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위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관)
 
(같은 사용자에 의한 4개의 중간 편집이 숨겨짐)
1번째 줄: 1번째 줄:
 
{{역사인물정보
 
{{역사인물정보
|사진 =  
+
|사진 = 고려사김위제.jpg
 
|이름 = 김위제
 
|이름 = 김위제
 
|한자 = 金謂磾
 
|한자 = 金謂磾
14번째 줄: 14번째 줄:
  
 
* ≪도선기≫를 들어, 고려에는 삼경이 있는데, 송악·목멱양(木覓壤:지금의 서울)·평양이 중경·남경·서경에 해당한다. 그런데 왕이 일 년을 3기로 나누어 11∼2월에는 중경에, 3∼6월에는 남경에, 7∼10월에는 서경에 머물면 36국이 조공하게 된다고 하였다.
 
* ≪도선기≫를 들어, 고려에는 삼경이 있는데, 송악·목멱양(木覓壤:지금의 서울)·평양이 중경·남경·서경에 해당한다. 그런데 왕이 일 년을 3기로 나누어 11∼2월에는 중경에, 3∼6월에는 남경에, 7∼10월에는 서경에 머물면 36국이 조공하게 된다고 하였다.
 
  
 
* <답산가 踏山歌>를 인용하여, 고려는 개국 160년 후에는 목멱양에 도읍을 옮기게 된다는 예언에 따라, 지기(地氣)의 쇠왕(衰旺)을 순주(巡駐)와 이어(移御)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답산가 踏山歌>를 인용하여, 고려는 개국 160년 후에는 목멱양에 도읍을 옮기게 된다는 예언에 따라, 지기(地氣)의 쇠왕(衰旺)을 순주(巡駐)와 이어(移御)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삼각산명당기≫를 들어, 목멱(지금의 남산)의 북쪽, 삼각산의 남쪽 평지에 제경(帝京:서울)을 건립하면 9년 뒤에는 사해가 모두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주장하여 남경의 지덕이 왕성함을 논하였다.
 
* ≪삼각산명당기≫를 들어, 목멱(지금의 남산)의 북쪽, 삼각산의 남쪽 평지에 제경(帝京:서울)을 건립하면 9년 뒤에는 사해가 모두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주장하여 남경의 지덕이 왕성함을 논하였다.
 
  
 
* 끝으로 [[신지비사|≪신지비사≫]]를 들어, 삼경은 마치 저울의 극기(極器:물건을 놓는 곳)·손잡이·추와 같아서, 삼경을 설치하면 70국이 항복하고, 또 남경은 오덕(五德:水·火·木·金·土)을 두루 갖춘 지역이어서 반드시 여기에 도성을 쌓아 순주해야 하며, 남경 건립은 사직흥망의 관건이라고 역설하였다.
 
* 끝으로 [[신지비사|≪신지비사≫]]를 들어, 삼경은 마치 저울의 극기(極器:물건을 놓는 곳)·손잡이·추와 같아서, 삼경을 설치하면 70국이 항복하고, 또 남경은 오덕(五德:水·火·木·金·土)을 두루 갖춘 지역이어서 반드시 여기에 도성을 쌓아 순주해야 하며, 남경 건립은 사직흥망의 관건이라고 역설하였다.
  
  
이에 1099년 9월에 이르러 일관(日官) 문상(文象)도 그를 지지하자, 드디어 왕이 친히 행차하여 그 지세를 둘러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 등에게 명하여 일을 착수시켜 감독하게 하니, 5년 만에 준공하고, 그 뒤 1101년에는 남경에 개창도감(開創都監)을 두었다.
+
이에 1099년 9월에 이르러 일관(日官) 문상(文象)도 그를 지지하자, 드디어 왕이 친히 행차하여 그 지세를 둘러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 등에게 명하여 일을 착수시켜 감독하게 하니, 5년 만에 준공하고, 그 뒤 1101년에는 남경에 개창도감(開創都監)을 두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063 김위제,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클래스'''==
 
=='''클래스'''==
34번째 줄: 31번째 줄:
 
!style="width:250px"|이 문서||style="width:200px"|관계||style="width:250px"|관련 문서
 
!style="width:250px"|이 문서||style="width:200px"|관계||style="width:250px"|관련 문서
 
|-
 
|-
|[[아차산성 토우]]|| A는 B에서 발견되었다||[[아차산]]
+
|[[김위제]]||A는 B를 주장했다 ||[[남경천도]]
|-
+
|[[아차산성 토우]]|| A는 B에서 발견되었다||[[아차산성]]
+
|-
+
|[[아차산성 토우]]|| A는 B에서 조사되었다||[[서울대학교 박물관]]
+
|-
+
|[[아차산성 토우]]||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서울대학교 박물관]]
+
 
|-
 
|-
|[[아차산성 토우]]|| A는 B에 만들어졌다||[[고구려]]시대
+
|[[김위제]]||A는 B를 인용했다 ||[[신지비사]]
 
|-
 
|-
|[[아차산성 토우]]|| A는 B와 관련된다||[[아차산성 철제 초두]]
+
|[[김위제]]||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
 
|}
  
 
=='''갤러리'''==
 
=='''갤러리'''==
 
<gallery>
 
<gallery>
파일:토우측면.jpg|토우 측면<ref>사진출처: 임효재 외, 앞의 책, 2000a, 6쪽.</ref>
+
파일:고려사김위제.jpg|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
파일:토우.jpg|아차산성 토우 도면<ref>그림출처: 최종택, 「아차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과제」, 『사총』, 제 81집, 2014, 25쪽.</ref>
+
 
</gallery>
 
</gallery>
  

2016년 6월 14일 (화) 00:59 기준 최신판

개관

1097년(숙종 1)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이 되었고, 예종 때에는 주부동정(注簿同正)을 지냈다. 도선(道詵)의 지리도참설을 신봉하고 그 술수를 배웠다. 1097년에 도선의 설과 당시 비기(秘記)로 알려져 있던 ≪삼각산명당기≫·≪신지비사≫를 인용하면서 남경(南京:지금의 서울) 천도를 상소하였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 ≪도선기≫를 들어, 고려에는 삼경이 있는데, 송악·목멱양(木覓壤:지금의 서울)·평양이 중경·남경·서경에 해당한다. 그런데 왕이 일 년을 3기로 나누어 11∼2월에는 중경에, 3∼6월에는 남경에, 7∼10월에는 서경에 머물면 36국이 조공하게 된다고 하였다.
  • <답산가 踏山歌>를 인용하여, 고려는 개국 160년 후에는 목멱양에 도읍을 옮기게 된다는 예언에 따라, 지기(地氣)의 쇠왕(衰旺)을 순주(巡駐)와 이어(移御)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삼각산명당기≫를 들어, 목멱(지금의 남산)의 북쪽, 삼각산의 남쪽 평지에 제경(帝京:서울)을 건립하면 9년 뒤에는 사해가 모두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주장하여 남경의 지덕이 왕성함을 논하였다.
  • 끝으로 ≪신지비사≫를 들어, 삼경은 마치 저울의 극기(極器:물건을 놓는 곳)·손잡이·추와 같아서, 삼경을 설치하면 70국이 항복하고, 또 남경은 오덕(五德:水·火·木·金·土)을 두루 갖춘 지역이어서 반드시 여기에 도성을 쌓아 순주해야 하며, 남경 건립은 사직흥망의 관건이라고 역설하였다.


이에 1099년 9월에 이르러 일관(日官) 문상(文象)도 그를 지지하자, 드디어 왕이 친히 행차하여 그 지세를 둘러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 등에게 명하여 일을 착수시켜 감독하게 하니, 5년 만에 준공하고, 그 뒤 1101년에는 남경에 개창도감(開創都監)을 두었다.[1]

클래스

  • 인물

관련 문서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김위제 A는 B를 주장했다 남경천도
김위제 A는 B를 인용했다 신지비사
김위제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갤러리

주석

  1. 김위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