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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능일은 강화군 송해면 홍의 마을에 서당을 운영하던 훈장이며 고명한 유학자였다. 1893년 양사면 교산리에 교항마을에 한학자이자 초시(初試) 김상임(金商林)이 자기집에 강화 최초의 교산교회를 세우자 그는 처음에는 이를 항의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김상임과 이문제에 대하여 계속 토론하는 과정에서, 교리를 이해하고 드디어 기독교를 | + | 박능일은 강화군 송해면 홍의 마을에 서당을 운영하던 훈장이며 고명한 유학자였다. 1893년 양사면 교산리에 교항마을에 한학자이자 초시(初試) 김상임(金商林) (후에 [[김상임 전도사]]가 됨)이 자기집에 강화 최초의 교산교회를 세우자 그는 처음에는 이를 항의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김상임과 이문제에 대하여 계속 토론하는 과정에서, 교리를 이해하고 드디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서사면 교항교회에서 처음 신앙생활하던 박능일은 1896년봄 송해면 상도리 958번지 자기집(서당)에서 전도인 이명숙([[교산교회]]교인), [http://www.kmcedu.net/bbs/board.php?bo_table=board3_5&wr_id=77&array_num= 종순일], [http://photohs.co.kr/xe/1091 권신일], 그리고 20여명의 서당 문하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로써 강화 두 번째 교회인 홍우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鴻羽-일제시 洪衣 [[홍의교회]]로 바뀜). |
이로써 초기 강화기독교는 김상임의 1인 체제에서 박능일과 함께 2인 지도체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강화기독교는 활발하게 성장하였다. | 이로써 초기 강화기독교는 김상임의 1인 체제에서 박능일과 함께 2인 지도체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강화기독교는 활발하게 성장하였다. | ||
− | 홍우교회가 세워진 다음해인 1897년 인천지역 감리교회를 담당하고 있던 [[존스(趙元時, George H. Jones)목사]]의 지도하에 그는 계삭회(季朔會 : 지금의 지방회와 같은 것))를 조직하였다. 강화 최초의 성경공부 조직인 셈이다. 홍우교회는 본처 사역자 없이 권사 박능일과 장양일이 각각 임명되었으며, 교인수가 세례, 학습인 포함해서 8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교인들에 대해서는 성경공부를 강화하는 한편, 청소년들에게는 매일학교(Day school)를 1897년 설립하여 서양의 기독교식 교육방법으로 운영하였다. 이 학교는 1896년 갑곶에 성공회신부 워나가 시작한 고아원 학당(후에 진명학교) 다음으로 설립된 강화의 두 번째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또한 1901년에 강화읍에도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강화읍 교인들이 잠두봉 언덕에 예배당과 학교건물을 마련하고 박능일을 초빙하여 학교 운영을 맡겼다. 이것이 오늘의 강화 [[ | + | 홍우교회가 세워진 다음해인 1897년 인천지역 감리교회를 담당하고 있던 [[존스(趙元時, George H. Jones) 목사]]의 지도하에 그는 계삭회(季朔會 : 지금의 지방회와 같은 것))를 조직하였다. 강화 최초의 성경공부 조직인 셈이다. 홍우교회는 본처 사역자 없이 권사 박능일과 장양일이 각각 임명되었으며, 교인수가 세례, 학습인 포함해서 8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교인들에 대해서는 성경공부를 강화하는 한편, 청소년들에게는 매일학교(Day school)를 1897년 설립하여 서양의 기독교식 교육방법으로 운영하였다. 이 학교는 1896년 갑곶에 성공회신부 워나가 시작한 고아원 학당(후에 진명학교) 다음으로 설립된 강화의 두 번째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또한 1901년에 강화읍에도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강화읍 교인들이 잠두봉 언덕에 예배당과 학교건물을 마련하고 박능일을 초빙하여 학교 운영을 맡겼다. 이것이 오늘의 강화 [[합일초등학교]]의 시작인 <span style="color:#0000FF">잠두의숙</span>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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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유교의 장례식에서는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으며 대나무 지팡이를 집고 슬피 곡하는 것이 예의였다. 홍우 교인들이 보여준 이러한 장례모습은 일반인들의 시각에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장례식을 처음 목격한 강화 사람들은 교인들을 비난하며, '인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고인의 눈을 뽑고 코를 깍았다.'는 헛소문을 퍼뜨렸고, 동네 아이들이 교회 목책을 뽑아 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적 신앙의 실천은 강화복음화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민중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홍의의 초대교인 7명은 다같이 하나가 되자는 결심으로, 제비를 뽑아 각각 새 이름으로 개명했다는 사실이다. 능 자 쪽지를 뽑은 사람은 능일(能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통이 아들, 처남에게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교동사람들은 信자를 택함). 또한 홍의 마을의 초대교인들은 이름만 아니라 옷도 검은 옷을 입고 다녔는데, 불신자들은 '꺼먼개"라고 비방했다고 한다. | + |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유교의 장례식에서는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으며 대나무 지팡이를 집고 슬피 곡하는 것이 예의였다. 홍우 교인들이 보여준 이러한 장례모습은 일반인들의 시각에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장례식을 처음 목격한 강화 사람들은 교인들을 비난하며, '인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고인의 눈을 뽑고 코를 깍았다.'는 헛소문을 퍼뜨렸고, 동네 아이들이 교회 목책을 뽑아 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적 신앙의 실천은 강화복음화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민중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홍의의 초대교인 7명은 다같이 하나가 되자는 결심으로, 제비를 뽑아 각각 새 이름으로 개명했다는 사실이다. '능'자 쪽지를 뽑은 사람은 능일(能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통이 아들, 처남에게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교동사람들은 信자를 택함). 또한 홍의 마을의 초대교인들은 이름만 아니라 옷도 검은 옷을 입고 다녔는데, 불신자들은 '꺼먼개"라고 비방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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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기독교 100년사(강화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 역사편차위원회) | *강화기독교 100년사(강화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 역사편차위원회) | ||
*행복을 선택한 사람들[홍의교회 116년 이야기](홍의교회 115주년 이야기 편찬위원회 편 | *행복을 선택한 사람들[홍의교회 116년 이야기](홍의교회 115주년 이야기 편찬위원회 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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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4일 (월) 23:25 기준 최신판
교회개척
박능일은 강화군 송해면 홍의 마을에 서당을 운영하던 훈장이며 고명한 유학자였다. 1893년 양사면 교산리에 교항마을에 한학자이자 초시(初試) 김상임(金商林) (후에 김상임 전도사가 됨)이 자기집에 강화 최초의 교산교회를 세우자 그는 처음에는 이를 항의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김상임과 이문제에 대하여 계속 토론하는 과정에서, 교리를 이해하고 드디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서사면 교항교회에서 처음 신앙생활하던 박능일은 1896년봄 송해면 상도리 958번지 자기집(서당)에서 전도인 이명숙(교산교회교인), 종순일, 권신일, 그리고 20여명의 서당 문하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로써 강화 두 번째 교회인 홍우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鴻羽-일제시 洪衣 홍의교회로 바뀜).
이로써 초기 강화기독교는 김상임의 1인 체제에서 박능일과 함께 2인 지도체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강화기독교는 활발하게 성장하였다.
홍우교회가 세워진 다음해인 1897년 인천지역 감리교회를 담당하고 있던 존스(趙元時, George H. Jones) 목사의 지도하에 그는 계삭회(季朔會 : 지금의 지방회와 같은 것))를 조직하였다. 강화 최초의 성경공부 조직인 셈이다. 홍우교회는 본처 사역자 없이 권사 박능일과 장양일이 각각 임명되었으며, 교인수가 세례, 학습인 포함해서 8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교인들에 대해서는 성경공부를 강화하는 한편, 청소년들에게는 매일학교(Day school)를 1897년 설립하여 서양의 기독교식 교육방법으로 운영하였다. 이 학교는 1896년 갑곶에 성공회신부 워나가 시작한 고아원 학당(후에 진명학교) 다음으로 설립된 강화의 두 번째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또한 1901년에 강화읍에도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강화읍 교인들이 잠두봉 언덕에 예배당과 학교건물을 마련하고 박능일을 초빙하여 학교 운영을 맡겼다. 이것이 오늘의 강화 합일초등학교의 시작인 잠두의숙이다.
사회개혁
교회를 세운지 2년이 되던 해에, 교인 '고씨 부인'이 별세하자 박능일은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고씨 부인이 1898년 1월 11일에 별세하여 상을 치루게 되자, 인천 내리교회에서 김기범, 복정채 전도사가 와서 장례를 집례하였다.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대한 그리스도 회보, 1898.1.26>에 잘 묘사하고 있다.
자녀 뎨손들이 조곰도 슬픔이 업고 죠화하시던 찬미로 천당가는 령혼을 위로하며 본 교우들이 제제히 복을 입엇난데 구쥬의 구쇽하신 십자가로 형뎨됨을 표 하랴고 십자건을 쓰고 부인들은 짓무명 조고리에 십자를 노아 닙었더라... 교중례로 션산에 안장하고 묘전에 십자패를 세웠으니 생시에도 쥬의 십자가를 잘ㅇ하시머니 사후에 육체까지라도 모든 분묘 중에 기독도 됨을 표 하였더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유교의 장례식에서는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으며 대나무 지팡이를 집고 슬피 곡하는 것이 예의였다. 홍우 교인들이 보여준 이러한 장례모습은 일반인들의 시각에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장례식을 처음 목격한 강화 사람들은 교인들을 비난하며, '인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고인의 눈을 뽑고 코를 깍았다.'는 헛소문을 퍼뜨렸고, 동네 아이들이 교회 목책을 뽑아 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적 신앙의 실천은 강화복음화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민중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홍의의 초대교인 7명은 다같이 하나가 되자는 결심으로, 제비를 뽑아 각각 새 이름으로 개명했다는 사실이다. '능'자 쪽지를 뽑은 사람은 능일(能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통이 아들, 처남에게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교동사람들은 信자를 택함). 또한 홍의 마을의 초대교인들은 이름만 아니라 옷도 검은 옷을 입고 다녔는데, 불신자들은 '꺼먼개"라고 비방했다고 한다.
기타 행적
- 1898년 무렵 일곱명의 초대교인들과 함께 일(一)자 돌림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
- 1899년 5월 ~1901년 3월 인천 제물포 학당(영화학교 전신) 교사로 활동했다.
- 1901년 4월 ~ 1903년 3월까지 강화읍 잠두교회(현 중앙교회)의 담임자(2대)를 역임하였다.
-존스 선교사와 협력하여 1901년 4월 잠두의숙, 즉 합일학교를 세우고 초대 숙장을 지냈다. -잠두교회 시무 중 교회 묘지로 임야 3,163평(당시 시가 100원 상당, 옥림리)을 기증하였다.
- 1902년 4월 김상임 전도사가 별세하자, 실질적으로 강화 전체를 통활하는 교회지도자로 활약하였다.
- 1903년 3월 1일 박능일 전도사 소천
박능일은 강화 초기 헌신적인 기독교 지도자였기에 그가 숙환으로 별세하였을 때, <신학월보>(1903.4.146쪽)는 "기둥같은 선생을 잃었다"고 다음과 같이 비통해 하였다.
본처 전도사 박능일은 미이미(大韓美以美 :현 기독교 대한감리회)교회에 기동갓흔 선생이라 선생에 밋음과 정성이 지극하고 규모가 잇어서 어나 시간에는 기도하고 어나 시간에는 성경을 공부하고 어나 시간에는 전도하기로 작정하고 또 열심히 전도하야 듯는자에 마음을 깨우게 권세잇게 전도를 하며 허물이는 자를 용서치 아니하며 자기 할 말외에 쓸때업는 말은 도무지 닙밧게 내지 아니하며 거즛시 업는 사랑을 베풀고 약조와 신 (신의)을 직혀 남의게 조곰도 잘못하지 안코 항상 발근 빗츨 빗최어 여러 교회에서 칭찬하더니..
참고문헌
- 박능일, 그는 누구인가?('중앙의 샘'3쪽,2011.11.6 강화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중앙교회 이은용 장로)
- 감리교회의 기둥 박능일 전도사 '묘역조성감사예배' 문헌(2011.10.9 기독교 대한감리회 홍의교회 한성수 목사)
- 토박이 신앙산맥 [3] (전택부 지음)
- 강화기독교 100년사(강화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 역사편차위원회)
- 행복을 선택한 사람들[홍의교회 116년 이야기](홍의교회 115주년 이야기 편찬위원회 편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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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 편집 및 정리 | 최원재 | 교육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