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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96. 강화부성(江華府城*) 環城終日感懷多성을 돌다 해가 지니 감회가 많구나, 五十年間變幾何지나간 오십 년 동안 변란이 몇 번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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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강화부성(江華府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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環城終日感懷多성을 돌다 해가 지니 감회가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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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環城終日感懷'''多''' (<small>환성종일감회'''다'''</small>)     성을 돌다 해가 지니 감회가 많구나,<br />五十年間變幾'''何''' (<small>오십년간변기'''하'''</small>)    지나간 오십 년 동안 변란이 몇 번 있었는가.<br />官吏武文多少式 (<small>관리무문다소식</small>)    문무의 관리들이 많았을 터인데,<br />摠如一劫夢中'''過''' (<small>총여일겁몽중'''과'''</small>)    모두가 한순간의 꿈처럼 지나갔네.<br />
五十年間變幾何지나간 오십 년 동안 변란이 몇 번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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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吏武文多少式문무의 관리들이 많았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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摠如一劫夢中過모두가 한순간의 꿈처럼 지나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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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일찍이 50년 전 여기 강화부에서 노닐 적엔, 관리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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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대책과 문무를 대우하고 기르는 방법, 관청 건물과 창고들이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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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하였었다. 황상 병인년(1866) 9월에 서양의 오랑캐가 갑곶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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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일찍이 50년 전 여기 강화부에서 노닐 적엔, 관리들의 방어대책과 문무를 대우하고 기르는 방법, 관청 건물과 창고들이 매우 치밀하였었다. 황상 병인년(1866) 9월에 서양의 오랑캐가 갑곶진에 와서 정박하고 갑자기 강화부로 쳐들어왔다. 이때 유수 이인기(李寅夔)와 본관 김재헌(金在獻)과 중군 이아무개 등은 대비를 소홀히 하고 달아나버리고, 하급관리와 백성들은 스스로 뛰어다니며 허우적대는데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저 오랑캐들이 관청 건물을 소굴로 삼고 한 달 가까이 살았다. 저들 수백 인이 정족산성(鼎足山城)에 함부로 쳐들어갔다가, 마침 양헌수(梁憲洙)의 매복 계획에 당하여 포를 맞고 죽은 자가 많았다. 그들은 이곳이 대비가 잘 돼있는 것을 보고는 관사(官舍)와 공청(公廳)과 각 탕고(帑庫)에 불을 지르고 철수하였다.  
와서 정박하고 갑자기 강화부로 쳐들어왔다. 이때 유수 이인기(李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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夔)221)와 본관 김재헌(金在獻)과 중군 이아무개 등은 대비를 소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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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조정에서는 다시 세 관아의 관각과 공청을 지어서 웅장하고 견고하게 하였다. 하급관리를 더 설치하고 별무사 3000명을 두어서 군량미 3000석을 준비해서 방어하는 대책으로 삼았으니 매우 장하다고 할 수 있다. 관(官)은 문무를 겸임하여 다스리는데, 유수 겸 진무사 삼도통어사가 있고, 그 아래의 판관과 중군이 있는데, 모두 명망 있고 정선된 자들이었다. 사(士)는 향교의 분교관(分敎官)인데 처음 벼슬을 맡은 계급이었다. 매년 도회(都會)에서 여름마다 시험을 보고 혹 백일장을 치러 가르침을 장려하였다. 무(武)는 춘추로 도시(都試)를 보고 매월 활쏘기를 시험해서 무예를 분발시켰다. 갑오년(1894)에는 단지 군수(郡守) 또는 부윤의 한 관아만을 남기니 그 나머지 관아들은 폐지되거나 저절로 없어진 것들이 많았다. 50년 동안 변화된 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육궁과 각 탕고들은 어떠했겠는가. 다만 탄식할 뿐이다.
하고 달아나버리고, 하급관리와 백성들은 스스로 뛰어다니며 허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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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고 한 달 가까이 살았다. 저들 수백 인이 정족산성(鼎足山城)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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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37.753860, 126.478324, [[64. 명륜당(明倫堂)]] 현 향교길 강화군 강화읍 강화향교
장하다고 할 수 있다. 관(官)은 문무를 겸임하여 다스리는데, 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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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37.754014, 126.478194, [[65. 강당(講堂) 안연재(安燕齋)]] 현 강화읍 관청리 936-3
겸 진무사 삼도통어사가 있고, 그 아래의 판관과 중군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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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37.755553, 126.482822, [[66. 북문(北門)]] 강화산성북문 강화읍 국화리 산3
221) 이인기(1804년 출생) 본관은 전주. 강화유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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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7.763184, 126.484513, [[67. 여제단(厲祭壇)]]?? 현 강화읍 대산리 1195
222) 양헌수(1816∼1888)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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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37.759656, 126.476231, [[68. 당주동(唐州洞)]] 현 강화군 송해면 당골길
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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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내면(府內面)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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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37.755592, 126.486896, [[69. 북장대(北將臺)]] 현 강화읍 대산리 북산공원
명망 있고 정선된 자들이었다. 사(士)는 향교의 분교관(分敎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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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37.760032, 126.486663, [[70. 북장춘목(北場春牧)]] 현 강화읍 대월로277번길,북산(송악)의북쪽 우마장,강화10경
처음 벼슬을 맡은 계급이었다. 매년 도회(都會)에서 여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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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37.755495, 126.487113, [[71. 기우청단(祈雨晴壇)]] 고려산 화산 마니악 송악산 혈구산 갑곶진중 여기는 송악
험을 보고 혹 백일장을 치러 가르침을 장려하였다. 무(武)는 춘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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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37.754340, 126.484252, [[72. 행궁 궁아제단(宮娥祭壇)]] 현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부의 관아북쪽 송악산)
도시(都試)를 보고 매월 활쏘기를 시험해서 무예를 분발시켰다.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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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37.755006, 126.484252, [[73. 척천정(尺天亭)]] 현 강화읍 관청리(행궁의 북쪽)
(1894)에는 단지 군수(郡守) 또는 부윤의 한 관아만을 남기니 그
+
(W) , [[74. 장녕전(長寧殿)]] 현
나머지 관아들은 폐지되거나 저절로 없어진 것들이 많았다. 50년
+
(X) , [[75. 세심재(洗心齋)]] 현
변화된 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육궁과 각 탕고들은 어떠했겠
+
(Y) , [[76. 연초헌(燕超軒)]] 현
는가. 다만 탄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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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 37.754223, 126.489997, [[77. 규장외각(奎章外閣)]] 현 강화읍 관청리 산32(??)(행궁의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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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52387, 126.485997, [[78. 상아(上衙)]] 현 강화읍 관청리 강화유수부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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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9. 객사(客舍)]]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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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 민풍시(民風詩)]]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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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1. 도과(道科)]]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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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2. 공도회(公都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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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3. 이아(貳衙)]]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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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4. 중영(中營)]]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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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47652, 126.476736, [[85. 진무영(鎭撫營) 열무당(閱武堂)]] 현 연무당 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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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48305, 126.484933, [[86. 선원비각(仙源碑閣)]] 현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3 선원김상용순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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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47529, 126.483159, [[87. 시장(市場)]] 현 강화읍 신문리 1003-6(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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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47903, 126.485195, [[88. 용흥궁(龍興宮)]] 강화읍 관청리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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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46572, 126.488306, [[89. 육궁(六宮)]] 현 강화읍 관청리 148-5 (동문안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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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0. 부내 심부윤(沈府尹*)]]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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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1. 부내 최판서(崔判書*)]]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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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2. 부내 김효자(金孝子*)]]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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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3. 성황단(城隍壇)]]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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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51875, 126.485356, [[94. 고려궁지(高麗宮址)]] 현 강화읍 북문길 42 강화 고려궁지
 +
() 37.749639, 126.491383, [[95. 동문(東門)]] 현 강화읍 관청리 49 동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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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54337, 126.473381, [[96. 강화부성(江華府城*)]] 현 강화산성 강화읍 국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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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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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기(1804년 출생) 본관은 전주. 강화유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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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헌수(1816∼1888)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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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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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kor-tv.com/ganghwa5.htm 강화]

2019년 5월 14일 (화) 07:45 기준 최신판

環城終日感懷 (환성종일감회)     성을 돌다 해가 지니 감회가 많구나,
五十年間變幾 (오십년간변기) 지나간 오십 년 동안 변란이 몇 번 있었는가.
官吏武文多少式 (관리무문다소식) 문무의 관리들이 많았을 터인데,
摠如一劫夢中 (총여일겁몽중) 모두가 한순간의 꿈처럼 지나갔네.


○ 내가 일찍이 50년 전 여기 강화부에서 노닐 적엔, 관리들의 방어대책과 문무를 대우하고 기르는 방법, 관청 건물과 창고들이 매우 치밀하였었다. 황상 병인년(1866) 9월에 서양의 오랑캐가 갑곶진에 와서 정박하고 갑자기 강화부로 쳐들어왔다. 이때 유수 이인기(李寅夔)와 본관 김재헌(金在獻)과 중군 이아무개 등은 대비를 소홀히 하고 달아나버리고, 하급관리와 백성들은 스스로 뛰어다니며 허우적대는데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저 오랑캐들이 관청 건물을 소굴로 삼고 한 달 가까이 살았다. 저들 수백 인이 정족산성(鼎足山城)에 함부로 쳐들어갔다가, 마침 양헌수(梁憲洙)의 매복 계획에 당하여 포를 맞고 죽은 자가 많았다. 그들은 이곳이 대비가 잘 돼있는 것을 보고는 관사(官舍)와 공청(公廳)과 각 탕고(帑庫)에 불을 지르고 철수하였다.

후에 조정에서는 다시 세 관아의 관각과 공청을 지어서 웅장하고 견고하게 하였다. 하급관리를 더 설치하고 별무사 3000명을 두어서 군량미 3000석을 준비해서 방어하는 대책으로 삼았으니 매우 장하다고 할 수 있다. 관(官)은 문무를 겸임하여 다스리는데, 유수 겸 진무사 삼도통어사가 있고, 그 아래의 판관과 중군이 있는데, 모두 명망 있고 정선된 자들이었다. 사(士)는 향교의 분교관(分敎官)인데 처음 벼슬을 맡은 계급이었다. 매년 도회(都會)에서 여름마다 시험을 보고 혹 백일장을 치러 가르침을 장려하였다. 무(武)는 춘추로 도시(都試)를 보고 매월 활쏘기를 시험해서 무예를 분발시켰다. 갑오년(1894)에는 단지 군수(郡守) 또는 부윤의 한 관아만을 남기니 그 나머지 관아들은 폐지되거나 저절로 없어진 것들이 많았다. 50년 동안 변화된 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육궁과 각 탕고들은 어떠했겠는가. 다만 탄식할 뿐이다.


기행지도

인물

  • 이인기(1804년 출생) 본관은 전주. 강화유수를 지냈다.
  • 양헌수(1816∼1888)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