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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정보
 
{{문화유산정보
|대표명칭 = 경포대(鏡浦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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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강릉 경포대
 
|지정번호 = 강원유형문화재 제6호
 
|지정번호 = 강원유형문화재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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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 1971년 12월 16일
 
|지정명칭 = 경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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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칭 = 鏡浦臺
 
|영문명칭 =  Gyeongpodae
 
|영문명칭 =  Gyeongpod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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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누각
 
|주소 = 강원도 강릉시 경포로 365(저동 94)
 
|주소 = 강원도 강릉시 경포로 365(저동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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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podae Pavi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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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podae Pavilion located on an upland overlooking Gyeongpoho Lagoon. Regarded as one of the Eight Scenic Views of Gwangdong or Eastern Korea, it is designated as National Scenic Site No. 108. It was constructed by Bak Suk, a local administrative official, in the late Goryeo Period (918-1392), but underwent many renovations. The Pavilion attracted numerous visitors, among whom were renowned scholars, poets, and painters who created odes to the beautiful scenery in awe. Inside the pavilion, visitors can see wooden steles by renowned scholars, including the one with engravings of ''Gyeongpodaebu'' by Yi Yulgok. Gyeongpodae Pavilion also reflects the changes in architectural style over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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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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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는 익공계양식에 팔작지붕으로 건축된 누대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경포8경]](녹두일출, 죽도명월, 강문어화, 초당취연, 홍장야우, 증봉낙조, 환선취적, 한송모종) 및 [[경포월삼]](월주, 월탑, 월파)은 천하의 장관이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604&cid=42840&categoryId=42847" 경포대『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2017.04.15 </ref>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지방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6칸, 측면 5칸, 기둥 32주(柱)의 팔작지붕 겹처마기와집의 누대(樓臺)로, 강릉 [[오죽헌(烏竹軒)]]에 있던 [[율곡(栗谷)]]이 10세 때에 지었다고 하는 《경포대부(鏡浦臺賦)》를 판각(板刻)하여 걸었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609&cid=40942&categoryId=33608" 경포대[鏡浦臺] 『두산백과』2017.04.15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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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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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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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는 1326년(충숙왕 13) 강원도안렴사였던 [[박숙]]이 신라의 사선(四仙)이 놀았다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세웠다가 그 뒤 1508년(중종 3)에 강릉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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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5칸, 측면 5칸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경포대는 우물천장을 하게 마련인 팔작지붕인데도 연등천장이며, 주춧돌도 자연석을 그대로 놓은 뒤 기둥에 딸린 부위만 둥글게 다듬어놓았다. 1626년(인조 4) 강릉부사 [[이명준]]이 크게 중수하였다.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던 [[장유]]가 지은 『중수기』에는 “태조와 세조도 친히 경포대에 올라 사면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라고 적혀 있다. 현재의 건물은 1745년(영조 21) 부사 [[조하망]]이 세운 것이며, 낡은 건물은 헐어낸 다음 홍수로 사천면 근처 앞바다까지 떠내려온 아름드리나무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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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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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 중 첫손에 꼽히는 경치를 자랑하는 경포대의 현판은 전서체와 해서체로 쓴 것 두 개가 있다. 해서체는 순조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이익회]]가 썼고, 전서체는 조선 후기의 서예가 [[유한지]]가 썼다. 제일강산(第一江山)은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館)을 썼다고 알려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글씨라고도 하고 또는 조선 전기 4대 서예가 중의 한 사람인 [[양사언]]의 글씨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뒷부분의 파손된 두 글자는 후세 사람이 써서 덧붙인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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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숙종의 어제시와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사람의 글이 걸려 있는 가운데 율곡 이이가 열 살 무렵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도 편액되어 있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0322&cid=43723&categoryId=43731" 관동제일루 경포대『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2017.04.15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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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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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경포호수는 옛날에 어느 부자가 살던 곳이었다. 하루는 중이 그 부자에게 쌀 시주를 청하였는데 그가 똥을 퍼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 부자가 살던 곳이 내려앉아서 호수가 되었고, 쌓였던 곡식은 모두 작은 조개로 변하였다. 해마다 흉년이 들면 조개가 많이 나고 풍년이 들면 적게 나는데, 조개의 하나인 맛의 맛이 달고 향긋하여 요기할 만하며, 세상 사람은 이를 적곡조개라 한다. 봄여름이면 먼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운 조개를 이고 지고 갔다. 호수 밑바닥에는 아직 기와 부스러기와 그릇들이 남아 있어 헤엄을 치는 사람들이 가끔 줍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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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거울처럼 맑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경포호에는 달이 네 개가 뜬다는 말이 있다. 하늘에 뜨는 달이 하나요,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그리고 술잔에도 똑같은 달이 뜬다는 말이다. 요즘은 여기에 하나가 덧붙여진다고 말한다. 하늘, 바다, 호수, 술잔 그리고 상대방의 눈동자에 또 하나의 달이 뜬다는 경포호는 사람에게 유익함을 준다는 뜻으로 군자호(君子湖)라고도 불린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0322&cid=43723&categoryId=43731" 관동제일루 경포대『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2017.04.15 </ref>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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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강릉시 저동, 운정동, 초당동의 [[경포호수]] 북쪽에 위치한 누각으로, [[경포대해수욕장]]과 가까운 곳에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경포호수]]를 내려다보는 위치인데, [[경포대해수욕장]]찾는 사람은 많아도 경포대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경포대는 1326년(충숙왕 13) 강원도안렴사였던 [[박숙]]이 신라의 사선(四仙)이 놀았다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세웠다가 뒤 1508년(중종 3)에 강릉부사 [[한급]]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0322&cid=43723&categoryId=43731]" 관동제일루 경포대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 10. 5., 다음생각),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ref>
+
*[[이익회]]
이 건물은 익공계양식에 팔작지붕으로 건축된 누대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경포8경]](녹두일출, 죽도명월, 강문어화, 초당취연, 홍장야우, 증봉낙조, 환선취적, 한송모종) 및 [[경포월삼]](월주, 월탑, 월파)은 천하의 장관이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604&cid=42840&categoryId=42847" 경포대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초판 1994., 21쇄 2011., 돌베개)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
*[[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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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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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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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8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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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두일출(綠豆日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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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정에서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는 것을 말하며, 옛 한송정으로서 현 강릉비행장 동쪽에 위치하였으며, 경포대의 정동(正東)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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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도명월(竹島明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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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동쪽에 있는 섬모양의 작은 산으로서 산죽이 무성하여 죽도라고 불렸는데 현 현대호텔자리이다. 동쪽 수평선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보름달의 달빛이 죽도의 대나무 사이를 뚫어 그 빛이 호수에 비칠 때 일어나는 그림같은 장관을 죽도명월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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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문어화(江門漁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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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은 경포대에서 동쪽 호수 하구에 있는 곳으로서 호수와 바다를 상통교류 하므로 강문이라고 했다. 오징어 잡는 고깃배의 불빛이 마치 항구의 불빛처럼 휘황찬란하게 보이는데, 빛이 바다와 호수에 영도되는 아름다운 광경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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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당취연(草堂炊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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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은 호수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지세가 호수와 바다보다 낮은 듯 보인다. 해가 서산마루 시루봉에 기울어질 무렵이면 집집마다 저녁을 짓는데 때 가가호호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노을에 물들어 평화로운 농촌을 연상케 하는데 그 평화로운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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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장야우(紅粧夜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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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장은 조선 초기에 석간 조운흘 부사가 강릉에 있을 즈음 부예기로 있었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모 감찰사가 강릉을 순방했을때 그를 극직히 대접한 홍장은 감찰사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감찰사는 뒷날 홍장과 석별하면서 몇 개월 후에 다시 오겠다고 언약을 남기고 떠나간다. 떠나간 님은 소식이 없고, 그리움에 사무친 홍장은 그만 호수에 빠져 죽게 된다. 이 때부터 이 바위를 홍장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안개 낀 비오는 날 밤이면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전한다. 꽃배에 임을 싣고 가야금에 흥을 돋우며 술 한잔 기울이던 옛선조들의 풍류정신을 회상하기 위한 기념으로서의 일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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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봉낙조(甑峰落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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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서산마루에 기울어질 무렵이면 채운이 시루봉(경포대 북쪽에 있으며, 그 생긴 봉우리 모양이 시루와 비슷하다) 북쪽 봉우리에서 경포 호수에 반영되는 일몰의 낙조가 잔물결에 부서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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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선취적(喚仙吹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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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경인 듯 하면서도, 속세를 떠난 속세인 듯 하면서도 신선경으로 생각되는 곳에 옛신선들이 바둑 놓고 피리불며 즐기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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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송모종(寒松暮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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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송정은 지금의 비행장 동쪽에 있다. 신라불교의 중흥기에 한송정에서 해질 무렵 치는 종소리가 경포호의 잔물결을 타고 신선이 놀던 경포대까지 은은히 들려오던 옛 정취를 회상한 것이다. <ref>"http://tip.daum.net/question/238722" 다음TIP에서 인용. 2017.04.15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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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월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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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주: 술잔에 비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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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탑: 임의 눈에 비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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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파: 경포호에 비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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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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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map>
  
 
 
=='''역사'''==
 
===시초===
 
월정사는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 유학을 마친 자장율사가 오대산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자장은 절을 세운 것은 아니었고,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 허름한 움막을 지었던 것이다. 고려말 민지가 지은 《봉암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라는 문헌에는 자장을 월정사의 최초 창건자로 보는 인식이 뚜렷히 나타나있고, 오늘날에도 월정사의 시초는 자장율사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ref>"[http://www.whlee.kr/bbs/board.php?bo_table=05_1&wr_id=43&page=6 월정사 역사와문화-1]"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작성일: 2014년 2월 3일</ref>
 
 
 
자장의 영향으로 인해 오대산은 문수보살을 모시는 문수신앙의 성지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오대산은 문수보살 뿐만아니라 다양한 불보살이 상주한다는 5만보살신앙으로 발전한다.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는 중앙의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는 각각 관음보살(동), 지장보살(서), 대세지보살(남), 미륵보살(북) 1만 분씩 상주하는 성지로 거듭난 것이다. <ref>"[http://woljeongsa.org/bbs/content.php?co_id=101010&tabs=2#tab 월정사소개]" 『오대산 월정사 홈페이지』</ref> 하지만 이때까지도 움막으로 기록되고 있던 월정사가 어엿한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신의]]가 이곳에 법당을 세우면서부터다. 이 시기를 전후로 월정사는 오대산 신앙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고려시대===
 
고려전기, 월정사는 창건 이래 최대 흥성기를 맞이했다. 사실 그 이전까지도 사찰로서 월정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초, [[선종]]의 아홉 갈래 승려집단을 일컫는 [[구산선문]] 중 강릉의 사굴산문이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월정사 또한 그 세력권에 포함되어 함께 발전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흥한 것도 잠시, 몽고의 침입 이후 다시 사세가 심하게 기울었다.<ref>"[http://www.whlee.kr/bbs/board.php?bo_table=05_1&wr_id=43&page=6 월정사 역사와문화-5]"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작성일: 2014년 2월 5일</ref> 이후 1377년(충렬왕 33)에는 절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다시 이일 스님이 중창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 때문에 불교가 전반적으로 쇠퇴했지만, 오대산 불교는 몇 가지 계기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첫번째는 조선 초기에 활약한 [[나옹]]의 문도들이 대거 오대산에 머무르면서 상원사와 월정사를 비롯한 오대산 불교권 전체가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두번째는 조선의 6대왕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불치의 병을 고치고, 이후 상원사를 중창하는데 적극적인 후원을 했기 때문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1358&cid=43723&categoryId=43732 오대산의 월정사]" 신정일,『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9: 우리산하』, 다음생각, 2012, 온라인참조: 네이버 지식백과</ref> 세번째는 16세기 말 쇠락했던 사찰을 [[사명대사]]가 중창하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왕실의 외사고(外史庫)가 이곳에 건립된 것이다. 이러한 여러 사건들은 억불정책 속에서도 월정사가 오히려 사세를 더욱 키워나갈 수 있도록 했다.
 
 
===해방이후===
 
해방 전후로는 당시 조계종의 최고 지도자를 4번이나 역임했던 [[한암]]이 오대산에 머무르면서, 상원사와 월정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로서 위상을 확립하게 된다. <ref>"[http://woljeongsa.org/bbs/content.php?co_id=101010&tabs=3#tab 월정사소개]" 『오대산 월정사 홈페이지』</ref> 하지만 곧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951년 1.4후퇴 때 사찰 대부분이 불타버렸지만, 이후에 [[탄허]], [[만화]], [[현해]] 등에 의해 다시 중건되어 월정사의 명맥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2017년 현재 월정사의 주지는 정념스님이다.
 
 
=='''지리'''==
 
평창 월정사가 위치한 오대산은 태백산맥의 한줄기로서 비로봉,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 다섯 봉우리가 오목하게 원을 그리며 누대를 이루고 있는 까닭에 붙여진 명칭이다. 즉, 오대산은 어느 하나의 봉우리를 지칭한다기보다는 다섯 봉우리를 아우르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이 봉우리에는 각각 중대(적멸보궁), 북대(미륵암), 서대(수정암), 동대(관음암), 남대(지장암)의 다섯 암자가 있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437&cid=42840&categoryId=42847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와 암자]" 한국문화유산답사회,『답사여행의 길잡이3 - 동해,설악』, 2011, 온라인참조: 네이버 지식백과</ref>
 
오대산은 자장이 월정사를 개창한 이래 불교신앙의 성산으로 추앙되어 왔다.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오대산은 "나라 안의 명산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삼국유사》「대산월정사 오류성중」) 라는 말이 있었다.<ref>"[http://www.whlee.kr/bbs/board.php?bo_table=05_1&wr_id=43&page=6 월정사 역사와문화-1]"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2014년 2월 3일 작성</ref>  또한 옛 사람들은 오대산을 '삼재가 들지 않는 명당 터'라 여기기도 했고 '어떤 재앙이 닥쳐도 안전한 땅'이라고 믿었다.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1358&cid=43723&categoryId=43732 오대산의 월정사]"신정일,『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9: 우리산하』, 다음생각, 2012, 온라인참조: 네이버 지식백과</ref> 
 
 
그런데 사실 오대산은 중국 산서성 북동부에 있는 청량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청량산 또한 동서남북중의 다섯 봉우리가 누대를 이루고 있어 오대산이라고 부르며, 예로부터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이곳은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있고, 월정사를 최초 창건한 자장이 신라로 돌아오기 이전에 문수보살을 만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중국의 오대산인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고 다시 신라의 오대산으로 돌아와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월정사가 세워졌으니 이는 매우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ref>"[http://www.whlee.kr/bbs/board.php?bo_table=05_1&wr_id=43&page=6 월정사 역사와문화-1]"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작성일: 2014년 2월 3일</ref>
 
 
오대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림지대로 동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며, 1975년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월정사로부터 상원사로 이어지는 10km의 계곡은 5백년 된 전나무들과 고산식물, 잡목들로 우거진 숲으로 수려하고 웅장한 경관을 자랑한다.
 
 
 
=='''관련 인물'''==
 
*[[나옹]]
 
*[[한암]]
 
*[[탄허]]
 
 
=='''경내 문화재'''==
 
*국보 48호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보물 제139호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보물 제1375호[[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
 
 
=='''가상현실'''==
 
 
<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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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참고문헌'''==
 
이도흠, 『오대산 월정사 이야기』, 민족사, 2013
 
 
   
 
   
 
=='''주석'''==
 
=='''주석'''==
 
<references/>
 
<references/>

2017년 4월 29일 (토) 18:19 기준 최신판


Gyeongpodae Pavilion

Gyeongpodae Pavilion located on an upland overlooking Gyeongpoho Lagoon. Regarded as one of the Eight Scenic Views of Gwangdong or Eastern Korea, it is designated as National Scenic Site No. 108. It was constructed by Bak Suk, a local administrative official, in the late Goryeo Period (918-1392), but underwent many renovations. The Pavilion attracted numerous visitors, among whom were renowned scholars, poets, and painters who created odes to the beautiful scenery in awe. Inside the pavilion, visitors can see wooden steles by renowned scholars, including the one with engravings of Gyeongpodaebu by Yi Yulgok. Gyeongpodae Pavilion also reflects the changes in architectural style over time.

정의

경포대는 익공계양식에 팔작지붕으로 건축된 누대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경포8경(녹두일출, 죽도명월, 강문어화, 초당취연, 홍장야우, 증봉낙조, 환선취적, 한송모종) 및 경포월삼(월주, 월탑, 월파)은 천하의 장관이다. [1]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지방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6칸, 측면 5칸, 기둥 32주(柱)의 팔작지붕 겹처마기와집의 누대(樓臺)로, 강릉 오죽헌(烏竹軒)에 있던 율곡(栗谷)이 10세 때에 지었다고 하는 《경포대부(鏡浦臺賦)》를 판각(板刻)하여 걸었다. [2]


내용

역사

경포대는 1326년(충숙왕 13) 강원도안렴사였던 박숙이 신라의 사선(四仙)이 놀았다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세웠다가 그 뒤 1508년(중종 3)에 강릉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경포대는 우물천장을 하게 마련인 팔작지붕인데도 연등천장이며, 주춧돌도 자연석을 그대로 놓은 뒤 기둥에 딸린 부위만 둥글게 다듬어놓았다. 1626년(인조 4) 강릉부사 이명준이 크게 중수하였다.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던 장유가 지은 『중수기』에는 “태조와 세조도 친히 경포대에 올라 사면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라고 적혀 있다. 현재의 건물은 1745년(영조 21) 부사 조하망이 세운 것이며, 낡은 건물은 헐어낸 다음 홍수로 사천면 근처 앞바다까지 떠내려온 아름드리나무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현판

관동팔경 중 첫손에 꼽히는 경치를 자랑하는 경포대의 현판은 전서체와 해서체로 쓴 것 두 개가 있다. 해서체는 순조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이익회가 썼고, 전서체는 조선 후기의 서예가 유한지가 썼다. 제일강산(第一江山)은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館)을 썼다고 알려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글씨라고도 하고 또는 조선 전기 4대 서예가 중의 한 사람인 양사언의 글씨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뒷부분의 파손된 두 글자는 후세 사람이 써서 덧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 밖에 숙종의 어제시와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사람의 글이 걸려 있는 가운데 율곡 이이가 열 살 무렵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도 편액되어 있다. [3]


전설

전설에 따르면, 경포호수는 옛날에 어느 부자가 살던 곳이었다. 하루는 중이 그 부자에게 쌀 시주를 청하였는데 그가 똥을 퍼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 부자가 살던 곳이 내려앉아서 호수가 되었고, 쌓였던 곡식은 모두 작은 조개로 변하였다. 해마다 흉년이 들면 조개가 많이 나고 풍년이 들면 적게 나는데, 조개의 하나인 맛의 맛이 달고 향긋하여 요기할 만하며, 세상 사람은 이를 적곡조개라 한다. 봄여름이면 먼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운 조개를 이고 지고 갔다. 호수 밑바닥에는 아직 기와 부스러기와 그릇들이 남아 있어 헤엄을 치는 사람들이 가끔 줍는다고 한다. 또한 거울처럼 맑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경포호에는 달이 네 개가 뜬다는 말이 있다. 하늘에 뜨는 달이 하나요,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그리고 술잔에도 똑같은 달이 뜬다는 말이다. 요즘은 여기에 하나가 덧붙여진다고 말한다. 하늘, 바다, 호수, 술잔 그리고 상대방의 눈동자에 또 하나의 달이 뜬다는 경포호는 사람에게 유익함을 준다는 뜻으로 군자호(君子湖)라고도 불린다. [4]


관련 인물


관련 절경

경포8경

  • 녹두일출(綠豆日出)

녹두정에서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는 것을 말하며, 옛 한송정으로서 현 강릉비행장 동쪽에 위치하였으며, 경포대의 정동(正東)을 가리킨다.

  • 죽도명월(竹島明月)

호수 동쪽에 있는 섬모양의 작은 산으로서 산죽이 무성하여 죽도라고 불렸는데 현 현대호텔자리이다. 동쪽 수평선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보름달의 달빛이 죽도의 대나무 사이를 뚫어 그 빛이 호수에 비칠 때 일어나는 그림같은 장관을 죽도명월이라 하였다.

  • 강문어화(江門漁火)

강문은 경포대에서 동쪽 호수 하구에 있는 곳으로서 호수와 바다를 상통교류 하므로 강문이라고 했다. 오징어 잡는 고깃배의 불빛이 마치 항구의 불빛처럼 휘황찬란하게 보이는데, 그 빛이 바다와 호수에 영도되는 아름다운 광경을 말한다.

  • 초당취연(草堂炊煙)

초당은 호수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지세가 호수와 바다보다 낮은 듯 보인다. 해가 서산마루 시루봉에 기울어질 무렵이면 집집마다 저녁을 짓는데 이 때 가가호호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노을에 물들어 평화로운 농촌을 연상케 하는데 그 평화로운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 홍장야우(紅粧夜雨)

홍장은 조선 초기에 석간 조운흘 부사가 강릉에 있을 즈음 부예기로 있었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모 감찰사가 강릉을 순방했을때 그를 극직히 대접한 홍장은 감찰사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감찰사는 뒷날 홍장과 석별하면서 몇 개월 후에 다시 오겠다고 언약을 남기고 떠나간다. 떠나간 님은 소식이 없고, 그리움에 사무친 홍장은 그만 호수에 빠져 죽게 된다. 이 때부터 이 바위를 홍장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안개 낀 비오는 날 밤이면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전한다. 꽃배에 임을 싣고 가야금에 흥을 돋우며 술 한잔 기울이던 옛선조들의 풍류정신을 회상하기 위한 기념으로서의 일경이다.

  • 증봉낙조(甑峰落照)

해가 서산마루에 기울어질 무렵이면 채운이 시루봉(경포대 북쪽에 있으며, 그 생긴 봉우리 모양이 시루와 비슷하다) 북쪽 봉우리에서 경포 호수에 반영되는 일몰의 낙조가 잔물결에 부서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말한다.

  • 환선취적(喚仙吹笛)

신선경인 듯 하면서도, 속세를 떠난 속세인 듯 하면서도 신선경으로 생각되는 곳에 옛신선들이 바둑 놓고 피리불며 즐기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을 말한다.

  • 한송모종(寒松暮鍾)

한송정은 지금의 비행장 동쪽에 있다. 신라불교의 중흥기에 한송정에서 해질 무렵 치는 종소리가 경포호의 잔물결을 타고 신선이 놀던 경포대까지 은은히 들려오던 옛 정취를 회상한 것이다. [5]

경포월삼

  • 월주: 술잔에 비친달
  • 월탑: 임의 눈에 비친달
  • 월파: 경포호에 비친달


위치


주석

  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604&cid=42840&categoryId=42847" 경포대『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2017.04.15
  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609&cid=40942&categoryId=33608" 경포대[鏡浦臺] 『두산백과』2017.04.15
  3.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0322&cid=43723&categoryId=43731" 관동제일루 경포대『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2017.04.15
  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0322&cid=43723&categoryId=43731" 관동제일루 경포대『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2017.04.15
  5. "http://tip.daum.net/question/238722" 다음TIP에서 인용. 2017.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