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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진작(慈慶殿進爵)>이 2월 12일 저녁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자경전에서 진작하였으며, 밤에는 같은 곳에서 <자경전야진별반과(慈慶殿夜進別盤果)>를 거행하였다. 다음날 아침에는 <자경전익일왕세자회작(慈慶殿翌日王世子會酌)>이 치러졌다. 이렇게 진작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밤에 야연(夜宴)이 한번더 거행되었고, 이튿날에는 주관자가 수고한 관원들에게 회작을 베푸는 예는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양상이다. 효명세자가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한 기간 동안 궁중 예연(禮宴)을 주관하면서 처음 시행한 것이라고 보며, 이 후 이러한 예는 관례적으로 줄곧 지켜졌다. 마지막으로 효명세자는 무자년을 특별한 해(年)라하여 6월1일 아침에 무자년 마지막 잔치인 <연경당진작(演慶堂進爵)>을 다시 한번 올렸다. 『무자진작의궤(戊子進爵儀軌)』의 기록에서 총 32종류의 정재가 연회 되었다. | <자경전진작(慈慶殿進爵)>이 2월 12일 저녁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자경전에서 진작하였으며, 밤에는 같은 곳에서 <자경전야진별반과(慈慶殿夜進別盤果)>를 거행하였다. 다음날 아침에는 <자경전익일왕세자회작(慈慶殿翌日王世子會酌)>이 치러졌다. 이렇게 진작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밤에 야연(夜宴)이 한번더 거행되었고, 이튿날에는 주관자가 수고한 관원들에게 회작을 베푸는 예는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양상이다. 효명세자가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한 기간 동안 궁중 예연(禮宴)을 주관하면서 처음 시행한 것이라고 보며, 이 후 이러한 예는 관례적으로 줄곧 지켜졌다. 마지막으로 효명세자는 무자년을 특별한 해(年)라하여 6월1일 아침에 무자년 마지막 잔치인 <연경당진작(演慶堂進爵)>을 다시 한번 올렸다. 『무자진작의궤(戊子進爵儀軌)』의 기록에서 총 32종류의 정재가 연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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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戊子년 『진작의궤(進爵儀軌)』에 정재된 처용무의 복식은 복식도에만 복식의 형태가 기록되어 있을뿐이며 복식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기록은 의궤상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복식도에 기록된 처용무 복식은 『악학궤범』 제9권의 처용 관복도설과 유사하여, 현재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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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4일 (금) 19:23 판
무자 진작의궤(戊子 進爵儀軌) | |
대표명칭 | 무자 진작의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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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戊子 進爵儀軌 |
유형 | 고서-의궤 |
저술시기 | 1828년 |
간행시기 | 1849년 |
간행처 | 의궤감인청(儀軌監印廳) |
간행인 | 서희순(徐憙淳) |
시대 | 순조 28 |
수량 | 결본(缺本). 권수(卷首) 1책(58장), 본本 권수卷首 2권 2책. |
크기 | 34.9×23.1㎝ |
판본 | 금속활자본(정리자整理字) |
형태사항 | 저지(楮紙) |
표기문자 | 한자, 이두 |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정의
1828년(순조 28)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40세 생일을 경축하는 의미로 2월과 6월에 각각 거행된 2차례의 진작(進爵) 의식에 대해 기록한 의궤로, 1849년 儀軌監印廳에서 간행하였다. 활자본이며, 2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심에 ‘進宴儀軌+戊子+목차’로 구성된 판심제가 기록되어 있어, 활자본 의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두 번째 진작 의식에 관한 부분을 附編이라 하여 따로 뒷부분에 수록한 것이 눈에 띈다. 곧, 본 의궤는 같은 주제이나 시차가 있는 두 종류의 의궤를 합편(合編)한 것이다.
내용
<자경전진작(慈慶殿進爵)>이 2월 12일 저녁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자경전에서 진작하였으며, 밤에는 같은 곳에서 <자경전야진별반과(慈慶殿夜進別盤果)>를 거행하였다. 다음날 아침에는 <자경전익일왕세자회작(慈慶殿翌日王世子會酌)>이 치러졌다. 이렇게 진작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밤에 야연(夜宴)이 한번더 거행되었고, 이튿날에는 주관자가 수고한 관원들에게 회작을 베푸는 예는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양상이다. 효명세자가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한 기간 동안 궁중 예연(禮宴)을 주관하면서 처음 시행한 것이라고 보며, 이 후 이러한 예는 관례적으로 줄곧 지켜졌다. 마지막으로 효명세자는 무자년을 특별한 해(年)라하여 6월1일 아침에 무자년 마지막 잔치인 <연경당진작(演慶堂進爵)>을 다시 한번 올렸다. 『무자진작의궤(戊子進爵儀軌)』의 기록에서 총 32종류의 정재가 연회 되었다.
戊子년 『진작의궤(進爵儀軌)』에 정재된 처용무의 복식은 복식도에만 복식의 형태가 기록되어 있을뿐이며 복식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기록은 의궤상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복식도에 기록된 처용무 복식은 『악학궤범』 제9권의 처용 관복도설과 유사하여, 현재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연경당 진작례는 순원왕후의 사순(四旬)을 기념하기 위해 거행되었지만, 실제로는 왕실의 권위 회복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삼고 거행된 중요한 의식이었다. 17종의 새로운 정재 종목을 선보이고, 이 종목들 사이에는 내적 흐름이 존재하고 있어서 매우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을 보인다는 점은 효명세자의 의도적인 기획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연향은 의례적인 행사가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기획되고 준비된 행사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치밀하게 준비된 궁중의 연향을 배설함으로써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나아가 왕권의 강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려 한 것이 바로 효명세자의 의도이다. 효명세자가 국사를 대리하던 기간에는 궁중정재가 정리되고 그 종목도 대폭 증대되었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다채로운 춤이 대거 출현하였다. 효명세자가 궁중정재의 황금기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김창하(金昌河)라는 훌륭한 예술가의 보좌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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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자 진작의궤(戊子進爵儀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