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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9일 (월) 06:43 판

한국 공연 관광의 효시, 워커힐쇼

워커힐쇼 초기 공연 모습

워커힐쇼는 1963년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 개관 이래 2012년까지 48년간 운영된 워커힐 내의 공연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정부에서 워커힐의 건립을 추진한 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었지만, 관광산업의 진흥을 꾀하고 관광시설을 개발함으로써 경제발전을 도모하려는 목적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워커힐은 단순한 호텔이 아닌 리조트의 개념으로 건립되었으며, 개관과 동시에 외래 관광객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도 함께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즉 워커힐쇼는 외국인을 위한 국내 최초의 호텔 공연이자 공연 관광의 시초였다고 볼 수 있다.

워커힐쇼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의 전통을 알릴 수 있는 민속공연과 해외에서 수입한 세계 정상급의 외국쇼를 함께 선보였으며, 일반 공연과 달리 객석에 고급 양식디너가 제공됨으로써 관객들은 쇼와 식음료를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이러한 형식의 호텔쇼는 아시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하고 유흥적인 공연 형태였다. 따라서 1960년대 미국인들과 1970년대 이후 일본, 홍콩, 대만, 중국 등 주로 아시아의 관광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까지도 외래 관광객들의 서울관광 필수 코스 중 하나였으며, 내국인들도 외국바이어 접대나 부모님을 위한 효도선물, 귀빈대접 등으로 많이 이용하는 콘텐츠였다.[1]

워커힐쇼의 역사
  • 1963년 - 퍼시픽나이트클럽 개관
  • 1978년 - 가야금 극장식당 개관, 제1회 외국쇼 Las Vegas on Ice
  • 1979년 - (주)워커힐프로덕션 설립
  • 1983년 - 워커힐민속무용단 설립
  • 2002년 - 한국전통민속공연 가련 오픈
  • 2008년 - 가야금 극장식당의 명칭을 워커힐시어터(Wakerhill Theater)로 변경
  • 2010년 - 워커힐 한국공연 꽃의 전설 오픈
  • 2012년 - 꽃의 전설 폐지

하니비쇼

하니비쇼단

초기의 워커힐쇼는 공연단인 "하니비"의 이름을 따서 "하니비쇼"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고, 이 이름은 1990년대까지 워커힐쇼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하니비쇼는 퍼시픽 나이트클럽이라는 식당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특이한 공연이었다. 하지만 주한 미군 등 외국인을 위한 전용쇼로서 외화 획득에 기여했고, 하니비쇼단이라는 무용단이 전부 내국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하니비쇼단의 첫 단원은 1962년 10월에 열린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었다.

허니비로 선발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은 162㎝ 이상의 신장과 고졸 이상의 학력, 18∼21세의 나이로 엄격했다. 허니비는 선발과 함께 연구생이 돼 6개월에 걸쳐 발레, 고전무용, 국악 등 전반적인 부분을 모두 배우고 이것이 숙달되고 1년이 지나면 허니비 가무단에 편성돼 1시간 동안 민속, 라인댄스, 뮤지컬 등 다양한 쇼를 보여줬던 것이다. 이런 허니비 가무단은 연구생이 70여 명이고 무대에 서는 현역은 35명 정도 규모였다.

- 출처: “60년대 쇼무대 지존 워커힐호텔”, 문화일보, 1962.10.11

워커힐호텔 개관 기념 축하 공연 당시 루이 암스트롱

퍼시픽 나이트클럽에서 열린 최초의 공연은 워커힐 준공 기념 축하 공연(1962년 12월 26일)이었다. 당시에는 하니비쇼단이 아직 완전히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8군의 유니버설 예능단에서 공연을 담당하였다.

하니비쇼단이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이듬해 열린 워커힐호텔 개관 기념 축하 공연(1963년 4월 8일)이었다. 이 공연은 할리우드의 공연기획자이자 제작자인 스티브 파커가 기획했으며, 파커는 부인인 여배우 셜리 맥클레인과 함께 워커힐을 방문하였다. 이 날은 미국의 재즈 가수이자 트럼펫 연주자인 루이 암스트롱이 특별공연을 가지기도 하였다.

당시 15세였던 윤복희가 이 공연에서 루이 암스트롱을 만났다는 에피소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미8군 무대에 출연하던 윤복희는 루이 암스트롱의 모창을 해서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공연 마지막 무대에서는 루이 암스트롱의 목말을 타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하니비쇼단은 워커힐호텔의 전속 무용단으로 민속쇼와 외국쇼 등을 공연하였다. 그리고 매년 군부대 위문공연과 양로원 방문 등 사회공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6년에는 대만 제일호텔에서 첫 해외 공연을 선보인 이후, 태국과 일본 등의 초청을 받으면서 해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호텔쇼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하니비쇼 관계자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선정적인 공연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관객들은 모두 정장을 반드시 착용해야 했고, 내국인의 경우 정부 고위급 인사나 외국인과 동반해야만 입장이 가능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공연장의 분위기와 관객을 매우 엄격하게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하니비쇼단의 이름은 2000년대 초반 워커힐민속무용단으로 개명되었다.

  • 하니비쇼 다이어그램

하니비쇼다이어그램.jpg

가야금 극장식당 시대

1970년대 워커힐쇼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65년 한국과 일본 사이의 국교가 정상화된 것[2]을 계기로, 197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인 관광객의 입국이 늘어났고 쇼 관람객들도 증가 추세를 보였다. 또한, 1978년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의 건립과 함께 가야금 극장식당이 개관하면서 워커힐쇼는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게 된다.

기존의 워커힐쇼 공연장은 구 본관 1층에 위치해 있던 퍼시픽 나이트클럽(퍼시픽 극장식당)이었지만, 신규 호텔이 건립됨에 따라 지하 1층에 가야금 극장식당이 개관하였다. 새로운 극장식당은 관객 수용 규모가 2배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최첨단 시설을 갖춘 당대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공연장이었다. 당시 국내의 무대장치 기술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라스베가스의 쇼디자이너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세트디자이너 등이 영입되어 극장이 완성되었다.

워커힐쇼의 공연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공연 기획에서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 업무의 규모도 한층 커졌고, 이같은 필요성에 따라 1979년 4월 워커힐 프로덕션이 설립되었다. 워커힐 프로덕션은 기존 하니비쇼의 제작진 및 연예인을 주축으로 하였으며, 워커힐쇼의 모든 업무를 관장함은 물론, 공연 기획 및 제작, 외국 공연 및 연예인의 수입, 초청 업무와 공급 등 제반 연예 사업을 벌임으로써 한국 연예업계의 진흥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3]

이 시기의 워커힐쇼는 재키박이라는 한국인 사회자 겸 가수가 한국어, 영어, 일본어 등의 3개 국어로 워커힐쇼를 소개함으로써 시작하였다. 또한 명원식오케스트라라는 전속 악단이 현장에서 쇼의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기도 하였다.

  • 워커힐쇼 다이어그램

워커힐쇼다이어그램.jpg


워커힐쇼의 변화와 쇠퇴

워커힐의 민속공연은 자체 예능팀이 주제와 컨셉, 시나리오와 내용 구성을 기획·제작해 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민속쇼의 제작비는 대략 3억원 정도로 한번 제작되면 3년 정도 공연되었다. 워커힐 민속공연은 1978년부터 1999년까지 주로 가야금 병창, 북춤, 탈춤, 군무, 살풀이, 사물놀이, 부채춤 등으로 이루어졌고, 이 밖에도 민요, 대중가요, 코미디 퍼포먼스 등이 함께 공연되었다.[4] 특정 주제나 제목이 없이 다양한 레퍼토리를 교차하며 이루어진 워커힐의 민속공연은 2002년 공연된 가련을 기점으로 정통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사용한 전통쇼라는 이름 대신 전통공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가련이 무대에 올려지던 2002년부터였다. 가련은 무고, 화관무, 태평무, 교방무, 장고춤, 바라춤, 부채춤 등과 같은 한국의 전통무용을 소재로 한 공연이었다. 특히, 중요무형문화재 승무의 예능보유자인 故 정재만(1948~2014)이 안무를 맡았고, 전통무용을 전공한 무용수들이 공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워커힐쇼는 사실상 쇠퇴기에 접어든다. 단체 외래관광객과 중장년층 내국인에 편중된 고객구조의 취약성은 개관 이래 전통적인 민속쇼와 레뷔쇼라는 혼합쇼의 질적 한계와 함께 지속적인 성장발전과 경쟁력 확보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5] 게다가 2002년 오페라의 유령 오리지널 내한팀의 한국 초연을 시작으로 태양의 서커스의 한국 공연,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 시장 확대와 국내 대형 창작 뮤지컬 제작으로 워커힐쇼의 질적 수준과 예술성을 능가하는 공연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소형 극장들의 건립 확대와 뮤지컬 전용극장이 오픈되는 상황은 워커힐쇼의 내국인 관객이탈을 더욱 가속화했다.[6]

워커힐쇼는 만성적인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보인다. 2006년에는 드라마 대장금을 모티브로 한 대향연이 제작되었고, 2009년에는 사물놀이, 승무, 탈놀이, 오고무 등 한국의 전통무용으로 구성된 동방의 빛을 선보였다. 그러나 동방의 빛 역시 흥행에 실패했고, 워커힐은 2010년 꽃의 전설을 통해 대대적인 변화를 꾀하였다.

2010년 초연된 꽃의 전설은 워커힐에서 자체 기획, 제작한 워커힐쇼 최초의 단독 민속공연이었으며, 한국 전통무용과 연희에 마샬아츠와 비보잉 등을 접목한 공연이었다. 이후 내용을 개편한 꽃의 전설 2가 2011년부터 공연되었지만 여전히 관객 수는 증가하지 않았다. 결국 누적된 적자와 관객 감소로 인해 2012년 3월 꽃의 전설2는 막을 내렸고, 이것이 워커힐쇼의 마지막이 되었다.


갤러리

관련 문서

주석

  1. 이상연, 『공연관광 효시 워커힐쇼의 사적 변천과정 고찰』,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예술경영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5, 1쪽.
  2. "한일국교정상화협상",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21세기 정치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3. 1981년 워커힐 프로덕션은 쉐라톤 워커힐에 합병되었다.
  4. 위의 논문, 87쪽.
  5. 위의 논문, 109쪽.
  6. 위의 논문, 1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