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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해면(三海面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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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9. 당산동(堂山洞310))
| + | <big>須到堂山披晩'''霞''' (<small>수도당산피만'''하'''</small>) 당산리에 이르니 저녁노을 퍼져있고, <br />李安許朴櫛比'''家''' (<small>리안허박즐비'''가'''</small>) 이씨 안씨 허씨 박씨네 집들이 즐비하네.<br />一條長路昇天府 (<small>일조장로승천부</small>) 한 갈래 긴 길은 승천부로 이어지고,<br />半是蒼松半是'''花''' (<small>반시창송반시'''화'''</small>) 절반은 푸른 소나무 절반은 꽃이로다.<br /> |
− | 須到堂山披晩霞당산리에 이르니 저녁노을 퍼져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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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安許朴櫛比家이씨 안씨 허씨 박씨네 집들이 즐비하네.
| + | </big> |
− | 一條長路昇天府한 갈래 긴 길은 승천부로 이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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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半是蒼松半是花절반은 푸른 소나무 절반은 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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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해면(三海面) 당산동(堂山洞)은 강화부 관아의 서북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승천포(昇天浦)에 이른다. | | ○ 삼해면(三海面) 당산동(堂山洞)은 강화부 관아의 서북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승천포(昇天浦)에 이른다. |
| ○ 홍주(洪州) 이씨인 진사 이윤중(李允中)311)의 증손 이현필(李賢弼)과 강진 안씨와 양천 허씨 그리고 권관 반남 박씨 진사 박제형(朴齊衡)의 자손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 | | ○ 홍주(洪州) 이씨인 진사 이윤중(李允中)311)의 증손 이현필(李賢弼)과 강진 안씨와 양천 허씨 그리고 권관 반남 박씨 진사 박제형(朴齊衡)의 자손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 |
− | 309) 현재는 송해면에 편입되었다. 송정면과 삼해면이 합하여 송해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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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0) 송해면 당산리 당산 마을로, 당집이 있던 당산 아래에 있다.
| + | ==인물== |
− | 311) 이윤중(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사인. 본관은 홍주(洪州). 호는 신재(愼齋). 문간공(文簡公) 이서(李舒)의 후손으로 강화에서 태어나, 일찍이 진사
| + | * 이윤중(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사인. 본관은 홍주(洪州). 호는 신재(愼齋). 문간공(文簡公) 이서(李舒)의 후손으로 강화에서 태어나, 일찍이 진사 |
| (進士)에 합격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 강화 송해에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포상만록(浦上漫錄)≫이 있다. | | (進士)에 합격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 강화 송해에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포상만록(浦上漫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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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참고== |
− | 130. 승천포(昇天浦312))
| + | * 삼해면(三海面) 현재는 송해면에 편입되었다. 송정면과 삼해면이 합하여 송해면이 되었다. |
− | 昇天浦口問歸船승천포 나루에서 돌아가는 배 물어보니,
| + | * 당산동(堂山洞) : 송해면 당산리 당산 마을로, 당집이 있던 당산 아래에 있다. |
− | 或指開城或漢川어떤 것은 개성이요 어떤 것은 한강을 가리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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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念昔高皇麾二將옛적에 태조께서 두 장수 거느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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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倭氛掃盡此津邊왜구를 소탕한 곳이 바로 이 나룻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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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 우왕 4년 무오년(1378)에 우리 태조 고황제(高皇帝)와 최영(崔瑩), 양백연(楊伯淵)이 승천부(昇天府)에서 왜병(倭兵)을 크게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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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이곳을 건너면서 시를 지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바람 물결 모질어 막지도 못하는데(遮莫風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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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惡), 호기를 부리는 손과도 같지 않네(無如客興豪). 파란 하늘은 작은 돌에 기대 있고(靑天欹片石), 하이얀 저 눈은 봄 옷을 씻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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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白雪洒春袍). 고래악어 보고서는 크게 한 번 웃어주고(一笑看鯨鱷), 술내오라 명하고서 노래를 부르네(長歌命酒醪). 외로운 배 아무리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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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했다 하지만(孤槎縱失勢), 저 높은 하늘을 해치지는 못하네(未害上天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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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포음(圃陰) 김창집(金昌緝)의 시는 다음과 같다. “마니산을 나막신 신고 가고(摩山收蠟屐) 승천포 가에서 고기를 낚는구나.(昇浦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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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漁舠) 지는 해에 초루가 작아보이니(落日華譙小) 봄바람에 푸른 바다 높구나.(春風碧海高) 배 지나니 악어가 놀라고(揚帆驚怒鱷) 배 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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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니 높은 파도 밀려오네.(散帙信飛濤) 집안의 경계를 범할지라도(縱犯垂堂戒) 내 길에서 스스로 호기 부리네.(吾行也自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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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2) 송해면 당산리 당산 동쪽에 있던 포구이다. 고려 때 개경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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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1. 긍곡(矜谷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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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矜谷來留客馬覊긍곡에 다다라서 나그네 발길을 멈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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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依然春色舊遊時봄기운 의연하네 옛적에 놀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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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薔薇花下金韓老장미꽃 아래서 김씨 한씨 노인 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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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情話慇懃日影移은근한 정담으로 해가 저물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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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긍곡(矜谷)은 당산동(堂山洞)의 소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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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해풍군(海豊君)의 후예인 대장(大將) 김영(金瑩)의 족손인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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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 청주인 삼괴정(三槐亭) 한경린(韓景麟)314)의 후손인 한씨들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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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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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3) 송해면 당산리 금곡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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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4) 한경린(1544년 출생) 자는 중진(仲振). 1582년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6위로 합격하였다. 강원도사(江原都事)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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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2. 상도동(上道洞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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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上道村前春水生상도촌 앞에는 봄물이 불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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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洪崖琥谷近郊程홍애부락 호박골이 가까이 자리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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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金各倚東西壟이씨와 김씨네가 동서 뚝 사이에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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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夜織茵紋晝出耕밤에는 돗자리 짜고 낮에는 농사짓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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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상도동의 동쪽의 호박골(琥珀谷)316)에는 대흥 이씨(李氏)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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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고 있고, 서쪽의 홍애촌(洪崖村)317)에는 광산 김씨(金氏)들이 살고 있다. 모두들 부지런히 농사짓고 자리 짜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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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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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5) 송해면 상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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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6) 송해면 상도1리로 홍의 마을 동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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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7) 송해면 상도2리로 홍의(紅衣), 홍해(紅海)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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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3. 하도동(下道洞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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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石洲卜宅五流川석주선생 오류천319)에 자리 잡고 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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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陂上櫻桃幾百年언덕 위의 앵두나무 몇 백 년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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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讀罷碑文如復見비문을 읽고 나니 다시 선생을 보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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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羹牆遺意士皆然우러러 사모하는 뜻 선비라면 모두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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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석주(石洲) 권필(權韠)320)은 절개와 행실을 갈고 닦아서 벼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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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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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 광해군 때에 궁류시(宮柳詩)에 연좌되어 해를 당하고서 이곳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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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천(五流川) 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 소유동(小有洞) 앵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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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櫻桃坡)와 반환정(盤桓亭)이 있었는데 지금도 명칭이 전해진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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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嗣孫) 권적(權樀)이 강화부의 유수가 되었을 때에 그 유허에 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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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워 기문을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강화부 서쪽 오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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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 석주 선생의 유지이다. 선생의 휘는 필(韠)이요 자는 여장(汝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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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으로 습재 선생 권벽(權擘)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고, 계부(季父)생원부군 휘 별(撇)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일찍이 과거에 뜻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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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기하고 관직에 제수되어도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의 번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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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움을 피해 이곳에 집을 짓고 거주하니 원근의 학자(學子)들이 선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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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을 듣고 다투어 몰려들어 구의(摳衣 ; 옷을 걷어 올려 존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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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함)로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 선생은 나날이 가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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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취시키는 것을 일로 삼았고, 때때로 시를 읊으며 스스로 소일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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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늙음에 이르는 것도 알지 못 하였다. 수년간 거하였는데 강화유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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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물에 빠져 아비를 시해한 옥사를 관대히 처결하자, 선생은 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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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려 그 죄를 바로잡았고, 드디어는 이곳을 떠나 현석강으로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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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았는데 스스로 호하여 석주(石洲)라 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공이 일찍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문사를 엄선할 때 선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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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생으로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 죽창 구용(具容)과 함께 화친을 주장하는 두 상신을 참수할 것을 청하는 글을 써 올렸다. 이이첨(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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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爾瞻)을 남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담을 넘어서 피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 4) 무옥(誣獄)에 궁류시(宮柳詩 ; 광해군 비 유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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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우 柳希奮 등 척족들의 방종을 비방한 시)로 연좌되어 화를 입었으니 간악한 무리들의 모해로 그렇게 된 것이다. 계해년(1623,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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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즉위년) 인조의 개옥(改玉ㆍ왕은 佩玉으로 즉법을 고침, 인조반정을 이름)에 이르러 선생에게 지평을 추증하고 그 후사를 관직에 채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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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이다. 선생은 자질이 매우 뛰어났고 안으로 행실이 심히 조신하셨으며 염락(濂洛)321)의 여러 책을 읽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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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견해가 두루 통하여 밝았다. 또한 도학정맥(道學正脈) 한 편을 저술하였으니 그 초(抄)하고 평(評)함이 자세하고 적절하니, 문장을 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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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은 실로 여가의 일인데, 세상에서 선생을 아는 이들은 다만 시를 잘 한다고만 알고 깊이 쌓인 것을 다 살피지 못하니 역사 아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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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박하다. 불초한 제가 무오년(1738, 영조 14) 가을, 강화부에 부임하여 선생의 유거(遺居)를 내방하니, 황폐한 집터며 부서진 섬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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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히려 이곳이 유거임을 판별하게 한다. 반환정(盤桓亭), 앵도파(櫻桃坡), 소유동(小有洞) 등 여러 명승지는 선생의 시집 중에서 지칭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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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곳이며, 또한 고로(古老)들도 가리켜 전해져 설명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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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하의 두 연못에 이르러서는 지금은 벼논이 되어 옛날의 맑은 물결이 없어, 배회하며 쓸쓸한 감상을 억제할 수 없다. 드디어 초당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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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에 짧은 표(表)를 세워 사실을 간략히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알리노니 이 역시 선생을 경모하고 추념하는 뜻이 깃든 것이다. 나를 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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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 오는 사람이 만약 더욱 뜻이 있어 이를 보호하여 비문이 벗겨져 떨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지켜준다면 어찌 비단 자손들만의 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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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운 다행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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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 송해면 하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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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 송해면 하도2리 오류내 마을에서 다섯 개울물이 합해져 바다로 흘러간다. 오리천(五里川)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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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0) 권필(1569∼1612)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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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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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1) 중국 송대 성리학의 두 계파로, 염은 염계의 주돈이, 낙은 낙양의 정호·정이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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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해면(三海面) 당산동(堂山洞)은 강화부 관아의 서북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승천포(昇天浦)에 이른다.
○ 홍주(洪州) 이씨인 진사 이윤중(李允中)311)의 증손 이현필(李賢弼)과 강진 안씨와 양천 허씨 그리고 권관 반남 박씨 진사 박제형(朴齊衡)의 자손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
(進士)에 합격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 강화 송해에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포상만록(浦上漫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