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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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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말하기를, “옛날 사람 가운데 옷 한벌로 30년을 입은 이가 있었다. 내가 타향에서 손 노릇 하는 것은 다만 1년 동안뿐이며, 지금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고 있으니, 베옷 한 벌로도 감당할 수 있다. 또 뱀과 물고기도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이를 갚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라 하고, 즉시 옷을 벗어 고벽에게 주니, 고벽은 손을 휘둘러 물리쳤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옛날 사람 가운데 옷 한벌로 30년을 입은 이가 있었다. 내가 타향에서 손 노릇 하는 것은 다만 1년 동안뿐이며, 지금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고 있으니, 베옷 한 벌로도 감당할 수 있다. 또 뱀과 물고기도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이를 갚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라 하고, 즉시 옷을 벗어 고벽에게 주니, 고벽은 손을 휘둘러 물리쳤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벗이 주는 것은 비록 거마(車馬)일 지라도 배례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이런 보잘 것 없는 옷이겠소? 옛날 한퇴지(韓退之)는 옷을 남겨 두어 대전(大廟)에게 작별하였으니[3], 작별에 임하여 옷을 남겨 두는 것은 곧 옛 사람의 뜻이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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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말하기를, “벗이 주는 것은 비록 거마(車馬)일 지라도 배례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이런 보잘 것 없는 옷이겠소? 옛날 한퇴지([http://korean.cri.cn/1680/2010/11/24/1s166937.htm 韓退之])는 옷을 남겨 두어 대전(大廟)에게 작별하였으니[3], 작별에 임하여 옷을 남겨 두는 것은 곧 옛 사람의 뜻이오”라고 하였습니다.
  
 
고벽은, “원래는 물리치려고 했는데 두터운 은정을 막을까 두렵군요”라고 하면서 받아 갔습니다.
 
고벽은, “원래는 물리치려고 했는데 두터운 은정을 막을까 두렵군요”라고 하면서 받아 갔습니다.

2020년 4월 2일 (목) 17:57 판

개요

학력

  • 충남여자고등학교
  • 동국대학교 사학과

경력

  • 교육봉사동아리 E.L.F 총무

좋아하는 것들

  • 강아지
  • 음식

최부의 표해록

최부의 표해록 장서각본

2월11일

十一日,在杭州,是日陰,楊秀祿、顧壁共來見臣,壁曰:“我杭城西山八盤嶺有古剎,名高麗寺,寺前有二碑記古跡,距此十五里,趙宋時,高麗使來貢而建也,你國人越境,尚且造寺,則其崇佛之意,可知矣!”臣曰: “此則高麗人所建也,今我朝鮮,關異端,尊儒道,人皆以入孝出恭、忠君信友,為職分事耳,若有影首者,則並令充軍,”壁曰:“凡人不事佛,則必祀神,然則你國事鬼神否?”臣曰:“國人皆建祠堂,以祭祖爾,事其當事之鬼神,不尚溢,”俄而楊秀祿辭出,壁以一公文示臣,乃杭州府報前路各府縣驛送臣等文也,其文曰:“杭州府:〈為海洋聲息事》,奉浙江等處承宣布政使司简付抄,蒙欽差鎮守浙江司設監太監張慶、巡按浙江監察御史暢亨會案前事,「據總督浙江備倭署都指揮僉事黃宗、巡視海道浙江按察司副使吳文元呈,并定海、昌國等衛及台州府等衙門各狀申報,《弘治元年正月十七日,瞭見海門衛桃诸千戶所牛頭外洋有船,使入師子寨》等因,為照,係于海洋船隻重事,就經併行督、巡海、分守、分巡官員,督指揮僉事黃宗等呈,備桃诸千戶所申,《該千百戶柳春等,帶領旗軍,前去臨海縣二十都,與同當地火甲,獲住人船,押送到所審問,語言難辨,據寫姓名來歷緣由,抄單呈報前來》會同巡按浙江監察御史暢亨議,看得單內開《審夷人崔溥,雖據供寫,朝鮮國人往濟州等處海島,為暴風所逆,得到天子大國之界》等情,但恐夷人多許,真偽難測,況無開報所泊船內,會否點擔有何器械、并別項行李等件,俱合勘審,又經行據撼督備倭署都指揮僉事黃宗、巡視海道副使吳文元、分守右參議陳潭、分巡副使楊峻呈,《該把烟松門等衛所備倭指揮同知劉澤呈送夷人四十三人,會同審據一人寫名云云,再三會審無異,隨將印信、馬牌、枋錄、文籍、冠帽、衣包等件,點看明白,給與崔溥等收領,及將所獲夷船,拖閣上塢外,備由連人并刀一把、一張解送到職》會同浙江都布按三司掌印都指揮僉事崔徹、左布政使徐主、副使魏福,覆審相同,緣係遭風外夷人船事理,擬合通行,除外,仰抄領人案回司.」照依會案內事理,即將崔溥等,本司給批差委指揮僉事楊旺,管送赴京,及行所屬驛遞,應付差去官員虞給、站船,并伴送軍餘及崔一把擒并所屬沿海軍衛巡司出海等官,部領軍船哨究,操守備,續據署都力

p.392 溥等口粮、紅船、脚力,合行前路官司,一體應付,其發去刀一把、弓一張,轉發官庫收,取庫收繳報,仍仰徑自會 奏施行,先具抄案依准,各 另呈來.”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양수록(楊秀祿)과 고벽이 함께 신을 보러 왔습니다.

고벽이 말하기를, “우리 항주성 서쪽 산인 팔반령(八盤嶺)에 고찰이 있는데 이름을 고려사(高麗寺)라 합니다. 절 앞에 2개의 비(碑)가 있어 옛 사적을 기록했는데 이곳과는 15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이는 곧 송나라 때 고려의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치고 세운 것입니다. 당신 나라 사람이 국경을 넘어와서도 힘써 절을 지었으니 불교를 숭상하는 뜻을 알 만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3]

고려 문종의 4남인 대각국사 의천은 중국에 건너가 송나라 철종의 환대를 받았으며 각지를 다니며 중국의 고승들과 토론했습니다. 항저우 혜인사원(慧因寺院)에서 존경하던 정원(淨源)법사를 만났고 7,500권 정도의 불경을 기증했습니다. 당(唐)대에는 도교 숭상정책으로 불교가 탄압 받아 경전들이 많이 멸실했기 때문에 의천이 기증한 경전은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 뒤로 절의 이름이 고려사가 되고, 선종에서 화엄종 절로 바뀌었습니다. 귀국한 뒤에도 의천은 화엄종 불경 170권과 화엄경각 보수를 위해 금 2,000냥을 쾌척했습니다. 절은 태평천국의 난 때 완전히 없어졌지요. 1989년에 가 보니 주춧돌과 우물만 있더군요. 그래서 3차례 방문해 중건 문제를 항저우시 당국과 협의했고, 지난달 왕궈핑(王國平) 시 공산당 서기와 만나 중건에 합의했습니다. 항저우시 종교국장도 중건에 참고하기 위해 해인사 불국사를 둘러보고 갔습니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 항저우를 방문한 한국인은 20만명으로 외국인 중 가장 많았다"며 "고려사가 서호 인근인 데다 옆에 호텔 신축계획도 있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생각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4] 신이 말하기를, “이는 고려 사람이 세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 조선은 이단(異端)을 물리치고[5] 유도(儒道)를 높이어 사람마다 모두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어른에게 공손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머리를 깎은 자가 있으면 모두 군역(軍役)에 편입시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사람들은 부처를 섬기지 않으면 반드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데, 그렇다면 당신 나라는 귀신을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사당을 세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당연히 섬겨야 할 귀신만 섬기고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조금 후에 양수록은 하직하고 나갔습니다.

고벽이 공문(公文) 한 장을 신에게 보여주었는데 바로 항주부에서 앞으로 가야할 각 부·현·역(府縣驛)에 신 등의 호송을 통지하는 공문이었습니다. 그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항주부 : 〈해양 상황에 관한 건) 절강등처승선포정사사(浙江等處承宣布政使司)의 차부(箚付)를 받았는데 내용은 이하와 같습니다.

흠차진수절강사설감태감(欽差鎭守浙江司設監太監) 장경(張慶)과 순안절강감찰어사(巡按浙江監察御史) 창형(楊亭)의 전사(前事)에 대한 공동의안(議案)을 받들었는데,

“총독절강비왜서도지휘첨사(摠督浙江備倭署都指揮僉事) 황종(黃宗), 순시해도절강안찰사부사(巡視海道浙江按察司副使) 오문원(吳文元)의 정문(呈文)과 아울러 정해위(定海衛), 창국위(昌國衛) 등 및 태주부(台州府) 등 아문(衙門)이 각기 올린 보고서는, 홍치(弘治) 원년 윤정월 17일에 해문위(海門衛) 도저천호소(桃渚千戶所)의 우두산(牛頭山) 앞 바다에 배가 있는 것을 멀리서 보고 사자채(師子寨)로 들어오도록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해양의 선박에 관한 중대한 일이므로 곧 총독(總督)·순해(巡海)·분수(分守)·분순(分巡)의 관원에게 아울러 이첩하여, '파총(把總) 및 소속 연해(沿海) 군위(軍衛)의 순사(巡司)·출해(出海) 등 관원을 독려하여 군선(軍船)을 거느리고 정찰하며 빈틈없이 방비하라’고 지시하였다. 또 이어서 받은 도저천호소의 보고서가 첨부된 서도지휘첨사(署都指揮僉事) 황종 등의 정문(呈文)에 해당 천호(千戶)·백호(百戶) 유춘(柳春) 등이 기군(旗軍)을 거느리고 임해현(臨海縣) 20도(都)로 가서 그 곳 화갑(火甲)과 함께 사람과 배를 붙잡아 유치하고, 도저소로 압송하여 심문했으나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하며, 성명과 내력 및 사유를 쓴 초단(抄單)을 보내왔다. 순안절강감찰어사 창형과 회동하여 논의하며 초단을 살펴보니, 이인(夷人) 최부를 심문하여 공술에 의거, <조선 사람으로 제주 등지의 섬에 갔다가 폭풍을 만나 천자가 다스리는 대국(大國) 땅에 도착한 것'이라는 사정을 써 놓았지만, 이인(夷人)들은 속임이 많아 사실인지 거짓인지 헤아리기 어렵고, 더구나 정박한 배 안에 무기나 별도의 행장 등을 점검했는지 여부를 보고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모두 실지 조사를 해야할 것이다. 다시 공문을 보내고 나서 받은 총독비왜서도지휘첨사(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 황종과 순시해도부사(巡視海道副使) 오문원 · 분수우참의(分守右參議) 진담(陳潭)·분순부사(分巡副使) 양준(楊竣)의 정문(呈文)은 '해당 파총송문등위소(把摠松門等衛所) 비왜지휘동지(備倭指揮同知) 유택(柳澤)이 이인(夷人) 43명을 정문과 함께 보내 왔으므로, 회동하여 심사하고 한 사람씩 이름을 써서 ... 운운하였다. 두세 차례 모여 심사해 보았으나 별 이상이 없었고, 바로 인신(印信)·마패(馬牌)·방록(榜錄)·문적(文籍)· 관모(冠帽)·의포(衣袍) 등을 하나씩 점검해 보아도 분명하였으므로 최부 등에게 내주어 수령하게 하였다. 압류한 이인(夷人)의 선박은 선거(船渠)로 끌어다 올려두는 한편 사유서를 갖춘 관련 인원을 칼 한 자루, 활 한 장(張) 딸려서 본직(本職)에게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에 절강 도(都) · 포(布)·안(按) 삼사(三司)의 장인도지휘사(掌印都指揮僉事) 최윤(崔__), 좌포정사(左布政使) 서규(徐圭), 부사(副使) 위복(魏福)과 회동하여 복심(覆審)해 보아도 앞뒤가 서로 동일하였다. 사연이 풍랑을 만난 외이(外夷)의 사람과 배에 관한 사항이므로 응당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 외에, 인원 인수의 건을 초록(抄錄)한 다음 포정사사(布政使司)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공동 의안(議案)의 사리(事理)에 따라 최부 등은 곧 본사(本司)에서 비문(批文)으로 지휘첨사(指揮僉事) 양왕(__王)을 차출하여 북경으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지나는 각지의 역체(驛遞)에 이첩하여 파견 관원의 늠급(豪給, =봉급) · 참선(站船, 운수용 선박)과 아울러 호송 군여(軍餘) 및 최부 등의 구량(口糧)· 홍선(紅船). 각력(脚力, 운반비)을 지급하게 하라. 앞길의 관사(官司)도 이첩하여 모든 것을 제공하게 하라. 보내는 칼 한 자루와 활 한 장은 전송(轉送)하여 관고(官庫)에 보관하도록 하고, 창고에서 꺼낼 때는 보관증을 받도록 하라. 직접 상주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먼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초안(抄案)을 갖추니 각기 따로 보고하기 바란다.

행정(공문) 11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Yang Hsiu-lu and Ku Pi came to see me. Ku Pi said, “On Pa-p’an Range in the mountains west of Hang-chou is an old monastery named Koryo Temple. In front of the temple are two stone tablets that commemorate the old ruins.21 They are fifteen li from here. In the Sung period an envoy from Koryo came with tribute and built [the temple). That your countrymen build temples even beyond their own borders must mean that they revere the Buddha.” I said, “But that was built by a man from Koryo. Our Chosón, now, has exposed heresies and respects the Confucian Way. The people consider as their duties only filial piety in the home and courtesy outside it, loyalty to their lords, and sincerity with their friends. Anyone who shaves his head is banished.” Ku Pi said, “All people who do not serve the Buddha sacrifice to gods. That being so, does your country serve gods and spirits? I said, “All my countrymen build shrines and sacrifice to their ancestors. They serve the gods and spirits they ought to serve and do not respect unorthodox sacrifices.” Presently Yang Hsiu-lu left, and Ku Pi showed me an official document. It was a document in which Hang-chou Prefecture notified each prefecture and county on the road ahead that they were sending us on by stations. The text said, “Hang-chou Prefecture on a matter of maritime intelligence: “We have received a copy of orders from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 Office of Chekiang and Other Places. We have received the joint judgment on the above matter of Chang Ch’ing, Overseer of the Imperial Grand Defending Directorate of Chekiang (Ch’in-ch'ai chen [shou] Che-chiang Ssu-she-chien t'ai-chien] and Ch’ang Heng, Regional Investigating Censor for Chekiang [Hsün-an Che-chiang chien-ch'a yü-shih].22 According to a report from Huang Tsung, Supreme Anti-Japanese Commander for Chekiang and Concurrent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and Wu Wen-yuan, Chekiang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for the Maritime Circuit, and reports of respective conditions in Ting-hai, Ch’ang-kuo, and other garrisons, and in T’ai-chou Prefecture and other garrison ports: “On the 17th Day, Intercalary First Month, Hung-chih 1, a ship was clearly seen to sail into Shih-tzu Stockade from Niu-t’ou-wai-yang, T’ao-chu Chiliad, Hai-men Garrison. Accordingly, the matter was held to be an important one of seagoing ships, and we ordered maritime and local defending and touring offices of the Supreme Command, coast guards and naval officers in their commands, and warships under control of the Ministry to reconnoiter and take firm precautions. “Continuing, according to the report of Concurrent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Huang Tsung, etc., and the reports of the T'ao-chu Chiliarch: “Liu Ch’un, Centurion [Po-hu] of the said Chiliad, and others led banner troops out to Division 20 in front of Lin-hai County and with the local militia of the area arrested the men, seized the boat, and drove [the men] to the Chiliad. When they were questioned, their speech was difficult to understand. Their names and backgrounds, as they wrote them, were copied into a statement, reported, and have come to hand. We met with Ch’ang Heng, Regional Investigating Censor for Chekiang, and discussed the matter. We saw that the contents of the statement began with an interrogation of the barbarian Ch’oe Pu. Although, according to his statement, he was a Korean who had gone to Cheju and other islands and been driven off by violent winds, arriving at the border of the country of the Son of Heaven, we feared that barbarians are often deceitful, and it is hard to judge what is true and what false. That was the more so in this case, since there was no report on the contents of the boat – whether they had been inspected, what implements there were, and what items of baggage there were. It was appropriate that all that be examined. “According, then, to the report of Huang Tsung, Supreme Anti-Japanese Commander and Concurrent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Wu Wenyüan,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for the Maritime Circuit; Ch'en T’an, Right Assistant Administration Commissioner; and Yang Chün, Regional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23 and the report of Liu Tse, the said AntiJapanese Commissioner for Sung-men and Other Garrisons and Chiliads and Vice Commander [T’ung-chih]: “The forty-three barbarians were brought together and investigated by having each man write his name and so forth. A second and third time they were all questioned, and there were no discrepancies. Accordingly, the seal, horse permit, records, documents, hats, bundles of clothing, and other things were taken and each checked carefully. Receipts were given to Ch’oe Pu and the others. The seized boat was also towed outside Ko-shang-wu and a statement of its details prepared. The men, a sword, and a bow were sent off together to this office.

“We have met with [representatives of] the Three Authorities of Chekiang, Ts’ui Yin,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for Documents [Chang-yin tuchih-hui ch’ien-shih]; Hsü Kuei, Left Provincial Administration Commissioner; and Wei Fu,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and held another investigation. Since the facts and theories concerning the barbarians and their boat, aside from the encounter with the wind, are consistent and in harmony, we put aside that one fact and ordered that the notes of the proceedings in the matter of the men be turned over to this office. In accordance with the facts and principles involved in the case, in respect to Ch’oe Pu and the others, this office grants its endorsement and commissions Commander Yang Wang to take charge of escorting them to the capital. Let the stations and transfer stations under this office give to the dispatched official food and boats and to the escorting troops and Ch’oe Pu and his company rations, red boats, and laborers. It is fitting that all offices on the road ahead should comply. Let the sword and bow that have been sent out be turned over to the Public Treasury to be stored. When we have received a report from the Treasury that it has taken them in, we shall order direct individual and group memorials requesting the arrangements to be allowed. First, let copies of the handling of the case be prepared and, as acknowledgement, individually reported here.”

2월12일

十二日,在杭州,是日晴,臣謂程保等曰:“顧壁誠心待我,凡所聞所見,悉告無隱,俾我不迷,恩情甚重,欲表信物,顧我行李一無些子之儲,所有者,只此衣耳,我欲解以與之”保等曰:“前日解一衣,贈許千戶,今日又解贈顧公,則所穿之衣,只一件耳,迢遞萬里之路,敵誰改為?”臣曰:“古人以一衣三十年者有之,我之作客他鄉,只在一年之間,今時日漸懷,一布衣足以當之,且虫也魚感恩,亦欲報之,而況於人乎?”即解衣與壁,壁揮手以却.臣曰:“朋友之賜,雖車馬不拜,况此矮小之乎?昔韓退之留衣以別大顚, 則臨別留衣,即古人之意也.”壁曰:“本欲却之,恐阻盛意,”受而去之.O浙江布政司,東南至海,南至福建界,管十一府州,統七十六縣,內有杭州為第一,即五代時吳越國,宋高宗南渡遷都之地,所謂臨安府也,府治、仁和·錢塘兩縣之治及鎮守府、都司、布政司、運司、按察院、__法察院、中察院、府學、仁和學、錢塘學、武林驛,俱在城中,城中又有吳山,其景最好,上有十廟,伍子胥廟、三茅觀、四聖廟等也,又有九井、三潭,吳山大井為上,郭婆上八眼、下八眼、中八眼、西寺等井居次,又以小溝浚西湖之井,導入城中,府之鎮,乃武林山也,西湖在城西二里,南北長,東西徑十里,山川秀發,歌管瞬間之地,竹閣在廣化院,白樂天 所建,樂天詩宵眠竹閣間者此也,岳鄂王墓在棲霞嶺口,冷泉亭在靈隱寺前飛來宰下,古誌,許由嘗飲於靈隱潤者此也,表忠觀龍山南,有東坡所撰碑,風堂嶺在放牧馬場西,即東坡訪辨才之處,南屏山在興教寺後,崖壁剝落之餘,唯存司馬溫公隸書家人卦及米元章書琴臺二字,坡詩我識南屏金鯉魚者此也,蘇公與興教寺相對,東坡守杭時所築,長十餘里,中有六橋,难德觀在蘇公第一橋下,袁韶奏請建祠,取錢塘名人自許由至張九成及節婦五人等三十九人,摘傳立祠,豐樂樓在城西涌金門外西湖岸,其北有環碧園園,玉蓮堂在湧金門,北門內又有湧金池,玉壺園在錢塘門外,東坡詠南满堂杜鵑花節此也,門西有先得樓,雲洞園在昭慶寺北,花柳參差,中有婦人墓,石函橋在水磨頭,白樂天〈湖石記〉云:“錢塘一名上湖,北有石函者是也,宜園在德生堂西,摘東坡詩淡粒濃抹總相宜二字,御書堂扁,斷橋在宜園西,所謂斷橋斜口岸烏紗者此也.西石頭在石函橋西,秦始皇東巡浮海纜船之地,孤山在西湖孤山路西,山之東有林和靖隱廬古基及墓,三賢祠在蘇公第三橋下,乃白文公、林和靖、蘇文忠公祠,已上古蹟,皆顧壁所與臣說話,杭即東南一都會,接屋成廊,連成帷,市積金銀,人擁錦繡,蠻橋海舶,榆立街衢,酒帘歌樓,咫尺相望,四時有不謝之花,八節有常春之景,真所謂別作天地也,

항주[1][2]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신이 정보 등에게 말하기를,

“고벽이 성심껏 나를 대하여 보고 듣는 바를 숨김없이 죄다 알려주어 나를 헷갈리지 않도록 하였다. 심히 두터운 은정을 신물(信物)로 표시하고자 나의 행장을 돌아보니,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가진 것은 이 옷뿐이니 내가 벗어서 주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보 등이 말하기를, “전일에 옷 한 벌을 벗어 허(許)천호(千戶)에게 주었는데, 오늘 또 옷을 벗어 고공(顧公)에게 준다면 입고 있는 옷은 다만 한 벌뿐입니다. 머나먼 만 리 길에 옷이 해지면 누가 고쳐 만들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옛날 사람 가운데 옷 한벌로 30년을 입은 이가 있었다. 내가 타향에서 손 노릇 하는 것은 다만 1년 동안뿐이며, 지금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고 있으니, 베옷 한 벌로도 감당할 수 있다. 또 뱀과 물고기도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이를 갚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라 하고, 즉시 옷을 벗어 고벽에게 주니, 고벽은 손을 휘둘러 물리쳤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벗이 주는 것은 비록 거마(車馬)일 지라도 배례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이런 보잘 것 없는 옷이겠소? 옛날 한퇴지(韓退之)는 옷을 남겨 두어 대전(大廟)에게 작별하였으니[3], 작별에 임하여 옷을 남겨 두는 것은 곧 옛 사람의 뜻이오”라고 하였습니다.

고벽은, “원래는 물리치려고 했는데 두터운 은정을 막을까 두렵군요”라고 하면서 받아 갔습니다.

절강포정사는 동남으로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는 복건의 경계에 이르러 11개의 부 · 주를 관할하고 76개의 현을 통할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항주가 제일인데 곧 오대(五代) 때의 오월국(吳越國)이고, 송나라 고종(高宗)이 남쪽으로 양자강을 건너 도읍을 옮겼던 땅으로서[4][5][6][7][8][9][10][11][12] 이른바 임안부(臨安府)입니다.

부치(府治)와 인화현(仁和縣)·전당현(錢塘縣) 두 현의 현치(縣治)와 진수부(鎭守府)·도사(都司)·포정사(布政司)·염운사(鹽運司)·안찰원(按察院)·염법찰원(鹽法察院) · 중찰원(中察院)·부학(府學)·인화학(仁和學)·전당학(錢塘學)·무림역(武林驛)이 모두 성안에 있습니다.

성안에 또 오산(吳山)이 있는데 그 경치가 가장 좋습니다. 산 위에는 오자서묘(伍子胥廟)[13][14][15] · 삼모관(三觀) ·사성묘(四聖廟) 등 10묘(廟)가 있습니다.

또 9정(井)과 3담(潭)이 있으니, 오산의 대정(大井) 이 상등이고, 곽파(郭婆)의 상팔안(上八眼) · 하팔안(下八眼)·중팔안(中八眼), 서사(西寺) 등의 우물이 다음이고, 또 작은 도랑으로 서호(西湖)[16][17][18]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부의 진산(鎭山)은 무림산(武林山)입니다.

서호[19]는 성 서쪽 2리에 있는데 남북은 길고 동서의 직경이 10리나 되고, 산천이 수려하므로 노래와 연주 소리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죽각(竹閣)은 광화원(廣化院)에 있었으니 백낙천(白樂天)이 세운 것입니다.

백낙천의 시에, '밤에는 죽각 사이에서 졸았다’는 곳이 곧 이곳입니다.

악악왕(__岳王)의 무덤[20][21]은 서하령(棲霞嶺) 입구에 있습니다.

냉천정(冷泉亭)은 영은사(靈隱寺)[22][23][24] 앞의 비래봉(飛來峯)이 아래에 있으니, 고지(古誌)에, '허유(許由)[25]가 일찍이 영은간(靈隱澗)에서 물을 마셨다’는 곳이 이곳입니다.

표충관(表忠觀)은 용산(龍山)의 남쪽에 있는데, 소동파(蘇東坡)[26][27][28][29][30][31]가 지은 비문이 있습니다. 풍황령(風掌嶺)은 방목하는 마장(馬場) 서쪽에 있으니, 곧 소동파[32]가 변재(辨才)를 찾아보았던 곳입니다.

남병산(南屛山)은 흥교사(興敎寺)의 뒤에 있습니다.

낭떠러지가 벗겨져 떨어진 나머지에 다만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예서(隸書) 가인괘(家人卦)와 미원장(米元章)이 쓴 금대(琴臺)란 두 글자가 남았는데, 소동파의 시에, ‘내가 남병산의 금직어를 안다’는 곳이 곧 이곳입니다.

소공제(蘇公滉)는 흥교사와 서로 마주보고 있으니 소동파[33]가 항주의 지주(知州)로 있을 때 쌓은 것으로 길이가 10여 리나 되었고, 가운데에 6교(__橋)가 있습니다.

정덕관(佐德觀)은 소공제의 제일교(第一橋) 아래에 있습니다. 원소(袁韶)가 주청(奏請)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전당(錢塘)의 명인 허유(許由)로부터 장구성(張九成) 및 절부(節婦) 5인 등 39인을 취하여 전기(傳記)를 적고 사당을 세웠습니다.

풍악루(豊樂樓)는 성 서쪽의 용금문(湧金門) 밖 서호(西湖)의 언덕에 있는데, 그 북쪽에 환벽원(環碧園)이 있습니다.

옥련당(玉蓮堂)은 용금문(浦金門)에 있고, 성의 북문 안에 또 용금지(源 金池)가 있습니다.

옥호원(玉壺園)은 전당문(錢塘門) 밖에 있으니, 소동파가 남의당(南漪堂)의 두견화(杜鵑花)를 읊은 곳 이 곧 이곳입니다.

전당문 서쪽에는 선득루(先得樓)가 있습니다. 운동원(雲洞園)은 소경사(昭慶寺) 북쪽에 있는데, 꽃과 버들이 들쭉날쭉 섞여 있고, 가운데는 부인(婦人)의 무덤이 있습니다.

석함교(石函橋)는 수마두(水磨頭)에 있는데, 백낙천의 〈호석기(湖石記)〉에, 전당을 또한 상호(上湖)라 부르니 북쪽에 석함(石函)이 있다'고 한 곳이 곧 이곳입니다.

총의원(摠宜園)은 덕생당(德生堂) 서쪽에 있는데, 소동파 시의, 아담하고 짙은 분장이 모두 서로 알맞다’에서 '총의(摠宜)’ 두 글자를 따서 어필(御筆)로 당(堂)의 편액(扁額)에 썼던 것입니다.

단교(斷橋)는 총의원의 서쪽에 있으니 이른바 '단교의 지는 해에 오사모(烏紗帽)를 젖혀 쓴다고 한 곳이 곧 이곳입니다.

서석두(西石頭)는 석함교의 서쪽에 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바다에 떠서 배를 닻줄로 매었던 곳입니다.

고산(孤山)은 서호의 고산로 (孤山路) 서쪽에 있는데 고산의 동쪽에 임화정(林和靖)[34][35][36]이 숨어살던 초려(草廬)의 옛터와 무덤이 있습니다.

삼현사(三賢祠)는 소공제 제삼교아래에 있으니, 곧 백문공(白文公)·임화정(林和靖) · 소문충공(蘇文忠公) 의 사당이었습니다.

이상의 고적들은 모두 고벽이 신에게 얘기해 준 것입니다.

항주는 곧 동남방의 큰 도회(都會)로서, 가옥이 잇달아 행랑을 이루고 치맛자락이 이어져 장막을 이뤘으며, 저자에는 금은이 쌓여 있고 사람마다 비단옷을 걸쳤습니다. 그리고 만장(___), 해박(海舶)이 빗살처럼 죽 늘어서 있고, 거리에는 주렴(酒帝)과 가루(歌樓)가 가깝게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며, 사철에 시들지 않는 꽃이 있고, 팔절(八節)에 늘 봄과 같은 경치가 있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별천지였습니다

I said to Chòng Po and others, “Ku Pi has treated us sincerely. He has told us all he has heard and seen, hiding nothing, so that we have not been led into error. He has been very kind, and I want to give him a token of our esteem, but I have nothing in my baggage. All I have is this gown, which I am going to take off and give to him.” Chong Po and others said, “You took off a gown previously and gave it to Chiliarch Hsü. If you take off another today and give it to His Honor Ku Pi, you will have only one gown to wear. When that wears out on the long journey, who will replace it?” I said, “There were men in olden times who had one gown for thirty years; yet I have been traveling abroad for less than one year. The days are becoming warmer now, and one piece of clothing is enough. In any case, even snakes and fishes are grateful for kindness and want to repay it; how much more so with men?” I took off the gown to give it to Ku Pi, but he waved his hands and refused it. I said, “Between friends, no gift, not even a horse and carriage, need be refused. How much less [need one refuse] this short gown? Han T’ui-chih of old left a gown as a parting present to Ta-tien, so there is a precedent for leaving a garment with a friend at parting.”'24 Ku Pi said, “I really want to refuse, but I am afraid of offending you.” He took it and left. XXX The Chekiang Administrative Region extends to the sea in the southeast and the border of Fukien in the south. It has charge of eleven prefectures and departments and controls seventy-six counties. In it, Hang-chou is preeminent, having been the Wu-Yüeh [908-932] of the Five Dynasties period [907-960] and the Lin-an Prefecture to which Sung Kao Tsung [r. 1127-1162] moved his capital when he crossed to the South. The prefectural capital, the seats of Jen-ho and Ch'ien-t’ang counties, the Grand Defender's Headquarters, Regional Military Commission, Provincial Administration Office, Salt Distribution Commission [Yen-yün ssu], Provincial Surveillance Office, Salt Law Supervisory Commission [Yen-fa ch'a-yuan], Central Surveillance Office [Chung ch'a-yüan], Prefectural School, Jen-ho School, Ch’ien-t’ang School, and Wu-lin Station are all within its wall. Also within the wall is Mt. Wu, a most pleasing sight.25 On it are ten shrines, Wu Tzu-hsü Shrine,26 Three Maos Hermitage, 27 Four Sages Shrine, and others. There are also nine wells. Three Lakes and Mt. Wu Great Well are at the top with Kuo-p'o, Upper Eight Eyes, Lower Eight Eyes, Middle Eight Eyes, West Monastery, and other wells following. [The water of] West Lake wells is also led through small conduits into the town. The guardian mountain of the prefecture is Mt. Wu-lin.28 West Lake is two li west of the wall and is ten li north to south and east to west. The mountains and rivers [there] are very beautiful. It is a pleasure resort where singing and music are heard on every side. The Bamboo Pavilion in the Kuang-hua Monastery was built by Po Lo-t'ien [Po Chü-i]. It is the one in Po Lo-t’ien's poem, “Sleeping the Night in a Bamboo Pavilion.”29 The tomb of Yo [Fei],30 Prince of E, is at Ch’i-hsia Range Pass. Cold Spring Pavilion is in front of Ling-yin Temple and below Fei-lai Ridge. This spring is the Ling-yin Stream from which, according to ancient records, Hsü Yu used to drink.31 Piao-chung Hermitage is south of Mt. Lung and has a stone with a memorial composed by Tung-p'o [Su Shih). Feng-huang Range is west of Fang-mu-ma-ch'ang. It is the place where Tung-p'o visited Pien-ts’ai.32 Nan-p’ing Mountain is behind Hsing-chiao Temple. There remain on the crumbling cliff only the Diagram of the Family, written in square style by Ssu-ma Wen Kung [Ssu-ma Kuang], and the two words “lute terrace”, written by Mi Yüan-chang. Tung-p’o's poem, “I Remember the Nan-p'ing Goldfish” [refers to] that place.33 Su-kung Dike is across from Hsing-chiao Temple and was built by Tung-p'o when he governed Hang-chou. It is over ten li long and has six bridges on it.34 Ching-te Hermitage is below Bridge No. 1 of Su-kung Dike. When Yüan Shao asked in a memorial to build a shrine, he selected thirty-nine people – famous men of Ch’ien-t’ang from Hsü Yu to Chang Chiuch'eng and five virtuous women-, compiled their biographies, and established the shrine.35 Feng-lo Tower is on the bank of West Lake outside Yung-chin Gate, a west gate of the wall. Aquamarine [huan-pi] Garden is north of it, and Yü-lien Hall is at Yung-chin Gate. Inside the north gate of the wall there is also Yung-chin Lake. Jade Vat Garden is outside Ch’ien-t’ang Gate. Tungp'o's poem, “The Rhododendrons of Nan-i Hall” [refers to] that place. West of the gate there is Hsien-te Tower. Cloudy Gorge Garden is north of Chaoch'ing Temple; flowers and willows grow profusely, and among them are women's graves. Stone Box Bridge is at Water Mill Head. When Po Lo-t’ien, in his “Record on Stone Concerning [Ch’ien-t'ang] Lake,” says, “Another name for Ch’ien-t’ang is Upper Lake; to the north there is a stone box,” [he refers to] it. Both Fair Garden is west of Te-sheng Hall. Two words were selected from Tung-p'o's poem, “Lightly powdered or heavily painted, both are fair,” and the Emperor wrote the name-plaque for the Hall.36 Tuan Bridge is west of Both Fair Garden. “On Tuan Bridge, slanting sunlight; / On the bank, [rich men's] hats,” [refers to] it.37 West Stone Head is west of Stone Box Bridge and is a place at which Ch’in Shih Huang [r. 221-210 B.C.], sailing the sea on a tour of the east, moored his boats. Mt. Ku is on West Lake Mt. Ku Road. East of Mt. Hsi there are the old foundations of Lin Ho-ching's secluded hut and his grave.38 Three Worthies Shrine is below Bridge No. 3 of Su-kung Dike and is a shrine for Po Wen Kung [Po Chü-i), Lin Ho-ching, and Su Wen-chung Kung [Su Shih]. All the above historical sites Ku Pi told me about.

Hang-chou is a major urban center of the southeast. Houses stand in solid rows, and the gowns of the crowds seem like screens. The markets pile up gold and silver; the people amass beautiful clothes and ornaments. Foreign ships stand as thick as the teeth of a comb, and in the streets wine shops and music halls front directly each on another. There are flowers that do not fade through the four seasons and the scenery of everlasting spring all the year round. It truly seems a different world, as people say. XXX

2월13일

十三日,自杭州登程,是日陰,指揮楊旺護臣等自武林驛起程,二十餘里, 至城北門, 門有三層重城, 外門又二層, 日 ‘武林之門’. 城內所過層門十四、大橋十餘、廟三、鋪二,臣乘臟疾驅,或不記其名,所可記者,唯水

p.394 亭公館、解元門、真教寺、登瀛洲門、雲鳳門、觀光門、進士坊、貢院、亨衢門、千勝廟、晏公廟而已,重城外有吳山驛,瞬前又有吳山鋪,又三大橋、四門,皆忘其名,自門外可十餘里間,市肆相接,亦與城中一般,行至天妃宮,宮前即德勝壩河,河邊畫筋綁繩,不可勝數,楊旺與其弟楊昇及松 門衛千戶傳榮、錢塘人陳萱及從者李寬·夏斌·唐敬·杜玉等七八人同一船,臣與陪史等及北京人李節、金太同一船,臣之帶去人許尚理等同一紅.過(薄)普濟橋,橋有三虹門,橋上有華光寺、江漲橋,橋有四虹門,橋 上有江漲鋪,至香積寺前小留焉,寺有兵房吏、典簿吏,寺即東坡所遊之地也,自德勝壩至此,溫州、處州、台州、嚴州、紹興、寧波等浙江以南商舶俱會,橋竿如簇,夜過通示橋等三橋,橋以水廣,皆設五虹門,甚高大.

항주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지휘 양왕이 신 등을 호위하여 무림역(武林驛)에서 길을 떠나 20여 리를 가서 성의 북문에 이르니, 문은 3층 겹성이었고 외문(外門) 또한 2층이었는데, ‘무림지문(武林之門)'이라 씌어 있었습니다. 성안에서 층문(門) 14개, 대교(大橋) 10여 개, 묘(廟) 3개, 포(鋪) 2개 등을 지나왔습니다.

신은 당나귀를 타고 빨리 달려갔으므로, 더러 그 이름을 적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수정공관(水亭公館)·해원문(解元門)·진교사(眞敎寺) · 등영주문(登流洲門)·운봉문(雲鳳門)·관광문(觀光門)·진사방(進士坊)·공원(貢院). 형구문(亨衛門)·천승묘(千勝廟)·안공묘(公廟)뿐입니다.

겹 성 밖에 오산역(吳山驛)이 있고, 오산역 앞에는 오산포(吳山鋪)가 있었는데 그 밖의 세 대교(大橋)와 네 문은 모두 그 이름을 잊었습니다. 문 밖으로 10여 리 가는 동안 상점이 서로 잇따라 있어 또한 성 안과 같았습니다.

가다가 천비궁(天妃宮)에 이르니, 천비궁 앞이 곧 덕승파하(德勝鬪河)였습니다.

강가에 화방(畵__)이 연달아 있어 이루 셀 수가 없었습니다. 양왕은 그 아우 양승(楊昇)과 송문위천호(松門衛千戶) 부영(傅榮), 전당 사람 진훤(陳萱)과 종자 이관(李寬)·하빈(夏__)·당경(唐敬)·두옥(杜玉) 등 7-8인과 한 배를 같이 타고, 신은 배리(陪吏) 등과 북경 사람 이절 · 김태와 한 배를 타고, 신이 데리고 간 허상리 등이 한 배에 탔습니다.

보제교(普濟橋)를 지나니 다리에는 홍문(虹門) 세 개가 있었고 다리 위쪽으로 화광사(華光寺)와 강창교(江張橋)가 있었습니다. 강창교 다리에는 네 개의 홍문이 있고, 강창교 위에는 강창포(江웠鋪)가 있었습니다.

향적사(香積寺)앞에 이르러 조금 머물렀는데, 절에는 병방리(兵房吏)와 전부리(典簿吏)가 있었으며, 이 절은 곧 소동파가 노닐던 곳이었습니다.

덕승파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온주(溫州)·처주(處州)·태주(台州)·엄주(嚴州)·소흥(紹興)·영파(寧波) 등 절강 이남의 상선이 모두 모였는데, 돛대가 총총 잇닿아 있었습니다.

밤에 통시교(通示橋) 등 세 다리를 지났는데, 강이 넓은 까닭으로 다리에는 모두 다섯 개의 홍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매우 높고 컸습니다. 13th Day. Setting out from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Commander Yang Wang escorting us, we set out from Wu-lin Station. When we had gone more than twenty li, we came to the north gate of the wall.39 It had three stories and multiple walls, and even the outer gate had two stories. Its name-plate said, “Gate of Wu-lin.” Within the wall we passed fourteen gates of more than one story, more than ten big bridges, three shrines, and two stops. Riding a donkey and going fast, I did not record the names of some of the places; I was able to record only those of Shui-ting-kung-kuan, Chiehyüan Gate, Chen-chiao Temple, Teng-ying-chou, Yün-feng Gate, Kuan-kuang Gate, Chin-shih-fang, Kung-yüan, Heng-ch'ü Gate, Ch’ien-sheng Shrine, and Yen-kung Shrine. Outside the multiple wall was Mt. Wu Station, in front of which was also Mt. Wu Stop. There were also three big bridges and four gates, the names of all of which I have forgotten. From outside the gates for more than ten li, markets stretched continuously, just as they did inside the wall. We went on and came to T’ien-fei-kung. In front of the shrine was the Tesheng-pa River. Pleasure boats, tied together in uncountable numbers, were along the banks of the river. Yang Wang, his younger brother Yang Sheng, Chiliarch of Sung-men Garrison Fu Jung, Ch’en Hsüan of Ch’ien-t'ang, and seven or eight of their staff, including Li K’uan, Hsia Pin, T’ang Ching, and Tu Yü, shared one boat. I, my secondary officials, and Li Chieh and Chin T'ai of Peking, shared another boat; and my company, Hð Sang-ni and the others, shared a third boat. We passed P’u-chi Bridge, a bridge of three arches. Above it was Hua-kuang Temple and Chiang-chang Bridge, which had four arches, and above that was Chiang-chang Stop. We arrived in front of Hsiangchi Temple and stayed there a little while. At the temple were a quartermaster and an accountant, and it was a place that Tung-p'o used to visit. In the interval between it and Te-sheng Embankment, merchant boats from Chekiang and places south – Wen-chou, Ch'u-chou, T'ai-chou, Yen-chou, Shao-hsing, Ning-po, and other places - gather, their masts crowded thickly as in a forest. At night we passed T’ung-shih Bridge and two other bridges. Because the river was wide, all the bridges had five arches and were extremely big.

2월14일

十四日,過崇德縣,是日陰,謝村河而東,則其南岸石築新堤,長三十餘里,問之則都·布·按三司所新築也,過十二里洋、堅濟橋、普安橋、大尹廟,水即鴻麗河,河上官解,乃塘(西)(樓】鎮也,有官人韓軸謂臣曰:“你母奶奶知你到此否?”臣曰:“海天茫茫,偶查魚沈,母必以我為已葬魚腹中,傷母心,不孝于親,莫我若也,今蒙大國厚恩,生還故鄉,則母子相見,有勝隆下之融融矣.”因過夸塘橋、萬壽橋、福祿壽橋、福德橋、普濟橋、彭和橋,問其水名,則丞沈河也,又過恩榮門、大德新橋、三里橋、山川壇、(语)(語】溪橋,到崇德縣,知縣趙希賢,字堯卿,以糧釀甚優.水夫謂臣曰:“所過有長安驛,大人知否?”臣曰:“我不知也.”水夫曰:“此則楊指揮從者陳萱私討支供粮釀,不使大人知也.”又自崇德河播舟而上,過終橋稅課局、永安橋、養濟院、朔義門,所過大虹橋有六七,夜三更,過皂林驛,徹夜而行,

숭덕현(崇德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사촌하(謝村河)를 거슬러 동쪽으로 가니, 그 남쪽은 돌로 쌓은 새 제방으로서 길이가 30여 리나 되었습니다.

물어 보니 도지휘사, 포정사, 안찰사 등 삼사(三司)에서 새로 쌓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십이리양(十二里洋)·견제교(堅濟橋)·보안교(普安橋)· 대윤묘(大尹廟)를 지나니 강은 곧 홍려하(鴻麗河)이고, 홍려하 위의 관해(官海)는 당서진(棲鎭)이었습니다.

관인(官人) 한신(韓神)이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 어머님께서 당신이 이곳에 도착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바다 위의 하늘이 망망한데 기러기는 아득하고 물고기는 가라앉았으니, 어머니께서는 필시 내가 이미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으리라 여기실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으니, 나처럼 어버이에게 불효한 자는 없습니다. 지금 대국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게 된다면 모자가 서로 보게 됨이 수도(遂道) 밑에서 서로 만나는 기쁨보다 더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과당교(塘橋)·만수교(萬壽橋)·복록수교(福祿壽橋) ·복덕교(福德橋)·보제교(普濟橋)·팽화교(彭和橋)를 지나서, 그 물 이름을 물으니 승침하(丞沈河)였습니다.

또 은영문(恩榮門)·대덕신교(大德新橋) 삼리교(三里橋) · 산천단(山川壇)·어계교(語溪橋)를 지나서 숭덕현(崇德縣)에 도착하니, 자(字)가 요경(堯卿)인 지현 조희현(趙希賢)이 양식과 반찬을 매우 넉넉하게 보내왔습니다.

수부(水夫)가 신에게 말하기를, “지나온 곳에 장안역(長安驛)이 있었는데 대인께서는 알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몰랐소.”

“이는 양(楊) 지휘의 종자 진훤이 지급하는 양식과 반찬을 착복하고는, 대인이 알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또 숭덕하(崇德河)에서 배를 끌고 올라가 종교(終橋), 세과국(稅課局), 영안교(永安橋), 양제원(濟院), 삭의문(湖義門)을 지났는데, 지나온 곳에는 큰 홍교(虹橋) 예닐곱 개가 있었습니다. 밤 3경에 조림역(自林驛)을 지나 밤새도록 갔습니다. 14th Day. Passing Ch’ung-te County. This day was cloudy.

[We went up the Hsieh-ts’un River to the Hung-li River.] At T'ang-hsi Market, a public office above the river, an official, Han Shen, said to me, “Does your mother know that you have reached here?” I said, “The sea and sky are boundless; the wild geese are high, the fish are deep.40 My mother must think that I am buried in a fish's belly. No one has been as unfilial as I, no one has so broken his mother's heart. Now, if, through great kindness from your country, I return alive to my native place, then the joy of reunion between mother and son will be greater than that of Duke Chuang of Cheng and his mother when they emerged from the tunnel.”?41 [Then we passed from K’ua-t’ang Bridge to Tsao-lin Station and beyond.] We travelled through the night.

2월15일

十五日,過嘉興府,是日晴,三塔灣,過三塔鋪,至龍淵勝境之前,有三大塔臨河岸,地之得名以此.又過龍王廟、嘉禾遞運所、趙氏貞節門、社稷壇、香珠橋,至西水睾,睾前建石柱,作屋廊於河中百餘步,纜舟於廊下,驛丞何榮以詩三絕見遺,臣亦和之,榮另將荣碟、乾雞、八帶魚等物以贈,日:“我朝郎中祁順、行人張謹,會使朝鮮,著《皇華集》,國人實和,徐居正居首列也,其詩有曰:“明皇若問三韓事,文物衣冠上國同,今見足下,誠千載一遇,蒙不棄復承和詩,謹奉薄禮,少助舟中一膳,希目入,幸甚.”臣 曰:“郎中文章清德,人所欽慕,今為甚麼官職?張行人亦任甚麼職事?”榮曰:“郎中見貶,為貴州石阡府知府,今已卒矣,張行人被罪,今充錦衣衛之軍,”因問曰:“徐居正今為寧馨官職?”臣曰:“為議政府左贊成,”榮曰:“居正文章,亦海東人物也.”自西水驛過一大橋,至嘉興府,即古攜李城,越敗吳之地,城中有府治及秀水、嘉興兩縣之治,河抱城,自東南而南而西而北,其屋宇宏壯,景物繁華,亦與寧波府同,臣自城南過杉青間,至唐丞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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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費故里,里在城西,有族門在河之畔,又經安洋門、雲程門、丹兵橋、永福橋、松青巡檢司,夜又冒雨順風,達曙至平望驛而泊.

가흥부(嘉興府)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삼탑만(三塔灣)을 거슬러 올라가 삼탑포(三塔鋪)를 지나 경치 좋은 용연(龍淵) 앞에 이르니, 큰 탑 셋이 강가에 있었습니다. '삼탑'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또 용왕묘(龍王廟), 가화체운소(嘉禾遞運所), 조씨정절문(趙氏貞節門), 사직단(社稷壇), 향주교(香珠橋)를 지나 서수역(西水驛)에 이르렀습니다.

서수역 앞에 돌기둥을 세워 강 가운데에다 100여 보쯤에 행랑집을 지었는데, 배를 행랑 아래에 닻줄로 매어 두었습니다. 역승 하영(何榮)이 시 세 절구를 지어 주므로 신도 화답하였습니다.

하영은 채찬(菜饌), 건계(乾雞), 팔대어(八帶魚) 등 물품을 특별히 가져다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정의 낭중(郞中) 기순(部順)과 행인(行人) 장근(張__)이 일찍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황화집(皇華集)》을 지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시를 지어 화답했는데 서거정(徐居正)[1]166이 맨 첫줄에 있었습니다.[2] 그의 시에, 영명한 황제께서 삼한(三韓)의 일을 묻는다면, 문물과 의관은 상국(上國)과 같다고 하오'라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족하를 뵈니, 진실로 천년 동안에 한 번 만나게 되는 좋은 기회인데, 저를 내치지 않으시고 다시 화답하는 시를 얻는 은혜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삼가 변변치 못한 예물을 드리오니 배 안에서 드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눈에 찬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기(郁) 낭중의 문장과 고매한 덕은 사람들이 흠모하는 바인데, 지금은 무슨 관직이며, 장(張) 행인은 어떤 일을 맡고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기 낭중은 귀주(貴州) 석천부(石F府)의 지부(知府)로 폄직(反職)을 당하였는데, 지금은 벌써 돌아가셨습니다. 장 행인은 죄를 받아 지금은 금의위(錦衣衛)의 군인으로 충당되었습니다.”

이어서 묻기를, “서거정[3]은 지금 무슨 벼슬을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168입니다.”

하영이 말하기를, “서거정[4][5]은 문장가로서 해동의 인물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서수역에서 큰 다리 하나를 지나 가흥부[6]에 이르니, 곧 옛날의 휴리성(携李城)으로서 월(越) 나라가 오(吳) 나라를 격퇴시켰던 땅이었습니다.

성 안에 부치와 수수현(秀水縣), 가흥현(嘉興縣) 두 현의 치소가 있었습니다.

강은 성을 둘러싸, 동남쪽에서 남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갔습니다.

그 가옥의 크고 웅장함과 문물의 번화함은 또한 영파부와 같았습니다. 신은 성 남쪽에서 삼청갑(杉靑)을 지나 당 나라 승상 육지(陸)169가 옛날에 살던 마을에 이르니, 마을은 성의 서쪽에 있었으며, 정문(産門)은 강가에 있었습니다.

또 안양문(安洋門)· 운정문(雲程門)·단병교(丹兵橋)·영복교(永福橋)·송청순검사(松靑巡檢司)를 지났습니다.

밤에 또 비를 무릅쓰고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가서 새벽에 평망역(平望驛)에 도착하여 정박하였습니다. 15th Day. Passing Chia-hsing Prefecture.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Three Pagodas Bay to Hsi-shui Station.] Stone pillars had been erected in front of the station, making an arcade into the river over five hundred feet long. We tied the boats to the foot of the arcade. Ho Jung, the Station Master, addressed three quatrains of a poem to us, and I, in turn, answered them. Ho Jung also presented to us fish and meat delicacies, dried chicken, eight-band fish, and other things. He said, “Senior Secretary [Langchung] Ch’i Shun42 and Messenger [Hsing-jen] Chang Chin of our Court went on an embassy to Korea and wrote Huang hua chi. The people of the country wrote verses in response to it, So Ko-jong43 being foremost among them. His poem had the lines, 'If the glorious Emperor asks about the Three Han,/Their rites, music, and clothes are the same as those of China.' My meeting you now is truly a rare occasion, and you have even condescended to give me a poem in response. Respectfully I offer you some poor gifts to eke out your provisions in the boat. If you will receive them, I shall be extremely fortunate.” I said, “Senior Secretary Ch'i's literary accomplishments and virtue are much admired. What is his position now? And what post is Messenger Chang filling?" Jung said, “Senior Secretary Ch’i was demoted to Prefect of Shih-ch’ien Prefecture, Kuei-chou. He is dead now. Messenger Chang was charged with wrongdoing and is now banished to the Imperial Bodyguard.” Then he asked me, “What position does So Kō-jong now hold?” I said, “He is Fourth State Councillor.” Ho Jung said, “So Ko-jong, by virtue of his writing, is one of Korea's distinguished men.” From Hsi-shui Station we passed one big bridge and came to Chia-hsing Prefecture, which was the old Hsi-li-ch'eng, the place where Yüeh defeated Wu.44 Inside the wall were the prefectural capital and the seats of Hsiu-shui and Chia-hsing counties. The river cradled the wall, going from southeast south, west, and then north. The houses were handsome and the scenery splendid, the equals of Ning-po Prefecture. From south of the wall, I passed Shan-ch’ing Lock and came to the native village of Lu Chih, a Minister of T’ang. The village was west of the wall, and there was a banner gate on the bank of the river. We passed [five places]. At night we braved the rain and went with the wind till dawn, coming to P’ing-wang Station, where we stopped.

2월16일

十六日,過吳江縣,至蘇州府,是日陰,手牽舟平望河,過迎恩門、安德橋、大石橋、長老鋪、野湖、(鴛鴦)【驚阳湖,湖岸石築堰,可十餘里.又過吳江湖石塘、大浦橋、徹浦橋,至九里石塘,塘限太湖,太湖即《禹貢》震澤底定,周職方楊州戴日具區是也,或謂之“五湖,以其長五百餘里故名,范蠡所遊處也,湖中有洞庭東·西兩山,一名营山,一日千里,崇嚴疊陽,點綴於浩渺間,湖之東北有靈岩山下瞰焉,一名硯石山,即吳築館娃於石者此也,山去姑蘇山十里,山勢連續,抱太湖,湖北又有一山,望之渺茫,乃橫山也,至太湖壩,壩石築跨湖之南北,可五十餘里,即垂虹橋,虹門無慮四百餘穴,窄窄相續,其大者,若木莊、萬頃等橋也,循太湖壩而北,過龍王廟、太湖廟、視門,門前有大塔,塔十四層,層皆架屋,望之若登天梯,又過駐節門,至松陵驛,小停舟而過,過恩榮門、會元門、都室造士門、進士門、譽髦門、儒學、大明橋、登科門,所謂大湖壩,又通跨驛前里開中,直抵吳江縣,其間又有石大橋,虹門凡七十餘穴,驛與縣皆在大湖之中,屋舍壯麗,下鋪礎砌,上建石柱,以營湖水紫迴,橋帆束立於闇闇之中,所謂四面漁家繞縣城者此也,掉過三里橋、迎恩蓋,尹山湖而上,問西望一山,則乃絲子山,其北有山,即姑蘇山也,松江在尹山湖之東,又掉過尹山鋪、尹山橋,左有造舟作浮橋,可三里許,至寶帶橋,橋又有虹門五十五穴,正舟車往來之衝,跨(詹)【灣】臺湖,湖山饒景,望若橫帶,即應博所重建也,夜三更,傍蘇州城東南而西,至姑蘇驛前,自寶帶橋至此驛,兩岸市店相接,商舶禁集,真所謂東南南一都會也,

오강현(吳江縣)을 지나 소주부(蘇州府)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배를 당겨 평망하(平望河)를 거슬러 올라가서 영은문(迎恩門)·안덕교(安德橋) · 대석교(大石橋)·장로포(長老鋪) - 야호(野湖)·앵두호(陰虛湖)를 지났습니다.

호수가 언덕에 제방을 돌로 쌓았는데 10여 리 정도 되었습니다.

또 오강호(吳江湖)의 석당(石塘)·대포교(大浦橋)·철포교(徹浦橋)를 지나서 구리석당(九里石塘)174에 이르니, 석당(石塘)은 태호(太湖)를 가두고 있었습니다.

태호는 곧 <우공(禹貢)>의 '진택(震澤)이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곳과 《주례(周禮)》의 〈직방(職方)〉에 '양주(楊州)의 호수를 구구(具區)'라 한다'는 곳이 이곳입니다.

어떤 이는 '오호(五湖)'라고도 부르는데 그 길이가 500여 리가 되는 까닭에 이름 지어진 것으로 범려(范義)가 노닐던 곳입니다. 179

호수 안에 동정동산(洞庭東山)과 동정서산(洞庭西山) 두 산이 있는데 '포산(__山)'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눈앞이 천리나 되었고, 높은 바위와 첩첩한 계곡이 광활한 물 사이에 점을 찍은 것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호수의 동북방에 영암산(靈岩山)이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연석산(視石山)'이라고도 불렀으니, 곧 오나라에서 관와궁(館娃宮)을 연석산에 건축한 곳이 이곳입니다.

연석산은 고소산(姑蘇山)과의 거리가 10리인데, 산세가 서로 이어져 태호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태호의 북쪽에는 또 산 하나가 있었는데, 이를 바라보면 한없이 넓어 아득했으니 바로 횡산(橫山)이었습니다.

태호 방죽에 이르니 방죽은 돌로 쌓은 것으로서 호수의 남북으로 가로질러 있었습니다.

50여 리쯤 가니 곧 수홍교(垂虹橋)였는데 홍문은 400여 개의 구멍이 촘촘히 서로 잇따라 있었습니다. 그 큰 것으로는 목장교(木莊橋)·만경교(萬頌橋)84 등과 같은 다리가 있었습니다.

태호방죽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용왕묘(龍王廟)·태호묘(太湖廟)185 · 축성문(祝聖門)을 지났습니다.

축성문(祝聖門) 앞에 큰 탑이 있었는데, 탑은 14층으로서 층마다 모두 지붕을 얽었으므로, 이를 바라다보니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 같았습니다.

또 주절문(駐節門)을 지나서 송릉역(松陵驛)에 이르러 배를 잠시 멈추었다가 지나갔습니다.

은영문(恩榮門)·회원문(會元門)·도실조사문(都室造士門)·진사문(進士)·예모문(譽聖門)·유학(儒學)·대명교(大明橋) · 등과문(登科門)을 거쳤습니다.

이른바 태호방죽은 또 역 앞의 마을 가운데를 통해서 바로 오강현(吳江縣)에 이어졌는데, 그 사이에 또 돌로 만든 큰 다리가 있어 홍문이 모두 70여 구멍이나 되었습니다.

역과 현이 모두 태호의 섬 안에 있었으며, 옥사(屋舍)가 웅장하고 화려했는데, 아래에 주춧돌을 놓고 위에 돌기둥을 세워 호수를 둘러싸 돛대가 여염(__) 속에 나뭇단처럼 서 있었으니, 이른바 "사면으로 어가(漁家)가 현성을 둘렀다"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노를 저어 삼리교(三里橋), 영은암(迎恩養)을 지나 윤산호(尹山湖)를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서쪽에 바라다 보이는 한 산을 물으니 사자산(絲子山)이었습니다.

그 북쪽에 산이 있었으니 고소산(姑蘇山)189 이었습니다.

송강(松江)은 윤산호(尹山湖)의 동쪽에 있었습니다.

또 노를 저어 윤산포(尹山鋪), 윤산교(尹山橋)를 지나가니, 왼쪽에 배로 만든 부교(浮橋)가 있었는데 3리 정도 되었습니다.

보대교(寶帶橋)에 이르니 다리에는 또 홍문 55개192가 있어 배와 수레가 왕래하는 요충이었으며, 담대호(濬臺湖)193 건너 아름다운 호수와 산의 경치는 바라보면 허리띠를 두른 것과 같았으니 바로 추응박(鄒應博)이 다시 세운 것이었습니다.194

밤 3경에 소주성 동쪽에 가까이 가서 남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돌아 고소역(姑蘇驛)195 앞에 이르렀습니다.

보대교에서 이 역에 이르기까지의 양쪽 언덕에 시점(市店)이 서로 잇닿아 있고 상선(商船)이 한 곳으로 몰려드니 참으로 이른바 동남방의 큰 도시였습니다. 16th Day. Passing Wu-chiang County and arriving at Su-chou Prefecture. This day was cloudy.

The boats were towed up the P'ing-wang River, past [bridges, lakes, and other landmarks), and came to Chiu-li Stone Dike. The embankment bounded Lake T'ai. Lake T'ai is the lake of which it is said in Yü kung, “And it became possible to still the marsh of Chen” [Legge, III:110], and is called in the Chou (Chih-fang, Yang-chou-sou), “Chü-ch’ü.” Some call it Five Lakes; it is so named because it is over five hundred li long. 46 It is a place that Fan Li47 used to visit. In the lake are two mountains, Tung-t’ing East Mountain and Tung-t'ing West Mountain. They are also called Pao Mountain. From them, one can see for a thousand li. Their lofty cliffs rise up in ranges, ornaments on the vast expanse of water. Northeast of the lake, Ling-yen Mountain looks down on it. Another name for it is Yen-shih Mountain. It is the Yen-shih on which Wu built Kuan-wa.48 The mountain is ten li from Ku-su Mountain. Mountains lie in ranges, cradling Lake T'ai. In the north there is also a single mountain vaguely visible in the distance. It is Mt. Heng. We came to Lake T'ai Embankment, which was built of stone and straddled the lake north to south for over fifty li. It was Ch’ui-hung Bridge, 49 with at least four hundred arches, one slender one after another. In size it was like such bridges as Mu-chuang and Wan-ch’ing. Going north along Lake T'ai Embankment, we passed Lung-wang Shrine, Lake T'ai Shrine, and Chusheng Gate, in front of which was a great pagoda of fourteen stories. All the stories had rooms, and it looked like a ladder rising into the sky. We passed Chu-chieh Gate and came to Sung-ling Station. We stopped the boats a little while and then went on, past [six gates, a school and a bridge). Lake T'ai Embankment passed along village gates in front of the station and extended to Wu-chiang County. Along that part, too, was a large stone bridge, with more than seventy arches altogether. Both the station and the county were in Lake T'ai. The houses were beautiful, with stone plinths and well walls laid below and stone columns erected above. The lake water wound in and about them, and masts and sails stood grouped in the villages. It is there of which it has been said, “On all sides fishermen's houses wind round the county wall.” We went from San-li Bridge to Pao-tai Bridge, another great bridge] of fifty-five arches, a crossroads of boat and wheel traffic spanning Lake Tant'ai like a sash spread across the rich scenery of the lake and mountains. It had been rebuilt by Tsou Ying-po.50 In the third watch of the night, we followed alongside the Su-chou Wall, east, south, and then west, and arrived in front of Ku-su Station. From Pao tai Bridge to that station, shops and markets one after another lined both river banks, and merchant junks were crowded together. It was well called an urban center of the southeast.

2월17일

十七日,留泊姑蘇驛前,是日晴,蘇州即古吳王闔閭使伍子胥城而都之,城周又與杭州同,府治及吳縣、長洲縣之治,皆在城中,城之門,舊有姑蘇臺,今廢為驛,植木水中為混柱,作石堤三面,皇華樓據其前,昭陽樓建于後,臣問諸傅榮曰:“此驛若是姑蘇臺之址,則即古吳王所築臺之處乎?”榮曰:“非也,古所謂姑蘇臺在姑蘇山,吳王闔閭因山起臺,夫差侈大之,遺址猶存,紹興間又築臺於此,名姑蘇以存故事,今又廢而為驛,又於城中築臺,扁以姑蘇之名”云云,東有遞運所,又有山海鎮,而太湖之水,由石塘注運 河,由城東而西,以達于驛,因伍子胥所居,又名胥湖,湖廣可百餘步,北抱市衢,榮映射蘭櫃之間,光景浮動,而城西諸山,天平一室,號為郡鎮,其郡山之勝,日靈岩、五、仰天、秦臺,秩秩有序,而驛適臨之,真景致也,當午有按察御史二大人姓王若宋者來疇中,待我禮賓館,問:“你官何品?”臣對曰:“五品官,”又曰:“你能詩否?”臣曰:“我國士子皆以經學窮理.

p.398 為業,嘲弄風月為賤,故我亦不學詩詞,”又問曰:“算子封朝鮮,今有後否?且有廟墓祀事不廢否?”臣對曰:“算子之後算準為滿所逐,奔馬韓以立都,後為百濟所滅,今無嗣,算子廟在平壤,國家每歲春秋,降香祝牲幣以致祭”又問曰:“你國有何長技,能却隋唐之兵乎?”臣曰:“謀臣猛將,用兵有道,為兵卒者,率皆親上死長,故以高勾麗一偏小之國,猶以再却天下百萬之兵,今則合新羅、百濟、高句麗為一國,物聚地大,財富兵强,忠智之士,車載斗量,不可勝數,”二大人問罪,命外郎奉米一盤、黄腐一盤、麵節一盤以魄,臣作詩以謝,又有官人姓鄭者和約軒詩韻,臣即次之,其官人又以米六、鵝一集、菜一盤、胡桃一盤來贈,又有羅太監家偉姓柳者,年繼十五六,言詞清雅,自城中來饋,以及從者,李節、金大,亦買釀來饋,夜三更,又乘月掉舟而北,過間門,間門之外有通波亭臨湖,舊名高麗亭,宋元豐間所築,以待高麗朝貢之使,亭前接屋連槽,軸鱸如柳,(掉)[韓]至接官亭以泊,亭之西望有大塔,即寒山禪寺,所謂「姑蘇城外寒山寺者也.問其地名,則曰楓橋,問其水名,則日射潭河也.蘇州古稱吳會,東瀕于海,控三江帶五湖,沃野千里,士夫淵藪,海陸珍寶,若紗羅綫段,金銀珠玉,百工技藝,富商大賈,皆萃于此,自古天下以江南為佳麗地,而江南之中以蘇杭為第一州,此城尤最,樂橋在城中,界吳、長洲兩縣治間,市坊星布,江湖眾流,通貫吐納乎其中,人物奢侈,樓臺聯絡,又如間門、馬頭之間,楚商圈舶,輻禁雲集,又湖山明媚,景致萬狀,但臣等乘夜到姑蘇譯,翌日又不喜觀望,又乘夜傍城而過,故白樂天所謂“七堰八門六十坊、三百九十橋及今廢舊添新,勝景奇迹,俱不得記之詳也,

고소역 앞에서 유숙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소주[1]는 곧 옛날 오왕(吳王) 합려(固__)[2]196가 오자서(伍子昏)에게 성을 쌓게 하여 도읍으로 정했던 곳입니다.

성 둘레는 항주와 같았으며, 부치와 오현(吳縣), 장주현(長洲縣)의 치소도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성의 서문(胥門)197에 옛날에는 고소대(姑蘇臺)198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역이 되었습니다.

물속에 나무를 세워 황주(滉柱)를 만들고 돌 제방을 3면으로 만들었는데, 황화루(皇華樓)는 그 앞에 기대 있고, 소양루(昭陽樓)는 뒤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이 부영(薄榮)에게 묻기를, "이 역이 고소대의 터라면 바로 옛날 오왕이 대(臺)를 축조했던 곳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은, “아닙니다. 옛날의 이른바 고소대는 고소산(姑蘇山)(소주의 소=蘇)에 있었으니, 오왕 합려가 산에 의거하여 대를 만든 것을 부차(夫差)가 다시 넓힌 것인데 허물어진 집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소흥(紹興) 연간에 또 대를 이곳에 축조하고는 고소대라 명칭하여 고사(故事)를 보존했는데, 지금 또 없어지고 역이 되었던 것을 다시 성안에 대를 축조하고는 '고소'란 명칭으로 액자를 붙였던 것입니다" 운운하였습니다.

동쪽에는 체운소(遞運所)가 있고, 또 산해진(山海鎭)이 있었는데, 태호의 물은 석당(石塘)을 거쳐 운하로 흘러 들어가고, 성 동쪽을 거쳐 서쪽으로 가서 역에 이르게 됩니다.

오자서가 살았기 때문에 또 '서호(胥湖)'(오자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호수의 너비는 100여 보나 되는데, 북쪽으로는 시가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난간 사이로 광선이 반사하니, 빛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듯하였습니다.

성서쪽의 여러 산 가운데 천평산(天平山)이 한 봉우리를 군(郡)의 진산(鎭山)이라 하였습니다.

그 군에서 경치 좋은 산은 영암산(靈巖山)202, 오오산(五鳥山), 앙천산(仰天山)203, 진대산(秦臺山)204 으로서 질서 정연하게 벌여 있었는데, 역이 적당히 위치하고 있어 참으로 경치가 좋았습니다.

정오에 성이 왕(王)과 송(宋)인 안찰어사(按察御史) 두 대인이, 역 안에 와서 저를 예빈관(禮賓館)에서 대접하고는,

“당신 벼슬은 무슨 품계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5품 벼슬입니다."

“당신은 시를 잘 짓습니까?”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모두 경학의 궁리(窮理)로 업을 삼고 풍월을 농(弄)하는 것은 천하게 여기기 때문에 저도 시와 사(詞)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는데 지금도 후손이 있습니까? 또한 사당과 무덤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까?”

“기자의 후손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겨서 마한(馬韓)으로 달아나 도읍을 정했는데, 후에는 백제에게 멸망을 당하고 지금은 후사가 없습니다.

기자의 사당은 평양에 있는데, 국가에서 해마다 봄과 가을에 분향을 하고 생폐(性幣)205를 올리며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귀국은 무슨 장기가 있어서 수나라와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지모 있는 신하(=謀臣)와 용맹스런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데 적절하였고, 병졸은 모두 윗사람을 어버이처럼 따르고 그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도 오히려 천하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쳤던 것입니다.[3][4][5][6][7][8][9]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서 한 나라가 되었으니 물산(物産)은 많고 땅은 크며, 재물은 넉넉하고 군사는 강성하며, 충성스럽고 지모 있는 선비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두 대인은 다 묻고 나서 외랑(外郞)을 시켜서 쌀 1쟁반, 두부 1쟁반, 국수사리 1쟁반을 받들고 와서 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시를 지어 사례하였습니다.

또 정(鄭)씨 성을 가진 관원이 약헌(約軒)의 시(詩)에 화운(和__)해 주기를 청하기에 바로 차운(次韻)해 주었더니, 그 관인이 또 쌀 6되, 거위 1마리, 채소 1쟁반, 호두 1쟁반을 보내왔습니다.

또 나(羅) 태감의 가동(家__)으로 유(柳)씨 성을 가진 자는 나이 겨우 15-16세인데도 말씨가 맑고 단아하였습니다.

그는 성 안에서 와서 음식을 접대하였는데 종자들에게도 두루 미쳤습니다.

이절과 김태도 반찬을 사 가지고 와서 대접하였습니다.

밤 3경에 또 달빛을 이용하여 노를 저어 북쪽으로 가서 창문(門)을 지나니, 창문 밖에는 통파정(通波亭)08이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예전 이름은 '고려정(高麗亭)'[10]이라 합니다.

송나라 원풍(元豊) 연간209에 건축하여 고려에서 조공하던 사신을 대접했던 곳이었습니다. 고려정 앞에는 집과 담이 잇닿아 있으며, 배들이 빗살처럼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노를 저어 접관정(接官亭)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접관정의 서쪽에 큰 탑이 보였는데 이곳이 곧 한산선사(寒山禪寺)로서 이른바 고소성 밖의 한산사라는 곳입니다. 그 땅 이름을 물으니 풍교(楓橋)[11]라 하고, 그 물 이름을 물으니 사독하(射흰河)라 하였습니다.

소주는 옛날에 오회(吳會)라 불렸던 곳으로 동쪽으로는 바다에 연하고, 삼강(三江)을 끼고 오호(五湖)를 둘렀으며 비옥한 들판이 천 리나 되고, 사대부들이 많이 모인 곳입니다. 사라능단(紗羅綾殺), 금은주옥과 같은 바다와 육지의 진귀한 보물과 온갖 기술을 가진 장인(匠人)들과 부상

호구사, 호구탑 합려 무덤, 검 3,000개.

178-179

백낙천의 이른바 ‘칠언(七堰)·팔문(八門)·육십방(六十坊)·삼백구십교(三百九十橋)’

졸정원 관장하고 있었는데, 지금 또한 소주를 지나 북경을 향해 가면서 먼저 와서 이곳에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어사(御史) 세 대인이 와서 배 위에서 전송하다가 신을 맞이하여 앞에 오게 하고는 예절로 대우하고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의 좋은 사람이므로, 우리들 모두 당신을 존경합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묻기를,

“천순(天順), 성화(成化) 연간에 태감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당신 나라에 사신 갔었는데, 당신은 성명을 차례대로 댈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천순 연간에는 제가 강보 속에 쌓여(??????????????) 있었던 까닭에 나랏일을 알지 못합니다. 성화 연간에는 태감 정동(鄭同)[12]222 · 강옥(__玉)223. 김흥(金興)224 이 서로 잇달아 사신으로 왔었습니다”[13][14] 라고 하였습니다.

또 글을 써서 보이기를, “정 태감과 강 태감은 모두 이미 작고(作古)하고, 김 태감만이 북경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작고란 두 글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중국 사람은 죽은 사람을 일러 작고라 하니, 이미 고인이 되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어서, “당신나라에서는 무엇이라 이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물고(物故)라고 합니다.”

“물고는 무슨 뜻입니까?”

“물(物)은 일이고 고(故)는 없음이니, 죽은 사람은 다시 일을 할 수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나라에서는 어떤 경서를 높이고 있습니까?”

“유사(儒士)들은 모두 사서와 오경만 배워 익히고 다른 기예(技藝)는 배우지 않습니다.”

“당신 나라에도 학교가 있습니까?”

“국도(國都)에는 성균관(成均館)이 있고, 또 종학(宗學)225과 중학(中學)·동학(東學)·서학(西學)·남학(南學) 26이 있고, 주(州)·부(府)·군(郡)·현(縣)에도 모두 향교(鄕校)와 향학당(鄕學堂) 28이 있고, 또 집집마다 모두 국당(局堂)이 있습니다.”

“옛날의 어떤 성현을 숭상합니까?”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230을 숭상합니다.”

“당신 나라에서는 상례(喪禮)를 몇 해나 행합니까?”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 《가례(家禮)》를 따르고, 참최(斬衰)와 자최(齊衰)는 모두 3년을 행하며, 대공(大功)232 이하의 상복(喪服)도 모두 등급이 있습니다.”

“당신나라의 예절에는 몇 조목이 있으며, 형벌에는 어떤 조목이 있습니까?"

“예절에는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嘉禮)233가 있고, 형벌에는 참형(斬刑)·교형(敍刑)·유형(流刑)·도형(徒刑)·장형(杖刑)·태형(刑) 234 이 있어 한결같이 《대명률(大明律)》의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당신나라는 어떤 정삭(正朔) 235을 사용하며, 어떤 연호를 사용합니까?”

“한결같이 대명(大明)의 정삭과 연호를 따릅니다.”

“금년은 무슨 연호입니까?”

“홍치(弘治) 원년입니다.”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대명이 해상에 처음 돋아서 만방에 비치거늘, 하물며 우리나라는 대국과 한 집안이 되어 공물을 헌납함이 끊어지지 않는데,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당신나라의 관복(冠服)도 중국과 같습니까?”

“무릇 조복(朝服)236 · 공복(公服)237. 심의(深衣) 238 원령(圓領)239은 한결같이 중화의 복제와 같으나, 다만 철릭의 주름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이어서 신으로 하여금 배리(__吏) 이하 종자들을 불러 와서 상하의 주례(酒禮)를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정보 이하 종자들에게 명령하여 읍양(揖讓)240으로 예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태감은 세 대인과 함께 눈짓을 하며 담소하고는 이어 쌀 20되, 돼지고기 1쟁반, 채소 1쟁반, 약과(藥果) 1쟁반, 술 5동이를 주었습니다.

신 등은 사례하고 물러 나왔습니다. 드디어 배를 타고 보원교(普圓橋)·보은교(普恩橋)·호서포(清單鋪)·오가점(吳家店)·장공포(張公鋪)·불평득승교(不平得勝橋) 242. 통병교(通兵橋) 243망정순검사(望亭巡檢司)·마묘포(馬墓鋪)·순안교(純安橋)를 지나, 밤을 타서 가다가 4경에 석산역(錫山驛)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17th Day. Moored in Front of Ku-su Station. This day was fair. Su-chou is the place to which Ho-lü [r. 514-496 B.C.], King of old Wu, sent Wu Tzu-hsü to enclose it with a wall and make it the capital.51 The circumference of the wall is equal to that of Hang-chou, and the prefectural capital and the seats of Wu County and Ch’ang-chou County are within it. At Hsü Gate in the wall was formerly a Ku-su Tower, which is now done away with for a station. Trees have been planted in the water, forming great pillars, and a stone levee has been built on three sides. Huang-hua Tower stands in front, and Chao-yang Tower is built in the back. I asked Fu Jung about it: “If this station is on the ruins of Ku-su Tower, is this the place where the tower was built by the old King of Wu?” Fu Jung said, “No. What was called Ku-su Tower in olden times was on Ku-su Mountain. King Ho-lü of Wu put up the tower because of the mountain. Fu Ch'ai [r. 495-473 B.C.] enlarged it. The ruins still exist. 52 In the Shaohsing period [1131-1162], another tower was built here and named Ku-su to keep the tradition. Now it has been done away with for a station. A tower was also built inside the wall and given a signboard with the name Ku-su.” To the east was a transfer station and also Shan-hai Market. But the waters of Lake T'ai, flowing into the Grand Canal between stone levees, go east and west along the wall and come out at the station. Because Wu Tzu-hsü lived there, it is also called Hsü Lake. It is about five hundred feet wide. In the north it curves round markets and junctions, winding and sparkling among railings, light dancing from it. Of the mountains west of the wall, the peak T’ien-p'ing is called the guardian mountain of the prefecture. The outstanding mountains of the prefecture are Ling-yen, Wu-wu, Yang-t'ien, and Ch’in-t’ai, one after another. It happens that the station looks out on them, making for an extremely beautiful view. At noon, two eminent persons, Regional Inspecting Censors [An-ch'a yü-shih] named Wang and Sung, came into the Station and received me in the Li-pin-kuan. They asked, “What is your official rank?” I answered, “Fifth Rank.” They said, “Can you write poetry?” I said, “The gentlemen of my country consider studying the Classics and probing to principles to be their concern and moaning about the wind and moon to be cheap; 1, therefore, have not studied poetry.” They asked, “Chi Tzu having been enfeoffed in Korea, are there now descendants of his ? And are his shrine, grave, and rites still kept up?" I answered, “Chi Tzu's successor, Kijun, was expelled by Wei Man. He fled to Ma-han, set up a capital, and later was destroyed by Paekche. There are now no descendants. Chi Tzu's shrine is in P'yongyang, and every year in spring and fall, the state ritually burns incense and sacrifices animals and money.” They asked, “What great technique did your country have, to have been able to repel the Sui and T’ang armies?” I said, “The ministers, who planned well, and the generals, who were bold, knew the right way to wage war. All the soldiers cherished their leaders and died for them. That way, Koguryo, though a remote little country, was capable of twice repelling the armies of China. Now that Silla, Paekche, and Koguryo have been combined into one country, its resources are many, its land big, its wealth great, and its soldiers strong. Its loyal and wise gentlemen are too many to be counted.' When the two eminent persons had finished their questioning, they ordered a deputy secretary to present to us one plate of rice, one plate of bean-curd, and one plate of wheat noodles. I wrote a poem and thanked them. Then an official named Cheng wanted me to match the rhymes of “Yüeh hsüan shih," and I did so. He presented to me six bushels of rice, one duck, one plate of fish and meat delicacies, and one plate of walnuts. One Liu, a house servant of Overseer Lo, was fifteen or sixteen years old and elegant of speech. He came from inside the wall and presented food to [me] and my staff. Li Chieh and Chin T’ai also bought food and came and presented it. In the third watch of the night we rowed the boats north in the moonlight, past Ch’ang Gate. Outside Ch’ang Gate, T’ung-po Pavilion overlooked the lake. Its old name had been Koryo Pavilion, and it had been built in the Yüan-feng period of Sung (1078-1085] to receive tribute-bearers from Koryð. In front of the pavilion, adjoining roofs and rows of masts were as thick as the teeth of a comb. We rowed to Chieh-kuan Pavilion and stopped. To the west, the pavilion looked out on a great pagoda, which was Han-shan Ch’an Temple, the one commemorated in the line, “Outside the Ku-su wall is Han-shan Temple.”53 I asked the name of the place, and [someone] said, “Feng Bridge.” I asked the name of the river, and [someone] said, “She-tu River.” XXX In olden times, Su-chou was called Wu-k’uai. It borders the sea in the east, commands three large rivers and five lakes, and has a thousand li of rich fields. Learned men and gentry abound there; and all the treasures of the land and sea, such as thin silks, gauzes, gold, silver, jewels, crafts, arts, and rich and great merchants, are there. It has been accepted in China from olden times that the land south of the Yangtze River is the beautiful and good land and that within that land Su-chou and Hang-chou are the first departments, especially Su-chou. Yüeh Bridge is inside the wall and separates Wu and Chang-chou counties. Market quarters are scattered like stars. Many rivers and lakes flow through [the region], refreshing and purifying it. The people live luxuriously. There are solid rows of towers and stands, and in such places as the space between Ch’ang-men and Ma-t'ou (the wharves?], merchantmen and junks from Honan, Hopei, and Fukien gather like clouds. The lakes and mountains are fresh and stimulating, the scenic splendors innumerable. But we came to Ku-su Station at night. The following day we did not have the pleasure of looking about either, but, traveling again at night, went along and past the wall. I have not been able, therefore, to record in detail any of the seven dams, eight gates, sixty quarters, or 390 bridges spoken of by Po Lo-t'ien,54 or old things now ruined, new things now added, unusually beautiful scenery, or marvelous remains. XXX

2월18일

18th Day. Arrival at Hsi-shan Station. This day was fair.

When it was light, an official named Wu Mo, who was in the same boat as Yang Wang, sent me a letter that said, “I hear, sir, that you are a gentleman of rank and conduct and want to make your acquaintance. My colleague Yang is also in this boat, and we wish to invite you to come and see us. Do not refuse us.” I went, led by Ch’en Hsuan. When I and Chòng Po reached their boat, Wu and Yang had put their chairs round a table. They folded their hands in greeting, and we sat down together. They served us tea and things to eat and were very courteous to us. From Feng Bridge we [reached Ch’ao Barrier]. When boats passing north and south reached there, they were anchored in a cove and inspected before proceeding. An Overseer named Lo was there. Formerly he had been in charge of weaving and dyeing in Chekiang, and now he had left Su-chou and was going toward Peking. He had come there ahead of us and moored. Three censors who were there came aboard the boats to send us on our way with wine and food. They invited me before them and received me courteously, saying, “You are a good man from a country of propriety and morality. Our important people all respect you.” Then they asked, “In the T’ien-shun and Ch’eng-hua periods [1457-1487], there were overseers who received Imperial orders to go to your country. Can you give their names in order?” I answered, “In the T’ien-shun period I was not yet out of my swaddling clothes, and I knew nothing of affairs of state. In the Ch’eng-hua period, Overseer Cheng T’ung, Overseer Chiang Yü, and Overseer Chin Hsing came successively as envoys.” They wrote something and showed it to me. It said, “Overseers Cheng, Chiang, and Chin have all become ancient. Only Overseer Chin is in Peking.”'55 I said, “I do not understand the two words, become ancient.' ” They answered, “The Chinese speak of dying as becoming ancient, meaning that they have already joined the ancients.” Then they asked, “What do you say in your country?” I said, “We call them things old (wu-ku).'” They asked, “What does things old' mean?” I said, “ 'Things (wu)' means 'acts'; 'old (ku)' means ‘not to have.' The expression means not again to have power to act.”'56 They asked, “What classics does your country esteem?” I replied, “All the Confucian scholars master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They do not study other disciplines.” They said, “Does your country also have schools ?” I answered, “The national capital has the National Academy and also the Peers' School, Central College, Eastern College, Western College, and Southern College. All the departments, prefectures, counties, and districts have regional schools and local academies. All families have branch academies.”'57 They asked, “What sages of old do you revere?” I said, “We revere Confucius.” They asked, “How many years do mourning rites last in your country?” I said, “They follow entirely Chu Wen Kung's Chia li. Both the unhemmed garment and hemmed garment are for three years. The coarsely-woven garment and those below are respectively for shorter periods.58 They said, “What are the sections of the Code of Rites of your country and of the Code of Punishments?” I said, “In Rites there are Sacrifices, Laments, Military Rites, Visits, and Celebrations. In Punishments there are Beheading, Strangling, Banishment, Penal Servitude, and Flogging. They follow entirely the system of the Great Ming Code.” They said, “What calendar and reign-title does your country use?” I said, “We follow the Great Ming calendar and reign-title.” They said, “What is the reign-title this year?”? I said, “It is the first year of Hung-chih.” They said, “It has not been so long; how do you know it?” I said, “When the Great Light (Ta Ming) first came out of the sea, all nations were brightened. Especially when my country is of the same house as China and pays tribute without fail, how could I not know it?” They said, “Are the caps and gowns of your country the same as those of China?” I said, “In all court and official dress, long gowns and round collars, we follow fully Chinese dress. Only the figured linings and folds are slightly different.” They then ordered me to summon the secondary officials and those below them and have them perform the ceremony as between host and guests. The Overseer and the three eminent persons looked on, talking and laughing. Then they presented to us twenty bushels of rice, one plate of pork, one plate of fish and meat delicacies, one plate of herbs and fruits, and five containers of wine. We thanked them and left. We then got into the boats and went [from P’u-yüan Bridge to Hsi-shan Station).

3월4일

初四日,晴,至遞運所,前有起鳳門、淋浴堂,又以舟為橋截河流,號為大浮橋,橋之上下,橋竿如束,撥橋中二舟,以通往來船,船過,還以所撥之舟復為橋,臣船過是橋及搭應夫廠,至泊于蕭縣之水次倉前河畔.

맑았습니다.

배를 끌어 체운소에 이르니, 체운소 앞에 기봉문(起鳳門)과 목욕당(沐浴堂)이 있었습니다.

또 배로 다리를 만들어 강을 가로지르게 하니 이를 대부교(大浮橋)라 불렀습니다.

다리의 위아래에는 돛대가 나뭇단처럼 섰는데 다리 가운데의 두 배를 빼서 왕래하는 배를 통행시키고, 배가 지나고 나면 도로 뽑아냈던 배로 다시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신의 배는 이 다리와 탑응부창(塔應夫__)을 지나서 소현(蕭縣)의 수차창(水大倉)372 앞의 강가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4th Day. Fair.

We pulled the boats and came to a transfer station, in front of which were Ch’i-feng Gate and Mu-yü Hall. Boats had been made into a bridge that spanned the river and was named Great Floating Bridge. Above and below the bridge, masts were like thorns. Two boats were removed from the bridge to let passing boats through, and when they had passed, the removed boats were put back and the bridge made again. My boats passed that bridge and Ta-ying workers' quarters and came to the river bank in front of Shui-tz’u Granary of Hsiao County, where we stopp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