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남산동(南山洞 수록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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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열 남궁씨인 부제학 남궁찬(南宮璨)의 후손이 수록암 마을에서 대대로 세습하여 살았다. 손자 남궁제(南宮埞)는 진사로서 행실과 의리에 돈독하였다. 향리에서 장녕전(長寧殿) 참봉에 제수된 것으로 인하여 형조좌랑 회덕 현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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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A8%EC%97%B4_%EB%82%A8%EA%B6%81%EC%94%A8 함열 남궁씨] 부제학 남궁찬(南宮璨)의 후손이 수록암 마을에서 대대로 세습하여 살았다. 손자 남궁제(南宮埞)는 진사로서 행실과 의리에 돈독하였다. 향리에서 장녕전(長寧殿) 참봉에 제수된 것으로 인하여 형조좌랑 회덕 현감을 지냈다.
  
○ 그 아들 남궁헌(南宮(金憲))은 관직이 인동 부사에 이르렀는데 효행이 뛰어났었다. 영조 계유년(1753)에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그 아들 남궁철(南宮澈)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 후손 가선대부 남궁일(南宮鎰)과 남궁주(南宮澍) 부자는 향반(鄕班)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어찌 장수와 복록의 징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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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아들 남궁헌(南宮𨯶)은 관직이 인동 부사에 이르렀는데 효행이 뛰어났었다. 영조 계유년(1753)에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그 아들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27_020672 남궁철(南宮澈)]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 후손 가선대부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84_015466 남궁일(南宮鎰)]과 남궁주(南宮澍) 부자는 향반(鄕班)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어찌 장수와 복록의 징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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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747316, 126.487190, [[강화부]]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1003-15
 
() 37.747316, 126.487190, [[강화부]]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1003-15
() 37.647308, 126.525496, [[237.굴곶포(屈串浦)]] 현 불은면 덕성리 굴이포 일명 '구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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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250.사복포(司僕浦)]] 현 불은면 덕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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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37.733851, 126.476067, [[52. 남산동(南山洞_수록암)]] 현 강화읍 화성길
(N)[[251.능촌동(陵村洞)]] 현 불은면 덕성리
+
(B) 37.739427, 126.482456, [[53. 구춘당(九春堂*)]] 현 강화읍 남산리 산21
(O) 37.677455, 126.496196, [[252.능촌(陵村)]] 현 불은면 두운리 1482 능촌입구
+
(C) 37.738121, 126.482706, [[54. 청송심씨(靑松沈氏*)]] 현 강화읍 부조고개길
(P) 37.687287, 126.501630, [[253.고잔동(高盞洞)]] 현 불은면 고능리 710-4
+
(D) 37.742052, 126.487058, [[55. 부내12동(府內12洞*)]] 현 강화읍 남문로
(Q) 37.688276, 126.501549, [[254.지천(芝川)]] 현 불은면 고릉리 (고잔마을 지레)
+
(E) 37.734451, 126.516065, [[56. 진보 돈대(鎭堡墩臺*)]] 현 강화읍 갑곳리 갑곶돈대
(R) 37.692192, 126.495413, [[255.곶내동(串內洞)]] 현 불은면 고릉리 고능로262번길(아침가리마을)
+
(F) 37.744102, 126.487152, [[57. 충신 이춘일(李春一*)]] 강화산성남문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일원
(S) 37.683937, 126.491910, [[256.두두미(斗頭尾)]]현 불은면 두운리 712-2(두두미마을)
+
(G) 37.739253, 126.474012, [[58. 남대제월(南臺霽月)]]강화읍 남산리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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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37.747762, 126.476693, [[59. 서문동(西門洞)]]강화읍 신문리 621-4 연무당 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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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37.741810, 126.459236, [[60. 국정동(國淨洞)]] 현 강화읍 국화리 3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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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61. 맥현제단(麥峴祭壇)]]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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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62. 사직단(社稷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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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37.754031, 126.477765, [[63. 문묘(文廟)]] 현 강화읍 관청리 936-1 강화향교내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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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37.753860, 126.478324, [[64. 명륜당(明倫堂)]] 현 향교길 강화군 강화읍 강화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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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37.754014, 126.478194, [[65. 강당(講堂) 안연재(安燕齋)]] 현 강화읍 관청리 9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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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37.755553, 126.482822, [[66. 북문(北門)]] 강화산성북문 강화읍 국화리 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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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7.763184, 126.484513, [[67. 여제단(厲祭壇)]]?? 현 강화읍 대산리 1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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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37.759656, 126.476231, [[68. 당주동(唐州洞)]] 현 강화군 송해면 당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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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인물==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2783&cid=46622&categoryId=46622 남궁찬](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여헌(汝獻), 호는 창랑(滄浪). 제주목사·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2783&cid=46622&categoryId=46622 남궁찬](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여헌(汝獻), 호는 창랑(滄浪). 제주목사·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 남궁제(南宮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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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87_015713 남궁제(南宮埞)]
* 남궁헌(南宮(金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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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헌(南宮𨯶 南宮(金憲))
* 남궁철(南宮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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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27_020672 남궁철(南宮澈)]
* 남궁일(南宮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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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84_015466 남궁일(南宮鎰)]
 
* 남궁주(南宮澍)
 
* 남궁주(南宮澍)
  

2019년 5월 5일 (일) 13:49 판

壽祿巖前壽祿 (수록암전수록)     수록암 앞에 살면 수명 복록이 늘어난다는데, 
南宮世世卜居 (남궁세세복거) 남궁씨 가문이 대를 이어 살고 있네.
乃知壽祿由心德 (내지수록유심덕) 수명과 복록은 심덕(心德)에서 나옴을 알겠으니,
一鑑東天水月 (일감동천수월) 동쪽 하늘 물에 비친 달을 거울삼고 살았네.


함열 남궁씨 부제학 남궁찬(南宮璨)의 후손이 수록암 마을에서 대대로 세습하여 살았다. 손자 남궁제(南宮埞)는 진사로서 행실과 의리에 돈독하였다. 향리에서 장녕전(長寧殿) 참봉에 제수된 것으로 인하여 형조좌랑 회덕 현감을 지냈다.

○ 그 아들 남궁헌(南宮𨯶)은 관직이 인동 부사에 이르렀는데 효행이 뛰어났었다. 영조 계유년(1753)에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그 아들 남궁철(南宮澈)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 후손 가선대부 남궁일(南宮鎰)과 남궁주(南宮澍) 부자는 향반(鄕班)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어찌 장수와 복록의 징험이 아니겠는가?


기행지도



인물


참고

  • 강화읍 남산리이다.
  • 이형상 ≪강도지≫에 보이는 남산 남쪽에 수륙암리(水陸庵里)가 수록암·술감으로도 불린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