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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하던 자기를 생산하였던 가마는 경기도 광주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도 광주지역에 국가 직영 사기소인 관요가 설립되는 시점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을 통하여 1432년 이전까지는 전국 군현 별로 운영되었던 184개의 자기소에서 자기를 공납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 조선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하던 자기를 생산하였던 가마는 경기도 광주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도 광주지역에 국가 직영 사기소인 관요가 설립되는 시점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을 통하여 1432년 이전까지는 전국 군현 별로 운영되었던 184개의 자기소에서 자기를 공납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 ||
− | 토산품으로 공납되었던 백자는 1467년경 궁중 주방인 사옹원의 분원 가마가 광주에 설치되면서 관영수공업체제를 갖추고 직접 생산, 조달하게 되었다.</br> 관요 중의 하나였던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사옹원으로 추정되는 ‘司’자가 인각기법으로 새겨진 백자 접시 편이 출토되었다. 본래 사옹원은 고려시대의 사옹司饔이다. 사옹의 ‘옹’은 <주례周禮>의 주에서 割烹煎和, 즉 ‘고기를 베어 삶고 간을 맞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즉 사옹은 왕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을 담당하는 동시에 공납용 자기 제작을 감독하고 수취해왔다. 고려시대의 사옹은 조선시대에는 사옹방으로 吏曹에 편제되었고, 1467년에 첨설직에서 녹관을 둔 정3품의 정식 행정 관사인 사옹원으로 개칭되었다. 관요는 사옹원의 분원으로 설립되어 왕실용 자기를 제작하는 자기소로 운영되었다. 공납물이었던 자기는 광주 자기소에서 직접 조달받게 된 것이다. | + | 토산품으로 공납되었던 백자는 1467년경 궁중 주방인 사옹원의 분원 가마가 광주에 설치되면서 관영수공업체제를 갖추고 직접 생산, 조달하게 되었다.</br> 관요 중의 하나였던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사옹원으로 추정되는 ‘司’자가 인각기법으로 새겨진 백자 접시 편이 출토되었다. 본래 사옹원은 고려시대의 사옹司饔이다. 사옹의 ‘옹’은 <주례周禮>의 주에서 割烹煎和, 즉 ‘고기를 베어 삶고 간을 맞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즉 사옹은 왕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을 담당하는 동시에 공납용 자기 제작을 감독하고 수취해왔다. 고려시대의 사옹은 조선시대에는 사옹방으로 吏曹에 편제되었고, 1467년에 첨설직에서 녹관을 둔 정3품의 정식 행정 관사인 사옹원으로 개칭되었다. 관요는 사옹원의 분원으로 설립되어 왕실용 자기를 제작하는 자기소로 운영되었다. 공납물이었던 자기는 광주 자기소에서 직접 조달받게 된 것이다.</br> |
− | 사옹원 소속의 번조관과 경공장은 관요 운영과 관련한 구성원이었다. 번조관은 경공장을 관리하는 역할이었고, 경공장은 <경국대전> 공전 사옹원 조에 명시된 사기장 380명이었다. | + | 사옹원 소속의 번조관과 경공장은 관요 운영과 관련한 구성원이었다. 번조관은 경공장을 관리하는 역할이었고, 경공장은 <경국대전> 공전 사옹원 조에 명시된 사기장 380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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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9일 (금) 00:2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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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Episode 1: 관요의 등장
Synopsis
조선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하던 자기를 생산하였던 가마는 경기도 광주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도 광주지역에 국가 직영 사기소인 관요가 설립되는 시점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을 통하여 1432년 이전까지는 전국 군현 별로 운영되었던 184개의 자기소에서 자기를 공납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토산품으로 공납되었던 백자는 1467년경 궁중 주방인 사옹원의 분원 가마가 광주에 설치되면서 관영수공업체제를 갖추고 직접 생산, 조달하게 되었다.</br> 관요 중의 하나였던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사옹원으로 추정되는 ‘司’자가 인각기법으로 새겨진 백자 접시 편이 출토되었다. 본래 사옹원은 고려시대의 사옹司饔이다. 사옹의 ‘옹’은 <주례周禮>의 주에서 割烹煎和, 즉 ‘고기를 베어 삶고 간을 맞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즉 사옹은 왕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을 담당하는 동시에 공납용 자기 제작을 감독하고 수취해왔다. 고려시대의 사옹은 조선시대에는 사옹방으로 吏曹에 편제되었고, 1467년에 첨설직에서 녹관을 둔 정3품의 정식 행정 관사인 사옹원으로 개칭되었다. 관요는 사옹원의 분원으로 설립되어 왕실용 자기를 제작하는 자기소로 운영되었다. 공납물이었던 자기는 광주 자기소에서 직접 조달받게 된 것이다.</br> 사옹원 소속의 번조관과 경공장은 관요 운영과 관련한 구성원이었다. 번조관은 경공장을 관리하는 역할이었고, 경공장은 <경국대전> 공전 사옹원 조에 명시된 사기장 38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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