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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숙종 15) 후궁 소의 장씨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정국''' | '''1689년(숙종 15) 후궁 소의 장씨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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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그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신의 주장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그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신의 주장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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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원자정호와 희빈 책봉이 이미 끝났는데,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던 차에 남인 이현기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 숙종은 원자정호와 희빈 책봉이 이미 끝났는데,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던 차에 남인 이현기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 ||
− | 이를 기회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약을 내렸다. | + | 이를 기회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약을 내렸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71031&cid=40942&categoryId=31778 기사환국]</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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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사사로 된서리를 맞은 서인은 이어서 김수흥·김수항 등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직되고, 또는 유배되어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나고, | 송시열의 사사로 된서리를 맞은 서인은 이어서 김수흥·김수항 등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직되고, 또는 유배되어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나고, | ||
− | 그 대신 권대운·김덕원·목래선 등의 남인이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다. | + | 그 대신 권대운·김덕원·목래선 등의 남인이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71031&cid=40942&categoryId=31778 기사환국]</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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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사건은 정치적 이유도 있었지만 [[숙종]]의 총애를 받는 여인들의 싸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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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환국이 일어나고부터 그 유명한 숙종의 여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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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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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종은 민씨가 왕후로 간택되기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궁녀 장옥정을 후궁으로 삼았으며 그러던 차에 장씨가 1688년 왕자 윤(昀)을 낳게 되자 일약 정치적 격변을 몰고오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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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종은 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삼으려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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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때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정비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 ||
− | + |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며, 주위에 강한 이웃나라가 있어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여 반대론을 물리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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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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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1332&cid=46622&categoryId=46622 기사환국] | ||
+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1332&cid=46622&categoryId=46622 기사일기 사진]참조 | ||
==주석== | ==주석== | ||
<references/> | <referenc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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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5일 (화) 04:06 기준 최신판
정의
1689년(숙종 15) 후궁 소의 장씨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정국
인물
내용
왕자 윤의 출생으로 파급된 여파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치 실세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불렀다.
숙종은 왕자 윤(뒷날의 경종)을 원자로 삼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숙종의 발언에 서인들은 크게 반대했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그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신의 주장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간하였다.
숙종은 원자정호와 희빈 책봉이 이미 끝났는데,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던 차에 남인 이현기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이를 기회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약을 내렸다.[2]
결과
송시열의 사사로 된서리를 맞은 서인은 이어서 김수흥·김수항 등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직되고, 또는 유배되어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권대운·김덕원·목래선 등의 남인이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다.[3]
인물들과의 연관성
이 사건은 정치적 이유도 있었지만 숙종의 총애를 받는 여인들의 싸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사환국이 일어나고부터 그 유명한 숙종의 여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자,
숙종은 민씨가 왕후로 간택되기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궁녀 장옥정을 후궁으로 삼았으며 그러던 차에 장씨가 1688년 왕자 윤(昀)을 낳게 되자 일약 정치적 격변을 몰고오게 되었다.
숙종은 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때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정비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며, 주위에 강한 이웃나라가 있어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여 반대론을 물리치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희빈(희빈 장씨)으로 높였다.
이 환국의 여파로 5월 2일에 서인세력이었던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되고, 남인을 등에 업은 장희빈은 정비가 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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