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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2일 (월) 14:32 판
목차
네트워크 그래프
개요
관왕묘는 본래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 측의 영향을 받아 건설되어 조선의 국왕이 제사를 지내도록 강요받은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우와 관왕묘에 우호적으로 변해간 국왕들의 태도와 민간의 관우신앙 등이 겹쳐 적잖은 인식의 변천을 겪었다. 근대에는 관성교(關聖敎)라는 민간 종교단체의 숭배 대상이 되기도 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대표적인 관왕묘 중 하나였던 동묘가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어 유적 및 문화관광지로 보존되고 있다.
이 큐레이션은 국내에 건립된 관왕묘의 역사적 배경과 변천을 정리하고, 이에 얽힌 인물 및 문헌 자료들을 일괄적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위키 페이지에 관왕묘 인식의 변천사를 간략히 작성하고, 네트워크 그래프를 만들어 관왕묘와 그 주변에 얽힌 개체 정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시각화 자료로 만드는 작업을 시도했다. 관왕묘에 얽힌 역사적, 문화적 지식의 습득을 희망하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는 초보적인 디지털 큐레이션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관왕묘의 건립 배경
조선에 관왕묘가 들어온 것은 선조 대 임진왜란 시기였다. 참전을 위해 조선 경내로 들어온 명나라 장수들은 무운을 빌기 위해 자비를 들여 관우의 사당을 건립하였고, 조선 조정에 직접 인력과 물자를 들여 관왕묘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관우는 무인의 표상 같은 존재로 여겨져 숭배됐을 뿐 아니라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산 정치가들의 의미 부여로 왕호와 제호까지 수여된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관우를 역사 속의 일개 무장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종교적인 관우 숭배를 접하고 다소 당혹해하곤 했다. 류성룡이 남긴 기록을 보자.
- "내가 왕년에 연도(燕都)에 갈 때, 요동으로부터 연경까지 수천 리에 이르는 사이에 유명한 성이나 큰 읍과 여염이 번성한 곳에는 모두 묘우(廟宇)를 세워 한의 장군 수정후(壽亭侯) 관공(關公)을 제사하고 인가에도 사사로 화상을 설치하여 벽에 걸어 두고 향을 피우며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제사하는 것이었다. 무릇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기도하고, 새로 부임하는 관리는 목욕재계하고 관왕묘에 나가 알현하는데 심히 엄숙하고 경건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어떤 사람에게 물었더니, 북방뿐 아니라 곳곳마다 이같이 하니 천하가 다 똑같다고 하였다."[1]
조선에서는 이상히 여겨질 법했던 관우 숭배가 중국에서는 '천하가 다 똑같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대중화·일상화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무장들은 민간 신앙에 필적할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관우를 중요시했다. 생사의 기로를 넘나드는 그들에게 군신의 보호와 영험이 그만큼 더 소중했는지도 모른다. 한 사례로 명나라 장수 진인은 전투 도중 왜병의 탄환에 맞았으나 살아남아 후방으로 후송되었고, 이때 관왕묘를 건립할 마음을 먹었던 듯하다. 류성룡은 명나라 장수들이 관왕묘를 건립한 취지와 그 이후 일어난 몇몇 사건들을 의식적으로 연결하여 기술하고 그 신묘함에 감탄하는 기록을 남겼다.[2] 사행 당시 관우 숭배를 당혹해하던 모습과 대조되는 그의 변화는 마치 조선의 관우와 관왕묘에 대한 인식의 변천을 그대로 축약해놓은 것 같아 재미있다.
관왕묘가 조선에 처음 설치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여론이 좋지 않았다. 상술하였듯 관우가 신앙의 대상이라는 개념부터가 조선에는 낯선 것이었고, 사당을 건축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많았기 때문이다. 명나라 조정과 장수들이 자금을 대는 경우도 있었지만 양측의 관계상 조선이 재정적인 부담을 떠안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헌부는 관왕묘의 건립 과정과 재정 부담을 비판하는 계를 올리기도 했다.[3] 그러나 선조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 또한 명나라 장수들의 요구로 직접 관우에게 친제를 올리기까지 했으니[4] 개인적인 감정이 좋았을 것 같지는 않으나 명나라의 요구를 무시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친제 직전에 비변사에서 올린 계에는 당시 조정의 난감하고 당혹한 심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 "관왕묘(關王廟)에 행례(行禮)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에 전에는 이런 예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일 행례하는 것은 너무 급박하니, 중국 장수가 말한 대로 시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걱정이 되는 것은 경리·제독이 먼저 도착하여 주상(主上)을 청할 경우에는 난처할 듯 싶습니다. 그러나 전의(奠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예절을 강정(講定)하지 못하였음은 물론 또 일찍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관계로 감히 경솔히 관왕묘에 나아갈 수 없다는 뜻으로 답변하소서. ……만약 중국 장수들이 굳이 청한다면 다시 거절할 만한 말이 없으니 매우 구간(苟簡)스러운 줄은 압니다만 형편이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일은 위에서 친림할 필요가 없으니 특별히 중신(重臣)을 차견하여 예식을 행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황상께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또 관원을 보내어 거행하면 중국 장수들이 틀림없이 등존(等尊)한다 하여 노여워 할 것이니, 이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5]
즉 건립 초기의 관왕묘는 명나라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설치하고 유지해야 하는 계륵 같은 존재였다. 종전 후 국왕의 친제가 끊기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대리하게 한 기록이 이를 방증한다.[6] 이때 예조가 관왕묘의 파손 상태 및 잡인들의 출입 여부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 관리가 썩 잘 이루어지지도 않았던 듯하다. 관우라는 인물을 특별히 존숭할 필요가 없었던 조선의 분위기와, 전시의 정치적·재정적 압박이 된 건립 배경 등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결과 관왕묘는 기피의 대상으로 전락한 채 한동안 방치되었다.
관왕묘 제의와 인식 변화
- "아! 무안왕(武安王)의 충의는 참으로 천고에 드문 것이다. 이제 한번 들러서 유상(遺像)을 본 것은 참으로 세상에 드물게 서로 느끼는 뜻에서 나왔고, 또한 무사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니, 본디 한때의 유관(游觀)을 쾌하게 하려는 뜻이 아니었다. 아아, 너희 장사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몸받아 충의를 더욱 면려(勉勵)하여 왕실을 지키도록 하라. 이것이 바라는 것이다. 또 동쪽과 남쪽에 관왕묘가 파손된 곳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한결같이 고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되, 제문 가운데에 내가 멀리 생각하고 경탄하는 뜻을 갖추도록 하라."[7]
관왕묘의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발생한 시점은 숙종 대였다. 이전의 국왕들이 관왕묘의 제사를 담당 관원으로 하여금 대리하게 했던 것과는 달리 숙종은 직접 방문하여 친제하고, 관우의 충의를 기리거나 제사에 신경쓸 것을 명하는 등 큰 관심을 내비쳤다. 강진의 관왕묘에 진린과 이순신을 함께 향사하는 절차에 관한 논의도 숙종 대에 이루어졌다.[8] 관우에 대한 관심이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숙종은 오랜 재위기간에 걸쳐 관왕묘의 위상을 적극적으로 정립해나갔다.
숙종이 관우에게 큰 관심을 쏟은 이유를 설명하는 견해는 대체로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 번째는 관우가 상징하는 충의의 가치를 신하들에게 강조하고 그것을 토대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관왕묘를 활용했다는 견해이다. 숙종 대는 여러 차례의 예송을 거치며 붕당의 대립이 심각해지고, 숙종 자신이 환국을 발생시켜 정치 구도의 전환을 꾀하는 등 파란이 많은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이 의도적으로 관우의 충의를 강조함으로써 신하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독려했다고 보는 견해이다.[9] 두 번째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는 견해이다. 1662년 남명(南明)의 멸망과 함께 중국은 청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명을 기억하고 현창하는 작업을 다수 수행했다. 관왕묘는 명이 남긴 문화적 영향을 상징하는 가장 구체적인 실체로써 숙종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 논지이다.[10] 그것은 효종이 북벌을 논하고 추진하는 행위에서 기대한 가치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진상이야 어쨌든 관왕묘에 대한 왕실의 관심과 존중은 영조를 거쳐 정조 대까지 이어졌다. 정조는 몸소 친제를 행하는 것은 물론 별다른 용건 없이도 관왕묘를 방문하곤 했다. 실록에 따르면 정조가 친제 등의 특수한 이유 없이 관왕묘를 들른 횟수는 14회에 이르며[11] 숙종, 영조, 장조(사도세자), 그리고 자신의 어제(御製)[12]와 어필비(御筆碑)[13]를 관왕묘 안에 세우기도 했다.[14] 이는 숙종 대부터 이어진 왕실 차원의 관우 숭배를 강조하는 동시에 사도세자의 정치적 정통성을 은연중에 격상시키는 정조 나름의 목적이 있었던 듯싶다.
정조는 직접 관왕묘의 제사에 쓸 악장(樂章)을 작성하기도 했다.[15] 정조가 지은 악장은 3성(成)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본래 3성은 제후국에서 아악 제례를 행할 때 적용되는 것이나 속악(俗樂) 제례인 관왕묘에 3성을 따른 것은 아악을 지향하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무안왕묘 악가>는 전조의 관우에 대한 송시(頌詩)들과 아악 제례에서 사용하는 3성의 양식을 고려하여 영신(迎神), 전폐(奠幣), 송신(送神)[16] 각 1편씩 제작되었다.[17] 이 제례악은 관왕묘악(關王廟樂), 또는 무안왕묘제악(武安王廟祭樂)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왕직아악대(李王職雅樂隊)에서 낸 《조선악개요(朝鮮樂槪要)》에 의하면 조선 이후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근근이 관왕묘 제사와 아악 연주가 이어졌던 모양이지만,[18]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결국 끊겨버렸다고 전해진다.[19]
한편 상술한 국왕들의 의사와는 별개로 민간에서도 관우신앙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삼국지(三國志)를 주제로 한 소설 등의 콘텐츠가 대중화되면서 중요 등장인물인 관우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졌고, 또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민간에서 일종의 미신적 성격의 관우신앙을 자체적으로 확산시킨 것도 한 요인이었던 듯하다. 《하재일기》에서 관제마(關帝馬) 앞에서 돈을 던져 행운을 빌었다거나, 관성묘에 참배하고 제비를 뽑아 점괘를 구했다는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20] 19세기 무렵에 이르면 관왕묘는 매우 일상적인 모습으로 민간 생활에 접해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종 대 이후의 관왕묘와 관왕묘의식(關王廟儀式)
- "관왕묘(關王廟)를 높이 모시고 공경스럽게 제사지낸 지가 지금 300여 년이 되었다. 순수하고 충성스러우며 지조 있고 의로운 영혼은 천년토록 늠름하여 없어지지 않고, 중정(中正)하며 굳세고 큰 기백은 천하에 차고 넘쳐 오가면서 말없이 짐의 나라를 도와 여러 번 신령스러운 위엄을 드러냈으니, 경모하고 우러르는 성의를 한껏 표시해야 할 것이다."[21]
조선 말기 고종 대에 이르면 관왕묘는 또 다른 의미를 부여받고 실록에 등장한다. 고종 역시 관왕묘를 자주 방문하고 제사를 지냈지만, 또한 열무(閱武)와 시사(試射) 등 군사적 행사로의 장소로도 활용했다.[22] 고종은 기존에 존재한 남묘, 동묘와는 별개로 북묘를 추가로 건립했고,[23]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제위에 오른 뒤에는 관왕을 관제(關帝)로 격상시키는 제반 의식 절차를 논의하도록 명령했다.[24] 아마도 고종은 당시 국내외의 혼란스러운 정세를 극복하려는 군사적 의지와 왕실에서 황실로 격상된 권위의 신장을 관왕묘라는 상징적인 존재를 통해 표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주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통제 하에 놓이는 과정에서 관왕묘 제사는 폐지되는 수순을 밟아나갔다.
- "……대보단(大報壇), 만동묘(萬東廟), 숭의묘(崇義廟), 동관묘(東關廟), 남관묘(南關廟), 북관묘(北關廟) 및 지방 관묘(地方關廟)의 제사를 폐지하고, 대보단의 터는 궁내부에서 관할하며 숭의묘와 북관묘는 국유로 이속시킨다. 만동묘, 동관묘, 남관묘 및 지방 관묘는 해당 지방 관청에 넘겨 백성들의 신앙에 따라 따로 관리할 방법을 정한다."[25]
이로써 관왕묘 제사는 다른 여러 국가적 종교행사들이 폐지되거나 규모가 축소당하는 가운데 함께 폐지되었고,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관리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 이후 관왕묘는 대체로 무속이나 도교적인 성격이 짙은 종교집단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이것이 현재까지도 명맥을 유지해온 결과 오늘날 무속적인 성격을 짙게 지니는 한국의 관우신앙이 성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6]
1920년 박기홍(朴基洪), 김용식(金龍植) 등은 기존의 무속신앙단체를 중심으로 관성교(關聖敎)라는 신흥 종교를 창시하여 동관왕묘를 본부로 삼아 종교 및 포교 활동을 이어나갔다. 무당들 또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까지 제법 오래 명맥을 이어나간 것으로 보이나, 현대 들어 동관왕묘가 보물 142호로 지정되고 지자체의 관리를 받는 문화유적이 됨으로써 종교 본부로서의 기능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 이미지 출처:디지털 장서각 아카이브.
고종 대를 전후로 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관왕묘의식(關王廟儀式)》이라는 문헌의 존재와 그 내용이다. 고종은 서울 뿐 아니라 지방 곳곳에도 관왕묘를 설치하였는데, 그중 개성에 설치된 관왕묘의 운영과 관련된 각종 규정을 기록한 문헌이 바로 이 《관왕묘의식》이다. 경외에 위치한 관왕묘이므로 국왕이 친제를 올리지 못하는 만큼 현지 관리가 제사를 대리하도록 돼 있는데, 이에 필요한 예산과 절차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것이 개성관왕묘만의 독자적인 규례가 아니라 기존에 설치된 타 지역의 관왕묘의 전례를 참고하여 작성된 것인 만큼 고종 대 관왕묘 관리와 제례 의식을 검토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이때 작성된 절목의 내용은 1. 경칩(驚蟄)이나 상강(霜降)[27] 때의 제향에는 개성 부윤이 헌관이 되고 진신(縉紳) 중에서 제집사를 차출할 것, 2. 탄일이나 기신 및 12차례 절향(節享) 때의 헌관과 제집사는 사원(社員) 중에서 차출할 것, 3. 각 제항의 헌관과 제집사는 스스로 식사를 준비하여 거행할 것, 4. 수직(守直) 등은 사원이 돌아가면서 거행할 것, 5. 수삼세전 중 8천 냥은 매년 10월에 包所에서 관왕묘에 수납할 것 등이다. 이어 6. 8천 냥의 지출 항목을 규정하였는데 수라 비용 1,440냥, 경칩과 상강 향사 비용 각 300냥, 탄일과 기신제 등의 향사 비용 각 200냥, 12차례 절향 비용 각 150냥, 燈油香炭費 360냥, 재방(齋房)과 수복방(守僕房)[28]의 시유비(柴油費)[29] 각 240냥 등이다. 이 밖에도 7. 8천 냥을 수납 후 봉표(捧標)를 시전(市廛)에게 줄 것, 8. 당해 연도는 10월에 수납할 것, 9. 미진한 조항은 추후에 마련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30]
현대 문화유적으로서의 관왕묘
- 이미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왕묘.
현존 관왕묘 건축물들은 종교적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문화유적 및 관광지로 통용되는 상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서울 동관왕묘로,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국가가 법적으로 지정한 문화재로 관리받고 있다. 다만 그 외의 관왕묘들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거나 잘 알려지지 않아 잊혀진 것들이 많다. 일례로 선조 대 최초로 설치된 관왕묘인 남관왕묘는 1970년 1월에 도시 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대우빌딩과 힐튼호텔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자리에서 밀려나 현 사당동으로 이전되었다. 중구에서는 남관왕묘가 자리하고 있던 터를 역사문화자원으로 지정하고 관련 지식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31]
- 이미지 출처: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완도 고금도 관왕묘비.
구 강진관왕묘 건물은 현재 충무사(忠武祠)로 불리운다. 상술하였듯 숙종 대에 이 관왕묘에 진린과 이순신이 함께 배향됐는데, 시간이 흐르자 관우는 뒤로 밀리고 이순신을 기리는 쪽으로 기능이 바뀌어간 듯하다. 진린과 이순신을 함께 모실 때만 해도 그 가부를 따지느라 시끄러웠던 당시 조정의 여론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충무사로 바뀐 현재에도 관왕묘비(關王廟碑)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6호로 지정된 채 현장에 남아있어 한때는 이곳이 관왕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32]
- 이미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원관왕묘.
남원에 위치한 관왕묘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유정(劉鋌)이 비석과 소상을 세운 것에서 시작되어, 숙종 대에 누각을 지어 비석과 소상을 관리하고 영조 대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1973년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 이미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동관왕묘.
안동관왕묘는 안동시 공식블로그에서 한 차례 포스팅하여 다룬 적이 있다.[33] 이로 보아 하나의 문화 관광 자원으로는 인식하고 있는 듯하나 구글, 네이버 등의 포털 사이트에서 '안동관왕묘'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보아도 최소한의 메타데이터조차 습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아쉬운 사실이다. 사실 안동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방 관왕묘는 온라인 검색만으로 자세한 정보를 열람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관왕묘의식》과 연관이 깊은 개성관왕묘를 비롯해 북한에 있는 관왕묘의 현황을 파악하기 힘든 것도 관련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작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관왕묘의 위치
확장된 네트워크 그래프?
기획 초기에 구성한 네트워크 그래프로, 본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노드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비교적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 노드들을 골라내서 만든 것이 상단의 네트워크 그래프이다. 이쪽은 향후 추가로 자료를 조사해나가며 연결망을 더 확장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주석
- ↑ 서애선생문집 16권, 잡저(雜著), 기관왕묘(記關王廟), 한국고전종합DB.
- ↑ 위의 책, 한국고전종합DB.
- ↑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40권, 선조 34년 8월 27일 임진 1번째 기사.
- ↑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00권, 선조 31년 5월 14일 무술 2번째 기사.
- ↑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00권, 선조 31년 5월 12일 병신 6번째 기사.
-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54권, 광해 4년 6월 1일 갑자 2번째 기사.
- ↑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23권, 숙종 17년 2월 27일 계미 1번째 기사.
- ↑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49권, 숙종 36년 12월 17일 정축 2번째 기사.
- ↑ 남호현, 〈조선시대 關王廟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그 의미〉,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강대학교 대학원, 2016, 23~24쪽 참조.
- ↑ 이성형, 〈대명의리론의 추이와 조선관왕묘: 숙종연간을 중심으로〉, 《한국한문학연구》 53권, 한국한문학회, 2014, 370~373쪽 참조.
- ↑ 정조 4년 4월 13일, 정조 5년 4월 9일, 정조 6년 4월 10일, 정조 7년 4월 5일, 정조 10년 4월 1일, 정조 12년 4월 4일, 정조 14년 2월 12일, 정조 16년 9월 10일, 정조 17년 1월 12일, 정조 17년 9월 4일, 정조 18년 1월 12일, 정조 21년 1월 29일, 정조 21년 8월 15일, 정조 23년 8월 19일.
- ↑ 임금이 지은 글.
- ↑ 임금이 친히 쓴 글을 새긴 비.
- ↑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권, 정조대왕 행장.
- ↑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21권, 정조 10년 2월 2일 병자 1번째 기사.
- ↑ 영신은 제의에서 신을 맞아들이는 단계이고, 전폐는 폐백을 올리는 단계이며, 송신은 신을 돌려보내는 단계를 의미한다.
- ↑ 김명준, 〈관왕묘(關王廟) 악장의 형성과 개찬의 의미: 정조와 고종대를 중심으로〉, 《어문논집》 77권, 민족어문학회, 2016, 15쪽 참조.
- ↑ 디지털 장서각 아카이브, 조선악개요(朝鮮樂槪要).
-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무안왕묘제악(武安王廟祭樂).
- ↑ 《하재일기》6, 기해년(1899) 1월 1일.
- ↑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8월 25일 양력 1번째 기사.
- ↑ 고종 5년 3월 23일, 고종 8년 9월 11일, 고종 8년 9월 12일, 고종 11년 9월 4일, 고종 30년 5월 13일.
- ↑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20권, 고종 20년 9월 25일 갑인 2번째 기사.
- ↑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8월 25일 양력 1번째 기사.
- ↑ 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 7월 23일 양력 3번째 기사.
- ↑ 남호현, 같은 논문, 50쪽 참조.
- ↑ 24절기 가운데 18번째 절기로, 가을의 마지막 절기이다.
- ↑ 조선시대에 종묘, 왕릉 등을 관리하거나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지내던 곳.
- ↑ 땔나무와 기름에 쓰는 비용.
- ↑ 디지털 장서각 아카이브, 관왕묘의식(關王廟儀式).
- ↑ 중구 역사문화자원
-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완도 고금도 관왕묘비.
- ↑ 삼국지의 명장 관우를 배향한 관왕묘와 서악사:: 안동여행, 안동관왕묘, 안동서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