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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a Data ==
 
== Meta Data ==
 
* 타입: 인물
 
* 타입: 인물
* 한글항목명 : 이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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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항목명: 흥선대원군
* 한자항목명 : 李昰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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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항목명: 興宣大院君
* 편자: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http://kadhlab102.com/wiki/index.php/201410325%EC%9E%A5%EC%84%A0%EC%98%81 장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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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항목명: Regent H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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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자: [[돈암서원팀 KU|돈암서원팀]] [[201410308성민영|201410308 성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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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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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철종 14) 후사 없이 철종이 죽자 조대비에 의해 그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을 맡게 되었다. 이로부터 10년간 대원군 집정시대를 맞아 안동김씨의 세도를 제거하고 당쟁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 사색을 신분 · 계급 · 출생지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등용했으며, 부패관리를 파직시켰다. 국가재정을 좀먹고 당쟁의 소굴이 되고 있는 서원을 47개만 남겨놓고 모두 철폐하고, 세제를 개혁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함으로써 민생을 다소 안정시키고 국고도 충실하게 만들었다. 또한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법전을 편수,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기강을 수립하는 한편,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어 정권과 군권을 분리하는 등 군제를 개혁했다. 그러나 경복궁을 중건 하면서 원납전을 발행하여 민생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천주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외국인 선교사를 죽임으로써 66년(고종 3) 병인양요를 일으킨 데 이어, 국제정세에 어두운 나머지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71년 신미양요 등을 일으킴으로써 국제 관계를 악화시키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했다. 결국 국민의 원성을 사서 최익현 등 유림의 탄핵으로 집권 10년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민비(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나라 군대가 출동하고, 천진으로 납치되어 4년간 유폐되었다. 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다가 87년 청의 위안스카이와 결탁,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황을 옹립하려다가 실패했다. 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인해 청 · 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옹립되어 사대당을 몰아내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와 일을 꾸미다가 쫓겨났다. 청 · 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정국은 일본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간섭으로 친로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95년 일본의 책략에 의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살해되어 일본공사 미우라가 본국으로 소환되자 정권을 내놓고 은퇴했다.
* 이칭별칭 :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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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철폐령 KU|서원철폐령]]
* 시대 :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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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사망 : 1820년([[순조KU|순조]] 20) ~ 18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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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격 : 종친, 왕족,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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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신지 :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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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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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전주(全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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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사건 : [[임오군란KU|임오군란]], [[을미사변KU|을미사변]], [[아관파천KU|아관파천]], [[병인양요KU|병인양요]], [[신미양요KU|신미양요]], [[서원철폐령KU|서원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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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관직(경력) : 종친부 [[유사당상KU|유사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KU|오위도총부]] [[도총관KU|도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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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1일) ~ 1898년 음력 2월 2일(양력 2월 22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KU|대한제국]]의 황족, 추존왕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KU|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KU|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KU|고종]]친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철폐령KU|서원을 철폐]]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KU|노론]]의 일당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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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조선KU|조선]]의 국정을 이끌었다. 직접 며느리 [[명성황후KU|명성황후]]를 간택하였으나, 도리어 명성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된다. 1873년 11월 명성황후와 유학자 및 (신)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이후 명성황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일본인과 결탁하여 며느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유길준KU|유길준]]에 따르면 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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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이재선KU|이재선]] 등을 조선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KU|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을미사변KU|을미사변]]의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쇄국정책KU|쇄국정책]]과 천주교도 대량 학살, 무리한 [[경복궁KU|경복궁]] 중건 과정, 일본에 명성황후의 제거를 청탁한 점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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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자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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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ED%9D%A5%EC%84%A0%EB%8C%80%EC%9B%90%EA%B5%B0 흥선대원군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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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6416&cid=1593&categoryId=1593 이하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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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서원 KU]]
 
[[분류:서원 KU]]

2017년 3월 5일 (일) 08:19 기준 최신판

Meta Data


설명

1863년(철종 14) 후사 없이 철종이 죽자 조대비에 의해 그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을 맡게 되었다. 이로부터 10년간 대원군 집정시대를 맞아 안동김씨의 세도를 제거하고 당쟁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 사색을 신분 · 계급 · 출생지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등용했으며, 부패관리를 파직시켰다. 국가재정을 좀먹고 당쟁의 소굴이 되고 있는 서원을 47개만 남겨놓고 모두 철폐하고, 세제를 개혁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함으로써 민생을 다소 안정시키고 국고도 충실하게 만들었다. 또한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법전을 편수,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기강을 수립하는 한편,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어 정권과 군권을 분리하는 등 군제를 개혁했다. 그러나 경복궁을 중건 하면서 원납전을 발행하여 민생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천주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외국인 선교사를 죽임으로써 66년(고종 3) 병인양요를 일으킨 데 이어, 국제정세에 어두운 나머지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71년 신미양요 등을 일으킴으로써 국제 관계를 악화시키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했다. 결국 국민의 원성을 사서 최익현 등 유림의 탄핵으로 집권 10년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민비(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나라 군대가 출동하고, 천진으로 납치되어 4년간 유폐되었다. 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다가 87년 청의 위안스카이와 결탁,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황을 옹립하려다가 실패했다. 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인해 청 · 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옹립되어 사대당을 몰아내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와 일을 꾸미다가 쫓겨났다. 청 · 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정국은 일본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간섭으로 친로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95년 일본의 책략에 의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살해되어 일본공사 미우라가 본국으로 소환되자 정권을 내놓고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