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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삼해면(三海面309)) 129. 당산동(堂山洞310)) 須到堂山披晩霞당산리에 이르니 저녁노을 퍼져있고, 李安許朴櫛比家이씨 안씨 허씨 박씨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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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이윤중(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사인. 본관은 홍주(洪州). 호는 신재(愼齋). 문간공(文簡公) 이서(李舒)의 후손으로 강화에서 태어나, 일찍이 진사
 
311) 이윤중(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사인. 본관은 홍주(洪州). 호는 신재(愼齋). 문간공(文簡公) 이서(李舒)의 후손으로 강화에서 태어나, 일찍이 진사
 
(進士)에 합격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 강화 송해에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포상만록(浦上漫錄)≫이 있다.
 
(進士)에 합격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 강화 송해에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포상만록(浦上漫錄)≫이 있다.
 
 
130. 승천포(昇天浦312))
 
昇天浦口問歸船승천포 나루에서 돌아가는 배 물어보니,
 
或指開城或漢川어떤 것은 개성이요 어떤 것은 한강을 가리키네.
 
念昔高皇麾二將옛적에 태조께서 두 장수 거느리고,
 
倭氛掃盡此津邊왜구를 소탕한 곳이 바로 이 나룻가네.
 
 
 
○ 고려 우왕 4년 무오년(1378)에 우리 태조 고황제(高皇帝)와 최영(崔瑩), 양백연(楊伯淵)이 승천부(昇天府)에서 왜병(倭兵)을 크게 격파하였다.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이곳을 건너면서 시를 지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바람 물결 모질어 막지도 못하는데(遮莫風濤
 
惡), 호기를 부리는 손과도 같지 않네(無如客興豪). 파란 하늘은 작은 돌에 기대 있고(靑天欹片石), 하이얀 저 눈은 봄 옷을 씻는구나
 
(白雪洒春袍). 고래악어 보고서는 크게 한 번 웃어주고(一笑看鯨鱷), 술내오라 명하고서 노래를 부르네(長歌命酒醪). 외로운 배 아무리 실
 
세했다 하지만(孤槎縱失勢), 저 높은 하늘을 해치지는 못하네(未害上天高).”
 
○ 포음(圃陰) 김창집(金昌緝)의 시는 다음과 같다. “마니산을 나막신 신고 가고(摩山收蠟屐) 승천포 가에서 고기를 낚는구나.(昇浦上
 
漁舠) 지는 해에 초루가 작아보이니(落日華譙小) 봄바람에 푸른 바다 높구나.(春風碧海高) 배 지나니 악어가 놀라고(揚帆驚怒鱷) 배 멈
 
추니 높은 파도 밀려오네.(散帙信飛濤) 집안의 경계를 범할지라도(縱犯垂堂戒) 내 길에서 스스로 호기 부리네.(吾行也自豪)”
 
 
312) 송해면 당산리 당산 동쪽에 있던 포구이다. 고려 때 개경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131. 긍곡(矜谷313))
 
矜谷來留客馬覊긍곡에 다다라서 나그네 발길을 멈추니,
 
依然春色舊遊時봄기운 의연하네 옛적에 놀던대로.
 
薔薇花下金韓老장미꽃 아래서 김씨 한씨 노인 둘이,
 
情話慇懃日影移은근한 정담으로 해가 저물어가네.
 
○ 긍곡(矜谷)은 당산동(堂山洞)의 소지명이다.
 
○ 해풍군(海豊君)의 후예인 대장(大將) 김영(金瑩)의 족손인 김씨
 
와 청주인 삼괴정(三槐亭) 한경린(韓景麟)314)의 후손인 한씨들이 많
 
이 살고 있다.
 
 
313) 송해면 당산리 금곡마을이다.
 
314) 한경린(1544년 출생) 자는 중진(仲振). 1582년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6위로 합격하였다. 강원도사(江原都事)를 지냈다.
 
 
 
132. 상도동(上道洞315))
 
上道村前春水生상도촌 앞에는 봄물이 불어나고,
 
洪崖琥谷近郊程홍애부락 호박골이 가까이 자리했네.
 
李金各倚東西壟이씨와 김씨네가 동서 뚝 사이에 살며,
 
夜織茵紋晝出耕밤에는 돗자리 짜고 낮에는 농사짓네.
 
○ 상도동의 동쪽의 호박골(琥珀谷)316)에는 대흥 이씨(李氏)들이
 
살고 있고, 서쪽의 홍애촌(洪崖村)317)에는 광산 김씨(金氏)들이 살고 있다. 모두들 부지런히 농사짓고 자리 짜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이
 
들이 많다.
 
 
315) 송해면 상도리이다.
 
316) 송해면 상도1리로 홍의 마을 동쪽에 있다.
 
317) 송해면 상도2리로 홍의(紅衣), 홍해(紅海)라고도 불린다.
 
 
133. 하도동(下道洞318))
 
石洲卜宅五流川석주선생 오류천319)에 자리 잡고 살았는데,
 
陂上櫻桃幾百年언덕 위의 앵두나무 몇 백 년이 되었는가.
 
讀罷碑文如復見비문을 읽고 나니 다시 선생을 보는 듯,
 
羹牆遺意士皆然우러러 사모하는 뜻 선비라면 모두 같네.
 
○ 석주(石洲) 권필(權韠)320)은 절개와 행실을 갈고 닦아서 벼슬길
 
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
 
다. 광해군 때에 궁류시(宮柳詩)에 연좌되어 해를 당하고서 이곳 오
 
류천(五流川) 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 소유동(小有洞) 앵도파
 
(櫻桃坡)와 반환정(盤桓亭)이 있었는데 지금도 명칭이 전해진다. 사
 
손(嗣孫) 권적(權樀)이 강화부의 유수가 되었을 때에 그 유허에 비를
 
세워 기문을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강화부 서쪽 오리천
 
은 석주 선생의 유지이다. 선생의 휘는 필(韠)이요 자는 여장(汝章)
 
으로 습재 선생 권벽(權擘)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고, 계부(季父)생원부군 휘 별(撇)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일찍이 과거에 뜻이 없어
 
포기하고 관직에 제수되어도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의 번거로
 
움을 피해 이곳에 집을 짓고 거주하니 원근의 학자(學子)들이 선생의
 
명성을 듣고 다투어 몰려들어 구의(摳衣 ; 옷을 걷어 올려 존경을
 
표함)로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 선생은 나날이 가르쳐
 
성취시키는 것을 일로 삼았고, 때때로 시를 읊으며 스스로 소일하여
 
늙음에 이르는 것도 알지 못 하였다. 수년간 거하였는데 강화유수가
 
재물에 빠져 아비를 시해한 옥사를 관대히 처결하자, 선생은 소를
 
올려 그 죄를 바로잡았고, 드디어는 이곳을 떠나 현석강으로 돌아가
 
살았는데 스스로 호하여 석주(石洲)라 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공이 일찍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문사를 엄선할 때 선생은
 
유생으로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 죽창 구용(具容)과 함께 화친을 주장하는 두 상신을 참수할 것을 청하는 글을 써 올렸다. 이이첨(李
 
爾瞻)을 남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담을 넘어서 피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 4) 무옥(誣獄)에 궁류시(宮柳詩 ; 광해군 비 유씨의
 
아우 柳希奮 등 척족들의 방종을 비방한 시)로 연좌되어 화를 입었으니 간악한 무리들의 모해로 그렇게 된 것이다. 계해년(1623, 인조
 
즉위년) 인조의 개옥(改玉ㆍ왕은 佩玉으로 즉법을 고침, 인조반정을 이름)에 이르러 선생에게 지평을 추증하고 그 후사를 관직에 채용하
 
니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이다. 선생은 자질이 매우 뛰어났고 안으로 행실이 심히 조신하셨으며 염락(濂洛)321)의 여러 책을 읽어 그
 
견해가 두루 통하여 밝았다. 또한 도학정맥(道學正脈) 한 편을 저술하였으니 그 초(抄)하고 평(評)함이 자세하고 적절하니, 문장을 짓는
 
일은 실로 여가의 일인데, 세상에서 선생을 아는 이들은 다만 시를 잘 한다고만 알고 깊이 쌓인 것을 다 살피지 못하니 역사 아는 것이
 
천박하다. 불초한 제가 무오년(1738, 영조 14) 가을, 강화부에 부임하여 선생의 유거(遺居)를 내방하니, 황폐한 집터며 부서진 섬돌들은
 
오히려 이곳이 유거임을 판별하게 한다. 반환정(盤桓亭), 앵도파(櫻桃坡), 소유동(小有洞) 등 여러 명승지는 선생의 시집 중에서 지칭한
 
곳이며, 또한 고로(古老)들도 가리켜 전해져 설명한 곳이기도 하다.
 
상하의 두 연못에 이르러서는 지금은 벼논이 되어 옛날의 맑은 물결이 없어, 배회하며 쓸쓸한 감상을 억제할 수 없다. 드디어 초당 옛
 
터에 짧은 표(表)를 세워 사실을 간략히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알리노니 이 역시 선생을 경모하고 추념하는 뜻이 깃든 것이다. 나를 뒤이
 
어 오는 사람이 만약 더욱 뜻이 있어 이를 보호하여 비문이 벗겨져 떨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지켜준다면 어찌 비단 자손들만의 사사
 
로운 다행이겠는가.”
 
 
318) 송해면 하도리이다.
 
319) 송해면 하도2리 오류내 마을에서 다섯 개울물이 합해져 바다로 흘러간다. 오리천(五里川)이라고도 한다.
 
320) 권필(1569∼1612)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321) 중국 송대 성리학의 두 계파로, 염은 염계의 주돈이, 낙은 낙양의 정호·정이를 이른다.
 

2019년 5월 19일 (일) 23:43 판

삼해면(三海面309)) 129. 당산동(堂山洞310)) 須到堂山披晩霞당산리에 이르니 저녁노을 퍼져있고, 李安許朴櫛比家이씨 안씨 허씨 박씨네 집들이 즐비하네. 一條長路昇天府한 갈래 긴 길은 승천부로 이어지고, 半是蒼松半是花절반은 푸른 소나무 절반은 꽃이로다.

○ 삼해면(三海面) 당산동(堂山洞)은 강화부 관아의 서북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승천포(昇天浦)에 이른다. ○ 홍주(洪州) 이씨인 진사 이윤중(李允中)311)의 증손 이현필(李賢弼)과 강진 안씨와 양천 허씨 그리고 권관 반남 박씨 진사 박제형(朴齊衡)의 자손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 309) 현재는 송해면에 편입되었다. 송정면과 삼해면이 합하여 송해면이 되었다. 310) 송해면 당산리 당산 마을로, 당집이 있던 당산 아래에 있다. 311) 이윤중(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사인. 본관은 홍주(洪州). 호는 신재(愼齋). 문간공(文簡公) 이서(李舒)의 후손으로 강화에서 태어나, 일찍이 진사 (進士)에 합격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 강화 송해에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포상만록(浦上漫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