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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은 식민지 근대가 도래하기 전 개신교 선교사들의 계몽적 근대가 먼저 당도한 지역이다.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은 광주 선교를 위해 양림동의 땅을 사들였다. 중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다, 땅값이 쌌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교회와 사택을 짓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양림동에 ‘서양촌’을 형성해 나갔다. 일제강점기 들어 광주 중심부는 조선총독부의 계획 아래 근대 도시가 되었으나, 양림동은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광주 제중원 등 종교와 교육과 의료를 통해 근대를 접하게 되었다.<br>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은 식민지 근대가 도래하기 전 개신교 선교사들의 계몽적 근대가 먼저 당도한 지역이다.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은 광주 선교를 위해 양림동의 땅을 사들였다. 중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다, 땅값이 쌌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교회와 사택을 짓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양림동에 ‘서양촌’을 형성해 나갔다. 일제강점기 들어 광주 중심부는 조선총독부의 계획 아래 근대 도시가 되었으나, 양림동은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광주 제중원 등 종교와 교육과 의료를 통해 근대를 접하게 되었다.<br>
 
유진 벨(Eugene Bell, 한국이름 배유지), 클레멘트 오웬(Clement Owen, 한국이름 오기원) 등 선교사들은 교회와 사택을 짓고, 교육과 의료 사업에 착수했다. 선교사들은 1904년부터 10여 년 동안 오늘날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일대에 10여 곳의 건물을 세웠다. 선교사들이 지었던 사택 가운데 유진 벨 선교사 등의 사택은 한국전쟁 시기에 불탔고, 윌슨(Robert M. Willson, 한국이름 우일선)<ref>[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B2%84%ED%8A%B8_M._%EC%9C%8C%EC%8A%A8 우일선], 위키백과</ref> 선교사의 사택이 양림산에 남아 있다.<br>
 
유진 벨(Eugene Bell, 한국이름 배유지), 클레멘트 오웬(Clement Owen, 한국이름 오기원) 등 선교사들은 교회와 사택을 짓고, 교육과 의료 사업에 착수했다. 선교사들은 1904년부터 10여 년 동안 오늘날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일대에 10여 곳의 건물을 세웠다. 선교사들이 지었던 사택 가운데 유진 벨 선교사 등의 사택은 한국전쟁 시기에 불탔고, 윌슨(Robert M. Willson, 한국이름 우일선)<ref>[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B2%84%ED%8A%B8_M._%EC%9C%8C%EC%8A%A8 우일선], 위키백과</ref> 선교사의 사택이 양림산에 남아 있다.<br>
우일선선교사사택의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5~1911년 사이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1921년 증축되었다. 선교사들이 자신들 고향에서 가져다 심은 이국적인 고목들 속에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입구 현관이 인상적이다. 고급 사교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고아원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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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일선선교사사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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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일선선교사사택의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5~1911년 사이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1921년 증축되었다. 선교사들이 자신들 고향에서 가져다 심은 이국적인 고목들 속에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입구 현관이 인상적이다. 고급 사교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고아원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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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현존하는 양식 주택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양림산 기슭에 동향으로 세워진 고색창연한 2층 벽돌 건물이다. 평면은 정방형으로 1층은 거실, 가족실, 다용도실, 부엌, 욕실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사생활공간으로서 침실이 배치되었다. 지하층에는 보일러실이 있다. 한국의 전통건축과는 달리 현관이 남향에 위치하지 않고 동향으로 된 것이 특이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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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서구 열강들이 그들의 주거문화를 한국에 소개해 주는 귀중한 근대건축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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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M. 윌슨 (Robert M. Wilson, 1880년 - 1963년) 선교사는 한국에 온 미국의 선교사이다. 미국 아칸사스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나서 의료선교를 위해 1908년 한국에 왔다. 윌슨 선교사는 1948년 미국으로 영구 귀국했으며, 그의 청춘과 인생의 절반을 한국 근대 역사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시절 1909년부터 1948년 (일본 강점기)까지 한국에 머물며 의료 선교와 한센 선교, 교육을 위해서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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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주에 1908년에 와서 광주병원(현광주기독병원), 1905년 11월 20일 놀란선교 원장과 교제하면서 제중병원 2대 원장으로 지냈다. 1909년부터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면서 한국한센병원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봉선리교회에서 영적인 회복도 하였음. 1912년 최흥종 소록도 한센병원에서 기증한 땅이 1,000평 이상으로 점점 많아지자 일반인들의 핍박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면서, 광주 봉선리의 역사는 1928년에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 나병환자 치료 시설을 열었던 윌슨을 도와 이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은 쉐핑 선교사(Ms. Elizabeth Shepping)였다.[2] 1945년 광복 이후 미 군정청은 그를 소록도, 애양원 등 한센인 시설을 총괄하는 군정 자문관에 임명했고, 그의 아들 존 윌슨도 아버지의 사역을 이어 한국 땅에서 젊음을 불살랐다. 1948년 귀국 후 미국에서 신학공부로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던 로버트 윌슨은 1963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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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제중원===
  
 
==Web Resource==
 
==Web Resource==

2023년 5월 10일 (수) 21:09 판

Story

광주선교기지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은 식민지 근대가 도래하기 전 개신교 선교사들의 계몽적 근대가 먼저 당도한 지역이다.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은 광주 선교를 위해 양림동의 땅을 사들였다. 중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다, 땅값이 쌌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교회와 사택을 짓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양림동에 ‘서양촌’을 형성해 나갔다. 일제강점기 들어 광주 중심부는 조선총독부의 계획 아래 근대 도시가 되었으나, 양림동은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광주 제중원 등 종교와 교육과 의료를 통해 근대를 접하게 되었다.
유진 벨(Eugene Bell, 한국이름 배유지), 클레멘트 오웬(Clement Owen, 한국이름 오기원) 등 선교사들은 교회와 사택을 짓고, 교육과 의료 사업에 착수했다. 선교사들은 1904년부터 10여 년 동안 오늘날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일대에 10여 곳의 건물을 세웠다. 선교사들이 지었던 사택 가운데 유진 벨 선교사 등의 사택은 한국전쟁 시기에 불탔고, 윌슨(Robert M. Willson, 한국이름 우일선)[1] 선교사의 사택이 양림산에 남아 있다.

우일선선교사사택

우일선선교사사택의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5~1911년 사이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1921년 증축되었다. 선교사들이 자신들 고향에서 가져다 심은 이국적인 고목들 속에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입구 현관이 인상적이다. 고급 사교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고아원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광주에 현존하는 양식 주택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양림산 기슭에 동향으로 세워진 고색창연한 2층 벽돌 건물이다. 평면은 정방형으로 1층은 거실, 가족실, 다용도실, 부엌, 욕실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사생활공간으로서 침실이 배치되었다. 지하층에는 보일러실이 있다. 한국의 전통건축과는 달리 현관이 남향에 위치하지 않고 동향으로 된 것이 특이하다.
이 건물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서구 열강들이 그들의 주거문화를 한국에 소개해 주는 귀중한 근대건축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우일선

로버트 M. 윌슨 (Robert M. Wilson, 1880년 - 1963년) 선교사는 한국에 온 미국의 선교사이다. 미국 아칸사스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나서 의료선교를 위해 1908년 한국에 왔다. 윌슨 선교사는 1948년 미국으로 영구 귀국했으며, 그의 청춘과 인생의 절반을 한국 근대 역사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시절 1909년부터 1948년 (일본 강점기)까지 한국에 머물며 의료 선교와 한센 선교, 교육을 위해서 공헌하였다.

전남 광주에 1908년에 와서 광주병원(현광주기독병원), 1905년 11월 20일 놀란선교 원장과 교제하면서 제중병원 2대 원장으로 지냈다. 1909년부터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면서 한국한센병원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봉선리교회에서 영적인 회복도 하였음. 1912년 최흥종 소록도 한센병원에서 기증한 땅이 1,000평 이상으로 점점 많아지자 일반인들의 핍박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면서, 광주 봉선리의 역사는 1928년에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 나병환자 치료 시설을 열었던 윌슨을 도와 이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은 쉐핑 선교사(Ms. Elizabeth Shepping)였다.[2] 1945년 광복 이후 미 군정청은 그를 소록도, 애양원 등 한센인 시설을 총괄하는 군정 자문관에 임명했고, 그의 아들 존 윌슨도 아버지의 사역을 이어 한국 땅에서 젊음을 불살랐다. 1948년 귀국 후 미국에서 신학공부로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던 로버트 윌슨은 1963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광주 제중원

Web Resource

type resource title description/caption URL
해설 세월의 흔적, 근대문화 역사유산 양림동역사문화마을 https://ncms.nculture.org/legacy/story/4548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id type bibliographic index online resource url
RISS:A106397882 논문 이영식, 초기 광주선교부 활동이 사회변혁 및 근대문화에 끼친 영향, 성경과 신학 91호 (2019) RISS http://www.riss.kr.openlink.aks.ac.kr:8080/link?id=A106397882
  • id: 인용전거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1. 우일선,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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