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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ack.png|right|thumb|[[민족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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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최대섭-고려대장경판각-1977s.jpg|최대섭 「고려대장경」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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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최대섭-고려대장경판각-1977s.jpg|최대섭 「고려대장경 판각」 1977 | 600px | right]]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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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현존하는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팔만대장경으로 알려진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교장(敎藏),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을 통틀어 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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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을 주조하는 모습을 그린 최대섭의 민족기록화이다. 초조대장경과 교장, 재조대장경을 통틀어 고려대장경이라 부르는데, 본 기록화는 고려대장경 가운데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대장경 가운데 재조대장경은 팔만대장경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한역대장경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초조대장경은 고려(高麗) 현종(顯宗, 1010~1031)대에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염원으로 1011년부터 북송판 대장경을 받아들여 판각하기(覆刻)하여 1029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문종(文宗, 1047~1082)대에 거란 대장경[契丹大藏經]이 유입되자 북송판 대장경에 수록되지 않은 경전들을 간행하여 1087년에 완성함으로써 초조대장경의 정장(正藏)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20여 년 동안 중국, 일본, 우리나라 제가의 장서 1000여 부 5000여 권을 수집하여 분류 정리하고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의 목록을 편찬하였고, 이에 의거하여 초조대장경의 속장(續藏)인 고려 교장(敎藏)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팔공산(八公山)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재장경의 경판(經板)은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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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요나라(거란)침입을 받아 곤경에 있을 때 불심(佛心)으로 그것을 물리치기 위하여 간행에 착수하였다. 고려 현종 대부터 문종 대에 걸쳐 완성되었다. 대구의 부인사(符仁寺 : 지금은 없음)에 도감(都監)을 두고, 《대반야경》 6백 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천여 권을 목판에 새겨 만들었다. 이 《초조대장경》은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을 받아 병화(兵火)로 없어졌고, 약간 남아 있는 것은 일본 교토 난젠지(南禪寺. 南禅寺. 남선사)에 1,715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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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장(敎藏): 부처님의 말씀인 《대장경》이 아닌, 여러 불교 교파의 교리를 정리한 장서이다. 이전의 초조대장경의 주석도 포함되어 있기에, 《속대장경(續大藏經)》 또는 《의천의 속장경》이라고도 부른다.
고려 고종(高宗) 24년(1237)부터 동 38년(1251) 9월에 이르기까지 16년 동안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고려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의 본사(本司)를 강화에 두고 분사(分司)를 남해에 설치하여 판각을 진행하였다. 당시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 수기(守其)는 북송본과 거란본 및 고려대장경 초조본(初雕本)을 대교하여 오류를 정정하는 경문교감(經文校勘)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그 교감의 결과를 『교정별록(校正別錄)』 30권에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고종 대에 완성을 본 고려 재조대장경은 역대의 모든 대장경 중 가장 정확하고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재조대장경은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에서 조성됐으며, 강화도 대장경판당에 보관됐다가 태조 7년(1398) 해인사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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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1236년(고종 23년) 강화군에서 조판에 착수하여 15년이 지난 1251년(고종 38년)까지 총 16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1962년 12월 20일에 대한민국의 국보 제32호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작가==
 
==작가==
 
최대섭(崔大燮): 1927년~1991년 서양화가. 전북 남원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사. 1956년-1965년 영생고등학교 및 한양공업고등학교 교사. 1988년 군산대학교 미술과 교수.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감사. 1974 한국미협 전국회의장상, 1975 카뉴국제회화제 국가상 수상.
 
최대섭(崔大燮): 1927년~1991년 서양화가. 전북 남원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사. 1956년-1965년 영생고등학교 및 한양공업고등학교 교사. 1988년 군산대학교 미술과 교수.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감사. 1974 한국미협 전국회의장상, 1975 카뉴국제회화제 국가상 수상.
 
  
 
==관련 자료==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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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경판전1.jpg | 해인사 장경판전(내부)
 
파일:장경판전1.jpg | 해인사 장경판전(내부)
 
파일:장경판전2.jpg | 해인사 장경판전(외부)
 
파일:장경판전2.jpg | 해인사 장경판전(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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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인영-안융진담판(서희)-1976s.jpg|이인영 「안융진 담판을 하는 서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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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용환-귀주대첩(강감찬)-1975s.jpg|이용환 「귀주대첩」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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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서봉-삼별초대몽항쟁-1975s.jpg|김서봉 「삼별초의 대몽항전」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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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민족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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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민족기록화]] [[분류:전자문서와 하이퍼텍스트 2023]] [[분류:박영선]]

2023년 9월 20일 (수) 14:31 기준 최신판

최대섭 「고려대장경 판각」 1977

작품

고려대장경을 주조하는 모습을 그린 최대섭의 민족기록화이다. 초조대장경과 교장, 재조대장경을 통틀어 고려대장경이라 부르는데, 본 기록화는 고려대장경 가운데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대장경 가운데 재조대장경은 팔만대장경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한역대장경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요나라(거란)의 침입을 받아 곤경에 있을 때 불심(佛心)으로 그것을 물리치기 위하여 간행에 착수하였다. 고려 현종 대부터 문종 대에 걸쳐 완성되었다. 대구의 부인사(符仁寺 : 지금은 없음)에 도감(都監)을 두고, 《대반야경》 6백 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천여 권을 목판에 새겨 만들었다. 이 《초조대장경》은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을 받아 병화(兵火)로 없어졌고, 약간 남아 있는 것은 일본 교토 난젠지(南禪寺. 南禅寺. 남선사)에 1,715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 교장(敎藏): 부처님의 말씀인 《대장경》이 아닌, 여러 불교 교파의 교리를 정리한 장서이다. 이전의 초조대장경의 주석도 포함되어 있기에, 《속대장경(續大藏經)》 또는 《의천의 속장경》이라고도 부른다.
  •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1236년(고종 23년) 강화군에서 조판에 착수하여 15년이 지난 1251년(고종 38년)까지 총 16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1962년 12월 20일에 대한민국의 국보 제32호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작가

최대섭(崔大燮): 1927년~1991년 서양화가. 전북 남원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사. 1956년-1965년 영생고등학교 및 한양공업고등학교 교사. 1988년 군산대학교 미술과 교수.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감사. 1974 한국미협 전국회의장상, 1975 카뉴국제회화제 국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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