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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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대표명칭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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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명칭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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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Rock-carved Buddha Triad in Yonghyeon-ri, Seosan
 
|주소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마애삼존불길 65-13 (용현리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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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磨崖佛이 위치한 서산 일대는 백제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 지역이 백제의 수도가 아닌 지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적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서산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이다. 이 지역은 당시 주요 대외 교통로로서 중국문화의 전래와 정착이 다른 지역보다 앞섰기 때문에 백제 안에서도 특수한 문화권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산 磨崖佛이 위치한 서산 일대는 백제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 지역이 백제의 수도가 아닌 지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적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서산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이다. 이 지역은 당시 주요 대외 교통로로서 중국문화의 전래와 정착이 다른 지역보다 앞섰기 때문에 백제 안에서도 특수한 문화권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산과 태안지역은 백제 이전에는 마한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백제의 영역으로 포함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이왕(234-286)이 마한의 중심권인 목지국(인천)을 병합했을 때 백제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f>이경희, 「瑞山磨崖三尊佛像의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pp. 5~7 참조.</ref> 이 일대는 고이왕의 서해진출의 경로로 활용되었다. 서산·당진지역이 중국과의 교류에 주요 루트로 사용된 것은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겨 공주로 도읍을 옮긴 5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다.<ref>瑞山郡, 『瑞山·泰安 文化遺蹟』 上 (瑞山文化院, 1991), p. 30참조.</ref> 백제는 서해의 해안선을 확보하고 있어 중국과의 대외교섭에 유리하였으며 그 중 하나가 서산·당진을 위시한 태안반도인 것이다. 더불어 고려시대에는 중국 사신들도 태안반도를 통해 무역을 하였으며,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장점으로 서산·태안·당진 일대는 對中 교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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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과 태안지역은 백제 이전에는 마한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백제의 영역으로 포함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이왕(234-286)이 마한의 중심권인 목지국(인천)을 병합했을 때 백제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f>이경희, 「瑞山磨崖三尊佛像의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pp. 5~7 참조.</ref> 이 일대는 고이왕의 서해진출의 경로로 활용되었다. 서산·당진지역이 중국과의 교류에 주요 루트로 사용된 것은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겨 공주로 도읍을 옮긴 5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다.<ref>瑞山郡, 『瑞山·泰安 文化遺蹟』 上 (瑞山文化院, 1991), p. 30참조.</ref> 백제는 서해의 해안선을 확보하고 있어 중국과의 대외교섭에 유리하였으며 그 중 하나가 서산·당진을 위시한 태안반도인 것이다. 더불어 고려시대에는 중국 사신들도 태안반도를 통해 무역을 하였으며,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장점으로 서산·태안·당진 일대는 對中 교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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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교통로의 역할로 인해 중국문화의 수입과 남해를 통한 일본과의 교류로 한·중·일 삼국 사이에 가교적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백제문화가 발달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더욱이 서산·당진을 위시한 태안반도 일대는 외래문물이 들어오는 初入路였기 때문에 백제 안에서도 다양하고 개방적인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f>이경희, 앞의 논문, p. 8 참조.</ref>
 
이러한 교통로의 역할로 인해 중국문화의 수입과 남해를 통한 일본과의 교류로 한·중·일 삼국 사이에 가교적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백제문화가 발달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더욱이 서산·당진을 위시한 태안반도 일대는 외래문물이 들어오는 初入路였기 때문에 백제 안에서도 다양하고 개방적인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f>이경희, 앞의 논문, p. 8 참조.</ref>
  
 
=='''磨崖三尊佛像'''<ref>문명대, 「서산 백제 마애삼존불상의 도상 해석」, 『觀佛과 古拙美』 (예경, 2003) pp. 309~345 참조.</ref>==  
 
=='''磨崖三尊佛像'''<ref>문명대, 「서산 백제 마애삼존불상의 도상 해석」, 『觀佛과 古拙美』 (예경, 2003) pp. 309~345 참조.</ref>==  
 
서산 磨崖三尊佛像은 1959년 4월 말 김상기·이홍직·홍사준 선생 등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5월 26일 황수영·김재원 박사가 정식으로 조사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산 磨崖三尊佛像은 1959년 4월 말 김상기·이홍직·홍사준 선생 등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5월 26일 황수영·김재원 박사가 정식으로 조사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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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백제의 불교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에는 남조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후 수·당대에는 수도 지역의 불교가 주로 수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위덕왕(553-597), 무왕(600-640), 성왕(523-553) 등 세 명의 왕이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반에 걸쳐 1세기라는 기간을 집권하면서 국력이 크게 강화되고 불교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이때의 불교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마애불 형식인 서산의 磨崖三尊佛像인 것이다.  
 
당시 백제의 불교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에는 남조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후 수·당대에는 수도 지역의 불교가 주로 수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위덕왕(553-597), 무왕(600-640), 성왕(523-553) 등 세 명의 왕이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반에 걸쳐 1세기라는 기간을 집권하면서 국력이 크게 강화되고 불교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이때의 불교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마애불 형식인 서산의 磨崖三尊佛像인 것이다.  
  
 
==='''본존불입상'''===
 
==='''본존불입상'''===
 
본존불입상은 묵중하고 중후한 형태로 정면향하여 서 있다. 얼굴에는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눈은 행실형(은행알 모양)이고 눈시울은 볼록하며 고식의 눈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런 눈은 중생제도에 전념하는, 행동하는 대승적인 佛眼이다. 코밑이 넓고 두터워 큼직한 코가 되었는데 입과 인중이 조화되어 佛眼을 생기 있게 만들고 있다. 이마에는 백호 구멍이 작게 표현되어 있다. 이런 얼굴은 백제적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며 자비무한하고 순진무구한 백제의 불교적 이상을 잘 표현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본존불입상은 묵중하고 중후한 형태로 정면향하여 서 있다. 얼굴에는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눈은 행실형(은행알 모양)이고 눈시울은 볼록하며 고식의 눈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런 눈은 중생제도에 전념하는, 행동하는 대승적인 佛眼이다. 코밑이 넓고 두터워 큼직한 코가 되었는데 입과 인중이 조화되어 佛眼을 생기 있게 만들고 있다. 이마에는 백호 구멍이 작게 표현되어 있다. 이런 얼굴은 백제적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며 자비무한하고 순진무구한 백제의 불교적 이상을 잘 표현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본존의 체구는 웅대한 편이다. 어깨가 넓고 당당하며 둥글면서도 역동감 있게 처리하여 육중하게 보이며 하체도 넓고 묵중하여 전체적으로 웅대한 체구를 자랑하고 있다. 이런 특징은 6세기 후반기에서부터 7세기 전반기까지 삼국 불상의 주류적인 경향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나 현재 많은 예가 남아 있지 못한 편이다. 이 불 상은 가슴이나 허리, 다리 등 신체의 굴곡이 표현되지 않아 원통형 체구를 보여주고 있다. 두꺼운 불의에 싸여 있어서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다. 통견의는 가슴에 U자형으로 넓고 길게 그리면서 발가락까지 흘러내렸으며 층단과 선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승각기를 묶은 매듭도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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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존의 체구는 웅대한 편이다. 어깨가 넓고 당당하며 둥글면서도 역동감 있게 처리하여 육중하게 보이며 하체도 넓고 묵중하여 전체적으로 웅대한 체구를 자랑하고 있다. 이런 특징은 6세기 후반기에서부터 7세기 전반기까지 삼국 불상의 주류적인 경향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나 현재 많은 예가 남아 있지 못한 편이다. 이 불 상은 가슴이나 허리, 다리 등 신체의 굴곡이 표현되지 않아 원통형 체구를 보여주고 있다. 두꺼운 불의에 싸여 있어서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다. 통견의는 가슴에 U자형으로 넓고 길게 그리면서 발가락까지 흘러내렸으며 층단과 선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승각기를 묶은 매듭도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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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은 오른손의 시무외인과 왼손이 여원인의 새끼손가락과 약지를 구부린 특징 있는 수인인데 특히 백제불상에서 특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광배는 보주형 머리광배로 신체에 비해서 유난히 큼직한 편이며 머리 주위의 연꽃무늬와 그 외곽의 불꽃무늬로 구성되어 있다. 대좌는 연꽃 대좌로 중심의 원만하고 부드러운 것과 좌우 각 두 잎이 좌우로 곡선적인 꽃모양을 이루고 있다.
 
수인은 오른손의 시무외인과 왼손이 여원인의 새끼손가락과 약지를 구부린 특징 있는 수인인데 특히 백제불상에서 특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광배는 보주형 머리광배로 신체에 비해서 유난히 큼직한 편이며 머리 주위의 연꽃무늬와 그 외곽의 불꽃무늬로 구성되어 있다. 대좌는 연꽃 대좌로 중심의 원만하고 부드러운 것과 좌우 각 두 잎이 좌우로 곡선적인 꽃모양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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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구도의 문제이다. 서산과 가까운 태안마애삼존불상과는 다르게 좌 반가사유상, 우 보살입상이라는 기발한 삼존불상을 이루고 있다. 불상 외쪽의 바위 면이 보다 낮고 협소한 점도 참작되었을 것이고, 조성의 사상적인 면도 고려되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또한 이형의 대칭미가 우선적으로 전제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구도의 문제이다. 서산과 가까운 태안마애삼존불상과는 다르게 좌 반가사유상, 우 보살입상이라는 기발한 삼존불상을 이루고 있다. 불상 외쪽의 바위 면이 보다 낮고 협소한 점도 참작되었을 것이고, 조성의 사상적인 면도 고려되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또한 이형의 대칭미가 우선적으로 전제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형태적인 특징이다. 어깨는 한결같이 둥글고 원만하며 체구는 묵중하지만 다소 양감이 느껴지도록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다. 특히 본존의 눈과 뺨을 팽창시키고 입가에 보조개를 만들어 만면에 미소를 띠게 한 한국적인 장자풍의 얼굴은 가장 한국적인 부처님의 얼굴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반가사유상의 얼굴은 훨씬 자연스러워진 모습이며 이런 얼굴형은 인도·서역 등 어디에도 없는 佛眼이어서 주목된다.
 
둘째, 형태적인 특징이다. 어깨는 한결같이 둥글고 원만하며 체구는 묵중하지만 다소 양감이 느껴지도록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다. 특히 본존의 눈과 뺨을 팽창시키고 입가에 보조개를 만들어 만면에 미소를 띠게 한 한국적인 장자풍의 얼굴은 가장 한국적인 부처님의 얼굴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반가사유상의 얼굴은 훨씬 자연스러워진 모습이며 이런 얼굴형은 인도·서역 등 어디에도 없는 佛眼이어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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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양감과 선의 특징이다. 형태미와 마찬가지로 얼굴의 양감이 풍부하지만 부드럽고 온화하며 원만한 면이 삼존상 모두에 표현되어 있다. 얼굴의 윤곽선이나 옷주름 선 그리고 광배의 문양이 나타내고 있는 선의 미는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이지만 이 선에는 내밀한 힘이 들어 있는 것이다.
 
셋째, 양감과 선의 특징이다. 형태미와 마찬가지로 얼굴의 양감이 풍부하지만 부드럽고 온화하며 원만한 면이 삼존상 모두에 표현되어 있다. 얼굴의 윤곽선이나 옷주름 선 그리고 광배의 문양이 나타내고 있는 선의 미는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이지만 이 선에는 내밀한 힘이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磨崖三尊佛像은 삼국시대 특히 백제 불교의 조상 의지를 알 수 있게 해주며 우리와 가장 친근한 불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지 않나 한다.
 
따라서 磨崖三尊佛像은 삼국시대 특히 백제 불교의 조상 의지를 알 수 있게 해주며 우리와 가장 친근한 불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지 않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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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대, 「서산 백제 마애삼존불상의 도상 해석」, 『觀佛과 古拙美』,예경,  2003.  
 
*문명대, 「서산 백제 마애삼존불상의 도상 해석」, 『觀佛과 古拙美』,예경,  2003.  
*이경희, 「瑞山磨崖三尊佛像의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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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瑞山磨崖三尊佛像의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瑞山郡, 『瑞山·泰安 文化遺蹟』 上, 瑞山文化院, 1991.
 
*瑞山郡, 『瑞山·泰安 文化遺蹟』 上, 瑞山文化院,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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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봄 답사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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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6일 (토) 02:28 기준 최신판


역사적. 지리적 환경

서산 磨崖佛이 위치한 서산 일대는 백제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 지역이 백제의 수도가 아닌 지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적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서산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이다. 이 지역은 당시 주요 대외 교통로로서 중국문화의 전래와 정착이 다른 지역보다 앞섰기 때문에 백제 안에서도 특수한 문화권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산과 태안지역은 백제 이전에는 마한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백제의 영역으로 포함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이왕(234-286)이 마한의 중심권인 목지국(인천)을 병합했을 때 백제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 이 일대는 고이왕의 서해진출의 경로로 활용되었다. 서산·당진지역이 중국과의 교류에 주요 루트로 사용된 것은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겨 공주로 도읍을 옮긴 5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다.[2] 백제는 서해의 해안선을 확보하고 있어 중국과의 대외교섭에 유리하였으며 그 중 하나가 서산·당진을 위시한 태안반도인 것이다. 더불어 고려시대에는 중국 사신들도 태안반도를 통해 무역을 하였으며,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장점으로 서산·태안·당진 일대는 對中 교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교통로의 역할로 인해 중국문화의 수입과 남해를 통한 일본과의 교류로 한·중·일 삼국 사이에 가교적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백제문화가 발달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더욱이 서산·당진을 위시한 태안반도 일대는 외래문물이 들어오는 初入路였기 때문에 백제 안에서도 다양하고 개방적인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3]

磨崖三尊佛像[4]

서산 磨崖三尊佛像은 1959년 4월 말 김상기·이홍직·홍사준 선생 등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5월 26일 황수영·김재원 박사가 정식으로 조사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백제의 불교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에는 남조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후 수·당대에는 수도 지역의 불교가 주로 수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위덕왕(553-597), 무왕(600-640), 성왕(523-553) 등 세 명의 왕이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반에 걸쳐 1세기라는 기간을 집권하면서 국력이 크게 강화되고 불교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이때의 불교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마애불 형식인 서산의 磨崖三尊佛像인 것이다.

본존불입상

본존불입상은 묵중하고 중후한 형태로 정면향하여 서 있다. 얼굴에는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눈은 행실형(은행알 모양)이고 눈시울은 볼록하며 고식의 눈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런 눈은 중생제도에 전념하는, 행동하는 대승적인 佛眼이다. 코밑이 넓고 두터워 큼직한 코가 되었는데 입과 인중이 조화되어 佛眼을 생기 있게 만들고 있다. 이마에는 백호 구멍이 작게 표현되어 있다. 이런 얼굴은 백제적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며 자비무한하고 순진무구한 백제의 불교적 이상을 잘 표현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본존의 체구는 웅대한 편이다. 어깨가 넓고 당당하며 둥글면서도 역동감 있게 처리하여 육중하게 보이며 하체도 넓고 묵중하여 전체적으로 웅대한 체구를 자랑하고 있다. 이런 특징은 6세기 후반기에서부터 7세기 전반기까지 삼국 불상의 주류적인 경향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나 현재 많은 예가 남아 있지 못한 편이다. 이 불 상은 가슴이나 허리, 다리 등 신체의 굴곡이 표현되지 않아 원통형 체구를 보여주고 있다. 두꺼운 불의에 싸여 있어서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다. 통견의는 가슴에 U자형으로 넓고 길게 그리면서 발가락까지 흘러내렸으며 층단과 선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승각기를 묶은 매듭도 표현되어 있다.

수인은 오른손의 시무외인과 왼손이 여원인의 새끼손가락과 약지를 구부린 특징 있는 수인인데 특히 백제불상에서 특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광배는 보주형 머리광배로 신체에 비해서 유난히 큼직한 편이며 머리 주위의 연꽃무늬와 그 외곽의 불꽃무늬로 구성되어 있다. 대좌는 연꽃 대좌로 중심의 원만하고 부드러운 것과 좌우 각 두 잎이 좌우로 곡선적인 꽃모양을 이루고 있다.

좌협시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본존 석가불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보다 유연하게 묘사되어 있다. 원광과 상부를 뾰족하게 처리하여 보주형을 이루게 한 특이한 머리광배가 돋보이며 내원 안에 새겨진 12엽의 단판 연꽃무늬는 백제 숫막새 기와의 부드러운 연꽃무늬와 동일한 것으로 본존불 광배와 일치한다. 보관은 당초무늬와 유사한 무늬를 이루며 관대가 좌우로 내려가 보주형 목걸이를 지나 가슴까지 내려가고 있다.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양감 있게 표현되었고 입가에 보조개를 지었다. 왼다리를 내리고 오른다리 발목을 왼다리 무릎 위에 올리면서 오른손을 오른쪽 뺨에 살짝 댄 특이한 반가사유 자세로 앉아 있다. 대좌는 복련으로 되어 있으며 좀 더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우협시 봉보주보살입상

본존불의 오른쪽에는 보살입상이 반가사유상과 이형 대칭으로 서있다. 광배나 대좌는 좌협시 반가사유상과 동일하지만 입상 형태는 고식의 바탕이 있는 날씬한 장신형이다. 얼굴은 반가사유상보다 한결 갸름한 미인형으로 가는 눈, 작은 입, 통통한 뺨, 만면한 미소는 백제 미의 전형적인 얼굴이다. 머리 위의 높은 고관은 정면의 삼각형 장식과 주위의 꽃무늬 문양이 새겨진 것으로 인도 마투라 보살상 보관에서부터 유래해서 중국을 거쳐 삼국시대 보살상에 나타난다.

磨崖三尊佛像의 양식 특징

磨崖三尊佛像의 특징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구도의 문제이다. 서산과 가까운 태안마애삼존불상과는 다르게 좌 반가사유상, 우 보살입상이라는 기발한 삼존불상을 이루고 있다. 불상 외쪽의 바위 면이 보다 낮고 협소한 점도 참작되었을 것이고, 조성의 사상적인 면도 고려되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또한 이형의 대칭미가 우선적으로 전제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형태적인 특징이다. 어깨는 한결같이 둥글고 원만하며 체구는 묵중하지만 다소 양감이 느껴지도록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다. 특히 본존의 눈과 뺨을 팽창시키고 입가에 보조개를 만들어 만면에 미소를 띠게 한 한국적인 장자풍의 얼굴은 가장 한국적인 부처님의 얼굴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반가사유상의 얼굴은 훨씬 자연스러워진 모습이며 이런 얼굴형은 인도·서역 등 어디에도 없는 佛眼이어서 주목된다.

셋째, 양감과 선의 특징이다. 형태미와 마찬가지로 얼굴의 양감이 풍부하지만 부드럽고 온화하며 원만한 면이 삼존상 모두에 표현되어 있다. 얼굴의 윤곽선이나 옷주름 선 그리고 광배의 문양이 나타내고 있는 선의 미는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이지만 이 선에는 내밀한 힘이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磨崖三尊佛像은 삼국시대 특히 백제 불교의 조상 의지를 알 수 있게 해주며 우리와 가장 친근한 불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지 않나 한다.

사진 및 도면

사진

도면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 문명대, 「서산 백제 마애삼존불상의 도상 해석」, 『觀佛과 古拙美』,예경, 2003.
  • 이경희, 「瑞山磨崖三尊佛像의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 瑞山郡, 『瑞山·泰安 文化遺蹟』 上, 瑞山文化院, 1991.


답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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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이경희, 「瑞山磨崖三尊佛像의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pp. 5~7 참조.
  2. 瑞山郡, 『瑞山·泰安 文化遺蹟』 上 (瑞山文化院, 1991), p. 30참조.
  3. 이경희, 앞의 논문, p. 8 참조.
  4. 문명대, 「서산 백제 마애삼존불상의 도상 해석」, 『觀佛과 古拙美』 (예경, 2003) pp. 309~3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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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장원석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