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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6일 (금) 08:4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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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Episode 1: 중국 사신 영접행사에서의 전통연희-아극돈의 조선 방문
Synopsis
중국의 아극돈(阿克敦, 1685~1756)은 1717년에서 1725년 사이 네 차례나 조선에 왔던 청나라 사신이다. 1717년 조선에서 숙종임금의 안질 치료에 필요한 공청을 구하러 청나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강희제는 숙종의 치세를 높이 평가하며 특별히 공청을 보내도록 명했고, 그 해 9월 18일 아극돈을 정사, 장정매를 부사로 하는 사신단이 파견되어 조선을 방문했다. 이 때 아극돈은 수많은 즉흥시를 남겼고, <아극돈시>라는 시집으로 남아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아극돈이 두번째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조선에서 귀국한지 3일째 되는 날 황태후가 승하하자 이를 알리는 고부사(告訃使)로 임명되며 오게 되었다. 서 번째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1722년 4월로 경종임금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어 그 이복동생인 연잉군 이금 (영조)을 세제로 삼는 다는 조서를 전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수행인원이 75명이되는 대규모 사신단이었다. 이후 1724년 12월 19일 네번째로 조선을 받문하게 되는데, 이때는 각라서로와 아극돈이 경종에게 사제 및 세제 이금을 국왕으로 봉한다는 조서를 전하는 임무로 온 것으로, 조선에서 정사 각라서로가 병을 앓는 바람에 이듬해 3월에 귀국하게 된다. 아극돈은 1725년(영조1) 조선에 관한 풍물과 자신에 대한 영접 행사를 묘사한 스무폭짜리 화첩 <봉사도>를 만들었다. 이 중 제7폭에 그려진 모화관 마당 연희 공연에서는 대접돌리기, 땅재주(물구나무서기), 탈춤, 줄타기 등이 묘사되어 있고, 소규모 산대도 보인다. 11폭에는 솟대타기를 하는 연희자도 보인다. 이 7폭의 배경이 되는 모화관은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전 머물던 곳으로 지금의 독립문 근처이다. 중국 사신 영접을 위한 대산대를 만드는 데만 각각 수군 천사백명과 천삼백명이 동원될 정도였다고 한다. 행사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중국 사신 영접의 나례는 정조 8년 (1784)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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