '察天行以自强, 察地勢以厚徳', 則是但欲因其已定之名, 擬其已著之迹, 而未嘗如程子所謂'求其所以然與其所以爲'者之妙也. 獨有所謂'即事即物, 不厭不棄而身親格之以精其知'者, 爲得致字向裏之意. 而其曰: '格之之道, 必立志以定其本, 居敬以持其志. 志立乎事物之表, 敬行乎事物之内, 而後知乃可精'者,胡仁仲說 又有以合乎所謂'未有致知而不在敬者'之指. 但其語意頗傷急迫, 既不能盡其全體規模之大, 又無以見其從七恭反容潛玩、積乆貫通之功耳."
"또 '[격물이란] 사물마다 자세히 살펴서 宛轉하게?? 자신에게 귀결시키는 것이니, 하늘의 운행을 관찰하여 자신을 강하게 하고,[358] 땅의 형세를 관찰하여 덕을 두텁게 하는 것[359]과 같다'고 여기는 자가 있었으니, 그럴 듯하다.胡安國의 설이다.[360] 그러나 그가 '사물마다 자세히 살핀다'고 한 것은 정자의 '천하의 사물을 모두 궁구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살피지 않은 것이고, 또 '宛轉하게?? 자신에게 귀결시킨다'고 한 것은 정자의 '사물과 나는 동일한 理를 [갖고 있으니], 저것을 밝히자마자 이것을 알게 된다'는 뜻을 살피지 않은 것이며, 또 '하늘의 운행을 관찰하여 자신을 강하게 하고, 땅의 형세를 관찰하여 덕을 두텁게 한다'고 한 것은 단지 이미 정해진 이름을 따르고 이미 드러난 자취에 의거하는 것이니, 정자의 이른바 '그 所以然과 그 所以爲를 찾는 묘함'과 같았던 적이 없는 것이다. 오직 이른바 '사물에 나아가 싫증내지도 버리지도 않고 몸소 직접 궁구해 앎을 정밀하게 한다'는 것이 있으니, '致'자의 향내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다 하겠다. 그가 '궁구하는 방법은 반드시 뜻을 세워 근본을 확정하고, 居敬해 그 뜻을 유지하는 것이다. 뜻이 사물 밖에서 확립되고 敬이 사물 안에서 행해진 뒤에야 앎이 정밀해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또 [정자의] '致知하면서 敬에 있지 않은 경우는 없다'는 뜻에 부합한다. 다만 그의 표현이 급박하다는 작지 않은 문제가 있어 정자의 큰 전체 규모를 포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자의 느긋하게 익히고 누적이 오래되어 통달하게 되는 공부를 보지 못한다."
- 朱子曰: "'身親格之', 說得親字急迫, 不成是倩人格?"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身親格之'에서 '親'자를 말한 것이 급박하니, 남한테 부탁해서 궁구(格)하겠는가!"[361]
- ○此叚本說得精, 然却有病者, 只說得向裏來, 不曾説得外面, 所以語意頗傷急迫. 蓋致知本廣大, 須說得表裏内外、周遍兼該, 方得. 其曰: "志立乎事物之表, 敬行乎事物之内", 此語極好. 而曰: "知乃可精", 便有局促氣象. 他須要就這裏便精其知, 殊不知致知之道不如此急迫. 須是寛其程限[362], 大其度量, 久久自然通貫. 他只說得裏面一邊極精, 遺了外面一邊, 所以其規模之大不如程子. 且看程子所說: "今日格一物, 明日格一物, 積久自貫通", 此言該内外, 寛緩不迫, 有涵泳從容之意. 所謂"語小天下莫能破, 語大天下莫能載"也.
- 이 단락은 본래 정밀하게 말했지만 병폐가 있다. 내면에 대해서만 말하고 외면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표현이 급박하다는 상당한 단점이 있다. 대개 致知는 본래 광대해서 안팎을 두루 빠짐 없이 말해야 한다. 그가 '뜻은 사물 밖에서 세워지고, 敬은 사물 안에서 행해진다'고 한 이 말은 매우 좋다. 그러나 '앎이 그제서야 정밀해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급박한 느낌이 있다. 그는 여기에서 앎을 정밀하게 하려고 했으니, 致知하는 방법이 이렇게 급박하지 않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반드시 기한을 여유롭게 두고 도량을 크게 해 오래 되면 저절로 통달하게 된다. 그는 그저 내면 하나에 대해서만 매우 지극하게 말하고 외면은 빠뜨렸기 때문에, 규모가 정자만 못한 것이다. 또 정자께서 '오늘 하나를 궁구하고 내일 하나를 궁구해, 누적이 오래되면 저절로 통달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말은 안팎을 겸하면서도 여유 있고 급박하지 않아 천천히 젖어드는 뜻이 있다. 이른바 '작은 것을 말하면 누구도 쪼갤 수 없고, 큰 것을 말하면 천하도 실을 수 없다'[363]는 것이다.[364]
- ○問'立志以定其本, 居敬以持其志.' 曰: "人之爲事, 必先立志以為本. 志不立, 則不能爲得事. 雖能立志, 苟不能居敬以持之, 此心亦泛然而無主, 悠悠終日, 亦只是虛言. 立志必須髙出事物之表, 而居敬則常存於事物之中, 令此敬與事物皆不相違. 言也須敬, 動也須敬, 坐也須敬, 頃刻去他不得."
- '뜻을 세워 근본을 확정하고, 居敬해 뜻을 유지한다'에 대해 물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이 뭔가를 할 때 반드시 먼저 뜻을 세워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뜻이 확정되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비록 뜻을 세울 수 있더라도 居敬해 유지하지 못한다면, 이 마음은 역시 泛然히 주재가 없어 아득한 채로 하루를 보낼 것이니, ['立志'라는 말] 역시 허언이 되버린다. '뜻을 세우는 것'은 반드시 사물 밖에 높이 드러나야 하고, '居敬'은 늘 사물 안에 보존되어 이 敬과 사물 모두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말할 때에도 敬하고, 움직일 때에도 敬하며, 앉아있을 때에도 敬해서 잠시라도 敬에서 떨어져서는 안 된다."
"嗚呼! 程子之言, 其答問反復之詳且明也如彼, 而其門人之所以爲說者乃如此. 雖或僅有一二之合焉, 而不免於猶有所未盡也. 是亦不待七十子喪去聲而大義已乖矣.出<家語>後序 尚何望其能有所發而有助於後學哉?
"아! 정자의 말씀하신 문답이 반복되어 상세하고도 명백한 것이 저와 같은데, 그의 문인들이 말한 것은 도리어 이와 같다. 비록 혹시 겨우 10~20%라도 부합하는 점이 있더라도, 여전히 포괄하지 못하는 점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니, [공자의] 칠십 제자가 죽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대의가 이미 어그러졌다.<공자가어> 후서에 나온다.[365] 그런데도 어찌 그들이 계발한 바가 있어 후학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겠는가?"
- 朱子曰: "程子說更不可易. 某當初於呂、謝、楊、尹說, 叚叚録出, 句句比對, 逐字秤停[366]過, 方見程子說攧撲不破, 諸說挨著便成粉碎, 諸說皆失了程子意. 此正是入門欵, 於此既差, 他可知矣."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정자의 설은 더이상 바꿀 수 없다. 나는 원래 여여숙·사상채·양귀산·윤화정의 설을 단락마다 기록해두고 구절마다 비교하며 글자마다 헤아려보았고, 그제서야 정자의 설을 어떻게 해도 깨뜨릴 수 없고, 정자 제자들의 설은 줄줄이 분쇄되어 그들의 설 모두 정자의 뜻을 놓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격물치지)은 바로 입문에 [해당하는] 조목이니, 여기서 어긋나면 다른 것도 알 수 있다."[367]
- ○程子諸門人說得都差, 不曽精曉程子之說. 亦縁當時諸公所聞於程子者語意不全, 所以多差, 後來集註家語録凑起衆說, 此叚工夫方是渾全. 然則當時親炙, 未為全幸; 生先生之後者, 未為不幸也.
- 정자의 여러 문인들이 말한 것은 모두 어긋나 정자의 설을 제대로 이해한 경우가 없었다. 또 당시 여러 선생이 정자께 들은 내용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많이 차이를 보여, 나중에 주석가의 어록이나 여러 설을 모으고 나서야 이 공부(격물치지)가 비로소 온전해졌다. 그렇다면 당시에 [정자께] 직접 수업을 들었다고 해서 십분 다행인 것도 아니고, 선생 뒤에 태어난 것도 불행이 아니다.[368]
"間獨惟念昔聞延平先生之教,李先生名侗, 字愿中, 延平人, 朱子之師也. 以爲'爲學之初, 且當常存此心, 勿爲他事所勝. 凡遇一事, 即當且就此事反復推尋以究其理, 待此一事融釋脫落, 然後循序少進, 而别窮一事. 如此既久, 積累之多, 胷中自當有洒然處, 非文字言語之所及也.' 詳味此言, 雖其規模之大、條理之宻, 若不逮於程子. 然其功夫之漸次、意味之深切, 則有非他說所能及者. 惟嘗實用力於此者, 爲能有以識之, 未易去聲以口舌爭也."
"근래에 유독 전에 들었던 연평 선생의 가르침이 떠올랐다.이선생의 이름은 侗이고 자는 愿中이니 延平 사람으로, 주자의 스승이다. [연평 선생께서는] '학문하는 첫 단계에는 우선 이 마음을 늘 보존하여 다른 일에 압도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무릇 어떤 일을 마주쳤을 때에는 우선 이 일을 반복해 탐구해 그 안의 理를 찾아야 하고, 한 가지 일이 눈 녹듯 해결된 연후에 차례대로 조금씩 나아가 다른 일을 궁구해야 한다. 이런 식이 오래 되고 누적한 것이 많게 되면, 가슴 속에 저절로 응당 시원한 부분이 있을 것이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잘 살펴보니, 비록 규모의 크기나 조리의 엄밀성이 정자의 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공부의 단계나 의미의 깊이는 다른 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오직 이에 실제로 힘쓴 자만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요, 쉽게 말로 다툴 문제가 아니다."
- 格菴趙氏曰: "程子言: '若一事窮未得, 且别窮一事'; 延平則言: '且就一事推尋, 待其融釋脫落, 然後别窮一事', 其言不同. 盖程子以人心各有明處有暗處, 若就明處推去, 則易為力, 非謂一事未窮得而可貳以二、參以三也. 若延平則專爲不能主一者之戒. 讀者不可以辭害意."
- 격암 조씨가 말했다: "정자께서는 '만약 한 가지 일을 아직 다 궁구하지 못했다면 우선 다른 일을 궁구하라'고 말씀하셨고, 연평 선생께서는 '우선 한 가지 일을 탐구해 눈 녹듯 해결된 연후에 다른 일을 궁구하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이 같지 않다. 대개 정자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각각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있으니, 밝은 부분에서 탐구한다면 쉽게 힘을 낼 수 있다'고 여기신 것이지, '한 가지 일을 아직 궁구하지 못했더라도 두 번째·세 번째로 옮겨가도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연평 선생의 경우는 오직 主一하지 못하는 자에 대해 경계하신 것이다. 독자는 표현을 가지고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9.
曰: "然則所謂'格物致知之學', 與世之所謂'博物洽聞'者, 奚以異?" 曰: "此以反身窮理爲主, 而必究其本末是非之極摯與至同; 彼以徇外誇多爲務, 而不覈下革反其表裏眞妄之實. 然必究其極, 是以知愈博而心愈明; 不覈其實, 是以識愈多而心愈窒陟力反. 此正爲去聲下同己爲人之所以分, 不可不察也."
물었다: "그렇다면 이른바 '격물치지의 학문'은 세간의 이른바 '博物洽聞'이라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대답했다: "이것(격물치지)은 자신을 반성하고 理를 궁구하는 것을 위주로 하니, 반드시 본말·시비의 극치를 궁구한다. 저것(博物洽聞)은 외물을 좇아 박식을 과장하는 데 힘쓸 뿐 표리·眞妄의 실질은 탐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격물치지는] 반드시 극치를 궁구하기 때문에 앎이 넓어질수록 마음이 더욱 밝혀지는 반면, [博物洽聞은] 실질을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지식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막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이 나뉘는 지점이니,[369] 살피지 않아선 안 된다."
- 濳室陳氏曰: "格物致知, 研窮義理, 心學也; 記誦博識, 口耳外馳, 喪志之學也. 二者正相反."
- 잠실 진씨가 말했다: "격물치지는 의리를 연구하니 마음의 학문이고, 記誦博識은 입과 귀가 밖으로 내달리니, 뜻을 해치는 학문이다.[370] 두 가지는 정반대이다."
傳六章
所謂誠其意者:毋自欺也,如惡惡臭,如好好色,此之謂自謙,故君子必慎其獨也!惡、好上字,皆去聲。謙讀為慊,苦劫反。
이른바 '誠其意'라는 것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듯이 하고 [선을 좋아하기를] 미모를 좋아하듯이 하는 것, 이것을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혼자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
- 誠其意者,自脩之首也。毋者,禁止之辭。自欺云者,知為善以去上聲下同惡此知字帶從上章致知之知字來,而心之所發有未實也。謙,快也,足也。朱子曰: "誠意章在兩箇自字上用功."獨者,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言欲自脩者知為善以去其惡,則當實用其力,而禁止其自欺。使其惡惡則如惡惡臭,好善則如好好色,皆務決去,而求必得之,以自快足於己,不可徒苟且以殉外而為去聲人也。不求自惬便是為人 然其實與不實,蓋有他人所不及知而己獨知之者,故必謹之於此此指獨字以審其幾焉。
- '誠其意'라는 것은 '自脩'[371]의 시작이다. '毋'는 금지사이다. '自欺'라는 것은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해야 함을 알면서도여기 '知'자는 앞 장의 '致知'의 知자에서 가져온 것이다. 마음에서 발현되는 것에 진실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다. '謙'은 만족스러움이다.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성의장은 두 自자(毋自欺, 自謙)에서 공부해야 한다." '獨'은 남은 모르고 자기만 아는 곳이다. 자신을 수양하고자 하는 자가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해야 함을 안다면, 마땅히 자신의 힘을 실제로 써서 스스로를 속이는 일을 금해, 악을 미워하기를 마치 악취를 싫어하듯이 하고 선을 좋아하기를 미모를 좋아하듯이 해서, [악은] 모두 없애는 데 힘쓰고 [선은] 구하면 반드시 얻어 자신에게 만족스럽게 해야지, 그저 구차하게 외물을 좇고 남을 위해서는 안 된다.스스로 만족스럽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진실함과 진실하지 못함은 대개 타인은 알 수 없고 자기만 알 수 있는 것이므로, 반드시 여기서(혼자만 아는 곳) 조심하며 기미를 살펴야 한다.
- ○朱子曰: "'㡬者, 動之微', 是欲動未動之間, 便有善惡, 便須就這處理㑹. 若到發出處, 更怎生奈何得?"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기미(㡬)라는 것은 움직임의 싹이다'[372]란 동하려고 하거나 동하지 않은 사이이니, [이때] 선악이 있으니[373]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발현되고 나면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 ○問: "知至了, 如何到誠意? 又說'毋自欺'?" 曰: "到這裏, 方可著手下工夫, 不是知至了下面許多一齊掃去. 下面節節有工夫在."
- 물었다: "知至하고 나서 어떻게 誠意합니까? 또 어째서 '毋自欺'라고 말한 것입니까?" 대답하셨다: "知至하고 나서야 비로소 공부에 착수할 수 있지, 知至하고 나면 다음의 많은 공부를 일절 제치는 것이 아니다. 知至 다음에 단계별로 공부가 있다."
- ○譬如一塊物, 外面是銀, 裏面是鐵, 便是自欺. 須表裏如一, 方是不自欺. 須是見得分曉, 如知烏喙不可食, 水火不可蹈, 則自不食不蹈. 如寒欲衣, 饑欲食, 則自是不能已. 人果見善如饑欲食寒欲衣, 見惡如烏喙不可食, 水火不可蹈, 則此意自是實矣.烏喙藥石, 食之, 能殺人.
- 어떤 덩어리에 비유하자면, 외면은 은인데 내면은 철이라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반드시 안팎이 한결같아야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이다. 마치 오훼는 먹어선 안 되고 물·불에 뛰어들어서는 안 됨을 아는 것처럼 분명히 안다면 스스로 오훼를 먹지도 물·불에 뛰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추우면 옷을 입으려 하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으려 하는 것은 본래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선천적으로 아는 것이다) 사람이 만약 마치 배고플 때 먹으려 하고 추울 때 옷을 입으려 하는 것처럼 선을 보고, 마치 오훼를 먹어선 안 되고 물·불에 뛰어들어선 안 되는 것처럼 악을 본다면, 이 뜻이 저절로 진실해질 것이다.오훼는 약석이니 먹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 ○自欺是半知半不知底人. 知道善我所當為, 却又不十分去為善; 知道惡不可為, 却又自家舎他不得, 這便是自欺. 不知不識只喚欺; 不知不識不喚做自欺.新安陳氏曰: "以上語, 以知為重. 見得物格知至為意誠之根基也."
- '自欺'는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사람이다. 선을 내가 실천해야 함을 알면서도 십분 선을 실천하지 못하고, 악을 내가 행해선 안 됨을 알면서도 스스로 악을 버리지 못하는 것, 이것이 '自欺'이다. 모르는 것은 '欺'라고만 부르지, 모르는 것을 '自欺'라고 부르지는 않는다.[374]신안 진씨가 말했다: "이상의 말은 앎(知)을 중시한 것이다. 物格知至가 意誠의 근거가 됨을 알겠다."
- ○纔說不自欺, 則其好善惡惡, 只要求以自快自足. 如寒而思衣以自溫, 饑而思食以自飽, 非有牽強苟且姑以為人之意也.
- '不自欺'를 말하는 순간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단지 스스로 만족스러움을 구하는 것이니 되니, 마치 추울 때 옷을 입어 스스로 따뜻하게 하고자 하고 배고플 때 음식을 먹어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억지로 구차하게 남을 위하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375]
- ○如鑄私錢, 做官㑹[376], 此是大故[377]無狀[378]小人, 豈自欺之謂耶? 此處工夫極細, 未便說到粗處. 前後學者說差了. 縁賺[379]連下文'小人閒居'一節看了, 所以差也.
- 私錢을 주조하고 지폐를 위조하는 것은 매우 볼썽사나운 소인이니, 어찌 '自欺'를 말하는 것이겠는가? 이 공부(성의)는 지극히 세밀하니, 거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앞뒤 학자들이 잘못 설명했다. 다음의 '小人閒居'와 잘못 이어 봤기 때문에 틀린 것이다.[380]
- ○如有九分義理, 雜了一分私意, 便是自欺. 到得厭然揜著之時, 又其甚者.
- 의리가 90%이고 사의가 10% 뒤섞였다면 '自欺'이다. '슬쩍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는 때가 되면 ['自欺'가] 더욱 심한 경우이다.[381]
- ○十分為善, 有一分不好底意潜發於其間, 便由邪徑以長, 這箇却是實, 前面善意却是虚矣.
- 100% 선을 행하더라도 10% 좋지 못한 뜻이 그때 슬그머니 발한다면 삿된 길을 통해 [좋지 못한 뜻이] 자라니, 이것(선을 행한 것)은 진실하지만, 앞의 선의는 허위이다.[382]
- ○凡惡惡之不真, 為善之不勇, 外然而中實不然, 或有為而為之, 或始勤而終怠, 皆不實而自欺之患也.
- 악을 미워함에 진실하지 않고, 선을 행함에 용감하지 않으며, 겉으로는 옳게 여기면서 속으로는 사실 옳게 여기지 않고, 어떨 때는 까닭이 있어 하고, 어떨 때는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 끝에 가서는 해이해지니, 이 도무는 진실하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는 근심거리이다.[383]
- ○論自欺細處: 且如為善, 自家也知得是當為, 也勉強去做, 只是心裏又有些便不消如此做也不妨底意思; 如為不善, 也知得不當為而不為, 心中也又有些便為也不妨底意思, 便是自欺, 便是虚偽不實矣.
- '스스로를 속이는(自欺)' 디테일한 상황을 따져보자: 선을 행하는 경우, 스스로도 이것을 마땅히 행해야 하고 힘써야 함을 알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하지 않다고 괜찮다'는 생각이 있고, 불선을 행하는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됨을 알아서 하지 않지만,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있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거짓되어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384]
- ○"'自謙', 與<孟子>'行有不慊於心'相類, 亦微不同. <孟子>訓滿足意多, <大學>訓快意多." 問: "'自謙'只是真實為善去惡, 無牽滯於己私, 只是快底意, 方是心下滿足?" 曰: "是."
- "'自謙'은 <맹자>의 '행실이 마음에 만족스럽지 않다(行有不慊於心)'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맹자>의 의미는 '만족스럽다'는 뜻이 많고, <대학>의 의미는 '시원하다'는 뜻이 많다." 물었다: "'自謙'은 진실하게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함에 사욕에 얽매이지 않는 것일 뿐이요, '시원하다'는 뜻이며, 그러고나서야 만족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까?" 대답하셨다: "그렇다."[385]
- ○自謙是合下好惡時便是要自謙了, 非謂做得善了方能自謙. 自謙正與自欺相對. 所謂誠其意, 便是要毋自欺, 非是誠其意了, 方能不自欺也. 自謙者, 外面如此, 中心也是如此, 表裏一般; 自欺者, 外面如此, 中心其實有些子不願. 只此便是二心, 誠偽之所由分也.
- '自謙'은 좋아하거나 싫어할 때 당장 스스로 만족스러워야 한다는 것이지, 선을 행하고 나서 비로소 스스로 만족스러워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自謙'은 '自欺'와 정반대이다. '자기 뜻을 진실하게 한다(誠其意)'라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 자신의 뜻을 진실하게 하고 나서 비로소 스스로를 속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自謙'이라는 것은 밖으로 이러하다면 마음속도 이와 같아 겉과 속이 똑같은 것이고, '自欺'라는 것은 밖으로는 이러한데 마음속으로는 조금 내키지 않는 점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둘로 만드는 것이니, 진실과 거짓이 나뉘는 지점이다.
- ○謹獨, 則於善惡之㡬察之愈精愈密.
- 혼자 있을 때 삼간다면, 선악이 나뉘는 기미를 살피는 것이 더욱 정밀해질 것이다.
- ○如與衆人對坐, 自心中發一念, 或正或不正, 此亦是獨處.
- 여러 사람들과 마주앉아있을 때 마음속에서 한 생각이 싹트면 바르기도 하고 바르지 않기도 하는데, 이 역시 '혼자 있는 경우'이다.
小人閒居為不善,無所不至,見君子而后厭然,揜其不善,而著其善。人之視己,如見其肺肝然,則何益矣。此謂誠於中,形於外,故君子必慎其獨也。閒,音閑。厭,鄭氏讀為黶。
소인은 혼자 있을 때 불선한 짓을 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가, 군자를 본 이후에 厭然히 자신의 불선을 가리고 선을 드러낸다. 남들이 자신을 봄이 마치 폐나 간을 보는 것과 같으니, [감춘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이를 '내면으로 진실하면 겉으로 드러난다'고 말하니,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가 혼자 있을 때 삼간다.
- 閒居,獨處也。厭然,消沮閉藏之貌。此言小人陰為不善,而陽欲揜之閒居為隂, 見君子為陽.,則是非不知善之當為與惡之當去上聲也非不知乃其秉彝之天不可泯沒者;但不能實用其力以至此耳。然欲揜其惡而卒不可揜,欲詐為善而卒不可詐,則亦何益之有哉!此君子所以重去聲以為戒,而必謹其獨也。
- '閒居'는 혼자 있는 경우이다. '厭然'은 막고 가리는 모습이다. 이 구절은 [다음을] 말한 것이다: 몰래 불선한 짓을 하면서 겉으로 그것을 숨기려 한다면, 이는 선은 행하고 악은 제거해야 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단지 실제로 힘을 써 이에 이르지 못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악을 가리려 하더라고 끝내 가릴 수 없고, 선을 거짓으로 행하려 하더라도 끝내 속일 수 없으니,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이것이 군자가 거듭 이를 경계하고 반드시 혼자 있을 때 삼가는 이유이다.
- 朱子曰: "'小人閒居為不善', 是誠心為不善也; '揜其不善而著其善', 是為善不誠也. 為惡於隠微之中而詐善於顯明之地, 將虚假之善來盖真實之惡, 自欺以欺人也. 然人豈可欺哉?"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小人閒居為不善'은 진심으로 불선을 행하는 것이고, '揜其不善而著其善'은 선을 행함에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몰래 악을 행하면서 겉으로 선을 꾸미는 것은 거짓된 설으로 진실한 악을 가리는 것이니, 자실을 속여 남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남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386]
- ○'閒居為不善', 便是'惡惡不如惡惡臭'; '揜不善, 著其善', 便是'好善不如好好色'.
- '閒居為不善'은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듯 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揜不善, 著其善'은 '선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君子小人之分, 却在誠其意處. 誠於為善, 便是君子; 不誠底便是小人.
-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誠其意'에 달려있다. 선을 행함에 진실하면 군자이니, 진실하지 않은 자는 소인이다.
曾子曰:「十目所視,十手所指,其嚴乎!」
증자께서 말씀하셨다: "열 눈이 보는 대상이며, 열 손이 가리키는 대상이니, 엄중하도다!"
- 引此以明上文之意。言雖幽獨之中,而其善惡之不可揜如此。可畏之甚也。
- 이것(증자의 말)을 인용해 앞 글의 의미를 밝혔다. 비록 혼자 있을 때라도 선악을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매우 두려워할 만함을 말한 것이다.
- 朱子曰: "此是承上文'人之視己, 如見其肺肝'之意. 不可說人不知, 人曉然共知如此. 人雖不知, 我已自知, 自是甚可皇恐了, 其與十目十手所視所指, 何異哉?"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앞 글의 '人之視己, 如見其肺肝'의 의미를 이은 것이다. 남들이 모른다고 말해선 안 되니, 남들은 이처럼 훤히 모두 알고 있다. 남이 비록 모르더라도 나는 이미 스스로 알고 있어서 스스로 매우 두려워할 만하니, 이것이 '열 눈이 보는 대상이며, 열 손이 가리는 바'와 무엇이 다르겠는가?"[387]
富潤屋,德潤身,心廣體胖,故君子必誠其意。胖,步丹反。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해주고 덕은 자신을 윤택하게 해주기에,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편안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자신의 뜻을 진실하게 한다.
- 胖,安舒也。言富則能潤屋矣,德則能潤身矣,故心無愧怍,則廣大寬平,而體常舒泰,德之潤身者然也。蓋善之實於中而形於外者如此,故又言此以結之。
- '胖'은 편안함이다. [이 구절은 다음을] 말한 것이다: 부는 집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고, 덕은 자신을 윤택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마음에 부끄러운 바가 없다면, [마음은] 넓고 안정되고 몸은 늘 편안해지니, '덕이 자신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대개 선이 '내면으로 진실하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와 같으므로, 다시 이를 말하여 마무리한 것이다.
- 朱子曰: "'富潤屋'以下, 是說意誠之驗如此. 心本是濶大底物事, 只因愧怍便卑狹. 被他隔礙了, 所以體不能得安舒."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富潤屋' 이하는 意誠의 결과가 이와 같음을 말한다. 마음은 본래 광대한 것인데, 부끄러움에 의해 협소해진다. 부끄러움에 의해 막혔기 때문에 몸이 편안할 수 없는 것이다."[388]
- ○毋自欺是誠意; 自慊是意誠
- '毋自欺'는 '誠意'이고, '自慊'은 '意誠'이다.
- ○小人閒居以下是形容自欺之情狀; 心廣體胖是形容自慊之意.
- '小人閒居' 이하는 '自欺'의 정황을 형용한 것이고, '心廣體胖'은 '自慊'의 의미를 형용한 것이다.
- ○無愧怍是無物欲之蔽, 所以能廣大.
- [마음에] 부끄러워하는 바가 없는 것이 [마음에] 물욕에 의한 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광대할 수 있다.
- 右傳之六章。釋誠意。朱子曰: "許多病痛都在誠意章, 一齊說了. 下面有些小病痛, 亦輕可. 此章最緊切. 若透過此一關此去做工夫便易了. 由是而之, 便駸駸[389]進於善, 而決不至下陷於惡矣."
- 이상은 전6장이니, '誠意'를 풀이하였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수많은 병통이 모두 성의장에 달려있으니, 모두 말했다. 이후의 여러 작은 병통들은 가벼이 여겨도 괜찮다. 이 장이 가장 핵심적이다. 만약 이 관문을 통과하고서 공부한다면 쉬울 것이다. 이로부터 나아간다면 빠르게 선을 진전시켜 결코 악에 빠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390]
- 經曰:「欲誠其意,先致其知。」又曰:「知至而后意誠。」蓋心體之明有所未盡,則其所發必有不能實用其力,而苟焉以自欺者。朱子曰: "<大學>雖使人戒夫自欺, 而推其本, 則必其有以用力於格物致知之地, 然後理明心一, 而所發自然莫非真實. 不然則正念方萌, 而私意隨起, 亦非力之所能制矣." ○若知有不至, 則其不至之處, 惡必蔵焉以為自欺之主, 雖欲致其謹獨之功, 亦且無主之能為而無地之可據矣. 此又傳文之所未發, 而其理已具於經者, 皆不可以不察也. 然或己明而不謹乎此,則其所明又非己有,而無以為進德之基。故此章之指,必承上章而通考之,然後有以見其用力之始終,其序不可亂而功不可闕如此云。
- <대학> 경문에서 "欲誠其意,先致其知"라고 했고, 또 "知至而后意誠"이라고 했다. 대개 心體의 밝음을 다 드러내지 못하면, 마음에서 발한 것 가운데 필시 자기 힘을 실제로 쓰지 못하는 것이 있어 구차하게 그 때문에 자신을 속일 것이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대학>이 비록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속이는 것을 경계하게 하지만, 그 근본을 추론해보면 반드시 격물치지 단계에 힘을쏟을 수 있은 연후에야 理가 밝혀지고 마음이 전일해져 [마음에서] 발한 것이 저절로 진실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격물치지하지 않는다면) 바른 생각이 막 싹텄을 때 이기적인 생각이 따라 일어나 힘으로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다."[391] ; 만약 앎에 지극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지극하지 않은 곳에서 악이 반드시 숨어서 스스로를 속이는 주체가 될 것이니, 비록 '謹獨'의 공부를 다하려 하더라도 해낼 수 있는 주체가 없고 근거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또 전문에서 말하지 않았지만 그 이치는 이미 경문에 갖춰져 있는 것이니, 모두 살피지 않아선 안 된다. 그러나 혹시라도 [心體가] 이미 밝은데 여기서 삼가지 않는다면, 밝은 것이 다시 제 소유가 아니게 되어 덕을 진전시키는 기초로 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의미는 반드시 앞 장을 이어 전체적으로 살펴본 연후에야 실천의 순서와 그 순서를 어지럽혀선 안 되며 공부는 빠드려서는 안 됨이 이와 같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혹문』 전6장
或問: "六章之㫖, 其詳猶有可得而言者邪?" 曰: "天下之道二, 善與惡而已矣. 然揆厥所元而循其次第, 則善者天命所賦之本然; 惡者物欲所生之邪穢也. 是以人之常性莫不有善而無惡, 其本心莫不好去聲下並同善而惡惡上去聲下如字. 此後可惡其惡惡之不惡而惡好惡並去聲. 然既有是形體之累而又爲氣稟之拘. 是以物欲之私得以蔽之, 而天命之本然者不得而著. 其於事物之理, 固有瞢莫中反然不知其善惡之所在者, 亦有僅識其粗而不能眞知其可好可惡之極者. 夫音扶下同不知善之眞可好, 則其好善也雖曰好之, 而未能無不好者以拒之於内; 不知惡之眞可惡, 則其惡惡也雖曰惡之, 而未能無不惡者以挽音晚之於中. 是以不免於苟焉以自欺, 而意之所發有不誠者."
혹자가 물었다: "6장 뜻의 상세한 부분에 대해 더 말해줄 수 있는가?" 대답했다: "세상의 길은 善과 惡 두 가지일 뿐이다. 그러나 선악의 근원을 헤아려 그 순서를 따라가 보면, 선이라는 것은 天命이 부여한 본래적인 것이고, 악이라는 것은 물욕이 낳은 삿되고 더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항상된 性은 선만 있고 악은 없으며, 사람의 本心은 선을 좋아하고 惡을 싫어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그러나 형체가 얽매고 또 기품에 의해 구속되기 때문에, 이기적인 물욕이 그 본심을 가리고 天命이 부여한 본래적인 것이 드러나지 못한다. 그러한 사람은 사물의 이치에 대해서 진실로 멍청하게 그 善惡의 소재을 알지 못하기도 하고, 또 겨우 사물의 이치를 거칠게나마 알았더라도 좋아해야 할 것과 싫어해야 할 것의 극치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무릇 선을 진실로 좋아해야 함을 알지 못한다면, 그가 선을 좋아하는 것을 비록 '좋아한다'고 말하더라도 좋아하지 않음이 없을 수 없어서 마음에서 그것(선)을 막게되고, 악을 진실로 싫어해야 함을 알지 못한다면, 그가 惡을 싫어하는 것을 비록 '싫어한다'고 말하더라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 없을 수 없어서 마음으로 그것(악)을 끌어온다. 그러므로 결국 구차하게 이런 식으로 자신을 속이고, 意가 발현됨에 진실하지 않은 점이 있게 되는 것이다."
- 北溪陳氏曰: "造化流行, 生育賦與, 更無别物, 只是箇善而已. 所謂善者, 以實理言. 人受得此理以為善[392], 亦本善而無惡. 如外好善而内不好善, 外惡惡而内不惡惡, 便是不眞實. 一等未實見道理人, 雖分明有好善之心, 終是不能徹表裏. 須是眞知善惡分明, 然後有眞好眞惡之切[393]."
- 북계 진씨가 말했다: "[天理가] 조화·유행해서 [만물을] 생육시키고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은, 달리 특별한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善일 뿐이다. 이른바 선이라는 것은 '實理'로 말한 것이다. 사람은 이 理를 얻어서 性으로 삼았으므로 性 또한 본래 선할 뿐 惡함이 없다. 만일 겉으로만 선을 좋아하고 안으로는 선을 좋아하지 않으며, 겉으로는 악을 싫어하는데 안으로는 악을 싫어하지 않는다면, 이는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道理를 진실하게 보지 못한 사람은 비록 선을 좋아하는 마음을 분명히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 겉과 속을 다 꿰뚫을 수 없다. 모름지기 선악을 분명하게 안 연후에야 진실하게 좋아하고 진실하게 싫어하는 공효가 있게 된다."
"夫好善而不誠, 則非唯不足以爲善, 而反有以賊乎其善; 惡惡而不誠, 則非唯不足以去上聲惡, 而適所以長上聲乎其惡. 是則其爲害也徒有甚焉, 而何益之有哉? 聖人於此蓋有憂之. 故爲<大學>之教而必首之以格物致知之目, 以開明其心術, 使既有以識夫善惡之所在、與其可好可惡之必然矣. 至此而復扶又反進之以必誠其意之說焉, 則又欲其謹之於幽獨隱微之奥, 以禁止其苟且自欺之萌. 而凡其心之所發, 如曰好善則必由中及外無一毫之不好也; 如曰惡惡則必由中及外無一毫之不惡也. 夫好善而中無不好, 則是其好之也, 如好好色之眞, 欲以快乎己之目, 初非爲去聲人而好之也; 惡惡而中無不惡, 則是其惡之也, 如惡惡臭之眞, 欲以足乎已之鼻, 初非爲人而惡之也.新安陳氏曰: "慊字, 兼快、足之義. 此以快與足分屬好惡言之, 蓋對舉而互相備也." 所發之實既如此矣, 而須臾之頃、纎芥之微, 念念相承, 又無敢有少間斷焉, 則庶乎内外昭融, 表裏澄徹, 而心無不正, 身無不脩矣.意誠則心正, 身脩之本, 皆已在此. 故於此便究言之."
"무릇 善을 좋아하는데 진실하지 않다면, 선을 실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선을 해치게 되고, 惡을 싫어하는데 진실하지 않다면, 악을 제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악을 기르는 데 알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폐해가 심하기만 할 뿐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성인께서 아마도 이를 우려하셨기 때문에, <大學>의 가르침을 펴실 때 반드시 格物致知 조목을 첫 머리에 두어 사람들의 마음(心術)을 열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저 선악의 소재와 필연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해야 하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다시 '반드시 그 意을 진실하게 해야한다'는 설을 내세우셨으니, 또한 그들이 은미하고 혼자인 곳에서부터 삼가서 구차하게 자신을 속이는 싹을 막고자 하신 것이다. 무릇 心이 발현한 바를 만약 '善을 좋아한다'고 한다면, 반드시 마음속에서부터 밖으로 나옴에 한 터럭만큼의 좋아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고, 만약 '惡을 싫어한다'고 한다면 반드시 마음속에서부터 밖으로 나옴에 한 터럭만큼의 싫어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선을 좋아하는데 마음속에 선을 좋아하지 않음이 없다면, 이는 그가 선을 좋아하는 것이 마치 '미모를 좋아하는 진실함이 자기 눈에 만족스럽고자 하는 것이지 애당초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님'과 같을 것이고, 惡을 싫어하는데 마음속으로 악을 싫어하지 않음이 없다면, 이는 그가 악을 싫어하는 것이 마치 '악취를 싫어하는 진실함이 자기 코에 만족스럽고자 하는 것이지 애당초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님'과 같을 것이다.신안진씨가 말했다: "'慊'이라는 글자는 '快'와 '足'의 뜻을 겸한다. 여기서 '快'자와 '足'자를 好와 惡에 분속하여 말한 것은 대개 상대해서 들어서 서로 갖추려는 것이다." 발현한 바의 실질이 이미 이와 같은 데다가, 아주 잠깐 사이나 아주 실같이 작은 것이라도 생각마다 이어지고 또 감히 잠시라도 끊어짐이 없다면, 거의 안과 밖·겉과 속이 다 훤히 밝혀져 心이 바르지 않음이 없고 자신도 수양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意誠은 心正과 身脩의 근본으로, 이 두 가지 모두는 이미 이것(意誠)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모두 말했다."
"若彼小人, 幽隱之間實爲不善, 而猶欲外託於善以自蓋, 則亦不可謂其全然不知善惡之所在. 但以不知其眞可好惡, 而又不能謹之於獨以禁止其苟且自欺之萌. 是以淪䧟至於如此, 而不自知耳. 此章之說其詳如此, 是固宜爲自脩之先務矣. 然非有以開其知識之眞, 則不能有以致其好惡之實. 故必曰: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又曰: '知至而后意誠'. 然猶不敢恃其知之已至而聽其所自爲也. 故又曰: '必誠其意, 必謹其獨而毋自欺焉', 則<大學>工夫次第相承首尾爲一, 而不假他術以雜乎其間, 亦可見矣. 後此皆然. 今不復扶又反重平聲出也."後此皆然", 如'意誠而後心正'. 意既誠, 又不可不正其心. 心正而后身修倣此."
"저 소인은 으슥한 곳에서 진실로 不善을 행하고도 오히려 겉으로는 善에 가탁하여 스스로를 가리려고 하니, 그가 전혀 그 善惡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실로 좋아하거나 싫어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또 혼자 있을 때 삼가서 구차하게 자기를 속이려는 싹을 막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에 빠져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이 장 설명이 이처럼 상세하니, 진실로 마땅히 자신을 수양하기 위한 첫 단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지식에 개명하지 못하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실질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意을 진실하게 하고자 하는 자는 그 知를 먼저 지극히 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 '知가 지극해진 이후에 意가 진실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감히 자신의 知가 이미 지극해졌다고 자부하고서 스스로 하는 바를 따를 순 없다. 그러므로 또 '반드시 그 意을 진실하게 하고 반드시 그 혼자 있을 때 삼가서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말한 것이니, <大學> 공부의 순서가 서로 이어지고 수미일관해서 감히 다른 학설을 그 사이에 뒤섞을 필요가 없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이후의 것들이 모두 그러하니, 이제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後此皆然"은 '意이 진실해진 이후에 心이 바르게 된다'와 같다. 意가 진실해지면 그 心도 바르지 않을 수 없다. 心이 바르게 된 이후에 자신이 수양되는 것도 이와 같다."
○曰: "然則慊之爲義, 或以爲少, 又以爲恨, 與此不同, 何也?" 曰: "慊之爲字, 有作嗛口簟反者, 而<字書>以爲口銜物也. 然則慊亦但爲心有所銜之義, 而其爲快爲足、爲恨爲少, 則以所銜之異而别筆列反下同之耳. <孟子>所爲'慊於心', <樂毅>所謂'慊於志', 則以銜其快與足之意而言者也<史記> <列傳> 樂毅遺燕惠王書曰: '自五伯音霸以來, 功未有及於先王者也. 先王以爲慊於志.'先王, 燕昭王也. <孟子>所謂'吾何慊'、<漢書>所謂'嗛栗姬'<史記> <西漢外戚傳> 景帝立齊栗姬男爲太子, 王夫人男爲膠東王. 長公主嫖有女, 欲與太子為妃, 栗姬謝不許. 長公主欲與王夫人, 夫人許之. 㑹薄皇后廢, 長公主日譛栗姬短景帝. 甞屬諸姬曰: '吾百嵗[394]後, 善視之.' 栗姬怒, 不肯應, 言不遜. 景帝心銜之而未發也. 長公主日譽王夫人男之美, 帝亦自賢之. 王夫人知嗛栗姬, 又隂使人趣大臣立栗姬為皇后. 大臣奏事文曰: '子以母貴, 母以子貴. 今太子母宜號為皇后.' 帝怒曰: '是乃所當言耶?' 遂案誅[395]大臣而廢太子為臨江王, 栗姬以憂死. 卒立王夫人為皇后, 男為太子., 則以銜其恨與少之意而言者也.朱子曰: "字有同一義而二用者. 如銜字, 或為銜恨, 或為銜思, 亦同此義. 讀者各隨所指而觀之, 則既並行而不悖矣. 字書又以其訓快與足者. 讀與惬同, 則義愈明而音又異, 尤不患於無别也."
○물었다: "그렇다면 '慊'의 뜻을 어떨 때는 '少'라고 하고 또 어떨 때는 '恨'이라고 하는데, 이것과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답했다: "慊이라는 글자는 '嗛'이라고 쓴 경우가 있는데, <字書>에서는 '입이 물건을 머금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慊 또한 단지 마음이 머금고 있는 것이 있다는 뜻이니, 慊이 '快'·'足'이나 '恨'·'少'의 뜻이 되는 것은 머금고 있는 것의 차이 때문에 구별한 것일 뿐이다. <맹자>에서 '마음에 흡족하다'[396]고 말한 것과 <사기> <악의열전>에서 말한 '뜻을 이룬 것에 만족함'이란 것이 '快'와 '足'의 뜻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고,<史記> <列傳> 악의가 연나라 혜왕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오패 이후로 선왕만큼 공업을 이룬 분은 있지 않았습니다. 선왕께서는 뜻을 이룬 것에 만족하셨습니다.'선왕은 연나라 소왕이다. <맹자>에서 '내 어찌 부족할 것이 있겠는가?'[397]라고 한 것과 <한서>에서 '율희를 원망한다'<사기> <외척세가> 경제는 제나라 출신 율희의 아들을 태자로, 왕부인의 아들을 교동왕으로 세웠다. 장공주 표에게 딸이 있었는데, 그를 태자에게 주어 태자비로 삼게 하고자 했는데, 율희가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장공주는 왕부인의 [아들(교동왕)에게 자신의 딸을] 주려고 했는데, 왕부인은 허락했다. 마침 박황후가 폐해지자, 장공주는 날마다 율희의 단점을 경제에게 참소하였다. [경제는] 일찍이 여러 처첩들을 [율희에게] 부탁했다: '내가 죽은 뒤에 잘 돌봐주시오.' 율희가 노하여 응낙하려 하지 않아 말이 불손했다. 경제는 마음속으로 [화를] 품었을 뿐 드러내지는 않았다. 장공주가 날마다 왕부인 아들(교동왕)의 훌륭함을 칭찬하니, 경제 역시 절로 그를 대견하게 생각했다. 왕부인은 [경제가 여전히] 율희를 원망함을 알고, 다시 사람을 대신에게 보내 율희를 황후로 세우도록 은밀히 사주했다. 대신이 상주문에서 아뢰었다: '자식은 어머니를 때문에 귀해지고, 어머니는 자식 때문에 귀해진다고 합니다. 지금 태자의 어머니를 마땅히 황후로 불러야 합니다.' 경제가 노하여 말했다: '이게 마땅히 해야 할 말인가?' 마침내 대신의 죄를 따져 주살하고 태자를 폐해 임강왕으로 삼으니, 율희는 근심하다가 죽었다. 마침내 왕부인을 황후로, 그 아들(교동왕)을 태자로 삼았다.[398]라고 말한 것은 '恨'과 '少'의 뜻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글자 중에 뜻은 하나인데 두 가지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銜'자의 경우, 어떨 때는 '원한을 품다(銜恨)'로 쓰이고 어떨 때는 '그리움을 품다(銜思)'로 쓰이지만 역시 똑같이 '품다'라는 뜻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 각각 가리키는 바에 따라 살핀다면, 두 가지 뜻이 함께 쓰이더라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字書에서는 또 '慊 가운데 快와 足의 뜻을 지닌 것은 협(惬)과 같이 읽는다'고 하니, 뜻은 더욱 분명하고 음 또한 달라 구분되지 않는 것을 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傳七章
所謂脩身在正其心者,身有所忿懥,則不得其正;有所恐懼,則不得其正;有所好樂,則不得其正;有所憂患,則不得其正。忿, 弗粉反; 懥, 勑值反. 好樂, 並去聲.
이른바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그 心을 바르게 하는 데 달려있다'는 것은, 心에 분노가 있으면 心이 바르게 되지 못하고, 두려움이 있으면 心이 바르게 되지 못하며,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心이 바르게 되지 못하고,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心이 바르게 되지 못한다.
- 程子曰:「身有之身當作心。」○ 忿懥,怒也。蓋是四者,皆心之用,而人所不能無者。然一有之而不能察,則欲動情勝,而其用之所行,或不能不失其正矣。
-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身有'의 '身'은 마땅히 '心'이 되어야 한다." ○ 忿懥는 분노이다. 이 네 가지 감정은 모두 心의 用으로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감정이 생겼는데 살피지 못한다면, 욕망이 끓고 감정이 압도해 감정이 발현됨에 혹 올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問: "'有所忿懥、恐懼、好樂、憂患, 心不得其正', 是要無此數者, 心乃正乎?" 程子曰: "非是謂無, 只是不以此動其心. 學者未到不動處, 須是執持其志."
- 물었다: "'분노·두려움·좋아함·근심이 있으면 心이 바르게 될 수 없다'는 것은 이 여러 가지가 없어야 心이 바르게 된다는 겁니까?" 정자께서 대답하셨다: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것들로 자기 心을 동요시켜선 안 된다는 것이다. 배우는 자가 아직 不動[399]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자신의 志를 잡아 지켜야 한다.[400]"[401]
- ○朱子曰: "<大學>格物誠意, 都已鍊成; 到得正心脩身章, 都易了. 意有善惡之殊, 意或不誠, 則易於為惡; 心有偏正之異, 心有不正, 則為物欲所動, 未免有偏處, 却未必為惡."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대학>의 格物·誠意를 모두 단련하고 나서 正心·脩身에 이르면 모두 쉬워진다. 意에는 善惡의 구분이 있어서, 意가 혹 진실하지 않으면 惡하게 되기 쉽다. 心에는 偏正의 차이가 있어서, 心에 바르지 않은 것이 있으면 물욕에 동요되어 치우침을 면할 수 없지만 반드시 악하게 되는 건 아니다."[402]
- ○四者只要從無處發出, 不可先有在心下. 須看'有所'二字. 如有所忿怒, 因人有罪而撻之, 纔了, 其心便平, 是不有; 若此心常常不平, 便是有.
- [분노·두려움·좋아함·근심] 네 가지 감정은 빈 상태에서 나와야지 미리 마음에 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有所' 두 글자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분노하는 바가 있는 경우, 어떤 사람에게 죄가 있어 매를 칠 때 다 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 '미리 마음에 두지 않은 것'이다. 만약 이 마음이 늘 평안하지 않다면, 이는 '미리 마음에 둔 것'이다."[403]
- ○所謂'有所', 是被他為主於内, 心反為他動也.
- 이른바 '有所'란 어떤 것이 마음속에서 위주가 되어 心이 거꾸로 그것에 의해 동요하는 것이다.
- ○心纔繫於物, 便為所動. 所以繫於物者有三事: 未來先有箇期待之心; 或事已應過, 又留在心下, 不能忘; 或正應事時, 意有偏重, 都是為物所繫縳. 便是有這箇物事, 到别事來到面前, 應之便差了, 如何心得其正? 聖人之心, 瑩然虚眀, 看事物來, 若大若小, 四方八面, 莫不隨物隨應, 此心元不曾有這物事.
- 心이 외물에 얽매이자마자 동요하게 된다. 외물에 얽매이는 경우가 세 가지 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해 미리 기대하는 마음이 있는 경우, 혹 일이 이미 지나갔는데도 미련을 갖고 잊지 못하는 경우, 혹 일에 대응할 때 意가 치우치는 경우, 모두 외물에 얽매이는 것이다. 이 일이 있는데 다른 일이 눈앞에 닥치면 대응이 잘못될 것이니, 어떻게 心이 바르게 될 수 있겠는가? 성인의 心은 瑩然하게 虚眀해서, 일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 그 일이 크든 작든 사방팔면 어디서 오든 간에 일에 따라 제대로 대응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心에는 원래 이러한 일들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404]
- ○如顔子'不遷怒', 可怒在物, 顔子未嘗為血氣所動而移於人也, 則豈怒而心有不正哉?
- 안자의 '분노를 옮기지 않음'(不遷怒)[405]이란, 노여워할 만한 것이 외물에 있어서 안자께서는 혈기에 동요돼 남에게 전가하지 않으셨던 것이니, 어찌 분노했다고 해서 心에 바르지 않은 것이 있으셨겠는가?
- ○今人多是才怒, 雖有可喜事, 亦所不喜; 才喜, 雖有當怒之事來, 亦不復怒, 便是蹉過事理了. 盖這物事纔私, 便不去, 只管在胷中推盪, 終不消釋. 使此心如太虚, 則應接萬務, 各止其所, 而我無所與, 可也. 看此一章, 只是要人不可先有此心耳.
-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분노하기만 하면 기뻐할 만한 일이 있더라도 기뻐하지 않고, 기뻐하기만 하면 분노할 만한 일이 닥치더라도 더이상 분노하지 않으니, 이는 사리에 어긋난 것이다. ?? 이 心이 태허 같다면, 온갖 일에 대응할 때 각각 제자리에 있게 되어 내가 간여하는 바가 없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이 장을 보니 단지 사람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미리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406]
- ○問: "忿、好自己事, 可勉強不為; 憂患恐懼自外來, 不由自家." 曰: "便是自外來, 須要我有道理處之. 事來亦合當憂懼. 但只管累其本心, 亦濟甚事? 孔子畏於匡, 文王囚羑里, 死生在前, 聖人元不動心, 處之恬然."
- 물었다: "분노·좋아함은 자신의 감정이니 노력하면 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근심·두려움은 외부에서 오지 자기에게서 말미암지 않습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분노·두려움·좋아함·근심은 외부에서 오니, 반드시 자신이 도리대로 대처해야 한다. ?? 공자께서는 匡에서 경계하시고, 문왕께서는 羑里에 갇혀계셔서 생사가 목전에 있었는데, 성인은 원래 不動心하기 때문에 편안하게 대처하셨다."[407]
心不在焉,視而不見,聽而不聞,食而不知其味。
心이 보존되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 心有不存,則無以檢其身. 是以君子必察乎此而敬以直之,然後此心常存而身無不脩也。
- 心이 보존되지 못하면 자신의 몸을 검속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心을 살펴 敬하여 곧게 하니, 그러한 뒤에야 이 心이 항상 보존되어 자신이 수양되지 않음이 없다.
- 朱子曰: "心若不存, 一身便無主宰."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心이 보존되지 못하면 일신에 주재가 없게 된다."
- ○敬是常要此心在這裏, 直是直上直下[408]無纎毫委曲.
- 敬은 이 心을 이 안에 늘 보존하려는 것이니, 단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털끝만큼의 구부러짐도 없는 것이다.
- ○問: "'視而不見, 聽而不聞', 只是說知覺之心, 却不及義理之心." 曰: "才知覺, 義理便在此; 才昏, 便不見了."
- 물었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지각하는 心을 말할 뿐 義理의 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지각하기만 하면 義理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心이 어두워지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다."[409]
此謂脩身在正其心。
이것을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그 心을 바르게 하는 데 달려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 右傳之七章。釋正心脩身。
- 이상은 전 7장이니, 正心·修身을 풀이했다.
- 此亦承上章以起下章。蓋意誠則真無惡而實有善矣,所以能存是心以檢其身。朱子曰: "意誠然後心得其正, 自有先後." ○新安陳氏曰: "此言'意誠而後心可得而正', 盖其序之不可亂者."然或但知誠意,而不能密察此心之存否,則又無以直內而脩身也。○或謂: "意誠則心正." 朱子曰: "不然. 這㡬句連了又斷, 斷了又連. 雖若不相連綴, 中間又自相貫. 譬如一竿[410]竹, 雖只是一竿, 然其間又有許多節. 意未誠, 則全體是私意, 更理㑹甚正心? 然意雖誠了, 又不可不正其心."[411]自此以下,並以舊文為正。
- 이 장 역시 앞 장을 이어서 뒷 장을 일으킨 것이다. 대개 意가 진실하면 진실로 악은 없고 선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心을 보존하여 그 몸을 검속할 수 있는 것이다.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意가 진실해진 연후에 心이 바르게 될 수 있으니, 본래 선후의 차례가 있다." ○신안 진씨가 말했다: "여기서 '意가 진실해진 연후에 心이 바르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차례를 어지럽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혹 단지 誠意만 알고 이 心이 보존되는지 아닌지를 정밀하게 살피지 못한다면, 또한 내면을 곧게 하여 자신을 수양할 수 없다.혹자가 意가 진실해지면 心이 바르게 된다'고 말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이 여러 구절은 이어지지만 또 끊어지고, 끊어졌지만 또 다시 이어진다. 비록 서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중간에 또 서로 연관된다. 대나무에 비유하자면, 비록 대나무 한 그루지만 그 안에 또 수많은 마디가 있다. 意가 진실하지 못하면 전체가 사사로운 생각일 것이니, 달리 무슨 正心을 이해하겠는가? 그러나 意가 진실하더라도 心을 바르게 하지 않아선 안 된다." 이 이하는 모두 옛 판본의 글을 바르다고 본다.
『혹문』 전7장
或問: "人之有心, 本以應物. 而此章之傳, 以爲有所喜怒、憂懼, 便爲不得其正. 然則其爲心也, 必如槁木之不復扶又反下同生, 死灰之不復然, 乃爲得其正邪?"
曰: "人之一心, 湛丈減反然虛明, 如鑑之空, 如衡之平, 以爲一身之主者, 固其眞體之本然.眞體乃其本體之不雜於人偽者也 而喜怒、憂懼, 隨感而應, 妍蚩充之反俯仰因物賦形者, 亦其用之所不能無者也. 故其未感之時, 至虛至静, 所謂鑑空衡平之體, 雖鬼神有不得窺其際者, 固無得失之可議. 及其感物之際, 而所應者又皆中去聲節, 則其鑑空衡平之用, 流行不滯, 正大光明, 是乃所以爲天下之逹道, 亦何不得其正之有哉? 唯其事物之來, 有所不察, 應之既或不能無失, 且又不能不與俱往, 則其喜怒憂懼必有動乎中者, 而此心之用始有不得其正者耳."
혹자가 물었다. "사람에게 있는 마음은 본래 이것으로 외물에게 응하는 것인데, 이 장의 설명에서는 喜怒憂懼한 것이 있으면 곧 바르지 않음이 있기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마음 됨이라는 것은 반드시 죽어버린 나무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꺼져버린 잿더미가 다시 불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되고 나서야 그 바름을 얻게 되는 것입니까?"
답했다. "사람의 한 마음은 맑고 허령불매함이 마치 거울의 텅빔과 저울의 평평함 같아서 한 몸의 주재자가 되는 것이니 진실로 眞體의 본래 그러함이다.眞體란 바로 그 본체가 인위적인 것에 섞이지 않는 것이다. 喜怒憂懼는 (외물에게) 감한 것을 따라서 응한 것이고, 아름다움과 추함, (저울의) 오르내림은 외물에 따라서 형체가 부여된 것이니 또한 마음의 用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직 감하기 전에는 매우 허명하고 고요하니 이른바 거울의 텅빔, 저울의 평평함 이라는 體다. 비록 귀신이라고 그 때(미발)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어서 진실로 의논할 만한 잘못을 얻지 않는 것이고, 외물에 감할 때에 미쳐서 그 응한 것이 또한 모두 절도에 맞으면 그 鑑空衡平이라는 用이 흘러다님에 막힘이 없고 바르고 크며 빛나니 이것이 바로 천하의 공통된 도가 되는 이유이다. 또 어찌 그 바름을 얻지 못함이 있겠는가! 오직 그 사물이 올 때에 살피지 못하 바가 있어서 응하는 것에 잘못이 없을 수 없고, 또 (외물에) 휩쓸려가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그 喜怒憂懼가 반드시 미발 상태에서 동요된 바가 있어서 이 마음의 用이 비로소 그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 朱子曰: "人心如一箇鏡. 先未有一箇影象, 有物事來, 方始照見妍醜. 若先有箇影象在裏面, 如何照得人心本是湛然虚明? 事物之來, 隨感而應, 自然照得髙下輕重. 事過便當依前恁地虚方得. 若事未來, 先有一箇忿懥、好樂、恐懼、憂患之心在這裏; 及忿懥、好樂、恐懼、憂患之事到來, 又以這心相與滚合, 便失其正. 事了又只若留在這裏, 如何得正?"
- 주자가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어떤 거울 같아서 먼저 어떤 형상이 있지 않다가 외물이 오는 경우에야 비로소 (외물의) 아름답고 추함을 비추게 된다. 만약 먼저 어떤 형상이 그 안에 있다면 어떻게 (외물을) 비출 수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본래 맑고 허명해서 사물이 올 때에 감한 것을 따라 응해서 자연스럽게 높이와 무게를 비출 수 있는 것이다. 외물이 지나가면 이전의 이와같은 허명함을 따라야 비로소 옳다. 만약 외물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먼저 어떤 忿懥、好樂、恐懼、憂患의 마음이 그 안에 있다가 忿懥、好樂、恐懼、憂患한 일이 오는 경우에 미쳐서 이 마음으로 서로 합하는 경우에는 그 바름을 잃어버리고 일이 끝나고도 그 안에 머무르는 바가 있게 되면 어떻게 바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
- ○北溪陳氏曰: "感自外入, 以彼物之至吾前而言. 應由中出, 以此心之接彼物而言."
- 북계진씨가 말했다. "感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니 저 외물이 와서 내 앞에 있는 것으로 말한 것이고, 應은 마음으로 부터 나온 것이니 이 마음이 외물에 접한 것으로 말한 것이다."
- ○節齋蔡氏曰: "鑑之空, 方能照人. 若先有人形滯其中, 則人之繼至者不復可得而照矣. 衡之平, 方能稱物. 若先有物重滯於上, 則物之繼至者不復可得而稱矣. 以鑑空衡平喻心體之虚明, 最為精切."
- 절제채씨가 말했다. "거울의 텅빔이어야 다른 사람을 비출 수 있다. 만약 먼저 그 마음에 모습이 있다면 다른 모습이 이어지는 경우에 다시 비출 수 없게 된다. 저울의 평평함 이라야 외물을 잴 수 있다. 만약 먼저 그 위에 무게가 달려있으면 다른 외물이 이어지는 경우에 다시 잴 수 없다. 鑑空衡平으로 心體의 허명함을 비유한 것은 가장 정밀하고 적절하다."
- ○陳氏曰: "此章只是四者感物而應不中其節, 則此心便爲四者所動而不得其正矣. 若世俗心盧昏昏, 莫克主宰, 體用動静無復凖則, 目隨物視, 耳隨物聽, 行信足歩, 言信口說矣."
- 진씨가 말했다. "이 장에서 다만 (忿懥、好樂、恐懼、憂患의) 네 가지가 외물에 감하여 응한 것이 그 절도에 맞지 못하면 이 마음은 곧 이 네 가지에 의해 동요되어서 그 바름을 얻지 못하게 된다. 마치 세상 사람들의 걱정이 혼란스러워서 (그들을) 주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마음의) 體用과 動静이 기준을 회복하지 못하면 눈은 외물을 따라 보고, 귀는 외물을 따라 듣고, 걷는 것은 발 가는대로 가고, 말은 말하는 대로 말한다."
- ○西山眞氏曰: "鑑空衡平之體用, 切須玩味. 蓋未應物時, 此心只要清明虛静, 不可先有一物, 如鑑未照物, 只是一箇空; 如衡未稱物, 只是一箇平. 此乃心之本體; 即喜怒哀樂未發之中; 所謂鑑空衡平之體也. 及事物之來, 隨感而應, 因其可喜而喜, 可怒而怒, 在我本未甞先有此心, 但隨物所感而應之耳, 故其發無不中節, 此所謂鑑空衡平之用也."
- 서산진씨가 말했다. "鑑空衡平의 體用은 절실히 완미해야한다. 대개 외물에 아직 응하지 않았을 때에 이 마음은 清明虛静하기 마련이니 어떤 외물이 먼저 있을 수 없다. 마치 거울이 아직 외물을 비추지 않으면 다만 텅 비어있고, 저울이 아직 외물을 재지 않았으면 다만 평평한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본체이니 '喜怒哀樂未發之中'의 경우가 이른바 鑑空衡平의 體라는 것이요, 사물이 올 때에 감응한 것을 따라 응하는 것은 기뻐할 만한 것을 따라 기뻐하고, 화낼 만한 것에 화내니, 나에게 있는 것은 본래 먼저 이러한 마음이 아닌 적이 없고 다만 외물에 감응한 바를 따라서 응할 뿐이다. 그러므로 '其發無不中節'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鑑空衡平의 用이라는 것이다."
- ○徽菴程氏曰: "未發之前, 氣未用事, 心之本體, 不待正而後正; 發而中節, 則心之用無不正, 亦不待正之而後正. 夫有不正而後正, 心體静而未發, 何待於正乎? 惟此心之用, 發不中節, 始有不正, 而待於正耳. <章句>曰: '用之所行, 或失其正'; <或問>曰: '此心之用, 不得其正', 未甞言體之不正也. 惟經之<或問>有曰: '不得其本然之正', 曰: '心之本體, 物不能動而無不正', 或者遂執之以為正心乃静時工夫, 如<中庸>未發之中, <太極圖>之主静, 而經之所謂定静安也. 傳之心不在焉, 乃心不在腔子裏時也, 殊不知聖人教人多於動處用功. 格至誠正脩皆教人用功於動者, 定静安, 亦非但言心之静也. 若静時工夫, 則戒謹恐懼而已, 存之養之守之而已, 不待乎正其所不正也. 聖賢之動固主乎静. 元亨誠之通, 固主乎利貞誠之復. 而誠正脩云者, 正誠通之事. 既誠正而脩矣, 始有誠復之明. 若當誠意之後, 厭動而求静, 棄事而㝠心, 收視反聽, 而曰: '吾將以正心焉', 此乃異端之事, 非吾儒事也. 况'心不在焉'亦曰: 心不在視, 則視而不見; 不在聽, 則聽而不聞, 豈静在腔中之謂哉? <或問>所謂本然、本體, 亦指此心之義理而言; 孟子言本心亦指仁義之心而言, 豈一於静之謂乎?"
- 휘암정씨가 말했다. "아직 발하기 전에 기가 용사하지 않았으면 마음의 본체는 바르기를 기다린 이후에 바르게 되는 것이 아니며; 발하여 절도에 맞게 되었다면 마음의 용은 바르지 않음이 없어서 또한 마음을 바르게 하기를 기다린 이후에 바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무릇 바르지 않은 것이 있은 이후에 바르게 하는 것이니 心體가 고요하고 아직 말하지 않았다면 무슨 바르게 하기를 기다리겠는가? 오직 이 마음의 用이 발하여 중절하지 않아야 비로소 바르지 않음이 있어서 바르게 하기를 기라릴 뿐이다. <대학장구>에서 (주자의 주석에서) 말한 '마음이 행하는 바가 혹 그 바름을 잃는다'[412] 고 말한 것과 <혹문>에서 '이 마음의 용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일찍이 그 마음의 體의 바르지 않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오직 경1장에 관한 <혹문>에서 '그 본연의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과 '마음의 본체는 외물이 동요시킬 수 없으니 바르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 것을 혹자가 끝내 그것을 가져가다 正心은 바로 고요한때의 공부이니, <중용>의 '未發之中'과 <태극도>의 主静공부와 경전에서 말한 '定静安'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대학>의) 傳의 '心不在焉'는 바로 마음이 텅 비어있는 때에 있다는 것이 아니니 성인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움직이는 곳에서 힘쓰게 하신 바가 많게 했음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격물, 치지, 성의, 정신, 수신은 모두 사람들도 하여금 움직이는 곳에서 힘쓰게 한 것들이니, '定静安'또한 다만 마음의 고요한 때만 말한 것이 아니다. 고요한 때의 공부는 계신공구일 뿐이요 '存之', '養之', '守之'일 뿐이니, 그 바르지 않은 바를 바르게 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현의 動은 진실로 靜을 주로하니, 元亨의 誠의 통함이 진실로 利貞의 誠의 돌아옴(復)을 주로하는 것이다. [413] 성의, 정심, 수신을 말한 것은 바로 (앞 구절의) '誠'과 '通'의 일이요, 성의 정심하고 나서 수신하여야 비로소 '誠'과 '復'의 밝음이 있게 된다. 만약 성의한 이후에 움직이기를 싫어하면서 精을 구하고, 일을 버리고 마음을 밝히려 하여 보는 것을 거두고 듣는 것을 돌이켜 말하기를 '나는 장차 이러한 행동들로 마음을 바르게 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이단의 일이요 우리 유가의 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心不在焉'은 또한 마음이 보는 것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마음이 듣는 것에 있지 않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 다는 말이니, 어찌 텅 빈 곳 속에 고요하게 있음을 말한 것이겠는가! <혹문>에서 말한 (경1장의) '本然'과 '本體' 또한 이 마음의 의리를 가리켜 말한 것이요, 맹자가 말한 '本心' 또한 인의의 마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어찌 静에 한결같음을 말한 것이겠는가?"
- ○玉溪盧氏曰: "湛然虚明者, 心之體; 隨感而應者, 心之用. 如鑑之空, 則妍蚩因物, 而空者自如; 如衡之平, 則俯仰因物, 而平者自若. 眞體之本然, 吾心之太極也. 隨感而應, 則本體之眞, 在在呈露, 而太極亦無不在矣. 未感之時, 鬼神不得窺其際, 乃天下之大本, 是明徳之體、寂然不動者也. 寂之中有能感者存, 感物之際, 流行不滯, 正大光明, 乃天下之逹道, 是明徳之用、感而遂通者也. 感之中未甞無寂者存."
- 옥계노씨가 말했다. "맑고 허명하다는 것은 마음의 體요, 감한 것을 따라 응한다는 것은 마음의 用이니, 마치 거울의 텅빔은 그 아름답고 추함이 외물을 따르지만 텅빔은 본래 그러함과 같고, 저울의 평평함은 그 오르내림이 외물을 따르지만 평평함은 본래 그러함과 같다. 眞體之本然은 내 마음의 태극이다. 감하는 바에 따라 응하면 본체의 眞이 곳곳마다 드러나니 태극 또한 없는 곳이 없다. (마음이) 아직 발하기 이전에 귀신이 그 (미발의) 때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바로 '天下之大本'이니 明徳의 體이고 寂然不動하다는 것이다. 적연한 가운데에 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외물에 감할 때에 그 흘러감이 막힘이 없고 正大光明한 것이 바로 '天下之逹道'이니, 이것이 明徳의 用이요, 感而遂通한다는 것이다. 감하는 중에도 일찍이 고요함이 보존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傳者之意, 固非以心之應物便爲不得其正, 而必如枯木死灰然後乃爲得其正也. 惟是此心之靈, 既曰一身之主, 苟得其正而無不在是, 則耳目鼻口四肢百骸, 莫不有所聽命以供其事, 而其動靜語黙出入起居, 唯吾所使而無不合於理. 如其不然, 則身在於此而心馳於彼, 血肉之軀無所管攝, 其不爲仰面貪看鳥. 囘頭錯應人者幾平聲希矣.所引二句乃杜子美詩 孔子所謂: '操則存, 舍則亡', 孟子所謂: '求其放心'、'從其大體'者, 蓋皆謂此. 學者可不深念而屢省悉井反之哉!"
"傳의 뜻은 진실로 마음이 외물에 응하면 곧 바름을 얻지 못하게 되어 반드시 죽은 나무와 꺼진 재와 같이 된 이후에야 그 바름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한 것이 아니다. 오직 이 마음의 허령임을 이미 '一身之主'라고 말했으니 만약 그 바름을 얻고 옳은 곳에 있지 않음이 없다면 귀, 눈, 코, 입, 사지 온 몸의 뼈가 그 (마음이) 명령한 바를 들어서 각자의 일에 이바지 하지 않음이 없고 그 움직임과 말함과 출입함과 행동함이 오직 내가 시키는 바 대로 하여도 이치에 부합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몸이 여기에 있더라도 마음이 저쪽을 내달리고 , 육신이 다스려지는 바가 없게되니, 얼굴 들어 새보기를 탐하다가 고개 돌려 사람에게 응답하지 못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인용한 두 구절은 모두 두보의 아름다운 시이다. 공자가 말한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없어진다' [414]는 것과 맹자가 말한 '그 놓아버린 마음을 구한다' [415], '그 큰 것을 따른다' [416]는 것이 모두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학자가 깊히 생각하고 자주 이것을 성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傳八章
所謂齊其家在脩其身者:人之其所親愛而辟焉,之其所賤惡而辟焉,之其所畏敬而辟焉,之其所哀矜而辟焉,之其所敖惰而辟焉。故好而知其惡,惡而知其美者,天下鮮矣!辟,讀為僻。惡而之惡、敖、好,並去聲。鮮,上聲
이른바 '자기 집안을 단속하는 것은 제 자신을 수양하는 데 달려있다'는 것은 [다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아끼는 것에 치우치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치우치며, 경외하는 것에 치우치고, 안타까워하는 것에 치우치며, 게으른 바에 치우치므로, 좋게 여기면서 그것의 단점을 알거나 싫어하면서 그것의 장점을 아는 경우는 천하에 드물다.
- 人,謂眾人。之,猶於也。辟,猶偏也。朱子曰: "古註辟音譬, 窒礙不通. 只是辟字便通. 况此篇自有僻字, '辟則為天下僇', 是矣"五者,在人本有當然之則;然常人之情惟其所向而不加審焉,則必陷於一偏而身不脩矣。
- '人'은 뭇 사람들을 말한다. '之'는 '於'와 같다. '辟'은 치우침(偏)과 같다.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옛 주석에 '辟'의 음이 '비(譬)'라고 했는데, [의미가] 막혀서 통하지 않는다. '벽(辟)'자라면 [의미가] 통한다. 게다가 이 책에 본래 '벽(僻)'자가 있으니, '편벽되면 천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417]는 것이 이것이다." 이 다섯 가지의 경우 사람에게 마땅히 따라야 할 준칙이 본래부터 있지만, 일반 사람들의 마음은 오직 이를 좇을 뿐 더 이상 살피지 않으니, 틀림없이 한 쪽에 빠져 자신이 수양되지 못한다.
- ○朱子曰: "正心、脩身兩段, 大㮣差錯處, 皆非在人欲上, 皆是人合有底事, 如在官街[418]上差了路."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정심과 수신 두 단락에서 일반적으로 잘못하는 지점은 모두 인욕에 있지 않고, 모두 사람이 해야 할 일에 있으니, 마치 대로에서 길을 잃는 것과 같다."[419]
- ○忿懥等是心與物接時事; 親愛等是身與物接時事.
- '忿懥' 등은 마음이 외물과 접했을 경우이고, '親愛' 등은 몸이 외물과 접했을 경우이다.
- ○'之所親愛', 如父子當主於愛. 然父有不義, 不可以不争; 子有不肖, 亦不可不知教之. '之所敬畏', 如君固當敬畏. 然若當正救責難, 也只管敬畏不得. '賤惡'固可惡, 或尚可教, 或有長處, 亦當知之.
- '之所親愛'는 예를 들어 마땅히 사랑(愛)을 위주로 해야 하는 부자 관계와 같다. 그러나 부모에게 불의한 점이 있으면 [자식이] 다투지 않아선 안 되고, 자식에게 불초한 점이 있으면 [부모] 또한 그를 가르칠 줄 몰라서는 안 된다. '之所敬畏'는 예를 들어 마땅히 경외해야 하는 군주와 같다. 그러나 마땅히 바로잡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경우 그저 경외만 해서는 안 된다. '賤惡'은 진실로 미워할 만하지만, 혹 여전히 가르칠 만하거나 혹 뛰어난 점이 있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420]
- ○問: "'敖惰', 恐非好事." 曰: "此如眀鏡之懸, 妍醜隨其來而應之. 不成醜者至前, 亦喚做妍者? 又'敖惰'是輕, '賤惡'是重. 既賤惡得, 如何却不得敖惰? 然傳者猶戒其辟, 則須檢㸃, 不可有過當處."
- 물었다: "'敖惰'는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답하셨다: "이는 밝은 거울이 매달려있는 것과 같으니, 예쁘고 못난 것은 오는 바에 따라 드러나는 것이다. 못난 것이 앞에 왔는데 예쁘다고 하지는 않겠지? 또 '게으름(敖惰)'는 가볍고 '싫어함(賤惡)'는 무겁다. 싫어한 이상 어찌 게으르지 않겠는가? 그러나 전을 쓴 자가 오히려 그 치우침을 경계했으니, 반드시 점검해 정도를 넘어서는 점이 있어선 안 된다."[421]
- ○'哀矜', 如有大姦, 方欲懲之, 被他哀鳴懇吿, 又却寬之, 這便是哀矜之偏處.
- '哀矜'은 마치 매우 간사한 자를 징계하려고 할 때, 그의 슬프고 간곡한 하소연을 듣고 용서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안타까움(哀矜)'에 의해 치우친 것이다.
- ○五者各自有當然之則, 只不可偏. 如人饑而食, 只合當食, 食纔過些子便是偏; 渴而飲, 飲纔過些子便是偏. 如愛其人之善, 若愛之過則不知其惡, 便是因其所重而陷於所偏; 惡惡亦然. 下面說'人莫知其子之惡, 莫知其苗之碩', 上面許多偏病不除, 必至於此.
- 다섯 가지 각각에는 마땅히 따라야 할 준칙이 있으니, 치우쳐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이 굶주렸다가 먹을 때에는 마땅히 먹어야겠지만, 먹는 것이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치우친 것이다. 목이 말라서 마실 때 마시는 것이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치우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선을 아끼는 경우, 아낌이 지나치면 그의 단점을 알아채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중하게 여기는 바 때문에 치우침에 빠지는 것이다. 악을 미워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아래에 '사람 중에 제 자식의 단점을 아는 자가 없고, 제 싹이 큼을 아는 자가 없다'고 말한 것은, 위의 수많은 치우침의 병폐가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런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故諺有之曰:「人莫知其子之惡,莫知其苗之碩。」諺,音彥。碩,協韻,時若反。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 "사람 중에 제 자식의 단점을 아는 자가 없고, 제 싹이 큼을 아는 자가 없다."
- 諺,俗語也。溺愛者不明,貪得者無厭,是則偏之為害,而家之所以不齊也。
- '諺'은 속담이다. 자식 사랑에 빠진 자는 사리에 어둡고, 이득을 탐하는 자는 만족을 모르니, 이것이 치우침의 해이며 집안이 단속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此謂身不脩不可以齊其家。
이를 "자신이 수양되지 않으면 제 집안을 단속할 수 없다"고 말한다.
- 問: "如何脩身專指待人而言?" 朱子曰: "脩身以後, 大㮣說向接物待人去, 又與只說心處不同. 要之, 根本之理則一, 但一節說濶, 一節去."
- 물었다: "어째서 '脩身'인데 오로지 다른 사람(人)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脩身' 이후에는 대체로 외물이나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경우를 말하니, 단지 마음에 대해 말하는 부분과는 다르다. 요컨대 근본 이치는 똑같지만, 한 절은 넓게 말했고, 한 절은 없애버렸다."??[422]
- 右傳之八章。釋脩身、齊家。
- 이상은 전8장이니, 脩身·齊家를 풀이했다.
『혹문』 전8장
或問: "八章之辟, 舊讀爲譬, 而今讀爲僻, 何也?" 曰: "舊音舊說, 以上章例之而不合也; 以下文逆之而不通也. 是以間者竊以類例文意求之而得其說如此, 蓋曰人之常情. 於此五者一有所向, 則失其好去聲下同惡去聲下於惡好惡同之平, 而陷於一偏. 是以身有不脩, 不能齊其家耳. 蓋偏於愛, 則溺焉而不知其惡矣; 偏於惡, 則阻焉而不知其善矣. 是其身之所接好惡取舍上聲之間, 將無一當去聲於理者. 而况於閨門之内恩常掩義, 亦何以勝其情愛暱尼質反比音鼻之私, 而能有以齊之哉?"
혹자가 물었다. "8장의 '辟'을 옛날에는 '譬'으로 읽었고, 지금은 '僻'이라고 읽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답했다. "옛날 음과 옛 설명은 위의 장을 참조해 보아도 맞지 않고, 아래의 글로 역추해봐도 통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최근에 삼가 부류들과 글의 뜻으로 구해서 이와 같은 설명을 얻은 것이다. 대게 '사람들의 항상된 감정은 이 다섯가지에 대해 하나라도 지향하는 바가 있으면 그 좋아하고 싫어함의 평정심을 잃고 한 쪽 편에 빠져버리니, 이 때문에 몸은 닦여지지 않는 것이 있고, 그 집안은 다스려질 수 없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대개 愛에 치우치면 愛에 빠져서 그의 악함을 알지 못하게 되고, 싫어함(惡)에 빠지면 惡에 가로막혀서 그의 선함을 알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423] 이 몸이 (외물을) 접하는 것과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때에 장차 하나도 이치에 합당한 것이 없을텐데 하물며 집안에서는 '은혜가 항상 義를 가리니'[424] , 또 어찌 이 情,愛,暱,比의 사사로움을 이겨서 집안을 가지런히 할 수 있겠는가!"
- 北溪陳氏曰: "治家非如治國. 治國可用刑威, 治家則刑威不可得而施, 只是公其心而已."
- 북계진씨가 말했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는 형벌을 쓸 수 있지만, 집안을 다스릴 적에는 형벌을 시행할 수 없으니 다만 이 마음을 공정하게 할 뿐이다."
- ○格菴趙氏曰: "'閨門之内, 義常不勝乎恩; 情愛暱比之私, 尤所難克. 使一有偏焉, 則長幼親疏, 欲其心之齊一不可得矣. 盖至近至宻之地, 一毫之偽無所容欺. 此常情之所易忽而君子之所甚謹也."
- ○격암조씨가 말했다. "집 안에서 義는 항상 은혜를 이기지 못하니 情,愛,暱,比의 사사로움은 더욱 이기기 어려운 것이다. 만일 그 중에 하나라도 치우친 것이 있다면 長幼, 親疏에 그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싶어도 할 수 없다. 대개 가장 가깝고 가장 친밀한 경우에 약간의 거짓됨이라도 속임을 용납하는 바가 없이 해야하니 이것이 (일반사람들의) 항상된 감정이 쉽게 소홀히하는 바이며 군주는 매우 삼가는 바이다."
曰: "凡是五者, 皆身與物接所不能無, 而亦既有當然之則矣. 今曰一有所向便爲偏倚而身不脩, 則是必其接物之際, 此心漠然都無親疎之等、貴賤之别筆列反, 然後得免於偏也. 且心既正矣, 則宜其身之無不脩, 今乃猶有若是之偏, 何哉?" 曰: "不然也. 此章之義, 實承上章. 其立文命意, 大抵相似. 蓋以爲身與事接而後或有所偏, 非以爲一與事接而必有所偏. 所謂'心正而后身脩', 亦曰: '心得其正, 乃能脩身',非謂: '此心一正, 則身不待檢而自脩'也."
물었다. "무릇 이 다섯가지는 모두 자신이 외물과 접하는 경우에 없을 수 없는 것이며 또 이미 당연한 이치가 있습니다. 지금 '하나라도 지향하는 바가 있으면 곧 치우치게 되어서 몸이 닦여지지 않는다'고 말하니 이것은 필시 그 외물을 접할 때에 이 마음이 막연하게 親疎의 차이와 貴賤의 구별을 없앤 다음에야 이 치우침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마음이 이미 바르다면 마땅히 그 몸이 닦여지지 않음이 없을 것인데 지금 이내 이와 같은 치우침이 있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답했다. "그렇지 않다. 이 장의 뜻은 진실로 윗 장을 이은 것이니, 그 의도가 대체로 서로 비슷하다. 대개 몸이 외물과 접한 이후에 간혹 치우친 바가 있게 된다고 여긴 것이지, 한 번이라도 외물과 접하면 반드시 치우치는 바가 있다고 여긴것이 아니다. 이른바 '마음이 바르게 된 이후에 몸이 닦여진다'고 한 것은 '마음이 그 바름을 얻어야 몸을 닦을 수 있다고'고 하 것이지 이 마음이 한 번 바르게 되면 몸은 검속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닦여진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 朱子曰: "<大學>所以有許多節次, 正欲教人逐節用功, 非如一無節之竹, 使人才能格物, 便知平天下也. 人蓋有意誠而心未正者, 故於忿懥等, 誠不可不隨事而排遣; 有心正而身未脩者, 故於好惡間, 誠不可不隨人而節制. 齊家以下, 皆是教人省察用功. 故經之序, 但言心正者必自誠意而來; 修身者必自正心而來, 非謂意既誠, 則心無事乎正; 心既正, 則身無事乎脩也."[425]
- 주자가 말했다. "<대학>에 많은 절목들이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절목을 따라 힘쓰게 하기 위함이지, 하나의 마디도 없는 나무와 같이 사람들로 하여금 격물하자마자 곧바로 평천하를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대개 뜻이 진실되더라도 마음이 아직 바르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忿,懥등에 있어서 진실로 일에 따라서 배제하지 않을 수 없고, 마음이 바르게 되더라도 몸은 아직 닦여지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好,惡사이에 진실로 사람에 따라서 절제하지 않을 수 없다. 齊家이하는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성찰하고 힘쓰게 한 것이기 때문에 경전의 순서에서 다만 마음이 바르게 되는 것은 반드시 뜻을 진실하게 하는 것으로 부터 오고, 몸을 닦는 것은 반드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부터 온다고 말한 것이지 뜻이 이미 진실해 졌다면 마음은 바름에 종사하지 않음이 없고, 마음이 이미 바르게 되었다면 몸은 닦음에 종사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曰: "親愛、賤惡、畏敬、哀矜, 固人心之所宜有. 若夫音扶敖惰, 則凶徳也. 曾謂本心而有如是之則哉?" 曰: "敖之爲凶徳也, 正以其先有是心, 不度待洛反所施而無所不敖爾. 若因人之可敖而敖之, 則是常情所宜有而事理之當然也. 今有人焉, 其親且舊未至於可親而愛也; 其位與徳未至於可畏而敬也; 其窮未至於可哀而其惡未至於可賤也, 其言無足去去聲取而其行去聲無足是非也, 則視之泛然如塗之人而已爾. 又其下者, 則夫子之取瑟而歌,[426] 孟子之隱去聲几而臥,[427] 蓋亦因其有以自取而非吾故有敖之之意, 亦安得而遽謂之凶徳哉? 又况此章之㫖, 乃爲去聲慮其因有所重而陷於一偏者發. 其言雖曰有所敖惰, 而其意則正欲人之於此更加詳審; 雖曰所當敖惰, 而猶不敢肆其敖惰之心也. 亦何病哉?"
○물었다, "親愛、賤惡、畏敬、哀矜은 진실로 人心이 마땅히 가지고 있는 것인데, 저 업신여김(敖惰)의 경우는 흉한 덕인데 일찍이 본심에 이와같은 법칙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했다. "敖이 흉덕이 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이 마음에 먼저 있는데 시행하는 바를 헤아리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는 바가 없을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사람의 업신여길말한 것에 인하여 그를 업신여긴다면 이것은 항상된 감정이 마땅히 가지고 있는 바이고 이치의 당연한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있어서 그의 親과 舊가 친애할 수 있음에 미치지 못하고, 그의 지위와 덕망이 경외할 수 있음에 미치지 못하고, 그의 곤궁함이 슬퍼할만함에 미치지 않고, 그의 악함이 천하게 여길만함에 미치지 못하고, 그의 말이 버리고 취하기에 부족하고, 그의 행실도 시비를 논하기 부족하니, 평범하게 그를 보기를 마치 길가의 일반 사람들 같이할 뿐이다. 또 그보다 못한 사람의 경우 공자는 비파를 가져다 노래하였고, 맹자는 궤에 기대어 누워있었다. (이는) 대개 그가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에 따른 것이지, 내가 고의로 그를 업신여기는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니 또 어찌 갑자기 흉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장의 뜻은 바로 그가 중요하게 가진 것에 인하여 한 쪽으로 빠져버릴까 염려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그 말이 비록 '업신여기는 바가 있다'고 했지만 그 뜻은 바로 사람들이 '敖惰'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를 바란 것이다. 비록 '마땅히 업신여기는 바'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감히 그 업신여기는 마음을 멋대로 하지 않는 것이니 또 뭐가 병폐이겠는가!"
傳九章
所謂治國必先齊其家者,其家不可教而能教人者,無之。故君子不出家而成教於國:孝者,所以事君也;弟者,所以事長也;慈者,所以使眾也。弟,去聲。長,上聲。
이른바 '治國은 반드시 齊家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집안을 가르치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군자는 집안을 벗어나지 않고 나라에 대한 교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孝라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방법이고, 弟(悌)라는 것은 어른을 섬기는 방법이며, 慈라는 것은 백성을 부리는 방법이다.
- 身脩,則家可教矣因家不可教而推家所以可教之由, 實自脩身始.;孝、弟、慈,所以脩身而教於家者也;然而國之所以事君、事長、使眾之道不外乎此此字指孝弟慈而言。此所以家齊於上,而教成於下也。
- 자신이 수양된다면 집안을 가르칠 수 있다.집안을 가르칠 수 없음으로부터 집안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미뤄보면, [齊家는] 실로 脩身에서 비롯된다. 孝·弟·慈는 脩身하고서 집안을 가르치는 방법이다. 그러나 나라에서 임금을 섬기고 어른을 섬기며 백성을 부리는 방법이 이것'이것'은 孝·弟·慈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지배층에서는 집안이 단속되고, 피지배층에서는 교화가 완성된 방법이다.
- 朱子曰: "上面說不出家而成教於國, 下面便說所以教者如此, 此三者便是教之目."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앞부분에서 '집안을 벗어나지 않고도 나라에 대한 교화를 이룬다'고 말하고, 뒷부분에서 '가르치는 방법이 이와 같다'고 말하였으니, 이 세 가지(孝·弟·慈)가 바로 교화의 조목이다."
- ○'孝者, 所以事君; 弟者, 所以事長; 慈者, 所以使衆', 此道理皆是我家裏做成了, 天下人看着, 自能如此; 不是我推之於國.
- '孝라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방법이고, 弟(悌)라는 것은 어른을 섬기는 방법이며, 慈라는 것은 백성을 부리는 방법이다.' 이 도리는 모두 자기 집안에서 이뤄진 것을 천하 사람들이 보고 스스로 이처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내가 이를 나라에 적용하는 게 아니다.
- ○孝以事親, 而使一家之人皆孝; 弟以事長, 而使一家之人皆弟; 慈以使衆, 而使一家之人皆慈, 是乃成教於國者也.
- 孝로 부모를 섬겨 집안 사람들이 모두 효도하게 만들고, 弟(悌)로 어른을 섬겨 집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게 만들며, 慈로 백성을 부려 집안 사람들이 모두 자애롭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나라에 대한 교화를 이루는 것'이다.
康誥曰「如保赤子」,心誠求之,雖不中不遠矣。未有學養子而后嫁者也!中,去聲。
<康誥>에서 '핏덩이를 보호하듯 한다'고 말하니, 마음으로 진실하게 [핏덩이가/백성이 원하는 바를] 추구한다면 비록 [목표에] 들어맞지는 않더라도 [목표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자식 기르는 법을 배운 뒤에 장가가는 경우는 없다!
- 此引書而釋之,又明立教之本不假強上聲為,在識其端而推廣之耳。
- 이는 <서경>을 인용하여 해석한 것이니, '교화를 세우는 근본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화의 실마리를 알아 이를 확충하는 데 달려있을 뿐'임을 거듭 밝힌 것이다.
- 朱子曰: "孝弟雖人所同有, 能守而不失者鮮; 惟保赤子罕有失者. 故特即人所易曉者以示訓, 亦與<孟子>言'見孺子入井'之意同."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孝·弟가 비록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덕목이지만, 지켜서 잃지 않을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오직 핏덩이를 보호하려는 마음만큼은 잃는 자가 드물다. 그러므로 특별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가르치신 것이니, 이 역시 <맹자>의 '어린 아이가 우물로 기어가는 것을 본 사례'의 의미과 같다.
- ○'保赤子', 慈於家也; '如保赤子', 慈於國也. '保赤子', 是慈; '如保赤子', 是使衆. 心誠求赤子所欲, 於民亦當求其不能自達者. 此是推慈幼之心以使衆也.
- '핏덩이를 보호하는 것'은 집안 사람들에게 자애롭게 대하는 것이고, '핏덩이를 보호하듯 하는 것'은 나라에 자애롭게 대하는 것이다. '핏덩이를 보호하는 것'은 慈이고, '핏덩이를 보호하듯 하는 것은' 백성을 부리는 것(使衆)이다. 마음으로 진실로 핏덩이가 원하는 바를 추구한다면, 백성에 대해서도 응당 그들이 스스로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린 아이에 대한 자애로운 마음을 미루어 백성을 부리는 것'이다.[428]
- ○此且只說動化[429]為本; 未說到推上. 後方全是說推.
- 이 구절은 우선 감화가 근본임을 말하고 있을 뿐, 그 이상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뒷장에서 비로소 그 이상을 말한다.[430]
一家仁,一國興仁;一家讓,一國興讓;一人貪戾[431],一國作亂;其機如此。此謂一言僨事,一人定國。僨,音奮。
한 집안이 仁해야 한 나라가 그 仁에 감동해 일어나고, 한 집안이 겸양해야 한 나라가 그 겸양에 감동해 일어나며, [군주] 한 사람만이라도 이익을 탐내면 한 나라가 난을 일으키니, 그 기미가 이와 같다. 이를 '말 한 마디가 일을 망치기도 하고,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키기도 한다'고 한다.
- 一人,謂君也。機,發動所由也。僨,覆敗也。此言教成於國之效。
- '한 사람'은 군주이다. '機'는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된 시원이다. '僨'은 엎어지는 것이다. 이 구절은 '나라에 대한 교화가 이뤄진' 결과를 말한 것이다.
- 朱子曰: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自家禮讓, 有以感之. 故民亦如此興起. 自家好争利, 却責民間禮讓, 如何得他應?"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주] 한 집안이 仁하면 한 나라가 그 仁에 감동해 일어나고, 한 집안이 겸양하면 한 나라가 그 겸양에 감동해 일어난다'는 것은, [군주] 자신이 예양하면 [백성을] 감동시킬 수 있으므로, 백성도 이렇게(겸양) 흥기한다는 것이다. [군주] 자신이 이익 다투길 좋아하면서 도리어 백성들에게는 예양을 요구한다면, 백성의 호응을 어떻게 얻겠는가?"[432]
- ○'一家仁'以上, 是推其家以治國; '一家仁'以下, 是人自化之也.
- '一家仁' 이전은 [논의의 대상을] '집안'에서부터 '국가 통치'로 확장한 것이고, '一家仁' 이후는 백성들이 스스로 교화되는 것이다.
堯舜帥天下以仁,而民從之;桀紂帥天下以暴,而民從之;其所令反其所好,而民不從。是故君子有諸己而后求諸人,無諸己而后非諸人。所藏乎身不恕,而能喻諸人者,未之有也。好,去聲。
요순은 천하 사람들을 [자신의] 仁한 덕으로 이끌었는데 백성들이 따랐고, 걸주는 천하 사람들을 [자신의] 포악한 덕으로 이끌었는데 백성들이 따랐으니, 군주가 명령한 것이 군주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배치되면 백성들은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신에게 [선함이] 있은 뒤에야 남에게 [선함을] 요구하고, 자기에게 [악함이] 없은 뒤에야 남에게 [악함이 있음을] 비판한다. 자기 몸에 간직하고 있는 것을 恕하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 此又承上文一人定國而言。有善於己,然後可以責人之善;無惡於己,然後可以正人之惡。皆推己以及人,所謂恕也,不如是,則所令反其所好,而民不從矣。喻,曉也。
- 이는 다시 앞 글의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키기도 한다'에 이어 말한 것이다. 자신에게 선함이 있고 나서 남에게 선을 요구할 수 있고, 자신에게 악함이 없고 나서 남의 악을 바로잡을 수 있다. 모두 자기로부터 남에게 확장하는 것(推己以及人)이니, 이른바 '恕'이다. 이와 같지 않다면, 명령하는 바가 자신이 좋아하는 바에 배치되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喻'는 가르침이다.
- 問: "此章言治國, 乃言'帥天下以仁', 又似說平天下; 言'有諸己', 又似說脩身, 何也?" 朱子曰: "聖賢之文簡暢. 身是齊治平之本; 治國、平天下自是相關, 豈可截然不相入?"
- 물었다: "이 장은 治國을 말하는데, 천하 사람들을 [자신의] 仁한 덕으로 이끌었다'고 말하니 또 흡사 '平天下'를 말하는 것 같고, '자신에게 [선함이] 있다'고 말하니 또 흡사 脩身을 말하는 것 같은데, 어째서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성현의 글은 간단하면서도 막힘이 없다. 자기 자신(身)은 治國·平天下의 근본이고, 治國·平天下는 본래 연관되어 있으니, 어찌 자른 듯이 서로 관련이 없을 수 있겠는가?"[433]
- ○尋常人若有諸己, 又何必求諸人? 無諸己, 又何必非諸人? 如孔子說'躬自厚而薄責於人', '攻其惡, 無攻人之惡'. 至於<大學>之說, 是有天下國家者, 勢不可以不責他. 大抵治國者禁人惡、勸人善, 便是求諸人、非諸人.
- 보통 사람은 만약 [선함이] 자신에게 있다면 또 어찌 남에게 [선함을] 반드시 요구하겠는가? [악함이] 자신에게 없다면, 또 어찌 남에게 [악함이 있음을] 비판하겠는가? 공자께서 '몸소 후하게 자책하고 남에게는 박하게 책망하라'[434], '자신의 악함을 공격하고 남의 악은 공격하지 말아라'[435]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대학>의 말의 경우는, 천하국가를 소유한 자는 형세상 다른 사람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사람들의 악함을 금하고 선함을 권하니, 이것이 바로 '남에게 요구하고 남을 비판하는 것'이다.[436]
故治國在齊其家。
그러므로 治國은 齊家에 달려있는 것이다.
- 通結上文。
- 이상의 글을 총괄해 마무리한 것이다.
詩云:「桃之夭夭,其葉蓁蓁;之子于歸,宜其家人。」宜其家人,而后可以教國人。夭,平聲。蓁,音臻。
<시>에서 "어리고 예쁜 복사꽃, 그 잎이 무성하네. 시집 가는 이 처자, 집안 사람들에게 잘하라"고 하니, 집안 사람에게 잘한 이후에야 나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다.
- 詩周南桃夭之篇。夭夭,少去聲好貌少嫩也。蓁蓁,美盛貌。興去聲也。於六義屬興之子,猶言是子,此指女子之嫁者而言也。婦人謂嫁曰歸。宜,猶善也。
- <시> <주남> <도요>편이다. '夭夭'는 어리고 예쁜 모습이다. '蓁蓁'은 아름다고 성대한 모습이다. 興이다.六義 가운데 興에 속한다. '之子'는 '是子'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시집가는 여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부인이 시집가는 것을 '歸'라고 한다. '宜'는 '善'과 같다.
詩云:「宜兄宜弟。」宜兄宜弟,而后可以教國人。
<시>에서 "형과 동생에게 잘하라"라고 하니, 형과 동생에게 잘한 뒤에야 나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다.
- 詩小雅蓼音六蕭篇。
- <시> <소아> <육소>편이다.
詩云:「其儀不忒,正是四國。」其為父子兄弟足法,而后民法之也。
<시>에서 "그 위의가 어긋나지 않으니, 이 사방 나라를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하니, 父子·兄弟가 [그를] 본받을 만한 이후에야 백성들이 그를 본받을 것이다.
- 詩曹風鳲音尸鳩篇。忒,差也。
- <시> <조풍> <시구>편이다. '忒'은 어긋남이다.
- 問: "'父子兄弟足法而後民法之', 然堯舜不能化其子, 周公不能和兄弟, 是如何?" 朱子曰: "聖賢是論其常; 堯、舜、周公是處其變. 如不將天下與其子而傳賢, 便是能處變得好. 若周公不辟管叔, 周如何不亂? 是不得已著恁地. 而今且理㑹常底. 今未解有父如瞽瞍、兄弟如管蔡, 未論到變處."
- 물었다: "'부자·형제가 본받을 만한 이후에야 백성들이 그를 본받을 것'이지만, 요순은 제 자식을 교과하지 못했고, 주공은 자기 형제를 화합하지 못했으니, 이는 어째서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성현(<대학>)은 일반적(常)인 경우를 논한 것이고, 요·순·주공은 예외적(變)인 경우에 대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천하를 자기 아들에게 주지 않고 현자에게 전한 것은 예외적인 경우에 잘 대처한 것이다. 만약 주공이 관숙을 물리치지 않았다면, 주나라가 어떻게 어지럽지 않았겠는가? 이는 부득이하게 이렇게 한 것이다. 지금 우선 일반적인 경우를 이해해야 한다. 지금은 고수같은 아버지나 관숙·채숙같은 형제가 있을 수 없으므로, 예외적인 경우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437]
此謂治國在齊其家。
이것을 '治國은 齊家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 此三引詩,皆以詠歎上文之事,而又結之如此。其味深長,最宜潛玩。
- 여기서 <시>를 세 편 인용한 것은 모두 앞 글의 일을 읊은 것이고, 또 이렇게 마무리한 것이다. 그 맛이 깊고 기니, 가장 마땅히 음미해야 한다.
- 右傳之九章。釋齊家治國。
- 이상은 전9장이다. 齊家·治國을 풀이했다.
『혹문』 전9장
或問: "'如保赤子', 何也?" 曰: "程子有言: '赤子未能自言其意, 而爲之母者慈愛之心出於至誠, 則凡所以求其意者雖或不中去聲, 而不至於大相逺矣.' 豈待學而後能哉? 若民則非如赤子之不能自言矣. 而使之者反不能無失於其心, 則以本無慈愛之實而於此有不察耳. 傳之言此, 蓋以明夫音扶使衆之道不過自其慈幼者而推之, 而慈幼之心又非外鑠[438]式約反而有待於强上聲爲也. 事君之孝、事長之弟, 亦何以異於此哉? 既舉其細, 則大者可知矣.細謂慈; 大謂孝弟."
혹자가 물었다: "'핏덩이를 보호하듯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대답했다: "정자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핏덩이는 아직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지만, 그 어미의 자애로운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니, 무릇 [어미가] 핏덩이의 생각을 추리하는 것이 비록 딱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439] [이것이] 어찌 배운 뒤에야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백성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핏덩이와 같지 않은데도 백성을 부리는 자가 도리어 그들의 마음을 놓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본래 [어미와 같은] 자애로움의 실질이 없어 그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일 뿐이다. 전9장에서 이를(如保赤子) 말한 것은, '백성을 부리는 방법은 아이에게 자애롭게 대하는 것으로부터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아이에게 자애롭게 대하는 마음은 또 밖으로부터 들어와 강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군주를 섬기는 것과 孝와의 관계, 어른을 섬기는 것과 弟(悌)와의 관계 역시 이(慈)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상세한 것(慈)을 거론한 이상, 큰 것(孝弟)은 알 수 있다.'상세한 것'은 '慈'이고, 큰 것은 '孝弟'이다."
- ○三山陳氏曰: "長民者往往不得下之情, 蓋亦視之不切於己, 不若慈母之心耳. 孝弟與慈初無二心. 苟自切己推之, 則舉慈可以見孝矣."
- 삼산 진씨가 말했다: "백성의 우두머리가 된 자가 종종 백성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역시 백성을 보는 것이 자신에게 절실하지 않아 자애로운 어미의 마음과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孝弟'와 '慈'는 애당초 두 가지 마음이 아니다. 만약 자신에게 절실한 것으로부터 추론한다면, '慈'만 거론해도 '孝'를 알 수 있을 것이다.”
○曰: "仁讓言家, 貪戾言人, 何也?" 曰: "善必積而後成, 惡雖小而可懼, 古人之深戒也. <書>所謂'爾惟徳罔小, 萬邦惟慶; 爾惟不徳罔大, 墜厥宗', 亦是意爾."
물었다: "'仁讓'에 대해서는 집안(家)을 말하고, '貪戾'에 대해서는 개인(人)을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대답했다: "선(仁讓)은 반드시 누적된 이후에야 완성되므로 [家로 말하고], 악(貪戾)은 비록 적더라도 두려워할 만하므로 [人으로 말하였으니], 옛 분들의 심오한 경계이다. <서경>에서 '너는 덕을 작게 여기지 말라, 만방이 경하할 것이다. 너는 부덕을 크게 여기지 않으면 종묘사직를 무너뜨릴 것이다'[440]라고 말한 것 역시 이런 의미이다."
- 朱子曰: "'惟徳罔小', 言其不可小也."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惟徳罔小'는 것은 작게 여겨선 안 됨을 말한 것이다."
- ○三山陳氏曰: "為惡之効, 捷於為善. 仁讓必積而刑[441]於一家, 而後可以化一國; 貪戾則纔出於一人之身, 而一國已作亂矣. 見為善者不可無悠久之積; 為惡者不可有斯須之暫也."
- 삼산 진씨가 말했다: "악을 행한 결과는 선을 행한 것보다 빠르게 [나타난다.] '仁讓'이 반드시 누적되고서야 한 집안에 드러나고, 그런 이후에야 한 나라를 교화할 수 있다. [군주가] 이익을 탐내면, 개인의 몸을 벗어나자마자 한 나라가 이미 난을 일으킨다. 선을 행하는 것은 오래 누적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는 것은 잠시라도 있어선 안 됨을 알 수 있다."
○曰: "此章本言上行下效有不期然而然者, 今曰: '有諸己而后求諸人, 無諸己而後非諸人', 則是猶有待於勸勉程督督音篤, 察也勸也.而后化. 且内適自脩, 而遽欲望人之皆有; 己方僅免, 而遂欲責人以必無也." 曰: "此爲去聲治其國者言之, 則推吾所有與民共由. 其條教法令之施、賞善罰惡之政, 固有理所當然而不可已者. 但以所令反其所好, 則民不從. 故又推本言之, 欲其先成於己而有以責人, 固非謂其專務修己, 都不治人, 而拱手以俟其自化; 亦非謂其矜己之長, 愧人之短, 而脅之以必從也. 故先君子之言曰文公父名松, 字喬年, 號韋齊先生.: "有諸己, 不必求諸人, 以爲求諸人而無諸己, 則不可也; 無諸己, 不必求諸人, 以爲非諸人而有諸己, 則不可也", 正此意也."
물었다: "이 장에서는 본래 '윗사람이 행하면 그렇게 하라고 약속하지 않아도 아랫사람이 본받음'을 말하는데, 지금 '자신에게 [선함이] 있은 이후에 남에게 [선함을] 요구하고, 자신에게 [악함이] 없은 이후에 남에게 [악함이 있음을] 비판한다'고 말하니, 이는 오히려 [인위적으로] 권면하고 감독하고서야 교화되는 것이다. 또 내면으로 이제 막 자신을 수양해놓고 급히 백성 모두 [선함을] 가지고 있기를 바라고, 자신은 이제야 겨우 [악함을] 면해놓고 마침내 남에게 [악함이] 반드시 없기를 요구한다." 대답했다: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에 대해 말한 것이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미루어 백성들과 함께 말미암는 것이다. 법령의 시행과 선을 포상하고 악을 벌주는 정치는 진실로 이치상 당연해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다.(정치에서 인위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군주가] 명령한 것이 그가 좋아하는 바에 배치되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기 때문에 다시 근본을 미루어 말한 것이다. 먼저 자신을 완성하고 백성을 책망하고자 하는 것이지, 진실로 오로지 자기 수양에만 힘쓰고 백성을 전혀 다스리지 않아서 팔짱 끼고 백성 스스로 교화되기를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 자신의 뛰어남을 뽐내고 백성의 못남을 부끄러워해 백성을 을러 반드시 따르게끔 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선군자께서주자 부친의 이름은 송(松)이고 자는 교년(喬年)이며 호는 위재선생(韋齊先生)이다. ‘자신에게 [선함이] 있으면 되지 반드시 남에게 [선함을]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에게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악함이] 없으면 되지 반드시 남에게 [악함이 없기를]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을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 玉溪盧氏曰: "有諸己而求諸人, 無諸己而非諸人者, 恕也. 求諸人而無諸己, 則不可. 非諸人而有諸己則不可者, 必先有忠而後有恕也."
- 옥계 노씨가 말했다: "[<대학>의] ‘자신에게 [선함을] 있어서 [선함을] 남에게 요구하거나, 자신에게 [악함을] 없어서 남에게 있는 [악함을] 비판한다’는 것은 恕이다. [주송의] ‘남에게 [선함을] 요구하면서 자신에게 [선함이] 없어서는 안 된다. 남에게 있는 [악함을] 비판하면서 자신에게 [악함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은, 반드시 忠을 우선하고 恕를 나중에 하는 것이다."
曰: "然則未能有善而遂不求人之善; 未能去上聲惡而遂不非人之惡, 斯不亦恕而終身可行乎哉?" 曰: "恕字之旨, 以如心爲義, 蓋曰如治己之心以治人, 如愛己之心以愛人, 而非苟然[442]姑息[443]之謂也. 然人之爲心, 必甞窮理以正之, 使其所以治己愛己者, 皆出於正, 然後可以即是推之以及於人, 而恕之爲道有可言者. 故<大學>之傳最後兩章, 始及於此, 則其用力之序, 亦可見矣. 至即此章而論之, 則欲如治己之心以治人者, 又不過以强上聲下同於自治爲本. 蓋能强於自治, 至於有善而可以求人之善, 無惡而可以非人之惡, 然後推己及人, 使之亦如我之所以自治而自治焉, 則表端景正景即影字, 古只作景. 至晉葛洪始加彡., 源潔流清, 而治己治人, 無不盡其道矣. 所以終身力此而無不可行之時也. 今乃不然, 而直欲以其不肖之身爲標凖, 視吾治教所當及者, 一以姑息待之, 不相訓誥, 不相禁戒, 將使天下之人, 皆如已之不肖, 而淪胥以䧟焉, 是乃大亂之道, 而豈所謂終身可行之恕哉? 近世名卿之言有曰范純仁, 字堯夫, 諡忠宣公.: '人雖至愚, 責人則明; 雖有聰明, 恕己則昏. 苟能以責人之心責己, 恕己之心恕人, 則不患不至於聖賢矣.' 此言近厚, 世亦多稱之者. 但恕字之義, 本以如心而得. 故可以施之於人, 而不可以施之於己. 今曰: '恕己則昏', 則是己知其如此矣; 而又曰: '以恕己之心恕人', 則是既不知自治其昏, 而遂推以及人, 使其亦將如我之昏而後已也. 乃欲由此以入聖賢之域, 豈不誤哉? 藉令平聲其意但爲欲反此心以施於人, 則亦止可以言下章愛人之事, 而於此章治人之意, 與夫音扶<中庸>以人治人之說, 則皆有未合者. 蓋其爲恕雖同, 而一以及人爲主; 一以自治爲主, 則二者之間, 毫釐之異, 正學者所當深察而明辨也. 若漢之光武亦賢君也. 一旦以無罪黜其妻, 其臣郅音質惲委粉反不能力陳大義以救其失, 而姑爲緩辭以慰解之. 是乃所謂'不能三年而緦功之察, 放飯流歠而齒决是憚者. 光武乃謂惲爲善恕己量主, 則其失又甚逺, 而大啓爲人臣者不肯責難陳善以賊其君之罪. 一字之義, 有所不明, 而其禍乃至於此, 可不謹哉?"
물었다: "그렇다면 선함을 가지지 못했다면 마침내 남에게 선을 요구하지 않거나, 악함을 아직 제거하지 못했다면 끝내 남의 악함을 비판하지 않는 것, 이것도 '恕해서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대답했다: "'恕'자의 뜻은 '如心'으로 의미를 삼으니, '자신을 다스리는 마음처럼 남을 다스리고, 자신을 아끼는 마음처럼 남을 아낌'을 말하는 것이지, ['마음대로(如心)'라는 말처럼] 아무 생각 없이 마음대로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됨은 반드시 궁리(격물)하고 바로잡아(정심) 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을 아끼는 것(수신)이 모두 바름에서 나오게 한 연후에야 곧 이를 미루어 남에게 미칠 수 있고, 恕의 도리에 말할 만한 것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대학>의 마지막 두 장(전9장<제가치국>, 전10장<치국평천하>)에서 처음 이것(恕)을 언급하였으니, <대학>의 공부 순서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이 장에 대해 논한다면, 자신을 다스리는 마음처럼 남을 다스리려는 것은 또 자신을 다스리는 것(自治)에 힘쓰는 것을 근본으로 함에 지나지 않는다. 대개 자신을 다스리는 데 능히 힘써, '선하게 되어 남에게 선을 요구할 수 있고, 악함이 없게 되어 남의 악을 비판할 수 있게 된' 연후에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쳐 남들도 내가 자신을 다스린 방법처럼 자신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겉모습이 단정해 그림자가 바르고, 근원이 정결해 물줄기가 맑듯 자신을 다스리고 남을 다스림에 도리를 다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이에 힘써도 행하지 못하는 때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아서, 단지 못난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이것을] 내 治教가 마땅히 미쳐야 할 바로 여기고는, 한결같이 제멋대로 남을 대해 훈계하지도 금지하지도 않아 장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못난 자신과 같이 되어 함께 [수렁에] 빠지고자 하니, 이것이 바로 크게 어지러운 도이니, [이것이] 어찌 이른바 '종신토록 행할 만한 恕'이겠는가? 근래 유명한 공경범순인의 자는 요부(堯夫)이고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사람이 비록 매우 어리석더라도 남을 비판할 때만큼은 현명하다. 사람이 비록 총명하더라도 자신을 용서(恕)할 때만큼은 어리석다. 만약 남을 비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비판하고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면, 성현이 되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비근하면서도 울림이 있어 세상 사람들도 자주 이를 일컫는다. 다만 '恕'자의 뜻은 본래 '如心'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恕'자는] 남에게 쓸 수 있지 자신에게는 쓸 수 없다. 지금 [범순인이] '자신을 용서(恕)할 때는 어리석다'고 말한 것은 자신이 이처럼 [어리석음을] 아는 것이지만, 또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고 말한다면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다스릴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마침내 이를 미루어 남에게 미쳐 남도 장차 어리석은 나같이 만든 뒤에야 그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통해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고자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설령 범순인의 뜻이 단지 '이 마음을 뒤집어 남에게 베풀고자 한다'는 것이었더라도, 다음 장의 '愛人'의 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 이 장의 '治人'의 일과 <중용>의 '以人治人'[444] 설에 대해서는 모두 부합하지 않는다. 대개 '恕'라고 말한 것은 똑같지만, 하나는 남에게 미치는 것(及人)을 위주로 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다스리는 것(自治)을 위주로 하니, 양자의 미세한 차이가 바로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면밀하게 살펴 분명하게 변별해야 할 바이다. 예를 들어, 후한 광무제 역시 현군이었지만 하루 아침에 죄없이 자기 아내를 쫓아냈는데, 신하였던 질운은 대의를 힘써 말해 군주의 잘못을 구제하지 못하고 그저 완곡한 말로 위로하며 타일렀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삼년상은 잘 치르지 못하면서 시마복이나 소공복만 자세히 살피며, 밥숟가락은 크게 뜨고 국은 흘리면서 마른고기를 이로 끊어 먹는 걸 꺼리는 격'[445]이다. 광무제는 도리어 '질운이 잘 자신을 恕하여 군주를 헤아렸다'고 말했으니 그 잘못이 매우 심할 뿐더러, 신하된 자가 군주를 책망하고 선을 말하려 하지 않아 제 군주를 망치는 죄를 크게 열었다. 한 글자의 뜻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 화가 도리어 이 지경에 이르니,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後漢書> <郅惲傳> 郭皇后廢,光武之后. 以寵衰數懐懟而廢. 惲乃言於帝曰: "臣聞夫婦之好, 父不能得之於子, 况臣能得之於君乎? 是臣所不敢言. 雖然, 願陛下念其可否之計, 無令天下有議社稷而巳." 帝曰: "惲善恕己量主, 知我必不有所左右而輕天下也."
- <후한서> <질운전> 곽황후가 폐위되자,[곽황후는] 광무제의 황후이다. 총애가 식자 자주 원망을 품었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질운이 이에 광무제에게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부부 간의 애정은 아버지도 자식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신이 폐하께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신이 감히 말할 수 없는 바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폐하께서 황후를 폐하신 일이 괜찮은지 아닌지 유념하셔서, 천하 사람들이 종묘사직 운운하지 않게 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광무제가 말했다: "질운이 자신을 恕하여 군주를 헤아리길 잘하니, 내가 필시 左右??하는 바가 있는데도 천하를 가볍게 여기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 것이다."[446]
- ○問如心爲恕. 朱子曰: "如, 比也, 比自家心上推去. 仁之與恕, 只争些子. 自然底是仁; 比而推之, 便是恕."
- ○'如心'이 '恕'가 되는 것에 대해 물었다. 주자가 답했다. "如는 비교한다는 것이니, 나의 마음에서 비교해서 (이를) 미루어나가는 것이다. 仁은 恕와 약간의 차이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仁이고, 비교하여 이를 미루어서 나가는 것이 恕다."
- ○問: "范忠宣以恕己恕人此語固有病. 但上文先言以責人之心責己, 則連下句亦未害." 曰: "上句自好, 下句自不好. 蓋才恕己便已不是. 若横渠云: '以愛己之心愛人, 則盡仁; 以責人之心責己, 則盡道'[447], 語便不同. 蓋恕是推去底, 我有是善, 亦要他人有是善. 推此計度之心, 此乃恕也. 於己不當下恕字."
- ○물었다. "범충선이 '나를 용서하는 것을 가지고 남을 용서한다'고 한 이 말은 진실로 병폐가 있습니다. 다만 윗글에서 먼서 '남을 책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를 책한다'고 말하였으니 아랫 문장을 이어도 해가 아닌 것입니다." 답했다, "윗 구절은 그 자체로 좋고, 아랫구절은 그 자체로 좋지 않다. 대개 나를 용서하자마자라고 한다면 이미 옳지 않다. 만약 횡거가 말한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남을 아낀다면 仁을 다한 것이고, 남을 책하는 마음으로 나를 책한다면 道를 다한 것이다.'라는 것과는 말이 같지 않다. 대개 恕는 미루어 나가는 것으로 내가 선함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선함을 요구할 수 있어서 이 헤아리는 마음을 미루니 이것이 바로 恕다. 본인(己)에 대해서 아래 恕자가 붙는 것은 옳지 못하다."
- ○玉溪盧氏曰: "心必窮理以正之者, 格物致知之事. 治己愛己, 皆出於正者, 誠意正心脩身之事. 即是推之以及人者, 齊家治國平天下之事也. 治己愛己, 皆出於正, 是盡己之忠, 即是推之以及於人, 是推己之恕. 忠者體, 恕者用. 表端源潔, 忠也; 景正流清, 恕也. 忠者, 明徳之事; 恕者, 新民之事. <大學>之道, 一忠恕而已. 此章言治國, 下章言治國平天下, 皆明明徳之推而恕之事也. 此章之義, 則欲如治己之心以治人; 下章絜矩之義, 則欲如愛己之心以愛人. 蓋治國乃平天下之本, 故此章以治人言; 下章以愛人言. 義各有攸當也."
- ○옥계노씨가 말했다. "'마음은 반드시 궁리해서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다'라는 것은, 격물치지의 일이요, '나를 다스리고 나를 아끼는 것은 모두 바름에서 나온다'는 것은 성의, 정심, 수신의 일이요 '이것을 미루어서 남에게 미친다'는 것은 제가, 치국, 평천하의 일이다. '治己愛己, 皆出於正'은 '盡己之忠'이요, '即是推之以及於人'은 '推己之恕'이다. 忠은 體이고 恕는 用이다. (위에서) '表端', '源潔'이라고 한 것은 忠이고, '景正', '流清'이라고 한 것은 恕이다. 忠이라는 것은 '明徳'의 일이요, 恕라는 것은 '新民'의 일이다. <대학>의 도는 '忠恕'로 관통될 뿐이다. 이 장에서 치국을 말하고, 아래장에서는 치국, 평천하를 말한 것은 모두 명명덕을 미루어서 恕하는 일이다. 이 장의 뜻은 나를 다스리는 마음과 같이 남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요, 아래장 '絜矩'의 뜻은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나를 아끼고자 하는 것이다. 대개 치국은 평천하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 장에서는 治人으로 말한 것이고, 아래 장에서는 愛人으로 말한 것이니 뜻은 각각 마땅한 바가 있다."
- ○新安陳氏曰: "<大學>傳至治國平天下章方言恕. 觀此言恕, 則隱然見脩身以前之當言忠矣. 盧氏之說, 正是即後之言以發明前之所未言者也."
- ○신안진씨가 말했다. "<대학>의 傳은 치국, 평천하장에 이르러서 비로소 恕를 말하였다. 이 恕를 말한 것을 보면 은연중에 수신 이전의 일은 忠을 말한 것임을 알겠다. 노씨의 설은 바로 이후의 것을 말하여서 이전에 말하지 않은 것을 드러낸 것이다."
○曰: "既結上文而復扶又反引詩者三, 何也?" 曰: "古人言必引詩, 蓋取其嗟嘆咏歌, 優游厭飫依據反, 有以感發人之善心, 非徒取彼之文, 證此之義而已也. 夫音扶以此章所論齊家治國之事, 文具而意足矣. 復三引詩, 非能於其所論之外, 别有所發明也. 然甞試讀之, 則反覆吟咏之間, 意味深長, 義理通暢, 使人心融神㑹, 有不知手舞而足蹈者, 是則引詩之助與音預爲多焉. 蓋不獨此, 他凡引詩云者, 皆以是求之, 則引者之意可見, 而詩之爲用亦得矣." 曰: "三詩亦有序乎?" 曰: "首言家人, 次言兄弟, 終言四國, 亦'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448]之意也."
○물었다. "이미 윗 글을 결론지었는데 다시 시 세 가지를 인용한 것은 어째서 입니까?" 답했다. "옛 사람들은 말할 적에 반드시 시를 인용했으니 대개 시의 특성들을 취해서 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감발시킬 수 있었으니 다만 저 글자만을 취하여 여기의 뜻을 알린 것이 아니었다. 무읏 이 장에서 논한 제가, 치국의 일은 글이 갖춰져있고 의미가 충분하다. 다시 시 세가지를 인용한 것은 논한 것 이외에 별도로 감발하려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찍이 시험삼아 읽어보니, 반복해서 읊어보는 사이에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고, 뜻이 통하게 되어 사람들도 하여금 마음으로 이해하게 하여서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足之蹈之、手之舞之'[449] 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시를 인용하는 도움이 많은 것이다. 대개 이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시를 인용해 말한 것은 모두 이러한 이유로 헤아린 것이니, 인용한 사람의 뜻을 알수 있고 시의 쓰임도 얻은 것이다." 물었다. "세 시는 또한 순서가 있습니까?" 답했다. "처음에 家人을 말하였고 다음에 兄弟를 말하였고 마지막에 四國을 말하였으니, 또한 '덕이 적은 부인에게 모범이 되고, 형제들에까지 미쳐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 新安陳氏曰: "所引詩, 見<大雅><思齊>篇. 孟子甞引之, <集註>云: '御, 治也', 於御字無音; <詩傳>云: '御, 迎也', 於御字音牙嫁反. 當依<集註>如字讀."
- 신안진씨가 말했다. "인용한 시는 <大雅>, <思齊>편에 보인다. 맹자가 일찍이 이를 인용하여 <집주>에서 '御는 다스린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御'자가 성조가 없고, <시집전>에서 '御'는 맞이하는 것이다' 라고 한 것은 御의 음이 牙嫁反이니, 마땅히 <집주>가 如字로 읽은 것에 의거해야한다."
傳十章
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上老老而民興孝,上長長而民興弟,上恤孤而民不倍,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長,上聲。弟,去聲。倍,與背同。絜,胡結反。
이른바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달려있다'는 것은, 위정자가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면 백성들이 효(孝)를 일으키고, 위정자가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면 백성들이 공경(弟)을 일으키며, 위정자가 고아를 긍휼히 대우하면 백성들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혈구지도(絜矩之道)가 있다.
- 老老,所謂老吾老也。興,謂有所感發而興起也。孤者,幼而無父之稱。絜,度待洛反下同也。矩,所以為方也。矩者, 制方之器, 俗呼曲尺. 此借以為喻.言此三者,上行下效,捷疾業反於影響,所謂家齊而國治也。亦可以見人心之所同,而不可使有一夫之不獲矣。是以君子必當因其所同,推以度物物即人也,使彼我之間各得分去聲願,則上下四旁均齊方正,而天下平矣。
- '老老'는 [<맹자>의 이른바] '내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한다'[450]는 것이다. '興'은 감발하는 점이 있어 흥기함을 말한다. '孤'라는 것은 어린데 부모가 없는 사람을 말한다. '혈(絜)'은 헤아림이고, '구(矩)'는 직각(方)을 만드는 도구이다.'矩'라는 것은 직각을 만드는 도구이니, 세속에서는 곡척(曲尺)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가지고 비유한 것이다. [이 구절은 다음을] 말한다: 이 세 가지는 위정자가 실천하면 피치자가 본받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르니, 이른바 '집안이 단속되어 나라가 다스려진다'는 것이고, 또한 [이 세 가지에서] 사람 마음이 매한가지니 한 사람이라도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동일한 마음에 기인해 이를 미루어 남을 헤아려 피아가 각각 원하는 바를 얻게 해야 하니, 이렇게 한다면 상하사방이 고르고 바르게 되어 천하가 평안해질 것이다.
- 朱子曰: "'老老、長長、恤孤', 方是就自家切近處說, 所謂家齊也; '民興孝、興弟、不倍'是就民之感發興起處說, 治國而國治之事也. 上行下效, 感應甚速, 可見人心所同者如此. '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此句方是引起絜矩事; 下面方說絜矩, 而結之云此之謂絜矩之道."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며, 고아를 긍휼히 대우하는 것'은 한창 자기에게 가까운 곳에서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집안이 단속된다'는 것이고, '백성들이 효를 일으키고 공경을 일으키며 배신하지 않는 것'은 백성들이 [위정자의 실천에] 감발해 흥기한 상황에서 말하는 것이니, '나라를 다스려 나라가 다스려진' 일이다. 위정자가 실천함에 피치자가 본받는 감응의 과정이 매우 빠르니, 사람 마음이 이렇게 동일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혈구지도(絜矩之道)가 있다' 이 구절은 한창 혈구(絜矩)의 일을 제기하고 있고, 뒤에서야 혈구(絜矩)를 말하고, '이것을 혈구지도라고 한다'고 마무리한다."[451]
- ○絜矩之說, 不在前數章, 却在治國平天下章. 到此是節次成了, 方用得.
- 혈구(絜矩)에 대한 설은 이전의 여러 장에 있지 않고 전10장(치국평천하장)에 있다. 전10장에 이르면 절차가 완성되므로 비로소 이를 실천할 수 있다.[452]
- ○先說上行下效, 到絜矩處是就政事上說. 若但興起其善心, 不使得遂其心, 雖能興起, 亦徒然耳. 如政煩賦重, 不得養其父母, 畜其妻子, 又安得遂其善心? 須是推己之心, 以及於彼, 使彼仰足以事, 俯足以育, 方得.
- 먼저 위정자가 실천하면 피치자가 본받음을 말하고, 혈구(絜矩) 부분에서는 정사에 대해 말한다. 만일 단지 피치자의 선한 마음만 일으키고 그 마음을 이룰 수 있도록 하지 못한다면, 비록 그들이 선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허사일 뿐이다. 만약 정치가 번잡하고 세금은 무거워 피치자가 자신의 부모를 봉양하거나 자신의 처자식을 기르지 못한다면, 또 어디서 선한 마음을 이룰 수 있겠는가? 반드시 [위정자는]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쳐, 피치자로 하여금 위로는 [위정자를] 섬길 수 있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기를 수 있어야 한다.
- ○能使人興起者, 聖人之教化也; 能遂其興起之心者, 聖人之政事也.
- 사람들이 흥기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성인의 교화이고, 그들이 일으킨 마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성인의 정사이다.
- ○矩者, 心也. 我心所欲, 即他人所欲. 我欲孝弟慈, 必使他人皆如我之孝弟慈, 不使一夫之不獲, 方可. 只我能如此, 他人不能如此, 即是不平矣.
- 구(矩)라는 것은 마음이다. 내 마음이 원하는 바가 바로 남이 원하는 바이다. 내가 효도·공경·자애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남들도 모두 내가 효도·공경·자애하는 것처럼 만들어 한 사람이라도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나만 이렇게 할 수 있고 남은 이렇게 못하는 것은 평안하지 못한 것이다.
- ○絜矩不是外面别有箇道理, 只便是前面正心脩身底推而措之.
- 혈구(絜矩)란 외부에 따로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正心·脩身한 것을 미루어 행하는 것이다.
- ○問: "絜矩之道是廣仁之用否?" 曰: "此乃求仁工夫, 正要著力. 若仁者, 只是舉而措之耳, 不待絜矩而自無不平矣. 絜矩正是恕者之事."
- 물었다: "혈구지도는 仁의 用을 넓히는 것입니까?" 대답하셨다: "혈구지도는 仁을 구하는 공부이니 힘을 쏟아야 한다. 仁이라는 [경지는] 단지 들어다 놓기만 하면 될 뿐 혈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평안하지 않음이 없다. 혈구는 바로 恕의 일이다."[453]
- ○興孝、興弟、不倍, 上行下效之意, 上章已言之矣, 此章再舉之者, 乃欲引起下文'君子必須絜矩然後可以平天下'之意. 不然則雖民化其上以興於善, 而天下終不免於不平也. 故此一章首尾皆以絜矩之意推之, 而未嘗復言躬行化下之說.
- '興孝·興弟·不倍'는 '위정자가 실천하면 피치자가 본받는다'는 뜻으로 앞장에서 이미 언급했는데 이 장에서 다시 거론한 것은, 다음의 '군자는 반드시 혈구한 연후에 천하를 평안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비록 백성들이 위정자에 감화되어 선한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천하는 끝내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혈구의 뜻에서 미룬 것이고, 더 이상 '위정자가 몸소 실천해 피치자를 감화시킨다'는 설을 말한 적이 없다.
- ○問: "'上老老而民興孝', 下面接'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似不相續, 如何?" 曰: "這箇便是相續. 絜矩是四面均平底道理, 教他各得老其老, 各得長其長, 各得幼其幼. 不成自家老其老, 教他不得老其老; 長其長, 教他不得長其長; 幼其幼, 教他不得幼其幼, 便不得. '是以'二字是結上文, 猶言君子為是之故所以有絜矩之道."
- 물었다: "'위정자가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면 백성들이 효(孝)를 일으킨다' 뒤에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혈구지도(絜矩之道)가 있다'를 이었는데,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대답하셨다: "이 부분은 서로 연결된다. 혈구란 사방으로 균등한 도리이니, 그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고, 자신의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며, 자신의 아이를 아이로 대우하는 것이지, 자기는 자기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면서 남은 자기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지 못하게 하거나, 자기는 자기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면서 남은 자기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지 못하게 하거나, 자기는 자기 아이를 아이로 대우하면서 남은 자기 아이를 아이로 대우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是以' 두 자가 앞 문장을 마무리하니, '군자는 이 때문에 혈구지도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 ○絜矩如自家好安樂, 便思他人亦欲安樂, 當使無'老稚轉乎溝壑, 壯者散而之四方'之患. 制其田里, 教之樹畜, 皆比以推之.
- 혈구는 마치 자신이 안락함을 좋아하면 남도 안락하고자 함을 생각하고서 그들로 하여금 '노인과 어린이의 시체가 골짜기에 뒹굴고, 청년이 흩어저 사방으로 가는'[454] 근심이 없게 해야 하는 것과 같다. 백성들의 농지를 구획하고 나무 심고 가축을 기르게 하는 등의 정치 행위 모두 자신의 마음에 견줘 미루는 것이다.
所惡於上,毋以使下;所惡於下,毋以事上;所惡於前,毋以先後;所惡於後,毋以從前;所惡於右,毋以交於左;所惡於左,毋以交於右:此之謂絜矩之道。惡、先,並去聲。
윗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고, 아랫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뒷사람의 앞에 서지 말고, 뒷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앞사람의 뒤에 서지 말며, 오른쪽 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왼쪽 사람과 사귀지 말고, 왼쪽 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오른쪽 사람과 사귀지 않는 것, 이것을 혈구지도(絜矩之道)라고 한다.
- 此覆解上文絜矩二字之義。如不欲上之無禮於我,則必以此度下之心,而亦不敢以此無禮使之。不欲下之不忠於我,則必以此度上之心,而亦不敢以此不忠事之。至於前後左右,無不皆然,則身之所處上聲,上下、四旁上下己見上文. 前後左右為四旁, 四旁即四方也.、長短、廣狹,彼此如一,而無不方矣。彼同有是心而興起焉者,又豈有一夫之不獲哉。所操平聲者約,而所及者廣,此平天下之要道也。故章內之意,皆自此而推之。
- 여기서는 앞의 '혈구' 두 자의 뜻을 다시 풀고 있다. 만약 윗사람이 내게 무례했던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로써 아랫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나라도 이렇게 무례하게 아랫사람을 감히 부려서는 안 되고, 아랫사람이 내게 불충했던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로써 윗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나라도 이렇게 불충하게 윗사람을 감히 섬겨서는 안 된다. 전후·좌우의 경우도 모두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다면, 내 자신이 놓여있는 상하·사방·장단·광협의 관계가 피차가 모두 한결같아 바르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니, 나와 똑같은 이 마음을 지녀 흥기한 자들 가운데 또 어찌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는가? 단속하는 바는 간략한데 미치는 효과는 광대하니, 이것이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핵심적 방법이다. 그러므로 전10장의 의미는 모두 이것(혈구)에서 미룬 것이다.
- 朱子曰: "上下、前後、左右都只一様. 心只是將那頭折轉來比這頭. 在我上者使我如此而我惡之, 更不將來待在下之人. 如此則自家在中央, 上面也占許多地步, 下面也占許多地步, 便均平方正. 若下之事我如此而我惡之, 我若將去事上, 便下面長, 上面短, 不方了. 左右前後皆然."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상하·전후·좌우 모두 똑같을 뿐이다. 마음에는 [피차의 구분이 없고] 그저 저것을 돌려 이것에 견주는 것일 뿐이다. 내 위에 있는 자가 나를 이렇게 부려서 내가 싫다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아랫사람을 대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한다면, 내가 가운데에 있으면서 위로도 ?? 아래로도 ?? 똑같이 방정해질 것이다. 만약 아랫사람이 나를 이렇게 섬겨서 내가 싫은데 내가 만약 이렇게 윗사람을 섬긴다면, 아래는 길고 위는 짧아 방정하지 못하게 된다. 좌우·전후 모두 그러하다."[455]
- ○譬如交代官, 前官之待我既不善, 吾毋以前官所以待我者待後官也. 左右, 如東西鄰. 以鄰國為壑, 是所惡於左, 毋以交於右, 可也. 上下、前後、左右做九箇人來看便見[456].
- 관직 교대에 비유하자면, 전임자가 나를 잘 대우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전임자가 나를 대우한 식으로 후임자를 대해서는 안 된다. '좌우'는 동서의 이웃과 같다. '이웃 나라를 구렁으로 여기는 것'[457]이 '왼쪽 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오른쪽 사람과 사귀는 것'이니,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458] 상하·전후·좌우 등 [중앙과 팔방] 아홉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알 수 있다??[459]
-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是兩摺說, 只以己對人言. 若絜矩, 則上之人所以待我, 我又思以待下之人, 是三摺說, 如<中庸>'所求乎子以事父未能'亦是此意. 但<中庸>是言其所好; 此言其所惡也. 人莫不有在我之上者, 莫不有在我之下者, 如親在我之上、子孫在我之下, 我欲子孫孝於我而我却不能孝於親; 我欲親慈於我而我却不能慈於子孫, 便是一畔長一畔短, 不是絜矩.
- '내가 서고자 하면 남부터 세워주고, 내가 현달하고자 하면 남부터 현달시킨다'[460]는 말은 둘로 접은 설(己·人)이니, 단지 자신을 남에게 대비해 말한 것이다. '혈구'는 윗사람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내가 다시 생각하고서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이니, 셋으로 접은 설(上之人·我·下之人)로 <중용>의 '자식에게 원하는 바로 부모 섬기기를 잘 하지 못한다'[461] 역시 이런 의미이다. 다만 <중용>은 좋아하는 바를 말하는 말하고, 여기는 싫어하는 바를 말하고 있다. 마치 내 위의 부모나 내 아래의 자손처럼 누구나에게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있는데, 자신은 자손이 내게 효도하기를 바라면서 정작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고, 자신은 부모가 내게 자애롭기를 바라면서 정작 자손에게 자애롭지 못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길고 한편으로는 짧은 것이니 '혈구'가 아니다."[462]
- ○問: "長短、廣狭如一而無不方. 在人有天子、諸侯、大夫、士、庶人之分, 何以使之均平?" 曰: "非言上下之分欲使之均平. 盖事親事長, 當使之均平, 上下皆得行之. 上之人得事其親, 下之人也得事其親. 但各隨其分, 得盡其事親事長之意耳."
- 물었다: "'장단·광협의 관계가 피차가 모두 한결같아 바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셨는데, 사람에게는 천자·제후·대부·사·서인의 신분이 있는데, 어떻게 균등하게 합니까?" 대답하셨다: "상하 신분을 균등하게 하려고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나 어른을 섬길 때 똑같이 해야 상하가 모두 순조로워진다. 윗사람이 자신의 부모를 잘 섬겨야 아랫사람도 자신의 부모를 잘 섬길 수 있다. 다만 각각 자신의 분수에 따라 부모나 어른을 섬기는 뜻을 다할 수 있을 뿐이다."[463]
1. 혈구
詩云:「樂只君子,民之父母。」民之所好好之,民之所惡惡之,此之謂民之父母。樂,音洛。只,音紙。好、惡,並去聲,下並同。
<시>에서 "즐거운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고 하니, 백성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를 싫어하는 자, 이 자를 '백성의 부모'라고 한다.
- 詩小雅南山有臺之篇。只,語助辭。言能絜矩而以民心為己心,則是愛民如子,而民愛之如父母矣。
- <시> <소아> <남산유대>편이다. '只'는 어조사이다. [이 구절은 다음을] 말한 것이다: 혈구해 백성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을 수 있다면, 이는 백성을 자식처럼 아낀 것이니, 백성은 부모처럼 아낄 것이다.
- 此言能絜矩之效.
- 이 구절은 잘 혈구했을 때의 효과를 말한다.
詩云:「節彼南山,維石巖巖,赫赫師尹,民具爾瞻。」有國者不可以不慎,辟則為天下僇矣。節,讀為截。辟,讀為僻。僇,與戮同。
<시>에서 "깎아지르는 듯한 저 남산, 바위가 겹겹이 쌓였구나. 위대한 태사 윤씨여, 백성들이 모두 그대를 바라보노라"라고 하니, 나라를 소유한 자는 삼가지 않아선 안 되니, 편벽되면 천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 詩小雅節南山之篇。節,截然高大貌。師尹,周太師尹氏也。具,俱也。辟,偏也。言在上者人所瞻仰,不可不謹。若不能絜矩而好惡殉於一己之偏,則身弒國亡,為天下之大戮矣。
- <시> <소아> <절남산> 편이다. '節'은 깎아지른 듯 높고 큰 모양이다. '師尹'은 주나라 태사 윤씨이다. '具'은 '모두'이다. '辟'은 '치우침'이다. [이 구절은 다음을] 말한 것이다: 윗자리에 있는 자는 백성들이 우러르는 대상이니, 삼가지 않아선 안 된다. 만약 그가 혈구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기호만 좇아 좋아하고 싫어한다면, 자신은 시해당하고 나라는 망해 천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 此言不能絜矩之禍, 與上一節正相反者也.
- 여 구절에서는 혈구하지 못했을 때의 화에 대해 말했으니, 앞 구절과 정반대이다.
詩云:「殷之未喪師,克配上帝;儀監于殷,峻命不易。」道得眾則得國,失眾則失國。喪,去聲。儀,詩作宜。峻,詩作駿。易,去聲。
<시>에서 "은나라가 아직 대중을 잃지 않았을 때는 능히 [그 덕이][464] 상제에 짝했었다. 마땅히 은나라를 볼 지어다. 큰 명은 [지키기] 쉽지 않도다"라고 하니, 대중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대중을 잃으면 나라를 잃음을 말한다.
- 詩文王篇。師,眾也。配,對也。配上帝,言其為天下君,而對乎上帝也。監,視也。峻,大也。不易,言難保也。道,言也。引詩而言此,以結上文兩節之意。有天下者,能存此心而不失,則所以絜矩而與民同欲者,自不能已矣。
- <시> <문왕>편이다. '師'는 대중이다. '配'는 '짝함'이다. '配上帝'는 그가 천하의 임금이 되어 상제와 짝함을 말한다. '監'은 '봄'이다. '峻'은 '큼'이다. '不易'는 보존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道'는 '말함'이다. 시를 인용해 이를 말함으로써 앞의 두 구절의 의미를 마무리하였다. 천하를 소유한 자가 이 마음을 보존해 잃지 않을 수 있다면, 혈구해 백성들과 똑같이 바라는 것을 저절로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2.財貨를 가지고 혈구를 말함
是故君子先慎乎德。有德此有人,有人此有土,有土此有財,有財此有用。
그러므로 군자는 먼저 자신의 덕을 삼간다. 덕이 있으면 이에 사람을 얻고, 사람을 얻으면 땅을 얻으며, 땅을 얻으면 재물을 얻고, 재물을 얻으면 그것을 쓰게 된다.
- 先慎乎德,承上文不可不慎而言。德,即所謂明德。有人,謂得眾。有土,謂得國應上文得衆則得國。有國則不患無財用矣。
- '먼저 자신의 덕을 삼간다'는 것은 앞 글의 '삼가지 않아선 안 된다'[465]를 이어 말한 것이다. '德'은 바로 이른바 '명덕'이다. '有人'은 대중을 얻음을 말하고, '有土'는 '나라를 얻음'을 말한다.앞 글의 "得衆則得國"에 호응한다. 나라를 얻으면 재용이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 朱子曰: "為國, 絜矩之大者又在於財用. 所以後面只管說財."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를 다스릴 때, 혈구하는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또한 재용에 달려있다. 그래서 뒤에서는 그저 재용(財)에 대해 말한다."
- ○自家若意誠、心正、身脩、家齊了, 則天下之人, 安得不歸於我? 如湯、武之東征西怨, 則自然有人有土."
- 자신이 만일 뜻이 진실하고 마음이 바르며 자기 자신이 수양되고 집안이 단속되었다면, 천하 사람들이 어찌 나에게 귀의하지 않겠는가? 탕왕·무왕이 동쪽을 정벌하면 서쪽 사람들이 원망한 것처럼[466] 저절로 사람과 땅을 얻을 것이다.
德者本也,財者末也,
덕이라는 것은 근본이고, 재물이라는 것은 말단이니,
- 本上文而言。
- 앞 글에 근거해 말한 것이다.
外本內末,爭民施奪。
근본을 제쳐두고 말단만 중시하면, [이는] 백성들을 다투게 하고 빼앗으라고 가르치는 격이다.
- 人君以德為外,以財為內,則是爭鬥其民,而施之以劫奪之教也。蓋財者人之所同欲,不能絜矩而欲專之,則民亦起而爭奪矣。
- 임금이 덕을 제쳐두고 재물만 중시하면, 이는 자기 백성들을 다투게 하고 빼앗으라는 가르침을 펴는 것이다. 재물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똑같이 원하는 바이지만, 혈구하지 못하고 독차지하려고 한다면, 백성들 역시 일어나 다투고 빼앗을 것이다.
- 朱子曰: "民本不是要争奪. 惟上之人以徳為外而暴征横斂, 民便效, 尤相攘相奪. 是上教得他如此."
-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은 본래부터 다투고 빼앗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윗사람이 덕을 제쳐두고 멋대로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기 때문에, 백성이 이를 본받아 더욱 서로 빼앗는 것이니, 이는 위정자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是故財聚則民散,財散則民聚。
그러므로 재물이 모이면 백성은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백성이 모인다.
- 外本內末故財聚,爭民施奪故民散.反是則有德而有人矣。
- '근본을 제쳐두고 말단을 중시했기' 때문에 '재물이 모이고', '백성을 다투게 하고 빼앗으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백성이 흩어진다. 이와 반대로 하면 '덕이 생기고 사람을 얻는다'.
是故言悖而出者,亦悖而入;貨悖而入者,亦悖而出。悖,布內反。悖,逆也。
그러므로 어그러져 나간 말은 다시 어그러져 들어오고, 어그러져 들어온 재화는 다시 어그러져 나간다.
- 此以言之出入,明貨之出入也。自先慎乎德以下至此,又因財貨以明能絜矩與不能者之得失也。
- 이 구절은 말의 출입으로 재화의 출입을 밝혔다. "先慎乎德"부터 여기까지는 또 재화를 통해 혈구할 수 있는지 못하는지에 따른 득실을 밝혔다.
- 問: "絜矩如何只管說財利?" 朱子曰: "畢竟人為這箇較多. 所以生養人, 只是這箇; 所以殘害人, 亦只是這箇."
- 물었다: "혈구에 대해 [논하는데] 어째서 줄곧 재화만 말하는 것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결국 사람들이 재화를 추구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기 때문이다. 사람을 낳고 기르는 것도 이것 뿐이고, 사람을 해치는 것도 이것 뿐이다."[467]
- ○此章大㮣是専從絜矩上來. 盖財者, 人之所同好也. 而我欲専其利, 則民有不得其所好者矣. 大抵有國有家所以生起禍亂, 皆是從這裏來.
- 이 장은 대체로 오로지 '혈구'만 다루고 있다. 재물이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그 이익을 독차지하고자 한다면, 백성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자가 생길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라나 집안에 화란이 생기는 이유는 모두 이로부터 말미암는다.
3.
康誥曰:「惟命不于常!」道善則得之,不善則失之矣。
- 道,言也。因上文引文王詩之意而申言之,其丁寧反覆之意益深切矣。
楚書曰:「楚國無以為寶,惟善以為寶。」
- 楚書,楚語。言不寶金玉而寶善人也。
- <國語><楚語>王孫圉聘扵晉, 定公饗之, 趙簡子鳴玉以相, 問曰: "楚之白珩, 猶在乎? 其為寳也, 㡬何矣?" 曰: "楚之所寳者, 曰觀射父, 能作訓辭以行事於諸侯, 使無以寡君為口實. 又有左史倚相, 能通訓典, 以敘百物, 以朝夕獻善敗于寡君, 使無忘先王之業. 若諸侯之好幣具, 而導之以訓辭, 寡君其可以免罪於諸侯, 而國民保焉. 此楚國之寳也. 若夫白珩, 先王之玩也, 何寳之焉?"王孫圉, 楚大夫; 趙簡子, 名鞅. '鳴玉以相', 鳴佩玉以相禮也. 珩, 佩玉之横者.
舅犯曰:「亡人無以為寶,仁親以為寶。」
- 舅犯,晉文公舅狐偃,字子犯。亡人,文公時為公子名重耳,出亡在外也。仁,愛也。事見形甸反檀弓。<禮記><檀弓篇>晉獻公之喪, 秦穆公使人弔公子重耳, 且曰: "寡人閒之: 亡國恒於斯, 得國恒於斯. 雖吾子儼然在憂服之中, 喪亦不可久也. 時亦不可失也. 孺子其圖之." 以吿舅犯, 舅犯曰: "孺子其辭焉. 喪人無寳, 仁親以為寳. 父死之謂何? 又因以為利而天下其孰能說之? 孺子其辭焉."重, 平聲. 喪亦、喪人之喪並去聲. 喪即出亡也. 父死而欲反國求為後, 是因以為利也. 說如字, 猶解也.此兩節又明不外本而內末之意。
秦誓曰:「若有一个臣,斷斷兮無他技,其心休休焉,其如有容焉。人之有技,若己有之,人之彥聖,其心好之,不啻若自其口出,寔能容之,以能保我子孫黎民,尚亦有利哉。人之有技,媢疾以惡之,人之彥聖,而違之俾不通,寔不能容,以不能保我子孫黎民,亦曰殆哉。」个,古賀反,書作介。斷,丁亂反。媢,音冒。
- 秦誓,周書。斷斷,誠一之貌。彥,美士也。聖,通明也。尚,庶幾也。媢,忌也。違,拂戾也。殆,危也。
唯仁人放流之,迸諸四夷,不與同中國。此謂唯仁人為能愛人,能惡人。迸,讀為屏,古字通用。
- 迸,猶逐也。言有此媢疾之人,妨賢而病國,則仁人必深惡而痛絕之。以其至公無私,故能得好惡之正如此也。
見賢而不能舉,舉而不能先,命也;見不善而不能退,退而不能遠,過也。
- 命,鄭氏云「當作慢。」程子云:「當作怠。」未詳孰是。遠,去聲。若此者,知所愛惡矣,而未能盡愛惡之道,蓋君子而未仁者也。
好人之所惡,惡人之所好,是謂拂人之性,菑必逮夫身。菑,古災字。夫,音扶。
- 拂,逆也。好善而惡惡,人之性也;至於拂人之性,則不仁之甚者也。自秦誓至此,又皆以申言好惡公私之極,以明上文所引南山有臺、節南山之意。
是故君子有大道,必忠信以得之,驕泰以失之。
- 君子,以位言之。道,謂居其位而修己治人之術。發己自盡為忠,循物無違謂信。驕者矜高,泰者侈肆。此因上所引文王、康誥之意而言。章內三言得失,而語益加切,蓋至此而天理存亡之幾決矣。
生財有大道,生之者眾,食之者寡,為之者疾,用之者舒,則財恒足矣。恒,胡登反。
- 呂氏曰:「國無遊民,則生者眾矣;朝無幸位,則食者寡矣;不奪農時,則為之疾矣;量入為出,則用之舒矣。愚按:此因有土有財而言,以明足國之道在乎務本而節用,非必外本內末而後財可聚也。自此以至終篇,皆一意也。
仁者以財發身,不仁者以身發財。
- 發,猶起也。仁者散財以得民,不仁者亡身以殖貨。
未有上好仁而下不好義者也,未有好義其事不終者也,未有府庫財非其財者也。
- 上好仁以愛其下,則下好義以忠其上;所以事必有終,而府庫之財無悖出之患也。
孟獻子曰:「畜馬乘不察於雞豚,伐冰之家不畜牛羊,百乘之家不畜聚斂之臣,與其有聚斂之臣,寧有盜臣。」此謂國不以利為利,以義為利也。畜,許六反。乘、斂,並去聲。
- 孟獻子,魯之賢大夫仲孫蔑也。畜馬乘,士初試為大夫者也。伐冰之家,卿大夫以上,喪祭用冰者也。百乘之家,有采地者也。君子寧亡己之財,而不忍傷民之力;故寧有盜臣,而不畜聚斂之臣。此謂以下,釋獻子之言也。
長國家而務財用者,必自小人矣。彼為善之,小人之使為國家,菑害並至。雖有善者,亦無如之何矣!此謂國不以利為利,以義為利也。長,上聲。
- 「彼為善之」,此句上下,疑有闕文誤字。自,由也,言由小人導之也。此一節,深明以利為利之害,而重言以結之,其丁寧之意切矣。
- 右傳之十章。釋治國平天下。
- 此章之義,務在與民同好惡而不專其利,皆推廣絜矩之意也。能如是,則親賢樂利各得其所,而天下平矣。
- 凡傳十章:前四章統論綱領指趣,後六章細論條目功夫。其第五章乃明善之要,第六章乃誠身之本,在初學尤為當務之急,讀者不可以其近而忽之也。
- 右傳之十章。釋治國平天下。
『혹문』 전10장
或問: "上章論齊家治國之道, 既以孝弟慈爲言矣. 此論治國平天下之道, 而復扶又反以是爲言, 何也?" 曰: "三者, 人道之大端、衆心之所同得者也. 自家以及國, 自國以及天下, 雖有大小之殊, 然其道不過如此而已. 但前章專以己推而人化爲言; 此章又申言之以見形甸反人心之所同而不能已者如此. 是以君子不唯有以化之, 而又有以處上聲下同之也.新安陳氏曰: "'老老長長恤孤, 躬行於上而民興孝弟不倍於下', 是'有以化之'. '絜矩'是乃'處之'之道也." 蓋人之所以爲心者, 雖曰未甞不同, 然貴賤殊勢, 賢愚異稟. 苟非在上之君子眞知實蹈有以倡尺亮反之, 則下之有是心者, 亦無所感而興起矣.以上詳說'有以化之'. 幸其有以倡焉而興起矣, 然上之人乃或不能察彼之心而失其所以處之之道, 則彼其所興起者或不得遂而反有不均之歎. 是以君子察其心之所同而得夫音扶絜矩之道, 然後有以處此而遂其興起之善端也.以上詳説'有以處之'."
혹자가 물었다. "윗 장에서 齊家, 治國의 도를 논할 적에 이미 孝弟慈를 말했는데, 여기에서 治國, 平天下의 도를 논할 적에 다시 孝弟慈를 말하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답했다. "세 가지는 人道의 핵심이요, 뭇 사람들의 마음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집안에서부터 나라까지, 나라에서부터 천하까지 비록 그 크기는 다르지만, 그 道는 여기(孝弟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다만 이전 장에서는 오직 나를 미루어서 남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또 (효제자를) 거듭 말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똑같이 가진 것이라서 그칠 수 없음이 이와 같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신안진씨가 말했다. "'노인을 노인대접하고 어른을 어른대접하며 고아를 긍휼히 여기는 것을 위에서 부터 몸소 실천하면 백성들이 아래에서 부터 孝, 弟, 不倍를 일으킨다'는 것이 '有以化之'요, '絜矩'가 바로 '그들을 대처'하는 방법이다." 대개 사람들의 마음은 비록 똑같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지만 귀천이 형세를 달리하고, 어질고 우매함이 기품을 달리하여 만일 위에 있는 군자가 진실로 알고 몸소 실천해서 그들을 선도할 수 있지 않다면 아래사람들 중에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또한 감발하여 흥기함이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有以化之'를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요행히 그들을 선도하여 흥기시킬 수 있겠지만, 윗 사람들이 이에 간혹 그들의 마음을 살필 수 없고, 그들을 대처하는 방법을 잃어버린다면 그들이 흥기하는 바가 간혹 이루어질 수 없고 도리어 균등하지 못하다는 탄식이 있을 것이니, 이 때문에 군자가 그 마음이 동일한 바를 살피고 絜矩의 방법을 얻은 이후에야 그들에게 대처하고 그 흥기하는 선한 단서를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有以處之'를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曰: "何以言'絜之爲度'待洛反下同也?" 曰: "此<莊子>所謂'挈之百圍'; 賈子所謂'度長絜大'者也.莊子名周人間世篇匠石之齊, 至于曲轅, 見社櫟樹, 其大蔽牛, 絜之百圍.<註> 絜, 圍束也. 是将一物圍束以為之則也.[468]賈子名誼, 西漢洛陽人.<過秦論>試使山東之國, 與陳渉度長絜大, 比權量力, 則不可同年而語矣. 前此諸儒, 蓋莫之省悉井反而强上聲訓以挈口結反,[469] 殊無意謂[470]. 先友太史范公名如圭, 文公父韋齋之友.乃獨推此以言之, 而後其理可得而通也. 蓋挈, 度也; 矩, 所以爲方也. 以己之心, 度人之心, 知人之所惡去聲下同者不異乎己, 則不敢以己之所惡者施之於人, 使吾之身一處乎此, 則上下四方物我之際, 各得其分去聲, 不相侵越, 而各就其中. 校音教其所占之地, 則其廣狹、長短又皆平均如一, 截然方正, 而無有餘不足之處去聲. 是則所謂絜矩者也. 夫音扶爲天下國家, 而所以處心制事者一出於此, 則天地之間, 將無一物不得其所, 而凡天下之欲爲孝弟不倍者, 皆得以自盡其心而無不均之歎矣. 天下其有不平者乎? 然君子之所以有此, 亦豈自外至而强上聲爲之哉? 亦曰物格知至, 故有以通天下之志, 而知千萬人之心即一人之心; 意誠心正, 故有以勝一己之私而能以一人之心爲千萬人之心. 其如此而已矣."
물었다. "어째서 '絜'는 탁(度)이 된다고 말한 것입니까?" 답했다. "이것은 <장자>에서 '둘레가 백아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가의가 '길이를 헤아리고 크기를 재다'라고 말한 것이다." <장자>이름은 周다.<人間世>편에, '장인 石이 齊나라에 가다가, 曲轅에 이르러 社櫟樹를 보았는데 그 크기가 소를 가릴만했고, 둘레가 백 아름이었다'라고 하였다.<註>에 絜, 는 두른다는 것이니 장차 하나의 물건으로 두른 것을 규격으로 삼는다는 것이다.賈子이름은 의(誼)요, 서한 낙양사람이다.<過秦論>에 '시험삼아 산동국으로 하여금 진섭과 (서로) 길이와 크기를 재보고 그 힘을 비교해보니, 동등하게 말할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 전의 여러 유자들은 대개 아무도 이것을 성찰하지 않고 억지로 '挈'을 뜻으로 하였으니, 매우 말이 안 된다. 아버지의 친우이신 태사범공이이름은 如圭이고, 문공부 위재의 친구이다. 이에 홀로 '度'을 미루어서 말씀하신 이후에 그 문맥이 통할 수 있었다. 대개 '絜'는 헤아린다는 것이고 '矩'는 직각을 만드는 것이니,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면 감히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을 것이다. 내 몸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여기에 거처하게 한다면 세상 안의 나와 외물 사이에 각각 그 몫을 얻어서 서로 침범하지 않고 각각 그 中을 얻을 수 있으니, 점유한 곳을 비교해봐도 그 넓이와 길이가 또한 한결같이 일정할 것이고 완전히 딱 정확해서 남거나 부족한 곳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絜矩'라는 것이다. 무릇 나라와 집안을 다스리면서 대처하고 일을 제재하는 방법이 모두 絜矩에서 똑같이 나온다면 천지간에 장차 한 가지라도 그 바른 곳을 얻지 못함이 없을 것이고 무릇 천하에 효, 제, 不倍하고자 아는 사람들이 모두 그 마음을 스스로 다해서 균등하지 않다는 탄식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천하에 어찌 평화롭지 않음이 있겠는가! 그러나 군자가 絜矩를 소유한 것이 또한 어찌 외부에서부터 와서 억지로 하는 것이겠는가. 또한 '物格知至'라고 말하였으니 그러므로 천하의 志를 통달할 수 있고 천만가지 마음은 곧 한 사람의 마음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意誠心正'이라고 말하였으니 그러므로 한 가지의 사사로움을 이겨서 한 사람의 마음을 천만가지 사람의 마음으로 여길 수 있으니 絜矩는 이와같을 뿐이다.
- 格庵趙氏曰: "天下之志萬殊, 理則一也. 物格知至者, 能燭理, 則視衆人之心猶一心而明絜矩之義, 公則一致, 私則萬殊; 意誠心正者, 能克己則以一心為衆人之心而盡絜矩之道."
- 격암조씨가 말했다. "천하의 뜻은 만가지로 다르지만 理는 하나이다. 물격지지한 사람은 이치를 밝힐 수 있으니 뭇사람들의 마음이 한 마음과 같음을 볼 것이요 혈구의 의미를 밝힐 것이다. 公은 일치하지만 사사로움(私)은 만 가지로 다르니, 자기를 극복할 수 있다면 한 마음을 뭇 사람들의 마음으로 삼아서 혈구의 도를 다할 수 있다."
"一有私意存乎其間, 則一膜音莫之外, 便爲胡越[471], 雖欲絜矩, 亦將有所隔礙牛代反而不能通矣. 若趙由之爲守, 則易去聲尉; 而爲尉則陵守. 王肅之方於事上而好去聲人佞己. 推其所由, 蓋出於此. 而充其類, 則雖桀、紂、盗跖音隻之所爲, 亦將何所不至哉?"
하나의 사사로운 의도라도 그 사이에 있으면 한 장막의 밖일 뿐이었는데 아주 멀어지게 될 것이니, 비록 絜矩하고자 하더라도 장차 떨어지는 바가 있어서 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마치 조유가 태수가 되면 도위를 업신여기고, 도위가 되면 태수를 능멸하는 것과 왕숙이 윗사람 섬기기에는 맞게하고, 사람이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 그 말미암은 바를 추론해보면 대개 사의에서 나온 것이니 그 사의를 충족한다면 비록 걸주와 도척이 한 짓이라도 장차 무슨 미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 <史記> <酷吏傳> 周陽由者, 其父趙兼, 以淮南王舅父, 侯周陽. 故因姓周陽氏. 由為郎事孝文及景帝, 景帝時為郡守. 武帝即位, 吏治尚循謹甚. 然由居二千石中, 最為酷暴驕恣, 所居郡, 必夷其豪, 為守視都尉如令; 為令必陵太守, 奪之治. 由後為河東都尉時, 與其守勝屠公勝屠, 即申屠也., 相告言罪. 勝屠公當抵罪, 義不受刑, 自殺而由棄市.[472]
- <사기>, <혹리전>에 주양유라는 사람은 그 아버지 조겸이 회남왕의 외삼촌으로 주양의 제후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말미람아 주양씨를 성으로 삼은 것이다. 유가 랑이 되어 효문과 경제를 모셨다. 경제때에 군수가 되었다. 무제가 즉위할 적에 관리들의 풍속이 여전히 법을 지키는 풍속이 심하였다. 그러나 유가 이천 석에 있을 적에 가장 혹독하고 교만하였다. 거처하는 도위는 그의 호족을 배척하였고, 도위를 대할적에 현령과 같이 하였다. 현령이 되어서는 꼭 태수를 능멸했고, 그의 권력을 빼앗았다. 유가 후에 하동군위가 되었을 적에 거기 태수인 승도공과 권세를 다퉜다. 승도는 바로 申屠이다. 서로 죄를 고하였는데, 승도공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았으나 의리상 형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자살하였고, 유는 기시형을 받아서 죽었다.
- ○<魏志> <王肅傳> 肅太和中拜散騎常侍,肅字子雍, 東海郡人. 史評曰: "劉寔以為肅方於事上而好下佞己, 此一反也."[473]
- <위지>, <왕숙전>에 왕숙이 태화 때 산기상시에 제수되었다. 숙은 字가 子雍이고, 동해군 사람이다. 사평에 이르길 '유식은 숙이 윗 사람에게는 맞게 하였지만 아랫사람이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했으니 이것이 하나의 반례이다라고 생각했다.'
曰: "然則絜矩之云, 是則所謂恕者己乎?" 曰: "此固前章所謂'如愛己之心以愛人'者也. 夫子所謂終身可行,[474] 程子所謂'充拓音托得去, 則天地變化而草木蕃音煩; 充拓不去, 則天地閉而賢人隱',[475] 皆以其可以推之而無不通耳."
- 朱子曰: "推得去, 則物我貫通, 自有箇生生無窮底意思, 便有'天地變化, 草木蕃'氣象. 天地只是這様道理. 若推不去, 物我隔絶, 欲利於己, 不利於人; 欲己之富, 欲人之貧; 欲己之壽, 欲人之夭, 似這氣象, 全然閉塞隔絶了, 便似'天地閉, 賢人隱'."
"然必自其窮理正心者而推之, 則吾之愛惡、取舍上聲, 皆得其正; 而其所推以及人者, 亦無不得其正. 是以上下四方, 以此度音鐸之, 而莫不截然各得其分去聲. 若於理有未明而心有未正, 則吾之所欲者, 未必其所當欲; 吾之所惡者, 未必其所當惡. 乃不察此而遽欲以是爲施於人之凖則, 則其意雖公而事則私. 是將見其物我相侵, 彼此交病, 而雖庭除[476]之内、跬丘弭反歩[477]之間, 亦且參商參音森參商二星名[478]矛盾盾食允反二者皆兵器名而不可行矣. 尚何終身之望哉? 是以聖賢凡言恕者, 又必以忠爲本; 而程子亦言'忠恕兩言, 如形與影',[479] 欲去上聲其一而不可得. 蓋唯忠而後所如之心始得其正, 是亦此篇先後本末之意也.所當先而為本者, 忠也; 所當後而為末者, 恕也. 然則君子之學, 可不謹其序哉!"
- 朱子曰: "忠是本體, 恕是枝葉, 非是别有枝葉, 乃是本根中發出枝葉."
- ○陳氏曰: "大槩忠恕只是一物; 就中截作兩片, 則為二物. 蓋存諸中者既忠, 則發出外來便是恕; 應事接物處不恕, 則是在我者必不十分眞實. 故發出忠底心, 便是恕底事; 做成恕底事, 便見忠底心."
○曰: "自身而家, 自家而國, 自國而天下, 均爲推己及人之事, 而傳之所以釋之者, 一事自爲一說, 若有不能相通焉者, 何也?" 曰: "此以勢之遠邇、事之先後而所施有不同耳, 實非有異事也. 蓋必審於接物、好惡二字並去聲下同不偏, 然後有以正倫理、篤思義而齊其家; 其家已齊, 事皆可法, 然後有以立標凖、胥教誨而治其國; 其國已治去聲, 民知興起, 然後可以推已度待洛反物、舉此加彼而平天下. 此以其遠近、先後而施有不同者也. 然自國以上上聲, 則治於内者嚴宻而精詳; 自國以下, 則治於外者廣愽而周遍, 亦可見其本末實一物, 首尾實一身矣. 何名爲異說哉?"
- 格庵趙氏曰: "嚴宻精詳, 所以為廣博周遍之地. 治内者疎略苟簡, 則治外者雖欲廣博周遍, 得乎?"
○曰: "所謂'民之父母'者, 何也?" 曰: "君子有絜矩之道, 故能以己之好惡知民之好惡; 又能以民之好惡爲己之好惡也. 夫音扶好其所好而與之聚之; 惡其所惡而不以施焉, 則上之愛下, 眞猶父母之愛其子矣. 彼民之親其上, 豈不亦猶子之愛其父母哉?"
- 三山陳氏曰: "父母之於子, 其所好惡無有不知者, 體氣同也. 至於民之好惡, 其君常有所不知, 無他, 制於形體之異耳. 能絜矩, 則能以民之心為心, 而可以父母斯民, 民亦父母之矣."
○曰: "此所引節南山之詩, 何也?" 曰: "言在尊位者, 人所觀仰, 不可不謹. 若人君恣己徇私, 不與天下同其好惡, 則爲天下僇如桀、紂、幽、厲也,"
○曰: "得衆得國, 失衆失國, 何也?" 曰: "言能絜矩, 則民父母之而得衆得國矣; 不能絜矩, 則爲天下僇而失衆失國矣."
○曰: "所謂先慎乎徳, 何也?" 曰: "上言有國者不可不謹; 此言其所謹而當先者尤在於徳也. 徳即所謂明徳; 所以謹之, 亦曰格物、致知、誠意、正心以脩其身而已矣."
○曰: "此其深言務財用而失民, 何也?" 曰: "有徳而有人有土, 則因天分地, 不患乎無財用矣. 然不知本末而無絜矩之心, 則未有不爭鬭其民而施之以劫奪之教者也. <易>大傳曰: '何以聚人? 曰財'[480]; <春秋外傳>曰:即<國語> '王人者, 將以導利而布之上下者也'[481]. 故財聚於上, 則民散於下矣; 財散於下, 則民歸於上矣. 言悖而出者亦悖而入; 貨悖而入者亦悖而出. 鄭氏以爲君有逆命, 則民有逆辭; 上貪於利, 則下人侵畔, 得其㫖矣."
○曰: "前既言命之不易矣,[482] 此又言命之不常, 何也?" 曰: "以天命之重而致其丁寜之意, 亦承上文而言之也. 蓋'善則得之'者, 有徳而有人之謂也; '不善則失之'者, 悖入而悖出之謂也. 然則命之不常, 乃人之所自爲耳, 可不謹哉?"
○曰: "其引<秦誓>, 何也?" 曰: "言好去聲下同善之利及其子孫; 不好善之害流於後世, 亦由絜矩與否之異也."
曰: "媢疾之人, 誠可惡去聲下並同矣. 然仁人惡之之深, 至於如此, 得無疾之已甚之亂邪?"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진실로 미워할만 하지만 인한 사람이 그를 미워함이 심한 것이 이와 같은 수준에 이르렀다면 그를 지나치게 미워하여 (생긴) 난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曰: "小人爲惡如字. 下惡人、其惡、善惡並同, 千條萬端, 其可惡者, 不但媢疾一事而已. 仁人不深惡乎彼而獨深惡乎此者, 以其有害於善人, 使民不得被其澤; 而其流禍之長, 及於後世而未已也. 然非殺人于貨之盗, 則罪不至死. 故亦放流之而已. 然又念夫音扶彼此之勢雖殊, 而苦樂音洛之情則一. 今此惡人放而不遠, 則其爲害雖得不施於此, 而彼所放之地其民復扶又反何罪焉? 故不敢以己之所惡施之於人, 而必遠而置之無人之境, 以禦魑抽知反魅音媚而後已[483]. 蓋不惟保安善人, 使不蒙其害; 亦所以禁伏凶人, 使不得稔其惡. 雖因彼之善惡而有好惡之殊, 然所以仁之之意, 亦未甞不行乎其間也. 此其爲禦亂之術至矣, 而何致亂之有?"
소인이 악을 행함은 다양하니, 그를 미워할 만한 점은 시기하는 일 하나에 그치지지 않는다. 인한 사람이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인 도둑이 아니라면 죄가 사형에 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를 추방할 뿐이다. 그러나 또 생각건데 저 피차의 (지역의) 형세가 비록 다르지만 고락의 감정은 똑같다. 지금 이 악인을 추방하되 멀지 않게 한다면 그 해됨이 비록 여기에는 시행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저 추방된 곳의 백성은 또 무슨 죄겠는가? 그러므로 감히 자신이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시행하지 않으니 반드시 멀리하여 사람이 없는 곳에 두어서 나쁜기운(魑魅)을 막게한 이후에 그친다. 대개 선한 사람을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여 (악한 사람의) 해를 입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흉인을 막고 복종시켜서 그의 악함을 쌓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비록 그의 선악에 따라서 좋고 나쁨의 다름이 있지만 그를 인하게 여기는 뜻이 또한 일찍이 그 사이에 행해지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그가 난리를 막는 기술을 행함이 지극한 것이니 무슨 난리를 부름이 있겠는가?
曰: "迸之爲屏必正反下同, 何也?" 曰: "古字之通用者, 多矣. 漢石刻詞有引'尊五美, 屏四惡'[484]者, 而以尊爲遵, 以屏爲迸, 則其證也."
曰: "仁人之能愛人、能惡人, 何也?" 曰: "仁人者, 私欲不萌而天下之公在我. 是以是非不謬靡又反而舉措得宜也."
○曰: "命之爲慢, 與其爲怠也, 孰得?" 曰: "大凡疑義所以决之, 不過乎義理、文勢、事證三者而已. 今此二字欲以義理、文勢决之, 則皆通; 欲以事證决之, 則無考, 蓋不可以深求矣. 若使其於義理、事實之大者有所鄉許亮反背音佩而不可以不究, 猶當視其緩急以爲先後, 况於此等字既兩通, 而於事義無大得失, 則亦何必苦心極力以求之, 徒費日而無所益乎? 以是而推, 他亦皆可見矣."
曰: "好善惡好惡並去聲下同惡如字, 人之性, 然也. 有'拂人之性'者, 何哉?" 曰: "不仁之人, 阿黨媢疾, 有以陷溺其心. 是以其所好惡戾於常性如此, 與民之父母能好惡人者[485]正相反. 使其能勝私而絜矩, 則不至於是矣."
○曰: "忠信、驕泰之所以爲得失者, 何也?" 曰: "忠信者, 盡己之心而不違於物, 絜矩之本也; 驕泰, 則恣己徇私, 以人從欲, 不得與人同好惡矣."
○曰: "上文深陳財用之失民矣, 此復扶又反言生財之道, 何也?" 曰: "此所謂'有土而有財'[486]者也. 夫音扶<洪範>八政, 食、貨爲先見<尚書> <洪範>篇'三八政'疇;[487] 子貢問政, 而夫子告之亦以'足食'爲首;[488] 蓋生民之道不可一日而無者, 聖人豈輕之哉? 特以爲國者以利爲利, 則必至於剥民以自奉, 而有悖出之禍. 故深言其害以爲戒耳. 至於崇本節用'崇本', '生之衆'、'為之疾'也; '節用', '食之寡'、'用之舒'也., 有國之常政, 所以厚下而足民者, 則固未甞廢也. 吕氏之說得其㫖矣.吕說已見章句中[489] 有子曰: '百姓足, 君孰 與不足?';[490]孟子曰: "無政事, 則財用不足",[491] 正此意也. 然孟子所謂政事, 則所以告齊、梁之君, 使之制民之産者是己, 豈若後世頭㑹古外反箕歛力驗反, 厲民自養之云哉?"
- <前漢書> <陳餘傳> 秦為亂政, 外内騷動, 百姓罷敝罷音疲; 頭㑹箕歛, 以供軍費秦吏到民家, 計人頭數以箕歛之, 而供軍需.財匱力盡.
- <전한서> <진여전> 진나라가 어지러운 정치를 행해, 나라 안팎으로 동요가 일어나고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진나라 관리들이] 사람 머릿수대로 키질하듯 세금을 거둬 군비에 충당하니, 재정은 바닥나고 민력은 다하였다.[492]
○曰: "'仁者以財發身; 不仁者以身發財', 何也?" 曰: "仁者不私其有, 故財散民聚而身尊; 不仁者惟利是圖, 故捐身賈音古禍以崇貨也. 然亦即財貨而以其效言之爾, 非謂仁者眞有以財發身之意也." 曰: "'未有府庫財非其財'者, 何也?" 曰: "上好去聲下同仁, 則下好義矣; 下好義, 則事有終矣; 事有終, 則爲君者安富尊榮, 而府庫之財可長保矣. 此'以財發身'之效也. 上不好仁, 則下不好義; 下不好義, 則其事不終. 是將爲天下僇之不暇, 而况府庫之財又豈得爲吾之財乎? 若商紂以自焚而起鉅橋、鹿臺之財; 徳宗以出走而豐瓊林、大盈之積, 皆'以身發財'之效也."
- <史記> 紂使師㳙作新淫聲, 北里之舞、靡靡之樂. 厚賦税以實鹿臺之財, 而盈鉅橋之粟, 以酒為池, 縣肉為林, 爲長夜之飲, 百姓怨望, 而諸侯有畔者. 周武王於是遂率諸侯伐紂. 紂亦發兵距之牧野. 甲子日, 紂兵敗, 紂走登鹿臺, 衣其寳玉, 乃自焚而死. 武王遂斬紂頭, 懸之白旗. 又<書> <武成>篇此篇記武王功成之事 "乃反商政, 政由舊. 散鹿臺之財, 發鉅橋之栗, 大賚于四海, 而萬姓悦服."
- <사기> 주왕(紂)이 사연(師㳙)으로 하여금 새로운 음란한 노래, 즉 <북리>라는 춤과 <미미>라는 음악을 짓게 했다. 세금을 심하게 걷어 녹대(鹿臺)에는 재물을 채우고 거교(鉅橋)에는 곡식을 채웠으며,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매달아 숲을 만들어 밤새도록 마시니, 백성들은 원망하고 제후 가운데에는 배신하는 자가 있었다. 주 무왕이 이에 마침내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왕을 정벌했다. 주왕 역시 군대를 일으켜 목야(牧野)에서 항거했다. 갑자일에 주왕의 군대가 패퇴하자, 주왕은 달아나 녹대에 올라 보옥을 둘러입고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다. 무왕이 마침내 주왕의 머리를 베어 백기에 매달았다.[493] 또 <서경> <무성편> "상나라 정사를 되돌렸는데, 정사는 옛 것을 따랐다. 녹대의 재물을 나눠주고 거교의 곡식을 베풀어 사해의 백성을 크게 위로하니, 온 백성이 기뻐하며 복종했다."[494]
- ○<唐書> <陸贄𫝊> "始, 帝播遷帝, 徳宗也. 朱泚反, 帝出走在外., 府蔵委棄, 至是天下貢奉稍至, 乃於行在夾廡署[495]瓊林、大盈二庫, 别藏貢物. 贄諌以為: '今師旅方殷, 瘡痛呻吟之聲未息, 遽以珍貢私别庫, 恐羣下有所觖望不滿所望. 請悉出以賜有功, 給軍賞.' 帝悟, 即撤其署."
- <당서> <육지전> "예전에 황제가 파천했을 때'황제'는 덕종이다. 주차(朱泚)가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도성 밖으로 달아났다. 창고를 버려두었는데, 이때 천하 각지의 공물이 조금씩 올라오자 행재소의 협무(夾廡)에 경림(瓊林)·대영(大盈) 두 창고를 설치하고 따로 공물을 보관하였다. 육지가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지금 전쟁이 한창 성하고 부상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급히 공물을 별도의 창고에 개인적으로 보관하신다면 아랫사람들이 불만을 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청컨대 이를 모두 내어 유공자에게 내리시거나 군대의 포상에 사용하십시오.' 황제가 깨달아 바로 설치했던 것을 철거했다."[496]
曰: "其引孟獻子之言, 何也?" 曰: "鷄、豚、牛、羊, 民之所畜許六反養以爲利者也. 既已食君之禄而享民之奉矣, 則不當復扶又反與之爭. 此公儀子所以㧞園葵去上聲下同織婦; 而董子因有與之齒者去其角. 傅之翼者兩其足之喻, 皆絜矩之義也."
- <史記> 公儀休爲魯相, 食茹而美,食其菜曰茹 㧞其園葵而棄之; 見其家織布好而疾, 出其家婦, 燔其機, 云: '欲令農夫工女, 安所讎其貨乎?'讎, 售也. 謂食禄者不得與下民爭利.
- <사기> 공의휴가 노나라 재상일 때, 자기 채소밭의 채소를 먹었는데 맛이 좋자 자기 채소밭의 채소를 뽑아 갖다버렸고, 자기 집에서 베를 빨리 잘 짜는 것을 보고는 베 짜는 여인을 내쫓고 베틀을 태워버리고는 말했다: "농부와 베 짜는 여인들이 어디서 이 재화를 팔라는 것이냐?"녹을 받는 자는 백성들과 이익을 다퉈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497]
- ○<西漢書> 董仲舒以賢良對䇿曰: "夫天亦有所分去聲, 予上聲之齒者去其角,言天生物賦予有分定. 牛無上齒者, 則有角; 其餘無角則有上齒. 傅之翼者两其足,傅, 讀曰附, 附著也. 言鳥不四足 是所受大者不得取小也. 古之所予禄者, 不食於力, 不勤於末,末謂工商之業. 是亦受大者不得取小, 與天同意者也."
- <서한서> 동중서가 현량대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에도 정해진 몫이 있으니, 윗니를 준 소에게는 뿔을 없애고,하늘이 만물을 낳고 부여함에 일정한 몫이 있음을 말한다. 소 중에 윗니가 없는 것은 뿔이 있고, 나머지 뿔이 없는 소는 윗니가 있다. 날개를 붙여준 것에는 다리가 두 개 뿐이니,'傅'는 '附'로 읽으니 붙인다는 것이다. 새는 다리가 넷이 아님을 말한다. 이는 '큰 것을 받은 자는 작은 것을 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적 봉록을 주는 자가 자기 힘으로 농사지어 먹지 않고 말업에 힘쓰지 않은 것 역시 '큰 것을 받은 자는 작은 것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니, 하늘과 같은 뜻입니다."[498]
"聚歛之臣, 剥民之膏血以奉上, 而民被其殃; 盗臣, 竊君之府庫以自私, 而禍不及下. 仁者之心, 至誠惻怛,當葛反 寧亡己之財, 而不忍傷民之力. 所以'與其有聚歛之臣, 寧有盗臣'亦絜矩之義也. 昔孔子以臧文仲之妾織蒲, 而直斥其不仁;事詳見<論語><公冶長>篇[499] 以冉求聚歛於季氏, 而欲鳴鼓以聲其罪.[500] 以聖人之宏大兼容、温良博愛, 而所以責二子者, 疾痛深切, 不少假借如此, 其意亦可見矣."
- 三山陳氏曰: "織紝亦儉矣, 而君子疾之, 以其主於利也. 冉求之聚歛, 未必有後世掊克[501]之事, 但聚歛藏於季氏之家, 而不能布之於下, 則聖人疾而欲攻之, 况剥民力以自富乎?"
- ○西山眞氏曰: "近世所謂善理財者, 何其僭[502]乎此也! 元元[503]已病, 而科歛日興, 不知皮將盡而毛無所附也. 出新巧以籠愚民, 苟邀倍稱[504]之入, 不知朝四暮三之無益也. 孟子曰: '「我能為君充府庫.」今之所謂良臣, 古之所謂民賊也.'"
- 서산 진씨가 말했다: "오늘날 '잘 재화를 다룬다'고 하는 자들은 어째서 이리도 이것에 대해 몽매한지요! [그들은] 백성들은 이미 병들었는데 세금을 날로 일으켜, 백성들의 살갗이 닳아 털이 붙어있을 곳이 없는 지경임을 알지 못하고 있고, 새로운 기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구차하게 2배의 세입을 걷지만, 조삼모사의 꼴이라 전혀 이득이 없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날 임금을 섬기는 자는]「나는 임금을 위해 부고를 채워줄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이른바 훌륭한 신하(良臣)는 옛날의 이른바 백성의 도적(民賊)이다.'[505]"[506]
曰: "'國不以利爲利, 以義爲利', 何也?" 曰: "'以利爲利', 則上下交征, 不奪不饜;[507] '以義爲利', 則不遺其 親, 不後其君, 蓋惟義之安而自無所不利矣. 程子曰: '聖人以義爲利. 義之所安, 即利之所生'[508], 正謂此也. 孟子分别筆列反義利、㧞本塞源之意, 其傳蓋亦出於此云."
- 朱子曰: "只萬物皆得其分便是利. 君得其為君, 臣得其為臣, 父得其為父, 子得其為子, 何利如之? 這利字即<易>所謂'利者, 義之和'[509], 利便是義之和處."
○曰: "此其言'菑害並至, 無如之何', 何也?" 曰: "怨己結於民心, 則非一朝一夕之可解矣. 聖賢深探其實而極言之, 欲人有以審於未然而不爲無及於事之悔也. 以此爲防, 人猶有用桑羊、孔僅、宇文融、楊矜、陳京、裴延齡之徒, 以敗其國者."
- 桑弘羊、楊愼矜, 朱子以在宋避諱, 故各去一字.
- ○張氏存中曰: "桑弘羊, 洛陽賈人之子. 漢武帝朝, 為治栗都尉, 領大司農, 盡管天下監鐵, 後為御史大夫. 昭帝朝, 與燕王旦謀反坐誅."
- ○孔僅, 漢武帝朝為大農丞, 領鹽鐵事, 後為大農令.
- ○宇文融, 辨給多詐. 唐玄宗朝為覆田勸農使, 擢兵部員外郎兼侍御史; 又兼稅地安輯戸口使, 拜御史中丞. 有司劾融交不逞, 作威福, 貶平樂尉. 司農發融在汴州紿隱官息錢巨萬, 給事中馮紹烈深文推證. 詔流嵓州道廣州, 惶恐而卒.
- ○楊愼矜, 唐玄宗朝為御史知雜事, 後授御史中丞. 以蓄讖緯妖言賜死.
- ○陳京事唐徳宗. 帝討李希烈, 財用屈, 京為給事中與戸部侍郎趙賛請稅民屋間架, 籍賈人資力, 以率貸之. 後以事罷, 為秘書少監卒.
- ○裴延齡, 唐徳宗朝為司農少卿, 領度支. 取宿姦老吏與謀, 以固帝幸. 延齡資苛刻, 專剥下附上. 肆騁譎怪, 時人側目. 及死, 人語以相安. 惟帝悼不已.
"故陸宣公之言曰:陸公名䞇, 字敬輿, 蘇州嘉興人. 事唐徳宗, 諡曰宣. 其言見奏議. "民者, 邦之本; 財者, 民之心. 其心傷, 則其本傷; 其本傷, 則枝幹凋瘁秦醉反而根柢蹷居月反㧞矣." 吕正獻公之言曰:吕公名公著, 字晦叔, 諡正獻, 河南人. 其言見奏劄. "小人聚歛以佐人主之欲, 人主不悟以爲有利於國, 而不知其終爲害也. 賞其納忠而不知其大不忠也; 嘉其任怨而不知其怨歸於上也." 嗚呼! 若二公之言, 則可謂深得此章之指者矣. 有國家者可不監哉?"
- 格庵趙氏曰: "興利之臣, 不過以聚歛為長䇿; 以掊克為善謀/ 唯求取媚於上而不顧結怨於下, 人主以其奉己之欲悅而寵之, 不知其失民心而蠧國脉. '菑害並至', 匪一朝一夕之可解, 有必然之理者. 此桑羊之徒, 所以誤人之天下國家至於極也. 陸、吕二公之言, 可謂當矣. 如司馬公闢善理財者, 不加賦之說, 則亦所當知. 其言曰: '天地所生財貨百物, 止有此數, 不在民, 則在官. 譬如雨澤, 夏澇則秋旱',[510] 此古今之至言也. 後世之臣, 有以言利媒人主者, 其尚以<大學>此章之㫖. 與三君子之言察之."
- ○玉溪盧氏曰: "聖賢千言萬語, 其論道, 只在遏人欲以存天理; 其論治, 只在進君子而退小人."
○曰: "此章之文, 程子多所更平聲下同定, 而子獨以舊文爲正者, 何也?" 曰: "此章之義博, 故傳言之詳. 然其實, 則不過好惡並去聲義利之兩端而已. 但以欲致其詳, 故所言已足, 而復扶又反更端以廣其意. 是以二義相循, 間去聲見形甸反下同層出, 有似於易置而錯陳耳. 然徐而考之, 則其端緒接續, 脉絡貫通, 而丁寧反復爲去聲人深切之意, 又自别見於言外, 不可易也. 必欲二說中判, 以類相從, 自始至終, 畫爲兩節, 則其界辨雖若有餘, 而意味或反不足. 此不可不察也."
대학 판본 비교
송대 유학자들이 『禮記』 「大學」을 높이 평가했지만 모두 온전한 글이라고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大學」이 순하게 읽히지 않는 것은 전래되는 과정에서 오류(착간이나 오탈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아마도) 내용을 기준으로 「大學」의 순서를 바로잡거나 글자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기도 했다. (자세한 수정 사항은 차치하고) 『禮記』 「大學」의 구절을 순서에 따라 ①~⑯으로 구분했을 때,
- 「明道先生改正大學」 : 1-6-7-8, 2-3-4-10-11-12-13, 5-9-14-15-16
- 「伊川先生改正大學」 : 1-2-9-3, 6-7-8, 4-10-11-12-13, 5-15-14-16
- 『大學章句』 : 1-2-6-7-8-5-9-3, 4-10-11-12-13, 14-15-16
의 순서로 수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표와 같다:
『禮記』 「大學」 | 「明道先生改正大學」 | 「伊川先生改正大學」 | 『大學章句』 |
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 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 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當作新>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 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
②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 身修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國治而後天下平.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為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 ⑥《康誥》曰: 「克明德.」 《大甲》曰: 「顧諟天之明命.」 《帝典》曰: 「克明峻德.」 皆自明也. | ②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 身修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國治而後天下平.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為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 ②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 身修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國治而後天下平.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為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
③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 | ⑦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康誥》曰: 「作新民.」 《詩》曰: 「周雖舊邦, 其命維新.」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 ⑨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四字衍> | ⑥《康誥》曰: 「克明德.」 《大甲》曰: 「顧諟天之明命.」 《帝典》曰: 「克明峻德.」 皆自明也. |
④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慎其獨也! 小人閑居為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後厭然, 掩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然, 則何益矣! 此謂誠於中, 形於外, 故君子必慎其獨也.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 ⑧《詩》云: 「邦畿千里, 惟民所止.」 《詩》云: 「緡蠻黃鳥, 止于丘隅.」 子曰: 「於止, 知其所止, 可以人而不如鳥乎?」 《詩》云: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為人君, 止於仁; 為人臣, 止於敬; 為人子, 止於孝; 為人父, 止於慈; 與國人交, 止於信. | ③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 | ⑦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康誥》曰: 「作新民.」 《詩》曰: 「周雖舊邦, 其命維新.」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
⑤《詩》云: 「瞻彼淇澳, 菉竹猗猗. 有斐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赫兮喧兮. 有斐君子, 終不可諠兮!」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 「瑟兮僩兮」者, 恂慄也; 「赫兮喧兮」者, 威儀也; 「有斐君子, 終不可諠兮」者, 道盛德至善, 民之不能忘也. 《詩》云: 「於戲前王不忘!」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 | ②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 身修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國治而後天下平.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為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 ⑥《康誥》曰: 「克明德.」 《大甲》曰: 「顧諟天之明命.」 《帝典》曰: 「克明峻德.」 皆自明也. | ⑧《詩》云: 「邦畿千里, 惟民所止.」 《詩》云: 「緡蠻黃鳥, 止于丘隅.」 子曰: 「於止, 知其所止, 可以人而不如鳥乎?」 《詩》云: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為人君, 止於仁; 為人臣, 止於敬; 為人子, 止於孝; 為人父, 止於慈; 與國人交, 止於信. |
⑥《康誥》曰: 「克明德.」 《太甲》曰: 「顧諟天之明命.」 《帝典》曰: 「克明峻德.」 皆自明也. | ③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 | ⑦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康誥》曰: 「作新民.」 《詩》曰: 「周雖舊邦, 其命維新.」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 ⑤《詩》云: 「瞻彼淇澳, 菉竹猗猗. 有斐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赫兮喧兮. 有斐君子, 終不可諠兮!」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 「瑟兮僩兮」者, 恂慄也; 「赫兮喧兮」者, 威儀也; 「有斐君子, 終不可諠兮」者, 道盛德至善, 民之不能忘也. 《詩》云: 「於戲前王不忘!」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 |
⑦湯之盤銘曰: 「茍日新, 日日新, 又日新.」 《康誥》曰: 「作新民.」 《詩》曰: 「周雖舊邦, 其命惟新.」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 ④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慎其獨也! 小人閑居為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後厭然, 掩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然, 則何益矣! 此謂誠於中, 形於外, 故君子必慎其獨也.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 ⑧《詩》云: 「邦畿千里, 惟民所止.」 《詩》云: 「緡蠻黃鳥, 止于丘隅.」 子曰: 「於止, 知其所止, 可以人而不如鳥乎?」 《詩》云: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為人君, 止於仁; 為人臣, 止於敬; 為人子, 止於孝; 為人父, 止於慈; 與國人交, 止於信. | ⑨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 . |
⑧《詩》云: 「邦畿千里, 惟民所止.」 《詩》云: 「緡蠻黃鳥, 止于丘隅.」 子曰: 「於止, 知其所止, 可以人而不如鳥乎?」 《詩》云: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為人君, 止於仁; 為人臣, 止於敬; 為人子, 止於孝; 為人父, 止於慈; 與國人交, 止於信. | ⑩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此謂修身在正其心. | ④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愼其獨也. 小人閒居爲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后厭然揜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已, 如見其肺肝, 然則何益矣? 此謂誠於中, 形於外, 故君子必愼其獨也.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 ③此謂知本<四字衍>, 此謂知之至也. (閒嘗竊取程子之意以補之曰: 「所謂致知在格物者, 言欲致吾之知, 在即物而窮其理也. 蓋人心之靈莫不有知, 而天下之物莫不有理, 惟於理有未窮, 故其知有不盡也. 是以大學始教, 必使學者即凡天下之物, 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至於用力之久, 而一旦豁然貫通焉, 則眾物之表裏精粗無不到, 而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矣. 此謂物格, 此謂知之至也.」) |
⑨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 | ⑪所謂齊其家在修其身者: 人之其所親愛而辟焉, 之其所賤惡而辟焉, 之其所畏敬而辟焉, 之其所哀矜而辟焉, 之其所敖惰而辟焉. 故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者, 天下鮮矣! 故諺有之曰: 「人莫知其子之惡, 莫知其苗之碩.」 此謂身不修不可以齊其家. | ⑩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當作心>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此謂修身在正其心. | ④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愼其獨也. 小人閒居爲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后厭然揜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已, 如見其肺肝, 然則何益矣? 此謂誠於中, 形於外, 故君子必愼其獨也.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
⑩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此謂修身在正其心. | ⑫所謂治國必先齊其家者, 其家不可教而能教人者, 無之. 故君子不出家而成教於國: 孝者, 所以事君也; 弟者, 所以事長也; 慈者, 所以使眾也. 《康誥》曰: 「如保赤子」, 心誠求之, 雖不中不遠矣. 未有學養子而後嫁者也!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一人貪戾, 一國作亂. 其機如此. 此謂一言僨事, 一人定國. 堯、舜率天下以仁, 而民從之; 桀、紂率天下以暴, 而民從之. 其所令反其所好, 而民不從. 是故君子有諸己而後求諸人, 無諸己而後非諸人. 所藏乎身不恕, 而能喻諸人者, 未之有也. 故治國在齊其家. 《詩》云: 「桃之夭夭, 其葉蓁蓁; 之子于歸, 宜其家人.」 宜其家人, 而後可以教國人. 《詩》云: 「宜兄宜弟.」 宜兄宜弟, 而後可以教國人. 《詩》云: 「其儀不忒, 正是四國.」 其為父子兄弟足法, 而後民法之也. 此謂治國在齊其家. | ⑪所謂齊其<其字衍>家在脩其身者: 人之其所親愛而辟焉, 之其所賤惡而辟焉, 之其所畏敬而辟焉, 之其所哀矜而辟焉, 之其所敖惰而辟焉; 故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者, 天下鮮矣; . 故諺有之曰: 「人莫知其子之惡, 莫知其苗之碩.」 此謂身不脩不可以齊其家. | ⑩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此謂修身在正其心. |
⑪所謂齊其家在修其身者: 人之其所親愛而辟焉, 之其所賤惡而辟焉, 之其所畏敬而辟焉, 之其所哀矜而辟焉, 之其所敖惰而辟焉. 故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者, 天下鮮矣! 故諺有之曰: 「人莫知其子之惡, 莫知其苗之碩.」 此謂身不修不可以齊其家. | ⑬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 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所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事上; 所惡於前, 毋以先後; 所惡於後, 毋以從前; 所惡於右, 毋以交於左; 所惡於左,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 《詩》云: 「樂只君子, 民之父母.」 民之所好好之, 民之所惡惡之, 此之謂民之父母. 《詩》云: 「節彼南山, 維石巖巖. 赫赫師尹, 民具爾瞻.」 有國者不可以不慎, 辟則為天下戮矣. | ⑫所謂治國必先齊其家者, 其家不可教而能教人者, 無之. 故君子不出家而成教於國: 孝者, 所以事君也; 弟者, 所以事長也; 慈者, 所以使眾也. 《康誥》曰: 「如保赤子」, 心誠求之, 雖不中不遠矣. 未有學養子而後嫁者也!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一人貪戾, 一國作亂. 其機如此. 此謂一言僨事, 一人定國. 堯、舜率天下以仁, 而民從之; 桀、紂率天下以暴, 而民從之. 其所令反其所好, 而民不從. 是故君子有諸己而後求諸人, 無諸己而後非諸人. 所藏乎身不恕, 而能喻諸人者, 未之有也. 故治國在齊其家. 《詩》云: 「桃之夭夭, 其葉蓁蓁; 之子于歸, 宜其家人.」 宜其家人, 而後可以教國人. 《詩》云: 「宜兄宜弟.」 宜兄宜弟, 而後可以教國人. 《詩》云: 「其儀不忒, 正是四國.」 其為父子兄弟足法, 而後民法之也. 此謂治國在齊其家. | ⑪所謂齊其家在修其身者: 人之其所親愛而辟焉, 之其所賤惡而辟焉, 之其所畏敬而辟焉, 之其所哀矜而辟焉, 之其所敖惰而辟焉. 故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者, 天下鮮矣! 故諺有之曰: 「人莫知其子之惡, 莫知其苗之碩.」 此謂身不修不可以齊其家. |
⑫所謂治國必先齊其家者, 其家不可教而能教人者, 無之. 故君子不出家而成教於國: 孝者, 所以事君也; 弟者, 所以事長也; 慈者, 所以使眾也. 《康誥》曰: 「如保赤子」, 心誠求之, 雖不中不遠矣. 未有學養子而後嫁者也!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一人貪戾, 一國作亂. 其機如此. 此謂一言僨事, 一人定國. 堯、舜率天下以仁, 而民從之; 桀、紂率天下以暴, 而民從之. 其所令反其所好, 而民不從. 是故君子有諸己而後求諸人, 無諸己而後非諸人. 所藏乎身不恕, 而能喻諸人者, 未之有也. 故治國在齊其家. 《詩》云: 「桃之夭夭, 其葉蓁蓁; 之子于歸, 宜其家人.」 宜其家人, 而後可以教國人. 《詩》云: 「宜兄宜弟.」 宜兄宜弟, 而後可以教國人. 《詩》云: 「其儀不忒, 正是四國.」 其為父子兄弟足法, 而後民法之也. 此謂治國在齊其家. | ⑤《詩》云: 「瞻彼淇澳, 菉竹猗猗. 有斐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赫兮喧兮. 有斐君子, 終不可諠兮!」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 「瑟兮僩兮」者, 恂慄也; 「赫兮喧兮」者, 威儀也; 「有斐君子, 終不可諠兮」者, 道盛德至善, 民之不能忘也. 《詩》云: 「於戲前王不忘!」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 | ⑬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 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所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事上; 所惡於前, 毋以先後; 所惡於後, 毋以從前; 所惡於右, 毋以交於左; 所惡於左,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 《詩》云: 「樂只君子, 民之父母.」 民之所好好之, 民之所惡惡之, 此之謂民之父母. 《詩》云: 「節彼南山, 維石巖巖. 赫赫師尹, 民具爾瞻.」 有國者不可以不慎, 辟則為天下戮矣. | ⑫所謂治國必先齊其家者, 其家不可教而能教人者, 無之. 故君子不出家而成教於國: 孝者, 所以事君也; 弟者, 所以事長也; 慈者, 所以使眾也. 《康誥》曰: 「如保赤子」, 心誠求之, 雖不中不遠矣. 未有學養子而後嫁者也!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一人貪戾, 一國作亂. 其機如此. 此謂一言僨事, 一人定國. 堯、舜率天下以仁, 而民從之; 桀、紂率天下以暴, 而民從之. 其所令反其所好, 而民不從. 是故君子有諸己而後求諸人, 無諸己而後非諸人. 所藏乎身不恕, 而能喻諸人者, 未之有也. 故治國在齊其家. 《詩》云: 「桃之夭夭, 其葉蓁蓁; 之子于歸, 宜其家人.」 宜其家人, 而後可以教國人. 《詩》云: 「宜兄宜弟.」 宜兄宜弟, 而後可以教國人. 《詩》云: 「其儀不忒, 正是四國.」 其為父子兄弟足法, 而後民法之也. 此謂治國在齊其家. |
⑬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 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所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事上; 所惡於前, 毋以先後; 所惡於後, 毋以從前; 所惡於右, 毋以交於左; 所惡於左,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 《詩》云: 「樂只君子, 民之父母.」 民之所好好之, 民之所惡惡之, 此之謂民之父母. 《詩》云: 「節彼南山, 維石巖巖. 赫赫師尹, 民具爾瞻.」 有國者不可以不慎, 辟則為天下戮矣. | ⑨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 | ⑤《詩》云: 「瞻彼淇澳, 菉竹猗猗. 有斐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赫兮喧兮. 有斐君子, 終不可諠兮!」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 「瑟兮僩兮」者, 恂慄也; 「赫兮喧兮」者, 威儀也; 「有斐君子, 終不可諠兮」者, 道盛德至善, 民之不能忘也. 《詩》云: 「於戲前王不忘!」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 | ⑬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 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 所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事上; 所惡於前, 毋以先後; 所惡於後, 毋以從前; 所惡於右, 毋以交於左; 所惡於左,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 《詩》云: 「樂只君子, 民之父母.」 民之所好好之, 民之所惡惡之, 此之謂民之父母. 《詩》云: 「節彼南山, 維石巖巖. 赫赫師尹, 民具爾瞻.」 有國者不可以不慎, 辟則為天下戮矣. |
⑭《詩》云: 「殷之未喪師, 克配上帝. 儀監于殷, 峻命不易.」 道得眾則得國, 失眾則失國. 是故君子先慎乎德. 有德此有人, 有人此有土, 有土此有財, 有財此有用. 德者本也, 財者末也, 外本內末, 爭民施奪. 是故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 是故言悖而出者, 亦悖而入; 貨悖而入者, 亦悖而出. | ⑭《詩》云: 「殷之未喪師, 克配上帝. 儀監于殷, 峻命不易.」 道得眾則得國, 失眾則失國. 是故君子先慎乎德. 有德此有人, 有人此有土, 有土此有財, 有財此有用. 德者本也, 財者末也, 外本內末, 爭民施奪. 是故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 是故言悖而出者, 亦悖而入; 貨悖而入者, 亦悖而出. | ⑮《康誥》曰: 「惟命不于常!」 道善則得之, 不善則失之矣. 《楚書》曰: 「楚國無以為寶, 惟善以為寶.」 舅犯曰: 「亡人無以為寶, 仁親以為寶.」 《秦誓》曰: 「若有一个臣, 斷斷兮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彥聖, 其心好之, 不啻若自其口出. 實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尚亦有利哉! 人之有技, 媢嫉以惡之; 人之彥聖, 而違之俾不通. 實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唯仁人放流之, 迸諸四夷, 不與同中國, 此謂唯仁人為能愛人, 能惡人. 見賢而不能舉, 舉而不能先, 命也<作怠之誤也.>; 見不善而不能退, 退而不能遠, 過也. 好人之所惡, 惡人之所好, 是謂拂人之性, 災必逮夫身. 是故君子有大道, 必忠信以得之, 驕泰以失之. | ⑭《詩》云: 「殷之未喪師, 克配上帝. 儀監于殷, 峻命不易.」 道得眾則得國, 失眾則失國. 是故君子先慎乎德. 有德此有人, 有人此有土, 有土此有財, 有財此有用. 德者本也, 財者末也, 外本內末, 爭民施奪. 是故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 是故言悖而出者, 亦悖而入; 貨悖而入者, 亦悖而出. |
⑮《康誥》曰: 「惟命不于常!」 道善則得之, 不善則失之矣. 《楚書》曰: 「楚國無以為寶, 惟善以為寶.」 舅犯曰: 「亡人無以為寶, 仁親以為寶.」 《秦誓》曰: 「若有一个臣, 斷斷兮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彥聖, 其心好之, 不啻若自其口出. 實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尚亦有利哉! 人之有技, 媢嫉以惡之; 人之彥聖, 而違之俾不通. 實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唯仁人放流之, 迸諸四夷, 不與同中國, 此謂唯仁人為能愛人, 能惡人. 見賢而不能舉, 舉而不能先, 命也; 見不善而不能退, 退而不能遠, 過也. 好人之所惡, 惡人之所好, 是謂拂人之性, 災必逮夫身. 是故君子有大道, 必忠信以得之, 驕泰以失之. | ⑮《康誥》曰: 「惟命不于常!」 道善則得之, 不善則失之矣. 《楚書》曰: 「楚國無以為寶, 惟善以為寶.」 舅犯曰: 「亡人無以為寶, 仁親以為寶.」 《秦誓》曰: 「若有一个臣, 斷斷兮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彥聖, 其心好之, 不啻若自其口出. 實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尚亦有利哉! 人之有技, 媢嫉以惡之; 人之彥聖, 而違之俾不通. 實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唯仁人放流之, 迸諸四夷, 不與同中國, 此謂唯仁人為能愛人, 能惡人. 見賢而不能舉, 舉而不能先, 命也; 見不善而不能退, 退而不能遠, 過也. 好人之所惡, 惡人之所好, 是謂拂人之性, 災必逮夫身. 是故君子有大道, 必忠信以得之, 驕泰以失之. | ⑭《詩》云: 「殷之未喪師, 克配上帝. 儀監于殷, 峻命不易.」 道得眾則得國, 失眾則失國. 是故君子先慎乎德. 有德此有人, 有人此有土, 有土此有財, 有財此有用. 德者本也, 財者末也, 外本內末, 爭民施奪. 是故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 是故言悖而出者, 亦悖而入; 貨悖而入者, 亦悖而出. | ⑮《康誥》曰: 「惟命不于常!」 道善則得之, 不善則失之矣. 《楚書》曰: 「楚國無以為寶, 惟善以為寶.」 舅犯曰: 「亡人無以為寶, 仁親以為寶.」 《秦誓》曰: 「若有一个臣, 斷斷兮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彥聖, 其心好之, 不啻若自其口出. 實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尚亦有利哉! 人之有技, 媢嫉以惡之; 人之彥聖, 而違之俾不通. 實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唯仁人放流之, 迸諸四夷, 不與同中國, 此謂唯仁人為能愛人, 能惡人. 見賢而不能舉, 舉而不能先, 命也; 見不善而不能退, 退而不能遠, 過也. 好人之所惡, 惡人之所好, 是謂拂人之性, 災必逮夫身. 是故君子有大道, 必忠信以得之, 驕泰以失之. |
⑯生財有大道. 生之者眾, 食之者寡, 為之者疾, 用之者舒, 則財恒足矣. 仁者以財發身, 不仁者以身發財. 未有上好仁而下不好義者也, 未有好義其事不終者也, 未有府庫財非其財者也. 孟獻子曰: 「畜馬乘, 不察於雞豚; 伐冰之家, 不畜牛羊; 百乘之家, 不畜聚斂之臣. 與其有聚斂之臣, 寧有盜臣.」此謂國不以利為利, 以義為利也. 長國家而務財用者, 必自小人矣. 彼為善之, 小人之使為國家, 災害并至. 雖有善者, 亦無如之何矣! 此謂國不以利為利, 以義為利也. | ⑯生財有大道. 生之者眾, 食之者寡, 為之者疾, 用之者舒, 則財恒足矣. 仁者以財發身, 不仁者以身發財. 未有上好仁而下不好義者也, 未有好義其事不終者也, 未有府庫財非其財者也. 孟獻子曰: 「畜馬乘, 不察於雞豚; 伐冰之家, 不畜牛羊; 百乘之家, 不畜聚斂之臣. 與其有聚斂之臣, 寧有盜臣.」此謂國不以利為利, 以義為利也. 長國家而務財用者, 必自小人矣. 彼為善之, 小人之使為國家, 災害并至. 雖有善者, 亦無如之何矣! 此謂國不以利為利, 以義為利也. | ⑯生財有大道. 生之者眾, 食之者寡, 為之者疾, 用之者舒, 則財恒足矣. 仁者以財發身, 不仁者以身發財. 未有上好仁而下不好義者也, 未有好義其事不終者也, 未有府庫財非其財者也. 孟獻子曰: 「畜馬乘, 不察於雞豚; 伐冰之家, 不畜牛羊; 百乘之家, 不畜聚斂之臣. 與其有聚斂之臣, 寧有盜臣.」此謂國不以利為利, 以義為利也. 長國家而務財用者, 必自小人矣. 彼為善之, 小人之使為國家, 災害并至. 雖有善者, 亦無如之何矣! 此謂國不以利為利, 以義為利也. <一本云彼爲不善之小人使之爲國家> | ⑯生財有大道. 生之者眾, 食之者寡, 為之者疾, 用之者舒, 則財恒足矣. 仁者以財發身, 不仁者以身發財. 未有上好仁而下不好義者也, 未有好義其事不終者也, 未有府庫財非其財者也.
孟獻子曰: 「畜馬乘, 不察於雞豚; 伐冰之家, 不畜牛羊; 百乘之家, 不畜聚斂之臣. 與其有聚斂之臣, 寧有盜臣.」此謂國不以利為利, 以義為利也. 長國家而務財用者, 必自小人矣. 彼為善之, 小人之使為國家, 災害并至. 雖有善者, 亦無如之何矣! 此謂國不以利為利, 以義為利也. |
각주
- ↑ <한어대사전> 轉述; 傳授; 傳說.
- ↑ <한어대사전> 10. 可以; 便於.
- ↑ <한어대사전> 28. 能够; 會.
- ↑ <한어대사전> 3. 一會兒; 不多久.(잠깐 사이에, 오래지 않아)
- ↑ <한어대사전> 直要.
- ↑ 1. 접미사. 동작의 결과가 화자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뜻을 나타냄.
- ↑ <대학장구> 傳6章. 所謂誠其意者:毋自欺也,如惡惡臭,如好好色,此之謂自謙,故君子必慎其獨也!
- ↑ <대학장구> 傳6章. 小人閒居為不善,無所不至。
- ↑ <한어대사전> 8. 知; 覺.
- ↑ <주자어류> 권14 <대학1> 伊川舊日教人先看大學,那時未有解說,想也看得鶻突。而今看注解,覺大段分曉了,只在子細看。
- ↑ <한어대사전> 19. 介詞. 對; 與. 表示動作的對象.
- ↑ <주자어류> 권118 <주자13/훈문인4>又言:「大學等書,向來人只說某說得詳,如何不略說,使人自致思?此事大不然。人之為學,只是爭箇肯不肯耳。他若無得,不肯向這邊,略亦不解致思;他若肯向此一邊,自然有味,愈詳愈有意味。」
- ↑ <한어대사전> 6. 標准; 模式.
- ↑ <서경> 탕고
- ↑ <한어대사전> 僅此而已. 謂不復深究或就此了事.
- ↑ <한어대사전> 1. 古代稱帝王或貴族的長子.
- ↑ <한어대사전> 4. 代詞. 泛指任何人.
- ↑ <주역> 태괘 대상전. 天地交泰,后以財成天地之道,輔相天地之宜,以左右民。
- ↑ <한어대사전> [坯墣] 亦作“坯璞”。 謂初具規模的事物;半成品。
- ↑ <주자어류> 권7 <학1> 古者小學已自養得小兒子這裏定,已自是聖賢坯璞了,但未有聖賢許多知見。及其長也,令入大學,使之格物、致知,長許多知見。
- ↑ <예기> <내칙> 凡內外,雞初鳴,咸盥漱,衣服,斂枕簟,灑掃室堂及庭,布席,各從其事。
- ↑ <예기> <곡례상> 凡為長者糞之禮,必加帚於箕上,以袂拘而退;其塵不及長者,以箕自鄉而扱之。
- ↑ <예기> <내칙> 在父母舅姑之所,有命之,應唯敬對。
- ↑ <예기> <곡례상> 長者與之提攜,則兩手奉長者之手。負劍辟咡詔之,則掩口而對。
- ↑ <예기> <내칙> 進退周旋慎齊。
- ↑ <예기> <곡례상> 凡與客入者,每門讓於客。
- ↑ <한어대사전> 指書面文字。 ▶ 漢 揚雄 《法言‧問神》: “言, 心聲也;書, 心畫也。 聲畫形, 君子小人見矣。”
- ↑ <주례> <지관사도> 以鄉三物教萬民而賓興之:一曰六德,知、仁、聖、義、忠、和;二曰六行,孝、友、睦、姻、任、恤;三曰六藝,禮、樂、射、御、書、數。
- ↑ <대대례기> <보부> 古者年八歲而出就外舍,學小藝焉,履小節焉。束髮而就大學。學大藝焉,履大節焉。
- ↑ <한어대사전> 2. 指學校。
- ↑ <한어대사전> 1. 古時國子學的代稱。 因其地在虎門之左, 故有是稱。
- ↑ <한어대사전> 3. 不可相比;不同於。
- ↑ <주자어류> 권14 <대학1> 問:「外有以極其規模之大,內有以盡其節目之詳。」曰:「這丢須先識得外面一丢規模如此大了,而內做工夫以實之。所謂規模之大,凡人為學,便當以『明明德,新民,止於至善』,及『明明德於天下』為事,不成只要獨善其身便了。須是志於天下,所謂『志伊尹之所志,學顏子之所學也』。所以大學第二句便說『在新民』。」
- ↑ <맹자> <진심상> 9. 古之人,得志,澤加於民;不得志,脩身見於世。窮則獨善其身,達則兼善天下。
- ↑ <通書> <志學第十> 志伊尹之所志。學顔子之所學也。
- ↑ <주자어류> 권14 <대학1> 明德,新民,便是節目;止於至善,便是規模之大。(3. 止於至善이 궁극적 목표이고, 明德,新民은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두 단계의 세부 과정이다.)
- ↑ 義와 意의 차이: <논어집주> <讀論語孟子法> 程子曰:「凡看文字,須先曉其文義,然後可以求其意。未有不曉文義而見意者也。」
- ↑ <주역> <계사전상> 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
- ↑ <맹자> <등문공하> 楊墨之道不息,孔子之道不著,是邪說誣民,充塞仁義也。
- ↑ <한어대사전> 先秦的九個學術流派。▶ 《漢書‧敘傳下》: “ 劉向 司籍, 九流以別。” ▶ 顏師古 注引 應劭 曰: “儒、道、陰、陽、法、名、墨、從橫、雜、農, 凡九家。”
- ↑ <맹자> <이루하> 22. 予未得為孔子徒也,予私淑諸人也。
- ↑ <논어> <자로> 14. 雖不吾以,吾其與聞之。
- ↑ <맹자집주> <이루하> 22. 人,謂子思之徒也。
- ↑ 신안 진씨는 "大學之書,古之大學所以教人之法也。"을 한 단락으로, 다음 "蓋自天降生民,則既莫不與之以仁義禮智之性矣。然其氣質之稟或不能齊,是以不能皆有以知其性之所有而全之也。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出於其閒,則天必命之以為億兆之君師,使之治而教之,以復其性。此伏羲、神農、黃帝、堯、舜,所以繼天立極,而司徒之職、典樂之官所由設也。"을 또 한 단락으로 본 듯 하다.
- ↑ <논어집주> <학이> 學之為言效也。人性皆善,而覺有先後,後覺者必效先覺之所為,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 ↑ <대학장구> 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以復其初也。
- ↑ 『수언』3-31 子曰: 大學孔子之遺言也. 學者由是而學則不迷於入德之門也.
- ↑ <한어대사전> 2. 選取經由的道路。
- ↑ <한어대사전> 7. 闡述;闡發。
- ↑ <정씨경설> <伊川先生改正大學>
- ↑ 2. 亦作“ 破賺 ”。 漏洞;毛病。
- ↑ 21. 全部;完全;盡。
- ↑ <맹자> <공손추상> 6.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皆有怵惕惻隱之心。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非所以要譽於鄉黨朋友也,非惡其聲而然也。由是觀之,無惻隱之心,非人也;
- ↑ <맹자> <진심상> 15. 孟子曰:「人之所不學而能者,其良能也;所不慮而知者,其良知也。孩提之童,無不知愛其親者;及其長也,無不知敬其兄也。
- ↑ <한어대사전> 4. 照亮;照見。(밝게 비추다); 5. 指顯露, 呈現。(드러나다)
- ↑ <주자어류> 권14 <대학1> 蓋所謂明德者,只是一個光明底物事。如人與我一把火,將此火照物,則無不燭。自家若滅息著,便是暗了明德;能吹得著時,又是明其明德。
- ↑ <대학장구> 전2장.
- ↑ <한어대사전> 割大腿肉。 割股療親, 古以為孝行;割股祭祀, 則表示崇敬之至。 ▶ 《新唐書‧孝友傳序》: “ 唐 時 陳藏器 著《本草拾遺》, 謂人肉治羸疾, 自是民間以父母疾, 多刲股肉而進。”
- ↑ <맹자> <등문공상> 4.
- ↑ <중용장구> 23장. 其次致曲,曲能有誠,誠則形,形則著,著則明,明則動,動則變,變則化,唯天下至誠為能化。
- ↑ <한어대사전> 定當;安定。
- ↑ 猶繁雜。
- ↑ <주자대전> 권32 <答張敬夫問目>
- ↑ <주자어류> 권15. 「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至致知在格物。」「欲」與「先」字,謂如欲如此,必先如此,是言工夫節次。若「致知在格物」,則致知便在格物上。看來「欲」與「先」字,差慢得些子,「在」字又緊得些子。
- ↑ <논어> <위령공> 5. 立,則見其參於前也;在輿,則見其倚於衡也。
- ↑ <주자어류> 권15. 「格物」二字最好。物,謂事物也。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便有一箇是,一箇非,是底便行,非底便不行。凡自家身心上,皆須體驗得一箇是非。若講論文字,應接事物,各各體驗,漸漸推廣,地步自然寬闊。如曾子三省,只管如此體驗去。
- ↑ <논어> <학이> 4. 曾子曰:「吾日三省吾身:為人謀而不忠乎?與朋友交而不信乎?傳不習乎?」
- ↑ <주자어류> 권15. 聖人亦是略分箇先後與人知,不是做一件淨盡無餘,方做一件。若如此做,何時得成!
- ↑ <한어대사전> 處理;籌劃安排。
- ↑ <주자어류> 권15. 或問:「格物、致知,到貫通處,方能分別取舍。初間亦未嘗不如此,但較生澀勉強否?」曰:「格物時是窮盡事物之理,這方是區處理會。到得知至時,卻已自有箇主宰,會去分別取舍。初間或只見得表,不見得裏;只見得粗,不見得精。到知至時,方知得到;能知得到,方會意誠,可者必為,不可者決不肯為。到心正,則胸中無些子私蔽。洞然光明正大,截然有主而不亂,此身便修,家便齊,國便治,而天下可平。」
- ↑ <한어대사전> 過渡連接。
- ↑ <한어대사전> 2. 推動搖蕩;振蕩。
- ↑ <주자어류> 권15. 意誠後,推盪得渣滓靈利,心盡是義理。
- ↑ <대학장구> 전6장. 所謂誠其意者:毋自欺也,如惡惡臭,如好好色,此之謂自謙,故君子必慎其獨也!【朱注】謙,快也,足也。
- ↑ <한어대사전> 超越制度規定之範圍。
- ↑ <한어대사전> 2. 比喻立足點或立場。▶ 宋 朱熹 《答陳膚仲》四: “凡事從今更宜審細, 見得是, 當便立定腳根, 斷不移易。”
- ↑ <한어대사전> 2. 比喻堅定的立場與意志。
- ↑ <주역> 건괘 <문언> 子曰:「君子進德脩業,忠信,所以進德也,脩辭立其誠,所以居業也。」
- ↑ <중용> 人一能之己百之,人十能之己千之。【章句】 君子之學,不為則已,為則必要其成,故常百倍其功。
- ↑ <예기> <예운> 故禮義也者,人之大端也,所以講信修睦而固人之肌膚之會、筋骸之束也。
- ↑ <예기집설> 肌膚之總會, 筋骨之聨束, 非不固也。 然無禮以維飭之, 則惰慢傾側之容見矣。
- ↑ <예기> <옥조> 足容重,手容恭,目容端,口容止,聲容靜,頭容直,氣容肅,立容德,色容莊,坐如尸,燕居告溫溫。
- ↑ <맹자> <이루상> 9. 今之欲王者,猶七年之病求三年之艾也。苟為不畜,終身不得。
- ↑ 2.越規;放逸。
- ↑ 非僻 : 邪惡。《禮記‧玉藻》:“非辟之心,無自入也。”
- ↑ <논어> <요왈> 2. 君子正其衣冠,尊其瞻視,儼然人望而畏之,斯不亦威而不猛乎?
- ↑ <예기> <옥조> 足容重,手容恭,目容端,口容止,聲容靜,頭容直,氣容肅,立容德,色容莊,坐如尸,燕居告溫溫。
- ↑ 喚醒 : 叫醒。常用作比喻,有使之覺醒意。
- ↑ <한어대사전> 貼切恰當。
- ↑ <논어> <리인> 15. 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
- ↑ <중용장구> 27장. 故君子尊德性而道問學,致廣大而盡精微,極高明而道中庸。溫故而知新,敦厚以崇禮。
- ↑ <맹자> <고자상> 15. 先立乎其大者,則其小者弗能奪也。
- ↑ <논어> <헌문> 45. 脩己以安百姓,堯舜其猶病諸!
- ↑ <중용장구> 33장. 是故君子篤恭而天下平。
- ↑ <주역> <계사상> 5. 一陰一陽之謂道,繼之者善也,成之者性也。
- ↑ <주역> <계사상> 12. 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
- ↑ <태극도설>
- ↑ <한어대사전> 2. 比喻着落、依據。
- ↑ <한어대사전> 【貫注】 1. 貫穿;貫通。▶ 《參同契》卷上“須以造化, 精氣乃舒” 宋 朱熹 考异: “此時陰陽對待, 分為二物, 莫不含情互結, 兩相貪戀, 交通貫注, 而後化生萬物, 以舒展向來自具之精氣。”
- ↑ <한어대사전>4. 形體;外貌。
- ↑ <대학장구> 경1장 주석. 明德者,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以具眾理而應萬事者也。
- ↑ 혹은 '이것이 바로 이른바 명명덕이라는 것이니, 性分 밖에서 작위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다'
- ↑ 『太極圖說』 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 “乾道成男, 坤道成女”, 二氣交感, 化生萬物. 萬物生生, 而變化無窮焉. <注> 蓋合而言之, 萬物統體一太極也; 分而言之, 一物各具一太極也.
- ↑ <이정수언> 3-67. 子曰: "理義精微, 不可得而名言也, 姑以至善目之, 黙識, 可也."
- ↑ <대학장구> 전3장. 為人君,止於仁;為人臣,止於敬;為人子,止於孝;為人父,止於慈;與國人交,止於信。
- ↑ <예기> <옥조> 足容重,手容恭,目容端,口容止,聲容靜,頭容直,氣容肅,立容德,色容莊,坐如尸,燕居告溫溫。
- ↑ <논어> <계씨> 10. 孔子曰:「君子有九思:視思明,聽思聰,色思溫,貌思恭,言思忠,事思敬,疑思問,忿思難,見得思義。」
- ↑ 義 : 4.理應。
- ↑ <한어대사전> 謂將自己認為有疑義的問題如實告人。 亦謂傳授有疑義的問題。 ▶ 《穀梁傳‧莊公七年》: “《春秋》著以傳著, 疑以傳疑。”
- ↑ <춘추곡량전> 환공5년. 五年春,正月甲戌、己丑,陳侯鮑卒。鮑卒,何為以二日卒之?《春秋》之義,信以傳信,疑以傳疑。陳侯以甲戌之日出,己丑之日得。不知死之日,故舉二日以包也。
- ↑ <한어대사전> 探究
- ↑ <주역> <계사상> 夫易,聖人之所以極深而研幾也。
- ↑ <논어> <위정> 4. 子曰:「吾十有五而志于學,三十而立,四十而不惑,五十而知天命,六十而耳順,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 <맹자> <진심하> 25. 浩生不害問曰:「樂正子,何人也?」孟子曰:「善人也,信人也。」 「何謂善?何謂信?」 曰:「可欲之謂善,有諸己之謂信。充實之謂美,充實而有光輝之謂大,大而化之之謂聖,聖而不可知之之謂神。樂正子,二之中,四之下也。」
- ↑ <맹자> <이루상> 11. 孟子曰:「道在爾而求諸遠,事在易而求之難。人人親其親、長其長而天下平。」
- ↑ <맹자> <만장상> 7. 萬章問曰:「人有言『伊尹以割烹要湯』有諸?」 孟子曰:「否,不然。伊尹耕於有莘之野,而樂堯舜之道焉。…… 思天下之民匹夫匹婦有不被堯舜之澤者,若己推而內之溝中。」
- ↑ <상서대전> <略說> 周人可比屋而封。; <한어대사전> 【比屋可封】 1. 謂上古之世教化遍及四海, 家家都有德行, 堪受旌表。
- ↑ <논어> <태백> 9. 子曰:「民可使由之,不可使知之。」
- ↑ 『논어』 <자장> 14. 子游曰:「喪致乎哀而止。
- ↑ 俯仰 : 7.比喻時間短暫。
- ↑ <상서> <순전> 月正元日,舜格于文祖
- ↑ <한어대사전> 1. 怎能; 何能.
- ↑ 「原道」 曰:「斯道也,何道也?」曰:「斯吾所謂道也,非向所謂老與佛之道也。」堯以是傳之舜,舜以是傳之禹,禹以是傳之湯,湯以是傳之文武周公,文武周公傳之孔子,孔子傳之孟軻。軻之死,不得其傳焉。荀與揚也,擇焉而不精,語焉而不詳。
- ↑ <중용장구> 20장. 在下位不獲乎上,民不可得而治矣;獲乎上有道:不信乎朋友,不獲乎上矣;信乎朋友有道:不順乎親,不信乎朋友矣;順乎親有道:反諸身不誠,不順乎親矣;誠身有道:不明乎善,不誠乎身矣。
- ↑ <한어대사전> 2. 翻倒;翻轉。; 15. 重複。
- ↑ <한어대사전> 8. 失。
- ↑ <중용장구> 30장. 萬物並育而不相害,道並行而不相悖,小德川流,大德敦化,此天地之所以為大也。
- ↑ <논어> <리인> 15. 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曾子曰:「唯。」
- ↑ 『맹자』 「진심상」 45. "孟子曰:「於不可已而已者,無所不已;於所厚者薄,無所不薄也。"
- ↑ 『논어』, 「헌문」. 28장 "曾子曰:「君子思不出其位。」"
- ↑ <논어> <헌문> 25. 子曰:「古之學者為己,今之學者為人。」
- ↑ <한어대사전> 俊士和選士。 古代指可以教育深造的優秀人材。
- ↑ <맹자> <진심상> 25. 欲知舜與蹠之分,無他,利與善之閒也。
- ↑ <한어대사전> 舊有自割股肉以供君親食用之說, 古人認為是大忠大孝的表現。
- ↑ <한어대사전> 破車瘦馬。▶ 《三國志‧吳志‧劉繇傳》“ 繇 伯父 寵 為 漢 太尉” 裴松之注引晉司馬彪 《續漢書》: “ 寵 前後歷二郡, 八居九列, 四登三事。 家不藏賄, 無重寶器, 恆菲飲食, 薄衣服, 弊車羸馬, 號為窶陋。”
- ↑ <남헌집> 권14. <孟子講義序> 學者潜心孔孟, 必得其門而入, 愚以為莫先於義利之辯. 蓋聖學無所為而然也. 無所為而然者, 命之所以不已, 性之所以不偏, 而教之所以無窮也. 凡有所為而然者, 皆人欲之私而非天理之所存, 此義利之分也.
- ↑ <한어대사전> 3. 時下流行的文體。 舊時對科舉應試文體的通稱。
- ↑ <이정문집> 9-20. <答楊時論西銘書> <西銘>之爲書, 推理以存義, 擴前聖所未發, 與孟子性善、養氣之論同功.(二者亦前聖所未發)
- ↑ <대학장구> 경1장 右經一章,蓋孔子之言,而曾子述之。其傳十章,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
- ↑ <한어대사전> 證人;證據。
- ↑ <한어대사전>【質】 15. 對質;驗證。
- ↑ <중용장구> 20장. 在下位不獲乎上,民不可得而治矣;獲乎上有道:不信乎朋友,不獲乎上矣;信乎朋友有道:不順乎親,不信乎朋友矣;順乎親有道:反諸身不誠,不順乎親矣;誠身有道:不明乎善,不誠乎身矣。
- ↑ <맹자> <진심상> 1. 孟子曰:「盡其心者,知其性也。知其性,則知天矣。存其心,養其性,所以事天也。殀壽不貳,修身以俟之,所以立命也。」
- ↑ <대학장구> 경1장. 【朱注】 物格者,物理之極處無不到也。
- ↑ <대학장구> 경1장. 【朱注】 知至者,吾心之所知無不盡也。
- ↑ <중용장구> 1장. 見乎隱,莫顯乎微,故君子慎其獨也。
- ↑ 『맹자』, 「공손추상」, 2장. "是集義所生者,非義襲而取之也。行有不慊於心,則餒矣。我故曰,告子未嘗知義,以其外之也。" 【朱注】 慊,快也,足也。言所行一有不合於義,而自反不直,則不足於心而其體有所不充矣
- ↑ <맹자> <양혜왕상> 孟子對曰:「王何必曰利?亦有仁義而已矣。」
- ↑ <맹자> <이루상> 5. 孟子曰:「人有恆言,皆曰『天下國家』。天下之本在國,國之本在家,家之本在身。」
- ↑ <대학장구> 서론. 子程子曰:「大學,孔氏之遺書,而初學入德之門也。」於今可見古人為學次第者,獨賴此篇之存,而論、孟次之。學者必由是而學焉,則庶乎其不差矣。 ; <이정유서> 2上-36. 大學乃孔氏遺書, 須從此學則不差.
- ↑ <이정유서> 22上-1. 棣初見先生, 問「初學如何?」 曰:「入德之門, 無如大學. 今之學者, 賴有此一篇書存, 其他莫如論·孟.」
- ↑ <상서정의> <序> 討論墳典, 斷自唐虞以下 訖于周, 芟夷煩亂, 翦截浮辭, 擧其宏綱, 撮其機要, 足以垂世立敎.
- ↑ 謂克製私欲邪念。
- ↑ <상서> <입정> 文王惟克厥宅心,乃克立茲常事司牧人,以克俊有德。」
- ↑ <맹자> <이루상> 10. 孟子曰:「自暴者,不可與有言也;自棄者,不可與有為也。言非禮義,謂之自暴也;吾身不能居仁由義,謂之自棄也。
- ↑ 『중용장구』 21장. 自誠明,謂之性;自明誠,謂之教。誠則明矣,明則誠矣。 【朱注】 自,由也。德無不實而明無不照者,聖人之德。
- ↑ <논어> <위령공> 5. 立,則見其參於前也;在輿,則見其倚於衡也。夫然後行。
- ↑ <주역> <계사상> 7. 成性存存,道義之門。
- ↑ <주자어류> 권14 <대학1> 「在明明德」,須是自家見得這物事光明燦爛,常在目前,始得。; 같은 책, 권 17 <대학혹문상> 顧諟,是常要看教光明燦爛,照在目前。
- ↑ <논어> <리인> 4. 子曰:「苟志於仁矣,無惡也。」 【朱注】 苟,誠也。
- ↑ <주자어류> 권16. 「其命維新」,是新民之極,和天命也新。
- ↑ <한어대사전> 1. 謹慎戒懼貌。▶ 《書‧皋陶謨》: “兢兢業業, 一日二日萬幾。”▶ 孔 傳: “兢兢, 戒慎;業業, 危懼。”
- ↑ <한어대사전> 1. 洗滌;沐浴。
- ↑ <한어대사전> 1. 洗滌使之清潔;洗滌。
- ↑ <맹자> <진심하> 33. 孟子曰:「堯舜,性者也;湯武,反之也。
- ↑ <서경> <商書> <仲虺之誥> 惟王不邇聲色,不殖貨利。
- ↑ <서경> <商書> <仲虺之誥> 王懋昭大德,建中于民,以義制事,以禮制心,垂裕後昆。
- ↑ <서경> <商書> <伊訓> 先王肇修人紀,從諫弗咈,先民時若。
- ↑ <서경> <商書> <仲虺之誥> 用人惟己,改過不吝。
- ↑ <서경> <商書> <伊訓> 居上克明,為下克忠,與人不求備,檢身若不及,以至于有萬邦,茲惟艱哉!
- ↑ <시경> <상송> <長發> 湯降不遲、聖敬日躋。
- ↑ <서경> <商書> <咸有一德> 惟尹躬暨湯,咸有一德,克享天心,受天明命,以有九有之師,爰革夏正。
- ↑ <서경> <商書> <咸有一德> 終始惟一,時乃日新。
- ↑ <맹자> <만장상> 6. 太甲顛覆湯之典刑,伊尹放之於桐。三年,太甲悔過,自怨自艾,於桐處仁遷義;三年,以聽伊尹之訓己也,復歸于亳。
- ↑ <서경> <商書> <伊訓> 伊尹乃明言烈祖之成德,以訓于王。
- ↑ <한어대사전> 1. 謹慎整飭, 不違禮義。
- ↑ <한어대사전> 2. 留心;着意。
- ↑ <한어대사전> 齊太公 呂望 的尊稱。
- ↑ <대대례기> <武王踐阼>王齊三日,端冕,師尚父亦端冕,奉書而入,負屏而立。王下堂,南面而立。師尚父曰:「先王之道不北面!」王行西,折而南,東面而立。師尚父西面道書之言曰:「敬勝怠者吉,怠勝敬者滅,義勝欲者從,欲勝義者凶,凡事,不強則枉,弗敬則不正,枉者滅廢,敬者萬世。藏之約、行之行、可以為子孫常者,此言之謂也!且臣聞之,以仁得之,以仁守之,其量百世;以不仁得之,以仁守之,其量十世;以不仁得之,以不仁守之,必及其世。」
- ↑ <주역> <문언> 「直」其正也,「方」其義也。君子敬以直內,義以方外,敬義立而德不孤。「直、方、大、不習无不利」,則不疑其所行也。
- ↑ <대대례기> 원문에는 "不志"가 "以忘"으로 되어 있다.
- ↑ <대대례기> 원문에는 '殷'자는 '所'자로 되어 있다.
- ↑ <대대례기> 원문에는 爾자가 邇자로 되어 있다.
- ↑ <한어대사전> 4. 《詩‧大雅‧皇矣》: “帝謂文王,予懷明德,不大聲以色,不長夏以革。” ▶ 孔穎達 疏: “不大其音聲以見於顏色而加人,不以年長大以有變革於幼時。” 後遂以“聲色”為疾言厲色之意。 ▶ 《禮記‧中庸》: “聲色之於以化民, 末也。”
- ↑ <상서정의> <강고> <序> 成王旣伐管叔蔡叔.
- ↑ <호굉집>, 중화서국, 1987, 262쪽, <皇王大紀論> <載書之敍> <康誥>序曰: "成王既伐管叔、蔡叔, 以殷餘民封康叔." 謹按, 康叔者, 成王叔父也, 不應稱之曰: "朕其弟". 成王者, 康叔之猶子也, 不應自稱曰: "乃寡兄". 其曰兄曰弟者, 盖武王命康叔之辭也, 故<史記>武王封康叔於衛. 且康叔者, 文王之子, 叔虞, 成王之弟也. 周公東征叔虞, 已得封於唐, 王命歸周公於東, 豈有康叔得封反在唐叔之後乎? 故不得不捨<書>序而從經史也.
- ↑ <한어대사전> 大變。 ▶ 《書‧盤庚上》: “罔有逸言, 民用丕變。” ▶ 孔 傳: “民用大變從化。”
- ↑ <한어대사전> 1. 一日之間。
- ↑ <서경> <주서> <泰誓中> 天視自我民視,天聽自我民聽。
- ↑ <장자> <인간세> 擎、跽、曲拳,人臣之禮也,人皆為之,吾敢不為邪!<한어대사전> 陳鼓應 今注: “‘擎’, 執笏;‘跽’, 跪拜。 ‘曲拳’, 鞠躬。”
- ↑ <맹자> <이루상> 1. 故曰:責難於君謂之恭,陳善閉邪謂之敬,吾君不能謂之賊。
- ↑ <한어대사전> 2. 外形, 外表。
- ↑ <한어대사전> 2. 《詩》六義之一。 乃先言他物以引起所詠之詞的一種寫作手法。
- ↑ <한어대사전> 2. 贊嘆歌頌
- ↑ <한어대사전> 3. 謂聲音綿延不絕。
- ↑ <주자어류> 권 16. 問「前王不忘」云云。曰:「前王遠矣,盛德至善,後人不能忘之。『君子賢其賢』,如堯舜文武之德,後世尊仰之,豈非賢其所賢乎!『親其親』,如周后稷之德,子孫宗之,以為先祖先父之所自出,豈非親其所親乎!
- ↑ <한어대사전> 11. 眾多。; 12. 率,皆;大抵。
- ↑ <시경> <대아> <증민> 天生烝民、有物有則。
- ↑ <시경> <대아> <문왕> 上天之載、無聲無臭。儀刑文王、萬邦作孚。
- ↑ <시집전> <대아> <문왕> 止, 語辭.
- ↑ <대학장구> 學者於此,究其精微之蘊,而又推類以盡其餘,則於天下之事,皆有以知其所止而無疑矣。
- ↑ <한어대사전> 2. 無原則的寬容。
- ↑ <장자> 잡편 <도척> 尾生與女子期於梁下,女子不來,水至不去,抱梁柱而死。
- ↑ <한어대사전> 本謂孝子先父母之意而承順其志, 後泛指揣摩人意, 諂媚逢迎。 ▶ 《禮記‧祭義》: “君子之所為孝者, 先意承志, 諭父母於道。”
- ↑ <논어> <리인> 18. 子曰:「事父母幾諫。見志不從,又敬不違,勞而不怨。」
- ↑ <중용장구> 20장. 誠者,天之道也;誠之者,人之道也。誠者不勉而中,不思而得,從容中道,聖人也。誠之者,擇善而固執之者也。
- ↑ <맹자> <진심상> 21. 君子所性,仁義禮智根於心。其生色也,睟然見於面,盎於背,施於四體,四體不言而喻。
- ↑ <한어대사전> 2. 叉手。 表示無所事事。
- ↑ <한어대사전> 2. 自在行游貌。
- ↑ <논어> <술이> 3. 子曰:「德之不脩,學之不講,聞義不能徙,不善不能改,是吾憂也。」
- ↑ <상서> <주서> <다방> 惟聖罔念作狂,惟狂克念作聖。
- ↑ <맹자> <만장하> 1. 孔子之謂集大成。集大成也者,金聲而玉振之也。金聲也者,始條理也;玉振之也者,終條理也。始條理者,智之事也;終條理者,聖之事也。
- ↑ 猶講習。 ▶ 《國語‧魯語下》: “晝而講貫, 夕而習復。” ▶ 韋昭 注: “貫, 習也。”
- ↑ <논어> <학이> 15. 子貢曰:「貧而無諂,富而無驕,何如?」子曰:「可也。未若貧而樂,富而好禮者也。」 子貢曰:「詩云:『如切如磋,如琢如磨。』其斯之謂與?」 子曰:「賜也,始可與言詩已矣!告諸往而知來者。」 【朱注】 子貢自以無諂無驕為至矣,聞夫子之言,又知義理之無窮,雖有得焉,而未可遽自足也,故引是詩以明之。
- ↑ <맹자> <진심하> 38. 孟子曰:「由堯舜至於湯,五百有餘歲,若禹、皋陶,則見而知之;若湯,則聞而知之。由湯至於文王,五百有餘歲,若伊尹、萊朱則見而知之;若文王,則聞而知之。由文王至於孔子,五百有餘歲,若太公望、散宜生,則見而知之;若孔子,則聞而知之。
- ↑ <중용장구> 17장. 子曰:「舜其大孝也與!德為聖人,尊為天子,富有四海之內。宗廟饗之,子孫保之。
- ↑ <한어대사전> 猶基業。
- ↑ <한어대사전> 2. 指遺留給後人的德澤。
- ↑ <한어대사전> 口含食物, 飽食挺腹。語出《莊子‧馬蹄》: “夫 赫胥氏 之時, 民居不知所為, 行不知所之, 含哺而熙, 鼓腹而遊, 民能以此矣。”後因以“含哺鼓腹”形容人過着安樂的生活。
- ↑ <논형> <감허> 堯時,五十之民,擊壤於塗。觀者曰:「大哉,堯之德也!」擊壤者曰:「吾日出而作,日入而息,鑿井而飲,耕田而食,堯何等力?」
- ↑ <한어대사전> zhŭ 〔《廣韻》之欲切, 入燭, 章。 〕 1. 繼續;聯接。
- ↑ <한어대사전> shŭ 〔《廣韻》市玉切, 入燭, 禪。 〕 6. 歸屬;隸屬。
- ↑ <논어> <안연> 13. 子曰:「聽訟,吾猶人也,必也使無訟乎!」
- ↑ <예기> <단궁하> 成人有其兄死而不為衰者,聞子皋將為成宰,遂為衰。成人曰:「蠶則績而蟹有匡,范則冠而蟬有緌,兄則死而子皋為之衰。」
- ↑ <한어대사전> 16. 計算;籌劃。
- ↑ <한어대사전> 10. 似;如。 ▶ 《國語‧魯語下》: “ 楚公子 甚美, 不大夫矣, 抑君也。” ▶ 韋昭 注: “似君也。” -이렇게 번역할 경우, '말단과 같다.'
- ↑ <정씨경설> 5-10 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四字衍> 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
- ↑ <맹자> <공손추상> 6. 凡有四端於我者,知皆擴而充之矣,若火之始然,泉之始達。苟能充之,足以保四海;苟不充之,不足以事父母。
- ↑ <주자어류> 권16 任道弟問:「『致知』章,前說窮理處云:『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且經文『物格,而后知至』,卻是知至在後。今乃云『因其已知而益窮之』,則又在格物前。」曰:「知先自有。才要去理會,便是這些知萌露。若懵然全不向著,便是知之端未曾通。才思量著,便這箇骨子透出來。且如做些事錯,才知道錯,便是向好門路,卻不是方始去理會箇知。只是如今須著因其端而推致之,使四方八面,千頭萬緒,無有些不知,無有毫髮窒礙。孟子所謂:『知皆擴而充之,若火之始然,泉之始達。』『擴而充之』,便是『致』字意思。」
- ↑ 接受命令或教導。
- ↑ <대학장구> 此句之上別有闕文,此特其結語耳。
- ↑ <한어대사전> 1. 句子的結構方式。
- ↑ <대학장구> 閒嘗竊取程子之意以補之.
- ↑ <한서> 師古曰: "還讀曰旋, 旋, 速也."
- ↑ <한어대사전> 19. 立刻(즉시) ▶ 《史記‧留侯世家》: “於是 呂澤 立夜見 呂后 , 呂后 承間為上泣涕而言, 如四人意。” ; <한서> 宋祁曰: "越本無立字."
- ↑ <한서> <동중서전> 彊勉學問,則聞見博而知益明;彊勉行道,則德日起而大有功:此皆可使還至而立有效者也。《詩》曰「夙夜匪解」,《書》云「茂哉茂哉!」皆彊勉之謂也。
- ↑ <한어대사전> 42. 助詞。 用在句末, 常與“何”、“奚”等相配合, 表疑問或反詰。 ▶ 《左傳‧襄公十七年》: “親逐而君, 爾父為厲。 是之不憂, 而何以田為?”
- ↑ <이정유서> 18-18 問:「學何以有至覺悟處?」 曰:「莫先致知. 能致知, 則思一日愈明一日, 久而後有覺也. 學而無覺, 則何益矣? 又奚學爲? 『思曰睿, 睿作聖.』纔思便睿, 以至作聖, 亦是一箇思. 故曰:『勉强學問, 則聞見博而智益明.』」 又問:「莫致知與力行兼否. 曰:「爲常人言纔知得非禮不可爲, 須用勉强, 至於知穿窬不可爲, 則不待勉强, 是知亦有深淺也. 古人言樂循理之謂君子. 若勉强, 只是知循理, 非是樂也. 纔到樂時, 便是循理爲樂, 不循理爲不樂, 何苦而不循理. 自不須勉强也. 若夫聖人不勉而中, 不思而得. 此又上一等事.」
- ↑ 神情面色。
- ↑ <이정유서> 18-25 問: 「忠信進德之事固可勉强, 然致知甚難.」 曰:「子以誠敬爲可勉强, 且恁地說. 到底, 須是知了方行得. 若不知, 只是覰却堯學他行事. 無堯許多聰明叡智, 怎生得如他動容周旋中禮? 有諸中, 必形諸外. 德容安可妄學? 如子所言, 是篤信而固守之, 非固有之也. 且如中庸九經, 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堯典『克明峻德, 以親九族』. 親親本合在尊賢上, 何故却在下? 須是知所以親親之道方得. 未致知, 便欲誠意, 是躐等也. 學者固當勉强, 然不致知, 怎生行得? 勉强行者, 安能持久. 除非燭理明, 自然樂循理. 性本善, 循理而行是順理事, 本亦不難. 但爲人不知, 旋安排著, 便道難也. 知有多少般數, 煞有深淺. 向親見一人, 曾爲虎所傷, 因言及虎, 神色便變. 傍有數人, 見佗說虎, 非不知虎之猛可畏, 然不如佗說了有畏懼之色, 蓋眞知虎者也. 學者深知亦如此. 且如膾炙, 貴公子與野人莫不皆知其美, 然貴人聞著便有欲嗜膾炙之色, 野人則不然. 學者須是眞知, 纔知得是, 便泰然行將去也. 某年二十時, 解釋經義, 與今無異. 然思今日, 覺得意味與少時自別.」
- ↑ <한어대사전> 3. 中藥附子的別稱。 以其塊莖形似得名。
- ↑ <주역> <문언·건> 九三曰:「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无咎」。何謂也?子曰:「君子進德脩業,忠信,所以進德也,脩辭立其誠,所以居業也。
- ↑ <이정유서> 18-27 或問:「進修之術何先?」 曰:「莫先於正心誠意. 誠意在致知, 『致知在格物』. 格, 至也. 如『祖考來格』之格. 凡一物上有一理, 須是窮致其理. 窮理亦多端: 或讀書, 講明義理; 或論古今人物, 別其是非. 或應接事物而處其當. 皆窮理也.」 或問:「格物須物物格之, 還只格一物而萬理皆知?」 曰:「怎生便會該通? 若只格一物便通衆理. 雖顔子亦不敢如此道. 須是今日格一件, 明日又格一件, 積習旣多, 然後脫然自有貫通處.」
- ↑ <주자어류> 권18 格物、致知,彼我相對而言耳。格物所以致知。於這一物上窮得一分之理,即我之知亦知得一分;於物之理窮二分,即我之知亦知得二分;於物之理窮得愈多,則我之知愈廣。其實只是一理,「才明彼,即曉此」。所以大學說「致知在格物」,又不說「欲致其知者在格其物」。蓋致知便在格物中,非格之外別有致處也。又曰:「格物之理,所以致我之知。」
- ↑ <한어대사전> 參考質正。
- ↑ 相繼;相互。
- ↑ <한어대사전> 40. 介詞。 或;抑。
- ↑ <한어대사전> 2. 超越尋常貌。
- ↑ <이정유서> 18-27 或問:「進修之術何先?」 曰:「莫先於正心誠意. 誠意在致知, 『致知在格物』. 格, 至也. 如『祖考來格』之格. 凡一物上有一理, 須是窮致其理. 窮理亦多端: 或讀書, 講明義理; 或論古今人物, 別其是非. 或應接事物而處其當. 皆窮理也.」 或問:「格物須物物格之, 還只格一物而萬理皆知?」 曰:「怎生便會該通? 若只格一物便通衆理. 雖顔子亦不敢如此道. 須是今日格一件, 明日又格一件, 積習旣多, 然後脫然自有貫通處.」
- ↑ <논어> <공야장> 9. 子謂子貢曰:「女與回也孰愈?」 對曰:「賜也何敢望回。回也聞一以知十,賜也聞一以知二。」
- ↑ <논어> <자로> 17. 子夏為莒父宰,問政。子曰:「無欲速,無見小利。欲速,則不達;見小利,則大事不成。」
- ↑ <이정유서> 17-64 今人欲致知, 須要格物. 物不必謂事物然後謂之物也, 自一身之中, 至萬物之理, 但理會得多, 相[幾]次自然豁然有覺處.
- ↑ <이정유서> 02上-192 所務於窮理者, 非道須盡窮了天下萬物之理, 又不道是窮得一理便到, 只是要積累多後, 自然見去.
- ↑ <맹자> <등문공상> 2. 諸侯之禮,吾未之學也;
- ↑ <맹자> <만장하> 2. 北宮錡問曰:「周室班爵祿也,如之何?」 孟子曰:「其詳不可得聞也。
- ↑ <한어대사전> 32. 用在動詞後, 表示極度。 相當於“煞”。
- ↑ <주자어류> 권18 問:「知至若論極盡處,則聖賢亦未可謂之知至。如孔子不能證夏商之禮,孟子未學諸侯喪禮,與未詳周室班爵之制之類否?」曰:「然。如何要一切知得!然知至只是到脫然貫通處,雖未能事事知得,然理會得已極多。萬一有插生一件差異底事來,也都識得他破。只是貫通,便不知底亦通將去。某舊來亦如此疑,後來看程子說:『格物非謂欲盡窮天下之物,又非謂只窮得一理便到,但積累多後自脫然有悟處。』方理會得。」; 같은 책, 같은 곳. 問程子格物之說。曰:「須合而觀之,所謂『不必盡窮天下之物』者,如十事已窮得八九,則其一二雖未窮得,將來湊會,都自見得。
- ↑ <이정유서> 15-104 格物窮理, 非是要盡窮天下之物. 但於一事上窮盡, 其他可以類推. 至如言孝, 其所以爲孝者如何, 窮理(一無此二字). 如一事上窮不得, 且別窮一事, 或先其易者, 或先其難者, 各隨人深淺. 如千蹊萬徑, 皆可適國, 但得一道入得便可. 所以能窮者, 只爲萬物皆是一理, 至如一物一事, 雖小, 皆有是理.
- ↑ <효경> <廣揚名> 子曰:「君子之事親孝,故忠可移於君。事兄悌,故順可移於長。居家理,故治可移於官。是以行成於內,而名立於後世矣。」
- ↑ <주자어류> 권18 問:「程子言:『今日格一件,明日格一件,積習既久,自當脫然有貫通處。』又言:『格物非謂盡窮天下之理,但於一事上窮盡,其他可以類推。』二說如何?」曰:「既是教類推,不是窮盡一事便了。且如孝,盡得箇孝底道理,故忠可移於君,又須去盡得忠。以至於兄弟、夫婦、朋友,從此推之無不盡窮,始得。且如炭,又有白底,又有黑底。只窮得黑,不窮得白,亦不得。且如水雖是冷而濕者,然亦有許多樣,只認冷濕一件也不是格。但如今下手,且須從近處做去。若幽奧紛拏,卻留向後面做。所以先要讀書,理會道理。蓋先學得在這裏,到臨時應事接物,撞著便有用處。且如火爐,理會得一角了,又須都理會得三角,又須都理會得上下四邊,方是物格。若一處不通,便非物格也。」又曰:「格物不可只理會文義,須實下工夫格將去,始得。」
- ↑ <한어대사전> 【擔擱】 2. 耽誤.
- ↑ <주자어류> 권18 問:「程子『若一事上窮不得,且別窮一事』之說,與中庸『弗得弗措』相發明否?」曰:「看來有一樣底,若『弗得弗措』,一向思量這箇,少間便會擔閣了。若謂窮一事不得,便掉了別窮一事,又輕忽了,也不得。程子為見學者有恁地底,不得已說此話。」
- ↑ <한어대사전> 1. 退卻, 後退。
- ↑ <주자어류> 권18 問:「伊川論致知處云:『若一事上窮不得,且別窮一事。』竊謂致之為言,推而致之以至於盡也。於窮不得處正當努力,豈可遷延逃避,別窮一事邪?至於所謂『但得一道而入,則可以類推而通其餘矣』。夫專心致志,猶慮其未能盡知,況敢望以其易而通其難者乎?」曰:「這是言隨人之量,非曰遷延逃避也。蓋於此處既理會不得,若專一守在這裏,卻轉昏了。須著別窮一事,又或可以因此而明彼也。」
- ↑ <주자어류> 권18 問:「延平謂:『為學之初,且當常存此心,勿為他事所勝。凡遇一事,即當且就此事反復推尋以究其極。待此一事融釋脫落,然後別窮一事,久之自當有洒然處。』與伊川『今日格一件,明日格一件』之語不同,如何?」曰:「這話不如伊川說『今日明日』恁地急。卓錄但云:「伊川說得較快。」這說是教人若遇一事,即且就上理會教爛熟離析,不待擘開,自然分解。久之自當有洒然處,自是見得快活。某常說道,天下事無他,只是箇熟與不熟。若只一時恁地約摸得,都不與自家相干,久後皆忘卻。只如借得人家事一般,少間被人取將去,又濟自家甚事!」
- ↑ <주자어류> 권18 仁甫問:「伊川說『若一事窮不得,須別窮一事』,與延平之說如何?」曰:「這說自有一項難窮底事,如造化、禮樂、度數等事,是卒急難曉,只得且放住。且如所說春秋書『元年春王正月』,這如何要窮曉得?若使孔子復生,也便未易理會在。須是且就合理會底所在理會。延平說,是窮理之要。若平常遇事,這一件理會未透,又理會第二件;第二件理會未得,又理會第三件,恁地終身不長進。」
- ↑ <한어대사전> 1. 供人效法、模仿的榜樣和式樣。
- ↑ <주자어류> 권18 陶安國問:「『千蹊萬徑,皆可適國。』國,恐是譬理之一源處。不知從一事上便可窮得到一源處否?」曰:「也未解便如此,只要以類而推。理固是一理,然其間曲折甚多,須是把這箇做樣子,卻從這裏推去,始得。且如事親,固當盡其事之之道,若得於親時是如何,不得於親時又當如何。以此而推之於事君,則知得於君時是如何,不得於君時又當如何。推以事長,亦是如此。自此推去,莫不皆然。」
- ↑ <한어대사전> 八方荒遠的地方。
- ↑ <대학장구> 전3장 為人君,止於仁;為人臣,止於敬;為人子,止於孝;為人父,止於慈;與國人交,止於信。
- ↑ <주자어류> 권18 德元問:「萬物各具一理,而萬理同出一原。」曰:「萬物皆有此理,理皆同出一原。但所居之位不同,則其理之用不一。如為君須仁,為臣須敬,為子須孝,為父須慈。物物各具此理,而物物各異其用,然莫非一理之流行也。
- ↑ <주자어류> 권18 行夫問:「萬物各具一理,而萬理同出一源,此所以可推而無不通也。」曰:「近而一身之中,遠而八荒之外,微而一草一木之眾,莫不各具此理。如此四人在坐,各有這箇道理,某不用假借於公,公不用求於某,仲思與廷秀亦不用自相假借。然雖各自有一箇理,又卻同出於一箇理爾。如排數器水相似;這盂也是這樣水,那盂也是這樣水,各各滿足,不待求假於外。然打破放裏,卻也只是箇水。此所以可推而無不通也。所以謂格得多後自能貫通者,只為是一理。釋氏云:『一月普現一切水,一切水月一月攝。』這是那釋氏也窺見得這些道理。濂溪通書只是說這一事。」
- ↑ <한어대사전> 1. 宋 人詩論中提出的學詩所必須掌握的能靈活變通的法則。
- ↑ <태극해의> 蓋合而言之, 萬物統體一太極也; 分而言之, 一物各具一太極也.
- ↑ <이정유서> 15-108 物理須是要窮. 若言天地之所以高深, 鬼神之所以幽顯. 若只言天只是高, 地只是深, 只是已辭, 更有甚?
- ↑ <예기> <곡례상> 凡為人子之禮:冬溫而夏凊,昏定而晨省,在醜夷不爭。
- ↑ <이정유서> 18-101 問:「必有事焉, 當用敬否?」 曰:「敬只是涵養一事. 必有事焉, 須當集義. 只知用敬, 不知集義, 却是都無事也.」 又問:「義莫是中理否?」 曰:「中理在事, 義在心內. 苟不主義, 浩然之氣從何而生? 理只是發而見於外者. 且如恭敬, 幣之未將也恭敬, 雖因幣帛威儀而後發見於外, 然須心有此恭敬, 然後著見. 若心無恭敬, 何以能爾? 所謂德者得也, 須是得於己, 然後謂之德也.」 幣之未將之時, 已有恭敬, 非因幣帛而後有恭敬也. 問:「敬義何別?」 曰:「敬只是持己之道, 義便知有是有非. 順理而行, 是無義也. 若只守一箇敬, 不知集義, 却是都無事也. 且如欲爲孝, 不成只守著一箇孝字? 須是知所以爲孝之道, 所以侍奉當如何, 溫凊當如何, 然後能盡孝道也.」 又問:「義只在事上, 如何?」 曰:「內外一理, 豈特事上求合義也?」
- ↑ 5. 同, 相同;一致。▶ 《易‧乾》: “夫大人者, 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
- ↑ <이정유서> 18-48 問:「觀物察己, 還因見物, 反求諸身否?」 曰:「不必如此說. 物我一理, 纔明彼卽曉此, 合內外之道也. 語其大, 至天地之高厚; 語其小, 至一物之所以然. 學者皆當理會.」 又問:「致知, 先求之四端, 如何.」 曰:「求之性情, 固是切於身. 然一草一木皆有理, 須是察.」
- ↑ <주례> <지관사도> 仲冬斬陽木,仲夏斬陰木。
- ↑ <맹자> <양혜왕상> 7. 君子之於禽獸也,見其生,不忍見其死;聞其聲,不忍食其肉。是以君子遠庖廚也。
- ↑ <맹자> <양혜왕상> 3. 不違農時,穀不可勝食也;數罟不入洿池,魚鼈不可勝食也;斧斤以時入山林,材木不可勝用也。
- ↑ <예기> <왕제> 昆蟲未蟄,不以火田,不麑,不卵,不殺胎,不殀夭,不覆巢。
- ↑ <주자어류> 권15 問:「格物須合內外始得?」曰:「他內外未嘗不合。自家知得物之理如此,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便見合內外之理。目前事事物物,皆有至理。如一草一木,一禽一獸,皆有理。草木春生秋殺,好生惡死。『仲夏斬陽木,仲冬斬陰木』,皆是順陰陽道理。砥錄作「皆是自然底道理」。自家知得萬物均氣同體,『見生不忍見死,聞聲不忍食肉』,非其時不伐一木,不殺一獸,『不殺胎,不殀夭,不覆巢』,此便是合內外之理。」
- ↑ 【泛然】 5. 空泛;浮淺, 不深入。
- ↑ <대학장구> 전3장 為人子,止於孝;為人父,止於慈;
- ↑ <이정유서> 07-60 致知, 但知止於至善·爲人子止於孝·爲人父止於慈之類, 不須外面, 只務觀物理, 汎然正如遊騎無所歸也.
- ↑ <주자대전> 권39 <答陳齊仲> 格物之論, 伊川意雖謂眼前無非是物, 然其格之也, 亦須有緩急先後之序, 豈遽以爲存心於一草木器用之間而忽然懸悟也哉? 且如今爲此學而不窮天理、明人倫、講聖言、通世故, 乃兀然存心於一草木․一器用之間, 此是何學問?
- ↑ <주자어류> 권18 「致知」一章,此是大學最初下手處。若理會得透徹,後面便容易。故程子此處說得節目最多,皆是因人之資質耳。雖若不同,其實一也。見人之敏者,太去理會外事,則教之使去父慈、子孝處理會,曰:「若不務此,而徒欲汎然以觀萬物之理,則吾恐其如大軍之遊騎,出太遠而無所歸。」若是人專只去裏面理會,則教之以「求之情性,固切於身,然一草一木,亦皆有理」。要之,內事外事,皆是自己合當理會底,但須是六七分去裏面理會,三四分去外面理會方可。若是工夫中半時,已自不可。況在外工夫多,在內工夫少耶!此尤不可也。」
- ↑ <이정유서> 17-07 「致知在格物」, 格物之理, 不若察之於身, 其得尤切.
- ↑ <한어대사전> 2. 用在動詞後。 表示擴大或擴展。; 3. 用在動詞後。 表示開始並繼續下去。 ; 4. 用在動詞後。 表示分開或離開。
- ↑ <이정유서> 22上-03 又問:「如何是格物?」先生曰:「格, 至也, 言窮至物理也.」又問:「如何可以格物?」曰:「但立誠意去格物, 其遲速卻在人明暗也. 明者格物速, 暗者格物遲.」
- ↑ <예기집설> 五峯胡氏曰: "人非生而知之, 則其所知皆縁事物而知. 故迷於事物, 流蕩失中, 無所攸止. 然所謂事物者, 乃人生所不可無而亦不能掃滅使之無者也. 故儒之道, 即事即物, 不厭不棄, 必身親格之以精其知焉. 格之之道, 立志以定其本, 而居敬以持其志. 志立乎事物之表而敬行乎事物之内, 則物可格而知可精矣."
- ↑ <이정유서> 03-98 入道莫如敬, 未有能致知而不在敬者. 今人主心不定, 視心如寇賊而不可制, 不是事累心, 乃是心累事. 當知天下無一物是合少得者, 不可惡也.
- ↑ <주자어류> 권117. 又曰:「今人將敬、致知來做兩事。特敬時只塊然獨坐,更不去思量;卻是今日持敬,明日去思量道理也!豈可如此?但一面自持敬,一面去思慮道理,二者本不相妨。」
- ↑ <주자어류> 권128. 某以為諸公莫若且收斂身心,盡掃雜慮,令其光明洞達,方能作得主宰,方能見理。不然,亦終歲而無成耳。
- ↑ <이정유서> 8-28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
- ↑ <주자어류> 권18. 任道弟問:「或問,涵養又在致知之先?」曰:「涵養是合下在先。古人從小以敬涵養,父兄漸漸教之讀書,識義理。今若說待涵養了方去理會致知,也無期限。須是兩下用工,也著涵養,也著致知。伊川多說敬,敬則此心不放,事事皆從此做去。」
- ↑ <한어대사전> [tou] 3. 名詞後綴。 接於形容詞詞根之後。 ▶ 《朱子語類》卷二一: “眾人只是樸實頭不欺瞞人, 亦謂之忠。”
- ↑ <莊子> <繕性> 古之治道者,以恬養知;
- ↑ <이정외서> 2-66 "致知在格物", 格, 至也; 物, 事也. 事皆有理, 至其理, 乃格物也. 然致知在所養, 養知莫過於寡欲二字. <正叔>
- ↑ <이정유서> 25-01 大學曰:「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人之學莫大於知本末終始. 致知在格物, 則所謂本也, 始也; 治天下國家, 則所謂末也, 終也. 治天下國家, 必本諸身, 其身不正而能治天下國家者無之. 格猶窮也, 物猶理也, 猶曰窮其理而已也. 窮其理, 然後足以致之, 不窮則不能致也. 格物者適道之始, 欲思格物, 則固已近道矣. 是何也? 以收其心而不放也.
- ↑ 4-12~15조목은 경공부와 격물치지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말하고 있다면, 4-16조목은 격물 공부 자체가 일종의 경공부라고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 ↑ <한어대사전> 1. 盡頭。 ▶ 宋 晏幾道 《長相思》詞: “若問相思甚了期, 除非相見時。”
- ↑ <주역> <계사상> 八卦而小成,引而伸之,觸類而長之,天下之能事畢矣。; <한어대사전> 【觸類旁通】 《易‧繫辭上》: “引而伸之, 觸類而長之。”又《乾》: “六爻發揮, 旁通情也。”後以“觸類旁通”謂掌握了某一事物規律, 就能推知同類事物。
- ↑ <주자어류> 권18. 或問程子致知、格物之說不同。曰:「當時答問,各就其人而言之。今須是合就許多不同處,來看作一意為佳。且如既言『不必盡窮天下之物』,又云『一草一木亦皆有理』。今若於一草一木上理會,有甚了期。但其間有『積習多後自當脫然有貫通處』者為切當耳。今以十事言之,若理會得七八件,則那兩三件觸類可通。若四旁都理會得,則中間所未通者,其道理亦是如此。蓋長短大小,自有準則。如忽然遇一件事來時,必知某事合如此,某事合如彼,則此方來之事亦有可見者矣。聖賢於難處之事,只以數語盡其曲折,後人皆不能易者,以其於此理素明故也。」又云:「所謂格物者,常人於此理,或能知一二分,即其一二分之所知者推之,直要推到十分,窮得來無去處,方是格物。」
- ↑ <한어대사전> 9. 助詞。 相當於“的”用在定語後面。 表示領屬。
- ↑ <한어대사전> 3. 處所;地方。
- ↑ <한어대사전> 1. 逐次;逐一。▶ 宋 朱熹 《勸農文》之一: “其塍畔斜生茅草之屬, 亦須節次芟削, 取令凈盡, 免得分耗土力。”
- ↑ <중용장구> 20장. 誠身有道:不明乎善,不誠乎身矣。…… 誠之者,擇善而固執之者也。
- ↑ <맹자> <진심상> 1. 孟子曰:「盡其心者,知其性也。知其性,則知天矣。
- ↑ <맹자> <진심상> 15. 孩提之童,無不知愛其親者;及其長也,無不知敬其兄也。
- ↑ <서경> <태갑중> 視遠惟明;聽德惟聰。
- ↑ <주역> <계사상> 12. 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
- ↑ <주역> <계사상> 10장. 易无思也,无為也,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
- ↑ <예기> <옥조> 足容重,手容恭,目容端,口容止,聲容靜,頭容直,氣容肅,立容德,色容莊,坐如尸,燕居告溫溫。
- ↑ <논어> <계씨> 10. 孔子曰:「君子有九思:視思明,聽思聰,色思溫,貌思恭,言思忠,事思敬,疑思問,忿思難,見得思義。」
- ↑ <논어> <안연> 1. 顏淵問仁。子曰:「克己復禮為仁。一日克己復禮,天下歸仁焉。為仁由己,而由人乎哉?」顏淵曰:「請問其目。」子曰:「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
- ↑ <맹자> <등문공상> 4. 聖人有憂之,使契為司徒,教以人倫:父子有親,君臣有義,夫婦有別,長幼有序,朋友有信。
- ↑ <태극해의> 蓋合而言之, 萬物統體一太極也; 分而言之, 一物各具一太極也.
- ↑ <논어> <공야장> 12. 子貢曰:「夫子之文章,可得而聞也;夫子之言性與天道,不可得而聞也。」
- ↑ <이정유서> 17-65 楊子拔一毛不爲, 墨子又摩頂放踵爲之, 此皆是不得中. 至如子莫執中, 欲執此二者之中, 不知怎麽執得? 識得則事事物物上皆天然有箇中在那上, 不待人安排也. 安排著, 則不中矣.
- ↑ <정몽> <성명편> 性者萬物之一源,非有我之得私也。惟大人僞能盡其道,是故立必俱立,知必周知,愛必兼愛,成不獨成。披自蔽塞而不知順吾理者,則亦末如之何矣。
- ↑ <격양집> 性者,道之形體也。性傷,則道亦從之矣。心者,性之邪郭也。心傷,則性亦從之矣。身者,心之區宇也。身傷,則心亦從之矣。物者,身之舟車也。物傷,則亦從之矣。是知以道觀性,以性觀心,以心觀身,以身觀物,治則治矣,然猶未離乎害者也。不若以道觀道,以性觀性,以心觀心,以身觀身,以物觀物,則雖欲相傷其可得乎。
- ↑ <한어대사전> 强行改變.
- ↑ <주자어류>에 의거해 수정한다. <주자어류> 권100 正卿問:「邵子所謂『道之形體』如何?」曰:「諸先生說這道理,卻不似邵子說得最著實。這箇道理,纔說出,只是虛空,更無形影。惟是說『性者道之形體』,卻見得實有。不須談空說遠,只反諸吾身求之,是實有這箇道理?還是無這箇道理?故嘗為之說曰:『欲知此道之實有者,當求之吾性分之內。』邵子忽地於擊壤集序自說出幾句,最說得好!」
- ↑ <正蒙> <誠明篇第六> 人之剛柔、緩急、有才與不才,氣之偏也。天本參和不偏,養其氣,反之本而不偏,則盡性而天矣。; 莫非天也,陽明勝則德性用,陰濁勝則物欲行。領惡而全好者,其必由學乎!- '氣質清濁偏正'을 직접 언급한 구절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 ↑ <예기집설> 권133 藍田吕氏曰: " …… 然人有近物之性者, 物有近人之性者, 亦係乎此. 於人之性開塞偏正無所不盡, 則物之性未有不能盡也. 人也物也莫不盡其性, 則天地之化幾矣." - 주자는 장재 말로 알았던 것 같은데, 衛湜은 여대림의 말로 본다.
- ↑ <맹자> <고자상> 11. 學問之道無他,求其放心而已矣。
- ↑ <맹자> <진심상> 1. 存其心,養其性,所以事天也。
- ↑ <예기> <옥조> 足容重,手容恭,目容端,口容止,聲容靜,頭容直,氣容肅,立容德,色容莊
- ↑ <주역> <계사상> 10. 易无思也,无為也,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
- ↑ <대학장구> 전3장 為人君,止於仁;為人臣,止於敬;為人子,止於孝;為人父,止於慈;與國人交,止於信。
- ↑ <논어> <자로> 19. 樊遲問仁。子曰:「居處恭,執事敬,與人忠。雖之夷狄,不可棄也。」
- ↑ <맹자> <진심상> 1. 孟子曰:「盡其心者,知其性也。知其性,則知天矣。
- ↑ <한어대사전> 猶如; 例如.
- ↑ <주자어류> 권60 盡心,如何盡得?不可盡者心之事,可盡者心之理。理既盡之後,謂如一物初不曾識,來到面前,便識得此物,盡吾心之理。盡心之理,便是「知性,知天」。
- ↑ <맹자> <공손추상> 2. 「何謂知言?」曰:「詖辭知其所蔽,淫辭知其所陷,邪辭知其所離,遁辭知其所窮。
- ↑ <주자어류> 권18. 問:「陸先生不取伊川格物之說。若以為隨事討論,則精神易弊,不若但求之心,心明則無所不照,其說亦似省力。」曰:「不去隨事討論後,聽他胡做,話便信口說,腳便信步行,冥冥地去,都不管他。」
- ↑ <傳家集> <致知在格物論> 太學曰: "致知在格物." 格猶扞也, 禦也. 能扞禦外物, 然後能知至道矣.
- ↑ <예기> <악기> 人生而靜,天之性也;感於物而動,性之欲也。物至知知,然後好惡形焉。好惡無節於內,知誘於外,不能反躬,天理滅矣。
- ↑ 孔宗翰(1029-1088)
- ↑ <예기> <예운> 飲食男女,人之大欲存焉;死亡貧苦,人之大惡存焉。故欲惡者,心之大端也。人藏其心,不可測度也;美惡皆在其心,不見其色也,欲一以窮之,舍禮何以哉?
- ↑ <한어대사전> 26. 連詞. 與'便'或'就'連用, 表示兩種動作時間上的前後緊接.
- ↑ <한어대사전> 多聞博識.
- ↑ <한어대사전> 2. 說明; 證明; 表明.
- ↑ <한어대사전> 1. 雙方; 兩方面.
- ↑ <한어대사전> 1. 相違; 背向. 3. 依賴; 憑藉. 5. 指在時間或空間上接近.
- ↑ <한어대사전> 6. 規模.
- ↑ <한어대사전> 9. 效法; 承襲.
- ↑ <이정유서> 03-08 須是合內外之道, 一天人, 齊上下, 下學而上達, 極高明而道中庸.
- ↑ <이정유서> 25-40 通乎晝夜之道, 而知晝夜, 死生之道也.
- ↑ <논어> <위령공> 23. 子貢問曰:「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子曰:「其恕乎!己所不欲,勿施於人。」- 尹氏曰:「學貴於知要。子貢之問,可謂知要矣。孔子告以求仁之方也。」
- ↑ <주자어류> 권18 問:「『一理通則萬理通』,其說如何?」曰:「伊川嘗云:『雖顏子亦未到此。』天下豈有一理通便解萬理皆通!也須積累將去。如顏子高明,不過聞一知十,亦是大段聰明了。學問卻有漸,無急迫之理。」
- ↑ <맹자> <진심상> 4. 孟子曰:「萬物皆備於我矣。反身而誠,樂莫大焉。
- ↑ <중용장구> 20장. 反諸身不誠,不順乎親矣;誠身有道:不明乎善,不誠乎身矣。
- ↑ <중용장구> 20장. 博學之,審問之,慎思之,明辨之,篤行之。有弗學,學之弗能弗措也;有弗問,問之弗知弗措也;有弗思,思之弗得弗措也;有弗辨,辨之弗明弗措也;有弗行,行之弗篤弗措也;
- ↑ <주역> 건괘 상전 天行健,君子以自強不息。
- ↑ <주역> 곤괘 상전 地勢坤,君子以厚德載物。
- ↑ <예기집설> 권 149. 武夷胡氏曰: "格, 度也, 猶曰品式也, 所謂物之則也." 又曰: "夫窮理盡性乃聖門事業, 物物而察知之始也, 中人所可能者; 一以貫之, 知之至也, 非上知不與焉. 是故以子貢之明達, 猶疑於其師以為多學而識之也. 且置是事而以致知格物為先, 物物而察則知益明, 心益廣, 道可近矣. 然物物而察者, 又豈逐物而不知反哉? 又豈以己與物為二哉? 察於天行, 以自强也; 察於地勢, 以厚德也; 察於雲雷, 以經綸也; 察於山泉, 以果行也; 察於日月, 通晝夜也; 察於尺蠖, 明屈伸也; 逺察諸物, 其畧如此. 察於耳目身舌, 克私心也; 察於辭貌顔色, 尊德性也; 察於灑掃應對, 兼本末也; 察於心性四體, 養浩然之氣也; 近察諸身, 其要如此. 無所不在者, 理也; 無所不有者, 心也. 物物致察, 宛轉歸己, 則心與理不昧. 故知循理者, 士也; 物物皆備, 反身而誠, 則心與理不違. 故樂循理者, 君子也; 天地合德, 四時合序, 則心與理為一無事乎循矣. 故一以貫之, 聖人也, 豈易言哉?
- ↑ <주자어류> 권18 上蔡說:「窮理只尋箇是處,以恕為本。」窮理自是我不曉這道理,所以要窮,如何說得「恕」字?他當初說「恕」字,大概只是說要推我之心以窮理,便礙理了。龜山說「反身而誠」,卻大段好。須是反身,乃見得道理分明。如孝如弟,須見得孝弟,我元有在這裏。若能反身,爭多少事。他又卻說:「萬物皆備於我,不須外面求。」此卻錯了。「身親格之」,說得「親」字急迫。自是自家格,不成倩人格!
- ↑ <한어대사전> 2. 期限; 3. 路程.
- ↑ <중용장구> 12장. 故君子語大,天下莫能載焉;語小,天下莫能破焉。
- ↑ <주자어류> 권18 五峰說「立志以定其本,居敬以持其志。志立乎事物之表,敬行乎事物之內,而知乃可精」者,這段語本說得極精。然卻有病者,只說得向裏來,不曾說得外面,所以語意頗傷急迫。蓋致知本是廣大,須用說得表裏內外周遍兼該方得。其曰「志立乎事物之表,敬行乎事物之內」,此語極好。而曰「而知乃可精」,便有局促氣象。他便要就這裏便精其知。殊不知致知之道不如此急迫,須是寬其程限,大其度量,久久自然通貫。他言語只說得裏面一邊極精,遺了外面一邊,所以其規模之大不如程子。且看程子所說:「今日格一件,明日格一件,積久自然貫通。」此言該內外,寬緩不迫,有涵泳從容之意,所謂「語小天下莫能破,語大天下莫能載」也。
- ↑ <공자가어> <후서> 孔子旣没而微言絶, 七十二弟子終而大義乖.
- ↑ <한어대사전> 衡量斟酌.
- ↑ <주자어류> 권18. 先生問:「大學看得如何?」曰:「大綱只是明明德,而著力在格物上。」曰:「著力處大段在這裏,更熟看,要見血脈相貫穿。程子格物幾處,更子細玩味,說更不可易。某當初亦未曉得。如呂,如謝,如尹楊諸公說,都見好。後來都段段錄出,排在那裏,句句將來比對,逐字稱停過,方見得程子說鶏撲不破。諸公說,挨著便成粉碎了!」; 같은 책, 같은 곳. 諸公致知、格物之說,皆失了伊川意,此正是入門款。於此既差,則他可知矣。
- ↑ <주자어류> 권18. 這箇道理,自孔孟既沒,便無人理會得。只有韓文公曾說來,又只說到正心、誠意,而遺了格物、致知。及至程子,始推廣其說,工夫精密,無復遺憾。然程子既沒,諸門人說得便差,都說從別處去,與致知、格物都不相干,只不曾精曉得程子之說耳。只有五峰說得精,其病猶如此。亦緣當時諸公所聞於程子者語意不全,或只聞一時之語,或只聞得一邊,所以其說多差。後來卻是集諸家語錄,湊起眾說,此段工夫方始渾全。則當時門人親炙者未為全幸,生於先生之後者未為不幸。
- ↑ <논어> <헌문> 25. 子曰:「古之學者為己,今之學者為人。」
- ↑ <이정유서> 03-17 以記誦博識爲玩物喪志.
- ↑ <대학장구> 전3장. 如切如磋者,道學也;如琢如磨者,自脩也;
- ↑ <주역> <계사하> 5. 子曰:「知幾其神乎?君子上交不諂,下交不瀆,其知幾乎,幾者動之微,吉之先見者也,君子見幾而作,不俟終日。易曰:『介于石,不終日,貞吉。』介如石焉,寧用終日,斷可識矣,君子知微知彰,知柔知剛,萬夫之望。」
- ↑ <통서> <誠幾德> 幾,善惡.
- ↑ <주자어류> 권16. 問劉棟:「看大學自欺之說如何?」曰:「不知義理,卻道我知義理,是自欺。」先生曰:「自欺是箇半知半不知底人。知道善我所當為,卻又不十分去為善;知道惡不可作,卻又是自家所愛,舍他不得,這便是自欺。不知不識,只喚欺,不知不識卻不喚做『自欺』。」
- ↑ <주자대전> 권64 <答孫敬甫> 蓋自欺自慊兩事正相抵背, 纔不自欺, 卽其好惡眞如好好色惡惡臭, 只爲求以自快自足, 如寒而思衣以自溫, 饑而思食以自飽, 非有牽强苟且, 姑以爲人之意.
- ↑ <한어대사전> 宋代發行的一種紙幣.
- ↑ <한어대사전> 5. 猶言特別.
- ↑ <한어대사전> 4. 謂所行醜惡無善狀.
- ↑ <한어대사전> 4.誤, 貽誤.
- ↑ <주자어류> 권16. 如公之言,須是鑄私錢,假官會,方為自欺,大故是無狀小人,此豈自欺之謂邪!…… 此處工夫極細,未便說到那粗處。所以前後學者多說差了,蓋為牽連下文『小人閒居為不善』一段看了,所以差也。
- ↑ <주자어류> 권16. 如有得九分義理,雜了一分私意,九分好善、惡惡,一分不好、不惡,便是自欺。到得厭然揜著之時,又其甚者。
- ↑ <주자어류> 권16. 今能致知,知至而意誠矣。驗以日用間誠意,十分為善矣。有一分不好底意思潛發以間於其間,此意一發,便由斜徑以長,這箇卻是實,前面善意卻是虛矣。
- ↑ <주자어류> 권16. 凡惡惡之不實,為善之不勇,外然而中實不然,或有所為而為之,或始勤而終怠,或九分為善,尚有一分苟且之心,皆不實而自欺之患也。
- ↑ <주자어류> 권18. 若論自欺細處:且如為善,自家也知得是合當為,也勉強去做,只是心裏又有些便不消如此做也不妨底意思;如不為不善,心裏也知得不當為而不為,雖是不為,然心中也又有些便為也不妨底意思。此便是自欺,便是好善不『如好好色』,惡惡不『如惡惡臭』。便做九分九釐九毫要為善,只那一毫不要為底,便是自欺,便是意不實矣。
- ↑ <주자어류> 권16.「『自慊』之『慊』,大意與孟子『行有不慊』相類。子細思之,亦微有不同:孟子慊訓滿足意多,大學訓快意多。橫渠云:『有外之心,蜀錄作「自慊」。不足以合天心。』初看亦只一般。然橫渠亦是訓足底意思多,大學訓快意多。」問:「大學說『自慊』,且說合做處便做,無牽滯於己私,且只是快底意,少間方始心下充滿。孟子謂『行有不慊』,只說行有不滿足,則便餒耳。」曰:「固是。
- ↑ <주자어류> 권64. 曰:「『小人閒居為不善』,是誠心為不善也。『掩其不善,而著其善』,是為善不誠。」; 같은 책, 권16. 所謂為惡於隱微之中,而詐善於顯明之地,是所謂自欺以欺人也。然人豈可欺哉!
- ↑ <주자어류> 권16. 蓋人雖不知,而我已自知,自是甚可皇恐了,其與十目十手所視所指,何以異哉?
- ↑ <주자어류> 권16.『富潤屋』以下,卻是說意誠之驗如此。
- ↑ <한어대사전> 2. 疾速.
- ↑ <주자어류> 권16. 說許多病痛,都在「誠意」章,一齊要除了。下面有些小為病痛,亦輕可。若不除去,恐因此滋蔓,則病痛自若。
- ↑ <주자대전> 권60 <答彭子壽> 然竊聞之: <大學>於此雖若使人戒夫自欺, 而推其本則必其有以用力於格物致之地, 然後理明心一, 而所發自然莫非眞實. 如其不然, 則雖欲防微謹獨, 無敢自欺, 而正念方萌, 私欲隨起, 亦非力之所能制矣.
- ↑ '善'이 '性'의 오자인 듯하다. <북계자의> 天所命於人以是理, 本只善而無惡. 故人所受以為性, 亦本善而無惡. …… 造化流行, 生育賦予, 更無别物, 只是箇善而已. 此是太極之動而陽時. 所謂善者, 以實理言.
- ↑ '切'이 '功'의 오자인 듯하다. 趙順孫(격암 조씨), <四書纂疏> 陳氏曰: "造化流行, 生育賦予, 更無别物, 只是箇善而已. 所謂善者, 以實理言. 人受得此理以為善, 亦本善而無惡." …… 陳氏曰: "一等未實見道理人, 雖分明有好善之心, 終是不能徹表裏. 須是真知善惡分明, 然後有真好真惡之功." …… 陳氏曰: "如外好善而内不好善, 外惡惡而内不惡惡, 便是不真實."
- ↑ <한어대사전> 3. 死的諱稱.
- ↑ <한어대사전> 査明罪行而處以死刑.
- ↑ <맹자> <공손추상> 2. 「敢問何謂浩然之氣?」曰:「難言也。其為氣也,至大至剛,以直養而無害,則塞于天地之閒。其為氣也,配義與道;無是,餒也。是集義所生者,非義襲而取之也。行有不慊於心,則餒矣。
- ↑ <맹자> <공손추하> 2. 曰:「豈謂是與?曾子曰:『晉楚之富,不可及也。彼以其富,我以吾仁;彼以其爵,我以吾義,吾何慊乎哉?』
- ↑ <사기> <외척세가> 景帝長男榮,其母栗姬。栗姬,齊人也。立榮為太子。長公主嫖有女,欲予為妃。栗姬妒,而景帝諸美人皆因長公主見景帝,得貴幸,皆過栗姬,栗姬日怨怒,謝長公主,不許。長公主欲予王夫人,王夫人許之。長公主怒,而日讒栗姬短於景帝曰:「栗姬與諸貴夫人幸姬會,常使侍者祝唾其背,挾邪媚道。」景帝以故望之。景帝嘗體不安,心不樂,屬諸子為王者於栗姬,曰:「百歲後,善視之。」栗姬怒,不肯應,言不遜。景帝恚,心嗛之而未發也。長公主日譽王夫人男之美,景帝亦賢之,又有曩者所夢日符,計未有所定。王夫人知帝望栗姬,因怒未解,陰使人趣大臣立栗姬為皇后。大行奏事畢,曰:「『子以母貴,母以子貴』,今太子母無號,宜立為皇后。」景帝怒曰:「是而所宜言邪!」遂案誅大行,而廢太子為臨江王。栗姬愈恚恨,不得見,以憂死。卒立王夫人為皇后,其男為太子,封皇后兄信為蓋侯。
- ↑ <맹자> <공손추상> 2. 公孫丑問曰:「夫子加齊之卿相,得行道焉,雖由此霸王不異矣。如此,則動心否乎?」孟子曰:「否。我四十不動心。」
- ↑ <맹자> <공손추상> 2. 夫志,氣之帥也;氣,體之充也。夫志至焉,氣次焉。故曰:『持其志,無暴其氣。』
- ↑ <이정유서> 19-05 問:「『有所忿懥·恐懼·憂患, 心不得其正.』是要無此數者, 心乃正乎?」 曰:「非是謂無, 只是不以此動一本作累.其心. 學者未到不動處, 須是執持其志.」
- ↑ <주자어류> 권16. 大學於「格物」、「誠意」章,都是鍊成了,到得正心、修身處,都易了。
- ↑ <주자어류> 권16. 敬之問:「『正心』章云:『人之心要當不容一物。』」曰:「這說便是難。才說不容一物,卻又似一向全無相似。只是這許多好樂、恐懼、忿懥、憂患,只要從無處發出,不可先有在心下。; 같은 책, 같은 곳. 大學七章,看「有所」二字。「有所憂患」,憂患是合當有,若因此一事而常留在胸中,便是有。「有所忿懥」,因人之有罪而撻之,才撻了,其心便平,是不有;若此心常常不平,便是有。恐懼、好樂亦然。
- ↑ <주자어류> 권16. 才係於物,心便為其所動。其所以係於物者有三:或是事未來,而自家先有這箇期待底心;或事已應去了,又卻長留在胸中不能忘;或正應事之時,意有偏重,便只見那邊重,這都是為物所係縛。既為物所係縛,便是有這箇物事,到別事來到面前,應之便差了,這如何會得其正!聖人之心,瑩然虛明,無纖毫形跡。一看事物之來,若小若大,四方八面,莫不隨物隨應,此心元不曾有這箇物事。
- ↑ <논어> <옹야> 2. 哀公問:「弟子孰為好學?」孔子對曰:「有顏回者好學,不遷怒,不貳過。不幸短命死矣!今也則亡,未聞好學者也。」
- ↑ <주자어류> 권16. 今人多是才忿懥,雖有可喜之事亦所不喜;才喜,雖有當怒之事亦不復怒,便是蹉過事理了,便『視而不見,聽而不聞,食而不知其味』了。蓋這物事才私,便不去,只管在胸中推盪,終不消釋。設使此心如太虛然,則應接萬務,各止其所,而我無所與,則便視而見,聽而聞,食而真知其味矣。看此一段,只是要人不可先有此心耳。
- ↑ <주자어류> 권120. 又問:「忿懥好樂,乃在我之事,可以勉強不做。如憂患恐懼,乃是外面來底,不由自家。」曰:「都不得。便是外面來底,須是自家有箇道理措置得下。恐懼憂患,只是徒然。事來亦合當思慮不妨,但只管累其本心,也不濟得事。孔子畏匡人,文王囚羑里,死生在前了,聖人元不動心,處之恬然。
- ↑ <한어대사전> 1. 上下一貫; 2. 從上到下, 從頭到脚.
- ↑ <주자어류> 권16. 黃丈云:「舊嘗問:『「視而不見,聽而不聞」,只是說知覺之心,卻不及義理之心。』先生曰:『才知覺,義理便在此;才昏,便不見了。』」
- ↑ <한어대사전> 6. 量詞. 猶棵、株. 用於竹的計量.
- ↑ <주자어류> 권16. 或問「正心」、「誠意」章。先生令他說。曰:「意誠則心正。」曰:「不然。這幾句連了又斷,斷了又連,雖若不相粘綴,中間又自相貫。譬如一竿竹,雖只是一竿,然其間又自有許多節。意未誠,則全體是私意,更理會甚正心!然意雖誠了,又不可不正其心。」
- ↑ <대학장구> 8장. 所謂脩身在正其心者,身有所忿懥,則不得其正;有所恐懼,則不得其正;有所好樂,則不得其正;有所憂患,則不得其正。<주> 程子曰:「身有之身當作心。」忿,弗粉反。懥,敕值反。好、樂,並去聲。忿懥,怒也。蓋是四者,皆心之用,而人所不能無者。然一有之而不能察,則欲動情勝,而其用之所行,或不能不失其正矣。
- ↑ <통서해>, 誠上第一. 元、亨,誠之通;利、貞,誠之復。
- ↑ <맹자>, <고자상> 8장
- ↑ <맹자>, <고자상>, 11장.
- ↑ <맹자>, <고자상>, 15장
- ↑ <대학장구> 전10장. 詩云:「節彼南山,維石巖巖,赫赫師尹,民具爾瞻。」有國者不可以不慎,辟則為天下僇矣。
- ↑ <한어대사전> 都市中的大街.
- ↑ <주자어류> 권16. 正心、修身,今看此段大概差錯處,皆未在人欲上。這箇皆是人合有底事,皆恁地差錯了。況加之以放辟邪侈,分明是官街上錯了路!
- ↑ <주자어류> 권16. 「人之其所親愛而僻焉」,如父子是當主於愛,然父有不義,子不可以不爭;如為人父雖是止於慈,若一向僻將去,則子有不肖,亦不知責而教焉,不可。「人之其所賤惡而僻焉」,人固自有一種可厭者,然猶未至於可賤惡處,或尚可教,若一向僻將去,便賤惡他,也不得。「人之其所畏敬而僻焉」,如事君固是畏敬,然「說大人則藐之」,又不甚畏敬。孟子此語雖稍粗,然古人正救其惡,與「陳善閉邪」,「責難於君」,也只管畏敬不得。
- ↑ <주자어류> 권16. 又問:「『敖惰』二字,恐非好事。」曰:「此如明鑑之懸,妍者自妍,醜者自醜,隨所來而應之。不成醜者至前,須要換作妍者!又敖惰是輕,賤惡是重。既得賤惡,如何卻不得敖惰?然聖人猶戒其僻,則又須點檢,不可有過當處。」
- ↑ <주자어류> 권16. 問:「如何修身卻專指待人而言?」曰:「修身以後,大概說向接物待人去,又與只說心處不同。要之,根本之理則一,但一節說闊,一節去。」
- ↑ 是 15. 則
- ↑ 예기, <喪服四制>, '門內之治,恩掩義;門外之治,義斷恩。資於事父以事君,而敬同,貴貴尊尊,義之大者也。故為君亦斬衰三年,以義制者也。'
- ↑ <주자어류> 권16. 大學所以有許多節次,正欲學者逐節用工。非如一無節之竹,使人才能格物,則便到平天下也。夫人蓋有意誠而心未正者,蓋於忿懥、恐懼等事,誠不可不隨事而排遣也。蓋有心正而身未修者,故於好惡之間,誠不可不隨人而節制也。至於齊家以下,皆是教人節節省察用功。故經序但言心正者必自誠意而來,修身者必自正心而來。非謂意既誠而心無事乎正,心既正而身無事乎修也。
- ↑ <논어> <양화> 21. 孺悲欲見孔子,孔子辭以疾。將命者出戶,取瑟而歌。使之聞之。
- ↑ <맹자> <공손추하> 11. 孟子去齊,宿於晝。有欲為王留行者,坐而言。不應,隱几而臥。客不悅曰:「弟子齊宿而後敢言,夫子臥而不聽,請勿復敢見矣。」曰:「坐!我明語子。昔者魯繆公無人乎子思之側,則不能安子思;泄柳、申詳,無人乎繆公之側,則不能安其身。子為長者慮,而不及子思,子絕長者乎?長者絕子乎?」
- ↑ <주자어류> 권16. 「心誠求之」者,求赤子之所欲也。於民,亦當求其有不能自達。此是推其慈幼之心以使眾也。
- ↑ <한어대사전> 感化.
- ↑ <주자어류> 권16. 問「治國在齊其家」。曰:「且只說動化為功,未說到推上。後章方全是說推。
- ↑ <예기정의> 정현 注: 戾之言利也。
- ↑ <주자어류> 권16. 因講「禮讓為國」,曰:「『一家仁,一國興仁;一家讓,一國興讓。』自家禮讓有以感之,故民亦如此興起。自家好爭利,卻責民間禮讓,如何得他應!
- ↑ <주자어류> 권16. 問:「九章本言治國,何以曰『堯舜率天下以仁而民從之』,都是說治天下之事也?至言『君子有諸己而後求諸人,無諸己而後非諸人』,又似說修身,如何?」曰:「聖人之言,簡暢周盡。修身是齊家之本,齊家是治國之本。如言『一家仁,一國興仁;一家讓,一國興讓』之類,自是相關,豈可截然不相入也!」
- ↑ <논어> <위령공> 14. 子曰:「躬自厚而薄責於人,則遠怨矣。」
- ↑ <논어> <안연> 21. 樊遲從遊於舞雩之下,曰:「敢問崇德、脩慝、辨惑。」子曰:「善哉問!先事後得,非崇德與?攻其惡,無攻人之惡,非脩慝與?一朝之忿,忘其身,以及其親,非惑與?」
- ↑ <주자어류> 권18. 或問:「先吏部說:『有諸己而後求諸人,無諸己而後非諸人。』」曰:「這是說尋常人,若自家有諸己,又何必求諸人;無諸己,又何必非諸人。如孔子說『躬自厚而薄責於人』,『攻其惡,毋攻人之惡』。至於大學之說,是有天下國家者,勢不可以不責他。然又須自家有諸己,然後可以求人之善;無諸己,然後可以非人之惡。」
- ↑ <주자어류> 권16. 問:「齊家、治國之道,斷然『是父子兄弟足法,而後人法之』。然堯舜不能化其子,而周公則上見疑於君,下不能和其兄弟,是如何?」曰:「聖人是論其常,堯舜是處其變。看他『烝烝乂,不格姦』,至於『瞽瞍底豫』,便是他有以處那變處。且如他當時被那兒子恁地,他處得好,不將天下與兒子,卻傳與賢,便是他處得那兒子好。若堯當時把天下與丹朱,舜把天下與商均,則天下如何解安!他那兒子如何解寧貼!如周公被管蔡恁地,他若不去致辟于商,則周如何不擾亂!他後來盡死做這一著時,也是不得已著恁地。但是而今且去理會常倫。而今如何便解有箇父如瞽瞍,有箇兄弟如管蔡。未論到那變處。」
- ↑ <맹자> <고자상> 6. 仁義禮智,非由外鑠我也,我固有之也,弗思耳矣。【朱注】鑠,以火銷金之名,自外以至內也。
- ↑ <이정유서> 02上-26 今夫赤子未能言, 其志意嗜欲人所未知, 其母必不能知之, 然不至誤認其意者, 何也? 誠心愛敬而已. 若使愛敬其民如其赤子, 何錯繆之有? 故心誠求之, 雖不中, 不遠矣.
- ↑ <서경> <이훈> 爾惟德罔小,萬邦惟慶;爾惟不德罔大,墜厥宗。
- ↑ <한어대사전> 12. 通"形".
- ↑ <한어대사전> 隨隨便便.(아무 생각 없이, 멋대로, 좋을대로)
- ↑ <한어대사전> 1. 苟安.(안일하다)
- ↑ <중용장구> 13장. 故君子以人治人,改而止。
- ↑ <맹자> <진심상> 47. 不能三年之喪,而緦小功之察;放飯流歠,而問無齒決,是之謂不知務。」
- ↑ <후한서> <申屠剛鮑永郅惲列傳> 及郭皇后廢,惲乃言於帝曰:「臣聞夫婦之好,父不能得之於子,況臣能得之於君乎?是臣所不敢言。雖然,願陛下念其可否之計,無令天下有議社稷而已。」帝曰:「惲善恕己量主,知我必不有所左右而輕天下也。」; <자치통감> 권43. 郭后寵衰,數懷怨懟,上怒之。冬,十月,辛巳,廢皇后郭氏,立貴人陰氏為皇后。詔曰:「異常之事,非國休福,不得上壽稱慶。」郅惲言於帝曰:「臣聞夫婦之好,父不能得之於子,況臣能得之於君乎!賢曰: "得猶制御也. 司馬遷曰: '妃匹之愛, 君不能得之臣, 父不能得之子, 况卑下乎?'"是臣所不敢言。雖然,願陛下念其可否之計,無令天下有議社稷而已。」帝曰:「惲善恕己量主,知我必不有所左右而輕天下也!」賢曰: "左右, 猶向背也, 言其齊等." 帝進郭后子右翊公輔為中山王,以常山郡益中山國,郭后為中山太后,其餘九國公皆為王。
- ↑ <정몽> <中正篇第八> 以責人之心責己則盡道,所謂「君子之道四,丘未能一焉」者也;以愛己之心愛人則盡仁,所謂「施諸己而不願,亦勿施於人」者也;以衆人望人則易從,所謂「以人治人改而止」者也;此君子所以責己責人愛人之三術也。
- ↑ <시경> <대아> <思齊> 刑于寡妻、至于兄弟、以御于家邦。
- ↑ <맹자장구>, 이루상 27. "孟子曰:「仁之實,事親是也;義之實,從兄是也。智之實,知斯二者弗去是也;禮之實,節文斯二者是也;樂之實,樂斯二者,樂則生矣;生則惡可已也,惡可已,則不知足之蹈之、手之舞之。」"
- ↑ <맹자> <양혜왕상> 7. 老吾老,以及人之老;幼吾幼,以及人之幼。天下可運於掌。
- ↑ <주자어류> 권16. 才卿問:「『上老老而民興孝』,恐便是連那老眾人之老說?」曰:「不然。此老老、長長、恤孤方是就自家身上切近處說,所謂家齊也。民興孝、興弟、不倍此方是就民之感發興起處,說治國而國治之事也。緣為上行下效,捷於影響,可以見人心之所同者如此。『是以君子必有絜矩之道也』,此一句方是引起絜矩事。下面方解說絜矩,而結之云:『此之謂絜矩之道。』
- ↑ <주자어류> 권16. 絜矩之說,不在前數章,卻在治國、平天下之後。到這裏,也是節次成了,方用得。
- ↑ <주자어류> 권16. 陶安國問:「絜矩之道,是廣其仁之用否?」曰:「此乃求仁工夫,此處正要著力。若仁者,則是舉而措之,不待絜矩,而自無不平者矣。」銖曰:「仁者,則『己欲立而立人,己欲達而達人』,不待推矣。若絜矩,正恕者之事也。」先生頷之。
- ↑ <맹자> <등문공상> 3. 使老稚轉乎溝壑,惡在其為民父母也?; <양혜왕하> 12. 孟子對曰:「凶年饑歲,君之民老弱轉乎溝壑,壯者散而之四方者,幾千人矣;而君之倉廩實,府庫充,有司莫以告,是上慢而殘下也。
- ↑ <주자어류> 권16. 問絜矩。曰:「只把『上下』、『前後』、『左右』等句看,便見。絜,度也。不是真把那矩去量度,只是自家心裏暗度那箇長那箇短。所謂度長絜大,上下前後左右,都只一樣。心無彼己之異,只是將那頭折轉來比這頭。在我之上者使我如此,而我惡之,則知在我下者心亦似我如此,故更不將所責上底人之心來待下人。如此,則自家在中央,上面也占許多地步,下面也占許多地步,便均平正方。若將所責上底人之心來待下,便上面長,下面短,不方了。下之事我如此,而我惡之,則知在我之上者心亦似我如此。若將所責下底人之心更去事上,便又下面長,上面短了。左右前後皆然。待前底心,便折轉來待後;待左底心,便折轉來待右,如此便方。每事皆如此,則無所不平矣。」
- ↑ 사고전서본 <사서대전>에는 '便是'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출처로 추정되는 <주자어류> 원문이나 학민본에는 '便見'으로 되어있다.
- ↑ <맹자> <고자하> 11. 白圭曰:「丹之治水也愈於禹。」孟子曰:「子過矣。禹之治水,水之道也。是故禹以四海為壑,今吾子以鄰國為壑。
- ↑ <주자어류> 원문에 의거해 번역했다. <주자어류> 권16 「平天下,謂均平也。『所惡於上,毋以使下;所惡於下,毋以事上。』此與中庸所謂『所求乎臣,以事君未能』者同意。但中庸是言其所好者,此言其所惡者也。」問:「前後左右何指?」曰:「譬如交代官相似。前官之待我者既不善,吾毋以前官所以待我者待後官也。左右,如東鄰西鄰。以鄰國為壑,是所惡於左而以交於右也。俗語所謂『將心比心』,如此,則各得其平矣。」
- ↑ <주자어류> 권16 問絜矩。曰:「只把『上下』、『前後』、『左右』等句看,便見。
- ↑ <논어> <옹야> 28. 夫仁者,己欲立而立人,己欲達而達人。
- ↑ <중용장구> 13장. 君子之道四,丘未能一焉:所求乎子,以事父未能也;
- ↑ <주자어류> 권16. 又曰:「『己欲立而立人,己欲達而達人』,是兩摺說,只以己對人而言。若絜矩,上之人所以待己,己又所以待人,是三摺說,如中庸『所求乎子以事父未能也,所求乎臣以事君未能也』,一類意。」; 같은 책, 같은 곳. 李丈問:「盡得絜矩,是仁之道,恕之道?」曰:「未可說到那裏。且理會絜矩是如何。」問:「此是『我不欲人之加諸我,吾亦欲無加諸人』意否?」曰:「此是兩人,須把三人看,便見。人莫不有在我之上者,莫不有在我之下者。如親在我之上,子孫在我之下。我欲子孫孝於我,而我卻不能孝於親;我欲親慈於我,而我卻不能慈於子孫,便是一畔長,一畔短,不是絜矩。」
- ↑ <주자어류> 권16. 問:「論上下四旁,長短廣狹,彼此如一,而無不方。在矩,則可以如此。在人則有天子諸侯大夫士庶人之分,何以使之均平?」曰:「非是言上下之分欲使之均平。蓋事親事長,當使之均平,上下皆得行。上之人得事其親,下之人也得以事其親;上之人得長其長,下之人也得以事其長。」
- ↑ <시경집전> 又言殷未失天下之時,其德足以配乎上帝矣。
- ↑ <대학장구> 전10장. 有國者不可以不慎,辟則為天下僇矣。
- ↑ <서경> <상서> <중외지고> 初征自葛,東征,西夷怨;南征,北狄怨,曰:『奚獨後予?』
- ↑ <주자어류> 권16. 或問:「絜矩之義,如何只說財利?」曰:「必竟人為這箇較多。所以生養人者,所以殘害人者,亦只是這箇。且如今官司皆不是絜矩。自家要賣酒,便教人不得賣酒;自家要榷鹽,便教人不得賣鹽。但事勢相迫,行之已久,人不為怪,其實理不如此。」
- ↑ <주자어류> 권16. 道夫云:「古注,絜音戶結反。云結也。」曰:「作『結』字解,亦自得。蓋荀子莊子注云:『絜,圍束也。』是將一物圍束以為之則也。」又曰:「某十二三歲時,見范丈所言如此。他甚自喜,以為先儒所未嘗到也。」
- ↑ <예기정의> 絜,猶結也,挈也。矩,法也。君子有挈法之道,謂當執而行之,動作不失之。
- ↑ <한어대사전> 3. 猶意義.
- ↑ <한어대사전> 2. 胡地在北, 越在南, 比喩疎遠隔絶.
- ↑ <사기> <혹리열전> 周陽由者,其父趙兼以淮南王舅父侯周陽,故因姓周陽氏。由以宗家任為郎,事孝文及景帝。景帝時,由為郡守。武帝即位,吏治尚循謹甚,然由居二千石中,最為暴酷驕恣。所愛者,撓法活之;所憎者,曲法誅滅之。所居郡,必夷其豪。為守,視都尉如令。為都尉,必陵太守,奪之治。與汲黯俱為忮,司馬安之文惡,俱在二千石列,同車未嘗敢均茵伏。由后為河東都尉,時與其守勝屠公爭權,相告言罪。勝屠公當抵罪,義不受刑,自殺,而由棄市。
- ↑ <삼국지> <王朗傳子名肅> 王肅亮直多聞,能析薪哉!劉寔以為肅方於事上而好下佞己,此一反也。性嗜榮貴而不求苟合,此二反也。吝惜財物而治身不穢,此三反也。
- ↑ <논어> <위령공> 23. 子貢問曰:「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子曰:「其恕乎!己所不欲,勿施於人。」
- ↑ <이정외서> 12-22 或問: "明道先生如何斯可謂之恕?" 先生曰: "充擴得去則爲恕." "心如何是充擴得去底氣象?" 曰: "天地變化, 草木蕃." "充擴不去時, 如何?" 曰: "天地閉, 賢人隱."
- ↑ <한어대사전> 2. 庭院.
- ↑ <한어대사전> 1. 半步, 跨一脚. ; 3. 指極近的距離.
- ↑ <한어대사전> 1. 參星和商星. 參星在西, 商星在東, 此出彼沒, 永不上見. ; 2. 喩彼此對立, 不和睦.
- ↑ <이정외서> 11-6 或問忠恕之別, 曰: "猶形影也. 無忠則不能爲恕矣."
- ↑ <주역> <계사하> 1. 天地之大德曰生,聖人之大寶曰位。何以守位曰仁,何以聚人曰財。理財正辭,禁民為非曰義。
- ↑ <국어> <周語上> 夫王人者,將導利而布之上下者也,使神人百物無不得其極,猶曰怵惕,懼怨之來也。
- ↑ <대학장구> 전10장. 詩云:「殷之未喪師,克配上帝;儀監于殷,峻命不易。」道得眾則得國,失眾則失國。
- ↑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18년 조에 “순 임금이 요 임금의 신하가 되어서는 사문을 활짝 열어 손님을 맞아들이고, 사흉의 무리인 혼돈, 궁기, 도올, 도철을 유배하여 사방 변두리로 내쳐서 도깨비들의 재해를 막게 하였다.〔舜臣堯, 賓于四門, 流四凶族渾敦、窮奇、檮杌、饕餮, 投諸四裔, 以禦魑魅.〕”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 ↑ <논어> <요왈> 2. 子張問於孔子曰:「何如斯可以從政矣?」子曰:「尊五美,屏四惡,斯可以從政矣。」
- ↑ <대학장구> 전10장. 詩云:「樂只君子,民之父母。」民之所好好之,民之所惡惡之,此之謂民之父母。
- ↑ <대학장구> 전10장. 有德此有人,有人此有土,有土此有財,有財此有用。
- ↑ <서경> <주서> <홍범> 三、八政:一曰食,二曰貨,三曰祀,四曰司空,五曰司徒,六曰司寇,七曰賓,八曰師。
- ↑ <논어> <안연> 7. 子貢問政。子曰:「足食。足兵。民信之矣。」
- ↑ <대학장구> 전10장. 呂氏曰:「國無遊民,則生者眾矣;朝無幸位,則食者寡矣;不奪農時,則為之疾矣;量入為出,則用之舒矣。
- ↑ <논어> <안연> 9. 哀公問於有若曰:「年饑,用不足,如之何?」有若對曰:「盍徹乎?」曰:「二,吾猶不足,如之何其徹也?」對曰:「百姓足,君孰與不足?百姓不足,君孰與足?」
- ↑ <맹자> <진심하> 12. 孟子曰:「不信仁賢,則國空虛。無禮義,則上下亂。無政事,則財用不足。」
- ↑ <한서> <장이진여전> 至諸縣,說其豪桀曰:「秦為亂政虐刑,殘滅天下,北為長城之役,南有五領之戍,外內騷動,百姓罷敝,頭會箕斂以供軍費,財匱力盡,重以苛法,使天下父子不相聊。
- ↑ <사기> <은본기> 愛妲己,妲己之言是從。於是使師涓作新淫聲,北里之舞,靡靡之樂。厚賦稅以實鹿臺之錢,而盈鉅橋之粟。益收狗馬奇物,充仞宮室。益廣沙丘苑臺,多取野獸蜚鳥置其中。慢於鬼神。大聚樂戲於沙丘,以酒為池,縣肉為林,使男女裸相逐其閒,為長夜之飲。百姓怨望而諸侯有畔者,…… 周武王於是遂率諸侯伐紂。紂亦發兵距之牧野。甲子日,紂兵敗。紂走入,登鹿臺,衣其寶玉衣,赴火而死。周武王遂斬紂頭,縣之白旗。
- ↑ <상서> <주서> <무성> 乃反商政,政由舊。釋箕子囚,封比干墓,式商容閭。散鹿臺之財,發鉅橋之粟,大賚于四海,而萬姓悅服。
- ↑ <한어대사전> 3. 布置, 安排.
- ↑ <신당서> 권157 <열전제82 陸贄> 始,帝播遷,府藏委棄,衛兵無褚衣。至是,天下貢奉稍至,乃於行在夾廡署瓊林、大盈二庫,別藏貢物。贄諫,以為:「瓊林、大盈於古無傳。舊老皆言:開元時貴臣飾巧以求媚,建言郡邑賦稅,當委有司以制經用,其貢獻悉歸天子私有之。蕩心侈欲,亦終以餌寇。今師旅方殷,瘡痛呻吟之聲未息,遽以珍貢私別庫,恐群下有所觖望,請悉出以賜有功。令後納貢必歸之有司,先給軍賞,瑰怪纖麗無得以供。是乃散小儲成大儲,捐小寶固大寶也。」帝悟,即撤其署。
- ↑ <사기> <순리열전> 公儀休者,魯博士也。以高弟為魯相。奉法循理,無所變更,百官自正。使食祿者不得與下民爭利,受大者不得取小。客有遺相魚者,相不受。客曰:「聞君嗜魚,遺君魚,何故不受也?」相曰:「以嗜魚,故不受也。今為相,能自給魚;今受魚而免,誰復給我魚者?吾故不受也。」食茹而美,拔其園葵而棄之。見其家織布好,而疾出其家婦,燔其機,云「欲令農士工女安所讎其貨乎」?
- ↑ <한서> <동중서전> 夫天亦有所分予,予之齒者去其角,傅其翼者兩其足,是所受大者不得取小也。古之所予祿者,不食於力,不動於末,是亦受大者不得取小,與天同意者也。夫已受大,又取小,天不能足,而況人乎!此民之所以囂囂苦不足也。
- ↑ <공자가어> <안회> 顏回問於孔子曰:「臧文仲、武仲孰賢?」孔子曰:「武仲賢哉!」顏回曰:「武仲世稱聖人,而身不免於罪,是智不足稱也;好言兵討,而挫銳於邾,是智不足名也。夫文仲、其身雖歿,而言不朽,惡有未賢?」孔子曰:「身歿言立,所以為文仲也。然猶有不仁者三,不智者三,是則不及武仲也。」回曰:「可得聞乎?」孔子曰:「下展禽,置六關,妾織蒲,三不仁。設虛器,縱逆祀,祠海鳥,三不智。
- ↑ <논어> <선진> 16. 季氏富於周公,而求也為之聚斂而附益之。子曰:「非吾徒也。小子鳴鼓而攻之,可也。」
- ↑ <한어대사전> 聚斂; 搜括. 亦指搜括民財之人. <詩·大雅·蕩>曾是彊禦、曾是掊克。
- ↑ <서산문집>에는 '懵'으로 되어있다.
- ↑ <한어대사전> 1. 百姓; 庶民.
- ↑ <한어대사전> 加倍償還, 借一還二.
- ↑ <맹자> <고자하> 9. 孟子曰:「今之事君者曰:『我能為君辟土地,充府庫。』今之所謂良臣,古之所謂民賊也。
- ↑ <서산문집> 권5. 夫晏以一有司粗知財用之本末, 猶能致利若此, 况爲天下者誠能究<大學>生財之義, 一意務徳以養民, 其效可勝計㢤? 臣觀近世所謂善理財者. 何其懵乎此也? 元元已病而科歛日興, 不知皮將盡而毛亡所傳也. 出新巧以籠愚民. 苟邀倍稱之入, 不知朝四莫三之亡益也. 孟子曰: "'我能爲君實倉廩充府庫.' 今之所謂良臣, 古之所謂民賊也."(劉晏은 일개 유사로써 재용의 본말을 거칠게 알았는데도 능히 이익을 이룬 것이 이와 같았으니, 하물며 천하를 다스리는 자가 진실로 <대학> '生財'의 뜻을 궁구하여 한뜻으로 덕에 힘써 백성을 기를 수 있다면, 그 공효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 ↑ <맹자> <양혜왕상> 1. 孟子對曰:「王何必曰利?亦有仁義而已矣。王曰『何以利吾國』?大夫曰『何以利吾家』?士庶人曰『何以利吾身』?上下交征利而國危矣。萬乘之國弒其君者,必千乘之家;千乘之國弒其君者,必百乘之家。萬取千焉,千取百焉,不為不多矣。苟為後義而先利,不奪不饜。
- ↑ <이정유서> 16-03 趙景平問:「『子罕言利與命與仁』, 所謂利者, 何利?」 曰:「不獨財利之利, 凡有利心, 便不可. 如作一事, 須尋自家穩便處, 皆利心也. 聖人以義爲利, 義安處便爲利. 如釋氏之學, 皆本於利, 故便不是.」
- ↑ <주역> 건괘 <문언> 「元」者,善之長也;「亨」者,嘉之會也;「利」者,義之和也;「貞」者,事之幹也。
- ↑ <송명신언행록> 후집권7 公曰: "衮辭禄猶賢於持禄固位者. 國用不足真急務. 安石言非是." 安石曰: "不足者, 以未得善理財者也." 公曰: "善理財者, 不過頭㑹箕歛以盡民財, 民窮為盗, 非國之福." 安石曰: "不然. 善理財者, 不加賦而上用足." 公曰: "天下安有此理? 天地所生財貨百物, 止有此數, 不在民則在官. 譬如雨澤, 夏澇則秋旱. '不加賦而上用足', 不過設法隂奪民利, 其害甚於加賦." ; <송사> 권336 <열전제95 사마광> 執政以河朔旱傷,國用不足,乞南郊勿賜金帛。詔學士議,光與王珪、王安石同見,光曰:「救災節用,宜自貴近始,可聽也。」安石曰:「常袞辭堂饌,時以爲袞自知不能,當辭位不當辭祿。且國用不足,非當世急務,所以不足者,以未得善理財者故也。」光曰:「善理財者,不過頭會箕斂爾。」安石曰:「不然,善理財者,不加賦而國用足。」光曰:「天下安有此理?天地所生財貨百物,不在民,則在官,彼設法奪民,其害乃甚於加賦。此蓋桑羊欺武帝之言,太史公書之以見其不明耳。」爭議不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