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고려조선 화문석기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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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ckable button|[[강화도_화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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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왕골/참골/용수초/부들 |왕골/골풀자리]]가 사용되었는지부터 강화도 화문석이 처음 등장한 기록된 자료 등을 통하여 강화 화문석의 역사와 활용을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왕골/참골/용수초/부들 |왕골/골풀자리]]가 사용되었는지부터 강화도 화문석이 처음 등장한 기록된 자료 등을 통하여 강화 화문석의 역사와 활용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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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해설'''==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왕골]]은 신라시대 휘장으로 처음 등장하며, 자리는 경덕왕때 이전의 기구였던 석전을 개칭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자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왕실 뿐 아니라 해외 교역품 및 공물로 자리를 활용한 기록이 있는데, 고려도경에서 구체적인 화문석의 모양이 언급되며, 해동역사 원씨액정기에서는 당인의 만화석이라는 구체적인 지명까지 등장하여 강화도 화문석의 오랜 역사를 알 수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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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왕골]]은 신라시대 휘장으로 처음 등장하며, 자리는 경덕왕때 이전의 기구였던 석전을 개칭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자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왕실 뿐 아니라 해외 교역품 및 공물로 자리를 활용한 기록이 있는데, 고려도경에서 구체적인 화문석의 모양이 언급되어 있다.<br/>
화문석은 처음엔 왕실에서 사용하고 중국, 일본 등 교역품, 선물, 공물 등에 활용하다가 후에는 양반가에서 주로 사용하고 후에는 전국 부녀자들 사이에 관심을 갖는 물품으로 성장하였고, 그 중 강화 화문석은 기록 상에 꾸준히 등장하면서 당시의 위상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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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기록이 해동역사 원씨액정기에서 원나라 순제(재위 : 1333(37)~1367(70)) 시기 고려에 있는 섬 이름인, 당인의 만화석을 깔았다는 내용인데, 우리나라 섬 중에서 자리를 생산하던 곳은 현재 강화 혹은 교동이여서 당인은 이 지역으로 여겨진다(과거에 유명한 화문석 자리로 거론되었던 지명은 안동, 보성, 연안, 백천 등으로 모두 내륙 지방이다).''' 해동역사에 나온 당인이라는 고려의 섬이 강화, 교동인지의 여부는 추후에 구체적으로 다시 논의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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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문석은 처음엔 왕실에서 사용하고 중국, 일본 등 교역품, 선물, 공물 등에 활용하다가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는 양반가에서 주로 사용하고 후기로 가면 전국 부녀자들 사이에 관심을 갖는 물품으로 성장하였고, 그 중 강화 화문석은 기록 상에 꾸준히 등장하면서 당시의 위상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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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頭品(오두품) : 5두품은,  
 
  五頭品(오두품) : 5두품은,  
 
  前後幰只用竹簾莞席(전후헌지용죽렴완석)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대발과 왕골 자리만을 사용하되,<ref> 三國史記 第 三十三卷(삼국사기 제 33권) 雜志 第 二(잡지 제 02) https://hwalove.tistory.com/entry/%E4%B8%89%E5%9C%8B%E5%8F%B2%E8%A8%98-%E7%AC%AC-%E4%B8%89%E5%8D%81%E4%B8%89%E5%8D%B7%EC%82%BC%EA%B5%AD%EC%82%AC%EA%B8%B0-%EC%A0%9C-33%EA%B6%8C122%EF%A4%82%E9%A8%8E%EA%B1%B0%EA%B8%B0 </ref>   
 
  前後幰只用竹簾莞席(전후헌지용죽렴완석)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대발과 왕골 자리만을 사용하되,<ref> 三國史記 第 三十三卷(삼국사기 제 33권) 雜志 第 二(잡지 제 02) https://hwalove.tistory.com/entry/%E4%B8%89%E5%9C%8B%E5%8F%B2%E8%A8%98-%E7%AC%AC-%E4%B8%89%E5%8D%81%E4%B8%89%E5%8D%B7%EC%82%BC%EA%B5%AD%EC%82%AC%EA%B8%B0-%EC%A0%9C-33%EA%B6%8C122%EF%A4%82%E9%A8%8E%EA%B1%B0%EA%B8%B0 </ref>   
위의 내용을 보면, 수레를 휘장으로 치장할 때 6두품과 5두품은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자료에 나오는 왕골에 대한 처음 언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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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보면, 수레를 휘장으로 치장할 때 6두품과 5두품은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자료에 나오는 왕골에 대한 처음 언급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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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완莞은 왕골을 가리킨다. 
  
  
===='''삼국사기  제39 잡지雜志 제8 직관(職官) 중/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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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39 잡지雜志 제8 직관(職官) 중/석전 三國史記 卷 第三十九 雜志 第八 職官 中 席典 '''====
  석전(席典) (118) 은 경덕왕이 봉좌국(奉座局)(119) 으로 고쳤으나 뒤에 옛 이름대로 하였다. 간(干) 은 1명이었다. 사(史) 는 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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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德王改爲奉座局 後復故 干一人 史二人
석전(席典)이라는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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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전(席典)은 경덕왕이 봉좌국(奉座局)으로 고쳤으나 뒤에 옛 이름대로 하였다. 간(干) 은 1명이었다. 사(史) 는 2명이었다.
 
직관조(職官條)는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청의 이름에서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ref>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151&content_id=rp070201510001&search_left_menu=3</ref> <br/>
 
직관조(職官條)는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청의 이름에서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ref>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151&content_id=rp070201510001&search_left_menu=3</ref> <br/>
 
신라 경덕왕은 신라의 제35대 왕(재위 742∼765)으로 이때 석전을 봉좌국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석전이 이미 경덕왕 이전에 있던 관청이었고, 자리의 생산을 담당하던 관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자리가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br/>
 
신라 경덕왕은 신라의 제35대 왕(재위 742∼765)으로 이때 석전을 봉좌국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석전이 이미 경덕왕 이전에 있던 관청이었고, 자리의 생산을 담당하던 관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자리가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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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려'''===
===='''해동역사'''====
 
고려 목종 11년(1008)에 요나라에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용수초]] 31석을 보냈다
 
요나라 통화 26년인 무신 5월에 사신을 보내어 문화무공 양 궁전에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용수초]] 31석을 전물하였다
 
고려 초에 해동역사는 요사를 인용하여 위와 같이 기록하였다. <ref> 등메장 최헌열 http://www.oneclick.or.kr/bbs/boardView.do?id=83&bIdx=80930&page=1&menuId=143&bc=0</ref> <br/> <br/>[[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용수초]]는 골풀류의 하나로 석(席) 혹은 화문석(花紋席)을 제작하는 식물이다. 현재 화문석을 제작하는 [[왕골/참골/용수초/부들 |왕골]]과 혼동하여 사용되기도 하는데, 기록된 많은 자료에 의하면, 제작 후에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왕골]] 화문석보다 훨씬 부드러운 것으로 보여져 다른 식물로 보여진다. 마찬가지로 이때의 용수초석이 돗자리인 석(席)이지 무늬가 있는 화문석(花紋席)인지는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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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35권 / 교빙지(交聘志) 3 조공(朝貢) 3 고려(高麗)'''====
  
===='''고려사 권 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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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1008, 목종11) -무신- 5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문화전(文化殿)과 무공전(武功殿)에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용수초지석]](龍鬚草地席)을 바쳤다. 《요사》<br/>
007 세가 07 / <문종 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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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20190815_170128.png|100px]]
기해(己亥)에 제(制)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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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先朝)께서 쓰시던 의상(倚床)과 답두(踏斗) 등은 모두 금과 은으로 장식한 못을 썼고 또 금은 실로 짠 계금(錦)으로 이불과 요[茵褥]를 만들었으니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동철(銅鐵)과 능견(綾絹)으로 바꾸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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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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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에 해동역사는 요사를 인용하여 위와 같이 기록하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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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완莞과 다르게 고려시대에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용수초]]가 언급된다.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용수초]]는 골풀류의 하나로 석(席) 혹은 화문석(花紋席)을 제작하는 식물이다. 현재 화문석을 제작하는 [[왕골/참골/용수초/부들 |왕골]]과 혼동하여 사용되기도 하는데, 기록된 많은 자료에 의하면, 제작 후에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왕골]] 화문석보다 훨씬 부드러운 것으로 보여져 다른 식물로 보여진다. 마찬가지로 이때의 용수초석이 돗자리인 석(席)이지 무늬가 있는 화문석(花紋席)인지는 확실치 않다.   
  
고려 문종이 즉위하여 영을 내릴 인욕(茵褥 : 왕골이나 부들 등(等)으로 짠 자리)는 금, 은선으로 짜서 계금을 사용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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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6권 - 세가 제6 정종 4년(1038) 7월 '''====
  이는 마땅히 동철(銅鐵)과 능견(綾絹)으로 바꾸어야겠노라. <ref>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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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甲寅 金元冲還自契丹詔曰 省所上表夏季起居事具悉卿挺生方略善撫世封得愛戴於東韓盡傾虔於北闕屬歊蒸之在候馳章奏以問安嘉矚之懷每興增切 <br/>
고려 문종은 제11대 왕(재위 1046∼1083)으로 이때에도 사용된 [[왕골/참골/용수초/부들 | 왕골]]자리가 돗자리인 석(席)이지 무늬가 있는 화문석(花紋席)인지는 확실치 않다. 
+
又詔曰 省所上表謝恩令朝貢幷進捧金吸甁銀藥甁幞頭紗紵布貢平布腦原茶大紙細墨'''龍鬚▩席等'''事具悉<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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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甲寅)에 김원충(金元)이 거란(契丹)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詔)하기를, “올린 표문(表文)을 살피고 여름철 문안(問安)의 일을 자세히 알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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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卿)은 방략(方略)에 뛰어나 나라[世封]를 잘 진무(鎭撫)하여 동한(東韓)에서 애대(愛戴)함을 받고 북궐(北闕)에 정성(精誠)을 다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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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절후(節候)에 글월을 보내어 문안(問安)하니 가상히 여기는 마음 더욱 간절하도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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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조(詔)하기를, “올린 표문(表文)을 보고 조공(朝貢)케 한 것을 사은(謝恩)한 것과 아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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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흡병(金吸甁)·은약병(銀藥甁)·복두(頭) 사저포(紗紵布)·공평포(貢平布)·뇌원다(腦原茶)·대지(大紙)·세묵(細墨)·<용수등석(龍鬚簦席)> 등을 올린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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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알았노라.
  
006 세가 06 / 정종 4년(1038)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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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에 조공으로 올린 물품 중 龍鬚▩席等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 또한 용수자리를 가리킨 것으로 보이며, 무늬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br/>
§ 가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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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20190815_173230.png|300px]]
  
○ 신축(辛丑)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 무신(戊申)에 상서형부(尙書刑部)가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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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7권 - 세가 제7 문종 1 '''====
“경외(京外)의 참형(斬刑)과 교형(絞刑) 두 죄를 지은 죄인이 103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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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 制曰 先朝所御倚床踏斗皆以金銀裝釘又以金銀線織成罽錦爲'''茵褥'''宜令有司代以銅鐵綾絹.
라고 하니 제(制)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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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己亥)에 제(制)하기를,
“참죄(斬罪)는 내려 무인도에 장배(杖配)하고 교죄(絞罪)는 유인도(有人島)에 장배(杖配)하라.”
+
“선조(先朝)께서 쓰시던 의상(倚床)과 답두(踏斗) 등은 모두 금과 은으로 장식한 못을 썼고
고 하였다.
+
또 금은 실로 짠 계금()으로 이불과 요[茵褥]를 만들었으니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동철(銅鐵)과 능견(綾絹)으로 바꾸도록 하라.”고 하였다.
 
+
○ 갑인(甲寅)에 김원충(金元)이 거란(契丹)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詔)하기를,
+
“올린 표문(表文)을 살피고 여름철 문안(問安)의 일을 자세히 알았노라 경(卿)은 방략(方略)에 뛰어나 나라[世封]를 잘 진무(鎭撫)하여 동한(東韓)에서 애대(愛戴)함을 받고 북궐(北闕)에 정성(精誠)을 다하였도다. 무더운 절후(節候)에 글월을 보내어 문안(問安)하니 가상히 여기는 마음 더욱 간절하도다.”
+
라고 하였다. 또 조(詔)하기를,
+
“올린 표문(表文)을 보고 조공(朝貢)케 한 것을 사은(謝恩)한 것과 아울러 금흡병(金吸甁)·은약병(銀藥甁)·복두(頭) 사저포(紗紵布)·공평포(貢平布)·뇌원다(腦原茶)·대지(大紙)·세묵(細墨)·<용수등석(龍鬚簦席)> 등을 올린 일도 자세히 알았노라. 경(卿)은 국토(國土)를 권사(權司)하여 조정(朝廷)을 흠봉(欽奉)하고 이번에는 사신을 보내어 멀리 충성을 베풀어 여러 대에 걸쳐 공납(貢納)을 바쳐온 절의를 준수하고 근년에 막히게 된 이유를 주달(奏達)하여 거듭 조공(朝貢)에 힘쓸 것이며 길이 번병(藩屛)이 되기를 원하였도다. 그 공순(恭順)함을 보아 윤종(允從)함을 표명하며, 번거로이 감사의 글월을 보내고 공물(貢物)의 상자까지 보낸 데 대하여 이것을 고열(顧閱)할 때에 부끄럽고 경탄스러운 마음이 진실로 깊도다.”
+
라고 하였다. 또 조(詔)하기를,
+
“아뢴 바를 살펴보고 이미 중희(重熙)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알았다. 경(卿)이 지난번 조공(朝貢)할 것을 바라매 곧 이를 받아들여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옴에 우리 연호(年號)를 서문(書文)에서 <이미> 사용하였음을 알고 그 사대(事大)하는 지성(至誠)을 보았도다. 성람(省覽)한 나머지 가탄(嘉歎)하여 마음에 잊혀지지 못하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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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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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은 제11대 왕(재위 1046∼1083)으로 강화화문석문화관에는 <고려 문종이 즉위하여 영을 내릴 인욕(茵褥 : 왕골이나 부들 등(等)으로 짠 자리)는 금, 은선으로 짜서 계금을 사용하나 이는 마땅히 동철(銅鐵)과 능견(綾絹)으로 바꾸어야겠노라.> <ref>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ref><br/> 를 언급하며 인욕을 왕골이나 부들 등으로 짜 자리라고 해석하여 이곳에 기록하였지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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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의 문맥상 금은 실로 짠 계금의 이불과 요로 보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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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제29, 2장 뒤쪽, 세가 29 충렬왕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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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29권 - 세가 제29 충렬왕 2 기묘 5년(1279) 3월'''====
029 世家 29 / 忠烈王 己卯 五年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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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 遣郎將殷洪淳 如元 獻'''花文大席'''
§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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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인일에 낭장 은홍순을 원나라에 보내어 화문대석을 바쳤다. <ref>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전용어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8929&cid=41826&categoryId=41826</ref>
029 세가 29 / 충렬왕 5년(1279)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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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庚戌, 親醮于康安殿. 撤竹坂泂人家三百餘戶, 以起新宮, 徒役凡四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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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 遣郞將殷弘淳, 如元, 獻花文大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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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甲寅 遣郎將殷洪淳 如元 獻花文大席 갑인일에 낭장 은홍순을 원나라에 보내어 화문대석을 바쳤다. <ref>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전용어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8929&cid=41826&categoryId=4182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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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은 제25대(재위:1274~1308) 왕으로 대략 1100년 이후로 지속적으로 화문석이 언급됨을 알 수 있다.  
 
고려 충렬왕은 제25대(재위:1274~1308) 왕으로 대략 1100년 이후로 지속적으로 화문석이 언급됨을 알 수 있다.  
 
   
 
   
  
037 세가 37 / 충정왕 1년(1349)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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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37권 - 세가 제37 충정왕 1년(1349) 3월'''====
갑진(甲辰)에 상호군(上護軍) 조득규(趙得珪)를 원나라에 보내어 용석(龍席) 및 죽점()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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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 遣上護軍趙得珪如元獻'''龍席'''及竹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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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甲辰)에 상호군(上護軍) 조득규(趙得珪)를 원나라에 보내어 용석(龍席) 및 죽점(竹簟-대자리)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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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용석龍席이 용수석을 가리키는지 또는 용무늬 자리인지 확실치는 않다.  
  
  
137 열전 50 / 신창 1년(1389)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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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26권 / 물산지(物産志) 1 초류草類 만화석초滿花席草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 인용'''====
○ 임인(壬寅)에 창()의 생일이므로 2죄(二罪) 이하를 사면하였다. 비로소 의창(義倉)을 두었다. 창()이 유구국(琉球國)의 바친 바 소목(蘇木)·호초(胡椒)를 장차 궁중(宮中)에 쓰고자 하니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유백유(柳伯濡)가 간(諫)하여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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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순제(順帝)가 영영(英英)을 위하여 채방관(采芳館)을 경화도(瓊華島) 안에다 짓고는 당인(唐人)의 만화석(滿花席)을 깔았다.
“옛적 충숙왕(忠肅王)이 젓갈 항아리[瓮]를 궁중(宮中)에 두매 사관(史官)이 이것을 써서 전하여 웃음거리가 되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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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인(唐人)은 고려에 있는 섬 이름으로, 만화초(滿花草)가 나는데, 성질이 부드러워서 꺾어도 손상되지 않으며, 광택이 있어 아주 아름답다.  
고 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정지(鄭地)로 양광 전라 경상도 도절제체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節制體察使)를 삼아 초토 영전 선성사(招討營田繕城事)를 겸하여 총괄하게 하였다. 전객 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 부령(副令) 김인용(金仁用)을 보내어 유구국(琉球國)에 래빙에 보답하고 답서(答書)에 이르기를,
+
그 지방 사람들이 이것으로 짜서 방석을 만든다.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
“고려권서국사(高麗權署國事) 왕창(王昌)은 삼가 유구국(琉球國) 중산왕 전하(中山王殿下)에게 부서(復書)하노라. 우리 나라가 귀국(貴國)과 더불어 바다로 1만리(里)를 떨어져 일찍이 왕래(往來)하지 못하였으나 그윽히 방예(芳譽)를 듣고 경모(景慕)한지가 오래이더니 지금에 사신으로 글월을 보내고 좋은 선물을 부쳤으며 이로 인하여 본국(本國)의 피로(被虜)된 인구(人口)를 송환(送還)하니 기쁜 정(情)은 말로써 답할 수 없도다. 다만 보내온 사신(使臣)을 관(館)으로서 대접함을 능히 예대로 하지 못하여 진실로 유감으로 생각하여 이제 전객령(典客令)을 김윤후(金允厚) 등을 보내어 애오라지 비의(菲儀)를 치송(致送)하니 다행히 조량(照亮)하라. 온 글에[來書]에 이르기를, ‘납치된 인구(人口)를 내년에 모두 회향(回鄕)하도록 허락한다’하니 더욱 감희(感喜)가 더하거니와 청컨대 윤후(允厚) 등이 돌아올 때에 쇄송(刷送)하여 그 부모와 처자(妻子)로 하여금 완취(完聚)케 하면 행심(幸甚)일까 하노라.
+
조선의 만화석을 만드는 풀은 색이 누렇고 부드러워서 꺾어도 부러지지 않으며, 소주(蘇州)에서 생산되는 것보다 더 좋다.  
고 하였고 예물(禮物)로는 안자(鞍子) 2, 은모(銀)·시저(匙) 각(各) 2, 은잔배(銀盞盃) 각(各) 1, 흑마포(黑麻布) 20필(匹), 호피(虎皮) 2영(領), 표피(豹皮) 1영(領), 만화석(滿花席) 4장(張), 전(箭) 100매(枚), 화병(畵屛) 1폭(幅), 화족(畵簇) 1쌍(雙)이었다. 사재 부령(司宰副令) 문윤경(文允慶)이 부(父)의 첩(妾)을 증(烝)하고 또 관물(官物)을 훔치거늘 법사(法司)가 탄핵하여 아뢰니 문윤경(文允慶)과 첩(妾)을 목메어 죽어 이로써 거리에 조리돌렸다.
+
《조선부 주》 ○ 살펴보건대, 만화석초(滿花席草)는 바로 용수초(龍鬚草)로, 속명은 ‘장골’이다.
 +
고전DB 주석) 만화석, 즉 여러 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방석을 만드는 풀로, 골풀을 말한다. 골풀은 줄기가 원기둥형이고 1m 이상 자라는 풀로, 말린 줄기로 자리를 짠다. 등심초(燈心草), 석용추(石龍芻), 골속, 용수초(龍鬚草)라고도 한다.
  
 
 
 
 
===='''해동역사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
 
원나라 순제가 영영英英을 위하여 채방관采芳館을 경화도 안에다 짓고는 당인唐人의 만화석滿花席을 깔았다.
 
당인唐人은 고려에 있는 섬 이름으로 만화초滿花草가 나는데, 성질이 부드러워서 꺽어도 손상되지 않으며 광택이 있어 아주 아름답다.
 
이 지방 사람들은 이것을 짜서 방석으로 만든다. <ref>해동역사 제26권 물산지物産志 초류草類 https://citrain64.blog.me/100119606744</ref>
 
 
원(元)나라 순제는 15대 황제(재위 : 1333(37)~1367(70))으로 고려에서 공물 받은 만화석으로 궁궐을 장식하였다.  <br/>  
 
원(元)나라 순제는 15대 황제(재위 : 1333(37)~1367(70))으로 고려에서 공물 받은 만화석으로 궁궐을 장식하였다.  <br/>  
 
만화석은 화문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려에 만화초가 나는 섬인 당인唐人은 강화도로 보여지며, 석(席)은 물론 방석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br/>
 
만화석은 화문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려에 만화초가 나는 섬인 당인唐人은 강화도로 보여지며, 석(席)은 물론 방석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br/>
 
기존에는 막연히 등장하던 화문석에 이제 구체적인 지명까지 등장하며 [[강화도 화문석]]의 역사가 족히 1000년은 넘는 것으로 보여진다.     
 
기존에는 막연히 등장하던 화문석에 이제 구체적인 지명까지 등장하며 [[강화도 화문석]]의 역사가 족히 1000년은 넘는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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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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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화문석이란 명칭이 실록 세종 2년 경자(1420) 윤 1월 15일(갑신)에 언급을 시작으로 상당히 자주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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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문석이 전국 어느 지역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강화도(혹은 교동도)로 추정되는 지역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강화도는 현재는 인천에 속한 섬이지만, 과거에는 경기도에 속한 섬이어서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기술된 자료를 찾았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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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등메로 유명한 교동도는 태종 때 경기우도 도만호가 현경을 겸한 것으로 경기도 소속섬으로 보여진다. 교동도는 지금은 강화도에 부속점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교동절제사를 따로 언급할 만큼 전력적 요충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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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리는 고려시대에 이어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8678&cid=46622&categoryId=46622 장흥고]에서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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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1년 임신(1392) 7월 28일 문무백관관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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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興庫: 掌布匹、紙席等事。 使一, 從五品; 副使一, 從六品; 直長二, 從七品; 注簿二, 從八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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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고(長興庫)는 포필(布匹)ㆍ지석(紙席)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사(使) 1명 종5품이고, 부사(副使) 1명 종6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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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直長) 2명 종7품이고, 주부(注簿) 2명 종8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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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927 장흥고](長興庫)에는 자리류(類)를 만드는 장인(匠人)들은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리 만드는 석장(席匠)은 경공장(京工匠)에는 보이지 않고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에만 보이고 있다. 이것은 화문석들이 주로 지방의 토산품으로 진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ref>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저. 한국민속대관. 1980. 8. 15. 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523&nodeId=NODE04001422&medaId=MEDA04107039#none</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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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2년 계유(1393) 5월 4일(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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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朴永忠爲江華節制使, 李承源爲喬桐節制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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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충(朴永忠)을 강화 절제사(江華節制使)로 삼고, 이승원(李承源)을 교동 절제사(喬桐節制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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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21년 기미(1439) 3월 19일(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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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今於本道三處水營, 依京畿左右道例, '''以喬桐、江華'''所屬萬戶千戶中慣於舟楫者六人, 差爲領船, 審其兵船可泊處及諸島水路迂直, 使船軍常加肄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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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본도 세 곳 수영을 경기 좌우도의 예에 의하여, '''강화(江華)의 교동(喬桐)'''에 소속된 천호(千戶)ㆍ만호(萬戶) 중에서 배질하는 데에 익숙한 자 6인을 뽑아 영선(領船)으로 임명하고, 그 병선의 정박할 수 있는 곳과 여러 섬의 수로의 굽고 곧은 것을 살피게 하여 선군(船軍)을 항상 연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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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제29권 7년 8월 22일'''====
 
===='''세종실록 제29권 7년 8월 22일'''====
각 도에서 장흥고로 납부하는 돗자리가 5,148장인데 현재 634장이 있다. 1년 동안 필요한 돗자리가 2,215에 불과하니 경기도에서 바치는 480장은 없애기를 청한다.<ref>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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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도에서 장흥고로 납부하는 돗자리가 5,148장인데 현재 634장이 있다. 1년 동안 필요한 돗자리가 2,215에 불과하니 경기도에서 바치는 480장은 없애기를 청한다.<ref>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ref>
세종실록의 세종 7년은 1425년으로, 경기도에서도 석(席)을 진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때 경기도는 강화도로 여겨진다. 강화도는 현재는 인천시이지만, 과거에는 경기도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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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의 세종 7년은 1425년으로, 경기도에서도 석(席)을 진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때 경기도는 강화, 교동도 또는 당시에는 경기도를 관장하던 개성부 관하였던 (해서)의 연안, 백천 등으로 여겨진다. 강화도는 현재는 인천시이지만, 과거에는 경기도에 속하였다.  
  
  
 
===='''세종실록 12년(1430) 2월 정유'''====
 
===='''세종실록 12년(1430) 2월 정유'''====
명나라에 대한 세공품목 석(席)류로는 만화석, 만화방석, 염석, 황화석, 해화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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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에 대한 세공품목 석(席)류로는 만화석, 만화방석, 염석, 황화석, 해화석을 한다. <br/>
 
조선 초에도 화문석을 중국으로 보낸 것은 고려시대 이후로 꾸준한 중국의 화문석에 대한 인기를 알 수 있다.   
 
조선 초에도 화문석을 중국으로 보낸 것은 고려시대 이후로 꾸준한 중국의 화문석에 대한 인기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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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방석(滿花方席) 20
 
  만화방석(滿花方席) 20
 
  잡채방석(雜彩方席) 20 각(各)10 10
 
  잡채방석(雜彩方席) 20 각(各)10 10
고려 초기부터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화문석류(花紋席類)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중국에 보내는 조정의 선사품으로 배 놓을 수 없는 품목이 되었으며, 수량면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물론 일본에도 보내졌으나 그 규모는 중국에 비해 적었다. 이처럼 막대한 양의 화문석들을 조달 관장하는 부서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927 장흥고](長興庫)였다. 그런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927 장흥고](長興庫)에는 자리류(類)를 만드는 장인(匠人)들은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리 만드는 석장(席匠)은 경공장(京工匠)에는보이지 않고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에만 보이고 있다. 이것은 화문석들이 주로 지방의 토산품으로 진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ref>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저. 한국민속대관. 1980. 8. 15. 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523&nodeId=NODE04001422&medaId=MEDA04107039#none</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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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부터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화문석류(花紋席類)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중국에 보내는 조정의 선사품으로 배 놓을 수 없는 품목이 되었으며, 수량면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물론 일본에도 보내졌으나 그 규모는 중국에 비해 적었다.  
  
  
===='''임원경제지 제3권 섬용지(贍用志) 용수석(龍鬚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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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경제지 섬용지(贍用志) : 건축·도구·일용품 백과사전 권3 용수석(龍鬚席)'''====
 
  서울의 지체 높은 가정이나 사랑방에서는 해서의 백천, 연안 등의 읍에서 생산된 것을 최고로 치고 다음이 경기도 교동의 것이다.  
 
  서울의 지체 높은 가정이나 사랑방에서는 해서의 백천, 연안 등의 읍에서 생산된 것을 최고로 치고 다음이 경기도 교동의 것이다.  
 
  용수석은 오색의 화조문이다. 검은 단색으로 수, 복, 만자 무늬를 장식하고 부들자리를 밑에 대어 청, 흑, 갈색의 천으로 둘레를 싼 것을 등매석(登每席)이라 한다.  
 
  용수석은 오색의 화조문이다. 검은 단색으로 수, 복, 만자 무늬를 장식하고 부들자리를 밑에 대어 청, 흑, 갈색의 천으로 둘레를 싼 것을 등매석(登每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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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 萬物篇/萬物雜類 / 규합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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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 萬物篇/萬物雜類/物産辨證說 / 규합총서'''====  
  유명산지에 강화도 교동의 돗자리가 있다 <ref>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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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산지에 강화도 교동의 돗자리가 있다 喬桐之席 <ref>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10</ref>
 
이규경(李圭景)의 _1788에서 강화도 교동의 돗자리를 전국 특산품으로 기술하며, 교동을 돗자리의 산지로 언급하였다. <br/>
 
이규경(李圭景)의 _1788에서 강화도 교동의 돗자리를 전국 특산품으로 기술하며, 교동을 돗자리의 산지로 언급하였다. <br/>
 
규합총서에도 교동이 나오는데, 이때는 교동의 노계(露鷄)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주 : 안산의 수시(水枾)·조개·게, 교동의 노계(露鷄), 양주의 생밤[生栗], 파주의 게)<ref>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10</ref>
 
규합총서에도 교동이 나오는데, 이때는 교동의 노계(露鷄)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주 : 안산의 수시(水枾)·조개·게, 교동의 노계(露鷄), 양주의 생밤[生栗], 파주의 게)<ref>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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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잡지 제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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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잡지 제택조第宅'''====  
  방안에 기름 먹인 누런 종이로 장판에 기름이 엉긴 것같이 매끄럽게 하고 그 위에 등메(골풀자리)를 깔았는데 수복문자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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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士夫高大其門庶人有禁 堂前結樅棚引 其餘梢爲葫蘆傘蓋翔鶴之狀 號老松翠屛 堂內舖 油黃紙滑如凝脂 <br/>
경도잡지는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저술한 책으로 위와 같이 기록이 있다고 여러 신문 기사에서 언급되지만, 마찬가지로 아직 자료를 찾지 못하여 이 부분은 추후에 다시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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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舖龍鬚草壽福字席置花紋隱囊 牖設卍字複窗遊移開闔 糊紙着油凈如 泥銀色嵌琉璃瞰外 閭巷新設白板門書庚申年庚申月庚申日庚申時姜太公造 盖取金克木 之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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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는 문을 높이 세울 수 있지만, 서민들은 법으로 금지한다. 당 앞에 전나무로 시렁을 만들어 걸어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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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은 부분으로 호로, 산개, 상학 모양을 만드는데 이것을 노송취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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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내에는 유황지를 깔아 기름이 엉긴 듯이 미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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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에 수복자를 넣은 용수초 자리를 깔며 화문석과 은낭을 배치해둔다. 창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만자 무늬 이중창을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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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도잡지는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저술한 책으로 자리가 나온다. 그런데 용수초자리는 수복자를 놓은 용수초자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흥미로운 부분은 수복자를 넣은 용수초 자리와 화문석을 따로 언급한 부분이다.  
 
<ref>서울타임즈 2010.12.06.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http://www.seoultimes.net/news/articleView.html?idxno=3400</ref>   
 
<ref>서울타임즈 2010.12.06.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http://www.seoultimes.net/news/articleView.html?idxno=3400</ref>   
 
<ref>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002240919172</ref>
 
<ref>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002240919172</ref>

2019년 8월 23일 (금) 15:41 기준 최신판

강화도_화문석


개요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왕골/골풀자리가 사용되었는지부터 강화도 화문석이 처음 등장한 기록된 자료 등을 통하여 강화 화문석의 역사와 활용을 살펴보았다.


해설

왕골은 신라시대 휘장으로 처음 등장하며, 자리는 경덕왕때 이전의 기구였던 석전을 개칭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자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왕실 뿐 아니라 해외 교역품 및 공물로 자리를 활용한 기록이 있는데, 고려도경에서 구체적인 화문석의 모양이 언급되어 있다.
흥미로운 기록이 해동역사 원씨액정기에서 원나라 순제(재위 : 1333(37)~1367(70)) 시기 고려에 있는 섬 이름인, 당인의 만화석을 깔았다는 내용인데, 우리나라 섬 중에서 자리를 생산하던 곳은 현재 강화 혹은 교동이여서 당인은 이 지역으로 여겨진다(과거에 유명한 화문석 자리로 거론되었던 지명은 안동, 보성, 연안, 백천 등으로 모두 내륙 지방이다). 해동역사에 나온 당인이라는 고려의 섬이 강화, 교동인지의 여부는 추후에 구체적으로 다시 논의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화문석은 처음엔 왕실에서 사용하고 중국, 일본 등 교역품, 선물, 공물 등에 활용하다가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는 양반가에서 주로 사용하고 후기로 가면 전국 부녀자들 사이에 관심을 갖는 물품으로 성장하였고, 그 중 강화 화문석은 기록 상에 꾸준히 등장하면서 당시의 위상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신라

삼국사기 제33 잡지雜志 제2 거기조車騎條

六頭品(육두품) : 6두품은,  
前後幰若隨眞骨已上貴人行則不設(전후헌약수진골이상귀인행칙부설)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진골 이상의 귀인을 수행할 때는 치지 않고, 
但自行則用竹簾若莞席(단자행칙용죽렴약완석) : 혼자 다닐 때만 대발이나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
五頭品(오두품) : 5두품은, 
前後幰只用竹簾莞席(전후헌지용죽렴완석) : 수레의 앞 뒤 휘장은 대발과 왕골 자리만을 사용하되,[1]  

위의 내용을 보면, 수레를 휘장으로 치장할 때 6두품과 5두품은 왕골 자리를 사용한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자료에 나오는 왕골에 대한 처음 언급이다.
일반적으로 완莞은 왕골을 가리킨다.


삼국사기 제39 잡지雜志 제8 직관(職官) 중/석전 三國史記 卷 第三十九 雜志 第八 職官 中 席典

景德王改爲奉座局 後復故 干一人 史二人 
석전(席典)은 경덕왕이 봉좌국(奉座局)으로 고쳤으나 뒤에 옛 이름대로 하였다. 간(干) 은 1명이었다. 사(史) 는 2명이었다.

직관조(職官條)는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청의 이름에서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2]
신라 경덕왕은 신라의 제35대 왕(재위 742∼765)으로 이때 석전을 봉좌국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석전이 이미 경덕왕 이전에 있던 관청이었고, 자리의 생산을 담당하던 관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자리가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때 언급된 석(席)이 백색자리인지, 무늬가 있는 석(席)인 화문석(花紋席)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해동역사 제35권 / 교빙지(交聘志) 3 조공(朝貢) 3 고려(高麗)

26년(1008, 목종11) -무신- 5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문화전(文化殿)과 무공전(武功殿)에 용수초지석(龍鬚草地席)을 바쳤다. 《요사》
20190815 170128.png

고려 초에 해동역사는 요사를 인용하여 위와 같이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의 완莞과 다르게 고려시대에 용수초가 언급된다. 용수초는 골풀류의 하나로 석(席) 혹은 화문석(花紋席)을 제작하는 식물이다. 현재 화문석을 제작하는 왕골과 혼동하여 사용되기도 하는데, 기록된 많은 자료에 의하면, 제작 후에 왕골 화문석보다 훨씬 부드러운 것으로 보여져 다른 식물로 보여진다. 마찬가지로 이때의 용수초석이 돗자리인 석(席)이지 무늬가 있는 화문석(花紋席)인지는 확실치 않다.

고려사 제6권 - 세가 제6 정종 4년(1038) 7월

甲寅 金元冲還自契丹詔曰 省所上表夏季起居事具悉卿挺生方略善撫世封得愛戴於東韓盡傾虔於北闕屬歊蒸之在候馳章奏以問安嘉矚之懷每興增切 
又詔曰 省所上表謝恩令朝貢幷進捧金吸甁銀藥甁幞頭紗紵布貢平布腦原茶大紙細墨龍鬚▩席等事具悉
갑인(甲寅)에 김원충(金元)이 거란(契丹)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詔)하기를, “올린 표문(表文)을 살피고 여름철 문안(問安)의 일을 자세히 알았노라
경(卿)은 방략(方略)에 뛰어나 나라[世封]를 잘 진무(鎭撫)하여 동한(東韓)에서 애대(愛戴)함을 받고 북궐(北闕)에 정성(精誠)을 다하였도다.
무더운 절후(節候)에 글월을 보내어 문안(問安)하니 가상히 여기는 마음 더욱 간절하도다.” 라고 하였다. 
또 조(詔)하기를, “올린 표문(表文)을 보고 조공(朝貢)케 한 것을 사은(謝恩)한 것과 아울러
금흡병(金吸甁)·은약병(銀藥甁)·복두(頭) 사저포(紗紵布)·공평포(貢平布)·뇌원다(腦原茶)·대지(大紙)·세묵(細墨)·<용수등석(龍鬚簦席)> 등을 올린 일도 
자세히 알았노라. 

거란에 조공으로 올린 물품 중 龍鬚▩席等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 또한 용수자리를 가리킨 것으로 보이며, 무늬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20190815 173230.png


고려사 제7권 - 세가 제7 문종 1

己亥 制曰 先朝所御倚床踏斗皆以金銀裝釘又以金銀線織成罽錦爲茵褥宜令有司代以銅鐵綾絹.
기해(己亥)에 제(制)하기를,
“선조(先朝)께서 쓰시던 의상(倚床)과 답두(踏斗) 등은 모두 금과 은으로 장식한 못을 썼고 
또 금은 실로 짠 계금(錦)으로 이불과 요[茵褥]를 만들었으니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동철(銅鐵)과 능견(綾絹)으로 바꾸도록 하라.”고 하였다.

고려 문종은 제11대 왕(재위 1046∼1083)으로 강화화문석문화관에는 <고려 문종이 즉위하여 영을 내릴 인욕(茵褥 : 왕골이나 부들 등(等)으로 짠 자리)는 금, 은선으로 짜서 계금을 사용하나 이는 마땅히 동철(銅鐵)과 능견(綾絹)으로 바꾸어야겠노라.> [3]
를 언급하며 인욕을 왕골이나 부들 등으로 짜 자리라고 해석하여 이곳에 기록하였지만,
원본의 문맥상 금은 실로 짠 계금의 이불과 요로 보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보인다.


고려도경 제28권 공장(供張) 문석(文席)

文席。精粗不等。精巧者。施於床榻。粗者。用以藉地。織草性柔。摺屈不損。黑白二色。閒錯成文。靑紫爲襈。初無定制。
문석은 곱고 일정하지 않다.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  [4]

고려도경은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이 지은 책이다.
매우 부드럽고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 화문석은 재료가 용수초 혹은 골풀류로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며, 청자색 테를 두른 것으로 보아 강화도 등메로 여겨진다.
등메 조리풀을 1년 이상 재배하여 길들인 참골로 제작되어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으며, 뒤에 부들기직을 대고 청자색 테를 두르는 특징이 있다.


고려사 제29권 - 세가 제29 충렬왕 2 기묘 5년(1279) 3월

甲寅 遣郎將殷洪淳 如元 獻花文大席 
갑인일에 낭장 은홍순을 원나라에 보내어 화문대석을 바쳤다. [5]

고려 충렬왕은 제25대(재위:1274~1308) 왕으로 대략 1100년 이후로 지속적으로 화문석이 언급됨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제37권 - 세가 제37 충정왕 1년(1349) 3월

甲辰 遣上護軍趙得珪如元獻龍席及竹簟
갑진(甲辰)에 상호군(上護軍) 조득규(趙得珪)를 원나라에 보내어 용석(龍席) 및 죽점(竹簟-대자리)을 바쳤다.

기록의 용석龍席이 용수석을 가리키는지 또는 용무늬 자리인지 확실치는 않다.


해동역사 제26권 / 물산지(物産志) 1 초류草類 만화석초滿花席草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 인용

원(元)나라 순제(順帝)가 영영(英英)을 위하여 채방관(采芳館)을 경화도(瓊華島) 안에다 짓고는 당인(唐人)의 만화석(滿花席)을 깔았다. 
당인(唐人)은 고려에 있는 섬 이름으로, 만화초(滿花草)가 나는데, 성질이 부드러워서 꺾어도 손상되지 않으며, 광택이 있어 아주 아름답다. 
그 지방 사람들이 이것으로 짜서 방석을 만든다.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
조선의 만화석을 만드는 풀은 색이 누렇고 부드러워서 꺾어도 부러지지 않으며, 소주(蘇州)에서 생산되는 것보다 더 좋다. 

《조선부 주》 ○ 살펴보건대, 만화석초(滿花席草)는 바로 용수초(龍鬚草)로, 속명은 ‘장골’이다.

고전DB 주석) 만화석, 즉 여러 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방석을 만드는 풀로, 골풀을 말한다. 골풀은 줄기가 원기둥형이고 1m 이상 자라는 풀로, 말린 줄기로 자리를 짠다. 등심초(燈心草), 석용추(石龍芻), 골속, 용수초(龍鬚草)라고도 한다.

원(元)나라 순제는 15대 황제(재위 : 1333(37)~1367(70))으로 고려에서 공물 받은 만화석으로 궁궐을 장식하였다.
만화석은 화문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려에 만화초가 나는 섬인 당인唐人은 강화도로 보여지며, 석(席)은 물론 방석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에는 막연히 등장하던 화문석에 이제 구체적인 지명까지 등장하며 강화도 화문석의 역사가 족히 1000년은 넘는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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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고려에서는 사직신(社稷神)인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의 신위에 왕골자리를 깔았으며 왕실에서는 문석(文席)채석(彩席)화문대석(花文大席)을 사용하였다. [6]


조선

조선시대에는 화문석이란 명칭이 실록 세종 2년 경자(1420) 윤 1월 15일(갑신)에 언급을 시작으로 상당히 자주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화문석이 전국 어느 지역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강화도(혹은 교동도)로 추정되는 지역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강화도는 현재는 인천에 속한 섬이지만, 과거에는 경기도에 속한 섬이어서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기술된 자료를 찾았다.
또한 등메로 유명한 교동도는 태종 때 경기우도 도만호가 현경을 겸한 것으로 경기도 소속섬으로 보여진다. 교동도는 지금은 강화도에 부속점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교동절제사를 따로 언급할 만큼 전력적 요충지였다. 또한 자리는 고려시대에 이어 장흥고에서 담당하였다.

태조실록 1년 임신(1392) 7월 28일 문무백관관제

長興庫: 掌布匹、紙席等事。 使一, 從五品; 副使一, 從六品; 直長二, 從七品; 注簿二, 從八品
장흥고(長興庫)는 포필(布匹)ㆍ지석(紙席)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사(使) 1명 종5품이고, 부사(副使) 1명 종6품이고, 
직장(直長) 2명 종7품이고, 주부(注簿) 2명 종8품이다.

그런데 장흥고(長興庫)에는 자리류(類)를 만드는 장인(匠人)들은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리 만드는 석장(席匠)은 경공장(京工匠)에는 보이지 않고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에만 보이고 있다. 이것은 화문석들이 주로 지방의 토산품으로 진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7]


태조실록 2년 계유(1393) 5월 4일(무신)

以朴永忠爲江華節制使, 李承源爲喬桐節制使。

박영충(朴永忠)을 강화 절제사(江華節制使)로 삼고, 이승원(李承源)을 교동 절제사(喬桐節制使)로 삼았다.


세종실록 21년 기미(1439) 3월 19일(정묘)

自今於本道三處水營, 依京畿左右道例, 以喬桐、江華所屬萬戶千戶中慣於舟楫者六人, 差爲領船, 審其兵船可泊處及諸島水路迂直, 使船軍常加肄習。

이제부터는 본도 세 곳 수영을 경기 좌우도의 예에 의하여, 강화(江華)의 교동(喬桐)에 소속된 천호(千戶)ㆍ만호(萬戶) 중에서 배질하는 데에 익숙한 자 6인을 뽑아 영선(領船)으로 임명하고, 그 병선의 정박할 수 있는 곳과 여러 섬의 수로의 굽고 곧은 것을 살피게 하여 선군(船軍)을 항상 연습하게 하소서.


세종실록 제29권 7년 8월 22일

각 도에서 장흥고로 납부하는 돗자리가 5,148장인데 현재 634장이 있다. 1년 동안 필요한 돗자리가 2,215에 불과하니 경기도에서 바치는 480장은 없애기를 청한다.[8] 세종실록의 세종 7년은 1425년으로, 경기도에서도 석(席)을 진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때 경기도는 강화, 교동도 또는 당시에는 경기도를 관장하던 개성부 관하였던 (해서)의 연안, 백천 등으로 여겨진다. 강화도는 현재는 인천시이지만, 과거에는 경기도에 속하였다.


세종실록 12년(1430) 2월 정유

명나라에 대한 세공품목 석(席)류로는 만화석, 만화방석, 염석, 황화석, 해화석을 한다.
조선 초에도 화문석을 중국으로 보낸 것은 고려시대 이후로 꾸준한 중국의 화문석에 대한 인기를 알 수 있다.


통문관지通文館志 卷 3 「事大」 方物數目 參照

통문관지(通文館志)에 기재된 중국으로 보내진 화문석의 종류와 수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지사행(冬至使行)
황제(皇帝) 황태후(皇太后)ㆍ태후(太后) 황태자(皇太子)
용문염석(龍紋簾席) 2장(張)
황화석(黃花席) 20 각(各)10 10
만화석(滿花席) 20 각(各)10 10
만화방석(滿花方席) 20
잡채방석(雜彩方席) 20 각(各)10 10

고려 초기부터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화문석류(花紋席類)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중국에 보내는 조정의 선사품으로 배 놓을 수 없는 품목이 되었으며, 수량면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물론 일본에도 보내졌으나 그 규모는 중국에 비해 적었다.


임원경제지 섬용지(贍用志) : 건축·도구·일용품 백과사전 권3 용수석(龍鬚席)

서울의 지체 높은 가정이나 사랑방에서는 해서의 백천, 연안 등의 읍에서 생산된 것을 최고로 치고 다음이 경기도 교동의 것이다. 
용수석은 오색의 화조문이다. 검은 단색으로 수, 복, 만자 무늬를 장식하고 부들자리를 밑에 대어 청, 흑, 갈색의 천으로 둘레를 싼 것을 등매석(登每席)이라 한다. 
자리 여러개를 연결하여 관부 청사에 까는 것을 지의석이라 하고 자리에 화조문을 가득 놓은 것을 만화석이라 한다. [9]

임원경제지는 1800년대 초에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기록한 책으로 교동의 왕골자리를 공물로 바친다는 기록하면서 구체적인 이름인 등매가 나온다. 등메등매가 혼동되어 사용되는데, 정확한 이름은 등메이다. 또한 서울의 지체높은 가정에서 최고로 친 해서(황해도)의 백천과 연안는 강화도 교동도를 바로 마주한 육지로 황해도와 경기도로 지역은 구분되어 있지만, 연안, 교동의 용수초 인기가 양반가에서 무척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萬物篇/萬物雜類/物産辨證說 / 규합총서

유명산지에 강화도 교동의 돗자리가 있다 喬桐之席 [10]

이규경(李圭景)의 _1788에서 강화도 교동의 돗자리를 전국 특산품으로 기술하며, 교동을 돗자리의 산지로 언급하였다.
규합총서에도 교동이 나오는데, 이때는 교동의 노계(露鷄)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주 : 안산의 수시(水枾)·조개·게, 교동의 노계(露鷄), 양주의 생밤[生栗], 파주의 게)[11] .
어떤 블로거가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정성희> 책을 소개하면서 책을 소개하는 안산의 게와 감, 교동의 화문석, 양주의 날밤, 남양의 굴, 연평도의 조을 좋은 상품이라고 기록했다고 소개하였는데, [12] 여러 번 규합총서를 읽고 관련 자료를 찾아도 규합총서에 교동의 화문석이 우수하다는 기록된 자료를 찾지 못하여 이 부분은 추후에 다시 논의한다.


경도잡지 제택조第宅

士夫高大其門庶人有禁 堂前結樅棚引 其餘梢爲葫蘆傘蓋翔鶴之狀 號老松翠屛 堂內舖 油黃紙滑如凝脂 
再舖龍鬚草壽福字席置花紋隱囊 牖設卍字複窗遊移開闔 糊紙着油凈如 泥銀色嵌琉璃瞰外 閭巷新設白板門書庚申年庚申月庚申日庚申時姜太公造 盖取金克木 之義也 사대부는 문을 높이 세울 수 있지만, 서민들은 법으로 금지한다. 당 앞에 전나무로 시렁을 만들어 걸어매고 그 남은 부분으로 호로, 산개, 상학 모양을 만드는데 이것을 노송취병이라고 부른다. 당내에는 유황지를 깔아 기름이 엉긴 듯이 미끄럽다. 그 위에 수복자를 넣은 용수초 자리를 깔며 화문석과 은낭을 배치해둔다. 창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만자 무늬 이중창을 단다.

경도잡지는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저술한 책으로 자리가 나온다. 그런데 용수초자리는 수복자를 놓은 용수초자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흥미로운 부분은 수복자를 넣은 용수초 자리와 화문석을 따로 언급한 부분이다. [13] [14]


강화화문석문화관

왕골 화문석은 조선시대 고종 때에 왕실로부터 도안을 특이하게 제작하라는 어명을 받고 당시에 백색자리의 생산지인 송해면 양오리의 한충교씨에 의해 화문석 제작에 성공하며 다양한 도안개발과 제조 기술로 오늘에 이르고 있어 전국 유일의 왕골공예품으로 강화군에서만 생산되는 자랑스러운 민족 문화 유산이다. [15]


시각자료

사진

출처

  1. 三國史記 第 三十三卷(삼국사기 제 33권) 雜志 第 二(잡지 제 02) https://hwalove.tistory.com/entry/%E4%B8%89%E5%9C%8B%E5%8F%B2%E8%A8%98-%E7%AC%AC-%E4%B8%89%E5%8D%81%E4%B8%89%E5%8D%B7%EC%82%BC%EA%B5%AD%EC%82%AC%EA%B8%B0-%EC%A0%9C-33%EA%B6%8C122%EF%A4%82%E9%A8%8E%EA%B1%B0%EA%B8%B0
  2.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151&content_id=rp070201510001&search_left_menu=3
  3.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
  4.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
  5.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전용어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8929&cid=41826&categoryId=41826
  6.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2,00290000,11&pageNo=5_2_1_0
  7.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저. 한국민속대관. 1980. 8. 15. http://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523&nodeId=NODE04001422&medaId=MEDA04107039#none
  8.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
  9. 완초장 이상재의 완초공예기술 조사, 정리한 <문헌 및 관계기록.pdf. p.5> www.cultureline.kr/webgear/.../[%202%20]%20Ⅱ.%20문헌%20및%20관계기록.pdf
  10. 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10
  11. 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10
  12. 책미리보기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011981&memberNo=30620779
  13. 서울타임즈 2010.12.06.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http://www.seoultimes.net/news/articleView.html?idxno=3400
  14.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002240919172
  15. 강화화문석문화관 http://www.ghss.or.kr/src/article.php?menu_cd=0804010100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6월 정리 및 편집 손형남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