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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1일 (화) 14:30 판

(수정중입니다)

녹우당은,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蓮洞里)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윤선도(尹善道)의 고택입니다.

개요[1]

윤선도가 살았던 집으로 윤선도의 4대 조부인 효정(1476∼1543)이 연동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집터 뒤로는 덕음산을 두고, 앞에는 벼루봉과 그 오른쪽에 필봉이 자리잡고 있는 명당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인데, 앞면에 사랑채가 있고 서남쪽 담모퉁이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사랑채는 효종이 윤선도에게 내려준 경기도 수원에 있던 집을 현종 9년(1668)에 이곳에 옮긴 것이다. 사랑채 뒤 동쪽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ㄷ’자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 담장 안에 한 채가 있고 담장 밖에 고산사당과 어초은사당 등이 있다.

입구에는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500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우거져 있다. 이곳에는 윤두서자화상(국보 제240호), 『산중신곡집』(보물 제482호), 『어부사시사집』 등의 지정문화재와 3천여 건의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녹우당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구성되고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집채는 서향, 대문은 남향, 안채에는 3칸의 대청과 대청 북단에 서향한 2칸의 마루방이 있고, 마루방 서쪽에 작은 온돌방이 2칸 이어져 안방을 이루고, 그 끝에 큰 부엌이 붙어 있다. 사랑채는 안채 앞에 있으며, 서향하여 남단에 2칸의 대청이 있고, 그 옆에 2칸의 온돌방이 이어지며, 온돌방 옆에 서쪽으로 돌출한 작은 온돌방이 있다. 안채 뒤쪽에 큰 대밭이 이어지고, 남동쪽 귀퉁이에 선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으며, 외원(外垣) 바깥에 윤선도를 모신 고산사당(孤山祠堂)과 고조인 윤효정(尹孝貞)을 모신 어초은(漁樵隱) 사당이 있다.

고산사당은 전면에 3개의 문이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고, 어초은사당은 담장을 둘렀으나 1칸 문에 정측면(正側面)이 1칸으로 된 건물이다. 이 밖에 북동쪽으로 어초은의 재실(齋室)인 추원당(追遠堂)이 있고, 북쪽으로 녹우당(綠雨堂)이 있는데, 효종이 하사한 것으로 현판은 공재 윤두서의 친구인 옥동 이서가 동국진체로 썼다.

이 유구(遺構)들은 근세 선비의 주택 시설을 고루 갖추었는데, 여기에는 윤선도의 윤고산수적(尹孤山手蹟)을 비롯하여, 윤씨 일문의 문적·문서·그림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녹우당 명칭에 대하여

녹우당은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口字형 고택으로, 효종 임금이 사부였던 고산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지어준 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와 사랑채로 만들고 녹우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고산 사당, 어초은 사당, 추원당 등을 품은 해남윤씨 종택 전체를 아울러 녹우당이라 부르고 있다.

당호인 '녹우(綠雨)'는 동국진체를 최초로 쓴 옥동 이서(1662~1723)가 지었다. 녹우당 현판 역시 그의 작품이다. 고산의 증손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사이다. '녹우'를 그대로 풀어내면 '초록색 비'로, ‘늦봄과 초여름 사이 잎이 우거진 때 내리는 비’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녹우당 앞 은행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녹우당 뒤에 자리한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들리는 푸른 빗소리 등으로 해석되곤 한다.

녹우당의 건출물 + 풍수지리

녹우당의 건축은 풍수지리에 따라 덕음산을 진산(鎭山)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구성되고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입구에는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오백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년기념물 제 241호)이 우거져 있다. 이 곳에는 윤두서자화상(국보 제 240호) 산중신곡집(보물 제 482호) 어부사시사집(漁父四時詞集) 등의 지정문화재와 3천여 건의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현판은 옥동 이서의 글씨다

주위 볼거리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지난 2010년에 개관한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은 고산과 해남윤씨 종손들의 작품을 통해 당시 시대 상황을 보여준다. 내로라는 명문 사대부가였던 해남윤씨 가계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고산의 육필은 물론 그의 증손 윤두서의 공재자화상(국보 제240호) 등 대대로 전해오는 가보들이 눈길을 끈다. 한 집안에 이렇게 많은 보물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전시관을 가득 채운 유물 하나하나에 무엇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고이 간직해 온 후손들의 정성이 전해진다. 〈어부사시사〉 〈오우가〉를 통해 교과서에서나 만났던 아득한 고산의 실체와 마주하는 듯하다.

전시품들은 대부분 윤선도나 윤두서와 관련된 것들이다. 우선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산중신곡」(山中新曲) 등 윤선도가 직접 쓴 가첩(歌帖)들이 있고 사은첩(思恩帖, 인조와 봉림 대군이 윤선도의 집에 쌀과 포 등을 내리면서 보낸 사송장(賜送狀)을 모아 첩으로 만든 것) 등이 있는데 일괄하여 보물 제4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보물 제483호인 「지정14년노비문권」(至正十四年奴婢文卷)이 있다. 이것은 고려 공민왕 때 윤광전이 큰아들 윤단학에게 노비를 상속해 준다는 문서인데 이두문으로 쓰여 있으며 승주 송광사 노비첩과 함께 희귀한 고려 시대의 문서이다.

비자나무 숲

고산 사당을 지나 해남 윤씨 중시조 어초은 윤효정(1476~1543) 사당을 지나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숲길이 나온다. 어초은 윤효정은 녹우당에 터를 잡아 해남윤씨가 번창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뒷산에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그의 유훈을 받들어 후손들이 비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해남 별미 비자강정이 만들어진 이유기도 하다. 방귀 좀 뀐다는 양반들은 해남윤씨 종택을 방문하면 비자로 만든 한과와 차를 대접받았단다. 예나 지금이나 비자강정은 구경도 못했을까, 아쉬운 마음 한겨울에도 여전한 비자림 스치는 빗소리에 남몰래 달래본다. 고산도 이곳에서 이 빗소리를 들었을까

연동마을 뒤 덕음산 자락의 비자숲은 500년 가량 된 것으로 추정된다.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마을이 가난해진다고 한 윤씨 시조의 유언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이 숲을 잘 간수해 왔다고 전해지며,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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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2]

하늘에서 내려다 본 녹우당

녹우당 평면도[3]

녹우당 평면도.jpg

녹우당 종단면도[4]

녹우당 종단면도.jpg

갤러리

관련 항목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녹우당 보유 문화재 철감선사탑, 철감선사탑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쌍봉사 극락전
녹우당 관련 인물 윤선도
녹우당 관련 공간 보길도 윤선도 원림, 해남 윤선도 유적,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기여

참고

주석

  1. 문화재청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 검색
  2. 두산백과 <해남 윤씨 녹우당 일원> 검색
  3. 건축가 박태홍의 건축교류사이트
  4. 건축가 박태홍의 건축교류사이트
  5. 남도여행길잡이 <녹우당> 검색
  6. 남도여행길잡이 <녹우당>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