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선교장"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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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6일 (목) 09:55 판
강릉 선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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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 |
지정일 | 1967년 04월 20일 |
지정 명칭 | 강릉 선교장 |
한자 명칭 | 江陵船橋莊 |
영문 명칭 | Seongyojang House of Gangneung |
분류 | 역사관광지 > 고택 |
건립·제작 | |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63 (운정동) |
위도 | 37.786892 |
경도 | 128.885000 |
웹사이트 | http://www.knsgj.net |
정의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 이 집은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하게 한다고 하여 선교장이라고 하는데, 전주 사람 이내번(李乃蕃)이 지었다고 한다. [1]
위치
개요
강릉 선교장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예전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은 면적으로 조성되어 있을 때 배를 타고 건너다니던 배다리마을(선교리)에 위치하여 ‘선교장(船橋莊)’이라 붙였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 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2]
가상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