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상원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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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는 705년(성덕왕 4)에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에 의해 세워진 절이다. 상원사라는 명칭은 조선기에 붙여진 것이며 창건 초기에는 진여원(眞如院)이라 불렸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20여년 전 오대산에 들어간 두 왕자는 중대 남쪽 진여원 터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 두 형제는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오대에 나아가 항상 공경스레 예배를 드렸으며,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茶)를 달여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 때 신라의 왕이 죽자 나라사람들이 오대산으로 와서 두 왕자를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보천은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왕위에 올랐다. 보천은 705년 3월 8일 진여원을 처음으로 세운 뒤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였다. 또, 결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라고 하였고 복전(福田) 7원(員)을 두게 하였으며,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의 지원을 받았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7234 상원사(上院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7년 4월 5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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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는 어떠한 역사를 거쳤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동문선』의 「오대상원사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에 ""고려 말 극도로 황폐해진 절터를 본 영령암(英靈庵)이 절을 새로 짓고자 했다.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그의 부인 김씨(金氏)가 그 뜻을 듣고 재물을 보태서 1376년(우왕 2)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가을 완공하였다.그 해 겨울 선객(禪客) 33명을 모아 10년 좌선(坐禪)을 시작하였는데, 5년째인 1381년 5주년 기념법회를 열자, 승당의 불상이 방광을 하고 향내음을 풍겼다. 중창주 김씨 부인은 이 사실을 목도하고 더욱 불교를 믿는 마음이 지극해졌고, 토지와 노비를 시주하여 상원사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7234 상원사(上院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7년 4월 5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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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척불정책 속에 전국의 사찰이 황폐되었으나 오히려 이 절은 더욱 발전하였다. 척불정책의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할 3칸 집과 2칸의 목욕소를 만들었다. 그 해 겨울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왕림하여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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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태종은 권근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에 젖고 유명(幽明)이 함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記文)하여 구원(久遠)한 세대에게까지 알게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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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절은 세조가 문수동자(文殊童子)를 만나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일화가 서려 있는 세조의 원찰(願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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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상원사를 중창하게 된다. 1465년(세조 11) 학열이 공사의 총감독을 맡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는 경상감사(慶尙監司)에 명하여 쌀 500석을 내어 강릉부(江陵府)로 운반하게 하고, 비단 1,000필을 함께 내어 공사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1466년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졌는데, 크게 동서로 나눈 가람형식에 각각 상실(上室)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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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는 다섯 칸의 누각을 짓고 범종을 안치하였으며,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 서쪽에는 청련당(淸蓮堂)을 지었다. 청련당의 서편으로는 재주실(齋廚室)을 지어 승당(僧堂)과 선원(禪院)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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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石槽)와 집기(什器) 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유물들은 이때에 마련된 것이다. 그 뒤 인수대비는 탱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다시 조(租) 150석을 하사하고, 신미를 초대 주지로 모시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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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도 상원사의 역사가 이룩된 다음 상원사에 들러 의발(衣鉢)과 좌구(坐具) 등 수선(修禪)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그 해 52명의 선객을 모아 수선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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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1469년(예종 1)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고, 전대에 하사한 전답에 대해서는 조세(租稅)하는 것을 금하였다.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되어 온 이 절은 1946년 선원 뒤에 위치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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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상원사 [上院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 인물 및 설화'''==
 
=='''관련 인물 및 설화'''==

2017년 4월 5일 (수) 17:39 판

개요

상원사는 현재 월정사의 말사로 있으나,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문수신앙의 중심지이다. 기록에 의하면 보천, 효명 두 신라 왕자가 중대 지로봉에서 1만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하며, 왕위에 오른 효명태자(성덕왕)가 재위 4년 만인 705년 지금의 상원사터에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함과 동시에 문수보살상을 봉안하였고, 이어 725년 동종을 주조하였다.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불치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세조는 친히 권선문을 작성하고 진여원을 확장하였으며, 이름을 ‘상원사’(上院寺)라 바꾸고 원찰(願刹)로 정하여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 이후 몇 차례 중창되다가 1907년 수월화상이 방장으로 있을 때 크게 선풍을 떨쳤으며, 1951년 입적한 방한암 스님이 3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지냈다. 방한암스님이 한국전쟁 때 병화로부터 상원사를 지켜낸 일화 또한 매우 유명하다. 방한암의 제자인 탄허스님도 강원도 일대에 이름난 분이다. [1]

위치

역사

상원사는 705년(성덕왕 4)에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에 의해 세워진 절이다. 상원사라는 명칭은 조선기에 붙여진 것이며 창건 초기에는 진여원(眞如院)이라 불렸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20여년 전 오대산에 들어간 두 왕자는 중대 남쪽 진여원 터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 두 형제는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오대에 나아가 항상 공경스레 예배를 드렸으며,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茶)를 달여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 때 신라의 왕이 죽자 나라사람들이 오대산으로 와서 두 왕자를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보천은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왕위에 올랐다. 보천은 705년 3월 8일 진여원을 처음으로 세운 뒤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였다. 또, 결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라고 하였고 복전(福田) 7원(員)을 두게 하였으며,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의 지원을 받았다.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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