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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까는 자리는 참골, 왕골, 대, 볏짚, 갈대, 칡 따위를 재료로 하여 만드는데 그 가짓수가 아주 많다. 여러 가지 풀이나 볏짚 따위로 짜여진 자리 가운데서 가장 긴하게 쓰였고 많이 만들어진 것은 왕골로 짠 자리이며, 또 가장 귀하게 여겨졌던 것은 참골로 짠 등메이다. <ref> 예용해전집(돗자리) 대원사, 1997.06.07 https://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5018&nodeId=NODE04209758&medaId=MEDA04350392#none </ref> <br/> | 바닥에 까는 자리는 참골, 왕골, 대, 볏짚, 갈대, 칡 따위를 재료로 하여 만드는데 그 가짓수가 아주 많다. 여러 가지 풀이나 볏짚 따위로 짜여진 자리 가운데서 가장 긴하게 쓰였고 많이 만들어진 것은 왕골로 짠 자리이며, 또 가장 귀하게 여겨졌던 것은 참골로 짠 등메이다. <ref> 예용해전집(돗자리) 대원사, 1997.06.07 https://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5018&nodeId=NODE04209758&medaId=MEDA04350392#none </ref> <br/> | ||
진상석이었던 등메는 대략 일제강점기부터 쇠퇴의 길을 걷다가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명맥이 끊어지고 더 이상 찾는 사람이 없어 60년대를 끝으로 역사 속에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여진다. | 진상석이었던 등메는 대략 일제강점기부터 쇠퇴의 길을 걷다가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명맥이 끊어지고 더 이상 찾는 사람이 없어 60년대를 끝으로 역사 속에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여진다. | ||
+ | 흥미로운 점은 등메와 화문석 모두 무늬가 있는 자리인데, 기록에 의하면 화문석과 등메를 각각 따로 나란히 기술됨을 볼 수 있는데 이 둘은 현재는 혼용되어 언급되지만, 명백한 형태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한 교동도의 자리를 등메라 하였는데, 등메가 여타 지역에서 나오는 것도 등메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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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메는 참골이라는 가늘고 긴 초경식물로 한올씩 가마니를 만드는 것처럼 바디로 다져서 짜며 무늬도 물들인 골로 수놓듯 짜는 것으로 유연하면서도 부러지지않아 여름철 요나 보료 위 또는 궁중과 사대부가의 깔자리와 방석으로 쓰였다. | 등메는 참골이라는 가늘고 긴 초경식물로 한올씩 가마니를 만드는 것처럼 바디로 다져서 짜며 무늬도 물들인 골로 수놓듯 짜는 것으로 유연하면서도 부러지지않아 여름철 요나 보료 위 또는 궁중과 사대부가의 깔자리와 방석으로 쓰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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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메의 어원과 의미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순우리말로 보여지고 한자로 등매(登每, 등메자리[藤莓席)로 쓰여지는데, 오를 등, 매양 매로 한자의 의미보다는 한글을 차용한 단어로 보여진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어원과 의미는 추후에 자세히 보강되길 바란다. <br/> | + | 등메의 어원과 의미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순우리말로 보여지고 한자로 등매(登每, 등메자리[藤莓席])로 쓰여지는데, 오를 등, 매양 매로 한자의 의미보다는 한글을 차용한 단어로 보여진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어원과 의미는 추후에 자세히 보강되길 바란다. <br/> |
− | 또한 등메는 헝겊으로 가장자리 선을 두르고 뒤에 부들자리를 대서 꾸민 돗자리, 즉 수를 놓은 자리와 초석(草席)을 합쳐 만든 겹자리로 ‘등메’의 의미로 ‘등매’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등메’만 표준어로 삼고 ‘등매’는 버린다. <ref>국어사전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10952200</ref> <ref> | + | 또한 등메는 헝겊으로 가장자리 선을 두르고 뒤에 부들자리를 대서 꾸민 돗자리, 즉 수를 놓은 자리와 초석(草席)을 합쳐 만든 겹자리로 ‘등메’의 의미로 ‘등매’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등메’만 표준어로 삼고 ‘등매’는 버린다. <ref>국어사전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10952200</ref> <ref> 세종대왕기념사업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8993&cid=41826&categoryId=41826</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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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傳于尹知敬曰, 今日擧動時, 百官班列處, 各司下人, 或持方席, 或持'''登每''', 奔走往來, 所見極爲駭愕, 廢朝時, 亦不至於是, 排設各司, 不爲排設而然耶? | ||
+ | 윤지경에게 전교하기를, | ||
+ | “오늘 거둥할 때에 백관들이 반열(班列)한 곳으로 각사(各司)의 하인들이 방석(方席)이나 혹 등메〔登每〕를 가지고 분주히 왕래하여 보기에 매우 놀라웠다. 폐조(廢朝) 때에도 이 같은 일은 없었는데 배설을 담당한 각사가 배설하지 않아서 이러한 것인가? 추고해야 마땅할 듯하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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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릇 일용의 물건에는 마땅히 식은 있으되 기는 없어야 할 것이다.<하기가 없다는 말이다.>. 시험삼아 포진<골자리 등속을 포진이라 한다.> 한가지로 말해보자. 기록하기를 전 3전 <엽전 30잎이 3전이다.>은 백석 1장 값, 1전은 용수초 염색값<청•적•황•흑색을 다 물들인다.>, 1전은 기화<5색초로 수놓는 것을 기화라 한다.> 때의 공가, 2전은 겹과 초석 값<수석과 초석을 합쳐서 겹자리를 만드는데 이름하여 등매라 한다.> ; 凡日用之物宜 有式而無記<無下記> 試論舖陳一事<莞席之屬 謂之舖陳> 記之曰錢三戔<三十曰三戔> 白席一張價 錢一戔 龍鬚草染色價<靑赤黃黑皆染之> 錢一戔起花時嵀¥價<繡之以五色草曰起花> 錢二戔袷裏草席價<繡席草席合之袷席 名曰登每> <ref>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8993&cid=41826&categoryId=41826</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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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김신부부전(金申夫 婦傳)과 동상기(同廂記)'''==== | ||
+ | 정조의 명으로 가난한 양반 서손(庶孫)을 위해 서울 관아에서 치른 혼례를 기록한 글로, 정조는 특별히 혼수를 1등급으로 마련하도록 지시하여 혼례에 들어가는 온갖 물품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관에서 마련한 물품은 납폐에 쓸 비단, 관(冠)과 신발, 비녀·가락지, 치마·저고리, 이불·요, 쟁반·바리 등 그릇붙이, 소반·대야, 청주와 탁주, 떡, 장막·병풍, 화문석, 그림, 초와 향(香), 경대·연지·분 등 온갖 화장품, 안장 갖춘 말 등이며 호위할 하인도 갖추었다. 또 신방에는 병풍·화문석·등매(登每),160) 이불과 요, 남녀 베개와 요강·비누통·나무 양치통·경대·놋대야·놋반상·혼서함(婚書函)과 보자기 등을 마련하였다. 신랑·신부의 의복 또한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갖추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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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는 혼례 때 필요한 온갖 물품을 세밀하게 정리하면서 전용속례(全用俗禮), 즉 전적으로 당대(當代) 풍속을 따른다고 밝혔다.161) 여기서 당대 풍속이란 반친영례를 말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물품의 가짓수를 보면 혼례 때 이렇게 많은 물품이 쓰일까 싶을 만큼 물품의 규모가 놀랍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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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례 때는 지의(地衣),165) 등매, 꽃무늬 방석, 햇빛 가리개가 필요하였다. 동원되는 사람은 가마꾼 열 명, 등롱꾼 네 명, 안보(按步)166) 네 명, 우산 담당, 배종 하인, 폐백 들고 가는 여종 두 명, 몸종 두 명, 경대·함 들고 가는 여종 각 두 명, 아이 여종 두 명, 방지기 여종, 문안 여종, 수모(手母)와 수모 여종 두 명, 유모와 유모 여종 한 명, 수모가 탄 가마꾼 두 명, 유모 마부 등이 있어야 했다. <ref>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01_0050_0020_0020_0010&whereStr=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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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문화유산, 등메'''=== | ==='''사라진 문화유산, 등메'''=== | ||
− | + |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헌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각광 받던 명품으로 알려졌으나 조선말기 이후 그 기술이 완전히 단절되었고, 해방 전후에 이미 그 기술 전통이 끊겼었다. 무형문화재 공예기술 분야의 문화사적 가치에 주목하고 단절의 위치에 처한 전승 공예기술의 발굴과 문화사적 복원에 남다른 애정을 쏟아온 예용해(1995년 작고) 선생에 따르면, 이산용 이후에는 사실상 단절되었던 셈이다. <ref> 최공호. 2003. 등메장 지정 조사 보고서. 서울시 無形文化財 指定照査 報告書. 서울특별시. pp451-452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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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백석에 댓개비 바블로 염색한 재료로 수를 놓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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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메는 돗자리와 달라서 바늘대질을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번을 해야하고 또 중앙에서 바디를 든 채 | ||
+ | 풀을 꺽어서 안을 넣어야 하기 때문에 작업량이 이중으로 걸려 많은 시간이 걸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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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유자는 좋은 자재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재배부터 시작하여 제작까지 일관작업을 해야한다. | ||
+ | 생산방식으로 보면 중세기적이고 매우 뒤떨어진 방식이기는 하나 전통적인 방법을 그대로 계승 답습하고 있다. | ||
+ | 현재는 수요가 극히 적고 제작 시일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값이 고가여서 대중화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자리(대화석 길이 293cm, 폭 121cm)가 | ||
+ | 일본 일광의 윤왕사에 7매가 보존되어 있는데 그중 1매를 복원 제작한 것은 350년전의 한국의 화문석 공예기술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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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6일 (월) 15:22 기준 최신판
개요
바닥에 까는 자리는 참골, 왕골, 대, 볏짚, 갈대, 칡 따위를 재료로 하여 만드는데 그 가짓수가 아주 많다. 여러 가지 풀이나 볏짚 따위로 짜여진 자리 가운데서 가장 긴하게 쓰였고 많이 만들어진 것은 왕골로 짠 자리이며, 또 가장 귀하게 여겨졌던 것은 참골로 짠 등메이다. [1]
진상석이었던 등메는 대략 일제강점기부터 쇠퇴의 길을 걷다가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명맥이 끊어지고 더 이상 찾는 사람이 없어 60년대를 끝으로 역사 속에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여진다.
흥미로운 점은 등메와 화문석 모두 무늬가 있는 자리인데, 기록에 의하면 화문석과 등메를 각각 따로 나란히 기술됨을 볼 수 있는데 이 둘은 현재는 혼용되어 언급되지만, 명백한 형태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한 교동도의 자리를 등메라 하였는데, 등메가 여타 지역에서 나오는 것도 등메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해설
등메는 참골이라는 가늘고 긴 초경식물로 한올씩 가마니를 만드는 것처럼 바디로 다져서 짜며 무늬도 물들인 골로 수놓듯 짜는 것으로 유연하면서도 부러지지않아 여름철 요나 보료 위 또는 궁중과 사대부가의 깔자리와 방석으로 쓰였다.
등메의 의미
등메의 어원과 의미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순우리말로 보여지고 한자로 등매(登每, 등메자리[藤莓席])로 쓰여지는데, 오를 등, 매양 매로 한자의 의미보다는 한글을 차용한 단어로 보여진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어원과 의미는 추후에 자세히 보강되길 바란다.
또한 등메는 헝겊으로 가장자리 선을 두르고 뒤에 부들자리를 대서 꾸민 돗자리, 즉 수를 놓은 자리와 초석(草席)을 합쳐 만든 겹자리로 ‘등메’의 의미로 ‘등매’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등메’만 표준어로 삼고 ‘등매’는 버린다. [2] [3]
등메 기록
승정원 일기 . 인조 5년 정묘(1627)10월 28일(신유)
傳于尹知敬曰, 今日擧動時, 百官班列處, 各司下人, 或持方席, 或持登每, 奔走往來, 所見極爲駭愕, 廢朝時, 亦不至於是, 排設各司, 不爲排設而然耶?
윤지경에게 전교하기를,
“오늘 거둥할 때에 백관들이 반열(班列)한 곳으로 각사(各司)의 하인들이 방석(方席)이나 혹 등메〔登每〕를 가지고 분주히 왕래하여 보기에 매우 놀라웠다. 폐조(廢朝) 때에도 이 같은 일은 없었는데 배설을 담당한 각사가 배설하지 않아서 이러한 것인가? 추고해야 마땅할 듯하다.”
정약용, 목민심서 봉공육조 수법
무릇 일용의 물건에는 마땅히 식은 있으되 기는 없어야 할 것이다.<하기가 없다는 말이다.>. 시험삼아 포진<골자리 등속을 포진이라 한다.> 한가지로 말해보자. 기록하기를 전 3전 <엽전 30잎이 3전이다.>은 백석 1장 값, 1전은 용수초 염색값<청•적•황•흑색을 다 물들인다.>, 1전은 기화<5색초로 수놓는 것을 기화라 한다.> 때의 공가, 2전은 겹과 초석 값<수석과 초석을 합쳐서 겹자리를 만드는데 이름하여 등매라 한다.> ; 凡日用之物宜 有式而無記<無下記> 試論舖陳一事<莞席之屬 謂之舖陳> 記之曰錢三戔<三十曰三戔> 白席一張價 錢一戔 龍鬚草染色價<靑赤黃黑皆染之> 錢一戔起花時嵀¥價<繡之以五色草曰起花> 錢二戔袷裏草席價<繡席草席合之袷席 名曰登每> [4]
이덕무(李德懋, 1741∼1793), 김신부부전(金申夫 婦傳)과 동상기(同廂記)
정조의 명으로 가난한 양반 서손(庶孫)을 위해 서울 관아에서 치른 혼례를 기록한 글로, 정조는 특별히 혼수를 1등급으로 마련하도록 지시하여 혼례에 들어가는 온갖 물품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관에서 마련한 물품은 납폐에 쓸 비단, 관(冠)과 신발, 비녀·가락지, 치마·저고리, 이불·요, 쟁반·바리 등 그릇붙이, 소반·대야, 청주와 탁주, 떡, 장막·병풍, 화문석, 그림, 초와 향(香), 경대·연지·분 등 온갖 화장품, 안장 갖춘 말 등이며 호위할 하인도 갖추었다. 또 신방에는 병풍·화문석·등매(登每),160) 이불과 요, 남녀 베개와 요강·비누통·나무 양치통·경대·놋대야·놋반상·혼서함(婚書函)과 보자기 등을 마련하였다. 신랑·신부의 의복 또한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갖추었다.
저자 미상(호는 수산(綏山)) , 1893년의 광례람(廣禮覽)
저자는 혼례 때 필요한 온갖 물품을 세밀하게 정리하면서 전용속례(全用俗禮), 즉 전적으로 당대(當代) 풍속을 따른다고 밝혔다.161) 여기서 당대 풍속이란 반친영례를 말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물품의 가짓수를 보면 혼례 때 이렇게 많은 물품이 쓰일까 싶을 만큼 물품의 규모가 놀랍다.
신례 때는 지의(地衣),165) 등매, 꽃무늬 방석, 햇빛 가리개가 필요하였다. 동원되는 사람은 가마꾼 열 명, 등롱꾼 네 명, 안보(按步)166) 네 명, 우산 담당, 배종 하인, 폐백 들고 가는 여종 두 명, 몸종 두 명, 경대·함 들고 가는 여종 각 두 명, 아이 여종 두 명, 방지기 여종, 문안 여종, 수모(手母)와 수모 여종 두 명, 유모와 유모 여종 한 명, 수모가 탄 가마꾼 두 명, 유모 마부 등이 있어야 했다. [5]
등메와 왕골화문석의 비교
화문석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강화군 하점면(河岾面) 양오리(陽五里)에서 나는 왕골〔莞草〕을 재료로 하는 꽃돗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교동면 읍내에서 골을 재료로 하는 등메이다.
세상에서는 꽃돗자리와 등메를 혼동하고 있는데, 공정에 있어서도 꽃돗자리는 '왕골' 껍질을 손으로 엮은 것이고, 등메는 '골'을 한 올씩 가마니 치듯 돗자리틀에 바디로 다져서 짜는 것이며, 화문을 놓는 것도 전자는 물을 들인 왕골을 덧겹쳐 엮어서 무늬에 따라 잘라낸 것이고, 후자는 물을 들인 골로 수놓듯 무늬를 놓은 것이다. 꽃돗자리는 지금도 흔하게들 생산되며 시중에서도 볼 수가 있으나, 등메는 이미 없어진 지가 오랬고 강화 본바닥에서도 보기 힘들게 되었다. 옛날에는 궁에 진상했다고 하여 진상석이라고도 부른다. [6]
등메의 특징
- 등메에 사용된 재료는 교동 논두렁에는 덤풀진 자연생'골'을 물이 마르지 않는 무논에 떠다 옮겨 1년을 잘 가꾼 부들부들한 참골이다.
- 왕골은 대궁이 꼭지에 꽃이 나와서 잔 꽃이 피는 것이나, 등메의 재료인 참골은 대궁이(식물의 위 부분)가 똥글똥글하고 가늘고 살구색 꽃이 핀다. 참골은 살구꽃 봉오리가 필까말까 할 때 옮겨 심는다.
- 제직은 가마니틀과 비슷하게 생긴 돗자리틀(돗틀)로 짠다. 이 경우에는 은경밀직방법으로 짜게 되어 경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 기본 색상은 7종이고, 백석을 완성한 후 두 손에 송곳을 쥐고 깁실같이 가는 골과 골 사이를 버르집어 벌려서 채색을 한 골을 끼우고는 수놓듯이 무늬를 논다.
- 문양과 제작방법은 강화참골화문석(등메) 문양/제작방법에서 확인 가능하다.
- 기직에 부들자리를 댄 후, 남색 모단으로 선둘러 꾸민다. (주:꾸미는 의미도 있지만, 2겹을 모단으로 합폭하는 의미도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7]
사라진 문화유산, 등메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헌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각광 받던 명품으로 알려졌으나 조선말기 이후 그 기술이 완전히 단절되었고, 해방 전후에 이미 그 기술 전통이 끊겼었다. 무형문화재 공예기술 분야의 문화사적 가치에 주목하고 단절의 위치에 처한 전승 공예기술의 발굴과 문화사적 복원에 남다른 애정을 쏟아온 예용해(1995년 작고) 선생에 따르면, 이산용 이후에는 사실상 단절되었던 셈이다. [8]
백석이 준비되면 잘 선조시킨 부들로 뒷판을 짠다. 뒷판을 왕골용 돗틀에 날줄을 25-30개 정도 걸어 성글게 짜며 이 두 판을 붙여 고정하고 바탕무늬의 색감에 따라 검정색, 청자색 또는 자주색천으로 네 변을 둘러 완성한다.
박대순 pp.457-459
제작공정 이 백석에 댓개비 바블로 염색한 재료로 수를 놓는다. 이 작업이 보통 2-3주 정도 걸린다. 염색은 매우 까다롭고 어려어서 완숙한 숙련공이라야 된다.
수놓기가 끝나면 부들기직을 엮어 부판을 대고 마지막으로 가장자리를 헝겊으로 선을 둘러 꾸미어
이를 地衣 라 하고, 흰천이나 삼베등으로 선을 두른 것은 素지의라 한다.
임동권 pp 460
등메는 돗자리와 달라서 바늘대질을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번을 해야하고 또 중앙에서 바디를 든 채
풀을 꺽어서 안을 넣어야 하기 때문에 작업량이 이중으로 걸려 많은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한장을 짜는데 수일이 걸린다.
여기에 다시 문양을 넣으려면 도안작성부터 시작해야하고 염색하는 과정이 첨부되어야 하므로 제작 시일이 배로 늘어난다.
보유자는 좋은 자재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재배부터 시작하여 제작까지 일관작업을 해야한다.
생산방식으로 보면 중세기적이고 매우 뒤떨어진 방식이기는 하나 전통적인 방법을 그대로 계승 답습하고 있다.
현재는 수요가 극히 적고 제작 시일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값이 고가여서 대중화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자리(대화석 길이 293cm, 폭 121cm)가
일본 일광의 윤왕사에 7매가 보존되어 있는데 그중 1매를 복원 제작한 것은 350년전의 한국의 화문석 공예기술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시각자료
사진
1890년 등메
은경밀직법
대궁이 꼭지에 핀 잔꽃
교동 등메장인 이산룡씨
출처
- ↑ 예용해전집(돗자리) 대원사, 1997.06.07 https://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5018&nodeId=NODE04209758&medaId=MEDA04350392#none
- ↑ 국어사전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10952200
-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8993&cid=41826&categoryId=41826
- ↑ 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8993&cid=41826&categoryId=41826
-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01_0050_0020_0020_0010&whereStr=
- ↑ 예용해전집1(인간문화재), 등메장, 대원사, 1997.06.07 http://www.krpia.co.kr/viewer?plctId=PLCT00005018&tabNodeId=NODE04209736&nodeId=NODE04210444
- ↑ 예용해전집1(인간문화재), 등메장, 대원사, 1997.06.07 http://www.krpia.co.kr/viewer?plctId=PLCT00005018&tabNodeId=NODE04209736&nodeId=NODE04210444
- ↑ 최공호. 2003. 등메장 지정 조사 보고서. 서울시 無形文化財 指定照査 報告書. 서울특별시. pp451-452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6월 정리 및 편집 손형남 인문정보학