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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6일 (일) 12:18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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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문효세자, 5세에 요절하여 효창원에 안장되다
Synopsis
정조임금에게는 아들이 2명 있었는데, 한명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조선의 23대 임금인 순조이며 또 다른 한명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왕이 되기 전에 요절한 문효세자이다.
문효세자가 태어날 당시 정조는 나이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정부인 이었던 효의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후궁인 원빈 홍씨는 이미 병으로 죽었으며 화빈 윤씨는 임신을 했다고 하여 산실청을 설치했지만 20개월이 되어도 출산소식이 없었다.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승은 상궁인 성덕임(훗날 의빈성씨)[1]은 2차례 임신했었지만 2번의 유산 끝에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출산에 성공하였고, 이것이 문효세자이다. 이에 정조는 자신이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라며 크게 기뻐하였다.[2]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자들을 올바르게 양육하기 위하여 어린 나이일 때부터 교육기관인 보양청(輔養廳)을 설치하고 스승 보양관(輔養官)을 임명하였다. 보양관이 정해지면 바로 원자와 상견례(相見禮)를 실시하였는데, 상견례는 임금의 맏아들, 원자(元子)가 보양관과 처음 인사를 나누는 행사로 보양청에서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이다.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은 1784년 1월 문효세자가 창덕궁 대은원(戴恩院)에서 두 명의 보양관과 처음 만나 서로 인사하는 의식을 그린 궁중행사도이며, 『문효세자 보양청일기(輔養廳日記)』에는 1783년 11월 18일부터 1785년 4월 3일까지 보양청에서 있었던 일들이 매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왕세자는 다음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였기에 그 위상을 높이는 각종 통과의례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통과의례는 책봉, 입학, 관례, 가례다. 책례는 책봉 의식으로 왕세자가 왕의 후계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공식 의식이며 왕이 세자로 책봉한다는 임명서를 수여하고, 세자가 이를 하사받는 의식이다. 왕세자 책봉을 위해서는 책례도감이 구성되어 책봉에 따른 의장과 물품을 준비하고, 행사가 끝나면 책례도감의궤를 작성하였다.
문효세자는 조선왕조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어린 나이인 3세(22개월, 만 1세)에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는 정조의 나이가 30대였기 때문에 신하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3]본래 책봉례와 수책례는 동시에 진행되지만, 문효세자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책봉례에 참석할 수 없어서 별도로 치러진 것으로 추측된다. 책봉례는 1784년 8월 1일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에서 정조와 대신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으며, 이어 임금의 사자들이 책봉 교명과 책인을 가지고 동궁 중희당으로 이동하고 왕세자는 책봉례 동안 중희당에서 대기하다가 사자들이 가지고 온 교명과 책인을 인도받는 수책례가 진행되었다. 이때 어린 문효세자 대신 세자시강원의 궁료들이 교명과 책인을 받는 역할을 맡았고, 문효세자는 이후 사배례를 올렸다. 이 책봉례와 수책례의 모습은 《문효세자책례계병》에 각각 묘사되어있으며,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文孝世子冊禮都監儀軌)』에도 기술되어 있다.
정조는 문효세자를 위해 새로운 왕세자궁인 중희당을 짓고 현판을 직접 썼다. 그러나 1786년 문효세자는 홍역에 걸렸고 그해(1786년) 5월 문효세자는 5세(만 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더불어 같은 해 9월 의빈 성씨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이[4]하였다.
이에 정조는 궁궐 가까운 곳[5]에 ‘문효세자와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원소를 조성하며 정조는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의미로 '효창묘'라고 명명하였고, 묘소 조성에 관해서는 《문효세자묘소도감의궤(文孝世子墓所都監儀軌)》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조는 효창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이 행차하는 것)하였기 때문에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을 ‘거둥 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6] 특히 효창원의 아기 석호는 정조의 애달픔이 들어있는 것으로 앙증맞고 귀엽고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정조가 쓴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에는 ‘꿈인가, 참인가, 꿈이라 하여 반드시 꿈도 아닐 것이고 참이라 하여 반드시 참도 아닐 것이다’라며 사랑하는 문효세자를 잃고 슬픔에 괴로워하는 자신의 애통한 심경을 서술했다.
효창묘는 고종황제 때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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